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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정준하를 아시죠?그 프로를 보면 정준하는 정말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어요.<무한도전>에 정준하의 지인으로 소지섭, 조인성까지 출연했으니 그 인맥이 엄청나죠.  ?아무튼 정준하는 배우, 가수, 스포츠 선수까지 다방면의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여기 저기 아는 사람도 많고 그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는 사람을 보고‘발이 넓다’ 라고 합니다.

‘발이 넓다’는 발 크기가 크다는 뜻이 아니죠. 즉 ‘발이 넓다’라는 표현은 ‘발’과 ‘넓다’라는 말이 각각 가진 사전적 의미와 다른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표현을 바로 ‘관용 표현’이라고 해요.     "친구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장점을 보려고 해 봐."이 문장에서 ‘귀를 기울이다’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아래 그림에서 골라 볼까요? ?네. 정답은 쉽죠. ‘귀를 기울이다’는 귀를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향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죠. ‘남의 이야기나 의견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모으다’라는 뜻입니다.

 관용 표현 중에 몸과 관련된 관용 표현이 굉장히 많습니다.

 한번 알아볼까요?* 눈? 눈에 밟히다 : 잊혀지지 않고 자꾸 ?눈에 떠오르다.

?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다 : 몹시 애타게 오랫동안 기다리다.

 * 귀? 귀가 솔깃하다 : 어떤 말이 그럴듯하게 여겨져 마음이 쏠리다.

? 귀에 못이 박히다 : 같은 말을 여러 번 듣다.

 * 코? 코 묻은 돈 : 코흘리개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돈.? 콧대를 꺾다 : 상대편의 자만심이나 자존심을 꺾어 기를 죽이다.

 * 입? 입을 맞추다 : 미리 짜고 말의 내용을 맞추어 두다.

? 입이 무겁다 : 말수가 적거나 아는 얘기를 함부로 옮기지 않다.

? 입이 짧다 : 음식을 심하게 가리거나 적게 먹다.

 * 얼굴? 얼굴이 두껍다 : 부끄러움을 모르다.

? 얼굴이 반쪽이 되다 : 병이나 고통 따위로 ?얼굴이 몹시 마르고 야위게 되다.

 * 손? 손이 맵다 : 손으로 슬쩍 때려도 몹시 아프다.

? 손이 크다 : 씀씀이가 후하고 크다.

 * 발? 발을 끊다 : 오가지 않거나 관계를 끊다.

? 발이 묶이다 : 몸을 움직일 수 없거나 활동할 수 없는 형편이 되다.

 ??이외에도 우리가 사용하는 관용 표현은 정말 많답니다.

우리말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잘 살려 주는 관용 표현을잘 사용해서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보도록 해요

 그럼 다음에 더 알찬 내용으로 만나요! 장원교육 국어랑 독서랑 F과정 15,16조에 <관용 표현>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가령 '왼뺨을 때리면 오른쪽뺨을대라' <---이런건 정말이지 보통사람은 못하겠다싶은 행동이지만나이가드니 그제서야 이해가 되셨다고.... 아브라함은 주님의뜻을 그대로 받아들여너그러운사람이었음창세기 13:9네앞에 온 땅이있지아니하냐 나를떠나가라네가 좌하면 나는우하겠고 네가 우하면내가 좌하리라아브라함은 섭섭하고 화가나는 상황이었지만 그 자신이 먼저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를 보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아브라함같이 너그러운마음을 가지고살고 너그럽게 베풀고살면 하나님은 그것의 백배만배의 축복을 내려주심섭섭한 마음은 사탄의 올무이니 섭섭한마음이 들면 회개하고 기도빌립보서4:4하나님이 성도에게 바라심은항상기뻐하고 아무것도염려하지말고 다만 모든일에기도와간구로 너희구할것을 감사함으로아뢰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너그러운사람이 되라고하셨고관용:남의잘못을 너그러히 받아들이고 용서함역경을 당했을 때 크게 요동치거나 흔들리지말고 어떤경우에도 화내지말고 낙심하지말고용서와 양보를하라고 가르치심예수님과 닮은 삶을 사는것1. 집착과 오기,욱하는 마음 버리기 2 양보와 배려 3 상대방을 축복하는 넉넉한마음*아브라함은 축복의 근원 아브라함을 통해 다른사람이 축복을 받게됨?예수님을 믿는사람은 누구와 다투면 안되고 타인을 축복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나를 조롱하고 비판할지라도 그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만배의 축복으로 돌려주신다예전에 친구와 탄 비행기 친구와 난 사선으로 앉아있었는데 친구뒤의 서양인이 다리가 유난히 길었다친구가 의자뒷좌석을 끝까지 제껴서 그 서양인이 인상을 찌푸리길래 친구에게 슬쩍 말했다'뒷사람이 불편해보이니 의자를 좀 앞으로해달라고' 비행기에서 내려서 친구가 나에게그런다'내돈주고 비행기티켓을 구매해서 탔기때문에 의자를 내맘대로 제낄 권리가 있다'고그 친구말도 맞지만 서로 조금만 배려하면서 살면 더 좋을텐데.. 그런생각을했었는데예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모습이 그런모습이라니 앞으로 더욱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어떻게 생각해보면 요즘 유행하는 갑질도 내가 돈주고 낸 권리를 너무 오바해서 이런사건들이 발생하는게 아닌가 싶다식당에서 돈주고 음식을 사먹으면서 백화점에서 물건을 돈주고사면서돈 지불에대한 권리를 오바해서 생각하기때문에 더 많은것을 바라고 요구하고그래서 그런 갑질현상들이 생기는건 아닌지...손님은 왕이라고하는데 왕대접을 받으려면 왕처럼 기품있고 교양있게 행동해야한단다왕대접을 받으려고하면서 어디 구석에 거지처럼 막 행동하면서 왕대접을 받으려고하면 모순아닌가11.리뷰보기 기쁨: 종결을 짓는 여기에서는, 자기증오와 괴로움을 해소하는 용매이며, 자부심과 관용과 행복을 촉진하고 도모하는 위대한 힘인 기쁨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다고 나는 느낀다.

