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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오늘 여러분께 알려드릴역사상식 정보는 바로 <사육신>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익히 아시는 것처럼사육신은 세조 시절 단종을 복위시키려던계획이 누설되어 그 주동자 여섯 명이 죽임을 당한 것을 말합니다.

 사육신의 여섯 명은성삼문, 박팽년, 이개,하위지, 유응부, 유성원이에요.사육신 여섯 명은단종에 대한 충심으로,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를 몰아내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이들은 명나라 사신을 위한 창독궁 연회에서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가의장용 칼을 들고 왕 옆에 서게 될 기회를 이용해 세조를 없앨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고,오히려 이 계획을 김질이라는 자가 밀고하여모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체포된 사육신 여섯 명은끝까지 항거하다 죽게 되는데요.이러한 이유로 '사육신'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죠.이들은 대부분 현직 또는 전직 집현전 유신으로철저히 유교주의를 따르는 인물이었고,세종 대부터 중용된 인물입니다.

 이들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저항과 세조의 전제권 강화 등에 대한 반발이라고도할 수 있다고 하네요.  사육신의 명단은책이나 자료마다 의견이 분분한데요.성삼문과 박팽년 외에는주동자가 누구라고 딱히 단정짓기가 어렵긴 하다고 하네요.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사육신의 명단은남효온의 <육신전>에 소개된여섯 명을 가리킵니다.

 사육신은 훗날 숙종 대에 이르러사육신을 정식으로 국가에서 공인, 복관시키고 묘우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게끔 해주었고 이후로는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만 하더라도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점에서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가 없는데요.상왕이 되어버린 단종을다시 복위시키고자 한사육신의 충성심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그렇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이들의 충성심과 명예로움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겠죠?즐거운 금요일 잘 즐기시고,편안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김씨는 2011년 4월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위치한 사육신묘 공원 내에서 사육신 후손 모임인 사육신선양회(선양회) 회원들이 제사를 지내려 하자 방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선양회는 김씨가 속한 현창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체다.

김씨 등 백촌 김문기 후손들은 선조를 사육신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사육신 후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견대립 끝에 다른 사육신 후손들은 현창회를 나와 선양회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김씨 등 김녕김씨 문중들은 선양회가 이날 제사를 지내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방해하기로 했다.

이들은 "왜 자꾸 백촌을 비방하느냐"며 말싸움을 벌이다 제사상을 엎는 등 난동을 피웠다.

형법 158조는 제사, 장례식, 예배 또는 설교를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재판에서 김씨는 "제사지내는 것을 방관했을 뿐 직접 제사를 방해하지는 않았다"고 변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심은 김씨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사육신 묘역 내 의절사로 가는 길을 막아 선양회 회원들의 제사를 방해했다"며 "가령 김씨가 방해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제사를 제지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모인 현창회 회원들의 행위결정에 협력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공범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 반대해 거사를 도모하다 숙청당했다.

백촌 김문기도 이때 함께 처형당했다.

백촌 김문기는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 결의로 사육신에 포함됐다.

이에 일부 후손들은 김녕김씨 후손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압력이 작용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등 반발했다.

당시 학계에서도 백촌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인정해야하는지를 두고 찬반논란이 일었다.

(2016.9.13. 머니투데이/ 김종훈 )  머니투데이 http://www.mt.co.kr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는 백촌 김문기의 묘??死六臣 김문기, 김재규, 김영삼, 금난새김진우의 족보이야기-김녕김씨(金寧金氏)  뿌리공원에 조성된 김녕김씨 조형물. 전면/대전 중구?작품명/ ‘씨의 근원’ 조각가 金豊圭. 해설/ 천지인(天地人)의 표현으로 선조의 뿌리와 근본, 후손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함 ?뿌리공원에 조성된 김녕김씨 조형물 .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김녕김씨 유래>  김녕김씨의 관조(貫租)는 신라김씨의 시조(始祖)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5세손이시며 신라 제56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8세손으로 고려 인종때 한림원(翰林院)에 오르고 병부시랑으로 큰 공을 세워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고 김녕군(金寧君)에 봉군(封君)된 문열공(文烈公) 김시흥(金時興)이시다.

  김녕김씨는 효(孝)와 충절(忠節)을 최고의 가치로 간직하고 있는 가문(家門)으로 김녕군 7세손 김질(金?)은 태조 이성계의 출사제의를 거절하고 아산 도고산(道高山)에서 수절하였으며, 9세손 충민공 김인찬(忠愍公 金仁贊)은 조선개국 일1공신으로 정일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종1품재신)에 이르셨고 9세손 충의공(忠毅公) 백촌 김문기(白忖 金文起,초명 효기)는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工曹判書 兼 三軍都鎭撫)로서 단종(端宗)의 복위모의를 주도하고 영도자 위상에서 군동원(軍動員)을 맡아 세조(世祖)의 패륜을 응징코져하였으나 간인(奸人)의 밀고(密告)로 발각되어 순절(殉節)한 사육신(死六臣)중 최영도자(最領導者)이시다.

  10세손 영돈령(領敦寧) 김준은 세종때 정1품 돈령부 영돈령(敦寧府 領敦寧)의 관직에 올랐으며 세조의 좌의정 제의를 거절 충절을 지켰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정란공신(靖亂功臣) 13세손 충정공(忠貞公) 김준영(金俊榮) 겁암공(?巖公) 김영년(金永年)과 분성군(盆城君) 김응수(金應壽), 충경공(忠敬公) 김경세(金景世) 충숙공(忠肅公) 김흔(金欣)이 있으시며,항일독립운동의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 항일열사 김한종(金漢鍾)은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독립군 양성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여 3.1독립운동을 불러일으키게 하였고, 기미독립운동 33인 민족대표 김병조(金秉祚), 대한민국(大韓民國) 제14대 대통령(大統領) 김영삼(金泳三), 국무총리 부총리 중앙정보부장 국가정보원장 각 부처장관 및 대법관 헌법재판관 국회의원 검찰총장 공군참모총장 육군대장 공군대장을 비롯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계 등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서 충효혈통가문(忠孝血統家門)을 빛낸 자랑스러운 김녕군(金寧君)의 후예들이다.

  <김진우의 해설> 김녕김씨(金寧金氏) 사육신 김문기와 5세(世)충.효의 절신효(孝)와 충절(忠節)을 최고 가치로 간직하고 있는 가문김문기. 김형일. 김홍일. 김재규. 김영삼국무총리 김석수, 헌법재판관 김진우. 작곡가 금수현. 지휘자 금난새 김녕김씨(金寧金氏)는 김시흥(金時興,시호 문열 文烈)을 관조(貫祖)로 받든다.

그는 신라김씨 시조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5세손이며, 신라 제56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8세손으로 고려 인종때 한림원(翰林院,고려때 왕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뒤에 예문춘추관)에 오르고,병부시랑(兵部侍郞:정4품국방차관)으로  공을 세웠으며,광록대부(光祿大夫:종3품문관 품계로 흥록대부를 고친것)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에 올라 김녕군(金寧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이와 같이 김녕김씨는 경주김씨에서  나온 성씨의 하나다.

