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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수녀



2 계명 위반)?우리가 죄를 고백할 대상도 예수님이요,사해주실분도 예수님이요,중보자는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단 한분 입니다.

)?엄연히 우상숭배를 버젓이 하는데도 천국가겠는가? 하나님이 제일 진노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이 우상숭배다.

테레사수녀가 지옥 깊은 불구덩이속에서 형벌을 받고 있다.

?우상숭배자는 결단코 회개치 못하면 지옥이다.

천주교인들이 많은 구제, 헌신, 봉사를 하지만 예수님없는 봉사,헌신,구제를 하고우상숭배를 버젓이 하는데 천국갈 수 있겠는가? 천국간다는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직 주님께 영광!http://cafe.daum.net/ymmch주님께서는 그 연필을 자를 수도 있고 깎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 쓰고 싶으면 쓰시고, 그리고 싶으면 그리실 겁니다.

멋진 그림을 보거나 감동적인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미술도구나 연필을 칭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하여 감탄합니다.

하나님의 작은 몽당연필로 자신을 비유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테레사(Theresa, 1910.08.26.

1997.09.05.) 수녀. 2016년 8월 26일은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는 겸손한 말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몸을 낮추어 사랑을 실천했던 그녀가 태어난 지 107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신의 부름을 듣다테레사 수녀의 원래 이름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iu)'로 1910년 8월 26일 중부유럽과 아테네를 잇는 주요거점 도시인 유고슬라비아 스코프예(Yugoslavia Skopje)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건축업자 겸 수입상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나, 정치사건에 휘말린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졌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천을 팔고, 자수 놓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테레사 수녀의 가족들은 이를 계기로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며 화목한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있는 테레사 수녀] 유년기의 화목했던 가정환경은 테레사 수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훗날 노벨상을 수상한 후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한 의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집에 돌아가 가족을 사랑해주세요." 평소에 가족의 사랑을 자주 강조하고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보살핀 테레사 수녀의 언행은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심이 깊고 영민했으며 12살 때에는 인도에서 수녀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는 18살 때 어머니에게 수녀가 되는 것을 허락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도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아일랜드의 ‘로레타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로레타 수녀원’에서는 많은 수녀들을 교육해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로 파견하여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계 백인의 딸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원에서 1년 동안 기초교육과 영어를 배우고, 19살에 인도의 다르질링(Darjeeling)으로 옮겨 예비 수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본명인 ‘아그네스’ 대신 ‘테레사’라는 세례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16년 동안 인도의 콜카타(Kolkata)에 있는 성 마리아 수녀원의 부속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지리학을 가르치다 교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37년 ‘로레타 수녀원’에서 평생을 보낼 것이라고 서원(誓願)하기도 했던 테레사 수녀의 삶은 1946년, 콜카타에서 다르질링으로 연례 피정(避靜, 가톨릭 신자들이 행하는 일정기간 동안의 수련생활)을 가던 기차 안에서 완전히 바뀝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어머니테레사 수녀는 기차 안에서 신(神)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평온한 ‘로레타 수녀원’에서 나가 거리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후에 이 경험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녀로서 이미 한 번 신의 부름을 받았던 그녀에게 신은 또 한 번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임무를 준 것입니다.

그녀는 즉각 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려 했으나 그 과정을 쉽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교단에서는 테레사 수녀가 ‘로레타 수녀원’에서 평생을 할 것임을 서원한 것과 거리에서의 신변보호 등을 문제로 그녀의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청원했고, 가톨릭 교단은 2년 만에 그녀가 거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1948년 인도의 빈민거리로 혈혈단신으로 나선 테레사 수녀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인도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200년간 이어졌던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난 상황이었으나, 독립을 기쁨을 누릴 시간도 없이 종교적·정치적인 싸움으로 인해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테레사 수녀의 봉사의 손길을 선교활동이라고 여겨 적대시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에게 선교의 목적은 없었습니다.

단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병을 치료받을 수조차 없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종교에 따라 마지막 종교의례를 치러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힌두교인에게는 갠지스강에서 떠온 물을 나눠주고, 이슬람교인에게는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誓願)을 읽어줬습니다.