기쁨이 또한 관용의 산물이기도 한 까닭은, 자기증오와 만성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흔히 잃게 되는 기쁨을 경험하게끔 하는 역할을 관용이 맡기 때문이다.

나는 기쁨을 느끼는 능력보다 우리들을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다른 요소는 별로 없다고 믿는다.

기쁨은 자연스러운 조건이요, 느낌이다.

  그렇다면 기쁨이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쁨이란 그냥 기분이 좋은 상태다! 그것은 (내적이거나 외적인 강요와 폭력으로부터의) 해방감, 생동감, 희망, 활력 그리고 몰입이다.

그리고 기쁨을 형성하고, 분출시키고, 뒷받침하는 요소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자세 즉, 자부심과, 내적인 평화와, 균형과, 즉흥성과, 통합성과, 관능과, 성적인 의식과, 자아의 실현과, 창조성과, 타인들과의 협조적인 관계맺기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준거 기준과 한계 안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다.

그리고 기쁨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해소시키는 전염성이 그 특성이다.

  아울러 기쁨은 소외감 제거의 장치로서 기능하고, 감정의 죽음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또 상호 간의 공박과 증오를 방지하고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쁨이 이런 역할을 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애와, 상호 간의 존경심과, 협동, 그리고 사랑의 분위기에서도 엄청난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한편 내 생각에 기분(mood)은 느낌의 관현악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들의 시각과 인식을 크게 좌우해서, 완전한 객관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기분은 뜻하는 대로 달라지고 결정되기도 하는가? 나는 기분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들이 인간의 두뇌라고 부르는 오묘하고도 강력한 화학 실험실의 선(腺, glands)들이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에 반응하여, 그런 느낌에 상응하는 기분을 생성하고 유지하는 화학작용을 크게 주도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모든 작용을 통괄하는 힘은 우리들의 가치관이요, 철학과 관점이며,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가려내는 선택력이요, 우리들 자신과 타인들과 세상과 맺는 관계의 형태다.

그렇다면 기쁨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다.

기쁨은 철학으로부터, 인생관으로부터, 관점으로부터 생성되는 그런 기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할 때마다 관용과 기쁨을 도모해야 하며, 자기증오와 비참함이라는 적이 눈에 띌 때마다 일어나 맞서 싸워야 한다.

또 우리들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기쁨의 철학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름다운 경치에서, 맑은 공기와 꽃에서, 웃는 아이들에게서, 지적인 활동에서, 산책하고 대화하고 회상하면서, 그리고 우리들이 행하는 수천 가지 인간적인 활동에서 기쁨을 찾아내 누리며, 처음으로 또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돕기 위해서 우리들이 노력하는 바로 그만큼, 우리들은 기쁨의 가치 창조에 기여하는 셈이다.

낙천성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 밝은 쪽을 보려는 습성 또한 도움이 된다.

우리들은 용기를 잃으면 안 된다.

기쁨 또한 하나의 습성이지만, 그 습성을 몸에 익히려면, 특히 오랫동안 기쁨을 멀리했던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스페인을 지배하는 막강한 두 세력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이 결혼을 하고 통일 왕국을 이룬다.

또한 1492년에 스페인 그라나다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왕국이 항복을 한다.

이제 스페인은 780년간의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그리고 또한 1492년에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의 도움으로 아메리카로 떠난다.

스페인의 새로운 시대는 이렇게 시작을 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면서 얻어들인 부는 16, 17세기에 스페인이 세계를 제패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편 스페인 왕국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통일 작업을 마무리 하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한 무슬림과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무슬림과 유대인을 제거하는 일은 그간의 뿌리박힌 이슬람 세력의 유산과 풍습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과제처럼 보였다.

스페인의 옛수도 톨레도 전경?1492년 3월 31일 스페인 왕국은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7월 31일까지 떠날 것을 명하는 알함브라 칙령을 선포한다.

알함브라 칙령은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재산의 반출을 금지시켰다.

