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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


.)조카였던 에드워드 5세의 자리를 빼앗고에드워드 5세와 그의 형제들을 런던탑에 가두었던 왕 입니다.

결국 조카가 죽었는데 리처드 3세가 그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며 민심이 흉흉해 지기도 하였죠.게다가 바로 다음 왕이 튜터 왕조로 바뀌면서 ( *리처드 3세는 요크 왕조)역사에는 그의 악행이 많이 밝혀집니다.

각종 매체에서도 악인으로 등장하는 등 후세에도 그리 평가가 좋지 못한 국왕...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구요...2012년 레스터에서 정체 불명의 유골이 발견됩니다.

3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의 검사 결과 리처드 3세가 유골의 주인이라고 밝혀집니다.

후세에 평가가 어떻든간에 영국의 왕 이었으니 무덤을 만들워 줘야 하겠죠.유골이 발견된 장소 (레스터) 와 리처드 3세 가문의 고향 (요크)이 두 지역 사이에서 무덤의 위치를 두고 법적 분쟁이 일어납니다.

결과는 유골이 발견된 레스터 지역의 승리로 돌아가죠.(무덤 위치를 두고 법적 소송까지 일어나다니.... 뭔가 섬짓하죠...?)우여곡절 끝에 영국 왕실이 주관하고 레스터 시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형식의 성대한 장례식이 열립니다.

레스터 시 측에서는 이제 리처드 3세의 무덤을 통해 관광 수익을 올린 다는 계산이 있었겠죠.참고로 이 날 장례식에는 "The 오이" 베네딕트 컴버내치 가 참석합니다.

(리처드 3세의 후손 이라고 하네요... 왕족이었어...)흥미롭게도 장례식이 있던 날이 2015년 3월 26일 인데리처드 3세가 레스터에서 안식을 찾자마자강등권에 있던 "레스터 시티" 는잔여경기 9경기 중 7경기를 승리하면서 기적적으로 강등권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레스터 현지 팬들은 500여년 만에 안식을 찾은 왕의 은총이 아니냐는 농담이 퍼지기 시작하죠..그리고 2016 시즌이 시작되는데요...이게 무슨일인지...15/16 시즌이 시작되자,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레스터 시티 는 미칠듯한 강함을 보여주며 리그 테이블 최상단에 이름을 올린채 시즌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리처드 3세가 그려진 패러디가 나오고,그가 그려진 상품들이 판매되기 시작하기도 하죠.그리고 마침내,창단 130여년 만에 처음으로"1부리그 에서 우승하며"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레스터 시티.급기야 우승 확정 후에는영국의 가디언지 1면에 리처드 3세와 레스터 시티의 관계에 관한 기사마저 실리게 됩니다.

..)조카였던 에드워드 5세의 자리를 빼앗고에드워드 5세와 그의 형제들을 런던탑에 가두었던 왕 입니다.

결국 조카가 죽었는데 리처드 3세가 그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며 민심이 흉흉해 지기도 하였죠.게다가 바로 다음 왕이 튜터 왕조로 바뀌면서 ( *리처드 3세는 요크 왕조)역사에는 그의 악행이 많이 밝혀집니다.

각종 매체에서도 악인으로 등장하는 등 후세에도 그리 평가가 좋지 못한 국왕...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구요...2012년 레스터에서 정체 불명의 유골이 발견됩니다.

3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의 검사 결과 리처드 3세가 유골의 주인이라고 밝혀집니다.

후세에 평가가 어떻든간에 영국의 왕 이었으니 무덤을 만들워 줘야 하겠죠.유골이 발견된 장소 (레스터) 와 리처드 3세 가문의 고향 (요크)이 두 지역 사이에서 무덤의 위치를 두고 법적 분쟁이 일어납니다.

결과는 유골이 발견된 레스터 지역의 승리로 돌아가죠.(무덤 위치를 두고 법적 소송까지 일어나다니.... 뭔가 섬짓하죠...?)우여곡절 끝에 영국 왕실이 주관하고 레스터 시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형식의 성대한 장례식이 열립니다.

레스터 시 측에서는 이제 리처드 3세의 무덤을 통해 관광 수익을 올린 다는 계산이 있었겠죠.참고로 이 날 장례식에는 "The 오이" 베네딕트 컴버내치 가 참석합니다.

(리처드 3세의 후손 이라고 하네요... 왕족이었어...)흥미롭게도 장례식이 있던 날이 2015년 3월 26일 인데리처드 3세가 레스터에서 안식을 찾자마자강등권에 있던 "레스터 시티" 는잔여경기 9경기 중 7경기를 승리하면서 기적적으로 강등권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레스터 현지 팬들은 500여년 만에 안식을 찾은 왕의 은총이 아니냐는 농담이 퍼지기 시작하죠..그리고 2016 시즌이 시작되는데요...이게 무슨일인지...15/16 시즌이 시작되자,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레스터 시티 는 미칠듯한 강함을 보여주며 리그 테이블 최상단에 이름을 올린채 시즌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리처드 3세가 그려진 패러디가 나오고,그가 그려진 상품들이 판매되기 시작하기도 하죠.그리고 마침내,창단 130여년 만에 처음으로"1부리그 에서 우승하며"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레스터 시티.급기야 우승 확정 후에는영국의 가디언지 1면에 리처드 3세와 레스터 시티의 관계에 관한 기사마저 실리게 됩니다.

.           (3) 그의 아내 : 레이디 앤 네빌(Anne Neville)마리 반필드(Marie Barnfield) 씀  어릴 적  앤 네빌(Anne Neville)은 리처드 3세의 아내이자 왕비이다.

그녀는 워릭 백작 부부인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과 앤 보챔프(Beauchamp)의 둘째 딸이며, 그녀의 언니 이자벨(Isabel Neville, 1451년생)은 클라렌스 공작부인이다.

앤은 에이븐 강(Avon River)이 내려다 보이는 워릭 성(Warwick Castle)에서 1456년 6월 11일에 태어났으며, 그 마을에 있는 성모 마리아 신학대학 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바라고 있었지만, 결국에 두 딸이 자신들 부부의 상속자가 될 것임을 서서히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앤이 태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인 워릭 백작은 이미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전 해 세인트 알번스(St. Albans)의 첫번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덕분에 칼레의 수비대장(Captain of Calais)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앤이 거의 한 살이 다 되었을 때 워릭 백작 부부는 칼레에 거처를 차렸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앤은 이후 3년을 부모 그리고 언니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워릭 성>   요크 가문의 승리와 함께 워릭은 섬으로 돌아왔다.

에드워드 왕의 수석 외교관이자 군인으로서, 워릭 백작은 종종 집을 떠난 상태였을 것이고, 이자벨과 앤은 아마도 어머니와 함께 성에 남았을 것이다.

두 소녀가 어디에 살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노스 요크셔(North Yorkshire)의 미들험 성(Middleham Castle)이 아마도 그들의 거처였을 듯 하다.

앤은 친삼촌인 조지 네빌(George Neville)이 1465녀 9월에 요크의 총대주교로서 즉위식을 가질 때 처음으로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9살이었다.

또한 같은 해 왕의 막내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Richard, Duke of Gloucester, 1452년생)가 프랜시스 로벨 경(Francis Lord Lovell, 1456년생) 및 몇몇 귀족 자제들과 함께 워릭 백작의 궁정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그 전 해 앤의 아버지와 에드워드 왕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는데, 에드워드 왕이 프랑스의 신부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워릭 백작의 외교적 중재를 고작 젠트리 계급의 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과 비밀리에 결혼하였음을 공언하는 것으로 답하였기 때문이다.

새 왕비는 자매들이 여럿이었고, 때문에 워릭 백작은 왕국 내 유력한 사윗감을 그녀들에게 뺏길 판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은 당시 글로스터 공작과 로벨을 각각 이자벨과 앤의 신랑감으로 찍고 있던 듯 하다.

 하지만 워릭은 당시에 자신의 두 딸을 왕의 두 동생과 각각 결혼시키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이 경우라면 글로스터 공작은 이자벨이 아닌 앤과 혼인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이자벨이 클라렌스 공작과 결혼하게 되면, 앤과 글로스터의 결혼은 ‘근친혼’의 범주에 들어가 불법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힉스(Hicks), 앤 네빌, Tempus, 2006, 2006년도판 BBC 역사 매거진 ‘리처드 3세 왕은 과연 근친상간을 저질렀나?'). ‘법적으로’ 혼인이 제한되는 경우는 성적인 결합으로 인하여 ‘하나의 육체’가 되었을 때만 국한되었다.

즉 이에 따르면, 사면장 없이 이전 배우자의 친척, 또는 이론적으로 이전 애인과의 친척과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결혼하는 두 사람의 혈연자가 친척, 또는 ‘혼인 관계’라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워릭의 계획한 이중 결혼식의 유일한 장애물은 왕이었다.

왕은 클라렌스의 조지의 결혼이 중요한 외교적 흥정 대상일 것이 때문에, 자신의 맏아우를 워릭 가문의 후계자로 넘겨주는 것을 반대하엿다.

워릭 가문의 자매는 매우 좋은 신부감이었으나, 그들은 아버지의 샐리스버리(Salisbury) 백작령과 어머니의 광대한 영지들, 즉 워릭(Warwick)과 남서쪽의 디스펜서(Despencer) 백작령 등을 균등하게 상속받아야 했다.

(북쪽에 있는 네빌 가문의 영토는 남자 후계자에게만 상속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워릭 백작이 아닌 그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

)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워릭은 클라렌스의 동의를 얻어 교황에게 사면장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교회법으로 볼 때 그의 딸들은 왕의 동생들과 원칙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가까운 친척 사이였기 때문이었다1. 우리는 적어도 워릭 백작이 이자벨의 결혼에 대한 사면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문서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리처드와 앤의 결혼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고, 정황을 보았을 때 사면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두 쌍의 결혼에 대한 사면장들은 바티칸 기록 보관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때는 바야흐로 1468년 말, 워릭 백작과 왕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져버렸고, 리처드는 누구의 편이 될 것이냐는 다그침을 받았다.

리처드는 왕의 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떠남으로서, 앤과의 결혼은 깨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로벨 경은 이미 앤의 사촌인 앤 피츠휴(Anne FitzHugh)와 결혼한 상태였다.

  랭카스터의 웨일즈 왕자와 결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렌스는 워릭과 함께 음모를 꾸며 1469년 7월 12일 칼레에서 이자벨 네빌과 비밀 결혼식을 치렀다.

이 결혼은 클라렌스와 워릭이 반역을 일으키는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왕의 총신들을 박살내고 에드워드 왕을 포로로 가뒀다.

아마도 클라렌스가 에드워드 대신 왕이 되고 네빌이 배후에서 조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쿠데타를 지속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왕과 재화합하였지만,  이내 반란을 또 일으켰고,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였다.

앤은 부모와 언니, 그리고 형부인 클라렌스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 생활을 떠났다.

이 자벨이 낳은 첫 아이는 배에서 사산되었다.

          <랭카스터 가문 : 헨리 6세, 그의 아내 앙주의 마거릿, 부부의 아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19세기에 판화에 그려진 초상화이고,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크 가문 :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 에드워드 4세가 랭카스터파의 일개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한 덕분에 불필요한 정치적 파란을 겪게 되었고, 이는 그 자신의 일시적 퇴위와 바넷, 툭스버리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참혹한 전투를 초래하였다.

 당대 최고의 미녀로 평가받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자신의 낮은 신분 때문에 정도 이상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이 앤이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Margaret of Anjou)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인 랭카스터의 에드워드(Edward of Lancaster)와 결혼하게 된 전후배경이다.

마거릿 왕비는 프랑스의 루이 11세를 설득하여 지원을 약속받은 후, 에드워드 왕과 군사작전으로 결판을 내기 위해 워릭과 동맹을 맺었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와 앤은 8촌지간2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사면장 없이 결혼할 수 없었지만, 1470년 7월 25일 에드워드와 앤은 서로 낯설어 하면서 앙제(Angers) 성당에서 엄숙한 약혼식을 올렸다.

1주일 후 워릭과 클라렌스는 앤과 그녀의 어머니를 프랑스에 남기고 영국을 침공하였다.

에드워드 4세는 패하여 해외로 달아났고, 헨리 6세는 복위하였다.

교황의 사면장이 도착하자, 앤과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12월 13일 앙부아즈(Anboise)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때 웨일즈 왕자는 17세, 앤은 14세였다.

  크리스마스 이후, 젊은 왕세자 부부는 각자 어머니를 대동하고 디프(Dieppe) 해안으로 이동하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그들은 3월이 되기 전에 웨이머스(Weymouth) 항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당시 앤은 웨일즈 왕자 및 마거릿 왕비와 한 배에 타고 있었고, 워릭 백작부인은 다른 배를 타고 있었다.

날씨 상태는 그때까지도 나빠서, 앤의 어머니를 태우고 있던 배는 홀로 떨어져 동쪽으로 수 마일이 떨어진 곳으로 표류하였다.

그들은 1471년 4월 14일에 상륙하였으나, 바로 그 때 다시 세워진 왕권이 몰락한 것을 목격하였다.

에드워드 왕이 다시 돌아와 런던을 접수하였으며, 클라렌스는 다시 요크 가문 쪽으로 붙었고, 바로 그 날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전사하였다.

워릭 백작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뉴 포레스트(New Forest)에 있는 볼리유 수도원(Baeulieu Abbey)의 성소로 들어갔다3. 앤은 툭스버리(Tewkesbury)로 향하는 행렬에 억지로 끼어 이동하였고,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에드워드 왕의 군대가 랭카스터의 군대를 박살냈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병사들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앤은 언니 이자벨과 형부인 클라렌스 공작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결혼으로 인한 분쟁  앤의 아버지와 남편은 모두 반역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볼리유 수도원의 성소로 도피하였으며, 에드워드 왕은 이를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곧 무장한 경비병들로 그녀를 감시하게 하였다(BL MS Cotton Julius BXII, f. 317). 부모의 영지는 모두 몰수당했으며, 원래 앤과 이자벨이 나눠 가져할 영지를 이자벨의 남편인 클라렌스가 모두 차지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앤의 어린 사촌인 조지 네빌(George Neville)에게 주어졌어야 할 영국 북쪽에 있는 네빌 가문의 영지도, 조지 네빌의 아버지인 몽태규 후작(John Neville, Marquess of Montagu)이 바넷 전투에서 반역자로 죽는 바람에, 글로스터 공작이 가져가고 말았다.

앤의 언니인 이자벨과 클라렌스 공작 모두 앤의 재혼 또는 워릭과 샐리스버리의 영지 상속권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9개월이 조금 못미치는 시간 동안 리처드는 끊임 없이 앤과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양자 모두에게 신중한 결합이었으며, 또한 앤의 아버지과 원래 점지해주던 혼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감시자 노릇을 하던 클라렌스는 동생이 앤의 배후에 있다고 보고, 앤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자 하였다.

아마도 그는 처제를 주방의 하녀로 모습을 감추게 하려고 했던 듯 싶다.

하지만 앤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상속권을 위해서 싸웠을 것이다.

결국에 리처드가 앤을 찾아냈고, 그녀를 데리고 런던의 성 마틴(St. Martin) 수도원의 성소의 은신처로 갔다.

    <앤 네빌과 리처드의 사인>앤 네빌은 "Anne Warwick"이라 썼고, 리처드는 "R(ichard) Gloucester"라 썼다.

   앤은 이에 리처드와 결혼하기로 동의하였고, 최종적인 사면권을 얻기 위해 로마로 사절을 보냈다.

리처드는 이전에 앤이 결혼하였던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와 8촌 지간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사면장 없이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72년 2월, 에드워드의 압력에 의하여 클라렌스는 리처드와 앤이 ‘재산을 나누어 갖지 않는 조건 하에서’ 그들의 결혼을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 해 3월 18일까지, 클라렌스는 리처드에게 몇몇 영지들을 양도하는데 동의하였다.

(CPR 1467-77, p. 330). 리처드와 앤의 사면장은 4월 22일에 로마에서 비준되었고, 영국으로 출발한 것은 6월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건대 리처드와 앤은 클라렌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면장이 도착하기 전인 1473년 1월에 결혼 한 듯 하다.

당시 앤의 나이 16세, 리처드의 나이 19세 또는 20세였다.

1473년 여름에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왕의 허락을 받아 볼리유의 성소에서 머무르고 있던 앤의 어머니를 데리고 미들험에 있는 자신의 궁정으로 모셔갔다.

  하지만 워릭 백작부인은 자신의 영지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두 딸과 사위들의 금전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에드워드 왕이 워릭 백작부인의 재혼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녀가 재혼한다면, 그 남편은 그녀의 광대한 영지와 재산 덕분에 왕국에서 가장 막강한 인물이 될 터였다.

백작부인의 영지를 두 딸과 사위들에게 상속하면 상황이 안정될 것으로 보였으나, 클라렌스는 이를 방해하려 들었다.

1473년 가을까지 그는 글로스터 공작에 대항하여 무장하였으며, 이 상황은 곧 클라렌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던 한 영국인 방문자에 의해 프랑스 궁정에도 보고되었다.

  <클라렌스 공작 부부, 조지 플란타지넷과 이자벨 네빌. 카디프 성당의 스테인글라스>   ‘글로스터 공작은 강제로 이전에 웨일즈 왕자와 결혼하였던 고(故) 워릭 백작의 딸을 아내로 취했으며, 클라렌스 공작에 맞서 끊임 없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클라렌스는 그의 형인 에드워드 왕과 이전에 워릭 백작령을 받기로 약속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글로스터가 백작의 둘째 딸과 결혼하는 것을 이유로 영지를 나누어 갖는 것을 원하치 않고 있습니다.

’ (Calendar of Milanese State Papers, p. 177).  결혼이 강요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두려움은 근거 없는 얘기다.

하지만 그러하였기 때문에, 클라렌스가 리처드와 앤의 결혼이 교회법으로 봤을 때 원래 무효라는 점을 들어서라도 리처드가 워릭 백작령의 일부라도 상속 받는 것을 반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요된 결혼은 특히 지주 계급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

특히 신부 측의 부모 또는 보호자가 아닌 신랑에 의한 강요라면 더했다.

  당대의 사회는 특히 신부의 가족 또는 보호자의 의사에 반하여 상속녀를 유혹하는 일을 도둑질을 목적으로 한 ‘유괴(raptus4)’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대의 사회 통념상 유괴와 가출은 그 뜻에서 차이가 거의 없었다.

클라렌스의 감시에서 앤을 성 마틴 수도원의 성소로 데려온 일은, 리처드가 그녀를 유괴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었다.

클라렌스가 리처드의 납치설을 주장한 근거는 이러한 점들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교회법이 당대의 사회 관습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신부가 직접 동의하는 경우라면, 신부측 가족의 동의가 없어도, 신랑과 신부의 정당한 결혼이 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육체적인 성관계나 동거하는 것도 법적으로 가능하였다.