종교에 상관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그녀의 행동은 많은 인도인들에게 큰 감명을 줬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미혼모와 고아, 나병환자를 위한 집을 만들고, 그들의 재활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선행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힘을 모으겠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 교단과 인도 정부도 이를 인정했고, 1950년 테레사 수녀를 중심으로 ‘사랑의 선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테레사수녀] 에 대한 몇가지 이슈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있는 성녀인도 콜카타에서 13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사랑의 선교회’는 급성장해 1960년에는 인도 전역에 25개의 지부가 생기고, 1963년에는 ‘사랑의 선교회 형제단’이 창설됐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기부금이 모아지고, 많은 유명인들이 테레사 수녀를 만나기 위해 인도를 방문했습니다.

그때마다 받은 기부금들은 고스란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살아있는 성녀’라고 그녀를 칭송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동요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나병환자들을 씻기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격전지에 갇혀 있던 어린이 37명을 양측으로부터 휴전 약속을 받고 구출했으며, 에티오피아의 아사자(餓死者)들, 러시아 체르노빌 원전 희생자들 등을 돕기 위한 국제적인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그녀는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도 시상식 만찬을 사양하고, 그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상금을 받으면서 "이 돈으로 빵을 몇 개나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그녀의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며 많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997년 9월 5일,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도 더 비싼 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이 돌봤던 환자들과 같은 수준의 치료를 받길 원했습니다.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 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주님께서는 그 연필을 자를 수도 있고 깎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 쓰고 싶으면 쓰시고, 그리고 싶으면 그리실 겁니다.

멋진 그림을 보거나 감동적인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미술도구나 연필을 칭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하여 감탄합니다.

하나님의 작은 몽당연필로 자신을 비유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테레사(Theresa, 1910.08.26.

1997.09.05.) 수녀. 2016년 8월 26일은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는 겸손한 말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몸을 낮추어 사랑을 실천했던 그녀가 태어난 지 107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신의 부름을 듣다테레사 수녀의 원래 이름은 '아그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iu)'로 1910년 8월 26일 중부유럽과 아테네를 잇는 주요거점 도시인 유고슬라비아 스코프예(Yugoslavia Skopje)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건축업자 겸 수입상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나, 정치사건에 휘말린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졌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천을 팔고, 자수 놓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테레사 수녀의 가족들은 이를 계기로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며 화목한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테레사수녀] 궁금증 해소



[아이를 돌보고 있는 테레사 수녀] 유년기의 화목했던 가정환경은 테레사 수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훗날 노벨상을 수상한 후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한 의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집에 돌아가 가족을 사랑해주세요." 평소에 가족의 사랑을 자주 강조하고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보살핀 테레사 수녀의 언행은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심이 깊고 영민했으며 12살 때에는 인도에서 수녀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는 18살 때 어머니에게 수녀가 되는 것을 허락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도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아일랜드의 ‘로레타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로레타 수녀원’에서는 많은 수녀들을 교육해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로 파견하여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계 백인의 딸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원에서 1년 동안 기초교육과 영어를 배우고, 19살에 인도의 다르질링(Darjeeling)으로 옮겨 예비 수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본명인 ‘아그네스’ 대신 ‘테레사’라는 세례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931년부터 1947년까지 16년 동안 인도의 콜카타(Kolkata)에 있는 성 마리아 수녀원의 부속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지리학을 가르치다 교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37년 ‘로레타 수녀원’에서 평생을 보낼 것이라고 서원(誓願)하기도 했던 테레사 수녀의 삶은 1946년, 콜카타에서 다르질링으로 연례 피정(避靜, 가톨릭 신자들이 행하는 일정기간 동안의 수련생활)을 가던 기차 안에서 완전히 바뀝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어머니테레사 수녀는 기차 안에서 신(神)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평온한 ‘로레타 수녀원’에서 나가 거리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후에 이 경험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녀로서 이미 한 번 신의 부름을 받았던 그녀에게 신은 또 한 번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임무를 준 것입니다.

그녀는 즉각 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려 했으나 그 과정을 쉽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교단에서는 테레사 수녀가 ‘로레타 수녀원’에서 평생을 할 것임을 서원한 것과 거리에서의 신변보호 등을 문제로 그녀의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청원했고, 가톨릭 교단은 2년 만에 그녀가 거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1948년 인도의 빈민거리로 혈혈단신으로 나선 테레사 수녀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인도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200년간 이어졌던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난 상황이었으나, 독립을 기쁨을 누릴 시간도 없이 종교적·정치적인 싸움으로 인해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테레사 수녀의 봉사의 손길을 선교활동이라고 여겨 적대시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에게 선교의 목적은 없었습니다.