강제로 스페인을 떠나야 했던 유대인들은 포르투갈로 이주하거나 남동부 유럽, 또는 북유럽으로 향한다.

 그후 1556년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펠리페 2세가 등극한다.

이때까지 스페인은 유럽의 강자로 군림하며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예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펠리페 2세의 등극은 스페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된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성곽 야경2.펠리페 2세는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네델란드를 가톨릭국가로 통합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종교개혁의 기운이 네델란드까지 퍼지고 있었기에 펠리페 2세의 의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네델란드 북부지방(지금의 네델란드 지역)에는 점차 칼뱅파를 위시한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이 몰려들면서 북부유럽의 상업중심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펠리페 2세와 네델란드는 점차 갈등을 빚으며 독립전쟁 양상을 띠게 된다.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의 절대적인 수호자였다.

결국 펠리페 2세의 강압적 종교통일 전쟁은 80년 전쟁이라 부르는 네델란드 독립전쟁으로 발전한다.

 위트레흐트 조약 기념 걸개그림(위트레흐트 시내 전시) 1574년 10월 3일, 네델란드는 라이덴에서 스페인군에게 승리를 한다.

그러나 라이덴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이후 1579년 네델란드 북부지방의 7개주(지금의 네델란드) 대표가 위트레흐트에 모여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한다.

위트레흐트 조약(Treaties of Utrecht)은 이후 네덜란드 독립의 모태가 된다.

 위트레흐트 조약의 가장 중요한 골자는 “단일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종교적 관용과 종교 다원주의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7개주의 주민들이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이슬람 등 여러 종교를 각기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전 유럽에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하는 신호탄이 된다.

 위트레흐트 돔성당 입구, 횃불을 들고 있는 여인상 네델란드가 종교적 관용을 독립의 명분으로 삼자 유럽 전역에서 박해받던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든다.

특히 유대인들이 대거 북부 네덜란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1560년대부터 20여년간 스페인이 장악하던 네덜란드 남부 지역(지금의 벨기에 지역) 인구는 급격히 감소한다.

당시 북부유럽에서 가장 번성했던 앤트베르펜의 경우 8만 5천명에서 4만 2천명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와 반대로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암스테르담과 라이덴, 그리고 하를렘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종교적 자유가 이민자들을 네덜란드 북부로 이끈 것이다.

17세기에 이르자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3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늘어난다.

라이덴 인구 역시 1만 5천 명에서 7만 2천 명으로 증가한다.

종교적 자유가 만든 현상이었다.

이들 중에는 수많은 금융업자와 전문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7세기를 전후한 시기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든 이들은 이제 네델란드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이끄는 주역으로서 선봉장 노릇을 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네델란드 발전의 숨은 공로자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네델란드가 전 세계 무역을 주도하며 강력한 제국으로 자리하는데 이들의 도움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순수한 종교적 혈통주의를 고수하려던 펠리페 2세의 아집은 종교적 관용을 무시하고 오직 일체감 형성을 위해 종교적 광신주의에 빠져 정치적 만용을 야기하면서 정치, 경제는 물론 사상적 전통까지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스페인의 종교적 광신주의는 역설적으로 네델란드가 독립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사상적 관용을 갈구하는 사상가들마저 암스테르담으로 모이게 만드는 원인 제공을 한다.

반면 네델란드는 종교적 관용을 베풀게 됨으로써 종교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자유가 허용되는 진정한 자유의 땅으로 거듭나게 된다.

  네델란드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기술과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세운 가장 큰 공은 세계 무역을 선도할수 있는 여러 기술적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 1594년 유대인 기술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배를 개발해 해상무역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미 17세기 중반에 네델란드는 세계무역의 75%를 담당한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설탕과 향신료를 포함해 각종 천연자원과 물품을 들여와 가공을 한후 비싼 값에 되팔아 커다란 이윤을 남긴다.

특히 18세기부터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유대인기술자들이 식미지에서 가져온 다이아몬드를 세공함으로써 암스테르담이 세계 보석산업의 중심지로 자리한다.

 한편, 1602년에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한다.

당시 세계무역을 주도하던 네델란드의 81명 선주들이 오늘날의 ‘주식회사’형태로 회사를 만든 것이다.

이들 주주들 81명 역시 예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다.

그 뿐 아니라 1609년에는 증권거래소까지 설립하고 운영자금 등 자금 대출로 이자 수익을 올리는 은행업무까지 시작한다.

그런데 네델란드 증권거래소 덕분에 이들을 내쫓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경제체제는 역설적으로 부도가 나게 된다.

 스페인 펠리페 2세는 당시 주변국들에게 40%대의 높은 이자로 다른 나라들에게 대출을 해주었는데 네델란드 증권거래소에서는 3%의 낮은 이자율로 대출을 해주었다.

그 바람에 스페인에게 돈을 빌린 나라들이 대출금을 모두 갚아버리게 되자 스페인 경제가 부도가 나게 된다.