비록 그 결혼이 실제로 ‘강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어도 그러하였다.

  클라렌스는 영지의 분할 상속을 막기 위해 동생의 결혼이 유괴에 의한 것이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클라렌스가 그 결혼에 대해 교회법에 의거하여 더욱 강하게 반대했다고 했을지라도, 기록으로 남겨진 바는 없다.

   결국에 클라렌스는 자신의 영지를 압수하겠다는 왕의 위협에 굴복하였다.

영지 상속에 대한 분란은 1474년 5월 의회의 의결로 가라앉았다.

연대기 작가 크로울랜드(Crowland)는 ‘워릭 백작 부인이 자연스레 죽은 것처럼’ 간주하여 그녀의 영지를 즉시 두 딸들과 사위들한테 즉시 지급할 것을 명시한 포고령에 경악하였다.

클라렌스가 그때까지도 워릭 백작부인의 상속재산 대부분을 사실상 보유하고 있었고, 리처드와 앤의 몫으로 돌아간 것은 다른 가문의 재산에 속하는 것이었다.

클라렌스는 앤과 리처드의 결혼의 적법성에 대하여 끊임 없이 중상모략을 가하였다.

즉, 교회가 그들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함으로서 리처드와 앤이 이혼하게 된 상태에서 다시 재결합하는 경우, 그들의 권리를 지켜줄 법적 문구를 발표해버리는 식이었다.

또한 클라렌스는 리처드가 앤과 두 번째 결혼을 하기 위해선 지켜야 할 권리들은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다는 식으로 떠들고 다녔다 (C. Given-Wilson [ed.], Parliament rolls of Medieval England, Edward IV - October 1472 - 2nd roll). 하지만 그 어떠한 교회 법정도 혼인의 적법성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대중 앞에서 선언해야 한다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또한 리처드와 앤의 결혼은 서로간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며, 부부 사이는 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글로스터 공작부인<글로스터 공작부부, 앤과 리처드>  공작부인으로서 앤의 활동은 살짝 훑어볼 수 있는 정도이다.

1475년과 1477년 사이의 예시는 그 일면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1475년, 리처드는 프랑스로 원정을 가는 바람에 자리를 비웠다.

이 때 앤은 요크 시의 시장 및 시의원들과 함께 서신으로 왕래하였으며, 특히 그녀에게 중요한 편지 한 통은 그레이스톡 경(Loard Greystock)을 비롯한 남편의 참사회 회원들의 손에 딸려 보내기도 하였다 (York City Chamberlains’ Account Rolls, Surtees Soc. Vol. 192, 1980, p. 152). 리처드와 앤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Edward)는 1476년 봄 또는 여름에 미들험(Middleham)에서 태어났다.

적어도 공식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부부의 유일한 혈육이다.

같은 해에, 앤은 네빌 가문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더럼 수도원(Durham Priory)의 자선 회원5이 되었다.

12월에 그녀는 아마도 리처드와 함께 런던에 있었던 듯 싶다.

당시 리처드는 ‘공작 각하의 분부에 의하여, 각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내를 위하여 대령하라고 했던 모피’와 ‘공작부인께 대령하라고 명령하셨던 비단옷과 다른 물품들’에 대한 비용을 자신의 동-잉글랜드의 영지에 달아놓았다.

1477년 리처드와 앤은 요크의 성체 협회(Corpus Christi Guild)에 가입하였다.

앤은 자신의 개인사제를 승진시키기 위하여 더럼 수도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마도 같은 해에 케임브릿지의 퀸스 컬리지(Queen’s College)에 부부가 공동으로 기부금을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가 되다.

  <리처드 3세와 앤 왕비><리처드 3세, 아내와 함께 대관식을 치르다>영드 The White Queen 8화의 한 장면 (배우는 아뉴린 바너드(Aneurin Barnard), 페이 마세이(Faye Marsay))   에드워드 4세의 죽음 이후, 리처드는 남쪽으로 가서 어린 에드워드 5세의 호국경 자리를 꿰찼다.

앤은 한 달 후에 런던으로 향했고, 6월 5일 화요일에 도착하였다.

곧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였고, 결국에 리처드가 왕위를 차지하였다.

같은 시기에 앤은 언니 이자벨의 아들이자 고아인 상태로 도르셋 후작의 후견을 받고 있었던 워릭 백작 에드워드(Edward Plantagenet, Earl of Warwick)을 돌보기로 하였다(Mancini).  리처드와 앤은 공동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웨스트민스터 타워에서 치러진 식 하루 전에, 그녀는 여성용 가운과 길이가 27야드(=11.88m)나 되는 금으로 수놓인 흰색 망토를 입었다.

그 망토는 담비와 족제비의 털로 만들어졌고, 흰색 비단과 금으로 수놓여진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Laynesmith, p. 92). 대관식은 아침 7시에 웨스트민스터의 홀에서 사원으로 걸어서 행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부부는 미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대관식과 도유식6을 치렀다.

그 날은 장엄한 축하 연회와 함께 끝났으며,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금으로 만든 접시에, 앤은 금박을 입힌 접시에 음식을 대접받았다.

  <리처드 3세의 가족 : (왼쪽부터) 왕비 앤 네빌, 리처드 3세, 부부의 아들 미들험의 에드워드>   왕비로서 앤이 군림했던 시간은 짧았고, 당시 왕비의 궁정에서 남겨진 기록도 없어서, 아직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남아있는 증거에 따르면, 앤이 글로스터 공작부인일 때부터 그녀를 모시던 북부 신사계급 출신 여인들이 그대로 왕비의 시녀로서 궁정에서 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종종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의 대관식 기간 동안, 앤은 워릭에 도착하여 리처드를 잠시 멈춰 세우고, 그녀가 일전에 윈저(Windsor)에서 접견하였던 에스파냐 대사를 만나게 하였다.

부부는 앤의 고향(=워릭)에서 1주일 정도 머물렀다.

이후 앤과 리처드는 요크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7살 먹은 아들 에드워드를 웨일즈 왕자로 선포하였다.

국왕 일행은 다시 남쪽으로 향했고, 폰티프락스(Pontefract)를 방문하여 2주일을 머물렀다.

 앤은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을 위해 남편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에 머물렀다.

3월에, 그녀와 리처드는 이틀 동안 말을 타고 케임브릿지의 퀸스 컬리지로 행차하였고, 그곳에서 '가장 거룩하신 앤 왕비 마마(께서는)..... 막대한 기부금으로 대학의 재정을 크게 늘려주셨다' (Laynesmith, p. 256). 그에 대한 보답으로, 케임브릿지 대학의 간부들은 매해 5월 2일에 '가장 고명하신 군주(=리처드)와 전하의 사랑하시는 앤 왕비 마마를 위하여' 미사를 치르기로 결의하였다 (Hammond, p. 20). 이후 부부는 노팅엄(Nottingham)에 궁정을 차렸는데, 그곳에서 아들 에드워드 왕자가 미들험에서 죽었다는 불의의 소식을 들었다.

'여러분은 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비탄에 압도되어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Crowland, p. 171).  에드워드 왕자의 죽음은 리처드와 앤에게 개인적인 비극일 뿐만 아니라 왕조에도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제 통치 왕조의 안정성과 왕조의 지속을 보장해줄 후계자가 사라졌다.

헨리 튜더(Henry Tudor)는 에드워드 4세의 맏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York)를 미래의 배우자로 맞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앤이 또 아들을 낳아야할 필요성이 시급히 대두되었다.

그녀는 아직 27세였고 건강해보였으며, 그랬기 때문에 리처드와 함께 국내를 여행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가 어디를 갔던지 간에, 즉 예를 들어 리처드가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여 해상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스카보로(Scarborough)에 주둔지를 차렸을 때조차도, 앤은 역시 그곳에 있었다.

앤이 스카보로에서 머물렀던 사각형의 탑은 1538년에 여행객 존 릴런드(John Leland)에 의해 '왕비의 타워 또는 임시거처(The Queens Towre or lodging)'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The Itinerary of John leland the Antiquary, ed. Thomas Hearne, Vol. 1, 1745, p. 62). 앤은 리처드와 함께 왕비로서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였다.

이 때 앤의 시녀로서 에드워드 4세의 맏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아마도) 그 여동생들도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그 해 3월에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자매들은 어머니와 함께 성소에서 나오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크로울랜드의 연대기는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관심이 춤과 환락에 쏟아졌으며' 앤 왕비와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옷을 자주 바꿔 입었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십이야에7, 헨리 튜더가 1485년 여름에 영국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당도하였다.

  그 즉시, 리처드에 대한 적대적인 소문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한 소문들은 리처드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꾸며내어 퍼트린 것이다' (Lander, p. 255). 크로울랜드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 동엔에 왕은 엘리자베스에게 호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왕이 앤이 죽고 난 뒤, 또는 '이미 그 근거가 충분한 것으로 보이므로 앤하고 이혼한 뒤에'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연대기 작가는 왕이 앤과 이혼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클라렌스가 이전에 리처드와 앤의 결혼을 중상모략하면서 했던 바로 그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앤은 '바로 며칠 뒤에' 죽을 병에 걸렸으며, 이 상황에서도 리처드가 이혼을 고려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면 다소 놀라운 일이 될 것이므로, 앞선 소문은 이제 그가 아내를 독살하려 한다는 루머로 대체되었을 것이다8. 앤의 병세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는, 앤의 병세가 2달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 그리고 의사들이 리처드에게 그녀의 침상으로 다가가지 말라고 조언한 것 정도이다.

  현재 남겨진 증거로 보면, 리처드는 자신이 홀아비가 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조카인 엘리자베스의 결혼 협상을 고려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리처드가 조카와 직접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포르투갈의 공주와 결혼하고 동시에 조카를 포르투갈의 왕자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앤은 만 29세 생일을 석 달 남겨두고 1485년 3월 16일에 죽었다.

바로 그 날, 영국엔 개기일식이 관측되었다.

그녀는 '왕비에게 어울리는 경의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crowland, p. 175). 보챔프 가문의 여러 위인전을 작성하였던 존 로스(John Rous)에 의하면, 앤은 '품위가 있었으며, 상냥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행동은 늘 칭찬할만 하였고, 고결하였으며, 그녀의 이름인 '앤(Anne)'이 나타내고 있듯이 우아함으로 가득차있었다.

' 이제 앤의 이야기에서 후기를 쓸 때가 왔다.

3월 30일, 리처드는 런던 시장과 시민들 및 가능한 많은 영주들을 성 요한 자선회당(Hospital of St. John)의 대강당에 불러모았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 위하여 앤을 독살하였다는 루머에 대해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연설하였다.

'왕은 이전의 일에 대해 슬픔과 언짢음을 보여주면서, 그런식으로 결혼하려는 것이 절대로 자신의 생각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며, 왕비의 죽음에 결코 기뻐한 적도, 또한 바란 적도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왕비의 죽음 때문에 큰 비탄에 사로잡혔으며, 남자로서 견딜 수 없을만큼 괴롭다고 하였다.

....' (Lander, pp. 255-6).주요 출처 / 더 읽어보세요데이비드 볼드윈(David Baldwin) "리처드 3세(Richard III)" 스트로우드(Stroud), 2012마리 반필드(Marie Barnfield), "무효화된 혼인 제한, 교황 사면장과 이혼 : 리처드 3세와 그의 결혼에 대하여(Diriment impediments, Dispensations and Divorce : Richard III and Matrimony', The Ricardian, Vol. XVII, 2007 PP. 84-98아네트 카슨(Annette Carson), "리처드 3세 : 비난받는 왕(Richard III : The Maligned King)" 스트로우드, 2008P. D. 클라크(P. D. Clarke), "영국 왕가의 혼인과 15세기 로마 교황청 법원(English royal marriages and the Papal Penitentiary in the fifteenth century)", 영국 역사 비평(English History Review), 120, 2005로스 연대기(The Rows roll). W. H. 커토프(W. H. Courthope) 편집, 런던, 1859.로다 에드워즈(Rhoda Edwards), "리처드 3세의 순방, 1483-1485(The Itinerary of Richard III, 1483-1485)", 글로스터, 1983중세 영국 의회 의사록(Parliament rolls of Medieval England), 크리스토퍼 기븐-윌슨(Christopher Given-Wilson) 편집.P. W. 헤이먼드(P. W. Hammond), "웨일스 왕자, 미들험의 에드워드(Edward of Middleham, Prince of Wales), 켄트, 1973.리처드 3세의 대관식 : 현존하는 기록들(the Coronation of Richard III : The Extant Documents), P. W. 헤이먼드와 A. F. 서튼(A. F. Sutton) 편집. 글로스터, 1983.H. 힘홀즈(H. Helmholz) "중세 영국의 결혼 소송(Marriage Litigation in Medieval England)", 케임브릿지, 1974 (2007년에 페이퍼북 판이 나옴)마이클 힉스 :- 앤 네빌(Anne Neville), 스트로우드, 2006- 그릇되고 이랬다 저랬다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클라렌스(False, Fleeting, Perjur'd Clarence), 글로스터, 1980- 리처드 3세(Richard III), 스트로우드, 2000 (개정판)- 국왕 옹립자 워릭(Warwick the Kingmaker), 옥스포드, 1998 (2002년에 페이퍼북 판이 나옴)- 왕자는 한 명? 아니면 두 명? (One prince or tow?', The Ricardian, Vol. IX, 1993, pp. 469-72.J. L. 레인스미스(J. L. Laynesmith), "마지막 중세의 왕비들(The Last Medieval Queens)", 옥스포드, 2004J. R. 랜더(J. R. Lander), "장미 전쟁(The Wars of the Roses), 런던, 1974 (White Lion 판)로즈머리 호우록스(Rosemary horrox), 앤 서튼(Anne Sutton), "글로스터 공적으로서 리처드의 몇몇 지출내역, 1475-7(Some expenses of Richard Duke of Gloucester, 1475-7)", The Ricardian, Vol. VI, 1983, pp. 266-9.1459-1486년 기간의 크로울랜드 연대기, N. 프로니(N. Pronay), J. 콕스(J. Cox) 편집, 런던, 1986.셜리 ㅁ. 싱클레어(Shelley A. Sinclair) "이자벨 버틀러의 유괴 : 랭카스터 왕조 시절 잉글랜드의 납치와 부의 추구(The 'ravishing' of Isabel Boteler : abduction and the pursuit of wealth in Lncasterian England), The Ricardian, Vol. XI, no 146, 1999년 9월배리 윌리엄즈(Barrie Williams) :- 포르투갈과의 외교관계와 신앙심 깊은 공주의 중요성(The Portuguese connection and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princess'), The Ricardian, Vol. VI, pp. 138-5- 포르투갈과 맺은 결혼 협상들 : 그 대답 (The Portuguese marriage negotiations : a reply), The Ricardian, Vol. VI, pp. 235-6에드워드 4세의 어머니 세실리 네빌은 워릭 백작의 고모였다.

그래서 클라렌스와 글로스터 형제는, 나이 차이는 거의 안나지만, 이자벨과 앤 자매의 5촌 당숙이 된다.

즉, 앤의 친할아버지의 어머니인 조앤 보퍼트(Joan Beaufort)는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의 친증조할아버지인 헨리 4세의 의붓동생이다.

당시 성소로 들어가면 죄인이라도 끌어내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일종의 치외법권인 셈이다.

워릭 백작부인은 워릭 백작이 전사하고 에드워드 4세가 복위함에 따라서 자신이 반역자가 된 셈이기 때문에 성소로 도피한 것이다.

라틴어 단어 rapere(빼앗다)의 수동태 과거분사에서 유래에는 sister로 되어 있는데, 최소한 수녀는 아닐 것이 확실하므로, 능력이 닿는 대로 가장 비슷할 것 같은 뜻의 단어로 번역해서 넣었다.

하느님의 가호를 받아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역대 기독교도 왕들의 호칭에 DEI GRATIA라고 되어 있는 문구는, 바로 이 의식을 치렀음을 암시한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12월 25일에 시작하여 12일 동안 이어지며, Twelfth Night라 하면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째인 1월 6일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1)앤의 죽음 2)앤과 이혼 두 가지 헛소문이 있었는데, 앤이 아프자마자 2)를 기각하고 앤이 독살당하는 것으로 1)의 설이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조카였던 에드워드 5세의 자리를 빼앗고에드워드 5세와 그의 형제들을 런던탑에 가두었던 왕 입니다.

결국 조카가 죽었는데 리처드 3세가 그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며 민심이 흉흉해 지기도 하였죠.게다가 바로 다음 왕이 튜터 왕조로 바뀌면서 ( *리처드 3세는 요크 왕조)역사에는 그의 악행이 많이 밝혀집니다.

각종 매체에서도 악인으로 등장하는 등 후세에도 그리 평가가 좋지 못한 국왕...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구요...2012년 레스터에서 정체 불명의 유골이 발견됩니다.

3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의 검사 결과 리처드 3세가 유골의 주인이라고 밝혀집니다.

후세에 평가가 어떻든간에 영국의 왕 이었으니 무덤을 만들워 줘야 하겠죠.유골이 발견된 장소 (레스터) 와 리처드 3세 가문의 고향 (요크)이 두 지역 사이에서 무덤의 위치를 두고 법적 분쟁이 일어납니다.

결과는 유골이 발견된 레스터 지역의 승리로 돌아가죠.(무덤 위치를 두고 법적 소송까지 일어나다니.... 뭔가 섬짓하죠...?)우여곡절 끝에 영국 왕실이 주관하고 레스터 시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형식의 성대한 장례식이 열립니다.

레스터 시 측에서는 이제 리처드 3세의 무덤을 통해 관광 수익을 올린 다는 계산이 있었겠죠.참고로 이 날 장례식에는 "The 오이" 베네딕트 컴버내치 가 참석합니다.

(리처드 3세의 후손 이라고 하네요... 왕족이었어...)흥미롭게도 장례식이 있던 날이 2015년 3월 26일 인데리처드 3세가 레스터에서 안식을 찾자마자강등권에 있던 "레스터 시티" 는잔여경기 9경기 중 7경기를 승리하면서 기적적으로 강등권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레스터 현지 팬들은 500여년 만에 안식을 찾은 왕의 은총이 아니냐는 농담이 퍼지기 시작하죠..그리고 2016 시즌이 시작되는데요...이게 무슨일인지...15/16 시즌이 시작되자,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레스터 시티 는 미칠듯한 강함을 보여주며 리그 테이블 최상단에 이름을 올린채 시즌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리처드 3세가 그려진 패러디가 나오고,그가 그려진 상품들이 판매되기 시작하기도 하죠.그리고 마침내,창단 130여년 만에 처음으로"1부리그 에서 우승하며"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레스터 시티.급기야 우승 확정 후에는영국의 가디언지 1면에 리처드 3세와 레스터 시티의 관계에 관한 기사마저 실리게 됩니다.

