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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출판사 창고에 쌓여 있던 책들은 정보기관이 빼앗아 갔다.

 절판됐던 책이 2005 년 다시금 세상으로 나왔다.

  내가 읽은 빨치산 이야기... 지리산 (이병주), 남부군 (이태), 이현상 평전 (안재성),이번에, 빨치산의 딸 (정지아),다음엔, 남도 빨치산 (정관호) 을 읽어봐야겠다.

  내 고향 전라남도, 내 마음의 고향 지리산, 그곳에 해방전후사와 6.25 전후사가 있다.

    저자 정지아...정지아는 빨치산, 그것도 6.25 전에 입산한 구빨치산의 딸이다.

 지아, 남부군의 거점 지리산과 전남도당의 거점 백아산,본인 말로는 '지리산과 백아산을 품안에' 이라나... 1965 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녀의 성장기에 아버지는 사상범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집에는 수시로 형사들이 들락거렸다.

한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부모님의 삶은 그녀의 삶에도 그늘을 드리웠다.

연좌제로 자식의 삶까지 비틀리게 만든 독재정권 치하에서 대학생이 된 그녀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청춘을 보냈다.

 졸업 후 부모님의 삶을 소설로 옮긴 '빨치산의 딸' 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으나,몇 년간의 수배생활 끝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실로 복귀했다.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운동세력의 부침 속에 20 대를 떠나보내며 침묵하다가1996 년 신춘문예에 단편 '고욤나무' 를 당선시키며 다시 창작활동을 시작했고,2004 년에는 소설집'행복' 을 출간했다.

 정지아의 아버지는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낸 정운창 (남로당 가명 유혁운) 이고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을 지낸 이옥남 (가명 이옥자) 이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소설은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 라고 한다.

소설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사실적인 증언에 의거했다나...       소설 속의 그, 정운창...그는 2008. 5. 1. 눈을 감았다.

 1928 년 구례 문척면 출생, 철도학교를 졸업했으며 철도노동자로 일했다.

유혁운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며 1948 년 5.10 단선 이후 야산대를 거쳐 유격투쟁 대열에 참가했고주로 백운산 지역에서 활동 (특각 비서과장) 했다.

그 뒤 봉두산, 백아산 (지구 부책) 을 거쳐  6.25 뒤 도당 노동부 지도위원으로 일한다.

전시 평양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후퇴과정에서 다시 입산.재산 활동 중 곡성군당위원장, 도당 조직부 부부장 (봉두산 분트책) 을 지냈다.

그 뒤 지하활동을 위해 하산 활동 중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4.19 직후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도 통일을 염원했다.

그는 한 시대의 역사를 몸으로 기록했으며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소설속 정운창의 말이다.

 저는 지하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한 사람입니다.

대중과 같이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임무입니다.

 정운창은 1957. 7. 4. '전술적인' 전향을 하였다.

1,400 명이 넘는 좌익수 중 100 여 명만이 전향을 거부하였다.

    소설 속의 그녀, 이옥남...2008 년 9 월 이현상 선생의 제에 참석했을 때 모습이다.

 1926년 생, 1943 년 18 세 되던 해최규복과 결혼했다.

최윤호로 불렸던 남편최규복은 이현상 부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며한국전쟁 기간 중 낙동강 도하를 위해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47 년 7 월 구례 광의면 여맹위원장이 됐고,48 년 아들 출산 후 여순사건을 주도한 세력들과 함께 지리산에 입산했다.

49 년 빨치산 활동 중 아들을 잃었고, 시아버지는 경찰에 총살당했으며시동생들도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나 살아남지 못했다.

50 년 남부군 정치지도원이 되어 지하활동을 목적으로 경남도당으로 옮겨가던 53 년까지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선생을 보좌한다.

54 년 4 월 환자트에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하산하게 된다.

이후 정운창 선생을 만나 동지로서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살아간다.

    피아골 구례군당 유격대 트...이제껏 남아있을리는 없고 복원한 것이다.

 그림들을 모셔온 곳은 블로그 '진달래 산천' 이다.

블로그 주인장에 따르면 구례군당 유격대 트를 갈려면... 피아골 삼홍소 다리 건너기 전 잘 살펴 보면 흰 빨랫줄 같은게 보입니다.

그줄을 따라 한 이십분 올라가면 트가 나옵니다.

 작년 가을 피아골에 가보니 정말 빨래줄이 보였다.

그러나 동네 산악회를 따라간지라 시간 탓으로 가보지는 못했다.

 트에 관한 주인장 소개이다.

 구례군당유격대와 이현상부대는 처음과 끝이 맞물려 있다.

 여순반군을 이끌고 처음 문수골로 들어온 이현상은 피아골에서 겨울을 넘기고49 년 3.1 절 기념투쟁으로 거창까지 진출했다가 지리산 뱀사골 반선에서 토벌대에게 걸려홍순석, 지창수, 김지회 등 여순반군의 지휘부가 모두 전사하고궤멸상태에서 다시 피아골 구례군당 트로 들어온다.

이 때 소설 '빨치산의 딸' 에서 말하듯이이옥남, 정운창을 처음 만난다.

 ... 53 년 8 월30 일 제 5 지구당 해체와 두 부대 (김지회부대와 박종하부대) 의 생존 전투대원 23 명은이현상의 호위대장이던김태규의 인솔로 구례군당유격대로 보내졌다.

53 년 9 월17 일 이현상은 빗점골에서 전사한다.

   트, 산사람, 빨치산, 이현상, 정운창, 이옥남...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 을 가르키는 추상명사였다.

 이 땅의 서러운 반동 (反動) 의 역사...    >출판사 소개글... └ 접기 그러나, 전남·북과 경남 일원에는 지리산이라는 험악한 산세에 웅거한 공비들이 자주 출몰하여 민심교란과 치안질서 문란을 야기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953년 4월 6일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사령부 설치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동년 5월 1일 이하영 경무관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사령부(이하 ‘서전사’)가 전북 남원에서 창설되었다.

 1951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붙잡힌 빨치산과 부역자들. 지리산 토벌대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작전 개시 사흘째인 12월 4일 본격적으로 지리산 일대에 숨어 있던 빨치산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종군작가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려 있다.

 내용.1. 서전사의 편성 서전사는 본부와 4개 전투연대로 편성되었으며, 본부에는 경무과·수사사찰과·작전과·정보과·보급과·통신과를 두었다.

서전사의 관할지역은 전남의 순천·승주·광양·곡성·구례, 전북의 남원·장수·임실·순창, 경남의 함양·거창·산청·하동등지로 이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총괄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 창설된 4개 전투연대는 남원군 운봉면에 제1연대, 남원군 주천면에 제2연대, 순천시에 제3연대, 함양군에 제5연대를 각각 두었고, 창설 당시 대원수는 총 5,383명이었다.

  2. 서남지구의 빨치산 서전사 설치 당시, 이 지역에는 이현상이 지휘하는 소위 ‘남부군’을 기간으로 여순반란사건의 패잔병과 북한군의 남침 당시 지방부역자 및 남하인민유격대 패잔병 등이 암약하고 있었다.

1953년 4월 30일 현재 완전무장공비 668명, 비무장공비 282명 합계 950명이 각각 집단을  이루어 지리산·백운산·백웅산·회문산·덕유산 등 산악밀림지역에 거점을 두고 준동하고 있었다.

이 공비들은 후방의 민심을 교란하여 정치·경제 및 군사적으로 다각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써 군사력의 분산은 물론 국민총화를 저해하고 있어 정부에서는 수차에 걸쳐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한 바 있으나, 살아남은 자들은 소위 정예·악질분자들로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북한의 김일성은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출신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따라서 남한 공비의 총수인 제5지구당위원장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되면서 빨치산의 남부군 내부에서도 파란이 일고 있었다.

  3. 서전사의 활동 개요 빨치산의 전투력에 비해 창설 초기 서전사의 전투능력은 상당히 낮았으므로 산악전에 대비하여 유격훈련을 실시하였고, 지리산 일대의 산악지형에 익숙한 대원들을 해당 부대에 배속시켰다.

그리하여 빨치산 방어위주의 작전에서 벗어나 일선 지휘본부를 빨치산의 근거지로 전진배치하고 수색전과 매복전을 병행하는 공세적인 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이런 작전의 결과 빨치산의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자기들끼리의 결속력도 상당부분 와해되었다.

그러나 서전사의 공세가 심해질수록 식량부족으로 애를 먹던 빨치산들이 인근 민가를 침입하여 곡식과 가축을 절취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준 바 있다.

 서전사는 이형련 생포전, 이현상 사살전, 이영회 부대 섬멸작전, 평원리 매복전투, 산척 공비생포 작전, 여주 한은지점 습격공비 추적작전, 문정리 지구 전투, 웅천리 수색작전, 마천지구 수색전투, 내암리 전투, 교동초등학교 앞 사격전, 추정리 수색작전, 와룡산 매복 생포작전, 북다랑 공비 생포작전, 선운사지구 수색작전, 마천지구 잔비 섬멸작전, 내원부락 납치민간인 수색작전 등과 같은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빨치산들을 궤멸시켰다.

 특히, 이현상 사살전과 이영회 부대 섬멸작전은 대 빨치산 작전의 전기를 바꾸어 놓은 전투이므로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현상은 빨치산의 최고 수뇌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의 생포 없이는 지리산을 평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고, 그의 생포에 큰 현상금을 내걸 정도였다.

서전사 예하 제2연대 수색대는 생포한 공비로부터 이현상이 지리산 벽점골에 은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철저히 분석하여 이현상 생포작전에 돌입했다.

9월 5일부터 시작된 이 작전은 약 2주간 별 성과없이 수색만 계속하다가 9월 18일 11:00경 속칭 ‘갈매기봉’ 방면으로부터 이현상 일당이 10m 간격을 두고 남하하는 것을 발견하고 약 15m까지 근접시켜 일대사격을 가하였다.

약 3분간의 교전 끝에 이현상이 사살된 것이다.

이현상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전쟁이 끝났다는 심리적 효과를 주었고, 전투에 참가하고 있던 경찰과 군인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반대로 지리산 일대와 경북 동북부 산악지역 및 강원지역에 남아있던 빨치산들에게는 큰 지도자를 잃어 심리적 위축을 가져온 전투였다.

 1953년 11월 하순 경남 의령군 일대에서 이영회 부대가 민심교란과 보급을 목적으로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 부대는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빨치산 부대로 이들은 11월 23일 두 대의 트럭을 빼앗아 나누어 타고 오후 5시경 의령경찰서를 급습하였다.

이영회 일당은 경찰서 유치장을 부수었고, 이어 군청·우체국·금융조합·정미소 등을 불태웠다.

이후 오후 7시경 의령읍을 떠나 인근의 용덕지서와 정곡지서를 습격·소각하고, 합천방면으로 북상하면서 합천경찰서 경찰대와 육군 제56연대와 세 차례 교전을 벌였다.

