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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부대


이때 파리 포위 당시 포위된 도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부상병이나 탈출하는 고위층을 나르는 데 열기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그리고 역사를 아는 후대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전황을 뒤집을 정도의 의미는 없었습니다만 프로이센군 입장에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군산복합체 -_- 크룹(Krupp) 사에서는 곧 수레 거치식 36mm 대 '기구' 포 (Ballonabwehrkanone, B.A.K.)를 내어 놓았습니다.

독일 어로 써 놓으니 이름이 좀 거창해보이지만, 결국 Ballon (풍선, 기구) + abwehr(저항하는) + kanone(포) 니까, 대 '기구' 포, 결국 대공포가 되겠습니다.

말이 끄는 마차에 거치해 두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겠지만 파리 포위전에 여섯 문 배치된 이 '대공포'는 기구가 나타나면 바로 달려나가 대공 사격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열기구를 격추시키는 건 지극히 어려웠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실제로 파리 포위전 기간 동안 66기의 열기구들이 날아올랐으나, 이 중 독일군이 실제로 격추에 성공한 것은 1870년 10월 12일 다귀레(Daquerre) 단 한 기뿐이었습니다.

    이런 신통치 않은 성적을 보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1. 부실한 조준장치 - 열기구든, 후대에 등장하는 비행선이든, 비행기든, 3차원 공간을 비행하는 '무언가'를 격추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보시다 시피 제대로 된 조준기도 없다시피했으니 이만 저만 곤란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향후 근 칠십여 년 간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2. 부족한 숫자 - 파리 포위전에 동원된 대공포 자체가 6문이었으니 아무리 기동성을 부여한들 한계가 있었습니다.

 3. 전용 포탄의 부재 - 난관을 뚫고, 어떻게든 명중시킨다 할지라도 36mm 구경의 쇳덩어리는 기구를 뚫고 나갈 뿐 추락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뭐 이런 문제도 있었을뿐더러 결정적으로, 대공포가 위협이 될 수 있다 한들 프랑스인들은 기구를 밤에 띄우면 그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얼마 후 프랑스 자체가 굴복해버리니 이 병기는 잠시 잊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는데, 비행선과 비행기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 새로운 '날틀'들은 곧 군용으로, 즉 정찰 및 포격 관측용으로 전용되었습니다.

다름아닌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Ferdinand von Zeppelin) 백작이 비행선의 개발자였으며, 독일의 비행선 제작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그것이 민수용 외에 군용으로 전환되면서 독일 자신부터가 방공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했습니다.

  ???독일 군수산업의 반응?  독일 산업계 역시 이에 부응해서 몇 가지 시제 병기를 내놓았습니다.

  1906년 베를린 자동차 박람회에서 라인 금속공업 및 기계공업사(Rheinische Metallwaren und Maschinenfabrik)라는 긴 이름의 회사가 장갑차에 거치할 수 있는 50mm 대 '비행선' 포를 내놓았습니다.

이름은 아직 B.A.K. *        * Lastkraftwagen mit 5 cm Ballonabwehrkanone L/30 Rheinmetall - 5cm 대 기구포를 장착한 화물차...... 와 그 개발자 에어하르트 씨.    하인리히 에어하르트(Heinrich Ehrhardt)는 1840년 생의 독일 발명가이자 기업가로 1889년 뒤셀도르프에 본사를 둔 라인 금속공업 및 기계공업사(Rheinische Metallwaren- und Maschinenfabrik AG)를 차린 양반입니다.

라인 금속공업...... 바로 후대의 라인메탈(Rheinmetall) 사입니다.

이외에 민수용 차량 및 트럭을 개발/생산하는 한편 군용으로도 납품하였는데, 본문에 나와 있듯 8톤급 대공포 전용 트럭을 개발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Heinrich_Ehrhardt      1908년에는 역시나 전통의 크룹 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하고 60도의 부앙각을 가지면서, 9파운드, 즉 약 4kg 짜리 포탄을 고도 5,500m까지 쏘아 올릴 수 있는 65mm 포를 내놓았습니다.

    1909년 개최된 프랑크푸르트 국제 박람회에서 크룹 사와 라인메탈 양 사는 자신들의 병기를 다시 출품했습니다.

 이번에는 크룹 사는 기존의 65mm 포 이외에 트럭에 거치할 수 있는 75mm 대공포와 함상용 105mm 대공포를 공개했습니다.

이 포들은 특이하게 조작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포방패가 있었는데 일부에서는 하늘의 위협에서는 꼭 필요한 조치겠느냐며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병기들은 호기심을 자아냈지만 실제로 계약은 몇 건 체결되지 않았습니다.

     * 좌 - 크룹 사의 75mm 차량화 대공포 / 우 - 라인메탈 사의 50mm 차량화 대공포(http://note100.egloos.com/5118502 )?   독일 육군의 반응?   아무튼 방공무기 소요 자체는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1907년 독일 육군은 모터보트로 예인되는 기구에 대한 재래식 야포 사격훈련을 시행했습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즉 군 관계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재래식 야포들이 대공용으로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1909년 5월 위터보르그(Jueterborg)의 보병 학교에서 4,000피트 고도로 떠 있는 50피트 길이의 기구에 대한 보병용 소화기 사격 시험이 진행되었습니다.

  첫번째 분대는 소총탄 4,800발을 소모해서 어떤 효과도 얻지 못했으며, 두번째 분대는 맥심 기관총 약 2,700발을 소모했는데 역시 효과를 보지 못햇다.

기구는 여전히 떠 있었던 겁니다.

마침내 기구가 땅에 끌려오고 확인한 결과는 76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시험의 결과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 재래식 화기의 명중률(1% 미만이었습니다!)이 처참하다.

 * 대공 임무를 위해선 무언가 새로운 탄약이 필요하다.

효과적인 탄약, 탄체, 신관 개발이 필요하다.

 탄환에 대해서는, 탄환이나 포탄이 천 재질의 외피를 그냥 뚫고 나가버리면 이야기가 되지 않았으므로, 기존의 신관을 개량해야 했습니다.

또한 제대로 된 대공사격을 하려면 날아가는 포탄의 궤적을 확인하고 조준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만, 포탄이 명중하는 것을 보고 제원을 수정할 수 있는 지상 포격과 달리 하늘에 있는 표적을 쏠 때는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크룹 사에서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바로 탄두 부분에 소이탄을 끼우고 끝 부분에는 발연체를 끼워넣는 방식이었습니다.

바로 예광탄이었습니다.

 그렇긴 하나 여전히 조준 방식은 난제였습니다.

  1910년쯤 되면 완고한 독일 육군 수뇌부도 이제 방공무기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습니다만, 그에 걸맞는 포에 대해서는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대공임무를 위한 전용 포를 개발할 것인가, 혹은 기존의 야포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처음에 1910년 1월 야포 개발 위원회에서는 마차에 의해 견인되는 기존 야포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한달 뒤 1910년 2월 14일 특별 보고서(Sondergutachten)는 1월에 제출된 보고서에서는 그 결론을 반박했습니다.

  1) 차량화 포 쪽이 방열과정이 필요없는 신속한 사격이 가능하고 기동성 면에서 더 뛰어나다.

  2) 대공사격 전용 포의 개발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보고서에서는 "현재 기술상 전용 포(Spezialgeschuetz)만이 일반 야포보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더 나은 답이 된다"라고 명기)  3) 비행선 전용의 특수탄이 필요하다.

  아무튼 수뇌부들도 필요성은 인정했습니다.

 1910년 3월 14일 육군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소 몰트케)는 자신의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의 비행선의 위협을 언급하며, 독일도 비행선을 전력화시켜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만, 동시에 적의 비행선을 지상에서도 격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케는 대공 전용 포에 대해서는 아직까진 부정적이었습니다.

 ???(필요는 할 거 같긴 하지만 아, 안 사요 안 살 거임)?? 그래도 방공무기에 대해 육군의 수장이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1910년 연례 육군 훈련 연습에서 육군은 유기적인 방공 임무를 위한 두 가지 병기를 시험했습니다.

