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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독도를 자국 땅이라고 인식하고 있다고.설민석은 책에서 말한다.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지식과 끊임없는 국민적 관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 간도를 어째서 잃게 되었는지, 한국인으로서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작은 관심과 애정이면 충분하다.

우리 것을 지키는 힘은 바로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런 맥락에서 이번 무한도전 도산 안창호 특집은 역사에 무관심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며 큰 깨달음과 감동을 준다.

오죽하면 내가 무한도전 볼 때마다 매번 '저걸 왜 보냐'며 훼방 놓던 쭌똘아범도 '이번 무한도전은 꼭 봐야된다' '울뻔 했다'며 호평을 아까지 않았다는.<LA한복판에서 도산 안창호를 외치다>무한도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LA특집 편 중 지난 1편은 현지 놀이기구를 소개하다 끝나버렸다.

이번 주 2편에선 LA투어를 하려는지 멤버들을 버스에 태우고 현지 PD를 투입해 가이드를 해준다.

그런데 어째 장소들을 설명만 해주고서 그냥 휙휙 지나쳐 가버리네황당해 하는 무한도전 멤버들그러나 굴하지 않고 할말만 계속 하는 가이드설명과 함께 초고속으로 지나쳐 버리는 코리아타운 투어어이 없는 관광에 슬슬 짜증내기 시작함정체불명 LA 투어때문에 멤버들 불만 폭주하는 중드디어 가이드가 준 미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핸드프린팅 남긴 우리나라 사람 세 명을 찾아라.멤버들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를 열심히 찾아헤매지만 두명 밖에 찾지 못하고, 제작진은 다시 멤버들을 버스에 태우고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 바닥에 있는 세번째 한국인의 핸드프린팅을 보여준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핸드프린팅을 남긴 세번째 한국인은 할리우드 최초의 한국인 배우 필립 안이다.

완전 생소한 이름^^;갑자기 피디가 묻는다.

필립 안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냐고필립 안이란 이름도 완전 생소한데 아버지가 누군줄 아냐고??.....바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필립 안의 아버지였다.

그랬다.

제작진의 진짜 의도는 이거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발자취를 되새겨 보자는 것. 이번 무한도전에선 그동안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부분을 찬찬히 보여주며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안창호 선생의 삶을 다뤘다.

도산 안창호의 큰아들 이름인 필립. 무심코 봤을 땐 영어이름 같은 거 지어줬나보다 했었다.

그런데 큰아들 필립의 이름은 바로 '반드시 세우겠다'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도산 안창호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이름이었던 거다.

사실 조금 전 지나쳐온 LA코리아타운의 인터체인지, 우체국, 한인회관에 안창호 선생의 이름이 다 붙여져 있었고 안창호 선생의 흔적이 생생한 곳이었다.

남가주대 한인연구소엔 안창호 선생의 가족이 살던 자택이 복원돼 있었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3남2녀 중 막내 아들 안필영씨를 만난다.

그분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안창호가 독립운동을 하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는 바람에 평생 단 한 번도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했단다.

안필영씨가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 분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자 멤버들 모두 먹먹한 표정이 된다.

도산 안창호는 독립운동을 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동포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이날 무한도전 도산 안창호 편에선 무한도전 멤버들이 안창호 선생의 외손자인 필립 안 커디와 만나는 장면도 나온다.

커디는 무도 멤버들을 자택에 초대해서 그동안 소중히 보관해온 역사 자료들을 보여 준다.

그는 "우리 기억 속에 도산은 가장 순수한 애국자고,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사랑한 분으로 남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커디의 얘기를 듣던 유재석은 "몰랐다.

죄송하고 부끄럽다"고 말한다.

나머지 멤버들도 넘나 숙연해지는구료.그래 그런거다.

오늘 무한도전은 'LA투어'가 아니라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본 '안창호 투어'였던 거다.

우리가 기억해야만 할 역사를 조명한 거였어. 이후 멤버들은 서울에 있는 도산 공원을 방문한다.

안창호 선생의 묘소는 입구에서 조금만 걸으면 보이는 위치에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른 채 그동안 도산공원에서 만나고 촬영하고 그랬었다며 멤버들 모두 반성모드.나 역시 도산공원에 두어번 쯤 가봤는데 그냥 안창호 선생 이름만 딴 줄 알았지 묘소가 있는줄도 몰랐다.

사실 별 관심도 없었지. 그냥 공원에 놀러갔던겨.무한도전 도산 안창호 특집편을 보니 이제껏 역사에 얼마나 무관심한 채 살았나 느껴진다.

것두 여실히. 반성도 하고, 역사에 관심 가져야겠다고 결심도 하고 그랬다오.그런 의미에서 예능을 넘어서 감동과 역사의식까지 선물하는 무한도전이 새삼 고맙고 그러네. (나는야 10년 무한도전 덕후 ㅎㅎ)캘리포니아 LA특집 2탄, 완전 히트다 히트!역사가 없으면미래도 없다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도산 안창호-   도산(島山) 안창호 (1878 ? 1938)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동영상KBS ??? ?? ?? ??? ?? ?4?? ?? ? ??? ??? ??? ?? ?? ??? ??? ??. ???? ???175?? ????? ???? ??? ??? ?? ??? ?...www.youtube.com도산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02년 유학을 위해 도미하여 그곳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섰다.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에 창립되어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 당시로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힘있는 단체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도산이 미국에 있던 5년 동안 국내정세는 날로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심하였으며1907년 초 귀국 길에 올랐다.

  이 때 이미 국내에서 전개할 구국운동의 새로운 목표와 방법론과 조직형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귀국 즉시 도산은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갑 등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찾았다.

  그는 새로운 구상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고한말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지휘했던 신민회(新民會)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민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가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교육ㆍ언론ㆍ산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게 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약 3년간 그가 주도했던 신민회 운동은 비록 나라를 지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일제 치하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

  1910년 5월 통합 교민단체로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공립협회를 비롯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가 합쳐진 조직이었다.

 사진출처 : http://www.archives.go.kr이로써 해외의 전교민이 도산을 대표자로 하여 하나의 조직으로 결집한 셈이었다.

  국내가 일제 지배 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도산은 해외에 사는 교민들이야말로 현실적인 독립 운동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선 해외 한인의 총단결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여겼다.

  도산은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흥사단은 국내에서 그가 세웠던 청년학우회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훈련단체였다.

  흥사단은 미국에 본부를 두었는데3ㆍ1운동 후에는 중국과 국내에도 회원을 확보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은 약소 민족들에게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해였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담이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교민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는데이에 도산은 아직 그 시기가 아님을 말하고 좀 더 실력배양에 노력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3ㆍ1운동 소식을 접하자 도산은 일제의 총칼을 무릅쓰고 맨손으로 총궐기한 국내 동포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에 착수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는 국민회의대표 자격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1919년 5월말 상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그곳에도 이미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도산은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도산은 당초 정부 형식이 아닌 정당 형식의 독립당 결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은 기정 사실로 되어 있었고, 청년들은 그의 취임을 강력히 원했다.

  도산은 아직 명의상의 정부에 불과한 임시정부 체계 갖추는 데 전력을 쏟았다.

국민회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정부청사를 얻고 각료로 추대된 각지의 인물들을 불러 모았으며 독립신문 발간, 독립운동 방략작성을 주도했다.