.           (3) 그의 아내 : 레이디 앤 네빌(Anne Neville)마리 반필드(Marie Barnfield) 씀  어릴 적  앤 네빌(Anne Neville)은 리처드 3세의 아내이자 왕비이다.

그녀는 워릭 백작 부부인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과 앤 보챔프(Beauchamp)의 둘째 딸이며, 그녀의 언니 이자벨(Isabel Neville, 1451년생)은 클라렌스 공작부인이다.

앤은 에이븐 강(Avon River)이 내려다 보이는 워릭 성(Warwick Castle)에서 1456년 6월 11일에 태어났으며, 그 마을에 있는 성모 마리아 신학대학 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바라고 있었지만, 결국에 두 딸이 자신들 부부의 상속자가 될 것임을 서서히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앤이 태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인 워릭 백작은 이미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전 해 세인트 알번스(St. Albans)의 첫번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덕분에 칼레의 수비대장(Captain of Calais)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앤이 거의 한 살이 다 되었을 때 워릭 백작 부부는 칼레에 거처를 차렸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앤은 이후 3년을 부모 그리고 언니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워릭 성>   요크 가문의 승리와 함께 워릭은 섬으로 돌아왔다.

에드워드 왕의 수석 외교관이자 군인으로서, 워릭 백작은 종종 집을 떠난 상태였을 것이고, 이자벨과 앤은 아마도 어머니와 함께 성에 남았을 것이다.

두 소녀가 어디에 살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노스 요크셔(North Yorkshire)의 미들험 성(Middleham Castle)이 아마도 그들의 거처였을 듯 하다.

앤은 친삼촌인 조지 네빌(George Neville)이 1465녀 9월에 요크의 총대주교로서 즉위식을 가질 때 처음으로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9살이었다.

또한 같은 해 왕의 막내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Richard, Duke of Gloucester, 1452년생)가 프랜시스 로벨 경(Francis Lord Lovell, 1456년생) 및 몇몇 귀족 자제들과 함께 워릭 백작의 궁정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그 전 해 앤의 아버지와 에드워드 왕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는데, 에드워드 왕이 프랑스의 신부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워릭 백작의 외교적 중재를 고작 젠트리 계급의 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과 비밀리에 결혼하였음을 공언하는 것으로 답하였기 때문이다.

새 왕비는 자매들이 여럿이었고, 때문에 워릭 백작은 왕국 내 유력한 사윗감을 그녀들에게 뺏길 판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은 당시 글로스터 공작과 로벨을 각각 이자벨과 앤의 신랑감으로 찍고 있던 듯 하다.

 하지만 워릭은 당시에 자신의 두 딸을 왕의 두 동생과 각각 결혼시키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이 경우라면 글로스터 공작은 이자벨이 아닌 앤과 혼인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이자벨이 클라렌스 공작과 결혼하게 되면, 앤과 글로스터의 결혼은 ‘근친혼’의 범주에 들어가 불법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힉스(Hicks), 앤 네빌, Tempus, 2006, 2006년도판 BBC 역사 매거진 ‘리처드 3세 왕은 과연 근친상간을 저질렀나?'). ‘법적으로’ 혼인이 제한되는 경우는 성적인 결합으로 인하여 ‘하나의 육체’가 되었을 때만 국한되었다.

즉 이에 따르면, 사면장 없이 이전 배우자의 친척, 또는 이론적으로 이전 애인과의 친척과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결혼하는 두 사람의 혈연자가 친척, 또는 ‘혼인 관계’라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워릭의 계획한 이중 결혼식의 유일한 장애물은 왕이었다.

왕은 클라렌스의 조지의 결혼이 중요한 외교적 흥정 대상일 것이 때문에, 자신의 맏아우를 워릭 가문의 후계자로 넘겨주는 것을 반대하엿다.

워릭 가문의 자매는 매우 좋은 신부감이었으나, 그들은 아버지의 샐리스버리(Salisbury) 백작령과 어머니의 광대한 영지들, 즉 워릭(Warwick)과 남서쪽의 디스펜서(Despencer) 백작령 등을 균등하게 상속받아야 했다.

(북쪽에 있는 네빌 가문의 영토는 남자 후계자에게만 상속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워릭 백작이 아닌 그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

)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워릭은 클라렌스의 동의를 얻어 교황에게 사면장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교회법으로 볼 때 그의 딸들은 왕의 동생들과 원칙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가까운 친척 사이였기 때문이었다1. 우리는 적어도 워릭 백작이 이자벨의 결혼에 대한 사면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문서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리처드와 앤의 결혼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고, 정황을 보았을 때 사면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두 쌍의 결혼에 대한 사면장들은 바티칸 기록 보관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때는 바야흐로 1468년 말, 워릭 백작과 왕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져버렸고, 리처드는 누구의 편이 될 것이냐는 다그침을 받았다.

리처드는 왕의 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떠남으로서, 앤과의 결혼은 깨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로벨 경은 이미 앤의 사촌인 앤 피츠휴(Anne FitzHugh)와 결혼한 상태였다.

  랭카스터의 웨일즈 왕자와 결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렌스는 워릭과 함께 음모를 꾸며 1469년 7월 12일 칼레에서 이자벨 네빌과 비밀 결혼식을 치렀다.

이 결혼은 클라렌스와 워릭이 반역을 일으키는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왕의 총신들을 박살내고 에드워드 왕을 포로로 가뒀다.

아마도 클라렌스가 에드워드 대신 왕이 되고 네빌이 배후에서 조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쿠데타를 지속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왕과 재화합하였지만,  이내 반란을 또 일으켰고,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였다.

앤은 부모와 언니, 그리고 형부인 클라렌스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 생활을 떠났다.

이 자벨이 낳은 첫 아이는 배에서 사산되었다.

          <랭카스터 가문 : 헨리 6세, 그의 아내 앙주의 마거릿, 부부의 아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19세기에 판화에 그려진 초상화이고,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크 가문 :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 에드워드 4세가 랭카스터파의 일개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한 덕분에 불필요한 정치적 파란을 겪게 되었고, 이는 그 자신의 일시적 퇴위와 바넷, 툭스버리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참혹한 전투를 초래하였다.

 당대 최고의 미녀로 평가받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자신의 낮은 신분 때문에 정도 이상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이 앤이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Margaret of Anjou)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인 랭카스터의 에드워드(Edward of Lancaster)와 결혼하게 된 전후배경이다.

마거릿 왕비는 프랑스의 루이 11세를 설득하여 지원을 약속받은 후, 에드워드 왕과 군사작전으로 결판을 내기 위해 워릭과 동맹을 맺었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와 앤은 8촌지간2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사면장 없이 결혼할 수 없었지만, 1470년 7월 25일 에드워드와 앤은 서로 낯설어 하면서 앙제(Angers) 성당에서 엄숙한 약혼식을 올렸다.

1주일 후 워릭과 클라렌스는 앤과 그녀의 어머니를 프랑스에 남기고 영국을 침공하였다.

에드워드 4세는 패하여 해외로 달아났고, 헨리 6세는 복위하였다.

교황의 사면장이 도착하자, 앤과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12월 13일 앙부아즈(Anboise)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때 웨일즈 왕자는 17세, 앤은 14세였다.

  크리스마스 이후, 젊은 왕세자 부부는 각자 어머니를 대동하고 디프(Dieppe) 해안으로 이동하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그들은 3월이 되기 전에 웨이머스(Weymouth) 항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당시 앤은 웨일즈 왕자 및 마거릿 왕비와 한 배에 타고 있었고, 워릭 백작부인은 다른 배를 타고 있었다.

날씨 상태는 그때까지도 나빠서, 앤의 어머니를 태우고 있던 배는 홀로 떨어져 동쪽으로 수 마일이 떨어진 곳으로 표류하였다.

그들은 1471년 4월 14일에 상륙하였으나, 바로 그 때 다시 세워진 왕권이 몰락한 것을 목격하였다.

에드워드 왕이 다시 돌아와 런던을 접수하였으며, 클라렌스는 다시 요크 가문 쪽으로 붙었고, 바로 그 날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전사하였다.

워릭 백작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뉴 포레스트(New Forest)에 있는 볼리유 수도원(Baeulieu Abbey)의 성소로 들어갔다3. 앤은 툭스버리(Tewkesbury)로 향하는 행렬에 억지로 끼어 이동하였고,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에드워드 왕의 군대가 랭카스터의 군대를 박살냈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병사들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앤은 언니 이자벨과 형부인 클라렌스 공작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결혼으로 인한 분쟁  앤의 아버지와 남편은 모두 반역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볼리유 수도원의 성소로 도피하였으며, 에드워드 왕은 이를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곧 무장한 경비병들로 그녀를 감시하게 하였다(BL MS Cotton Julius BXII, f. 317). 부모의 영지는 모두 몰수당했으며, 원래 앤과 이자벨이 나눠 가져할 영지를 이자벨의 남편인 클라렌스가 모두 차지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앤의 어린 사촌인 조지 네빌(George Neville)에게 주어졌어야 할 영국 북쪽에 있는 네빌 가문의 영지도, 조지 네빌의 아버지인 몽태규 후작(John Neville, Marquess of Montagu)이 바넷 전투에서 반역자로 죽는 바람에, 글로스터 공작이 가져가고 말았다.

앤의 언니인 이자벨과 클라렌스 공작 모두 앤의 재혼 또는 워릭과 샐리스버리의 영지 상속권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9개월이 조금 못미치는 시간 동안 리처드는 끊임 없이 앤과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양자 모두에게 신중한 결합이었으며, 또한 앤의 아버지과 원래 점지해주던 혼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감시자 노릇을 하던 클라렌스는 동생이 앤의 배후에 있다고 보고, 앤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자 하였다.

아마도 그는 처제를 주방의 하녀로 모습을 감추게 하려고 했던 듯 싶다.

하지만 앤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상속권을 위해서 싸웠을 것이다.

결국에 리처드가 앤을 찾아냈고, 그녀를 데리고 런던의 성 마틴(St. Martin) 수도원의 성소의 은신처로 갔다.

    <앤 네빌과 리처드의 사인>앤 네빌은 "Anne Warwick"이라 썼고, 리처드는 "R(ichard) Gloucester"라 썼다.

   앤은 이에 리처드와 결혼하기로 동의하였고, 최종적인 사면권을 얻기 위해 로마로 사절을 보냈다.

리처드는 이전에 앤이 결혼하였던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와 8촌 지간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사면장 없이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72년 2월, 에드워드의 압력에 의하여 클라렌스는 리처드와 앤이 ‘재산을 나누어 갖지 않는 조건 하에서’ 그들의 결혼을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 해 3월 18일까지, 클라렌스는 리처드에게 몇몇 영지들을 양도하는데 동의하였다.

(CPR 1467-77, p. 330). 리처드와 앤의 사면장은 4월 22일에 로마에서 비준되었고, 영국으로 출발한 것은 6월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건대 리처드와 앤은 클라렌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면장이 도착하기 전인 1473년 1월에 결혼 한 듯 하다.

당시 앤의 나이 16세, 리처드의 나이 19세 또는 20세였다.

1473년 여름에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왕의 허락을 받아 볼리유의 성소에서 머무르고 있던 앤의 어머니를 데리고 미들험에 있는 자신의 궁정으로 모셔갔다.

  하지만 워릭 백작부인은 자신의 영지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두 딸과 사위들의 금전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에드워드 왕이 워릭 백작부인의 재혼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녀가 재혼한다면, 그 남편은 그녀의 광대한 영지와 재산 덕분에 왕국에서 가장 막강한 인물이 될 터였다.

백작부인의 영지를 두 딸과 사위들에게 상속하면 상황이 안정될 것으로 보였으나, 클라렌스는 이를 방해하려 들었다.

[리처드 3세] 생각의 끝은?


1473년 가을까지 그는 글로스터 공작에 대항하여 무장하였으며, 이 상황은 곧 클라렌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던 한 영국인 방문자에 의해 프랑스 궁정에도 보고되었다.

  <클라렌스 공작 부부, 조지 플란타지넷과 이자벨 네빌. 카디프 성당의 스테인글라스>   ‘글로스터 공작은 강제로 이전에 웨일즈 왕자와 결혼하였던 고(故) 워릭 백작의 딸을 아내로 취했으며, 클라렌스 공작에 맞서 끊임 없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클라렌스는 그의 형인 에드워드 왕과 이전에 워릭 백작령을 받기로 약속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글로스터가 백작의 둘째 딸과 결혼하는 것을 이유로 영지를 나누어 갖는 것을 원하치 않고 있습니다.

’ (Calendar of Milanese State Papers, p. 177).  결혼이 강요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두려움은 근거 없는 얘기다.

하지만 그러하였기 때문에, 클라렌스가 리처드와 앤의 결혼이 교회법으로 봤을 때 원래 무효라는 점을 들어서라도 리처드가 워릭 백작령의 일부라도 상속 받는 것을 반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요된 결혼은 특히 지주 계급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

특히 신부 측의 부모 또는 보호자가 아닌 신랑에 의한 강요라면 더했다.

  당대의 사회는 특히 신부의 가족 또는 보호자의 의사에 반하여 상속녀를 유혹하는 일을 도둑질을 목적으로 한 ‘유괴(raptus4)’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대의 사회 통념상 유괴와 가출은 그 뜻에서 차이가 거의 없었다.

클라렌스의 감시에서 앤을 성 마틴 수도원의 성소로 데려온 일은, 리처드가 그녀를 유괴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었다.

클라렌스가 리처드의 납치설을 주장한 근거는 이러한 점들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교회법이 당대의 사회 관습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신부가 직접 동의하는 경우라면, 신부측 가족의 동의가 없어도, 신랑과 신부의 정당한 결혼이 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육체적인 성관계나 동거하는 것도 법적으로 가능하였다.

비록 그 결혼이 실제로 ‘강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어도 그러하였다.

  클라렌스는 영지의 분할 상속을 막기 위해 동생의 결혼이 유괴에 의한 것이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클라렌스가 그 결혼에 대해 교회법에 의거하여 더욱 강하게 반대했다고 했을지라도, 기록으로 남겨진 바는 없다.

   결국에 클라렌스는 자신의 영지를 압수하겠다는 왕의 위협에 굴복하였다.

영지 상속에 대한 분란은 1474년 5월 의회의 의결로 가라앉았다.

연대기 작가 크로울랜드(Crowland)는 ‘워릭 백작 부인이 자연스레 죽은 것처럼’ 간주하여 그녀의 영지를 즉시 두 딸들과 사위들한테 즉시 지급할 것을 명시한 포고령에 경악하였다.

클라렌스가 그때까지도 워릭 백작부인의 상속재산 대부분을 사실상 보유하고 있었고, 리처드와 앤의 몫으로 돌아간 것은 다른 가문의 재산에 속하는 것이었다.

클라렌스는 앤과 리처드의 결혼의 적법성에 대하여 끊임 없이 중상모략을 가하였다.

즉, 교회가 그들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함으로서 리처드와 앤이 이혼하게 된 상태에서 다시 재결합하는 경우, 그들의 권리를 지켜줄 법적 문구를 발표해버리는 식이었다.

또한 클라렌스는 리처드가 앤과 두 번째 결혼을 하기 위해선 지켜야 할 권리들은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다는 식으로 떠들고 다녔다 (C. Given-Wilson [ed.], Parliament rolls of Medieval England, Edward IV - October 1472 - 2nd roll). 하지만 그 어떠한 교회 법정도 혼인의 적법성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대중 앞에서 선언해야 한다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또한 리처드와 앤의 결혼은 서로간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며, 부부 사이는 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글로스터 공작부인<글로스터 공작부부, 앤과 리처드>  공작부인으로서 앤의 활동은 살짝 훑어볼 수 있는 정도이다.

1475년과 1477년 사이의 예시는 그 일면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1475년, 리처드는 프랑스로 원정을 가는 바람에 자리를 비웠다.

이 때 앤은 요크 시의 시장 및 시의원들과 함께 서신으로 왕래하였으며, 특히 그녀에게 중요한 편지 한 통은 그레이스톡 경(Loard Greystock)을 비롯한 남편의 참사회 회원들의 손에 딸려 보내기도 하였다 (York City Chamberlains’ Account Rolls, Surtees Soc. Vol. 192, 1980, p. 152). 리처드와 앤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Edward)는 1476년 봄 또는 여름에 미들험(Middleham)에서 태어났다.

적어도 공식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부부의 유일한 혈육이다.

같은 해에, 앤은 네빌 가문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더럼 수도원(Durham Priory)의 자선 회원5이 되었다.

12월에 그녀는 아마도 리처드와 함께 런던에 있었던 듯 싶다.

당시 리처드는 ‘공작 각하의 분부에 의하여, 각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내를 위하여 대령하라고 했던 모피’와 ‘공작부인께 대령하라고 명령하셨던 비단옷과 다른 물품들’에 대한 비용을 자신의 동-잉글랜드의 영지에 달아놓았다.

1477년 리처드와 앤은 요크의 성체 협회(Corpus Christi Guild)에 가입하였다.

앤은 자신의 개인사제를 승진시키기 위하여 더럼 수도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마도 같은 해에 케임브릿지의 퀸스 컬리지(Queen’s College)에 부부가 공동으로 기부금을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가 되다.

  <리처드 3세와 앤 왕비><리처드 3세, 아내와 함께 대관식을 치르다>영드 The White Queen 8화의 한 장면 (배우는 아뉴린 바너드(Aneurin Barnard), 페이 마세이(Faye Marsay))   에드워드 4세의 죽음 이후, 리처드는 남쪽으로 가서 어린 에드워드 5세의 호국경 자리를 꿰찼다.

앤은 한 달 후에 런던으로 향했고, 6월 5일 화요일에 도착하였다.

곧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였고, 결국에 리처드가 왕위를 차지하였다.

같은 시기에 앤은 언니 이자벨의 아들이자 고아인 상태로 도르셋 후작의 후견을 받고 있었던 워릭 백작 에드워드(Edward Plantagenet, Earl of Warwick)을 돌보기로 하였다(Mancini).  리처드와 앤은 공동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웨스트민스터 타워에서 치러진 식 하루 전에, 그녀는 여성용 가운과 길이가 27야드(=11.88m)나 되는 금으로 수놓인 흰색 망토를 입었다.

그 망토는 담비와 족제비의 털로 만들어졌고, 흰색 비단과 금으로 수놓여진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Laynesmith, p. 92). 대관식은 아침 7시에 웨스트민스터의 홀에서 사원으로 걸어서 행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부부는 미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대관식과 도유식6을 치렀다.

그 날은 장엄한 축하 연회와 함께 끝났으며,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금으로 만든 접시에, 앤은 금박을 입힌 접시에 음식을 대접받았다.

