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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하지만 채권단과 금융당국은 “자금 사정에 일부 숨통이 트였지만 회생까지는 갈 길이 멀다”고 평가했다.

 현대상선은 1일 KB금융지주가 현대증권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자 “매각 대금은 모두 산업은행과 협의해 운영자금으로 우선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증권 지분을 담보로 빌린 3600억여 원부터 상환하고 나머지 6000억 원 정도를 현대상선 운영에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채권단 관계자 역시 “매각대금이 일찍 들어오더라도 그 돈은 당장 만기가 돌아올 빚을 갚는 게 아니라 회사운영 정상화에 먼저 쓰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달 7일과 7월 7일 각각 만기가 되는 사채권자의 채무(총 3200억 원)를 갚는 데는 이번 매각 대금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를 사채권자들과 해외 선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다.

현대상선은 앞서 지난달 29일 채권단과 조건부 자율협약을 맺었다.

협약에 따르면 채권단은 3개월간 채무를 유예해주는 조건으로 현대상선이 용선료 인하와 사채권 채무를 조정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선주들이 협상을 지연시키거나, 만기 연장에 비협조적인 사채권자들이 “매각 대금으로 내 빚부터 갚아 달라”고 요구할 경우 자율협약이 깨지고 현대상선이 법정관리 수순을 밟게 될 수도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고통 분담을 하지 않으면 채권단의 지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알려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해나갈 것”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1&oid=020&aid=0002960717????? ????? ?? ?? ????[????]?? ?????? ??? ??? ??? ????? ?? ?? ???1? ??? ???? ?? ??? ??? KB????? ???...news.naver.com <시사저널>은 이 전 회장이 지난 2009년 7월부터 13개월 동안 수감되어 있을 때 교도소에서 작성한 자필 원고의 한글 파일을 단독 입수했다.

여기에는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사업,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 현대가 형제들의 ‘왕자의 난’, 정몽헌 회장의 자살 등 굵직한 사건들과 관련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공개한다.

  <시사저널>에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관련한 비화를 털어놓은 이익치 전 회장. ⓒ 시사저널 임준선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지난 1970년부터 2001년 3월 영면할 때까지 이익치 전 현대증권 대표이사 회장(69)을 ‘이비서’라고 불렀다.

이익치 전 회장은 1969년 3월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그 이듬해 회장 비서실로 발령 났고 1986년까지 비서를 지냈다.

1987년 현대중공업 전무이사, 1994년 현대해상화재보험 부사장, 1996년 현대증권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비롯해 현대그룹의 핵심 업무를 추진하면서 정주영 회장과 그의 넷째아들이자 그룹 2대 총수인 정몽헌 회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이 전 회장은 대북 송금과 현대 비자금 사건,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자살, 왕자의 난,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에 직·간접으로 관련 있고 금강산 관광 사업, 국민투자신탁(현 한화투자증권) 인수, 바이코리아 펀드 열풍을 주도했다.

그렇다 보니 그는 정주영 회장과 그 일가와 관련한 의혹과 소문의 실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런 이익치 전 회장이 지난 12년 동안 지켰던 침묵을 깼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말 조만간 출간할 목적으로 자서전 초벌 원고를 완성했다.

<시사저널>은 이 전 회장이 지난 2009년 7월부터 13개월 동안 징역형을 산 의정부교도소에서 작성한 자필 원고를 한글로 정리한 파일을 단독 입수했다.

이어 지난 2월22일 서울 중구 장충동의 한 음식점에서 이익치 전 회장을 만나 4시간에 걸쳐 인터뷰했다.

이익치 전 회장은 지난 12년 동안 밝히지 않았던 금강산 관광 사업,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왕자의 난’, 정몽헌 회장 자살을 비롯한 갖가지 의문점 등에 대해 상세히 털어놓았다.

<시사저널>은 자서전 핵심 내용과 이 전 회장의 인터뷰를 가감 없이 보도한다.

■ 정주영 회장이 푸틴 제치고 금강산 관광 사업권 따낸 막후  1998년 12월15일 방북 회견을 하던 당시의 정주영 명예회장. ⓒ 시사저널 사진팀김정일 위원장 “제가 처녀입니다.

정주영 회장 선생에게 드리느냐, 푸틴 대통령에게 주느냐 생각하다가 정주영 회장 선생에게 주기로 했죠.”정주영 회장은 지난 1997년 금강산 관광 사업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넷째아들이자 그룹 차기 총수로 점찍은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이 그 중책을 맡았다.

정몽헌 회장은 계동 사옥 15층에 자리한 그룹 명예회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이익치 사장에게 “북한과 연결 고리를 찾아봐라”라고 지시했다.

이익치 사장은 서울 여의도 소재 현대증권 사장실로 돌아와 박정두 고문에게 상의했다.

박정두 고문은 김영삼 대통령의 외신 담당 고문 출신으로 당시 현대증권 고문으로 일하고 있었다.

박고문은 친분이 두터운 고바야시 게이지 전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을 소개했다.

고바야시 전 지국장은 김용순 당시 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세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과 연결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고바야시는 일본 큐슈 국제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5공 신군부’에 항의해 20일 이상 단식 농성을 벌이는 사실을 기사화해 전세계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고바야시는 현대측 위임장과 금강산 개발 계획서를 ‘금강산 개발은 현대가 가장 적임이다’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김용순 위원장 앞으로 보냈다.

하지만 김용순 위원장으로부터 아무 응답이 없었다.

고바야시는 요시다라는 인물에게 북한 인사와 접촉해 사정을 파악해달라고 부탁했다.

요시다 씨는 북한과 일본을 오가며 식자재나 잡화를 취급하는 무역업자였다.

그러자 북한으로부터 ‘교섭을 하고 싶다’는 답장이 왔다.

수십 차례 연락을 주고받다가 1998년 1월 싱가포르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정몽헌 회장, 이익치 사장, 고바야시 교수를 비롯해 현대측 협상 관계자가 채비를 갖추고 호텔까지 예약했다.

하지만 면담 날짜 이틀 전 북한이 돌연 약속을 취소했다.

정몽구 회장 밑에서 일하는 차정식 전무가 북한측에 ‘몽헌 그룹과의 교섭은 현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팩스를 보냈다.