상해 임시정부 외에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정부와서울 한성정부의 구성이 계획돼있어 그 통합이 시급했다.

  도산은 3개월에 걸친 헌신적인 노력 끝에 결국 9월에 들어 통합을 이루어냈다.

  통합 임정의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 각부 총장들이 차례로 취임하고 대통령 이승만까지 합류함으로써임정은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추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이동휘 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다.

도산의 적극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먼저 이동휘가 임정을 떠났으며이승만도 미국으로 떠났다.

  도산은 임시정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전체 독립 운동가가 한번 크게 모여 의견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임정을 사퇴하고 국민대표회 개최를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 갈등으로 끝내 유회되고 말았다.

  도산의 주도로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발히 추진되다가 실패로 끝나, 1920년대 말 중국 한국독립 운동계는결국 민족주의자들의 한국독립당과사회주의자들의 한국 독립운동자동맹으로 나뉘어지고 말았다.

  한국독립당은 상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우리 나라 민족주의 정당이었는데도산계(서북파, 흥사단계)와 이동령계(기호파, 임정계)를 주축으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28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도산은 기다리던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대일전선 통일동맹을 추진하던 그는 윤봉길 의거의 여파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약력   1897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가입1898년 평양 쾌재정 연설로 명성 얻음1902년 미국 유학1903년 샌프란시스코 상항한인회, 공립협회 조직1905년 서재필, 윤치호 등과 을사조약 반대운동   1907년동경을 거쳐 국내 귀국이승훈, 김구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1908년 평양 대성학교 설립 1909년 윤치호 등과 청년학우회 결성안중근 의사 의거 배후 혐의 체포혐의불충분 석방   1910년 국외 망명중국 청도 독립운동가 회의 개최   1911년 재러한인사회 확인 후 미국으로 건너감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조직1913년 흥사단 창립1917년 멕시코와 쿠바 한인사회 방문1918년 하와이 한인사회 순방, 이승만 등 만남  1919년 3·1 운동 후 서재필, 이승만과 독립운동 방법 논의3·1 독립 선언 찬동 포고문 발표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 서리 선임   1921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 조직임정 개조론을 주장, 개조파의 지도자   1922년 김구, 이유필, 신익희 등과 한국노병회 창립   1923년 국민대표자회의 개최, 부의장 선출임시정부 내무부장 김구의 국민대표회의 불법화로 강제 해산대독립당 결성을 주장하여 민족파, 공산당, 아나키스트 연대 주도이상촌 건설계획 수립  1924년 난징에 동명학원 설립1925년 미주 동포사회 순방대동단결과 통일 역설1926년 길림성과 간도 순방이상촌 건설 추진, 실패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관련, 상해 일본 경찰에 체포국내 압송, 서대문형무소 대전형무소 복역   1935년 간경화, 폐렴 등 지병으로 대전형무소 가출옥지방순회 강연 후 은거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이광수, 주요한 등과 서대문형무소 수감간질환과 폐질환 악화 보석 출감병세 위독, 경성제국대학병원 입원   1938년 합병증으로 사망망우리 공동묘지 안장  흥사단 링크 http://www.yka.or.kr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고국에서 교사가 되는 것이다.

1908년 대성학교를 설립하여잠자는 나라의 청년들을 가르치고 일깨웠답니다.

민족의 독립운동가이자사상가이며 교육자인도산 안창호 선생.어제가 그분의 78주기라고 하네요..^^진심을 담아 추모합니다.

10평점리뷰보기 "민족의 큰스승" 으로 기억된 도산 안창호 선생.나 역시 그분의 이름 석자와 호 그리고 그의 업적을 간단하게나마역사시간에 배웠고, 책으로도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막상 그분의 짧지만 강한60여년의 생에 대해서는 알고있는게 얼마 없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분의 탄생에서 죽음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선택하였다.

 우선 책의구성쪽으로 보자면,우리가 간단하게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좋았다.

중간 중간 책에서 팁으로 따로 관련된 이야기들을풀어 놓은것 또한 좋았다.

제목의 크기와 여백이 있는 책이라 확실히 어린 청소년 친구들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을듯 하다.

 도산이라는 호가 고향마을인'도롱섬'에서 나왔던 것인지는 미쳐 몰랐었는데 이번에 알게 되었다.

원래 이름이 치삼이었는데열살때 서당에 다니면서 창호로바꾸었다는것도 처음 알았다.

이밖에 장남안필립씨는 할리우드 진출 1호 한국인이었고, 장녀안수산씨는 미군 해군 최초의 여성포격전술장교로,해군 특수부대 대위로 활동하셨단다.

 기억에남는것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과,꾸준히 교육의 중요성을강조하셨던것과,훌륭한 연설과 함께 청중들을 끌어안는 리더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방법을 정하고(목표를 정하고),그 실행 방법을 체계적으로 세워 꾸준히 실천하며 민족이 나아갈 바를 일깨우고 미래를 항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1세기전의 사람인데 그야말로 21세기에 맞는 리더십을 보인 것이다.

 이책에서기억남는 키워드가 있다면,"무실역행","충의용감","주인정신","애기애타"가 아닐까 싶다.

그 중"애기애타(愛己愛他)"야 말로 21세기 꼭 필요한 리더십이라고 본다.

말 그대로 자기를 사랑하듯 다른 사람도 사랑하라라는 뜻이다.

사랑이 부족한 21세기를 살고 있는지라그런가...가장와닿았던 문구이다.

옛날에 "나를 따르라!" 하고 무작정 리더가 한 무리를 이끌던 권위적인 시대가 아니라,서로 의견을 나누고 구성원들의 존중과 함께 서로 함께 움직이는 시대에"애기애타"야 말로 가장 필요한정신인듯 싶다.

 p189"생각이 같다고 해서 성격도 나와 같다고 여기지 말고, 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마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따로 있는 법이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은 개개인 모두가 개성을 지니고 그 쓰임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데,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무시하거나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사랑과 화합으로 이끌어 나가길바라는게 아닐까 싶다.

 도산  어록비 中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이 서평은 한우리서평단원으로써 쓴 글입니다.

 안창호 리더십작가유한준출판북스타발매2013.09.10평점리뷰보기 "민족의 큰스승" 으로 기억된 도산 안창호 선생.나 역시 그분의 이름 석자와 호 그리고 그의 업적을 간단하게나마역사시간에 배웠고, 책으로도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막상 그분의 짧지만 강한60여년의 생에 대해서는 알고있는게 얼마 없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분의 탄생에서 죽음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선택하였다.

 우선 책의구성쪽으로 보자면,우리가 간단하게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좋았다.

중간 중간 책에서 팁으로 따로 관련된 이야기들을풀어 놓은것 또한 좋았다.

제목의 크기와 여백이 있는 책이라 확실히 어린 청소년 친구들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을듯 하다.

 도산이라는 호가 고향마을인'도롱섬'에서 나왔던 것인지는 미쳐 몰랐었는데 이번에 알게 되었다.

원래 이름이 치삼이었는데열살때 서당에 다니면서 창호로바꾸었다는것도 처음 알았다.

이밖에 장남안필립씨는 할리우드 진출 1호 한국인이었고, 장녀안수산씨는 미군 해군 최초의 여성포격전술장교로,해군 특수부대 대위로 활동하셨단다.

