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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모



16. 13:29http://cafe.daum.net/sisaview/5Bd0/126 http://www.ilbe.com/622149472012.04.15 11:51:08 (*.47.*.155)24호랑이 장군, 한국의 패튼이라 불렸던 박정인 장군.그의 일대기를 짤막하게 나열해 보고자 한다.

                               1. 효율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두뇌를 지닌 지장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박정인 장군. 해방이 되고난 후 함흥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반공사건에 연루되면서 월남을 하게 된다.

육사 6기생으로 소위에 임관하여, 한국전쟁 당시에는 육본 작전장교(대위)로 전쟁에 참여했다.

낙동강벨트 방어전 당시 6사단 작전장교로 있으면서 성공적인 방어를 해냄과 동시에 북한군 연대들을 후퇴시켜버린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육사 동기들 중에서도 당시 180이 넘는 체구의 상당한 강골을 자랑했음은 물론이지만, 본업인 작전병과에서의 활약 또한 두드러졌다.

 2. 절대로 적에게 굴복하지 않는 강장낙동강벨트 방어전 이후 그는 소령으로 진급하나, 압록강 지역까지 북진하는 도중 불행하게도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당시 상황은 중공군에 포위된 1개 연대를 구출해내기 위한 구출작전이었으나, 중공군이 넘치는 병력과 기동력을 앞세워서 후방을 차단하는 바람에 사방의 포위를 뚫을 수 없었다.

연대는 거의 분해되고 연대장마저 전사했던 최악의 상황. 그러나 절대 북한군에게 정보를 넘겨줄 수 없다는 각오로 탈출을 감행하나 결국 붙잡혀버렸다.

그러나 압송 도중 그에 굴하지 않고 또다시 탈출을 감행.동료들과 함께 박정인 장군이 가까스로 본대로 복귀했던 당시 환경은 영하 40도에 가까운 극한의 환경과 360km가 넘는 거리였다.

 또한 그는 탈출하는 과정에서도 작전장교로써의 감각을 살려 곳곳에 산재한 북한군 기지와 병참라인 정보를 획득해서 싸그리 폭격시켜버림. 당시 폭격된 곳은 북한군 주요 거점들 중 하나이자 군수창이 있던 원산 지역으로써, 연합군 북진의 기회를 제공해주는데도 큰 기여를 했다.

                                               3. 3사단의 전설을 만든 장군이후 승승장구한 박정인장군은 3사단장으로 발령을 받는데, 강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처럼 이 때 이후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3사단이 만들어진다.

철저한 대비태세와 전투력, 그리고 확실한 주적관을 무엇보다 강조했던 박정인 장군의 대략적인 명령들은 이렇다.

 - 전장병 상시 철모착용 (언제나 전투태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총기보관대 자물쇠 죄다 없애버림 (전시에 언제나 총을 들고 뛰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총검술방향, 화장실, 장병막사, 포배치 전부 북쪽으로 돌려버림 (부모형제를 향해 총칼을 향하지 마라!)- 영내 구타, 도박, 외상술 금지 (군기는 언제나 철저하게 유지하라!)- 경례구호는 '백골'로 통일 (3사단 경례구호인 백골은 이때 확립됨) 원래가 북에서 월남한 반공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출신들이 주류였던 백골단은 사기, 전투태세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강군이었고, 여기에 박정인 장군의 지휘력과 사상이 더해지자 3사단은 더욱 더 강한 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3사단 18연대는 진백골이라 불리며, 현재까지도 한국전쟁 당시 단 한번의 패배도 없던 무패의 부대임을 자랑하고 있다.

                                                4. 북한군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 용장그가 연대장을 맡고 있던 때, 당시 군기는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은 심심하면 군사분계선을 넘어왔고, 아군은 그들과 때로 어울려 놀거나 담배나 술을 교환하기도 했다고.박정인 당시 연대장은 과감하게 부대 내 기강을 바로잡고, 특공소대를 조직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인민군을 싸그리 생포해 버렸다.

인민군이 항의를 하며 협박을 해오자 그는 '전차대 1개 연대가 있으니 한번 내려와 봐라!'라 일갈했고, 인민군은 더이상 저항치 못하고 후퇴했다.

 당시 그는 중대장들을 향해 흐트러진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대대장의 총과 무기는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라고 준 것이다! 적의 손가락이 넘어오면 손가락을 자르고, 발가락이 넘어오면 발가락을 잘라라!그것이 대한민국이 당신을 무장시킨 유일한 이유다! 차후 우리 지역에 넘어오는 적들은 즉각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아라!" 이런 정신자세를 높게 평가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장군 진급 후 친히 찾아가 공로를 치하하기도 했다.