하나는 트럭의 유개 짐칸에 거치된 75mm 포였으며, 둘째론 역시 트럭에 거치된 보병용 기관총이었습니다.

 포의 경우, 기동성을 위한 조치였겠지만 단순히 포를 트럭 짐칸에 거치하는 것만으론 조작자나 차대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반동으로 인해 트럭 차대에 무리가 갔으며 공간 부족으로 인해 포탄 적재나 조준에 애로 사항이 속출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격통제 체계가 없었으므로 사격의 효과는 뚝 떨어졌습니다.

조준기 없는 목측식 조준만으론 적기를 맞추는 것은 사수의 실력 덕이라기보단 운에 가까웠습니다.

 반대로 기관총 쪽은 좀더 사정이 나았습니다.

어떤 장소에서라도 조작이 쉬웠고 명중률은 더 높았으며 필요한 공간도 적게 들었습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짧은 사정거리가 문제였는데 비행선은 기관총 사정거리 바깥에서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주 - 기관총은 약 고도 1000m 이상의 표적은 효과가 적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해, 이제는 비행선뿐 아니라 비행기도 위협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 총참모부는 비행기 기술의 향상되어 앞으로의 군사작전에도 영향을 크게 줄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이미 1911년에서 1912년에 걸친 리비아 전역에서 이탈리아군이 비행기를 투입한 적이 있고 1912년의 발칸 전역에서도 비행기는 높은 잠재력을 입증했습니다.

특히나 독일군 참모부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프랑스군이 훈련에서 정밀 폭격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11년 4월에서 "항공전 관련 특수 위원회"에서는 지상방공에 대한 보고서 하나를 전쟁성에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현재의 방공능력은 최신 비행기의 능력에 비해 뒤떨어져 있으며 보다 경량화되고 기동성 좋은 항공기들의 위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지상 방공부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공 전용 포를 개발하고 포반원들에게 보다 현실적인 훈련을 많이 하는 방법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1912년 4월 5일 전쟁성 보고서는 다소 애매한 지지만을 보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실전과 같은 훈련을 늘리는 한편 일선부대에 방공 자산들을 보다 하위 제대까지 폭넓게 배치시키길 것을 권장했으며, 정밀하고 신뢰성 높은 거리 지시계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해 위원회의 보고서와는 달리 전쟁성은 여전히 종래의 야전포 혹은 보병포가 대공용으로도 유용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런 입장이 1913년 3월 독일 육군이 발간한 최초의 '방공전 교범'에서 드러납니다.

"Guidelines for Instructing Troops about Aircraft and Means of Comating Aircraft'라는 이름의 교본은 지상 방공수단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여진히 야전포나 보병용 경포가 유효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 생각해보니 지르긴 질러야 할 듯 'ㅅ')?   1914년에 이르면 마침내 소 몰트케 역시 방공에 대해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1914년 4월 9일 소 몰트케는 "점증하는 항공기의 위협"으로부터 효과적인 대공수단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지상 방공수단 확충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모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마침내 그 역시 1910년 이래 근 4년 동안 고수해 오던 전용 대공포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23문의 차량화 대공포가 주문되었으며, 각 군(Armee)에 각기 4문씩의 대공포를 주문했습니다.

 그는 각 사단에 기존 편성되어 있던 재래식 포병대에 더해 대공포 1개 포대를 추가로 편제하도록 지시했지만, 기존 포병부대를 대공포부대로 전환시키는 것은 사단 화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어 금지햇습니다.

  또한 그는 1914년 가을 계획된 육군의 연습에서 방공부대의 훈련도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연습은 실행에 옮겨질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훗날 독일 육군 항공대 사령관을 지낸 에른스트 폰 회프너(Ernst von Hoeppner)에 따르면 독일 항공대 및 방공부대는 예산과 유능한 장교들 그리고 병력 부족으로 인해 정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독일군은 대공포와 서치라이트를 동원해서 견인되어 움직이거나 혹은 고정된 고공 표적에 대해서 많은 실험들을 수행해 왔습니다.

심지어 군 수뇌부의 방공에 대한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이당시 방공에 대해서는 선구자격이었습니다.

영국 방공 전사를 다루는 N.W. 루틀리지(Routledge)는 영국육군의 방공 부대는 독일에 뒤처져 있었으며 심지어 프랑스는 1914년 이전에는 '영국만큼의' 방공부대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프랑스군의 경우 1906년에 이미 대공포 시험을 해본 적이 있고 이동식 대공포도 1910년에 시험해 보았지만 실질적인 방공포의 배치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독일 해군 역시 전쟁 몇 년 전부터 대공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개전 시점에서는 유수의 대공포를 보유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단기 기동전을 상정했던 당시의 독일군 수뇌부는 적어도 1914년 상반기까지는 방공을 제 1 우선순위로까지는 두지 않았습니다.

실제 전장에서 그러한 결단이 평가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대전쟁의 서막   개전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방공 무기의 수량 자체는 한심한 수준이었습니다.

 차량화된 대공포 6문과 말이 끄는 77mm 대공포 12문이 전부였습니다.

동원계획상 각 군(Armee)는 4문의 차량화 대공포대, 각 사단은 말이 끄는 야전 대공포대 하나를 갖추게 되어 있습니다만,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렇지 못했습니다.

결국 6문의 차량화 대공포는 각 군단에 배분되고, 마필 견인식 대공포들은 전량 라인강 교량들과 비행선 기지로 배치되었습니다.

?     * I 군단 - 제 8군 (동부전선, 동프로이센 지역) : 차량화 대공포 1문* VIII 군단 - 제 4군 (서부전선, 룩셈부르크 지역) : 차량화 대공포 1문* XXI 군단 - 제 6군 (서부전선, 로렌 지역) : 차량화 대공포 1문* XV 군단 - 제 7군 (서부전선, 알자스 지역) : 차량화 대공포 2문 - Hermann Cron,C. F. Colt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p 190   (포대도 아니고 '문' 단위라니 orz 하긴 1차대전 개전 당시이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   ? 야전군을 지원해야 할 대공포도 없는 판이었으므로  개전초에는 산업단지와 도심지의 대공태세는 '전무' 했습니다.

  그러나 장기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피차 방공 수단이 없는 건 이시기의 열강 모두가 마찬가지였지만 영국군은 독일의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1914년 가을부터 영국 왕립 해군 항공대 (RNAS)는 독일 내 목표물에 대한 폭격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당장 1914년 9월 22일과 10월 8일에 걸쳐 영국 해군항공대는 영국 본토의 당면한 위협이었던 체펠린 비행선을 제거하기 위해 쾰른(Cologne)과 뒤셀도르프(Duesseldorf)의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를 폭격했으며, 프리드리히스하펜(Friederichshafen)과 루드비히샤펜(Ludwigshafen)의 비행선 기지에 대해서도 폭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폭격의 피해 자체는 미미했는데 10월 8일 폭격에서 겨우 비행선 한 대 (Z9)를 전소시켰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항해야 할 독일 방공부대의 전과도 미미한 것은 마찬가지라 프리드리히샤펜 폭격에서 겨우 한 대를 격추시키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1914년 12월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 시의 폭격 후에는 독일 민간인들 역시 더 나은 대공수단과 임박한 폭격을 경보할 민방위 체계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임기변통의 산물 중 하나;;;)   대공포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물론 아니었으므로 독일은 임시변통으로 노획한 포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14년 10월까지도 대공포는 고작 36문에 불과했으며 1915년 여름까지도 175문의 야전 대공포를 보유한 정도였습니다.

  이즈음에는 기존의 야포들은 대공 임무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이 이미 드러난 상태였습니다.

사실,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1915년 5월 26일의 보고서에서 "적 항공기에 대한 야포 사격은 이시점까지는 대량의 탄약을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매우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고 있다"라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

   (7.7cm BAK을 조작하는 독일 병정들. 무...... 무엇인가 유쾌해 보인다.