 기억에남는것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과,꾸준히 교육의 중요성을강조하셨던것과,훌륭한 연설과 함께 청중들을 끌어안는 리더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방법을 정하고(목표를 정하고),그 실행 방법을 체계적으로 세워 꾸준히 실천하며 민족이 나아갈 바를 일깨우고 미래를 항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1세기전의 사람인데 그야말로 21세기에 맞는 리더십을 보인 것이다.

 이책에서기억남는 키워드가 있다면,"무실역행","충의용감","주인정신","애기애타"가 아닐까 싶다.

그 중"애기애타(愛己愛他)"야 말로 21세기 꼭 필요한 리더십이라고 본다.

말 그대로 자기를 사랑하듯 다른 사람도 사랑하라라는 뜻이다.

사랑이 부족한 21세기를 살고 있는지라그런가...가장와닿았던 문구이다.

옛날에 "나를 따르라!" 하고 무작정 리더가 한 무리를 이끌던 권위적인 시대가 아니라,서로 의견을 나누고 구성원들의 존중과 함께 서로 함께 움직이는 시대에"애기애타"야 말로 가장 필요한정신인듯 싶다.

 p189"생각이 같다고 해서 성격도 나와 같다고 여기지 말고, 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마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따로 있는 법이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은 개개인 모두가 개성을 지니고 그 쓰임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데,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무시하거나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사랑과 화합으로 이끌어 나가길바라는게 아닐까 싶다.

 도산  어록비 中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이 서평은 한우리서평단원으로써 쓴 글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고국에서 교사가 되는 것이다.

1908년 대성학교를 설립하여잠자는 나라의 청년들을 가르치고 일깨웠답니다.

민족의 독립운동가이자사상가이며 교육자인도산 안창호 선생.어제가 그분의 78주기라고 하네요..^^진심을 담아 추모합니다.

.?안창호선생 부부는 한국인 부부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안수산은 LA에서 선생의 3남 2녀 중 셋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http://blog.naver.com/nonepapa/220667618132??? ?? ??? ???? ???, ?? ???..???(???, 1878- 1938) ? ??(??) ?? ?????, ????? ??(???) ? ???(???)...blog.naver.com-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미 해군에 입대했고, 해군 역사상 첫 여성장교로 복무하기도 했다.

 ?- 당시 미국 사회에서 ‘비백인’, 특히 아시아계 이주민은 사회적 차별 탓에 변변한 일자리조차 얻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녀 역시 처음 해군에 지원했을 땐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했다.

?- 하지만 재도전했다,이유는 미국이 일본에 승리해 한국이 독립국가가 되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한인 이민 1세대의 독립운동을 지켜봤고,?미국인으로서의 애국심과 함께 ??강한 반일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 - 입대후 그녀는 여성 최초로 포격술 장교 자리에 올랐지만 ‘키 작은 아시아 여성’이라는 편견에 늘 부딪혀야만 했다.

인종차별 탓에 6개월 동안 암호해독 업무에서 배제되기도 했으나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암호해독가로 활약했다.

 - 1945년 종전 후에는 해군을 퇴직하고 국가안보국(NSA) 비밀정보 분석 요원으로 변신했다.

300명 이상의 요원을 거느린 씽크탱크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 1947년 엔 해군 정보장교로 재직할 때 사귄 아일랜드계 미국인 프랜시스 커디와 결혼했다.

[안창호] 근본적 원인은 ?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고, 거주지인 버지니아 주에‘인종 간 결혼 금지법(anti-miscegenation laws)'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 - 은퇴 후엔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했다.

2006년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아시안 아메리칸 저스티스 센터에서 주는 ‘제10회 미국 용기상’을 수상했고,2016년엔 ?타임지가 선정한 '이름 없는 여성 영웅(history unsung women)'에 포함됐다.

 - 타임지는 그녀가 “신뢰할 수 있는 용감한 장교이자,늘 인종차별을 겪었음에도 미국을 위해 봉사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한 세대를 대표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 2015년 6월25일 100세 일기로 별세했다.

???2. 안필립?(安必立, 1905-1978)??- 한국계 미국인 영화배우 안필립이 그녀의 오빠다.

도산 안창호의 맏아들이고..?? - 헐리웃에 진출한 최초 아시아계 배우였고 70년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TV시리즈 ‘쿵후’에서 주인공 사부로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있다.

?- 안수산은 방송에 출연해 ?“ 아버지(안창호)는 필립이 배우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걸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드라마가 저급한 문화가 아닌 위대한 예술이라고 내다 본 안목이 있으셨던 것” 이라며 필립 안이 배우가 되는 것에 안창호 선생이 힘이 되었음을 설명했다.

   ?- 안필립의 동생 안필선(필슨 안 Philson Ahn)도 영화배우였으며,하워드 휴즈 항공 부사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3. 안필영(?Ralph Ahn, 1926- )?-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이자 그녀의 남동생이다.

아버지를 한번도 뵌 적이 없다고 하며,현재 91세로 LA에 살고 계신다고 한다.

 ?????안필영, 안필선, 안수산- 큰누나 안수산이 복부했던 해군에서 ?형 필선과 함께 미국군인으로 군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혜련 여사?안필영이 전수받은 이헤련여사의 건국훈장 애족장??- 1963년 가족과 함께 서울 공동묘지 망우리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기 위해,2008년 어머니 이혜련 여사 훈장전수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 안창호 선생의 다섯자녀 중 세분은 이미 사망하셨고,둘째 딸 안수라는 근황을 알 수 없기 때문에안필영선생이 근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시다.

???4. 알려지지 않은 여성 영웅..???-안창호-???*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안창호-? ??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안창호-*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안창호-*아름다운 이성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얼굴을 보고 싶거든 정면으로당당하게 보고 옆에서 엿보지 마라.-안창호-*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매끈한 돌이나 거친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내 성격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어리석은 생각이다.

-안창호-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 만한 도덕력을 겸하여갖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해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 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포함시키는 것보다 우 정 있는 2천만을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득일 것이다.

내가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동양의 평화와 일본의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 -안창호-????1; color: rgb(55, 58, 60);">안창호 건국훈장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강우규김구김규식김좌진김창숙민영환서재필손병희신익희쑨원쑹메이링안중근안창호여운형오동진윤봉길이강년이승만이승훈이시영이준임병직장제스조만식조병세조소앙천궈푸천치메이최익현한용운허위박정희  이름안창호아호도산(島山)출생년월일1878년 11월 9일사망년월일1938년 3월 10일출생지평안남도 강서군사망지경상남도 부산부(現 부산광역시)활동분야정치, 사회, 교육업적독립운동, 민족계몽운동,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가족아버지 안흥국, 어머니 제안 황씨, 부인 이혜련, 장남 필립 안, 차남 안필선, 삼남 안필영, 장녀 안수산, 차녀 안수라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誠實)을 잃었거든 통회(痛悔)하라.한평생 정직과 성실을 강조하며 살아간 당대 최고의 신사이자, 민족과 청년을 진실로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교육자.대한민국 비폭력 자강, 교육계 독립운동가의 독보적 원탑이라고 불릴만한 최고의 교육자 안창호(安昌浩, 1878.11.9

1938.3.10)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이신 분으로 호는 도산(島山) [1] 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셨다.