                            5. 물러서지 않는 장군, 그러나..그렇게 군사적 대치 중이던 어느날, 북한군이 DMZ주변 아군들에게 무단으로 기습총격을 가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아군은 표지판 보수작업 하고 오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  이 보고를 듣자마자 박정인 사단장은 인민군에게 더이상 사격하지 말 것을 확성기로 권고하지만, 인민군 측에서는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정인 장군은 즉시 보복타격을 감행한다.

부상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연막탄을 뿌림과 동시에 정찰기를 띄운 후 155미리 곡사포 등 수단가능한 전투력을 총동원해서 적 진지를 통째로 날려버림.거기에다가 전 사단 내 차량을 다 끌고와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군사분계선 근처까지 돌진시켰고, 이에 기겁한 김일성은 전군 동원령까지 내렸었다 한다.

 이때 운지한 북한군의 숫자는 36명. 아군의 피해는 부상자 4명이었다.

이 전투는 휴전 이후 첫 전투였고, 그 뒤로 3사단지역에서의 도발은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또한 이를 계기로 당시부터 지금도 북한군은 3사단 백골부대를 마치 호성성님 대하듯 오줌을 지린다고 함.                                 하지만 이 일에 휴전상황 내 책임론이 대두되었고, 박정인장군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홀연히 군문을 떠나버린다.

3사단을 떠나면서 박정인 장군은 어떤 변명도, 후회의 말도 남기지 않았다.

  '북진통일의 성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사단장직을 떠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병들은 나의 뜻을 받들어 선봉사단과 북진통일의 임무를 기필코 완수하기를 당부하며, 전 백골사단 장병들의 무운장수를 빈다.

' 전 장병들은 그의 퇴임을 눈물로 보냈고, 그의 수행부관은 당시 맥아더 사령관의 계급이었던 5성장군의 칭호인 왕별이 새겨진 성판을 선물했다.

 6. 군을 떠난 후에도 변하지 않는 애국충정..군을 떠난 뒤에도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그는 자신이 연대장일 때 대대장 직위에 있었던 장태완 장군을 만나게 된다.

당시 재향군인회를 발족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정인장군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인맥으로 적극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양으로 음으로 재향군인회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현재 재향군인회는 육해공 전군 전역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유가족지원, 사회봉사활동 등의 수많은 일을 하고 있다.

재향군인회 산하 기업 중 잘 알려진 것은 재향군인회상조와 중앙고속이 있다.

 참고로 장태완 장군은 전장군의 12.12사태를 마지막까지 막으려 분투했던 수경사령관으로써, MBC 제 5공화국에서 김기현씨가 열연했던 그분이다.

 야이 반란군놈의 새끼야!!!몇년 전 안타깝게 별세하셨고, 최근에는 그의 부인 되시는 분께서도 고인을 향한 그리움에 투신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잠시 묵념..                                              지금은 90을 향해가는 노구임에도 국방기록물편찬사업, 각종 기념사업회 등 많은 분야에서 현역들을 능가하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그는 나라를 위한 사명으로 아들과 손자 모두 육군사관학교를 보냈고, 지금은 3대가 국방에 힘쓰는 병역 명문가의 시조이기도 하다.

맨 왼쪽이 박정인 장군.   최근 연평도 사건 이후 박정인 장군은 군 지휘부에게 일갈했다.

"군 지휘부는 상황과 상부 눈치만 봐서는 안된다.

지휘관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전에는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한다!" 그의 일갈이 무색하지 않게 되어서였을까, 현 국방장관인 김관진 장관 또한 같은 자세로 국토 수호에 힘쓰고 있다.

  7. 글을 마치며 진짜 평화를 유지해 주는 건 가혹한 환경에서 차가운 냉대를 받아도 묵묵히 그 자리에 있는 훌륭한 군인들이다.

이런 입으로만 평화를 일삼는 정상배들이 아니란 말이다.

   일게이들이든 유입종자든 정말 최전선에서 대한민국을 지켜왔고, 또 지켜가고 있는 이분들에게 잠깐이나마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정인 장군과 김관진 장관님의 건강을 빌어 본다.