단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병을 치료받을 수조차 없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종교에 따라 마지막 종교의례를 치러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힌두교인에게는 갠지스강에서 떠온 물을 나눠주고, 이슬람교인에게는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誓願)을 읽어줬습니다.

종교에 상관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그녀의 행동은 많은 인도인들에게 큰 감명을 줬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미혼모와 고아, 나병환자를 위한 집을 만들고, 그들의 재활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선행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힘을 모으겠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 교단과 인도 정부도 이를 인정했고, 1950년 테레사 수녀를 중심으로 ‘사랑의 선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있는 성녀인도 콜카타에서 13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사랑의 선교회’는 급성장해 1960년에는 인도 전역에 25개의 지부가 생기고, 1963년에는 ‘사랑의 선교회 형제단’이 창설됐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기부금이 모아지고, 많은 유명인들이 테레사 수녀를 만나기 위해 인도를 방문했습니다.

그때마다 받은 기부금들은 고스란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살아있는 성녀’라고 그녀를 칭송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동요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나병환자들을 씻기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격전지에 갇혀 있던 어린이 37명을 양측으로부터 휴전 약속을 받고 구출했으며, 에티오피아의 아사자(餓死者)들, 러시아 체르노빌 원전 희생자들 등을 돕기 위한 국제적인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그녀는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도 시상식 만찬을 사양하고, 그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상금을 받으면서 "이 돈으로 빵을 몇 개나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그녀의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며 많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1997년 9월 5일,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도 더 비싼 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이 돌봤던 환자들과 같은 수준의 치료를 받길 원했습니다.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 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 테레사 수녀가 하늘로 떠난뒤공개된 미공개 편지에서신의 존재에 대해심각하게 고민했음을 본다 "주께서 제안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하지만 어둠, 냉담, 공허의 현실이너무도 커서 제 영혼에는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신이 없다면 영혼도 없고영혼이 없다면예수님 당신도 또한진실이 아닙니다" 세속적 기운 이 조금도 없었던테레사 수녀에게내적 갈등이 있었음을우리는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 신이 없음을 자백한 것은더욱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며더욱 간절하게 신을 찾았음일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하루 밤과 같은 것이라고마지막 말을 남겼다 우리 모두는 어차피 단 한번이 지구촌에 내려와머물다 떠난다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자신을 깨우치고 반성하며"겸손하자"  다짐하며살아야 할 것이다 아...테레사 수녀님!...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 테레사 수녀의 삶이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아무런 대가 없이 기꺼이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거친 손에 터진 발, 주름투성이의 자그마한 할머니테레사 수녀는 평생을 두 벌의 옷과 낡은 신발 한 켤레만 지닌 채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이 죽어가는 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1970년대를 통해 세계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80년 인도의 가장 높은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수여받았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계속 확장하여 그녀가 사망할 무렵에는 나병과 결핵,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과 거처, 무료 급식소, 상담소, 고아원, 학교 등을 포함해 123개 국가에 610개의 선교 단체가 있었다.

그녀는 사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어 "캘커타의 복녀 데레사"라는 호칭을 받았다.

[1][2] 생애(편집)1910년 스코페의 알바니아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남. (당시 오스만 제국, 현 마케도니아 공화국)1928년 아일랜드의 라스판햄으로 이주하여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1928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가 됨. 테레사로 개명. 이후 인도로 이주.1950년 인도에 귀화.1946년 사랑의 선교회 (Missionaries of Charity) 설립.1952년 8월 22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 또는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 벵골어: Nirmal Hriday의 번역)로 불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개설. 테레사 수녀는 콜카다 시청에서 제공한 건물을 사용하였다.

그 건물은 칼리 신전 뒤에 있는 건물이었으며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였다.

건물이 사용하기 편리했으므로[3] 기꺼이 사용을 마음먹었다.

당시 힌두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건물을 이용할 것이라고 의심하여 시위를 벌였으나,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종교에 구애없이 복지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4]1955년 9월 23일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시슈 브하반)이란 이름의 어린이 보호시설을 개설. 1958년에 90명의 어린이들이 살수 있는 공간이 마련됨. 경찰과 공무원들은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들을 보냈으며, 어린이들의 집에서는 이들을 먹이고 병도 고쳐주었다.

어린이들은 교육도 받았으며, 해외로 입양되었다.

갓난 아기는 기독교인인 것을 알 수 있을 때만 세례를 주었다.