  <리처드 3세의 가족 : (왼쪽부터) 왕비 앤 네빌, 리처드 3세, 부부의 아들 미들험의 에드워드>   왕비로서 앤이 군림했던 시간은 짧았고, 당시 왕비의 궁정에서 남겨진 기록도 없어서, 아직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남아있는 증거에 따르면, 앤이 글로스터 공작부인일 때부터 그녀를 모시던 북부 신사계급 출신 여인들이 그대로 왕비의 시녀로서 궁정에서 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종종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의 대관식 기간 동안, 앤은 워릭에 도착하여 리처드를 잠시 멈춰 세우고, 그녀가 일전에 윈저(Windsor)에서 접견하였던 에스파냐 대사를 만나게 하였다.

부부는 앤의 고향(=워릭)에서 1주일 정도 머물렀다.

이후 앤과 리처드는 요크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7살 먹은 아들 에드워드를 웨일즈 왕자로 선포하였다.

국왕 일행은 다시 남쪽으로 향했고, 폰티프락스(Pontefract)를 방문하여 2주일을 머물렀다.

 앤은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을 위해 남편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에 머물렀다.

3월에, 그녀와 리처드는 이틀 동안 말을 타고 케임브릿지의 퀸스 컬리지로 행차하였고, 그곳에서 '가장 거룩하신 앤 왕비 마마(께서는)..... 막대한 기부금으로 대학의 재정을 크게 늘려주셨다' (Laynesmith, p. 256). 그에 대한 보답으로, 케임브릿지 대학의 간부들은 매해 5월 2일에 '가장 고명하신 군주(=리처드)와 전하의 사랑하시는 앤 왕비 마마를 위하여' 미사를 치르기로 결의하였다 (Hammond, p. 20). 이후 부부는 노팅엄(Nottingham)에 궁정을 차렸는데, 그곳에서 아들 에드워드 왕자가 미들험에서 죽었다는 불의의 소식을 들었다.

'여러분은 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비탄에 압도되어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Crowland, p. 171).  에드워드 왕자의 죽음은 리처드와 앤에게 개인적인 비극일 뿐만 아니라 왕조에도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제 통치 왕조의 안정성과 왕조의 지속을 보장해줄 후계자가 사라졌다.

헨리 튜더(Henry Tudor)는 에드워드 4세의 맏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York)를 미래의 배우자로 맞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앤이 또 아들을 낳아야할 필요성이 시급히 대두되었다.

그녀는 아직 27세였고 건강해보였으며, 그랬기 때문에 리처드와 함께 국내를 여행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가 어디를 갔던지 간에, 즉 예를 들어 리처드가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여 해상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스카보로(Scarborough)에 주둔지를 차렸을 때조차도, 앤은 역시 그곳에 있었다.

앤이 스카보로에서 머물렀던 사각형의 탑은 1538년에 여행객 존 릴런드(John Leland)에 의해 '왕비의 타워 또는 임시거처(The Queens Towre or lodging)'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The Itinerary of John leland the Antiquary, ed. Thomas Hearne, Vol. 1, 1745, p. 62). 앤은 리처드와 함께 왕비로서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였다.

이 때 앤의 시녀로서 에드워드 4세의 맏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아마도) 그 여동생들도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그 해 3월에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자매들은 어머니와 함께 성소에서 나오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크로울랜드의 연대기는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관심이 춤과 환락에 쏟아졌으며' 앤 왕비와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옷을 자주 바꿔 입었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십이야에7, 헨리 튜더가 1485년 여름에 영국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당도하였다.

  그 즉시, 리처드에 대한 적대적인 소문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한 소문들은 리처드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꾸며내어 퍼트린 것이다' (Lander, p. 255). 크로울랜드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 동엔에 왕은 엘리자베스에게 호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왕이 앤이 죽고 난 뒤, 또는 '이미 그 근거가 충분한 것으로 보이므로 앤하고 이혼한 뒤에'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연대기 작가는 왕이 앤과 이혼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클라렌스가 이전에 리처드와 앤의 결혼을 중상모략하면서 했던 바로 그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앤은 '바로 며칠 뒤에' 죽을 병에 걸렸으며, 이 상황에서도 리처드가 이혼을 고려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면 다소 놀라운 일이 될 것이므로, 앞선 소문은 이제 그가 아내를 독살하려 한다는 루머로 대체되었을 것이다8. 앤의 병세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는, 앤의 병세가 2달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 그리고 의사들이 리처드에게 그녀의 침상으로 다가가지 말라고 조언한 것 정도이다.

  현재 남겨진 증거로 보면, 리처드는 자신이 홀아비가 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조카인 엘리자베스의 결혼 협상을 고려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리처드가 조카와 직접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포르투갈의 공주와 결혼하고 동시에 조카를 포르투갈의 왕자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앤은 만 29세 생일을 석 달 남겨두고 1485년 3월 16일에 죽었다.

바로 그 날, 영국엔 개기일식이 관측되었다.

그녀는 '왕비에게 어울리는 경의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crowland, p. 175). 보챔프 가문의 여러 위인전을 작성하였던 존 로스(John Rous)에 의하면, 앤은 '품위가 있었으며, 상냥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행동은 늘 칭찬할만 하였고, 고결하였으며, 그녀의 이름인 '앤(Anne)'이 나타내고 있듯이 우아함으로 가득차있었다.

' 이제 앤의 이야기에서 후기를 쓸 때가 왔다.

3월 30일, 리처드는 런던 시장과 시민들 및 가능한 많은 영주들을 성 요한 자선회당(Hospital of St. John)의 대강당에 불러모았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 위하여 앤을 독살하였다는 루머에 대해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연설하였다.

'왕은 이전의 일에 대해 슬픔과 언짢음을 보여주면서, 그런식으로 결혼하려는 것이 절대로 자신의 생각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며, 왕비의 죽음에 결코 기뻐한 적도, 또한 바란 적도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왕비의 죽음 때문에 큰 비탄에 사로잡혔으며, 남자로서 견딜 수 없을만큼 괴롭다고 하였다.

....' (Lander, pp. 255-6).주요 출처 / 더 읽어보세요데이비드 볼드윈(David Baldwin) "리처드 3세(Richard III)" 스트로우드(Stroud), 2012마리 반필드(Marie Barnfield), "무효화된 혼인 제한, 교황 사면장과 이혼 : 리처드 3세와 그의 결혼에 대하여(Diriment impediments, Dispensations and Divorce : Richard III and Matrimony', The Ricardian, Vol. XVII, 2007 PP. 84-98아네트 카슨(Annette Carson), "리처드 3세 : 비난받는 왕(Richard III : The Maligned King)" 스트로우드, 2008P. D. 클라크(P. D. Clarke), "영국 왕가의 혼인과 15세기 로마 교황청 법원(English royal marriages and the Papal Penitentiary in the fifteenth century)", 영국 역사 비평(English History Review), 120, 2005로스 연대기(The Rows roll). W. H. 커토프(W. H. Courthope) 편집, 런던, 1859.로다 에드워즈(Rhoda Edwards), "리처드 3세의 순방, 1483-1485(The Itinerary of Richard III, 1483-1485)", 글로스터, 1983중세 영국 의회 의사록(Parliament rolls of Medieval England), 크리스토퍼 기븐-윌슨(Christopher Given-Wilson) 편집.P. W. 헤이먼드(P. W. Hammond), "웨일스 왕자, 미들험의 에드워드(Edward of Middleham, Prince of Wales), 켄트, 1973.리처드 3세의 대관식 : 현존하는 기록들(the Coronation of Richard III : The Extant Documents), P. W. 헤이먼드와 A. F. 서튼(A. F. Sutton) 편집. 글로스터, 1983.H. 힘홀즈(H. Helmholz) "중세 영국의 결혼 소송(Marriage Litigation in Medieval England)", 케임브릿지, 1974 (2007년에 페이퍼북 판이 나옴)마이클 힉스 :- 앤 네빌(Anne Neville), 스트로우드, 2006- 그릇되고 이랬다 저랬다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클라렌스(False, Fleeting, Perjur'd Clarence), 글로스터, 1980- 리처드 3세(Richard III), 스트로우드, 2000 (개정판)- 국왕 옹립자 워릭(Warwick the Kingmaker), 옥스포드, 1998 (2002년에 페이퍼북 판이 나옴)- 왕자는 한 명? 아니면 두 명? (One prince or tow?', The Ricardian, Vol. IX, 1993, pp. 469-72.J. L. 레인스미스(J. L. Laynesmith), "마지막 중세의 왕비들(The Last Medieval Queens)", 옥스포드, 2004J. R. 랜더(J. R. Lander), "장미 전쟁(The Wars of the Roses), 런던, 1974 (White Lion 판)로즈머리 호우록스(Rosemary horrox), 앤 서튼(Anne Sutton), "글로스터 공적으로서 리처드의 몇몇 지출내역, 1475-7(Some expenses of Richard Duke of Gloucester, 1475-7)", The Ricardian, Vol. VI, 1983, pp. 266-9.1459-1486년 기간의 크로울랜드 연대기, N. 프로니(N. Pronay), J. 콕스(J. Cox) 편집, 런던, 1986.셜리 ㅁ. 싱클레어(Shelley A. Sinclair) "이자벨 버틀러의 유괴 : 랭카스터 왕조 시절 잉글랜드의 납치와 부의 추구(The 'ravishing' of Isabel Boteler : abduction and the pursuit of wealth in Lncasterian England), The Ricardian, Vol. XI, no 146, 1999년 9월배리 윌리엄즈(Barrie Williams) :- 포르투갈과의 외교관계와 신앙심 깊은 공주의 중요성(The Portuguese connection and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princess'), The Ricardian, Vol. VI, pp. 138-5- 포르투갈과 맺은 결혼 협상들 : 그 대답 (The Portuguese marriage negotiations : a reply), The Ricardian, Vol. VI, pp. 235-6에드워드 4세의 어머니 세실리 네빌은 워릭 백작의 고모였다.

그래서 클라렌스와 글로스터 형제는, 나이 차이는 거의 안나지만, 이자벨과 앤 자매의 5촌 당숙이 된다.

즉, 앤의 친할아버지의 어머니인 조앤 보퍼트(Joan Beaufort)는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의 친증조할아버지인 헨리 4세의 의붓동생이다.

당시 성소로 들어가면 죄인이라도 끌어내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일종의 치외법권인 셈이다.

워릭 백작부인은 워릭 백작이 전사하고 에드워드 4세가 복위함에 따라서 자신이 반역자가 된 셈이기 때문에 성소로 도피한 것이다.

라틴어 단어 rapere(빼앗다)의 수동태 과거분사에서 유래에는 sister로 되어 있는데, 최소한 수녀는 아닐 것이 확실하므로, 능력이 닿는 대로 가장 비슷할 것 같은 뜻의 단어로 번역해서 넣었다.

하느님의 가호를 받아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역대 기독교도 왕들의 호칭에 DEI GRATIA라고 되어 있는 문구는, 바로 이 의식을 치렀음을 암시한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12월 25일에 시작하여 12일 동안 이어지며, Twelfth Night라 하면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째인 1월 6일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1)앤의 죽음 2)앤과 이혼 두 가지 헛소문이 있었는데, 앤이 아프자마자 2)를 기각하고 앤이 독살당하는 것으로 1)의 설이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뛰어난 행정능력을 인정받아지지자들의 협조를 받으며 즉위했지만조카를 잔인하게 숙청했다는 면에서 신뢰를 잃고 보즈워스 전투에서아군의 ☆배신☆으로 전사했다고 하네요..뛰어난 행정가이자 군인이었지만 ☆도덕성의 결함☆으로지지세력을 잃으면 오래 못간다는것을잘 보여준 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얘는 항상 사회성의 결함,사교성의 결함,성격파탄자,소시오패스,은둔형 외톨이,도덕성의 결함 이런 애들만 맡지???)하지만 이건 사극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거니까좀 다를 수도 있겠죠?왕쟈님도 아니고 왕이래요 왕☆THE KING☆ (하지만 도덕성의 결함이 있지)왕관 너무 좋아하는 우리 애들.Honey, you should see me in a crown필터 좀 다르게 한거랑 확대한거와...진짜 이쁘다.

..저런 왕이라면 진짜 좋아할 수 있어요ㅠㅠ(도덕성의 결함이라도)리처드 3세의 초상왼쪽이 만약에 그 보즈워스 전투라면리처드 3세는 저기서 전사하는 건가요예고편 보니까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던데요.그래도 잼있겠다.

방영일이..5월 7일 한국시각으로 새벽 5시랬죠?저 그때 어떻게 일어나요..토요일이라 다행이지 일요일이었어봐학교가서 하루종일 졸지.하지만 토욜이니 5시에 일어나 우리리처드 3세를 보고 다시 잠들겠습니다.

..마침 명동예술극장에서 이 공연이 올라왔다.

아..진짜 명동예술극장 라인업은 계속 관심을 가져야지.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ㅠㅠㅠ새벽에 급 표 찾다가 겨우 구해서 갈 수 있었다.

자리는 1열자리는 좋은데 자막보면서 무대 보니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아는 단어 나오면 혼자서 좋아하면서 관람;;;) 우리나라 배우들은 전공, 학력이랑 상관없이 보게 되는데, 이쪽은 좀 아닌 듯. 중앙 희극원이니 중앙 연극학원 출신들인데 연기에 구멍이 하나도 없다.

리차드 3세는 멀쩡하고 준수한 남자였다가 추악한 내면을 드러낼 때마다 곱추가 된다.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무대 뒤의 병풍 한면씩 피가 흐름. 나중엔 그 화선지의 먹물까지 함께 흘러내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마지막 대사의 一匹馬.. 一匹馬 .. (말 한필..주면 왕국도 내준다고 ) 셰익스피어 희곡을 연기할 때마다 주의해야하는 것은 그 많은 대사. 그런데 잘하기 힘들다는 것이 함정. 예전에 연극 햄릿 보러갔다가 대사 못한다고 분노하면서 나오기도 했었는데 ...이국적인 대사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무랄 데가 없다.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발성의 대사임. 그런데 ...아 ..왜 이렇게 성조를 모르겠지?  경극을 함께 넣은 것은 신선한 발상이었다.

이분 충격적이었다.

아니..그 할머니였는데 팜플렛 사진은 너무나도 어여쁜 언니가...  ..마침 명동예술극장에서 이 공연이 올라왔다.

아..진짜 명동예술극장 라인업은 계속 관심을 가져야지.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ㅠㅠㅠ새벽에 급 표 찾다가 겨우 구해서 갈 수 있었다.

자리는 1열자리는 좋은데 자막보면서 무대 보니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아는 단어 나오면 혼자서 좋아하면서 관람;;;) 우리나라 배우들은 전공, 학력이랑 상관없이 보게 되는데, 이쪽은 좀 아닌 듯. 중앙 희극원이니 중앙 연극학원 출신들인데 연기에 구멍이 하나도 없다.

리차드 3세는 멀쩡하고 준수한 남자였다가 추악한 내면을 드러낼 때마다 곱추가 된다.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무대 뒤의 병풍 한면씩 피가 흐름. 나중엔 그 화선지의 먹물까지 함께 흘러내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마지막 대사의 一匹馬.. 一匹馬 .. (말 한필..주면 왕국도 내준다고 ) 셰익스피어 희곡을 연기할 때마다 주의해야하는 것은 그 많은 대사. 그런데 잘하기 힘들다는 것이 함정. 예전에 연극 햄릿 보러갔다가 대사 못한다고 분노하면서 나오기도 했었는데 ...이국적인 대사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무랄 데가 없다.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발성의 대사임. 그런데 ...아 ..왜 이렇게 성조를 모르겠지?  경극을 함께 넣은 것은 신선한 발상이었다.

이분 충격적이었다.

아니..그 할머니였는데 팜플렛 사진은 너무나도 어여쁜 언니가...   영국 레스터대학은 수개월에 걸친 DNA 조사 결과 리처드 3세의 유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4일 영국 BBC 등이 보도했다.

                                레스터 대학이 공개한 리처드 3세의 유골 모습. 영국 레스터대는 4일 회견을 열고 DNA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두개골에 대한 조사를 이끈 조 애플비 레스터대 고고학과 및 고대사 교수는 “두개골이 부서기기 쉽긴 하지만 상태가 좋아 연구진에게 세세한 정보를 줄수 있었다”며 “가능한 자세하게 흥미로운 특징들을 조사할 수 있도록 고해상도의 스캔 작업을 벌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사람이 리처드 3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 특징들에 대한 생물학적 이력을 추적했고 폭력적인 죽음의 흔적을 찾기 위해 유골을 세심하게 관찰했다”고 밝혔다.

그는 “유골에서 발견된 증거들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것임을 강하게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유전자 조사는 모계를 통해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통해 이뤄졌다.

3개월 이상 걸렸던 유전자 조사에서 DNA 표본을 제공한 후손은 캐나다의 가구 제작자인 마이클 입센(55)이다.

 DNA 검사 결과 2005년 세상을 뜬 그의 모친이 왕의 누이였던 요크의 앤의 직계 후손인 것으로 밝혀졌다.

                          리차드3세 유해가 발견된 영국 레스터(Leicester)의 시의회 주차장 지하의 옛 교회터                                                           발굴작업인 Mathew Morris 박사 유전학자인 튜리 박사는 “유전자 분석은 어려웠지만 마침내 표본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유골의 DNA 염기서열을 확인한 결과 리처드왕의 후손인 마이클 입센과 일치했다”며 “DNA조사는 유골들이 리처드 3세의 것임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레스터 대학 연구진은 주차장 지하에서 발견된 유골이 리차드 3세라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확언했었다.

이후 유골은 DNA 조사를 포함해 탄소연대측정과 환경 분석과 같은 일련의 시험들을 거쳤다.

                                        발굴 당시 리차드3세 유해 모습. 확연하게 휘어진 착추가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리처드 3세가 문헌 기록대로 매우 폭력적으로 죽음을 맞았다고 보고 있다.

조사 결과 머리쪽에 단검류로 강한 충격을 받은 흔적이 있고 유골의 척추에선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세익스피어의 회곡에 ‘꼽추’로 묘사되었듯이 심하게 휘어있는 척추도 일치한다.

시신이 고위직의 장례에 사용되었던 성당 부지에서 발견된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로 제시됐다.

두개골은 리처드 3세의 생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이용되었다.

                  리처드 3세(Richard Ⅲ, 1452

1485년)은 영국 요크 왕가 최후의 왕이다.

에드워드 4세의 막내 동생으로, 에드워드 4세가 죽자 당시 12세였던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을 대신해 섭정으로 영국을 다스리다가 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에, 에드워드 5세의 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이 무효라 주장하여 대관을 취소시키고, 약 2달 후인 6월 경에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두 조카(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는 8월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리처드 3세가 런던탑에 가두어 살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1485년 보스워즈에서 있었던 헨리 튜더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전투에서 죽은 마지막 영국왕이자, 영국땅의 전투에서 죽은 두 왕 중 한 명이다.