정몽구 회장은 부하 차정식 전무를 중국에 상주시키며 컨테이너나 철도 차량 합작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 광명성경제연합회 대표와 협의하고 있었다.

이에 사정을 알 수 없는 북한측이 회합을 취소했다.

정주영 회장이 박세용 그룹기획조정실장과 이익치 사장을 북한에 보내 ‘북한과의 교섭 책임자는 몽헌이다’라고 통보했다.

이로 인해 당초 일정보다 2주 늦어져 2월24

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첫 만남이 열렸다.

  정몽헌 회장(앞줄 왼쪽 세번째)과 강종훈 아태평화위원회 서기장이 1998년 6월 금강산 관광 사업 계약서에 서명할 때 이익치 회장과 정주영 회장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 시사저널 사진팀현대그룹의 대북 창구는 정몽헌 회장으로 일원화되었다.

서울은 김윤규 현대건설 부사장, 베이징은 김고중 현대종합상사 전무가 연락 창구로 지정되었다.

현대측에서는 정몽헌 회장, 이익치 사장, 김윤규 부사장, 김고중 전무가 참석했다.

북한측에서는 송호경 아세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 김봉익 광명성경제연합회 회장, 이재철 광명성 베이징 대표, 황청·김창순·이재상 아태참사가 참석했다.

첫 면담을 주선한 고바야시와 요시다도 참석했다.

그 뒤로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며 실무 협상이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40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 협상단과 기술진이 고려항공을 전세 내 평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당초 기대와 달리 협상은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협상 창구가 중첩되다 보니 아세아태평양위원회 인사와 합의해도 다른 부서 합동회의에서 부결되기도 했다.

중구난방으로 협상이 진행된 탓에 현대측 협상단은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전원 귀국했다.

현대측 협상단이 평양 철수로 노린 것이 있었다.

협상 중단 사유와 현대측 요구가 무엇인지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될 것이라 판단했다.

협상단은 평양에서 철수하기 전에 현대측 요구사항을 북한에 서면으로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협상 실무단을 이끈 김윤규 부사장의 역할이 컸다.

아침 8시에 시작해 새벽 3시에 끝나는 협상을 반복하면서도 김부사장은 지치지 않았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이 결정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는 사회였다.

김위원장은 지지부진한 협상 주제를 바로 결정했다.

김위원장은 현대측 협상단과 4시간 면담을 갖고 개성공단 지정, 금강산 골프장 건립 같은 까다로운 협상 난제를 바로 결정했다.

              정주영 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1998년 10월 소 5백마리를 몰고 올라가는 2차 방북에 앞서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실무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정회장은 1998년 6월16

23일 소 5백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넘어갔다.

김정일 위원장은 6월16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현대측 일행을 맞이한 자리에서 “제가 처녀입니다.

정주영 회장 선생에게 드리느냐,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주느냐 고민하다가 정주영 회장 선생에게 주기로 했죠”라고 말했다.

금강산 사업 합의서가 체결되기 며칠 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박2일 일정으로 평양을 다녀갔다.

당시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은 북한에 수십 년 동안천연가스를 무상으로 공급하겠다는 제의를 했다고 한다.

김위원장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러시아는 사전 예고도 없이 북한 원조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김위원장은 ‘북한이 러시아가 보내준 천연가스에 의존하다가 옛날처럼 갑자기 가스 공급관을 잠가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하며 거절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실행하려면 해결해야 할 난제가 쌓여 있었다.

남한 관광객이 금강산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남쪽 군사분계선은 유엔군 사령부 관할이고 북측은 강경 군부가 막고 있었다.

금강산 근처에 국제공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결책은 정몽헌 회장이 제시했다.

현대상선 회장답게 크루즈 선박으로 관광객을 실어나르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4.5t짜리 크루즈여객선이 닿을 수 있는 항만 시설이 금강산 주변에는 없었다.

원산항은 100㎞가 넘었다.

금강산과 가장 가까운 고저항은 조그만 어항에 불과했다.

금강산과의 거리도 40㎞나 떨어져 있었다.

현대 기술진은 금강산과 가까운 만에 장전항이라는 군사 시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전항은 당시 북한 해군의 잠수함 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세아태평양위원회 관계자나 북한 군부가 장전항을 크루즈 여객선이 들고 날 수 있는 항구로 개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현대측이 ‘그러면 못하겠다’고 나서자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의 반발을 제압하고 장전항의 용도 변경을 허락했다.

정회장은 5개월 안에 장전항 공사를 마치라고 지시했다.

현대건설 기술진이 하루 24시간 돌관 공사를 진행해 5개월 만에 완공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5개월 만에 완공된 장전항을 보고 놀랐다.

김위원장은 장전항 완공 현장에서 북한측 고위 관료와 현대측 인사와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이거 너희(북한측 인사)에게 맡겼으면 2

3년 걸렸겠지. 현대 선생들 대단하구만”이라고 말했다.

     ■ 신의주·남포 아니라 왜 개성공단 탄생했나  정주영 회장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정몽구·정몽근·고 정몽헌·정몽준 형제(왼쪽부터). ⓒ 문화일보제공김정일 위원장 “내가 정몽헌 회장 선생에게 개성공단을 선물로 드리겠소.”정주영 명예회장, 정몽헌 회장, 이익치 사장은 지난 2000년 6월29일 새벽 머무르고 있던 평양 백화원 국빈 숙소를 떠나 원산행 비행기를 탔다.

원산항에 위치한 북한 해군 기지 안에 있는 별장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CNN 생방송을 보고 있었다.

김위원장은 일행에게 물었다.

“아태위원회가 제의한 신의주공단 개발 사업은 내가 추천했다.

신의주가 중국과 가깝고 인력을 구하기 쉽다 보니 공단이 들어서기에 최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현대 회장 선생들이 반대하고 개성공단을 요청한다고 하니 현대측 말을 듣고 싶다.

” 현대측은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이 있기 전에 신의주와 남포를 실사했다.

먼저 아태위원회로부터 요청을 받고 신의주공단 사업을 검토했으나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남포공단도 답사했다.

평양에서 내륙으로 60㎞ 떨어진 산속에 굴을 뚫고 그 속에서 장비를 생산하고 있으니 그곳을 활용해보라는 제의를 받고 조사를 벌였으나 역시 타당성이 없었다.

정몽헌 회장은 개성공단 사업을 제안했다.

