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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대통령 선거


해당 투표함은 선거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투표소 밖으로 반출 시도됐다가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시위는 강제진압됐고 투표함의 내용물은 그동안 비공개됐다.

구로구을 선거구 일부 투표함 미개표와 관계없이 제13대 대통령선거는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로 당선됐다.

2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와의 표차가 봉인된 투표함의 규모를 초과했다.

故 김영삼 후보는 28.0%, 3위 故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는 27.0%의 표를 얻었다.

이후 김영삼은 1992년 제14대, 김대중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mksports@maekyung.com] com/addons/highslide/highslide/graphics/zoomin.cur), pointer !important;") -->  -----------------------------------------------------------------------------------------------------------------------------------------<1987년 6월 10일 -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10일전두환 대통령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에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를 임명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제'였다.

    그러나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 후보에 임명되었을 때서울에서는 이한열 군 사망사건을 규탄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직접선거제 개헌을 하게 한 6월 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1987년 6월 29일 - 6.29선언>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규모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증가하였다.

더 나아가 단순 학생들의 시위에 회사원들까지 합류함으로써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커지게 되고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를 생각하게 된다.

   1987년 6월 29일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아주 크나큰 결단을 하게 된다.

노 대표는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이라는 제목으로들의 앞에서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첫째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우리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 과거가 어떠하였든 간에 김대중 씨도 사면·복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당원 동지 여러분과 야당 정치인 여러분.저의 충정이 받아들여져 오늘의 난국이 극복되고 모든 국민 개개인이 안정되고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나라'를 열어가는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글쓰는 본인이 6.29선언의 내용을 임의로 줄임   1987년 6월 29일은 국민들이 그렇게 열망하던 민주화를 여당 대표에게 약속받은 아주 뜻깊은 날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6.29 선언이 있은 후에 국민들은 환호하였고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한 찻집에서는 '오늘 기쁜날 차값은 무료입니다'라고 써 붙여놓기도 하였다.

 이제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정말 기쁘다.

훌륭한 결정이다.

  이 시대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발표로 전적으로 환영한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생긴다.

여당 대표로서 그 정도 했으면 불만 없다.

어쨌든 노 대표가 어려운 결단을 했다고 본다.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김대중-      6.29선언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을 때김영삼과 김대중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고민'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누가 야권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야 하는가?-----------------------------------------------------------------------------------------------------------------------------------------<김영삼과 김대중> 잠시 화제를 돌려 김영삼과 김대중, 이 두 사람이 살아온 길과 둘의 관계를 정리하고 가도록 하자.    1971년 4월 27일이 날은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루어지는 날이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대선에 출마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고야권에서는 박 대통령에 맞서게 된 후보는 김대중이었다.

어떻게 김대중이 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을까?    야당인 민주당은 5·6대 대통령 선거에서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웠었으나두 번 모두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한 상황이었다.

   (왼쪽 김영삼, 오른쪽 김대중) 이에 윤보선과 그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구파의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약해졌고당시 40대였던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대통령 후보직을 놓고 경선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철승이 사퇴 선언을 한 뒤 김대중을 지지하여  김대중은 재석 884명 중 458표를 얻어 410표를 득표한 김영삼에게서 승리하였고이에 야권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게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패배하였고그 후 대한민국을 떠나 일본, 미국을 오가며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때 사겨놓은 외국인 인맥 덕분에 1980년 당시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살 수 있었다.

 1973년 8월 8일김대중이 일본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그 후 그는 1973년 8월 13일,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오게 된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다른 글에서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음   1976년 3월 1일'3.1 민주 구국 선언'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등 재야인사는 서울 명동성당에 모여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아래와 같이 발표한다.

첫째,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둘째, 경제 입국의 구상과 자세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셋째, 민족 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질 지상의 과업이다.

민주주의 만세!이 사건으로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인사들은 긴급조치 제9호를 위반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1심에서 징역 8년(구형 10년), 항소심에서 징역 5년(구형 10년)을 선고받았고1977년 3월 22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여 징역 5년형을 확정받게 된다.

 1978년 12월 27일김대중은 제9대 대통령 취임 특별 사면 1호로 선정되어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그의 자서전에 쓰여있는 내용으로 보아 김대중이 지팡이를 사용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2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나니 걷기가 불편하여 지팡이가 필요했다.

