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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



나는 고려의 왕들 중 광종의 업적이 가장 인상 깊다.

고려의 제 4대 왕인 광종은 크게 세가지의 업적을 남겼다.

첫째)노비안검법 실시 둘째)과거제 실시, 이제부터 그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첫째로 노비안검법에 대해 살펴보자. 노비안검법이란 “고려 광종 때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안검하여 방량(放良)하게 한 일종의 노비해방법” 이라고 백과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즉 쉽게 말해 억울하게 노비가 된 백성을 풀어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노비안검법이 시행 될 필요가 있었던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조 왕건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왕건은 지방호족세력을 통합시키기 위해 혼인정책을 실시하였다.

여러 귀족과 혼인을 하면서 자신의 왕권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 요소들을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혼인정책으로 인해 왕위결정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많은 귀족들과 혼인을 맺음으로써 왕위를 세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왕위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왕권이 떨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광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떨어진 왕권을 강화시킬 방법을 모색하던 도중 노비안검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노비안검법의 시행으로 호족들의 세력은 약화되고 왕권은 강화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 과거제의 실시에 대해 알아보자. 과거제도 역시 신분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던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과거제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면 1)교육제도와 관리 등용 제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2)광종 대에 쌍기의 건의에 따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하였습니다(958년)3)문과.잡과.승과로 나누어지며, 문과는 다시 제술과,명경과로 , 승과는 교종시와 선종시로 나누었습니다.

이 과거제의 실시로 신분에 따라 관리가 되는 골품제가 없어지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신라에 비해 신분의 굴레가 가벼워졌을 뿐만 아니라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된 사람들은 왕의 뜻을 따르는 충직한 신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제도에 한계가 있었다.

바로 음서를 더 중시하였다는 것인데 고려의 관리등용제도는 신분제와 귀족 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귀족의 관직 진출에 있어서 음서제도가 더 중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광종이 호족들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제라는 제도를 도입하였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이때의 과거제가 조선시대 때 본격적으로 시행된 과거제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광종의 과거제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싶다.

자원 하나 없는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경제적 성장을 이룩한 데에 교육적 효과가 큰데, 우리나라가 교육적자원으로 인해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광종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 큰 부자들은 농토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었는데이 부자들은  그 땅을 노비가정에게 소작으로 나눠준후그들을 하청업체처럼 관리하면서 이익을 취하는 형태였어요.이런 큰 부자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이들을"호족"이라 부르고 있어요.오늘날로 말하면,, 재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따르면,고려시대에는 소작농 노비를 포함해서1,000명 이상의 노비를 보유한 호적들이 적지 않았다.

태조 왕건이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건국과 통일을 한게 아니라대부분 평안도 청주 유씨와충청도 충주 유씨, 경상도 김씨의 김씨의성의 홍씨, 황해도 평산의 박씨 등 같은지방 호족들의 도움으로 이룩했죠.태조 왕건의 정권은 호족연합체 정권으로 호족과 함께 성장한 나라였죠.왕건이 29명의 부인을 둔 것도 이런 이유였구요.자신을 도운 호족들을 배려(?)하면서 통솔하려면그들의 딸들을 부인으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죠.고려왕조는 태생부터 재벌적인 호족연합이었으니까요.대한민국 처럼 재벌들에게 휘둘려백성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재벌을 위해 작동할 수 밖에 없었죠.왕건의 고려 건국이후,모든 왕들은 이런 풍토에 불만이 있었지만이런 불만을 겉으로 표출한 용감한(?) 왕이바로,, 왕소(훗날 광종)였죠.재벌 중심, 호족중심으로국가를 운영하자니, 이만저만 불편(?)한게 아니었으니까요.그래서,, 광종은호족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왕권을 강화하는 일을 급속하게 처리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했어요.처음 몇년간은 아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호족들의 이익을 지켜주고 좋게 지냈지만,집권 8년차에 접어 들었을때는 호족들의 세력을흔들었죠. 집권 8년차인 956년에  <노비안검법>집권 10년차인 958년에 <과거시험>실시가신호탄이었죠.참고로,, "시무 28조"로 유명한 최승로는 경주 출신의 귀족출신으로 광종 사후에 성종에게 제출한 상소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어요.고려 역사서인 <고려사절요>에 실린 상소문에서최승로는,,, 광종의 집권초기 몇년간 보여진 친재벌적 정책을 두고즉위한 뒤로 8년만에 정치와 교화가 맑아지고 공평해졌다라고극찬했는데,, ,  (중략)  말년에는 죄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고하면서 사람 살 세상이 못된다고 혹평했죠.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이 부당하게 소유한 노비들을해방시키기 위한 취지로 호족들의 농토를 경영하는 노비들을빼앗은 것은 호족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고,과거시험은 호족들의 관직 독점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가문을 배경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호족자녀들을 견제할 목적으로실력 위주의 관료 선발제도를 실시하였어요.집권12년차, 대대적은 호족 숙청노비안검법과 과거시험으로호족세력을 서서히 빼앗은 광종은집권12년차가 되는 960년부터는 아예 호족들에 대한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돌입했어요.호족들의 역모사건을 적발하거나조작하는 방법으로 공포정국을 조성한 뒤,호족들을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했죠.광종이 반재벌(반호족)정책을 시행하자광종을 좋게 평가했던 최승로도 혹평을 했구요.

광종은 재벌이 서민을 착취하는 것은 물론이고왕실을 압박하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서 싸운 왕이었어요.대부분의 왕은 이런 일을 시작했다가제대로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은데무려 16년동안 재벌들을 압박하면서 나름 경제민주화를 달성한 거죠.광종 죽음이후,그 개혁이 대부분 물거품되어제대로 이어지도록 하는데는 실패하여한계가 드러났지만

지도자가 경제민주화를 위해서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잘 보여준 인물이바로, 왕소(훗날 광종)이에요.유용했다면

선물 팡팡



부탁드려요

?   극중 " 왕소 " 라는 인물은 고려태조 왕건의 3남이자 고려의 4대왕인 광종이라는 사람 입니다.

실질적으로 존재 했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이 였습니다.

그래서 고려 4대와 광종에 대해서 소개 해드리겠습니다.

???   조선시대의 "피의 군주" 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연산군? 세조? 머 물론 많겠지만, 진정한 " 피의? 군주 " 라고 하면 태종이 생각 납니다.

동복형제, 이복형제, 부인의 친척, 아들인 세종의 부인의 외척, 개국공신 까지 왕권강화에 방해 되는 인물들을 다 죽였으며, 피로써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다잡았습니다.

고려에도 마찬가지로 피의 군주가 존재 했었습니다.

그 역활을 했던 이가 고려 4대왕 광종 입니다.

????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초반의 태조가 한말 중에 처음 나라를 세울때는 개국공신의 힘이 필요하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 되려면 개국공신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하죠, 그것처럼 광종은 오랜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태조의 3남으로 태어나 누가 봐도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위치 큰형인 혜종과 친형인 정종을 앞서 보내고 철저하게 힘을 키워 왔다고 합니다.

외가인 충주를 기반으로 정치적으로 힘을 키우고, 황주를 기반으로 한 첫번째 부인의 후광이 있었고, 첫번째 부인은 태조와 신정왕태후 사이에 맏딸이라고 합니다.

 즉, 첫번째부인과 광종은 이복남매가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 또한 큰형인 셰종의 맏딸로 조카와 혼인을 하였고, 이것으로 인해 통치 기간 내내 외척의 세력이 개입 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광종이 이루 업적은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관복제정, 왕권강화 등이 있습니다.

광종의 업적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 첫번째 노비안검법? 노비안검법은 노비 해방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공신들이 소유한 사노비는 전쟁 포로나 가난한 양민 출신들의 많았지고, 공신세력의 개인 소유 재산이엿습니다.

노비안검법은 이런 자들을 조사를 해서 전에 양민이었던 사람들을 해방 하는 조치 였습니다.

광종은 이것을 통해 공신들의 세력을 누루고 왕권을 강화 하였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과거제도?당시 고려시대에서 벼슬길에 오르는 방법은 시험이나 명성이 아닌 집안 배경이였다고 합니다.

권문세가의 자제가 아니더라도 관리가 되어 나랏일을 볼수 있는 제도로 그 당시에 파격적인 조치이며, 광종은 호족세력이 아닌 젊은인재를 등용함으로 호족세력을 견제하고 고려가 문인들의 시대로 가게 되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 ?세번째는 관복제정?개국초기이고 그 당시엔 아직 관리들의 예복이 없었다고 합니다.

임금보다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입궐하는 신하도 있었고, 태봉쪽의 호족들은 그들의 관복이였던 가사를 신라쪽 호족들은 옛 신라의 관복을 중국쪽 호족들은 원래 자신들이 입던 대로 입궐 했다고 합니다.

지금 으로 말하면 자율 복장이였습니다.

상황이 이러 하여 광복제정을 하였고, 각 관리의 등급에 따라 보라색, 붉은색, 연두색, 자주색 만들어 위계질서를 바로 잡았다고 합니다.

?? ?지금까지 알아본 것은 광종의 업적이였다면, 그가 피의 군주 또는 미치광이 왕 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즉위 11년이 되는 해 부터 시작된 공포정치 그가 죽기전까지 15년동안 사람을 미친듯이 죽였고, 자신의 형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 까지 죽였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아들까지 의심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에는 자리가 없어 넘쳐날 정도였고, 죽기전까지 이어 졌다고 합니다.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뜻은 이것을 뜻 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빛나는 업적이거나 미치광이 살인마 이거나 빛 광 光  미칠광 狂 = 광종? 고려 광종을 주인공으로 한 KBS 대하사극, 2002.3

2003.1
고려는 사병의 나라
신라말 호족세력들(좌)과 사병들(우)신라말에는 거의 국가 권력이란게 거의 없었습니다.

 나라가 개판이었던 것이지요.지역 유지들은 자기 지역 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병을 모집해서 운영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보해양조>(광주), <금복주> (대구) 같은 지역 회사들이 총으로 무장한 <사설 경호회사>를 운영한다고 보면 됩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깡패들로 채워졌을 수도 있었겠지요.<왕건>은 개경의 대표 호족이긴 했지만, 하느님의 자손이거나 하는 신화적인 배경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왕권 국가" 같은 슬로건은 불가능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 연방>이었으며 <사병>은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왕건은 신라 항복을 받고 죽을 때까지 8년 밖에 되지 않아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건국하고 29년 후(947)에야 처음으로 <광군>이라는 전국 군인이 생겼고, 그 후로 48년 후(995)에야 <중앙군>이 정비되었습니다.

즉, 건국 후 77년 후에야 전체적으로 군대가 정리된 것입니다.

도전받는 왕권
왕건의 부인들(좌)과 그 자식들(우)왕건은 28명의 부인들을 데리고 있었고, 그 아래 아들이 25명이 있었습니다.

호족세력들은 자신의 딸에게서 나온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왕건은 943년 죽으면서 유언 10가지를 남깁니다.

그게 <훈요십조>입니다.

거기에 장자승계의 원칙을 남겼지만 호족들의 욕심은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왕건이 죽은 후 호족들은 왕권 경쟁을 심하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2대 혜종, 3대 정종이 모두 독살, 암살되었다고도 합니다.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썰만...)
노비의 가치
고려시대 신분 구조(좌), 고려 노비의 형태(중), 탈 노비의 사례(우)고려 초 노비는 주로 <전쟁포로>이거나 생활고 때문에 <노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노비는 농지 경작의 값싼 <노동력>이자 <사병>의 주된 구성원이기도 했습니다.

고려 후기 때는 천 명이 넘는 노비를 거느린 귀족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태조실록)네이버 직원수가 2,600명 정도 되니 꽤 큰 기업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보통 한 명당 면포 100필

200필 정도 (당시는 이게 거래화폐)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말은 400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굳이 비교하자면.요즘 그랜져 가격이 약 3,000만원 정도 하니까, 750

1,000만원 정도면 노비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관청에 신고를 해야 하고, 밥도 주어야 합니다.

 때릴 수는 있지만,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솔거노비는 집안 하인이었지만, 외거노비는 집밖의 하인으로 돈을 받고 면천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 참고 : 노비의 신분에 대하여
제도 개혁을 통한 왕권의 확보
출처 : 줌인터넷백과사전(좌)노비안검(按檢)법, 한자로는 살필 안, 검사할 검입니다.