 종교는 개신교 중 장로교다 [2]https://www.yka.or.kr/html/about_dosan/life_achievement.asp?? ???? ??? ?? ? ???www.yka.or.kr1902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리버사이드에서 각종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고학생활을 하면서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 등과의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1907년 귀국,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계몽 운동을 펼쳤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그의 뛰어난 웅변은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1908년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김좌진,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하지만 일제 탄압이 심해져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서북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안창호는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양성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과 같은 급진파는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항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안창호는 실력양성운동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다시 도미,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1913년 5월 13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했다.

기본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다.

이 후 흥사단은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서울 동숭동을 거점으로 활동 중이다.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도산은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계속 하다가 3.1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설립되려 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그리고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상해에서 임정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6141"??? ??, ??? ???? ???" - ?????? ??? ????. ?? 70?. ??? 8? 15? ??? ?. ???? ???? ???? ? ?? ???? ? ??? ??? ?????. ?? ...www.ohmynews.com 【1919. 8. 25. 상하이에서】구미위원부 이승만 각하“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은 각하가 집정관 총재 직명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실 것이요,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려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답장】<1919. 8. 26. 워싱턴에서>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 씨“우리가 정부 승인을 얻으려고 전력하는데,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사정을 발표한 까닭에,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한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워싱턴 이승만1932년에 체포되어 [8] 국내에 압송, 5년 간 수감되었다가 출옥하였고, 고향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또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1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건강 악화로 출소 후 경성제국대학교 부속 병원에 입원했으나, 61세의 일기로 1938년 3월 10일 간경화로 별세하였다.

위인전에서 보통 자주나오는 그의 유언은 "목인아, 목인 [9] 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별세한 직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서울특별시에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부인 이혜련 여사와 도산공원에 합장되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3/06/0200000000AKR20160306047800075.HTML?? ??? ??, 1902? ???? ??? ?? ???? "??? ?? ? ?? ??? ???? ? ?" ???? ??? ?? '?? ??' ???? ?? ?? : ?www.yonhapnews.co.kr 안창호의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민족 실력양성"이라는 노선이 지금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설립한 흥사단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단 이광수가 실력양성론을 민족개조론이라는 병크로 매도한 점에서 실력양성론이 까이는 감도 있다.

하지만 안창호는 그런 이광수의 행보를 당연히 좋지 않게 보았고, 감옥에서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11] 그리고,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독립국가' 라는 전제하에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직접 몸소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결코 이광수같이 '총독부에 순응하는 자치론' 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것을 염두해두자. 북한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안창호도 자치론자였다며 까지만, 일단 이광수는 자치론 이상은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노선이었고, 안창호는 언젠가 미래에는 독립해야 한다는 노선이었다.

아마도 안창호가 옥고를 겪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이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12]http://www.ahnchangho.or.kr/site/index.php? ?? ??? ?????? ?www.ahnchangho.or.kr현재 공식적으로 작사가 불명으로 되어있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안창호라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안창호의 비서와 자녀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증언들만 있고 구체적 사료가 없어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미 1955년도에 정부에서 조직한 '애국가 작가 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적이 있으나, 규명불가로 결론을 내렸다.

이 문제는 그것이 알고 싶다 946회 '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2014-07-12) 편에서 다뤘다.

안창호 선생의 장녀인 안수산 여사는 1915년 LA 출생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 소위로 입대하여 이후 포격술 장교(대위)로 복무하였다가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전역 후에는 1959년 까지 계속 중앙참고부서의 책임자로 복무하였다.

 [13] LA 카운티 정부는 2015년 3월 10일을 안수산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후 6월 24일 자택에서 수면 중 별세하였다.

검사(이하 검) : "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안창호(이하 안) : "그렇다.

[안창호] 최선의 선택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는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 :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안 :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검 :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안 :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검 : "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안 :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91215231"??? ???? ?? ???, ?? ??"?? ??? ???? ? ??? ???? ???? ???? ?? ??? ??(1878-1938)???? ????? ???. ???(??? ???)? ...news.khan.co.krhttp://newstapa.org/842????? ???? ??? ??????????? ???? ??? ??????newstapa.org  이 때 안중근 의사가 안창호 선생을 초청해 강연을 청한 적이 있어서안창호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고향마을에방문하여 친분을 갖게 되었죠.안중근 의사가 항일무장활동 하기 이전에안창호 선생은 이미 민족지도자로 유명인사였구요.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냥 알고 지낸사이 정도 ㅎㅎ같은 안씨 <순흥 안씨>는 맞는데살짝 달라요

안중근은 순흥 안씨 제1계파의 하나인 <참판공파 30세손>안창호는 순흥 안씨 제 1계파의 하나인 <참의공파> 후손그래도 같은 <순흥 안씨>이니좀 더 끌렸을 것 같네요

안중근 스페셜 4부작으로 끝내려 했는데

8부작까지 가야겠네요

  오픈캐스트 > 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 | ceo_zeushttp://opencast.naver.com/HD906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학습|구독자:960|구독하기 안중근 스페셜(1) 1

4부급한 성격 덕에 암살성공 !! 무모한 낭만자객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 안중근 안창호 무슨 관계니?? -안중근 가계도와 -안중근의 <이토 히루부미>암살과정.-안중근 어머니 왈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더보기 2016.07.18 10:49선물 팡팡

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학습|구독자:960|구독하기 안중근 스페셜(1) 1

4부급한 성격 덕에 암살성공 !! 무모한 낭만자객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 안중근 안창호 무슨 관계니?? -안중근 가계도와 -안중근의 <이토 히루부미>암살과정.-안중근 어머니 왈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더보기 2016.07.18 10:49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도산 안창호-   도산(島山) 안창호 (1878 ? 1938)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동영상KBS ??? ?? ?? ??? ?? ?4?? ?? ? ??? ??? ??? ?? ?? ??? ??? ??. ???? ???175?? ????? ???? ??? ??? ?? ??? ?...www.youtube.com도산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02년 유학을 위해 도미하여 그곳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섰다.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에 창립되어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 당시로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힘있는 단체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도산이 미국에 있던 5년 동안 국내정세는 날로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심하였으며1907년 초 귀국 길에 올랐다.

  이 때 이미 국내에서 전개할 구국운동의 새로운 목표와 방법론과 조직형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귀국 즉시 도산은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갑 등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찾았다.

  그는 새로운 구상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고한말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지휘했던 신민회(新民會)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민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가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교육ㆍ언론ㆍ산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게 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약 3년간 그가 주도했던 신민회 운동은 비록 나라를 지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일제 치하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

  1910년 5월 통합 교민단체로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공립협회를 비롯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가 합쳐진 조직이었다.

 사진출처 : http://www.archives.go.kr이로써 해외의 전교민이 도산을 대표자로 하여 하나의 조직으로 결집한 셈이었다.

  국내가 일제 지배 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도산은 해외에 사는 교민들이야말로 현실적인 독립 운동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선 해외 한인의 총단결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여겼다.

  도산은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흥사단은 국내에서 그가 세웠던 청년학우회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훈련단체였다.

  흥사단은 미국에 본부를 두었는데3ㆍ1운동 후에는 중국과 국내에도 회원을 확보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은 약소 민족들에게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해였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담이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교민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는데이에 도산은 아직 그 시기가 아님을 말하고 좀 더 실력배양에 노력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3ㆍ1운동 소식을 접하자 도산은 일제의 총칼을 무릅쓰고 맨손으로 총궐기한 국내 동포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에 착수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는 국민회의대표 자격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1919년 5월말 상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그곳에도 이미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도산은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도산은 당초 정부 형식이 아닌 정당 형식의 독립당 결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은 기정 사실로 되어 있었고, 청년들은 그의 취임을 강력히 원했다.

