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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 김문기



2.11.css" />조선문신김문기|백촌할아버지꿈과성공조회 58|추천 0|2007.11.19. 22:25 <script type="text/javascript">//</script>목록열기 목록닫기 <input class="pcol2 fil5" value="엮인글" readonly="readOnly" /> <input class="pcol2 fil5" value="스크랩" readonly="readOnly" /> 전체목록(5587)var betaYn = "false";function setBlinkString(logNo){ var blinkUrl = '/BlinkInfoByPostAsync.nhn?blogId=kwank99&logNo='+logNo; var jsonBlink = new Ajax ( blinkUrl,{ method : 'get', params : { blogId : 'kwank99', logNo : logNo },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Load : function(req){ doSetBlinkString(logNo, req.responseText); } }); } function doSetBlinkString(logNo, jsonStr){ var structBlink = eval!("(" + jsonStr + ")"); var fulltitles = []; var links = []; var linkedText = []; if(structBlink && structBlink.length){ for(var i=0; i < structBlink.length; i++){ fulltitles[i] = structBlink[i]['title'] + " " + structBlink[i]['themeName']; links[i] = "http://blink.naver.com\/" + structBlink[i]['blinkNo']; linkedText[i] = ""+fulltitles[i]+""; } } $("sp_blink_"+logNo).innerHTML = linkedText.jo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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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파일로 저장하기 메뉴 도움말 조선 문신 김문기인명사전2007/11/17 04:09http://blog.naver.com/kwank99/30024348882 김문기(金文起.1399.정종 1∼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금녕(金寧). 자 여공(汝恭). 호 백촌(白村). 초명 효기(孝起). 시호 충의(忠毅).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檢閱)ㆍ정언(正言)ㆍ함길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복위(端宗復位)의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모의가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개(李塏)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영조 때 9대손 정구(鼎九)의 송원(訟寃)으로 복관되었으며, 경북 김천시 지례면(知禮面)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배향되었다.

   1981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고, 그의 가묘를 서울시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설치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김녕(金寧).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출신. 아버지는 관(觀)이다.

   1426년(세종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였으며, 1430년에 예문관검열, 1436년 10월에 사간원좌헌납이 되었다.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으나,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음이 인정되어서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를 마치라는 유시에 따라 이를 수행하는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1456년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그 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들어 ‘사육신’이라 하였는데, 이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리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뒤, 1691년(숙종 17)에는 국가에서 공인하여 육신을 복관시키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도 복관되었으며, 1757년에는 충의(忠毅)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 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그는 삼중신(三重臣: 閔伸ㆍ趙克寬ㆍ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이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하여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문적을 널리 고증하게 하여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 되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가 내려진 것이다.

그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금릉군 지례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그런데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

”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역에 그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놓고 일부학자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져 신문지상에 그들의 논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 <김문기, 사육신으로 현창> - (1977. 9. 30)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이 문교부에 통보되어 28일 장관 결재를 받아 확정, 29일 서울시에 회보되었다.

  문교부가 서울시에 보낸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의문에 따르면 김문기는,   ① 세조 2년 6월 8일 병오조(丙午條)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한 6신의 한 사람으로 군 동원의 책임을 맡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② 세조 2년 6월 6일 감신조(甲申條)에 이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박중림(朴仲林), 권자신(權自愼), 김문기(金文起),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박정(朴靖), 송석동(宋石同), 최득지(崔得池), 최치지(崔致池), 윤영손(尹令孫), 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 등이 기록돼 모의를 꾀한 17인의 한 사람으로 밝혀졌으며,   ③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서무배향위차(西?配享位次)에 있어서 국혼(國婚) 관계자를 빼고는 순절한 관원 가운데서 순위가 가장 빠른 점 등으로 미루어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판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의 최종 결의가 나오기까지에는 여러 고비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사육신 명단에 대한 이의가 제기된 후 학계의 의견을 폭넓게 들어오던 국사편찬위원회가 의견을 종합하기 위해 처음 위원회를 소집한 것은 지난 16일.   이 회합에서 참석자들은 “정사(正史)인 이조실록에 김문기가 엄연히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를 현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521년 동안 현창되어 온 유응부를 빼고 대신 김문기를 넣는 등 6신 가운데 누굴 빼고 넣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 지적, “종래의 숫자 개념을 떠나 사육신을 ‘단종 충신’으로, 사육신묘에 대해서도 ‘단종충신 묘’로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었다.

