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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태권도 감독



?? ????? ???? ??? ??? ?????....www.youtube.com 출근길 지각은 물론이고 차량을 버리고 걸어서 출근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한낮이 되어도 눈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전철은 초만원이었다.

모처럼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하얀 눈은 축복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 없는 여름나라에서의 타향 생활이 벌써 10년째다.

약속 장소는 그가 머물고 있는 수유리 인근. 그는 오전 일찍 전화해서, 자신은 괜찮은데 혹시 눈 때문에 길이 불편하면 약속 시간을 연기해도 된다고 말했다.

듣던 대로 그는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약속 장소를 정할 때도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배려하려 했지만 애써 거절하고 그가 있는 수유리로 가겠다고 했다.

  수유역에서 내리자마자 아기용품점부터 찾았다.

그러나 한때 여러 브랜드가 동네 구석구석까지 체인점을 개설했던 아기용품점은 이제 시장 안으로 깊숙이 숨어들어가 있었다.

저출산으로 인해서 아기용품점마저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아닐까. 주인아주머니의 추천을 받아 신생아 내복과 손싸개를 구입했다.

성별을 모르니 색상은 그날의 서울처럼 하얀색. 곧 태어날 그의 첫 아기에게 작은 선물이 되기를 바랐다.

*무명의 태국 태권도를 세계 3

4위로조용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녹음기를 꺼냈다.

인터뷰 때만 사용하는 인터뷰 전문(?) 녹음기다.

모양은 투박하지만 녹음을 풀기에 적합한 기능들이 내재된 제품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눈으로 마비된 그날의 도시처럼 기능들이 상실되었을 법한 구형이다.

집을 나서면서 90분짜리 녹음테이프 하나만 챙겼다.

1시간 30분 안에 인터뷰를 끝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인터뷰는 8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사전에 질문지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면 매우 난감했을 날이다.

그는 태국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74년 성남에서 태어났고 176cm 키에 몸무게는 70kg. 선수 시절에는 62kg 경량급으로 뛰었고 마지막 은퇴 경기였던 99년 전국체전에서는 67kg급으로 출전했다.

정작 현역 시절 자신은 국가대표로 뛰어보지 못했지만 무명의 태국 태권도를 세계 3

4위에 올려놓은 주인공이다.

그가 처음 태국 국가대표팀 지도자로 간 것은 2002년의 일이다.

전임 감독의 몇 개월 공석을 임시로 채워 줄 지도자로 가게 된 것이다.

태국에서는 그해 9월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까지만 선수들을 지도해줄 임시직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그 말고도 몇 명의 지원자가 더 있었다.

하지만 태국 현지에서 이루어진 인터뷰 때 보니 의욕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봐도 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태국 관계자가 그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태국에 부임하고 보니 팀이 없었습니다.

태국 국가대표 선수는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데, 월급이 체불되고 불화가 겹치면서 모두들 탈퇴한 것이죠. 부랴부랴 국가대표 선발전부터 치렀습니다.

30명을 뽑았는데 제가 15명, 태국 사무총장이 15명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무총장이 뽑은 15명의 선수들이었어요. 모두들 무에타이 선수들이었거든요.”그들 생각에는 태권도와 무에타이 모두 발차기 기술이 많으니 무에타이 선수들도 충분히 먹혀들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권도와 무에타이는 전혀 다른 종목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밑그림부터 그리기 위해서다.

당신들이 다 그려놓은 그림에 덧칠만 할 것이라면 왜 나를 불렀나? 나에게 선수 선발권을 주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초강수를 두었다.

결국 선수 선발 권한을 얻은 그는 모든 무에타이 선수를 잘라내고 태권도 선수들로만 팀을 꾸렸다.

하지만 1진 선수들은 그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탈퇴를 해버렸으니 2진 선수들만으로 꾸려진 대표팀이었다.

“다행히 얼마 뒤부터 소문을 들은 1진 선수들도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첫 대회는 8명의 선수를 데리고 출전한 아시아 선수권 대회였습니다.

부임한지 불과 3개월 만이었죠.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하고 유일하게 1명이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수도 실력보다는 대진 운이 좋았었죠. 1회전 탈락 선수 중에는 KO패도 있었습니다.

”그는 귀국 후 선수들의 체력 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시켰다.

운동 시간도 하루 4회로 늘렸고 선수들과 직접 대련을 뛰어주며 함께 훈련했다.

선수와 하나가 되어 미친 듯이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태국 국민성 때문인지 승부 근성은커녕 모두 순해 터졌다.

대회장에서 한국 선수들이 현란한 기술을 구사하면 신기한 듯 감탄사나 연발하고 있던 아이들이다.

속이 터졌지만 선수들에게 승리만 목표로 삼게 하지는 않았다.

기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국 선수들은 선후배는 물론이고 스승과 제자와의 끈끈한 유대감이 부족했다.

그래서 운동 못지않게 그가 강조한 것이 예의와 인사성이다.

그래서 지금도 대회장에 가면 다른 나라 대표팀 감독들에게 태국 선수 운동 잘한다는 이야기보다 예의 바르다는 칭찬을 더 기쁘게 생각한다.

그렇게 5개월을 훈련하고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어차피 임시직이었으니 그에게는 마지막 대회나 다름없었다.

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이 대회가 너희 인생의 마지막 게임이라고 생각해라! 나 역시 내 삶의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희나 나나 후회 없는 대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당시 1회전에서 탈락한 선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자 선수 두 명은 결승전까지 진출했습니다.

상대 선수가 모두 한국 선수였죠. 결국 한국 선수들에게 패해 은메달 두 개를 획득했습니다.

당시 협회에서는 동메달 하나만이 목표였습니다.

” 그날 저녁 남자 선수들이 소주 세 병을 사들고 숙소로 들어왔다.

성공적인 대회였지만 그와 선수들의 마지막 대회이기도 했으니 기나긴 여운이 남은 탓이다.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여자 선수가 소주 한 잔을 마시고 그렇게 말했다.

자신들과 더 있어주면 안 되느냐고, 더 가르쳐 줄 수는 없느냐고. 그날 그는 여자 선수들이 생리까지 숨겨가며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임시직에 불과했던 그에게 아무런 결정권은 없었다.

그가 선수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누가 감독으로 오든 열심히 운동해서 다음에는 더 큰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라’는 당부뿐이었다.

다행히 부산 아시안게임의 커다란 성공 덕분에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계약이 연장되었다.

그리고 태국 태권도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이라는 쾌거를 일궈냈다.

협회에서 준 기회와 열심히 가르친 그,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뛰어준 선수 등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후 태국 태권도는 국제 대회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개인 메달은 물론이고 단체전 우승도 여러 차례 거듭했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드디어 은메달까지 거머쥐었다.

2004년 동메달에 이어 2008년에는 은메달을 따냈으니 2012년 금메달에 대한 기대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혹시 태국 정부의 이런 기대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부담스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항상 금메달이었습니다.

금메달은 실력뿐 아니고 컨디션과 운도 맞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가난한 판잣집의 어린 시절그가 태권도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친구와 놀다가 헤어질 무렵 도장을 간다는 친구를 무심코 따라갔던 것이 그가 처음으로 태권도장에 가본 날이다.

친구는 이미 품띠였다.

사범은 친구를 따라 도장에 놀러온 그에게 몇 가지 동작을 시켜보았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범이 한 달을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돼지저금통에 모아두었던 돈을 털어서 어머니 몰래 두 달을 더 다녔다.

그리고 곧바로 ‘전국 어린이 태권왕 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도장 선수가 모자라서 다른 학생의 품띠를 빌려 차고 출전한 대회였다.

지금은 없어진 대회지만 당시만 해도 초등부에서는 가장 큰 전국대회였다.

그는 그 대회에서 3등을 차지했다.