 ===================================================  글번호150086조회수 : 8510 다운횟수 : 0작성자나이스제목[Re]즉각대응의 전설 3사단 박정인 장군홈페이지 백골부대의 예비역들은 잘 알고 계시는 박정인 장군님께서는 북의 도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잘 보여주신 분이죠. 아마 그러한 전통이 위 글처럼 백골부대의 신속하고 준비된 대응 능력의 원천이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때는 1973년 2월  :   북한이 군사분계선 북쪽에 559GP 불법 설치하고 육성 비방 시작, 559GP 남쪽의 우리측 DMZ표지판을 제거          북측의 도발이 함정이라고 판단하여 예정된 DMZ표지판 보수 작업 보류 지시3월 5일 : 군단장의 사단 순시 중 적의 함정임을 보고했음에도 군단장이 DMZ표지판 보수 작업 강행 지시함.3월 7일 13시20분 : DMZ표지판 보수 작업 완료 후 철수하는 아군에게 적이 사격 보고..3명 부상(2명 중상)                   관측기를 띄워 적 GP 좌표 확보 후 사단 포병 105mm,155mm 동원 포격 명령                   부상당한 아군의 철수를 위해 백린연막탄 57발, 연막탄 17발 발사        14시20분 : 1군 사령관이 부상자에 구애받지 말고 과감하게 작전할 것을 지시 --> 하던대로 계속함         14시30분 : 군단장이 부상자 구출을 위한 무리한 사격하지 말 것을 지시 --> 무시함                   그날 오후 우리측 포격으로 북한군 30여명 사망(후일 귀순한 북한군 장교 증언)               그날 밤 : 전 사단의 트럭을 총 동원, 라이트를 켠 채 DMZ 남방한계선까지 진출, 이에 놀란 북한에는 전군 동원령이 발령.4월 3일 : 박정인 장군 사단장에서 해임              ▲ 6.25 참전 중 박정인 대대장                                                           ▲ 3사단장 재임 중 박정인 장군                                                    =============================================   박정인장군 회고록을 읽고(4)  결혼(結婚) 박정인은 1952년 12월 24일 결혼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전쟁 막바지지만,그 시절을 살던 사람으로서야 언제 끝날지 알수 없었다.

그의 보직은 37연대 1대대장이니, 최일선 지구로 총알이 마구 날라 다녔다.

그런데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재미(?)-독특하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그 무렵 나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지라 후사(後嗣)가 생각났다.

만약 내가 죽고 나면 나의 대(代)가 끊기고 마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결혼을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박정인 회고록 86회 중에서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요즘 같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애 나으려고 결혼한다면 욕 먹을 것이다.

자기 죽고 나면, 여자 혼자 애 하고 이 험한 세상 어떻게 헤쳐나가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 옛 조상들-필자 아버지 세대까지는 대략 이랬다.

대를 이을 아이를 낳는 것은 자손 된 의무고, 일단 태어나면 그 뒤야여자하고 애가 어떻게든 살아가고 또 클것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5.16을 바라보는 박정인 장군 생각..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이 같은 혁명공약대로라면 무엇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과업 성취 후에 민간인에게 정권을 넘겨 준다는 데야 할 말이 있겠는가.나는 자문자답하면서 일단은 5·16 군사혁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이후 실망스러운 일들이 하나둘 생겨나면서,나는 5·16 혁명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실망은 혁명주체라는 중령급, 심지어 예비역에 편입된 중령까지,일시에 장군으로 두 계급씩 특진을 시켰다는 사실이다.

…중략(中略)… … 일부 권력의 시녀인 장군들이 이 땅 대한민국에 나타나면서,‘똥 장군’이란 유행어까지 생기게 됐다.

….김형욱(炯旭) 중령은5·16 직후 두 계급을 특진해 육군준장으로 예편했다.

그 후 중앙정보부장이 돼 권력을 휘두르다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자,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조국의 지도층을 매도했던 그 사건,그 사람이 한 나라의 장군일 수 있겠는가?. …중략(中略)… 다음으로 나를 실망시킨 것은 일부 주체세력들의 월권과 부정축재다.

혁명공약에 엄연히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라고 했던 약속을 스스로 위반한 것이었다.

구악보다 신악은 몇 배 부풀어서 더 악성이 됐다.

 … 더욱 실망시킨 것은 일부 주체세력들이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고 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고 영구집권 음모에 정신을 쏟고 있는 점이었다.

국민의 군대로서의 기본자세에 흠을 내 역사에 중대한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들이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목숨보다 중요한 군인의 명예를 더럽힌 결과가 됐다.

-박정인 회고록 93회와 94회 중에서..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5.16은 원초적으로 군인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는 시각은 아니다.

 실망했다는 이유의 첫번 째가 진급이 마구잡이었다 인데,악의적으로 접근하면 바로 그 진급에 누락된 불만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박정인 장군은 어느 면으로든 육군 내에서 이름 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대령과 장군 진급 과정을 보면 늦은 정도가 아니라 간신히 턱걸이했다.