개성에 가공 공장을 짓고 남쪽에서 부품을 가져와 북한의 저임금을 이용해 조립하고 다시 남쪽으로 가져와 인천이나 부산 항구를 이용해 제3국으로 수출하자는 계획이었다.

새 공단에서 만들 제품이 중국산과 겹치는 품목이 많다 보니 중국 수출이 여의치 않을 것이므로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신의주의 장점은 부각되지 않았다.

제품을 남쪽으로 가져와 수출해야 하므로 남쪽과 가까운 것이 오히려 낫다.

또, 공단은 전력 사용량이 많아 남쪽에서 전력을 끌어다 써야 했다.

북한의 전력 사정이 여의치 않은 탓이다.

이익치 회장이 설명을 마치자 김정일 위원장은 “내가 오늘 정몽헌 회장 선생에게 개성공단을 선물로 주겠소. 얼마나 필요합니까?”라고 말했다.

다음 날 오전 7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의전용 벤츠 승용차를 타고 개성으로 바로 내려갔다.

정몽헌 회장 일행은 개성공단 부지 2천평을 선물받고 평양에서 개성공단 후보지를 지나 판문점을 경유해 계동 현대 사옥에 도착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과 청구권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수탈당한 재산권에 대한 보상과 징병, 징용 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포괄적인 배상으로 100억 달러를 청구한 것이다.

북한은 노나카 일본 내각에 차관 수백 억 달러도 함께 요청했다.

김위원장은 이 자금을 경제 개발에 쓰고자 했다.

김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에게 “일본에서 곧 돈이 들어오면 우선 김책제철소 설비부터 고치려 한다.

이 자금을 활용해 경제 개발이나 산업화에 아껴서 쓰고자 하니 도와달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위원장의 기대와 달리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북한에 호의적이던 노나카 내각이 물러나고 대북 강경파 내각이 들어섰다.

그 뒤로 일본인 납치 사건이 부각되면서 협상이 중단되고 북한 핵개발 이슈가 중첩되면서 북·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 정주영은 왜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했나   정주영 회장이 지난 2000년 5월 3부자 동반 퇴진을 선언하고 정몽구·정몽헌 형제와 함께 계동 사옥을 나오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금강산 관광사업은 전쟁 방지, 현대건설 살리기, 첫사랑을 만나기 위한 정주영의 일석삼조 카드였다.

정주영 회장이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1994년 전쟁 일촉즉발까지 갔던 미국에 의한 북한 영변 핵시설 폭격 시도였다.

정회장은 1990년대 중반 이진호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 과장으로부터 미군 움직임을 1일 단위로 들을 수 있었다.

이 전 과장은 4남 몽우의 처남으로 정회장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FBI를 그만두고 정회장 경호실장을 맡았다.

이 전 과장이 수집한 첩보는 엄청났다.

미국이 영변 핵시설을 폭격할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폭격은 전면전으로 비화해 서울 인구 25% 이상이 희생될 것으로 평가했다.

미국은 모의 공습 훈련까지 마쳤고, 미군 50만명을 동원할 계획까지 세웠다.

미국 시민권자에게는 한국을 떠나라는 소개령까지 내려졌다.

미국 시민권자가 집결할 장소까지 알렸다.

미국은 미군 전용기와 선박을 이용해 일본을 비롯해 제3국으로 미국 시민권자를 실어나를 조처까지 내렸다.

미국은 당시 남북한이 전쟁으로 입을 피해 규모를 1조 달러 이상으로 추산했다.

이 전 과장은 정씨 일가와 이익치 전 회장 가족이 집결할 장소까지 말해주었다.

이익치 전 회장도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있는 친구에게서 정보를 수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이 미국 시민권자를 철수시키고 있다’는 첩보를 파악하고 경악했다.

김대통령은 주한 미국 대사와 주한 미8군 사령관을 불러 “미국이 우리 땅에서 전쟁을 벌일 수 없고 한국군 통수권자로서 군인 60만명 중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다행스럽게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한반도가 언제든지 전쟁의 잿더미로 변할 수 있는 화약고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1997년 초가을 정주영 회장은 이익치 회장을 불러 ‘남북한 간 전쟁 위험을 막고 평화통일로 가는 첫 번째 단추를 끼우는 사업으로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정회장은 과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에 대해 언급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정회장과의 면담에서 “북한의 가난은 소련 책임이 크다.

한국과 소련 사이에 경제 협력이 이루어져 결실을 맺으면 그 결실 일부를 북한에 나눠주어 북한도 남한처럼 잘살 수 있도록 하자”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은 사업가였다.

명분도 중요하지만 실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97년 경제 사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당시 현대그룹의 총 부채액은 70조원에 이르렀다.

계열사 가운데 부채 규모가 가장 큰 곳은 현대건설이었다.

현대건설은 악성 부채 7조원을 떠안고 있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전자, 현대자동차, 현대정유, 현대석유화학 같은 계열사는 보유 자산이 부채보다 2

3배 되었으나 현대건설은 자산도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건설 부채 관련 주제만 나오면 금강산 관광을 빨리 성사시켜 북측 경제 개발을 앞당기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대건설이 북한 경제 개발을 주도하면 빚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금강산 관광 사업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하나 있다.

정회장이 고향 땅에서 만난 첫사랑을 찾고자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익치 전 회장은 “정회장이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첫사랑이다”라고 말했다.

금강산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북한 당국에 부탁해 통천 이장 집 딸을 찾았으나 아쉽게 2년 전에 죽는 바람에 첫사랑과의 재회는 실패했다(26쪽 딸린 기사 참조). ■ 이른바 ‘왕자의 난’의 전말을 밝힌다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1999년 12월 남북 통일 농구 경기에 참석한 정주영 회장에게 귀엣말을 건네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현대가의 피비린내 나는 재산 분쟁을 지켜보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현대’라는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환멸을 느꼈다.

형제 분쟁의 시발점은 2000년 3월 터진 ‘왕자의 난’이었다.

정몽구 현대그룹 공동회장(이하 MK)이 현대증권 회장이던 이익치 전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 조치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당시 현대증권은 정몽헌 공동회장(이하 MH)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상선의 지배를 받았다.

인사 권한 역시 MH에게 있었다.