두 명의 형이 불행하게 죽는 것을 보고, <광종>은  '이대로는 안된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노비안검법은 전쟁 노비와 파산 노비를 풀어주는 법이었습니다.

고려 초 노비는 전체 인구수의 1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전국 28 호족들이 보유한 경우가 전부였을 것 같습니다.

 이 법은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켰으니 이 법안은 <표적 법안> 정도 되겠네요.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증세> 정도의 법안이 아닐까.호족들은 엄청나게 반대를 했습니다만, 광종은 이를 밀어 부쳤습니다.

그러나 광종이 죽고 12년이 지난 성종 때 다시 호족들에 밀려 <노비환천법>이 실시됩니다.

12년이면 20살 때 면천 되었던 사람이 32살 때 다시 노비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왕권의 완성은 한참 후
고려 현종은 8대 왕입니다.

왕건의 손자이고, 왕건이 죽고 난 후 겨우 49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지방 호족들 중 건국 1세대는 대부분 죽고 2세대들이 경쟁을 벌일 때입니다.

현종은 경쟁자 천추태후로부터 살해 당할 위험이었으나 <강조>의 힘을 빌어 역전승을 합니다.

문제는 <거란>이 이를 빌미로 침략을 합니다.

 의문의 침략??? 이 되겠네요.현종은 전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강한 왕권을 확립하게 됩니다.

팔관회 개최, 팔만대장경 착수, 중앙군 정비, 군현제 정비 등 전국 단위의 국가사업들이 많이 벌입니다.

자연스레 호족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자 고려는 비로소 강력한 왕권 국가가 됩니다.

공민왕 때까지 주욱 현종의 혈통이 이어졌으니 정통성 문제가 이 때서야 해결된 것입니다.

※ 참고 : 김훈, 최질의 난
느낀 점
- 전쟁, 건국과 같이 한 세대가 공감했던 가치관들은 그 세대가 지날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 값싼 노동력은 예나 지금이나 부의 원천이다.

전쟁은 호족들에게 엄청난 이권을 위한 투자사업이었다.

- 명분과 정통성이 없으면 많은 도전을 받는다.

높은 위치일수록 더욱 그렇다.

※ 참고 : 위키대백과, 줌인터넷백과 등F.케네디 대통령은 100년이라는 차이를 두고 1860년과 1960년 그러니까 60년도에 백악관에 입성했습니다.

  이해영: 너무 진지하게 듣고 있었나봐요. 엉터리 같은데

이광용: 또 이 두사람은 금요일에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려와 조선에도 정말 똑같은 삶을 살아간 두 왕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의 태종과 고려의 광종! 먼저 창업자의 아들이었다는 점 그리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적장자가 아니었음에도 피의 숙청을 통해 왕좌를 거머쥐었다는 점!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조선 태종 바로 앞의 왕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해영: 압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분이기 때문에 정종.  이광용: 그렇다면 고려 광종 바로 앞의 왕은 누구입니까? 이해영: 설마? 정종?  이광용: 맞습니다.

심지어 한자까지 똑같습니다.

시시하다, 끼워맞췄다 하시는 분들 오늘 방송 끝날 때 즈음에 분명히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오늘 역사저널 그날은 조선 태종과 고려 광종의 평행이론에 집중해서 보시면 보는 재미 분명 두 배로 늘어납니다.

채널고정! 956년, 광종은 중대 발표를 한다.

  이 나라의 수십만 백성들이 지난 삼한 통일 때 억울하게 희생이 되어 크고 작은 호족들의 노비가 된 것을 알고 있소이다.

그들을 노비의 사슬에서 풀어주고자 함이올시다.

이른바 노비안검법이란 것이올시다.

 노비를 통해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취해오던 호족 세력은 광종에게 반기를 들고 나서는데... 폐하께서 내리신 노비안검법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오까?세상이 몽땅 노비들의 천국이 되었소이다.

이렇게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광종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 나라의 모든 노비는 관에 신고를 하랍니다.

억울한 자들은 모두 평민으로 되돌려 보내준다는구먼. 노비안검법, 호족세력과의 정면 충돌이자 고려 500년 기틀을 다지는 개혁의 신호탄이었다.

  최원정: 노비안검법, 한번 쯤은 다 들어보셨잖아요.  이해영: 사실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선생님이 빨간줄 치면서 시험에 나온다고 이거 나왔는데 틀리면 한대 맞는다고 했는데 틀려서 한대 맞았어요. 요새도 강조되나요? 최태성: 그럼요. 예나 지금이나. 조선시대에 세종이 나온다면 고려시대는 광종이 꼭 시험문제에 나오거든요. 광종은 두가지 키워드가 있어요. 노비안검법 그리고 또 한가지 시험에 나옵니다.

  신병주: 고려시대는 드라마가 많지 않았는데 2002년 KBS <제국의 아침>으로 방영했어요. 2015년에 MBC에서 광종의 광자를 잘 해석해서 <빛나거나 미치거나>, SBS에서도 이준기씨 주연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해요. 결국 방송 3사에서 광종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을 했거나 할 예정이라는건 광종에게 뭔가 있다는 거에요.   류근: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의미가 심상치 않게 읽히는 것이 빛 광자잖아요. 미칠 광자도 있고요. 중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는 것, 이 분이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런 해석을 받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최원정: 노비안검법?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가요? 이익주: 안검은 살피고 조사한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노비 가운데는 원래 양인이었다가 호족들이 전쟁포로를 자기 노비로 삼거나 돈을 주고 사서 노비로 삼은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조사해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 신분인 양인으로 되돌리는 겁니다.

  노비를 상세히 조사하고 살펴서 옮고 그름을 따져 밝혀내도록 명하였다 <고려사절요 광종 7년>  이해영: 억울하고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댓가없이 풀어준다? 굉장히 획기적인데요? 류근: 미국의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했잖아요. 그렇게 보면 노비안검법이야말로 노예해방의 원조 아닙니까? 신병주: 정말 원조입니다.

노비, 노예는 비슷한 하층민이었으니까 거의 900년 앞서서 제시를 했고 광종은 호족의 경제, 군사력을 약화시켜서 왕권을 강화하고자하는 목적이 있었고 링컨은 인권을 향상시키고 북부 산업지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크게 보면 광종도 왕권강화, 링컨 입장에서도 정치 리더십 강화라는 공통점이 보이는 거죠. 최태성: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남부 지역에서는 격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광종의 노비안검도 가정이 순탄치 않죠. 호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이해영: 모든 노비가 대상이 아니라 억울한 노비들만 풀어준다는데 그렇게까지 반대할 이유가 있나요? 이익주: 그 당시 노비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 노비 뿐만 아니고 사병이 될 수 있는 즉, 호족의 군사력이 될 수 있죠. 따라서 노비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호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걸 의미하는데요. 그런데 왕비인 대목왕후 황보 씨가 광종에게 불만을 전달합니다.

 류근: 남편의 왕권이 강화되는 정책인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지해줘야하는거 아닌가요? 조선시대 같으면 왕의 정책을 왕비가 대놓고 반대하는건 있을 수 없잖아요.  신병주: 조선시대는 왕비가 정치에 관여하는건 금지했죠. 류근: 대목왕후 외가가 당시 유력한 호족세력이었던거 잖아요? 그래서 왕비의 입김이 강했다고 해석해야하는게 아닐까요? 최태성: 당시 광종을 지지하는 세력을 보면 황주의 황보가 버티고 있고 엄청난 호족 세력인 박수경이 평주에 있고 충주에 있는 엄청난 호족 집안들이 왕건, 혜종, 정종 내려오면서 지지하는 왕을 앉히려고 노력하는데 최종 승자는 광종인거죠. 그래서 황주, 평주, 충주의 호족 세력들이 광종이 즉위할 당시 가진 힘은 엄청날 수 밖에 없어요. 이해영: 대목왕후 황보 씨도 황주 지역 호족세력의 일원으로서 반대했다고 봐야하나요? 어쨌든 광종의 즉위 초기에 호족 세력이 득세하고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그럴때 자기 부인이 친정편 들면 반대편에서 각을 세운 거잖아요. 남자의 마음 이해가 되네요.  이익주: 왕후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려시대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죠. 고려시대 국왕들이 족내혼을 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고려시대 왕 중 가장 먼저 족내혼을 한 왕이 누굴까요?  이해영: 설마 광종인가요? 이익주: 네. 광종에게는 두 사람의 왕후가 있었는데 한 명이 대목왕후 황보씨입니다.

태조의 4번째 부인인 황보씨의 딸입니다.

그러므로 대목왕후 황보씨와 광종은 남매간이 되는 거죠. 그리고 광종의 두번째 부인은 경화궁부인 임씨인데 형 혜종의 딸입니다.

그러니까 삼촌의 조카 간에 결혼을 한 것이죠.  최원정: 삼촌, 조카, 남매... 정말 난이도가 높네요. 류근: 다시 말하지만 고려, 고려에요. 최원정: 조선에는 이런게 없었잖아요. 신병주: 조선은 깔끔하죠. 기본적으로 조선왕조 왕비는 외부 간택 즉, 공모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려시대처럼 조카와 이모가 섞이는게 없죠. 아주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이익주: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왕조입니다.

따라서 신라시대에 골품 안에서 족내혼을 하던 전통이 고려 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던 겁니다.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 왕실의 권력, 경제력이 분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겁니다.

 최원정: 고려 왕실의 족내혼은 고려의 풍습이었다는걸 잊지마시고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호족의 세력이 강했는데 광종은 어떻게 호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비안검법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까요? 이익주: 아주 오랫동안 기다립니다.

[광종]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광종이 왕위에 있던 기간이 26년입니다.

맨 앞에 8년 동안을 호족의 실세를 인정하고 호족에 대한 어떠한 정책도 없었던 거죠. 그러다가 8년째 되는 광종 7년에 노비안검법이라고 하는 개혁을 시작한 것이죠. 초기에는 기다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영:혹독한 시집살이의 느낌일거 같아요. 귀 닫고 3년, 입 닫고 3년 이런 식으로 그 시간을 버티면서 마인드 컨트롤? 마음을 다 잡으면서 언젠가 때가 오면 일어날 것이다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신병주: 그래서 드라마 <제국의 아침>을 보면 광종이 신하들에게 절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실제로 그러진 않았겠지만 건드리지 않겠다는걸 드라마적으로 표현한거죠.  광종이 즉위하신 해로부터... 정치와 교화가 맑고 태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최태성: 교수님이 7년을 얘기하셨는데요. 개혁의 순서가 7년에 나온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늘 정관정요라는 책을 끼고다니면서 읽었다고 해요. 정관정요는 당태종이 신하들과 정치문답을 하면서 적어두었던 제왕학의 교과서, 정치란 어떻게 해야하는지 적어놓은 건데 당태종도 형제를 죽이면서 패륜을 저지르면서 왕이 된 사람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너무 잘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정관의 치’라는 말로 높여줬어요. 사천감에서 아뢰어 말하기를 ‘덕을 닦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이로부터 늘 <정관정요>를 읽었다.

 이해영: 광종의 입장에서는 정관정요, 당태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후대에 길이 남는 왕이 되야겠다는...  류근: 광종도 사람인데 힘없는 왕으로 남고싶진 않았겠죠. 그러고보니까 7년이라는 세월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이 매미도 날개를 달기 전에 7년간 애벌레 시절이 있다고 해요.  이해영: 그래서 그렇게 시끄럽게 우는구나

 류근: 광종이 정말 7년간 와신상담하면서 정관정요를 읽으면서 칼을 갈고 있는 거에요. 이익주: 그렇게 열심히 칼을 간 광종이 칼을 뽑습니다.

그것이 노비안검법입니다.

노비는 세금을 안 내고 군대도 안 가죠. 국가 입장에서 볼 때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 사람들을 양인으로 만들면 군역도 확충할 수 있고 세수도 늘릴 수 있죠. 따라서 노비안검법은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할 수 있는 3가지 목적을 동시에 가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원정: 호족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잘라낸다는건 그야말로 손과 발을 잘라내는 절묘한 개혁안이네요.  이해영: 학교다닐 때 이 만큼만 설명해주셨어도 안 틀렸을텐데 그냥 외우라고 하니까 틀리지...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네요. 최원정: 광종이 개혁의 칼을 꺼내들었는데 노비안검법만 꺼내든건 아닐거 아니에요? 고려에는 또 다른 파란이 예고됩니다.

