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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5·16 혁명공약’의 탄생   반공 국시 처음 본 박정희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 … " 거사 전날 JP "배 속 아이, 아들일 거요" 아내의 눈물을 봤다?미국은 '박정희 사상'을 의심했고, 8군 사령관은 대놓고 예편 요구6·25 때 북한군과 맞서 싸운 박정희,  대한 좌익 혐의는 부당"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의 물결 앞에 나는 섰다둘째 임신한 아내와 비감의 이별, 비가 헛일 안 했다고 가르치구려" 밤이 깊어가던 1961년 5월 14일(일요일). 나는 아내에게 군복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석 달 전 군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하극상(下剋上) 사건’으로 강제 예편되면서 벗어뒀던 카키색 군복이다.

중령 계급장은 달려 있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나는 이 군복을 입고 먼 길을 나설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가슴 온 구석을 채웠다.

이미 벗었던 군복을 다시 꺼내 들 정도로 나는 그해 그 봄, 그렇듯 결연(決然)했다.

사생(死生)의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박함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의 내 나이는 서른다섯. 일제 강점기를 겪고 동족상잔의 참혹했던 6·25전쟁을 군인의 신분으로 치러낸 내 생각은 영글어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서른다섯의 생을 모두 접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전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글이었다.

이틀 동안 내가 머리를 싸매면서 썼던 선언문은 다름 아닌 ‘혁명공약’이었다.

그것은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세상을 뒤집는 거사다.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 나가는 것이다.

’ 그 말이 나의 뇌리를 스쳐간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 그 혁명의 물결 앞에 서야 하는 상황이 나와 내 조국 대한민국에 닥치고 말았다.

 글 솜씨가 제법 괜찮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나였지만 그 격문만큼은 잘 써지지 않았다.

끙끙대며 썼다가 지웠다.

이틀 동안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나열했다.

    52년 4월 김종필 대위의 가족사진.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전해인 60년 4·19가 벌어졌다.

자유당 말기의 암울함이 가셨을까. 전혀 아니었다.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선보였던 민주당 장면 내각은 상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은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의 무능과 함께 국가안보의 초석인 군(軍)은 썩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정부는 어쩔 줄 몰랐다.

수수방관했다고 할 정도다.

 혼돈이 점차 극을 향해 가고 있었다.

6월엔 경찰관 데모가 있었고 9월엔 초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가 신문의 주요 면을 장식했다.

61년 3월 21일 대구에선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혁신계 정당과 일부 대학생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폐지하라면서 횃불을 들고 행진한 것이다.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선 남북학생회담을 촉구하는 ‘민족자주통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전쟁을 치른 지 10년도 안 지난 상황이었다.

내 마음은 타들어갔다.

다수 국민도 사회 혼란을 걱정했다.

국민 대부분이 결정적인 전환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망각의 늪에 던져버린 전쟁의 기억, 그로써 우리 대한민국이 맞이할 위험은 거세고 높은 파도처럼 우리 사회에 닥칠 기세였다.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생 1300여 명 가운데 전쟁 때 절반을 잃은 나로서는 이 혼란스러운 풍조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결의였다.

 거사를 앞에 두고 펜 끝으로 상념이 모아지고 있었다.

영국 명재상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금언(金言)이 떠올랐다.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10대 후반 시절 내가 감명을 받았던 말이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다.

나는 다시 문장을 다듬었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군부는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 펜은 거침이 없었다.

내 글에 제법 힘이 담겼다고 여겨졌다.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중심은 나였다.

 궐기취지문의 서두를 그렇게 시작했다.

이제 구체적인 공약을 썼다.

‘반공(反共)’을 먼저 꺼냈다.

‘혁명공약 제1조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고…’ 우리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 그러나 놓치고 있는 곳을 먼저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공이 앞에 놓여야 한다.

혼돈을 정리하고 국가의 안위(安危)를 먼저 따져야 했던 것이다.

    1961년 8월 최고회의 회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신 공군참모총장, 박정희 의장, 박병권 국방장관(테이블 건너). 박정희 뒤는 김종필 정보부장(사복 차림), 박병권 뒤는 장성환 공군참모차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결정적인 이유는 숨겨져 있었다.

거사의 중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49년 그가 소령 시절 남로당에 휘말려 들어간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좌익의 혐의는 부당했다.

그는 잠시 길을 잃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대한민국의 군에 복귀해 공산주의 북한과 맞서 싸웠다.

누구보다 나는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를 의심했다.

이들은 공공연히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 정도였다.

미국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한국에 주둔 중인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 소장을 예편시키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따라서 나는 궐기군 지도자인 박 소장에게 걸린 그런 혐의를 불식하기 위해서도 반공을 공약 1호로 내세워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뒤에 벌어진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격이지만 궐기문을 인쇄하러 가기 전 박 소장이 이 반공 국시 조항을 읽으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혼잣말 비슷하게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이라고 말했다.

거사를 앞둔 박 소장의 마음이 매듭처럼 뭉쳐져 있던 대목이었다.

 시계의 시침이 자정을 훌쩍 넘겼다.

우리가 계획한 디데이, 5월 16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15일 아침 혁명취지문과 포고문 원고를 주머니에 넣고 현관을 나섰다.

아내 박영옥(朴榮玉)이 말을 꺼냈다.

당시 아내는 첫째 예리(禮利)를 낳고 10년 만에 둘째 진(進)을 임신한 상태였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하시는 거예요?’ ‘응, 하느님이 도우시면 당신과 또 만날 수 있겠지.’ 아내는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나는 불룩해진 아내의 배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자고로 유복자는 대개 아들이라고 하니까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놈은 아들이 틀림없을 거요. 잘 키워서 훗날 녀석에게 이 아비가 헛일 하다가 죽지는 않았다고 가르치라고.’ 비감(悲感)이라면 그때의 내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아내는 아무런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군복을 차려입은 나는 아내와 함께 문을 나섰다.

지금의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에 있던 집 앞의 언덕을 내려갔다.

아내는 문밖에서 떠나는 나를 바라봤다.

조금 언덕을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내가 저만치 보였다.

역시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 심정이 그랬을까. 장미의 5월 속 적막한 봄날이었다.

정리=전영기 , 유광종 작가?-------------------------------------------------------------------------------- JP 품에서 쏟아진 11개 '혁명 포고문' - 방송 통해 공포 … 거사 기정사실화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30분 KBS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간 군사혁명위원회 발표문은 ‘혁명공약’(사진)과 11개의 ‘포고문’이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의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혁명취지문) 군사혁명위원회는 이어 ①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 ②유엔헌장을 준수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④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⑤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요지의 공약 6개 항을 발표했다.

 마지막 대목은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이다.

혁명공약과 11개 포고문은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의장 명의로 발표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JP가 작성해 품 안에 품고 다니다가 상황에 맞춰 차례로 방송에 내보냈다.

 육군 소장 박정희는 장도영을 5·16의 간판으로 내세웠다.

장도영은 박정희보다 6살 아래지만 육군 정보국장 시절 박정희 당시 문관(文官)을 현역으로 복직시킨 장본인이었다(50년 7월). 5·16 당시 장도영은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장도영은 5·16 당일 박정희에게 출동 병력을 복귀시키라고 요구하다가 오히려 박정희에게 설득당해 그날 오후 의장직을 수락했다.

이후 장도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을 겸임했다.

 JP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인 61년 7월 반혁명 혐의로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을 체포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사전 보고하지 않고 저질렀다.

JP는 “장도영을 그냥 두면 혁명이 파괴될 우려가 있었다.

더 크기 전에 잘라야 했다”고 말한다.

[한애란 ]    ● 인물 소사전 장도영(1923

2012년)=5·16 군정(軍政)의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의장. 박정희는 스스로 부의장으로 내려앉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간판으로 내세웠다.

장 의장은 계엄사령관, 내각 수반을 포함해 5개 자리에 올랐다.

1961년 7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됐다.

63년 미국으로 건너가 93년까지 위스콘신대 교수로 재직했다.

일본군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뒤 귀국해 군사영어학교(육사 개교 이전 장교 양성기관)를 졸업하고 국군 창군 멤버가 됐다?    ● 1961년 5월 16일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앞에 국가재건최고 회의 의장 겸 계엄사령관 중장 장도영(왼쪽)과 부의장 소장 박정희 부의장이 나란히 서있다.

[중앙포토]  '박정희 복직' 건의한 장도영? - 장병 통솔, 수원에 나타나자 "유능한 사람, 사상 의혹 버려"6·25 남침은 문관 박정희의 평판과 이미지를 바꿨다.

장도영 당시 육군 정보국장의 시각도 그랬다.

장도영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 문관은 정보국 장병들을 직접 지휘 통솔해서 수원으로 후퇴해왔다.

정보상황도 등 중요 문서들까지 깨끗이 보존해 가지고 왔다.

이를 본 장도영 국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28일 적정으로 봐서 그가 원했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지 않았는가. 근거 없이 부하를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저렇게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는 이때부터 그에 대한 사상적 의혹을 깨끗이 버렸다.

” 정보국은 작전정보 활동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를 실행할 장교가 부족했다.

장도영 국장은 육본 정보상황실 한쪽 구석에서 낡은 민간 작업복을 입은 채 근무에 열중하고 있는 박정희에 주목했다.

장교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를 계속 문관으로 둘 이유가 없다고 봤다.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박정희의 현역 복직을 건의했다.

처음엔 “쓸데없는 말이 나올 수 있다”며 주저하던 정 총장은 거듭된 건의에 마음을 바꿨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승낙을 받아 박정희는 소령으로 복직됐다(정식 복직일은 1950년 7월 31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함께 파면형을 선고받은 지 1년5개월여 만이었다.

장도영은 그렇게 박정희와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5·16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둘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한애란 ]?---------------------------------------------------------------------- 2. 박정희 문관, 소령으로 복귀개전 초 박정희 34시간 행방 … 육사 동기들과 내기 했다, 돌아온 그에게 파이버 씌워주자 "자네가 임명하는구먼"?임시 육본은 이미 수원으로 후퇴 , 그가 안 나타나면 좌익의혹 증폭 한강 다리 코앞에 두고 큰 폭발음  , 사람 피와 살이 내 얼굴에 묻었다 "구미서 올라가는데 차편이 없네" , 박정희가 전화 … 100% 확신 못해 육본 정문 앞서 그와 감격의 재회  , 마음속 '의심 덩어리' 눈 녹듯 풀려?    1952년 8월부터 53년 5월까지 당시 김종필 대위는 6사단 19연대 수색중대장으로 강원도 금성 구두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김 대위가 81㎜ 박격포 발사를 준비하는 장면.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박정희에겐 좌익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JP는 6·25 개전 초기 박정희가 좌익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됐다.

JP가 확보한 흔들리지 않는 증거는 무엇일까.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됐다.

나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중위)이었다.

며칠 전부터 휴전선 쪽 적정(敵情)이 크게 불안했다.

6월 24일 밤 나는 정보국 당직을 자처했다.

밤새 뜬눈으로 전쟁을 맞았다.

 대비 없이 맞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오판은 우리가 했다.

육군 정보국은 적의 동향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인 박정희와 우리 전투정보과는 적정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군과 정부의 수뇌들은 이를 불신했고 활용할 줄 몰랐다.

우리는 적을 알고서도 당한 것이다.

27일 밤 적의 탱크가 서울 미아리에 출몰하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졌다.

육군본부는 그날 경기도 시흥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적정을 파악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 없이 바빴다.

28일 자정을 넘긴 새벽, 지하 벙커에서 일하다 나와 보니 상황장교와 사병 몇 명만이 보였다.

육본 수뇌부는 임시본부가 차려질 수원을 향해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병기감실 앞에 GMC 트럭이 보였다.

차에 올라 키를 꽂아보니 시동이 걸렸다.

 나는 그 트럭을 몰아 육사 8기생인 동기 몇 명을 태우고 길을 나섰다.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를 200m쯤 남겨둔 지점이었다.

그때 앞에서 번쩍하더니 큰 폭발음이 일었다.

한강 인도교에는 피란을 가려는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무엇인가가 후두둑 떨어져 내 얼굴에 묻었다.

사람들의 피와 살점이었다.

내가 몰던 차가 조금만 일찍 인도교에 진입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등에 식은 땀이 났다.

우리는 차를 버리고 서빙고 나루를 향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바지선으로 우리를 건네 주었다.

남쪽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노를 젓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꼭 돌아들 와, 꼭 돌아오라구….” 서울을 탈환해 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

우리는 강을 건넌 뒤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걸었다.

 김종필 대위가 1952년 강원도에 근무할 때 탱크 앞에서 찍은 사진(위)과 중위 때인 50년 6월 27일 육본 정보국 북한반장으로 서울 창동 전선에 나가는 모습.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박 실장의 소재는 나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후퇴하면서도 정보국 동료들과 “우리 내기를 하자”고 할 정도였다.

박정희 실장은 남으로 갈 것인가, 북으로 갈 것인가. 수원으로 내려갈 것인가, 서울에 남을 것인가. 박 실장이 돌아와 인민군과 싸우게 되면 좌익 의혹은 사라질 것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조국을 배반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동료 두어 명은 “박정희는 의심스럽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후퇴하지 않았을 거다”고 주장했다.

나는 “박정희는 수원으로 갔다” 쪽에 걸었다.

우선 구미에서 걸려왔던 그의 전화를 믿었다.

그럼에도 100%의 확신은 아니었다.

 오후 5시 무렵 우리는 수원 농업시험장에 도착했다.

장병을 태운 지프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육군의 수뇌부 모습은 형편이 없었다.

미군 고문단이 이미 자리를 잡은 2층의 낮은 건물 한쪽에 육군본부를 차렸다.

우리 정보국은 인근 수원초등학교에 자리 잡았다.

내 눈길은 어느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 박정희 실장이 초등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34시간 만의 만남이었다.

옆에는 장도영 정보국장이 있었다.

“휴… 빨갱이가 아니었구먼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따뜻한 생각이 가슴속에 번졌다.

암담한 후퇴 상황에서 발견한 믿음과 환희였다.

박 실장은 “오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예의 그 멋쩍어하는 미소도 지어 보였다.

비로소 내 마음속의 큰 응어리가 풀렸다.

봄에 녹아 내리는 깊은 얼음 구덩이 같았다.

그에게 둘러씌워진 좌익 중죄(重罪) 이미지는 단단했다.

박 실장을 옥죄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집요했다.

 수원 육본에서 해후하면서 박 실장이 좌익이다, 아니다는 논란은 육본 정보국 내부에서는 사라졌다.

수원에서 박정희 실장은 1년여 전 벗었던 군복을 다시 걸친다.

장도영 당시 정보국장이 문관인 그의 현역 복귀 문제를 해결했다.

 전쟁 통이라 모든 것이 부족했다.

당시 우리는 철모의 내피인 파이버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의 복귀 결정 소식을 듣고서는 파이버 하나를 얼른 구해 왔다.

그 위에 그리스펜슬(종이말이 색연필)로 태극 무늬를 그렸다.

소령 계급장을 달리 구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파이버를 들고 가서 그에게 씌워 줬다.

그러자 박정희 소령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날 임명하는구먼.” 지동도합(志同道合)이라는 말이 있다.

동지(同志)라는 한자 단어가 유래한 성어다.

품은 뜻과 가려는 길이 같은 경우를 말한다.

사상과 신념의 일치도 말해 준다.

5·16의 거사와 완성을 위한 멀고도 긴 여정에서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때 그렇게 뜻을 맞추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 , 유광종 작가]6·25 개전 초기 국군 혼란상북한의 남침은 개전 뒤 사흘 동안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 개시 6시간 뒤인 6월 25일 오전 10시 경복궁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던 중 전쟁 발발 소식을 처음 접했다.

25일 오후 2시에 열린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북한의 공격은 공비 두목 이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해 벌인 책략으로 전면 남침은 아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한 대사 무초는 오전 10시26분 국무부에 “북한군이 전면 남침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이어 미 국무부는 대통령 주재 국가안보회의(NSC)를 거쳐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하는 등 긴급 대처에 나섰다.

주미 한국대사 장면의 요청을 받아들여 오후에는 도쿄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에 “한국에 탄약을 추가로 공급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유엔 안보리는 26일 오전 3시(한국시간) ‘적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튿날인 26일 국군은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옹진반도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공세를 이어갔다.

 27일에는 북한군이 의정부를 통과해 서울로 향했고 동부전선의 춘천과 강릉을 점령했다.

육군본부는 28일 오전 2시30분 한강 인도교를 끊기 직전 강을 넘어 수원의 농업시험장으로 옮겼다.

[유광종 작가]   ● 인물 소사전 채병덕(1914

50년)=6·25 남침 당시 육군참모총장. 1950년 4월 취임 뒤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했다.

50년 7월 1일 육군참모총장직을 사임하고 영남 편성 관구사령관으로 물러났다.

그해 7월 27일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49기) 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육사 이전 장교 양성기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국군 군번 2번이다.

       ?3. 박정희와의 첫 만남?  처음 본 박정희, 참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사내였어 … "내가 사고 당해 군복 벗었지" 박정희는 계면쩍게 웃었다육사 8기 졸업, 육본 정보국 배치 검은색 양복 입은 문관과 악수 기강·규율 한심했던 초기 한국군 ,해방공간 속 정치, 혼란에 빠져 대구사범 졸업, 만주군관학교 1등 , 엘리트 장교 박정희, 울분 토로해 "박 소령 사상 온건치 않아 보인다" , 숙군 핏발 김창룡 감시망에 걸려?  1952년 4

8월 김종필 대위(왼쪽)는 진해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본부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육사 교정에서 선글라스를 낀 김종필 대위가 동료들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돌이켜보면 특별할 것도, 강렬한 점도 없는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아흔에 이르러 회상해 보니 그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 우리 둘이 처음 만난 장면 말이다.

육사를 8기로 졸업한 1949년 6월,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장교로서 첫발을 디뎠다.

동기생 일곱이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발령식 때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신고 드릴 분이 한 분 더 있다.

작전실로 가서 인사 드려라.”바로 옆 ‘작전정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방으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전투정보과에 배속된 신임 소위들입니다.

신고를 받으십시오.” 작전정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 탓이었을까.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첫인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면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박정희요. 근데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거기들 앉게.” 악수를 나누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박 실장은 “내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을 벗었다”고 간단히 본인을 소개했다.

이어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다.

환영한다”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군복을 벗고 정보국의 문관(文官)으로 일하던 그분과의 첫 만남이었다.

박정희란 이름은 알고 있었다.

내가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행정처에 사병으로 근무할 때 7기 특별반 1중대장을 하던 분이었다.

그러다 어디로 잡혀갔다고 하는 소문만 들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듬해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을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군부 내 남로당 조직책이었다.

 박정희 사관학교 제1중대장은 비분에 차 있었다.

군대가 왜 이 지경이냐, 나라는 왜 이 모양이냐. 울분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왔다.

일제의 지배 시대, 박정희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新京, 지금의 長春)에 갔다.

1등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특별 입학, 졸업(57기)한 엘리트 장교였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2기로 나와 소위로 임관했다.

미 군정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조선경비대)를 창립했다.

국군의 전신이었다.

장교 자원이 부족했다.

일본군 지원병이나 하사관 출신이 대거 장교로 임관했다.

사병 출신도 미 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서 몇 주 교육을 받고 지휘관이 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조선경비대는 기강이나 규율 면에서 한심스러웠다.

군인정신을 찾기 힘든 장교들도 있었다.

사명감 투철한 엘리트 장교 출신의 박정희 소령이 개탄할 만했다.

해방공간 속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50년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시절 육사 8기 동료들. 앞줄 왼쪽부터 서정순(훗날 정보부 차장)·석정선(정보부 차장)·전재덕(정보부 차장), 뒷줄 왼쪽부터 이영근(유정회 국회의원)·고재훈(정보부 국장)·안영원(경제 과학심의회의 부이사관). [중앙포토]사관학교 2중대장이던 강창선 대위는 박 소령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친했다.

비밀 남로당원이었던 강창선은 우수한 장교와 육사 생도를 당원으로 포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 강창선 대위가 박정희 소령을 놓칠 리 없었다.

그때도, 그 뒤로도 박정희 소령은 술과 술자리를 좋아했다.

강창선은 박 소령에게 접근해 저녁 자리를 벌였다.

박 소령은 술만 들어가면 마음속 응어리를 분출해 내곤 했다.

세상과 군대에 대한 답답함과 비분강개를 한바탕 쏟아내야 속이 시원했다.

술김에 과장되고 격한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군 내 빨갱이 검거에 열을 올리던 1연대 정보주임 김창룡 대위는 이미 강창선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순사건 직후 좌익계열 숙군(肅軍)의 바람은 거셌다.

일본군 헌병보 출신인 김창룡은 공산당을 때려잡겠다며 한창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던 차였다.

강창선과 자주 어울리는 박정희가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나중에 육사 8기로 나와 동기생이 되는 전창희에게 밀명을 내렸다.

“박정희가 사상이 온건치 않아 보인다.

네가 책임지고 전모를 캐라.” 박정희 소령이 술자리에서 터뜨린 불평불만이 전창희를 통해 고스란히 김창룡에게 보고됐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나 그의 과격한 발언이 그를 옭아맸다.

48년 11월 강창선에 이어 박정희 소령이 체포됐다.

남로당에 가담해 반란을 기도했다는 혐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 10·1사건 때 사망한 셋째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아 좌익에 물들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야기 꾸며내기 좋아하는 이들이 멋대로 갖다 붙인 소리다.

내 장인 박상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다.

두 형제분 간 사이는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다.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나의 장인에 대해선 황태성 사건과 관련 있어 나중에 기술하겠다.

 박정희 소령은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과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위기에 처한 박정희 소령을 구해준 건 육군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었다.

그는 군대 내 좌익 색출 작업의 총책임자였다.

백 대령이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하겠다”고 나섰다.

마침 김창룡은 사생활이 깨끗한 백선엽을 가장 존경하는 상사로 여기고 있었다.

김창룡도 백 대령 뜻을 따라 박 소령에 대한 신원보증서에 서명을 했다.

형집행이 정지됐지만 박 소령은 군복을 벗어야 했다.

민간인 신분이 된 그를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한 것도 백선엽 정보국장이었다.

박 소령을 위해 원래 직제에 없던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선 그때가 특히 불행했던 시기다.

타의에 의해 군인의 길을 접고, 사관학교 중대장 시절 직접 가르쳤던 유양수 전투정보과장(육사 특7기) 밑에서 편제에도 없는 실장으로 일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에 대해 그가 불평의 말을 털어놓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육사 후배들에게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라고 말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정을 그땐 나도 미처 알 수 없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박헌영을 중심으로 1946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그해 8월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된 뒤 남한 내 좌익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조직됐다.

남한의 공산화 공작을 진행하다 48년 12월 국가보안법으로 당이 불법화되자 간부들이 대거 월북한다.

    ● 인물 소사전 김창룡(1920

56년)=이승만 정권 시절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특무대장. 일본 관동군 헌병보로 근무하다 광복 후 귀국해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사) 3기생으로 졸업했다.