(첫 번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죽은 해롤드 2세))튜더 시대를 거치며 흔히 권세욕이 강하고 책략이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게 되었다.

리처드 3세는 1483년부터 1485년 장미전쟁으로 불리는 영국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해 사망하기까지 2년 간 영국을 통치했다.

[리처드 3세] 완전 대박

영국 역사가들은 그의 죽음과 함께 중세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보고 있다.

 그는 웨일스의 보즈워스 전투 중에 사망했는데 영국 왕이 전투에서 사망한 마지막 사례이다.

흰 장미를 표식으로 삼은 요크 왕가의 리처드 3세와의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한 랭커스터 왕가는 후에 붉은 장미를 표식으로 삼았다.

리처드 3세의 뒤를 이어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7세가 튜더 왕조를 열었다.

 리처드 3세는 튜더 왕조가 들어선 이후 형과 조카, 부인마저 서슴지않고 살해하는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세익스피어가 일조를 했다.

그는 리처드 3세를 그의 회곡에서 영국 왕 중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의 하나로 기록했다.

 많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그의 조카인 에드워드 5세를 죽인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오늘날 영국에선 그가 에드워드 5세를 유폐만 시켰을 뿐이고 폭군의 이미지는 승자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리처드 3세는 그의 조카 에드워드 5세를 런던탑에 유폐시킨 뒤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차드3세의 유해를 수습중인 고고학발굴팀  이번 유골의 발견은 그 진위를 밝힐 절호의 기회이자 그 결과에 따라 역사를 다시 써야할 만큼 파급력이 있다는 평가이다.

이날 회견 장에서 조사에 참여한 레스터 대학의 린 폭스홀 교수는 “그는 이제 우리가 리처드 3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재평가해야할 지 모른다”고 답했다.

                                          발굴 당시 발견된 성당 성가대석 부조 파편  리처드 3세의 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필 스폰 박사는 “리처드에 관심있는 누구에게나 절호의 기회로 500여년의 리처드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소식”이라며 “리처드 왕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자 세익스피어의 희곡은 단지 꾸며낸 이야기일 뿐임을 환기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발굴당시 리차드3세 유해 모습 수년간 리처드 3세를 추적해 온 영화 극작가 필리파 랭글리는 “그의 이야기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라며 “튜더 왕가의 역사가들이 기록하기 이전의 진짜 그의 모습을 발견하길 원한다”고 CNN에 전했다.

 그는 “리처드 3세는 중세 시대의 사람이다”며 “그를 15세기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다른 왕과 공작, 귀족 등도 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한 일을 했다는 걸 알수 있다”고 덧붙였다.

 리처드 테일러 레스터 대학의 부교무과장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에 영광스럽다”고 전했다.

                                                      레스터 성당안에 있는 리차드3세의 묘비                 사진 자료 Associated Press / 구성 : 수연   중국 정부가 선정한 문화리더 ‘사개일비(四?一批)’ 인재로 채택되기도 한 연출가 왕 시아오잉은 이번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중국 최고 연출가로서의 면모를 자랑한다.

중국어 특유의 리듬감과 함께 경극으로 재탄생한 리차드 3세는 그 어떤 셰익스피어 무대보다 신선한 경험을 선사한다.

낯선 만큼 새로운 중국 대륙의 옷을 입은 <리차드 3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단 3일뿐이다.

리차드 3세는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눈이 멀어 모든 것을 잃는 실존 인물이다.

셰익스피어가 이 비극적 인물의 이야기에 본인 특유의 상상력을 녹여내 한 편의 역사극을 낳았고, 중국의 국가대표 극단이 이를 풍성한 이미지와 함께 재탄생시킨다.

텅 빈 무대, 새하얀 배경은 주인공이 하나하나 맛보는 인간의 죄악으로 더럽혀진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부질없는 것. 마지막 순간 모든 글자가 붉게 물드는 배경 아래로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말, 말을 다오! 내 왕관을 내 줄 터이니 말을 다오!”라는 마지막 순간의 대사처럼 권력과 소유욕은 허무함 그 자체이다.

이번 공연은 400년 전, 헛된 욕망의 위험성을 알린 셰익스피어의 메시지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해줄 것이다.

<혈맥>'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뼈아픈 우리 역사를 생생하게 그려낸 사실주의 희곡의 대표작가 김영수 원작'거지 움 같은 땅굴생활' 속 가족의 의미를 묻다‘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한국 근대 사실주의 희곡의 대표작 <혈맥>(1948)을 선보인다.

작가 김영수는 광복 직후의 세태를 배경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극빈한 계층을 있는 생동감 있게 그려내 근대 사실주의 희곡 형성사의 절정에 이 작품을 올려놓았다.

한 시대의 종막과 새 시대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영화화되어 대종상 및 청룡영화상을 휩쓸기도 했다.

<황금용>, <리어왕> 등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세련미를 보여준 연출가 윤광진, 시적인 무대로 작품을 물들일 무대 디자이너 이태섭, 무게감 있는 배우 장두이, 이호성 등이 함께해 기억에서 사라진 우리의 과거를 꺼내 깊이있는 무대로 완성한다.

광복 직후인 1947년, 나란히 늘어선 세 개의 주인 없는 방공호에 도시 빈민들이 둥지를 튼다.

주민들의 공통된 소망은 단 하나, ‘거지 움 같은 이 땅굴생활’을 하루 빨리 청산하는 것이다.

좁디좁은 방공호의 주인이 되기 위해 문패를 달고, 가난을 벗어나는 일은 영어밖에 없다며 자식을 다그치는 그들의 모습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결국 가족이라는 구심점으로 돌아온 이들이 우리를 향해 혈맥으로 이어진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다.

<국물 있사옵니다>대한민국 희극정신의 대표주자 이근삼, 풍자와 아이러니로 현대인을 투시하다!국물도 없는 인생들을 위한 '국물처세술'어느 날 '새 상식'에 눈뜬 샐러리맨의 이야기!대한민국의 역사와 사람들, 우리가 오랜 시간 간직해 온 이야기의 힘은 강력했다.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를 통해 새롭게 재조명된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이영녀>, <토막>의 뜨거운 호응을 2016년에도 계속해서 이어간다.

그 네 번째 작품은 한국 희극의 저력을 보여줄 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1966)이다.

객석의 즐거운 반응을 통해 희극의 중요성을 되새김질한 작가 이근삼은 리얼리즘을 극복하고, 혁신적으로 형식을 실험하는 동시에 우리 연극의 완만했던 템포를 빠르게 이끌어 냄으로써 당시 젊은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50년이 흐른 지금, 희극의 밑바닥에 흐르는 인생의 비극성을 음미해 주기를 원했던 작가의 바람이 사람에 대해 따뜻하지만 집요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연출가 서충식, 그리고 박완규를 비롯한 사람 냄새나는 배우들을 통해 실현된다.

국물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력투구 중인 당신에게 ‘새 상식’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한 사람이 있다.

마냥 어리숙하게 살다 ‘새 상식’에 눈을 뜬 후 초고속 출세에 성공한 샐러리맨 김상범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상식적인 그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묻어난다.

작가 이근삼은 전도된 가치관과 상식이 안 통하는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와 아이러니를 통해 통렬히 고발했다.

김상범이 가르쳐 주는 ‘국물처세술’을 우리 인생에 적용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권은 극장 문을 나서는 당신의 손에 쥐어져 있다.

리뷰이벤트, 이렇게 참여하세요!국립극단?의 <리차드 3세>, <혈맥>, <한국인의 초상>을 관람하시고 난 후,1. 여러분의 개인 블로그, 포스트, 폴라 중 원하시는 곳에 리뷰를 작성하시고2. 꼭 #(태그)를 달아주세요.(#국립극단리뷰, #국립극단, #리차드3세리뷰, #리차드3세, #혈맥리뷰 #혈맥 #국물있사옵니다리뷰 #국물있사옵니다)3. 작성하신 블로그/포스트/폴라의 url을 아래 댓글에 남겨주시면 됩니다.

꼭 공개 설정으로 남겨주세요. 비밀 댓글일 경우 국립극단에서 확인이 불가합니다.

<리차드 3세>명동예술극장     2016. 4. 1

4. 3<혈맥>명동예술극장     2016. 4. 20

5. 15<국물 있사옵니다>백성희장민호극장     2016. 4. 6

4. 24이렇게 선정합니다!4월 30일까지의 댓글 참여자 중1. 10분을 선정하여,2. 5월 6일(금)에3. 네이버 책문화 블로그를 통하여 발표할 예정입니다.

선정되신 10분께는현금처럼 사용 가능한 네이버페이 포인트 2만원을 선물로 드립니다.

네이버페이 포인트는 선정 발표 일주일 후, 사용 안내 메일과 함께 네이버 개별 ID로 지급됩니다.

* 리뷰 선정은 '국립극단'에서 진행합니다.

* 5/6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됨에 따라, 선정자 발표는 5/9일(월)에 진행됩니다.

4월 리뷰 선정자 발표안녕하세요, 문화지기입니다.

수준 높은 리뷰와 관심 감사 드립니다.

^^국립극단에서 선정해 주신 총 10분입니다.

선정 안내 E-mail은 5/9일 발송되며 안내에 따라 네이버페이 포인트는 5/13일 지급됩니다.

Joan 님크리슈머 님모짜렐라 님레어소보루 님박졔 님경윤 님삶도 공연만 같아라 님G DDON GO 님산토리아 님햇콩빈 님국립극단의 리뷰 이벤트는 5월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많은 참여, 입소문 부탁드려요

1탄, 12월 <시련> 참여 리뷰 및 선정자 보러 가기2탄, 1월 <겨울이야기> 참여 리뷰 및 선정자 보러 가기3탄, 3월 <빛의 제국> & <한국인의 초상> 참여 리뷰 및 선정자 보러 가기여러분의 리뷰가 좋은 공연을 만드는 힘이 됩니다

! ^^많은 참여 부탁드릴게요

.)조카였던 에드워드 5세의 자리를 빼앗고에드워드 5세와 그의 형제들을 런던탑에 가두었던 왕 입니다.

결국 조카가 죽었는데 리처드 3세가 그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며 민심이 흉흉해 지기도 하였죠.게다가 바로 다음 왕이 튜터 왕조로 바뀌면서 ( *리처드 3세는 요크 왕조)역사에는 그의 악행이 많이 밝혀집니다.

각종 매체에서도 악인으로 등장하는 등 후세에도 그리 평가가 좋지 못한 국왕...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구요...2012년 레스터에서 정체 불명의 유골이 발견됩니다.

3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의 검사 결과 리처드 3세가 유골의 주인이라고 밝혀집니다.

후세에 평가가 어떻든간에 영국의 왕 이었으니 무덤을 만들워 줘야 하겠죠.유골이 발견된 장소 (레스터) 와 리처드 3세 가문의 고향 (요크)이 두 지역 사이에서 무덤의 위치를 두고 법적 분쟁이 일어납니다.

결과는 유골이 발견된 레스터 지역의 승리로 돌아가죠.(무덤 위치를 두고 법적 소송까지 일어나다니.... 뭔가 섬짓하죠...?)우여곡절 끝에 영국 왕실이 주관하고 레스터 시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형식의 성대한 장례식이 열립니다.

레스터 시 측에서는 이제 리처드 3세의 무덤을 통해 관광 수익을 올린 다는 계산이 있었겠죠.참고로 이 날 장례식에는 "The 오이" 베네딕트 컴버내치 가 참석합니다.

(리처드 3세의 후손 이라고 하네요... 왕족이었어...)흥미롭게도 장례식이 있던 날이 2015년 3월 26일 인데리처드 3세가 레스터에서 안식을 찾자마자강등권에 있던 "레스터 시티" 는잔여경기 9경기 중 7경기를 승리하면서 기적적으로 강등권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레스터 현지 팬들은 500여년 만에 안식을 찾은 왕의 은총이 아니냐는 농담이 퍼지기 시작하죠..그리고 2016 시즌이 시작되는데요...이게 무슨일인지...15/16 시즌이 시작되자,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레스터 시티 는 미칠듯한 강함을 보여주며 리그 테이블 최상단에 이름을 올린채 시즌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리처드 3세가 그려진 패러디가 나오고,그가 그려진 상품들이 판매되기 시작하기도 하죠.그리고 마침내,창단 130여년 만에 처음으로"1부리그 에서 우승하며"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레스터 시티.급기야 우승 확정 후에는영국의 가디언지 1면에 리처드 3세와 레스터 시티의 관계에 관한 기사마저 실리게 됩니다.

..)조카였던 에드워드 5세의 자리를 빼앗고에드워드 5세와 그의 형제들을 런던탑에 가두었던 왕 입니다.

결국 조카가 죽었는데 리처드 3세가 그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며 민심이 흉흉해 지기도 하였죠.게다가 바로 다음 왕이 튜터 왕조로 바뀌면서 ( *리처드 3세는 요크 왕조)역사에는 그의 악행이 많이 밝혀집니다.

각종 매체에서도 악인으로 등장하는 등 후세에도 그리 평가가 좋지 못한 국왕...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구요...2012년 레스터에서 정체 불명의 유골이 발견됩니다.

3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의 검사 결과 리처드 3세가 유골의 주인이라고 밝혀집니다.

후세에 평가가 어떻든간에 영국의 왕 이었으니 무덤을 만들워 줘야 하겠죠.유골이 발견된 장소 (레스터) 와 리처드 3세 가문의 고향 (요크)이 두 지역 사이에서 무덤의 위치를 두고 법적 분쟁이 일어납니다.

결과는 유골이 발견된 레스터 지역의 승리로 돌아가죠.(무덤 위치를 두고 법적 소송까지 일어나다니.... 뭔가 섬짓하죠...?)우여곡절 끝에 영국 왕실이 주관하고 레스터 시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형식의 성대한 장례식이 열립니다.

레스터 시 측에서는 이제 리처드 3세의 무덤을 통해 관광 수익을 올린 다는 계산이 있었겠죠.참고로 이 날 장례식에는 "The 오이" 베네딕트 컴버내치 가 참석합니다.

(리처드 3세의 후손 이라고 하네요... 왕족이었어...)흥미롭게도 장례식이 있던 날이 2015년 3월 26일 인데리처드 3세가 레스터에서 안식을 찾자마자강등권에 있던 "레스터 시티" 는잔여경기 9경기 중 7경기를 승리하면서 기적적으로 강등권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레스터 현지 팬들은 500여년 만에 안식을 찾은 왕의 은총이 아니냐는 농담이 퍼지기 시작하죠..그리고 2016 시즌이 시작되는데요...이게 무슨일인지...15/16 시즌이 시작되자,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레스터 시티 는 미칠듯한 강함을 보여주며 리그 테이블 최상단에 이름을 올린채 시즌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리처드 3세가 그려진 패러디가 나오고,그가 그려진 상품들이 판매되기 시작하기도 하죠.그리고 마침내,창단 130여년 만에 처음으로"1부리그 에서 우승하며"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레스터 시티.급기야 우승 확정 후에는영국의 가디언지 1면에 리처드 3세와 레스터 시티의 관계에 관한 기사마저 실리게 됩니다.

.           (3) 그의 아내 : 레이디 앤 네빌(Anne Neville)마리 반필드(Marie Barnfield) 씀  어릴 적  앤 네빌(Anne Neville)은 리처드 3세의 아내이자 왕비이다.

그녀는 워릭 백작 부부인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과 앤 보챔프(Beauchamp)의 둘째 딸이며, 그녀의 언니 이자벨(Isabel Neville, 1451년생)은 클라렌스 공작부인이다.

앤은 에이븐 강(Avon River)이 내려다 보이는 워릭 성(Warwick Castle)에서 1456년 6월 11일에 태어났으며, 그 마을에 있는 성모 마리아 신학대학 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바라고 있었지만, 결국에 두 딸이 자신들 부부의 상속자가 될 것임을 서서히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앤이 태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인 워릭 백작은 이미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전 해 세인트 알번스(St. Albans)의 첫번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덕분에 칼레의 수비대장(Captain of Calais)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앤이 거의 한 살이 다 되었을 때 워릭 백작 부부는 칼레에 거처를 차렸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앤은 이후 3년을 부모 그리고 언니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워릭 성>   요크 가문의 승리와 함께 워릭은 섬으로 돌아왔다.

에드워드 왕의 수석 외교관이자 군인으로서, 워릭 백작은 종종 집을 떠난 상태였을 것이고, 이자벨과 앤은 아마도 어머니와 함께 성에 남았을 것이다.

두 소녀가 어디에 살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노스 요크셔(North Yorkshire)의 미들험 성(Middleham Castle)이 아마도 그들의 거처였을 듯 하다.

앤은 친삼촌인 조지 네빌(George Neville)이 1465녀 9월에 요크의 총대주교로서 즉위식을 가질 때 처음으로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9살이었다.

또한 같은 해 왕의 막내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Richard, Duke of Gloucester, 1452년생)가 프랜시스 로벨 경(Francis Lord Lovell, 1456년생) 및 몇몇 귀족 자제들과 함께 워릭 백작의 궁정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그 전 해 앤의 아버지와 에드워드 왕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는데, 에드워드 왕이 프랑스의 신부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워릭 백작의 외교적 중재를 고작 젠트리 계급의 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과 비밀리에 결혼하였음을 공언하는 것으로 답하였기 때문이다.

새 왕비는 자매들이 여럿이었고, 때문에 워릭 백작은 왕국 내 유력한 사윗감을 그녀들에게 뺏길 판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은 당시 글로스터 공작과 로벨을 각각 이자벨과 앤의 신랑감으로 찍고 있던 듯 하다.

 하지만 워릭은 당시에 자신의 두 딸을 왕의 두 동생과 각각 결혼시키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이 경우라면 글로스터 공작은 이자벨이 아닌 앤과 혼인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이자벨이 클라렌스 공작과 결혼하게 되면, 앤과 글로스터의 결혼은 ‘근친혼’의 범주에 들어가 불법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힉스(Hicks), 앤 네빌, Tempus, 2006, 2006년도판 BBC 역사 매거진 ‘리처드 3세 왕은 과연 근친상간을 저질렀나?'). ‘법적으로’ 혼인이 제한되는 경우는 성적인 결합으로 인하여 ‘하나의 육체’가 되었을 때만 국한되었다.

즉 이에 따르면, 사면장 없이 이전 배우자의 친척, 또는 이론적으로 이전 애인과의 친척과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결혼하는 두 사람의 혈연자가 친척, 또는 ‘혼인 관계’라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워릭의 계획한 이중 결혼식의 유일한 장애물은 왕이었다.