..... orz)   그래도 효용 떨어지는 일반 야포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독일군은 노획한 외제 야포를 개량해서 사용해야 했습니다.

(주 - 제 2차대전 때의 기술이 아닙니다 orz)  1915년 한 해에만 독일군은 대략 1,000문에 달하는 프랑스/러시아/벨기에 제 야포를 방공포로 돌렸고, 전쟁 말쯤 가면 독일 대공포의 거의 절반이 노획한 외제 포로 구성되었을 정도이지요.   (제정 러시아군이 쓰던 76mm M1903 포. 독일군은 이를 유용해서 "7.62cm Russische Sockellafette Fliegerabwehrkanone"라는 이름으로 써먹었다고 합니다.

어째, 2차대전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그려. 그나 저나 제정 러시아군은 소련 때보다도 군수 산업력이 열악했을 텐데 그때나 저때나 여전히 조공셔틀 신세라니 orz)   이렇게 조직이 팽창하다 보니 1914년 말이면 기존 독립적으로 운용되던 대공포들을 대공포 소대(platoon)으로 묶어 편제하게 되었고, 후에는 포대 편제도 나타났습니다.

후술하겠습니다만, 1915년 5월부터는 방공포 부대는 이제 포병대하고도 별개의 지휘 계통을 확립하게 됩니다.

1916년 5월부터는 기존의 고색창연한 Ballonabwehrkanone 이라는 이름 대신 Fliegerabwehrkanone - Fliger (비행물체) + abwehr (저항하는) + kanone (포), 즉 Flak - 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쯤 하면 명실 상부, "대공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할까요......  대체로 1915년 봄에 이르면 보다 효과적인 경보수단과 충분한 숫자의 대공포대가 확보되게 되었습니다.

[912부대] 대체 무엇때문에.


초기 독일군은 적기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따라 대공포 기지들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훈련된 대공포사수와 포의 부족으로 전선 일부와 지휘소, 보급창 등 일부 지역만을 커버할 수 있었습니다.

1917년쯤 가면 방공포의 차량화 수준도 올라가고, 수 자체 늘어나 보다 효과적으로 전선의 하늘을 책임질 수 있었습니다.

  뭐 이런 추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1914년 개전 당시 - 차량화 대공포 6문, 마필 견인식 대공포 12문 - 동년 10월까지 총 36문으로 증강.   1915년 6월- 일선 부대용으로 270문, 본토 방공용으로 150문 확보   1916년 말 - 173개 이동식 대공포대, 2개 고정식 대공포대, 16개 차량화 대공포대> 217개 이동식 대공포 소대, 122개 고정식 대공포 소대, 14개 대공기관총 소대, 독립 차량화 대공포 80문   1917년 말- 104문의 차량화 중대공포, 112문의 차량화 경대공포, 998문의 마필 견인식 혹은 고정식 대공포 추가로 37mm 대공 기관포 197문 및 9mm 대공기관포 542문* 1917

1918년 신편부대가 편성 완료될 경우차량화 중 대공포대 116개(각 2

3문), 3 차량화 경대공포대 9개(각 2문), 마필 견인식 대공포대 168개, 고정식 대공포대 166개, 열차 대공포대 3개, 대공기관총 소대 183개, 마필 견인식 대공포 소대 49개, 고정식 대공포 소대 173개, 독립 차량화 대공포 80문     당시 대공포 수에 대한 명확한 통계자료가 없어서 좀 어설프게 접근할 수밖에 없긴 합니다.

그러나 과연 괄목할 만한 발전이긴 합니다.

     야전 및 본토 방공 체계의 조직?   독일 본토 방공 체계에서 가장 문제되었던 것 중 하나가 관계당국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주 정부(Laender), 행정기구 및 경찰 조직, 지역 군 수뇌부, 지역 군 기지 사령관 등이 한 다리씩 걸치고 있었으므로 이 난삽하고 비효율적인 체계를 일원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에 따라 1915년 5월 1일 전쟁성의 휴고 그림(Hugo Grimme) 소령 아래 독일 본토 및 서부 국경 및 서부전선의 본토 방공 업무가 일원화되었습니다.

동년 7월 10일에는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방공포병감(Inspekteur der Fliegerabwehrkanonen)이라는 직책을 신설해서 야전 및 본토 방공임무를 책임지도록 했습니다.

또한 각 군에 방공 참모(Stabsoffizier der Flakarthillerie)를 두었습니다.

 방공포병감으로서 그림 소령은 이제 독일군 총사령부에 예속되어, 참모총장의 명령을 직접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각 군의 대공포부대의 인력 및 포의 배치 업무를 총괄했으며, 방공 관련 규정을 내리는 한편 방공포병 학교들을 감독하는 업무도 맡았습니다.

   * 주 - 1915년 봄부터 벨기에 오스텐드(Ostend)에 차량화 대공포수들을 훈련시킬 학교가 세워졌으며 곧 방공포병 학교로 확대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2주간의 이론 및 실기교육이 진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론 이프르 북쪽에 마련된 방공포 기지에서 실사격 졸업 시험이 시행되었습니다.

일선의 경험 많은 장교들을 교관으로 활용한 이 학교에서는 1917년까지 요원들이 배출되었고, 그 이후에는 해군의 요구에 따라 블랑켄베르게(Blankenberge) 근교로 이전했습니다.

이외에도 육군은 발렌시엔(Valenciennes)에 항공대 및 방공부대 훈련장을 세웠습니다.

   다만 각 군에 대한 그림의 권한에는 제한이 있었는데, 1916년 봄에는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공포의 관할은 육군 병기감(Chief of Army Ordnance)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병기감은 곧 마차 운반식 방공포들은 사단급으로 분산시키고 차량화 방공포들은 군급으로 배속시켰습니다.

  한편 연합군의 본토 폭격이 거듭됨에 따라 1915년 3월 전쟁성은 본국의 방공포 소요를 일선 부대의 소요보다 우선 순위로 놓았으며, 일선에 배치되었던 방공부대 일부를 독일 내 요충지로 이동시키는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럭저럭 1915년 6월까지는 본토 방공용으로 150문의 대공포를 확보했습니다.

 또한 방공 구획을 설정하여 효과적인 관리를 꾀했는데, 북쪽으로는 함부르크에서 남쪽으로는 뮌헨에 이르는 구역을 다섯 개의 방공 구획으로 나누었습니다.

 초기 폭격기들의 항속거리 한계 덕분에 독일군은 자신들의 방공 자산들을 프랑스와 접경한 서부지역에 집중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독일 제 2 제국은 적어도 한 세대 뒤의 '후예'들처럼 본토 깊숙이까지 폭격을 두드려맞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   이런 조치에 더하여 1915년에는 통합된 대공경보체계(Flugmeldedienst)가 본토 방공포감의 지휘 하에 만들어졌습니다.

56) 이것으로 적기의 수와 방향을 감지해서 요격기들을 발진하고 지상 방공부대에 경고를 조기에 내릴 수 있는 체계가 중요해졌습니다.

이를 위해 독일 서부 국경, 나중에는 독일 전역에 걸쳐 대공 감시초소가 세워졌습니다만, 통신체계의 미비로 썩 효율적이진 못했습니다.

  * 주 - 가령 뮌헨지역의 방공 사령관은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잉골슈타트를 관할하고, 쾰른의사령관은 쾰른, 코블렌츠, 슐레부스(Schlebusch), 트로이스도르프(Troisdorf), 트리어(Trier), 아헨(Aachen), 도르마겐(Dormagen), 그레벤브로이흐(Grevenbroich), 베르그하임(Bergheim)을 관장했습니다.

이러한 관할구역을 관리하기 위해선 잘 짜여진 통신망, 단일화된 지휘체계, 갈 갖추어진 조기경보망, 잘 훈련된 대공포대가 필요하지만, 이런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자원이 들었습니다.