  이광용: 오늘은 특별히 <이광용이 만난 사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파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들어오시지요.  쌍기: 니하오

 이광용: 중국사람? 쌍기: 나는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요. 이광용: 후주에서 고려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쌍기: 사절단을 따라 왔었는데 몸이 아파 돌아가지 못하고 그냥 눌러 앉아서 귀화했소. 대리평사 쌍기가 설문우를 따라 왔다가 병에 걸려서 머무르게 되었다 <고려사절요 광종 7년>  이광용: 아무리 봐도 아플 몸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거나 다 나으신듯 한데 왜 안 돌아가시고 눌러 앉으신겝니까? 쌍기: 이거 얘기하면 내 자랑 같은데 괜찮겠소?광종이 내 식견에 탐복을 하셔서 남아서 고려 발전에 도움이 되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길래 받아들였소. 자랑같은데... 병이 낫자 왕이 접견하고는 매우 흡족히 여겼다.

.. ... 발탁하여 관직에 임용하였다.

<고려사 열전 쌍기> 이광용: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려의 폐하께서 뭘 내리셨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쌍기: 아주 큰 집을 내리셨소.  이광용: 거기다가 벼슬도 주셨다면서요? 쌍기: 대통령 비서실에서 연설문 작성하는 비서관 있지 않소? 이 당시로는 한림학사라고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자리를 저에게 제수하셨소.한림학사: 고려 시대 한림원의 정4품 관직, 주로 황제의 조칙을 담당 이광용: 한림학사라... 그런데 말입니다.

집도 주고 여자도 주고 심지어 고려 신하의 집을 뺏어서 싹 나눠주는 바람에 호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신지? 당시 광종이 투화한 한인들을 후하게 대우하여 신료의 제택 및 딸들을 가려 뽑아 그들에게 주었다 <고려사 열전 서필> 쌍기: 그 분들에게 글로벌하게 생각하라고 좀 전하시오. 난 순수한 마음으로 고려에 귀화해서 보탬이 되려는 마음 밖에 없소. 고려 만세!  이광용: 무슨 보탬이 되겠다는?  쌍기: 내 친척들도 다 올 예정이오. 쌍철이 오니, 좌승으로 삼았다.

쌍철은 쌍기의 아버지인데 쌍기가 총애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왕긍을 따라온 것이다 <고려사절요 광종 10년> 이광용: 지금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쌍기를 만나보았습니다.

가시오. 여러분, 속보가 도착했습니다.

충신 서필이 귀화인에게 주라며 자신의 집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무슨 의도일까요?  이해영: 다들 반발하는 와중에 충신이니까 앞장섰네요?  류근: 전 순수한 자산 헌납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집 내놓을테니 가져가 봐, 이런 의도가 숨어져 있는것 같아요. 이광용: 역시 류시인님 예리하십니다.

뒷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을 귀화인에게 뺏길 바에야 미리 바치는게 낫다며 항의를 강력하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서필 같은 충신마저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는 상황인데요. 쌍기의 등장이 어떤 파란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최원정: 최태성 선생님은 이러다가 연기대상 후보에 오르는거 아닌가 싶어요.  최태성: 좀전에 자신의 집을 내놓았던 서필이요. 외교담판을 통해서 강동6주를 획득했던 사람 기억나세요? 이해영: 혹시 서희? 최태성: 바로 그 서희의 아버지에요.  류근: 부전자전이라고 서희의 담판 능력이 아버지한테 물려받았나 싶어요. 연기도 재밌었지만 도대체 쌍기가 어떤 인물이길래 광종이 그렇게 탐을 낸거에요? 신병주: 쌍기는 후주의 관리에요.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5대 10국의 혼란기라고 해서 후주가 5대의 마지막 왕조였고 세종이라는 황제였어요. 세종이 황권을 강화하는데 쌍기가 관리로서 참여했고 개혁적 성향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탐을 냈던 거죠. 이해영: 쌍기가 몸이 안 좋아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거 같은데 정확히 무슨 병인가요? 이익주: 고려사에도 단순하게 병으로 남았다고만 되어 있고 어떤 병이었는지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쌍기가 남은 것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나 이야기까지 나온 것이죠. 이해영: 그럼 딱 진단이 나네요. 병명 나왔네요. 꾀병이에요. 마침 몸이 안 좋아서 고려에 남았는데 광종 눈에 들어서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발탁되고 우연이 많이 겹치는 드라마같은 설정인거 같아요.  류근: 아무리 꾀병이 난치고 불치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게 당시 후주가 고려보다 더 발전한 선진국이었을텐데 고려에 머무는게 좋았을까요? 이해영: 상상력을 보탠다면 광종이 미리 물밑작업을 해서 스카웃처럼 데리고 온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왕권을 강화하려면 호족세력 외의 새로운 인재가 필요한데 이웃나라에서 소문을 들어보니까 쌍기란 사람이 그만한 재능이 있어보여서 집도 주고 벼슬도 주고 여자도 준다고 하고나서 명분이 필요하니까 몸이 아파서 남았다고 입을 맞춘거죠.  최태성: 정말 재밌는건 쌍기가 고려에 온게 956년이에요. 그런데 쌍기의 나라인 후주가 멸망한게 960년이에요. 아마도 쌍기 입장에서는 망국의 흐름을 읽고나서 뜻을 펼칠 수 없어서 다른 나라에서 부르면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타이밍이라는 거죠. 광종도 쌍기를 원했고 쌍기도 다른 뜻을 펼치고 싶었고 뭔가 서로가 윈윈되는 운명적 만남이 아니었을까. 이해영: 광종이 선사하는 집을 본 순간 ‘나는 몸이 아파서 잠깐 누웠다 가야할거 같아’ 하면서 누울거 같아요.  신병주: 쌍기가 자유계약 수준이 된거죠. FA 최원정: 당시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귀화인을 등용까지 해야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익주: 고려 초 관직에 있던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무장들이죠. 문치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상당히 적었습니다.

게다가 신라 말처럼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오는 사람도 적어지고 더군다나 고려 초에는 여러가지 제도를 만들면서 중국의 제도를 많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되다보니까 중국 제도에 밝은 중국계 귀화인들의 가치가 대단히 높아지게 된거죠. 신병주: 호족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면 호족과 연결된 인물은 등용하면 안되는 거죠. 그런 인물을 찾다보니까 쌍기와 같은 중국계 인물처럼 이해관계 없는 인물이죠. 그래서 이 사람한테 힘을 실어준거죠. 이해영: 2002년 월드컵때 히딩크 감독의 역할이었겠네요.  신병주: 히딩크 감독도 귀화하자고 했는데 성질 급한 사람은 이름까지 지었어요. 하동구라고. 인터넷에 많이 떴어요.  최태성: 956년에 노비안검법이라는 첫 칼을 들었는데 그 해에 쌍기가 등장하는 거죠. 7년의 긴 숙고 속에서 956년 개혁의 신호탄이 하나씩 등장하고 있습니다.

 류근: 1,100년 전에 해외 전문가를 등용한거 아닙니까. 충신인 서필마저 광종을 비난했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광종이야말로 열린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최원정: 지금도 외국 국적의 정치인을 영입한다는건 아직 힘든 일이잖아요.  신병주: 광종의 인재 등용의 폭이 매우 넓어서 빛나거나(光) 미치거나(狂) 넓거나(廣)도 해도 될거 같아요.  958년, 전국의 수험생들이 개경으로 모여들었다.

  그동안 힘 있는 자들의 자식들만이 벼슬을 했고 영화를 누려왔다허나 오늘의 이 과거는 나라의 희망이며 짐의 기대이며 앞으로는 공부하는 자들만이 살 수 있고그들만이 벼슬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다 신분에 상관없이 시험을 통해 벼슬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광종의 혁신적인 인재 등용. 그것은 우리 역사 최초의 과거 시험이었다.

  쌍기: 고려 최초의 과거시험을 보겠소!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볼 수 있소! 획기적이지 않소?내 자랑같지만 이게 내가 광종에게 건의해서 보는 시험이오. 이 시험이 천년을 갈 것이오. 역사적인 순간이오.  쌍기의 의견을 채택하여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하니 이로부터 문풍이 비로소 흥성하였다 <고려사절요 광종 9년> 쌍기: 천하장사 이해영. 씨름왕? 뭐요? 왜 천하장사요? 이해영: 제가 그만큼 똑똑합니다.

  쌍기: 알겠소. 충주는 호족의 지역 아니오. 오늘 꼭 합격하시오. 그럼 최초의 1회 과거시험 시제를 공개하겠소!  류근: 알겠소. 최원정: 13년 만에 도전 골든벨 문제를 내보겠습니다.

역사저널 그날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 논해주시기 바랍니다.

  류근: 이거 문제 진짜 나쁘다.

정규직들이 워크숍 가서 논의할 거를 왜 우리한테 시키냐고요.  최원정: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데요? 쌍기: 정답판 들어주세요. 먼저 충주의 자랑! “패널을 쌍기만큼 대접하면 됨(집, 벼슬, 여자)” 류근: 정답이라고 확신합니다.

 이해영: 이해영을 매주 쓰시오. 매주 출연하면 더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보고있나 이윤석?그리고 “역사저널 그날 is 뭔들” 이미 완벽하다는 뜻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유행어입니다.

 쌍기: 그렇소? 고려시대 사람이라 잘 모르겠소. 자, 쌍기가 시행해서 시작한 과거제도의 첫 장원급제자는 누구일까요? 최원정: 역사적인 최초의 장원급제자는 바로 최섬 입니다.

  류근: 시험은 우리 둘이 봤는데 왜 최씨가 되요? 최원정: 다 그런거에요.  신병주: 당선작이 없어서 다른 사람을 치게 했겠죠. 최태성: 과거와 관련된 중요한 사료를 가져왔어요. 과거에 합격하면 합격증을 주는데 홍패라고 해요. 보여드릴게요. 실제 크기에요. 잘 보시면 병과 급제, 그리고 관직명 나오고 밑에 수결, 사인한 시험관들이 나옵니다.

아쉽게도 최섬의 홍패는 남아있지 않고요. 1205년 과거에 합격한 장양수라는 사람의 홍패에요. 어쨌건 왕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행정문서이기 때문에 국보 18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신병주: 고려시대 홍패는 총 6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홍패는 붉은 종이에 쓴 합격증서라는 뜻입니다.

  류근: 이해영 감독이 매주 출연시켜달라고 행패를 부리니까 홍패가 다른 사람한테 가잖아

이해영: 수험생 입장에서는 문제가 좀 황당해요. 어떻게 풀어야 하나 막막하더라고요. 실제로는 어떤 시험을 봤나요?  이익주: 문장 실력,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이 두가지를 가지고 시험을 보게 되는데 첫번째 과거에서는 시, 부, 송 세가지 문장을 포함해서 시험을 보게 했는데 여기에 시무책이라는걸 같이 시험봤습니다.

역사저널 그날의 발전방향에 대해 논하시오. 이런 식입니다.

국가의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제시하고 수험생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죠. 광종이 첫번째 시험에서 이런 시무책을 포함시킨건 자기와 함께 개혁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널리 얻기 위한 것이라 해석됩니다.

  시, 부, 송 및 시무책으로 시험하여 진사를 뽑았으며... <고려사 세가 광종 9년> 신병주: 처음 쌍기가 과거시험을 건의해서 시행했을때 본인이 직접 주관했어요. 지공거의 역할을 하면서 주도해나갔습니다.

 쌍기가... 여러 차례 지공거(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관리)를 맡이 후학을 북돋우니 비로소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흥기하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쌍기> 류근: 그럼 과거제도가 없었을 때 고려는 관리를 어떻게 등용했어요? 신병주: 요즘으로 말하면 금수저로 태어난 귀족의 자제들이 주로 관리로 등용되었죠. 그런 의미에서 광종때 실시된 과거제도가 능력있는 인물이라면 누구나 응시해서 관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혁신적인 제도였고 조선에서는 더 발전된 형태로 계승되죠. 958년에 실시해서 1894년 갑오개혁때 과거제도가 공식 폐지된걸 고려하면 거의 940여년 이상 존속한 제도가 과거제도였어요. 이익주: 고려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과거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됩니다.