이로인해 점차 전 유럽의 자금까지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스페인에서 포루투칼로 도망을 간 유대인들, 그러나 포루투칼에서 또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가야만 했던 유대인들, 그들 덕분에 지금의 네델란드로 발전하게 된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수상가옥의 암스테르담 시민들  ?3.네델란드는 인구밀도는 높지만 지리적으로 작은 나라이다.

이런 작은 나라가 어떻게 강력한 나라로 자리 잡을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종교적 관용 때문이다.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네델란드로 이주를 했다.

그 결과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경제적 기량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네델란드가 경제적 강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참고로 2010년 현재 네델란드의 종교 구성은; 무종교 49.2%, 로마 가톨릭 24.4%, 개신교 15.8%, 이슬람교 4.9%, 그 외 종교 4.5%, 힌두교, 불교 1.1%, 유대교 0.1% 이다.

[관용] 놀랍네요.


출처: 네델란드 통계청)네델란드의 종교적 관용은 영국의 사상가 존 로크에게도 영양을 미친다.

당시 영국내 이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그는 종교와 상관없이 영국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든 문화와 기술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제적 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네델란드는 단지 세계 강국으로서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한게 아니라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문화 예술의 황금시기를 주도하는 유럽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는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와 문화 예술가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든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이다.

단지 경제적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네델란드의 종교적 관용을 찾아 사상적 관용을 추구하려한 때문이었다.

 이제 네델란드는 마치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의 나라가 된 듯 했다.

특히 데카르트가 자신의 사상을 의심해 출판마저 허용하지 않은 파리를 버리고 ‘자유의 도시’ 네델란드 라이덴 대학으로 옮겨와 20년 넘게 교수로서 연구생활을 하며 지낸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그는 프랑스에서 칼뱅주의자로 낙인찍혀 가톨릭세력은 그를 불온한 사람처럼 취급을 한다.

그러나 칼뱅주의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를 무신론자로 보고 비난한다.

이런 상황에서 데카르트가 갈수 있는 곳은 네델란드뿐 이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라이덴전투 승리기념 퍼레이드 4.종교적 관용의 모태는 어쩌면 네델란드에 이미 자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에라스무스가 치즈로 유명한 도시 하우다(Gouda)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외치기 전인 1469년 하우다 교회 신부인 아버지와 가정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서인지 그의 최대 관심사는 네델란드가 평등사회가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에라스무스는 26살에 가톨릭 사제가 된다.

 그후 에라스무스는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한다.

그러던 중 1509년 런던으로 여행을 가면서 수도원 생활을 풍자한 작품을 구상한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토머스 모어 집에 도착해 ‘우신예찬’(Encomium Moriae)을 완성하고 1511년 출간한다.

우신예찬은 네델란드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적이고 교조적인 기독교 정체성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에라스무스 동상, 하우다 소재에라스무스가 ‘하우다의 아들’임을 소개하는 안내판‘우신예찬’은 ‘어리석은 신에 대한 예찬’이란 뜻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인문주의적 풍자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은 신들을 통해 당시 학자들의 어리석음과 권위주의, 그리고 형식주의로 점철된 기독교에 대해 풍자섞인 비난을 한다.

종교적 맹신주의를 강력히 경고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관용을 부추키는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종교에 대한 편협함과 무조건적인 믿음을 경계한 에라스무스의 의지는 국가를 초월해 16세기 유럽 문화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네덜란드 태생이지만 평생 동안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럽인’으로 활동한 에라스무스, 국경을 넘나들며 유럽을 무대로 여러나라에서 종교적 관용의 가치를 주장하며 강의를 한다.

 에라스무스 동상, 로테르담 소재?유럽에서는 쉽게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을 만날 수 있다.

비엔나에서 폴란드와 항가리를 오가고, 또다시 비엔나에서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는 고속열차가 바로 ‘에라스무스’이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기리는 것으로 이 보다 적절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아무튼 1648년 드디어 신성로마제국이 벌인 30년 전쟁과 스페인과 네델란드간의 80년 전쟁이 막을 내리고 평화를 위해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다.

유럽의 평화가 찾아오는 순간이다.

네델란드가 정식으로 독립국가로 출발을 하는 날이기도 하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은 이제 에라스무스가 주장하는 “종교적 관용”의 정신을 받아들여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에라스무스 동상, 벨기에 루뱅 소재 5. 암스테르담은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형적인 유대인 집안 출신이었는데 처음에는 포루투칼 리스본에서 살았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박해로 또다시 네델란드로 이주를 한다.

그후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와 스피노자를 낳는다.

 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모든 인간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표현할 자유가 조건없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 주장의 핵심이다.

과연 이런 생각을 받아들여줄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스피노자에게 이단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키워준 장본인은 어쩌면 암스테르담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스피노자, 그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부유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상속을 거부한 스피노자, 랍비가 되려했지만 유대교 교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쫓겨나 호구지책으로 안경알 만드는 일을 한다.

그러나 렌즈를 만들며 유리가루를 너무 마신 탓인지 나이 45살에 숨을 거두고 만다.