소장 (3사단장)에서 예편한 것도 그 유명세에 비하면,고작(?) 별 둘에 옷을 벗게 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된 데에는 원채 강골(强骨)이라 사바사바에 약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고록에는 없지만 줄을 잘못 선탓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옛날 우리 군대에 평안도와 함경도 두 파벌이 있었는데,평안도는 백선엽, 함경도는 정일권이 대표라는 것은 꽤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박정인 씨는 함경남도 출신이다.

그래서 회고록에 6.25 때 백선엽 혼자 다 싸웠느냐는 대목이 나오는 것 아닐까?그 위에 5.16 주체도 아니고 또 할 말은 또박또박 다 했으니 별 둘까지도 용케 갔다.

  장군에 대한 자부심.. 1971년 1월 속초발 서울행 KAL 납치 사건이 생, 비행기 탑승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검색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내렸다.

우리의 박정인 씨가 울산지구 경비사령관으로 있을 때 비행기를 타려는데,공항 경비원이 검문하려 들자 일이 벌어졌다.

[박희모] 짱입니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그 지시가 내려진 어느 날 나는 육본 주요 지휘관 회의 참석차,정복차림에 지휘봉을 들고 울산비행장에 나갔었다.

그런데 허름한 복장의 한 사나이가 나에게 다가 오더니 몸 수색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장군이, 그것도 자기 나라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자에게 몸 수색을 받기 위해 손을 번쩍 든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는가? 나는 하도 기가 막혀 다짜고짜 “야 임마, 너는 뭐야?” 하며,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이에 그가 “KAL 청원경찰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울산특정지역 경비사령관입니다.

“알기는 아는군. 내가 바로 무장공비를 잡는 이 지역 최고사령관인데,누구를 수색하겠다는 거냐?” 나는 단호하게 수색을 거부하고 그대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정복차림의 장군의 몸을 수색하다니….그렇다면 청원경찰이 장군보다 신원이 더 확실하단 말인가…..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당시 교통부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울산지구 경비사령관이 검색에 불응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참석한 국방장관에게, “박 장군은 앞으로 군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라고 그래!” 하더라는 것이었다…-박정인 회고록 제 105회와 106회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관점을 달리 할 수도 있다.

나 군대 생활할 때 경계병-보초병은  누구를 막론하고 원칙대로 하라는 교육을 받았고, 또 그렇게 했다고포상휴가를 간 경우도 더러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회고록에는 예편 뒤 전사편찬위원장으로 있으며 일본 갔을 때 자위대에서 한 사람도 마중나오지 않았다고 불평을 제기하는 장면도 있다.

해석이 여러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장군에 대한 자부심이 유치하리만큼 대단하다.

  백골(白骨) 사단장.. 실미도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직위 해제되는 등 곡절을 겪던 박정인 씨는 육군 3사단장으로 부임하고 첫날부터 구호 ‘백골’을 되살린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연대장에게 장병들의 경례 구호가 왜 “백골”이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백골은 끔찍스러워 안전사고가 날까 봐 없앴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사단 참모장에게 지휘지시 제3호로 사단 구호 ‘백골’을 부활시키라고 지시했다.

?박정인 회고록 제 112회 중에서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총검술, 잠자리, 심지어 장병들 오줌도 부모형제 있는 남쪽이 아니라 김일성 쪽으로 누게 한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국민의 군대가 왜 우리들의 부모형제 자매가 있는 곳을 향해 찌르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록 훈련일지라도 우리의 적인 김일성이 있는 곳을 향해서 하라!”고 지시했다.

또 야외 변소도 남쪽을 향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왜 부모형제 자매에게 오줌을 누느냐”고 주의를 환기시킨 뒤,“북쪽 김일성에게 돌려라!”고 지시했다.

잠자리도 마찬가지로 김일성을 향해 발을 뻗고 자도록 조치했다.

?박정인 회고록 제 112회 중에서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이건 내가 군대 있을 때 들었던 일인데, 회고록을 읽으니 실화였다.

그러다 북괴군 도발에 사단 대구경 대포를 동원하여 적 벙커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당시 북괴군이 먼저 총질 해 대는 일이 가끔 있었지만 이렇게 강경대응하기는 처음이었다.

어쨌던 이 일로 박 장군은 군복을 벗는다.

  전사편찬위원장.. 예편 후 5년을 놀던 박정인 씨는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 직을 맡는다.

이것이 1979년 12월 10일인 10.26 직후-12.12 직전이다.

 위원장이 된 박장군은 그때까지 허울 좋기만 하고 한일 은 별로 없던 전사편찬을 의욕적, 정력적으로 추진한다.

그래서 독립청사도 만들고 기구도 대대적으로 개편한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전사(戰史)도 사실대로 기술하고 전투의 교훈을 도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허위로 기재했다면 그 전사는 없는 것만 못하다.