예컨대 몽골과 전쟁을 하고 수도가 강화도로 옮겨진 상황에서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치렀다는 것이죠. 이해영: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이 아마도 이때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싶은데... 들으면 들을 수록 광종이 쌍기를 만난건 절묘한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해요. 만난게 아니라 광종이 선택을 했다면 진짜 신의 한 수, 대단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최태성: 광종은 두가지 키워드를 기억하라고 했잖아요. 첫번째가 노비안검법 그리고 과거제에요. 노비안검법이 경제적 개혁이라면 과거는 정치적 개혁이라고 보면 됩니다.

과거제를 통해 호족의 칼의 시대에서 붓의 시대로 넘어갑니다.

신분만 봤는데 이제는 실력도 보는 획기적인 분기점에 있는 제도입니다.

 류근: 칼의 시대에서 붓의 시대로 간다는거 멋진데요?  최원정: 문치시대로 가는 역사적인 사건이잖아요. 학생들은 광종이 시험을 만든 왕이었어? 하면서 싫어할거 같아요. 류근: 우리 학교다닐때 실제로 광종을 미워했죠. 왜 쓸데없는 걸 만들어가지고... 정말 내용을 모르고 무조건 암기만 하니까요. 그때 과거제를 실시하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면 관직과 기득권을 대물림 하면서 금수저만 활개치는 나라가 되었을 것 아닙니까? 백성들에게 희망의 물길을 열어줬다는 면에서 제대로 평가를 해주고 싶습니다.

 신병주: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이외에도 광종의 개혁은 계속됩니다.

960년에 관복을 정비합니다.

그 이전에도 물론 관복을 입었는데 어떤 사람은 예전 신라쪽 관복을 입고온다던가 심지어는 왕보다 더 화려하고 비싼 옷을 입고 와요.  이해영: 빠져가지고... 류근: 신하들이 빨주노초파남보로 앉아있는거 아니에요. 한마디로 위계질서가 없어진거 아니에요? 신병주: 그래서 광종 때 통일을 합니다.

4가지 색, 자색, 붉은색, 진홍색, 녹색 네등급의 공복을 정해서 등급에 따라 입게 한거죠. 관복이 정비됐다는건 그만큼 광종 시대의 왕권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거죠.  백관의 공복을 정하였는데, 원윤 이상은 자삼, 중단경 이상은 단삼, 도향경 이상은 비삼, 소주부 이상은 녹삼으로 하였다 <고려사 지 광종 11년> 최태성: 정리해보면 956년에 노비안검법, 958년 과거제, 960년 관복제정, 2년마다 착착 하나씩 풀고 있죠. 뿐만 아니라 개경을 황도라고 하고 서경을 서도라고 하는데 황도는 황제의 도읍이에요. 스스로 황제라는걸 만천하에 증명합니다.

  이해영: 황제라는 말은 중국에서만 쓸 수 있는거 아니에요? 류근: 그러게요. 불경죄에 걸리는거 아니에요?  이익주: 여기서도 고려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류근: 고려할 게 정말 많네요

 이익주: 고려는 조선과 많은 점에서 다른 나라입니다.

고려는 대대로 중국의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습니다.

  그래서 중국왕조에 대해서는 국왕이라고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바깥으로는 국왕이라고 하고 안에서는 황제라고 한다, 외왕내제라고 하는거죠. 조선에서 국왕을 전하라고 부르고 왕위에 오를 사람을 세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고려에서는 폐하라고 부르고 그 다음 왕에 오를 사람을 태자로 통일한 겁니다.

  최원정: 고려시대에는 전하라고 하면 안된다는 거네요.  류근: 괜히 제국의 아침이 아니었던 거네요.  신병주: 왠만한 것은 고려보다는 조선이 시스템으로 앞서고 발전했는데 여기는 제가 좀 밀립니다.

황제라고 칭하고 태자, 폐하라고 부르지 못한건 격이 한단계 낮춰진거죠. 이건 고려가 셌다고 인정합니다.

  이익주: 고려는 조선과 비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최원정: 재밌다

교수님들끼리 신경전 너무 재밌다.

그쵸? 이익주: 고려는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고 그에 걸맞는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 고려사를 편찬할 때 조선시대 관리들의 가치관에 의해서 황제국 고려의 모습이 많이 삭제되었습니다.

그래서 황제국의 모습을 알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최원정: 그렇군요. 조선과 비교해서 들여다보면 더욱 더 재미있는 나라

 신병주: 황제국은 제가 인정한다 그랬잖아요.  이해영: 배트맨 대 슈퍼맨만 알고 있었는데 고려 대 조선도 재밌네요. 최원정: 과감한 개혁을 통해서 고려의 기틀을 다진 광종인데요. 빛나던 그의 치세에도 변화가 찾아옵니다.

     964년, 고려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광종] 누구의 잘못인가



 모두에게 행형을 가하라 태조 이래 최고의 실력자였던 박수경의 세아들이 참소를 입오 광종의 분노를 산 것이다.

   박승위/ 박수경의 첫째아들아버님과 우리들은 황제 자리를 폐하께 만들어 드렸소이다그러나 폐하는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소이다광종은 개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숙청했다.

결국 박수경 일가는 몰락하고 말았다.

 왕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형 혜종과 정종의 아들인 조카들까지 처형했다.

광종이 또 다른 칼을 뽑아든 것이다.

최원정: 개혁의 칼이 아닌 숙청의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변하나요? 최태성: 저 숙청의 칼을 들기 위해서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저는 그 부분이 소름끼치는 거에요.  류근: 일단 힘을 빼놓는 거에요? 최태성: 노비안검법으로 세력을 약하게 해놓고 신진인사를 앉혀놓은 다음에 숙청의 칼을 드는거에요.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토리를 만들어보면 소름이 끼쳐요. 신병주: 조선 태종과 광종의 평행이론을 이야기했는데 수시로 칼을 뽑아드는 것도 비슷해요. 이익주: 박수경 일가의 몰락은 광종 치세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7년이 준비의 시기였다면 광종 7년부터 개혁의 시기가 있고 광종 15년 박수경을 처벌하면서부터 숙청의 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박수경은 평산이 본거지이고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태조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외척이 되기도 하고 그 이후에 광종이 즉위할 때도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던 사람입니다.

 이익주: 그런데 박수경의 세아들을 처벌하고 박수경은 화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세력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강력한 후원세력인 평주의 박수경 일가를 제거해버린 것이죠.  아들인 좌승 박승위, 박승경과 대상 박승례 등이 참소를 당하여 옥에 갇히자, 박수경은 울화병으로 죽었다 <고려사 열전 박수경> 류근: 정국이 정말 긴박하게 돌아가네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최측근을 숙청해야했는지 모르겠어요.이해영: 이 정도의 최측근에 후원세력이라면 역모 정도는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최태성: 참소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는 없는데 박수경 일가의 몰락 이전인 960년에 권신이라는 사람이 참소를 합니다.

조정의 실세였던 왕동과 준홍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면서 참소를 올리는데 이때부터 호족세력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시작된거죠. 쭉 이어져서 박수경에 연결되는 스토리가 나오거든요. 당시 모습을 보면 후세 사람들이 고발과 고소가 난무했던 시기라고 해요. 노비들이 주인을 고발하고 심지어는 자식이 아비를 고발하다보니까 감옥이 모자라서 임시감옥을 만들정도였다고 해요. 죄없는 사람도 당했던 처참한 시기입니다.

 평농서사 권신이 준홍과 좌승 왕동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하자 이들을 내쫓았다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고 그 아비를 참소하니, 감옥이 늘 넘쳐나 별도로 임시 감옥을 두었고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계속 생겼다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최원정: 카더라 카더라 하면서 무고죄로 잡혀갈만한 카더라가 유행해던... 류근: 그래서 빛나거나 미치거나 네요. 빛나던 시대에서 이제 미친 시대로 접어드는 거 아니에요? 신병주: 광종의 개혁정치 자체는 기본적으로 왕권강화 입니다.

본인이 왕위에 오르는데에는 결정적 도움을 준 호족이지만 왕권강화를 하는 광종에게는 가장 강력한 적이 되어버린거죠. 정말 절묘하게 조선도 태종이 왕이 되는데 가장 결정적 도움을 준게 처남들이에요.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들인 민무구, 민무질. 드라마 많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최명길씨의 동생을 다 죽여버려요. 태종이 광종 연구를 많이 한거 같아요. 최원정: 그때도 참소로 인해서 다 숙청된거잖아요? 이해영: 진짜 광종이 노비안검법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이 숙청을 위한 단계였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우면서... 호족세력이 실제로 역모를 꾀하려고 했을 수도 있지만 이것도 광종이 뭐 하려고만 하면 걸리적거리니까 누굴 시켜서 센 걸로 걸어보라고 참소가 들어오면 명분이 생기니까 제거하는 그런 식이 아니었을까... 최원정: 왕에게 명분을 만들어주는게 잘 짜여진 시나리오 같네요. 정말 그랬을까요?이익주: 역사 속에서는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고요. 그래서 짜여진 시나리오 아니냐는 음모론이 싹틀 수 있는데요. 물론 여러가지 상상이 가능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대로 남겨두려고 하는 여유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무튼 광종의 숙청은 호족들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고 왕실 안까지도 칼날이 미치게 되는데요. 광종의 두 형인 혜종과 정종의 하나뿐인 아들 두 사람을 광종이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는 자기 아들 왕주조차도 의심하게 됐다고 합니다.

 두 임금의 조정에는 오직 외아들만이 있었는데 광종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않았으니... <고려사 열전 최승로> 비록 왕의 외아들 왕주라도 의심을 받아 왕을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 신병주: 정말 고려판 킬러에요.류근: 정말 권력을 놓고 아들과 아버지와 반목하는 구조는 역사저널 하면서 너무 익숙해져버렸어요. 그래도 그렇지 정치는 참 비정한거 같아요. 도대체 왜 아들을 의심한거에요? 이해영: 아까 대목왕후 황보씨도 자기 편이 아니라 반대편에서 각을 세웠잖아요. 아들도 엄마따라서 외가편을 들어서 ‘이놈도 애비의 마음을 모르고 적이 될 수 있다’ 이런 경계? 최태성: 황주의 호족세력을 경계한거죠. 자기 아들 경종을 앞세워서 압박할 수 있다, 도전할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그랬구요. 최원정: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광종 입장에서는 생존 투쟁? 그런 느낌이 드는데요? 신병주: 고금을 통틀어 권력은 부자도 나눌 수 없는 겁니다.

광종이 공포정치를 할 때는 왠만하면 다 걸리는 거에요. 최승로가 광종을 평가한 기록을 보더라도 그 당시 형장에 끌려간 사람은 대부분 죄가 없었고 대부분 오래된 공신과 장군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거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공포정치가 거의 10년 가까이 지속됩니다.

그래서 드라마 제목에 ‘미치거나’가 들어간거죠. 형장에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죄가 없는 이들이었으며 역대의 훈신과 노장들이 모두 죽임을 면하지 못하여 사라져 갔습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류근: 개혁을 통해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분명히 빛나는 업적이지만 숙청은 정말 광기라고 볼 여지가 충분한거 같아요. 최태성: 약간 ‘뭐지?’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숙청 동시에 법회를 열어요. 모든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법회를 열고 귀법사를 창건하고 제위보 열어서 질병 치료하고 빈민을 구하는...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속으로는 스스로 회의하여 죄악을 씻어보고자 재회를 널리 베풀었다 <고려사 세가 광종 19년> 류근: 이번엔 세조하고 비슷하네요.  신병주: 그렇죠. 병 주고 약 주고

 이익주: 광종은 선행을 통해서 개인적인 죄를 씻으려고 했던거 같습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어떤 때는 식량과 땔감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줄이 너무 길었다고 합니다.

수를 셀 수 없었다는 말이 나오고... 또 방생소를 설치해서 방생을 하고 불경을 강론하게 하고 살생을 금한다고 해서 도살을 금지했기 때문에 왕의 밥상에 오르는 고기마저도 시장에 가서 사와야 될 지경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끔 떡과 쌀, 콩과 땔감을 서울과 지방의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곤 하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방생하는 곳을 많이 설치하고 근처 사원에 나아가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으며 도살을 금하였으므로 왕의 반찬으로 쓸 고기도 시전에서 사다가 올렸다.

<고려사 세가 광종 19년>이해영: 말하자면 양심의 가책같은걸 느꼈다고 볼 수 있는데 요즘 표현으로 하면 ‘태양의 후회’ 군요. 최원정: 요즘 그런 표현이 있어요? 안 웃기지 말입니다.

 이해영: 날카롭지 말입니다.