이에 서전사 사령부는 서전사와 인근 시군의 전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이영회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포위에 성공한 경찰과 국군은 11월 28일 밤 10시 40분경부터 전투를 시작하여 산청군 신등면 양공리 뒷산에서 이영회를 사살하고, 이어 12월 1일까지 나머지 잔당들을 전원 사살하였다.

  4. 동계 대토벌작전 공비섬멸작전은 주로 겨울철에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험악한 산세와 밀림이라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공비들을 섬멸하기가 용이하지 않아 낙엽이 지는 가을부터 겨울 및 초봄이 작전을 펼치기가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빨치산을 섬멸하고 후방지역의 치안을 확보한다는 목표아래 서전사와 남부지구 경비사령부, 육군 제5사단이 공동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약 8백여 명 정도였던 지리산 지구 빨치산은 작전이 종료될 시점에는 140명으로 줄어들었다.

1954년 1월 방준표(전북도당 위원장)가 남덕유산에서 사살된 것을 시작으로 조병하(경남도당 위원장, 2월 6일 지리산에서 체포, 5월 총살), 김선우 (전남도당 위원장, 2월 27일 백운산에서 자살), 박영발(전남도당 위원장, 제5지구당 부위원장, 3월 뱀사골에서 자살) 등 빨치산 지휘부를 이루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사살되거나 군경에 포위되어 자살하였다.

이 기간 동안 경찰은 348명의 빨치산을 사살하고 107명을 생포하였으며, 93명을 귀순시켰다.

  빨치산의 최고 수뇌 이현상. 당시에 보도된 이현상 최후 기사. 역사적 의의.서전사의 활약으로 지리산 지구의 공비들은 궤멸되었지만, 이 작전을 전개하는 동안에 아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경찰과 군인 및 민간인 6,333명이 산화하였고, 동계 작전으로 많은 군경이 부상을 당하거나 동상을 입었다.

 겨울철 대토벌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빨치산의 주력 대부분이 궤멸됨에 따라 서전사는 1955년 7월 1일 해체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빨치산들은 끈질기게 활동을 계속하였다.

1955년 7월 이후 분산된 빨치산들이 재집결해 조직을 복구하고 활동을 강화할 기미를 보임에 따라 서전사를 대체할 기동부대를 편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955년 6월 28일 국회에 「경찰직무응원법」이 상정·통과되었다.

이 법률에 근거해 경찰기동대가 1955년 7월 1일 창설되었다.

이후 경찰기동대는 국내치안상황이 호전됨에 따라 창설 1년 2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참고자료.경찰청,《한국경찰60년사》, 2006 내무부 치안국,《한국경찰사Ⅱ》 광명인쇄공사, 1973대한민국참전경찰유공자회 편,《아

살아있다! 대한민국 경찰의 혼: 경찰전사》 사, 2003차길진,《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 기린원, 1990글/전대양(관동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출판사 창고에 쌓여 있던 책들은 정보기관이 빼앗아 갔다.

 절판됐던 책이 2005 년 다시금 세상으로 나왔다.

  내가 읽은 빨치산 이야기... 지리산 (이병주), 남부군 (이태), 이현상 평전 (안재성),이번에, 빨치산의 딸 (정지아),다음엔, 남도 빨치산 (정관호) 을 읽어봐야겠다.

  내 고향 전라남도, 내 마음의 고향 지리산, 그곳에 해방전후사와 6.25 전후사가 있다.

    저자 정지아...정지아는 빨치산, 그것도 6.25 전에 입산한 구빨치산의 딸이다.

 지아, 남부군의 거점 지리산과 전남도당의 거점 백아산,본인 말로는 '지리산과 백아산을 품안에' 이라나... 1965 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녀의 성장기에 아버지는 사상범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집에는 수시로 형사들이 들락거렸다.

한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부모님의 삶은 그녀의 삶에도 그늘을 드리웠다.

연좌제로 자식의 삶까지 비틀리게 만든 독재정권 치하에서 대학생이 된 그녀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청춘을 보냈다.

 졸업 후 부모님의 삶을 소설로 옮긴 '빨치산의 딸' 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으나,몇 년간의 수배생활 끝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실로 복귀했다.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운동세력의 부침 속에 20 대를 떠나보내며 침묵하다가1996 년 신춘문예에 단편 '고욤나무' 를 당선시키며 다시 창작활동을 시작했고,2004 년에는 소설집'행복' 을 출간했다.

 정지아의 아버지는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낸 정운창 (남로당 가명 유혁운) 이고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을 지낸 이옥남 (가명 이옥자) 이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소설은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 라고 한다.

소설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사실적인 증언에 의거했다나...       소설 속의 그, 정운창...그는 2008. 5. 1. 눈을 감았다.

 1928 년 구례 문척면 출생, 철도학교를 졸업했으며 철도노동자로 일했다.

유혁운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며 1948 년 5.10 단선 이후 야산대를 거쳐 유격투쟁 대열에 참가했고주로 백운산 지역에서 활동 (특각 비서과장) 했다.

그 뒤 봉두산, 백아산 (지구 부책) 을 거쳐  6.25 뒤 도당 노동부 지도위원으로 일한다.

전시 평양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후퇴과정에서 다시 입산.재산 활동 중 곡성군당위원장, 도당 조직부 부부장 (봉두산 분트책) 을 지냈다.

그 뒤 지하활동을 위해 하산 활동 중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4.19 직후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도 통일을 염원했다.

그는 한 시대의 역사를 몸으로 기록했으며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소설속 정운창의 말이다.

 저는 지하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한 사람입니다.

대중과 같이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임무입니다.

 정운창은 1957. 7. 4. '전술적인' 전향을 하였다.

1,400 명이 넘는 좌익수 중 100 여 명만이 전향을 거부하였다.

    소설 속의 그녀, 이옥남...2008 년 9 월 이현상 선생의 제에 참석했을 때 모습이다.

 1926년 생, 1943 년 18 세 되던 해최규복과 결혼했다.

최윤호로 불렸던 남편최규복은 이현상 부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며한국전쟁 기간 중 낙동강 도하를 위해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47 년 7 월 구례 광의면 여맹위원장이 됐고,48 년 아들 출산 후 여순사건을 주도한 세력들과 함께 지리산에 입산했다.

49 년 빨치산 활동 중 아들을 잃었고, 시아버지는 경찰에 총살당했으며시동생들도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나 살아남지 못했다.

50 년 남부군 정치지도원이 되어 지하활동을 목적으로 경남도당으로 옮겨가던 53 년까지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선생을 보좌한다.

54 년 4 월 환자트에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하산하게 된다.

이후 정운창 선생을 만나 동지로서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살아간다.

    피아골 구례군당 유격대 트...이제껏 남아있을리는 없고 복원한 것이다.

 그림들을 모셔온 곳은 블로그 '진달래 산천' 이다.

블로그 주인장에 따르면 구례군당 유격대 트를 갈려면... 피아골 삼홍소 다리 건너기 전 잘 살펴 보면 흰 빨랫줄 같은게 보입니다.

그줄을 따라 한 이십분 올라가면 트가 나옵니다.

 작년 가을 피아골에 가보니 정말 빨래줄이 보였다.

그러나 동네 산악회를 따라간지라 시간 탓으로 가보지는 못했다.

 트에 관한 주인장 소개이다.

 구례군당유격대와 이현상부대는 처음과 끝이 맞물려 있다.

 여순반군을 이끌고 처음 문수골로 들어온 이현상은 피아골에서 겨울을 넘기고49 년 3.1 절 기념투쟁으로 거창까지 진출했다가 지리산 뱀사골 반선에서 토벌대에게 걸려홍순석, 지창수, 김지회 등 여순반군의 지휘부가 모두 전사하고궤멸상태에서 다시 피아골 구례군당 트로 들어온다.

이 때 소설 '빨치산의 딸' 에서 말하듯이이옥남, 정운창을 처음 만난다.

 ... 53 년 8 월30 일 제 5 지구당 해체와 두 부대 (김지회부대와 박종하부대) 의 생존 전투대원 23 명은이현상의 호위대장이던김태규의 인솔로 구례군당유격대로 보내졌다.

53 년 9 월17 일 이현상은 빗점골에서 전사한다.

   트, 산사람, 빨치산, 이현상, 정운창, 이옥남...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 을 가르키는 추상명사였다.

 이 땅의 서러운 반동 (反動) 의 역사...    >출판사 소개글... └ 접기공산측이나 미국 모두 휴전을 원했기 때문에개성과 판문점에서는 휴전 협정이 시작되고 있었고양측 모두 무리한 군사작전은 자제하는 터라전선은 그대로 고착되어 갔다.

이럴 때 미국은 남쪽에는 원조물자를, 북쪽에는 폭탄을 뿌리고 있었다.

▲ 미국의 구호물자 + 미군의 폭탄공산측은 미군의 화력에 버텨내기 위해서전선마다 참호를 파며 무려 130만 명의 병력을 때려 박고 있었다.

"믿을 건 인해전술밖에 없다해."이승만은 이런 시간을 체제 안정과 독재권력 강화에 쏟고자 했다.

 ▲ 빨치산 토벌 + 버스째로 연행된 국회의원들때문에 그동안 신경 쓰지 못한남한 내 빨치산을 토벌하고또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적 파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 빨치산은 왜 생겨났을까?빨치산은 정식 군인이 아닌,군복이나 계급장도 없이 자체적으로 결성된 무장부대를 말한다.

"민중 중심의 부대가 아니기 때문에시민군이나 민병대와는 다른 성격의 무장단체임."같은 말로 '게릴라' 혹은 '유격대'라고도 말하고러시아어로 '파르티잔'이라고 말하는데,이걸 음차해서 '빨치산'이 된 것이다.

▲ 2차대전 중 소련의 파르티잔"의외로 산(山) 이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있지만.."그런데 남한 내 빨치산은 애초에 북한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단체였다.

"?�?"사연은 이렇다.

남한 내 공산당의 당수였던 박헌영이1946년 말, 미군정의 탄압에 못 이겨 월북을 하게 되자▲ 조선공산당 행사 : 가운데 박헌영곧 공산당은 불법 단체로 선포되었고이때부터 공산당은 '남로당'이란 이름의지하 비밀조직으로 변모하게 된다.

▲ 공산당원들의 대대적인 검거 (1946년 10월)그러다가 1948년 초부터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한다는 목적으로남로당은 각종 시위와 대중 선동에 앞장서게 되는데"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모두 남로당 세력과 관련이 있지."정부는 이때부터 남로당과 좌익의 뿌리를 뽑기 위해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게 된다.

 "1948년초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좌익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총 10만 명이 학살된다능."(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p.27)때문에 남로당원과 좌익들은살기 위해서 산으로 숨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남한 내 빨치산의 시초였다.