  도산은 아직 명의상의 정부에 불과한 임시정부 체계 갖추는 데 전력을 쏟았다.

국민회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정부청사를 얻고 각료로 추대된 각지의 인물들을 불러 모았으며 독립신문 발간, 독립운동 방략작성을 주도했다.

상해 임시정부 외에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정부와서울 한성정부의 구성이 계획돼있어 그 통합이 시급했다.

  도산은 3개월에 걸친 헌신적인 노력 끝에 결국 9월에 들어 통합을 이루어냈다.

  통합 임정의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 각부 총장들이 차례로 취임하고 대통령 이승만까지 합류함으로써임정은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추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이동휘 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다.

도산의 적극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먼저 이동휘가 임정을 떠났으며이승만도 미국으로 떠났다.

  도산은 임시정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전체 독립 운동가가 한번 크게 모여 의견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임정을 사퇴하고 국민대표회 개최를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 갈등으로 끝내 유회되고 말았다.

  도산의 주도로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발히 추진되다가 실패로 끝나, 1920년대 말 중국 한국독립 운동계는결국 민족주의자들의 한국독립당과사회주의자들의 한국 독립운동자동맹으로 나뉘어지고 말았다.

  한국독립당은 상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우리 나라 민족주의 정당이었는데도산계(서북파, 흥사단계)와 이동령계(기호파, 임정계)를 주축으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28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도산은 기다리던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대일전선 통일동맹을 추진하던 그는 윤봉길 의거의 여파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약력   1897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가입1898년 평양 쾌재정 연설로 명성 얻음1902년 미국 유학1903년 샌프란시스코 상항한인회, 공립협회 조직1905년 서재필, 윤치호 등과 을사조약 반대운동   1907년동경을 거쳐 국내 귀국이승훈, 김구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1908년 평양 대성학교 설립 1909년 윤치호 등과 청년학우회 결성안중근 의사 의거 배후 혐의 체포혐의불충분 석방   1910년 국외 망명중국 청도 독립운동가 회의 개최   1911년 재러한인사회 확인 후 미국으로 건너감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조직1913년 흥사단 창립1917년 멕시코와 쿠바 한인사회 방문1918년 하와이 한인사회 순방, 이승만 등 만남  1919년 3·1 운동 후 서재필, 이승만과 독립운동 방법 논의3·1 독립 선언 찬동 포고문 발표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 서리 선임   1921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 조직임정 개조론을 주장, 개조파의 지도자   1922년 김구, 이유필, 신익희 등과 한국노병회 창립   1923년 국민대표자회의 개최, 부의장 선출임시정부 내무부장 김구의 국민대표회의 불법화로 강제 해산대독립당 결성을 주장하여 민족파, 공산당, 아나키스트 연대 주도이상촌 건설계획 수립  1924년 난징에 동명학원 설립1925년 미주 동포사회 순방대동단결과 통일 역설1926년 길림성과 간도 순방이상촌 건설 추진, 실패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관련, 상해 일본 경찰에 체포국내 압송, 서대문형무소 대전형무소 복역   1935년 간경화, 폐렴 등 지병으로 대전형무소 가출옥지방순회 강연 후 은거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이광수, 주요한 등과 서대문형무소 수감간질환과 폐질환 악화 보석 출감병세 위독, 경성제국대학병원 입원   1938년 합병증으로 사망망우리 공동묘지 안장  흥사단 링크 http://www.yka.or.kr.    신사동/도산사거리 맛집 신사쭈꾸미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실로 오랫만에 도산공원을 찾았습니다.

 울 딸래미 어릴때 유모차 끌며 자주 다녔던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도심 속 울창한 숲을 선사하는 곳으로 신사동/압구정 명소라 부르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충의용감(忠義勇敢)을 기본 정신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우고 민족국가 수립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입니다.

 여기서 무실역행이란 참되고 성실하게 힘써 실행하는 것을 말하며 충의용감이란 나라를 위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이르는 말입니다.

     신사쭈꾸미에서 배부르게 쭈꾸미 양념숯불구이와 쭈꾸미볶음을 드신 울 마눌님과 딸래미와 함께 신사동/압구정 명소 도산공원에 걸어갔습니다.

    도산공원의 입구 모습입니다.

 도산공원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기념관과 도산 안창호 선생을 모신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도산공원을 신사동/압구정 명소라 부르는 것이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으나 강남 도심에 역사적 인물의 기념관과 묘역이 조성된 공원이 있기에 오히려 도산공원을 신사동/압구정 명소라 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속 도산공원 입구에서 쭉 뻗은 길의 끝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부인과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도산공원 입구에 들어서서 좌측에 있는 건물이 도산 안창호기념관 입니다.

 도산 안창호기념관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활동 사료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어 울 딸래미 교육 상 같이 보고 싶었으나 마침 일요일은 휴관이어서 기념관안을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념관 외벽에 1973년 개장 당시의 사진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도산공원 조성 모습을 보는 것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끌었던 사진 한장. 도산공원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을 중심으로 찍은 항공사진인데요,, 공원 내부는 말할것도 없고 주변까지 허허벌판 인지라 지금의 주변 모습과 비교하면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개장 당시 텅빈 벌판같았던 도산공원이 지금은 울창한 나무가 빽빽한 도심속 숲이 되었습니다.

 잘자란 나무가 주는 그늘의 시원함이 일요일 한 낮의 뜨거움을 식혀주었고 여기저기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은 지나는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공원을 빙 둘러 조성된 산책길을 걷다보면 간단한 운동기구들도 만나게 되고 산책길이 우레탄 포장길과 황토길로 나뉘는 갈래길도 만나며 쉬었다 갈 수 있는 벤치들도 곳곳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도산공원 한가운데 서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상. 사진보다 실제 모습은 훨씬 크게 세워져 있습니다.

 동상 속 도산 안창호 선생이 바라보는 곳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저 멀리 뭔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도산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무실역행'과 '충의용감'의 도산 정신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무궁화가 아름답게 핀 길을 따라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역이 있습니다.

 묘역에 단이 조성된 것으로보아 이 곳에서는 매년 선생의 기일을 맞아 제례가 진행되는 듯 합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시민들이 시원한 그늘에 앉거나 누워 있는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다들 여유있게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가족들도 많지만 연인들의 데이트 모습도 곧잘 보이고,, 눈 앞의 풍경들이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도산공원을 한바퀴 돌고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객를 돌려 다시한번 신사동/압구정 명소 도산공원을 바라 봅니다.

 '성실하게 힘써 실천해라.그리고 용기있게 나라를 사랑해라...' 그렇게 도산 안창호 선생은 오늘도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이상 신사동/압구정 명소 도산공원에 대한 포스팅을 마칩니다.

  -도산공원사거리가 왜 도산공원사거리인지,도산공원이 어떤 공원인지 모르는 분들이 많이 보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공감,덧글은 필수!!감사합니다.