 스피노자 동상, 암스테르담 소재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지금 절대적이라고 믿는 신도 내일이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연’이 '신‘이기 때문이란다.

엄격한 유대교 집안에서 범신론을 주장한 그는 결국 파문을 당한다.

그런데도 스피노자는 계속해서 자유를 주창한다.

개인의 자유는 결국 국가가 보장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일 수밖에 없기에 국가가 보장해 주지 않으면 언제든 구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그 자체가 자유라는 말로 환원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스피노자가 집필한 '신학정치론'은 당시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이 신의 말씀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문학작품이고, 참된 신앙은 제도화된 종교와 상관이 없고, 종교가 근대국가의 통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서 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급진적이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과 저주를 예상하고 '헨리쿠스 퀸라트'라는 익명을 사용해 암스테르담이 아닌 독일 함부르크에서 책을 출간한다.

예상대로 책은 1670년 1월 출간되자마자 전 유럽에서 불온하고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지옥에서 꾸며진 책'이라는 제목도 그런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스피노자 동상 받침대(Staat is de Vrijheit/ The State is the freedom) 스피노자의 말대로, 국가가 개인의 사상적 자유까지 보장해 줄때 참다운 민주주의 체제를 가질수 있다.

이처럼 당연한 말이 오늘날 우리의 귓가에 맴도는 것은 여전히 우리사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게 아닐까? 오래전 철학자의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절실한 말이기에 더욱 그렇단 말이다.

 스피노자가 사랑한 암스테르담, 이 곳에서 그는 “이 번영의 나라에는 귀족이 없으며 어떤 계급과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고 네델란드를 찬양한다.

[관용] 세상에나..



 “네델란드의 모든 국민은 평등한 환경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종교, 신념, 정치적 의견, 인종 또는 성별 등의 어떠한 배경에 바탕을 둔 차별도 금지한다.

 네델란드라는 작은 나라가 만들어낸 그들만의 헌법 제1조, “모든 국민은 동일한 법 아래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이 말은 결국 네델란드는 어떤 불필요한 간섭이나 불평등이라도 지양하며 네델란드 법이 정한 바에 따라 모든 행위는 자유롭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암스테르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왕궁 누군가는 이런 네델란드를 두고서 “관용이 만든 제국”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앞에서 네델란드를 이해 하는 지름길이 “Gedogen”(헤도흔: 관용)이란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도 바로 네델란드 헌법 1조가 관용의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지금의 네델란드가 지켜온 종교적 관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프랑스라는 나라는 똘레랑스(Tol�rance)를 외치는 사람들을 죽였고, 네델란드라는 나라는 헤도흔(Gedogen)을 외치는 사람을 보호했다.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시민들이 지켰고, 네델란드의 헤도흔은 국가가 지켰단 말이다.

?킨더다이크 지역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정준하를 아시죠?그 프로를 보면 정준하는 정말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어요.<무한도전>에 정준하의 지인으로 소지섭, 조인성까지 출연했으니 그 인맥이 엄청나죠.  ?아무튼 정준하는 배우, 가수, 스포츠 선수까지 다방면의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여기 저기 아는 사람도 많고 그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는 사람을 보고‘발이 넓다’ 라고 합니다.

‘발이 넓다’는 발 크기가 크다는 뜻이 아니죠. 즉 ‘발이 넓다’라는 표현은 ‘발’과 ‘넓다’라는 말이 각각 가진 사전적 의미와 다른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표현을 바로 ‘관용 표현’이라고 해요.     "친구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장점을 보려고 해 봐."이 문장에서 ‘귀를 기울이다’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아래 그림에서 골라 볼까요? ?네. 정답은 쉽죠. ‘귀를 기울이다’는 귀를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향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죠. ‘남의 이야기나 의견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모으다’라는 뜻입니다.

 관용 표현 중에 몸과 관련된 관용 표현이 굉장히 많습니다.

 한번 알아볼까요?* 눈? 눈에 밟히다 : 잊혀지지 않고 자꾸 ?눈에 떠오르다.

?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다 : 몹시 애타게 오랫동안 기다리다.

 * 귀? 귀가 솔깃하다 : 어떤 말이 그럴듯하게 여겨져 마음이 쏠리다.

? 귀에 못이 박히다 : 같은 말을 여러 번 듣다.

 * 코? 코 묻은 돈 : 코흘리개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돈.? 콧대를 꺾다 : 상대편의 자만심이나 자존심을 꺾어 기를 죽이다.

 * 입? 입을 맞추다 : 미리 짜고 말의 내용을 맞추어 두다.

? 입이 무겁다 : 말수가 적거나 아는 얘기를 함부로 옮기지 않다.

? 입이 짧다 : 음식을 심하게 가리거나 적게 먹다.

 * 얼굴? 얼굴이 두껍다 : 부끄러움을 모르다.

? 얼굴이 반쪽이 되다 : 병이나 고통 따위로 ?얼굴이 몹시 마르고 야위게 되다.

 * 손? 손이 맵다 : 손으로 슬쩍 때려도 몹시 아프다.