체육관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예선에서 탈락했으니 그의 입상은 큰 이변이었다.

그가 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당시 태권도 명문 초등학교였던 서울의 신석초등학교 선수였다.

더욱이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우승 후보였다.

그의 친구 역시 한 번도 그 선수를 이겨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막강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 경기의 패배는 실력보다 편파 판정의 가능성이 높았단다.

어린 그가 기억하는 것은 매우 강하게 항의하던 사범의 모습이다.

이후 그가 도장에 다니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의 운동을 반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 성적이 남다를 정도로 그에게 공부에 대한 소질도 특별했기 때문이다.

3학년 때부터 내내 반장도 했고 6학년 때는 반장들이 모여서 투표하던 전교어린이회장으로 뽑힐 정도로 리더십도 있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때 잠시 다니는 취미 정도로 여기고 어렵지 않게 그의 도장 생활을 허락했다.

중학교는 태권도 명문으로 통하던 성남서중학교를 지원했다.

입학시험 결과는 전교 5등. 일상적인 절차대로 입학을 하자면 고스란히 등록금을 내야하지만 체육특기장학생으로 입학하면 3년 내내 등록금이 면제였다.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육특기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고등학교 역시 태권도 명문이었던 품생고등학교에서 3년 내내 장학생으로 다녔다.

결국 중고등학교 모두 등록금을 한 번도 내지 않고 졸업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7살 때 돌아가셨다.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낡은 앨범에 남은 사진 몇 장이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의 대부분이다.

오래도록 병원에 입원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들은 단칸 셋방에서마저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야산에 판자로 만든 어설픈 가건물 대여섯 채가 모여서 살았다.

“집에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산을 내려가면 언덕 아래 교회가 있었는데 누나는 거기까지 가서 볼일을 보고는 했죠. 저야 어리니까 집 근처 아무대서나 해결했었고요.”당시 ‘영세민’으로 등록되었던 그들에게는 매달 라면과 약간의 생활보조금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철거반이 들이닥치고는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천장이 없었진 날도 있고 벽이 없어진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한 철거는 하지 않았다.

아마 다들 어려운 살림이란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듯 싶다.

그래도 1년에 한두 번 단속이 심할 때는 집이 거의 부서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정작 창피했던 것은 친구들에게 들키는 일이었단다.

반장과 전교어린이회장을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던 그가 그렇게 가난하게 살 것이라고 상상하는 친구는 없었다.

하굣길 후문에서 나와 곧장 올라가면 그의 집이었지만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집으로 가지 못하고 엉뚱한 동네까지 걸어가서는 남의 집으로 들어가는 척 숨어 있다가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면 집까지 뛰어갔던 적도 있었다.

그의 누나 역시 그런 생활환경을 창피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 중학교 가정방문을 앞두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 끝에 남의 집에서 선생님 가장방문을 받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던 일이지만 그때 어머니는 딸에게만 숨겼을 뿐, 선생님에게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남매와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억척같이 일했다.

동시에 세 개의 직업을 같기도 했단다.

새벽에 우유를 배달하고 낮에 공장에서 일을 한 뒤에 저녁에는 남매와 시어머니에게 밥상을 차려준 후 두세 시간씩 파출부로 일을 하고 돌아오고는 했단다.

그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오로지 얼른 돈을 벌어 어머니 고생을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가 고1 무렵부터였다.

생활력 강한 어머니 덕분에 처음으로 방 두 칸짜리 전세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드디어 작은 빌라로 이사를 하며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

그는 ‘작아도 그때부터 불빛이 비추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학 4학년 때 체육관에서 보조사범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20만 원 정도 월급을 받았는데 봉투가 너무 두껍더라고요. 세상에 태어나서 첫 월급이었죠. 몇 번이나 세어보고 또 세어봤죠. 추운 겨울이었고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습니다.

집에 가려고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잔돈이 모자라는 겁니다.

월급봉투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아서 눈을 맞으며 여섯 정거장을 걸어서 집에 갔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것도 모르던 어머니는 20만 원이 든 아들의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그는 돈이란 것이 사람을 이렇게 따뜻하게 할 수 있구나 싶었단다.

학사장교로 군 생활을 하려던 그는 마지막 면접에서 독자獨子라는 이유 때문에 떨어졌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졸업 후 방위산업체 근무였다.

이때도 그는 늘 야근을 자처했고 월급봉투를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갖다드렸다.

당시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때였고 퇴근 후에는 늘 어머니 일손을 돕다가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그가 외국 대표팀 감독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스페인 대표팀 감독으로 있던 학교 선배가 선수들을 이끌고 한국에 전지훈련을 왔다가 모교를 방문했던 적이 있단다.

그는 그 모습에 반해서 학교가 끝난 후 무작정 감독과 선수들이 묵고 있던 성남의 한 호텔로 찾아갔다.

말이 선배지 당연 그 감독이 그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외국 대표팀 감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선배는 그의 이름을 묻고는 대견하다는 듯 큰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헤비급 출신의 덩치 큰 선배는 그에게 영어 공부 열심히 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이후 그는 무작정 영어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커다란 노트 다섯 권을 빼곡히 채우며 고등학교 3년 내내 단어들을 외웠다.

대학에 들어가서 운도 따랐다.

교수님은 운동만 시킨 것이 아니고 하루 1시간 영어 공부도 병행했다.

화이트보드에 그날 외워야 하는 영어 단어들이 줄줄이 적혔고 그것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갈 수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들 힘들어 하는데 그는 이미 고등학교 때 대부분 외운 단어들이었다.

영어 실력이 남달랐던 그에게 교수님도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첫 해외 지도자 생활은 태국이 아니다.

방위산업체 근무를 마치고 곧바로 바레인의 코치로 갈 수 있었다.

2000년, 당시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세 명이 지원을 했는데 한 명은 나이가 많아서 안 되고 다른 한 명은 영어를 못해서 불합격이었다.

결국 바레인 코치 자리는 그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첫 해외 코치 생활은 지독하게 외로웠다.

국제전화 요금도 비쌌고 컴퓨터 보급이 제대로 안 되어서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었다.

오로지 위로는 집에서 날아오는 편지. 편지가 한 통 날아오면 열두 번도 더 읽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하지만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힌 채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에게 답장이 왔는데, 공항에서 저를 보낸 다음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고 계신답니다.

아들에 대한 염원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너도 나약하게 여기서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의 내용을 읽고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일상을 보냈다.

일부러 하루 세 개의 학원을 끊기도 했단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한 달간의 휴가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차곡차곡 월급을 모은 1천만 원짜리 통장이 들려있었다.

어머니에게 치과 치료를 해드릴 생각으로 모은 돈이다.

당뇨가 있으셨던 어머니의 치아가 좋지 않아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임플란트는 그 돈으로 어림도 없었다.

결국 틀니를 할 예정이었다.

그날 저녁, 돈 많이 벌어왔으니 무엇이든 드시고 싶은 것을 드시라고 했더니 횟집에 가서 광어회와 백세주를 주문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외식이었다.

며칠 후 어머니는 건넌방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쓰러졌다.

119를 불러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뇌사 상태였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3일을 보내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누님은 첫 아이를 입신한지 8개월 무렵이었다.

평생 고생만 하다가 아들이 벌어온 통장으로 치과 치료도 받아보지 못했고, 조금만 더 참으면 볼 수 있었던 첫 손자도 보지 못한 채였다.

모든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밝아오듯 고단한 생활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유품을 정리하며 발견한 어머니의 일기장 앞에서 그는 또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가 바레인으로 떠난 다음날부터 그가 집에 도착하기 전날까지 차곡차곡 적힌 일기장이었다.

이후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바레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서 그에게 닥친 일들을 설명하고 바레인 코치를 사임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다 고등학교 은사님이 그를 불렀다.