'    1979년 8월 9일가발수출업체인 YH무역의 근로 여성들이 김영삼이 총재로 있는 신민당 당사로 몰려왔다.

YH무역은 당시에 대기업이라 불릴만한 기업이었는데 YH무역 창립자인 장용호가 무리하게 사업체를 확장시켰고제2차 석유파동이 발생하여 회사가 어려워졌고 경영난에 휩싸이게 되었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YH무역은 노동자의 수를 줄이고 폐업을 공고하게 되었다.

YH무역 노동조합은 폐업 공고에 대해 반발하였고 회사측에 항의하였으나 합의를 보지 못 했다.

이에 YH무역 소속 200여명의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로 몰려와 농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김영삼은 이들을 환영하였고 이들을 지켜주겠다고 말하였는데YH무역 여공들은 1979년 8월 11일,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모두 진압되었고이 사건으로 1979년 9월 8일, 김영삼은 의원직에서 제명된다.

  김영삼의 제명으로 그의 연고지인 경상남도 지역인부산·마산 지역에서 학생들에 의한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이 사건을 부마민주항쟁이라 부른다.

 1979년 10월 26일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서거한다.

 1979년 12월 21일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공석이 된 대통령 자리에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고그는 취임사에서 "조속한 시일내에 개헌(유신헌법 철폐)을 하겠다"고 발언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개헌 주도권을 놓고 정부와 국회가 대립하게 된다.

최규하 대통령은 정부 주도 하의 개헌을 주장하였고김대중·김영삼 등은 최규하 정부를 '유신 잔당'이라 비난하며 국회 주도 하의 개헌을 주장하였다.

  1980년 5월 17일이렇게 정부와 국회가 대립하며 혼란스러운 때에박 대통령 서거 이후 줄곧 이어져온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김대중·김종필은 연행되었으며 김영삼은 가택연금조치에 취해지게 된다.

※5.17 얘기는 조속한 시일 내에 쓸 광주사태 글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음 1980년 5월 18일광주사태가 발생한다.

이들은 '최규하·신현확(국무총리)·전두환 퇴진'을 외쳤고'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군에 의해 진압당한다.

   1980년 9월 17일 그 후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죄목은 '광주사태 배후 조종자'였다.

하지만 그는 해외 망명 당시 사겨두었던 인맥들의 노력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  김대중 본인의 탄원서(앙망문)를 통해 무기 징역으로 감형받게 된다.

1982년 12월 23일김대중은 미국으로 제2차 망명을 하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지미 카터 미국 제39대 대통령과 만나기도 하였고미국의 민주당 인사들과 만나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85년 2월 12일대한민국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루어지게 된다.

제12대 총선이 치루어지기 불과 한달 전인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창당되었는데전두환 대통령은 '김대중이 귀국할 시 야권 세력이 분열하여 민주정의당(여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하였고대한민국 정부는 김대중의 귀국을 허락하게 되고 김대중은 총선 나흘 전인 1985년 2월 8일, 귀국한다.

하지만 예상 외로 김대중·김영삼·이민우(신민당 총재)는 분열하지 않았고결국 신생 정당인 신민당이 총선에서 67석을 획득하는 돌풍을 일으키게 된다.

그 후 민주한국당(민한당) 당선자들이 탈당하여 신민당에 입당하였고  신민당은 103석을 보유한 거대야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통합진보당처럼 성격이 강한 정당이 대한민국 제1야당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1986년 3월 11일신민당은 총선에서의 승리하였던 기세를 이어가 이른바 '1000만개헌서명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이 개헌서명운동의 내용은 간접선거제 철폐, 직접선거제 도입을 담고 있었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은 올림픽이 끝난 후 논의해야 한다"며 개헌을 할 용의를 내비추게 된다.

 이때부터 김대중과 김영삼이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김영삼은 전두환 대통령의 발언에 수긍하였고 김대중은 김영삼의 태도에 반발했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였기에 힘이 없었으며 김영삼을 제지할 수도 없었다.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 줄이고여튼 아까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선언 세번째 내용에서 봤었던...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 과거가 어떠하였든 간에 김대중 씨도 사면·복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1985년 2월 8일 당시 귀국한 이후로 줄곧 가택연금 조치에 취해져있었던 김대중을 사면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김대중이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끔 활로를 열어준 것이었다.

