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난정


  장녹수 장녹수는 드라마로도 있었고  영화 간신에서도 나오게 됩니다.

우선 장녹수는 가난하게 태어나서 몸을 팔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여인이였습니다.

이쁜 외모로 양반대감 가노들의 부인으로 살아가며 아들도 낳았는데요그리고 나서 노래와 춤을 배우고 몸도 팔며 창기가 되었습니다? 연산군 시절의 여인인데요흥청 망청 이라는 말이 나올때 흥청으로 궁에 들어와서 연산군에 눈에 들어  말그대로 권력에 중심에 서게 되었고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부추겨서 더더욱 국고를 낭비하고 문란하고 부패한 폭군으로 만들었습니다.

30살에 나이에도 기생으로 들어와서연산군을 꼬신 그녀..30대나이에도 16살의 외모처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을정도니어마어마한 동안이네요애엄마인데...허허? 하지만 권력을 손에 진 시절도 지나고...폭정 연산군과 장녹수는 패망의 길로 걷게 됩니다.

바로  조선 11대 왕  중종이 반정을 일으킨 사건이죠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새 시대를 열겠다는 이 반정은성공하게 되었고연산군과 함께 가장  권력을 휘둘렀던 장녹수는 그렇게 참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흥청망청 이라는 말은 바로 연산군 시대에 생겨난 말로서 흥청 과 망청 을 개설하여국고를  놀고 마시고 유흥하는곳에 탕진하게 되면서 생겨 난 말이죠정말 저시대에 얼마나  놀았으면 국고가 부족할 정도였다고 하네요개인적으로  조선시대 3대악녀중에서  장녹수가 저는 제일  살벌한거같아요 ㅎ30대 여인이 기생이 될려고 춤과 노래를 배워서 궁에 들어와서 연산군까지 꼬시고권력을 휘두를정도 ㅎㅎㅎ ㄷㄷㄷㄷ남자였으면 아마 최소 연산군일듯 ㅋ  둘이 잘 어울리네...ㅋㅋ다음 조선시대 3대악녀        2. 정난정? 정난정... 이 여인도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시대상으로는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였으나,명종의 나이가 어려서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절 입니다.

출세를 하고 싶었던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첩이 됩니다.

 정난정은 첩이 된 후에도 문정왕후에게  잘 보여 궁궐출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잇는 권한까지도 갖게 되었고첩 이라는 타이틀이 싫어서  윤원형의 본처를 독살하였습니다.

그후에 문정와후에게   외명부 품계인  정.종 1품  정경부인의 봉해졌습니다.

정경부인은  대략적으로 옹주, 공주 들과 동등한 등급의 품계 라고 하니 여인으로서 내명부가 아닌 외명부로는  최고의 직분이라고 볼 수 있는거죠 ? 하지만.... 역시 이여인도 조선시대 악녀에 걸맞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권력의 중심인 문정왕후가 죽게 되자   탄핵을 받아 천인으로 강등되었고윤원형과 함께 유배를 갔으나,갖은 멸시와 탄핵등이 빗발치게 되자 독약을 먹고 스스로 자결하엿다고 합니다.

정난정 ...이여자도 살벌하네요..암튼 외모와 지략은 있으니 저만큼 올라간거겠죠....여자들은 무서워;...조선시대 3대악녀       마지막 ... 장옥정(장희빈)? 며칠 전 장옥정 사랑에 살다 로 포스팅을 따로 하기도 하엿는데요장옥정은 정말 다양하고 격번의 시대를 살아간 여인이죠솔직히 저는  조선시대3대악녀 로 장옥정을 꼽고 싶지는 않았어요다른 악녀들에 비해서  그나마...순하다고 할까요??그리고  다른 조선시대 악녀 들 중에서기생이 아닌 나인인 궁녀신분으로 입궐한 나름 출신성분이 좋은 여인이였습니다.

? 숙종에 눈에 들어서  총애를 받은 장희빈.개인적으로 내가 장희빈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자리 그리고자신의 자식을 왕위에 올리기위해서 저도 어느정도는장희빈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싶어요그리고 자신의 남자인 숙종이 다른 여인과 있는걸 보면눈이 뒤집힐테니까요..ㅎㅎ? 조선시대 임금들이 의외로 독살당해서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모략과 반대새력 그리고 다음 임금을 향항 왕위쟁탈전이 난무하는곳이 궁 이기 때문이죠장희빈 역시 그런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고 생각해요..물론 행동들이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중전 인 인현왕후를 죽이고자하엿고, 저주하였고숙종을 꼬셔서 중전을 폐위하고 자신이 중전의 자리 까지 올랐다는 점..어찌보면 여인으로 최고의 권력을 차지한 그녀지만.결국 잘못된 행동들이 발각되면서 사약을 먹고 죽게 됩니다.

?조선시대 3대악녀 들에 대해서 소개를 했습니다.

장녹수, 정난정, 장옥정 하지만 그중에서 저는 장녹수가 가장 얄밉고 ...정난정이 가장 독해보이네요장옥정은 김태희 때문인가....마음이 약해 봅� 내가 ㅋㅋㅋㅋㅋㅠㅠㅠ김태희가 장옥정 하니..뭐 그럴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구요 ㅋㅋㅋㅋㅋ나란남자... 악녀들에게 휘둘릴 남자 ㅋㅋㅋㅋ조선시대 3대악녀 여러분들은 누가 가장 악녀 라고 생각이 드시나요??^^

    -2015 드라마 <옥중화>에서 정난정-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평소에 선비들을 도륙한 것을 언짢아하던 명종은  자신의 외삼촌인 윤원형과 정난정을 황해로 유배보냈고 문정왕후가 아꼈던 승려 <보우>를 죽이고 불교를 탄압했죠.   .         정난정 죽음? 윤원형 죽음?  결국, 정난정은 자살하고  윤원형은 정난정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다가 얼마 후 죽자 모두가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이 후로는,,  사림파가 조선 정계의 주도세력이 되었고 ?저희끼리 권력을 놓고 다투어,  동인, 서인, 남인, 북인, 탁남, 청남, 대북, 소북, 노론, 소론, 벽파, 시파 등,, 수많은 파벌들이 등장해 죽고 죽이는 당쟁에 몰두하여 국력을 소모하게 되었죠.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후, 2년 뒤