더 이상 방황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도리가 아니니 태국으로 떠날 것을 권했다.

은사님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그는 그날 단돈 5만원을 들고 곧바로 강릉으로 향했다.

바다를 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정리하고 태국으로 떠났다.

태국의 제자들이 가끔 가족에 대해 물으면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7년 제자들을 이끌고 고국으로 전지훈련을 왔을 때였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어머니가 모셔진 성남으로 향했다.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감독님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고만 말했다.

아이들은 생소한 풍경에 어리둥절하다가 묘소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는 서서히 눈치를 채기 시작했단다.

그날 그는 제자들과 함께 어머니에게 백세주를 바쳤다.

늘 아이들에게 엄하기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아이들 앞에서 엉엉 울던 날이다.

‘감독님의 어머니를 소개할 테니 너희들도 어머니께 소원을 빌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고생만 했던 어머니, 그가 아이들을 만나기 몇 달 전에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앞에서 아이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그가 제자들을 이끌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그는 한국인이지만 태국 대표팀 감독이다.

그의 선수가 한국 선수와 싸울 때 그는 어떤 기분일까. “당연히 이겨야죠. 그게 제 임무입니다.

한국 선수는 세계 최강입니다.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선수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물론 한국 선수가 다른 나라 선수와 싸울 때는 한국 선수를 응원합니다.

”다시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태국 선수가 결승에 먼저 진출했고 준결승에서 한국 선수와 다른 나라 선수가 싸우고 있다면 어디를 응원할 것인가.“한국 선수가 져야죠.”눈물 가득하던 우리들의 눈가에 함박웃음이 하나 가득 걸렸다.

그의 탁월한 지도자 역량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뛰어난 조건으로 감독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과감히 거절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상대팀 감독으로 앉아 있으면 과연 그들이 잘 싸울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그래서 감독은 태국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만약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을 제의를 받는다면 어떨까.“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감독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하지만 제가 꿈꿔왔던 일은 아닙니다.

나를 만들어 준 것은 태국 선수들입니다.

저는 태국에서 감독직을 은퇴할 것이고 태국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그와의 인터뷰는 카페와 돼지부속 구이집과 민속주점을 전전하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어떨 때는 인터뷰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꾹꾹 참아야 했고, 가끔은 여전히 멈추지 않는 창밖의 눈만 엄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많은 술을 마신 것은 아니지만 알코올 기운이 돌면서 그가 남긴 말들의 상당 부분을 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있다.

언젠가 그가 태국 선수들을 이끌고 참가하는 경기에 반드시 응원을 가겠다는 결심이다.

그것이 지구 반대편 남미거나 동토의 땅 북유럽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때 나는 목청껏 그들을 응원할 것이고 이곳에 다 옮기지 못한 감동들을 나 혼자 뭉클한 가슴으로 끌어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글과 사진 박동식 출근길 지각은 물론이고 차량을 버리고 걸어서 출근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한낮이 되어도 눈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전철은 초만원이었다.

모처럼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하얀 눈은 축복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 없는 여름나라에서의 타향 생활이 벌써 10년째다.

약속 장소는 그가 머물고 있는 수유리 인근. 그는 오전 일찍 전화해서, 자신은 괜찮은데 혹시 눈 때문에 길이 불편하면 약속 시간을 연기해도 된다고 말했다.

듣던 대로 그는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약속 장소를 정할 때도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배려하려 했지만 애써 거절하고 그가 있는 수유리로 가겠다고 했다.

  수유역에서 내리자마자 아기용품점부터 찾았다.

그러나 한때 여러 브랜드가 동네 구석구석까지 체인점을 개설했던 아기용품점은 이제 시장 안으로 깊숙이 숨어들어가 있었다.

저출산으로 인해서 아기용품점마저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아닐까. 주인아주머니의 추천을 받아 신생아 내복과 손싸개를 구입했다.

성별을 모르니 색상은 그날의 서울처럼 하얀색. 곧 태어날 그의 첫 아기에게 작은 선물이 되기를 바랐다.

*무명의 태국 태권도를 세계 3

4위로조용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녹음기를 꺼냈다.

인터뷰 때만 사용하는 인터뷰 전문(?) 녹음기다.

모양은 투박하지만 녹음을 풀기에 적합한 기능들이 내재된 제품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눈으로 마비된 그날의 도시처럼 기능들이 상실되었을 법한 구형이다.

[태국 태권도 감독] 진실 또는 거짓..


집을 나서면서 90분짜리 녹음테이프 하나만 챙겼다.

1시간 30분 안에 인터뷰를 끝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인터뷰는 8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사전에 질문지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면 매우 난감했을 날이다.

그는 태국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74년 성남에서 태어났고 176cm 키에 몸무게는 70kg. 선수 시절에는 62kg 경량급으로 뛰었고 마지막 은퇴 경기였던 99년 전국체전에서는 67kg급으로 출전했다.

정작 현역 시절 자신은 국가대표로 뛰어보지 못했지만 무명의 태국 태권도를 세계 3

4위에 올려놓은 주인공이다.

그가 처음 태국 국가대표팀 지도자로 간 것은 2002년의 일이다.

전임 감독의 몇 개월 공석을 임시로 채워 줄 지도자로 가게 된 것이다.

태국에서는 그해 9월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까지만 선수들을 지도해줄 임시직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그 말고도 몇 명의 지원자가 더 있었다.

하지만 태국 현지에서 이루어진 인터뷰 때 보니 의욕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봐도 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태국 관계자가 그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태국에 부임하고 보니 팀이 없었습니다.

태국 국가대표 선수는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데, 월급이 체불되고 불화가 겹치면서 모두들 탈퇴한 것이죠. 부랴부랴 국가대표 선발전부터 치렀습니다.

30명을 뽑았는데 제가 15명, 태국 사무총장이 15명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무총장이 뽑은 15명의 선수들이었어요. 모두들 무에타이 선수들이었거든요.”그들 생각에는 태권도와 무에타이 모두 발차기 기술이 많으니 무에타이 선수들도 충분히 먹혀들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권도와 무에타이는 전혀 다른 종목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밑그림부터 그리기 위해서다.

당신들이 다 그려놓은 그림에 덧칠만 할 것이라면 왜 나를 불렀나? 나에게 선수 선발권을 주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초강수를 두었다.

결국 선수 선발 권한을 얻은 그는 모든 무에타이 선수를 잘라내고 태권도 선수들로만 팀을 꾸렸다.

하지만 1진 선수들은 그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탈퇴를 해버렸으니 2진 선수들만으로 꾸려진 대표팀이었다.

“다행히 얼마 뒤부터 소문을 들은 1진 선수들도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첫 대회는 8명의 선수를 데리고 출전한 아시아 선수권 대회였습니다.

부임한지 불과 3개월 만이었죠.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하고 유일하게 1명이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수도 실력보다는 대진 운이 좋았었죠. 1회전 탈락 선수 중에는 KO패도 있었습니다.

”그는 귀국 후 선수들의 체력 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시켰다.

운동 시간도 하루 4회로 늘렸고 선수들과 직접 대련을 뛰어주며 함께 훈련했다.

선수와 하나가 되어 미친 듯이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태국 국민성 때문인지 승부 근성은커녕 모두 순해 터졌다.

대회장에서 한국 선수들이 현란한 기술을 구사하면 신기한 듯 감탄사나 연발하고 있던 아이들이다.

속이 터졌지만 선수들에게 승리만 목표로 삼게 하지는 않았다.

기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국 선수들은 선후배는 물론이고 스승과 제자와의 끈끈한 유대감이 부족했다.

그래서 운동 못지않게 그가 강조한 것이 예의와 인사성이다.

그래서 지금도 대회장에 가면 다른 나라 대표팀 감독들에게 태국 선수 운동 잘한다는 이야기보다 예의 바르다는 칭찬을 더 기쁘게 생각한다.