MK가 MH와 상의도 없이 인사 결과를 언론에 발표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언론에서는 형제간의 다툼이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당시 이익치 전 회장은 MH와 함께 싱가포르에 있었다.

북한의 송호경 아세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발령 난 사실은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귀국해서 정주영 회장을 만나 보니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당장 그룹 회장에서 MK의 이름을 빼라”라고 호통을 쳤다.

때마침 남북 정상회담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북한은 현대건설에 7개 사업권을 주기로 MH와 합의했다.

그 대가로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정부가 1억 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현대그룹] 최고의 방법은?


남북 정상회담 날짜도 6월15일로 확정했다.

정회장은 이때 이미 후계 구도를 결정한 것 같았다.

합의문 발표 직후인 4월 중순에 MH와 나만 조용히 불러 유언장 작성을 지시했다.

정주영 이름의 모든 재산을 MH에게 상속하며, 현대그룹의 경영권 역시 MH에게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극비리에 후속 조치들이 진행되었다.

법적 절차를 마무리 짓기 위해 변호사단이 꾸려졌다.

서울 남부터미널 현장 앞에 있는 사무실에서 유언장이 작성되었다.

이때가 4월17일이었다.

당시 정회장은 두 명의 변호사 앞에서 직접 유언장을 낭독했다.

변호사 확인 후 유언장에 날인을 하면서 후계 구도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왕자의 난’이 발생한 지 한 달여 만이었다.

정회장은 장남인 MK를 끔찍하게 아낀 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았다.

정회장은 1999년 현대차를 장남인 MK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사석에서는 항상 “우리 몽구, 우리 몽구”라고 말하면서 술을 많이 마신다고 걱정을 했다.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이후로 기대가 더 커졌다.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김일성 주석 서거 이후 3년 동안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했을 때가 3년상을 치른 직후였다.

방북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정회장을 깍듯하게 대했다.

기념 촬영 때에도 정회장을 가운데 두고, 김위원장과 MH가 양쪽에 섰다.

김위원장의 예의 바른 모습을 많이 부러워했다.

MK에게도 이런 모습을 기대했는데 왕자의 난이 터져 실망이 컸다.

■ ‘3부자 퇴진’ 발표 이전 전문경영인 체제 구상, MK 반발하자 국회의원 비례대표 제의 지난 2000년 5월25일이었다.

유언장 내용에 따라 정주영 회장이 보유한 현대중공업 주식이 MH에게 넘어갔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현대중공업 주식을 MH가 모두 증여받도록 했다.

이익치 전 회장 역시 ‘세금을 내더라도 MH 개인에게 증여되는 것이 현대가의 정통성을 잇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지주회사 격인 현대중공업 지분 17.85%를 모두 받아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MH를 설득했다.

하지만 MH는 현대상선과 현대건설 명의로 인수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현대상선이 12%를, 현대건설이 나머지 5.8%를 인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중공업 지분을 계열사에 판 돈으로 현대차 주식 9.3%를 매입하도록 지시했다.

자동차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자동차는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될 수 있도록 전문경영인을 영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판단은 달랐다.

현대그룹의 주가가 일제히 폭락하면서 정부와 채권단은 지배 구조 개선과 함께 경영진 문책을 요구했다.

정회장은 5월30일 ‘3부자 퇴진’ 계획을 언론에 발표했다.

당시 정회장이 3부자 퇴진 계획을 발표한 것은 정부나 여론의 압박에 밀려서가 아니었다.

정씨 일가가 모두 경영에서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구상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다만 ‘현대아산’은 북한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MK가 등기이사로 남아서 대북 사업을 챙기라고 말했다.

MH는 정회장의 뜻을 수용했다.

하지만 MK는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계동 사옥 회장실로 찾아와 “3부자 퇴진 발표를 거두어달라”라고 정회장을 설득했다.

정회장의 결심은 확고했다.

정씨는 주주로만 남고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경영자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현대의 이름이 영속할 수 있고,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신 MK에게는 국회의원 출마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비례대표의 경우 돈을 기부하면 가능하기 때문에 배당금 중 일부를 기부하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라고 했다.

당시 회장실에는 MK 부자와 MH, 정상영 KCC 명예회장 등이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가족 회의였기 때문에 나는 밖에 나가서 기다리려고 했다.

정회장이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해서 얘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MK가 “말주변이 없어서 국회의원은 할 수 없다”라고 버티자 정회장은 “말은 못하는 것이 좋다.

괜히 구설에 올라 표적만 된다”라고 MK를 설득했다.

이익치 전 회장은 나중에 정회장으로부터 3부자 퇴진을 결정하게 된 배경을 들을 수 있었다.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였다.

MK의 경우 영어가 안 되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전문경영인을 앉힐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자식에 대한 애정도 묻어났다.

정회장은 현대그룹을 더 키우기보다 지키는 것을 원했다.

2세들이 자산가나 사회사업가로 살면서 자신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경영진이 잘못하면 대주주 권한을 행사해 더 좋은 경영진으로 바꾸면 되었다.

법적 책임 역시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구상도 현실화되지 못했다.

정회장이 현대차 주식을 매입하자마자 공정위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MH 역시 여러 차례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부로부터 압박을 많이 받는 것 같았다.

이익치 전 회장은 현재 상황을 아버지에게 보고하고 잠시 해외로 나가 있을 것을 MH에게 권유했다.

당분간 연락을 끊으면 답답한 사람이 스스로 나올 것이고, 그러면 주식의 주인인 정주영 회장을 만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MH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이 소유한 현대차 주식을 모두 팔아 현대건설 주식을 매입했다.

■ “7월26일은 현대건설 제삿날”… 정부 소식통 귀띔 한 달만에 정크본드 수준으로 신용등급 하락 현대건설을 매입하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7월26일이 현대건설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라는 얘기가 국정원 인사들 사이에서 나온다는 내용이었다.

이익치 전 회장은 정부의 핵심 정보통을 통해 이같은 얘기를 귀띔받았다.

정보를 전달해준 인사는 박정희 정권 때까지 중앙정보부 국장을 지낸 고위급이었다.

5공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국정원을 나왔지만, 정부 인맥은 여전히 막강했다.

국정원 후배들과도 가끔 어울려 식사를 하곤 했다.

이 자리에서 현대건설 신용등급이 정크본드 수준으로 강등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이 전 회장에게 전해준 것이다.