? 손이 크다 : 씀씀이가 후하고 크다.

 * 발? 발을 끊다 : 오가지 않거나 관계를 끊다.

? 발이 묶이다 : 몸을 움직일 수 없거나 활동할 수 없는 형편이 되다.

 ??이외에도 우리가 사용하는 관용 표현은 정말 많답니다.

우리말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잘 살려 주는 관용 표현을잘 사용해서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보도록 해요

 그럼 다음에 더 알찬 내용으로 만나요! 장원교육 국어랑 독서랑 F과정 15,16조에 <관용 표현>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스페인을 지배하는 막강한 두 세력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이 결혼을 하고 통일 왕국을 이룬다.

또한 1492년에 스페인 그라나다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왕국이 항복을 한다.

이제 스페인은 780년간의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그리고 또한 1492년에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의 도움으로 아메리카로 떠난다.

스페인의 새로운 시대는 이렇게 시작을 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면서 얻어들인 부는 16, 17세기에 스페인이 세계를 제패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편 스페인 왕국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통일 작업을 마무리 하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한 무슬림과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무슬림과 유대인을 제거하는 일은 그간의 뿌리박힌 이슬람 세력의 유산과 풍습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과제처럼 보였다.

스페인의 옛수도 톨레도 전경?1492년 3월 31일 스페인 왕국은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7월 31일까지 떠날 것을 명하는 알함브라 칙령을 선포한다.

알함브라 칙령은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재산의 반출을 금지시켰다.

강제로 스페인을 떠나야 했던 유대인들은 포르투갈로 이주하거나 남동부 유럽, 또는 북유럽으로 향한다.

 그후 1556년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펠리페 2세가 등극한다.

이때까지 스페인은 유럽의 강자로 군림하며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예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펠리페 2세의 등극은 스페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된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성곽 야경2.펠리페 2세는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네델란드를 가톨릭국가로 통합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종교개혁의 기운이 네델란드까지 퍼지고 있었기에 펠리페 2세의 의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네델란드 북부지방(지금의 네델란드 지역)에는 점차 칼뱅파를 위시한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이 몰려들면서 북부유럽의 상업중심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펠리페 2세와 네델란드는 점차 갈등을 빚으며 독립전쟁 양상을 띠게 된다.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의 절대적인 수호자였다.

결국 펠리페 2세의 강압적 종교통일 전쟁은 80년 전쟁이라 부르는 네델란드 독립전쟁으로 발전한다.

 위트레흐트 조약 기념 걸개그림(위트레흐트 시내 전시) 1574년 10월 3일, 네델란드는 라이덴에서 스페인군에게 승리를 한다.

그러나 라이덴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이후 1579년 네델란드 북부지방의 7개주(지금의 네델란드) 대표가 위트레흐트에 모여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한다.

위트레흐트 조약(Treaties of Utrecht)은 이후 네덜란드 독립의 모태가 된다.

 위트레흐트 조약의 가장 중요한 골자는 “단일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종교적 관용과 종교 다원주의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7개주의 주민들이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이슬람 등 여러 종교를 각기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전 유럽에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하는 신호탄이 된다.

 위트레흐트 돔성당 입구, 횃불을 들고 있는 여인상 네델란드가 종교적 관용을 독립의 명분으로 삼자 유럽 전역에서 박해받던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든다.

특히 유대인들이 대거 북부 네덜란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1560년대부터 20여년간 스페인이 장악하던 네덜란드 남부 지역(지금의 벨기에 지역) 인구는 급격히 감소한다.

당시 북부유럽에서 가장 번성했던 앤트베르펜의 경우 8만 5천명에서 4만 2천명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와 반대로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암스테르담과 라이덴, 그리고 하를렘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종교적 자유가 이민자들을 네덜란드 북부로 이끈 것이다.

17세기에 이르자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3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늘어난다.

라이덴 인구 역시 1만 5천 명에서 7만 2천 명으로 증가한다.

종교적 자유가 만든 현상이었다.

이들 중에는 수많은 금융업자와 전문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7세기를 전후한 시기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든 이들은 이제 네델란드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이끄는 주역으로서 선봉장 노릇을 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네델란드 발전의 숨은 공로자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네델란드가 전 세계 무역을 주도하며 강력한 제국으로 자리하는데 이들의 도움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순수한 종교적 혈통주의를 고수하려던 펠리페 2세의 아집은 종교적 관용을 무시하고 오직 일체감 형성을 위해 종교적 광신주의에 빠져 정치적 만용을 야기하면서 정치, 경제는 물론 사상적 전통까지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스페인의 종교적 광신주의는 역설적으로 네델란드가 독립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사상적 관용을 갈구하는 사상가들마저 암스테르담으로 모이게 만드는 원인 제공을 한다.

반면 네델란드는 종교적 관용을 베풀게 됨으로써 종교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자유가 허용되는 진정한 자유의 땅으로 거듭나게 된다.