여순사건 직후 숙군작업에서 이재복·이중업 등 남로당 간부를 잇따라 체포해 이름을 떨쳤다.

51년 육군 특무대장(대령)이 됐고 53년 준장, 55년 소장으로 승진했다.

군내 좌익 제거에 앞장서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56년 그의 권력 남용에 불만을 품은 허태영 육군 대령과 그 부하들에게 저격 살해당했다.

?4. 5·16 거사 결의 ?  5·16 석 달 전 JP "혁명합시다" 박정희 "준비하고 있었네" … 박정희 장군 "한강 이북은 자네가 맡게, 이남은 내가 맡지"박정희와 김종필 두 개의 흐름, 거대한 물줄기로 만나 '혁명 잉태'하극상 사건 주동자로 감방 갇혀, "군복 벗어라" 압박에 결국 굴복결혼기념일 10주년 날 강제 예편, 엉엉 통곡하자 아내가 등 토닥여박정희와 대구서 8개월 만에 재회, "이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1961년 7월 28일 용산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해 간부들을 대상으로 특별강연을 하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 군복 차림에 권총을 찬 모습과 탁자 위의 낡은 물주전자가 눈에 띈다.

청중 맨 앞줄에 공정식 해병대 1여단장, 김성은 해병대 사령관(왼쪽부터).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61년 5·16을 거사할 때 김종필의 신분은 민간인이었다.

그는 3개월 전 군에서 쫓겨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석 달이었다.

얼마 동안 혁명 계획을 세웠는지에 많은 질문이 쏟아져왔다.

3개월이라고 대답하면 놀랄 것이다.

세 달 준비하고 세상을 평정했다니-. 그것은 사실이다.

본격적인 거사 도모 기간은 87일이었다.

물론 혁명 얘기는 그 전에도 나눴다.

그때는 묵시적인 의견교환이었다.

난마처럼 엉망진창인 시국에 대한 분노와 애국의 충정을 모으는 수준이었다.

1961년 2월 19일. 박정희 소장과 혁명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실행에 옮긴 시점이다.

나는 강제 예편돼 민간인 신분이었고 박 소장은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있었다.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있다 그리로 옮겼으니 좌천이었다.

우리는 그날 대구에서 만나 혁명을 결의했다.

그해 2월 4일부터 15일까지 나는 헌병대 감방에 있었다.

그 전해 그러니까 60년 9월 이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육사 동기생 석정선과 함께 구속됐다.

난로 없는 감방, 영하 10도의 한파를 모포 두 장으로 버텼다.

 4·19혁명 직후 나는 군 수뇌부의 부정·부패·무능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3성 이상 장군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整軍)운동을 주동했다.

 남들은 하극상(下克上)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있었다.

아랫사람이 위를 누르는 하극상이 아니라 내가 몸담은 군 조직을 온전하게 만드는 정군이었다.

군대만 제대로 서 있다면 대한민국은 버틸 수 있다.

정치가 아무리 썩고 못마땅해도 군이 굳건하다면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 두세 개짜리 수뇌부들은 나를 그냥 군에서 쫓아내려 했다.

아마 ‘저 건방진 자식, 중령 놈이 뭘 안다고 날뛰는 거야, 이번 기회에 날려 버려야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감방에 갇힌 뒤 열흘쯤 있는데 헌병감 조흥만 준장이 찾아왔다.

 ▶조흥만=“자네 자진해서 사표를 내 주어야겠어.” ▶나=“못 냅니다.

군법회의에 넘겨 주십시오. 법정에서 남길 말을 다 하고 나가겠습니다.

” ▶조흥만=“이제 그만해라. 옷을 벗고 나가면 하극상 사건도 불문에 부쳐주겠네.” ▶나=“군법회의에서 이 썩은 장군들을 다 쫓아내 군을 아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뒤에 나도 군을 떠나겠다고 말해야겠습니다.

” 이 사건은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에 군법회의는 정군의 필요성을 세상에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이틀 뒤 다시 돌아온 조흥만은 예상치 못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정 그렇다면 자네 처삼촌(박정희 소장)을 가만두지 않겠다.

자네들이 박 장군을 업고 혁명을 한다면서? CID(범죄수사대) 포함해 헌병대 인원 700명을 모두 투입해 박 소장을 빨갱이로 만들어 결딴내겠다”고 협박했다.

빨갱이 얘기가 또 나온 것이다.

“도대체 그게 누구의 뜻이냐?”고 묻자 그는 주저 없이 “참모총장님의 뜻”이라고 답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박 소장에게 씌웠던 좌익 혐의는 6·25전쟁을 통해 모두 벗겨졌다.

문관에서 소령으로 복귀했고 미국 유학을 거쳐 소장까지 승진하지 않았나. 참모총장의 협박은 나에게 군과 박정희 사이에 선택을 강요하는 셈이었다.

 그 전에 박 소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60년 6월 9일 육군 본부에서였다.

그를 못 본 지 벌써 반 년이 넘었고 ‘하극상 사건’은 그 사이 일어난 일인데도 육군 수뇌부는 내 등 뒤에 박 소장이 있다고 믿는 듯했다.

“박 소장은 이 사건을 전혀 모른다.

내가 그분의 조카딸과 살고 있다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아무리 외쳐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5·16을 일으키기 전인 1960년 육본 정보국의 한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 김종필 중령(왼쪽).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나는 결국 굴복했다.

군복을 벗기로 했다.

61년 2월 15일이었다.

그들이 작정하고 나서면 박 소장의 실오라기 하나라도 털어 좌익의 구덩이로 몰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리라. 군복을 벗고 집에 돌아온 날, 13년 군 생활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원망스러워 화가 났다.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결혼기념일 10주년이기도 한 그날 아내는 하염없이 우는 내 등을 토닥여 줬다.

나는 결심했다.

이제 정군이 아니다, 혁명을 해야 할 때다.

 사흘 뒤 청파동 내 집에서 정군운동 멤버들이 모였다.

울분에 찼던 나와 동기생들은 국외에서 벌어졌던 군사혁명의 사례들을 두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머리 속엔 박정희 소장이 떠올랐다.

‘혁명을 이끌 리더로 모셔야 한다.

’ 다음날인 19일 대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2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나는 동기생들과 청파동 집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제는 혁명을 해야겠습니다”고 제안했다.

세상에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한번 왔을 때 잡아채야 한다.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 소장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군…. 음, 그동안 나도 이런 때가 오리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 왔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서울 쪽 병력 사정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서울 근교 2개 예비사단을 동원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박 소장은 “나도 전방의 2개 사단 정도를 동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답했다.

 박 소장의 의중을 확인한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앞장을 서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 내 말을 듣고 난 박 소장은 “그래, 알겠네. 한강 이북은 자네가 맡아라. 그 이남은 내가 맡겠다”고 대답했다.

그동안 박 소장과 나는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각각의 방식으로 일을 도모해왔다.

이제 처음으로 두 개의 흐름이 거대한 하나의 물줄기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군복을 벗은 뒤 박 소장에게 달려온 내 뜻은 이로써 한 단락을 맺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전혀 새로운 시작이었다.

군에서 쫓겨날 땐 엉엉 울었지만 그때 안 나왔다면 거사를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강제 예편됨으로써 나는 시간의 여유가 생겼고 누구와도 만날 자유를 얻었다.

이 여유와 자유가 혁명을 설계하고 조직하고 일으키게 한 자원이었다.

군에서 나올 때 내가 받은 퇴직금은 90만환. 지금으로 치면 한 1000만원쯤 될까. 이 돈도 모두 거사를 준비하는 데 썼다.

아내의 곗돈도 타서 보탰다.

 꿈은 원래 마음속에서 오래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꿈이 말로 옮겨지면 다음 차례는 실행이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가슴에 품은 뜻은 2월19일을 기점으로 맹렬한 실천으로 전진했다.

[정리=전영기 , 유광종 작가 ] ● 인물 소사전 조흥만(1926

)=5·16 당시 육군 헌병감(준장). 61년 2월 정군운동을 주동한 김종필 중령을 강제 예편시킨 주인공이다.

5·16 직후 군사정부의 치안국장을 맡았지만 한 달여 만에 해임되고 군복을 벗었다.

이후 야당인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돼 야권 정치인이 된다.

69년 8월 신민당(총재 유진오) 의원 시절 같은 당 성낙현·연보흠 의원과 함께 3선 개헌안에 찬성하는 서명을 했다.

신민당은 그의 비례대표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해 당을 해산했다.

한영공업주식회사 사장,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5. 5·16 거사의 씨앗  "송 총장 당장 물러나십시오" … 그땐 내가 참 당돌했어 … 박정희 "자네 하려는 거, 그거 하자" 지프차서 언약박정희도 송요찬에게 공개편지 , '3·15 부정선거 책임지고 용퇴'송 총장 "정기있는 장교 있어 다행" , 사퇴 받아들여 … 기득권 세력 반발 중령 군복 입고 장면 총리 찾아가 , 송원영 비서관 "여기가 어디라고"'세상 뒤집는 혁명으로 전진' 결심 , 도서실서 책 빌려 이집트 혁명 연구“지금 생각해도 참 당돌했어.” JP가 정군(整軍)에서 5·16에 이르는 긴박했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떠올린 말이다.

그 대담함은 박정희와 ‘지프의 혁명언약’으로 발전한다.

    1961년 8월 진해 해군통제본부 공관에서 열린 군·정부 관계자 세미나에 참석한 김종필 중 정 부장(왼쪽 두 번째). 맨 왼쪽 선글라스 낀 사람이 송요찬 내각수반.4·19혁명 10주년, 나는 학생들의 의거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

1970년 그때 나는 공화당 의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역류에 숨 막히고/분노가 꽃 피던 날/해일같이 넘쳐 온 함성들이/선지빛 산화(散華)로 흩날려/조국의 사월 청정한 넋돌되어 솟아난다….” 1960년 4·19 때 나는 서른네 살 육군 중령이었다.

나 역시 4·19 정신에 공감하고 있었다.

 4·19의 반독재, 반부패 외침은 장면 정부의 무능한 리더십 때문에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젊음의 희생은 우리나라를 결정적으로 바꿔낸 전환적 에너지였다.

군대 내부도 그런 물결이 꿈틀거렸다.

    김종필, 장면 전 총리(왼쪽부터)전국 5대 도시에 비상계엄이 실시되자 장교들은 집에 못 들어가고 영내 대기할 때가 많았다.

육본 정보참모본부 기획관리과장이었던 나의 사무실은 영관급 장교들의 ‘시국 토론장’이 됐다.

중견 장교들의 논의는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군 수뇌부들이 퇴진해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5·16 거사까지 1년 새 육군 참모총장 4명이 바뀌고 10여 명의 장성이 퇴진한 정군운동은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정군운동의 주동자는 나를 비롯해 석정선(훗날 정보부 차장보), 김형욱(중앙정보부장), 길재호(공화당 사무총장) 등 육사 8기 동기생 8명이었다.

 우리들의 정군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박정희 소장이었다.

그는 당시 부산지구 계엄사령관(군수기지사령관)이었다.

5월 2일, 박 장군은 부관인 손영길 대위(육사 11기)를 L-19 경비행기로 서울로 보내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다음은 박정희 소장의 편지 요지. “군의 최고 명령권자인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 책임을 지시어 정화(淨化)의 태풍이 군내에 파급되기 전에 자진 용퇴하신다면 얼마나 떳떳한 것이겠습니까”라고 적었다.

박 소장은 우리와 일절 상의하지 않고 이런 편지를 보냈다.

송 총장의 반응은 격렬했다.

“내가 박정희를 얼마만큼 보호해줬는데.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네가 나를 잡아먹어?”라고 반응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송 총장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송 총장은 이미 나한테 약점이 잡혀 있었다.

3·15 부정선거 직후 그는 “군은 이번 선거에서 맡은 바 110%의 성과를 냈다”고 열변을 토했다.

나는 그때 회의의 주무과장으로 앉아 있었기에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110%라면 60만 군인의 최소한 10%를 엉터리로 투표하게 했다는 것 아닌가. 나는 박 소장의 편지 소식을 듣고 ‘정군 연판장’을 작성했다.

연판장은 “우리 군은 4·19정신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

정군 대상자는 3·15 부정선거를 지휘한 책임자, 부정축재자, 부패와 무능 지휘관으로 한다.

정군은 개인적 권고로 군을 떠나게 하며 사퇴권고에 불응한 때에는 지휘계통을 통해 사퇴를 종용한다”는 내용이다.

일차적으로 송 총장을 겨냥했다.

연판장은 허정 과도정부의 이종찬 국방장관에게 전달되기 하루 전 탄로났다.

정군파 8명 중 나와 석정선 등 5명이 방첩대에 구속됐다.

혐의는 국가반란음모죄. 범죄 혐의는 사형까지 가능한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민심과 군심이 우리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송 총장은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나를 불렀다.

    1959년 서울 영등포 육군 6관구사령관 사무실에서 박정희 소장이 미군 관계자와 환담하고 있다.

이듬해 1월 박 소장은 군수기지사령관에 임명돼 부산으로 내려간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송 총장=“나를 왜 물러나라고 하는 건가?” ▶나=“3·15 부정선거를 청산하고 나라가 큰 전환을 이루려고 하는데 총장님께서 하나도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얘기입니까. 책임지고 물러나십시오. 우리도 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을 받겠습니다.

” ▶송 총장=“난들 격동하는 상황에서 생각이 왜 없겠나. 우리 군대에도 귀관과 같은 정기(精氣)를 간직한 중견 장교들이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내게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주게.” ▶나=“안 됩니다.

오늘 저녁에 결심해주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결심이 물러집니다”라며 몰아붙였다.

 송 총장은 나를 설득하러 불렀다가 오히려 압박을 당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당돌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는 데 이런 당돌함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런 일을 하라고 한다면 과연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령이 육군 총수를 향해 하루의 유예도 주지 않고 군을 떠나라고 압박했으니 말이다.

나의 방식과 발상은 하극상으로 단죄될 수 있었다.

송 총장은 결국 참모총장직을 관두겠다고 답했다.

연병장에서 나를 기다리던 육사 동기생 30여 명은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때가 5월 19일 저녁이었고 송 총장은 이튿날 사표를 제출했다.

박정희 소장이 불을 붙인 지 17일 만에 내가 ‘송요찬 퇴진’을 마무리한 것이다.

정군운동의 기세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군의 기득권을 허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60년 6월 9일의 일이 떠오른다.

그날 이종찬 국방장관이 소집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도 참석했다.

회의에서 박 소장은 “과도정부하에서 군 내부의 정치세력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자정(自淨)없이 신정권으로 넘어가면 정치의 시녀가 될 수 있다.

소장 이상의 장성들에 대해 숙정(肅正)을 단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박 소장의 숙정 주장은 소수의 목소리에 그쳤다.

 지휘관 회의를 마친 박정희 소장은 정보국의 내 사무실에 들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박정희 소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저녁에 뭘 하나?”라고 물었다.

내가 “별일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럼, 우리 집에서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박 소장의 서울 집은 신당동이었다.

 박 장군은 자기 지프의 선탑석인 운전병 옆에 앉지 않고 굳이 뒷자석 내 옆자리에 올라탔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는 “자네, 지금 준비하는 거 본격화하자”고 말했다.

내가 “뭘 말입니까?”라고 묻자 박 소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가 하려고 하는 거, 그거 하자고!”라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금세 깨달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앞의 운전병에게 들리지 않게 나는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면 혁명을 해야지요.” 박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를 개혁하는 정군운동을 벌이되 반발이 심하면 혁명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박 장군과 나의 마음에 ‘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나와 그가 혁명이란 말을 나눈 최초의 대화였다.

그 순간 우리는 혁명가의 운명을 지니게 됐다.

60년 6월 9일 ‘혁명의 언약’은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61년 2월 내가 군에서 쫓겨난 뒤 ‘혁명의 결의’로 구체화되었다.

이 같은 결의는 수천년 가난을 극복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원대한 목표로 연결되었다.

지프의 언약 뒤 나는 육본 정보참모부에 설치된 도서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터키의 케말 파샤 혁명, 심지어 영국의 산업혁명까지 연구했다.

특히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 혁명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혁신과 반동의 대립이 격심한 20세기 후반기에 나세르가 지향했던 지도적 자세는 세계사적 의의를 뚜렷이 금 긋고 있었다.

 그 무렵 내 가슴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군은 참모총장이 이끌어야 했고 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이 밀어줘야 했다.

결국 문제는 정부의 인사였다.

그해 8월 21일, 나는 장면 총리를 만나러 갔다.

제2공화국은 내각제다.

국무총리가 최고 실권자다.

총리가 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중령 군복을 입고 중앙청(1995년 철거)의 총리실로 들어가는데 송원영 공보비서관이 가로막았다.

안쪽에서 고함소리가 새어 나왔다.

민주당 구파인 유진산 의원 등이 신파인 장면 총리와 조각(組閣) 협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송 비서관한테 “나라가 새로 출발하려 하는데 국군도 재정비해야 한다.

그러자면 정군을 해야 하는데 국방부 장관부터 신뢰받고 군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임명돼야 한다.

이런 건의를 드리려 왔으니 장 총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당신이 그 정군운동의 주동자요? 여보쇼, 여기가 어디라고 군복을 입고 들어오시나. 보시다시피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내일 아침 명륜동 총리 댁으로 오라”고 말했다.

 이튿날 총리 집으로 사복을 입고 갔다.

현관에 신발이 수십 켤레가 있었다.

그 시대의 안방정치 풍경이다.

송 비서관은 “지금은 당최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이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고 총리께서 곧 성당 미사를 가야 하니 오늘도 만나기 어렵겠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송 비서관은 나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와 “총리께 당신의 뜻을 다 전달했다”고 했다.

뒤이어 발표된 군 수뇌부 인사에서 정군의 의지는 희미했다.

 JP에게 1960년은 정군에 매진했던 한 해였다.

육군 참모총장 등 적지 않은 군 수뇌부가 정군운동으로 물러났으나 근본적으로 정치가 문제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 , 유광종 작가 ]?    ● 인물 소사전 송요찬(1918

80)=1960년 4·19 당시 계엄사령관. 이후 3·15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낸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61년 5·16이 나자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군사정부에서 국방장관, 내각수반 겸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62년 6월 물러났다.

63년 8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해 구속됐다.

70년 인천제철 사장, 80년 국정자문위원을 지냈다.

?    ●송원영(1928

95)=제2공화국 시절 장면 국무총리의 공보비서관. 출신. 1963년 야당인 국민의당 대변인을 맡았다.

신민당 소속으로 7

10대 서울 동대문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신민당 대변인과 원내총무를 지냈다.

80년 정치활동이 금지됐다가 85년 신한민주당 후보로 1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를 재개했다.

88년 정계에서 은퇴. 6. 포섭과 옹립 술집 '흐루시초프' 모의 "행운의 기회, 전광석화처럼 낚아채야" … 혁명핵심 29명 모여 "세상 바꾸고 뒤집어보자" 거병 결의나무 팔아 착복, 지도 못 읽는 장군 , 군 부패·무능에 젊은 장교들 분노 6군단 소속 동기생들 3명 만나 , "혁명" 입 떼자 "대찬성" 흔쾌히 동의 거사 38일 전 박정희, 29명 첫 대면 , "죽음 같이하자" 굳은 악수하며 약속 바로 그 자리서 혁명지도부 구성  , 작전반·행정반 통합조정 내가 맡아기회는 한 번뿐이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변질된 것이다.

오늘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과감하게 포착해야 한다.

그 무렵 김종필의 상념을 지배하던 언어였다.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해병대 훈련을 참관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오른쪽). 바로 뒤는 김종필 중정부장. 왼쪽은 의전비서관 조상호 중령. [중앙포토]꽃샘추위가 매서운 1961년 초봄 나는 분주해졌다.

박정희 소장과 대구에서 혁명 결의(2월 19일)를 한 뒤였다.

혁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출동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정군(整軍)운동은 육군본부 동료들로 충분했다.

이젠 혁명이다.

실병력이 있어야 했다.

그들을 이끄는 야전 장교를 포섭해야 했다.

나는 한강 이북, 박 소장은 한강 이남을 맡았다.

<3월 9일자 참고>?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열린 6·25 인천 상륙작전 기념행사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가운데 사복 차림 선글라스)과 육사 8기 동기생 등 5·16 주역들이 모였다.

이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주로 포진해 있었다.

앞줄 왼쪽부터 오정근 중령(해병), 강상욱·오치성·이석제 대령. 뒷줄 왼쪽부터 옥창호·정세웅 대령(해병), 길재호 대령 , 김종필 부장, 유원식 준장 . [사진 오정근씨 아들 오명식 삼정KPMG 고문]청계천과 무교동 사이에 조흥은행 본점이 있었다.

그 옆에 술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상수’라는 한글 간판을 달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 상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수상’이다.

이곳은 동지를 끌어들일 때 만남의 장소로 자주 사용됐다.

일종의 아지트다.

우리는 상수를 ‘흐루시초프’라고 불렀다.

당시 소련의 ‘수상’인 흐루시초프의 직책을 거꾸로 읽은 것에서 착안했다.

그는 유엔 총회 무대에서 구두를 벗어 연단을 두들기며 서방사회를 비난하는 연설로 꽤나 유명했다.

전화로 서로 만날 곳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암호처럼 “오늘은 ‘흐루시초프’에서 보자”는 식이었다.

헌병대 감시망도 그곳엔 닿지 않았다.

 ‘흐루시초프’에서의 가장 큰 성과는 포천에 있는 6군단 포병단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부대는 5·16 때 제일 먼저 육본을 점령했다.

6군단 소속인 홍종철(군단 작전참모) 대령과 구자춘·신윤창(군단 포병단 대대장) 중령을 만났을 때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들은 모두 육사 8기 동기생들이다.

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입을 떼자마자 “혁명하자는 거지? 그래, 세상 뒤집고 바꾸는 거 찬성한다”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 우리 다 생각이 같아”라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개 그런 분위기였다.

각 부대 지휘관들, 대대장이나 연대장들이 나오는데 많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내가 “이제 안 되겠다”고 하면 “이런 군대 갖고 안 된다” “나라를 방치할 수 없다” “염려하지 말라. 우리에게 임무가 주어지면 다 수행하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혁명동지의 규합이 쉬웠던 이유는 영관급 장교들이 너나없이 느끼는 군의 부패와 무능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스리쿼터(0.75t짜리 군용트럭)의 뒷바퀴를 빼고 바퀴축에 벨트를 연결한 뒤 여기에 기계톱을 매달아 산의 나무를 베어 파는 소위 ‘후생사업’이란 이름의 부패가 전군에 퍼져 있었다.

대부분의 장성이 부하들을 동원해 이런 짓을 해 사복을 채웠다.

축도 10만 분의 1 작전지도는 모눈 한 간이 10㎞다.