류근:  그만큼 광종은 호족이 두려웠다는 뜻일 수도 있을거 같아요. 정종과 혜종이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봤잖아요. 그래서 더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을 절감했던거 같고 개혁과 숙청이라는 양날의 칼을 휘두를 수 밖에 없지 않나...최원정: 오늘 이광용 아나운서가 조선의 태종과 고려의 광종이 평행이론이라고 했을때 억지스럽다고 했잖아요. 들으면 들을 수록 그 얘기가 맴돌면서 신기한데요?신병주: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아버지가 나라를 창업한 사람이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광종은 고려판 왕자의 난에서 최종적으로 평정한 인물이고요. 마찬가지로 태종도 1차 왕자의 난때는 형인 정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가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았고 결과적으로 500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창업에서 수성의 시대로 가는 기틀을 마련했던 또 다른 공통점이 있죠. 그리고 성격적으로도 킬러 본능을 가지죠.최태성: 다른 점도 있죠. 태종의 아들은 세종이고 광종의 아들은 경종입니다.

이 둘이 정말 손에 피를 묻혀가면서 안정적인 나라를 구축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아들에게 던져줬잖아요. 그런데 세종을 안아 받아서 찬란한 조선 전기를 만들어낸 반면 광종의 아들 경종은 세종만하지는 못했다는 거, 그게 차이점이죠.신병주: 경종의 뒤를 잇는 성종에 연이어서 개혁이 후퇴하는 성향도 보여요. 대표적으로 경종이 왕위에 올랐을때 숙청을 당한 사람의 가족들이 복수할 수 있는 복수법을 만들었어요. 호족들의 억울함을 법적으로 해결해주겠다는 거죠. 성종때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해서 해방시켰는데 다시 재조사가 들어가서 해방됐던 노비가 다시 노비로 환원됩니다.

노비의 경우는 잠시 평민이 됐다가 또 노비가 되면 더 침울하거든요. 이해영: 차라리 노비로 살게하지, 괜히 밥맛을 보게 해서 괜히 성격만 더 나빠지고... 삐뚤어지고 싶어 질거 같아요. 류근: 정말 기득권 세력들이 이렇게 무서운거네요. 그들을 개혁에 동반자로 삼지 못하면 결국 이렇게 다시 당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거 같아요.이익주: 광종이 읽었다는 <정관정요>에 탕업이 수성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이라는 말이죠. 고려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태조의 창업보다 뒤에 이어 등장하는 국왕들의 수성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광종과 태종이 모두 수성의 짐이라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힘들게 나라의 기틀을 잡은 왕들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죠. 신병주: 두 사람이 그 과정에서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거죠.  최원정: 창업이 수성난, 멋진 말이네요. 비단 나라를 세우는 일 뿐이겠어요?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 않아요? 사업도 그렇고 프로그램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요.  이해영: 제가 수성이 안되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최원정: 개혁의 군주이면서 피의 군주였던 광종, 하지만 고려의 기틀을 만들었던 고려의 4대왕인 광종에 대한 이야기 나누어보았습니다.

      .오밤중에뜻밖의 한국사;;달의연인 보보경심:려'려'가 고려의 麗라지.고울 려 라서그렇게 고운 것만 따졌는가ㅋㅋㅋ역사가 스포라더니흠흠뭐가 스폰데?ㅋㅋㅋㅠㅠ아,중드처럼 4황자니 8황자니 하길래이름들은 픽션일 줄 알았는데이름도 역사대로였구나!왕무,왕요,왕소드라마 시작할 때 문구가...괜히 당당한게 아니었어...http://naver.me/FzGvFevrhttp://naver.me/FI0jVJGshttp://naver.me/FBR1QnlJ존경하는 설민석 쌤의동영상도 있었구나

그나저나...피비린내가 나거나 말거나광종이거나 말거나이런 모습도 섹시한 소오빠성격이 개늑대라...다 죽이고ㅠㅠ숙청을 통해 왕권강화를 했지만...알고보면 업적도 많았던 왕, 광종!9화부터는 드디어 해수가 왕소가 광종이 될 인물임을 알았으니더 무섭고 더 재미있어지겠지?크흙흥+4황자-해수-8황자의 삼각관계는 뽀너스허허허그럼 이제...구르미를 위해홍경래의 난을 파러 가 볼까나?고려시대 큰 부자들은 농토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었는데이 부자들은  그 땅을 노비가정에게 소작으로 나눠준후그들을 하청업체처럼 관리하면서 이익을 취하는 형태였어요.이런 큰 부자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이들을"호족"이라 부르고 있어요.오늘날로 말하면,, 재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따르면,고려시대에는 소작농 노비를 포함해서1,000명 이상의 노비를 보유한 호적들이 적지 않았다.

태조 왕건이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건국과 통일을 한게 아니라대부분 평안도 청주 유씨와충청도 충주 유씨, 경상도 김씨의 김씨의성의 홍씨, 황해도 평산의 박씨 등 같은지방 호족들의 도움으로 이룩했죠.태조 왕건의 정권은 호족연합체 정권으로 호족과 함께 성장한 나라였죠.왕건이 29명의 부인을 둔 것도 이런 이유였구요.자신을 도운 호족들을 배려(?)하면서 통솔하려면그들의 딸들을 부인으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죠.고려왕조는 태생부터 재벌적인 호족연합이었으니까요.대한민국 처럼 재벌들에게 휘둘려백성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재벌을 위해 작동할 수 밖에 없었죠.왕건의 고려 건국이후,모든 왕들은 이런 풍토에 불만이 있었지만이런 불만을 겉으로 표출한 용감한(?) 왕이바로,, 왕소(훗날 광종)였죠.재벌 중심, 호족중심으로국가를 운영하자니, 이만저만 불편(?)한게 아니었으니까요.그래서,, 광종은호족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왕권을 강화하는 일을 급속하게 처리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했어요.처음 몇년간은 아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호족들의 이익을 지켜주고 좋게 지냈지만,집권 8년차에 접어 들었을때는 호족들의 세력을흔들었죠. 집권 8년차인 956년에  <노비안검법>집권 10년차인 958년에 <과거시험>실시가신호탄이었죠.참고로,, "시무 28조"로 유명한 최승로는 경주 출신의 귀족출신으로 광종 사후에 성종에게 제출한 상소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어요.고려 역사서인 <고려사절요>에 실린 상소문에서최승로는,,, 광종의 집권초기 몇년간 보여진 친재벌적 정책을 두고즉위한 뒤로 8년만에 정치와 교화가 맑아지고 공평해졌다라고극찬했는데,, ,  (중략)  말년에는 죄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고하면서 사람 살 세상이 못된다고 혹평했죠.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이 부당하게 소유한 노비들을해방시키기 위한 취지로 호족들의 농토를 경영하는 노비들을빼앗은 것은 호족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고,과거시험은 호족들의 관직 독점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가문을 배경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호족자녀들을 견제할 목적으로실력 위주의 관료 선발제도를 실시하였어요.집권12년차, 대대적은 호족 숙청노비안검법과 과거시험으로호족세력을 서서히 빼앗은 광종은집권12년차가 되는 960년부터는 아예 호족들에 대한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돌입했어요.호족들의 역모사건을 적발하거나조작하는 방법으로 공포정국을 조성한 뒤,호족들을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했죠.광종이 반재벌(반호족)정책을 시행하자광종을 좋게 평가했던 최승로도 혹평을 했구요.

광종은 재벌이 서민을 착취하는 것은 물론이고왕실을 압박하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서 싸운 왕이었어요.대부분의 왕은 이런 일을 시작했다가제대로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은데무려 16년동안 재벌들을 압박하면서 나름 경제민주화를 달성한 거죠.광종 죽음이후,그 개혁이 대부분 물거품되어제대로 이어지도록 하는데는 실패하여한계가 드러났지만

지도자가 경제민주화를 위해서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잘 보여준 인물이바로, 왕소(훗날 광종)이에요.유용했다면

선물 팡팡



부탁드려요

?   극중 " 왕소 " 라는 인물은 고려태조 왕건의 3남이자 고려의 4대왕인 광종이라는 사람 입니다.

실질적으로 존재 했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이 였습니다.

그래서 고려 4대와 광종에 대해서 소개 해드리겠습니다.

???   조선시대의 "피의 군주" 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연산군? 세조? 머 물론 많겠지만, 진정한 " 피의? 군주 " 라고 하면 태종이 생각 납니다.

동복형제, 이복형제, 부인의 친척, 아들인 세종의 부인의 외척, 개국공신 까지 왕권강화에 방해 되는 인물들을 다 죽였으며, 피로써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다잡았습니다.

고려에도 마찬가지로 피의 군주가 존재 했었습니다.

그 역활을 했던 이가 고려 4대왕 광종 입니다.

????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초반의 태조가 한말 중에 처음 나라를 세울때는 개국공신의 힘이 필요하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 되려면 개국공신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하죠, 그것처럼 광종은 오랜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태조의 3남으로 태어나 누가 봐도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위치 큰형인 혜종과 친형인 정종을 앞서 보내고 철저하게 힘을 키워 왔다고 합니다.

외가인 충주를 기반으로 정치적으로 힘을 키우고, 황주를 기반으로 한 첫번째 부인의 후광이 있었고, 첫번째 부인은 태조와 신정왕태후 사이에 맏딸이라고 합니다.

 즉, 첫번째부인과 광종은 이복남매가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 부인 또한 큰형인 셰종의 맏딸로 조카와 혼인을 하였고, 이것으로 인해 통치 기간 내내 외척의 세력이 개입 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광종이 이루 업적은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관복제정, 왕권강화 등이 있습니다.

광종의 업적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 첫번째 노비안검법? 노비안검법은 노비 해방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공신들이 소유한 사노비는 전쟁 포로나 가난한 양민 출신들의 많았지고, 공신세력의 개인 소유 재산이엿습니다.

노비안검법은 이런 자들을 조사를 해서 전에 양민이었던 사람들을 해방 하는 조치 였습니다.

광종은 이것을 통해 공신들의 세력을 누루고 왕권을 강화 하였다고 합니다.

?두번째는 과거제도?당시 고려시대에서 벼슬길에 오르는 방법은 시험이나 명성이 아닌 집안 배경이였다고 합니다.

권문세가의 자제가 아니더라도 관리가 되어 나랏일을 볼수 있는 제도로 그 당시에 파격적인 조치이며, 광종은 호족세력이 아닌 젊은인재를 등용함으로 호족세력을 견제하고 고려가 문인들의 시대로 가게 되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 ?세번째는 관복제정?개국초기이고 그 당시엔 아직 관리들의 예복이 없었다고 합니다.

임금보다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입궐하는 신하도 있었고, 태봉쪽의 호족들은 그들의 관복이였던 가사를 신라쪽 호족들은 옛 신라의 관복을 중국쪽 호족들은 원래 자신들이 입던 대로 입궐 했다고 합니다.

지금 으로 말하면 자율 복장이였습니다.

상황이 이러 하여 광복제정을 하였고, 각 관리의 등급에 따라 보라색, 붉은색, 연두색, 자주색 만들어 위계질서를 바로 잡았다고 합니다.

?? ?지금까지 알아본 것은 광종의 업적이였다면, 그가 피의 군주 또는 미치광이 왕 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즉위 11년이 되는 해 부터 시작된 공포정치 그가 죽기전까지 15년동안 사람을 미친듯이 죽였고, 자신의 형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 까지 죽였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아들까지 의심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에는 자리가 없어 넘쳐날 정도였고, 죽기전까지 이어 졌다고 합니다.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뜻은 이것을 뜻 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빛나는 업적이거나 미치광이 살인마 이거나 빛 광 光  미칠광 狂 = 광종? F.케네디 대통령은 100년이라는 차이를 두고 1860년과 1960년 그러니까 60년도에 백악관에 입성했습니다.

  이해영: 너무 진지하게 듣고 있었나봐요. 엉터리 같은데

이광용: 또 이 두사람은 금요일에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려와 조선에도 정말 똑같은 삶을 살아간 두 왕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의 태종과 고려의 광종! 먼저 창업자의 아들이었다는 점 그리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적장자가 아니었음에도 피의 숙청을 통해 왕좌를 거머쥐었다는 점!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조선 태종 바로 앞의 왕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해영: 압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분이기 때문에 정종.  이광용: 그렇다면 고려 광종 바로 앞의 왕은 누구입니까? 이해영: 설마? 정종?  이광용: 맞습니다.