박정인 회고록 제 130회에서..                                             --------------------------------------------- 내가 전사편찬위원장으로 부임한 후 일본에 가서 보니 전사편찬에 관한 지침이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예컨대 부대(군)의 명예에 흠이 될 수 있는 내용은 책에 쓸 수 없도록 돼 있었다.

 아무리 역사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부대의 명예에 흠집이 갈 내용은 기록하지 못하도록 지침에 정해 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전쟁사의  우에도 패자 보다는 승자(勝者)의 이야기나 논리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불리한 이야기, 나쁜 일 등은 감춰지고 좋은 얘기들만 기록되고 정리됐다.

나는 일본의 역사서술 방식은 참으로 독특하구나 생각했었다.

박정인 회고록 제 131회에서..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내가 박장군 회고록에서 놀란 것은 명예심 외에 군 출신치고는 역사의식이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가 역사를 보는 눈은 나와 다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과거부터 그 싹이 커 온 것이고, 미래가 어느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지금 시작되고 있다는 신념은 같다.

  전사편찬위원장 해임.. 이렇게 정력적으로 일하던 전사편찬위원장 자리를 4년 만인 1983년 12월 10일 그만 두게-실은 쫓겨 나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1982년은 내가 취임 직후 세웠던 ‘전사편찬위원회 10개년 계획’의 제2차 연도인 만큼 야심차게 의지를 불 태우고 있을 때였다.

[박희모] 궁금증 해소



…. 신임 차관은 J 모 정훈국장과 함께 나의 전편위(戰編委) 사업계획에 제동을 고 나섰다.

전사(戰史) 분야에 문외한(門外漢)인 그들이 전편위 사업에 발목을 잡고 나온다면 전편위는 정말이지 설 땅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가 있어도 쉽지 않는 판에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하면,사업이 제대로 굴러갈 리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정훈국장이 차관의 뜻이라며 나에게 사직(辭職)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 … 나는 장관에게 ‘내가 왜 전사편찬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느냐’ 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장관은 뜻밖에도 ‘차관이 아마 자기 고향 사람을 시키려고 그러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중략(中略)…. 당시 신군부의 핵심 권력자들은 호남 출신 장관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장관은 신군부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더 이상 구차하게 보직을 유지하느라 고심하느니 차라리 군인답게 용퇴하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 - 박정인 회고록 제 131회 중에서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역사는 돌고 돈다더니 요즘 국회에 무슨 위원장인가 두 사람이 겹쳐서 출석하는 사태를 보는 듯 하다.

 박정인 장군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하니,호남 출신이라는 장관은 윤성민 씨, 실세 차관은 권영각 씨가 회고록에 나온 연도에 해당하는 것 같다.

 박장군이 이를 두고두고 안타까와 한 것은 자리에 연연해서가 아니라,기껏 일구어 놓은 전사편찬 업무가 후퇴한 일이었다.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내 후임으로 전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된 사람은 그동안 소문대로 국방차관과 같은 동향(同鄕) 사람이었다.

면담 때 장관이내게 귀띔했던 ‘고향 사람’이 바로 그를 가리킨 것이었다.

중략….. 후임자가 된 신임 전사편찬위원장은 취임하자마자 독립 청사를 빼앗기더니,그 다음에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던 ‘전사편찬 10개년 계획’도 마침내 수포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그 후 오래도록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분노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군인공제회에 자기 집을 빼앗긴 전편위는. ………그 후 군인공제회는 독자적인 건물을 신축해 강남으로 자리를 옮겨 갔지만전사편찬위원회는 아직도 독립 건물을 갖지 못하고, 전쟁기념사업회 건물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애써 마련한 전사편찬위원회 독립 청사를 마치 장기판의 졸(卒)처럼 여기 붙였다 저기 붙였다 했던 당시 국방부 수뇌부들이 꼭 가슴에 새겨 둬야 할 금언이 아닐 수 없다.

-박정인 회고록 제 132회 중에서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박정인 회고록이 읽을만 한 것은 솔직담백하고, 또 다른 사람 같으면 말썽날까 두려워 가리는 사항도 비교적 거리낌없이 적어 놓은 점이다.

그런 것 중 또 하나는 채명신 장군 사항이다.

  채명신 장군에 대한 평(評).. 박장군은 이런 저런 명예(?)직 끝에 6.25 참전유공자회 부회장으로써 채명신 장군을 2004년부터 회장으로 모시게 되는데….                         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채 회장은 거의 모든 업무와 인사 문제를 오직 박희모(朴熹模)사무총장과 둘이서 의논하고 결정하는 방식을 취했다.