-----------------------------------------------------------------------------------------------------------------------------------------<대한민국 제9차 헌법 개정> 1987년 10월 27일직선제 개헌의 내용을 담고 있는 대한민국 제9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93.1%의 지지율로 확정되었다.

이 날 헌법 개정이 됨으로써 대한민국은 다시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김영삼-김대중 단일화 결렬>     이 두 사람은 6.29 선언 당시 통일민주당에 함께 몸을 담고 있었다.

김영삼은 통일민주당 총재였고 김대중은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것 같았고 김대중은 이를 지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1987년 9월 8일김대중이 전라남도 광주에 방문하였는데광주에는 그를 보기 위해 70만명이 모여들었다.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자신감을 얻어 대통령 선거에 나설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단일화 건에 대해 김대중 자서전의 내용을 옮겨보면...나는 야당의 후보 단일화에 대해서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았다.

김영삼 씨가 국민 앞에 공개적으로 천명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씨가 사면·복권되면 대통령 후보를 양보하겠다.

"김영삼 씨는 그렇게 여러 번 말했다.

나는 사람을 보내 그의 의중을 물었다.

그런데 김영삼 씨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며 본인이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 하지만 김대중은 1986년 11월 5일, 자기 입으로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

"※1986년 11월 5일은 건국대학교 사태(학생운동) 직후이다.

-------------------------------------------------------------    즉,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여있었고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출마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으나 합의를 보지 못 했고결국 1987년 10월 28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야권 단일화는 결렬된다.

 -----------------------------------------------------------------------------------------------------------------------------------------<1盧 3金>    노태우 후보는 그 자신이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였고 그 약속을 지켜냈다는 것에 대해 크게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하여 정치 군인이라는 이미지로 공격받게 되었다.

이에 노태우 후보는 보통 군인과는 다른 푸근한 인상(?)을 내세워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선거 유세에 나섰다.

[13대 대통령 선거] 완전 대박


    보통사람... ㅇㅇ 또한 노태우 후보는 징검다리론을 제시하며 '혼란이냐 안정이냐'라는 구호를 주장하였다.

군인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보통사람인 자신이 정권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을 안정시키는 징검다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노태우 후보와 전두환 대통령을 엮어 비난했다.

 "군인은 절대 보통사람이 될 수 없다.

 제가 당선되어 군정을 종식시키겠다.

"이 말이 처음에는 큰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6월 민주항쟁도 전두환 정부에서 발생한박종철 군, 이한열 군 사망사건이 촉매제로 작용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김영삼은 선거 운동이 시작될 때와 끝날 때까지 주야장천 '군정 종식'만 외쳤다.

이에 김영삼은 초반에만 반짝했고 더 이상 큰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다.

 김대중은 가택연금 조치에서 풀린지 얼마 안 되었고더 나아가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직후라 그 세력이 많이 약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지역기반인 호남에 의존하여 호남인들을 결집시켰다.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 두 사람이 경상도 사람이니 경상도에서는 표가 갈릴 것이고자신은 전라도 사람이니 호남 사람들만 결집시킨다면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김종필 후보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활동했었던 공화당 인사들을 포섭하여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고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여 지지 유세를 펼쳤으나  김종필 후보에게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이미지가 국민들에게 만연하였다.

당시 배경은 대한민국에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상황이었는데김종필 후보 본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최측근으로 활동했었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노태우 후보의 호남 유세> (돌팔매질 때문에 경호원들이 이를 막고 있다.

) 여러분은 일베에서 노태우 후보가 호남에서 유세할 때 돌팔매, 화염병, 사제폭발물로 위협을 받았다는  그 뉴스 동영상을 한 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사태에 대해 노태우 회고록과 김대중 자서전에 쓰여있는 내용을 몇 자 옮겨본다.

 --------------------------------------------------------------연단 위에 서서 사방의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과 쇠붙이 등이 날아들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몇몇 경호원들의 머리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다.

나는 자제를 호소했다.

"여러분, 진정합시다.

""이 노태우는 이미 6.29선언에서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의 뜻에 항복할 것을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화염병과 돌이라는 폭력 앞에는 절대로 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던지고 있는 화염병과 돌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화염병이며 민족을 분열시키는 돌멩이입니다.