 1567년 34세에 죽고,


  얼떨결에 잿팟터진,, 하성군(훗날 선조)가 왕위에 즉위하게 되죠

    http://ceo_zeus.blog.me/70168224771?? ??? & ??(??? ??) ???? ?????? ????] <?? ??> <?? ?? ??> ?? ??? & ??(??? ??) ??...blog.naver.com       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학습|구독자:953|구독하기 인종 독살설, 문정왕후와 정난정 죽음 인종 가계도, 인종 죽음은 독살??인종 죽음 후, 명종 어머니 문정왕후 섭정명종, 을사사화는 문정왕후 노림수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 1. 인종가계도와 인종의 죽음은 독살설(?)2. 인종 죽음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3. 정치적음모 을사사화의 뒷배는 문정왕후...더보기 2016.05.24 11:47      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학습|구독자:953|구독하기 인종 독살설, 문정왕후와 정난정 죽음 인종 가계도, 인종 죽음은 독살??인종 죽음 후, 명종 어머니 문정왕후 섭정명종, 을사사화는 문정왕후 노림수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 1. 인종가계도와 인종의 죽음은 독살설(?)2. 인종 죽음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3. 정치적음모 을사사화의 뒷배는 문정왕후...더보기 2016.05.24 11:47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자 기생이되었고 당시 실세인 윤원형에 접근하여첩이 되는데 성공하였다.

윤원형은 종종(조선 11대 왕 1488

1544)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이다.

??윤원형역 정준호종종이 죽고 1544년 인종(12대 왕) 즉위하였지만 9개월 만에 죽고 만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독살을 했다는 설이 있어 드라마에서는 단골 소재로쓰기 좋고, 이런 과정을 정난정이 주도했다는 작가적 상상이 극을 더 재미있게만들 수 있다.

이 후 인종의 외척인 윤임과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의 권력 싸움으로 윤원형의승리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의 대윤파 인원들이 대거 숙청을 당하게 된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하며, 드라마 재미를 위해 이 또한 정난정이 주도적으로일을 꾸민 것 으로 나올 수 있다고 예상된다.

1545년 12세인 명종(13대 왕)이 즉위하였으나 어린 나이로 인해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왕 대신 정치를 함)을 하게 된다.

이 또한 대윤파 숙청으로 인하여 문정왕후를 견제할 세력이없어 수렴청정이 가능하였다.

?1551년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부인 김씨를 몰아내고, 첩에서 정실부인이된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고 전매와 모리행위(공익과 상도를 무시하는 행위)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문정왕후역 이미숙?1553년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 직첩을받게 되며, 윤원형을 설득?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 없이 서자도 벼슬에나갈 수 있도록 하였고, 승려 부우을 문정왕후에 소개해 선종판사에 오르게하였고 도첩제도(승려 인정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잠시 불교가 융성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 유교 국가로 신분제와 불교에 대해서 민감하였고,정난정의 후원자였던 문정왕후가 1565년 죽고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가 죽고, 윤원형과 정난정은 탄핵을 받아 황해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윤원형의 전 정실부인 김씨의 계모인 강씨가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하려고했다고 고발해, 이를 계기로 사대부들의 공격이 심해져 처형을 당하기 전에 독약을 먹고 자결을 한다.

곧 뒤를 위어 윤원형도 자결을 하게 된다.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자 기생이되었고 당시 실세인 윤원형에 접근하여첩이 되는데 성공하였다.

윤원형은 종종(조선 11대 왕 1488

1544)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이다.

??윤원형역 정준호종종이 죽고 1544년 인종(12대 왕) 즉위하였지만 9개월 만에 죽고 만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독살을 했다는 설이 있어 드라마에서는 단골 소재로쓰기 좋고, 이런 과정을 정난정이 주도했다는 작가적 상상이 극을 더 재미있게만들 수 있다.

이 후 인종의 외척인 윤임과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의 권력 싸움으로 윤원형의승리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의 대윤파 인원들이 대거 숙청을 당하게 된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하며, 드라마 재미를 위해 이 또한 정난정이 주도적으로일을 꾸민 것 으로 나올 수 있다고 예상된다.

1545년 12세인 명종(13대 왕)이 즉위하였으나 어린 나이로 인해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왕 대신 정치를 함)을 하게 된다.

이 또한 대윤파 숙청으로 인하여 문정왕후를 견제할 세력이없어 수렴청정이 가능하였다.

?1551년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부인 김씨를 몰아내고, 첩에서 정실부인이된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고 전매와 모리행위(공익과 상도를 무시하는 행위)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문정왕후역 이미숙?1553년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 직첩을받게 되며, 윤원형을 설득?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 없이 서자도 벼슬에나갈 수 있도록 하였고, 승려 부우을 문정왕후에 소개해 선종판사에 오르게하였고 도첩제도(승려 인정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잠시 불교가 융성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 유교 국가로 신분제와 불교에 대해서 민감하였고,정난정의 후원자였던 문정왕후가 1565년 죽고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가 죽고, 윤원형과 정난정은 탄핵을 받아 황해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윤원형의 전 정실부인 김씨의 계모인 강씨가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하려고했다고 고발해, 이를 계기로 사대부들의 공격이 심해져 처형을 당하기 전에 독약을 먹고 자결을 한다.

곧 뒤를 위어 윤원형도 자결을 하게 된다.