▲ 지리산에 만들어진 아지트이후 북한의 박헌영은 남한 내 빨치산을 돕겠다며 무장간첩을 남파하며 보급품을 지원해주었고 고문관을 파견해군사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오히려 정부의 대대적인 소탕으로 인해전국의 빨치산은 수백 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지리산 일대의 팻말 : "이 지역은 게릴라가 소탕됐으므로 안심해도 좋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북한이 빠른 속도로 남한을 점령하게 되자산속에 숨어있던 빨치산들은 그제야 해방감을 맛보며 산에서 내려올 수가 있었다.

"드디어 공화국의 세상이 왔다!"이때 빨치산들은 한풀이라도 하듯이경찰서와 관공서들을 테러하고심지어 미군 기관을 습격해100여 명을 살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기쁨은3개월을 넘지 못했다.

다시 전황은 역전이 되었고궁지에 몰린 공산군은 빠르게 후퇴해야만 했다.

빨치산 출신들도다시 산으로 들어가야만 했었다.

"아놔."여기에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퇴로가 차단된 인민군들도 합세했다.

그렇게 산으로 들어간 이들이 무려 만 5천여 명에 이르게 된다.

 "흔히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을 구빨치,이후를 신빨치라고 하면서 구분한다능."이후 산으로 들어간 이들에게 북한은 지령을 내린다.

 박헌영"인민 군대가 다시 수복할 때까지제 2전선을 구축하여 후방을 교란하라능!"때문에 초기만 해도(1950년 하반기)빨치산들은 남한의 교도소를 털고도청소재지를 장악하는 등 어느 정도 후방교란 작전을 행하고 있었다.

 > 더 보기 └ 접기● 산 아래 주민들하지만 빨치산의 '후방 교란작전'은한계점이 뚜렷했다.

애초에 물자가 부족했고보급 자체가 전혀 없었던 군대였기 때문에점점 상황은 열악해져 갔고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라도이들은 산 아래의 마을을 약탈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정부는 민중에 대한 이해심이 전혀 없었다.

산 아래,약탈 당하는 마을 주민들을오히려 공비와 협조하는 이른바 '통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기 위해 강제 징용을 해야 했던 사람들을부역자로 몰아 처단했던 경우와 같은 셈이었지."때문에 당시 지리산 자락 주민들의 삶은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낮에는 대한민국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밤에는 빨치산에게 숨겨둔 양식을 빼앗겼고다음날 아침에는 토벌대에게무서운 고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공비토벌과 양민학살● 함평 학살 사건지리산이 빨치산 투쟁의 본거지가 되면서애꿎은 민간인들까지 전쟁에 휘말려들어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었다.

공비 토벌 작전을 하던 국군이마을 주민을 학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리산 토벌을 맡았던 부대는 국군 11사단이었고, 사단장은 최덕신이었다.

▲ 최덕신은 1989년 월북하였고 현재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토벌대는 1950년 11월 전북 남원에서 90명의 주민을 학살한데 이어12월에는 전남 함평에서도 유사한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사건은 이러했다.

전남 함평 일대에서빨치산 소탕 작전을 펼치던 토벌대들은도중에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그만 대원 2명이 전사하게 된다.

그러자 격분한 토벌대들은애꿎은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보복에 나섰으니,군인들은 마을을 돌며 집을 불태워버렸다.

"살고 싶거든 모두 모여라!"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전부 논바닥으로 끌려오게 된다.

"시방 왜 그란데요?""시끄러! 공비넘들아!" 그러더니 군인들은 다짜고짜 기관총을 쏘아대는 것이 아닌가!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50여 명의 주민이 학살을 당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다음날에도 인근 7개 부락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주민들을 불렀다.

"주민들은 모두 모여라!우리는 지금 도로 공사를 하러 간다!"총으로 위협하자놀란 주민들은 황급히 뛰어나올 수밖에 없었고그렇게 주민 700여 명을 마을 뒷동산에 집결시켜이 중에서 12

13세 되는 아이들만 따로 불러서마을 집집마다 불을 지르라고 내려보냈다.

"너희들은 내려가서 온 마을을 불태우도록!"그리고 나더니 군인이나 경찰 가족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돌아가도 좋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은?모두 죽어야만 했다.

이때부터 엽기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인솔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살고 싶은 사람들은 도망가도 좋다!""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모두 살려주겠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50여 명이 일어나 달렸다.

하지만 군인들을 일제히 사격했고도주한 사람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에이, 하느님이 인정이 없으셨네.""좋아, 또 한번 기회를 주지.살고 싶은 사람은 어서 도망가 봐!"이번에는 10여 명이 일어나 동네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그들의 등을 향해 다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그런 식으로 52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것이 천인공노할 함평학살의 실체다.

☞ 참고● 왜 양민들을 학살했던 것일까?여기서 의문이 든다.

왜 이토록 사람이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단지 보복 차원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사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지휘부의 어처구니없는 명령 때문이었다.

당시 사단장은, 공비와 결탁한 마을은 모조리 불태워 없애라는 '초토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최덕신"작전명은 견벽청야!"> 더 보기 └ 접기 구체적으로 지휘부의 명령은 이러했다.

"작전지역 내 사람들은 전원 총살하라!""작전지역 내 건물들은 모두 불태워라!""작전지역 내 식량과 물자는 후송이 불가능하거든 모두 불태워라!"여기에 지휘부는 각 부대에게할당량까지 지시했다.

"하루에 공비 50명 이상을 사살하고,무기 50점 이상을 노획할 것!"이러했으니 군인들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손쉬운 전과'를 택하게 되었고민간인들을 학살한 뒤에는괭이와 삽을 수거해 이를 노획된 무기로 신고했던 것이다.

● 골로 간 사람들함평에서 민간인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500동을 불태웠던 학살극은2개월 후 지리산 자락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이번에도 같은 부대가 저지른 것이었다.

당시 거창·함양·산청 등 지리산 일대의 곳곳에서 학살극이 일어났기 때문에 총 사망자 수는 가늠하기도 어렵지만그중에서도 세상에 폭로되어대중들에게 알려진 사건이 바로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다.

과연 어떤 사건이었을까?때는 1951년 2월 초, 어느 겨울이었다.

11사단 소속의 공비토벌대는 거창·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 지역에서 공비 소탕 작전을 펼치기로 하고거창 신원면에 토벌대를 주둔시키고지역 경찰과 청년 의용대를 진주하게 했다.

하지만 빨치산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자,토벌대는 경찰과 의용대 병력을 남기고 곧 다른 곳으로 떴다.

"이 동네는 빨치산들이 한명도 안 보이네."그러나 토벌대가 신원면을 떠나자마자 빨치산들은 그날 밤, 기다렸다는 듯이 습격해 경찰과 교전을 하게 되었고▲ 빨치산의 습격 : 영화 '남부군'의 장면경찰과 의용대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다시 토벌대는 신원면에 진주하게 된다.

▲ 토벌대 : 영화 '남부군'의 장면"아오, 짜증 나는 것들!어떻게 여기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거지?"토벌대는 신원면 주민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토벌대의 대장 한동석 소령은신원면 일대의 주민 1천여 명을 신원초등학교로 소집했다.

"이놈들 내통하는게 분명해. 본때를 보여주겠어."당시 토벌대는, 안전 지역으로 피난시켜준다는 명목으로주민들을 소집하고 있었다.

"자, 어서 따라오세요.""마, 갑시데이. 군인들이 지켜준다는데.." 그렇게 안심하고 남녀노소 모두 따라갔다.

다만 젊은 남자들은 괜히 마을에 남아 있다가는행여 빨치산으로 몰릴까 봐 두려워대부분 피신을 한 뒤였기 때문에모인 주민의 대부분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마, 젊은 사람이야 의심을 받더라도설마 여자들이랑 노인, 아들까지 의심하겠노."이런 심리였다.

 하지만 토벌대에게 그런 아량은 애당초 없었다.

한동석 소령은 지서 주임과 관할 순경에게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을 골라내게 했다.

"이중에 군경가족 있음?"그러자 몇 가족이 나왔다.

확인해보니 사실이었다.

또 몇 사람이 나왔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군경 가족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얻다 대고 사기 치는 거야!"그때 마을 면장이 나섰다.

그는 군인들에게 과잉 충성이라도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네가 무슨 군경가족이가."다짜고짜 한 사람을 끌어냈다.

"네도 무슨 군경가족이란 말이가."그렇게 또 한 사람을 끌어냈다.

결국 마을 면장의 삐딱한 충성심 때문에몇 사람들이 더 화를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빨치산] 해결책이 있는지


이후 700여 명의 주민들은인근 야산의 골짜기로 끌려갔다.

한국 전쟁 때 생긴 말 가운데 '골로 간다'는 말이 있다.

산골짜기로 끌려간다는 뜻이었고이는 곧 죽으러 간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당시 골로 간 사람들은끝까지 설마 했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함부로 학살한다는 것은도저히 상식적으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짜기에 도착하자, 기관총은 울려 퍼졌고당황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쓰러져 버렸다.

● 세상에 알려진, 거창양민학살 사건군인들은 학살을 마친 후 증거인멸을 위해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여기에 시체더미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기도 했다.

이후 학살 지역의 출입을 막아외부로부터 일체 차단했고생존 주민들에게는 학살에 대해 발설할 경우 공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때문에 거창양민학살 사건은그렇게 은폐되어버릴 사건이었다.

하지만 학살 현장에서는 기적적으로 시체더미에서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

또 잠시 친척 집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결국 억울함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뜻을 모아, 당시 거창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신중목을 찾아가 눈물로 호소했다.

 "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다 죽였심더."충격적인 말이었다.

 신중목"그런 일이 있었던가!"이후 신중목은 부산에서 열린 임시국회에서사건을 세상에 공개하게 된다.

 신중목"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그러자 국회는 발칵 뒤집혔고긴급히 조사단을 꾸려 거창 지역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군 관계자들은 한사코 양민학살은 없었다며 부인했다.

 "설마요, 빨치산 넘들이 국군으로 위장하고 벌인 일이겠죠."그러나 조사결과학살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음이 밝혀졌다.

"맞심미더. 그런 일이 있었심더.""군인들이 사람만 죽인 게 아니고부녀자들을 강간하고, 물건도 훔쳐가뿔고 그랬심더."하지만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오히려 화를 냈다.

 신성모"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이런 일이 외국에 알려지면 나라 망신입니다!" 신성모"가뜩이나 한창 전쟁 중인데군인들 사기도 생각해야지.."한술 더 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성모"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통비분자들이었다고요!"그러나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 등을 통해곧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때문에 대충 넘어갈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당시 이승만은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화를 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이승만"거창 사건 때문에 나라의 체면이 손상당했어." 이승만"장관들끼리 제대로 협력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니오."화를 낸 이유인즉,학살자 수를 두고국방부는 225명, 법무부는 275명, 내무부는 350명 등으로왜 입을 맞추지 못해 세간에 불신을 사게했냐는 것이었다.

결국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이 옷을 벗었다.

하지만 사건의 당사자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끝까지 무사했다.

그렇다면 해당 관련자들은 어떤 식으로 처벌했을까?해외 언론에 보고된 만큼 정부는 마냥 쉬쉬할 수만은 없었다.