그렇게 5개월을 훈련하고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어차피 임시직이었으니 그에게는 마지막 대회나 다름없었다.

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이 대회가 너희 인생의 마지막 게임이라고 생각해라! 나 역시 내 삶의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희나 나나 후회 없는 대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당시 1회전에서 탈락한 선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자 선수 두 명은 결승전까지 진출했습니다.

상대 선수가 모두 한국 선수였죠. 결국 한국 선수들에게 패해 은메달 두 개를 획득했습니다.

당시 협회에서는 동메달 하나만이 목표였습니다.

” 그날 저녁 남자 선수들이 소주 세 병을 사들고 숙소로 들어왔다.

성공적인 대회였지만 그와 선수들의 마지막 대회이기도 했으니 기나긴 여운이 남은 탓이다.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여자 선수가 소주 한 잔을 마시고 그렇게 말했다.

자신들과 더 있어주면 안 되느냐고, 더 가르쳐 줄 수는 없느냐고. 그날 그는 여자 선수들이 생리까지 숨겨가며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임시직에 불과했던 그에게 아무런 결정권은 없었다.

그가 선수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누가 감독으로 오든 열심히 운동해서 다음에는 더 큰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라’는 당부뿐이었다.

다행히 부산 아시안게임의 커다란 성공 덕분에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계약이 연장되었다.

그리고 태국 태권도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이라는 쾌거를 일궈냈다.

협회에서 준 기회와 열심히 가르친 그,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뛰어준 선수 등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후 태국 태권도는 국제 대회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개인 메달은 물론이고 단체전 우승도 여러 차례 거듭했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드디어 은메달까지 거머쥐었다.

2004년 동메달에 이어 2008년에는 은메달을 따냈으니 2012년 금메달에 대한 기대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혹시 태국 정부의 이런 기대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부담스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항상 금메달이었습니다.

금메달은 실력뿐 아니고 컨디션과 운도 맞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가난한 판잣집의 어린 시절그가 태권도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친구와 놀다가 헤어질 무렵 도장을 간다는 친구를 무심코 따라갔던 것이 그가 처음으로 태권도장에 가본 날이다.

친구는 이미 품띠였다.

사범은 친구를 따라 도장에 놀러온 그에게 몇 가지 동작을 시켜보았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범이 한 달을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돼지저금통에 모아두었던 돈을 털어서 어머니 몰래 두 달을 더 다녔다.

그리고 곧바로 ‘전국 어린이 태권왕 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도장 선수가 모자라서 다른 학생의 품띠를 빌려 차고 출전한 대회였다.

지금은 없어진 대회지만 당시만 해도 초등부에서는 가장 큰 전국대회였다.

그는 그 대회에서 3등을 차지했다.

체육관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예선에서 탈락했으니 그의 입상은 큰 이변이었다.

그가 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당시 태권도 명문 초등학교였던 서울의 신석초등학교 선수였다.

더욱이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우승 후보였다.

그의 친구 역시 한 번도 그 선수를 이겨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막강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 경기의 패배는 실력보다 편파 판정의 가능성이 높았단다.

어린 그가 기억하는 것은 매우 강하게 항의하던 사범의 모습이다.

이후 그가 도장에 다니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의 운동을 반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 성적이 남다를 정도로 그에게 공부에 대한 소질도 특별했기 때문이다.

3학년 때부터 내내 반장도 했고 6학년 때는 반장들이 모여서 투표하던 전교어린이회장으로 뽑힐 정도로 리더십도 있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때 잠시 다니는 취미 정도로 여기고 어렵지 않게 그의 도장 생활을 허락했다.

중학교는 태권도 명문으로 통하던 성남서중학교를 지원했다.

입학시험 결과는 전교 5등. 일상적인 절차대로 입학을 하자면 고스란히 등록금을 내야하지만 체육특기장학생으로 입학하면 3년 내내 등록금이 면제였다.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육특기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고등학교 역시 태권도 명문이었던 품생고등학교에서 3년 내내 장학생으로 다녔다.

결국 중고등학교 모두 등록금을 한 번도 내지 않고 졸업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7살 때 돌아가셨다.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낡은 앨범에 남은 사진 몇 장이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의 대부분이다.

오래도록 병원에 입원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들은 단칸 셋방에서마저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야산에 판자로 만든 어설픈 가건물 대여섯 채가 모여서 살았다.

“집에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산을 내려가면 언덕 아래 교회가 있었는데 누나는 거기까지 가서 볼일을 보고는 했죠. 저야 어리니까 집 근처 아무대서나 해결했었고요.”당시 ‘영세민’으로 등록되었던 그들에게는 매달 라면과 약간의 생활보조금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철거반이 들이닥치고는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천장이 없었진 날도 있고 벽이 없어진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한 철거는 하지 않았다.

아마 다들 어려운 살림이란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듯 싶다.

그래도 1년에 한두 번 단속이 심할 때는 집이 거의 부서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정작 창피했던 것은 친구들에게 들키는 일이었단다.

반장과 전교어린이회장을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던 그가 그렇게 가난하게 살 것이라고 상상하는 친구는 없었다.

하굣길 후문에서 나와 곧장 올라가면 그의 집이었지만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집으로 가지 못하고 엉뚱한 동네까지 걸어가서는 남의 집으로 들어가는 척 숨어 있다가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면 집까지 뛰어갔던 적도 있었다.

그의 누나 역시 그런 생활환경을 창피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 중학교 가정방문을 앞두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 끝에 남의 집에서 선생님 가장방문을 받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던 일이지만 그때 어머니는 딸에게만 숨겼을 뿐, 선생님에게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남매와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억척같이 일했다.

동시에 세 개의 직업을 같기도 했단다.

새벽에 우유를 배달하고 낮에 공장에서 일을 한 뒤에 저녁에는 남매와 시어머니에게 밥상을 차려준 후 두세 시간씩 파출부로 일을 하고 돌아오고는 했단다.

그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오로지 얼른 돈을 벌어 어머니 고생을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가 고1 무렵부터였다.

생활력 강한 어머니 덕분에 처음으로 방 두 칸짜리 전세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드디어 작은 빌라로 이사를 하며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

그는 ‘작아도 그때부터 불빛이 비추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학 4학년 때 체육관에서 보조사범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20만 원 정도 월급을 받았는데 봉투가 너무 두껍더라고요. 세상에 태어나서 첫 월급이었죠. 몇 번이나 세어보고 또 세어봤죠. 추운 겨울이었고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습니다.

집에 가려고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잔돈이 모자라는 겁니다.

월급봉투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아서 눈을 맞으며 여섯 정거장을 걸어서 집에 갔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것도 모르던 어머니는 20만 원이 든 아들의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말을 잇지 못했다.

[태국 태권도 감독] 노하우를 알려주마



그때 그는 돈이란 것이 사람을 이렇게 따뜻하게 할 수 있구나 싶었단다.

학사장교로 군 생활을 하려던 그는 마지막 면접에서 독자獨子라는 이유 때문에 떨어졌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졸업 후 방위산업체 근무였다.

이때도 그는 늘 야근을 자처했고 월급봉투를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갖다드렸다.

당시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때였고 퇴근 후에는 늘 어머니 일손을 돕다가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그가 외국 대표팀 감독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스페인 대표팀 감독으로 있던 학교 선배가 선수들을 이끌고 한국에 전지훈련을 왔다가 모교를 방문했던 적이 있단다.

그는 그 모습에 반해서 학교가 끝난 후 무작정 감독과 선수들이 묵고 있던 성남의 한 호텔로 찾아갔다.