    (에른스트 폰 회프너 (Ernst von Hoeppner). 2차 대전 때 날리던 -_- 기갑장군 에리히 회프너(Erich Hoepner)와는 "아마도" 무관할 듯. 이제 보니 스펠링도 다릅니다.

우웅.)   이런 조직개편에서 중요한 국면이 바로 1916년 10월 8일 '(육군) 항공대 사령관(Commander of the Air Service)" 직책이 신설되고 에른스트 폰 회프너(Ernst von Hoeppner)가 그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1860년생인 회프너는 기병장교로 임관하고 베를린 육군대학을 나온 그는 총참모부에서 근무하였으며, 개전 당시에는 제 3군 참모장으로 근무하다 동부전선의 제 75 예비역 사단장으로 보임되었다가 항공대 사령관 직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항공대 사령관으로서 회프너는 독일 대공포 부대를 독일 공군과 통합하였으며, 이로 인해 공군 및 대공포, 항공 통신부(Flying Signal Service) 모두가 회프너의 지휘를 받게 되었습니다.

   항공대 사령관(Chief of Aviation)은 계속해서 우리 전선, 해안선, 항구, 국내 군사 요충지에 대한 공습을 막아내는 데 주력했다.

우리의 방공 대책들은 전쟁이 닥쳐오면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고 체계적인 계획이라곤 없었다.

 다수의 군 관계 부서들이 우리 제국을 공습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관여했는데, 전쟁성, 항공감, 총참모부의 방공포병감, 국내지역 방공포병감, 지역 사령관, 해군 소속의 부서들 등이 끼여 있었다.

이들로부터 어떤 결과를 얻어내려면, (지휘체계의) 통합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본디 임시변통

.

)    회프너의 말대로, 분명히 이런 통합을 이루어내려면 공군, 병참조직, 대공포부대, 민방위 체계에 이르는 모든 조직들을 체계화하고 집중화시켜야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육군이나 해군이나 방공에 대해서 따로 따로 놀고 있었기에 비용이나 인력, 자원 면에서 낭비가 되었습니다.

이제 회프너의 취임으로 항만과 주요 지역들을 방어하는 데 돌려지던 400문 이상의 해군 방공포들이 본토 방공체계로 통합되었습니다.

  다시 1916년 12월 8일 내려진, 본토방공에 역점을 둔 전쟁성 훈령에 따라 이번에는 항공대 사령관 직속으로 본토 방공사령관(Kommandeur des Heimatluftschutzes) 직이 신설되었습니다.

이는 독일 본토의 대공포, 전투기 부대, 조기경보 부대 모두를 총괄하여 방공에 관한 업무 일반을 모두 관할했습니다.

   ========================================================================================================================== - To be Continue...?   Edward B. Westermann, Flak German Anti-aircraft defences 1941

1945, 14

40 pageHermann Cron,C. F. Colt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pp 190

192Flak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 http://note100.egloos.com/5118502 )노도부대 설비호 스키부대(2사단수색대대의 전신) 이때 파리 포위 당시 포위된 도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부상병이나 탈출하는 고위층을 나르는 데 열기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그리고 역사를 아는 후대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전황을 뒤집을 정도의 의미는 없었습니다만 프로이센군 입장에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군산복합체 -_- 크룹(Krupp) 사에서는 곧 수레 거치식 36mm 대 '기구' 포 (Ballonabwehrkanone, B.A.K.)를 내어 놓았습니다.

독일 어로 써 놓으니 이름이 좀 거창해보이지만, 결국 Ballon (풍선, 기구) + abwehr(저항하는) + kanone(포) 니까, 대 '기구' 포, 결국 대공포가 되겠습니다.

말이 끄는 마차에 거치해 두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겠지만 파리 포위전에 여섯 문 배치된 이 '대공포'는 기구가 나타나면 바로 달려나가 대공 사격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열기구를 격추시키는 건 지극히 어려웠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실제로 파리 포위전 기간 동안 66기의 열기구들이 날아올랐으나, 이 중 독일군이 실제로 격추에 성공한 것은 1870년 10월 12일 다귀레(Daquerre) 단 한 기뿐이었습니다.

    이런 신통치 않은 성적을 보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1. 부실한 조준장치 - 열기구든, 후대에 등장하는 비행선이든, 비행기든, 3차원 공간을 비행하는 '무언가'를 격추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보시다 시피 제대로 된 조준기도 없다시피했으니 이만 저만 곤란했습니다.

[912부대] 누구의 잘못인가

이런 문제는 향후 근 칠십여 년 간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2. 부족한 숫자 - 파리 포위전에 동원된 대공포 자체가 6문이었으니 아무리 기동성을 부여한들 한계가 있었습니다.

 3. 전용 포탄의 부재 - 난관을 뚫고, 어떻게든 명중시킨다 할지라도 36mm 구경의 쇳덩어리는 기구를 뚫고 나갈 뿐 추락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뭐 이런 문제도 있었을뿐더러 결정적으로, 대공포가 위협이 될 수 있다 한들 프랑스인들은 기구를 밤에 띄우면 그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얼마 후 프랑스 자체가 굴복해버리니 이 병기는 잠시 잊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는데, 비행선과 비행기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 새로운 '날틀'들은 곧 군용으로, 즉 정찰 및 포격 관측용으로 전용되었습니다.

다름아닌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Ferdinand von Zeppelin) 백작이 비행선의 개발자였으며, 독일의 비행선 제작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그것이 민수용 외에 군용으로 전환되면서 독일 자신부터가 방공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했습니다.

  ???독일 군수산업의 반응?  독일 산업계 역시 이에 부응해서 몇 가지 시제 병기를 내놓았습니다.

  1906년 베를린 자동차 박람회에서 라인 금속공업 및 기계공업사(Rheinische Metallwaren und Maschinenfabrik)라는 긴 이름의 회사가 장갑차에 거치할 수 있는 50mm 대 '비행선' 포를 내놓았습니다.

이름은 아직 B.A.K. *        * Lastkraftwagen mit 5 cm Ballonabwehrkanone L/30 Rheinmetall - 5cm 대 기구포를 장착한 화물차...... 와 그 개발자 에어하르트 씨.    하인리히 에어하르트(Heinrich Ehrhardt)는 1840년 생의 독일 발명가이자 기업가로 1889년 뒤셀도르프에 본사를 둔 라인 금속공업 및 기계공업사(Rheinische Metallwaren- und Maschinenfabrik AG)를 차린 양반입니다.

라인 금속공업...... 바로 후대의 라인메탈(Rheinmetall) 사입니다.

이외에 민수용 차량 및 트럭을 개발/생산하는 한편 군용으로도 납품하였는데, 본문에 나와 있듯 8톤급 대공포 전용 트럭을 개발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Heinrich_Ehrhardt      1908년에는 역시나 전통의 크룹 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하고 60도의 부앙각을 가지면서, 9파운드, 즉 약 4kg 짜리 포탄을 고도 5,500m까지 쏘아 올릴 수 있는 65mm 포를 내놓았습니다.

    1909년 개최된 프랑크푸르트 국제 박람회에서 크룹 사와 라인메탈 양 사는 자신들의 병기를 다시 출품했습니다.

 이번에는 크룹 사는 기존의 65mm 포 이외에 트럭에 거치할 수 있는 75mm 대공포와 함상용 105mm 대공포를 공개했습니다.

이 포들은 특이하게 조작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포방패가 있었는데 일부에서는 하늘의 위협에서는 꼭 필요한 조치겠느냐며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병기들은 호기심을 자아냈지만 실제로 계약은 몇 건 체결되지 않았습니다.

     * 좌 - 크룹 사의 75mm 차량화 대공포 / 우 - 라인메탈 사의 50mm 차량화 대공포(http://note100.egloos.com/5118502 )?   독일 육군의 반응?   아무튼 방공무기 소요 자체는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1907년 독일 육군은 모터보트로 예인되는 기구에 대한 재래식 야포 사격훈련을 시행했습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즉 군 관계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재래식 야포들이 대공용으로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1909년 5월 위터보르그(Jueterborg)의 보병 학교에서 4,000피트 고도로 떠 있는 50피트 길이의 기구에 대한 보병용 소화기 사격 시험이 진행되었습니다.