 옥중화도 시청률이 거의 20%니 음.. 좋아요 좋아

사극을 안 좋아하는 미니도 잘 보는 사극이니.. 괜찮은거겠지요

체탐인 - 조선시대의 첩보원체탐인은 어떤 사람이 되는거에요??부모형제가 없는 사람 중에 출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네요.절대 해서는 안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험한 일이니까..젊었을때는 내가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었지만.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고 하네요.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때이기도 했지만.. 가장 가슴 아팠던 시절이기도 하다는...성공을 하면.. 외롭다고 하던데..저는 평생을 전옥서 다모로 살까봐.. 막막하다는 옥녀..전옥서에서 태어나서 이름마저 옥녀인 그녀..지난번 끝날때에 옥녀 주변에 남자들이 둘러싸면서 끝이났었는데..체탐인을 하겠다고 몰래 나름 몰래 불러들인 포도청 부장의 행동이었네요.그때 윤태원은 그런 옥녀를 봤었지만, 공재명이 말리는 바람에.. 옥녀를 도와주지는 못 했어요.이런..이런...그래도 도와줘야 하는건데...그렇게 포도청 부장인지? 대장인지? 만나고 전광렬아저씨한테 복잡한 마음을..상의했었더랬지요.만난것은 말하지 않구요..흠..이런..암살.그에게 주어진 임무옥녀와 얘기하고 있는데 내금위 종사관이 와서 얘기를 전달하네요.내금위는 조선시대에 왕과 궁궐을 호위하던 군대임무를 하나 주겠는데 그 임무를 완수하면 풀어주겠다고 하네요.이제 와서 내게 오명을 안겨준 사람들에게 또다시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며그 제안을 거절하네요... 전광렬아저씨 여전히 멋지세요!!ㅎㅎㅎ 대박에서보다 훨씬 멋진 인간적인 남자

아.. 이것은 문정왕후가 내린 지시였었네요...전우치가 잠깐 등장


전우치는 옥중화에서 별로 좋은 일이나 비중있는 역할을 아직까지는 하지 못 하고 있어요.물방개가 가는 곳을 따라 하는 내기

ㅎㅎ 예전에도 내기는 많이 했었나봐요.저렇게 사람들이 둘러 모여서


물방개가 어딜가나 그 곳에 돈을 거는 내기였지요.ㅎㅎㅎ기방 소소루에 이뿐 기생이 오고


명나라 사신과 대행수가 만나요.명나라 사신이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대행수라니..예전에 자신이 빚진 사람이라며...대행수는 고수의 말을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가 평생 모은 돈을 고수에게 맡기지요


ㅎㅎㅎㅎ뭔가 또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한편.. 옥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요.포도청 대장이 몰래 오셔서 체탐인을 하겠냐는 제안을 생각하며..포도청 다모가 되는 것보다 체탐인이 되는 것이 엄마의 죽음을 알아내는데 더 빠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옥녀한참..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더니...결국엔 포도청에 가서 포도청 대장을 만나 체탐인이 되겠다고 말하네요.사흘씩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왔습니다.

그가 포도청에서 일을 하듯 옥녀도 원래 하던 일을 하면서 임무가 주어지면 그 때 하면 된다고 하네요.임무를 수행하려면 신분을 위장해야 한다고요..그러면서 여러 훈련을 배우기로 해요.문정왕후 친히.. 전광렬 찾아가시어.. 당신을 보는게 가슴이 아프다고...하면서..그 일을 해 달라고 하시네요.세월도 비껴갈 수 없다며.. 입을 떼네요..소인을 살려주신 것이 마마라는 것을 알고 많이 원망했습니다.

차마.. 내 입으로 참형하라고 명할수는 없었소.. 미안하오..전광렬아저씨는 내금위를 통해 자신의 뜻을 밝혔다고..둘이 예전에 무슨 관계가 있긴 있었나봐요..옥녀.. 체탐인이 되기 위해 훈련도 하고..마지막 관문이 남았는데.. 실전이었지요.하지만.. 옥녀.. 어떤 남자의 침소에 가서 그를 제거해야 하는 것 같은데..결국 잡혀서 맞고.. 물고문을 당해요..이런이런...여기서 좀 .. 어색어색..ㅎㅎㅎ그 사이 전광렬 아저씨는.. 내금위 종사관을 불러..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해요.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뜬 옥녀..마지막 관문을 통과한거였네요.눈을 뜨니 앞에, 그녀의 앞에 포도청 대장이 있었으니까요..ㅎㅎㅎ기뻐서였을까요.. 무엇때문이었을까요..우는.. 옥녀...그렇게 또 토요일 방송도 끝이 났어요.음. 오늘은. 사실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어요..이런... 역시.. 다른 분들도 고문장면에 조금 말도 있구..미니도 그랬지요..ㅎㅎㅎ 사람 마음은.. 눈은 똑같다니까요


어린 옥녀도 보고 싶구


고수도 조금 더 큰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구..원래 저만큼의 비중인건가요???오늘은 정난정에 대해서 공부 좀 하고 가요


정난정의 아버지는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 그리고 어머니는 관비출신이었어요.그래서 그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 싶어서 기생이 되어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에게 다가가서 그의 첩이 되지요.1545년 12세 어린 나이에 즉위한 명종.그 뒤에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정의 척족 윤임에게 왕위를 잇게하려한다고 무고를 했었다고 하네요.이로써 을사사화가 일어났지요.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반목으로 빚어진 권력다툼으로,대윤의 머리였던 윤임과 영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이 반역음모죄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하지요.1551년 결국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밀어내고 적처 자리에 앉아요.윤원형의 권세를 등에 지고, 상권을 장악하고 전매, 모리 행위를 해서 많은 부를 쌓지요.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으며 궁궐을 출입하다가1553년엔 마침내 정경부인이 된 정난정.(꿈은 이루어진다.

한다고 마음먹으니 저렇게 되네요..ㅎㅎㅎ)또한, 윤원형이 상소를 해서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는데,그 당시에는 신분제도를 뒤흔드는 큰 정책이었고, 신분제도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큰 힘을 받았었지요.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서 본래의 신분인 천인으로 강등이 되었지요.그후에도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윤원형과 같이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되었지요.윤원형의 처를 독살했다는 의심과, 사대부의 심한 공격을 받던 정난정은 독약을 먹고 스스로 독약을 먹었지요.이 후 조선의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으로... 여겼다고 하네요..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미니는 역사를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이지는 않는지라..뭐.. 이게 맞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요.누가 알겠어요??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서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지금 일어나는 일들도, 알면서도 묻히고 있는 사실들도, 아닌데도 버젓이 거짓으로 알려지는 일들도 있는걸요.그냥.. 그냥.. 그런가보다.