심지어 한자까지 똑같습니다.

시시하다, 끼워맞췄다 하시는 분들 오늘 방송 끝날 때 즈음에 분명히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오늘 역사저널 그날은 조선 태종과 고려 광종의 평행이론에 집중해서 보시면 보는 재미 분명 두 배로 늘어납니다.

채널고정! 956년, 광종은 중대 발표를 한다.

  이 나라의 수십만 백성들이 지난 삼한 통일 때 억울하게 희생이 되어 크고 작은 호족들의 노비가 된 것을 알고 있소이다.

그들을 노비의 사슬에서 풀어주고자 함이올시다.

이른바 노비안검법이란 것이올시다.

 노비를 통해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취해오던 호족 세력은 광종에게 반기를 들고 나서는데... 폐하께서 내리신 노비안검법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오까?세상이 몽땅 노비들의 천국이 되었소이다.

이렇게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광종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 나라의 모든 노비는 관에 신고를 하랍니다.

억울한 자들은 모두 평민으로 되돌려 보내준다는구먼. 노비안검법, 호족세력과의 정면 충돌이자 고려 500년 기틀을 다지는 개혁의 신호탄이었다.

  최원정: 노비안검법, 한번 쯤은 다 들어보셨잖아요.  이해영: 사실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선생님이 빨간줄 치면서 시험에 나온다고 이거 나왔는데 틀리면 한대 맞는다고 했는데 틀려서 한대 맞았어요. 요새도 강조되나요? 최태성: 그럼요. 예나 지금이나. 조선시대에 세종이 나온다면 고려시대는 광종이 꼭 시험문제에 나오거든요. 광종은 두가지 키워드가 있어요. 노비안검법 그리고 또 한가지 시험에 나옵니다.

  신병주: 고려시대는 드라마가 많지 않았는데 2002년 KBS <제국의 아침>으로 방영했어요. 2015년에 MBC에서 광종의 광자를 잘 해석해서 <빛나거나 미치거나>, SBS에서도 이준기씨 주연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해요. 결국 방송 3사에서 광종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을 했거나 할 예정이라는건 광종에게 뭔가 있다는 거에요.   류근: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의미가 심상치 않게 읽히는 것이 빛 광자잖아요. 미칠 광자도 있고요. 중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는 것, 이 분이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런 해석을 받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최원정: 노비안검법?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가요? 이익주: 안검은 살피고 조사한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노비 가운데는 원래 양인이었다가 호족들이 전쟁포로를 자기 노비로 삼거나 돈을 주고 사서 노비로 삼은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조사해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 신분인 양인으로 되돌리는 겁니다.

  노비를 상세히 조사하고 살펴서 옮고 그름을 따져 밝혀내도록 명하였다 <고려사절요 광종 7년>  이해영: 억울하고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댓가없이 풀어준다? 굉장히 획기적인데요? 류근: 미국의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했잖아요. 그렇게 보면 노비안검법이야말로 노예해방의 원조 아닙니까? 신병주: 정말 원조입니다.

노비, 노예는 비슷한 하층민이었으니까 거의 900년 앞서서 제시를 했고 광종은 호족의 경제, 군사력을 약화시켜서 왕권을 강화하고자하는 목적이 있었고 링컨은 인권을 향상시키고 북부 산업지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크게 보면 광종도 왕권강화, 링컨 입장에서도 정치 리더십 강화라는 공통점이 보이는 거죠. 최태성: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남부 지역에서는 격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광종의 노비안검도 가정이 순탄치 않죠. 호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이해영: 모든 노비가 대상이 아니라 억울한 노비들만 풀어준다는데 그렇게까지 반대할 이유가 있나요? 이익주: 그 당시 노비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 노비 뿐만 아니고 사병이 될 수 있는 즉, 호족의 군사력이 될 수 있죠. 따라서 노비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호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걸 의미하는데요. 그런데 왕비인 대목왕후 황보 씨가 광종에게 불만을 전달합니다.

 류근: 남편의 왕권이 강화되는 정책인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지해줘야하는거 아닌가요? 조선시대 같으면 왕의 정책을 왕비가 대놓고 반대하는건 있을 수 없잖아요.  신병주: 조선시대는 왕비가 정치에 관여하는건 금지했죠. 류근: 대목왕후 외가가 당시 유력한 호족세력이었던거 잖아요? 그래서 왕비의 입김이 강했다고 해석해야하는게 아닐까요? 최태성: 당시 광종을 지지하는 세력을 보면 황주의 황보가 버티고 있고 엄청난 호족 세력인 박수경이 평주에 있고 충주에 있는 엄청난 호족 집안들이 왕건, 혜종, 정종 내려오면서 지지하는 왕을 앉히려고 노력하는데 최종 승자는 광종인거죠. 그래서 황주, 평주, 충주의 호족 세력들이 광종이 즉위할 당시 가진 힘은 엄청날 수 밖에 없어요. 이해영: 대목왕후 황보 씨도 황주 지역 호족세력의 일원으로서 반대했다고 봐야하나요? 어쨌든 광종의 즉위 초기에 호족 세력이 득세하고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그럴때 자기 부인이 친정편 들면 반대편에서 각을 세운 거잖아요. 남자의 마음 이해가 되네요.  이익주: 왕후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려시대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죠. 고려시대 국왕들이 족내혼을 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고려시대 왕 중 가장 먼저 족내혼을 한 왕이 누굴까요?  이해영: 설마 광종인가요? 이익주: 네. 광종에게는 두 사람의 왕후가 있었는데 한 명이 대목왕후 황보씨입니다.

태조의 4번째 부인인 황보씨의 딸입니다.

그러므로 대목왕후 황보씨와 광종은 남매간이 되는 거죠. 그리고 광종의 두번째 부인은 경화궁부인 임씨인데 형 혜종의 딸입니다.

그러니까 삼촌의 조카 간에 결혼을 한 것이죠.  최원정: 삼촌, 조카, 남매... 정말 난이도가 높네요. 류근: 다시 말하지만 고려, 고려에요. 최원정: 조선에는 이런게 없었잖아요. 신병주: 조선은 깔끔하죠. 기본적으로 조선왕조 왕비는 외부 간택 즉, 공모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려시대처럼 조카와 이모가 섞이는게 없죠. 아주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이익주: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왕조입니다.

따라서 신라시대에 골품 안에서 족내혼을 하던 전통이 고려 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던 겁니다.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 왕실의 권력, 경제력이 분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겁니다.

 최원정: 고려 왕실의 족내혼은 고려의 풍습이었다는걸 잊지마시고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호족의 세력이 강했는데 광종은 어떻게 호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비안검법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까요? 이익주: 아주 오랫동안 기다립니다.

광종이 왕위에 있던 기간이 26년입니다.

맨 앞에 8년 동안을 호족의 실세를 인정하고 호족에 대한 어떠한 정책도 없었던 거죠. 그러다가 8년째 되는 광종 7년에 노비안검법이라고 하는 개혁을 시작한 것이죠. 초기에는 기다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영:혹독한 시집살이의 느낌일거 같아요. 귀 닫고 3년, 입 닫고 3년 이런 식으로 그 시간을 버티면서 마인드 컨트롤? 마음을 다 잡으면서 언젠가 때가 오면 일어날 것이다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신병주: 그래서 드라마 <제국의 아침>을 보면 광종이 신하들에게 절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실제로 그러진 않았겠지만 건드리지 않겠다는걸 드라마적으로 표현한거죠.  광종이 즉위하신 해로부터... 정치와 교화가 맑고 태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최태성: 교수님이 7년을 얘기하셨는데요. 개혁의 순서가 7년에 나온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늘 정관정요라는 책을 끼고다니면서 읽었다고 해요. 정관정요는 당태종이 신하들과 정치문답을 하면서 적어두었던 제왕학의 교과서, 정치란 어떻게 해야하는지 적어놓은 건데 당태종도 형제를 죽이면서 패륜을 저지르면서 왕이 된 사람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너무 잘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정관의 치’라는 말로 높여줬어요. 사천감에서 아뢰어 말하기를 ‘덕을 닦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이로부터 늘 <정관정요>를 읽었다.

 이해영: 광종의 입장에서는 정관정요, 당태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후대에 길이 남는 왕이 되야겠다는...  류근: 광종도 사람인데 힘없는 왕으로 남고싶진 않았겠죠. 그러고보니까 7년이라는 세월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이 매미도 날개를 달기 전에 7년간 애벌레 시절이 있다고 해요.  이해영: 그래서 그렇게 시끄럽게 우는구나

 류근: 광종이 정말 7년간 와신상담하면서 정관정요를 읽으면서 칼을 갈고 있는 거에요. 이익주: 그렇게 열심히 칼을 간 광종이 칼을 뽑습니다.

그것이 노비안검법입니다.

노비는 세금을 안 내고 군대도 안 가죠. 국가 입장에서 볼 때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 사람들을 양인으로 만들면 군역도 확충할 수 있고 세수도 늘릴 수 있죠. 따라서 노비안검법은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할 수 있는 3가지 목적을 동시에 가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원정: 호족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잘라낸다는건 그야말로 손과 발을 잘라내는 절묘한 개혁안이네요.  이해영: 학교다닐 때 이 만큼만 설명해주셨어도 안 틀렸을텐데 그냥 외우라고 하니까 틀리지...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네요. 최원정: 광종이 개혁의 칼을 꺼내들었는데 노비안검법만 꺼내든건 아닐거 아니에요? 고려에는 또 다른 파란이 예고됩니다.

  이광용: 오늘은 특별히 <이광용이 만난 사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파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들어오시지요.  쌍기: 니하오

 이광용: 중국사람? 쌍기: 나는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요. 이광용: 후주에서 고려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쌍기: 사절단을 따라 왔었는데 몸이 아파 돌아가지 못하고 그냥 눌러 앉아서 귀화했소. 대리평사 쌍기가 설문우를 따라 왔다가 병에 걸려서 머무르게 되었다 <고려사절요 광종 7년>  이광용: 아무리 봐도 아플 몸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거나 다 나으신듯 한데 왜 안 돌아가시고 눌러 앉으신겝니까? 쌍기: 이거 얘기하면 내 자랑 같은데 괜찮겠소?광종이 내 식견에 탐복을 하셔서 남아서 고려 발전에 도움이 되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길래 받아들였소. 자랑같은데... 병이 낫자 왕이 접견하고는 매우 흡족히 여겼다.

.. ... 발탁하여 관직에 임용하였다.

<고려사 열전 쌍기> 이광용: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려의 폐하께서 뭘 내리셨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쌍기: 아주 큰 집을 내리셨소.  이광용: 거기다가 벼슬도 주셨다면서요? 쌍기: 대통령 비서실에서 연설문 작성하는 비서관 있지 않소? 이 당시로는 한림학사라고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자리를 저에게 제수하셨소.한림학사: 고려 시대 한림원의 정4품 관직, 주로 황제의 조칙을 담당 이광용: 한림학사라... 그런데 말입니다.

집도 주고 여자도 주고 심지어 고려 신하의 집을 뺏어서 싹 나눠주는 바람에 호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신지? 당시 광종이 투화한 한인들을 후하게 대우하여 신료의 제택 및 딸들을 가려 뽑아 그들에게 주었다 <고려사 열전 서필> 쌍기: 그 분들에게 글로벌하게 생각하라고 좀 전하시오. 난 순수한 마음으로 고려에 귀화해서 보탬이 되려는 마음 밖에 없소. 고려 만세!  이광용: 무슨 보탬이 되겠다는?  쌍기: 내 친척들도 다 올 예정이오. 쌍철이 오니, 좌승으로 삼았다.

쌍철은 쌍기의 아버지인데 쌍기가 총애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왕긍을 따라온 것이다 <고려사절요 광종 10년> 이광용: 지금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쌍기를 만나보았습니다.

가시오. 여러분, 속보가 도착했습니다.

충신 서필이 귀화인에게 주라며 자신의 집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무슨 의도일까요?  이해영: 다들 반발하는 와중에 충신이니까 앞장섰네요?  류근: 전 순수한 자산 헌납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집 내놓을테니 가져가 봐, 이런 의도가 숨어져 있는것 같아요. 이광용: 역시 류시인님 예리하십니다.