  관조(貫祖) 김시흥은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6세손인 동정공(同正公:동정은 고려때 6품 이하의 문관과 5품 이하의 무관에게 주던 정직(正職)에 준하는 명예직이며,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는 경우에 주었고 정직 이름 밑에 붙여 씀) 김봉기(金鳳麒)의 넷째 아들로 의성에서 출생했으며,고려때 묘청의 난 등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금주군(金州君,금주는 김녕의 고호)에 봉해졌고,명종때도 나라에 공을 세워 식읍(食邑:나라에 유공한 사람에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것)을 하사받아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후에 익산의 오강서원(五岡書院),밀양의 밀성사(密城祠),아산의 도산사(道山祠)등에 배향[配享]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해오다가,고려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하였으나,김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 되어,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불러왔으나 후손들의 혼돈이 계속되어, 1849년 헌종 기유(憲宗 己酉)15년 11월, 경상도 유생(儒生) 김주성(金周聲),김근학(金根學),김성현(金成鉉),김치수(金致秀),김홍환(金鴻煥) 등이 선조(先祖)의 사실목록(事實目錄)에다 진정서를 첨부하여,예조(禮曹)에 상정(上呈)했고,1884년(고종 갑신년甲申年) 두 차례나 정부에 청원하여 당시 예조(禮曹)의 비준을 받아 1865년(고종 2) 본관을 김해의 원래 지명인 김녕(金寧)으로 하게 되었다.

  관조 김시흥의 증손자인 김중원은 고려시대에 안렴사(按廉使;고려 5도의 장관으로 안찰사라고도 함,절도사를 혁파하고 두었으며 고려 말에는 재신급이 맡앗고 주.현의 수령을 통할하여 중앙기구와 연결 기능을 함)를 거쳐 형부시랑(刑部侍郞:정4품 법무차관)을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에 증직(贈職)되었다.

  김중원은 고려가 멸망하자 단식을 하다가 순절하였다.

공양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전의 판도사의 으뜸벼슬)를 지낸 김중원의 손자 김광저는 무록산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로 절의를 지켜 태종이 이조판서(判書:정2품 장관)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김광저의 아들 김순(金順)도 고려때 호부상서(尙書:정3품 장관)를 역임하였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충북 옥천의 백지리에 정자를 짓고 망국의 한 을 달랬으며 이때 호를 퇴휴당(退休堂)이라 지었다.

  분성군 김정갑의 아들 김질(金秩)은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의 정(情)으로 개국원종공신에 책록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장관)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아산의 도고산에 은둔 한후 호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충의공 김문기 영정?이조판서 김관(金觀)의 아들인 김문기(金文起,1399

1456.초명 효기,호는 백촌,시호는 충의)는 1399년(정조1년) 2월16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했으며,세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 정규적으로 실시하는 과거시험으로 초시,복시,전시 3단계의 시험을 거쳐 33명을 급제자로 선발 함)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정9품)에 임명되어 '태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단종 원년 1453년 10월10일  수양 대군이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좌의정 김종서.영의정 황보인 등은 피살되고 안평 대군은 사사(賜死)됨)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장관)로 내.외종간인 박팽년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 했다가, 1456년(세조2) 6월8일 사육신과 함께 순절(殉節: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림)했다.

  양지 현감(縣監:종6품수령)을 거쳐 영월군수(郡守;종4품수령)를 역임한 아들 김현석(金玄錫)도 아버지 김문기를 따라 순절하였고,  김문기의 손자 김충주와 증손인 김현남,5세손인 김약전 등이 충효로 가문을 빛내어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旌門: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기위해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홍문)이 세워졌다.

  충의공 김문기 유허비(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 충북기념물 44호)  판서(判書;정2품 장관)를 지낸 김복룡의 아들 김응수(金應壽,1567

?)는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왜군 3명의 목을 베고 조헌과 함께 순절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분성군(盆城君,김해)에  봉해졌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품계)로 의정부 영의정(정1품)에 증직되었다.

 그 후손들이 분성김씨(盆城金氏,지금의 김해 평야)로 독립하였는데, 그 일부는 분성김씨로 쓰고, 일부는 김녕김씨로 남아 분성군파(盆城君派)로 활동하고 있다.

  담양부사(府使:정3품 외관직) 김언공은 이순신장군의 노량대첩과 권율의 영천전투에 중추적 역할을 해 명성을 떨쳤다.

  이밖에 팔공산 전투에서 노모를 등에 업고 공을 세운 김유부,병자호란 때 순절한 그의 아들 김기남,김난생 형제 등이 충효의 전통을 이어왔다.

  조선 후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소산(小山) 김기호(金琦浩, 1822

1902)는 김문기의 13세손이다.

 김기호는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제자로, 1861년에 소산재(小山齋)를 지어 창원 지역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유계(儒契)를 모아 시 창작에도 남다른 솜씨를 보였다.

 김문기가 단종 복위운동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정난(靖難)으로 순절하자, 그의 아들 김인석(金仁錫)과 손자 김덕지(金德知)가 함께 화(禍)를 피해 군위.자인 지방에서 살았고, 김덕지의 아들 김정무(金鼎武)는 유랑하다 1508년(중종 3) 창원으로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이지역 입향조가되었다.

 김녕김씨는 창원시 사파정동(옛 창원군 상남면 사파정리), 북면 대촌리, 대산면 상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소산 김기호의 현손인 김형만(金炯滿,1912

1969)은 1952년 당시 창원군 상남면과 웅남면에서 최초의 중학교인 남면중학교(지금의 창원남중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교육자였다.

그의 현손인 김정술(金汀述)은 이 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이고, 전 동남은행장을 역임한 김정규(金禎圭)는 김기호의 6세손이다.

소산 김기호가 강학을 위해 1861년 사파정마을 뒤쪽 비음산 아래에 지은 소산재가 있다.

지금의 소산재는 창원의 도시계획에 의해 1995년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인데, 창원시 사파정동 111-7번지에 위치해 있다.

또한 김호원(金鎬源)이 지은 김기호 묘갈명(金琦浩墓碣銘)이 창원 군지에 실려 있다.