. 하고 받아들이지요.그래서.. 이글.. 보시고 이건 이게 맞네, 저건 저게 맞네.. 그러지 말아주세요.전.. 그냥.. 그렇다는 걸루 그렇게 쓰는거니까요..그리고,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로 보는 걸루








이 글은 지난주 5월 2번째주에 보고 쓴글인것 같아요


어젠.. 보고 마지막쯤엔 화가 났어요.체탐인으로  옥녀에게 일을 시키더니만..나중엔 전광렬아저씨를 죽인(물론 죽진 않았을것 같은데..당연히..) 사람으로 옥녀를 몰고가요..그리고 포도청 부장은... 옥녀에게 누가 뭐라해도 받아들이라고..그게 체탐인의 임무에 포함되는거라고..체탐인은 정치적으로도 이용된다고 하고..뭐.. 체탐인은.. 그냥.. 필요에 의해 쓰여지고..필요없으면 버려지는 존재네요..세상에.......그런 것이니.. 전광렬아저씨.. 옥녀와 헤어질때..돌아가거든 절대 체탐인은 하지 말라고 하네요

그런건.. 하지 말아야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그런 사람과는 아예 인연을 맺지 말아야해요!!!!나 행복한 일

나 좋은 일만 해도 부족하니까요




을사사화의 공으로 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되고 강음에 귀양가서 죽었다.

평범한 집안의 출신으로 부친은 판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이고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누이가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면서 권력의 실세로 떠올랐다.

누이 문정왕후의 후광으로 형성된 파벌 소윤(小尹)의 영수를 자임하며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史官)에 등용되었다.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소생인 세자(世子:仁宗)를 폐위하고,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慶原大君:明宗) 환(?)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모의를 꾸몄고 세자(인종)의 외숙인대윤(大尹)의 영수윤임(尹任)과 세력을 다투었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파직당하였으나 8개월만에 인종이 급사하고 열두살 어린나이의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면서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윤원형은대윤 일파를 역모죄로 모함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을사사화의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1546년(명종 1), 형 윤원로(尹元老)와 권세(權勢)를 다투어 유배하여 죽게하고, 조카마저 죽이려고 하였다.

 이듬해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을 계기로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1548년 이조판서, 1551년 우의정, 1558년 다시 우의정을 거쳐서, 1560년(명종 15)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지고, 1563년 영의정에 올랐다.

모든 관직은 매관매직되어 윤원형에게 뇌물을 바쳐야만 가능했고 뇌물을 받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가 축재한 뇌물을 쌓아 둘곳이 없어 집 앞에서 시장을 열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정난정(鄭蘭貞)이라는 첩을 얻어 조강지처(糟糠之妻) 김씨가 독살되게 하였고 또 다른 첩의 소생인 아들 두리손을 죽여 시체를 강물에 버리는 패륜을 저질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그의 권세는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조강지처 김씨가 독살되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탄핵되었고 명종은 그를 삭탈관직시켜 고향으로 낙향시켰다.

하지만 윤원형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상소가 쇄도하였고 백성들의 원성도 높았다.

윤원형은정난정과 외진 곳으로 도망을 가서 살았으나 얼마뒤 의금부도사가 잡으러 온다는 연락을 듣고정난정은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으며 윤원형은정난정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다 독약을 마시고 함께 자결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원형 [尹元衡] (두산백과)♣    ♣    ♣    ♣    ♣     ♣     ♣☆  정난정 [鄭蘭貞] '옥중화' - 박주미※  조선 중기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의 첩. 을사사화에 관여하였으며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호를 받았으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 사림의 탄핵을 받아 자결하였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부총관을 지낸 정윤겸(鄭允謙)이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관비(官婢) 출신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기생이 되어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었다.

1545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명종(明宗)을 대신하여 모후 문정왕후가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소윤(小尹)의 우두머리였던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명종과 문정왕후에게인종의 척족윤임(尹任)이 그의 조카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획책한다고 무고하였다.

이는인종의 외척인대윤(大尹)과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반목으로 빚어진 권력다툼으로,대윤의 우두머리인윤임과 영의정 유관(柳灌), 이조판서유인숙(柳仁淑) 등이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死賜)됨으로써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1551년(명종 6)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몰아내고 적처(嫡妻)가 되었다.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한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으며, 1553년(명종 8) 직첩(職帖)을 받아 마침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다.

또한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승려보우(普雨)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선종판사(禪宗判事)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선·교(禪敎) 양종이 부활되고 도첩제도(度牒制度)가 다시 실시되는 등 한때나마불교가 융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반대도 극심하였고 정난정의 후원자인 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승려보우는 제주도로 귀양가 사망하고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 본래 신분인 천인(賤人)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으나 윤원형의 적처였던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사건으로 점차 사대부의 공격이 심해지자 몸에 지니고 있던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이후 조선의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타락한 여성으로 묘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난정 [鄭蘭貞] (두산백과) 1985년 조선왕조 500년 풍란 에서의 김영란 님   이때까지만 해도 정난정 하면 떠오르는 배우는 김영란 님이었을듯... 3. 2001년 여인천하 에서의 어린 정난정 장수혜4. 2001년 여인천하 에서의 강수연 5. 2016년 옥중화 에서의 박주미=======================1989년도에 "천명" 이라는 일일사극이 있었는데...거기도 정난정이 등장하는건 알게 되었지만...배역정보를 찾을 수 없어 기재하지 않음...2013년 리메이크 된 "천명" 에서는 "정난정"을 등장시키지 않았음....[정난정]이라는 인물이 대단히 귀에 익었는데....생각보다 여러작품에 등장하지는 않앗음....그만큼 [여인천하]가 대단했던 건가? ㅋㅋ 정난정은 역사에 기록된 실존인물이며생년은 미상이고 몰년은 1565년(명종 20)이다.

정난정의 아버지 정윤겸(鄭允謙)은 부총관을 역임한 양반이었지만 어머니는 군영에 소속된 관비(官婢)였다.

정사에서는 그녀가 스스로 미천한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에게 접근, 그의 첩이 되었으며 윤원형의 정실 부인을 독살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 모리행위를 하기도한 요부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진술들의 진위 여부는 정확하지 않다.

역사는 항상 승자 위주의 기록이며 사회의 이념에 배치되는 행위를 한 자는 철저한 악인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정난정 역시 문종실록 등에 나오는관련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양반수의 증가를 막기 위해 신분이 다른 두 남녀 사이에서낳은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을 실시했는데, 난정은 이 법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천인(賤人)이 되었다.