MH에게 말해 은밀히 조사를 해보도록 했다.

며칠 후 MH는 “잘못 알고 있는 얘기인 것 같다”라면서 가볍게 넘겼다.

지난 1997년까지만 해도 현대건설의 부채는 7조원 규모였다.

‘바이코리아 펀드’로 자금이 들어오면서 현대건설의 부채는 5조원 규모로 줄어들었다.

부채 비율 역시 4백%에서 1백90%로 낮아졌기 때문에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김윤규 사장도 당시 브리핑을 통해 “정부가 제시한 부채 비율 2백% 미만으로 줄여놓은 상태이다.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을 낮춘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라고 MH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은 정크본드 수준으로 하락했다.

날짜 역시 정확히 7월26일이었다.

5조원이 넘는 부채를 떠안고 있는 회사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은행관리나 법정관리로 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익치 전 회장은 현대차 주식을 정리해서 현대건설 주식을 사게 한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다 알면서 하나씩 조치해 나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MH와 이 전 회장을 겨냥한 파상 공세가 주변에서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전자와 현대증권, 이 전 회장을 상대로 2천5백억원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금감원은 소송과 관련한 조사를 한다면서 이 전 회장과 현대증권을 압박했다.

모든 것이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터여서 배후 세력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현대그룹] 최선의 선택

■ 이근영 금감원장, “해외 나가 머리 식히고 오면 어떨까” 제의 지난 2000년 9월 평소 안면이 있는 언론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근영 금융감독원장이 이익치 전 회장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현대중공업 소송 문제로 금감원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원장을 만날 이유가 없었다.

한편으로 “지금이 어느 때인데 관치인가”라고 생각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서울의 모처에서 이원장과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원장은 “두어 달 회사를 떠나 해외에서 머리를 식히고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제의했다.

증인(동석한 언론인)도 있는 만큼 연말에 귀국하면 복귀할 수 있도록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 전 회장은 미련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원장의 제안에 솔깃해서가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형제간의 전쟁에 더는 발을 담그기가 싫어서였다.

이전에도 정주영 회장이 물러나면 현대를 떠날 생각이었다.

MH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에게 사직서를 전달하도록 비서에게 시키고 여의도와 계동 사무실을 정리했다.

이근영 원장을 만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금감원은 9월10일 이 전 회장에게 해임 통보 상당의 징계를 내렸다.

이 전 회장은 이원장과의 신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현대가의 재산 분쟁 연장선에서 보고 있다.

이전에도 황당한 일이 많았다.

현대증권 주총을 하루 앞둔 지난 5월30일이었다.

당시 나는 3년 임기를 모두 마치고 연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정주영 회장과 MH의 결재까지 난 상황이었다.

야근하고 있는 직원에게 재정경제원 과장이라고 하면서 전화가 왔다.

이 과장은 “이익치 회장의 거취가 어떻게 되느냐. 다시 전화할 테니 확인해두어라”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정경제원의 간부가 증권사 회장의 거취에 왜 관심을 가지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익치 전 회장이 곁에서 지켜본 ‘인간 김정일’     1998년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김정일 위원장(왼쪽), 정주영 회장(가운데), 정몽헌 회장이 기념 촬영했다.

ⓒ AP 연합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현대측 협상단 구성원으로, 나중에는 북한의 경제 고문 자격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여러 차례 면담했다.

이 전 회장은 김정일 전 위원장에 대해 “안하무인하고 포악한 인물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예의범절, 유연한 사고, 유머 감각까지 갖춘 쾌활한 지도자였다”라고 평가했다.

이 전 회장은 가까이서 본 김 전 위원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정몽헌 회장은 북측에 장전항에 인접한 절벽 위쪽에 골프장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김용순 아세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은 대경실색했다.

정몽헌 회장이 지목한 곳에 군사 시설이 들어 있다고 하면서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정몽헌 회장은 김위원장과의 면담에서 “(장전항 인접 절벽 위쪽은) 미국 캘리포니아 몬테레이에 있는 페블비치 골프장에 비견되는 명문 골프장을 조성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췄다”라고 말했다.

북한군 대장 한 명이 말문을 열려고 하자 김위원장이 막았다.

“정몽헌 회장이 요청하는 대로 해줘라. 너희가 그 시설을 다른 곳으로 옮겨라. 제대로 관광지가 되려면 위락 시설이 있어야 해. 산만 보러 오나? 금강산이 아무리 명산이라도 술도 있고 여자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옮기고 골프장 지을 수 있도록 해드려라.”김정일 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을 깍듯이 예우했다.

기념 사진을 촬영할 때 김위원장은 중앙 자리를 정주영 회장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왼쪽에, 정몽헌 회장은 오른쪽에 세웠다.

정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김위원장이 1994년 아버지 김일성 주석 서거 이후 4년 동안 외부 활동을 자제한 것도 아버지에 대한 예를 지키는 것으로 정회장은 생각했다.

지난 1998년 10월30일 두 번째 방북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정주영 회장 일행을 김위원장이 찾아왔다.

김위원장은 현대측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백화원초대소에 찾아와 “금강산 사업은 나누지 말고 정주영 회장이 모두 추진하기 바란다.

발해만에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

석유가 생산되면 남쪽에 주겠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김위원장은 정주영 회장, 정몽헌, 김영주(정주영 회장 처남), 정희영(정주영 회장 여동생)과 사진을 찍으며 “공산당수와 사진 찍는 것, 보안법 위반 아닌가?”라고 말하며 웃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현대측 일행에게 “북측은 미군의 남측 주둔에 반대하지 않는다.

미군이 계속 남아서 북과 남이 전쟁하지 않도록 막아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언급된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1992년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미국 공화당 행정부에게 미군이 (남쪽에)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내용과 워낙 다르다 보니 정주영 회장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김위원장은 지난 1999년 6월15일 일어난 제1차 서해교전(연평해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위원장은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우리측(북한) 희생이 너무 컸다.

해군 쪽에서 육군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내가) 더 이상 확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해군은 남측과 상대가 안 되지요”라고 말했다.