"(중략)내 연설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박수갈채가 아니라 수많은 돌멩이들이었다.

어떤 청년은 칼을 품고 내게 접근했는데 그가 경호원과 부딪혀 칼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  --------------------------------------------------------------11월 29일 노태우 후보의 광주 유세에서도 연설 도중 각목이 날아들고  시위대가 연단으로 몰려들어 연설이 중단되었다.

이런 사례는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유세장의 훼방꾼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면 언론이 이를 지역감정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텔레비전은 이런 폭력 사태를 그대로 안방에 전달했다.

그 초점은 반(反)호남 정서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민주화 열기를 분산시키는 전략의 핵심은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김대중 자서전 1권-  --------------------------------------------------------------결국 노태우 후보는 호남 지방에서 제대로 연설 한 번 하지 못 하고 급히 자리를 뜨게 되었다.

 호남 지방에서는 노태우 후보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찔러 그의 선거물을 불태우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의 김영삼 지지 선언>12.12 사태 당시 전두환 세력에 의해 연행되어 강제 예편당했던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이 김영삼 후보 지지선언을 하게 된다.

그는 김영삼 후보 유세를 하며 노태우 후보를 이렇게 공격했다.

"12.12 사태는 명백한 군사 반란입니다!" 이에 노태우 후보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쳤고  노태우 후보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데 이때 북괴의 김정일이 나서 사건 하나를 터뜨리게 된다.

 -----------------------------------------------------------------------------------------------------------------------------------------<KAL기 858편 폭파사건>? ?1987년 11월 29일김정일의 명령을 받은 김승일과 김현희가 대한항공 소속 KAL기 858편을 폭파한다.

 1987년 12월 15일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 김현희가 한국으로 압송되었고그녀는 회견에서 자신이 KAL기 858편의 테러범임을 자백하고김정일의 명령을 받아 올림픽 유치 방해, 대통령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테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이 사건은 보수층의 결집과 노태우 후보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게 된다.

-----------------------------------------------------------------------------------------------------------------------------------------?<여의도 유세>? 김대중이 여의도 광장에서 연설을 하였을 때 그를 보기 위해 모인 청중은 약 50만명이었으며 김영삼을 보기 위해 모인 청중 또한 약 50만명으로 집계 되었다.

그러나 열기 면에서는 김대중 측이 더 뜨거웠다고 한다.

 노태우 후보는 다른 후보들이 여의도 유세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여의도광장을 찾았는데이때 모인 사람은 약 100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8,282,738표(36.6%)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6,337,581표(28.0%)로 2위의 결과로 낙선하였고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6,113,375표(27.0%)로 3위의 결과로 낙선하였으며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는 1,823,067표(8.1%)로 4위의 결과로 낙선하였다.

 노태우 후보는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제주도에서 승리하였고김대중 후보는 서울특별시와 자신의 연고지인 호남 지방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하였으며김영삼 후보는 자신의 연고지인 영남 지방에서 타 후보들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하였으며김종필 후보는 충청남도에서 승리했을 뿐 다른 지방에서는 모두 패배하였다.

-----------------------------------------------------------------------------------------------------------------------------------------?<노태우 정부 출범>? ??1988년 2월 25일노태우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다.

 우리는 흔히 '노태우'라는 사람을 '물태우'라고 칭하고대통령에 재임했을 때 한 일이 없으며 그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라고 알고 있으며그 대통령의 자리 또한 전두환이 없었으면 당선되지 못했을 사람이라며 저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이 재임하던 시기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산층이 많이 증가한 시대였고그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북방외교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혼을 빼놓은 사람이 바로 노태우 대통령이다.

또한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강력폭력조직을 소탕한 범죄와의전쟁으로 대한민국의 치안을 안정시켰으며좌경화되어 있는 교사들로 구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를 불법화시킨 사람 또한 노태우 대통령이다.

※전교조는 김대중 정부 당시 합법화되었다.

[13대 대통령 선거] 세상에. 왜..