정난정은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으며 심지어 물건처럼 매매되는 신세를 저주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자신을 따라 천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절망케 했다.

중국은 서얼을 그다지 차별하지 않는다는데 왜 조선만 유독 적서(嫡庶)를 구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조선은 오직 양반 적자(嫡子)만을 위한 나라였다.

난정은 양반 적자 출신인 윤원형이 이런 의식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했다고 한다.

윤원형은 또한 조선 사대부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불교를 신봉했다.

‘명종실록’은 윤원형이 ‘중에게 시주하고 부처에 비는가 하면 산에 제사를 지내고 불경을 외는 등 하지 않는 짓이 없었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그의 이런 불교 신봉은 독실한 불교도인 누이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게 되자 조선의 국시를 불교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책을 앞장서 수행한 남성이 승려 보우(普雨)라면 여성은 난정이었다.

난정과 문정왕후, 윤원형과 보우는 불교를 매개로 신분을 뛰어넘는 동지가 되었다.

문정왕후와 보우가 폐지되었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부활하고 승려들의 도첩제를 부활시키는 등 제도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국시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면 난정은 불사중창이나 불교행사 등 생활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연려실기술’에는 난정이 해마다 두세 차례씩 쌀 두어 섬의 밥을 지어 두모포(豆毛浦)에 가서 물고기에게 던져 준 사실을 전하고 있다.

난정의 깊은 불심은 대비 문정왕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정왕후는 명종 4년(1549)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그 첩의 소생은 다른 집 적자와 통혼할 수 있게 했다.

물론 그 첩은 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난정은 윤원형이 전 현감 김안수(金安遂)의 딸인 부인 김씨를 내쫓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윤원형은 난정을 부인으로 삼았으나 이는 조선의 국법이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기 넉 달 전인 명종 8년(1553) 3월 임금을 시켜 ‘윤원형의 첩에게 직첩(職牒)을 주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함으로써 난정은 합법적인 부인이 되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었으므로 그녀도 단숨에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된 것이다.

그녀의 자식들도 자연히 서출(庶出)의 굴레에서 벗어나 어엿한 적출(嫡出)이 되었다.

그러나 난정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의 자녀만 서출이란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다른 서출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저주하던 서출의 설움을 잊지 않았다.

명종 8년 10월 좌찬성 윤원형이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난정의 강한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고 해서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王者)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서얼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과감한 주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이조 판서 안현(安玹) 등은 반대했다.

그러나 윤원형은 다른 벼슬아치들과 합세해 끝내 서얼허통법을 통과시켰다.

난정은 천인들과 서출들이 주인들과 적출(嫡出)들에게 당하는 억울함을 충분히 체험했다.

전국 각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노비들이 그들 부부에게 몰려들었다.

‘명종실록’의 ‘(주인에게) 죄를 지은 노복(奴僕)들이 서로 이끌고 모여들어 그 수가 대단히 많다’는 기록은 이런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명종 18년 윤원형이 영의정이 되면서 난정도 외명부의 수장이 되었다.

관비(官婢) 소생의 천출 난정이 드디어 조선의 모든 벼슬아치 부인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부처님의 공덕으로 믿고 더욱 열심히 불교를 전파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난정을 저주하면서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명종 20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명종은 이양(李樑)을 중용해 윤원형을 견제했을 정도로 외삼촌 윤원형을 싫어했다.

명종은 대비 사망 후 경연에서 한나라 문제(文帝)가 외삼촌 박소(薄昭)를 죽인 사례를 언급했는데, 이는 윤원형을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명종 20년 8월 3일 대사헌 이탁(李鐸)과 대사간 박순(朴淳)이 윤원형을 탄핵하는 첫 포문을 열었다.

이들이 윤원형을 공격한 첫번째 사유가 ‘관비(官婢)의 소생을 올려서 부인으로 삼은 것’이었던 점은 난정에 대한 사대부의 반감의 크기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한달 후에 다시 첩으로 강등되었고 시골로 쫓겨난 윤원형을 따라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명종 20년 9월 윤원형의 전부인 김씨의 계모 강씨가 난정이 김씨를 독살했다고 고소했다.

난정이 전부인 김씨의 몸종 구슬이를 시켜 음식 속에 독약을 넣어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고소장을 접수한 형조에서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자신들이 처리할 수 없다며 역모 등 체제사건을 다루는 의금부로 이첩했다.

의금부는 구슬이는 물론 10여 명의 여성들을 소환해 문초했는데 짜맞춘 구도대로 진술하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명종실록’ 10월 22일자의 ‘전일 형문한 사람은 모두 죽고 단지 주거리(注巨里·정난정의 여종)만 남았다’는 위관의 보고는 이런 사정을 잘 말해준다.

이는 그녀들이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했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관련자들이 모두 죽자 의금부는 난정을 잡아다 심문하자고 청했다.

의금부가 원하는 것은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 난정의 목숨이었다.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에 풀이 돋기도 전에 어머니의 동기를 내쫓고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마저 장하(杖下)의 귀신으로 만들기는 너무 빠르다는 생각에서 일단 거부했다.

난정은 자신의 부인첩을 거두라는 주장을 한 달 동안 거부하는 체 하다가 윤허한 것처럼 이번에도 종국에는 허락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끌려가면 장하(杖下)의 귀신이 되리라고 직감한 그녀는 사대부들의 조롱 속에서 신음하지는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녀는 명종 20년(1565) 11월 3일 ‘금부도사가 온다’는 종의 말을 듣고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음만 못하다’며 자결했다.

난정이 죽자 그녀를 가슴 깊이 사랑했던 윤원형도 뒤를 따라 음독자살했다.

그녀는 죽은 후 다시 천인으로 환원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녀를 성리학과 강상(綱常)을 어지럽힌 만고의 죄인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악정(惡政)의 배후에 항상 악녀(惡女)가 있는 것으로 그렸다.

연산군에게 장녹수가 있고, 광해군에게 개시가 있는 것이 그런 예이다.

명종이 즉위한 1545년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배후에 난정이 있었던 것처럼 전하는 것도 이런 유형이다.