별 셋짜리 어떤 군단장은 독도법조차 몰라 지도의 두 지점을 손뼘으로 재고는 이 정도면 거리가 몇 ㎞냐고 물을 정도였다.

?    1962년 1월 1일 신년하례식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김 부장은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착용을 권장한 재건복을 입고 있다.

가운데 뒷모습은 채명신 감찰위원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정군을 통해 부패·무능 장성들이 정리되길 기대했던 젊은 장교들은 개혁의 좌절에 분노했다.

정쟁과 분열, 무력함에 휩싸였던 정치권도 우리의 결심에 영향을 줬다.

군대도 결국 사회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는 조직인데 군이 뭔가 일으키는 것을 오히려 바라는 분위기가 퍼져 갔다.

그래서 포섭 대상자를 만나 “혁명을 같이하고 함께 죽자”고 하면 거절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혁명에 합류키로 한 동지들이 1군 사령부의 조창대 중령, 30·33사단 작전참모인 이백일·오학진 중령, 육본의 강상욱 중령 등이다.

 모임이 잦아지면서 4·19 1주기를 거사일로 잡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날 예상되는 학생 시위를 빌미로 거병(擧兵)하는 시나리오였다.

그럴수록 동지들 사이에선 “혁명 지도자로 누구를 옹립하려고 하느냐” “너 혼자 알고 있으면 되나. 우리와 연결시켜라”는 요구가 뜨거웠다.

나는 말을 아꼈다.

박정희 소장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나야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박 소장은 여전히 군 감시망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소장이 내가 포섭한 혁명주체들 앞에 존재를 드러낸 건 4월 7일이었다.

거사 예정일을 10여 일 앞둔 시점이었다.

육사 9기생인 강상욱 중령의 장인이 운영하고 있던 명동의 한 호텔 건물(양명빌딩) 옥상에 동지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박정희 소장을 모시고 올라갔다.

이들 중엔 박 소장을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 가운데로 파고들면서 “자, 모두 이곳을 보라. 이분이 우리를 이끌 분이다”고 소개했다.

“와

”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만세” 소리도 여러 차례 나왔다.

박 소장은 극히 짧게 인사 겸 연설을 했다.

키워드는 구국(救國)과 살신(殺身), 기회였다.

“구국의 순간이 왔다.

지금이 나라를 구할 절호의 기회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게 아니다.

” 간결함이 박정희다웠다.

사실 길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 이심전심, 같은 뜻을 품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 아닌가. 행운의 여신은 한번의 기회만을 준다.

기회가 오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낚아채야 한다.

그 무렵 군심과 민심은 같았다.

사회안정과 변혁을 바라고 있었다.

군의 정치개입은 역사의 필연이 되고 있었다.

? 5·16 당시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박 소장은 연설 뒤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핵심 동지 29명은 육사 2기생인 박정희 소장, 5기생 4명, 나와 동기생인 8기 16명 8특(특별기수) 2명, 9기 4명 등이었고 포병 간부후보생 출신인 차지철 대위가 제일 낮은 계급으로 참여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혁명지도부를 구성했다.

총지휘자는 박정희 소장이다.

지도부를 작전반과 행정반으로 나누되 두 반을 통합 조정하는 임무는 내가 맡기로 했다.

작전은 출동부대를 이끌고 행정은 작전을 지원하는 업무였다.

 작전반 책임자는 서울 일원의 방어를 맡고 있던 6관구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 연락책은 육군본부 오치성 대령으로 정했다.

행정반은 육본의 이석제 중령, 연락책 강상욱 중령으로 했다.

원주의 1군 사령부는 조창대 중령이 맡았다.

조직을 본격적으로 확대하면서 보안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4월 7일 이후의 모임은 반을 단위로 해서 소규모로 진행하기로 했다.

[전영기 , 유광종 작가]    ●인물 소사전 홍종철(1924

74년)=육군 6군단 작전참모로서 포병단을 이끌고 5·16에 참여했다.

서울대 상대 출신의 육사 8기생.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겸 문교사회위원장을 역임했다.

대통령 경호실장(63년 12월)을 거쳐 문화공보부 장관(64년 9월)과 문교부 장관(69년 4월)을 지냈다.

74년 6월 청와대 사정담당 특별보좌관 재직 시절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 숨졌다.

7. 혁명의 확신?백운학 입에서 튀어나온 "혁명" … 거기서 민심을 읽었다 … 백씨, 박정희에게 "20년은 갑니다" … 내가 "그 후는?" 묻자 침묵정군운동으로 군복 벗은 석정선 , "백운학한테 좀 같이 가자" 졸라 백씨, 첫 만남에서 "때가 됐습니다" , 난 "누굴 죽이려고" 딱 잡아뗐다 좌파 준동 … 정부 무능은 극에 달해, 국민 마음속 불안한 그림자 짙어져 백씨, 내게만 속삭이며 말한 '천기' , "박 의장, 20년 뒤 돌아가실 것 같아"    1964년 1월 2일 한복을 입은 김종필 공화당 당의장(오른쪽)이 윤보선 민정당 대표(왼쪽)의 서울 안국동 자택을 방문해 새해 인사를 건네고 있다.

이날 김종필 당 의장은 윤보선 대표에게 승용차를 기증했다.

전직 대통령이자 제1야당의 당수인 윤 대표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윤 대표는 승용차를 돌려보냈다.

당시 선물한 차는 52년식 링컨으로, 윤보선씨가 대통령 재직 당시 쓰던 관용차를 손질한 것이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시운(時運)은 대사(大事)를 이루게 한다.

천운이라고도 한다.

5·16 거사가 그랬다.

변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민심은 새 질서를 요구했다.

이를 드러내주는 절묘한 장면이 있었다.

1961년 4월 말이었다.

나는 거사를 위한 비밀 준비를 진행 중이었다.

병력 투입을 위한 부대별 출동 계획이 완성돼 가던 때였다.

일요일 아침, 육사 8기 동기생인 석정선이 청파동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게 “사업이 잘 안 되는데, 백운학이한테 좀 같이 가자”고 했다.

 백운학은 관상을 잘 보기로 이름난 역술인이었다.

자유당 말기에 국회의원 당선과 장·차관 취임을 맞혔다고 해서 정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낭산(郎山) 김준연의 3대 국회의원(1954년) 당선을 예언했다고도 알려졌다.

나는 “안 가”라고 손사래 쳤다.

그러자 석정선이 “야, 네가 지프차가 있잖니. 그것 좀 태워 달라는 소리다”고 했다.

나는 지프차에 석정선을 태우고 집을 나섰다.

 석정선은 정군운동을 같이했다.

그해 2월 나와 함께 군복을 벗었다.

‘16인 하극상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서였다.

60년 9월 영관급 장교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정군의지를 따져 물은 사건이었다.

예편 뒤 나는 혁명 작업에 뛰어들었다.

석정선에게도 거사에 참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 못하겠다”며 빠졌다.

나는 “비밀을 지키라”고만 단단히 일렀다.

이후 석정선은 자동차 두 대를 사서 운수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사업은 자잘한 사고가 자꾸 났다.

그 때문에 백운학을 찾아갔다.

?    백운학은 종로 5가 제일여관 안채를 빌려 쓰고 있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술집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 손님 네댓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가 돌아와 석정선이 방으로 들어갔다.

백운학은 안방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지켜봤다.

 백운학이 석정선은 보지 않고 자꾸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대뜸 날 향해 소리를 쳤다.

“됩니다!” 밑도 끝도 없는 됩니다였다.

 “뭐가 됩니까?” 내 물음에 그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아, 지금 준비하는 혁명….” “아, 여보쇼! 누굴 죽이려고 엉뚱한 소리를 하쇼!” 나는 백운학 입에서 흘러나온 혁명이란 단어에 화들짝 놀랐다.

행여 누가 들을까 무서워 딱 잡아뗐다.

백운학은 그런 나를 보고 허허 웃었다.

 “지금 때가 됐습니다.

다들 원하는 일입니다.

국민 모두 변화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마음 놓고 하십시오. 아무 놈도 말리지 못합니다.

됩니다!” 그는 웅변하듯 말했다.

?    1962년 2월 동남아 6개국 순방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과 석정선 정보부 2국장.내 얼굴 어디에서 혁명의 기운이 묻어났기에 관상가가 이를 꿰뚫어 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백운학의 얘기에서 나는 민심을 읽었다.

관상은 운명의 정기를 추적한다.

그들의 예견은 민심 흐름과 유리되지 않는다.

 한 달 전쯤인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혁신계 좌파단체가 주도하는 야간 횃불시위가 있었다.

데모대 수백 명이 손에 횃불을 들고 명륜동 장면 국무총리 집을 향해 행진했다.

이들은 “데모규제법, 반공특별법을 철폐하라”고 외쳤다.

“장면 정권 물러나라”는 구호도 나왔다.

시위대는 경찰차를 부수고 민간인 차량을 탈취하는 난동까지 벌였다.

그 시위는 사회 혼란과 정치 무능의 상징이었다.

그 불안의 그림자가 국민 마음속에 짙게 드리워졌다.

장면 정권은 불안과 혼란을 정비할 능력이 없었다.

시위 이튿날 윤보선 대통령이 여야 인사를 불러 긴급 회담을 벌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장면 총리, 곽상훈 민의원 의장, 백낙준 참의원 의장, 김도연 신민당 대표, 유진산 간사장, 현석호 국방장관, 양일동·조한백 의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중대한 비상사태라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아무런 해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3·23 청와대 회담을 계기로 정치권은 극심한 정쟁과 분열로 치달았다.

여야는 혁신계의 무정부적인 일탈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선 일치했지만 뿌리 깊은 불신과 의심에 구체적인 대안을 도출할 수 없었다.

대다수 국민은 침묵하는 다수다.

그들에게 이 정권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았다.

사회 모든 면이 변혁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백운학의 소리가 민심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여겼다.

??1961년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진 혁신계 단체의 야간 횃불시위. 수백 명이 손에 횃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을 철폐하라는 주장을 펼쳤다.

경찰차를 부수는 등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당시 사회 혼란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중앙포토]나는 서둘러 백운학의 말을 끊었다.

“그만 하쇼. 앞에 앉은 사람이나 잘 봐주쇼.” 그제야 백운학이 앞에 있는 석정선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 사람, 사복 입고 왔지만 중령 아니면 대령 출신인데. 그 바퀴 달린 거 그만 처분하지”라고 했다.

석정선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데 깜짝 놀랐다.

 자리를 뜨려는데 백운학이 다시 날 바라봤다.

나는 그에게 “두 번 다시 그 얘기 하지 마쇼”라고 주의를 줬다.

그는 대답 없이 껄껄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넌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어. 돼, 돼. 다들 올 게 왔다고 할 거야. 방해할 사람 없으니 해.” 관상쟁이까지 혁명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흉중에 은근한 자신감이 더해졌다.

그 무렵 군대가 혁명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군 수뇌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사고(思考)의 나태와 집중력 부족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

군복 입은 군인들이 다방에 삼삼오오 모여 “혁명해야 한다” 떠들어도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5월 16일이 오기 전 거사 계획이 새 나간 적이 있다.

그때도 나는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백운학이 내게 천기를 누설한 건 그때 한 번만이 아니었다.

5·16 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된 61년 7월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나는 백운학을 저녁자리에 불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혁명 성공을 일찌감치 내다본 인물이니 박정희 의장도 한번쯤 만나볼 만하다고 여겼다.

서울시청 뒤편 다옥동(현 중구 다동)의 요릿집이었다.

시중 들던 종업원 두 명을 잠시 물리고 백운학이 박 의장에게 말했다.

“각하, 한 20년은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 그 얘기를 들은 박정희 의장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다음엔 어떻느냐”고 물었다.

백운학은 그 질문엔 입을 다물었다.

 자리가 파한 뒤 나가는 길에 백운학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이상한 괘인데요. 그 무렵에 돌아가실 것 같아요.” 나는 그 얘기를 박 의장에게 전하지 않았다.

예사롭지 않은 소리라고 그때도 생각했다.

18년 뒤 10·26 그날이 닥치고 나서는 더 놀랐다.

불길한 예언은 들어맞았다.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란 말이 있다.

이치(理致)가 아닌 것이 이치를 이길 수 없고, 옳은 이치라도 법에 우선할 수 없으며, 법도 권세를 능가하지 못하고, 그 권세라 할지라도 필경에는 하늘, 즉 민의를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숱한 힘과 원칙들이 종국엔 국민의 마음에 합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JP가 자주 쓰는 말이다.

[전영기·한애란  ]?● 인물 소사전 백운학(1921

79)=1950

70년대 유명 역술인. 호는 청산(靑山), 본명은 이종우다.

20대 후반부터 서울 종로에서 활동했다.

관상을 잘 본다고 이름이 알려져 정·재계 고위 인사들도 그를 찾았다.

그를 따라 백운학이라 이름 붙인 관상·작명가가 여럿 나왔다.

원조 백운학은 따로 있다.

구한말 고종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했다는 박유붕(1806

66)이다.

8. 5·16 최종 점검 "혁명은 의지다, 숫자가 아니다" 60만 대군 중 3600명 거병 … 박정희 "중심부 서울만 장악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형님 집서 핵심 25명 마지막 회의, '신이 계시다면 도와달라' 기도'공수단, 장면 숙소 반도호텔 장악' , 출동부대 구체적 점령 목표 결정D데이 H아워는 5월 16일 새벽 3시 , 박 장군 "세 번 연기는 없다" 다짐거사 계획 누설돼도 군 수뇌 무덤덤 , "성공하겠다" 은근히 자신감 생겨 역사는 기록되는 게 아니다.

기록하는 것이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한 5·16 핵심세력들은 운명의 순간들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거사 날짜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그들은 하늘의 도움을 구했다.

    1962년 4월 경기도 포천 6군단사령부를 방문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에서 둘째). 6군단포병단은 5·16 당시 가장 먼저 육군본부를 접수했다.

맨 왼쪽은 황종갑 최고회의 총무처장(준장), 김종필 부장오른쪽은 김진위 수도방위사령관(소장), 그 옆은 김계원 6군단장(중장). 김계원 장군은 이후 5대 중정부장과 대만대사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역사는 기록되는 게 아니다.

기록하는 것이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한 5·16 핵심세력들은 운명의 순간들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거사 날짜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그들은 하늘의 도움을 구했다.

그 무렵 나는 기도를 했다.

혁명의 성공을 간절히 구했다.

신이 계시다면 도와달라고 했다.

영어로 ‘메이 가드 블레스 어스(May God bless us·신이여 축복하소서)’를 되뇌었다.

그때 한국군이 60만 명, 미군이 5만6000명인데 3600명의 병력으로 세상을 뒤집었으니 누구는 기적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 적은 병력이 서울로 진입하는 데 별로 저항이 없었다.

석 달간 거사 준비 과정에선 비밀 누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군 사령탑은 이렇다 할 진압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어 그래’ ‘그게 사실이야?’ 하는 반응 정도였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1961년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장도영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이 나란히 앉아 있다.

[중앙포토]1961년 5월 14일 오전. 거사 계획을 확정 짓는 마지막 회의가 서울 약수동 셋째 형님 댁에서 있었다.

종락(鐘洛) 형님은 한일은행에 다녔는데 우리 일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형님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집 앞 골목길 입구에 나가 군 방첩대(CIC)나 범죄수사대(CID)의 감시가 따라붙었는지 망을 봐주었다.

형님 댁이 25명의 혁명주체들로 꽉 찼다.

거사 당일 움직이게 될 책임자들이다.

한 달여 전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할 때 29명이 모인 이래 가장 많은 숫자였다.

[김종필] 완전 대박


 내가 총괄기획 및 조정 역할을 맡아 회의를 진행했다.

박정희 소장은 D데이 H아워가 5월 16일 새벽 3시임을 선언했다.

그 순간 긴박감이 고조됐다.

그 전에 잡았던 거사일 4월 19일과 5월 12일이 두 번이나 연기됐기에 선언의 무게감은 더했다.

박 소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D데이 H아워의 변동은 없다.

최후의 1인까지 싸워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 중 누군가 “출동병력이 한 곳으로만 몰리는 것 아닌가. 대구나 부산, 인천, 수원 등 지방 주요 도시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걱정했다.

박 소장은 “서울이 중요하다.

서울만 장악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 나온다”고 안심시켰다.

적은 병력으로 큰 군대를 상대할 땐 중심부를 쳐야 한다는 게 박 소장의 생각이었다.

    혁명은 기습이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핵심부를 전격적으로 집중해 치는 것이다.

대상이 움직이기 전에 이쪽의 선제(先制)공격이 승부를 가른다.

칭기즈칸이 10만의 군사로 몽골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지역을 평정한 비결도 이것이었다.

주변부를 버리고 중심부만 장악하는 방식이다.

칭기즈칸은 광대한 지역의 주요 도시, 요충지에 소수 병력만 남겨 놓고 앞으로 전진했다.

 회의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의지로 합니다.

의지는 자기 몸을 집어던지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결의로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의지가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전 기안을 맡은 박원빈 중령(6관구 작전참모)은 “16일 0시를 기해 예하부대에 비상훈련을 가장한 혁명군 출동명령을 하달하겠습니다”고 보고했다.

6관구는 혁명 지도부의 첫 지휘소로 결정됐다.

6관구는 수도권을 방위하는 사령부다.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 거사 책임을 맡았다.

첫 지휘소 임무가 끝나면 두 번째 지휘소는 남산 KBS방송, 세 번째는 육군본부로 옮길 예정이었다.

박원빈 중령이 발표한 거병과 점령 목표는 이랬다.

괄호 안은 거사 책임자.    6관구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육사 5기) 대령. 영등포에 주둔한 6관구는 5·16의 첫 지휘소 역할을 했다.

◆제1공수단(단장 박치옥 대령)=장면 총리의 숙소인 반도호텔과 방송·통신 기관, 중앙청, 국회의사당 ◆해병1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내무부, 치안국, 서울시경 ◆6군단 포병단(단장 문재준 대령)=육군본부 ◆30사단(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청와대, 시경탄약고, 서대문형무소, 연희송신소 ◆33사단(작전참모 오학진 중령)=기독교 방송국, 국제전신전화국, 중앙우체국 ◆특수임무(오치성 대령, 옥창호·김형욱·이석제·유승원 중령, 박종규 소령)=출동부대 독려 및 요인 체포. 마지막 분위기는 비장했다.

지금 우리가 헤어지면 다음에 만날 곳은 육군본부이거나 하늘나라가 될 것이다.

이승의 끝이 될지 모르는 동지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나는 신문지에 싸서 미리 준비한 100만환(지금 1000만원 정도)을 그들에게 쪼개서 나눠줬다.

한 사람당 쌀 한 가마는 살 수 있는 돈이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가족에게 양식이라도 사주시라”고 말했다.

그 돈은 남상옥 사장(사업가·뒤에 타워호텔 사장)한테 마련했다.

 무산된 두 차례 거사가 무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첫 번째 4월 19일 계획은 4·19기념 1주년 행사를 맞아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예상하고 준비한 것이다.

시위가 벌어지면 진압군으로 투입되는 혁명 주체세력이 궐기군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날 동대문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3만 명이나 모여 기념식이 있었다.

기대했던 데모는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 궐기는 자동적으로 취소됐다.

나는 발상과 접근 자세를 바꿨다.

상황이 조성되어야 거병하는 소극적 방식은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역사는 스스로 써야 하고 미래는 만들어가야 한다.

이튿날 대구의 박정희 소장(2군 부사령관)을 찾아가 폭동 진압 계획에 편승하려는 소극적 계획을 수정하자고 했다.

우리는 주변 조건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혁명군을 편성하기로 했다.

 두 번째 계획은 5월 12일이었는데 주체세력 중 한 명의 부주의로 비밀이 누설됐다.

육본의 이종태 대령이 경인 통근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포섭하기 위해 혁명 준비 상황을 발설한 것이다.

이 동료는 방첩대에 밀고했다.

거사 계획은 서울지구 방첩대장(이희영 대령)→육본 방첩대장(이철희 준장)→장도영 참모총장(중장) 순으로 보고됐지만 방첩대의 손길은 우리에게 미치지 않았다.

이 대령 한 명만 구속시키고 수사를 확대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쿠데타 소문이 날짜까지 박아 군내에 널리 퍼지게 돼 부득이 그날 궐기를 중단했다.

우리들의 거사 계획은 여러 쪽에서 올라갔다.

그럼에도 보고를 받은 장도영의 군 수뇌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신빙성을 두지 않든가 ‘대단치 않은 일’이라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거사 기밀이 누설됐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두렵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군과 정부의 무관심과 나태함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사가 성공하리라는 자신감이 은근히 생겼다.

기묘한 상념이 일었다.

1950년 6·25 남침 때다.

정보국의 박정희 작전정보실장(무관)과 북한반장(중위)인 나는 49년 12월에 전쟁 발발 시점과 징후를 정확하게 분석해냈다.

군 수뇌부에 보고하고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군과 정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책 없는 안일함,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들을 지배했다.

그때 군 수뇌부는 알면서도 남침을 당했다.

그 11년 뒤 군 지휘부는 군사혁명을 눈치챘으면서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전영기 , 유광종 작가 ]    ● 인물 소사전 김종락(1920

2013년)=김종필의 셋째 형으로 5·16에 민간인 신분(한일은행 과장)으로 가담했다.

1949년 상호은행(한일은행 전신)에 입행해 전무까지 지낸 뒤, 68년 서울은행장에 올랐다.

66년 9대 대한야구협회장에 취임(66

80년)해 12대(89

93년)도 지내 최장기(18년) 협회장으로 재임했다.

국제야구연맹 부회장, 아시아야구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조선업체 ‘코리아 타코마’를 운영하다 91년 한진그룹에 넘겼다.

 9. 혁명 전야박정희 "과업 성취되면 군 복귀" … 버마식 군부통치 구상한 듯 … 박 장군 "참모총장 모셔 군 장악" … JP "장도영은 안 돼"박 소장 “혁명공약 6항에 원대복귀” , 난 ‘결국 없어질 조항’ 생각하며 동의군사혁명 계획서 건네받은 장도영 , 거사 앞둔 한 달 동안 묵묵부답“그는 어느 편 설지 불확실한 인물” , 강한 반대에도 박 장군 뜻 안 꺾어군화 신고 권총 찬 채 마루에 앉아 , ‘진인사대천명’ 출동시간 기다려김종필(JP)은 5·16을 기획하고 설계했다.

하지만 JP가 그린 거사 밑그림은 지도자인 박정희 소장의 수정을 거쳤다.

JP는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을 박정희 대통령이 메워줘서 거사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61년 6월 12일 서울운동장(옛 동대문구장, 2007년 헐림)에서 열린 ‘국가재건 범(汎)국민운동’ 촉진대회.시민·학생 7만여 명이 참석한 대회에서는 5·16 군사혁명을 국민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용공사상 배격 등을 결의했다.

윤보선 대통령(오른쪽)의 치사, 국가재건최고회의 장도영 의장(중장, 왼쪽)의 격려사에 이어 박정희 부의장(소장, 가운데)이 선창하면 참석자 모두가 뒤따라 만세를 외쳤다.