.. 중략 … 채 회장에게 박 장군을 사무총장에 임명한 배경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채 회장은 “내가 2군사령관 시절에 보니까 병사식당 관리를 매우 잘 해서 그를 임명했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사무총장직 업무 수행에 병사식당 관리가 무슨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며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도 했다….박정인 회고록 제 139회 중에서..                                   ------------------------------------------------------- 임기 말년에 회장의 건강에 문제가 생 김학호(學浩) 육군 부회장이 병실로 채 회장을 찾아가 “차기 회장은 누가 됐든 6·25 참전자 중에서 골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건의를 했다.

… ..차기 회장에 박희모(朴熹模) 당시 사무총장을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 조직의 장(長), 즉 CEO가 정상적인 집무를 할 수 없을 때는 그 다음 서열자가 회장 대리 근무를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당시 채 회장은 자신이 병석에 누워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대리 근무를 지정하지 않았었다.

 그뿐만 아니라 후임 회장을 선정하는 문제도 구술서라는 편법을 써서 단독으로 특정인을 지명했다.

… “사람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의 모습이 꼭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멀리서 보이는 그 사람의 이미지만으로 그를 평가하지요.하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너무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직접 경험했습니다.

박정인 회고록 제 140회에서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x 박희모 장군에 대하여는 12.12 때 반군부대가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30 사단장을 지냈다는 것 외에는 잘 모른다.

6.25 뭐라는 회 회장 자격이 있는지는 내가 알 까닭이 없다.

 박정인 씨는 1928년 생이니 올해 만 82세 노인이다.

노인이 되면 조그마한 일도 서운하게 생각하고, 노여움을 잘 타는 법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대목이 나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 회고록을 보면 좋은 것만 골라 적는데,이 분은 가리지 않고 쓴 점이 높이 쳐 줄만 하다.

 국방일보에는 채명신 장군도 회고록을 실었다.

필자는 그걸 읽고 박정인 씨와는 다른 관점에서 아 이래서 채명신 씨는 결코 참모총장이 될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궁금한 사람은 국방일보 들어가 기획연재-그때 그 이야기를 뒤져 보도록...http://kookbang.dema.mil.kr/ 이것으로 몇 줄 간단히 쓰려던 ‘박정인장군 회고록’ 독후감을 마친다.

 ====================================== [사람과 이야기] "중요한 건 첨단무기가 아니라 군인정신"안준호  libai@chosun.com 의 다른 기사보기100자평(219) : 2010.12.04 03:01

73년 北 DMZ도발에 무자비하게 보복했던 박정인 前백골사단장,"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교전규칙만 운운하다니…군인답지 않은 장군들 많아 대응 못하면 이등병 강등을"

1973년 3월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에서 갑작스러운 총성이 적막을 갈랐다.

북측 GP(경계초소)에서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하던 남측 3사단 백골부대원을 향해 기습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이 사격으로 백골부대 장병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박정인(82·예비역 준장) 당시 백골부대 사단장은 즉각 북측에 사격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아군(我軍)에 대응사격 준비를 지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측의 사격 중지 경고에도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 장군은 즉각 사단 포대에 대응사격을 지시했고 105㎜와 155㎜ 곡사포가 적 진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부상병을 구출하기 위한 연막탄도 작렬하며 사방에 화염이 치솟았고, 곳곳에 매설된 지뢰가 불을 뿜으며 폭발했다.

DMZ 인근에 있던 적군은 혼비백산해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중구 한 사무실에서 백골부대 사단장 출신인 박정인 장군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종찬 jc1979@chosun.com박 장군은 이날 밤 사단의 모든 차량을 동원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DMZ 남방한계선을 향해 돌진했다.

 북한군은 국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는 줄 알고 전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일주일 뒤 귀순한 북한군 장교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 30여명이 우리 군의 보복 사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 장군은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다.

상부의 허락 없이 임의로 대응사격을 했다는 이유였다.

박 장군은 사단장 이임식에서 "북진(北進)통일의 성업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단장 직을 떠나게 돼 유감스럽다"며 짧게 소감을 밝혔다.

평생을 바친 군(軍)이었지만, 후회는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박 장군을 만났다.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육사 출신인 그의 사무실 한쪽엔 '우리의 적(敵). 부정부패, 친북좌경세력, 적화통일북괴군'이란 글귀가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박 장군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태를 꺼내자 대뜸 "그렇게 두들겨 맞고, 교전규칙 운운하는 것들이 군인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는 하얗게 셌고, 180㎝에 달했던 체구는 굽었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 울렸다.