  그러나 22일 다시 열린 회합에서는 사육신의 개념이 세조조 당시에 확립된 것이고, 이에 따라 정사인 실록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그 밖의 문제는 추후에 논의하는 것이 옳다는 데 의견을 모아 첫 회합의 합의 내용을 일부 고쳐 최종 결의안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육신은 조선왕조 5백년을 통틀어 가장 추앙을 받아 온 충의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야사나 민간의 구전으로 숱한 얘기가 만들어지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김문기의 후손들인 김녕김씨 문중과 ‘金文起 先生 六臣墓域奉安推進委員會’, 일부 사학계가 사서(史書) 등 방대한 자료를 면밀히 검토, 종전까지 전해내려 온 6신 명단이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뒤늦게 이 문제가 논의의 대상으로 부각됐던 것이다.

이들은 정사인 실록의 기록을 무시하고 야사와 구전을 바탕으로 쓰여진 남효원(南孝溫.단종2년.1454∼성종23년.1492)의 <육신전>을 근거로 지금까지 전해내려 온 사육신 관계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사육신의 숫자 개념을 고집할 경우 유응부를 빼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는 사실상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어 최종 결정은 새로운 논쟁거리로 부상될 가능성도 짙다.

[백촌 김문기] 매력을 알아보자


자료:http://cafe.daum.net/wang2009/FL1v/2?docid=1C8uB|FL1v|2|20071119222537&q=%B1%E8%B9%AE%B1%E2&srchid=CCB1C8uB|FL1v|2|20071119222537김씨는 2011년 4월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위치한 사육신묘 공원 내에서 사육신 후손 모임인 사육신선양회(선양회) 회원들이 제사를 지내려 하자 방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선양회는 김씨가 속한 현창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체다.

김씨 등 백촌 김문기 후손들은 선조를 사육신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사육신 후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견대립 끝에 다른 사육신 후손들은 현창회를 나와 선양회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김씨 등 김녕김씨 문중들은 선양회가 이날 제사를 지내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방해하기로 했다.

이들은 "왜 자꾸 백촌을 비방하느냐"며 말싸움을 벌이다 제사상을 엎는 등 난동을 피웠다.

형법 158조는 제사, 장례식, 예배 또는 설교를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재판에서 김씨는 "제사지내는 것을 방관했을 뿐 직접 제사를 방해하지는 않았다"고 변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심은 김씨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사육신 묘역 내 의절사로 가는 길을 막아 선양회 회원들의 제사를 방해했다"며 "가령 김씨가 방해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제사를 제지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모인 현창회 회원들의 행위결정에 협력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공범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 반대해 거사를 도모하다 숙청당했다.

백촌 김문기도 이때 함께 처형당했다.

백촌 김문기는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 결의로 사육신에 포함됐다.

이에 일부 후손들은 김녕김씨 후손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압력이 작용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등 반발했다.

당시 학계에서도 백촌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인정해야하는지를 두고 찬반논란이 일었다.

(2016.9.13. 머니투데이/ 김종훈 )  머니투데이 http://www.mt.co.kr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는 백촌 김문기의 묘??死六臣 김문기, 김재규, 김영삼, 금난새김진우의 족보이야기-김녕김씨(金寧金氏)  뿌리공원에 조성된 김녕김씨 조형물. 전면/대전 중구?작품명/ ‘씨의 근원’ 조각가 金豊圭. 해설/ 천지인(天地人)의 표현으로 선조의 뿌리와 근본, 후손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함 ?뿌리공원에 조성된 김녕김씨 조형물 .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김녕김씨 유래>  김녕김씨의 관조(貫租)는 신라김씨의 시조(始祖)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5세손이시며 신라 제56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8세손으로 고려 인종때 한림원(翰林院)에 오르고 병부시랑으로 큰 공을 세워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고 김녕군(金寧君)에 봉군(封君)된 문열공(文烈公) 김시흥(金時興)이시다.