                  이 때 안중근 의사가 안창호 선생을 초청해 강연을 청한 적이 있어서안창호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고향마을에방문하여 친분을 갖게 되었죠.안중근 의사가 항일무장활동 하기 이전에안창호 선생은 이미 민족지도자로 유명인사였구요.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냥 알고 지낸사이 정도 ㅎㅎ같은 안씨 <순흥 안씨>는 맞는데살짝 달라요

안중근은 순흥 안씨 제1계파의 하나인 <참판공파 30세손>안창호는 순흥 안씨 제 1계파의 하나인 <참의공파> 후손그래도 같은 <순흥 안씨>이니좀 더 끌렸을 것 같네요

안중근 스페셜 4부작으로 끝내려 했는데

8부작까지 가야겠네요

  오픈캐스트 > 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 | ceo_zeushttp://opencast.naver.com/HD906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학습|구독자:960|구독하기 안중근 스페셜(1) 1

4부급한 성격 덕에 암살성공 !! 무모한 낭만자객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 안중근 안창호 무슨 관계니?? -안중근 가계도와 -안중근의 <이토 히루부미>암살과정.-안중근 어머니 왈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더보기 2016.07.18 10:49선물 팡팡

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학습|구독자:960|구독하기 안중근 스페셜(1) 1

4부급한 성격 덕에 암살성공 !! 무모한 낭만자객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 안중근 안창호 무슨 관계니?? -안중근 가계도와 -안중근의 <이토 히루부미>암살과정.-안중근 어머니 왈 "딴 맘 먹지 말고 죽어라"...더보기 2016.07.18 10:49 .    신사동/도산사거리 맛집 신사쭈꾸미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실로 오랫만에 도산공원을 찾았습니다.

 울 딸래미 어릴때 유모차 끌며 자주 다녔던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도심 속 울창한 숲을 선사하는 곳으로 신사동/압구정 명소라 부르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충의용감(忠義勇敢)을 기본 정신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우고 민족국가 수립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입니다.

 여기서 무실역행이란 참되고 성실하게 힘써 실행하는 것을 말하며 충의용감이란 나라를 위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이르는 말입니다.

     신사쭈꾸미에서 배부르게 쭈꾸미 양념숯불구이와 쭈꾸미볶음을 드신 울 마눌님과 딸래미와 함께 신사동/압구정 명소 도산공원에 걸어갔습니다.

    도산공원의 입구 모습입니다.

 도산공원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기념관과 도산 안창호 선생을 모신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도산공원을 신사동/압구정 명소라 부르는 것이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으나 강남 도심에 역사적 인물의 기념관과 묘역이 조성된 공원이 있기에 오히려 도산공원을 신사동/압구정 명소라 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속 도산공원 입구에서 쭉 뻗은 길의 끝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부인과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도산공원 입구에 들어서서 좌측에 있는 건물이 도산 안창호기념관 입니다.

 도산 안창호기념관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활동 사료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어 울 딸래미 교육 상 같이 보고 싶었으나 마침 일요일은 휴관이어서 기념관안을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념관 외벽에 1973년 개장 당시의 사진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도산공원 조성 모습을 보는 것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끌었던 사진 한장. 도산공원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을 중심으로 찍은 항공사진인데요,, 공원 내부는 말할것도 없고 주변까지 허허벌판 인지라 지금의 주변 모습과 비교하면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개장 당시 텅빈 벌판같았던 도산공원이 지금은 울창한 나무가 빽빽한 도심속 숲이 되었습니다.

 잘자란 나무가 주는 그늘의 시원함이 일요일 한 낮의 뜨거움을 식혀주었고 여기저기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은 지나는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공원을 빙 둘러 조성된 산책길을 걷다보면 간단한 운동기구들도 만나게 되고 산책길이 우레탄 포장길과 황토길로 나뉘는 갈래길도 만나며 쉬었다 갈 수 있는 벤치들도 곳곳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도산공원 한가운데 서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상. 사진보다 실제 모습은 훨씬 크게 세워져 있습니다.

 동상 속 도산 안창호 선생이 바라보는 곳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저 멀리 뭔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도산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무실역행'과 '충의용감'의 도산 정신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무궁화가 아름답게 핀 길을 따라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역이 있습니다.

 묘역에 단이 조성된 것으로보아 이 곳에서는 매년 선생의 기일을 맞아 제례가 진행되는 듯 합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시민들이 시원한 그늘에 앉거나 누워 있는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다들 여유있게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가족들도 많지만 연인들의 데이트 모습도 곧잘 보이고,, 눈 앞의 풍경들이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도산공원을 한바퀴 돌고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객를 돌려 다시한번 신사동/압구정 명소 도산공원을 바라 봅니다.

 '성실하게 힘써 실천해라.그리고 용기있게 나라를 사랑해라...' 그렇게 도산 안창호 선생은 오늘도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이상 신사동/압구정 명소 도산공원에 대한 포스팅을 마칩니다.

  -도산공원사거리가 왜 도산공원사거리인지,도산공원이 어떤 공원인지 모르는 분들이 많이 보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공감,덧글은 필수!!감사합니다.

                 죽사(竹史) 안창호 의사는 천안, 전의, 공주만세운동 주동인물로 1919년 공주에서 5월 20일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안창호 의사는 1903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감리교 공주지방 윌리암 선교사 어학 선생으로 충남과 인연이 되었다.

 안창호 의사는 1883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출신이다.

1906년에 공주영명학교를 설립하는 윌리암 선교사를 도우면서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공주읍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윌리암 선교사 어학선생으로 1911년부터 천안지역을 순회하면서 천안지역의 정서를 잘 파악한다.

천안읍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1915년 12월 23일에 파송 받으면서 천안지방 활동이 정착되었다.

이미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안태국 선생들과 구국운동 자금조달에 협력해 온 터에 천안지방 선교활동은 민족자주독립 정신 개명 의식화운동이 되었다.

1915년 당시 일제는 모든 단체 활동을 단속하고 지도자들을 감시하는 철저한 헌병 감찰 통치를 했다.

그래도 교회 활동은 자유를 주었다.

천안지방은 감리교 선교지역으로 유관순이 다니는 갈전(병천) 지령리교회, 수신 장명교회, 북면 매송교회, 직산교회, 양대교회, 성환 율금리교회가 매일학교, 주일학교를 열고 한글과 조선 역사를 교육했다.

천안지방감리교회 지도자들이 천안 영진, 갈전 진명, 수신 장명, 목천 보명, 입장 광명학교를 설립하고 개명 교육에 앞장섰다.

천안읍감리교회 담임 안창호 목사는 천안지방 개명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선구자였다.

  한글을 가르치고 영어를 배우게 하고 이스라엘 민족 역사를 통해 한국민족 역사 정신을 일깨웠다.

서릿말 천안읍교회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천안역, 직산역이 개업되면서 전의, 평택, 안성, 진천교회까지 연결하였다.

안창호 목사의 큰 딸 안예나가 유관순과 같이 이화학교 짝꿍이었다.

유관순 가족들은 천안읍교회 안예나 가족들과 형제들같이 어울렸다.

안창호 목사의 투철한 민족 자주독립 정신은 하와이 친구들과 연락하면서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서울만세운동을 기화로 천안지역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극비리에 교회들 조직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천안 목천 유림 지도자들도 합세했다.

목천 헌병대가 가장 가까워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목천 보통학교 학생들 172명이 제일 먼저 만세를 외쳐대며 헌병대 앞을 지나 동네로 쏟아져 나왔다.