  첫번째 분대는 소총탄 4,800발을 소모해서 어떤 효과도 얻지 못했으며, 두번째 분대는 맥심 기관총 약 2,700발을 소모했는데 역시 효과를 보지 못햇다.

기구는 여전히 떠 있었던 겁니다.

마침내 기구가 땅에 끌려오고 확인한 결과는 76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시험의 결과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 재래식 화기의 명중률(1% 미만이었습니다!)이 처참하다.

 * 대공 임무를 위해선 무언가 새로운 탄약이 필요하다.

효과적인 탄약, 탄체, 신관 개발이 필요하다.

 탄환에 대해서는, 탄환이나 포탄이 천 재질의 외피를 그냥 뚫고 나가버리면 이야기가 되지 않았으므로, 기존의 신관을 개량해야 했습니다.

또한 제대로 된 대공사격을 하려면 날아가는 포탄의 궤적을 확인하고 조준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만, 포탄이 명중하는 것을 보고 제원을 수정할 수 있는 지상 포격과 달리 하늘에 있는 표적을 쏠 때는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크룹 사에서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바로 탄두 부분에 소이탄을 끼우고 끝 부분에는 발연체를 끼워넣는 방식이었습니다.

바로 예광탄이었습니다.

 그렇긴 하나 여전히 조준 방식은 난제였습니다.

  1910년쯤 되면 완고한 독일 육군 수뇌부도 이제 방공무기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습니다만, 그에 걸맞는 포에 대해서는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대공임무를 위한 전용 포를 개발할 것인가, 혹은 기존의 야포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처음에 1910년 1월 야포 개발 위원회에서는 마차에 의해 견인되는 기존 야포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한달 뒤 1910년 2월 14일 특별 보고서(Sondergutachten)는 1월에 제출된 보고서에서는 그 결론을 반박했습니다.

  1) 차량화 포 쪽이 방열과정이 필요없는 신속한 사격이 가능하고 기동성 면에서 더 뛰어나다.

  2) 대공사격 전용 포의 개발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보고서에서는 "현재 기술상 전용 포(Spezialgeschuetz)만이 일반 야포보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더 나은 답이 된다"라고 명기)  3) 비행선 전용의 특수탄이 필요하다.

  아무튼 수뇌부들도 필요성은 인정했습니다.

 1910년 3월 14일 육군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소 몰트케)는 자신의 비망록에서 프랑스군의 비행선의 위협을 언급하며, 독일도 비행선을 전력화시켜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만, 동시에 적의 비행선을 지상에서도 격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케는 대공 전용 포에 대해서는 아직까진 부정적이었습니다.

 ???(필요는 할 거 같긴 하지만 아, 안 사요 안 살 거임)?? 그래도 방공무기에 대해 육군의 수장이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1910년 연례 육군 훈련 연습에서 육군은 유기적인 방공 임무를 위한 두 가지 병기를 시험했습니다.

하나는 트럭의 유개 짐칸에 거치된 75mm 포였으며, 둘째론 역시 트럭에 거치된 보병용 기관총이었습니다.

 포의 경우, 기동성을 위한 조치였겠지만 단순히 포를 트럭 짐칸에 거치하는 것만으론 조작자나 차대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반동으로 인해 트럭 차대에 무리가 갔으며 공간 부족으로 인해 포탄 적재나 조준에 애로 사항이 속출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격통제 체계가 없었으므로 사격의 효과는 뚝 떨어졌습니다.

조준기 없는 목측식 조준만으론 적기를 맞추는 것은 사수의 실력 덕이라기보단 운에 가까웠습니다.

 반대로 기관총 쪽은 좀더 사정이 나았습니다.

어떤 장소에서라도 조작이 쉬웠고 명중률은 더 높았으며 필요한 공간도 적게 들었습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짧은 사정거리가 문제였는데 비행선은 기관총 사정거리 바깥에서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주 - 기관총은 약 고도 1000m 이상의 표적은 효과가 적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해, 이제는 비행선뿐 아니라 비행기도 위협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 총참모부는 비행기 기술의 향상되어 앞으로의 군사작전에도 영향을 크게 줄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이미 1911년에서 1912년에 걸친 리비아 전역에서 이탈리아군이 비행기를 투입한 적이 있고 1912년의 발칸 전역에서도 비행기는 높은 잠재력을 입증했습니다.

특히나 독일군 참모부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프랑스군이 훈련에서 정밀 폭격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11년 4월에서 "항공전 관련 특수 위원회"에서는 지상방공에 대한 보고서 하나를 전쟁성에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현재의 방공능력은 최신 비행기의 능력에 비해 뒤떨어져 있으며 보다 경량화되고 기동성 좋은 항공기들의 위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지상 방공부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공 전용 포를 개발하고 포반원들에게 보다 현실적인 훈련을 많이 하는 방법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1912년 4월 5일 전쟁성 보고서는 다소 애매한 지지만을 보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실전과 같은 훈련을 늘리는 한편 일선부대에 방공 자산들을 보다 하위 제대까지 폭넓게 배치시키길 것을 권장했으며, 정밀하고 신뢰성 높은 거리 지시계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해 위원회의 보고서와는 달리 전쟁성은 여전히 종래의 야전포 혹은 보병포가 대공용으로도 유용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런 입장이 1913년 3월 독일 육군이 발간한 최초의 '방공전 교범'에서 드러납니다.

"Guidelines for Instructing Troops about Aircraft and Means of Comating Aircraft'라는 이름의 교본은 지상 방공수단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여진히 야전포나 보병용 경포가 유효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 생각해보니 지르긴 질러야 할 듯 'ㅅ')?   1914년에 이르면 마침내 소 몰트케 역시 방공에 대해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1914년 4월 9일 소 몰트케는 "점증하는 항공기의 위협"으로부터 효과적인 대공수단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지상 방공수단 확충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모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마침내 그 역시 1910년 이래 근 4년 동안 고수해 오던 전용 대공포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23문의 차량화 대공포가 주문되었으며, 각 군(Armee)에 각기 4문씩의 대공포를 주문했습니다.

 그는 각 사단에 기존 편성되어 있던 재래식 포병대에 더해 대공포 1개 포대를 추가로 편제하도록 지시했지만, 기존 포병부대를 대공포부대로 전환시키는 것은 사단 화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어 금지햇습니다.

  또한 그는 1914년 가을 계획된 육군의 연습에서 방공부대의 훈련도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연습은 실행에 옮겨질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훗날 독일 육군 항공대 사령관을 지낸 에른스트 폰 회프너(Ernst von Hoeppner)에 따르면 독일 항공대 및 방공부대는 예산과 유능한 장교들 그리고 병력 부족으로 인해 정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독일군은 대공포와 서치라이트를 동원해서 견인되어 움직이거나 혹은 고정된 고공 표적에 대해서 많은 실험들을 수행해 왔습니다.

심지어 군 수뇌부의 방공에 대한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이당시 방공에 대해서는 선구자격이었습니다.

영국 방공 전사를 다루는 N.W. 루틀리지(Routledge)는 영국육군의 방공 부대는 독일에 뒤처져 있었으며 심지어 프랑스는 1914년 이전에는 '영국만큼의' 방공부대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프랑스군의 경우 1906년에 이미 대공포 시험을 해본 적이 있고 이동식 대공포도 1910년에 시험해 보았지만 실질적인 방공포의 배치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독일 해군 역시 전쟁 몇 년 전부터 대공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개전 시점에서는 유수의 대공포를 보유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단기 기동전을 상정했던 당시의 독일군 수뇌부는 적어도 1914년 상반기까지는 방공을 제 1 우선순위로까지는 두지 않았습니다.