[5]1968년 한센병 환자 공동체 평화의 마을(Shanti Nagar)을 개설.1975년 회복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물"(Prem Dan)이란 이름의 장기 요양소를 개설.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 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 1980년 인도 최고 훈장(Bharat Ratna) 수훈.1983년 영국 명예 오더 오브 메리트(honorary Order of Merit, honorary OM) 수훈.1997년 9월 5일 캘커타에서 사망. 9월 13일 인도 국장으로 장례.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녀 반열에 오름. 현재 시성절차가 진행 중이다.

 비평(편집)테레사 수녀는 부자들의 성녀라는 비평을 받았다.

테레사 수녀는 사회적 모순과 불의가 원인인, 사회문제로 보아야 할 가난을 하늘의 뜻이라며 왜곡하여 캘커타 민중들의 계급투쟁 전통을 방해했으며, 해방신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로마 가톨릭의 신학적인 변화 같은 진보적인 신학들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부자들에게는 인도주의자,박애주의자라는 찬양을, 민중들에게는 부자들의 성녀라는 냉소를 받았다.

[6] 주석(편집)1.이동 ↑ Associate Press. (October 14, 2003). "Full house for Mother Teresa ceremony". CNN. Retrieved May 30, 2007.2.이동 ↑ "Blessed Mother Teresa". (2007). Encyclopædia Britannica. Retrieved May 30, 2007.3.이동 ↑ 전기 공급, 취사설비, 넓은 안마당4.이동 ↑ 에마 존슨. 〈마더 테레사〉, 김석희 옮김: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작가정신, 76-80쪽5.이동 ↑ 에마 존슨, 앞의 책, p.816.이동 ↑ 마더 테레사,부자들의 성녀 외부와 연결(편집)(영어) Mother Teresa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Nobel prize medal.svg 노벨 평화상 수상자 1976: 베티 윌리엄스 / 메어리드 코리건·1977: 국제사면위원회·1978: 안와르 사다트 / 메나헴 베긴·1979: 테레사 수녀·1980: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1981: 국제 연합 난민 고등 판무관실·1982: 알바 뮈르달 / 알폰소 가르시아 로블레스·1983: 레흐 바웬사·1984: 데스몬드 투투·1985: 핵전쟁 방지 국제 의사회·1986: 엘리 위젤·1987: 오스카르 아리아스·1988: 국제 연합 평화유지군·1989: 14대 달라이 라마·1990: 미하일 고르바초프·1991: 아웅산수찌·1992: 리고베르타 멘추·1993: 넬슨 만델라 / F. W. 데 클레르크·1994: 야세르 아라파트 / 시몬 페레스 / 이츠하크 라빈·1995: 퍼그워시 회의 / 조지프 로트블랫·1996: 카를로스 벨로 / 조제 하무스 오르타·1997: 지뢰 금지 국제 운동 / 조디 윌리엄스·1998: 존 흄 / 데이비드 트림블·1999: 국경 없는 의사회·2000: 김대중전체 목록·1901년 - 1925년·1926년 - 1950년·1951년 - 1975년·1976년 - 2000년·2001년 - 현재전거 통제WorldCat·VIAF: 95161232· LCCN: n79144708·ISNI: 0000 0001 2144 1401·GND: 118642707·LIBRIS: 199679·BNF: cb11887691t·NLA: 35543765 NDL: 00458486 분류 : 분류: 1910년 태어남ㆍ1997년 죽음ㆍ인도의 종교인ㆍ노벨 평화상 수상자ㆍ수녀ㆍ인도의 노벨상 수상자ㆍ막사이사이상 수상자ㆍ알바니아계 마케도니아인ㆍ마케도니아 공화국계 인도인ㆍ알바니아계 인도인  레이건 대통령이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의 메달을 수여하는 장면 출처 : 위키백과. 테레사 수녀가 하늘로 떠난뒤공개된 미공개 편지에서신의 존재에 대해심각하게 고민했음을 본다 "주께서 제안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하지만 어둠, 냉담, 공허의 현실이너무도 커서 제 영혼에는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신이 없다면 영혼도 없고영혼이 없다면예수님 당신도 또한진실이 아닙니다" 세속적 기운 이 조금도 없었던테레사 수녀에게내적 갈등이 있었음을우리는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 신이 없음을 자백한 것은더욱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며더욱 간절하게 신을 찾았음일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하루 밤과 같은 것이라고마지막 말을 남겼다 우리 모두는 어차피 단 한번이 지구촌에 내려와머물다 떠난다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자신을 깨우치고 반성하며"겸손하자"  다짐하며살아야 할 것이다 아...테레사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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