군인들은 곧 군사재판에 넘겨졌으니11사단장 최덕신은 직위 해제,대대장 한동석은 징역 10년이 떨어졌다.

하지만 실제 학살을 집행한 소위는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은 게 전부였다.

뿐만 아니다.

최덕신과 한동석 등 모든 관련자들은, 실제로 1년도 복역하지 않았고 전부 특사로 풀려나 현역에 복귀하게 된다.

● 거창학살사건의 뒷얘기당시 미군부대 통역관이었던 언론인 리영희는 거창 사건을 이렇게 술회한다.

 리영희"어째서 이 나라에서는 인간 말살의 범죄가'공비'나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이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가!" 리영희"거창양민학살을 주도한 관련자는 1년도 복역하지 않고 석방되었다.

" 리영희"광신적 반공주의 속에 휴머니즘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한편 거창학살사건은 10년 뒤 4.19 혁명이 발발하면서 다시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어째서일까?1960년 4.19 혁명이 발발하자거창학살사건 당시, 경찰가족이 아니라고고자질했던 신원면 면장이유족들에 의해 타살되어 불태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명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박명림"억압의 실체(이승만)가 소멸했을 때인간의 증오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묻게 되는 장면이다.

" 박명림"사건 10년이 지난 시점에서신원면 면장에 대한 소살은.." 박명림"민주주의 공간이 열렸을 때, 절제와 이성을 압도하고도 남는 분노의 크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 그 후 거창에서는진상 규명과 학살당한 이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목소리가 불거져 나왔고학살 당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피학살자 합동묘지도 만들어졌다.

▲ 거창 피학살자 합동묘하지만 5.16으로 쿠데타가 발생하고군사 정부가 들어서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너희들이 감히 국군의 명예를 실추시켜?"오히려 군사정부는 유족회 관계자들을 전부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아넣고 말았다.

"이런 빨갱이넘들!"그러면서 합동묘지도 해체해버렸다.

그 뒤로 36년 동안이나 거창사건은 입 밖으로 내서는 안될 금기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지난 역사였다.

빨치산 토벌● 지리산 토벌대51년 7월 이후전쟁이 소강상태가 진행되면서정부는 산악 지대에 파고든 빨치산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로 나섰으니, 이승만"더 이상 빨치산들을 방치할 수 없다.

"51년 11월 백선엽이 지리산 토벌군 사령관으로 차출되었고최전선의 2개 사단도 토벌군으로 차출되었다.

이승만이 미군에게 간곡히 요청해서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승만"전선도 중요하지만 후방의 불순분자들을 소탕하는 것도 중요합네다.

"이에 미군은 흔쾌히 받아주었고토벌작전에 고문단을 파견해주고선전전도 미군이 맡아서 했다.

"OK!"그리하여 미군은 남원에 방송시설을 만들어투항 권유 방송을 송출했으며투항 권유 전단지를 도쿄에서 인쇄해 공수해 와▲ 지리산 일대를 헬기를 타며 뿌렸던 투항 권유 삐라지리산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의엄청난 삐라를 공중에서 살포했다.

당시 뿌려진 삐라만 모두 992만장이었다.

(백선엽, 백선엽 회고록 p.221)삐라들 중에는'한 장이면 몇 사람이라도 통할 수 있다'는 식의 '귀순증'도 있었다.

그렇다면 빨치산들은 이런 삐라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당시 삐라 용지는 눈과 빗물에 견디도록 두껍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제법 내구성이 좋았다.

때문에 빨치산들은 삐라를 주워다가담배 마는데 쓰거나연락문이나 기록 용지로 썼다가용변 후의 뒤처리용으로 쓰거나불쏘시개로도 썼다가여성대원의 생리용으로까지 쓰는 등매우 다양하게 이용했다.

"오히려 고맙네. 이런 것까지 뿌려주고."때문에 '귀순증'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닌다고 해도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담배는 어쩌다가 농가에서 잎담배를 입수할 때도 있었지만대부분은 마른 단풍잎을 부셔서삐라 종이로 말아 피웠다.

하지만 단풍잎도 아무 데나 있지는 않기 때문에빨치산들은 단풍잎도 쌈지에 넣고 다녔다.

(이태, 남부군 : 지리산 빨치산 수기 p.443

444)한편 당시 토벌대는 모두 3개 사단 4만여 명의 병력으로주요 능선과 골짜기마다 들어섰기 때문에그 넓다는 지리산이 밤만 되면 토벌대의 모닥불로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장식되었고혹은 연등행렬처럼 늘어졌기 때문에빨치산들은 위협적인 장면에도 불구하고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 빨치산의 실체빨치산 대원들은 여성의 비율이 10% 정도로여성 대원의 숫자가 적지 않은 편이었다.

연령은 20대가 절반 이상이었고그 다음으로 30대가 많았다.

10대 대원들도 15% 정도가 있었다.

문맹률이 70

80%이던 시절인데도문맹은 거의 없었다고 하니당시로서는 나름 인텔리 층이었던 것이다.

▲ 영화 남부군의 장면"역시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최소한 글은 알아야.."하지만 대부분은 빈농 출신이었고전문대 이상을 졸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 빨치산 아지트그렇게 따져보면,해방 직후

한국전쟁 이전까지 사회계층은 최상위 기득권 층 : 자본주의자 (15%)차상위 기초교육을 받은 계층 : 공산주의자 (10%)나머지 대부분 문맹자 : 사회주의자 (70

80%)라는 식으로 개략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는 일이다.

이는 미군정에서 실시한여론조사 결과와도 얼추 비슷한 비율이다.

 물론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자는 소멸하고대다수의 사회주의자는 곧 반공주의자가 되지만 말이다.

한편 당시 지리산에는 여자들로만 편성도 전투부대도 있었는데이들은 생각보다 호전적이고때로는 매우 잔인했다고 하는데,여자 부대는 저마다 M-1 소총과 비슷한 성능의 총을 들고 있었고▲영화 '남부군'의 장면같이 밥을 굶어도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오래 살았고부상을 당해 창자가 나와도 여자들이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또 부상을 당했을 때 여자들은제발 죽이고 가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 1950년 4월 체포된 오대산 여자빨치산. 이들은 1시간 뒤에 즉결 총살됐다.

당시 빨치산들은 부상을 당해민폐 캐릭이 되면 군말 없이 죽어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다는데이때도 여성들은 여자답지(?)않게꽤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영화 '남부군'의 장면그런가 하면 여자들이라서 오히려 더 잔인한 모습도 있었다.

특히 포로를 죽일 때면여성들은 보통 포로의 귀를 자르고 코를 자르는 식으로 가혹했고총탄이 아깝다고 돌로 때려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토벌대에게 붙들리게 되면보통 윤간을 당하고 총창으로 가슴이 도려지는 등본인들도 잔혹하게 당했기 때문에 복수심 때문에라도 잔인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p.252)▲ 당시 사용하던 아지트 (복원)어쨌든 잔인함이양쪽 다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자들도 포로수용소에 와서는언제 그랬느냐는 듯▲ 포로수용소의 여자 빨치산저마다 여성스럽게 피어난 걸 보면 사뭇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p.252)한편 빨치산들은 생각보다 인근 마을에 지하조직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이태"빨치산은 냄새도 다르고 육체도 다르다.

그래서 도저히 일반인 행세를 할 수가 없었어요." 이태"특히 빨치산들은 발바닥에 두꺼운 살이 겹겹이 쌓여서 맨발로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고 그랬다.

"● 빨치산들의 최후빨치산 토벌은 52년 1월까지 행해졌으니한때 만 5천 명이던 빨치산의 수는5천 명으로 급감하게 되었다.

▲ 빨치산 모형당시 육본 자료에 의하면 사살 5,800명, 포로 5,700명 정도였다.

이후로도 빨치산 토벌은 계속되었는데한때 정부는 귀순 빨치산들로 구성된'보아라 부대'를 결성하기도 했었다.

▲ 빨치산 모형'보아라 부대'라고 명칭한 것은귀순하면 너희도 이렇게 활약을 할 수 있으니똑똑히 보고 투항하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보아라 출신의 토벌대의 활약이괜찮았던 모양이다.

빨치산의 전설적인 인물이자 남부군의 우두머리인, 이현상을 사살하게 된 것이다.

(53년 9월)▲ 이현상다만 끝까지 의리가 남아 있었는지,토벌대는 이현상을 사살한 후시체에 대고 거수경례를 하면서"선생님 죄송합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 붙잡힌 빨치산들당시만 해도 이현상은 축지법을 쓰고 다닌다는 등 신출귀몰한 인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사망 당시 이현상은, 부상을 당해 절뚝거리는 등한낱 나약한 중년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이현상이 사살되자지리산의 빨치산은 급격히 와해된다.

▲ 1953년 9월 이현상의 죽음으로 사실상 지리산 빨치산은 해체된다.

사실 이들은 철저히 버림받은 존재였다.

한국 정부는 빨치산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 나머지휴전 협상에서 북한에게이들을 데려가라고까지 말했었다.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은 한사코 거부했다.

▲ 휴전협상고작 북한에서 이들 빨치산에게 내렸던 지시는"하산해서 지하활동을 하라."라는 식의무책임한 말뿐이었다.

하지만 빨치산들의 몰골은 하나같이 거지꼴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내려가는 즉시 경찰에게 붙들리고 마는 신세였다.

▲ 영화 '남부군'의 장면게다가 무사히 산을 벗어난다 한들딱히 갈 곳도 없었다.

산을 내려가라는 말은곧 '하루빨리 죽으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 '여명의 눈동자'의 엔딩 장면 : 빨치산이 된 주인공의 최후빨치산의 최후와 관련해서고은의 애절한 시가 있다.

 ▲ 피아골피아골로 떠난 남편은전 남로당 소속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몰래 내려와서하룻밤 자고 날이 밝기 무섭게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 때 정했다.

검은 빨래를 널어두면 위험한 것이고흰 빨래를 널면 안전하다는 것으로그렇게 몇달 동안빨래를 통해 남편은 왔다갔다 했는데그 뒤 아무리 흰 빨래를 널어도남편은 오지 않았다.

그날 밤도 그날 밤도늦단풍 지리산 피아골 아래아이 밴 아낙 뱃속에서 꿈틀 노는 아이한테눈물바람 거두며 말했다.

"니 아부지 오라고 너도 빌어라.뱃속에서 빌어라."해가 져도 흰 빨래를 걷지 않았다.

 (고은 만인보 17편 p.42

43) 이러한 빨치산 토벌은 54년 4월 완료되었음을 공식 선포하였고,거창에서는 공비토벌을 축하하는축제가 거행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6년에 빨치산 1명이 사살되고, 2명이 생포되었고▲ 영화 '피아골'의 장면 : 빨치산을 다룬 최초의 영화63년에 마지막 빨치산이자 지리산의 전설로 알려진, 여자 빨치산 정순덕이 지리산에서 입산 12년 만에 붙잡히게 된다.