장·박 두 사람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대중 집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박정희는 어깨띠에 묶은 리볼버 권총을 왼쪽 허리에 찼다.

권총은 통상 오른쪽 허리춤에 찬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은 특이하다.

[사진 국가기록원]1961년 5월 15일,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군복을 꺼내 입었다.

석 달 전 강제예편으로 옷장에 넣어뒀던 군복이다.

허리엔 권총을 찼다.

 신당동 언덕배기에 있는 박정희 소장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정리 작업이 남아 있었다.

나는 품에서 혁명공약문 초안을 꺼내 박 소장에게 보여드렸다.

이틀 동안 가다듬은 5개 항 공약이었다.

그는 찬찬히 읽어보더니 “좋구만”이라고 했다.

글자 한 자 바꾸지 않았다.

 박 소장이 불쑥 말했다.

마지막 항목을 추가하자고 했다.

그 요지는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혁명군의 원대복귀-. 거사를 준비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성질서를 붕괴시키는 일이다.

세상을 뒤집는 일을 한 이상 군으로 돌아가진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복귀하면 다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숨 걸고 나서는 이유가 사라진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박 소장의 주장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강했다.

순수한 발상이었다.

‘내가 무슨 정권이 탐나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과업이 일단락되면 민간에 정권을 넘기고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그의 구상은 외국의 선례도 염두에 둔 듯했다.

내가 짐작하기에 박 소장은 버마(현재 미얀마)식 군부통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버마의 네 윈 장군은 58년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60년 2월 총선거를 실시했다.

군부세력은 출마하지 않았고, 네 윈은 민정 이양 뒤 군에 복귀했다(그 후 62년 3월 2차 쿠데타).    그 뜻을 알기에 굳이 만류하진 않았다.

“의견이 정 그러시다면 하나 넣읍시다”고 동의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품었다.

‘동의는 했지만 이 조항은 결국엔 없어질 것이다’. 혁명세력의 원대복귀를 약속한 제6항은 운명의 D-1일 그렇게 들어갔다.

나중 일이지만 이 조항은 두고두고 박정희 장군의 정치행보에 걸림돌이 된다.

 혁명취지문과 공약, 포고문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발표키로 했다.

장도영 총장(중장)을 앞장세우자는 것 역시 박정희 소장의 복안이었다.

박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 신분으로는 혁명군을 대표할 수 없다.

나는 2선으로 물러서고 장 총장을 1선에 모시자.” 나는 반대했다.

“장 총장은 저도 잘 알지만, 모시고 할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 내 머릿속엔 장 총장의 미덥지 못한 행각이 떠올랐다.

한 달여 전 4월 10일이었다.

박 소장이 군사혁명 계획서를 집으로 갖고 오라고 했다.

포섭한 동지의 역할과 출동부대 편성, D데이까지 진행 과정 등이 담긴 대여섯 장의 극비서류였다.

‘혁명’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지만 거사 전모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박 소장은 “장도영 총장에게 가서 이걸 보여주고 선두에 서 달라고 설득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 그걸 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를 잡아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큰일 납니다.

” “아니야, 괜찮아. 장 장군은 임자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내 입장에선 장도영을 끌어오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나한테 맡기고, 그 계획서를 주게.” 박 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장 총장보다 나이가 6살 위다.

하지만 군문에 장 총장(군사영어학교)이 먼저 들어왔다.

박 소장(육사 2기)은 상관인 장 총장의 신세를 여러 번 졌다.

1950년 육본 정보국 문관(文官)으로 근무하던 그를 현역(소령)으로 최종 복직시킨 인물이 장도영이었다.

장도영은 9사단장 시절 박정희 중령을 참모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박 소장은 장 총장과 오랫동안 쌓아온 신의를 굳게 믿고 있었다.

?    1961년 5월 18일 서울시청 앞에서 5·16 지지 가두시위를 한 육사 생도들에게 경례하는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오른쪽). 박정희의 검은색 선글라스는 5·16의 이미지로 굳어졌으며, 때로는 쿠데타의 상징으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JP는 “박 장군이 5·16 때 선글라스를 쓴 것은 얼굴 일부를 가려서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위엄을 더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중앙포토]나도 6·25가 발발했을 때 육본 정보국에서 장도영 국장을 상관으로 모셨다.

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판단력은 인정할 만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 동지들의 생명이 달린 거사다.

장 총장은 어느 편에 설지 확실치 않은 인물이었다.

자칫 위험할 수 있었다.

 나는 품속의 계획서를 꺼내 박 소장에게 건네면서 신신당부했다.

“드리긴 하겠는데, 사흘 안에 돌려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반란으로 몰아 몰살시킬 수 있는 계획서입니다.

그쪽에 내줬다가는 후환이 생길지 모릅니다.

” 박 소장은 “그래, 사흘만 보게 하고 꼭 돌려받겠다”고 약속했다.

박 소장은 그날 장 총장에게 찾아가 계획서를 전달했다.

 그 뒤로 계획서는 내 손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장 총장은 거사 순간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의 걱정에도 박 소장은 뜻을 꺾지 않았다.

“나를 간판으로 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였다.

육군 최고 지휘관인 참모총장을 내세워야 군 내부를 장악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 담겼다.

박 소장은 과거 좌익 연루 전력이 있다.

이 때문에 군 지휘부와 주한 미군에서 사상을 의심받고 있었다.

그가 정점에 서면 좌익 꼬리표를 빌미로 집중 공격 당할 우려가 있었다.

나 역시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 1의(義)로 삼는다’는 문구를 공약 첫머리로 내세웠다.

박 소장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여긴 듯했다.

나는 결국 장도영 1선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궐기를 세상에 알릴 발표문의 모든 문구가 5월 15일 오후 늦게 완성됐다.

이낙선 소령(육본)이 고쳐진 초안을 정서(精書)했다.

나는 원고를 잘 접어서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결의가 굳어졌고 내 마음속 긴장감도 고조됐다.

출동의 시간이 오길 기다렸다.

박정희 소장은 신당동 집 마루에 의자를 내놓고 앉았다.

군복을 차려입고 권총을 찬 채 군화를 신었다.

언제든지 궐기를 위해 나갈 채비가 돼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린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맞이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였다.

시간은 흘렀다.

밤 11시30분, 박정희 소장의 집을 나섰다.

나는 박 소장이 탄 지프차 뒤에 한웅진 준장(육군 정보학교장)과 함께 올랐다.

집 앞엔 정체불명의 검은색 지프차 두 대가 지켜보고 있었다.

헌병대였다.

거사 정보가 누설된 것이다.

행동은 시작됐다.

이제 누구도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혁명 전야는 이런 장면이었다.

[전영기·한애란 ]?● 인물 소사전 이낙선(1927

89년)=육군 소령으로 5·16에 가담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관과 청와대 민원비서관을 역임했다.

1966년 출범한 국세청의 초대 청장이다.

개청 첫해 ‘내국세 700억원 징수’ 목표(전년도 실적 430억원)를 달성해 추진력을 인정받았다.

상공부 장관(69년)과 건설부 장관(73년)에 연이어 올랐다.

롯데상사 회장(81년)과 한일그룹 고문(88년)을 지냈다.

10. 역사상 가장 긴 하루 JP "비밀누설, 불길한 출발" … 박정희 "가자, 나를 따르라" … 새벽 4시 한강 건넌 박 소장 "장도영이 나를 쐈어"30예비사단서 거병 계획 새나가 , 장도영 "반란군을 체포하라" 명령 한강 인도교서 헌병, 궐기군에 발포, 해병 병력, 응사하며 저지선 돌파 난, 광명인쇄소서 혁명공약 준비 , 경찰관 두 명 다가와 가슴 졸여 창경원 앞 6군단 포병단 트럭 행렬, 인쇄소 2층서 보고 "휴

이제 됐다"    5월 20일 청와대 본관에서 윤보선 대통령을 면담하고 나오는 박정희 소장(오른쪽 둘째)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중장·왼쪽). 박 소장이 윤 대통령을 만나러 들어갈 때 벗어놨던 권총을 박종규 경호대장(오른쪽)이 들고 있다.

장 총장 오른쪽은 참모총장 비서실장인 안용학 대령이다.

[중앙포토] 그날은 JP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1961년 5월 16일의 거병은 비밀누설 속에 시작됐다.

출발은 불길했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는 없다.

화살은 활시위를 떠났다.

긴장과 불안, 긴박감과 안도감이 팽팽하게 충돌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 하루는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었다.

?    5월 15일 밤 11시30분. 우리는 신당동의 박정희 소장 집을 떠났다.

박 소장의 지프 뒤칸엔 한웅진(육군정보학교장) 준장과 내가 동승했다.

장경순(육본 교육처장) 준장의 차가 따라왔다.

목적지는 영등포구 문래동의 6관구 사령부. 혁명 제1지휘소다.

6관구는 수도권 일대를 관할한다.

그 때문에 서울을 장악하려는 혁명 부대를 지휘하기 적격이다.

박 소장이 6관구에 도착해 작전 명령을 내림으로써 5·16 궐기는 시작될 것이었다.

 길을 나서는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거사 비밀이 누설됐기 때문이다.

집을 감시하던 방첩대(CIC) 요원들이 차량 두 대로 우리를 미행했다.

박 소장에게 급보가 들어온 건 오후 8시쯤부터였다.

“거사 기밀이 샜다” “무장 헌병들이 6관구 사령부를 차단하고 있다.

궐기군 장교들을 포위하려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6관구의 김재춘 대령과 6관구 부근에 나가 있는 동지들의 전화는 긴박감과 걱정으로 차 있었다.

박 소장은 옆에 있던 우리에게 “오늘 저녁 일이 탄로 났다는구먼”라고 했다.

다소 놀란 그의 표정은 금방 단호함으로 바뀌었다.

 누설의 진원지는 30예비사단이었다.

거사 참여자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상국 사단장에게 밀고가 들어갔다.

거병 책임자인 이백일(중령) 작전참모는 인근 야산으로 도피했다.

이상국은 이철희(준장) 방첩대장, 장도영(중장) 참모총장에게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장도영은 육본 헌병대에 “6관구의 반란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상황 파악 때문에 출발은 지연되고 있었다.

나는 초조했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주요 임무는 혁명공약문의 인쇄와 라디오방송이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밀어붙이셔야 합니다.

”?    5·16 거사 뒤 서울 중앙청(1995년 철거)을 지키고 있는 30예비사단 병력. [사진 국가기록원]박 소장은 대청마루 의자에서 전투화를 신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담배를 문 채 30여 분 묵묵히 있다가 일어났다.

“가자, 나를 따르라. 가다 죽더라도 올바른 역사가 있다면 평가해줄 것이다”고 했다.

선언 조의 그 말은 우리의 결연함을 더했다.

일부에선 박 소장이 이때 취기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성스러운 행동을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우리는 신당동 집을 떠났다.

자정 직전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나는 내렸다.

박 소장에게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안국동에 있는 광명인쇄소로 달려갔다.

이학수 사장은 인쇄소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만약 일이 잘못돼 붙들려 갈 경우 당신들은 내가 총으로 위협해 강제로 일을 시켰다고 진술하시라. 대신 아침 6시까지만 묵비권을 행사해 달라.” 인쇄기가 돌아가는 ‘쩔그럭 ’ 소리가 왜 그렇게 큰지 가슴을 졸였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감시했다.

새벽 2시쯤이었다.

경찰관 두 명이 순찰을 돌다가 인쇄소 문 앞에 섰다.

‘수상한데 들어가 볼까’하는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이 안으로 들어오면 감금을 하든지 총을 쏠 수밖에 없다.

제발 들어오지 마라’고 간절히 빌었다.

둘은 공장 문에 한동안 귀를 대고 듣더니 “야간작업이겠지”라며 그냥 지나갔다.

그들이 고마웠다.

 새벽 3시쯤. 원남동의 창경원 앞길에 40여 대 트럭이 쾅쾅거리며 지나갔다.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어둠을 대낮처럼 밝혔다.

포천에서 출발한 6군단 포병단이 예정대로 진입한 것이다.

삼각지 육군본부를 진주하기 위해 내려온 혁명군이다.

인쇄소 2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휴

이제 됐다”고 했다.

걱정과 긴장감이 잠시 풀렸다.

    6군단 포병단은 방첩대의 감시망에 잡히지 않았다.

문재준 포병단장과 홍종철 6군단 작전참모, 신윤창·구자춘 대대장이 1300명 장병을 이끌었다.

포병단은 트럭에 대포를 달았다.

그 부대 출동에는 미군의 의정부 검문소 통과가 가장 큰 문제였다.

사전 작전회의 때 나는 신윤창 중령에게 “절대 미군을 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검문소 미군은 7

8명 정도. 그들이 통과를 거부하면 그냥 몸으로 껴안아 서울까지 데려오라고 얘기했다.

신 중령은 “미군이 발포를 하면 어떻게 하나”고 물었다.

나는 “그래도 응사하지 말라. 우리 쪽 희생자가 나더라도 맨손으로 대응하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소장은 “잘했다.

우리의 혁명은 무혈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때 검문소 미군과의 다툼이 없었다.

신 중령에 따르면 미군 위병은 “헤이 헤이, 훈련 잘하라”고 웃으며 교통정리까지 해주었다.

미군은 포사격 훈련을 가는 줄 알고 의심 없이 통과시킨 것이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    ‘5월 16일 새벽 3시 군서 무혈 쿠데타’ 소식을 머리기사로 전한 같은 날짜 (석간) 1면.나는 전화통을 계속 돌려댔다.

6관구 사령부는 연락두절이었다.

박 소장이 짜놓은 실병력의 주력은 해병 1여단과 공수단(김포)이다.

이들이 한강 인도교를 돌파해 서울 시내로 진입해야 했다.

하지만 기밀 누설로 중대한 차질이 생겼다.

장도영 총장은 진압의 자세를 취했다.

박 소장은 상황을 역전시키려 했다.

신속하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영등포의 6관구 사령부를 나와 김포 쪽으로 갔다.

새벽 1시쯤 김포의 해병 1여단 1500여 명은 김윤근 준장의 지휘하에 서울로 들어오고 있었다.

김 준장은 박 소장을 만났다.

그리고 노량진쪽에서 한강 인도교로 진입했다.

상황은 험악해졌다.

인도교에서 해병대와 육본 헌병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헌병대는 50여 명, 장 총장의 지시로 급파된 저지 병력이다.

헌병대는 GMC 트럭 7대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해병대는 그 차량 봉쇄를 뚫었다.

하지만 한강 다리 중간 지점에 헌병대의 새로운 저지선이 있었다.

박 소장은 차에서 내렸다.

헌병대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박 소장은 무시한 채 다리 위를 앞장서 걸었다.

그 장면은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침착한 솔선수범이었다.

“나를 따르라”는 박 소장의 결의는 극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

 광명인쇄소에 있던 나는 그 일을 알 수 없었다.

초조감이 엄습했다.

 새벽 4시25분쯤 수십 발의 총성이 새벽의 고요함을 깼다.

그 총소리는 거꾸로 내게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혁명이 무산되진 않았구나.” 총소리는 장면 국무총리 체포조에서 나왔다.

체포조는 박종규 소령 주도하에 차지철 대위 등 공수단 중대장 6명으로 구성됐다.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의 실권자인 장 총리의 숙소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체포조가 급습하기 10분 전에 장 총리는 피신했다.

장 총리는 혜화동의 카르멜 수도원으로 숨었다.

총리 체포조는 작전에 실패했다.

그 화풀이를 하는지 그들은 공중에 대고 총을 쏜 것이었다.

 그리고 10분이 지났을까. 인쇄소 앞에 지프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났다.

박 소장이 인쇄소에 들어왔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장도영이가 헌병을 시켜 나를 쐈어. 내가 목숨 걸린 우리들의 혁명계획서까지 그에게 전부 주었는데. 이럴 수 있나” 하고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물었다.

박 소장은 그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간략히 말해줬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헌병들이 쏜 총알이 막 날아와. 나는 지프에서 내렸지, 그리고 다리를 걸어서 건너갔지. 이쪽에서 응사하니까 잠시 후 헌병대가 싹 사라졌어.” ?    ● 인물 소사전 김재춘(1927

2014)= 육사 5기 출신의 5·16 주체. 거사 때 제1혁명지휘소였던 영등포 6관구 사령부의 참모장(대령)이었다.

비밀누설로 6관구에서 궐기군과 헌병대가 대치할 때 상황을 장악했다.

국가재건최고위원과 3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8, 9대 국회의원. 5·16 주체 가운데 5기 세력의 대표로 육사 8기 출신을 이끌던 김종필(JP)과 정적(政敵) 관계였다.

최고회의와 군부 내 반JP세력을 규합해 김종필의 1차 외유를 압박했다.

정보부장 땐 JP의 비리를 캐려 했다.

----------------------------------------------------------------수녀원에 피신한 장면 총리 '54시간 부재' … 궐기군 진압 무산 … 반전의 기회 사라졌다    1961년 3월 장면 총리(왼쪽)가 이한림 제1군사령관(중장)과 함께 원주 국토건설사업 시공식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 사령관은 한국 최대 규모 실병력인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포토]5·16 거사의 최대 피해자는 총리 장면(1899

1966)이다.

그 한 해 전 4·19 혁명은 새 시대를 열었다.

민주당은 총선에 압승했다.

8월 12일 민주당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내각제 헌법의 국무총리는 권력 실세다.

대통령(윤보선)은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위치였다.

정권 출범 뒤 민주당 내부의 분열, 사회 불안이 이어졌다.

장면 정권의 운신 폭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9개월 뒤 장면은 군부의 기습을 당했다.

그리고 18일 낮 중앙청(1995년 철거)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그의 내각 총사퇴 의결은 5·16의 성공을 의미했다.

장면의 메모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 발발, 박정희 소장 지휘하 군사 쿠데타 발생.” 그는 비운의 정치인이 됐다.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전직 대통령 휘호 선호도는 박정희, 이승만, 김대중 전 대통령 순으로 높다.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2005년부터 10년간 거래가 많았던 전직 대통령 휘호 낙찰총액을 박정희 10억 9200만 원, 이승만 5억 6100만 원, 김대중 3억 2300만 원 순으로 집계했다.

역대 최고가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인용(智仁勇)'으로 2006년 경매에서 1억 5500만원에 낙찰됐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쓴 휘호 '고진감래(苦盡甘來)'(1975)이 밖에 낙찰 총액이 3200만원이었던 전두환 전대통령 휘호들이 눈길을 끈다.

경매업계 관계자는 '일반 선호도는 떨어지지만 희귀 작품을 소장하려는 추종자들 덕분에 비교적 높은 가격대를 형성한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이 쓴 휘호 '고진감래(苦盡甘來)'(1975)는 2013년 경매에서 1100만 원에 낙찰됐다.

김종필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전직 대통령 휘호 선호도는 박정희, 이승만, 김대중 전 대통령 순으로 높다.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2005년부터 10년간 거래가 많았던 전직 대통령 휘호 낙찰총액을 박정희 10억 9200만 원, 이승만 5억 6100만 원, 김대중 3억 2300만 원 순으로 집계했다.

역대 최고가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인용(智仁勇)'으로 2006년 경매에서 1억 5500만원에 낙찰됐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쓴 휘호 '고진감래(苦盡甘來)'(1975)이 밖에 낙찰 총액이 3200만원이었던 전두환 전대통령 휘호들이 눈길을 끈다.

경매업계 관계자는 '일반 선호도는 떨어지지만 희귀 작품을 소장하려는 추종자들 덕분에 비교적 높은 가격대를 형성한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이 쓴 휘호 '고진감래(苦盡甘來)'(1975)는 2013년 경매에서 1100만 원에 낙찰됐다.

김종필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60년대 중반 종로 어느 학교 운동장에서 여린 소년단 창단식에서이다.

키가 보통인 중년 남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 좋은 말을 해주고 갔다.

그가 김종필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줬다.

권력 2인자인 김종필 그 사람이었다.

다들 다음 대통령은 김종필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하지만 그는 쿠데타 세력과 불화를 겪다 이내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유를 경험하고 온 터이다.

젊은 데다 얼굴이 갸름해 인기가 있었고, 외유 중에는 제주도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여 다른 정치인과 구별이 됐다.

그리고는 박정희 시대 마지막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박정희 찬조연설을 하였다.

상대 김대중후보가 젊음으로 어필하자 대항마로 내세운 모양이다.

개발을 하고 발전을 하기 위해서 이번에 한 번 더 밀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대중 후보가 내세운 예비군 폐지론이 얼마나 위험한 지에 대해 얘기했는데 차분하고 감성적인 말솜씨였다.

이후 가끔은 금테 안경을 끼고 연설을 하였고, 유신시절 최장기 총리를 지냈다.

박정희가 신임하던 김재규에게 살해당하는 1026이 일어났다.

당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 방식이니까 김종필이 나서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그는 정당하게 경쟁해 대통령이 되고 싶다며 거절하였다.

멋져 보였다.

이어 1212 사태가 나고 ?서울의 봄?, 3김 시대가 열려 군부 속사정을 모르고 김영삼, 김대중은 경쟁을 하는데 김종필은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나라를 먼저 걱정하는 듯했다.

당시는 모든 악은 박정희에게서 비롯되었다란 논리가 성행하던 때여서 김종필이 움직일 공간은 좁았다.

그러다 전두환이 나타나 권력찬탈을 하였다.

이때 희생양으로 삼은 사람이 3김이었다.

김대중은 내란음모란 얼토당치도 않은 죄목으로, 김영삼은 별다른 이유없이 자택연금으로, 김종필은 부정축재자가 되었다.

그때 빼앗긴 제주 감귤농장과 서산농장에 대해 그는 아직도 억울하다고 하고 있다.

공익재단을 설립해 놓은 것이 어떻게 부정축재냐는 항변이다.

이후 6월 항쟁 결과 629선언이 나왔고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였다.

양김이 단일화하지 않고 엄청난 바람몰이로 서로 양보하라고 할 때 김종필은 신민주공화당을 만들어 대선에 출마를 하였다.

선거 결과는 3김 분열 속에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김종필] 궁금증 해소



선거 와중에 대전집회에 사람이 많이 모였으면 ‘우리 편도 꽤 있구만.’하는 조크를 하였고, 대구 유세일정을 마치고는 숙소부근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초월한 모습을 보였다.

그 다음해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총선)에서 자민련을 결성해 캐스팅 보우트에 충분한 50여석을 얻었다.

3당 합당으로 여당이 되었으나 김영삼 상도동계에게 쫓김을 당하고 지내다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제의를 받아 DJP연합으로 집권세력 한 축이 되었다.

이도 김대중이 내각제 개헌을 거부하자 공동정부를 탈퇴하고 다시 야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자민련은 선거에서 패배하여 정계 은퇴 수순을 밟는다.

작년에 부인 박영옥이 사망하자 빈소를 지키며 애통해 하였다.