"부하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는데 대체 군 지휘부는 뭘 했단 말인가! 자주포가 고장 났다는데 군 검열단은 뭘 했단 것인가! 전투기는 뭘 했고, 훈련 중이었던 함대는 함포 사격을 않고 뭘 했나! 지하벙커에서 탁상공론만 하면서 어떻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것인가!"박 장군은 최근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태 등이 모두 군의 기강 해이에서 비롯됐다며 적절한 대응을 못한 장성들은 이등병으로 강등시켜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박 장군은 "군 지휘부는 상부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전 상황 때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며 "요즘 장군 중엔 군인답지 못한 장군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의 연평도 피란민들에 대한 대응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적 도발 시 민간인들의 비상이주대책 수립은 필수"라고 비판했다.

박 장군은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민족은 패망하기 마련"이라며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나 월남 패망은 군이 부정부패했고 정신력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막가파' 살인집단인 북한에 대응하려면 역사안보에 대한 교육이 선행돼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첨단 무기가 아니라 투철한 군인정신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뿐이에요."   그는 육사출신이 아닌 갑종 출신이었다.

“박 장군! 당신도 이런 상황 하에서는 나의 지시를 받게끔 되어 있소. 지금 반란군인 김포 방면의 1공수여단이 제1한강교로 도강을 시도했으나 수경사에 의한 차량바리케이트로 인하여 회군하였는데 혹시 30사단 관할인 행주대교를 이용하려고 할지 모르니 반드시 차단해주시오. 또 전두환 합수부장 측인 노태우 소장의 9사단이 병력을 출동시키면 30사단 지역을 통과할 터이니 구파발의 대전차 장애물에 연하여 전차와 106미리 무반동총, 로케트 등을 동원해서 9사단의 서울 진입을 막아줘야겠습니다.

반란군인 전두환 합수부장과 황영시 1군단장 지시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알겠습니다.

사단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후 박희모 사단장은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으로부터도 전화를 받았다.

“나 군사령관이야.”“예.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지금 어디 있지?”“예. 방금 지금 ...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 들어가요.”“예.”“다시 들어가는데, 가서 부대 장악 좀 잘 해가지고 내가 뭔 부대 출동하자 할 때까지, 명령 있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말게.”“알겠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게 좀 불명확한게 있는 것 같아.”“아, 예. 예.”“그러니깐 지금 함부로(병력을) 냈다간 서로 충돌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맡에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고, 사단장만 알고(있어.) 내가 부대 출동할 일이 있으면 위에서 명령보고로 직접 연락할테니까.”“예, 예. 그럼 저 CP에 가 있겠습니다.

”“응, CP에 들어가 있어.”그러나 박희모 소장은 구파발과 수색에 검문소 병력을 증강하지도, 행주대교로 올 수 있는 1공수여단 병력을 증강시키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보안사 보안처장 정도영 대령의 전화를 받고서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이후 00시에는 아예 부대가 훈련을 나갔다는 이유로 구파발과 수색 검문소의 병력을 강화하여 좌우 방벽에서 반란군의 진입을 차단하는 것을 거부했다.

만일 박희모 사단장이 장태완 사령관의 요청처럼 구파발 방면의 병력을 증강하고 행주대교를 폐쇄 혹은 경계강화했다면 12.12가 조금 더 진압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을 것이다.

장태완 사령관은 이후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일행에게 그때까지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때 수경사 정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육본 보안부대장 변규수 장군이 도착했다는 전화였다.

장태완 소장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조금 전 보안사 요원들을 모두 감금시킨 것도 있고, 수경사까지 따라온 육본 보안부대장의 저의가 보여 그를 연금시키고자 했으나 상대가 장군이라는 점이 걸렸다.

그리하여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묻자, 윤성민 차장은 일언지하에 “연금시키시오!” 라고 말했다.

그는 그대로 지시를 내렸다.

수경사 정문에서는 변규수 장군이 지프차 안에서 진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다른 육본 참모 일행보다 늦은 이유도 합수부 측에 육본 지휘부의 수경사 이동을 알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헌병장교와 초병들이 달려들어 그와 운전병, 전속부관에게 총을 겨누고 하차를 지시했다.

그가 반항했다.

“이봐, 내 계급을 봐라. 내가 도망칠 신분이 아니잖나! 도대체 누가 구속영장도 없이 나를 이렇게 구금하라고 했는지 말해!”그에 대한 헌병 장교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상부 지시에 따른 겁니다!”변규수 준장은 무장해제를 당한 후 포승줄에 묶여 12월 13일 아침까지 수경사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어야 했다.

11시 경에는 육참총장 수석부관 황원탁 대령이 문홍구 합참본부장에게 “장갑차와 전차, 그리고 병력을 나에게 조치해 주시면 제가 직접 인솔하여 서빙고로 쳐들어가서 총장님을 구출해 오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육사 18기 대표화랑 출신이었다.