왕은 클라렌스의 조지의 결혼이 중요한 외교적 흥정 대상일 것이 때문에, 자신의 맏아우를 워릭 가문의 후계자로 넘겨주는 것을 반대하엿다.

워릭 가문의 자매는 매우 좋은 신부감이었으나, 그들은 아버지의 샐리스버리(Salisbury) 백작령과 어머니의 광대한 영지들, 즉 워릭(Warwick)과 남서쪽의 디스펜서(Despencer) 백작령 등을 균등하게 상속받아야 했다.

(북쪽에 있는 네빌 가문의 영토는 남자 후계자에게만 상속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워릭 백작이 아닌 그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

)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워릭은 클라렌스의 동의를 얻어 교황에게 사면장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교회법으로 볼 때 그의 딸들은 왕의 동생들과 원칙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가까운 친척 사이였기 때문이었다1. 우리는 적어도 워릭 백작이 이자벨의 결혼에 대한 사면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문서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리처드와 앤의 결혼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고, 정황을 보았을 때 사면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두 쌍의 결혼에 대한 사면장들은 바티칸 기록 보관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때는 바야흐로 1468년 말, 워릭 백작과 왕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져버렸고, 리처드는 누구의 편이 될 것이냐는 다그침을 받았다.

리처드는 왕의 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떠남으로서, 앤과의 결혼은 깨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로벨 경은 이미 앤의 사촌인 앤 피츠휴(Anne FitzHugh)와 결혼한 상태였다.

  랭카스터의 웨일즈 왕자와 결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렌스는 워릭과 함께 음모를 꾸며 1469년 7월 12일 칼레에서 이자벨 네빌과 비밀 결혼식을 치렀다.

이 결혼은 클라렌스와 워릭이 반역을 일으키는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왕의 총신들을 박살내고 에드워드 왕을 포로로 가뒀다.

아마도 클라렌스가 에드워드 대신 왕이 되고 네빌이 배후에서 조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쿠데타를 지속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왕과 재화합하였지만,  이내 반란을 또 일으켰고,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였다.

앤은 부모와 언니, 그리고 형부인 클라렌스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 생활을 떠났다.

이 자벨이 낳은 첫 아이는 배에서 사산되었다.

          <랭카스터 가문 : 헨리 6세, 그의 아내 앙주의 마거릿, 부부의 아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19세기에 판화에 그려진 초상화이고,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크 가문 :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 에드워드 4세가 랭카스터파의 일개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한 덕분에 불필요한 정치적 파란을 겪게 되었고, 이는 그 자신의 일시적 퇴위와 바넷, 툭스버리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참혹한 전투를 초래하였다.

 당대 최고의 미녀로 평가받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자신의 낮은 신분 때문에 정도 이상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이 앤이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Margaret of Anjou)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인 랭카스터의 에드워드(Edward of Lancaster)와 결혼하게 된 전후배경이다.

마거릿 왕비는 프랑스의 루이 11세를 설득하여 지원을 약속받은 후, 에드워드 왕과 군사작전으로 결판을 내기 위해 워릭과 동맹을 맺었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와 앤은 8촌지간2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사면장 없이 결혼할 수 없었지만, 1470년 7월 25일 에드워드와 앤은 서로 낯설어 하면서 앙제(Angers) 성당에서 엄숙한 약혼식을 올렸다.

1주일 후 워릭과 클라렌스는 앤과 그녀의 어머니를 프랑스에 남기고 영국을 침공하였다.

에드워드 4세는 패하여 해외로 달아났고, 헨리 6세는 복위하였다.

교황의 사면장이 도착하자, 앤과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12월 13일 앙부아즈(Anboise)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때 웨일즈 왕자는 17세, 앤은 14세였다.

  크리스마스 이후, 젊은 왕세자 부부는 각자 어머니를 대동하고 디프(Dieppe) 해안으로 이동하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그들은 3월이 되기 전에 웨이머스(Weymouth) 항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당시 앤은 웨일즈 왕자 및 마거릿 왕비와 한 배에 타고 있었고, 워릭 백작부인은 다른 배를 타고 있었다.

날씨 상태는 그때까지도 나빠서, 앤의 어머니를 태우고 있던 배는 홀로 떨어져 동쪽으로 수 마일이 떨어진 곳으로 표류하였다.

그들은 1471년 4월 14일에 상륙하였으나, 바로 그 때 다시 세워진 왕권이 몰락한 것을 목격하였다.

에드워드 왕이 다시 돌아와 런던을 접수하였으며, 클라렌스는 다시 요크 가문 쪽으로 붙었고, 바로 그 날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전사하였다.

워릭 백작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뉴 포레스트(New Forest)에 있는 볼리유 수도원(Baeulieu Abbey)의 성소로 들어갔다3. 앤은 툭스버리(Tewkesbury)로 향하는 행렬에 억지로 끼어 이동하였고,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에드워드 왕의 군대가 랭카스터의 군대를 박살냈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병사들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앤은 언니 이자벨과 형부인 클라렌스 공작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결혼으로 인한 분쟁  앤의 아버지와 남편은 모두 반역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볼리유 수도원의 성소로 도피하였으며, 에드워드 왕은 이를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곧 무장한 경비병들로 그녀를 감시하게 하였다(BL MS Cotton Julius BXII, f. 317). 부모의 영지는 모두 몰수당했으며, 원래 앤과 이자벨이 나눠 가져할 영지를 이자벨의 남편인 클라렌스가 모두 차지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앤의 어린 사촌인 조지 네빌(George Neville)에게 주어졌어야 할 영국 북쪽에 있는 네빌 가문의 영지도, 조지 네빌의 아버지인 몽태규 후작(John Neville, Marquess of Montagu)이 바넷 전투에서 반역자로 죽는 바람에, 글로스터 공작이 가져가고 말았다.

앤의 언니인 이자벨과 클라렌스 공작 모두 앤의 재혼 또는 워릭과 샐리스버리의 영지 상속권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9개월이 조금 못미치는 시간 동안 리처드는 끊임 없이 앤과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양자 모두에게 신중한 결합이었으며, 또한 앤의 아버지과 원래 점지해주던 혼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감시자 노릇을 하던 클라렌스는 동생이 앤의 배후에 있다고 보고, 앤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자 하였다.

아마도 그는 처제를 주방의 하녀로 모습을 감추게 하려고 했던 듯 싶다.

하지만 앤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상속권을 위해서 싸웠을 것이다.

결국에 리처드가 앤을 찾아냈고, 그녀를 데리고 런던의 성 마틴(St. Martin) 수도원의 성소의 은신처로 갔다.

    <앤 네빌과 리처드의 사인>앤 네빌은 "Anne Warwick"이라 썼고, 리처드는 "R(ichard) Gloucester"라 썼다.

   앤은 이에 리처드와 결혼하기로 동의하였고, 최종적인 사면권을 얻기 위해 로마로 사절을 보냈다.

리처드는 이전에 앤이 결혼하였던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와 8촌 지간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사면장 없이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72년 2월, 에드워드의 압력에 의하여 클라렌스는 리처드와 앤이 ‘재산을 나누어 갖지 않는 조건 하에서’ 그들의 결혼을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 해 3월 18일까지, 클라렌스는 리처드에게 몇몇 영지들을 양도하는데 동의하였다.

(CPR 1467-77, p. 330). 리처드와 앤의 사면장은 4월 22일에 로마에서 비준되었고, 영국으로 출발한 것은 6월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건대 리처드와 앤은 클라렌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면장이 도착하기 전인 1473년 1월에 결혼 한 듯 하다.

당시 앤의 나이 16세, 리처드의 나이 19세 또는 20세였다.

1473년 여름에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왕의 허락을 받아 볼리유의 성소에서 머무르고 있던 앤의 어머니를 데리고 미들험에 있는 자신의 궁정으로 모셔갔다.

  하지만 워릭 백작부인은 자신의 영지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두 딸과 사위들의 금전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에드워드 왕이 워릭 백작부인의 재혼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녀가 재혼한다면, 그 남편은 그녀의 광대한 영지와 재산 덕분에 왕국에서 가장 막강한 인물이 될 터였다.

백작부인의 영지를 두 딸과 사위들에게 상속하면 상황이 안정될 것으로 보였으나, 클라렌스는 이를 방해하려 들었다.

1473년 가을까지 그는 글로스터 공작에 대항하여 무장하였으며, 이 상황은 곧 클라렌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던 한 영국인 방문자에 의해 프랑스 궁정에도 보고되었다.

  <클라렌스 공작 부부, 조지 플란타지넷과 이자벨 네빌. 카디프 성당의 스테인글라스>   ‘글로스터 공작은 강제로 이전에 웨일즈 왕자와 결혼하였던 고(故) 워릭 백작의 딸을 아내로 취했으며, 클라렌스 공작에 맞서 끊임 없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클라렌스는 그의 형인 에드워드 왕과 이전에 워릭 백작령을 받기로 약속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글로스터가 백작의 둘째 딸과 결혼하는 것을 이유로 영지를 나누어 갖는 것을 원하치 않고 있습니다.

’ (Calendar of Milanese State Papers, p. 177).  결혼이 강요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두려움은 근거 없는 얘기다.

하지만 그러하였기 때문에, 클라렌스가 리처드와 앤의 결혼이 교회법으로 봤을 때 원래 무효라는 점을 들어서라도 리처드가 워릭 백작령의 일부라도 상속 받는 것을 반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요된 결혼은 특히 지주 계급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

특히 신부 측의 부모 또는 보호자가 아닌 신랑에 의한 강요라면 더했다.

  당대의 사회는 특히 신부의 가족 또는 보호자의 의사에 반하여 상속녀를 유혹하는 일을 도둑질을 목적으로 한 ‘유괴(raptus4)’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대의 사회 통념상 유괴와 가출은 그 뜻에서 차이가 거의 없었다.

클라렌스의 감시에서 앤을 성 마틴 수도원의 성소로 데려온 일은, 리처드가 그녀를 유괴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었다.

클라렌스가 리처드의 납치설을 주장한 근거는 이러한 점들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교회법이 당대의 사회 관습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신부가 직접 동의하는 경우라면, 신부측 가족의 동의가 없어도, 신랑과 신부의 정당한 결혼이 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육체적인 성관계나 동거하는 것도 법적으로 가능하였다.

비록 그 결혼이 실제로 ‘강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어도 그러하였다.

  클라렌스는 영지의 분할 상속을 막기 위해 동생의 결혼이 유괴에 의한 것이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클라렌스가 그 결혼에 대해 교회법에 의거하여 더욱 강하게 반대했다고 했을지라도, 기록으로 남겨진 바는 없다.

   결국에 클라렌스는 자신의 영지를 압수하겠다는 왕의 위협에 굴복하였다.

영지 상속에 대한 분란은 1474년 5월 의회의 의결로 가라앉았다.

연대기 작가 크로울랜드(Crowland)는 ‘워릭 백작 부인이 자연스레 죽은 것처럼’ 간주하여 그녀의 영지를 즉시 두 딸들과 사위들한테 즉시 지급할 것을 명시한 포고령에 경악하였다.

클라렌스가 그때까지도 워릭 백작부인의 상속재산 대부분을 사실상 보유하고 있었고, 리처드와 앤의 몫으로 돌아간 것은 다른 가문의 재산에 속하는 것이었다.

클라렌스는 앤과 리처드의 결혼의 적법성에 대하여 끊임 없이 중상모략을 가하였다.

즉, 교회가 그들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함으로서 리처드와 앤이 이혼하게 된 상태에서 다시 재결합하는 경우, 그들의 권리를 지켜줄 법적 문구를 발표해버리는 식이었다.

또한 클라렌스는 리처드가 앤과 두 번째 결혼을 하기 위해선 지켜야 할 권리들은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다는 식으로 떠들고 다녔다 (C. Given-Wilson [ed.], Parliament rolls of Medieval England, Edward IV - October 1472 - 2nd roll). 하지만 그 어떠한 교회 법정도 혼인의 적법성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대중 앞에서 선언해야 한다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또한 리처드와 앤의 결혼은 서로간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며, 부부 사이는 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글로스터 공작부인<글로스터 공작부부, 앤과 리처드>  공작부인으로서 앤의 활동은 살짝 훑어볼 수 있는 정도이다.

1475년과 1477년 사이의 예시는 그 일면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1475년, 리처드는 프랑스로 원정을 가는 바람에 자리를 비웠다.

이 때 앤은 요크 시의 시장 및 시의원들과 함께 서신으로 왕래하였으며, 특히 그녀에게 중요한 편지 한 통은 그레이스톡 경(Loard Greystock)을 비롯한 남편의 참사회 회원들의 손에 딸려 보내기도 하였다 (York City Chamberlains’ Account Rolls, Surtees Soc. Vol. 192, 1980, p. 152). 리처드와 앤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Edward)는 1476년 봄 또는 여름에 미들험(Middleham)에서 태어났다.

적어도 공식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부부의 유일한 혈육이다.

같은 해에, 앤은 네빌 가문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더럼 수도원(Durham Priory)의 자선 회원5이 되었다.

12월에 그녀는 아마도 리처드와 함께 런던에 있었던 듯 싶다.

당시 리처드는 ‘공작 각하의 분부에 의하여, 각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내를 위하여 대령하라고 했던 모피’와 ‘공작부인께 대령하라고 명령하셨던 비단옷과 다른 물품들’에 대한 비용을 자신의 동-잉글랜드의 영지에 달아놓았다.

1477년 리처드와 앤은 요크의 성체 협회(Corpus Christi Guild)에 가입하였다.

앤은 자신의 개인사제를 승진시키기 위하여 더럼 수도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마도 같은 해에 케임브릿지의 퀸스 컬리지(Queen’s College)에 부부가 공동으로 기부금을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가 되다.

  <리처드 3세와 앤 왕비><리처드 3세, 아내와 함께 대관식을 치르다>영드 The White Queen 8화의 한 장면 (배우는 아뉴린 바너드(Aneurin Barnard), 페이 마세이(Faye Marsay))   에드워드 4세의 죽음 이후, 리처드는 남쪽으로 가서 어린 에드워드 5세의 호국경 자리를 꿰찼다.

앤은 한 달 후에 런던으로 향했고, 6월 5일 화요일에 도착하였다.

곧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였고, 결국에 리처드가 왕위를 차지하였다.

같은 시기에 앤은 언니 이자벨의 아들이자 고아인 상태로 도르셋 후작의 후견을 받고 있었던 워릭 백작 에드워드(Edward Plantagenet, Earl of Warwick)을 돌보기로 하였다(Mancini).  리처드와 앤은 공동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웨스트민스터 타워에서 치러진 식 하루 전에, 그녀는 여성용 가운과 길이가 27야드(=11.88m)나 되는 금으로 수놓인 흰색 망토를 입었다.

그 망토는 담비와 족제비의 털로 만들어졌고, 흰색 비단과 금으로 수놓여진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Laynesmith, p. 92). 대관식은 아침 7시에 웨스트민스터의 홀에서 사원으로 걸어서 행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부부는 미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대관식과 도유식6을 치렀다.

그 날은 장엄한 축하 연회와 함께 끝났으며,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금으로 만든 접시에, 앤은 금박을 입힌 접시에 음식을 대접받았다.

  <리처드 3세의 가족 : (왼쪽부터) 왕비 앤 네빌, 리처드 3세, 부부의 아들 미들험의 에드워드>   왕비로서 앤이 군림했던 시간은 짧았고, 당시 왕비의 궁정에서 남겨진 기록도 없어서, 아직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남아있는 증거에 따르면, 앤이 글로스터 공작부인일 때부터 그녀를 모시던 북부 신사계급 출신 여인들이 그대로 왕비의 시녀로서 궁정에서 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종종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의 대관식 기간 동안, 앤은 워릭에 도착하여 리처드를 잠시 멈춰 세우고, 그녀가 일전에 윈저(Windsor)에서 접견하였던 에스파냐 대사를 만나게 하였다.

부부는 앤의 고향(=워릭)에서 1주일 정도 머물렀다.

이후 앤과 리처드는 요크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7살 먹은 아들 에드워드를 웨일즈 왕자로 선포하였다.

국왕 일행은 다시 남쪽으로 향했고, 폰티프락스(Pontefract)를 방문하여 2주일을 머물렀다.

 앤은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을 위해 남편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에 머물렀다.

3월에, 그녀와 리처드는 이틀 동안 말을 타고 케임브릿지의 퀸스 컬리지로 행차하였고, 그곳에서 '가장 거룩하신 앤 왕비 마마(께서는)..... 막대한 기부금으로 대학의 재정을 크게 늘려주셨다' (Laynesmith, p. 256). 그에 대한 보답으로, 케임브릿지 대학의 간부들은 매해 5월 2일에 '가장 고명하신 군주(=리처드)와 전하의 사랑하시는 앤 왕비 마마를 위하여' 미사를 치르기로 결의하였다 (Hammond, p. 20). 이후 부부는 노팅엄(Nottingham)에 궁정을 차렸는데, 그곳에서 아들 에드워드 왕자가 미들험에서 죽었다는 불의의 소식을 들었다.

'여러분은 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비탄에 압도되어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Crowland, p. 171).  에드워드 왕자의 죽음은 리처드와 앤에게 개인적인 비극일 뿐만 아니라 왕조에도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제 통치 왕조의 안정성과 왕조의 지속을 보장해줄 후계자가 사라졌다.

헨리 튜더(Henry Tudor)는 에드워드 4세의 맏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York)를 미래의 배우자로 맞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앤이 또 아들을 낳아야할 필요성이 시급히 대두되었다.

그녀는 아직 27세였고 건강해보였으며, 그랬기 때문에 리처드와 함께 국내를 여행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가 어디를 갔던지 간에, 즉 예를 들어 리처드가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여 해상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스카보로(Scarborough)에 주둔지를 차렸을 때조차도, 앤은 역시 그곳에 있었다.

앤이 스카보로에서 머물렀던 사각형의 탑은 1538년에 여행객 존 릴런드(John Leland)에 의해 '왕비의 타워 또는 임시거처(The Queens Towre or lodging)'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The Itinerary of John leland the Antiquary, ed. Thomas Hearne, Vol. 1, 1745, p. 62). 앤은 리처드와 함께 왕비로서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였다.

이 때 앤의 시녀로서 에드워드 4세의 맏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아마도) 그 여동생들도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그 해 3월에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자매들은 어머니와 함께 성소에서 나오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크로울랜드의 연대기는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관심이 춤과 환락에 쏟아졌으며' 앤 왕비와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옷을 자주 바꿔 입었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십이야에7, 헨리 튜더가 1485년 여름에 영국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당도하였다.