 ▲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출판사 창고에 쌓여 있던 책들은 정보기관이 빼앗아 갔다.

[빨치산] 분석을 해보면



 절판됐던 책이 2005 년 다시금 세상으로 나왔다.

  내가 읽은 빨치산 이야기... 지리산 (이병주), 남부군 (이태), 이현상 평전 (안재성),이번에, 빨치산의 딸 (정지아),다음엔, 남도 빨치산 (정관호) 을 읽어봐야겠다.

  내 고향 전라남도, 내 마음의 고향 지리산, 그곳에 해방전후사와 6.25 전후사가 있다.

    저자 정지아...정지아는 빨치산, 그것도 6.25 전에 입산한 구빨치산의 딸이다.

 지아, 남부군의 거점 지리산과 전남도당의 거점 백아산,본인 말로는 '지리산과 백아산을 품안에' 이라나... 1965 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녀의 성장기에 아버지는 사상범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집에는 수시로 형사들이 들락거렸다.

한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부모님의 삶은 그녀의 삶에도 그늘을 드리웠다.

연좌제로 자식의 삶까지 비틀리게 만든 독재정권 치하에서 대학생이 된 그녀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청춘을 보냈다.

 졸업 후 부모님의 삶을 소설로 옮긴 '빨치산의 딸' 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으나,몇 년간의 수배생활 끝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실로 복귀했다.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운동세력의 부침 속에 20 대를 떠나보내며 침묵하다가1996 년 신춘문예에 단편 '고욤나무' 를 당선시키며 다시 창작활동을 시작했고,2004 년에는 소설집'행복' 을 출간했다.

 정지아의 아버지는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낸 정운창 (남로당 가명 유혁운) 이고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을 지낸 이옥남 (가명 이옥자) 이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소설은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 라고 한다.

소설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사실적인 증언에 의거했다나...       소설 속의 그, 정운창...그는 2008. 5. 1. 눈을 감았다.

 1928 년 구례 문척면 출생, 철도학교를 졸업했으며 철도노동자로 일했다.

유혁운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며 1948 년 5.10 단선 이후 야산대를 거쳐 유격투쟁 대열에 참가했고주로 백운산 지역에서 활동 (특각 비서과장) 했다.

그 뒤 봉두산, 백아산 (지구 부책) 을 거쳐  6.25 뒤 도당 노동부 지도위원으로 일한다.

전시 평양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후퇴과정에서 다시 입산.재산 활동 중 곡성군당위원장, 도당 조직부 부부장 (봉두산 분트책) 을 지냈다.

그 뒤 지하활동을 위해 하산 활동 중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4.19 직후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도 통일을 염원했다.

그는 한 시대의 역사를 몸으로 기록했으며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소설속 정운창의 말이다.

 저는 지하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한 사람입니다.

대중과 같이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임무입니다.

 정운창은 1957. 7. 4. '전술적인' 전향을 하였다.

1,400 명이 넘는 좌익수 중 100 여 명만이 전향을 거부하였다.

    소설 속의 그녀, 이옥남...2008 년 9 월 이현상 선생의 제에 참석했을 때 모습이다.

 1926년 생, 1943 년 18 세 되던 해최규복과 결혼했다.

최윤호로 불렸던 남편최규복은 이현상 부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며한국전쟁 기간 중 낙동강 도하를 위해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47 년 7 월 구례 광의면 여맹위원장이 됐고,48 년 아들 출산 후 여순사건을 주도한 세력들과 함께 지리산에 입산했다.

49 년 빨치산 활동 중 아들을 잃었고, 시아버지는 경찰에 총살당했으며시동생들도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나 살아남지 못했다.

50 년 남부군 정치지도원이 되어 지하활동을 목적으로 경남도당으로 옮겨가던 53 년까지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선생을 보좌한다.

54 년 4 월 환자트에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하산하게 된다.

이후 정운창 선생을 만나 동지로서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살아간다.

    피아골 구례군당 유격대 트...이제껏 남아있을리는 없고 복원한 것이다.

 그림들을 모셔온 곳은 블로그 '진달래 산천' 이다.

블로그 주인장에 따르면 구례군당 유격대 트를 갈려면... 피아골 삼홍소 다리 건너기 전 잘 살펴 보면 흰 빨랫줄 같은게 보입니다.

그줄을 따라 한 이십분 올라가면 트가 나옵니다.

 작년 가을 피아골에 가보니 정말 빨래줄이 보였다.

그러나 동네 산악회를 따라간지라 시간 탓으로 가보지는 못했다.

 트에 관한 주인장 소개이다.

 구례군당유격대와 이현상부대는 처음과 끝이 맞물려 있다.

 여순반군을 이끌고 처음 문수골로 들어온 이현상은 피아골에서 겨울을 넘기고49 년 3.1 절 기념투쟁으로 거창까지 진출했다가 지리산 뱀사골 반선에서 토벌대에게 걸려홍순석, 지창수, 김지회 등 여순반군의 지휘부가 모두 전사하고궤멸상태에서 다시 피아골 구례군당 트로 들어온다.

이 때 소설 '빨치산의 딸' 에서 말하듯이이옥남, 정운창을 처음 만난다.

 ... 53 년 8 월30 일 제 5 지구당 해체와 두 부대 (김지회부대와 박종하부대) 의 생존 전투대원 23 명은이현상의 호위대장이던김태규의 인솔로 구례군당유격대로 보내졌다.

53 년 9 월17 일 이현상은 빗점골에서 전사한다.

   트, 산사람, 빨치산, 이현상, 정운창, 이옥남...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 을 가르키는 추상명사였다.

 이 땅의 서러운 반동 (反動) 의 역사...    >출판사 소개글... └ 접기 그러나, 전남·북과 경남 일원에는 지리산이라는 험악한 산세에 웅거한 공비들이 자주 출몰하여 민심교란과 치안질서 문란을 야기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953년 4월 6일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사령부 설치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동년 5월 1일 이하영 경무관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사령부(이하 ‘서전사’)가 전북 남원에서 창설되었다.

 1951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붙잡힌 빨치산과 부역자들. 지리산 토벌대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작전 개시 사흘째인 12월 4일 본격적으로 지리산 일대에 숨어 있던 빨치산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종군작가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려 있다.

 내용.1. 서전사의 편성 서전사는 본부와 4개 전투연대로 편성되었으며, 본부에는 경무과·수사사찰과·작전과·정보과·보급과·통신과를 두었다.

서전사의 관할지역은 전남의 순천·승주·광양·곡성·구례, 전북의 남원·장수·임실·순창, 경남의 함양·거창·산청·하동등지로 이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총괄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 창설된 4개 전투연대는 남원군 운봉면에 제1연대, 남원군 주천면에 제2연대, 순천시에 제3연대, 함양군에 제5연대를 각각 두었고, 창설 당시 대원수는 총 5,383명이었다.

  2. 서남지구의 빨치산 서전사 설치 당시, 이 지역에는 이현상이 지휘하는 소위 ‘남부군’을 기간으로 여순반란사건의 패잔병과 북한군의 남침 당시 지방부역자 및 남하인민유격대 패잔병 등이 암약하고 있었다.

1953년 4월 30일 현재 완전무장공비 668명, 비무장공비 282명 합계 950명이 각각 집단을  이루어 지리산·백운산·백웅산·회문산·덕유산 등 산악밀림지역에 거점을 두고 준동하고 있었다.

이 공비들은 후방의 민심을 교란하여 정치·경제 및 군사적으로 다각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써 군사력의 분산은 물론 국민총화를 저해하고 있어 정부에서는 수차에 걸쳐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한 바 있으나, 살아남은 자들은 소위 정예·악질분자들로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북한의 김일성은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출신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따라서 남한 공비의 총수인 제5지구당위원장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되면서 빨치산의 남부군 내부에서도 파란이 일고 있었다.

  3. 서전사의 활동 개요 빨치산의 전투력에 비해 창설 초기 서전사의 전투능력은 상당히 낮았으므로 산악전에 대비하여 유격훈련을 실시하였고, 지리산 일대의 산악지형에 익숙한 대원들을 해당 부대에 배속시켰다.

그리하여 빨치산 방어위주의 작전에서 벗어나 일선 지휘본부를 빨치산의 근거지로 전진배치하고 수색전과 매복전을 병행하는 공세적인 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이런 작전의 결과 빨치산의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자기들끼리의 결속력도 상당부분 와해되었다.

그러나 서전사의 공세가 심해질수록 식량부족으로 애를 먹던 빨치산들이 인근 민가를 침입하여 곡식과 가축을 절취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준 바 있다.

 서전사는 이형련 생포전, 이현상 사살전, 이영회 부대 섬멸작전, 평원리 매복전투, 산척 공비생포 작전, 여주 한은지점 습격공비 추적작전, 문정리 지구 전투, 웅천리 수색작전, 마천지구 수색전투, 내암리 전투, 교동초등학교 앞 사격전, 추정리 수색작전, 와룡산 매복 생포작전, 북다랑 공비 생포작전, 선운사지구 수색작전, 마천지구 잔비 섬멸작전, 내원부락 납치민간인 수색작전 등과 같은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빨치산들을 궤멸시켰다.

 특히, 이현상 사살전과 이영회 부대 섬멸작전은 대 빨치산 작전의 전기를 바꾸어 놓은 전투이므로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현상은 빨치산의 최고 수뇌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의 생포 없이는 지리산을 평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고, 그의 생포에 큰 현상금을 내걸 정도였다.

서전사 예하 제2연대 수색대는 생포한 공비로부터 이현상이 지리산 벽점골에 은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철저히 분석하여 이현상 생포작전에 돌입했다.

9월 5일부터 시작된 이 작전은 약 2주간 별 성과없이 수색만 계속하다가 9월 18일 11:00경 속칭 ‘갈매기봉’ 방면으로부터 이현상 일당이 10m 간격을 두고 남하하는 것을 발견하고 약 15m까지 근접시켜 일대사격을 가하였다.

약 3분간의 교전 끝에 이현상이 사살된 것이다.

이현상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전쟁이 끝났다는 심리적 효과를 주었고, 전투에 참가하고 있던 경찰과 군인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반대로 지리산 일대와 경북 동북부 산악지역 및 강원지역에 남아있던 빨치산들에게는 큰 지도자를 잃어 심리적 위축을 가져온 전투였다.

 1953년 11월 하순 경남 의령군 일대에서 이영회 부대가 민심교란과 보급을 목적으로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 부대는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빨치산 부대로 이들은 11월 23일 두 대의 트럭을 빼앗아 나누어 타고 오후 5시경 의령경찰서를 급습하였다.

이영회 일당은 경찰서 유치장을 부수었고, 이어 군청·우체국·금융조합·정미소 등을 불태웠다.

이후 오후 7시경 의령읍을 떠나 인근의 용덕지서와 정곡지서를 습격·소각하고, 합천방면으로 북상하면서 합천경찰서 경찰대와 육군 제56연대와 세 차례 교전을 벌였다.