말이 선배지 당연 그 감독이 그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외국 대표팀 감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선배는 그의 이름을 묻고는 대견하다는 듯 큰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헤비급 출신의 덩치 큰 선배는 그에게 영어 공부 열심히 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이후 그는 무작정 영어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커다란 노트 다섯 권을 빼곡히 채우며 고등학교 3년 내내 단어들을 외웠다.

대학에 들어가서 운도 따랐다.

교수님은 운동만 시킨 것이 아니고 하루 1시간 영어 공부도 병행했다.

화이트보드에 그날 외워야 하는 영어 단어들이 줄줄이 적혔고 그것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갈 수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들 힘들어 하는데 그는 이미 고등학교 때 대부분 외운 단어들이었다.

영어 실력이 남달랐던 그에게 교수님도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첫 해외 지도자 생활은 태국이 아니다.

방위산업체 근무를 마치고 곧바로 바레인의 코치로 갈 수 있었다.

2000년, 당시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세 명이 지원을 했는데 한 명은 나이가 많아서 안 되고 다른 한 명은 영어를 못해서 불합격이었다.

결국 바레인 코치 자리는 그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첫 해외 코치 생활은 지독하게 외로웠다.

국제전화 요금도 비쌌고 컴퓨터 보급이 제대로 안 되어서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었다.

오로지 위로는 집에서 날아오는 편지. 편지가 한 통 날아오면 열두 번도 더 읽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하지만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힌 채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다.

“어머니에게 답장이 왔는데, 공항에서 저를 보낸 다음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고 계신답니다.

아들에 대한 염원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너도 나약하게 여기서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의 내용을 읽고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일상을 보냈다.

일부러 하루 세 개의 학원을 끊기도 했단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한 달간의 휴가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차곡차곡 월급을 모은 1천만 원짜리 통장이 들려있었다.

어머니에게 치과 치료를 해드릴 생각으로 모은 돈이다.

당뇨가 있으셨던 어머니의 치아가 좋지 않아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임플란트는 그 돈으로 어림도 없었다.

결국 틀니를 할 예정이었다.

그날 저녁, 돈 많이 벌어왔으니 무엇이든 드시고 싶은 것을 드시라고 했더니 횟집에 가서 광어회와 백세주를 주문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외식이었다.

며칠 후 어머니는 건넌방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쓰러졌다.

119를 불러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뇌사 상태였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3일을 보내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누님은 첫 아이를 입신한지 8개월 무렵이었다.

평생 고생만 하다가 아들이 벌어온 통장으로 치과 치료도 받아보지 못했고, 조금만 더 참으면 볼 수 있었던 첫 손자도 보지 못한 채였다.

모든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밝아오듯 고단한 생활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유품을 정리하며 발견한 어머니의 일기장 앞에서 그는 또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가 바레인으로 떠난 다음날부터 그가 집에 도착하기 전날까지 차곡차곡 적힌 일기장이었다.

이후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바레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서 그에게 닥친 일들을 설명하고 바레인 코치를 사임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다 고등학교 은사님이 그를 불렀다.

더 이상 방황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도리가 아니니 태국으로 떠날 것을 권했다.

은사님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그는 그날 단돈 5만원을 들고 곧바로 강릉으로 향했다.

바다를 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정리하고 태국으로 떠났다.

태국의 제자들이 가끔 가족에 대해 물으면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7년 제자들을 이끌고 고국으로 전지훈련을 왔을 때였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어머니가 모셔진 성남으로 향했다.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감독님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고만 말했다.

아이들은 생소한 풍경에 어리둥절하다가 묘소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는 서서히 눈치를 채기 시작했단다.

그날 그는 제자들과 함께 어머니에게 백세주를 바쳤다.

늘 아이들에게 엄하기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아이들 앞에서 엉엉 울던 날이다.

‘감독님의 어머니를 소개할 테니 너희들도 어머니께 소원을 빌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고생만 했던 어머니, 그가 아이들을 만나기 몇 달 전에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앞에서 아이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그가 제자들을 이끌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그는 한국인이지만 태국 대표팀 감독이다.

그의 선수가 한국 선수와 싸울 때 그는 어떤 기분일까. “당연히 이겨야죠. 그게 제 임무입니다.

한국 선수는 세계 최강입니다.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선수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물론 한국 선수가 다른 나라 선수와 싸울 때는 한국 선수를 응원합니다.

”다시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태국 선수가 결승에 먼저 진출했고 준결승에서 한국 선수와 다른 나라 선수가 싸우고 있다면 어디를 응원할 것인가.“한국 선수가 져야죠.”눈물 가득하던 우리들의 눈가에 함박웃음이 하나 가득 걸렸다.

그의 탁월한 지도자 역량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뛰어난 조건으로 감독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과감히 거절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상대팀 감독으로 앉아 있으면 과연 그들이 잘 싸울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그래서 감독은 태국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만약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을 제의를 받는다면 어떨까.“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 감독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하지만 제가 꿈꿔왔던 일은 아닙니다.

나를 만들어 준 것은 태국 선수들입니다.

저는 태국에서 감독직을 은퇴할 것이고 태국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그와의 인터뷰는 카페와 돼지부속 구이집과 민속주점을 전전하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어떨 때는 인터뷰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꾹꾹 참아야 했고, 가끔은 여전히 멈추지 않는 창밖의 눈만 엄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많은 술을 마신 것은 아니지만 알코올 기운이 돌면서 그가 남긴 말들의 상당 부분을 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있다.

언젠가 그가 태국 선수들을 이끌고 참가하는 경기에 반드시 응원을 가겠다는 결심이다.

그것이 지구 반대편 남미거나 동토의 땅 북유럽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때 나는 목청껏 그들을 응원할 것이고 이곳에 다 옮기지 못한 감동들을 나 혼자 뭉클한 가슴으로 끌어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글과 사진 박동식>  운명은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그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할 지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 같은 인연으로 비롯된 그의 삶은 가난 탓에 더 탄탄하고 예리해 졌다.

오랜 시간 동안 곤궁함이 있어 집중할 수 있었고,어디서건 희망의 끈도 더 거세게 움켜 쥐었다.

  무에타이의 나라 태국의 국가대표 태권도 감독 최영석(37).태국 생활 만 9년 째인 그는 태국의 유명인사다.

 태국 10대들이 `동방신기’ `소녀시대’ 같은 한류 K-POP스타에 발을 굴러 열광한다면태국 지도층과 나이 깨나 먹은 사람치고 코최(최영석의 태국 닉네임)를 모르는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 150위권이던 태국 태권도를 4위로 점프시켰다.

10년 동안 태국의 태권도 인구가 5만 명에서 100만 명이 됐는데 그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누가 부인하랴? `타이거 최’라고 불리기도 하는 최영석은 2년에 한번 꼴로 태국을 들었나 놨다 한다.

태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다고 수식이 적확하다.

 태국 반정부 시위대 중정치색이 완전히 달라 사사건건 부딪치는 `레드셔츠’, `옐로셔츠’라는 게 있지만이들 조차도 그에게 만은 동시에 환호를 보내고 감동한다.

 이쯤되면 최영석은 태국인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유일한 외국인 인 셈이다.

 2002년 월드컵의 히딩크를 떠올리면 딱 맞겠다.

 그는 태국 왕실의 훈장을 받고,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스포츠 대상을 2번씩이나 받았다.

 태권도의 종주국 대한민국.최영석 감독은 2011년 5월 1일부터 한국에서 시작되는 경주 세계태권도 선수권대회12체급에 선수들을 출전시킨다.

 또 한번 결전을 준비중인 그를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태국식당에서 만나 후다닥 번개인터뷰를 했다.

  -한국에서 개최되는 세계 선수권대회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부담된다.

전쟁터의 장수처럼 긴장도 되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지도자는부담을 갖고 사는 게 아닌가. 세계 선수권대회에선 아직까지 태국이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당연히 금메달 수확이 목표다.