실제 전장에서 그러한 결단이 평가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대전쟁의 서막   개전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방공 무기의 수량 자체는 한심한 수준이었습니다.

 차량화된 대공포 6문과 말이 끄는 77mm 대공포 12문이 전부였습니다.

동원계획상 각 군(Armee)는 4문의 차량화 대공포대, 각 사단은 말이 끄는 야전 대공포대 하나를 갖추게 되어 있습니다만,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렇지 못했습니다.

결국 6문의 차량화 대공포는 각 군단에 배분되고, 마필 견인식 대공포들은 전량 라인강 교량들과 비행선 기지로 배치되었습니다.

?     * I 군단 - 제 8군 (동부전선, 동프로이센 지역) : 차량화 대공포 1문* VIII 군단 - 제 4군 (서부전선, 룩셈부르크 지역) : 차량화 대공포 1문* XXI 군단 - 제 6군 (서부전선, 로렌 지역) : 차량화 대공포 1문* XV 군단 - 제 7군 (서부전선, 알자스 지역) : 차량화 대공포 2문 - Hermann Cron,C. F. Colt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p 190   (포대도 아니고 '문' 단위라니 orz 하긴 1차대전 개전 당시이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   ? 야전군을 지원해야 할 대공포도 없는 판이었으므로  개전초에는 산업단지와 도심지의 대공태세는 '전무' 했습니다.

  그러나 장기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피차 방공 수단이 없는 건 이시기의 열강 모두가 마찬가지였지만 영국군은 독일의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1914년 가을부터 영국 왕립 해군 항공대 (RNAS)는 독일 내 목표물에 대한 폭격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당장 1914년 9월 22일과 10월 8일에 걸쳐 영국 해군항공대는 영국 본토의 당면한 위협이었던 체펠린 비행선을 제거하기 위해 쾰른(Cologne)과 뒤셀도르프(Duesseldorf)의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를 폭격했으며, 프리드리히스하펜(Friederichshafen)과 루드비히샤펜(Ludwigshafen)의 비행선 기지에 대해서도 폭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폭격의 피해 자체는 미미했는데 10월 8일 폭격에서 겨우 비행선 한 대 (Z9)를 전소시켰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항해야 할 독일 방공부대의 전과도 미미한 것은 마찬가지라 프리드리히샤펜 폭격에서 겨우 한 대를 격추시키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1914년 12월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 시의 폭격 후에는 독일 민간인들 역시 더 나은 대공수단과 임박한 폭격을 경보할 민방위 체계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임기변통의 산물 중 하나;;;)   대공포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물론 아니었으므로 독일은 임시변통으로 노획한 포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14년 10월까지도 대공포는 고작 36문에 불과했으며 1915년 여름까지도 175문의 야전 대공포를 보유한 정도였습니다.

  이즈음에는 기존의 야포들은 대공 임무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이 이미 드러난 상태였습니다.

사실,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1915년 5월 26일의 보고서에서 "적 항공기에 대한 야포 사격은 이시점까지는 대량의 탄약을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매우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고 있다"라고 기록한 바 있습니다.

   (7.7cm BAK을 조작하는 독일 병정들. 무...... 무엇인가 유쾌해 보인다.

..... orz)   그래도 효용 떨어지는 일반 야포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독일군은 노획한 외제 야포를 개량해서 사용해야 했습니다.

(주 - 제 2차대전 때의 기술이 아닙니다 orz)  1915년 한 해에만 독일군은 대략 1,000문에 달하는 프랑스/러시아/벨기에 제 야포를 방공포로 돌렸고, 전쟁 말쯤 가면 독일 대공포의 거의 절반이 노획한 외제 포로 구성되었을 정도이지요.   (제정 러시아군이 쓰던 76mm M1903 포. 독일군은 이를 유용해서 "7.62cm Russische Sockellafette Fliegerabwehrkanone"라는 이름으로 써먹었다고 합니다.

어째, 2차대전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그려. 그나 저나 제정 러시아군은 소련 때보다도 군수 산업력이 열악했을 텐데 그때나 저때나 여전히 조공셔틀 신세라니 orz)   이렇게 조직이 팽창하다 보니 1914년 말이면 기존 독립적으로 운용되던 대공포들을 대공포 소대(platoon)으로 묶어 편제하게 되었고, 후에는 포대 편제도 나타났습니다.

후술하겠습니다만, 1915년 5월부터는 방공포 부대는 이제 포병대하고도 별개의 지휘 계통을 확립하게 됩니다.

1916년 5월부터는 기존의 고색창연한 Ballonabwehrkanone 이라는 이름 대신 Fliegerabwehrkanone - Fliger (비행물체) + abwehr (저항하는) + kanone (포), 즉 Flak - 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쯤 하면 명실 상부, "대공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할까요......  대체로 1915년 봄에 이르면 보다 효과적인 경보수단과 충분한 숫자의 대공포대가 확보되게 되었습니다.

초기 독일군은 적기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따라 대공포 기지들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훈련된 대공포사수와 포의 부족으로 전선 일부와 지휘소, 보급창 등 일부 지역만을 커버할 수 있었습니다.

1917년쯤 가면 방공포의 차량화 수준도 올라가고, 수 자체 늘어나 보다 효과적으로 전선의 하늘을 책임질 수 있었습니다.

  뭐 이런 추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1914년 개전 당시 - 차량화 대공포 6문, 마필 견인식 대공포 12문 - 동년 10월까지 총 36문으로 증강.   1915년 6월- 일선 부대용으로 270문, 본토 방공용으로 150문 확보   1916년 말 - 173개 이동식 대공포대, 2개 고정식 대공포대, 16개 차량화 대공포대> 217개 이동식 대공포 소대, 122개 고정식 대공포 소대, 14개 대공기관총 소대, 독립 차량화 대공포 80문   1917년 말- 104문의 차량화 중대공포, 112문의 차량화 경대공포, 998문의 마필 견인식 혹은 고정식 대공포 추가로 37mm 대공 기관포 197문 및 9mm 대공기관포 542문* 1917

1918년 신편부대가 편성 완료될 경우차량화 중 대공포대 116개(각 2

3문), 3 차량화 경대공포대 9개(각 2문), 마필 견인식 대공포대 168개, 고정식 대공포대 166개, 열차 대공포대 3개, 대공기관총 소대 183개, 마필 견인식 대공포 소대 49개, 고정식 대공포 소대 173개, 독립 차량화 대공포 80문     당시 대공포 수에 대한 명확한 통계자료가 없어서 좀 어설프게 접근할 수밖에 없긴 합니다.

그러나 과연 괄목할 만한 발전이긴 합니다.

     야전 및 본토 방공 체계의 조직?   독일 본토 방공 체계에서 가장 문제되었던 것 중 하나가 관계당국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주 정부(Laender), 행정기구 및 경찰 조직, 지역 군 수뇌부, 지역 군 기지 사령관 등이 한 다리씩 걸치고 있었으므로 이 난삽하고 비효율적인 체계를 일원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에 따라 1915년 5월 1일 전쟁성의 휴고 그림(Hugo Grimme) 소령 아래 독일 본토 및 서부 국경 및 서부전선의 본토 방공 업무가 일원화되었습니다.

동년 7월 10일에는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방공포병감(Inspekteur der Fliegerabwehrkanonen)이라는 직책을 신설해서 야전 및 본토 방공임무를 책임지도록 했습니다.

또한 각 군에 방공 참모(Stabsoffizier der Flakarthillerie)를 두었습니다.

 방공포병감으로서 그림 소령은 이제 독일군 총사령부에 예속되어, 참모총장의 명령을 직접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각 군의 대공포부대의 인력 및 포의 배치 업무를 총괄했으며, 방공 관련 규정을 내리는 한편 방공포병 학교들을 감독하는 업무도 맡았습니다.

   * 주 - 1915년 봄부터 벨기에 오스텐드(Ostend)에 차량화 대공포수들을 훈련시킬 학교가 세워졌으며 곧 방공포병 학교로 확대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2주간의 이론 및 실기교육이 진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론 이프르 북쪽에 마련된 방공포 기지에서 실사격 졸업 시험이 시행되었습니다.