[백촌 김문기] 해부학



  김녕김씨는 효(孝)와 충절(忠節)을 최고의 가치로 간직하고 있는 가문(家門)으로 김녕군 7세손 김질(金?)은 태조 이성계의 출사제의를 거절하고 아산 도고산(道高山)에서 수절하였으며, 9세손 충민공 김인찬(忠愍公 金仁贊)은 조선개국 일1공신으로 정일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종1품재신)에 이르셨고 9세손 충의공(忠毅公) 백촌 김문기(白忖 金文起,초명 효기)는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工曹判書 兼 三軍都鎭撫)로서 단종(端宗)의 복위모의를 주도하고 영도자 위상에서 군동원(軍動員)을 맡아 세조(世祖)의 패륜을 응징코져하였으나 간인(奸人)의 밀고(密告)로 발각되어 순절(殉節)한 사육신(死六臣)중 최영도자(最領導者)이시다.

  10세손 영돈령(領敦寧) 김준은 세종때 정1품 돈령부 영돈령(敦寧府 領敦寧)의 관직에 올랐으며 세조의 좌의정 제의를 거절 충절을 지켰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정란공신(靖亂功臣) 13세손 충정공(忠貞公) 김준영(金俊榮) 겁암공(?巖公) 김영년(金永年)과 분성군(盆城君) 김응수(金應壽), 충경공(忠敬公) 김경세(金景世) 충숙공(忠肅公) 김흔(金欣)이 있으시며,항일독립운동의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 항일열사 김한종(金漢鍾)은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독립군 양성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여 3.1독립운동을 불러일으키게 하였고, 기미독립운동 33인 민족대표 김병조(金秉祚), 대한민국(大韓民國) 제14대 대통령(大統領) 김영삼(金泳三), 국무총리 부총리 중앙정보부장 국가정보원장 각 부처장관 및 대법관 헌법재판관 국회의원 검찰총장 공군참모총장 육군대장 공군대장을 비롯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계 등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서 충효혈통가문(忠孝血統家門)을 빛낸 자랑스러운 김녕군(金寧君)의 후예들이다.

  <김진우의 해설> 김녕김씨(金寧金氏) 사육신 김문기와 5세(世)충.효의 절신효(孝)와 충절(忠節)을 최고 가치로 간직하고 있는 가문김문기. 김형일. 김홍일. 김재규. 김영삼국무총리 김석수, 헌법재판관 김진우. 작곡가 금수현. 지휘자 금난새 김녕김씨(金寧金氏)는 김시흥(金時興,시호 문열 文烈)을 관조(貫祖)로 받든다.

그는 신라김씨 시조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5세손이며, 신라 제56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8세손으로 고려 인종때 한림원(翰林院,고려때 왕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뒤에 예문춘추관)에 오르고,병부시랑(兵部侍郞:정4품국방차관)으로  공을 세웠으며,광록대부(光祿大夫:종3품문관 품계로 흥록대부를 고친것)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에 올라 김녕군(金寧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이와 같이 김녕김씨는 경주김씨에서  나온 성씨의 하나다.

  관조(貫祖) 김시흥은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6세손인 동정공(同正公:동정은 고려때 6품 이하의 문관과 5품 이하의 무관에게 주던 정직(正職)에 준하는 명예직이며,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는 경우에 주었고 정직 이름 밑에 붙여 씀) 김봉기(金鳳麒)의 넷째 아들로 의성에서 출생했으며,고려때 묘청의 난 등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금주군(金州君,금주는 김녕의 고호)에 봉해졌고,명종때도 나라에 공을 세워 식읍(食邑:나라에 유공한 사람에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것)을 하사받아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후에 익산의 오강서원(五岡書院),밀양의 밀성사(密城祠),아산의 도산사(道山祠)등에 배향[配享]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해오다가,고려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하였으나,김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 되어,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불러왔으나 후손들의 혼돈이 계속되어, 1849년 헌종 기유(憲宗 己酉)15년 11월, 경상도 유생(儒生) 김주성(金周聲),김근학(金根學),김성현(金成鉉),김치수(金致秀),김홍환(金鴻煥) 등이 선조(先祖)의 사실목록(事實目錄)에다 진정서를 첨부하여,예조(禮曹)에 상정(上呈)했고,1884년(고종 갑신년甲申年) 두 차례나 정부에 청원하여 당시 예조(禮曹)의 비준을 받아 1865년(고종 2) 본관을 김해의 원래 지명인 김녕(金寧)으로 하게 되었다.

  관조 김시흥의 증손자인 김중원은 고려시대에 안렴사(按廉使;고려 5도의 장관으로 안찰사라고도 함,절도사를 혁파하고 두었으며 고려 말에는 재신급이 맡앗고 주.현의 수령을 통할하여 중앙기구와 연결 기능을 함)를 거쳐 형부시랑(刑部侍郞:정4품 법무차관)을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에 증직(贈職)되었다.