 -지난해 태국에서 본 광조우 아시안게임 흥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태국은 태권도에서 처음으로 기다리던 금메달이 나왔다.

19세 소녀 사라타라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 정말 난리가 났다.

중국 현지에서도 알고 있었나?@현장에서는 물론 돌아와서도 신문, 방송에 출연하느라 정신 없었다.

국제대회에선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 동메달 4개로, 11명이 출전해 8명이 메달을 땄다.

태권도로만 본다면 광조우에서 중국, 한국, 이란에 이어 태국이 4위였다.

    -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태국 대표팀의 한국코치가 개인사정으로 귀국하게 돼8개월간 계약직 코치를 맡게 됐다.

당시 바레인에서 코치로 있었는데, 막 계약이 끝날 때 쯤이었다.

  태국으로 오게 된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대타였던 셈이다.

2월에 코치 직을 맡고, 10월에 대회가 열렸는데 은메달 2개를 땄다.

태국으로선 당시 최고 성적이었다.

`죽도록 가르쳐 보자’는 생각 밖엔 한 것이 없다.

 -그 뒤부터 승승장구다.

@2년 뒤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여자 -49kg에서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에 출전한 것도 처음이지만 메달을 딴 것은 전례 없던 일이었다.

  사실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는 것 자체가 힘들다.

남-녀 각각 2체급씩만 출전할 수 있는데, 2004년 올림픽에서 태국이 4장의 올림픽 출전 티켓을 확보한 것 하나만 해도 큰 사건이었다.

4년 뒤인 베이징 올림픽에선 역시 여자 -49kg에서 은메달을 땄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목표다.

 -마치 계단을 밟듯이 국제대회에서 계속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비결이 있는가?@훈련 량을 늘리고, 같은 훈련도 집중해서 하는 것이다.

선수들은 훈련한 게 억울해서 맨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훈련이 강하다 보면 선수들 불만도 나오겠다.

@고된 훈련이지만 속속 드러나는 성적결과를 보고, 인정하며 열심히 따라온다.

 -하루에 훈련을 얼마나 시킨단 말인가?@태국은 국가대표라고 해도 수업은 빠질 수 없다.

경기출전 등으로 불가피하게 결석하면  이후에 리포트라도 꼭 내야 한다.

  훈련은 수업시간을 피해 아침 저녁으로 한다.

보통 오전 6시부터 2시간, 오후 5시부터 3시간 동안 하루 5시간의 훈련을 기본으로 한다.

 일요일만 빼곤 매일 한다.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한데.@훈련할 때와 경기할 때가 완전히 다르다.

  경기를 앞두고는 선수들과 장난치고 웃기기도 한다.

  하지만 훈련 때는 물 한 모금, 화장실 가는 것 조차 다 허락을 받도록 한다.

  새벽 운동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돌려보낸다.

내가 감독이라고 해서 훈련시간에 늦는 일은 없다.

나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훈련 때 엄하게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분위기가 형성되고 체계가 쌓였다.

운동은 못해도 약속을 지키고 인성을 닦으라는 말을 한다.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 다른 팀으로부터 태국선수들이 착하고 인사성도 바르다는 칭찬을 많이 받는다.

 -대표선수 선발에 전권을 쥐고 있다고 들었다.

@2006년 이후부터다.

 새로운 대표팀을 선발해 기존선수와 경합해 선발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대표선수가 90% 방콕에서 선발됐지만 이젠 전 지역에서 고루 선발될 만큼 폭이 두꺼워졌다.

  한국처럼 태국도 국가대표가 되기가 그만큼 힘들어 졌다.

일단 대표로 선발되면 지방대학의 경우 방콕으로 전학을 시켜주고, 합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원을 해주고 있다.

 -태권도 선수가 되려는 태국 학생들의 열기는?@아마 10년쯤 뒤면 태국이 한국을 역전할 지도 모르겠다.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관심이 상당히 늘었다.

악착 같은 면, 헝그리 정신만큼은 태국이 한국을 앞선다.

 -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화려한 수상경력이 있는데, 한 해에 딱 하나씩만 소개해 달라.@2004년 왕실훈장을 받았고, 2005년 태국 외무부 장관이 주는 공로상, 2006년엔 총리상, 2007년엔 체육들이 선정한 최우수 지도자상, 2008년엔 씨암낄라 스포츠대상 및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2009년엔 태국 체육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0년인 지난해는 씨암낄라 스포츠대상을 또 받았는데, 이 상을 받은 외국인도 없지만, 2번 받은 사람은 더더욱 없어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로부터 들었다.

태국사람들이 그토록 대단하게 여기는 상인데, 시상식장에 갔더니 막상 나 외에 한국인은 없었던 것 같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나?@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던 야오와파라는 여자선수다.

집안이 가난했다.

태권도를 하기엔 신체조건도 안 좋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단한 투지의 소유자였다.

나와 직접 대련해서 입술이 깨지고, 치아가 흔들린 적도 있었는데,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다시 대련을 하자고 했다.

  이 친구 때문에 태국에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됐으니, 어쩌면 나의 은인이다.

어렵게 자란 과정도 나와 비슷했다.

2008년 족막염으로 은퇴하고 지금은 국영방송 TV의 스포츠 해설가로 변신했다.

 -태국 국립대학의 전임교수직도 추대 받았다고 들었는데.@올해부터 카세삿대학 스포츠 과학부에서 전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3월부터 일주일에 두번씩 강의한다.

강의당 수강생은 40명쯤 된다.

스포츠과학부 안에 무도학과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사실 메인은 태권도다.

  한국 교수님들의 도움을 받아 커리큘럼을 직접 짜서 강의하고 있다.

지난해 광조우 아시안게임 여자 금메달리스트가 카세삿대학 학생이다.

태국 정부에서 태권도 감독 급여를 받고 있으니, 국립대학인 만큼 이중지급이 어려워 나 때문에 관련 법을 개정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최감독과 태권도의 인연을 소개해 달라.@초등학교 6학년 때 유단자 친구를 따라 도장에 갔다가 태권도를 하게 됐다.

3

4개월 훈련했을 무렵에 전국대회가 있었는데 한 명이 빠져 대타로 출전하게 돼 동메달을 땄다.

  태국 국가대표 감독도 `대타 코치’에서 시작했듯, 태권도 입문은 대타로 나가 홈런을 친 셈이었다.

그 덕에 성남 서 중학교를 체육특로 입학했다.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석차가 전교 5등 안에 든 적도 있다.

공부를 잘 했다.

대학교 졸업까지 성남을 떠나지 않아 성남 풍생고, 성남에 있는 경원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집안이 어려웠는데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면제받고 다녔다.

강원대에서 체육학 석사를 받았고, 카세삿대학에서 스포츠심리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 중에 있다.

 -어린 시절은?@집안이 어려웠다.

아버지가 내가 7세 때 돌아가셨다.

  위로 누나가 한 분 있는데, 어머니는  낮에는 공장일, 저녁엔 파출부 일을 하시면서 남매를 키웠다.

그것도 친구 집에서 파출부를 하셨는데,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이다.

 86 아시안 게임의 육상스타 임춘애씨가 초등학교 3년 선배다.

신문에 라면 먹고 뛰었다고 나왔는데, 우리 집은 훨씬 더 가난했다.

어머니의 꿈은 아들이 교수가 되는 것을 보는 거였다.

태국에 오기 직전인 2002년 돌아가셨다.

29살 때 바레인에서 코치를 하다 1년 반만에 휴가를 받고 한국을 왔는데 그 때 쓰러져 돌아가셨다.

이제 교수가 됐으니, 어머니 한을 풀어드린 셈인데, 자식 덕 좀 보셨으면 좋으련만, 이젠 안 계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태국에 오면서 더욱 지독히 선수들을 가리 친 계기가 됐다.