김소용, 이규태 학생대표가 추진한 천안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3월 14일 만세거사였다.

한동안 준비됐던 만세거사는 3월 20일 입장ㆍ양대 광부 광명학교만세, 3월 24일 입장 장터만세, 3월 29일 천안읍내장터만세 그리고 4월 1일 아우내장터만세 의거 그리고 전의, 공주, 아산으로 확대되었다.

안창호 의사는 공주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천안에는 얼씬 거리지 못하게 감시 받아 진남포 교회로 강제로 이임하게 된다.

끝내 안창호 의사는 일제 감시에 못 이겨 하와이로 떠났다.

 1925년부터 하와이에서 임시정부의 어려운 재정을 지원하는 거룩한 거사를 추진한다.

미주 하와이 단체연합운동 윤봉길, 이봉창 거사 자금 후원 등 민족을 위해 큰 몫을 했다.

민족해방직후 백범 김구 선생은 안창호 의사를 서둘러 만나 그 고마움을 전하고 기념으로 휘호를 주었다.

安昌鎬 雅正誓海魚龍動 盟山巾巾 木知忠武公 李舜臣 詩 一句 白凡 金九  1; color: rgb(55, 58, 60);">안창호 건국훈장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강우규김구김규식김좌진김창숙민영환서재필손병희신익희쑨원쑹메이링안중근안창호여운형오동진윤봉길이강년이승만이승훈이시영이준임병직장제스조만식조병세조소앙천궈푸천치메이최익현한용운허위박정희  이름안창호아호도산(島山)출생년월일1878년 11월 9일사망년월일1938년 3월 10일출생지평안남도 강서군사망지경상남도 부산부(現 부산광역시)활동분야정치, 사회, 교육업적독립운동, 민족계몽운동,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가족아버지 안흥국, 어머니 제안 황씨, 부인 이혜련, 장남 필립 안, 차남 안필선, 삼남 안필영, 장녀 안수산, 차녀 안수라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誠實)을 잃었거든 통회(痛悔)하라.한평생 정직과 성실을 강조하며 살아간 당대 최고의 신사이자, 민족과 청년을 진실로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교육자.대한민국 비폭력 자강, 교육계 독립운동가의 독보적 원탑이라고 불릴만한 최고의 교육자 안창호(安昌浩, 1878.11.9

1938.3.10)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이신 분으로 호는 도산(島山) [1] 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셨다.

 종교는 개신교 중 장로교다 [2]https://www.yka.or.kr/html/about_dosan/life_achievement.asp?? ???? ??? ?? ? ???www.yka.or.kr1902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리버사이드에서 각종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고학생활을 하면서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 등과의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1907년 귀국,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계몽 운동을 펼쳤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그의 뛰어난 웅변은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1908년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김좌진, 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하지만 일제 탄압이 심해져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서북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안창호는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양성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과 같은 급진파는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항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안창호는 실력양성운동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1년 다시 도미,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1913년 5월 13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했다.

기본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다.

이 후 흥사단은 3.1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서울 동숭동을 거점으로 활동 중이다.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도산은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계속 하다가 3.1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설립되려 하자 모은 성금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그리고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상해에서 임정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6141"??? ??, ??? ???? ???" - ?????? ??? ????. ?? 70?. ??? 8? 15? ??? ?. ???? ???? ???? ? ?? ???? ? ??? ??? ?????. ?? ...www.ohmynews.com 【1919. 8. 25. 상하이에서】구미위원부 이승만 각하“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은 각하가 집정관 총재 직명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실 것이요,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려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답장】<1919. 8. 26. 워싱턴에서>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 씨“우리가 정부 승인을 얻으려고 전력하는데,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고 대통령 명의로 한국 사정을 발표한 까닭에,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한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워싱턴 이승만1932년에 체포되어 [8] 국내에 압송, 5년 간 수감되었다가 출옥하였고, 고향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또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 해 1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건강 악화로 출소 후 경성제국대학교 부속 병원에 입원했으나, 61세의 일기로 1938년 3월 10일 간경화로 별세하였다.

위인전에서 보통 자주나오는 그의 유언은 "목인아, 목인 [9] 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별세한 직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서울특별시에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부인 이혜련 여사와 도산공원에 합장되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3/06/0200000000AKR20160306047800075.HTML?? ??? ??, 1902? ???? ??? ?? ???? "??? ?? ? ?? ??? ???? ? ?" ???? ??? ?? '?? ??' ???? ?? ?? : ?www.yonhapnews.co.kr 안창호의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민족 실력양성"이라는 노선이 지금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설립한 흥사단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단 이광수가 실력양성론을 민족개조론이라는 병크로 매도한 점에서 실력양성론이 까이는 감도 있다.

하지만 안창호는 그런 이광수의 행보를 당연히 좋지 않게 보았고, 감옥에서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하기까지 했다.

 [11] 그리고,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독립국가' 라는 전제하에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직접 몸소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결코 이광수같이 '총독부에 순응하는 자치론' 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것을 염두해두자. 북한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안창호도 자치론자였다며 까지만, 일단 이광수는 자치론 이상은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노선이었고, 안창호는 언젠가 미래에는 독립해야 한다는 노선이었다.

아마도 안창호가 옥고를 겪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이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12]http://www.ahnchangho.or.kr/site/index.php? ?? ??? ?????? ?www.ahnchangho.or.kr현재 공식적으로 작사가 불명으로 되어있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안창호라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안창호의 비서와 자녀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다만, 증언들만 있고 구체적 사료가 없어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미 1955년도에 정부에서 조직한 '애국가 작가 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적이 있으나, 규명불가로 결론을 내렸다.

이 문제는 그것이 알고 싶다 946회 '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2014-07-12) 편에서 다뤘다.

안창호 선생의 장녀인 안수산 여사는 1915년 LA 출생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 소위로 입대하여 이후 포격술 장교(대위)로 복무하였다가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전역 후에는 1959년 까지 계속 중앙참고부서의 책임자로 복무하였다.

 [13] LA 카운티 정부는 2015년 3월 10일을 안수산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후 6월 24일 자택에서 수면 중 별세하였다.