둘은 625 와중에 박정희 소개로 만나 결혼하였다.

전쟁 와중에 박영옥은 남편을 찾아 춘천에 와 다리 밑에서 지내면서 남편이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보려 했단다, 둘은 琴瑟이 좋아 남편 김종필이 집에 오면 부인 박영옥은 버선발로 치마를 들어 잡고 뛰어와 남편에게 안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60년대 정계 거물이었을 때 요정에서 김종필은 최고 인기 스타였지만 한 번도 기생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기생들은 김종필과 자기 위해 별 수단을 다 쓰면 경쟁하였으나 팁이나 넉넉하게 주지 결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대세력 감시도 있었겠지만 박영옥과 진실한 사랑이 아니면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 시기에 기생과 사이에 혼외자를 낳았다.

선거에 참패한 그를 들이 약 올리듯이 향후 계획을 묻자 “서산에 지는 해가 찬란한 법.”이라며 장렬히 散華할 걸 예고했으나 결과는 “정치는 虛業”이란 말 그대로 뒷 세대에게 세상을 넘겨주어야 했다.

미리 정한 묘비에 “九十而知八十九之非”라고 하는 멋진 말을 남겼다.

문학적 소양이 있었으며, 음악, 미술, 체육 등 예체능을 즐겼다.

애국심이 컸고, 나라를 위해서라면 욕먹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대신 권력욕은 약하다.

 그런대로 餘韻이 있는 요즘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5·16 혁명공약’의 탄생   반공 국시 처음 본 박정희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 … " 거사 전날 JP "배 속 아이, 아들일 거요" 아내의 눈물을 봤다?미국은 '박정희 사상'을 의심했고, 8군 사령관은 대놓고 예편 요구6·25 때 북한군과 맞서 싸운 박정희,  대한 좌익 혐의는 부당"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의 물결 앞에 나는 섰다둘째 임신한 아내와 비감의 이별, 비가 헛일 안 했다고 가르치구려" 밤이 깊어가던 1961년 5월 14일(일요일). 나는 아내에게 군복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석 달 전 군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하극상(下剋上) 사건’으로 강제 예편되면서 벗어뒀던 카키색 군복이다.

중령 계급장은 달려 있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나는 이 군복을 입고 먼 길을 나설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가슴 온 구석을 채웠다.

이미 벗었던 군복을 다시 꺼내 들 정도로 나는 그해 그 봄, 그렇듯 결연(決然)했다.

사생(死生)의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박함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의 내 나이는 서른다섯. 일제 강점기를 겪고 동족상잔의 참혹했던 6·25전쟁을 군인의 신분으로 치러낸 내 생각은 영글어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서른다섯의 생을 모두 접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전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글이었다.

이틀 동안 내가 머리를 싸매면서 썼던 선언문은 다름 아닌 ‘혁명공약’이었다.

그것은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세상을 뒤집는 거사다.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 나가는 것이다.

’ 그 말이 나의 뇌리를 스쳐간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 그 혁명의 물결 앞에 서야 하는 상황이 나와 내 조국 대한민국에 닥치고 말았다.

 글 솜씨가 제법 괜찮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나였지만 그 격문만큼은 잘 써지지 않았다.

끙끙대며 썼다가 지웠다.

이틀 동안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나열했다.

    52년 4월 김종필 대위의 가족사진.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전해인 60년 4·19가 벌어졌다.

자유당 말기의 암울함이 가셨을까. 전혀 아니었다.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선보였던 민주당 장면 내각은 상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은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의 무능과 함께 국가안보의 초석인 군(軍)은 썩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정부는 어쩔 줄 몰랐다.

수수방관했다고 할 정도다.

 혼돈이 점차 극을 향해 가고 있었다.

6월엔 경찰관 데모가 있었고 9월엔 초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가 신문의 주요 면을 장식했다.

61년 3월 21일 대구에선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혁신계 정당과 일부 대학생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폐지하라면서 횃불을 들고 행진한 것이다.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선 남북학생회담을 촉구하는 ‘민족자주통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전쟁을 치른 지 10년도 안 지난 상황이었다.

내 마음은 타들어갔다.

다수 국민도 사회 혼란을 걱정했다.

국민 대부분이 결정적인 전환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망각의 늪에 던져버린 전쟁의 기억, 그로써 우리 대한민국이 맞이할 위험은 거세고 높은 파도처럼 우리 사회에 닥칠 기세였다.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생 1300여 명 가운데 전쟁 때 절반을 잃은 나로서는 이 혼란스러운 풍조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결의였다.

 거사를 앞에 두고 펜 끝으로 상념이 모아지고 있었다.

영국 명재상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금언(金言)이 떠올랐다.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10대 후반 시절 내가 감명을 받았던 말이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다.

나는 다시 문장을 다듬었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군부는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 펜은 거침이 없었다.

내 글에 제법 힘이 담겼다고 여겨졌다.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중심은 나였다.

 궐기취지문의 서두를 그렇게 시작했다.

이제 구체적인 공약을 썼다.

‘반공(反共)’을 먼저 꺼냈다.

‘혁명공약 제1조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고…’ 우리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 그러나 놓치고 있는 곳을 먼저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공이 앞에 놓여야 한다.

혼돈을 정리하고 국가의 안위(安危)를 먼저 따져야 했던 것이다.

    1961년 8월 최고회의 회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신 공군참모총장, 박정희 의장, 박병권 국방장관(테이블 건너). 박정희 뒤는 김종필 정보부장(사복 차림), 박병권 뒤는 장성환 공군참모차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결정적인 이유는 숨겨져 있었다.

거사의 중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49년 그가 소령 시절 남로당에 휘말려 들어간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좌익의 혐의는 부당했다.

그는 잠시 길을 잃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대한민국의 군에 복귀해 공산주의 북한과 맞서 싸웠다.

누구보다 나는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를 의심했다.

이들은 공공연히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 정도였다.

미국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한국에 주둔 중인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 소장을 예편시키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따라서 나는 궐기군 지도자인 박 소장에게 걸린 그런 혐의를 불식하기 위해서도 반공을 공약 1호로 내세워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뒤에 벌어진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격이지만 궐기문을 인쇄하러 가기 전 박 소장이 이 반공 국시 조항을 읽으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혼잣말 비슷하게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이라고 말했다.

거사를 앞둔 박 소장의 마음이 매듭처럼 뭉쳐져 있던 대목이었다.

 시계의 시침이 자정을 훌쩍 넘겼다.

우리가 계획한 디데이, 5월 16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15일 아침 혁명취지문과 포고문 원고를 주머니에 넣고 현관을 나섰다.

아내 박영옥(朴榮玉)이 말을 꺼냈다.

당시 아내는 첫째 예리(禮利)를 낳고 10년 만에 둘째 진(進)을 임신한 상태였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하시는 거예요?’ ‘응, 하느님이 도우시면 당신과 또 만날 수 있겠지.’ 아내는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나는 불룩해진 아내의 배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자고로 유복자는 대개 아들이라고 하니까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놈은 아들이 틀림없을 거요. 잘 키워서 훗날 녀석에게 이 아비가 헛일 하다가 죽지는 않았다고 가르치라고.’ 비감(悲感)이라면 그때의 내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아내는 아무런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군복을 차려입은 나는 아내와 함께 문을 나섰다.

지금의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에 있던 집 앞의 언덕을 내려갔다.

아내는 문밖에서 떠나는 나를 바라봤다.

조금 언덕을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내가 저만치 보였다.

역시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 심정이 그랬을까. 장미의 5월 속 적막한 봄날이었다.

정리=전영기 , 유광종 작가?-------------------------------------------------------------------------------- JP 품에서 쏟아진 11개 '혁명 포고문' - 방송 통해 공포 … 거사 기정사실화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30분 KBS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간 군사혁명위원회 발표문은 ‘혁명공약’(사진)과 11개의 ‘포고문’이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의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혁명취지문) 군사혁명위원회는 이어 ①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 ②유엔헌장을 준수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④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⑤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요지의 공약 6개 항을 발표했다.

 마지막 대목은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이다.

혁명공약과 11개 포고문은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의장 명의로 발표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JP가 작성해 품 안에 품고 다니다가 상황에 맞춰 차례로 방송에 내보냈다.

 육군 소장 박정희는 장도영을 5·16의 간판으로 내세웠다.

장도영은 박정희보다 6살 아래지만 육군 정보국장 시절 박정희 당시 문관(文官)을 현역으로 복직시킨 장본인이었다(50년 7월). 5·16 당시 장도영은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장도영은 5·16 당일 박정희에게 출동 병력을 복귀시키라고 요구하다가 오히려 박정희에게 설득당해 그날 오후 의장직을 수락했다.

이후 장도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을 겸임했다.

 JP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인 61년 7월 반혁명 혐의로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을 체포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사전 보고하지 않고 저질렀다.

JP는 “장도영을 그냥 두면 혁명이 파괴될 우려가 있었다.

더 크기 전에 잘라야 했다”고 말한다.

[한애란 ]    ● 인물 소사전 장도영(1923

2012년)=5·16 군정(軍政)의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의장. 박정희는 스스로 부의장으로 내려앉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간판으로 내세웠다.

장 의장은 계엄사령관, 내각 수반을 포함해 5개 자리에 올랐다.

1961년 7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됐다.

63년 미국으로 건너가 93년까지 위스콘신대 교수로 재직했다.

일본군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뒤 귀국해 군사영어학교(육사 개교 이전 장교 양성기관)를 졸업하고 국군 창군 멤버가 됐다?    ● 1961년 5월 16일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앞에 국가재건최고 회의 의장 겸 계엄사령관 중장 장도영(왼쪽)과 부의장 소장 박정희 부의장이 나란히 서있다.

[중앙포토]  '박정희 복직' 건의한 장도영? - 장병 통솔, 수원에 나타나자 "유능한 사람, 사상 의혹 버려"6·25 남침은 문관 박정희의 평판과 이미지를 바꿨다.

장도영 당시 육군 정보국장의 시각도 그랬다.

장도영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 문관은 정보국 장병들을 직접 지휘 통솔해서 수원으로 후퇴해왔다.

정보상황도 등 중요 문서들까지 깨끗이 보존해 가지고 왔다.

이를 본 장도영 국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28일 적정으로 봐서 그가 원했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지 않았는가. 근거 없이 부하를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저렇게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는 이때부터 그에 대한 사상적 의혹을 깨끗이 버렸다.

” 정보국은 작전정보 활동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를 실행할 장교가 부족했다.

장도영 국장은 육본 정보상황실 한쪽 구석에서 낡은 민간 작업복을 입은 채 근무에 열중하고 있는 박정희에 주목했다.

장교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를 계속 문관으로 둘 이유가 없다고 봤다.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박정희의 현역 복직을 건의했다.

처음엔 “쓸데없는 말이 나올 수 있다”며 주저하던 정 총장은 거듭된 건의에 마음을 바꿨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승낙을 받아 박정희는 소령으로 복직됐다(정식 복직일은 1950년 7월 31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함께 파면형을 선고받은 지 1년5개월여 만이었다.

장도영은 그렇게 박정희와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5·16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둘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한애란 ]?---------------------------------------------------------------------- 2. 박정희 문관, 소령으로 복귀개전 초 박정희 34시간 행방 … 육사 동기들과 내기 했다, 돌아온 그에게 파이버 씌워주자 "자네가 임명하는구먼"?임시 육본은 이미 수원으로 후퇴 , 그가 안 나타나면 좌익의혹 증폭 한강 다리 코앞에 두고 큰 폭발음  , 사람 피와 살이 내 얼굴에 묻었다 "구미서 올라가는데 차편이 없네" , 박정희가 전화 … 100% 확신 못해 육본 정문 앞서 그와 감격의 재회  , 마음속 '의심 덩어리' 눈 녹듯 풀려?    1952년 8월부터 53년 5월까지 당시 김종필 대위는 6사단 19연대 수색중대장으로 강원도 금성 구두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김 대위가 81㎜ 박격포 발사를 준비하는 장면.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박정희에겐 좌익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JP는 6·25 개전 초기 박정희가 좌익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됐다.

JP가 확보한 흔들리지 않는 증거는 무엇일까.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됐다.

나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중위)이었다.

며칠 전부터 휴전선 쪽 적정(敵情)이 크게 불안했다.

6월 24일 밤 나는 정보국 당직을 자처했다.

밤새 뜬눈으로 전쟁을 맞았다.

 대비 없이 맞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오판은 우리가 했다.

육군 정보국은 적의 동향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인 박정희와 우리 전투정보과는 적정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군과 정부의 수뇌들은 이를 불신했고 활용할 줄 몰랐다.

우리는 적을 알고서도 당한 것이다.

27일 밤 적의 탱크가 서울 미아리에 출몰하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졌다.

육군본부는 그날 경기도 시흥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적정을 파악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 없이 바빴다.

28일 자정을 넘긴 새벽, 지하 벙커에서 일하다 나와 보니 상황장교와 사병 몇 명만이 보였다.

육본 수뇌부는 임시본부가 차려질 수원을 향해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병기감실 앞에 GMC 트럭이 보였다.

차에 올라 키를 꽂아보니 시동이 걸렸다.

 나는 그 트럭을 몰아 육사 8기생인 동기 몇 명을 태우고 길을 나섰다.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를 200m쯤 남겨둔 지점이었다.

그때 앞에서 번쩍하더니 큰 폭발음이 일었다.

한강 인도교에는 피란을 가려는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무엇인가가 후두둑 떨어져 내 얼굴에 묻었다.

사람들의 피와 살점이었다.

내가 몰던 차가 조금만 일찍 인도교에 진입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등에 식은 땀이 났다.

우리는 차를 버리고 서빙고 나루를 향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바지선으로 우리를 건네 주었다.

남쪽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노를 젓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꼭 돌아들 와, 꼭 돌아오라구….” 서울을 탈환해 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

우리는 강을 건넌 뒤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걸었다.

 김종필 대위가 1952년 강원도에 근무할 때 탱크 앞에서 찍은 사진(위)과 중위 때인 50년 6월 27일 육본 정보국 북한반장으로 서울 창동 전선에 나가는 모습.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박 실장의 소재는 나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후퇴하면서도 정보국 동료들과 “우리 내기를 하자”고 할 정도였다.

박정희 실장은 남으로 갈 것인가, 북으로 갈 것인가. 수원으로 내려갈 것인가, 서울에 남을 것인가. 박 실장이 돌아와 인민군과 싸우게 되면 좌익 의혹은 사라질 것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조국을 배반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동료 두어 명은 “박정희는 의심스럽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후퇴하지 않았을 거다”고 주장했다.

나는 “박정희는 수원으로 갔다” 쪽에 걸었다.

우선 구미에서 걸려왔던 그의 전화를 믿었다.

그럼에도 100%의 확신은 아니었다.

 오후 5시 무렵 우리는 수원 농업시험장에 도착했다.

장병을 태운 지프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육군의 수뇌부 모습은 형편이 없었다.

미군 고문단이 이미 자리를 잡은 2층의 낮은 건물 한쪽에 육군본부를 차렸다.

우리 정보국은 인근 수원초등학교에 자리 잡았다.

내 눈길은 어느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 박정희 실장이 초등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34시간 만의 만남이었다.

옆에는 장도영 정보국장이 있었다.

“휴… 빨갱이가 아니었구먼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따뜻한 생각이 가슴속에 번졌다.

암담한 후퇴 상황에서 발견한 믿음과 환희였다.

박 실장은 “오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예의 그 멋쩍어하는 미소도 지어 보였다.

비로소 내 마음속의 큰 응어리가 풀렸다.

봄에 녹아 내리는 깊은 얼음 구덩이 같았다.

그에게 둘러씌워진 좌익 중죄(重罪) 이미지는 단단했다.

박 실장을 옥죄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집요했다.

 수원 육본에서 해후하면서 박 실장이 좌익이다, 아니다는 논란은 육본 정보국 내부에서는 사라졌다.

수원에서 박정희 실장은 1년여 전 벗었던 군복을 다시 걸친다.

장도영 당시 정보국장이 문관인 그의 현역 복귀 문제를 해결했다.

 전쟁 통이라 모든 것이 부족했다.

당시 우리는 철모의 내피인 파이버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의 복귀 결정 소식을 듣고서는 파이버 하나를 얼른 구해 왔다.

그 위에 그리스펜슬(종이말이 색연필)로 태극 무늬를 그렸다.

소령 계급장을 달리 구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파이버를 들고 가서 그에게 씌워 줬다.

그러자 박정희 소령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날 임명하는구먼.” 지동도합(志同道合)이라는 말이 있다.

동지(同志)라는 한자 단어가 유래한 성어다.

품은 뜻과 가려는 길이 같은 경우를 말한다.

사상과 신념의 일치도 말해 준다.

5·16의 거사와 완성을 위한 멀고도 긴 여정에서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때 그렇게 뜻을 맞추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 , 유광종 작가]6·25 개전 초기 국군 혼란상북한의 남침은 개전 뒤 사흘 동안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 개시 6시간 뒤인 6월 25일 오전 10시 경복궁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던 중 전쟁 발발 소식을 처음 접했다.

25일 오후 2시에 열린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북한의 공격은 공비 두목 이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해 벌인 책략으로 전면 남침은 아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한 대사 무초는 오전 10시26분 국무부에 “북한군이 전면 남침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이어 미 국무부는 대통령 주재 국가안보회의(NSC)를 거쳐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하는 등 긴급 대처에 나섰다.

주미 한국대사 장면의 요청을 받아들여 오후에는 도쿄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에 “한국에 탄약을 추가로 공급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유엔 안보리는 26일 오전 3시(한국시간) ‘적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튿날인 26일 국군은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옹진반도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공세를 이어갔다.

 27일에는 북한군이 의정부를 통과해 서울로 향했고 동부전선의 춘천과 강릉을 점령했다.

육군본부는 28일 오전 2시30분 한강 인도교를 끊기 직전 강을 넘어 수원의 농업시험장으로 옮겼다.

[유광종 작가]   ● 인물 소사전 채병덕(1914

50년)=6·25 남침 당시 육군참모총장. 1950년 4월 취임 뒤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했다.

50년 7월 1일 육군참모총장직을 사임하고 영남 편성 관구사령관으로 물러났다.

그해 7월 27일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49기) 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육사 이전 장교 양성기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국군 군번 2번이다.

       ?3. 박정희와의 첫 만남?  처음 본 박정희, 참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사내였어 … "내가 사고 당해 군복 벗었지" 박정희는 계면쩍게 웃었다육사 8기 졸업, 육본 정보국 배치 검은색 양복 입은 문관과 악수 기강·규율 한심했던 초기 한국군 ,해방공간 속 정치, 혼란에 빠져 대구사범 졸업, 만주군관학교 1등 , 엘리트 장교 박정희, 울분 토로해 "박 소령 사상 온건치 않아 보인다" , 숙군 핏발 김창룡 감시망에 걸려?  1952년 4

8월 김종필 대위(왼쪽)는 진해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본부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육사 교정에서 선글라스를 낀 김종필 대위가 동료들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돌이켜보면 특별할 것도, 강렬한 점도 없는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아흔에 이르러 회상해 보니 그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 우리 둘이 처음 만난 장면 말이다.

육사를 8기로 졸업한 1949년 6월,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장교로서 첫발을 디뎠다.

동기생 일곱이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발령식 때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신고 드릴 분이 한 분 더 있다.

작전실로 가서 인사 드려라.”바로 옆 ‘작전정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방으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전투정보과에 배속된 신임 소위들입니다.

신고를 받으십시오.” 작전정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 탓이었을까.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첫인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면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박정희요. 근데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거기들 앉게.” 악수를 나누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박 실장은 “내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을 벗었다”고 간단히 본인을 소개했다.

이어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다.

환영한다”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군복을 벗고 정보국의 문관(文官)으로 일하던 그분과의 첫 만남이었다.

박정희란 이름은 알고 있었다.

내가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행정처에 사병으로 근무할 때 7기 특별반 1중대장을 하던 분이었다.

그러다 어디로 잡혀갔다고 하는 소문만 들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듬해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을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군부 내 남로당 조직책이었다.

 박정희 사관학교 제1중대장은 비분에 차 있었다.

군대가 왜 이 지경이냐, 나라는 왜 이 모양이냐. 울분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왔다.

일제의 지배 시대, 박정희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新京, 지금의 長春)에 갔다.

1등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특별 입학, 졸업(57기)한 엘리트 장교였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2기로 나와 소위로 임관했다.

미 군정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조선경비대)를 창립했다.

국군의 전신이었다.

장교 자원이 부족했다.

일본군 지원병이나 하사관 출신이 대거 장교로 임관했다.

사병 출신도 미 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서 몇 주 교육을 받고 지휘관이 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조선경비대는 기강이나 규율 면에서 한심스러웠다.

군인정신을 찾기 힘든 장교들도 있었다.

사명감 투철한 엘리트 장교 출신의 박정희 소령이 개탄할 만했다.

해방공간 속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50년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시절 육사 8기 동료들. 앞줄 왼쪽부터 서정순(훗날 정보부 차장)·석정선(정보부 차장)·전재덕(정보부 차장), 뒷줄 왼쪽부터 이영근(유정회 국회의원)·고재훈(정보부 국장)·안영원(경제 과학심의회의 부이사관). [중앙포토]사관학교 2중대장이던 강창선 대위는 박 소령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친했다.

비밀 남로당원이었던 강창선은 우수한 장교와 육사 생도를 당원으로 포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 강창선 대위가 박정희 소령을 놓칠 리 없었다.

그때도, 그 뒤로도 박정희 소령은 술과 술자리를 좋아했다.

강창선은 박 소령에게 접근해 저녁 자리를 벌였다.

박 소령은 술만 들어가면 마음속 응어리를 분출해 내곤 했다.

세상과 군대에 대한 답답함과 비분강개를 한바탕 쏟아내야 속이 시원했다.

술김에 과장되고 격한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군 내 빨갱이 검거에 열을 올리던 1연대 정보주임 김창룡 대위는 이미 강창선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순사건 직후 좌익계열 숙군(肅軍)의 바람은 거셌다.

일본군 헌병보 출신인 김창룡은 공산당을 때려잡겠다며 한창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던 차였다.

강창선과 자주 어울리는 박정희가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나중에 육사 8기로 나와 동기생이 되는 전창희에게 밀명을 내렸다.

“박정희가 사상이 온건치 않아 보인다.

네가 책임지고 전모를 캐라.” 박정희 소령이 술자리에서 터뜨린 불평불만이 전창희를 통해 고스란히 김창룡에게 보고됐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나 그의 과격한 발언이 그를 옭아맸다.

48년 11월 강창선에 이어 박정희 소령이 체포됐다.

남로당에 가담해 반란을 기도했다는 혐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 10·1사건 때 사망한 셋째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아 좌익에 물들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야기 꾸며내기 좋아하는 이들이 멋대로 갖다 붙인 소리다.

내 장인 박상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다.

두 형제분 간 사이는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다.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나의 장인에 대해선 황태성 사건과 관련 있어 나중에 기술하겠다.