‘을사사화’는 왕실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간의 대립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윤원형이 윤임 일파를 역모죄로 무고함으로써 사림 등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이다.

하지만 ‘윤원형 삭탈 명령서’를 살펴보면, 난정이 대비의 와병 때 문병한 것을 비난하는 대목은 있어도 을사사화 관련 내용은 없다.

또한 을사사화 희생자들을 신원(伸寃)하는 명령서에도 그녀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은 없다.

이는 윤원형이 나쁜 것은 난정 때문이란 등식을 만들어 악정의 배후에는 악녀가 있다는 전형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정리하면 정난정이 살아가던 조선 시대에서 그녀의 앞서가는 행동은 지배층의 이익에 위배된다는 측면에서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다.

축첩제는 유지하고 싶고 양반 수는 더 이상 늘어나면 특권이 줄어들게 되니 첩의 자식들은 차별하는 정책을 입안한 양반층의 비뚤어진 이중의식에 항거했던 그녀는 사대부를 유린한 희대의 악녀로 전락해 버렸다.

집권욕에 불탔던 문정왕후에 대한 기록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아들이라 하더라도 명백한 군주인왕께 감히 매질을하며 권력에 눈이 먼방자한 왕후로 그녀를 묘사한 것에서도 남성 양반에게 도전하는 여성들에 대한 지배층의 부정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복아들인 인종이 등극하자 자연히 문정왕후와 명종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고 왕위 보전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은 숙청해버리던 시대에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왕후는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그 역시 지배층인 남성 양반의 입장에서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불만을 품고 하루빨리 스스로 정치를 하길 원했던 명종이 외척을 견제하는 과정 속에서 정난정은 정실부인을 독살했다는 사실 여부가 분명치 않은 혐의를 받고요부로매도되고문정왕후 역시 정치에 욕심을 버리지 못한 안하무인의 여인으로 그려진 것이다.

정난정과 문정왕후 등을 무조건적으로 악녀로만 묘사하는 것은 지배층의 논리일 뿐이다.

물론 비판받아야 할 것은 비판받아야겠지만 그녀들이 그런 선택을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도 그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이다.

승자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반대편의 입장도 고려하여 객관적인 자세로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후손인 우리들에게 요구된다고 하겠다.

출처 : http://blog.empas.com/episode00/15812718, 조선닷컴‘1억퀴즈쇼’ 사극 여주인공 순서…대장금 정난정 장희빈 명성황후보기로 1번 장희빈, 2번 대장금, 3번 명성황후, 4번 정난정이 나왔다.

2000만원이 걸린 전화 연결에서 3명의 도전자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정답은 2번 대장금, 4번 정난정, 1번 장희빈, 3번 명성황후순이었다.

...1억퀴즈쇼 조선시대 사극 여주인공 순서, 대장금 정난정 장희빈 명성황후보기로 1번 장희빈, 2번 대장금, 3번 명성황후, 4번 정난정이 나왔다.

2000만원이 걸린 전화 연결에서 3명의 도전자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정답은 2번 대장금, 4번 정난정, 1번 장희빈, 3번 명성황후순이었다.

한편,...[천지시론] 정치·사회·종교 쇄신과 변화만이 살 길운명에 맞서 처절하게 살다간 정난정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작품을 드라마로 엮은 것이다.

윤원형의 첩으로 들어와 정경부인의 자리까지 오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여인 정난정이다.

동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그는 1948년에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해 월북했으나 남하하지 못하고 거기서 살다가 죽었다.

제1권이 봉단편으로 뜬금없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홍문관 교리 이장곤이다.

홍명희는 이장곤과 임꺽정을 교묘하게 연결시킨다.

따라가 보자.  이장곤은 연산군이 죽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하려 드는 것을 말리다가 그의 눈 밖에 나서 거제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거기서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몰래 탈출을 해 무작정 북쪽으로 도망친다.

함경도 땅을 밟은 뒤 안변, 덕원, 문천, 고원을 무사히 지나 영흥에 도착하게 된다.

빌어먹어 가며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함흥이었다.

  때는 여름이라 목이 타는데 마침 길 저쪽 편에서 포졸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이장곤은 덜컥 겁이나 소로를 통해 무조건 달렸다.

한참 달린 끝에 어느 시냇가에 도착했는데, 가까운 버드나무 아래서 웬 처녀가 빨래를 하는 것이 보였다.

이 처녀 이름이 봉단으로 1권의 제목인 것이다.

이장곤이 물 한 모금을 부탁하자 그녀는 버들가지 잎사귀를 따서 물바가지에 띄워서 건네주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고려 태조 왕건이 첫 번째 부인을 만날 때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아마 홍명희가 응용한 것 같다.

어쨌든 이장곤은 조심스럽게 물을 마시고 나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어느 재상가의 딸 못지않게 달덩이 같이 복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장곤은 이 처녀, 다시 말해 봉단의 집에 며칠 신세를 지다가 나중에는 얹혀살게 되고 궁극적으로 봉단에게 장가를 든다.

봉단의 아버지는 백정이므로 천민의 딸에게 장가를 든 것이다.

연산군에게 쫓기고 있는 이장곤이었으니 백정의 사위로 지내는 것이 오히려 숨어 지내는데 유리했다.

일을 못한다고 장모의 갖은 구박을 받지만 이장곤은 봉단이 만큼은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이장곤은 복직이 되어 서울로 돌아간다.

서울로 돌아가서도 천한 태생의 아내를 잊지 않고 불러들인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갸륵하게 여겨 이장곤에게 천한 아내를 내치치 마라고 하며 면천을 하게 해준다.

봉단은 남편 덕분에 면천이 되었고 더불어 가족들도 모두 면천을 하게 된다.

나중에 봉단은 정경부인에 까지 이른다.

여기까지는 모두 역사적인 사실이다.

물론 봉단이라는 이름은 작가가 지어낸 것이고 전체적인 스토리에 약간의 차이점이 있을 수 있으나 조선 중기 홍문관 교리 이장곤에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야말로 의리의 남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홍명희는 여기에 임꺽정을 교묘하게 갖다 붙인다.

지금부터는 홍명희가 허구로 꾸며낸 임꺽정의 탄생 이야기가 된다.