  김중원은 고려가 멸망하자 단식을 하다가 순절하였다.

공양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전의 판도사의 으뜸벼슬)를 지낸 김중원의 손자 김광저는 무록산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로 절의를 지켜 태종이 이조판서(判書:정2품 장관)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김광저의 아들 김순(金順)도 고려때 호부상서(尙書:정3품 장관)를 역임하였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충북 옥천의 백지리에 정자를 짓고 망국의 한 을 달랬으며 이때 호를 퇴휴당(退休堂)이라 지었다.

  분성군 김정갑의 아들 김질(金秩)은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의 정(情)으로 개국원종공신에 책록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장관)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아산의 도고산에 은둔 한후 호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충의공 김문기 영정?이조판서 김관(金觀)의 아들인 김문기(金文起,1399

1456.초명 효기,호는 백촌,시호는 충의)는 1399년(정조1년) 2월16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했으며,세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 정규적으로 실시하는 과거시험으로 초시,복시,전시 3단계의 시험을 거쳐 33명을 급제자로 선발 함)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정9품)에 임명되어 '태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단종 원년 1453년 10월10일  수양 대군이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좌의정 김종서.영의정 황보인 등은 피살되고 안평 대군은 사사(賜死)됨)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장관)로 내.외종간인 박팽년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 했다가, 1456년(세조2) 6월8일 사육신과 함께 순절(殉節: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림)했다.

  양지 현감(縣監:종6품수령)을 거쳐 영월군수(郡守;종4품수령)를 역임한 아들 김현석(金玄錫)도 아버지 김문기를 따라 순절하였고,  김문기의 손자 김충주와 증손인 김현남,5세손인 김약전 등이 충효로 가문을 빛내어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旌門: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기위해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홍문)이 세워졌다.

  충의공 김문기 유허비(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 충북기념물 44호)  판서(判書;정2품 장관)를 지낸 김복룡의 아들 김응수(金應壽,1567

?)는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왜군 3명의 목을 베고 조헌과 함께 순절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분성군(盆城君,김해)에  봉해졌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품계)로 의정부 영의정(정1품)에 증직되었다.

 그 후손들이 분성김씨(盆城金氏,지금의 김해 평야)로 독립하였는데, 그 일부는 분성김씨로 쓰고, 일부는 김녕김씨로 남아 분성군파(盆城君派)로 활동하고 있다.

  담양부사(府使:정3품 외관직) 김언공은 이순신장군의 노량대첩과 권율의 영천전투에 중추적 역할을 해 명성을 떨쳤다.

  이밖에 팔공산 전투에서 노모를 등에 업고 공을 세운 김유부,병자호란 때 순절한 그의 아들 김기남,김난생 형제 등이 충효의 전통을 이어왔다.

  조선 후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소산(小山) 김기호(金琦浩, 1822

1902)는 김문기의 13세손이다.

 김기호는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제자로, 1861년에 소산재(小山齋)를 지어 창원 지역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유계(儒契)를 모아 시 창작에도 남다른 솜씨를 보였다.

 김문기가 단종 복위운동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정난(靖難)으로 순절하자, 그의 아들 김인석(金仁錫)과 손자 김덕지(金德知)가 함께 화(禍)를 피해 군위.자인 지방에서 살았고, 김덕지의 아들 김정무(金鼎武)는 유랑하다 1508년(중종 3) 창원으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이지역 입향조가되었다.

 김녕김씨는 창원시 사파정동(옛 창원군 상남면 사파정리), 북면 대촌리, 대산면 상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소산 김기호의 현손인 김형만(金炯滿,1912

1969)은 1952년 당시 창원군 상남면과 웅남면에서 최초의 중학교인 남면중학교(지금의 창원남중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교육자였다.

그의 현손인 김정술(金汀述)은 이 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이고, 전 동남은행장을 역임한 김정규(金禎圭)는 김기호의 6세손이다.

소산 김기호가 강학을 위해 1861년 사파정마을 뒤쪽 비음산 아래에 지은 소산재가 있다.

지금의 소산재는 창원의 도시계획에 의해 1995년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인데, 창원시 사파정동 111-7번지에 위치해 있다.