이에 서전사 사령부는 서전사와 인근 시군의 전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이영회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포위에 성공한 경찰과 국군은 11월 28일 밤 10시 40분경부터 전투를 시작하여 산청군 신등면 양공리 뒷산에서 이영회를 사살하고, 이어 12월 1일까지 나머지 잔당들을 전원 사살하였다.

  4. 동계 대토벌작전 공비섬멸작전은 주로 겨울철에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험악한 산세와 밀림이라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공비들을 섬멸하기가 용이하지 않아 낙엽이 지는 가을부터 겨울 및 초봄이 작전을 펼치기가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빨치산을 섬멸하고 후방지역의 치안을 확보한다는 목표아래 서전사와 남부지구 경비사령부, 육군 제5사단이 공동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약 8백여 명 정도였던 지리산 지구 빨치산은 작전이 종료될 시점에는 140명으로 줄어들었다.

1954년 1월 방준표(전북도당 위원장)가 남덕유산에서 사살된 것을 시작으로 조병하(경남도당 위원장, 2월 6일 지리산에서 체포, 5월 총살), 김선우 (전남도당 위원장, 2월 27일 백운산에서 자살), 박영발(전남도당 위원장, 제5지구당 부위원장, 3월 뱀사골에서 자살) 등 빨치산 지휘부를 이루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사살되거나 군경에 포위되어 자살하였다.

이 기간 동안 경찰은 348명의 빨치산을 사살하고 107명을 생포하였으며, 93명을 귀순시켰다.

  빨치산의 최고 수뇌 이현상. 당시에 보도된 이현상 최후 기사. 역사적 의의.서전사의 활약으로 지리산 지구의 공비들은 궤멸되었지만, 이 작전을 전개하는 동안에 아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경찰과 군인 및 민간인 6,333명이 산화하였고, 동계 작전으로 많은 군경이 부상을 당하거나 동상을 입었다.

 겨울철 대토벌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빨치산의 주력 대부분이 궤멸됨에 따라 서전사는 1955년 7월 1일 해체되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빨치산들은 끈질기게 활동을 계속하였다.

1955년 7월 이후 분산된 빨치산들이 재집결해 조직을 복구하고 활동을 강화할 기미를 보임에 따라 서전사를 대체할 기동부대를 편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955년 6월 28일 국회에 「경찰직무응원법」이 상정·통과되었다.

이 법률에 근거해 경찰기동대가 1955년 7월 1일 창설되었다.

이후 경찰기동대는 국내치안상황이 호전됨에 따라 창설 1년 2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참고자료.경찰청,《한국경찰60년사》, 2006 내무부 치안국,《한국경찰사Ⅱ》 광명인쇄공사, 1973대한민국참전경찰유공자회 편,《아

살아있다! 대한민국 경찰의 혼: 경찰전사》 사, 2003차길진,《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 기린원, 1990글/전대양(관동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출판사 창고에 쌓여 있던 책들은 정보기관이 빼앗아 갔다.

 절판됐던 책이 2005 년 다시금 세상으로 나왔다.

  내가 읽은 빨치산 이야기... 지리산 (이병주), 남부군 (이태), 이현상 평전 (안재성),이번에, 빨치산의 딸 (정지아),다음엔, 남도 빨치산 (정관호) 을 읽어봐야겠다.

  내 고향 전라남도, 내 마음의 고향 지리산, 그곳에 해방전후사와 6.25 전후사가 있다.

    저자 정지아...정지아는 빨치산, 그것도 6.25 전에 입산한 구빨치산의 딸이다.

 지아, 남부군의 거점 지리산과 전남도당의 거점 백아산,본인 말로는 '지리산과 백아산을 품안에' 이라나... 1965 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녀의 성장기에 아버지는 사상범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집에는 수시로 형사들이 들락거렸다.

한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부모님의 삶은 그녀의 삶에도 그늘을 드리웠다.

연좌제로 자식의 삶까지 비틀리게 만든 독재정권 치하에서 대학생이 된 그녀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청춘을 보냈다.

 졸업 후 부모님의 삶을 소설로 옮긴 '빨치산의 딸' 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으나,몇 년간의 수배생활 끝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실로 복귀했다.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운동세력의 부침 속에 20 대를 떠나보내며 침묵하다가1996 년 신춘문예에 단편 '고욤나무' 를 당선시키며 다시 창작활동을 시작했고,2004 년에는 소설집'행복' 을 출간했다.

 정지아의 아버지는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낸 정운창 (남로당 가명 유혁운) 이고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을 지낸 이옥남 (가명 이옥자) 이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소설은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 라고 한다.

소설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사실적인 증언에 의거했다나...       소설 속의 그, 정운창...그는 2008. 5. 1. 눈을 감았다.

 1928 년 구례 문척면 출생, 철도학교를 졸업했으며 철도노동자로 일했다.

유혁운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며 1948 년 5.10 단선 이후 야산대를 거쳐 유격투쟁 대열에 참가했고주로 백운산 지역에서 활동 (특각 비서과장) 했다.

그 뒤 봉두산, 백아산 (지구 부책) 을 거쳐  6.25 뒤 도당 노동부 지도위원으로 일한다.

전시 평양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후퇴과정에서 다시 입산.재산 활동 중 곡성군당위원장, 도당 조직부 부부장 (봉두산 분트책) 을 지냈다.

그 뒤 지하활동을 위해 하산 활동 중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4.19 직후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도 통일을 염원했다.

그는 한 시대의 역사를 몸으로 기록했으며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소설속 정운창의 말이다.

 저는 지하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한 사람입니다.

대중과 같이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임무입니다.

 정운창은 1957. 7. 4. '전술적인' 전향을 하였다.

1,400 명이 넘는 좌익수 중 100 여 명만이 전향을 거부하였다.

    소설 속의 그녀, 이옥남...2008 년 9 월 이현상 선생의 제에 참석했을 때 모습이다.

 1926년 생, 1943 년 18 세 되던 해최규복과 결혼했다.

최윤호로 불렸던 남편최규복은 이현상 부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며한국전쟁 기간 중 낙동강 도하를 위해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47 년 7 월 구례 광의면 여맹위원장이 됐고,48 년 아들 출산 후 여순사건을 주도한 세력들과 함께 지리산에 입산했다.

49 년 빨치산 활동 중 아들을 잃었고, 시아버지는 경찰에 총살당했으며시동생들도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나 살아남지 못했다.

50 년 남부군 정치지도원이 되어 지하활동을 목적으로 경남도당으로 옮겨가던 53 년까지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선생을 보좌한다.

54 년 4 월 환자트에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하산하게 된다.

이후 정운창 선생을 만나 동지로서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살아간다.

    피아골 구례군당 유격대 트...이제껏 남아있을리는 없고 복원한 것이다.

 그림들을 모셔온 곳은 블로그 '진달래 산천' 이다.

블로그 주인장에 따르면 구례군당 유격대 트를 갈려면... 피아골 삼홍소 다리 건너기 전 잘 살펴 보면 흰 빨랫줄 같은게 보입니다.

그줄을 따라 한 이십분 올라가면 트가 나옵니다.

 작년 가을 피아골에 가보니 정말 빨래줄이 보였다.

그러나 동네 산악회를 따라간지라 시간 탓으로 가보지는 못했다.

 트에 관한 주인장 소개이다.

 구례군당유격대와 이현상부대는 처음과 끝이 맞물려 있다.

 여순반군을 이끌고 처음 문수골로 들어온 이현상은 피아골에서 겨울을 넘기고49 년 3.1 절 기념투쟁으로 거창까지 진출했다가 지리산 뱀사골 반선에서 토벌대에게 걸려홍순석, 지창수, 김지회 등 여순반군의 지휘부가 모두 전사하고궤멸상태에서 다시 피아골 구례군당 트로 들어온다.

이 때 소설 '빨치산의 딸' 에서 말하듯이이옥남, 정운창을 처음 만난다.

 ... 53 년 8 월30 일 제 5 지구당 해체와 두 부대 (김지회부대와 박종하부대) 의 생존 전투대원 23 명은이현상의 호위대장이던김태규의 인솔로 구례군당유격대로 보내졌다.

53 년 9 월17 일 이현상은 빗점골에서 전사한다.

   트, 산사람, 빨치산, 이현상, 정운창, 이옥남...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 을 가르키는 추상명사였다.

 이 땅의 서러운 반동 (反動) 의 역사...    >출판사 소개글... └ 접기공산측이나 미국 모두 휴전을 원했기 때문에개성과 판문점에서는 휴전 협정이 시작되고 있었고양측 모두 무리한 군사작전은 자제하는 터라전선은 그대로 고착되어 갔다.

이럴 때 미국은 남쪽에는 원조물자를, 북쪽에는 폭탄을 뿌리고 있었다.

▲ 미국의 구호물자 + 미군의 폭탄공산측은 미군의 화력에 버텨내기 위해서전선마다 참호를 파며 무려 130만 명의 병력을 때려 박고 있었다.

"믿을 건 인해전술밖에 없다해."이승만은 이런 시간을 체제 안정과 독재권력 강화에 쏟고자 했다.

 ▲ 빨치산 토벌 + 버스째로 연행된 국회의원들때문에 그동안 신경 쓰지 못한남한 내 빨치산을 토벌하고또 장기 집권을 위한 정치적 파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 빨치산은 왜 생겨났을까?빨치산은 정식 군인이 아닌,군복이나 계급장도 없이 자체적으로 결성된 무장부대를 말한다.

"민중 중심의 부대가 아니기 때문에시민군이나 민병대와는 다른 성격의 무장단체임."같은 말로 '게릴라' 혹은 '유격대'라고도 말하고러시아어로 '파르티잔'이라고 말하는데,이걸 음차해서 '빨치산'이 된 것이다.

▲ 2차대전 중 소련의 파르티잔"의외로 산(山) 이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있지만.."그런데 남한 내 빨치산은 애초에 북한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단체였다.

"?�?"사연은 이렇다.

남한 내 공산당의 당수였던 박헌영이1946년 말, 미군정의 탄압에 못 이겨 월북을 하게 되자▲ 조선공산당 행사 : 가운데 박헌영곧 공산당은 불법 단체로 선포되었고이때부터 공산당은 '남로당'이란 이름의지하 비밀조직으로 변모하게 된다.

▲ 공산당원들의 대대적인 검거 (1946년 10월)그러다가 1948년 초부터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한다는 목적으로남로당은 각종 시위와 대중 선동에 앞장서게 되는데"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모두 남로당 세력과 관련이 있지."정부는 이때부터 남로당과 좌익의 뿌리를 뽑기 위해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게 된다.

 "1948년초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좌익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총 10만 명이 학살된다능."(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p.27)때문에 남로당원과 좌익들은살기 위해서 산으로 숨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남한 내 빨치산의 시초였다.