  사실 이장곤을 봉단이하고 결혼하게 중매를 선 사람은 봉단 아버지의 동생, 즉 봉단의 삼촌인 양주팔이다.

갖바치인 그는 천인이지만 똑똑하여 나중에는 임꺽정의 스승이 되고 또 도인이 된다.

그가 이장곤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조카와 결혼을 시킨 것이다.

한편 이장곤을 구박하는 장모가 임씨이고, 이 임씨의 조카가 임돌이다.

임돌은 봉단과 외사촌 남매 사이가 된다.

따라서 이장곤과는 처남매부 사이가 되는 셈이다.

물론 허구로 그렇다는 것이다.

임돌은 갖바치의 주선으로 양주에 사는 백정의 데릴사위가 되어 거기서 정착한다.

여기서 나온 아들이 그 유명한 임꺽정이다.

홍명희는 실존 인물인 이장곤과 그의 천민 아내에다 교묘하게 살을 갖다 붙여 생생한 역사적인 인물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임꺽정은 실존 인물 이기는 하지만 개인 적인 역사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냥 이름만 남아 있는데, 홍명희가 세세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여기까지 다시 정리하면 이장곤과 이장곤의 아내 이야기만 진실이다.

그런데 이장곤의 아내가 정경부인까지 오른 것을 보면 천민 출신이지만 몸가짐이 정숙했고 또 현숙했던 모양이다.

  묘하게도 이 시대에 또 한명의 천한 출신으로서 정경부인까지 오른 유명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정난정이다.

그녀는 이장곤의 아내와 반대로 악독한 여자로 유명하다.

중중반정에 무관으로 참여한 후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의 첩실 소생으로 태어난 정난정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신분에 대한 반감을 품고서 자랐고 또 여기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야심으로 가득 찼다.

중종이 죽고 장남 인종이 물려받았으나 일 년도 못 채우고 죽게 되자 그의 이복동생인 명종이 왕위를 잇는다.

명종의 어머니가 악녀로 소문이 난 문정왕후이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눈에 들었으니 악녀와 악녀가 기가 막히게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정왕후의 동생이 세도를 누려 조선 중기 정치를 어지럽힌 윤원형이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첩의 자리로 있으면서 윤원형의 정실부인 김씨를 몰래 독살시킨다.

그리고는 승승장구하면서 온갖 부귀와 권세를 누린다.

하지만 나라는 엉망진창이 되어 간다.

이 때문에 임꺽정과 같은 도둑들이 설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권불십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되자 정난정의 부귀와 권세도 끝나고 만다.

결국 김씨 부인을 독살한 것이 탄로가 나서 남편과 함께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이장곤의 아내도 정경부인이고 정난정도 정경부인인데 둘 다 묘하게 임꺽정과 연결되어 있다.

이장곤의 아내는 홍명희가 소설에서 임꺽정과 엮어 버렸고 정난정은 그녀와 남편과 문정왕후가 정치를 어지럽힘으로 해서 임꺽정을 나오게 만들어 버렸다.

시대는 이장곤이 약간 앞서고 뒤따라 정난정과 임꺽정으로 이어진다.

<조열태 씀. 역사소설 ‘진주성 비가’ 작가> *** 제가 쓴 소설 ‘노량에 지다’가 출간되어 2015년 5월19일부터 판매가 시작됩니다.

사실 마음먹기에 따라 노량 해전은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이었습니다.

왜 이순신 장군이 끝까지 싸움을 고집하다가 목숨까지 잃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해 추리 형식으로 썼습니다.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항상 번창을 기원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그녀는 자신이 노비라는 신분의 굴레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타고난 미모를 통해 이를 극복하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미모를 밑바탕으로 삼고 희대의 걸출한 양반출신의 윤원형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문정왕후와 남편 윤원형의 부와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펴나갈 수가 있었다.

나아가 남편 윤원형과 시누이의 문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잘 보필하였고 불교의 진흥을 위하여 보우대사를 막후 지원하였고 신분제 사회의 타파를 시도하여 강고한 유교 사회에 일대 변혁을 꾀하였던 여인이었다.

?당시 조선의 유학자들은 중국보다 골수까지 성리학의 유학에 물들어 집착하였으며 사대명문에 빠져 있으면서도 종주국인 중국에도 없는 적서간 차별을 두는 노비제도라는 신분제도를 고수하였다.

결국 적자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맞서 싸우는 정난정의 이러한 도전에 반발하여 그녀를 희대의 요녀이자 탕녀로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노비출신으로 천첩에 불과한 그녀가 남편인 윤원형의 권세에 기대 본부인을 독살하고 정실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을사사화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는 그녀를 맹비난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희대의 악녀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던 여인으로 역사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정난정과 윤원형의 출생과 가계 정난정(鄭蘭貞)은 조선 명종 때 윤원형의 애첩으로 아버지는 초계정씨(草溪鄭氏)로서 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던 양반출신의 정윤겸(鄭允謙, 1463

1536)으로 무관이었다.

정난정은 아버지가 당당한 무반이었으나 어머니는 군영에 소속되었던 관비 출신이다가 보니 당연히 종모법에 따라 태어나 천민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조선은 양반만의 권력을 갖기 위하여 양반수의 증가를 막도록 신분제의 사회를 고수하였기때문에, 정난정은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쳐 그녀의 꿈은 높았고 넘쳐났으나 자신의 갈 길은 종모법에 의하여 어머니가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걸어서 천역으로 살아야만 하는 길이 이미 정하여져 있는 외길 수순이었다.

 아버지는 엄연한 양반신분임에도 어머니가 천민이었으니 이로 인하여 천민이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의 피붙이들에게 까지도 이어져 대대손손 노비생활을 잇게 해야 하는 숙명이었다.

노비는 소 돼지와 같은 물건과 같이 사고 팔리는 가축과 다를 바가 없는 물건이었다.

노비이던 자신의 기구한 팔자가 원망스럽다 못하여 절망스러웠으며 저주스럽기까지 하였을 것이다.

?당시 동북아 국가들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전쟁 포로나 죄지은 당사자 자신만은 노비가 되도록 하였으나 자손에게까지 굴레를 씌워 대를 이어 가면서 노비로 삼지는 않았다.