또한 김호원(金鎬源)이 지은 김기호 묘갈명(金琦浩墓碣銘)이 창원 군지에 실려 있다.

 ?창원시 사파정동(전 상남면 사파정리), 북면 대촌리, 대산면 상리 등에 김덕지의 아들인 입향조 김정무가 1508년 입향한 이후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창원시 소재의 김녕김씨 집성묘역> 또한 항일독립운동의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 항일열사 김한종(金漢鍾)은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독립군 양성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여 3.1독립운동을 불러일으키게 하였고 기미독립운동 33인 민족대표 김병조(金秉祚), 대한민국(大韓民國) 제14대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충정공파),국무총리 김석수,부총리,건설부장관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규, 육군정보국장 및 2군단장.육군참모차장을 거쳐 6.7.8.9대 국회의원으로 1971년 신민당사무총장.1974년 신민당 원내총무를 지낸 군인이자 정치인 김형일(金炯一), 6.25때 1군단장을 거쳐 육사교장,1971년 신민당당수권한대행을 지내고 광복회장을 지낸 김홍일(金弘壹) 및 각 부처장관 및 대법관, 헌법재판관 김진우,민주화투사이며 중진국회의원을 지낸 김덕룡, 검찰총장, 공군참모총장, 육군대장,공군대장을 비롯 정치.경제.교육계에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작곡가 금수현, 문화 예술계의 지휘자로 금수현의 아들인 금난새(예명) 등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서 충효혈통가문(忠孝血統家門)을 빛낸 자랑스러운 김녕군(金寧君)의 후예들이다.

  한편, 지휘자 금난새는 아버지인 작곡가 금수현이 교감으로 재직때, 학교에 김씨가 많아 스스로 금씨로 바꾸었다고 하며,호적에는 김씨로 되어있다고 한다.

  <김녕김씨 집성촌으로  100호 이상이 모여 집성을 이루고 있는 곳의 지명>전남 고흥군 고흥면 고소리,동압리,호형리 등 110호,전남 공흥군 점안면모용리,회계리 93호,대구광역시 일원 180호,경북 월성군 나산리 800호,경북 금릉군대덕면 작용리,덕산리일원 170호,구성면 상거리,금라동일원 140호,상주시일원 230호,경남 진양군일원 320호,의령군일원 145호,합천군일원 200호,남해군 일원130호 등이다.

  [계 파]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영돈영공준파(領敦寧公遵派),진주목사공형파(晋州牧使公□派),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충정공준영파(忠貞公俊榮派) 등이다.

  조선시대에 김녕김씨(金寧金氏)는 김진영(金鎭永,1852년 임자생)이 1893년(고종 30)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병년(丙年)마다 보던 과거) 문과(文科:대과) 병과(丙科)에 2등으로 급제하는 등 문과(文科:대과)에 2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2명 등 1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인구조사에서 김녕김씨는 1985년에는 102,901가구에  424,336명이었으며,2000년에는 162,200여가구  513,000 여명이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법흥파 김염계)> 1세조 김염(金濂)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고려 시대에 벼슬이 봉어(奉御:상의국 등의 정6품)에 이르렀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고있다.

 김녕김씨 관조인 김시흥(金時興)의 8세손 김문기(金文起)가 단종복위운동에 찬가하여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고 3족을 멸하는 위난이 닥치자, 김문기의 8촌동생 김해군수(郡守:종4품수령) 김춘(金春)은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했다가, 성종2년에 다시 평안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法興洞)에 옮겨가 터를잡고 살면서 자손이 번창하자 본관을 법흥(法興)으로 하고, 김춘을 관조(貫祖)로받들고 있다.

 [계 파] 고강파(古姜派),남시파(南市派),당산파(堂山派),동문파(東門派),만다지도파(灣多地島派),만진리파(灣津里派) 법흥파.원류본파(法興派.原流本派),사동파(社洞派),산후파(山後派),선천사사파(宣川沙士破),주의파(做義派) 등이 있다.

  김녕(金寧)은 경상남도 김해(金海)의 옛 지명으로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해 오다가 532년(신라 법흥왕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940년(고려 태조 23)에는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금주(金州) 등으로 불렸으며, 1270년(원종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주목(金州牧)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다.

1931년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 김해군이 시로 통합되었다.

(2011.1.31. 디트뉴24/ 김진우 한국성씨연구소 대표)  디트뉴24 http://www.dt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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