 박정희 소령은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과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위기에 처한 박정희 소령을 구해준 건 육군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었다.

그는 군대 내 좌익 색출 작업의 총책임자였다.

백 대령이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하겠다”고 나섰다.

마침 김창룡은 사생활이 깨끗한 백선엽을 가장 존경하는 상사로 여기고 있었다.

김창룡도 백 대령 뜻을 따라 박 소령에 대한 신원보증서에 서명을 했다.

형집행이 정지됐지만 박 소령은 군복을 벗어야 했다.

민간인 신분이 된 그를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한 것도 백선엽 정보국장이었다.

박 소령을 위해 원래 직제에 없던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선 그때가 특히 불행했던 시기다.

타의에 의해 군인의 길을 접고, 사관학교 중대장 시절 직접 가르쳤던 유양수 전투정보과장(육사 특7기) 밑에서 편제에도 없는 실장으로 일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에 대해 그가 불평의 말을 털어놓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육사 후배들에게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라고 말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정을 그땐 나도 미처 알 수 없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박헌영을 중심으로 1946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그해 8월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된 뒤 남한 내 좌익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조직됐다.

남한의 공산화 공작을 진행하다 48년 12월 국가보안법으로 당이 불법화되자 간부들이 대거 월북한다.

    ● 인물 소사전 김창룡(1920

56년)=이승만 정권 시절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특무대장. 일본 관동군 헌병보로 근무하다 광복 후 귀국해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사) 3기생으로 졸업했다.

여순사건 직후 숙군작업에서 이재복·이중업 등 남로당 간부를 잇따라 체포해 이름을 떨쳤다.

51년 육군 특무대장(대령)이 됐고 53년 준장, 55년 소장으로 승진했다.

군내 좌익 제거에 앞장서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56년 그의 권력 남용에 불만을 품은 허태영 육군 대령과 그 부하들에게 저격 살해당했다.

?4. 5·16 거사 결의 ?  5·16 석 달 전 JP "혁명합시다" 박정희 "준비하고 있었네" … 박정희 장군 "한강 이북은 자네가 맡게, 이남은 내가 맡지"박정희와 김종필 두 개의 흐름, 거대한 물줄기로 만나 '혁명 잉태'하극상 사건 주동자로 감방 갇혀, "군복 벗어라" 압박에 결국 굴복결혼기념일 10주년 날 강제 예편, 엉엉 통곡하자 아내가 등 토닥여박정희와 대구서 8개월 만에 재회, "이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1961년 7월 28일 용산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해 간부들을 대상으로 특별강연을 하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 군복 차림에 권총을 찬 모습과 탁자 위의 낡은 물주전자가 눈에 띈다.

청중 맨 앞줄에 공정식 해병대 1여단장, 김성은 해병대 사령관(왼쪽부터).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61년 5·16을 거사할 때 김종필의 신분은 민간인이었다.

그는 3개월 전 군에서 쫓겨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석 달이었다.

얼마 동안 혁명 계획을 세웠는지에 많은 질문이 쏟아져왔다.

3개월이라고 대답하면 놀랄 것이다.

세 달 준비하고 세상을 평정했다니-. 그것은 사실이다.

본격적인 거사 도모 기간은 87일이었다.

물론 혁명 얘기는 그 전에도 나눴다.

그때는 묵시적인 의견교환이었다.

난마처럼 엉망진창인 시국에 대한 분노와 애국의 충정을 모으는 수준이었다.

1961년 2월 19일. 박정희 소장과 혁명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실행에 옮긴 시점이다.

나는 강제 예편돼 민간인 신분이었고 박 소장은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있었다.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있다 그리로 옮겼으니 좌천이었다.

우리는 그날 대구에서 만나 혁명을 결의했다.

그해 2월 4일부터 15일까지 나는 헌병대 감방에 있었다.

그 전해 그러니까 60년 9월 이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육사 동기생 석정선과 함께 구속됐다.

난로 없는 감방, 영하 10도의 한파를 모포 두 장으로 버텼다.

 4·19혁명 직후 나는 군 수뇌부의 부정·부패·무능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3성 이상 장군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整軍)운동을 주동했다.

 남들은 하극상(下克上)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있었다.

아랫사람이 위를 누르는 하극상이 아니라 내가 몸담은 군 조직을 온전하게 만드는 정군이었다.

군대만 제대로 서 있다면 대한민국은 버틸 수 있다.

정치가 아무리 썩고 못마땅해도 군이 굳건하다면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 두세 개짜리 수뇌부들은 나를 그냥 군에서 쫓아내려 했다.

아마 ‘저 건방진 자식, 중령 놈이 뭘 안다고 날뛰는 거야, 이번 기회에 날려 버려야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감방에 갇힌 뒤 열흘쯤 있는데 헌병감 조흥만 준장이 찾아왔다.

 ▶조흥만=“자네 자진해서 사표를 내 주어야겠어.” ▶나=“못 냅니다.

군법회의에 넘겨 주십시오. 법정에서 남길 말을 다 하고 나가겠습니다.

” ▶조흥만=“이제 그만해라. 옷을 벗고 나가면 하극상 사건도 불문에 부쳐주겠네.” ▶나=“군법회의에서 이 썩은 장군들을 다 쫓아내 군을 아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뒤에 나도 군을 떠나겠다고 말해야겠습니다.

” 이 사건은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에 군법회의는 정군의 필요성을 세상에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이틀 뒤 다시 돌아온 조흥만은 예상치 못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정 그렇다면 자네 처삼촌(박정희 소장)을 가만두지 않겠다.

자네들이 박 장군을 업고 혁명을 한다면서? CID(범죄수사대) 포함해 헌병대 인원 700명을 모두 투입해 박 소장을 빨갱이로 만들어 결딴내겠다”고 협박했다.

빨갱이 얘기가 또 나온 것이다.

“도대체 그게 누구의 뜻이냐?”고 묻자 그는 주저 없이 “참모총장님의 뜻”이라고 답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박 소장에게 씌웠던 좌익 혐의는 6·25전쟁을 통해 모두 벗겨졌다.

문관에서 소령으로 복귀했고 미국 유학을 거쳐 소장까지 승진하지 않았나. 참모총장의 협박은 나에게 군과 박정희 사이에 선택을 강요하는 셈이었다.

 그 전에 박 소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60년 6월 9일 육군 본부에서였다.

그를 못 본 지 벌써 반 년이 넘었고 ‘하극상 사건’은 그 사이 일어난 일인데도 육군 수뇌부는 내 등 뒤에 박 소장이 있다고 믿는 듯했다.

“박 소장은 이 사건을 전혀 모른다.

내가 그분의 조카딸과 살고 있다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아무리 외쳐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5·16을 일으키기 전인 1960년 육본 정보국의 한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 김종필 중령(왼쪽).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나는 결국 굴복했다.

군복을 벗기로 했다.

61년 2월 15일이었다.

그들이 작정하고 나서면 박 소장의 실오라기 하나라도 털어 좌익의 구덩이로 몰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리라. 군복을 벗고 집에 돌아온 날, 13년 군 생활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원망스러워 화가 났다.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결혼기념일 10주년이기도 한 그날 아내는 하염없이 우는 내 등을 토닥여 줬다.

나는 결심했다.

이제 정군이 아니다, 혁명을 해야 할 때다.

 사흘 뒤 청파동 내 집에서 정군운동 멤버들이 모였다.

울분에 찼던 나와 동기생들은 국외에서 벌어졌던 군사혁명의 사례들을 두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머리 속엔 박정희 소장이 떠올랐다.

‘혁명을 이끌 리더로 모셔야 한다.

’ 다음날인 19일 대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2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나는 동기생들과 청파동 집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제는 혁명을 해야겠습니다”고 제안했다.

세상에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한번 왔을 때 잡아채야 한다.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 소장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군…. 음, 그동안 나도 이런 때가 오리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 왔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서울 쪽 병력 사정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서울 근교 2개 예비사단을 동원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박 소장은 “나도 전방의 2개 사단 정도를 동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답했다.

 박 소장의 의중을 확인한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앞장을 서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 내 말을 듣고 난 박 소장은 “그래, 알겠네. 한강 이북은 자네가 맡아라. 그 이남은 내가 맡겠다”고 대답했다.

그동안 박 소장과 나는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각각의 방식으로 일을 도모해왔다.

이제 처음으로 두 개의 흐름이 거대한 하나의 물줄기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군복을 벗은 뒤 박 소장에게 달려온 내 뜻은 이로써 한 단락을 맺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전혀 새로운 시작이었다.

군에서 쫓겨날 땐 엉엉 울었지만 그때 안 나왔다면 거사를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강제 예편됨으로써 나는 시간의 여유가 생겼고 누구와도 만날 자유를 얻었다.

이 여유와 자유가 혁명을 설계하고 조직하고 일으키게 한 자원이었다.

군에서 나올 때 내가 받은 퇴직금은 90만환. 지금으로 치면 한 1000만원쯤 될까. 이 돈도 모두 거사를 준비하는 데 썼다.

아내의 곗돈도 타서 보탰다.

 꿈은 원래 마음속에서 오래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꿈이 말로 옮겨지면 다음 차례는 실행이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가슴에 품은 뜻은 2월19일을 기점으로 맹렬한 실천으로 전진했다.

[정리=전영기 , 유광종 작가 ] ● 인물 소사전 조흥만(1926

)=5·16 당시 육군 헌병감(준장). 61년 2월 정군운동을 주동한 김종필 중령을 강제 예편시킨 주인공이다.

5·16 직후 군사정부의 치안국장을 맡았지만 한 달여 만에 해임되고 군복을 벗었다.

이후 야당인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돼 야권 정치인이 된다.

69년 8월 신민당(총재 유진오) 의원 시절 같은 당 성낙현·연보흠 의원과 함께 3선 개헌안에 찬성하는 서명을 했다.

신민당은 그의 비례대표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해 당을 해산했다.

한영공업주식회사 사장,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5. 5·16 거사의 씨앗  "송 총장 당장 물러나십시오" … 그땐 내가 참 당돌했어 … 박정희 "자네 하려는 거, 그거 하자" 지프차서 언약박정희도 송요찬에게 공개편지 , '3·15 부정선거 책임지고 용퇴'송 총장 "정기있는 장교 있어 다행" , 사퇴 받아들여 … 기득권 세력 반발 중령 군복 입고 장면 총리 찾아가 , 송원영 비서관 "여기가 어디라고"'세상 뒤집는 혁명으로 전진' 결심 , 도서실서 책 빌려 이집트 혁명 연구“지금 생각해도 참 당돌했어.” JP가 정군(整軍)에서 5·16에 이르는 긴박했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떠올린 말이다.

그 대담함은 박정희와 ‘지프의 혁명언약’으로 발전한다.

    1961년 8월 진해 해군통제본부 공관에서 열린 군·정부 관계자 세미나에 참석한 김종필 중 정 부장(왼쪽 두 번째). 맨 왼쪽 선글라스 낀 사람이 송요찬 내각수반.4·19혁명 10주년, 나는 학생들의 의거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

1970년 그때 나는 공화당 의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역류에 숨 막히고/분노가 꽃 피던 날/해일같이 넘쳐 온 함성들이/선지빛 산화(散華)로 흩날려/조국의 사월 청정한 넋돌되어 솟아난다….” 1960년 4·19 때 나는 서른네 살 육군 중령이었다.

나 역시 4·19 정신에 공감하고 있었다.

 4·19의 반독재, 반부패 외침은 장면 정부의 무능한 리더십 때문에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젊음의 희생은 우리나라를 결정적으로 바꿔낸 전환적 에너지였다.

군대 내부도 그런 물결이 꿈틀거렸다.

    김종필, 장면 전 총리(왼쪽부터)전국 5대 도시에 비상계엄이 실시되자 장교들은 집에 못 들어가고 영내 대기할 때가 많았다.

육본 정보참모본부 기획관리과장이었던 나의 사무실은 영관급 장교들의 ‘시국 토론장’이 됐다.

중견 장교들의 논의는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군 수뇌부들이 퇴진해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5·16 거사까지 1년 새 육군 참모총장 4명이 바뀌고 10여 명의 장성이 퇴진한 정군운동은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정군운동의 주동자는 나를 비롯해 석정선(훗날 정보부 차장보), 김형욱(중앙정보부장), 길재호(공화당 사무총장) 등 육사 8기 동기생 8명이었다.

 우리들의 정군운동에 불을 붙인 사람은 박정희 소장이었다.

그는 당시 부산지구 계엄사령관(군수기지사령관)이었다.

5월 2일, 박 장군은 부관인 손영길 대위(육사 11기)를 L-19 경비행기로 서울로 보내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다음은 박정희 소장의 편지 요지. “군의 최고 명령권자인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 책임을 지시어 정화(淨化)의 태풍이 군내에 파급되기 전에 자진 용퇴하신다면 얼마나 떳떳한 것이겠습니까”라고 적었다.

박 소장은 우리와 일절 상의하지 않고 이런 편지를 보냈다.

송 총장의 반응은 격렬했다.

“내가 박정희를 얼마만큼 보호해줬는데.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네가 나를 잡아먹어?”라고 반응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송 총장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송 총장은 이미 나한테 약점이 잡혀 있었다.

3·15 부정선거 직후 그는 “군은 이번 선거에서 맡은 바 110%의 성과를 냈다”고 열변을 토했다.

나는 그때 회의의 주무과장으로 앉아 있었기에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110%라면 60만 군인의 최소한 10%를 엉터리로 투표하게 했다는 것 아닌가. 나는 박 소장의 편지 소식을 듣고 ‘정군 연판장’을 작성했다.

연판장은 “우리 군은 4·19정신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

정군 대상자는 3·15 부정선거를 지휘한 책임자, 부정축재자, 부패와 무능 지휘관으로 한다.

정군은 개인적 권고로 군을 떠나게 하며 사퇴권고에 불응한 때에는 지휘계통을 통해 사퇴를 종용한다”는 내용이다.

일차적으로 송 총장을 겨냥했다.

연판장은 허정 과도정부의 이종찬 국방장관에게 전달되기 하루 전 탄로났다.

정군파 8명 중 나와 석정선 등 5명이 방첩대에 구속됐다.

혐의는 국가반란음모죄. 범죄 혐의는 사형까지 가능한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민심과 군심이 우리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송 총장은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나를 불렀다.

    1959년 서울 영등포 육군 6관구사령관 사무실에서 박정희 소장이 미군 관계자와 환담하고 있다.

이듬해 1월 박 소장은 군수기지사령관에 임명돼 부산으로 내려간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송 총장=“나를 왜 물러나라고 하는 건가?” ▶나=“3·15 부정선거를 청산하고 나라가 큰 전환을 이루려고 하는데 총장님께서 하나도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얘기입니까. 책임지고 물러나십시오. 우리도 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을 받겠습니다.

” ▶송 총장=“난들 격동하는 상황에서 생각이 왜 없겠나. 우리 군대에도 귀관과 같은 정기(精氣)를 간직한 중견 장교들이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내게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주게.” ▶나=“안 됩니다.

오늘 저녁에 결심해주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결심이 물러집니다”라며 몰아붙였다.

 송 총장은 나를 설득하러 불렀다가 오히려 압박을 당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당돌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는 데 이런 당돌함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런 일을 하라고 한다면 과연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령이 육군 총수를 향해 하루의 유예도 주지 않고 군을 떠나라고 압박했으니 말이다.

나의 방식과 발상은 하극상으로 단죄될 수 있었다.

송 총장은 결국 참모총장직을 관두겠다고 답했다.

연병장에서 나를 기다리던 육사 동기생 30여 명은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때가 5월 19일 저녁이었고 송 총장은 이튿날 사표를 제출했다.

박정희 소장이 불을 붙인 지 17일 만에 내가 ‘송요찬 퇴진’을 마무리한 것이다.

정군운동의 기세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군의 기득권을 허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60년 6월 9일의 일이 떠오른다.

그날 이종찬 국방장관이 소집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도 참석했다.

회의에서 박 소장은 “과도정부하에서 군 내부의 정치세력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자정(自淨)없이 신정권으로 넘어가면 정치의 시녀가 될 수 있다.

소장 이상의 장성들에 대해 숙정(肅正)을 단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박 소장의 숙정 주장은 소수의 목소리에 그쳤다.

 지휘관 회의를 마친 박정희 소장은 정보국의 내 사무실에 들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박정희 소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저녁에 뭘 하나?”라고 물었다.

내가 “별일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럼, 우리 집에서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박 소장의 서울 집은 신당동이었다.

 박 장군은 자기 지프의 선탑석인 운전병 옆에 앉지 않고 굳이 뒷자석 내 옆자리에 올라탔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는 “자네, 지금 준비하는 거 본격화하자”고 말했다.

내가 “뭘 말입니까?”라고 묻자 박 소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가 하려고 하는 거, 그거 하자고!”라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금세 깨달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앞의 운전병에게 들리지 않게 나는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면 혁명을 해야지요.” 박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를 개혁하는 정군운동을 벌이되 반발이 심하면 혁명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박 장군과 나의 마음에 ‘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나와 그가 혁명이란 말을 나눈 최초의 대화였다.

그 순간 우리는 혁명가의 운명을 지니게 됐다.

60년 6월 9일 ‘혁명의 언약’은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61년 2월 내가 군에서 쫓겨난 뒤 ‘혁명의 결의’로 구체화되었다.

이 같은 결의는 수천년 가난을 극복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원대한 목표로 연결되었다.

지프의 언약 뒤 나는 육본 정보참모부에 설치된 도서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터키의 케말 파샤 혁명, 심지어 영국의 산업혁명까지 연구했다.

특히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 혁명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혁신과 반동의 대립이 격심한 20세기 후반기에 나세르가 지향했던 지도적 자세는 세계사적 의의를 뚜렷이 금 긋고 있었다.

 그 무렵 내 가슴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군은 참모총장이 이끌어야 했고 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이 밀어줘야 했다.

결국 문제는 정부의 인사였다.

그해 8월 21일, 나는 장면 총리를 만나러 갔다.

제2공화국은 내각제다.

국무총리가 최고 실권자다.

총리가 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중령 군복을 입고 중앙청(1995년 철거)의 총리실로 들어가는데 송원영 공보비서관이 가로막았다.

안쪽에서 고함소리가 새어 나왔다.

민주당 구파인 유진산 의원 등이 신파인 장면 총리와 조각(組閣) 협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송 비서관한테 “나라가 새로 출발하려 하는데 국군도 재정비해야 한다.

그러자면 정군을 해야 하는데 국방부 장관부터 신뢰받고 군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임명돼야 한다.

이런 건의를 드리려 왔으니 장 총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당신이 그 정군운동의 주동자요? 여보쇼, 여기가 어디라고 군복을 입고 들어오시나. 보시다시피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내일 아침 명륜동 총리 댁으로 오라”고 말했다.

 이튿날 총리 집으로 사복을 입고 갔다.

현관에 신발이 수십 켤레가 있었다.

그 시대의 안방정치 풍경이다.

송 비서관은 “지금은 당최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이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고 총리께서 곧 성당 미사를 가야 하니 오늘도 만나기 어렵겠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송 비서관은 나중에 내게 전화를 걸어와 “총리께 당신의 뜻을 다 전달했다”고 했다.

뒤이어 발표된 군 수뇌부 인사에서 정군의 의지는 희미했다.

 JP에게 1960년은 정군에 매진했던 한 해였다.

육군 참모총장 등 적지 않은 군 수뇌부가 정군운동으로 물러났으나 근본적으로 정치가 문제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 , 유광종 작가 ]?    ● 인물 소사전 송요찬(1918

80)=1960년 4·19 당시 계엄사령관. 이후 3·15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낸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61년 5·16이 나자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군사정부에서 국방장관, 내각수반 겸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62년 6월 물러났다.

63년 8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해 구속됐다.

70년 인천제철 사장, 80년 국정자문위원을 지냈다.

?    ●송원영(1928

95)=제2공화국 시절 장면 국무총리의 공보비서관. 출신. 1963년 야당인 국민의당 대변인을 맡았다.

신민당 소속으로 7

10대 서울 동대문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신민당 대변인과 원내총무를 지냈다.

80년 정치활동이 금지됐다가 85년 신한민주당 후보로 1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를 재개했다.

88년 정계에서 은퇴. 6. 포섭과 옹립 술집 '흐루시초프' 모의 "행운의 기회, 전광석화처럼 낚아채야" … 혁명핵심 29명 모여 "세상 바꾸고 뒤집어보자" 거병 결의나무 팔아 착복, 지도 못 읽는 장군 , 군 부패·무능에 젊은 장교들 분노 6군단 소속 동기생들 3명 만나 , "혁명" 입 떼자 "대찬성" 흔쾌히 동의 거사 38일 전 박정희, 29명 첫 대면 , "죽음 같이하자" 굳은 악수하며 약속 바로 그 자리서 혁명지도부 구성  , 작전반·행정반 통합조정 내가 맡아기회는 한 번뿐이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변질된 것이다.

오늘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과감하게 포착해야 한다.

그 무렵 김종필의 상념을 지배하던 언어였다.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해병대 훈련을 참관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오른쪽). 바로 뒤는 김종필 중정부장. 왼쪽은 의전비서관 조상호 중령. [중앙포토]꽃샘추위가 매서운 1961년 초봄 나는 분주해졌다.

박정희 소장과 대구에서 혁명 결의(2월 19일)를 한 뒤였다.

혁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출동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정군(整軍)운동은 육군본부 동료들로 충분했다.

이젠 혁명이다.

실병력이 있어야 했다.

그들을 이끄는 야전 장교를 포섭해야 했다.

나는 한강 이북, 박 소장은 한강 이남을 맡았다.

<3월 9일자 참고>?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열린 6·25 인천 상륙작전 기념행사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가운데 사복 차림 선글라스)과 육사 8기 동기생 등 5·16 주역들이 모였다.

이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주로 포진해 있었다.

앞줄 왼쪽부터 오정근 중령(해병), 강상욱·오치성·이석제 대령. 뒷줄 왼쪽부터 옥창호·정세웅 대령(해병), 길재호 대령 , 김종필 부장, 유원식 준장 . [사진 오정근씨 아들 오명식 삼정KPMG 고문]청계천과 무교동 사이에 조흥은행 본점이 있었다.

그 옆에 술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상수’라는 한글 간판을 달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 상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수상’이다.

이곳은 동지를 끌어들일 때 만남의 장소로 자주 사용됐다.

일종의 아지트다.

우리는 상수를 ‘흐루시초프’라고 불렀다.

당시 소련의 ‘수상’인 흐루시초프의 직책을 거꾸로 읽은 것에서 착안했다.

그는 유엔 총회 무대에서 구두를 벗어 연단을 두들기며 서방사회를 비난하는 연설로 꽤나 유명했다.

전화로 서로 만날 곳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암호처럼 “오늘은 ‘흐루시초프’에서 보자”는 식이었다.

헌병대 감시망도 그곳엔 닿지 않았다.