  그 즉시, 리처드에 대한 적대적인 소문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한 소문들은 리처드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꾸며내어 퍼트린 것이다' (Lander, p. 255). 크로울랜드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 동엔에 왕은 엘리자베스에게 호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왕이 앤이 죽고 난 뒤, 또는 '이미 그 근거가 충분한 것으로 보이므로 앤하고 이혼한 뒤에'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연대기 작가는 왕이 앤과 이혼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클라렌스가 이전에 리처드와 앤의 결혼을 중상모략하면서 했던 바로 그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앤은 '바로 며칠 뒤에' 죽을 병에 걸렸으며, 이 상황에서도 리처드가 이혼을 고려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면 다소 놀라운 일이 될 것이므로, 앞선 소문은 이제 그가 아내를 독살하려 한다는 루머로 대체되었을 것이다8. 앤의 병세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는, 앤의 병세가 2달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 그리고 의사들이 리처드에게 그녀의 침상으로 다가가지 말라고 조언한 것 정도이다.

  현재 남겨진 증거로 보면, 리처드는 자신이 홀아비가 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조카인 엘리자베스의 결혼 협상을 고려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리처드가 조카와 직접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포르투갈의 공주와 결혼하고 동시에 조카를 포르투갈의 왕자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앤은 만 29세 생일을 석 달 남겨두고 1485년 3월 16일에 죽었다.

바로 그 날, 영국엔 개기일식이 관측되었다.

그녀는 '왕비에게 어울리는 경의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crowland, p. 175). 보챔프 가문의 여러 위인전을 작성하였던 존 로스(John Rous)에 의하면, 앤은 '품위가 있었으며, 상냥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행동은 늘 칭찬할만 하였고, 고결하였으며, 그녀의 이름인 '앤(Anne)'이 나타내고 있듯이 우아함으로 가득차있었다.

' 이제 앤의 이야기에서 후기를 쓸 때가 왔다.

3월 30일, 리처드는 런던 시장과 시민들 및 가능한 많은 영주들을 성 요한 자선회당(Hospital of St. John)의 대강당에 불러모았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 위하여 앤을 독살하였다는 루머에 대해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연설하였다.

'왕은 이전의 일에 대해 슬픔과 언짢음을 보여주면서, 그런식으로 결혼하려는 것이 절대로 자신의 생각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며, 왕비의 죽음에 결코 기뻐한 적도, 또한 바란 적도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왕비의 죽음 때문에 큰 비탄에 사로잡혔으며, 남자로서 견딜 수 없을만큼 괴롭다고 하였다.

....' (Lander, pp. 255-6).주요 출처 / 더 읽어보세요데이비드 볼드윈(David Baldwin) "리처드 3세(Richard III)" 스트로우드(Stroud), 2012마리 반필드(Marie Barnfield), "무효화된 혼인 제한, 교황 사면장과 이혼 : 리처드 3세와 그의 결혼에 대하여(Diriment impediments, Dispensations and Divorce : Richard III and Matrimony', The Ricardian, Vol. XVII, 2007 PP. 84-98아네트 카슨(Annette Carson), "리처드 3세 : 비난받는 왕(Richard III : The Maligned King)" 스트로우드, 2008P. D. 클라크(P. D. Clarke), "영국 왕가의 혼인과 15세기 로마 교황청 법원(English royal marriages and the Papal Penitentiary in the fifteenth century)", 영국 역사 비평(English History Review), 120, 2005로스 연대기(The Rows roll). W. H. 커토프(W. H. Courthope) 편집, 런던, 1859.로다 에드워즈(Rhoda Edwards), "리처드 3세의 순방, 1483-1485(The Itinerary of Richard III, 1483-1485)", 글로스터, 1983중세 영국 의회 의사록(Parliament rolls of Medieval England), 크리스토퍼 기븐-윌슨(Christopher Given-Wilson) 편집.P. W. 헤이먼드(P. W. Hammond), "웨일스 왕자, 미들험의 에드워드(Edward of Middleham, Prince of Wales), 켄트, 1973.리처드 3세의 대관식 : 현존하는 기록들(the Coronation of Richard III : The Extant Documents), P. W. 헤이먼드와 A. F. 서튼(A. F. Sutton) 편집. 글로스터, 1983.H. 힘홀즈(H. Helmholz) "중세 영국의 결혼 소송(Marriage Litigation in Medieval England)", 케임브릿지, 1974 (2007년에 페이퍼북 판이 나옴)마이클 힉스 :- 앤 네빌(Anne Neville), 스트로우드, 2006- 그릇되고 이랬다 저랬다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클라렌스(False, Fleeting, Perjur'd Clarence), 글로스터, 1980- 리처드 3세(Richard III), 스트로우드, 2000 (개정판)- 국왕 옹립자 워릭(Warwick the Kingmaker), 옥스포드, 1998 (2002년에 페이퍼북 판이 나옴)- 왕자는 한 명? 아니면 두 명? (One prince or tow?', The Ricardian, Vol. IX, 1993, pp. 469-72.J. L. 레인스미스(J. L. Laynesmith), "마지막 중세의 왕비들(The Last Medieval Queens)", 옥스포드, 2004J. R. 랜더(J. R. Lander), "장미 전쟁(The Wars of the Roses), 런던, 1974 (White Lion 판)로즈머리 호우록스(Rosemary horrox), 앤 서튼(Anne Sutton), "글로스터 공적으로서 리처드의 몇몇 지출내역, 1475-7(Some expenses of Richard Duke of Gloucester, 1475-7)", The Ricardian, Vol. VI, 1983, pp. 266-9.1459-1486년 기간의 크로울랜드 연대기, N. 프로니(N. Pronay), J. 콕스(J. Cox) 편집, 런던, 1986.셜리 ㅁ. 싱클레어(Shelley A. Sinclair) "이자벨 버틀러의 유괴 : 랭카스터 왕조 시절 잉글랜드의 납치와 부의 추구(The 'ravishing' of Isabel Boteler : abduction and the pursuit of wealth in Lncasterian England), The Ricardian, Vol. XI, no 146, 1999년 9월배리 윌리엄즈(Barrie Williams) :- 포르투갈과의 외교관계와 신앙심 깊은 공주의 중요성(The Portuguese connection and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princess'), The Ricardian, Vol. VI, pp. 138-5- 포르투갈과 맺은 결혼 협상들 : 그 대답 (The Portuguese marriage negotiations : a reply), The Ricardian, Vol. VI, pp. 235-6에드워드 4세의 어머니 세실리 네빌은 워릭 백작의 고모였다.

그래서 클라렌스와 글로스터 형제는, 나이 차이는 거의 안나지만, 이자벨과 앤 자매의 5촌 당숙이 된다.

즉, 앤의 친할아버지의 어머니인 조앤 보퍼트(Joan Beaufort)는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의 친증조할아버지인 헨리 4세의 의붓동생이다.

당시 성소로 들어가면 죄인이라도 끌어내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일종의 치외법권인 셈이다.

워릭 백작부인은 워릭 백작이 전사하고 에드워드 4세가 복위함에 따라서 자신이 반역자가 된 셈이기 때문에 성소로 도피한 것이다.

라틴어 단어 rapere(빼앗다)의 수동태 과거분사에서 유래에는 sister로 되어 있는데, 최소한 수녀는 아닐 것이 확실하므로, 능력이 닿는 대로 가장 비슷할 것 같은 뜻의 단어로 번역해서 넣었다.

하느님의 가호를 받아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역대 기독교도 왕들의 호칭에 DEI GRATIA라고 되어 있는 문구는, 바로 이 의식을 치렀음을 암시한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12월 25일에 시작하여 12일 동안 이어지며, Twelfth Night라 하면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째인 1월 6일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1)앤의 죽음 2)앤과 이혼 두 가지 헛소문이 있었는데, 앤이 아프자마자 2)를 기각하고 앤이 독살당하는 것으로 1)의 설이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3) 그의 아내 : 레이디 앤 네빌(Anne Neville)마리 반필드(Marie Barnfield) 씀  어릴 적  앤 네빌(Anne Neville)은 리처드 3세의 아내이자 왕비이다.

그녀는 워릭 백작 부부인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과 앤 보챔프(Beauchamp)의 둘째 딸이며, 그녀의 언니 이자벨(Isabel Neville, 1451년생)은 클라렌스 공작부인이다.

앤은 에이븐 강(Avon River)이 내려다 보이는 워릭 성(Warwick Castle)에서 1456년 6월 11일에 태어났으며, 그 마을에 있는 성모 마리아 신학대학 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바라고 있었지만, 결국에 두 딸이 자신들 부부의 상속자가 될 것임을 서서히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앤이 태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인 워릭 백작은 이미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전 해 세인트 알번스(St. Albans)의 첫번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덕분에 칼레의 수비대장(Captain of Calais)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앤이 거의 한 살이 다 되었을 때 워릭 백작 부부는 칼레에 거처를 차렸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앤은 이후 3년을 부모 그리고 언니와 함께 보냈을 것이다.

  <워릭 성>   요크 가문의 승리와 함께 워릭은 섬으로 돌아왔다.

에드워드 왕의 수석 외교관이자 군인으로서, 워릭 백작은 종종 집을 떠난 상태였을 것이고, 이자벨과 앤은 아마도 어머니와 함께 성에 남았을 것이다.

두 소녀가 어디에 살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노스 요크셔(North Yorkshire)의 미들험 성(Middleham Castle)이 아마도 그들의 거처였을 듯 하다.

앤은 친삼촌인 조지 네빌(George Neville)이 1465녀 9월에 요크의 총대주교로서 즉위식을 가질 때 처음으로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9살이었다.

또한 같은 해 왕의 막내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Richard, Duke of Gloucester, 1452년생)가 프랜시스 로벨 경(Francis Lord Lovell, 1456년생) 및 몇몇 귀족 자제들과 함께 워릭 백작의 궁정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그 전 해 앤의 아버지와 에드워드 왕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는데, 에드워드 왕이 프랑스의 신부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워릭 백작의 외교적 중재를 고작 젠트리 계급의 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과 비밀리에 결혼하였음을 공언하는 것으로 답하였기 때문이다.

새 왕비는 자매들이 여럿이었고, 때문에 워릭 백작은 왕국 내 유력한 사윗감을 그녀들에게 뺏길 판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은 당시 글로스터 공작과 로벨을 각각 이자벨과 앤의 신랑감으로 찍고 있던 듯 하다.

 하지만 워릭은 당시에 자신의 두 딸을 왕의 두 동생과 각각 결혼시키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이 경우라면 글로스터 공작은 이자벨이 아닌 앤과 혼인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이자벨이 클라렌스 공작과 결혼하게 되면, 앤과 글로스터의 결혼은 ‘근친혼’의 범주에 들어가 불법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힉스(Hicks), 앤 네빌, Tempus, 2006, 2006년도판 BBC 역사 매거진 ‘리처드 3세 왕은 과연 근친상간을 저질렀나?'). ‘법적으로’ 혼인이 제한되는 경우는 성적인 결합으로 인하여 ‘하나의 육체’가 되었을 때만 국한되었다.

즉 이에 따르면, 사면장 없이 이전 배우자의 친척, 또는 이론적으로 이전 애인과의 친척과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결혼하는 두 사람의 혈연자가 친척, 또는 ‘혼인 관계’라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워릭의 계획한 이중 결혼식의 유일한 장애물은 왕이었다.

왕은 클라렌스의 조지의 결혼이 중요한 외교적 흥정 대상일 것이 때문에, 자신의 맏아우를 워릭 가문의 후계자로 넘겨주는 것을 반대하엿다.

워릭 가문의 자매는 매우 좋은 신부감이었으나, 그들은 아버지의 샐리스버리(Salisbury) 백작령과 어머니의 광대한 영지들, 즉 워릭(Warwick)과 남서쪽의 디스펜서(Despencer) 백작령 등을 균등하게 상속받아야 했다.

(북쪽에 있는 네빌 가문의 영토는 남자 후계자에게만 상속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워릭 백작이 아닌 그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

)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워릭은 클라렌스의 동의를 얻어 교황에게 사면장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교회법으로 볼 때 그의 딸들은 왕의 동생들과 원칙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가까운 친척 사이였기 때문이었다1. 우리는 적어도 워릭 백작이 이자벨의 결혼에 대한 사면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문서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리처드와 앤의 결혼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고, 정황을 보았을 때 사면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두 쌍의 결혼에 대한 사면장들은 바티칸 기록 보관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때는 바야흐로 1468년 말, 워릭 백작과 왕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져버렸고, 리처드는 누구의 편이 될 것이냐는 다그침을 받았다.

리처드는 왕의 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떠남으로서, 앤과의 결혼은 깨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로벨 경은 이미 앤의 사촌인 앤 피츠휴(Anne FitzHugh)와 결혼한 상태였다.

  랭카스터의 웨일즈 왕자와 결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렌스는 워릭과 함께 음모를 꾸며 1469년 7월 12일 칼레에서 이자벨 네빌과 비밀 결혼식을 치렀다.

이 결혼은 클라렌스와 워릭이 반역을 일으키는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왕의 총신들을 박살내고 에드워드 왕을 포로로 가뒀다.

아마도 클라렌스가 에드워드 대신 왕이 되고 네빌이 배후에서 조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쿠데타를 지속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왕과 재화합하였지만,  이내 반란을 또 일으켰고,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였다.

앤은 부모와 언니, 그리고 형부인 클라렌스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 생활을 떠났다.

이 자벨이 낳은 첫 아이는 배에서 사산되었다.

          <랭카스터 가문 : 헨리 6세, 그의 아내 앙주의 마거릿, 부부의 아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19세기에 판화에 그려진 초상화이고,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크 가문 :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le)> 에드워드 4세가 랭카스터파의 일개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한 덕분에 불필요한 정치적 파란을 겪게 되었고, 이는 그 자신의 일시적 퇴위와 바넷, 툭스버리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참혹한 전투를 초래하였다.

 당대 최고의 미녀로 평가받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자신의 낮은 신분 때문에 정도 이상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이 앤이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Margaret of Anjou)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인 랭카스터의 에드워드(Edward of Lancaster)와 결혼하게 된 전후배경이다.

마거릿 왕비는 프랑스의 루이 11세를 설득하여 지원을 약속받은 후, 에드워드 왕과 군사작전으로 결판을 내기 위해 워릭과 동맹을 맺었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와 앤은 8촌지간2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사면장 없이 결혼할 수 없었지만, 1470년 7월 25일 에드워드와 앤은 서로 낯설어 하면서 앙제(Angers) 성당에서 엄숙한 약혼식을 올렸다.

1주일 후 워릭과 클라렌스는 앤과 그녀의 어머니를 프랑스에 남기고 영국을 침공하였다.

에드워드 4세는 패하여 해외로 달아났고, 헨리 6세는 복위하였다.

교황의 사면장이 도착하자, 앤과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12월 13일 앙부아즈(Anboise)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때 웨일즈 왕자는 17세, 앤은 14세였다.

  크리스마스 이후, 젊은 왕세자 부부는 각자 어머니를 대동하고 디프(Dieppe) 해안으로 이동하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폭풍우가 몰아쳤지만, 그들은 3월이 되기 전에 웨이머스(Weymouth) 항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당시 앤은 웨일즈 왕자 및 마거릿 왕비와 한 배에 타고 있었고, 워릭 백작부인은 다른 배를 타고 있었다.

날씨 상태는 그때까지도 나빠서, 앤의 어머니를 태우고 있던 배는 홀로 떨어져 동쪽으로 수 마일이 떨어진 곳으로 표류하였다.

그들은 1471년 4월 14일에 상륙하였으나, 바로 그 때 다시 세워진 왕권이 몰락한 것을 목격하였다.

에드워드 왕이 다시 돌아와 런던을 접수하였으며, 클라렌스는 다시 요크 가문 쪽으로 붙었고, 바로 그 날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전사하였다.

워릭 백작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뉴 포레스트(New Forest)에 있는 볼리유 수도원(Baeulieu Abbey)의 성소로 들어갔다3. 앤은 툭스버리(Tewkesbury)로 향하는 행렬에 억지로 끼어 이동하였고,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에드워드 왕의 군대가 랭카스터의 군대를 박살냈다.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병사들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앤은 언니 이자벨과 형부인 클라렌스 공작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결혼으로 인한 분쟁  앤의 아버지와 남편은 모두 반역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볼리유 수도원의 성소로 도피하였으며, 에드워드 왕은 이를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곧 무장한 경비병들로 그녀를 감시하게 하였다(BL MS Cotton Julius BXII, f. 317). 부모의 영지는 모두 몰수당했으며, 원래 앤과 이자벨이 나눠 가져할 영지를 이자벨의 남편인 클라렌스가 모두 차지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앤의 어린 사촌인 조지 네빌(George Neville)에게 주어졌어야 할 영국 북쪽에 있는 네빌 가문의 영지도, 조지 네빌의 아버지인 몽태규 후작(John Neville, Marquess of Montagu)이 바넷 전투에서 반역자로 죽는 바람에, 글로스터 공작이 가져가고 말았다.

앤의 언니인 이자벨과 클라렌스 공작 모두 앤의 재혼 또는 워릭과 샐리스버리의 영지 상속권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9개월이 조금 못미치는 시간 동안 리처드는 끊임 없이 앤과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양자 모두에게 신중한 결합이었으며, 또한 앤의 아버지과 원래 점지해주던 혼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감시자 노릇을 하던 클라렌스는 동생이 앤의 배후에 있다고 보고, 앤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자 하였다.

아마도 그는 처제를 주방의 하녀로 모습을 감추게 하려고 했던 듯 싶다.

하지만 앤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상속권을 위해서 싸웠을 것이다.

결국에 리처드가 앤을 찾아냈고, 그녀를 데리고 런던의 성 마틴(St. Martin) 수도원의 성소의 은신처로 갔다.

    <앤 네빌과 리처드의 사인>앤 네빌은 "Anne Warwick"이라 썼고, 리처드는 "R(ichard) Gloucester"라 썼다.

   앤은 이에 리처드와 결혼하기로 동의하였고, 최종적인 사면권을 얻기 위해 로마로 사절을 보냈다.

리처드는 이전에 앤이 결혼하였던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와 8촌 지간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사면장 없이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72년 2월, 에드워드의 압력에 의하여 클라렌스는 리처드와 앤이 ‘재산을 나누어 갖지 않는 조건 하에서’ 그들의 결혼을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 해 3월 18일까지, 클라렌스는 리처드에게 몇몇 영지들을 양도하는데 동의하였다.

(CPR 1467-77, p. 330). 리처드와 앤의 사면장은 4월 22일에 로마에서 비준되었고, 영국으로 출발한 것은 6월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건대 리처드와 앤은 클라렌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면장이 도착하기 전인 1473년 1월에 결혼 한 듯 하다.

당시 앤의 나이 16세, 리처드의 나이 19세 또는 20세였다.

1473년 여름에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왕의 허락을 받아 볼리유의 성소에서 머무르고 있던 앤의 어머니를 데리고 미들험에 있는 자신의 궁정으로 모셔갔다.