일선의 경험 많은 장교들을 교관으로 활용한 이 학교에서는 1917년까지 요원들이 배출되었고, 그 이후에는 해군의 요구에 따라 블랑켄베르게(Blankenberge) 근교로 이전했습니다.

이외에도 육군은 발렌시엔(Valenciennes)에 항공대 및 방공부대 훈련장을 세웠습니다.

   다만 각 군에 대한 그림의 권한에는 제한이 있었는데, 1916년 봄에는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공포의 관할은 육군 병기감(Chief of Army Ordnance)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병기감은 곧 마차 운반식 방공포들은 사단급으로 분산시키고 차량화 방공포들은 군급으로 배속시켰습니다.

  한편 연합군의 본토 폭격이 거듭됨에 따라 1915년 3월 전쟁성은 본국의 방공포 소요를 일선 부대의 소요보다 우선 순위로 놓았으며, 일선에 배치되었던 방공부대 일부를 독일 내 요충지로 이동시키는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럭저럭 1915년 6월까지는 본토 방공용으로 150문의 대공포를 확보했습니다.

 또한 방공 구획을 설정하여 효과적인 관리를 꾀했는데, 북쪽으로는 함부르크에서 남쪽으로는 뮌헨에 이르는 구역을 다섯 개의 방공 구획으로 나누었습니다.

 초기 폭격기들의 항속거리 한계 덕분에 독일군은 자신들의 방공 자산들을 프랑스와 접경한 서부지역에 집중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독일 제 2 제국은 적어도 한 세대 뒤의 '후예'들처럼 본토 깊숙이까지 폭격을 두드려맞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   이런 조치에 더하여 1915년에는 통합된 대공경보체계(Flugmeldedienst)가 본토 방공포감의 지휘 하에 만들어졌습니다.

56) 이것으로 적기의 수와 방향을 감지해서 요격기들을 발진하고 지상 방공부대에 경고를 조기에 내릴 수 있는 체계가 중요해졌습니다.

이를 위해 독일 서부 국경, 나중에는 독일 전역에 걸쳐 대공 감시초소가 세워졌습니다만, 통신체계의 미비로 썩 효율적이진 못했습니다.

  * 주 - 가령 뮌헨지역의 방공 사령관은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잉골슈타트를 관할하고, 쾰른의사령관은 쾰른, 코블렌츠, 슐레부스(Schlebusch), 트로이스도르프(Troisdorf), 트리어(Trier), 아헨(Aachen), 도르마겐(Dormagen), 그레벤브로이흐(Grevenbroich), 베르그하임(Bergheim)을 관장했습니다.

이러한 관할구역을 관리하기 위해선 잘 짜여진 통신망, 단일화된 지휘체계, 갈 갖추어진 조기경보망, 잘 훈련된 대공포대가 필요하지만, 이런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자원이 들었습니다.

    (에른스트 폰 회프너 (Ernst von Hoeppner). 2차 대전 때 날리던 -_- 기갑장군 에리히 회프너(Erich Hoepner)와는 "아마도" 무관할 듯. 이제 보니 스펠링도 다릅니다.

우웅.)   이런 조직개편에서 중요한 국면이 바로 1916년 10월 8일 '(육군) 항공대 사령관(Commander of the Air Service)" 직책이 신설되고 에른스트 폰 회프너(Ernst von Hoeppner)가 그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1860년생인 회프너는 기병장교로 임관하고 베를린 육군대학을 나온 그는 총참모부에서 근무하였으며, 개전 당시에는 제 3군 참모장으로 근무하다 동부전선의 제 75 예비역 사단장으로 보임되었다가 항공대 사령관 직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항공대 사령관으로서 회프너는 독일 대공포 부대를 독일 공군과 통합하였으며, 이로 인해 공군 및 대공포, 항공 통신부(Flying Signal Service) 모두가 회프너의 지휘를 받게 되었습니다.

   항공대 사령관(Chief of Aviation)은 계속해서 우리 전선, 해안선, 항구, 국내 군사 요충지에 대한 공습을 막아내는 데 주력했다.

우리의 방공 대책들은 전쟁이 닥쳐오면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고 체계적인 계획이라곤 없었다.

 다수의 군 관계 부서들이 우리 제국을 공습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관여했는데, 전쟁성, 항공감, 총참모부의 방공포병감, 국내지역 방공포병감, 지역 사령관, 해군 소속의 부서들 등이 끼여 있었다.

이들로부터 어떤 결과를 얻어내려면, (지휘체계의) 통합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본디 임시변통

.

)    회프너의 말대로, 분명히 이런 통합을 이루어내려면 공군, 병참조직, 대공포부대, 민방위 체계에 이르는 모든 조직들을 체계화하고 집중화시켜야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육군이나 해군이나 방공에 대해서 따로 따로 놀고 있었기에 비용이나 인력, 자원 면에서 낭비가 되었습니다.

이제 회프너의 취임으로 항만과 주요 지역들을 방어하는 데 돌려지던 400문 이상의 해군 방공포들이 본토 방공체계로 통합되었습니다.

  다시 1916년 12월 8일 내려진, 본토방공에 역점을 둔 전쟁성 훈령에 따라 이번에는 항공대 사령관 직속으로 본토 방공사령관(Kommandeur des Heimatluftschutzes) 직이 신설되었습니다.

이는 독일 본토의 대공포, 전투기 부대, 조기경보 부대 모두를 총괄하여 방공에 관한 업무 일반을 모두 관할했습니다.

   ========================================================================================================================== - To be Continue...?   Edward B. Westermann, Flak German Anti-aircraft defences 1941

1945, 14

40 pageHermann Cron,C. F. Colt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 of Battle pp 190