 노태우.전두환 대통령의 친구라는 점과그가 후에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을 예로 들어이 사람을 저평가하기에는 이 사람이 이루어놓은 공이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노태우 대통령이 재평가될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한 자료 출처>?노태우 회고록 상권 -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노태우 회고록 하권 - 전환기의 대전략노태우 시대의 재인식 - 전환기의 한국사회김대중 자서전 1권, 김대중 자서전 2권김영삼 대통령회고록 상권, 김영삼 대통령회고록 하권출처 : http://www.ilbe.com/444663607com/addons/highslide/highslide/graphics/zoomin.cur), pointer !important;") -->  -----------------------------------------------------------------------------------------------------------------------------------------<1987년 6월 10일 -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10일전두환 대통령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에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를 임명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제'였다.

    그러나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 후보에 임명되었을 때서울에서는 이한열 군 사망사건을 규탄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직접선거제 개헌을 하게 한 6월 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1987년 6월 29일 - 6.29선언>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규모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증가하였다.

더 나아가 단순 학생들의 시위에 회사원들까지 합류함으로써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커지게 되고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를 생각하게 된다.

   1987년 6월 29일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아주 크나큰 결단을 하게 된다.

노 대표는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이라는 제목으로들의 앞에서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첫째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우리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 과거가 어떠하였든 간에 김대중 씨도 사면·복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당원 동지 여러분과 야당 정치인 여러분.저의 충정이 받아들여져 오늘의 난국이 극복되고 모든 국민 개개인이 안정되고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나라'를 열어가는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글쓰는 본인이 6.29선언의 내용을 임의로 줄임   1987년 6월 29일은 국민들이 그렇게 열망하던 민주화를 여당 대표에게 약속받은 아주 뜻깊은 날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6.29 선언이 있은 후에 국민들은 환호하였고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한 찻집에서는 '오늘 기쁜날 차값은 무료입니다'라고 써 붙여놓기도 하였다.

 이제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정말 기쁘다.

훌륭한 결정이다.

  이 시대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발표로 전적으로 환영한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생긴다.

여당 대표로서 그 정도 했으면 불만 없다.

어쨌든 노 대표가 어려운 결단을 했다고 본다.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김대중-      6.29선언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을 때김영삼과 김대중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고민'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누가 야권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야 하는가?-----------------------------------------------------------------------------------------------------------------------------------------<김영삼과 김대중> 잠시 화제를 돌려 김영삼과 김대중, 이 두 사람이 살아온 길과 둘의 관계를 정리하고 가도록 하자.    1971년 4월 27일이 날은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루어지는 날이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대선에 출마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고야권에서는 박 대통령에 맞서게 된 후보는 김대중이었다.

어떻게 김대중이 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을까?    야당인 민주당은 5·6대 대통령 선거에서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웠었으나두 번 모두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한 상황이었다.

   (왼쪽 김영삼, 오른쪽 김대중) 이에 윤보선과 그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구파의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약해졌고당시 40대였던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대통령 후보직을 놓고 경선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철승이 사퇴 선언을 한 뒤 김대중을 지지하여  김대중은 재석 884명 중 458표를 얻어 410표를 득표한 김영삼에게서 승리하였고이에 야권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게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패배하였고그 후 대한민국을 떠나 일본, 미국을 오가며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때 사겨놓은 외국인 인맥 덕분에 1980년 당시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살 수 있었다.

 1973년 8월 8일김대중이 일본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그 후 그는 1973년 8월 13일,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오게 된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다른 글에서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음   1976년 3월 1일'3.1 민주 구국 선언'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등 재야인사는 서울 명동성당에 모여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아래와 같이 발표한다.

첫째,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둘째, 경제 입국의 구상과 자세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셋째, 민족 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질 지상의 과업이다.

민주주의 만세!이 사건으로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인사들은 긴급조치 제9호를 위반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1심에서 징역 8년(구형 10년), 항소심에서 징역 5년(구형 10년)을 선고받았고1977년 3월 22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여 징역 5년형을 확정받게 된다.

 1978년 12월 27일김대중은 제9대 대통령 취임 특별 사면 1호로 선정되어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그의 자서전에 쓰여있는 내용으로 보아 김대중이 지팡이를 사용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2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나니 걷기가 불편하여 지팡이가 필요했다.

'    1979년 8월 9일가발수출업체인 YH무역의 근로 여성들이 김영삼이 총재로 있는 신민당 당사로 몰려왔다.