  하지만 워릭 백작부인은 자신의 영지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두 딸과 사위들의 금전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에드워드 왕이 워릭 백작부인의 재혼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녀가 재혼한다면, 그 남편은 그녀의 광대한 영지와 재산 덕분에 왕국에서 가장 막강한 인물이 될 터였다.

백작부인의 영지를 두 딸과 사위들에게 상속하면 상황이 안정될 것으로 보였으나, 클라렌스는 이를 방해하려 들었다.

1473년 가을까지 그는 글로스터 공작에 대항하여 무장하였으며, 이 상황은 곧 클라렌스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던 한 영국인 방문자에 의해 프랑스 궁정에도 보고되었다.

  <클라렌스 공작 부부, 조지 플란타지넷과 이자벨 네빌. 카디프 성당의 스테인글라스>   ‘글로스터 공작은 강제로 이전에 웨일즈 왕자와 결혼하였던 고(故) 워릭 백작의 딸을 아내로 취했으며, 클라렌스 공작에 맞서 끊임 없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클라렌스는 그의 형인 에드워드 왕과 이전에 워릭 백작령을 받기로 약속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글로스터가 백작의 둘째 딸과 결혼하는 것을 이유로 영지를 나누어 갖는 것을 원하치 않고 있습니다.

’ (Calendar of Milanese State Papers, p. 177).  결혼이 강요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두려움은 근거 없는 얘기다.

하지만 그러하였기 때문에, 클라렌스가 리처드와 앤의 결혼이 교회법으로 봤을 때 원래 무효라는 점을 들어서라도 리처드가 워릭 백작령의 일부라도 상속 받는 것을 반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요된 결혼은 특히 지주 계급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

특히 신부 측의 부모 또는 보호자가 아닌 신랑에 의한 강요라면 더했다.

  당대의 사회는 특히 신부의 가족 또는 보호자의 의사에 반하여 상속녀를 유혹하는 일을 도둑질을 목적으로 한 ‘유괴(raptus4)’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대의 사회 통념상 유괴와 가출은 그 뜻에서 차이가 거의 없었다.

클라렌스의 감시에서 앤을 성 마틴 수도원의 성소로 데려온 일은, 리처드가 그녀를 유괴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었다.

클라렌스가 리처드의 납치설을 주장한 근거는 이러한 점들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교회법이 당대의 사회 관습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신부가 직접 동의하는 경우라면, 신부측 가족의 동의가 없어도, 신랑과 신부의 정당한 결혼이 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육체적인 성관계나 동거하는 것도 법적으로 가능하였다.

비록 그 결혼이 실제로 ‘강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어도 그러하였다.

  클라렌스는 영지의 분할 상속을 막기 위해 동생의 결혼이 유괴에 의한 것이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클라렌스가 그 결혼에 대해 교회법에 의거하여 더욱 강하게 반대했다고 했을지라도, 기록으로 남겨진 바는 없다.

   결국에 클라렌스는 자신의 영지를 압수하겠다는 왕의 위협에 굴복하였다.

영지 상속에 대한 분란은 1474년 5월 의회의 의결로 가라앉았다.

연대기 작가 크로울랜드(Crowland)는 ‘워릭 백작 부인이 자연스레 죽은 것처럼’ 간주하여 그녀의 영지를 즉시 두 딸들과 사위들한테 즉시 지급할 것을 명시한 포고령에 경악하였다.

클라렌스가 그때까지도 워릭 백작부인의 상속재산 대부분을 사실상 보유하고 있었고, 리처드와 앤의 몫으로 돌아간 것은 다른 가문의 재산에 속하는 것이었다.

클라렌스는 앤과 리처드의 결혼의 적법성에 대하여 끊임 없이 중상모략을 가하였다.

즉, 교회가 그들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함으로서 리처드와 앤이 이혼하게 된 상태에서 다시 재결합하는 경우, 그들의 권리를 지켜줄 법적 문구를 발표해버리는 식이었다.

또한 클라렌스는 리처드가 앤과 두 번째 결혼을 하기 위해선 지켜야 할 권리들은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다는 식으로 떠들고 다녔다 (C. Given-Wilson [ed.], Parliament rolls of Medieval England, Edward IV - October 1472 - 2nd roll). 하지만 그 어떠한 교회 법정도 혼인의 적법성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대중 앞에서 선언해야 한다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또한 리처드와 앤의 결혼은 서로간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며, 부부 사이는 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글로스터 공작부인<글로스터 공작부부, 앤과 리처드>  공작부인으로서 앤의 활동은 살짝 훑어볼 수 있는 정도이다.

1475년과 1477년 사이의 예시는 그 일면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1475년, 리처드는 프랑스로 원정을 가는 바람에 자리를 비웠다.

이 때 앤은 요크 시의 시장 및 시의원들과 함께 서신으로 왕래하였으며, 특히 그녀에게 중요한 편지 한 통은 그레이스톡 경(Loard Greystock)을 비롯한 남편의 참사회 회원들의 손에 딸려 보내기도 하였다 (York City Chamberlains’ Account Rolls, Surtees Soc. Vol. 192, 1980, p. 152). 리처드와 앤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Edward)는 1476년 봄 또는 여름에 미들험(Middleham)에서 태어났다.

적어도 공식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유아기를 무사히 넘긴 부부의 유일한 혈육이다.

같은 해에, 앤은 네빌 가문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더럼 수도원(Durham Priory)의 자선 회원5이 되었다.

12월에 그녀는 아마도 리처드와 함께 런던에 있었던 듯 싶다.

당시 리처드는 ‘공작 각하의 분부에 의하여, 각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내를 위하여 대령하라고 했던 모피’와 ‘공작부인께 대령하라고 명령하셨던 비단옷과 다른 물품들’에 대한 비용을 자신의 동-잉글랜드의 영지에 달아놓았다.

1477년 리처드와 앤은 요크의 성체 협회(Corpus Christi Guild)에 가입하였다.

앤은 자신의 개인사제를 승진시키기 위하여 더럼 수도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마도 같은 해에 케임브릿지의 퀸스 컬리지(Queen’s College)에 부부가 공동으로 기부금을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가 되다.

  <리처드 3세와 앤 왕비><리처드 3세, 아내와 함께 대관식을 치르다>영드 The White Queen 8화의 한 장면 (배우는 아뉴린 바너드(Aneurin Barnard), 페이 마세이(Faye Marsay))   에드워드 4세의 죽음 이후, 리처드는 남쪽으로 가서 어린 에드워드 5세의 호국경 자리를 꿰찼다.

앤은 한 달 후에 런던으로 향했고, 6월 5일 화요일에 도착하였다.

곧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였고, 결국에 리처드가 왕위를 차지하였다.

같은 시기에 앤은 언니 이자벨의 아들이자 고아인 상태로 도르셋 후작의 후견을 받고 있었던 워릭 백작 에드워드(Edward Plantagenet, Earl of Warwick)을 돌보기로 하였다(Mancini).  리처드와 앤은 공동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웨스트민스터 타워에서 치러진 식 하루 전에, 그녀는 여성용 가운과 길이가 27야드(=11.88m)나 되는 금으로 수놓인 흰색 망토를 입었다.

그 망토는 담비와 족제비의 털로 만들어졌고, 흰색 비단과 금으로 수놓여진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Laynesmith, p. 92). 대관식은 아침 7시에 웨스트민스터의 홀에서 사원으로 걸어서 행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부부는 미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대관식과 도유식6을 치렀다.

그 날은 장엄한 축하 연회와 함께 끝났으며,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금으로 만든 접시에, 앤은 금박을 입힌 접시에 음식을 대접받았다.

  <리처드 3세의 가족 : (왼쪽부터) 왕비 앤 네빌, 리처드 3세, 부부의 아들 미들험의 에드워드>   왕비로서 앤이 군림했던 시간은 짧았고, 당시 왕비의 궁정에서 남겨진 기록도 없어서, 아직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남아있는 증거에 따르면, 앤이 글로스터 공작부인일 때부터 그녀를 모시던 북부 신사계급 출신 여인들이 그대로 왕비의 시녀로서 궁정에서 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종종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의 대관식 기간 동안, 앤은 워릭에 도착하여 리처드를 잠시 멈춰 세우고, 그녀가 일전에 윈저(Windsor)에서 접견하였던 에스파냐 대사를 만나게 하였다.

부부는 앤의 고향(=워릭)에서 1주일 정도 머물렀다.

이후 앤과 리처드는 요크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7살 먹은 아들 에드워드를 웨일즈 왕자로 선포하였다.

국왕 일행은 다시 남쪽으로 향했고, 폰티프락스(Pontefract)를 방문하여 2주일을 머물렀다.

 앤은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을 위해 남편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에 머물렀다.

3월에, 그녀와 리처드는 이틀 동안 말을 타고 케임브릿지의 퀸스 컬리지로 행차하였고, 그곳에서 '가장 거룩하신 앤 왕비 마마(께서는)..... 막대한 기부금으로 대학의 재정을 크게 늘려주셨다' (Laynesmith, p. 256). 그에 대한 보답으로, 케임브릿지 대학의 간부들은 매해 5월 2일에 '가장 고명하신 군주(=리처드)와 전하의 사랑하시는 앤 왕비 마마를 위하여' 미사를 치르기로 결의하였다 (Hammond, p. 20). 이후 부부는 노팅엄(Nottingham)에 궁정을 차렸는데, 그곳에서 아들 에드워드 왕자가 미들험에서 죽었다는 불의의 소식을 들었다.

'여러분은 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비탄에 압도되어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Crowland, p. 171).  에드워드 왕자의 죽음은 리처드와 앤에게 개인적인 비극일 뿐만 아니라 왕조에도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제 통치 왕조의 안정성과 왕조의 지속을 보장해줄 후계자가 사라졌다.

헨리 튜더(Henry Tudor)는 에드워드 4세의 맏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York)를 미래의 배우자로 맞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앤이 또 아들을 낳아야할 필요성이 시급히 대두되었다.

그녀는 아직 27세였고 건강해보였으며, 그랬기 때문에 리처드와 함께 국내를 여행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가 어디를 갔던지 간에, 즉 예를 들어 리처드가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여 해상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스카보로(Scarborough)에 주둔지를 차렸을 때조차도, 앤은 역시 그곳에 있었다.

앤이 스카보로에서 머물렀던 사각형의 탑은 1538년에 여행객 존 릴런드(John Leland)에 의해 '왕비의 타워 또는 임시거처(The Queens Towre or lodging)'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The Itinerary of John leland the Antiquary, ed. Thomas Hearne, Vol. 1, 1745, p. 62). 앤은 리처드와 함께 왕비로서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였다.

이 때 앤의 시녀로서 에드워드 4세의 맏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아마도) 그 여동생들도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그 해 3월에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자매들은 어머니와 함께 성소에서 나오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크로울랜드의 연대기는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관심이 춤과 환락에 쏟아졌으며' 앤 왕비와 레이디 엘리자베스가 옷을 자주 바꿔 입었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십이야에7, 헨리 튜더가 1485년 여름에 영국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당도하였다.

  그 즉시, 리처드에 대한 적대적인 소문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한 소문들은 리처드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꾸며내어 퍼트린 것이다' (Lander, p. 255). 크로울랜드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 동엔에 왕은 엘리자베스에게 호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왕이 앤이 죽고 난 뒤, 또는 '이미 그 근거가 충분한 것으로 보이므로 앤하고 이혼한 뒤에'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연대기 작가는 왕이 앤과 이혼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클라렌스가 이전에 리처드와 앤의 결혼을 중상모략하면서 했던 바로 그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앤은 '바로 며칠 뒤에' 죽을 병에 걸렸으며, 이 상황에서도 리처드가 이혼을 고려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면 다소 놀라운 일이 될 것이므로, 앞선 소문은 이제 그가 아내를 독살하려 한다는 루머로 대체되었을 것이다8. 앤의 병세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는, 앤의 병세가 2달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 그리고 의사들이 리처드에게 그녀의 침상으로 다가가지 말라고 조언한 것 정도이다.

  현재 남겨진 증거로 보면, 리처드는 자신이 홀아비가 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조카인 엘리자베스의 결혼 협상을 고려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리처드가 조카와 직접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포르투갈의 공주와 결혼하고 동시에 조카를 포르투갈의 왕자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앤은 만 29세 생일을 석 달 남겨두고 1485년 3월 16일에 죽었다.

바로 그 날, 영국엔 개기일식이 관측되었다.

그녀는 '왕비에게 어울리는 경의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crowland, p. 175). 보챔프 가문의 여러 위인전을 작성하였던 존 로스(John Rous)에 의하면, 앤은 '품위가 있었으며, 상냥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행동은 늘 칭찬할만 하였고, 고결하였으며, 그녀의 이름인 '앤(Anne)'이 나타내고 있듯이 우아함으로 가득차있었다.

' 이제 앤의 이야기에서 후기를 쓸 때가 왔다.

3월 30일, 리처드는 런던 시장과 시민들 및 가능한 많은 영주들을 성 요한 자선회당(Hospital of St. John)의 대강당에 불러모았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 위하여 앤을 독살하였다는 루머에 대해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연설하였다.

'왕은 이전의 일에 대해 슬픔과 언짢음을 보여주면서, 그런식으로 결혼하려는 것이 절대로 자신의 생각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며, 왕비의 죽음에 결코 기뻐한 적도, 또한 바란 적도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왕비의 죽음 때문에 큰 비탄에 사로잡혔으며, 남자로서 견딜 수 없을만큼 괴롭다고 하였다.

....' (Lander, pp. 255-6).주요 출처 / 더 읽어보세요데이비드 볼드윈(David Baldwin) "리처드 3세(Richard III)" 스트로우드(Stroud), 2012마리 반필드(Marie Barnfield), "무효화된 혼인 제한, 교황 사면장과 이혼 : 리처드 3세와 그의 결혼에 대하여(Diriment impediments, Dispensations and Divorce : Richard III and Matrimony', The Ricardian, Vol. XVII, 2007 PP. 84-98아네트 카슨(Annette Carson), "리처드 3세 : 비난받는 왕(Richard III : The Maligned King)" 스트로우드, 2008P. D. 클라크(P. D. Clarke), "영국 왕가의 혼인과 15세기 로마 교황청 법원(English royal marriages and the Papal Penitentiary in the fifteenth century)", 영국 역사 비평(English History Review), 120, 2005로스 연대기(The Rows roll). W. H. 커토프(W. H. Courthope) 편집, 런던, 1859.로다 에드워즈(Rhoda Edwards), "리처드 3세의 순방, 1483-1485(The Itinerary of Richard III, 1483-1485)", 글로스터, 1983중세 영국 의회 의사록(Parliament rolls of Medieval England), 크리스토퍼 기븐-윌슨(Christopher Given-Wilson) 편집.P. W. 헤이먼드(P. W. Hammond), "웨일스 왕자, 미들험의 에드워드(Edward of Middleham, Prince of Wales), 켄트, 1973.리처드 3세의 대관식 : 현존하는 기록들(the Coronation of Richard III : The Extant Documents), P. W. 헤이먼드와 A. F. 서튼(A. F. Sutton) 편집. 글로스터, 1983.H. 힘홀즈(H. Helmholz) "중세 영국의 결혼 소송(Marriage Litigation in Medieval England)", 케임브릿지, 1974 (2007년에 페이퍼북 판이 나옴)마이클 힉스 :- 앤 네빌(Anne Neville), 스트로우드, 2006- 그릇되고 이랬다 저랬다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클라렌스(False, Fleeting, Perjur'd Clarence), 글로스터, 1980- 리처드 3세(Richard III), 스트로우드, 2000 (개정판)- 국왕 옹립자 워릭(Warwick the Kingmaker), 옥스포드, 1998 (2002년에 페이퍼북 판이 나옴)- 왕자는 한 명? 아니면 두 명? (One prince or tow?', The Ricardian, Vol. IX, 1993, pp. 469-72.J. L. 레인스미스(J. L. Laynesmith), "마지막 중세의 왕비들(The Last Medieval Queens)", 옥스포드, 2004J. R. 랜더(J. R. Lander), "장미 전쟁(The Wars of the Roses), 런던, 1974 (White Lion 판)로즈머리 호우록스(Rosemary horrox), 앤 서튼(Anne Sutton), "글로스터 공적으로서 리처드의 몇몇 지출내역, 1475-7(Some expenses of Richard Duke of Gloucester, 1475-7)", The Ricardian, Vol. VI, 1983, pp. 266-9.1459-1486년 기간의 크로울랜드 연대기, N. 프로니(N. Pronay), J. 콕스(J. Cox) 편집, 런던, 1986.셜리 ㅁ. 싱클레어(Shelley A. Sinclair) "이자벨 버틀러의 유괴 : 랭카스터 왕조 시절 잉글랜드의 납치와 부의 추구(The 'ravishing' of Isabel Boteler : abduction and the pursuit of wealth in Lncasterian England), The Ricardian, Vol. XI, no 146, 1999년 9월배리 윌리엄즈(Barrie Williams) :- 포르투갈과의 외교관계와 신앙심 깊은 공주의 중요성(The Portuguese connection and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princess'), The Ricardian, Vol. VI, pp. 138-5- 포르투갈과 맺은 결혼 협상들 : 그 대답 (The Portuguese marriage negotiations : a reply), The Ricardian, Vol. VI, pp. 235-6에드워드 4세의 어머니 세실리 네빌은 워릭 백작의 고모였다.

그래서 클라렌스와 글로스터 형제는, 나이 차이는 거의 안나지만, 이자벨과 앤 자매의 5촌 당숙이 된다.

즉, 앤의 친할아버지의 어머니인 조앤 보퍼트(Joan Beaufort)는 랭카스터의 에드워드의 친증조할아버지인 헨리 4세의 의붓동생이다.

당시 성소로 들어가면 죄인이라도 끌어내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일종의 치외법권인 셈이다.

워릭 백작부인은 워릭 백작이 전사하고 에드워드 4세가 복위함에 따라서 자신이 반역자가 된 셈이기 때문에 성소로 도피한 것이다.

라틴어 단어 rapere(빼앗다)의 수동태 과거분사에서 유래에는 sister로 되어 있는데, 최소한 수녀는 아닐 것이 확실하므로, 능력이 닿는 대로 가장 비슷할 것 같은 뜻의 단어로 번역해서 넣었다.

하느님의 가호를 받아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역대 기독교도 왕들의 호칭에 DEI GRATIA라고 되어 있는 문구는, 바로 이 의식을 치렀음을 암시한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12월 25일에 시작하여 12일 동안 이어지며, Twelfth Night라 하면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째인 1월 6일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1)앤의 죽음 2)앤과 이혼 두 가지 헛소문이 있었는데, 앤이 아프자마자 2)를 기각하고 앤이 독살당하는 것으로 1)의 설이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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