문홍구 장군은 그대로 장태완 사령관에게 가 이를 말했다.

장 사령관은 전차 2

3대 정도는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으나 정작 알아보니 동원 가능한 전차는 1대뿐이었다.

그럼에도 황원탁 대령은 한 대라도 좋으니 출동하겠다고 답했다.

그가 총장 구출을 준비하고 있을 때 문홍구 장군이 전화를 받았다.

미8군사령부로 가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의 전화였다.

“수경사에 모여있는 장군들이 지금 병력동원에 관해서 협의들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절대로 병력을 동원하지 말아요. 전두환이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원만하게 타협이 될 것 같소 박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정승화 장군 한 사람에 관한 문제라고 하니까 장군들에게 흥분하지 말고 있으라 해요. 보안사령관은 무지한 인간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으니 그리 알고들 있어요.”이후 문홍구 장군은 황원탁 대령의 서빙고 공격준비를 중지시켰다.

다만 장태완 사령관 또한 회고록에서 그도 그렇게 서빙고 공격을 고집하지는 않았다고 쓰고 있다.

그 이유로 그는 당시 정 총장이 사망하였거나 서울 외곽으로 빼돌려져있을 것이고, 서빙고에 있다 하더라도 구출작전을 펼치는 순간 보안사에서 정 총장을 빼돌릴 것이 뻔해보였기 때문임을 들고 있다.

다만 그때 정승화 총장은 실제로 서빙고 분실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후에는 김진기 헌병감이 장태완 사령관에게 가 ‘헌병 1개 소대를 차출해준다면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가 대통령 각하를 모셔오겠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고명승 대령과 정동호 준장이 101경비단과 55경비대대 병력으로 총리공관을 둘러싸놓은 이후였다.

결국 김진기 장군은 별 소득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참모장 김기택 준장에게 사령부의 전 장교를 수경사 기밀실에 모이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원래 사령부에는 4백 50여명의 장교가 근무중이었으나 대부분의 장교들이 하나회의 공작 등으로 이탈하고 남아 있는 장교들은 60여명 뿐이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그 곳에서 그의 결의를 전했다.

“내 생명과 같이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여러 동지들이야말로 배신할 줄 모르는 참된 군인이오. 여러분이 우리 사령부를 대표하는 그야말로 충정심에 불타는 간부들이라는 것이 이제 바로 그 모습으로 서로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모든 것이 다 이 사령관의 지휘능력과 덕이 부족한 소치이며, 또한 내가 취임한 지 불과 24일밖에 안되어 미처 이러한 암적 요소들을 사전에 제거치 못한 것이 전적으로 나의 책임임을 이해해 주길 바라면서 다음과 같은 최후의 명령을 하달하니 우리 모두 천지신명께 맹세하고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해 줄 것을 바랍니다.

첫째, 제30경비단장, 제33경비단장, 그리고 헌병단장 등을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둘째, 현재 제30경비단에서 반란을 모의하는 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니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셋째, 여기 없는 동료 장교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여 설득시켜 본대로 귀대시켜라. 그러면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지만 끝까지 역모에 가담하겠다면 그도 가차없이 사살하라.넷째, 각 외곽 검문소는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검문 검색을 강화하며 수상한 자는 별도 조사 후 조치하라.다섯째, 방송국 및 각 검문소 병력을 증강하라.여섯째, 현재 반란군에 가담하고 있는 청와대 뒷산 팔각정 주변에 배치된 병력을 33경비단 부단장이 가서 설득하여 은밀히 사령부로 철수시키도록 하라.일곱째, 사령부에 남아 있는 전차 4대, 3.5인치 로켓포 등 가용한 모든 화포는 탄약상자를 개방하여 완전히 차량에 탑재하고 자체방어에 임한다.

그리고 야포단의 모든 포는 경복궁을 조준하라.“이후 윤성민 차장에게 통보를 한 장태완 사령관은 이번엔 참모장 김기택 준장에게 명령했다.

“조금 전 기밀실에서 지시한대로 전차를 비롯해서 행정병들을 포함한 전 병력들을 즉시 전투조로 편성하라. 목표는 경복궁의 30경비단과 보안사령부이다.

공격개시선은 퇴계로의 아스토리아 호텔 앞이다.

즉시 공격개시선 상으로 모든 부대를 전개하라. 출발은 내가 선도하며 중앙청 부근에다 적절한 진지를 점령한 다음, 전차포, TOW, 106미리 무반동총, 3.5인치 로켓포로써 양개 목표에 동시 집중사격으로 수백 발의 포탄을 집중시킨 후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역모자들을 사살 혹은 포획하고 반란을 진압한다.

즉시 본 명령을 시달하고 출동을 대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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