  네델란드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기술과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세운 가장 큰 공은 세계 무역을 선도할수 있는 여러 기술적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 1594년 유대인 기술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배를 개발해 해상무역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미 17세기 중반에 네델란드는 세계무역의 75%를 담당한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설탕과 향신료를 포함해 각종 천연자원과 물품을 들여와 가공을 한후 비싼 값에 되팔아 커다란 이윤을 남긴다.

특히 18세기부터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유대인기술자들이 식미지에서 가져온 다이아몬드를 세공함으로써 암스테르담이 세계 보석산업의 중심지로 자리한다.

 한편, 1602년에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한다.

당시 세계무역을 주도하던 네델란드의 81명 선주들이 오늘날의 ‘주식회사’형태로 회사를 만든 것이다.

이들 주주들 81명 역시 예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다.

그 뿐 아니라 1609년에는 증권거래소까지 설립하고 운영자금 등 자금 대출로 이자 수익을 올리는 은행업무까지 시작한다.

그런데 네델란드 증권거래소 덕분에 이들을 내쫓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경제체제는 역설적으로 부도가 나게 된다.

 스페인 펠리페 2세는 당시 주변국들에게 40%대의 높은 이자로 다른 나라들에게 대출을 해주었는데 네델란드 증권거래소에서는 3%의 낮은 이자율로 대출을 해주었다.

그 바람에 스페인에게 돈을 빌린 나라들이 대출금을 모두 갚아버리게 되자 스페인 경제가 부도가 나게 된다.

이로인해 점차 전 유럽의 자금까지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스페인에서 포루투칼로 도망을 간 유대인들, 그러나 포루투칼에서 또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가야만 했던 유대인들, 그들 덕분에 지금의 네델란드로 발전하게 된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수상가옥의 암스테르담 시민들  ?3.네델란드는 인구밀도는 높지만 지리적으로 작은 나라이다.

이런 작은 나라가 어떻게 강력한 나라로 자리 잡을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종교적 관용 때문이다.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네델란드로 이주를 했다.

그 결과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경제적 기량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네델란드가 경제적 강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참고로 2010년 현재 네델란드의 종교 구성은; 무종교 49.2%, 로마 가톨릭 24.4%, 개신교 15.8%, 이슬람교 4.9%, 그 외 종교 4.5%, 힌두교, 불교 1.1%, 유대교 0.1% 이다.

출처: 네델란드 통계청)네델란드의 종교적 관용은 영국의 사상가 존 로크에게도 영양을 미친다.

당시 영국내 이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그는 종교와 상관없이 영국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든 문화와 기술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제적 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네델란드는 단지 세계 강국으로서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한게 아니라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문화 예술의 황금시기를 주도하는 유럽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는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와 문화 예술가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든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이다.

단지 경제적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네델란드의 종교적 관용을 찾아 사상적 관용을 추구하려한 때문이었다.

 이제 네델란드는 마치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의 나라가 된 듯 했다.

특히 데카르트가 자신의 사상을 의심해 출판마저 허용하지 않은 파리를 버리고 ‘자유의 도시’ 네델란드 라이덴 대학으로 옮겨와 20년 넘게 교수로서 연구생활을 하며 지낸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그는 프랑스에서 칼뱅주의자로 낙인찍혀 가톨릭세력은 그를 불온한 사람처럼 취급을 한다.

그러나 칼뱅주의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를 무신론자로 보고 비난한다.

이런 상황에서 데카르트가 갈수 있는 곳은 네델란드뿐 이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라이덴전투 승리기념 퍼레이드 4.종교적 관용의 모태는 어쩌면 네델란드에 이미 자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에라스무스가 치즈로 유명한 도시 하우다(Gouda)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외치기 전인 1469년 하우다 교회 신부인 아버지와 가정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서인지 그의 최대 관심사는 네델란드가 평등사회가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에라스무스는 26살에 가톨릭 사제가 된다.

 그후 에라스무스는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한다.

그러던 중 1509년 런던으로 여행을 가면서 수도원 생활을 풍자한 작품을 구상한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토머스 모어 집에 도착해 ‘우신예찬’(Encomium Moriae)을 완성하고 1511년 출간한다.

우신예찬은 네델란드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적이고 교조적인 기독교 정체성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에라스무스 동상, 하우다 소재에라스무스가 ‘하우다의 아들’임을 소개하는 안내판‘우신예찬’은 ‘어리석은 신에 대한 예찬’이란 뜻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인문주의적 풍자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은 신들을 통해 당시 학자들의 어리석음과 권위주의, 그리고 형식주의로 점철된 기독교에 대해 풍자섞인 비난을 한다.

종교적 맹신주의를 강력히 경고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관용을 부추키는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종교에 대한 편협함과 무조건적인 믿음을 경계한 에라스무스의 의지는 국가를 초월해 16세기 유럽 문화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네덜란드 태생이지만 평생 동안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럽인’으로 활동한 에라스무스, 국경을 넘나들며 유럽을 무대로 여러나라에서 종교적 관용의 가치를 주장하며 강의를 한다.

 에라스무스 동상, 로테르담 소재?유럽에서는 쉽게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을 만날 수 있다.