 ?창원시 사파정동(전 상남면 사파정리), 북면 대촌리, 대산면 상리 등에 김덕지의 아들인 입향조 김정무가 1508년 입향한 이후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창원시 소재의 김녕김씨 집성묘역> 또한 항일독립운동의 의병대장 김도현(金道鉉) 항일열사 김한종(金漢鍾)은 광복회(光復會)를 조직 독립군 양성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여 3.1독립운동을 불러일으키게 하였고 기미독립운동 33인 민족대표 김병조(金秉祚), 대한민국(大韓民國) 제14대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충정공파),국무총리 김석수,부총리,건설부장관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규, 육군정보국장 및 2군단장.육군참모차장을 거쳐 6.7.8.9대 국회의원으로 1971년 신민당사무총장.1974년 신민당 원내총무를 지낸 군인이자 정치인 김형일(金炯一), 6.25때 1군단장을 거쳐 육사교장,1971년 신민당당수권한대행을 지내고 광복회장을 지낸 김홍일(金弘壹) 및 각 부처장관 및 대법관, 헌법재판관 김진우,민주화투사이며 중진국회의원을 지낸 김덕룡, 검찰총장, 공군참모총장, 육군대장,공군대장을 비롯 정치.경제.교육계에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작곡가 금수현, 문화 예술계의 지휘자로 금수현의 아들인 금난새(예명) 등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서 충효혈통가문(忠孝血統家門)을 빛낸 자랑스러운 김녕군(金寧君)의 후예들이다.

  한편, 지휘자 금난새는 아버지인 작곡가 금수현이 교감으로 재직때, 학교에 김씨가 많아 스스로 금씨로 바꾸었다고 하며,호적에는 김씨로 되어있다고 한다.

  <김녕김씨 집성촌으로  100호 이상이 모여 집성을 이루고 있는 곳의 지명>전남 고흥군 고흥면 고소리,동압리,호형리 등 110호,전남 공흥군 점안면모용리,회계리 93호,대구광역시 일원 180호,경북 월성군 나산리 800호,경북 금릉군대덕면 작용리,덕산리일원 170호,구성면 상거리,금라동일원 140호,상주시일원 230호,경남 진양군일원 320호,의령군일원 145호,합천군일원 200호,남해군 일원130호 등이다.

  [계 파]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영돈영공준파(領敦寧公遵派),진주목사공형파(晋州牧使公□派),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충정공준영파(忠貞公俊榮派) 등이다.

  조선시대에 김녕김씨(金寧金氏)는 김진영(金鎭永,1852년 임자생)이 1893년(고종 30)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병년(丙年)마다 보던 과거) 문과(文科:대과) 병과(丙科)에 2등으로 급제하는 등 문과(文科:대과)에 2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2명 등 1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인구조사에서 김녕김씨는 1985년에는 102,901가구에  424,336명이었으며,2000년에는 162,200여가구  513,000 여명이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법흥파 김염계)> 1세조 김염(金濂)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고려 시대에 벼슬이 봉어(奉御:상의국 등의 정6품)에 이르렀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고있다.

 김녕김씨 관조인 김시흥(金時興)의 8세손 김문기(金文起)가 단종복위운동에 찬가하여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고 3족을 멸하는 위난이 닥치자, 김문기의 8촌동생 김해군수(郡守:종4품수령) 김춘(金春)은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했다가, 성종2년에 다시 평안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法興洞)에 옮겨가 터를잡고 살면서 자손이 번창하자 본관을 법흥(法興)으로 하고, 김춘을 관조(貫祖)로받들고 있다.

 [계 파] 고강파(古姜派),남시파(南市派),당산파(堂山派),동문파(東門派),만다지도파(灣多地島派),만진리파(灣津里派) 법흥파.원류본파(法興派.原流本派),사동파(社洞派),산후파(山後派),선천사사파(宣川沙士破),주의파(做義派) 등이 있다.

  김녕(金寧)은 경상남도 김해(金海)의 옛 지명으로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해 오다가 532년(신라 법흥왕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940년(고려 태조 23)에는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금주(金州) 등으로 불렸으며, 1270년(원종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주목(金州牧)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다.

1931년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 김해군이 시로 통합되었다.

(2011.1.31. 디트뉴24/ 김진우 한국성씨연구소 대표)  디트뉴24 http://www.dtnews24.com  여기에서도 밤에도 빛난다는           보석인 야광주와 명월주를 함께 이른 말 어두오랴 : 어둡겠는가? 님 : 단종을 가리킴 一片丹心(일편단심)이야 : 충성된 마음이야. 이 > 이아> 이야(강세조사) 고칠 : 변할 이시랴 : 있으랴. 이시다>잇다>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시조는 온갖 주위의 유혹에도 굽히지 않는 지조를 말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신과 영달을 위해서 비굴한 삶을 살았는가. 그러나 이 시조는 그런 생각을 깨우치게 하는 작품이다.

이 노래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단종과의 이별을 촛불에 이입시켜 그 슬픔을 노래한 시조이다.

초장과 중장은 인과 관계로 연결되었으며, 종장은 주제장으로 지은이의 감정이 이입된 구절이다.

초장과 중장은 '가마귀'와 '야광 명월'을 대조시켜 간신과 충신(또는 세조와 단종)의 이미지를 뚜렷이 한 후, 자신의 충절을 종장에 부각시킨 절의가(節義歌)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어린 임금 단종을 소재로 한 것으로, 야광주(夜光珠)가 밤이라 해서 그 빛을 잃을 까닭이 없는 것과 같이 자신의 충절은 오직 일편 단심(一片丹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은 세조의 무리로 가득 찼지만, 절개 높은 신하는 야광명월과 같이 언제나 빛난다는 것이다.

 작품 배경으로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시조로, 김질이 세조의 명을 받고 옥에 갇혀 있는 박팽년을 찾아가 술을 권하며 이방원의 하여가로 회유하려 하자 그 대답으로 지은 것이라고 함.  금생여수라아름다운 물에서 금이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며,곤강에서 옥이 난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겠는가아무리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들 임마다 (아무 임이나 다) 따르겠는가?요점 정리연대 : 세조 형식 : 평시조 제재 : 일편단심 표현 : 비유적, 의지적, 대구법주제 :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내용 연구금생여수 : 금은 아름다운 물에서 남 옥출곤강 : 옥은 곤강에서 남. '곤강'은 옥이 나는 산. 또는 곤륜산의 다른 이름 뫼마다 : 산마다 날쏜야 : 나겠느냐. 날 것이냐 암으리 : 아무리, '아므리'의 오철 좃츨야 :따르랴. 좇(어간) + 을야(의문형어미)이해와 감상  박팽년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 없음을 비?굅탔막� 노래한 시조로, '금'과 '옥'을 성군에 비겨 불사이군의 충절을 다짐한 것으로 이 시조의 초장과 중장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심화 자료박팽년 (朴彭年 [1417

1456])  사육신의 한 사람. 본관 순천. 자 인수(仁戒). 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형조판서 중림(中林)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金綢)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동생 대년(大年), 아들 3형제도 사형당하였다.