북한 해군의 전력은 동해와 서해로 나뉘어져 있어 장비와 인력 같은 군사력 이동이 힘들어 남한 해군과의 전투에서는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세영 전 현대차그룹 회장 “MK만은 절대 안 된다”    고 정세영 회장(왼쪽)이 아들 몽규씨와 함께 1999년 3월 현대차 회장직에서 퇴진하겠다는 요지의 회견을 가졌다.

ⓒ 시사저널 임준선고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지난 1967년부터 32년간 현대차를 이끌어왔다.

현대차 대표이사로서 인생 대부분을 현대차와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1999년 현대차 경영진에서 물러났다.

후임자로 정몽구 현 현대차그룹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당시 언론에서는 ‘나흘 만에 끝난 정세영 쿠데타’라는 제목의 보도가 잇따랐다.

정 전 회장은 2월26일 주주총회에서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현대차의 경영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 시도가 무산되자 정세영 회장은 나흘 만에 사표를 제출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서전에서 “정세영 회장이 사표를 제출한 것은 쿠데타가 아니다.

정세영 회장이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차를 넘기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협화음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회장 자서전에 따르면 정주영 회장은 지난 1999년 초 정세영 회장을 만나 개성공단 내에 20만대 규모의 소형차 생산 공장을 건설할 것을 지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개성공단 조성을 약속받은 터여서 어려움은 없었다.

정세영 회장이 주저주저하니까 자동차의 경영을 정몽구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당시 정세영 회장은 “정몽구는 절대 안 된다.

정몽헌에게 넘기라고 하면 기꺼이 내놓겠지만, 정몽구는 안 된다”라고 버텼다.

영어를 못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주영 회장은 “몽구가 부족한 게 있으면 내가 뒤를 봐주겠다.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말했다.

형의 단호한 지시에 정세영 회장은 결국 현대차 경영권을 정몽구 회장에게 내주어야 했다.

정주영 회장, 1997년 대선 재도전 시도했었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가 1992년 12월 부산 유세장에서 청중에게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지난 1997년 11월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사장은 계동 현대그룹 본사 사옥 15층에 자리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실로 다급하게 뛰어들어갔다.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계동 15층에 자리한 그룹 명예회장실에서는 정회장이 화를 삭이지 못하고 분노에 떨고 있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30년 동안 정주영 회장을 모셨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본적이 없다.

분을 삭이지 못해 잘못하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정회장은 이익치 사장을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하고 나서 10분 넘게 입에 담기 힘든 온갖 욕설로 이내흔 현대건설 사장을 욕했다.

이내흔 사장은 정회장이 내린 특명을 이행하지 않고 잠적한 상태였다.

   정회장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 나서도 대권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지난 1997년 가을 이익치 사장은 명예회장실에 불려갔다.

정회장은 이 자리에서 무소속으로 15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려면 6대 지역에서 각각 5천명씩 총 3만명의 유권자 추천서를 받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해야 했다.

정회장은 이 업무를 현대건설 대표이사이자 최고위 경영진 7인으로 구성된 현대그룹 운영위원회 멤버인 이내흔 사장에게 시켰다.

유인균 당시 고려산업개발 사장도 차출되었다.

유사장의 부친이 민주당 춘천 지역구 국회의원과 강원도당 위원장을 지내 정치 감각이 있었고 민주당 실세인 박관용 비서실장, 이원종 정무수석, 김운환 의원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이내흔 사장은 정몽헌 회장에게, 유인균 사장은 정몽구 회장에게 각각 명예회장의 출마 의지를 보고했다.

그 뒤로 정몽헌 회장 방에서 이내흔 사장, 박세용 그룹 종합기획실장이 모이는 횟수가 잦아졌다.

이병규 현대백화점 사장까지 명예회장 비서실을 보강하기 위해 차출되었다.

6개 지역에서 5천명씩 추천을 받으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하는 이내흔 사장은 어찌된 일인지 계동 사옥 6층 현대건설 사장실에 머무르면서 12층 정몽헌 회장 방에만 들락날락했다.

유인균 사장도 가끔 명예회장의 동선만 물어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흔 사장과 유인균 사장이 정회장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것이다.

이익치 전 회장은 “당시 실무자 회의에서는 명예회장의 건강과 현대그룹에 몰아닥칠 정치권의 태풍이 염려되어 명예회장의 지시를 이행할 수 없다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라고 말했다.

정주영 회장은 1997년 11월29일 저녁 청운동 집에서 YTN 방송을 보고 대통령 입후보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바로 이내흔 사장을 찾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정회장은 폭발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정몽헌 회장, 이진호 회장, 유인균 사장, 이병규 사장을 호출했다.

이 자리에서 이제 기업인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며 유인균 사장은 춘천에서, 이병규 사장은 서울 강남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고 지시했다.

명예회장 지시를 거역한 이내흔 사장은 현대건설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현대통신 사장에 취임했다.

현대통신은 정몽헌 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

‘명예회장 특명 거부’가 이내흔 사장 단독 행위가 아니라 정몽헌 회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주영 회장, 삼성 무서워 기아차 인수 결정했다    1997년 1월20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현대그룹 신년 하례회에서 손님을 맞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정몽구 회장. ⓒ 뉴스뱅크이미지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지난 1998년 가을 정주영 회장에게 ‘기아자동차 공개 입찰’ 관련 사항을 보고했다.

기아차는 실적 악화 탓에 1997년 법정관리를 거쳐 1998년 4월 회사 정리 절차에 들어갔다.

기아차는 1998년 10월 국내 제3자를 상대로 공개 입찰 매각을 앞두고 있었다.

보고를 마치자마자 정회장은 바로 정세영 현대차 회장을 불렀다.

다음은 배석한 이익치 회장이 전하는 정주영 회장과 정세영 회장 사이에 나눈 대화 내용이다.

 “기아차 매각 입찰이 곧 있다면서?” “국내의 제3자에게 매각한다고 합니다.

” “자동차는 어떻게 하고 있어?” “기아차 노조가 너무 강성이고 김선홍 회장이 수십 년 동안 기아차를 경영하면서 속이 너무 썩어 있는 것 같아서 자동차는 이번 매각 입찰에 불참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 “삼성이 지금 자동차 하고 있지? 닛산하고 하고 있나?” “부산에서 닛산차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많이 고전하고 있습니다.

” “삼성이 기아차 인수하면 어떻게 돼?”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 “삼성은 돈도 많고 인재도 많아. 지금 삼성전자 반도체도 한국반도체인가 조그만 회사 인수해서 세계적인 회사로 키웠다.