 -태권도 선수로서는 어땠나?@전국대회 1등은 해봤지만 국가대표는 못해봤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어렵다.

 -태국에서 영어로 박사학위를 밟고 있으며, 태국어로도 인터뷰를 잘 하던데.@외국에서 지도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돈을 더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까지도 산(山)의 가건물 같은 데서 살았다.

학원 다닐 돈이 없어 학턱은 못 가봤지만 영어공부는 열심히 했다.

태국어는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선수들과 운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 같다.

 -아내와 2세 된 아들이 있는데, 태국생활은 어떤가?@아직 골프 라운딩을 한 적이 없다.

거의 학교, 훈련장을 오가는 날의 연속이다.

아내를 위해 가끔씩 파타야 휴양지를 갔다 오곤 하는데, 가서 모자란 잠을 자는 것 뿐이다.

(웃음) -태국에서 많은 것을 이뤘다.

또 다른 꿈이 있는가?@태권도로는 올림픽에서 태국이 금메달을 따는 것이 첫째 목표다.

경기외적인 면에서는 태권도가 태국에 뿌리내려 보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겠지만, 그 작은 디딤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국에서 엄청난 대우를 해준다고 들었다.

아파트도 사줬다고 하던데.@외국 지도자로는 최고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파트는 내 돈 주고 산 것인데.. -태국 외 다른 나라에서 엄청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 종종 태국 언론에 보도되는데.@다른 나라에서 몇 배의 연봉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늘 태국에 감사하며 산다.

2002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해였는데, 그 해부터 이후까지 태국에서 많은 것을 이뤘다.

태국 사람들은  외국인이라고 차별 두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 줬으며, 과분한 사랑을 주었다.

10년 가까이 가리킨 제자들을 상대로 타국에서 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우선 부담이 되고, 태국인들을 대했던 그 불꽃 같은 열정을 가지지 못할 것이 두렵단다.

  길가 식당에서 한국의 김치라 할 수 있는 `쏨땀’과 밥 한 공기, 닭다리 몇 개를 시켰지만 둘 다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태국에서 겪고 있는 그의 인생역전을 말하고 들을 시간이 꿈결처럼 흘러만 갔다.

 성적과 결과로만 말해주는 스포츠. 최영석은 땀과 노력만 믿는 사람이었다.

선수는 물론 자신에 대해서도 혹독할 정도로 몰아 부치는 삶.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그 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담금질하고 있었다.

 이국 땅 태국에서 그가 쌓아 올린 화려한 프로필의 이면엔 같은 부피, 같은 무게 만큼의 고통과 번민이 자리잡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오기의 한국인만이 견뎌내고 가능한 일이다.

최영석은 한국인의 만만찮은 근성과 혼을 `만만디’ 태국에 심고 있었다.

태권도는 사실 그 다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by Harry. 한-태교류센터(KTCC) 대표 이사>                 >  운명은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그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할 지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 같은 인연으로 비롯된 그의 삶은 가난 탓에 더 탄탄하고 예리해 졌다.

오랜 시간 동안 곤궁함이 있어 집중할 수 있었고,어디서건 희망의 끈도 더 거세게 움켜 쥐었다.

  무에타이의 나라 태국의 국가대표 태권도 감독 최영석(37).태국 생활 만 9년 째인 그는 태국의 유명인사다.

 태국 10대들이 `동방신기’ `소녀시대’ 같은 한류 K-POP스타에 발을 굴러 열광한다면태국 지도층과 나이 깨나 먹은 사람치고 코최(최영석의 태국 닉네임)를 모르는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 150위권이던 태국 태권도를 4위로 점프시켰다.

10년 동안 태국의 태권도 인구가 5만 명에서 100만 명이 됐는데 그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누가 부인하랴? `타이거 최’라고 불리기도 하는 최영석은 2년에 한번 꼴로 태국을 들었나 놨다 한다.

태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다고 수식이 적확하다.

 태국 반정부 시위대 중정치색이 완전히 달라 사사건건 부딪치는 `레드셔츠’, `옐로셔츠’라는 게 있지만이들 조차도 그에게 만은 동시에 환호를 보내고 감동한다.

 이쯤되면 최영석은 태국인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유일한 외국인 인 셈이다.

 2002년 월드컵의 히딩크를 떠올리면 딱 맞겠다.

 그는 태국 왕실의 훈장을 받고,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스포츠 대상을 2번씩이나 받았다.

 태권도의 종주국 대한민국.최영석 감독은 2011년 5월 1일부터 한국에서 시작되는 경주 세계태권도 선수권대회12체급에 선수들을 출전시킨다.

 또 한번 결전을 준비중인 그를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태국식당에서 만나 후다닥 번개인터뷰를 했다.

  -한국에서 개최되는 세계 선수권대회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부담된다.

전쟁터의 장수처럼 긴장도 되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지도자는부담을 갖고 사는 게 아닌가. 세계 선수권대회에선 아직까지 태국이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당연히 금메달 수확이 목표다.

 -지난해 태국에서 본 광조우 아시안게임 흥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태국은 태권도에서 처음으로 기다리던 금메달이 나왔다.

19세 소녀 사라타라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 정말 난리가 났다.

중국 현지에서도 알고 있었나?@현장에서는 물론 돌아와서도 신문, 방송에 출연하느라 정신 없었다.

국제대회에선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 동메달 4개로, 11명이 출전해 8명이 메달을 땄다.

태권도로만 본다면 광조우에서 중국, 한국, 이란에 이어 태국이 4위였다.

    -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태국 대표팀의 한국코치가 개인사정으로 귀국하게 돼8개월간 계약직 코치를 맡게 됐다.

당시 바레인에서 코치로 있었는데, 막 계약이 끝날 때 쯤이었다.

  태국으로 오게 된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대타였던 셈이다.

2월에 코치 직을 맡고, 10월에 대회가 열렸는데 은메달 2개를 땄다.

태국으로선 당시 최고 성적이었다.

`죽도록 가르쳐 보자’는 생각 밖엔 한 것이 없다.

 -그 뒤부터 승승장구다.

@2년 뒤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여자 -49kg에서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에 출전한 것도 처음이지만 메달을 딴 것은 전례 없던 일이었다.

  사실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는 것 자체가 힘들다.

남-녀 각각 2체급씩만 출전할 수 있는데, 2004년 올림픽에서 태국이 4장의 올림픽 출전 티켓을 확보한 것 하나만 해도 큰 사건이었다.

4년 뒤인 베이징 올림픽에선 역시 여자 -49kg에서 은메달을 땄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목표다.

 -마치 계단을 밟듯이 국제대회에서 계속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비결이 있는가?@훈련 량을 늘리고, 같은 훈련도 집중해서 하는 것이다.

선수들은 훈련한 게 억울해서 맨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훈련이 강하다 보면 선수들 불만도 나오겠다.

@고된 훈련이지만 속속 드러나는 성적결과를 보고, 인정하며 열심히 따라온다.

 -하루에 훈련을 얼마나 시킨단 말인가?@태국은 국가대표라고 해도 수업은 빠질 수 없다.

경기출전 등으로 불가피하게 결석하면  이후에 리포트라도 꼭 내야 한다.

  훈련은 수업시간을 피해 아침 저녁으로 한다.

보통 오전 6시부터 2시간, 오후 5시부터 3시간 동안 하루 5시간의 훈련을 기본으로 한다.

 일요일만 빼곤 매일 한다.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한데.@훈련할 때와 경기할 때가 완전히 다르다.

  경기를 앞두고는 선수들과 장난치고 웃기기도 한다.

  하지만 훈련 때는 물 한 모금, 화장실 가는 것 조차 다 허락을 받도록 한다.

  새벽 운동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돌려보낸다.

내가 감독이라고 해서 훈련시간에 늦는 일은 없다.