192Flak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 http://note100.egloos.com/5118502 ) SS-Panzergrenadier-Division ?G�tz von Berlichingen“)?[카를 쾨르너(Karl K�rner)] 격파 전적:102대최종 계급:친위대 원사소속 부대:제503 친위대 중전차 대대(Schwere SS-Panzer-Abteilung 503)[발타자르 볼(Balthasar Woll)] 격파 전적:100대 이상 (81대는 포수 시절 격파)최종 계급:친위대 상사소속 부대:제501 친위대 중전차 대대(Schwere SS-Panzer-Abteilung 501)[파울 에거(Paul Egger)] 격파 전적:113대최종 계급:친위대 중위소속 부대:제502 친위대 중전차 대대(Schwere SS-Panzer-Abteilung 502)[한스 잔드로크(Hans Sandrock)] 격파 전적:100대 이상 (123대의 전차 및 장갑차)최종 계급:소령소속 부대-공수 기갑 연대(Fallschirm-Panzer-Regiment)-제12 친위대 기갑연대(SS-Panzer Regiment 12)[헬무트 벤도르프(Helmut Wendorff)] 격파 전적:84대최종 계급:친위대 중위소속 부대:제101 친위대 중전차 대대(Schwere SS-Panzer-Abteilung 101)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 격파 전적:82대 이상최종 계급:친위대 상사소속 부대:제2 친위대 기갑여단(SS-Panzer-Regiment 2)[프란츠 베케(Franz B�ke)] 격파 전적:79대최종 계급:대령소속 부대:제503 중전차 대대(Schwere Panzer-Abteilung 503) 소속 제106 기갑여단(Panzer-Brigade106)[헤르만 빅스(Hermann Bix)] 격파 전적:75대 이상최종 계급:특무상사소속 부대: 제35 기갑연대(Panzer-Regiment 35)[한스 슈트리펠(Hans Strippel)] 격파 전적:70대최종 계급:소위소속 부대:제1 기갑사단(1. Panzer-Division) 소속 제1 기갑연대(Panzer-Regiment 1)[에밀 자이볼트(Emil Seibold)] 격파 전적:69대최종 계급:친위대 원사소속 부대:제2 친위대 기갑연대(SS-Panzer-Regiment 2)[후고 프리모치크(Hugo Primozic)] 격파 전적:68대최종 계급:중위소속 부대:제667 돌격포 대대(Sturmgesch�tz-Abteilung 667) [카를 브로만(Karl Brommann)] 격파 전적:66대최종 계급:친위대 소위소속 부대:제503 친위대 중전차 대대(Schwere SS-Panzer-Abteilung 503) [요제프 브란트너(Josef Brandner)] 격파 전적:61대최종 계급:소령소속 부대:제912 돌격포 여단(Sturmgesch�tz-Brigade 912)[한스 바보 폰 로어(Hans-Babo von Rohr)] 격파 전적:58대최종 계급:중위소속 부대:제25 기갑연대(Panzer-Regiment 25)[하인츠 클링(Heinz Kling)] 격파 전적:51대 이상최종 계급:친위대 소령소속 부대:제101 친위대 중전차 대대(Schwere SS-Panzer-Abteilung 101) [요한 뮐러(Johann M�ller)] 격파 전적:50대최종 계급:특무상사소속 부대:제502 중전차 대대(Schwere Panzer-Abteilung 502)[요제프 달마이어(Josef Dallmeier)] 격파 전적:50대최종 계급:중위소속 부대:제1183 대전차 중대(Panzerj�ger-Kompanie 1183)[발터 파이비히(Walter Feibig)] 격파 전적:50대 이상최종 계급:상사소속 부대:제301 돌격포 여단(Sturmgesch�tz-Brigade 301)[호르스트 크뢴케(Horst Kr�nke)] 격파 전적:50대최종 계급:소위소속 부대:제503-제505 중전차 대대(Schwere Panzer-Abteilung 503 & 505) [하인츠 크라머(Heinz Kramer)] 격파 전적:50대 이상최종 계급:소위소속 부대:제502 중전차 대대 (Schwere Panzer-Abteilung 502) [알프레도 카르파네토(Alfredo Carpaneto)] 격파 전적:50대 이상최종 계급:부사관소속 부대:제502 중전차 대대(Schwere Panzer-Abteilung 502)[파울 젱하스(Paul Senghas)] 격파 전적:49대최종 계급:친위대 대위소속 부대:제5 친위대 기갑연대(SS-Panzer-Regiment 5)[볼프강 폰 보스텔(Wolfgang von Bostell)] 격파 전적:48대최종 계급:중위소속 부대:제205 대전차 대대(Panzerj�ger-Abteilung 205) 소속 제1023 대전차 돌격포 중대(Panzerj�ger-Sturmgesch�tz-Kompanie 1023) [위르겐 브란트(J�rgen Brandt)] 격파 전적:47대최종 계급:친위대 상사소속 부대:제101 친위대 중전차 대대(Schwere SS-Panzer-Abteilung 101) [하인츠 도이치(Heinz Deutsch)] 격파 전적:44대최종 계급:예비군 중위소속 부대:제12 공수 돌격포 여단(Fallschirm-Sturmgesch�tz-Brigade 12) [알로이스 칼스(Alois Kalss)] 격파 전적:42대 이상 (1944년 7월 달성)최종 계급:친위대 대위소속 부대:제502 친위대 중전차 대대(Schwere SS-Panzer-Abteilung 502) [프리츠 아믈링(Fritz Amling)] 격파 전적:42대 이상최종 계급:특무상사소속 부대:제202 돌격포 여단(Sturmgesch�tz-Brigade 202)) [하인츠 샤르프(Heinz Scharf)] 격파 전적:40대 이상최종 계급:사관후보 특무상사(Fahnenjunker-Oberwachtmeister)소속 부대:제202 돌격포 여단(Sturmgesch�tz-Brigade 202) [발터 오베르로스캄프(Walter Oberloskamp)] 격파 전적:40대최종 계급:예비군 중위소속 부대:제667 돌격포 여단(Sturmgesch�tz-Brigade 667) [프리츠 타드예(Fritz Tadje)] 격파 전적:39대최종 계급:대위소속 부대:제190 돌격포 대대(Sturmgesch�tz-Abteilung 190) [루돌프 로이(Rudolf Roy)] 격파 전적:37대최종 계급:친위대 상사소속 부대: 제12 SS 대전차 대대(SS-Panzerj�ger-Abteilung 12) [고트발트 슈티어(Gottwald Stier)] 격파 전적:30대 이상최종 계급:상사소속 부대:제667 돌격포 여단(Sturmgesch�tz-Brigade 667) [리하르트 슈람(Richard Schram)] 격파 전적:30대최종 계급:특무상사소속 부대:제202 돌격포 여단(Sturmgesch�tz-Brigade 202) [쿠르트 자메트라이터(Kurt Sametreiter)] 격파 전적:24대최종 계급:친위대 상사소속 부대:제1 SS 대전차 대대(SS-Panzerj�ger-Abteilung 1) [펠릭스 아다모비치(Felix Adamowitsch)] 격파 전적:23대최종 계급:대위소속 부대:제244 돌격포 대대(Sturmgesch�tz-Abteilung 244) [프란츠 슈타우데거(Franz Staudegger)] 격파 전적:22대 이상최종 계급:친위대 상사소속 부대:제101 친위대 중전차 대대(Schwere SS-Panzer-Abteilung 101) [루돌프 폰 리벤트로프(Rudolf von Ribbentrop)] 격파 전적:14대최종 계급:친위대 대위소속 부대-아돌프 히틀러 기수친위대 제1 친위대 기갑사단(1. SS-Panzer-Division Leibstandarte-SS Adolf Hitler, LSAH)-제12 "히틀러 소년단" 친위대 기갑사단(12. SS-Panzer-Division ?Hitlerjugend“)정보당국 관계자는 “폭발한 잠수정은 일명 ‘비둘기’로 불리는 코스모스급 특수작전용 잠수정으로 정보사가 운용중”이라고 밝혔다.

코스모스급 특수작전용 잠수정은 10명 내외의 특수요원이 탑승해 적진 정찰 및 기뢰봉쇄 등의 특수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필요할 경우 대형함정도 폭파할 수 있는 무장이 가능하다.

코스모스급의 기준배수량은 약 70톤급 정도로 잠항심도는 150m이다.

 수중속도는 7노트로 기뢰부설이나 특수부대 상륙작전용 임무를 수행한다.

사고가 난 잠수정은 1988년 이탈리아 코스모스사 SX756/MG110 7척을 코리아 타코마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것 중 한대로 알려졌다.

 코스모스급 잠수정인 ‘비둘기’는 폭탄조작, 수중운반, 폭파 등은 물론 무귀환 훈련, 유사지역침투훈련, 탈출훈련 등을 이수한 특수요원들을 작전지역까지 이동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

 코스모스급 잠수정을 운용하는 ‘비둘기 편대’는 국군 정보사령부 제 912부대 소속인 것으로 전해졌다.

 코스모스급 잠수정이 ‘비둘기’라 불리는 이유는 모선에서 침투요원들을 태워 작전지역까지 이들을 이송하는 역할을 하는 데 따른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부상자 2명 가운데 1명은 위독한 상태”라며 “사망자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종자는 폭발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바다로 튕겨 나갔다.

 이 잠수정은 진해군항에 계류 중이었으며 수리작업을 앞두고 장비작동검사를 하다가 폭발사고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사상자와 실종자는 모두 장교와 부사관 등 간부들이다.

 사고가 난 잠수정을 운용하는 부대는 진해군항에서 사고 현장 수습작업과 함께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이며 실종자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군 관계자는 “사고는 다양한 장비를 시험하던 중 발생한 것으로 안다”며 “부상자 의식이 회복되는 대로 증언을 청취하는 등 사고 원인을 본격적으로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61226001&code=910302#csidx3211ff2c2f8f70a9571de22d449e46a 노도부대 설비호 스키부대(2사단수색대대의 전신)노도부대 설비호 스키부대(2사단수색대대의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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