비엔나에서 폴란드와 항가리를 오가고, 또다시 비엔나에서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는 고속열차가 바로 ‘에라스무스’이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기리는 것으로 이 보다 적절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아무튼 1648년 드디어 신성로마제국이 벌인 30년 전쟁과 스페인과 네델란드간의 80년 전쟁이 막을 내리고 평화를 위해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다.

유럽의 평화가 찾아오는 순간이다.

네델란드가 정식으로 독립국가로 출발을 하는 날이기도 하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은 이제 에라스무스가 주장하는 “종교적 관용”의 정신을 받아들여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에라스무스 동상, 벨기에 루뱅 소재 5. 암스테르담은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형적인 유대인 집안 출신이었는데 처음에는 포루투칼 리스본에서 살았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박해로 또다시 네델란드로 이주를 한다.

그후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와 스피노자를 낳는다.

 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모든 인간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표현할 자유가 조건없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 주장의 핵심이다.

과연 이런 생각을 받아들여줄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스피노자에게 이단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키워준 장본인은 어쩌면 암스테르담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스피노자, 그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부유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상속을 거부한 스피노자, 랍비가 되려했지만 유대교 교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쫓겨나 호구지책으로 안경알 만드는 일을 한다.

그러나 렌즈를 만들며 유리가루를 너무 마신 탓인지 나이 45살에 숨을 거두고 만다.

 스피노자 동상, 암스테르담 소재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지금 절대적이라고 믿는 신도 내일이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연’이 '신‘이기 때문이란다.

엄격한 유대교 집안에서 범신론을 주장한 그는 결국 파문을 당한다.

그런데도 스피노자는 계속해서 자유를 주창한다.

개인의 자유는 결국 국가가 보장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일 수밖에 없기에 국가가 보장해 주지 않으면 언제든 구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그 자체가 자유라는 말로 환원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스피노자가 집필한 '신학정치론'은 당시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이 신의 말씀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문학작품이고, 참된 신앙은 제도화된 종교와 상관이 없고, 종교가 근대국가의 통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서 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급진적이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과 저주를 예상하고 '헨리쿠스 퀸라트'라는 익명을 사용해 암스테르담이 아닌 독일 함부르크에서 책을 출간한다.

예상대로 책은 1670년 1월 출간되자마자 전 유럽에서 불온하고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지옥에서 꾸며진 책'이라는 제목도 그런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스피노자 동상 받침대(Staat is de Vrijheit/ The State is the freedom) 스피노자의 말대로, 국가가 개인의 사상적 자유까지 보장해 줄때 참다운 민주주의 체제를 가질수 있다.

이처럼 당연한 말이 오늘날 우리의 귓가에 맴도는 것은 여전히 우리사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게 아닐까? 오래전 철학자의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절실한 말이기에 더욱 그렇단 말이다.

 스피노자가 사랑한 암스테르담, 이 곳에서 그는 “이 번영의 나라에는 귀족이 없으며 어떤 계급과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고 네델란드를 찬양한다.

 “네델란드의 모든 국민은 평등한 환경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종교, 신념, 정치적 의견, 인종 또는 성별 등의 어떠한 배경에 바탕을 둔 차별도 금지한다.

 네델란드라는 작은 나라가 만들어낸 그들만의 헌법 제1조, “모든 국민은 동일한 법 아래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이 말은 결국 네델란드는 어떤 불필요한 간섭이나 불평등이라도 지양하며 네델란드 법이 정한 바에 따라 모든 행위는 자유롭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암스테르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왕궁 누군가는 이런 네델란드를 두고서 “관용이 만든 제국”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앞에서 네델란드를 이해 하는 지름길이 “Gedogen”(헤도흔: 관용)이란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도 바로 네델란드 헌법 1조가 관용의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지금의 네델란드가 지켜온 종교적 관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프랑스라는 나라는 똘레랑스(Tol�rance)를 외치는 사람들을 죽였고, 네델란드라는 나라는 헤도흔(Gedogen)을 외치는 사람을 보호했다.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시민들이 지켰고, 네델란드의 헤도흔은 국가가 지켰단 말이다.

?킨더다이크 지역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 .이에 연유하여'누구에게 억지로 강요하다' 혹은 '강한 압력을 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는 거

▷ Dad, you don't have to twist my arm.    아빠, 내게 강요하지 마세요.▷ You don't need to twist your arm to get me to go with you.    네가 억지로 잡아끌지 않아도 너랑 같이 갈 거야.▷ He will never come if you don't twist his arm.    그에게 압력을 넣지 않으면 그는 오지 않을거야..이에 연유하여'누구에게 억지로 강요하다' 혹은 '강한 압력을 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는 거

▷ Dad, you don't have to twist my arm.    아빠, 내게 강요하지 마세요.▷ You don't need to twist your arm to get me to go with you.    네가 억지로 잡아끌지 않아도 너랑 같이 갈 거야.▷ He will never come if you don't twist his arm.    그에게 압력을 넣지 않으면 그는 오지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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