YH무역은 당시에 대기업이라 불릴만한 기업이었는데 YH무역 창립자인 장용호가 무리하게 사업체를 확장시켰고제2차 석유파동이 발생하여 회사가 어려워졌고 경영난에 휩싸이게 되었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YH무역은 노동자의 수를 줄이고 폐업을 공고하게 되었다.

YH무역 노동조합은 폐업 공고에 대해 반발하였고 회사측에 항의하였으나 합의를 보지 못 했다.

이에 YH무역 소속 200여명의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로 몰려와 농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김영삼은 이들을 환영하였고 이들을 지켜주겠다고 말하였는데YH무역 여공들은 1979년 8월 11일,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모두 진압되었고이 사건으로 1979년 9월 8일, 김영삼은 의원직에서 제명된다.

  김영삼의 제명으로 그의 연고지인 경상남도 지역인부산·마산 지역에서 학생들에 의한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이 사건을 부마민주항쟁이라 부른다.

 1979년 10월 26일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서거한다.

 1979년 12월 21일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공석이 된 대통령 자리에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고그는 취임사에서 "조속한 시일내에 개헌(유신헌법 철폐)을 하겠다"고 발언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개헌 주도권을 놓고 정부와 국회가 대립하게 된다.

최규하 대통령은 정부 주도 하의 개헌을 주장하였고김대중·김영삼 등은 최규하 정부를 '유신 잔당'이라 비난하며 국회 주도 하의 개헌을 주장하였다.

  1980년 5월 17일이렇게 정부와 국회가 대립하며 혼란스러운 때에박 대통령 서거 이후 줄곧 이어져온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김대중·김종필은 연행되었으며 김영삼은 가택연금조치에 취해지게 된다.

※5.17 얘기는 조속한 시일 내에 쓸 광주사태 글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음 1980년 5월 18일광주사태가 발생한다.

이들은 '최규하·신현확(국무총리)·전두환 퇴진'을 외쳤고'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군에 의해 진압당한다.

   1980년 9월 17일 그 후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죄목은 '광주사태 배후 조종자'였다.

하지만 그는 해외 망명 당시 사겨두었던 인맥들의 노력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  김대중 본인의 탄원서(앙망문)를 통해 무기 징역으로 감형받게 된다.

1982년 12월 23일김대중은 미국으로 제2차 망명을 하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지미 카터 미국 제39대 대통령과 만나기도 하였고미국의 민주당 인사들과 만나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85년 2월 12일대한민국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루어지게 된다.

제12대 총선이 치루어지기 불과 한달 전인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창당되었는데전두환 대통령은 '김대중이 귀국할 시 야권 세력이 분열하여 민주정의당(여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하였고대한민국 정부는 김대중의 귀국을 허락하게 되고 김대중은 총선 나흘 전인 1985년 2월 8일, 귀국한다.

하지만 예상 외로 김대중·김영삼·이민우(신민당 총재)는 분열하지 않았고결국 신생 정당인 신민당이 총선에서 67석을 획득하는 돌풍을 일으키게 된다.

그 후 민주한국당(민한당) 당선자들이 탈당하여 신민당에 입당하였고  신민당은 103석을 보유한 거대야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통합진보당처럼 성격이 강한 정당이 대한민국 제1야당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1986년 3월 11일신민당은 총선에서의 승리하였던 기세를 이어가 이른바 '1000만개헌서명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이 개헌서명운동의 내용은 간접선거제 철폐, 직접선거제 도입을 담고 있었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은 올림픽이 끝난 후 논의해야 한다"며 개헌을 할 용의를 내비추게 된다.

 이때부터 김대중과 김영삼이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김영삼은 전두환 대통령의 발언에 수긍하였고 김대중은 김영삼의 태도에 반발했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였기에 힘이 없었으며 김영삼을 제지할 수도 없었다.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 줄이고여튼 아까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선언 세번째 내용에서 봤었던...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 과거가 어떠하였든 간에 김대중 씨도 사면·복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1985년 2월 8일 당시 귀국한 이후로 줄곧 가택연금 조치에 취해져있었던 김대중을 사면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김대중이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끔 활로를 열어준 것이었다.

-----------------------------------------------------------------------------------------------------------------------------------------<대한민국 제9차 헌법 개정> 1987년 10월 27일직선제 개헌의 내용을 담고 있는 대한민국 제9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93.1%의 지지율로 확정되었다.