 ‘흐루시초프’에서의 가장 큰 성과는 포천에 있는 6군단 포병단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부대는 5·16 때 제일 먼저 육본을 점령했다.

6군단 소속인 홍종철(군단 작전참모) 대령과 구자춘·신윤창(군단 포병단 대대장) 중령을 만났을 때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들은 모두 육사 8기 동기생들이다.

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입을 떼자마자 “혁명하자는 거지? 그래, 세상 뒤집고 바꾸는 거 찬성한다”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 우리 다 생각이 같아”라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개 그런 분위기였다.

각 부대 지휘관들, 대대장이나 연대장들이 나오는데 많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내가 “이제 안 되겠다”고 하면 “이런 군대 갖고 안 된다” “나라를 방치할 수 없다” “염려하지 말라. 우리에게 임무가 주어지면 다 수행하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혁명동지의 규합이 쉬웠던 이유는 영관급 장교들이 너나없이 느끼는 군의 부패와 무능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스리쿼터(0.75t짜리 군용트럭)의 뒷바퀴를 빼고 바퀴축에 벨트를 연결한 뒤 여기에 기계톱을 매달아 산의 나무를 베어 파는 소위 ‘후생사업’이란 이름의 부패가 전군에 퍼져 있었다.

대부분의 장성이 부하들을 동원해 이런 짓을 해 사복을 채웠다.

축도 10만 분의 1 작전지도는 모눈 한 간이 10㎞다.

별 셋짜리 어떤 군단장은 독도법조차 몰라 지도의 두 지점을 손뼘으로 재고는 이 정도면 거리가 몇 ㎞냐고 물을 정도였다.

?    1962년 1월 1일 신년하례식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김 부장은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착용을 권장한 재건복을 입고 있다.

가운데 뒷모습은 채명신 감찰위원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정군을 통해 부패·무능 장성들이 정리되길 기대했던 젊은 장교들은 개혁의 좌절에 분노했다.

정쟁과 분열, 무력함에 휩싸였던 정치권도 우리의 결심에 영향을 줬다.

군대도 결국 사회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는 조직인데 군이 뭔가 일으키는 것을 오히려 바라는 분위기가 퍼져 갔다.

그래서 포섭 대상자를 만나 “혁명을 같이하고 함께 죽자”고 하면 거절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혁명에 합류키로 한 동지들이 1군 사령부의 조창대 중령, 30·33사단 작전참모인 이백일·오학진 중령, 육본의 강상욱 중령 등이다.

 모임이 잦아지면서 4·19 1주기를 거사일로 잡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날 예상되는 학생 시위를 빌미로 거병(擧兵)하는 시나리오였다.

그럴수록 동지들 사이에선 “혁명 지도자로 누구를 옹립하려고 하느냐” “너 혼자 알고 있으면 되나. 우리와 연결시켜라”는 요구가 뜨거웠다.

나는 말을 아꼈다.

박정희 소장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나야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박 소장은 여전히 군 감시망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소장이 내가 포섭한 혁명주체들 앞에 존재를 드러낸 건 4월 7일이었다.

거사 예정일을 10여 일 앞둔 시점이었다.

육사 9기생인 강상욱 중령의 장인이 운영하고 있던 명동의 한 호텔 건물(양명빌딩) 옥상에 동지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박정희 소장을 모시고 올라갔다.

이들 중엔 박 소장을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 가운데로 파고들면서 “자, 모두 이곳을 보라. 이분이 우리를 이끌 분이다”고 소개했다.

“와

”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만세” 소리도 여러 차례 나왔다.

박 소장은 극히 짧게 인사 겸 연설을 했다.

키워드는 구국(救國)과 살신(殺身), 기회였다.

“구국의 순간이 왔다.

지금이 나라를 구할 절호의 기회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게 아니다.

” 간결함이 박정희다웠다.

사실 길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 이심전심, 같은 뜻을 품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 아닌가. 행운의 여신은 한번의 기회만을 준다.

기회가 오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낚아채야 한다.

그 무렵 군심과 민심은 같았다.

사회안정과 변혁을 바라고 있었다.

군의 정치개입은 역사의 필연이 되고 있었다.

? 5·16 당시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박 소장은 연설 뒤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핵심 동지 29명은 육사 2기생인 박정희 소장, 5기생 4명, 나와 동기생인 8기 16명 8특(특별기수) 2명, 9기 4명 등이었고 포병 간부후보생 출신인 차지철 대위가 제일 낮은 계급으로 참여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혁명지도부를 구성했다.

총지휘자는 박정희 소장이다.

지도부를 작전반과 행정반으로 나누되 두 반을 통합 조정하는 임무는 내가 맡기로 했다.

작전은 출동부대를 이끌고 행정은 작전을 지원하는 업무였다.

 작전반 책임자는 서울 일원의 방어를 맡고 있던 6관구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 연락책은 육군본부 오치성 대령으로 정했다.

행정반은 육본의 이석제 중령, 연락책 강상욱 중령으로 했다.

원주의 1군 사령부는 조창대 중령이 맡았다.

조직을 본격적으로 확대하면서 보안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4월 7일 이후의 모임은 반을 단위로 해서 소규모로 진행하기로 했다.

[전영기 , 유광종 작가]    ●인물 소사전 홍종철(1924

74년)=육군 6군단 작전참모로서 포병단을 이끌고 5·16에 참여했다.

서울대 상대 출신의 육사 8기생.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겸 문교사회위원장을 역임했다.

대통령 경호실장(63년 12월)을 거쳐 문화공보부 장관(64년 9월)과 문교부 장관(69년 4월)을 지냈다.

74년 6월 청와대 사정담당 특별보좌관 재직 시절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 숨졌다.

7. 혁명의 확신?백운학 입에서 튀어나온 "혁명" … 거기서 민심을 읽었다 … 백씨, 박정희에게 "20년은 갑니다" … 내가 "그 후는?" 묻자 침묵정군운동으로 군복 벗은 석정선 , "백운학한테 좀 같이 가자" 졸라 백씨, 첫 만남에서 "때가 됐습니다" , 난 "누굴 죽이려고" 딱 잡아뗐다 좌파 준동 … 정부 무능은 극에 달해, 국민 마음속 불안한 그림자 짙어져 백씨, 내게만 속삭이며 말한 '천기' , "박 의장, 20년 뒤 돌아가실 것 같아"    1964년 1월 2일 한복을 입은 김종필 공화당 당의장(오른쪽)이 윤보선 민정당 대표(왼쪽)의 서울 안국동 자택을 방문해 새해 인사를 건네고 있다.

이날 김종필 당 의장은 윤보선 대표에게 승용차를 기증했다.

전직 대통령이자 제1야당의 당수인 윤 대표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윤 대표는 승용차를 돌려보냈다.

당시 선물한 차는 52년식 링컨으로, 윤보선씨가 대통령 재직 당시 쓰던 관용차를 손질한 것이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시운(時運)은 대사(大事)를 이루게 한다.

천운이라고도 한다.

5·16 거사가 그랬다.

변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민심은 새 질서를 요구했다.

이를 드러내주는 절묘한 장면이 있었다.

1961년 4월 말이었다.

나는 거사를 위한 비밀 준비를 진행 중이었다.

병력 투입을 위한 부대별 출동 계획이 완성돼 가던 때였다.

일요일 아침, 육사 8기 동기생인 석정선이 청파동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게 “사업이 잘 안 되는데, 백운학이한테 좀 같이 가자”고 했다.

 백운학은 관상을 잘 보기로 이름난 역술인이었다.

자유당 말기에 국회의원 당선과 장·차관 취임을 맞혔다고 해서 정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낭산(郎山) 김준연의 3대 국회의원(1954년) 당선을 예언했다고도 알려졌다.

나는 “안 가”라고 손사래 쳤다.

그러자 석정선이 “야, 네가 지프차가 있잖니. 그것 좀 태워 달라는 소리다”고 했다.

나는 지프차에 석정선을 태우고 집을 나섰다.

 석정선은 정군운동을 같이했다.

그해 2월 나와 함께 군복을 벗었다.

‘16인 하극상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서였다.

60년 9월 영관급 장교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정군의지를 따져 물은 사건이었다.

예편 뒤 나는 혁명 작업에 뛰어들었다.

석정선에게도 거사에 참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 못하겠다”며 빠졌다.

나는 “비밀을 지키라”고만 단단히 일렀다.

이후 석정선은 자동차 두 대를 사서 운수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사업은 자잘한 사고가 자꾸 났다.

그 때문에 백운학을 찾아갔다.

?    백운학은 종로 5가 제일여관 안채를 빌려 쓰고 있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술집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 손님 네댓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가 돌아와 석정선이 방으로 들어갔다.

백운학은 안방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지켜봤다.

 백운학이 석정선은 보지 않고 자꾸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대뜸 날 향해 소리를 쳤다.

“됩니다!” 밑도 끝도 없는 됩니다였다.

 “뭐가 됩니까?” 내 물음에 그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아, 지금 준비하는 혁명….” “아, 여보쇼! 누굴 죽이려고 엉뚱한 소리를 하쇼!” 나는 백운학 입에서 흘러나온 혁명이란 단어에 화들짝 놀랐다.

행여 누가 들을까 무서워 딱 잡아뗐다.

백운학은 그런 나를 보고 허허 웃었다.

 “지금 때가 됐습니다.

다들 원하는 일입니다.

국민 모두 변화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마음 놓고 하십시오. 아무 놈도 말리지 못합니다.

됩니다!” 그는 웅변하듯 말했다.

?    1962년 2월 동남아 6개국 순방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과 석정선 정보부 2국장.내 얼굴 어디에서 혁명의 기운이 묻어났기에 관상가가 이를 꿰뚫어 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백운학의 얘기에서 나는 민심을 읽었다.

관상은 운명의 정기를 추적한다.

그들의 예견은 민심 흐름과 유리되지 않는다.

 한 달 전쯤인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혁신계 좌파단체가 주도하는 야간 횃불시위가 있었다.

데모대 수백 명이 손에 횃불을 들고 명륜동 장면 국무총리 집을 향해 행진했다.

이들은 “데모규제법, 반공특별법을 철폐하라”고 외쳤다.

“장면 정권 물러나라”는 구호도 나왔다.

시위대는 경찰차를 부수고 민간인 차량을 탈취하는 난동까지 벌였다.

그 시위는 사회 혼란과 정치 무능의 상징이었다.

그 불안의 그림자가 국민 마음속에 짙게 드리워졌다.

장면 정권은 불안과 혼란을 정비할 능력이 없었다.

시위 이튿날 윤보선 대통령이 여야 인사를 불러 긴급 회담을 벌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장면 총리, 곽상훈 민의원 의장, 백낙준 참의원 의장, 김도연 신민당 대표, 유진산 간사장, 현석호 국방장관, 양일동·조한백 의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중대한 비상사태라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아무런 해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3·23 청와대 회담을 계기로 정치권은 극심한 정쟁과 분열로 치달았다.

여야는 혁신계의 무정부적인 일탈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선 일치했지만 뿌리 깊은 불신과 의심에 구체적인 대안을 도출할 수 없었다.

대다수 국민은 침묵하는 다수다.

그들에게 이 정권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았다.

사회 모든 면이 변혁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백운학의 소리가 민심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여겼다.

??1961년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진 혁신계 단체의 야간 횃불시위. 수백 명이 손에 횃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을 철폐하라는 주장을 펼쳤다.

경찰차를 부수는 등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당시 사회 혼란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중앙포토]나는 서둘러 백운학의 말을 끊었다.

“그만 하쇼. 앞에 앉은 사람이나 잘 봐주쇼.” 그제야 백운학이 앞에 있는 석정선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 사람, 사복 입고 왔지만 중령 아니면 대령 출신인데. 그 바퀴 달린 거 그만 처분하지”라고 했다.

석정선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데 깜짝 놀랐다.

 자리를 뜨려는데 백운학이 다시 날 바라봤다.

나는 그에게 “두 번 다시 그 얘기 하지 마쇼”라고 주의를 줬다.

그는 대답 없이 껄껄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넌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어. 돼, 돼. 다들 올 게 왔다고 할 거야. 방해할 사람 없으니 해.” 관상쟁이까지 혁명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흉중에 은근한 자신감이 더해졌다.

그 무렵 군대가 혁명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군 수뇌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사고(思考)의 나태와 집중력 부족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

군복 입은 군인들이 다방에 삼삼오오 모여 “혁명해야 한다” 떠들어도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5월 16일이 오기 전 거사 계획이 새 나간 적이 있다.

그때도 나는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백운학이 내게 천기를 누설한 건 그때 한 번만이 아니었다.

5·16 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된 61년 7월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나는 백운학을 저녁자리에 불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혁명 성공을 일찌감치 내다본 인물이니 박정희 의장도 한번쯤 만나볼 만하다고 여겼다.

서울시청 뒤편 다옥동(현 중구 다동)의 요릿집이었다.

시중 들던 종업원 두 명을 잠시 물리고 백운학이 박 의장에게 말했다.

“각하, 한 20년은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 그 얘기를 들은 박정희 의장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다음엔 어떻느냐”고 물었다.

백운학은 그 질문엔 입을 다물었다.

 자리가 파한 뒤 나가는 길에 백운학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이상한 괘인데요. 그 무렵에 돌아가실 것 같아요.” 나는 그 얘기를 박 의장에게 전하지 않았다.

예사롭지 않은 소리라고 그때도 생각했다.

18년 뒤 10·26 그날이 닥치고 나서는 더 놀랐다.

불길한 예언은 들어맞았다.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란 말이 있다.

이치(理致)가 아닌 것이 이치를 이길 수 없고, 옳은 이치라도 법에 우선할 수 없으며, 법도 권세를 능가하지 못하고, 그 권세라 할지라도 필경에는 하늘, 즉 민의를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숱한 힘과 원칙들이 종국엔 국민의 마음에 합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JP가 자주 쓰는 말이다.

[전영기·한애란  ]?● 인물 소사전 백운학(1921

79)=1950

70년대 유명 역술인. 호는 청산(靑山), 본명은 이종우다.

20대 후반부터 서울 종로에서 활동했다.

관상을 잘 본다고 이름이 알려져 정·재계 고위 인사들도 그를 찾았다.

그를 따라 백운학이라 이름 붙인 관상·작명가가 여럿 나왔다.

원조 백운학은 따로 있다.

구한말 고종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했다는 박유붕(1806

66)이다.

8. 5·16 최종 점검 "혁명은 의지다, 숫자가 아니다" 60만 대군 중 3600명 거병 … 박정희 "중심부 서울만 장악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형님 집서 핵심 25명 마지막 회의, '신이 계시다면 도와달라' 기도'공수단, 장면 숙소 반도호텔 장악' , 출동부대 구체적 점령 목표 결정D데이 H아워는 5월 16일 새벽 3시 , 박 장군 "세 번 연기는 없다" 다짐거사 계획 누설돼도 군 수뇌 무덤덤 , "성공하겠다" 은근히 자신감 생겨 역사는 기록되는 게 아니다.

기록하는 것이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한 5·16 핵심세력들은 운명의 순간들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거사 날짜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그들은 하늘의 도움을 구했다.

    1962년 4월 경기도 포천 6군단사령부를 방문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에서 둘째). 6군단포병단은 5·16 당시 가장 먼저 육군본부를 접수했다.

맨 왼쪽은 황종갑 최고회의 총무처장(준장), 김종필 부장오른쪽은 김진위 수도방위사령관(소장), 그 옆은 김계원 6군단장(중장). 김계원 장군은 이후 5대 중정부장과 대만대사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역사는 기록되는 게 아니다.

기록하는 것이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한 5·16 핵심세력들은 운명의 순간들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거사 날짜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그들은 하늘의 도움을 구했다.

그 무렵 나는 기도를 했다.

혁명의 성공을 간절히 구했다.

신이 계시다면 도와달라고 했다.

영어로 ‘메이 가드 블레스 어스(May God bless us·신이여 축복하소서)’를 되뇌었다.

그때 한국군이 60만 명, 미군이 5만6000명인데 3600명의 병력으로 세상을 뒤집었으니 누구는 기적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 적은 병력이 서울로 진입하는 데 별로 저항이 없었다.

석 달간 거사 준비 과정에선 비밀 누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군 사령탑은 이렇다 할 진압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어 그래’ ‘그게 사실이야?’ 하는 반응 정도였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1961년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장도영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이 나란히 앉아 있다.

[중앙포토]1961년 5월 14일 오전. 거사 계획을 확정 짓는 마지막 회의가 서울 약수동 셋째 형님 댁에서 있었다.

종락(鐘洛) 형님은 한일은행에 다녔는데 우리 일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형님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집 앞 골목길 입구에 나가 군 방첩대(CIC)나 범죄수사대(CID)의 감시가 따라붙었는지 망을 봐주었다.

형님 댁이 25명의 혁명주체들로 꽉 찼다.

거사 당일 움직이게 될 책임자들이다.

한 달여 전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옹립할 때 29명이 모인 이래 가장 많은 숫자였다.

 내가 총괄기획 및 조정 역할을 맡아 회의를 진행했다.

박정희 소장은 D데이 H아워가 5월 16일 새벽 3시임을 선언했다.

그 순간 긴박감이 고조됐다.

그 전에 잡았던 거사일 4월 19일과 5월 12일이 두 번이나 연기됐기에 선언의 무게감은 더했다.

박 소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D데이 H아워의 변동은 없다.

최후의 1인까지 싸워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 중 누군가 “출동병력이 한 곳으로만 몰리는 것 아닌가. 대구나 부산, 인천, 수원 등 지방 주요 도시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걱정했다.

박 소장은 “서울이 중요하다.

서울만 장악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 나온다”고 안심시켰다.

적은 병력으로 큰 군대를 상대할 땐 중심부를 쳐야 한다는 게 박 소장의 생각이었다.

    혁명은 기습이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핵심부를 전격적으로 집중해 치는 것이다.

대상이 움직이기 전에 이쪽의 선제(先制)공격이 승부를 가른다.

칭기즈칸이 10만의 군사로 몽골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지역을 평정한 비결도 이것이었다.

주변부를 버리고 중심부만 장악하는 방식이다.

칭기즈칸은 광대한 지역의 주요 도시, 요충지에 소수 병력만 남겨 놓고 앞으로 전진했다.

 회의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의지로 합니다.

의지는 자기 몸을 집어던지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결의로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의지가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전 기안을 맡은 박원빈 중령(6관구 작전참모)은 “16일 0시를 기해 예하부대에 비상훈련을 가장한 혁명군 출동명령을 하달하겠습니다”고 보고했다.

6관구는 혁명 지도부의 첫 지휘소로 결정됐다.

6관구는 수도권을 방위하는 사령부다.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 거사 책임을 맡았다.

첫 지휘소 임무가 끝나면 두 번째 지휘소는 남산 KBS방송, 세 번째는 육군본부로 옮길 예정이었다.

박원빈 중령이 발표한 거병과 점령 목표는 이랬다.

괄호 안은 거사 책임자.    6관구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육사 5기) 대령. 영등포에 주둔한 6관구는 5·16의 첫 지휘소 역할을 했다.

◆제1공수단(단장 박치옥 대령)=장면 총리의 숙소인 반도호텔과 방송·통신 기관, 중앙청, 국회의사당 ◆해병1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내무부, 치안국, 서울시경 ◆6군단 포병단(단장 문재준 대령)=육군본부 ◆30사단(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청와대, 시경탄약고, 서대문형무소, 연희송신소 ◆33사단(작전참모 오학진 중령)=기독교 방송국, 국제전신전화국, 중앙우체국 ◆특수임무(오치성 대령, 옥창호·김형욱·이석제·유승원 중령, 박종규 소령)=출동부대 독려 및 요인 체포. 마지막 분위기는 비장했다.

지금 우리가 헤어지면 다음에 만날 곳은 육군본부이거나 하늘나라가 될 것이다.

이승의 끝이 될지 모르는 동지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나는 신문지에 싸서 미리 준비한 100만환(지금 1000만원 정도)을 그들에게 쪼개서 나눠줬다.

한 사람당 쌀 한 가마는 살 수 있는 돈이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가족에게 양식이라도 사주시라”고 말했다.

그 돈은 남상옥 사장(사업가·뒤에 타워호텔 사장)한테 마련했다.

 무산된 두 차례 거사가 무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첫 번째 4월 19일 계획은 4·19기념 1주년 행사를 맞아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예상하고 준비한 것이다.

시위가 벌어지면 진압군으로 투입되는 혁명 주체세력이 궐기군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날 동대문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3만 명이나 모여 기념식이 있었다.

기대했던 데모는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 궐기는 자동적으로 취소됐다.

나는 발상과 접근 자세를 바꿨다.

상황이 조성되어야 거병하는 소극적 방식은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역사는 스스로 써야 하고 미래는 만들어가야 한다.

이튿날 대구의 박정희 소장(2군 부사령관)을 찾아가 폭동 진압 계획에 편승하려는 소극적 계획을 수정하자고 했다.

우리는 주변 조건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혁명군을 편성하기로 했다.

 두 번째 계획은 5월 12일이었는데 주체세력 중 한 명의 부주의로 비밀이 누설됐다.

육본의 이종태 대령이 경인 통근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동료를 포섭하기 위해 혁명 준비 상황을 발설한 것이다.

이 동료는 방첩대에 밀고했다.

거사 계획은 서울지구 방첩대장(이희영 대령)→육본 방첩대장(이철희 준장)→장도영 참모총장(중장) 순으로 보고됐지만 방첩대의 손길은 우리에게 미치지 않았다.

이 대령 한 명만 구속시키고 수사를 확대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쿠데타 소문이 날짜까지 박아 군내에 널리 퍼지게 돼 부득이 그날 궐기를 중단했다.

우리들의 거사 계획은 여러 쪽에서 올라갔다.

그럼에도 보고를 받은 장도영의 군 수뇌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신빙성을 두지 않든가 ‘대단치 않은 일’이라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거사 기밀이 누설됐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두렵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군과 정부의 무관심과 나태함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사가 성공하리라는 자신감이 은근히 생겼다.

기묘한 상념이 일었다.

1950년 6·25 남침 때다.

정보국의 박정희 작전정보실장(무관)과 북한반장(중위)인 나는 49년 12월에 전쟁 발발 시점과 징후를 정확하게 분석해냈다.

군 수뇌부에 보고하고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군과 정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책 없는 안일함,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들을 지배했다.

그때 군 수뇌부는 알면서도 남침을 당했다.

그 11년 뒤 군 지휘부는 군사혁명을 눈치챘으면서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전영기 , 유광종 작가 ]    ● 인물 소사전 김종락(1920

2013년)=김종필의 셋째 형으로 5·16에 민간인 신분(한일은행 과장)으로 가담했다.

1949년 상호은행(한일은행 전신)에 입행해 전무까지 지낸 뒤, 68년 서울은행장에 올랐다.

66년 9대 대한야구협회장에 취임(66

80년)해 12대(89

93년)도 지내 최장기(18년) 협회장으로 재임했다.