   이 몸이 죽어가셔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 것인가 하니, 봉래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우뚝솟은 소나무가 되었다가, 흰 눈이 온 누리에 가득 찼을 때 홀로 푸르고 푸르리라.  요점 정리 연대 : 세조 형식상 : 평시조 내용상 : 절의가, 충의가 제재 : 낙락장송 성격 : 의지적 주제 : 꿋꿋한 또는 굳은 절개 내용 연구 봉래산(蓬萊山) : 중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가상적 영산(靈山)인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 동쪽 바다의 가운데에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서울의 남산을 비유 낙락장송(落落長松) :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  되야 이셔 : 되어서 만건곤 : 하늘과 땅에 가득 찬 독야청청 : 홀로 푸르고 푸름. 비유하는 말로 가까운 것은 '오상고절' 이해와 감상 이 시조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할 때 읊은 시조로 온 세상이 다 세조를 섬기는 세상이 되더라도 자신만은 남산 위에 우뚝 솟은 소나무처럼 단종마을 받들어 절개를 지키겠다는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가상적인 전제로 이루어진 이 시조는 '낙락장송'은 '굳은 절개'를 '백설이 만곤곤할 때'는 '수양대군의 득세'를 '독야청청하리라'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홀로라도 지조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상징한 작품으로 그의 죽음은 이러한 단호함 지조지킴에 연유한다고 하겠다.

심화 자료 성삼문의 유고시 아래의 작품은 성삼문이 형장으로 가기 직전에 쓴 작품으로 형장으로 향하는 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回首日欲科(회수일욕과)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북소리는 내 명을 재촉하는데고개돌려 서산을 보니 해지려 하네황천에는 주막도 없을터인데오늘밤은 뉘집에서 쉬어갈꼬?  간밤에 부던 바람에지난 밤에 불던 바람에 눈서리가 쳤단 말가크나큰 소나무들이 다 기울어 가는구나하물여 아직 피지도 못한 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요점 정리 작자 : 유응부                성격 : 풍자시 제재 : 중신들의 죽음 주제 : 세조 일파의 무차별한 인재 살육 개탄하고, 계유정난을 풍자한 노래 출전 : 청구영언 내용 연구 바람 : 계유정난 눈서리 : 계유정난 낙락장송 : 김종서, 황보인같은 단종에 충성을 다하는 중신들 못다 핀 꽃 : 이제 막 벼슬길에 나아간 유생들, 젊은 선비들 이해와 감상 각 장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순서에 의하여 배열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은유적 수법으로 처리하여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을 풍자하고 있다.

오늘날의 광주민주화항쟁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심화 자료 유응부 (兪應孚 [?

1456]) 자 신지(信之) ·선장(善長). 호 벽량(碧梁). 시호 충목(忠穆). 첨지중추원사 ·평안도절제사를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중추원동지사로 정2품(正二品)에 올랐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端宗)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소임을 맡았으나 김질(金綢)의 배신으로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종하지 않아 죽음을 당하였다.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節義派) 학자로 알려졌고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능하였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

재상으로서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하였고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조 3수가 전해진다  http://www.seelotus.com/frame_g.htm문종은  자기 사후에 황보인.김종서 등에게 보필을 당부한다.

 정치권은 세종의 둘째 수양대군과 세째 안평대군으로 나누어 파벌싸움이 발생한다.

수양대군은 황보인 김종서를 제거하고 안평대군을 사사한다.

[사육신] 노하우를 알려주마


그후 수양대군은 선위로 왕위에 오른다.

세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의정부를 약화시키고 국왕중심의 집권체재를 만든다.

이에 불만을 느낀 집현전 출신 유학자들이 단종 복위 계획을 시도한다.

명나라 사신 환영회때 거사일로 잡고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지만김질의 밀고로 거사는 실패하고 성삼문.백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이 처참하게 처형되었고사육신이라 하고,?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여 부녀자들은 노비가 되고이 사건으로 단종은 영월로 귀향가서 죽었다.

사육신의 시신은 왜 노량진에 묻친 연유는 알수 없으나 김시습이 시신을 수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홍살문  ?   불이문  불이문을 들어서면 의절사가 나옵니다.

  의절사     신도비각숙종 1681년에 민절서원을 세워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고,정조 1782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육각 사육신비1955년에 세워졌다.

  무심한 까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7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적어봅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그리고 김문기 향을 켜고 참배를 합니다.

      이개 묘   유응부 묘 박팽년 묘 김문기(가묘)   사육신 묘     유성원(가묘)?성삼문 묘  하위지(가묘)    사육신 역사관     조망대에서 본 한강   조망대에서 본 여의도여기는 주차시설이 작아 애로사항이 있다.

          여기에서도 밤에도 빛난다는           보석인 야광주와 명월주를 함께 이른 말 어두오랴 : 어둡겠는가? 님 : 단종을 가리킴 一片丹心(일편단심)이야 : 충성된 마음이야. 이 > 이아> 이야(강세조사) 고칠 : 변할 이시랴 : 있으랴. 이시다>잇다>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시조는 온갖 주위의 유혹에도 굽히지 않는 지조를 말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신과 영달을 위해서 비굴한 삶을 살았는가. 그러나 이 시조는 그런 생각을 깨우치게 하는 작품이다.

이 노래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단종과의 이별을 촛불에 이입시켜 그 슬픔을 노래한 시조이다.

초장과 중장은 인과 관계로 연결되었으며, 종장은 주제장으로 지은이의 감정이 이입된 구절이다.

초장과 중장은 '가마귀'와 '야광 명월'을 대조시켜 간신과 충신(또는 세조와 단종)의 이미지를 뚜렷이 한 후, 자신의 충절을 종장에 부각시킨 절의가(節義歌)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어린 임금 단종을 소재로 한 것으로, 야광주(夜光珠)가 밤이라 해서 그 빛을 잃을 까닭이 없는 것과 같이 자신의 충절은 오직 일편 단심(一片丹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은 세조의 무리로 가득 찼지만, 절개 높은 신하는 야광명월과 같이 언제나 빛난다는 것이다.

 작품 배경으로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시조로, 김질이 세조의 명을 받고 옥에 갇혀 있는 박팽년을 찾아가 술을 권하며 이방원의 하여가로 회유하려 하자 그 대답으로 지은 것이라고 함.  금생여수라아름다운 물에서 금이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며,곤강에서 옥이 난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겠는가아무리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들 임마다 (아무 임이나 다) 따르겠는가?요점 정리연대 : 세조 형식 : 평시조 제재 : 일편단심 표현 : 비유적, 의지적, 대구법주제 :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내용 연구금생여수 : 금은 아름다운 물에서 남 옥출곤강 : 옥은 곤강에서 남. '곤강'은 옥이 나는 산. 또는 곤륜산의 다른 이름 뫼마다 : 산마다 날쏜야 : 나겠느냐. 날 것이냐 암으리 : 아무리, '아므리'의 오철 좃츨야 :따르랴. 좇(어간) + 을야(의문형어미)이해와 감상  박팽년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 없음을 비?굅탔막� 노래한 시조로, '금'과 '옥'을 성군에 비겨 불사이군의 충절을 다짐한 것으로 이 시조의 초장과 중장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심화 자료박팽년 (朴彭年 [1417

1456])  사육신의 한 사람. 본관 순천. 자 인수(仁戒). 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형조판서 중림(中林)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金綢)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동생 대년(大年), 아들 3형제도 사형당하였다.