▲ 지리산에 만들어진 아지트이후 북한의 박헌영은 남한 내 빨치산을 돕겠다며 무장간첩을 남파하며 보급품을 지원해주었고 고문관을 파견해군사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오히려 정부의 대대적인 소탕으로 인해전국의 빨치산은 수백 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지리산 일대의 팻말 : "이 지역은 게릴라가 소탕됐으므로 안심해도 좋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북한이 빠른 속도로 남한을 점령하게 되자산속에 숨어있던 빨치산들은 그제야 해방감을 맛보며 산에서 내려올 수가 있었다.

"드디어 공화국의 세상이 왔다!"이때 빨치산들은 한풀이라도 하듯이경찰서와 관공서들을 테러하고심지어 미군 기관을 습격해100여 명을 살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기쁨은3개월을 넘지 못했다.

다시 전황은 역전이 되었고궁지에 몰린 공산군은 빠르게 후퇴해야만 했다.

빨치산 출신들도다시 산으로 들어가야만 했었다.

"아놔."여기에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퇴로가 차단된 인민군들도 합세했다.

그렇게 산으로 들어간 이들이 무려 만 5천여 명에 이르게 된다.

 "흔히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을 구빨치,이후를 신빨치라고 하면서 구분한다능."이후 산으로 들어간 이들에게 북한은 지령을 내린다.

 박헌영"인민 군대가 다시 수복할 때까지제 2전선을 구축하여 후방을 교란하라능!"때문에 초기만 해도(1950년 하반기)빨치산들은 남한의 교도소를 털고도청소재지를 장악하는 등 어느 정도 후방교란 작전을 행하고 있었다.

 > 더 보기 └ 접기● 산 아래 주민들하지만 빨치산의 '후방 교란작전'은한계점이 뚜렷했다.

애초에 물자가 부족했고보급 자체가 전혀 없었던 군대였기 때문에점점 상황은 열악해져 갔고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라도이들은 산 아래의 마을을 약탈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정부는 민중에 대한 이해심이 전혀 없었다.

산 아래,약탈 당하는 마을 주민들을오히려 공비와 협조하는 이른바 '통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기 위해 강제 징용을 해야 했던 사람들을부역자로 몰아 처단했던 경우와 같은 셈이었지."때문에 당시 지리산 자락 주민들의 삶은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낮에는 대한민국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밤에는 빨치산에게 숨겨둔 양식을 빼앗겼고다음날 아침에는 토벌대에게무서운 고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공비토벌과 양민학살● 함평 학살 사건지리산이 빨치산 투쟁의 본거지가 되면서애꿎은 민간인들까지 전쟁에 휘말려들어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었다.

공비 토벌 작전을 하던 국군이마을 주민을 학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리산 토벌을 맡았던 부대는 국군 11사단이었고, 사단장은 최덕신이었다.

▲ 최덕신은 1989년 월북하였고 현재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토벌대는 1950년 11월 전북 남원에서 90명의 주민을 학살한데 이어12월에는 전남 함평에서도 유사한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사건은 이러했다.

전남 함평 일대에서빨치산 소탕 작전을 펼치던 토벌대들은도중에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그만 대원 2명이 전사하게 된다.

그러자 격분한 토벌대들은애꿎은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보복에 나섰으니,군인들은 마을을 돌며 집을 불태워버렸다.

"살고 싶거든 모두 모여라!"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전부 논바닥으로 끌려오게 된다.

"시방 왜 그란데요?""시끄러! 공비넘들아!" 그러더니 군인들은 다짜고짜 기관총을 쏘아대는 것이 아닌가!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50여 명의 주민이 학살을 당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다음날에도 인근 7개 부락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주민들을 불렀다.

"주민들은 모두 모여라!우리는 지금 도로 공사를 하러 간다!"총으로 위협하자놀란 주민들은 황급히 뛰어나올 수밖에 없었고그렇게 주민 700여 명을 마을 뒷동산에 집결시켜이 중에서 12

13세 되는 아이들만 따로 불러서마을 집집마다 불을 지르라고 내려보냈다.

"너희들은 내려가서 온 마을을 불태우도록!"그리고 나더니 군인이나 경찰 가족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돌아가도 좋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은?모두 죽어야만 했다.

이때부터 엽기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인솔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살고 싶은 사람들은 도망가도 좋다!""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모두 살려주겠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50여 명이 일어나 달렸다.

하지만 군인들을 일제히 사격했고도주한 사람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에이, 하느님이 인정이 없으셨네.""좋아, 또 한번 기회를 주지.살고 싶은 사람은 어서 도망가 봐!"이번에는 10여 명이 일어나 동네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그들의 등을 향해 다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그런 식으로 52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것이 천인공노할 함평학살의 실체다.

☞ 참고● 왜 양민들을 학살했던 것일까?여기서 의문이 든다.

왜 이토록 사람이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단지 보복 차원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사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지휘부의 어처구니없는 명령 때문이었다.

당시 사단장은, 공비와 결탁한 마을은 모조리 불태워 없애라는 '초토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최덕신"작전명은 견벽청야!"> 더 보기 └ 접기 구체적으로 지휘부의 명령은 이러했다.

"작전지역 내 사람들은 전원 총살하라!""작전지역 내 건물들은 모두 불태워라!""작전지역 내 식량과 물자는 후송이 불가능하거든 모두 불태워라!"여기에 지휘부는 각 부대에게할당량까지 지시했다.

"하루에 공비 50명 이상을 사살하고,무기 50점 이상을 노획할 것!"이러했으니 군인들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손쉬운 전과'를 택하게 되었고민간인들을 학살한 뒤에는괭이와 삽을 수거해 이를 노획된 무기로 신고했던 것이다.

● 골로 간 사람들함평에서 민간인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500동을 불태웠던 학살극은2개월 후 지리산 자락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이번에도 같은 부대가 저지른 것이었다.

당시 거창·함양·산청 등 지리산 일대의 곳곳에서 학살극이 일어났기 때문에 총 사망자 수는 가늠하기도 어렵지만그중에서도 세상에 폭로되어대중들에게 알려진 사건이 바로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다.

과연 어떤 사건이었을까?때는 1951년 2월 초, 어느 겨울이었다.

11사단 소속의 공비토벌대는 거창·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 지역에서 공비 소탕 작전을 펼치기로 하고거창 신원면에 토벌대를 주둔시키고지역 경찰과 청년 의용대를 진주하게 했다.

하지만 빨치산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자,토벌대는 경찰과 의용대 병력을 남기고 곧 다른 곳으로 떴다.

"이 동네는 빨치산들이 한명도 안 보이네."그러나 토벌대가 신원면을 떠나자마자 빨치산들은 그날 밤, 기다렸다는 듯이 습격해 경찰과 교전을 하게 되었고▲ 빨치산의 습격 : 영화 '남부군'의 장면경찰과 의용대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다시 토벌대는 신원면에 진주하게 된다.

▲ 토벌대 : 영화 '남부군'의 장면"아오, 짜증 나는 것들!어떻게 여기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거지?"토벌대는 신원면 주민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토벌대의 대장 한동석 소령은신원면 일대의 주민 1천여 명을 신원초등학교로 소집했다.

"이놈들 내통하는게 분명해. 본때를 보여주겠어."당시 토벌대는, 안전 지역으로 피난시켜준다는 명목으로주민들을 소집하고 있었다.

"자, 어서 따라오세요.""마, 갑시데이. 군인들이 지켜준다는데.." 그렇게 안심하고 남녀노소 모두 따라갔다.

다만 젊은 남자들은 괜히 마을에 남아 있다가는행여 빨치산으로 몰릴까 봐 두려워대부분 피신을 한 뒤였기 때문에모인 주민의 대부분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마, 젊은 사람이야 의심을 받더라도설마 여자들이랑 노인, 아들까지 의심하겠노."이런 심리였다.

 하지만 토벌대에게 그런 아량은 애당초 없었다.

한동석 소령은 지서 주임과 관할 순경에게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을 골라내게 했다.

"이중에 군경가족 있음?"그러자 몇 가족이 나왔다.

확인해보니 사실이었다.

또 몇 사람이 나왔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군경 가족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얻다 대고 사기 치는 거야!"그때 마을 면장이 나섰다.

그는 군인들에게 과잉 충성이라도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네가 무슨 군경가족이가."다짜고짜 한 사람을 끌어냈다.

"네도 무슨 군경가족이란 말이가."그렇게 또 한 사람을 끌어냈다.

결국 마을 면장의 삐딱한 충성심 때문에몇 사람들이 더 화를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후 700여 명의 주민들은인근 야산의 골짜기로 끌려갔다.

한국 전쟁 때 생긴 말 가운데 '골로 간다'는 말이 있다.

산골짜기로 끌려간다는 뜻이었고이는 곧 죽으러 간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당시 골로 간 사람들은끝까지 설마 했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함부로 학살한다는 것은도저히 상식적으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짜기에 도착하자, 기관총은 울려 퍼졌고당황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쓰러져 버렸다.

● 세상에 알려진, 거창양민학살 사건군인들은 학살을 마친 후 증거인멸을 위해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여기에 시체더미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기도 했다.

이후 학살 지역의 출입을 막아외부로부터 일체 차단했고생존 주민들에게는 학살에 대해 발설할 경우 공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때문에 거창양민학살 사건은그렇게 은폐되어버릴 사건이었다.

하지만 학살 현장에서는 기적적으로 시체더미에서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

또 잠시 친척 집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결국 억울함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뜻을 모아, 당시 거창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신중목을 찾아가 눈물로 호소했다.

 "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다 죽였심더."충격적인 말이었다.

 신중목"그런 일이 있었던가!"이후 신중목은 부산에서 열린 임시국회에서사건을 세상에 공개하게 된다.

 신중목"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그러자 국회는 발칵 뒤집혔고긴급히 조사단을 꾸려 거창 지역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군 관계자들은 한사코 양민학살은 없었다며 부인했다.

 "설마요, 빨치산 넘들이 국군으로 위장하고 벌인 일이겠죠."그러나 조사결과학살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음이 밝혀졌다.

"맞심미더. 그런 일이 있었심더.""군인들이 사람만 죽인 게 아니고부녀자들을 강간하고, 물건도 훔쳐가뿔고 그랬심더."하지만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오히려 화를 냈다.

 신성모"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이런 일이 외국에 알려지면 나라 망신입니다!" 신성모"가뜩이나 한창 전쟁 중인데군인들 사기도 생각해야지.."한술 더 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성모"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통비분자들이었다고요!"그러나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 등을 통해곧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때문에 대충 넘어갈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당시 이승만은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화를 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이승만"거창 사건 때문에 나라의 체면이 손상당했어." 이승만"장관들끼리 제대로 협력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니오."화를 낸 이유인즉,학살자 수를 두고국방부는 225명, 법무부는 275명, 내무부는 350명 등으로왜 입을 맞추지 못해 세간에 불신을 사게했냐는 것이었다.

결국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이 옷을 벗었다.

하지만 사건의 당사자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끝까지 무사했다.

그렇다면 해당 관련자들은 어떤 식으로 처벌했을까?해외 언론에 보고된 만큼 정부는 마냥 쉬쉬할 수만은 없었다.