나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훈련 때 엄하게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분위기가 형성되고 체계가 쌓였다.

운동은 못해도 약속을 지키고 인성을 닦으라는 말을 한다.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 다른 팀으로부터 태국선수들이 착하고 인사성도 바르다는 칭찬을 많이 받는다.

 -대표선수 선발에 전권을 쥐고 있다고 들었다.

@2006년 이후부터다.

 새로운 대표팀을 선발해 기존선수와 경합해 선발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대표선수가 90% 방콕에서 선발됐지만 이젠 전 지역에서 고루 선발될 만큼 폭이 두꺼워졌다.

  한국처럼 태국도 국가대표가 되기가 그만큼 힘들어 졌다.

일단 대표로 선발되면 지방대학의 경우 방콕으로 전학을 시켜주고, 합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원을 해주고 있다.

 -태권도 선수가 되려는 태국 학생들의 열기는?@아마 10년쯤 뒤면 태국이 한국을 역전할 지도 모르겠다.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관심이 상당히 늘었다.

악착 같은 면, 헝그리 정신만큼은 태국이 한국을 앞선다.

 -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화려한 수상경력이 있는데, 한 해에 딱 하나씩만 소개해 달라.@2004년 왕실훈장을 받았고, 2005년 태국 외무부 장관이 주는 공로상, 2006년엔 총리상, 2007년엔 체육들이 선정한 최우수 지도자상, 2008년엔 씨암낄라 스포츠대상 및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2009년엔 태국 체육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0년인 지난해는 씨암낄라 스포츠대상을 또 받았는데, 이 상을 받은 외국인도 없지만, 2번 받은 사람은 더더욱 없어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로부터 들었다.

태국사람들이 그토록 대단하게 여기는 상인데, 시상식장에 갔더니 막상 나 외에 한국인은 없었던 것 같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나?@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던 야오와파라는 여자선수다.

집안이 가난했다.

태권도를 하기엔 신체조건도 안 좋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단한 투지의 소유자였다.

나와 직접 대련해서 입술이 깨지고, 치아가 흔들린 적도 있었는데,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다시 대련을 하자고 했다.

  이 친구 때문에 태국에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됐으니, 어쩌면 나의 은인이다.

어렵게 자란 과정도 나와 비슷했다.

2008년 족막염으로 은퇴하고 지금은 국영방송 TV의 스포츠 해설가로 변신했다.

 -태국 국립대학의 전임교수직도 추대 받았다고 들었는데.@올해부터 카세삿대학 스포츠 과학부에서 전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3월부터 일주일에 두번씩 강의한다.

강의당 수강생은 40명쯤 된다.

스포츠과학부 안에 무도학과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사실 메인은 태권도다.

  한국 교수님들의 도움을 받아 커리큘럼을 직접 짜서 강의하고 있다.

지난해 광조우 아시안게임 여자 금메달리스트가 카세삿대학 학생이다.

태국 정부에서 태권도 감독 급여를 받고 있으니, 국립대학인 만큼 이중지급이 어려워 나 때문에 관련 법을 개정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최감독과 태권도의 인연을 소개해 달라.@초등학교 6학년 때 유단자 친구를 따라 도장에 갔다가 태권도를 하게 됐다.

3

4개월 훈련했을 무렵에 전국대회가 있었는데 한 명이 빠져 대타로 출전하게 돼 동메달을 땄다.

  태국 국가대표 감독도 `대타 코치’에서 시작했듯, 태권도 입문은 대타로 나가 홈런을 친 셈이었다.

그 덕에 성남 서 중학교를 체육특로 입학했다.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석차가 전교 5등 안에 든 적도 있다.

공부를 잘 했다.

대학교 졸업까지 성남을 떠나지 않아 성남 풍생고, 성남에 있는 경원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집안이 어려웠는데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면제받고 다녔다.

강원대에서 체육학 석사를 받았고, 카세삿대학에서 스포츠심리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 중에 있다.

 -어린 시절은?@집안이 어려웠다.

아버지가 내가 7세 때 돌아가셨다.

  위로 누나가 한 분 있는데, 어머니는  낮에는 공장일, 저녁엔 파출부 일을 하시면서 남매를 키웠다.

그것도 친구 집에서 파출부를 하셨는데,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이다.

 86 아시안 게임의 육상스타 임춘애씨가 초등학교 3년 선배다.

신문에 라면 먹고 뛰었다고 나왔는데, 우리 집은 훨씬 더 가난했다.

어머니의 꿈은 아들이 교수가 되는 것을 보는 거였다.

태국에 오기 직전인 2002년 돌아가셨다.

29살 때 바레인에서 코치를 하다 1년 반만에 휴가를 받고 한국을 왔는데 그 때 쓰러져 돌아가셨다.

이제 교수가 됐으니, 어머니 한을 풀어드린 셈인데, 자식 덕 좀 보셨으면 좋으련만, 이젠 안 계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태국에 오면서 더욱 지독히 선수들을 가리 친 계기가 됐다.

 -태권도 선수로서는 어땠나?@전국대회 1등은 해봤지만 국가대표는 못해봤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어렵다.

 -태국에서 영어로 박사학위를 밟고 있으며, 태국어로도 인터뷰를 잘 하던데.@외국에서 지도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돈을 더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까지도 산(山)의 가건물 같은 데서 살았다.

학원 다닐 돈이 없어 학턱은 못 가봤지만 영어공부는 열심히 했다.

태국어는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선수들과 운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 같다.

 -아내와 2세 된 아들이 있는데, 태국생활은 어떤가?@아직 골프 라운딩을 한 적이 없다.

거의 학교, 훈련장을 오가는 날의 연속이다.

아내를 위해 가끔씩 파타야 휴양지를 갔다 오곤 하는데, 가서 모자란 잠을 자는 것 뿐이다.

(웃음) -태국에서 많은 것을 이뤘다.

또 다른 꿈이 있는가?@태권도로는 올림픽에서 태국이 금메달을 따는 것이 첫째 목표다.

경기외적인 면에서는 태권도가 태국에 뿌리내려 보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겠지만, 그 작은 디딤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국에서 엄청난 대우를 해준다고 들었다.

아파트도 사줬다고 하던데.@외국 지도자로는 최고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파트는 내 돈 주고 산 것인데.. -태국 외 다른 나라에서 엄청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 종종 태국 언론에 보도되는데.@다른 나라에서 몇 배의 연봉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늘 태국에 감사하며 산다.

2002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해였는데, 그 해부터 이후까지 태국에서 많은 것을 이뤘다.

태국 사람들은  외국인이라고 차별 두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 줬으며, 과분한 사랑을 주었다.

10년 가까이 가리킨 제자들을 상대로 타국에서 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우선 부담이 되고, 태국인들을 대했던 그 불꽃 같은 열정을 가지지 못할 것이 두렵단다.

  길가 식당에서 한국의 김치라 할 수 있는 `쏨땀’과 밥 한 공기, 닭다리 몇 개를 시켰지만 둘 다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태국에서 겪고 있는 그의 인생역전을 말하고 들을 시간이 꿈결처럼 흘러만 갔다.

 성적과 결과로만 말해주는 스포츠. 최영석은 땀과 노력만 믿는 사람이었다.

선수는 물론 자신에 대해서도 혹독할 정도로 몰아 부치는 삶.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그 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담금질하고 있었다.

 이국 땅 태국에서 그가 쌓아 올린 화려한 프로필의 이면엔 같은 부피, 같은 무게 만큼의 고통과 번민이 자리잡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오기의 한국인만이 견뎌내고 가능한 일이다.

최영석은 한국인의 만만찮은 근성과 혼을 `만만디’ 태국에 심고 있었다.

태권도는 사실 그 다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by Harry. 한-태교류센터(KTCC) 대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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