   이 몸이 죽어가셔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 것인가 하니, 봉래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우뚝솟은 소나무가 되었다가, 흰 눈이 온 누리에 가득 찼을 때 홀로 푸르고 푸르리라.  요점 정리 연대 : 세조 형식상 : 평시조 내용상 : 절의가, 충의가 제재 : 낙락장송 성격 : 의지적 주제 : 꿋꿋한 또는 굳은 절개 내용 연구 봉래산(蓬萊山) : 중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가상적 영산(靈山)인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 동쪽 바다의 가운데에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서울의 남산을 비유 낙락장송(落落長松) :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  되야 이셔 : 되어서 만건곤 : 하늘과 땅에 가득 찬 독야청청 : 홀로 푸르고 푸름. 비유하는 말로 가까운 것은 '오상고절' 이해와 감상 이 시조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할 때 읊은 시조로 온 세상이 다 세조를 섬기는 세상이 되더라도 자신만은 남산 위에 우뚝 솟은 소나무처럼 단종마을 받들어 절개를 지키겠다는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가상적인 전제로 이루어진 이 시조는 '낙락장송'은 '굳은 절개'를 '백설이 만곤곤할 때'는 '수양대군의 득세'를 '독야청청하리라'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홀로라도 지조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상징한 작품으로 그의 죽음은 이러한 단호함 지조지킴에 연유한다고 하겠다.

심화 자료 성삼문의 유고시 아래의 작품은 성삼문이 형장으로 가기 직전에 쓴 작품으로 형장으로 향하는 이의 마음이 담겨 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回首日欲科(회수일욕과)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북소리는 내 명을 재촉하는데고개돌려 서산을 보니 해지려 하네황천에는 주막도 없을터인데오늘밤은 뉘집에서 쉬어갈꼬?  간밤에 부던 바람에지난 밤에 불던 바람에 눈서리가 쳤단 말가크나큰 소나무들이 다 기울어 가는구나하물여 아직 피지도 못한 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요점 정리 작자 : 유응부                성격 : 풍자시 제재 : 중신들의 죽음 주제 : 세조 일파의 무차별한 인재 살육 개탄하고, 계유정난을 풍자한 노래 출전 : 청구영언 내용 연구 바람 : 계유정난 눈서리 : 계유정난 낙락장송 : 김종서, 황보인같은 단종에 충성을 다하는 중신들 못다 핀 꽃 : 이제 막 벼슬길에 나아간 유생들, 젊은 선비들 이해와 감상 각 장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순서에 의하여 배열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은유적 수법으로 처리하여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을 풍자하고 있다.

오늘날의 광주민주화항쟁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심화 자료 유응부 (兪應孚 [?

1456]) 자 신지(信之) ·선장(善長). 호 벽량(碧梁). 시호 충목(忠穆). 첨지중추원사 ·평안도절제사를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중추원동지사로 정2품(正二品)에 올랐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端宗)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소임을 맡았으나 김질(金綢)의 배신으로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종하지 않아 죽음을 당하였다.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節義派) 학자로 알려졌고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능하였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

재상으로서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하였고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조 3수가 전해진다  http://www.seelotus.com/frame_g.htm 다만 추국(推鞫) 과정에서 주모자(主謀者)로 생각될 만한 사람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단종(端宗) 복위(復位) 계획의 주모자(主謀者)가 사육신(死六臣)으로 확실하게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남효온의 『추강집(秋江集)』에 나오는 「육신전(六臣傳)」이다.

여기에는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의 순서로 사육신(死六臣)의 이름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임금도 볼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공개되기 전에는, 사육신(死六臣)에 관한 한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만을 믿어왔다.

그 결과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꾀하다 죽음을 당한 충신(忠臣)은 「육신전(六臣傳)」에 기록된 여섯 사람뿐인 것으로 알아 왔다.

 단종(端宗) 2년(1454) 생원(生員) 남전(南?)의 아들로 태어난 남효온(南孝溫)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한 단종(端宗) 1년(1453)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단종(端宗) 복위(復位) 운동 때에는 겨우 2세에 불과하였다.

「육신전(六臣傳)」은 남효온(南孝溫)이 성장하여 자신이 들은 소문에 의존하여 기록을 남겼기에 오류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반 백성은 물론 임금까지도 실록(實錄)의 열람은 불가(不可)하였기에, 「육신전(六臣傳)」에 많은 허점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이를 정사(正史)로 믿었다.

 해방(解放) 이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복제한 영인본(影印本)이 간행되어, 사육신(死六臣)의 인물 구성에 관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을 이와 대조한 결과, 『추강집(秋江集)』에 기재된 사육신(死六臣) 중 유응부(兪應孚)는 김문기(金文起)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서는 1977년 9월 22일 회의에서 김문기(金文起)가 사육신(死六臣)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한 장시간 토론 끝에 다음의 사항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世祖) 2년(1456) 6월 8일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 순으로 사육신(死六臣)을 들고 있으며, 김문기(金文起)가 도진무(都鎭撫)로서 박팽년과 모의(謀議)할 때 군사(軍士) 동원을 맡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에 든 사육신(死六臣)이 세조(世祖)대에 가려진 사육신(死六臣)이라고 판정된다.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를 현창(顯彰)하여야 된다고 판단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사관(史官)이 기록한 정사(正史)이고, 『추강집(秋江集)』은 전하여 들은 바를 개인적으로 편찬한 것임을 밝힌다.

 서울시는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 장관의 동의를 받은 뒤, 1978년 5월 18일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의 허장(虛葬)과 가묘(假墓)를 시유지(市有地)인 사육신(死六臣) 묘역(墓域)에 봉안(奉安)하고, 기존에 있던 유응부(兪應孚)의 묘(墓)는 그대로 둠으로써 사육신(死六臣) 묘역(墓域)에 7기(基)의 묘(墓)를 봉안(奉安)하게 되었다.

[사육신] 란 무엇인가?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위원들이 당시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이었던 김재규의 압력을 받아 부당한 결의를 하였다는 주장을 퍼뜨리는 이가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金載圭)가 당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총격으로 살해한 이후, 김문기(金文起)의 문중(門中)은 여러 가지로 박해를 받았다.

보안사령부(保安司令部)는 사육신(死六臣)이 바뀌었다고 신문에 최초로 쓴 구석봉과 김문기(金文起) 문중(門中)의 종친회(宗親會) 회장을 구금(拘禁)하고 김문기(金文起)의 사육신(死六臣) 현창(顯彰)에 김재규(金載圭)가 간여(干與)했는지 여부(與否)를 조사하였다.