이 날 헌법 개정이 됨으로써 대한민국은 다시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김영삼-김대중 단일화 결렬>     이 두 사람은 6.29 선언 당시 통일민주당에 함께 몸을 담고 있었다.

김영삼은 통일민주당 총재였고 김대중은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것 같았고 김대중은 이를 지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1987년 9월 8일김대중이 전라남도 광주에 방문하였는데광주에는 그를 보기 위해 70만명이 모여들었다.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자신감을 얻어 대통령 선거에 나설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단일화 건에 대해 김대중 자서전의 내용을 옮겨보면...나는 야당의 후보 단일화에 대해서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았다.

김영삼 씨가 국민 앞에 공개적으로 천명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씨가 사면·복권되면 대통령 후보를 양보하겠다.

"김영삼 씨는 그렇게 여러 번 말했다.

나는 사람을 보내 그의 의중을 물었다.

그런데 김영삼 씨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며 본인이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 하지만 김대중은 1986년 11월 5일, 자기 입으로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

"※1986년 11월 5일은 건국대학교 사태(학생운동) 직후이다.

-------------------------------------------------------------    즉,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여있었고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출마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으나 합의를 보지 못 했고결국 1987년 10월 28일,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야권 단일화는 결렬된다.

 -----------------------------------------------------------------------------------------------------------------------------------------<1盧 3金>    노태우 후보는 그 자신이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였고 그 약속을 지켜냈다는 것에 대해 크게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하여 정치 군인이라는 이미지로 공격받게 되었다.

이에 노태우 후보는 보통 군인과는 다른 푸근한 인상(?)을 내세워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선거 유세에 나섰다.

    보통사람... ㅇㅇ 또한 노태우 후보는 징검다리론을 제시하며 '혼란이냐 안정이냐'라는 구호를 주장하였다.

군인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보통사람인 자신이 정권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을 안정시키는 징검다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노태우 후보와 전두환 대통령을 엮어 비난했다.

 "군인은 절대 보통사람이 될 수 없다.

 제가 당선되어 군정을 종식시키겠다.

"이 말이 처음에는 큰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6월 민주항쟁도 전두환 정부에서 발생한박종철 군, 이한열 군 사망사건이 촉매제로 작용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김영삼은 선거 운동이 시작될 때와 끝날 때까지 주야장천 '군정 종식'만 외쳤다.

이에 김영삼은 초반에만 반짝했고 더 이상 큰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다.

 김대중은 가택연금 조치에서 풀린지 얼마 안 되었고더 나아가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직후라 그 세력이 많이 약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지역기반인 호남에 의존하여 호남인들을 결집시켰다.

노태우 후보, 김영삼 후보 두 사람이 경상도 사람이니 경상도에서는 표가 갈릴 것이고자신은 전라도 사람이니 호남 사람들만 결집시킨다면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김종필 후보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활동했었던 공화당 인사들을 포섭하여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고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여 지지 유세를 펼쳤으나  김종필 후보에게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이미지가 국민들에게 만연하였다.

당시 배경은 대한민국에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상황이었는데김종필 후보 본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최측근으로 활동했었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노태우 후보의 호남 유세> (돌팔매질 때문에 경호원들이 이를 막고 있다.

) 여러분은 일베에서 노태우 후보가 호남에서 유세할 때 돌팔매, 화염병, 사제폭발물로 위협을 받았다는  그 뉴스 동영상을 한 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사태에 대해 노태우 회고록과 김대중 자서전에 쓰여있는 내용을 몇 자 옮겨본다.

 --------------------------------------------------------------연단 위에 서서 사방의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과 쇠붙이 등이 날아들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몇몇 경호원들의 머리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다.

나는 자제를 호소했다.

"여러분, 진정합시다.

""이 노태우는 이미 6.29선언에서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의 뜻에 항복할 것을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화염병과 돌이라는 폭력 앞에는 절대로 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던지고 있는 화염병과 돌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화염병이며 민족을 분열시키는 돌멩이입니다.

"(중략)내 연설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박수갈채가 아니라 수많은 돌멩이들이었다.