뒷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을 귀화인에게 뺏길 바에야 미리 바치는게 낫다며 항의를 강력하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서필 같은 충신마저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는 상황인데요. 쌍기의 등장이 어떤 파란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최원정: 최태성 선생님은 이러다가 연기대상 후보에 오르는거 아닌가 싶어요.  최태성: 좀전에 자신의 집을 내놓았던 서필이요. 외교담판을 통해서 강동6주를 획득했던 사람 기억나세요? 이해영: 혹시 서희? 최태성: 바로 그 서희의 아버지에요.  류근: 부전자전이라고 서희의 담판 능력이 아버지한테 물려받았나 싶어요. 연기도 재밌었지만 도대체 쌍기가 어떤 인물이길래 광종이 그렇게 탐을 낸거에요? 신병주: 쌍기는 후주의 관리에요.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5대 10국의 혼란기라고 해서 후주가 5대의 마지막 왕조였고 세종이라는 황제였어요. 세종이 황권을 강화하는데 쌍기가 관리로서 참여했고 개혁적 성향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탐을 냈던 거죠. 이해영: 쌍기가 몸이 안 좋아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거 같은데 정확히 무슨 병인가요? 이익주: 고려사에도 단순하게 병으로 남았다고만 되어 있고 어떤 병이었는지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쌍기가 남은 것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나 이야기까지 나온 것이죠. 이해영: 그럼 딱 진단이 나네요. 병명 나왔네요. 꾀병이에요. 마침 몸이 안 좋아서 고려에 남았는데 광종 눈에 들어서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발탁되고 우연이 많이 겹치는 드라마같은 설정인거 같아요.  류근: 아무리 꾀병이 난치고 불치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게 당시 후주가 고려보다 더 발전한 선진국이었을텐데 고려에 머무는게 좋았을까요? 이해영: 상상력을 보탠다면 광종이 미리 물밑작업을 해서 스카웃처럼 데리고 온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왕권을 강화하려면 호족세력 외의 새로운 인재가 필요한데 이웃나라에서 소문을 들어보니까 쌍기란 사람이 그만한 재능이 있어보여서 집도 주고 벼슬도 주고 여자도 준다고 하고나서 명분이 필요하니까 몸이 아파서 남았다고 입을 맞춘거죠.  최태성: 정말 재밌는건 쌍기가 고려에 온게 956년이에요. 그런데 쌍기의 나라인 후주가 멸망한게 960년이에요. 아마도 쌍기 입장에서는 망국의 흐름을 읽고나서 뜻을 펼칠 수 없어서 다른 나라에서 부르면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타이밍이라는 거죠. 광종도 쌍기를 원했고 쌍기도 다른 뜻을 펼치고 싶었고 뭔가 서로가 윈윈되는 운명적 만남이 아니었을까. 이해영: 광종이 선사하는 집을 본 순간 ‘나는 몸이 아파서 잠깐 누웠다 가야할거 같아’ 하면서 누울거 같아요.  신병주: 쌍기가 자유계약 수준이 된거죠. FA 최원정: 당시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귀화인을 등용까지 해야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익주: 고려 초 관직에 있던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무장들이죠. 문치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상당히 적었습니다.

게다가 신라 말처럼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오는 사람도 적어지고 더군다나 고려 초에는 여러가지 제도를 만들면서 중국의 제도를 많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되다보니까 중국 제도에 밝은 중국계 귀화인들의 가치가 대단히 높아지게 된거죠. 신병주: 호족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면 호족과 연결된 인물은 등용하면 안되는 거죠. 그런 인물을 찾다보니까 쌍기와 같은 중국계 인물처럼 이해관계 없는 인물이죠. 그래서 이 사람한테 힘을 실어준거죠. 이해영: 2002년 월드컵때 히딩크 감독의 역할이었겠네요.  신병주: 히딩크 감독도 귀화하자고 했는데 성질 급한 사람은 이름까지 지었어요. 하동구라고. 인터넷에 많이 떴어요.  최태성: 956년에 노비안검법이라는 첫 칼을 들었는데 그 해에 쌍기가 등장하는 거죠. 7년의 긴 숙고 속에서 956년 개혁의 신호탄이 하나씩 등장하고 있습니다.

 류근: 1,100년 전에 해외 전문가를 등용한거 아닙니까. 충신인 서필마저 광종을 비난했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광종이야말로 열린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최원정: 지금도 외국 국적의 정치인을 영입한다는건 아직 힘든 일이잖아요.  신병주: 광종의 인재 등용의 폭이 매우 넓어서 빛나거나(光) 미치거나(狂) 넓거나(廣)도 해도 될거 같아요.  958년, 전국의 수험생들이 개경으로 모여들었다.

  그동안 힘 있는 자들의 자식들만이 벼슬을 했고 영화를 누려왔다허나 오늘의 이 과거는 나라의 희망이며 짐의 기대이며 앞으로는 공부하는 자들만이 살 수 있고그들만이 벼슬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다 신분에 상관없이 시험을 통해 벼슬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광종의 혁신적인 인재 등용. 그것은 우리 역사 최초의 과거 시험이었다.

  쌍기: 고려 최초의 과거시험을 보겠소!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볼 수 있소! 획기적이지 않소?내 자랑같지만 이게 내가 광종에게 건의해서 보는 시험이오. 이 시험이 천년을 갈 것이오. 역사적인 순간이오.  쌍기의 의견을 채택하여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하니 이로부터 문풍이 비로소 흥성하였다 <고려사절요 광종 9년> 쌍기: 천하장사 이해영. 씨름왕? 뭐요? 왜 천하장사요? 이해영: 제가 그만큼 똑똑합니다.

  쌍기: 알겠소. 충주는 호족의 지역 아니오. 오늘 꼭 합격하시오. 그럼 최초의 1회 과거시험 시제를 공개하겠소!  류근: 알겠소. 최원정: 13년 만에 도전 골든벨 문제를 내보겠습니다.

역사저널 그날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 논해주시기 바랍니다.

  류근: 이거 문제 진짜 나쁘다.

정규직들이 워크숍 가서 논의할 거를 왜 우리한테 시키냐고요.  최원정: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데요? 쌍기: 정답판 들어주세요. 먼저 충주의 자랑! “패널을 쌍기만큼 대접하면 됨(집, 벼슬, 여자)” 류근: 정답이라고 확신합니다.

 이해영: 이해영을 매주 쓰시오. 매주 출연하면 더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보고있나 이윤석?그리고 “역사저널 그날 is 뭔들” 이미 완벽하다는 뜻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유행어입니다.

 쌍기: 그렇소? 고려시대 사람이라 잘 모르겠소. 자, 쌍기가 시행해서 시작한 과거제도의 첫 장원급제자는 누구일까요? 최원정: 역사적인 최초의 장원급제자는 바로 최섬 입니다.

  류근: 시험은 우리 둘이 봤는데 왜 최씨가 되요? 최원정: 다 그런거에요.  신병주: 당선작이 없어서 다른 사람을 치게 했겠죠. 최태성: 과거와 관련된 중요한 사료를 가져왔어요. 과거에 합격하면 합격증을 주는데 홍패라고 해요. 보여드릴게요. 실제 크기에요. 잘 보시면 병과 급제, 그리고 관직명 나오고 밑에 수결, 사인한 시험관들이 나옵니다.

아쉽게도 최섬의 홍패는 남아있지 않고요. 1205년 과거에 합격한 장양수라는 사람의 홍패에요. 어쨌건 왕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행정문서이기 때문에 국보 18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신병주: 고려시대 홍패는 총 6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홍패는 붉은 종이에 쓴 합격증서라는 뜻입니다.

  류근: 이해영 감독이 매주 출연시켜달라고 행패를 부리니까 홍패가 다른 사람한테 가잖아

이해영: 수험생 입장에서는 문제가 좀 황당해요. 어떻게 풀어야 하나 막막하더라고요. 실제로는 어떤 시험을 봤나요?  이익주: 문장 실력,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이 두가지를 가지고 시험을 보게 되는데 첫번째 과거에서는 시, 부, 송 세가지 문장을 포함해서 시험을 보게 했는데 여기에 시무책이라는걸 같이 시험봤습니다.

역사저널 그날의 발전방향에 대해 논하시오. 이런 식입니다.

국가의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제시하고 수험생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죠. 광종이 첫번째 시험에서 이런 시무책을 포함시킨건 자기와 함께 개혁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널리 얻기 위한 것이라 해석됩니다.

  시, 부, 송 및 시무책으로 시험하여 진사를 뽑았으며... <고려사 세가 광종 9년> 신병주: 처음 쌍기가 과거시험을 건의해서 시행했을때 본인이 직접 주관했어요. 지공거의 역할을 하면서 주도해나갔습니다.

 쌍기가... 여러 차례 지공거(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관리)를 맡이 후학을 북돋우니 비로소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흥기하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쌍기> 류근: 그럼 과거제도가 없었을 때 고려는 관리를 어떻게 등용했어요? 신병주: 요즘으로 말하면 금수저로 태어난 귀족의 자제들이 주로 관리로 등용되었죠. 그런 의미에서 광종때 실시된 과거제도가 능력있는 인물이라면 누구나 응시해서 관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혁신적인 제도였고 조선에서는 더 발전된 형태로 계승되죠. 958년에 실시해서 1894년 갑오개혁때 과거제도가 공식 폐지된걸 고려하면 거의 940여년 이상 존속한 제도가 과거제도였어요. 이익주: 고려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과거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됩니다.

예컨대 몽골과 전쟁을 하고 수도가 강화도로 옮겨진 상황에서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치렀다는 것이죠. 이해영: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이 아마도 이때부터 시작하지 않았나 싶은데... 들으면 들을 수록 광종이 쌍기를 만난건 절묘한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해요. 만난게 아니라 광종이 선택을 했다면 진짜 신의 한 수, 대단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최태성: 광종은 두가지 키워드를 기억하라고 했잖아요. 첫번째가 노비안검법 그리고 과거제에요. 노비안검법이 경제적 개혁이라면 과거는 정치적 개혁이라고 보면 됩니다.

과거제를 통해 호족의 칼의 시대에서 붓의 시대로 넘어갑니다.

신분만 봤는데 이제는 실력도 보는 획기적인 분기점에 있는 제도입니다.

 류근: 칼의 시대에서 붓의 시대로 간다는거 멋진데요?  최원정: 문치시대로 가는 역사적인 사건이잖아요. 학생들은 광종이 시험을 만든 왕이었어? 하면서 싫어할거 같아요. 류근: 우리 학교다닐때 실제로 광종을 미워했죠. 왜 쓸데없는 걸 만들어가지고... 정말 내용을 모르고 무조건 암기만 하니까요. 그때 과거제를 실시하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면 관직과 기득권을 대물림 하면서 금수저만 활개치는 나라가 되었을 것 아닙니까? 백성들에게 희망의 물길을 열어줬다는 면에서 제대로 평가를 해주고 싶습니다.

 신병주: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이외에도 광종의 개혁은 계속됩니다.

960년에 관복을 정비합니다.

그 이전에도 물론 관복을 입었는데 어떤 사람은 예전 신라쪽 관복을 입고온다던가 심지어는 왕보다 더 화려하고 비싼 옷을 입고 와요.  이해영: 빠져가지고... 류근: 신하들이 빨주노초파남보로 앉아있는거 아니에요. 한마디로 위계질서가 없어진거 아니에요? 신병주: 그래서 광종 때 통일을 합니다.

4가지 색, 자색, 붉은색, 진홍색, 녹색 네등급의 공복을 정해서 등급에 따라 입게 한거죠. 관복이 정비됐다는건 그만큼 광종 시대의 왕권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거죠.  백관의 공복을 정하였는데, 원윤 이상은 자삼, 중단경 이상은 단삼, 도향경 이상은 비삼, 소주부 이상은 녹삼으로 하였다 <고려사 지 광종 11년> 최태성: 정리해보면 956년에 노비안검법, 958년 과거제, 960년 관복제정, 2년마다 착착 하나씩 풀고 있죠. 뿐만 아니라 개경을 황도라고 하고 서경을 서도라고 하는데 황도는 황제의 도읍이에요. 스스로 황제라는걸 만천하에 증명합니다.

  이해영: 황제라는 말은 중국에서만 쓸 수 있는거 아니에요? 류근: 그러게요. 불경죄에 걸리는거 아니에요?  이익주: 여기서도 고려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류근: 고려할 게 정말 많네요

 이익주: 고려는 조선과 많은 점에서 다른 나라입니다.

고려는 대대로 중국의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습니다.