군인들은 곧 군사재판에 넘겨졌으니11사단장 최덕신은 직위 해제,대대장 한동석은 징역 10년이 떨어졌다.

하지만 실제 학살을 집행한 소위는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은 게 전부였다.

뿐만 아니다.

최덕신과 한동석 등 모든 관련자들은, 실제로 1년도 복역하지 않았고 전부 특사로 풀려나 현역에 복귀하게 된다.

● 거창학살사건의 뒷얘기당시 미군부대 통역관이었던 언론인 리영희는 거창 사건을 이렇게 술회한다.

 리영희"어째서 이 나라에서는 인간 말살의 범죄가'공비'나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이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가!" 리영희"거창양민학살을 주도한 관련자는 1년도 복역하지 않고 석방되었다.

" 리영희"광신적 반공주의 속에 휴머니즘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한편 거창학살사건은 10년 뒤 4.19 혁명이 발발하면서 다시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어째서일까?1960년 4.19 혁명이 발발하자거창학살사건 당시, 경찰가족이 아니라고고자질했던 신원면 면장이유족들에 의해 타살되어 불태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명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박명림"억압의 실체(이승만)가 소멸했을 때인간의 증오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묻게 되는 장면이다.

" 박명림"사건 10년이 지난 시점에서신원면 면장에 대한 소살은.." 박명림"민주주의 공간이 열렸을 때, 절제와 이성을 압도하고도 남는 분노의 크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 그 후 거창에서는진상 규명과 학살당한 이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목소리가 불거져 나왔고학살 당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피학살자 합동묘지도 만들어졌다.

▲ 거창 피학살자 합동묘하지만 5.16으로 쿠데타가 발생하고군사 정부가 들어서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너희들이 감히 국군의 명예를 실추시켜?"오히려 군사정부는 유족회 관계자들을 전부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아넣고 말았다.

"이런 빨갱이넘들!"그러면서 합동묘지도 해체해버렸다.

그 뒤로 36년 동안이나 거창사건은 입 밖으로 내서는 안될 금기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지난 역사였다.

빨치산 토벌● 지리산 토벌대51년 7월 이후전쟁이 소강상태가 진행되면서정부는 산악 지대에 파고든 빨치산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로 나섰으니, 이승만"더 이상 빨치산들을 방치할 수 없다.

"51년 11월 백선엽이 지리산 토벌군 사령관으로 차출되었고최전선의 2개 사단도 토벌군으로 차출되었다.

이승만이 미군에게 간곡히 요청해서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승만"전선도 중요하지만 후방의 불순분자들을 소탕하는 것도 중요합네다.

"이에 미군은 흔쾌히 받아주었고토벌작전에 고문단을 파견해주고선전전도 미군이 맡아서 했다.

"OK!"그리하여 미군은 남원에 방송시설을 만들어투항 권유 방송을 송출했으며투항 권유 전단지를 도쿄에서 인쇄해 공수해 와▲ 지리산 일대를 헬기를 타며 뿌렸던 투항 권유 삐라지리산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의엄청난 삐라를 공중에서 살포했다.

당시 뿌려진 삐라만 모두 992만장이었다.

(백선엽, 백선엽 회고록 p.221)삐라들 중에는'한 장이면 몇 사람이라도 통할 수 있다'는 식의 '귀순증'도 있었다.

그렇다면 빨치산들은 이런 삐라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당시 삐라 용지는 눈과 빗물에 견디도록 두껍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제법 내구성이 좋았다.

때문에 빨치산들은 삐라를 주워다가담배 마는데 쓰거나연락문이나 기록 용지로 썼다가용변 후의 뒤처리용으로 쓰거나불쏘시개로도 썼다가여성대원의 생리용으로까지 쓰는 등매우 다양하게 이용했다.

"오히려 고맙네. 이런 것까지 뿌려주고."때문에 '귀순증'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닌다고 해도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담배는 어쩌다가 농가에서 잎담배를 입수할 때도 있었지만대부분은 마른 단풍잎을 부셔서삐라 종이로 말아 피웠다.

하지만 단풍잎도 아무 데나 있지는 않기 때문에빨치산들은 단풍잎도 쌈지에 넣고 다녔다.

(이태, 남부군 : 지리산 빨치산 수기 p.443

444)한편 당시 토벌대는 모두 3개 사단 4만여 명의 병력으로주요 능선과 골짜기마다 들어섰기 때문에그 넓다는 지리산이 밤만 되면 토벌대의 모닥불로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장식되었고혹은 연등행렬처럼 늘어졌기 때문에빨치산들은 위협적인 장면에도 불구하고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 빨치산의 실체빨치산 대원들은 여성의 비율이 10% 정도로여성 대원의 숫자가 적지 않은 편이었다.

연령은 20대가 절반 이상이었고그 다음으로 30대가 많았다.

10대 대원들도 15% 정도가 있었다.

문맹률이 70

80%이던 시절인데도문맹은 거의 없었다고 하니당시로서는 나름 인텔리 층이었던 것이다.

▲ 영화 남부군의 장면"역시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최소한 글은 알아야.."하지만 대부분은 빈농 출신이었고전문대 이상을 졸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 빨치산 아지트그렇게 따져보면,해방 직후

한국전쟁 이전까지 사회계층은 최상위 기득권 층 : 자본주의자 (15%)차상위 기초교육을 받은 계층 : 공산주의자 (10%)나머지 대부분 문맹자 : 사회주의자 (70

80%)라는 식으로 개략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는 일이다.

이는 미군정에서 실시한여론조사 결과와도 얼추 비슷한 비율이다.

 물론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자는 소멸하고대다수의 사회주의자는 곧 반공주의자가 되지만 말이다.

한편 당시 지리산에는 여자들로만 편성도 전투부대도 있었는데이들은 생각보다 호전적이고때로는 매우 잔인했다고 하는데,여자 부대는 저마다 M-1 소총과 비슷한 성능의 총을 들고 있었고▲영화 '남부군'의 장면같이 밥을 굶어도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오래 살았고부상을 당해 창자가 나와도 여자들이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또 부상을 당했을 때 여자들은제발 죽이고 가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 1950년 4월 체포된 오대산 여자빨치산. 이들은 1시간 뒤에 즉결 총살됐다.

당시 빨치산들은 부상을 당해민폐 캐릭이 되면 군말 없이 죽어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다는데이때도 여성들은 여자답지(?)않게꽤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영화 '남부군'의 장면그런가 하면 여자들이라서 오히려 더 잔인한 모습도 있었다.

특히 포로를 죽일 때면여성들은 보통 포로의 귀를 자르고 코를 자르는 식으로 가혹했고총탄이 아깝다고 돌로 때려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토벌대에게 붙들리게 되면보통 윤간을 당하고 총창으로 가슴이 도려지는 등본인들도 잔혹하게 당했기 때문에 복수심 때문에라도 잔인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p.252)▲ 당시 사용하던 아지트 (복원)어쨌든 잔인함이양쪽 다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자들도 포로수용소에 와서는언제 그랬느냐는 듯▲ 포로수용소의 여자 빨치산저마다 여성스럽게 피어난 걸 보면 사뭇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p.252)한편 빨치산들은 생각보다 인근 마을에 지하조직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이태"빨치산은 냄새도 다르고 육체도 다르다.

그래서 도저히 일반인 행세를 할 수가 없었어요." 이태"특히 빨치산들은 발바닥에 두꺼운 살이 겹겹이 쌓여서 맨발로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고 그랬다.

"● 빨치산들의 최후빨치산 토벌은 52년 1월까지 행해졌으니한때 만 5천 명이던 빨치산의 수는5천 명으로 급감하게 되었다.

▲ 빨치산 모형당시 육본 자료에 의하면 사살 5,800명, 포로 5,700명 정도였다.

이후로도 빨치산 토벌은 계속되었는데한때 정부는 귀순 빨치산들로 구성된'보아라 부대'를 결성하기도 했었다.

▲ 빨치산 모형'보아라 부대'라고 명칭한 것은귀순하면 너희도 이렇게 활약을 할 수 있으니똑똑히 보고 투항하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보아라 출신의 토벌대의 활약이괜찮았던 모양이다.

빨치산의 전설적인 인물이자 남부군의 우두머리인, 이현상을 사살하게 된 것이다.

(53년 9월)▲ 이현상다만 끝까지 의리가 남아 있었는지,토벌대는 이현상을 사살한 후시체에 대고 거수경례를 하면서"선생님 죄송합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 붙잡힌 빨치산들당시만 해도 이현상은 축지법을 쓰고 다닌다는 등 신출귀몰한 인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사망 당시 이현상은, 부상을 당해 절뚝거리는 등한낱 나약한 중년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이현상이 사살되자지리산의 빨치산은 급격히 와해된다.

▲ 1953년 9월 이현상의 죽음으로 사실상 지리산 빨치산은 해체된다.

사실 이들은 철저히 버림받은 존재였다.

한국 정부는 빨치산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 나머지휴전 협상에서 북한에게이들을 데려가라고까지 말했었다.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은 한사코 거부했다.

▲ 휴전협상고작 북한에서 이들 빨치산에게 내렸던 지시는"하산해서 지하활동을 하라."라는 식의무책임한 말뿐이었다.

하지만 빨치산들의 몰골은 하나같이 거지꼴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내려가는 즉시 경찰에게 붙들리고 마는 신세였다.

▲ 영화 '남부군'의 장면게다가 무사히 산을 벗어난다 한들딱히 갈 곳도 없었다.

산을 내려가라는 말은곧 '하루빨리 죽으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 '여명의 눈동자'의 엔딩 장면 : 빨치산이 된 주인공의 최후빨치산의 최후와 관련해서고은의 애절한 시가 있다.

 ▲ 피아골피아골로 떠난 남편은전 남로당 소속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몰래 내려와서하룻밤 자고 날이 밝기 무섭게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 때 정했다.

검은 빨래를 널어두면 위험한 것이고흰 빨래를 널면 안전하다는 것으로그렇게 몇달 동안빨래를 통해 남편은 왔다갔다 했는데그 뒤 아무리 흰 빨래를 널어도남편은 오지 않았다.

그날 밤도 그날 밤도늦단풍 지리산 피아골 아래아이 밴 아낙 뱃속에서 꿈틀 노는 아이한테눈물바람 거두며 말했다.

"니 아부지 오라고 너도 빌어라.뱃속에서 빌어라."해가 져도 흰 빨래를 걷지 않았다.

 (고은 만인보 17편 p.42

43) 이러한 빨치산 토벌은 54년 4월 완료되었음을 공식 선포하였고,거창에서는 공비토벌을 축하하는축제가 거행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6년에 빨치산 1명이 사살되고, 2명이 생포되었고▲ 영화 '피아골'의 장면 : 빨치산을 다룬 최초의 영화63년에 마지막 빨치산이자 지리산의 전설로 알려진, 여자 빨치산 정순덕이 지리산에서 입산 12년 만에 붙잡히게 된다.

 ▲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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