검사(이하 검) : "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안창호(이하 안) :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는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검 :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안 :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검 :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안 :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검 : "너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느냐?"안 :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91215231"??? ???? ?? ???, ?? ??"?? ??? ???? ? ??? ???? ???? ???? ?? ??? ??(1878-1938)???? ????? ???. ???(??? ???)? ...news.khan.co.krhttp://newstapa.org/842????? ???? ??? ??????????? ???? ??? ??????newstapa.org 18846평양 대동강변 국수당(國水塘)으로 이거. 가정에서 한문수학. 매씨(妹氏) 신호(信浩) 태어남.*갑신정변(甲申政變)*한성조약(漢城條約) 체결18868한문 서당에서 수학하는 한편 열 다섯살 때까지 목동 생활. 이 무렵인 1890년 전후 황해도 구월산 만유(漫遊)*이화학당(梨花學堂)창립188911부친 별세 189012평양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거. 서당에서 황해도 안악 출신 청년 선각자인 연상의 필대은(畢大殷)과 교류.189416상경하여 서부 대정동 소재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 이즈음 예수교 장로회 입교. 필대은을 신앙으로 인도함.*동학혁명 발발*2월 김옥균 상해에서 피살*7월 청일전쟁(淸日戰爭) 발발189618구세학당 졸업 후 조교로 복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조부의 주선으로 이석관의 장녀 이혜련(당 13세)과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파혼을 주장하나 관철되지 않음.*2월 아관파천(俄館播遷)*4월 서재필《독립신문》발간*7월 독립협회 결성*11월 독립문 건립189719동생 신호와 약혼녀 혜련을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입학시킴. 독립협회에 가입. 동회(同會)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로 발전함에 따라 필대은 등과 평양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부(關西支部)를 발기. 여름, 평양 감사 조민강 등 수백 군중이 참집한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첫 열변. 18조의 쾌재와 18조의 불쾌를 열거하며 민중의 새로운 자각을 호소함.*경인철도 기공*10월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함18982011월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7대신을 탄핵하고, 6개조의 정치혁신안(政治革新案) 건의.*11월 황국협회가 만민공동회 습격함189921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 설립. 하천 매축 공사로 황무지 개간 사업에 종사.*아편전쟁(阿片戰爭) 발발190224김마리아 외숙 김윤오 주선, 밀러 목사 주례로 서울 제중원(세브란스)에서 이혜련과 결혼(9월 3일). 다음날 부부 동반으로 인천항을 출발, 일본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한 후 도미. 하와이 근해에서 아호를 도산(島山)으로 함.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가정 고용인으로 청소하는 일 등 노사에 종사하며 미국 소학교 통학.*시베리아 철도 완공*5월 서울 개성문 전화개설*8월 국가(國歌) 선정1903259월 23일 재미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 조직, 회장에 피선됨.*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발족190426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 기독교 경영의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수업.*러일전쟁(露日戰爭)1905274월 5일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초대 회장이 됨.11월 공립협회 회관 설립. 11월 20일 순국문판 《공립신보》 발행. 장남 필립(必立) 태어남.*을사5조약(乙巳五條約) 늑결190628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패시픽가에 있는 공립협회의 회관이 불탐. 오클랜드에 임시 본부 설치(이듬해 돌아옴)*3월 한국통감부 초대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부임190729동경 거쳐 환국. 동경 체류 중 한국인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서 애국 웅변. 귀국 후 서울에서 이갑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창립.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평양·서울·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평양 마산동 자기회사(磁器會社) 설립. 이토 히로부미와 회견하고 소위 안도산 내각의 조각(組閣)을 일축함.*1월 국채보상 (國債報償)운동 전개*6월 헤이그 특사 파견*8월 정미7조약 체결190830서북학회 창립. 교육에 몰두하는 한편 각지를 순행(巡行)하며 신민회사업을 의논함.190931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창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중앙총무로 도산을 도와 실무 담당.안중근(安重根) 의사 의거로 서울 용산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만에 석방됨.*10월 29일 안중근 의사 하르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191032통감부의 내각 조직 제의를 다시금 일축하고 4월 7일 행주 출발, 국외 망명의 길을 떠남. 이 때 거국가(去國歌)를 남김. 이갑 등과 위해위(威海衛)·북경·청도 거쳐 상해·블라디보스톡 등지 유랑. 산동성 청도(靑島)에서 독립 운동자들과 합동하고 청도회담을 개최.*'안악(安岳)사건' 발단191133북만 밀산현(密山縣)에 무관학교를 세울 계획이 여의치 못해 러시아·독일·영국 등을 거쳐 미국 뉴욕항에 도착. 191234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 지방총회를 망라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 조직, 초대회장에 선임됨. 한편 민족운동의 핵심체로서 민족성부흥운동을 위한 청년 엘리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 흥사단(興士團) 조직에 착수.《공립신보》를 《신한민보(新韓民報)》로 개제(改題) 속간. 차남 필선(必鮮) 태어남.*소위 105인 사건 검거 선풍191335청년학우회 후신(後身)으로 흥사단 창립. 발기인은 전국 8도를 대표하는 25인의 동지로 함.*윌슨, 미국 대통령에 취임191436대한인국민회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社團法人) 인가를 받음.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이거,장녀 수산(繡山) 태어남.*세계제1차대전 발발191537장녀 수산(繡山) 태어남 (1월 16일)*하와이 교민사회 순회191739송종익. 임준기 등과 함께 북미 실업주식 회사 설립. 주로 멕시코 교민사회 방문하며 대한인국민회 조직 운동 강화.차녀 수라(秀羅) 태어남.*뉴욕서 세계약소민족대표회의 개최*러시아 혁명191941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취임 연통제(聯通制)·독립 운동 방략 제창.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발간.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국총판이 됨.*중국 5.4 운동192042독립 운동 중심 세력의 통합에 주력하는 한편 흥사단 원동위원부(興士團 遠東委員部) 설치. 미국 국회의원 동양 시찰단 일행을 북경에서 맞아 한국 독립 협조를 호소함.*국내 민간 신문 《》, 《동아일보》창간*청산리 대첩*유관순 순국*인도의 간디 반영운동 개시192143임시정부(臨時政府) 세력 통일에 노력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인책사임(引責辭任).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國民代表會)발기.*하와이 태평양회의에 서재필.이승만 참석192244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 발족을 지시. 국민회 분쟁 격화, 하와이 지방 총회 해체하고 하와이 한인 교민단 조직됨.*김규식(金奎植)이 모스크바 극동무산자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192345봄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개최, 동 부회장이 됨. 그러나 동회가 개화파와 창조파로 대립되어 결렬되자 대독립당(大獨立黨) 결성과 독립 운동 근거지 이상촌(理想村) 건설 계획 수립.*김상옥 의사 순국*케말 파샤 대통령 취임192446북중국 만주 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 후보지 탐사. 남경에 동명학원(東明學園)을 설립*<동족에게 고하는 글>작성192648미주에서 다시 중국에 건너가 가을부터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사업 추진.*《동광》지 창간*6.10 만세 사건192749길림에서 군사 행동 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토의중 동지 200여명과 함께 중국 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내 사회 여론이 비등하여 20일 만에 석방.*신간회(新幹會) 조직192850이동녕, 이시형, 김구 등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이때 대공주의(大公主義) 제창. 193153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남경서 토지 매수.*만주사변193254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 정책에 따라 독립 운동 근거지의 건설 계획을 재검토 중인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폭탄사건으로 이날 오후 피체되어 일경에 인도됨. 6월 7일 인천에 호송되어 서울로 압송. 4년 실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 대전 감옥에서 복역. 1935572월 대전 감옥에서 2년 반 만에 가출옥. 지방 순회 후 평남 대보산 송태 산장에 은거. 1937596월 28일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 11월 1일 서대문 형무소 수감. 12월 24일 신병으로 보석 출감. 1938603월 10일 자정 경성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됨. 1962 건국 공로훈장 추서(3.1절) 1969 4월 21일 미국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 별세. 1973 11월 10일 탄신 95주년과 흥사단 창단 6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 649-9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망우리 공동 묘지의 도산 유해와 이혜련 여사 유해를 이장하여 안장함. 1978 9월 27일 탄신 100주년 기념 대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거행. 1988 3월 10일 서거 50주기 추모식을 서울 류관순 기념관에서 거행. 5월 6일부터 15일까지 도산 유품 및 사진 전시회를 도산 회관에서 가짐. 1997 3월 10일 서거 59주기 추모식전에서 거족적으로 도산기념관 건립을 결의하고 추진위원회와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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