  그래서 중국왕조에 대해서는 국왕이라고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바깥으로는 국왕이라고 하고 안에서는 황제라고 한다, 외왕내제라고 하는거죠. 조선에서 국왕을 전하라고 부르고 왕위에 오를 사람을 세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고려에서는 폐하라고 부르고 그 다음 왕에 오를 사람을 태자로 통일한 겁니다.

  최원정: 고려시대에는 전하라고 하면 안된다는 거네요.  류근: 괜히 제국의 아침이 아니었던 거네요.  신병주: 왠만한 것은 고려보다는 조선이 시스템으로 앞서고 발전했는데 여기는 제가 좀 밀립니다.

황제라고 칭하고 태자, 폐하라고 부르지 못한건 격이 한단계 낮춰진거죠. 이건 고려가 셌다고 인정합니다.

  이익주: 고려는 조선과 비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최원정: 재밌다

교수님들끼리 신경전 너무 재밌다.

그쵸? 이익주: 고려는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고 그에 걸맞는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 고려사를 편찬할 때 조선시대 관리들의 가치관에 의해서 황제국 고려의 모습이 많이 삭제되었습니다.

그래서 황제국의 모습을 알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최원정: 그렇군요. 조선과 비교해서 들여다보면 더욱 더 재미있는 나라

 신병주: 황제국은 제가 인정한다 그랬잖아요.  이해영: 배트맨 대 슈퍼맨만 알고 있었는데 고려 대 조선도 재밌네요. 최원정: 과감한 개혁을 통해서 고려의 기틀을 다진 광종인데요. 빛나던 그의 치세에도 변화가 찾아옵니다.

     964년, 고려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모두에게 행형을 가하라 태조 이래 최고의 실력자였던 박수경의 세아들이 참소를 입오 광종의 분노를 산 것이다.

   박승위/ 박수경의 첫째아들아버님과 우리들은 황제 자리를 폐하께 만들어 드렸소이다그러나 폐하는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소이다광종은 개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숙청했다.

결국 박수경 일가는 몰락하고 말았다.

 왕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형 혜종과 정종의 아들인 조카들까지 처형했다.

광종이 또 다른 칼을 뽑아든 것이다.

최원정: 개혁의 칼이 아닌 숙청의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변하나요? 최태성: 저 숙청의 칼을 들기 위해서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저는 그 부분이 소름끼치는 거에요.  류근: 일단 힘을 빼놓는 거에요? 최태성: 노비안검법으로 세력을 약하게 해놓고 신진인사를 앉혀놓은 다음에 숙청의 칼을 드는거에요.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토리를 만들어보면 소름이 끼쳐요. 신병주: 조선 태종과 광종의 평행이론을 이야기했는데 수시로 칼을 뽑아드는 것도 비슷해요. 이익주: 박수경 일가의 몰락은 광종 치세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7년이 준비의 시기였다면 광종 7년부터 개혁의 시기가 있고 광종 15년 박수경을 처벌하면서부터 숙청의 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박수경은 평산이 본거지이고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태조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외척이 되기도 하고 그 이후에 광종이 즉위할 때도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던 사람입니다.

 이익주: 그런데 박수경의 세아들을 처벌하고 박수경은 화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세력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강력한 후원세력인 평주의 박수경 일가를 제거해버린 것이죠.  아들인 좌승 박승위, 박승경과 대상 박승례 등이 참소를 당하여 옥에 갇히자, 박수경은 울화병으로 죽었다 <고려사 열전 박수경> 류근: 정국이 정말 긴박하게 돌아가네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최측근을 숙청해야했는지 모르겠어요.이해영: 이 정도의 최측근에 후원세력이라면 역모 정도는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최태성: 참소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는 없는데 박수경 일가의 몰락 이전인 960년에 권신이라는 사람이 참소를 합니다.

조정의 실세였던 왕동과 준홍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면서 참소를 올리는데 이때부터 호족세력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시작된거죠. 쭉 이어져서 박수경에 연결되는 스토리가 나오거든요. 당시 모습을 보면 후세 사람들이 고발과 고소가 난무했던 시기라고 해요. 노비들이 주인을 고발하고 심지어는 자식이 아비를 고발하다보니까 감옥이 모자라서 임시감옥을 만들정도였다고 해요. 죄없는 사람도 당했던 처참한 시기입니다.

 평농서사 권신이 준홍과 좌승 왕동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하자 이들을 내쫓았다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고 그 아비를 참소하니, 감옥이 늘 넘쳐나 별도로 임시 감옥을 두었고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계속 생겼다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최원정: 카더라 카더라 하면서 무고죄로 잡혀갈만한 카더라가 유행해던... 류근: 그래서 빛나거나 미치거나 네요. 빛나던 시대에서 이제 미친 시대로 접어드는 거 아니에요? 신병주: 광종의 개혁정치 자체는 기본적으로 왕권강화 입니다.

본인이 왕위에 오르는데에는 결정적 도움을 준 호족이지만 왕권강화를 하는 광종에게는 가장 강력한 적이 되어버린거죠. 정말 절묘하게 조선도 태종이 왕이 되는데 가장 결정적 도움을 준게 처남들이에요.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들인 민무구, 민무질. 드라마 많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최명길씨의 동생을 다 죽여버려요. 태종이 광종 연구를 많이 한거 같아요. 최원정: 그때도 참소로 인해서 다 숙청된거잖아요? 이해영: 진짜 광종이 노비안검법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이 숙청을 위한 단계였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우면서... 호족세력이 실제로 역모를 꾀하려고 했을 수도 있지만 이것도 광종이 뭐 하려고만 하면 걸리적거리니까 누굴 시켜서 센 걸로 걸어보라고 참소가 들어오면 명분이 생기니까 제거하는 그런 식이 아니었을까... 최원정: 왕에게 명분을 만들어주는게 잘 짜여진 시나리오 같네요. 정말 그랬을까요?이익주: 역사 속에서는 우리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고요. 그래서 짜여진 시나리오 아니냐는 음모론이 싹틀 수 있는데요. 물론 여러가지 상상이 가능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대로 남겨두려고 하는 여유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무튼 광종의 숙청은 호족들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고 왕실 안까지도 칼날이 미치게 되는데요. 광종의 두 형인 혜종과 정종의 하나뿐인 아들 두 사람을 광종이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는 자기 아들 왕주조차도 의심하게 됐다고 합니다.

 두 임금의 조정에는 오직 외아들만이 있었는데 광종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않았으니... <고려사 열전 최승로> 비록 왕의 외아들 왕주라도 의심을 받아 왕을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 신병주: 정말 고려판 킬러에요.류근: 정말 권력을 놓고 아들과 아버지와 반목하는 구조는 역사저널 하면서 너무 익숙해져버렸어요. 그래도 그렇지 정치는 참 비정한거 같아요. 도대체 왜 아들을 의심한거에요? 이해영: 아까 대목왕후 황보씨도 자기 편이 아니라 반대편에서 각을 세웠잖아요. 아들도 엄마따라서 외가편을 들어서 ‘이놈도 애비의 마음을 모르고 적이 될 수 있다’ 이런 경계? 최태성: 황주의 호족세력을 경계한거죠. 자기 아들 경종을 앞세워서 압박할 수 있다, 도전할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그랬구요. 최원정: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광종 입장에서는 생존 투쟁? 그런 느낌이 드는데요? 신병주: 고금을 통틀어 권력은 부자도 나눌 수 없는 겁니다.

광종이 공포정치를 할 때는 왠만하면 다 걸리는 거에요. 최승로가 광종을 평가한 기록을 보더라도 그 당시 형장에 끌려간 사람은 대부분 죄가 없었고 대부분 오래된 공신과 장군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거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공포정치가 거의 10년 가까이 지속됩니다.

그래서 드라마 제목에 ‘미치거나’가 들어간거죠. 형장에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죄가 없는 이들이었으며 역대의 훈신과 노장들이 모두 죽임을 면하지 못하여 사라져 갔습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류근: 개혁을 통해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분명히 빛나는 업적이지만 숙청은 정말 광기라고 볼 여지가 충분한거 같아요. 최태성: 약간 ‘뭐지?’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숙청 동시에 법회를 열어요. 모든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법회를 열고 귀법사를 창건하고 제위보 열어서 질병 치료하고 빈민을 구하는...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속으로는 스스로 회의하여 죄악을 씻어보고자 재회를 널리 베풀었다 <고려사 세가 광종 19년> 류근: 이번엔 세조하고 비슷하네요.  신병주: 그렇죠. 병 주고 약 주고

 이익주: 광종은 선행을 통해서 개인적인 죄를 씻으려고 했던거 같습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어떤 때는 식량과 땔감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줄이 너무 길었다고 합니다.

수를 셀 수 없었다는 말이 나오고... 또 방생소를 설치해서 방생을 하고 불경을 강론하게 하고 살생을 금한다고 해서 도살을 금지했기 때문에 왕의 밥상에 오르는 고기마저도 시장에 가서 사와야 될 지경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끔 떡과 쌀, 콩과 땔감을 서울과 지방의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곤 하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방생하는 곳을 많이 설치하고 근처 사원에 나아가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으며 도살을 금하였으므로 왕의 반찬으로 쓸 고기도 시전에서 사다가 올렸다.

<고려사 세가 광종 19년>이해영: 말하자면 양심의 가책같은걸 느꼈다고 볼 수 있는데 요즘 표현으로 하면 ‘태양의 후회’ 군요. 최원정: 요즘 그런 표현이 있어요? 안 웃기지 말입니다.

 이해영: 날카롭지 말입니다.

류근:  그만큼 광종은 호족이 두려웠다는 뜻일 수도 있을거 같아요. 정종과 혜종이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봤잖아요. 그래서 더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을 절감했던거 같고 개혁과 숙청이라는 양날의 칼을 휘두를 수 밖에 없지 않나...최원정: 오늘 이광용 아나운서가 조선의 태종과 고려의 광종이 평행이론이라고 했을때 억지스럽다고 했잖아요. 들으면 들을 수록 그 얘기가 맴돌면서 신기한데요?신병주: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아버지가 나라를 창업한 사람이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광종은 고려판 왕자의 난에서 최종적으로 평정한 인물이고요. 마찬가지로 태종도 1차 왕자의 난때는 형인 정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가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았고 결과적으로 500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창업에서 수성의 시대로 가는 기틀을 마련했던 또 다른 공통점이 있죠. 그리고 성격적으로도 킬러 본능을 가지죠.최태성: 다른 점도 있죠. 태종의 아들은 세종이고 광종의 아들은 경종입니다.

이 둘이 정말 손에 피를 묻혀가면서 안정적인 나라를 구축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아들에게 던져줬잖아요. 그런데 세종을 안아 받아서 찬란한 조선 전기를 만들어낸 반면 광종의 아들 경종은 세종만하지는 못했다는 거, 그게 차이점이죠.신병주: 경종의 뒤를 잇는 성종에 연이어서 개혁이 후퇴하는 성향도 보여요. 대표적으로 경종이 왕위에 올랐을때 숙청을 당한 사람의 가족들이 복수할 수 있는 복수법을 만들었어요. 호족들의 억울함을 법적으로 해결해주겠다는 거죠. 성종때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해서 해방시켰는데 다시 재조사가 들어가서 해방됐던 노비가 다시 노비로 환원됩니다.

노비의 경우는 잠시 평민이 됐다가 또 노비가 되면 더 침울하거든요. 이해영: 차라리 노비로 살게하지, 괜히 밥맛을 보게 해서 괜히 성격만 더 나빠지고... 삐뚤어지고 싶어 질거 같아요. 류근: 정말 기득권 세력들이 이렇게 무서운거네요. 그들을 개혁에 동반자로 삼지 못하면 결국 이렇게 다시 당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거 같아요.이익주: 광종이 읽었다는 <정관정요>에 탕업이 수성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이라는 말이죠. 고려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태조의 창업보다 뒤에 이어 등장하는 국왕들의 수성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광종과 태종이 모두 수성의 짐이라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힘들게 나라의 기틀을 잡은 왕들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죠. 신병주: 두 사람이 그 과정에서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거죠.  최원정: 창업이 수성난, 멋진 말이네요. 비단 나라를 세우는 일 뿐이겠어요?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 않아요? 사업도 그렇고 프로그램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요.  이해영: 제가 수성이 안되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최원정: 개혁의 군주이면서 피의 군주였던 광종, 하지만 고려의 기틀을 만들었던 고려의 4대왕인 광종에 대한 이야기 나누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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