 여러 조사 결과, 김재규(金載圭)는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서 김문기(金文起)를 사육신(死六臣)이라고 판정하는데 간여(干與)한 바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원들은 모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1977년 김문기(金文起)를 사육신(死六臣)으로 확정하는 일에 관해 누구로부터도 간여(干與)를 받은 바 없다는 확인을 1983년 이후에 문서로 남겼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世祖) 2년(1456) 6월 8일 ① 성삼문(成三問)은 성품이 승진에 조급하였다.

중시(重試)에 장원(壯元)한 이래 이름은 남에게 앞섰건만 오랫동안 제학(提學), 참의(參議)에 머물렀다고 생각하였다.

 ② 박팽년(朴彭年)은 사위 이전(李?, 영풍군)의 일로 화가 미칠까 늘 두려워하였다.

③ 하위지(河緯地)는 전에 세조(世祖)에게 책망 받은 일로 원한(怨恨)을 품고 있었다.

④ 이개(李塏)와 ⑤ 유성원(柳誠源)은 직위(職位)가 낮아서 우울해하고, 진달(進達)을 생각하여 서로 깊이 결탁하여 자주 왕래하며 그 행적을 숨기고 비밀히 하여 사람들이 의아해하였다.

 ⑥ 김문기(金文起)는 박팽년(朴彭年)과 족친(族親)이고 또한 깊이 사귀었다.

김문기(金文起)는 이때 도진무(都鎭撫)였는데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모의(謀議)하면서 말하기를, "자네들은 안에서의 일이 성사시키기만 하게. 내가 밖에서 병력(兵力)을 거느릴 것이니, 어기고 반대하는 세력이 있은들 제재(制裁)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다.

 원래 세조(世祖) 편이었던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에 대하여는 세조(世祖)를 떠난 동기(動機)만을 기술하였고, 단종(端宗)을 복위(復位)시키려는 모의(謀議)는 김문기(金文起)에 관해 기술(記述)하면서 밝혔다.

더욱이 김문기(金文起)가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에게 안에서의 일을 성사(成事)시키기만 하라고 분담(分擔)해 주고, 스스로는 단종(端宗) 복위(復位)의 성사(成事)를 좌우할 중요한 역할인 군(軍) 동원(動員)을 맡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조(世祖) 2년(1456) 6월 9일 이개(李塏)가 흉악(凶惡)한 마음을 품고 저희들의 감정을 풀려고 하여 난(亂)을 일으키자고 부르짖어 그 무리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박중림(朴仲林), 김문기(金文起), 심신(沈愼), 박기년(朴耆年), 허조(許?), 박대년(朴大年)이 서로 나쁜 짓을 부추기고 몰래 무관(武官)인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박쟁(朴?), 송석동(宋石同), 최득지(崔得池), 최치지(崔致池), 이유기(李裕基), 이의영(李義英), 성삼고(成三顧) 등을 우익(羽翼)으로 삼고 권자신(權自愼), 윤영손(尹令孫), 조청로(趙淸老), 황선보(黃善寶), 최사우(崔斯友), 이호(李昊), 권저(權著) 등 상왕(上王)의 인척(隣戚)과 연결하여 몰래 궁궐(宮闕)과 통하고 궁궐(宮闕) 안팎이 서로 호응하여 날짜를 정하여 거사(擧事)하려 하였다.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은 모두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로 그중에서도 우수한 지도적 인물이었으며, 강직한 성품에 3품 이상의 고위직이었다.

 박중림(朴仲林)은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박팽년(朴彭年)이 곤장을 맞고 당여(黨與, 공모자)라고 자백하여 밝혀진 인물로 박중림(朴仲林)의 태어난 연도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세종(世宗) 29년(1447)의 실록(實錄) 기록에서 박중림(朴仲林)이 이미 늙어 고신(拷訊)하기가 꺼려진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 그보다 9년 후인 세조(世祖) 2년(1456) 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모의할 당시는, 박중림(朴仲林)이 주도할 만한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박중림(朴仲林)이 세조(世祖) 2년(1456)에 맡은 역할은 없었다.

 김문기(金文起)는 언관(言官)과 승지(承旨), 감사(監司), 참판(參判), 도절제사(都節制使) 등 내외의 요직(要職)을 두루 거친 다음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삼군(三軍) 도진무(都鎭撫)에 올랐다.

김문기(金文起)는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모의(謀議)한 신하들 중에 유일한 현직 판서(判書)로 직위가 가장 높았고, 병력(兵力)을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였다.

실록(實錄)에 의하면 처음에는 부인(否認)하던 동지들이 매에 못 이겨 사건을 모의(謀議)한 사실과 동지(同志)에 대해 털어놓고 심지어 단종(端宗)까지 관련되었다 말하던 상황에서도, 김문기(金文起)는 모진 고문을 이기고 끝내 입을 다문 채 불복(不服)하였다.

불복(不服)한 사람은 김문기(金文起)뿐이었다.

 심신(沈愼)과 허조(許?)는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이지만 정6품의 이조좌랑(吏曹佐?)과 종6품의 부수찬(副修撰)으로 지위가 낮았다.

박팽년(朴彭年)의 동생인 박기년(朴耆年)과 박대년(朴大年)은 문과(文科)에 급제한 유신(儒臣)이지만 각각 정6품의 수찬(修撰)과 정7품의 박사(博士)로 하위직이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는 무관(武官)을 낮게 보고 문관(文官)을 숭앙(崇仰)하던 분위기가 팽배했다.

무관(武官)은 목숨을 바쳐 나라와 제왕(帝王)을 지키는 임무를 띤 관리이며 문관(文官)들의 보좌관 역할이라는 인식이 당연한 시대였으므로 사육신(死六臣) 선정 기준에 못 미쳤다.

따라서 무관(武官)인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박쟁(朴?), 송석동(宋石同), 최득지(崔得池), 최치지(崔致池), 이유기(李裕基), 이의영(李義英), 성삼고(成三顧)는 사육신(死六臣)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는 같은 문관(文館)이어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지 못한 음관(蔭官)의 경우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벼슬관과 비교했을 때, 사회적 대우나 명성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단종(端宗)의 인척(隣戚)으로 음관(蔭官)이었던 호조참판(戶曹參判) 권자신(權自愼, 단종 외숙부), 형조정랑(刑曹正?) 윤영손(尹令孫, 단종 이모부), 조청로(趙淸老, 단종 이모부), 황선보(黃善寶), 최사우(崔斯友), 이호(李昊), 권저(權著)는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과 비교될 수 없었다.

  계유년의 역신들 작가한국인물사연구원출판타오름발매2011.09.07.리뷰보기?문종은  자기 사후에 황보인.김종서 등에게 보필을 당부한다.

 정치권은 세종의 둘째 수양대군과 세째 안평대군으로 나누어 파벌싸움이 발생한다.

수양대군은 황보인 김종서를 제거하고 안평대군을 사사한다.

그후 수양대군은 선위로 왕위에 오른다.

세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의정부를 약화시키고 국왕중심의 집권체재를 만든다.

이에 불만을 느낀 집현전 출신 유학자들이 단종 복위 계획을 시도한다.