국제야구연맹 부회장, 아시아야구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조선업체 ‘코리아 타코마’를 운영하다 91년 한진그룹에 넘겼다.

 9. 혁명 전야박정희 "과업 성취되면 군 복귀" … 버마식 군부통치 구상한 듯 … 박 장군 "참모총장 모셔 군 장악" … JP "장도영은 안 돼"박 소장 “혁명공약 6항에 원대복귀” , 난 ‘결국 없어질 조항’ 생각하며 동의군사혁명 계획서 건네받은 장도영 , 거사 앞둔 한 달 동안 묵묵부답“그는 어느 편 설지 불확실한 인물” , 강한 반대에도 박 장군 뜻 안 꺾어군화 신고 권총 찬 채 마루에 앉아 , ‘진인사대천명’ 출동시간 기다려김종필(JP)은 5·16을 기획하고 설계했다.

하지만 JP가 그린 거사 밑그림은 지도자인 박정희 소장의 수정을 거쳤다.

JP는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을 박정희 대통령이 메워줘서 거사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61년 6월 12일 서울운동장(옛 동대문구장, 2007년 헐림)에서 열린 ‘국가재건 범(汎)국민운동’ 촉진대회.시민·학생 7만여 명이 참석한 대회에서는 5·16 군사혁명을 국민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용공사상 배격 등을 결의했다.

윤보선 대통령(오른쪽)의 치사, 국가재건최고회의 장도영 의장(중장, 왼쪽)의 격려사에 이어 박정희 부의장(소장, 가운데)이 선창하면 참석자 모두가 뒤따라 만세를 외쳤다.

장·박 두 사람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대중 집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박정희는 어깨띠에 묶은 리볼버 권총을 왼쪽 허리에 찼다.

권총은 통상 오른쪽 허리춤에 찬다는 점에서 이런 모습은 특이하다.

[사진 국가기록원]1961년 5월 15일,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군복을 꺼내 입었다.

석 달 전 강제예편으로 옷장에 넣어뒀던 군복이다.

허리엔 권총을 찼다.

 신당동 언덕배기에 있는 박정희 소장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정리 작업이 남아 있었다.

나는 품에서 혁명공약문 초안을 꺼내 박 소장에게 보여드렸다.

이틀 동안 가다듬은 5개 항 공약이었다.

그는 찬찬히 읽어보더니 “좋구만”이라고 했다.

글자 한 자 바꾸지 않았다.

 박 소장이 불쑥 말했다.

마지막 항목을 추가하자고 했다.

그 요지는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혁명군의 원대복귀-. 거사를 준비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성질서를 붕괴시키는 일이다.

세상을 뒤집는 일을 한 이상 군으로 돌아가진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복귀하면 다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숨 걸고 나서는 이유가 사라진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박 소장의 주장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강했다.

순수한 발상이었다.

‘내가 무슨 정권이 탐나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과업이 일단락되면 민간에 정권을 넘기고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그의 구상은 외국의 선례도 염두에 둔 듯했다.

내가 짐작하기에 박 소장은 버마(현재 미얀마)식 군부통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버마의 네 윈 장군은 58년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60년 2월 총선거를 실시했다.

군부세력은 출마하지 않았고, 네 윈은 민정 이양 뒤 군에 복귀했다(그 후 62년 3월 2차 쿠데타).    그 뜻을 알기에 굳이 만류하진 않았다.

“의견이 정 그러시다면 하나 넣읍시다”고 동의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품었다.

‘동의는 했지만 이 조항은 결국엔 없어질 것이다’. 혁명세력의 원대복귀를 약속한 제6항은 운명의 D-1일 그렇게 들어갔다.

나중 일이지만 이 조항은 두고두고 박정희 장군의 정치행보에 걸림돌이 된다.

 혁명취지문과 공약, 포고문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발표키로 했다.

장도영 총장(중장)을 앞장세우자는 것 역시 박정희 소장의 복안이었다.

박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 신분으로는 혁명군을 대표할 수 없다.

나는 2선으로 물러서고 장 총장을 1선에 모시자.” 나는 반대했다.

“장 총장은 저도 잘 알지만, 모시고 할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 내 머릿속엔 장 총장의 미덥지 못한 행각이 떠올랐다.

한 달여 전 4월 10일이었다.

박 소장이 군사혁명 계획서를 집으로 갖고 오라고 했다.

포섭한 동지의 역할과 출동부대 편성, D데이까지 진행 과정 등이 담긴 대여섯 장의 극비서류였다.

‘혁명’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지만 거사 전모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박 소장은 “장도영 총장에게 가서 이걸 보여주고 선두에 서 달라고 설득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 그걸 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를 잡아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큰일 납니다.

” “아니야, 괜찮아. 장 장군은 임자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내 입장에선 장도영을 끌어오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나한테 맡기고, 그 계획서를 주게.” 박 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장 총장보다 나이가 6살 위다.

하지만 군문에 장 총장(군사영어학교)이 먼저 들어왔다.

박 소장(육사 2기)은 상관인 장 총장의 신세를 여러 번 졌다.

1950년 육본 정보국 문관(文官)으로 근무하던 그를 현역(소령)으로 최종 복직시킨 인물이 장도영이었다.

장도영은 9사단장 시절 박정희 중령을 참모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박 소장은 장 총장과 오랫동안 쌓아온 신의를 굳게 믿고 있었다.

?    1961년 5월 18일 서울시청 앞에서 5·16 지지 가두시위를 한 육사 생도들에게 경례하는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오른쪽). 박정희의 검은색 선글라스는 5·16의 이미지로 굳어졌으며, 때로는 쿠데타의 상징으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JP는 “박 장군이 5·16 때 선글라스를 쓴 것은 얼굴 일부를 가려서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위엄을 더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중앙포토]나도 6·25가 발발했을 때 육본 정보국에서 장도영 국장을 상관으로 모셨다.

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판단력은 인정할 만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 동지들의 생명이 달린 거사다.

장 총장은 어느 편에 설지 확실치 않은 인물이었다.

자칫 위험할 수 있었다.

 나는 품속의 계획서를 꺼내 박 소장에게 건네면서 신신당부했다.

“드리긴 하겠는데, 사흘 안에 돌려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반란으로 몰아 몰살시킬 수 있는 계획서입니다.

그쪽에 내줬다가는 후환이 생길지 모릅니다.

” 박 소장은 “그래, 사흘만 보게 하고 꼭 돌려받겠다”고 약속했다.

박 소장은 그날 장 총장에게 찾아가 계획서를 전달했다.

 그 뒤로 계획서는 내 손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장 총장은 거사 순간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의 걱정에도 박 소장은 뜻을 꺾지 않았다.

“나를 간판으로 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였다.

육군 최고 지휘관인 참모총장을 내세워야 군 내부를 장악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 담겼다.

박 소장은 과거 좌익 연루 전력이 있다.

이 때문에 군 지휘부와 주한 미군에서 사상을 의심받고 있었다.

그가 정점에 서면 좌익 꼬리표를 빌미로 집중 공격 당할 우려가 있었다.

나 역시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 1의(義)로 삼는다’는 문구를 공약 첫머리로 내세웠다.

박 소장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여긴 듯했다.

나는 결국 장도영 1선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궐기를 세상에 알릴 발표문의 모든 문구가 5월 15일 오후 늦게 완성됐다.

이낙선 소령(육본)이 고쳐진 초안을 정서(精書)했다.

나는 원고를 잘 접어서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결의가 굳어졌고 내 마음속 긴장감도 고조됐다.

출동의 시간이 오길 기다렸다.

박정희 소장은 신당동 집 마루에 의자를 내놓고 앉았다.

군복을 차려입고 권총을 찬 채 군화를 신었다.

언제든지 궐기를 위해 나갈 채비가 돼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린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맞이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였다.

시간은 흘렀다.

밤 11시30분, 박정희 소장의 집을 나섰다.

나는 박 소장이 탄 지프차 뒤에 한웅진 준장(육군 정보학교장)과 함께 올랐다.

집 앞엔 정체불명의 검은색 지프차 두 대가 지켜보고 있었다.

헌병대였다.

거사 정보가 누설된 것이다.

행동은 시작됐다.

이제 누구도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혁명 전야는 이런 장면이었다.

[전영기·한애란 ]?● 인물 소사전 이낙선(1927

89년)=육군 소령으로 5·16에 가담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관과 청와대 민원비서관을 역임했다.

1966년 출범한 국세청의 초대 청장이다.

개청 첫해 ‘내국세 700억원 징수’ 목표(전년도 실적 430억원)를 달성해 추진력을 인정받았다.

상공부 장관(69년)과 건설부 장관(73년)에 연이어 올랐다.

롯데상사 회장(81년)과 한일그룹 고문(88년)을 지냈다.

10. 역사상 가장 긴 하루 JP "비밀누설, 불길한 출발" … 박정희 "가자, 나를 따르라" … 새벽 4시 한강 건넌 박 소장 "장도영이 나를 쐈어"30예비사단서 거병 계획 새나가 , 장도영 "반란군을 체포하라" 명령 한강 인도교서 헌병, 궐기군에 발포, 해병 병력, 응사하며 저지선 돌파 난, 광명인쇄소서 혁명공약 준비 , 경찰관 두 명 다가와 가슴 졸여 창경원 앞 6군단 포병단 트럭 행렬, 인쇄소 2층서 보고 "휴

이제 됐다"    5월 20일 청와대 본관에서 윤보선 대통령을 면담하고 나오는 박정희 소장(오른쪽 둘째)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중장·왼쪽). 박 소장이 윤 대통령을 만나러 들어갈 때 벗어놨던 권총을 박종규 경호대장(오른쪽)이 들고 있다.

장 총장 오른쪽은 참모총장 비서실장인 안용학 대령이다.

[중앙포토] 그날은 JP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1961년 5월 16일의 거병은 비밀누설 속에 시작됐다.

출발은 불길했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는 없다.

화살은 활시위를 떠났다.

긴장과 불안, 긴박감과 안도감이 팽팽하게 충돌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 하루는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었다.

?    5월 15일 밤 11시30분. 우리는 신당동의 박정희 소장 집을 떠났다.

박 소장의 지프 뒤칸엔 한웅진(육군정보학교장) 준장과 내가 동승했다.

장경순(육본 교육처장) 준장의 차가 따라왔다.

목적지는 영등포구 문래동의 6관구 사령부. 혁명 제1지휘소다.

6관구는 수도권 일대를 관할한다.

그 때문에 서울을 장악하려는 혁명 부대를 지휘하기 적격이다.

박 소장이 6관구에 도착해 작전 명령을 내림으로써 5·16 궐기는 시작될 것이었다.

 길을 나서는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거사 비밀이 누설됐기 때문이다.

집을 감시하던 방첩대(CIC) 요원들이 차량 두 대로 우리를 미행했다.

박 소장에게 급보가 들어온 건 오후 8시쯤부터였다.

“거사 기밀이 샜다” “무장 헌병들이 6관구 사령부를 차단하고 있다.

궐기군 장교들을 포위하려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6관구의 김재춘 대령과 6관구 부근에 나가 있는 동지들의 전화는 긴박감과 걱정으로 차 있었다.

박 소장은 옆에 있던 우리에게 “오늘 저녁 일이 탄로 났다는구먼”라고 했다.

다소 놀란 그의 표정은 금방 단호함으로 바뀌었다.

 누설의 진원지는 30예비사단이었다.

거사 참여자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상국 사단장에게 밀고가 들어갔다.

거병 책임자인 이백일(중령) 작전참모는 인근 야산으로 도피했다.

이상국은 이철희(준장) 방첩대장, 장도영(중장) 참모총장에게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장도영은 육본 헌병대에 “6관구의 반란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상황 파악 때문에 출발은 지연되고 있었다.

나는 초조했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주요 임무는 혁명공약문의 인쇄와 라디오방송이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밀어붙이셔야 합니다.

”?    5·16 거사 뒤 서울 중앙청(1995년 철거)을 지키고 있는 30예비사단 병력. [사진 국가기록원]박 소장은 대청마루 의자에서 전투화를 신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담배를 문 채 30여 분 묵묵히 있다가 일어났다.

“가자, 나를 따르라. 가다 죽더라도 올바른 역사가 있다면 평가해줄 것이다”고 했다.

선언 조의 그 말은 우리의 결연함을 더했다.

일부에선 박 소장이 이때 취기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성스러운 행동을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우리는 신당동 집을 떠났다.

자정 직전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나는 내렸다.

박 소장에게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안국동에 있는 광명인쇄소로 달려갔다.

이학수 사장은 인쇄소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만약 일이 잘못돼 붙들려 갈 경우 당신들은 내가 총으로 위협해 강제로 일을 시켰다고 진술하시라. 대신 아침 6시까지만 묵비권을 행사해 달라.” 인쇄기가 돌아가는 ‘쩔그럭 ’ 소리가 왜 그렇게 큰지 가슴을 졸였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감시했다.

새벽 2시쯤이었다.

경찰관 두 명이 순찰을 돌다가 인쇄소 문 앞에 섰다.

‘수상한데 들어가 볼까’하는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이 안으로 들어오면 감금을 하든지 총을 쏠 수밖에 없다.

제발 들어오지 마라’고 간절히 빌었다.

둘은 공장 문에 한동안 귀를 대고 듣더니 “야간작업이겠지”라며 그냥 지나갔다.

그들이 고마웠다.

 새벽 3시쯤. 원남동의 창경원 앞길에 40여 대 트럭이 쾅쾅거리며 지나갔다.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어둠을 대낮처럼 밝혔다.

포천에서 출발한 6군단 포병단이 예정대로 진입한 것이다.

삼각지 육군본부를 진주하기 위해 내려온 혁명군이다.

인쇄소 2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휴

이제 됐다”고 했다.

걱정과 긴장감이 잠시 풀렸다.

    6군단 포병단은 방첩대의 감시망에 잡히지 않았다.

문재준 포병단장과 홍종철 6군단 작전참모, 신윤창·구자춘 대대장이 1300명 장병을 이끌었다.

포병단은 트럭에 대포를 달았다.

그 부대 출동에는 미군의 의정부 검문소 통과가 가장 큰 문제였다.

사전 작전회의 때 나는 신윤창 중령에게 “절대 미군을 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검문소 미군은 7

8명 정도. 그들이 통과를 거부하면 그냥 몸으로 껴안아 서울까지 데려오라고 얘기했다.

신 중령은 “미군이 발포를 하면 어떻게 하나”고 물었다.

나는 “그래도 응사하지 말라. 우리 쪽 희생자가 나더라도 맨손으로 대응하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소장은 “잘했다.

우리의 혁명은 무혈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때 검문소 미군과의 다툼이 없었다.

신 중령에 따르면 미군 위병은 “헤이 헤이, 훈련 잘하라”고 웃으며 교통정리까지 해주었다.

미군은 포사격 훈련을 가는 줄 알고 의심 없이 통과시킨 것이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    ‘5월 16일 새벽 3시 군서 무혈 쿠데타’ 소식을 머리기사로 전한 같은 날짜 (석간) 1면.나는 전화통을 계속 돌려댔다.

6관구 사령부는 연락두절이었다.

박 소장이 짜놓은 실병력의 주력은 해병 1여단과 공수단(김포)이다.

이들이 한강 인도교를 돌파해 서울 시내로 진입해야 했다.

하지만 기밀 누설로 중대한 차질이 생겼다.

장도영 총장은 진압의 자세를 취했다.

박 소장은 상황을 역전시키려 했다.

신속하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영등포의 6관구 사령부를 나와 김포 쪽으로 갔다.

새벽 1시쯤 김포의 해병 1여단 1500여 명은 김윤근 준장의 지휘하에 서울로 들어오고 있었다.

김 준장은 박 소장을 만났다.

그리고 노량진쪽에서 한강 인도교로 진입했다.

상황은 험악해졌다.

인도교에서 해병대와 육본 헌병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헌병대는 50여 명, 장 총장의 지시로 급파된 저지 병력이다.

헌병대는 GMC 트럭 7대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해병대는 그 차량 봉쇄를 뚫었다.

하지만 한강 다리 중간 지점에 헌병대의 새로운 저지선이 있었다.

박 소장은 차에서 내렸다.

헌병대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박 소장은 무시한 채 다리 위를 앞장서 걸었다.

그 장면은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침착한 솔선수범이었다.

“나를 따르라”는 박 소장의 결의는 극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

 광명인쇄소에 있던 나는 그 일을 알 수 없었다.

초조감이 엄습했다.

 새벽 4시25분쯤 수십 발의 총성이 새벽의 고요함을 깼다.

그 총소리는 거꾸로 내게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혁명이 무산되진 않았구나.” 총소리는 장면 국무총리 체포조에서 나왔다.

체포조는 박종규 소령 주도하에 차지철 대위 등 공수단 중대장 6명으로 구성됐다.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의 실권자인 장 총리의 숙소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체포조가 급습하기 10분 전에 장 총리는 피신했다.

장 총리는 혜화동의 카르멜 수도원으로 숨었다.

총리 체포조는 작전에 실패했다.

그 화풀이를 하는지 그들은 공중에 대고 총을 쏜 것이었다.

 그리고 10분이 지났을까. 인쇄소 앞에 지프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났다.

박 소장이 인쇄소에 들어왔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장도영이가 헌병을 시켜 나를 쐈어. 내가 목숨 걸린 우리들의 혁명계획서까지 그에게 전부 주었는데. 이럴 수 있나” 하고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물었다.

박 소장은 그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간략히 말해줬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헌병들이 쏜 총알이 막 날아와. 나는 지프에서 내렸지, 그리고 다리를 걸어서 건너갔지. 이쪽에서 응사하니까 잠시 후 헌병대가 싹 사라졌어.” ?    ● 인물 소사전 김재춘(1927

2014)= 육사 5기 출신의 5·16 주체. 거사 때 제1혁명지휘소였던 영등포 6관구 사령부의 참모장(대령)이었다.

비밀누설로 6관구에서 궐기군과 헌병대가 대치할 때 상황을 장악했다.

국가재건최고위원과 3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8, 9대 국회의원. 5·16 주체 가운데 5기 세력의 대표로 육사 8기 출신을 이끌던 김종필(JP)과 정적(政敵) 관계였다.

최고회의와 군부 내 반JP세력을 규합해 김종필의 1차 외유를 압박했다.

정보부장 땐 JP의 비리를 캐려 했다.

----------------------------------------------------------------수녀원에 피신한 장면 총리 '54시간 부재' … 궐기군 진압 무산 … 반전의 기회 사라졌다    1961년 3월 장면 총리(왼쪽)가 이한림 제1군사령관(중장)과 함께 원주 국토건설사업 시공식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 사령관은 한국 최대 규모 실병력인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포토]5·16 거사의 최대 피해자는 총리 장면(1899

1966)이다.

그 한 해 전 4·19 혁명은 새 시대를 열었다.

민주당은 총선에 압승했다.

8월 12일 민주당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내각제 헌법의 국무총리는 권력 실세다.

대통령(윤보선)은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위치였다.

정권 출범 뒤 민주당 내부의 분열, 사회 불안이 이어졌다.

장면 정권의 운신 폭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9개월 뒤 장면은 군부의 기습을 당했다.

그리고 18일 낮 중앙청(1995년 철거)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그의 내각 총사퇴 의결은 5·16의 성공을 의미했다.

장면의 메모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 발발, 박정희 소장 지휘하 군사 쿠데타 발생.” 그는 비운의 정치인이 됐다.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전직 대통령 휘호 선호도는 박정희, 이승만, 김대중 전 대통령 순으로 높다.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2005년부터 10년간 거래가 많았던 전직 대통령 휘호 낙찰총액을 박정희 10억 9200만 원, 이승만 5억 6100만 원, 김대중 3억 2300만 원 순으로 집계했다.

역대 최고가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인용(智仁勇)'으로 2006년 경매에서 1억 5500만원에 낙찰됐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쓴 휘호 '고진감래(苦盡甘來)'(1975)이 밖에 낙찰 총액이 3200만원이었던 전두환 전대통령 휘호들이 눈길을 끈다.

경매업계 관계자는 '일반 선호도는 떨어지지만 희귀 작품을 소장하려는 추종자들 덕분에 비교적 높은 가격대를 형성한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이 쓴 휘호 '고진감래(苦盡甘來)'(1975)는 2013년 경매에서 1100만 원에 낙찰됐다.

김종필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전직 대통령 휘호 선호도는 박정희, 이승만, 김대중 전 대통령 순으로 높다.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2005년부터 10년간 거래가 많았던 전직 대통령 휘호 낙찰총액을 박정희 10억 9200만 원, 이승만 5억 6100만 원, 김대중 3억 2300만 원 순으로 집계했다.

역대 최고가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인용(智仁勇)'으로 2006년 경매에서 1억 5500만원에 낙찰됐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쓴 휘호 '고진감래(苦盡甘來)'(1975)이 밖에 낙찰 총액이 3200만원이었던 전두환 전대통령 휘호들이 눈길을 끈다.

경매업계 관계자는 '일반 선호도는 떨어지지만 희귀 작품을 소장하려는 추종자들 덕분에 비교적 높은 가격대를 형성한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이 쓴 휘호 '고진감래(苦盡甘來)'(1975)는 2013년 경매에서 1100만 원에 낙찰됐다.

김종필5.13 (끝)▲ JP “노병은 죽지않는다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3일 오후 자신의 모교인 서울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서 2016 자랑스러운 육사인상을 시상한 뒤 생도들을 향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 전 총리는 생도들에게 “노병은 죽지않는다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2016.5.13 (끝) [포토] 대통령궁 떠나는 호세프…테메르 부통령이 권한대행 : 2016/05/13<연합> 브라질리아 AFP▲ BRAZIL-CRISIS-ROUSSEFF-IMPEACHMENT Brazilian suspended President Dilma Rousseff leaves the Planalto Palace in Brasilia on May 12, 2016. Tears flowed when Dilma Rousseff addressed the nation for a last time Thursday before driving away from Brazil's presidential palace to the chanting of supporters. / AFP PHOTO / Brazilian Vice Presidency / VANDERLEI ALMEIDA▲ 브라질 호세프 대통령 ‘직무 정지’ (브라질리아 AP=연합뉴스) 5월 12일(현지시간) 상원 전체회의에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견서 표결 결과 찬성 55명, 반대 22명으로 가결됐다.

이로써 호세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됨에 따라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좌파 정권이 13년 만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끝) [포토] 박 대통령-여야 3당 원내대표, 1시간22분 회동 : 2016/05/13<연합> 백승렬 ▲ 춥지도 않은데 코트는 왜?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3당 원내 지도부 회동에서 기념촬영할 때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코트를 가리키고 있다.

왼쪽부터 박지원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 박근혜 대통령,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2016.5.13 (끝)▲ 분홍색이니까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3당 원내 지도부 회동에서 손을 잡고 있다.

왼쪽부터 국민의당 김성식 정책위의장, 박지원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 박근혜 대통령,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변재일 정책위의장, 새누리당 김광림 정책위의장. 2016.5.1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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