어떤 청년은 칼을 품고 내게 접근했는데 그가 경호원과 부딪혀 칼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  --------------------------------------------------------------11월 29일 노태우 후보의 광주 유세에서도 연설 도중 각목이 날아들고  시위대가 연단으로 몰려들어 연설이 중단되었다.

이런 사례는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유세장의 훼방꾼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면 언론이 이를 지역감정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텔레비전은 이런 폭력 사태를 그대로 안방에 전달했다.

그 초점은 반(反)호남 정서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민주화 열기를 분산시키는 전략의 핵심은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김대중 자서전 1권-  --------------------------------------------------------------결국 노태우 후보는 호남 지방에서 제대로 연설 한 번 하지 못 하고 급히 자리를 뜨게 되었다.

 호남 지방에서는 노태우 후보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찔러 그의 선거물을 불태우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의 김영삼 지지 선언>12.12 사태 당시 전두환 세력에 의해 연행되어 강제 예편당했던 정승화 前 육군참모총장이 김영삼 후보 지지선언을 하게 된다.

그는 김영삼 후보 유세를 하며 노태우 후보를 이렇게 공격했다.

"12.12 사태는 명백한 군사 반란입니다!" 이에 노태우 후보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쳤고  노태우 후보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데 이때 북괴의 김정일이 나서 사건 하나를 터뜨리게 된다.

 -----------------------------------------------------------------------------------------------------------------------------------------<KAL기 858편 폭파사건>? ?1987년 11월 29일김정일의 명령을 받은 김승일과 김현희가 대한항공 소속 KAL기 858편을 폭파한다.

 1987년 12월 15일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 김현희가 한국으로 압송되었고그녀는 회견에서 자신이 KAL기 858편의 테러범임을 자백하고김정일의 명령을 받아 올림픽 유치 방해, 대통령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테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이 사건은 보수층의 결집과 노태우 후보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게 된다.

-----------------------------------------------------------------------------------------------------------------------------------------?<여의도 유세>? 김대중이 여의도 광장에서 연설을 하였을 때 그를 보기 위해 모인 청중은 약 50만명이었으며 김영삼을 보기 위해 모인 청중 또한 약 50만명으로 집계 되었다.

그러나 열기 면에서는 김대중 측이 더 뜨거웠다고 한다.

 노태우 후보는 다른 후보들이 여의도 유세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여의도광장을 찾았는데이때 모인 사람은 약 100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8,282,738표(36.6%)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6,337,581표(28.0%)로 2위의 결과로 낙선하였고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6,113,375표(27.0%)로 3위의 결과로 낙선하였으며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는 1,823,067표(8.1%)로 4위의 결과로 낙선하였다.

 노태우 후보는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제주도에서 승리하였고김대중 후보는 서울특별시와 자신의 연고지인 호남 지방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하였으며김영삼 후보는 자신의 연고지인 영남 지방에서 타 후보들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하였으며김종필 후보는 충청남도에서 승리했을 뿐 다른 지방에서는 모두 패배하였다.

-----------------------------------------------------------------------------------------------------------------------------------------?<노태우 정부 출범>? ??1988년 2월 25일노태우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다.

 우리는 흔히 '노태우'라는 사람을 '물태우'라고 칭하고대통령에 재임했을 때 한 일이 없으며 그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라고 알고 있으며그 대통령의 자리 또한 전두환이 없었으면 당선되지 못했을 사람이라며 저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이 재임하던 시기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산층이 많이 증가한 시대였고그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북방외교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혼을 빼놓은 사람이 바로 노태우 대통령이다.

또한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강력폭력조직을 소탕한 범죄와의전쟁으로 대한민국의 치안을 안정시켰으며좌경화되어 있는 교사들로 구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를 불법화시킨 사람 또한 노태우 대통령이다.

※전교조는 김대중 정부 당시 합법화되었다.

 노태우.전두환 대통령의 친구라는 점과그가 후에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을 예로 들어이 사람을 저평가하기에는 이 사람이 이루어놓은 공이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노태우 대통령이 재평가될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한 자료 출처>?노태우 회고록 상권 -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노태우 회고록 하권 - 전환기의 대전략노태우 시대의 재인식 - 전환기의 한국사회김대중 자서전 1권, 김대중 자서전 2권김영삼 대통령회고록 상권, 김영삼 대통령회고록 하권출처 : http://www.ilbe.com/44466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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