명나라 사신 환영회때 거사일로 잡고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지만김질의 밀고로 거사는 실패하고 성삼문.백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이 처참하게 처형되었고사육신이라 하고,?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여 부녀자들은 노비가 되고이 사건으로 단종은 영월로 귀향가서 죽었다.

사육신의 시신은 왜 노량진에 묻친 연유는 알수 없으나 김시습이 시신을 수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홍살문  ?   불이문  불이문을 들어서면 의절사가 나옵니다.

  의절사     신도비각숙종 1681년에 민절서원을 세워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고,정조 1782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육각 사육신비1955년에 세워졌다.

  무심한 까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7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적어봅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그리고 김문기 향을 켜고 참배를 합니다.

      이개 묘   유응부 묘 박팽년 묘 김문기(가묘)   사육신 묘     유성원(가묘)?성삼문 묘  하위지(가묘)    사육신 역사관     조망대에서 본 한강   조망대에서 본 여의도여기는 주차시설이 작아 애로사항이 있다.

          특히 성삼문은 사육신에서도 대표격에 해당되는 인물로서 포커스를 맞출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우선,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성삼문은 1418년에 태어나 1456년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38살에 사망하였으니 매우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1438년, 약 20살에 과거에 붙었으며, 1447년, 약 29살쯤에 정 3품 이하의 당하관들이 치는 문과중시에서 장원급제를 했는데 판서와 참판, 찬성, 정승을 제외한 사람들 중에선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와 연관 지어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시를 만들어 동방 거벽(동방에서 학식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것으로 보아서는 동시대에서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판 이상의 자리는 정치적인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신숙주의 경우에는 문과중시에서 4등을 했다고 하므로, 성삼문이 신숙주보다는 당연히 학식에 있어서는 뛰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장, 차관을 제외한 1급 이하 공무원들을 데리고 학식을 평가했는데 1등을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사시, 행시를 통해 공무원이 된 사람들 중에서도 1등을 했다는 것이므로 굉장한 것이다.

또한 29살 때 집현전 부제학, 사간원 대간, 경연관을 지냈다고 하니, 미래가 매우 밝았던 지식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야사에 따르면 대간으로서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위해 대단한 실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지금으로 따지면 집현전은 과거 한글 창제 기관이었지만, 사실상 세종의 뇌가 되어준 특수 지식인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집현전은 국무에 대한 수많은 정책 아이디어의 보고였다고 한다.

사실 이는 매우 합리적인 조직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을 다 모아서 회의를 하는 것보다 확실한 사람들을 몇 명을 모아서 결론을 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 왜냐하면 이들의 머릿속에 이미 어중이떠중이들의 얕은 생각은 이미 커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제학과 부제학은 대표적인 학자 관직으로써 실제로 정치적인 자리인 정승 자리보다도 높게 평가받기도 하였다고 하니 어린 나이에 부제학을 한 것은 의미가 있다.

대제학은 보통 이보다 나이 많은 선비들이 하였다고 전해진다.

집현전의 경우 부제학의 윗자리들인 제학, 대제학, 영전사는 전부 겸직이었으므로 성삼문이 실체적으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요동에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13회나 찾아가서 정확한 음운과 언어연구에 대하여 의논하였으며,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제도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실제 성삼문은 신숙주와 함께 정음청에서 정음과 관계되는 모든 일을 맡아보았다고 한다.

또한 집현전 학자로서 글씨를 잘 썼고, 문장에 뛰어나 세종에게 앞날을 축복받았다고 하므로 지대한 공헌을 했음이 틀림없다.

다만, 하위지, 최만리, 정창손 등은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음운이란 음과 운을 말하는데, 13회나 황찬을 찾아가고, 명나라에까지 가서 연구했다면 이러한 음운에 대한 상당한 연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들은 대체로 하루 종일 연구만 할 수는 없고, 여러 분야의 수많은 실무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고, 불필요한 일과가 많아 연구할 시간이 물리적으로 빠듯하기 때문에 성삼문과 신숙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공헌을 했으리라 추정한다.

 세종대왕이 엄청난 천재라서 한글을 혼자서 다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한글의 음운에 대하여 가장 박식했던 것은 집현전과 정음청에서 일했고, 황찬과 음운과 언어연구에 대해서 의논하고, 명나라에 가서 언어연구를 하고, 예기대문언두를 간행한 성삼문과 신숙주였을 것이다.

 또한 많은 신하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였으므로 이에 관련된 신하는 많지는 않은데, 신숙주와 성삼문은 훈민정음 창제에 찬성하였던 신하이다.

그중에서도 이 둘은 명나라 사신에게도 동방거벽으로 불릴 정도로 문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인물들이므로 지대한 공헌을 했음이 틀림없다.

또한 그중에서도 당하관들의 문장실력을 평가하는 문과중시에서 장원을 했던 성삼문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정음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이개, 최항 등과 함께 참여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공이 컸다고 한다.

또한 세종은 성삼문, 신숙주 등을 자주 데리고 다니며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이들은 세종의 뇌가 되어줬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세종은 성삼문, 신숙주 등에게 예기대문언두를 만들도록 했는데, 이는 한자에 한글로 구결을 단 책이라고 한다.

즉, 成이라는 한자가 있다면 그걸 성이라고 한글로 한자 밑에 적어둔 것이다.

이는 사실상 한글의 뿌리와 같다.

또한, 조선 초기 성씨 가문이 저술한 저서들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성삼문이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사망하고나서, 세조대부터 이들 저서들의 성씨 가문 사람의 이름을 목판에서 파내 재간행했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 실물들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성삼문에 대한 학술적인 업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제부터는 성삼문의 가치관과 단종 이후에 어떠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성삼문은 신숙주와 달리 정의와 이상을 중시했고, 신숙주는 현실을 중시했다.

그 결과 성삼문은 결국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다 죽지만, 세조에게 붙은 신숙주는 오랫동안 영의정을 하며 잘 먹고 잘 산다.

신숙주 외에도 세조에게 붙은 인물들은 현대로 말하자면 장, 차관 등을 역임하며 잘 먹고 잘 산다.

또한 굳건한 절의를 지킨 인물이므로 강직한 성품을 가졌으리라 생각되지만, 실제로 그는 반대로 유머러스하고 밝은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계유정난단종이 왕이 되자, 세조가 반란을 일으켜서 황보인, 김종서를 죽인다.

그 후 집현전 학사들에게 공신 칭호를 주고 파티를 열었는데, 신숙주, 정인지 등과 달리 성삼문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혼자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성삼문은 이를 반대했음에도 공신 칭호를 받았다는 점이다.

세조가 성삼문을 포섭하고자 했음이 드러난다.

성삼문이 세조에 대하여 격렬히 반대했던 것은 아무래도 세종이 항상 데리고 다니던 성삼문, 신숙주 등 학자들에게 죽기 전에 병약한 단종을 지켜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신숙주는 세종을 배신하고 단종을 버리고 세조에 붙었고, 성삼문은 세종의 말대로 단종에게만 붙어있었다.