삼성이 (기아차를) 가져가면 어떻게 되겠어?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전부 머저리만 앉아 있는 것 아냐? 내일모레 제 회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멍충이들만 있잖아.” “삼성이 가져가면 심각해지죠.”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거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경솔하게 불참한다고 결정해? (중략) 꼭 가져오도록 해봐. 삼성이 가져가면 되겠어?” “안 되죠. 경쟁자 키울 필요 없죠.” “이제 제정신 돌아오는군.” “하여튼 꼭 성공하겠습니다.

” 정세영 회장은 기아차 매각 입찰에 참여했다.

기아차 인수가 확정되고 나서 정주영 회장은 기아차 화성공장에 방문했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회장은 50만대 생산 능력을 갖춘 기아차 화성공장을 방문해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이 세운 주행장, 공장 시설, 연구실을 둘러보고 너무나 좋아했다”라고 밝혔다.

  2007년 8월17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의 빈소에서 조문객이 참배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고(故)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부인인 고(故) 변중석 여사, 단골로 드나든 요정 마담,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던 첫사랑의 여인인 고향 통천의이장 집 딸이 그 주인공이다.

국내 최대 재벌이라 불렸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 인생을 통틀어 이 세 여인만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고 한평생 맴돌았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고 변중석 여사를 ‘살아 있는 천사’라고 묘사했다.

고 변중석 여사는 종갓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매일 자정이 되어서 귀가하는 정주영 회장의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남편 얼굴을 볼 시간도 거의 없이 일복(속칭 ‘몸빼’)을 입은 허름한 옷차림과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로 날마다 본사 직원 3백여 명의 점심을 준비했다.

더욱이 자식 양육까지 도맡았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화내거나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변여사는 정주영 회장을 여보나 당신 대신 항상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정주영 회장의 어머니인 시어머니에 대해 물어도 “자신보다 열 배는 부지런한 분이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핏덩이를 자식이라고 데리고 와 “잘 키우라”라고 했을 때도 아무 싫은 내색 없이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녀는 고 정회장의 곁에서 평생 함께하며 그의 안위를 보살핀 조강지처였다.

미모의 마담, 큰돈 빌려주고 자살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타났다.

낙동강 고령교 복구 공사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정회장은 여름에 불어난 물과 부족한 장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공사 진척도 보이지 않고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다.

인부들은 밀린 노임을 지급하라며 파업해 일은 거의 중단되었고 모든 돈을 쏟아부었지만 사채 조달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정회장은 당시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있던 요정 마담을 만나 자금을 부탁했다.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회장에게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지원했다.

정회장이 접대를 위해 자주 찾은 그 요정은 당시 제일가는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에 여전(현재의 대학)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단골손님이었던 정회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요정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말이 청산유수라는 마담도 정회장 앞에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잘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가 돈을 보내줄 때마다 오인보 당시 경리 책임자가 서울에 가서 받아오곤 했다.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회장에게 “한 번은 꼭 보고 싶다.

이번에는 직접 와달라. 서울에 꼭 들러 달라.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정회장은 볼 면목이 없다며 오인보를 보냈고 평소보다 세 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다.

정회장은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다.

‘꼭 성공하고 앞으로 더 큰일 많이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정회장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했던 정회장을 위해 요정 마담은 계속해서 큰 빚을 내 자금을 댔던 것이다.

그 여인은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안고 떠났다.

정회장은 마담의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에 다녀오면서 오인보와 함께 울었다.

정회장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일부 이자를 갚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업 실패를 코앞에 두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정회장은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 생각했다.

그녀의 죽음은 생사의 기로에 섰던 정회장에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다’라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게 했다.

정회장의 첫사랑은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나뭇잎 같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통천 이장 집 딸이었던 정회장의 첫사랑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이었다.

정회장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몸에 진이 다 빠진 후에도 이장 집에 가 동아일보를 받아 올 생각만 하면 20리 떨어진 길도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흙>을 보며 ‘허숭’처럼 경성에 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에게도 농군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받을 때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화끈거려 땅바닥만 바라보았고 신문을 주는 손만 봐도 천사의 손보다 더 곱다고 생각했다.

<흙>과 이장 집 딸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던 그때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꿈을 이루겠다고 네 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광복 이후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 꽤 큰돈을 벌었다.

정회장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살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 고향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구두를 신고, 모자도 쓰고, 좋은 시계도 찼다.

당시 아주 멋쟁이 같은 모습으로 친구 김영주와 함께 고향에 가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해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녀는 신랑을 소개해주면서 밥을 차려주었지만 정회장은 여전히 그녀가 너무나 예뻐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가슴이 울렁거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식사를 끝냈다.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그 여자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식사 대접을 한 번 더 받고 준비한 선물을 준 뒤 헤어졌지만 그 후 오랜 세월 첫사랑은 정회장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67년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주영은 84세의 한국 최대 재벌이 되었다.

그는 이익치 회장에게 자신이 북한에 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설명했다.

먼저는 국가와 민족의 통일, 두 번째는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익치 전 회장에게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에서 첫사랑을 데려와 매일 아침 손잡고 걸어서 출근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정회장은 서울 가회동에 첫사랑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라고 이익치 회장에게 지시했다.

이회장은 가회동에 매물로 나온 전 화신산업 박흥식 사장의 집을 70억원에 매입했다.

가회동 2층에 침실을 마련했고 그날부터 정회장은 가회동에서 기거했다.

북한까지 가서 찾은 첫사랑 ‘이장 집 딸’  정회장에게 첫사랑에 대한 희망은 곧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2000년 초 자식들의재산 싸움을 보면서 정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씨 일가의 경영 일선 퇴진과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을 선언했지만 자식들은 이를 거부했다.

정회장은 더욱 큰 실의에 빠졌고 이것은건강문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정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첫사랑 여인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북한의 관계 당국이 동원되어 통천 이장 집 딸을 수개월간 찾았다.

북측은 정회장에게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통천을 떠난 그녀가 청진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 그 가족을 평양에 데려다 놓았으니 원하면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전달했다.

정회장은 북한의 아태평화위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한 시간여 동안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정회장은 “2년 전에만 알았다면 아산병원에 데려가서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좀 늦었다”라며 아쉬워했다.