또한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는 6조 직계제를 선호했던 인물로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했던 성삼문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단종 복위 운동성삼문은 단종 대신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이를 왕위찬탈로 규정하고,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으며, "주상이 아직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는 왕위가 찬탈되었을 때 자살하려고 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에 따라 성삼문은 단종복귀운동을 계획할 당시, 신숙주보고 같이 하자고 했지만 비현실적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성삼문은 "신숙주는 나의 평생 친구지만 죄가 무거워 죽여버려야겠다"라고 하며 자객을 보냈으나 신숙주는 미리 감지하고 잘 숨어있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성삼문은 이를 신숙주에게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전에 이미 신숙주와 여러 번 다투고,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또한 수양대군이 즉위한 이후 받은 녹봉은 전부 표시해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하며, 세조에게 단, 한 번도 전하라고 부르지 않고 나리라고 불렀다는 것은 굉장한 마음가짐이다.

그럼에도 세조는 성삼문을 죽이지 않았는데, 그만큼 곁에 두고자 노력한 것이 아닐까. 반대로 신숙주는 세조대 장기간 영의정을 했을 정도였으며, 세조의 최측근이었다고 한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박팽년, 유응부, 금성대군, 이개, 유성원, 김질 등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세조의 운검을 맡은 성승과 유응부가 세조와 세자와 측근들을 다 죽이는 것이다.

(운검이란 큰 칼을 들고 왕을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이 한명회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신숙주와 한명회가 운검을 하지 말자고 하면서, 성삼문은 이를 중지하자고 한다.

이 과정에서 김질은 과거에 거사를 계획했던 것이 두려워 세조에게 밀고하게 되고, 성삼문은 바로 의금부로 잡혀가고, 모의를 계획했던 인물들이 지금의 태평로 근처에서 처형당하는데 이를 사육신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사육신의 관계자들까지 포함하여 신숙주를 제외한 세종대 활약했던 정상급 지식인들이 대거 사망한다.

또한 의금부에서 세조는 성삼문에게 일을 부인하고 자신에게 붙으면 다 덮어주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삼문은 "나으리!! 어서 내 목을 치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세조가 어떻게든 능력있는 엘리트인 성삼문을 측근으로 두고 싶었음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과 모의한다면 결국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탄로날 가능성이 높다.

모의하는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그만큼 탄로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런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면 계획한 뒤, 뜸을 들이지 말고 바로 시행했어야 했다.

또한 거사가 실패했다고 일을 접기보다, 목숨 걸고 쳐들어가서 수양대군을 죽였어야 하는 것이다.

성삼문은 죽기 전에 절명시를 한 수 읊었다고 한다이 일로 인해, 성삼문의 일가 중 남자는 모조리 죽이는데, 여자의 경우에는 노비가 되었다, 아들이 셋, 딸이 셋이 있었는데, 아들 셋은 죽고, 이미 시집을 갔던 두 딸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성삼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뿌려졌다.

성삼문의 시신과 일가족의 시신 일부는 김시습 등이 주워서 노량진에 매장하였고, 누가 이를 묘소에 비석을 세워 성씨의 묘라고 만들었다.

성삼문의 충의를 기리는 움직임은 성종 때 사림이 집권한 뒤에 계속되었다고 한다.

김종직, 조광조, 이이, 송시열 등이 성삼문의 충의에 대하여 논했고, 사육신을 복권하자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세조대 이후로도 성삼문을 용서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육신의 복권은 신권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조선조 왕들은 이를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했으리라 생각된다.

실제로 조광조가 사육신 복권 여론을 펼쳤는데 기묘사화로 싹 다 죽으면서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그 후 숙종 때 노론에 의해 사육신 복권 여론이 다시 나타났고 사육신들의 관직이 복구되었다.

노량진의 사당에는 사액이 내려졌고, 성삼문의 옛집은 서원이 되었다.

영조 때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충문의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조판서란 쉽게 말하자면 지금의 행정자치부 장관 같은 직위이다.

정조 때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에 올랐고, 단종의 묘인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배향이란 신주를 모시는 것을 말하는데 신주란 죽은 사람의 위패를 말한다.

그 외에도 노량진 민절서원, 의절사, 영월의 창절서원, 홍주의 노은서원, 논산의 사당, 의성의 학산 충렬사, 창년 물계세덕사, 연산의 충곡서원, 충남의 동학사 숙모전에서 다른 순절신들과 함께 배향되었다고 한다결론이를 토대로 성삼문은 정점에 도달한 학식과 더불어 완벽에 가까운 정의관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정의가 있다는 점은 현대에서도 의미가 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삶의 롤모델이 없는데, 성삼문이라면 롤모델이 되어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성삼문이 중시했던 것은 정치적인 것들보다 학문과 충군, 절의, 그리고 정의였다고 하며, 정치적인 지위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신숙주는 그 반대였다.

신숙주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생명과 정치적인 지위였던 것이다.

실제로 과거 성삼문의 평생 친구였던 신숙주는 영의정을 근 10년 가까이 지낸다.

물론, 신숙주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결과적으로 성삼문은 정의를 수호하다 죽었고 가족들이 노비가 되거나 죽고, 가문의 성과가 전부 사라지는 등 비극을 겪었고, 신숙주는 최고 직위에 올라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가문을 버리고도 지켜야 할 만큼 세종의 부탁을 무겁게 여겼다고 볼 수 있겠다.

주군과의 신의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삼성전자에서 일하긴 하였으나, 먹고살기힘들더라도 본인은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상관이 아닌이상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나에게도 주군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생긴다면 당연히 주군과의 신의를 중시 여기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며, 목숨을 버려서라도 정의를 지키고자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높은 자리와 돈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은 나와 유사하다.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다면 노숙자인들 어떠한가. 오히려 노숙자와 같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권력자들의 두뇌를 압도한다면 그것이 국민들에게 더 자신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저런 노숙자따위도 저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못하겠냐"라고 나를 비하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각종 전과, 실패들을 조작하여 프로필에 추가하는 방법으로, 노숙자라는 신분외에도 국민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무시받을만한 요소를 더 수집할 필요가 있다.

 그로인해 자신감을 얻는 국민들은 다시 힘을내어 국가의 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국민들이 가장 쉽게 자신감을 획득하는 경로는 국민들이 같은 영역내에서 특정인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선제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반대로, 잘못된 생각을 하는 권력자들의 두뇌는 철저하게 사고의 뿌리까지 밟아 꾸짖어줄 것이다.

대한민국은 정부 고위층이 아닌 국민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학벌, 직업, 돈 등의 요소들에 고개숙이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작은 힘을 더할 것이다.

오히려 과시하는 자들을 비웃을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주고 싶다.

개인적으로도 깨닫는 것이 많은 포스팅이었다.

자료 참조,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위키피디아, 논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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