그 후 정회장은 다시 북한을 찾지 않았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정주영 회장은 몇 달 후인 2001년 3월 눈을 감았다.

그의 첫사랑은 평생을 그와 함께했고, 결국 그를 데려갔다.

  현대가는 인물들이 너무 많아 핵심 가계도만 그려 봅니다.

얼마든지 퍼가셔도 됩니다.

ㅋ   현대를 이야기할때 현대를 창업한 고 정주영 회장을 빼놓고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현대를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으로 만든 입지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봐 해봤어?' 로 대표되는 그의 도전정신과 불같은 추진력을 전 요즘따라 많이 본받고 싶습니다.

.. (취준생으로서 가장 닮고싶은 덕목들이 아닐까요.. )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일화들은 너무 많아 여기서 언급하지는 못하겠네요.^^ 다음에 따로 포스팅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별세하고 난 후 현대그룹은 형제마다 따로 계열 분리하게 됩니다.

물론 약간 찝찝한 계열분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유는 아시다시피  왕자의 난 이라고 해서 경영권 다툼이 한때 극에 달했었죠. 결국 정몽구 회장이 자동차를 주력으로 하는 현대차를,정주영 회장이 후계자로 택한 5남 고 정몽헌 회장이 현대건설,현대전자, 현대 아산 등 현대그룹 주요 계열사를 품으며 분리했고, 정몽준 회장은 현대중공업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 외에도 현대백화점 그룹, 현대해상 그룹으로 분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언론상 범 현대가로 할때는 고 정주영 회장 의 동생들이 세운 기업들도 포함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한라그룹, 성우그룹, 현대산업개발, KCC가 포함됩니다.

 결론적으로 현대가가 계열분리 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현대의 주력 계열사가 있던 현대그룹은 더더욱이고요. 2000년대 초반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와 경영난으로 핵심계열사인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지금의 하이닉스)  등이  채권단에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대북송금사건, 정치 비자금 사건으로 정몽헌 회장은 자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죠. 이후로도. KCC 현대중공업 현대차그룹과의 경영권 분쟁이 끊이지 않았구요. 반면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 그룹은 승승장구하며 상반된 흐름을 보여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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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현대백화점 그룹, 현대해상 그룹으로 분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언론상 범 현대가로 할때는 고 정주영 회장 의 동생들이 세운 기업들도 포함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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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현대의 주력 계열사가 있던 현대그룹은 더더욱이고요. 2000년대 초반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와 경영난으로 핵심계열사인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지금의 하이닉스)  등이  채권단에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대북송금사건, 정치 비자금 사건으로 정몽헌 회장은 자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죠. 이후로도. KCC 현대중공업 현대차그룹과의 경영권 분쟁이 끊이지 않았구요. 반면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 그룹은 승승장구하며 상반된 흐름을 보여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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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  다양한 기업 SNS를 살펴보던 중에 현대자동차그룹의 SNS 운영이 눈에 띄여서 한번 분석해볼까 합니다 :D      < 현대자동차그룹 블로그 주소 : http://blog.hyundai.co.kr/Index.blg > 처음 현대자동차그룹 블로그를 보고 느낀점은 '참 깔끔하다였습니다.

' 위에 있는 캡쳐들을 보면 아실 수 있겠지만. 현대의 다양한 그룹들이 사용하는 SNS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잘 정리가 되어 있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동차에 관한 소식뿐만 아니라 전 그룹사적인 이슈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아래에 내려가서 보게 된다면 미디어월을 통해서 사회 전반에 대한 이슈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큰 장점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블로그를 보면서 조금 놀랐던 점은 미디어월을 보시면 알겠지만 글별로 어떤 SNS에서 작성되었는지 표시가 되어 있어서 이런 세세한 배려가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D 기존의 자동차 중심의 홈페이지와 달리 다양한 이야기들을 효과적으로 담으려 구성 했다는 노력이 보이는 블로그라는 생각이 드네요.  또한 우측 상단에 있는 배너를 클릭하게 되면이렇게 현대자동차그룹 블로그로 넘어갈 수 있어서 두 개의 블로그가 유기적으로 잘 결함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네요 :D현대자동차그룹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현대자동차그룹 블로그로 이동할 수 있어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세심한 블로그 운영이 돋보이는 부분은관심있는 카테고리의 글을 선택했을 때 위에 화면을 보시면 알겠지만 '연관 콘텐츠' 기능이 있어서관심있게 본 콘텐츠와 비슷한 성향의 글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아닐까 합니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사용자의 니즈를 잘 파악하고 SNS상 동선을 고려해서 블로그 구성을 잘했다는 생각을 들게 하네요.그리고 블로그에서 맨 아래 하단을 보면 각종 SNS 채널로 바로 이동 할 수 있도록 링크가 되어있는데요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플러스, 인스타그램, 유튜브, 텀블러, 카카오스토리까지 진짜 안하는게 없을정도로 많은 SNS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현대자동차그룹 SNS의 집결지가 바로 현대자동차그룹 블로그라고 할 수 있겠죠?! 각 SNS들의 사용 현황을 보면< 현대자동차그룹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hyundaimotorgroup >현대자동차그룹 페이스북을 살펴보면 현대자동차 소식을 전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들도 올라오더라구요 ㅋㅋㅋ그래서인지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더 재밌게 페이스북을 볼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D< 현대자동차그룹 트위터 : https://twitter.com/hmg_talk/ >현대자동차그룹 트위터는 현대자동차 관련 소식을 가볍게 알리는 방식으로 알리미 역활로 잘 운영되고 있는걸 볼 수 있었습니다.

< 현대자동차그룹 유튜브 : https://www.youtube.com/channel/UCFg3rtPVsLpWsaO7kTURikw >그리고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우에는 동영상 콘텐츠도 아주 많은걸로 알고 있는데요.이런 동영상을 모아서 볼 수 있는 유튜브 운영도 인상적이네요 :D현대자동차의 이슈 뿐만 아니라 전 그룹에 걸친 이슈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미디어월을 통해서는 사용자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을 만한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다양한 SNS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사용자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한점이 돋보이는 SNS 운영 성공사례가 아닐까 합니다^0^* 이 포스팅은 현대자동차그룹 후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현대가는 인물들이 너무 많아 핵심 가계도만 그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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