오직 조선만이 적자인 양반만이 권력을 쥐는 가장 심한 신분제사회를 고수하였다.

 조선은 적자와 양반만을 위한 나라였다고 할 수가 있다.

양반만의 신분사회 절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서얼차대법(庶孼差代法)이란 장치로 얽어매어서 신분의 차별을 두었다.

당초 서얼차대법은 태종 이방원이 자신과 자식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등장하였는데, 서얼은 정처의 자식과는 달리 관직진출이 원칙적으로 금지당하고, 재산상속과 가족 내의 위치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허균(許筠)이 지은 소설인〈홍길동전〉에서도 홍길동이 양반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호부호형(呼父呼兄)조차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서얼차별은 중국에도 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차별적 제도이다.

다른 것은 중국 것이라면 다 따르면서도 양반만의 특권을 유지키 위하여 종부법을 따르지 않고 종모법을 따르면서도 부모 중 한편이 천민이면 천민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이 ‘서얼차대법’ 을 시행하였던 이유는 조선사회가 양반층을 지배계급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를 보다 철저히 강화·유지해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같은 지배층인 사족(士族) 혈통이지만 어머니가 첩이거나, 양인이 아닌 천인출신일 경우에는 더 큰 차별 대우를 받았다.

즉 “재가(再嫁) 하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의 자손과 서얼자손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성리학을 지향한 조선사회에서는 만약 여인들이 조금이라도 큰 목소리를 낼라 치면 여지없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면서 이들을 악녀와 요녀로서 몰아붙이는 사회였다.

남성우위 사회유지를 위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부부유별(夫婦有別). 여필종부(女必從夫), 개가금지법(改嫁禁止法) 등과 같은 제도를 실시하면서, 이러한 전 근대적인 사회의 차별로 인해 유능한 인재들이 사장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사족들의 지배력만 높여서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는 덕목을 멀리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발전을 더디게 만든 폐단이 되었다고 지적을 받는다.

 조선사회에서 양반들은 자신은 물론 자신들이 부리는 노비들까지도 세금과 국방의 의무는 지지 않도록 하고 오직 평민들만이 세금과 국방의 의무를 지도록 하는 사회였다.

즉 양반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서 사회연대 의식을 약하게 만들어서 국가는 수탈의 도구에 불과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평민과 노비에게 ‘나라가 멸망하여 외적에 점령당해도 다른 수탈하는 대상의 교체에 다름에 아니다’ 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로마가 번성하였던 것도 귀족들만이 국방의 의무를 져서 전쟁에 참여하여 지켰다.

노비나 평민에게는 국방의 의무를 맡기지 않고 손수 나라를 지켰다.

후기에 국방의 의무를 게르만 용병에게 맡기면서 로마 멸망은 예고 되었는데 조선의 양반은 아예 이 두 가지 의무 중 어느 하나도 떠맡지 않고서 단지 백성위에 군림하려고만 하였다.

 조선의 노비제도가 종부법에서 후기에는 종모법을 따르면서도 부모의 한쪽이 노비이면 노비로 만드는 제도야말로 자신들이 부리는 노비를 늘리기 위한 제도에 다름아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후기에 사회공동체의 유대인식의 해이를 불러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불렀다고 지적하는 것도 일응 일리가 있다.

 이러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재기있는 정난정 그녀가 신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냥 정상적인 신분제 사회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설 수가 없다면 남의 힘에 의지하여서라도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서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고심 끝에 그는 자신이 남보다 뛰어난 미모를 이용하여서 권세 있는 남자를 사로잡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음에 그의 권력에 의지하여 자신의 뜻한바 대로 자신의 꿈을 펼쳐서 뜻을 이루어 살다가 간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이던 정윤겸(1463-1536, 鄭允謙) 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정윤겸은 아버지 정온과 어머니 원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지 첫돌도 안되어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도 양반사대부와 같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앉자 후에 뜻을 바꿔 무과공부를 하였다.

?성종 23년인 1492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에 보직을 받아 참군으로 승진하였고, 이후에는 사헌부의 감찰, 군기시 주부, 사복시 판관을 거쳤고. 중종 1년이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서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에 3등에 녹훈이 되고,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이 되었다.

 이듬해 공신에게 특별히 품계를 받아서 통정대부로 당상관에 올랐으며, 간성군수에 임명되었고, 4년 뒤 웅천부사로 옮겨 삼포왜란 이후의 민심수습과 복구에 힘썼다.

1519년에는 회령부사로 복무하였고 청계군(淸溪君)에 봉하여진다.

?정윤겸은 1523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근무하였는데, 명나라에서 약탈하고 돌아가는 왜구를 소탕해 임금에게 궁시(弓矢)와 의대(衣帶)를 하사받기도 하였고, 명나라로부터 백금을 하사받았다.

1524년에 훈련원 도정이 되었고 1526년에는 훈련원 도정의 신분으로 성절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는 오위도총부의 정2품 무관 부총관이 되었다.

 그에 관한 기사는 중종 재위 당시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강직한 성격으로서 매우 책임감이 강하였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1528년에는 당시 병사로 근무하였는데 당시 정윤겸의 부하로 만포첨사이던 심사손(沈思遜)이 야인의 급습을 받아 죽었고 이로 인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 가을에 방면돼 돌아왔으며 다음 해에는 서용되어서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1530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연좌로 인해 횡성에 유배되었다가 겨울에 풀려난다.

1532년 부총관이 되고 1535년에 영해부사가 되었다가 1536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서울에 올라가 치료를 받다 죽는데 향년 74세였다.

《중종실록》중종 31년 6월 12일자의 기사를 보면 정윤겸의 ‘졸기’ 가 나오는데,  청계군 정윤겸이 졸했다.

윤겸은 굳세고 날램이 남보다 뛰어나서 적진에 임해서는 분기(용맹)하였으므로 공적이 많았다.

또한 성품이 검소해 사치를 일삼지 않았고, 청렴결백을 좋아한 사람이었다.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윤겸은 죽어서 강원도 원주시 격동산에 묻히었다.

그의 묘는 원주시 호저면에 부인 원주이씨와 함께 묻혀 있다.

첫 부인으로부터 아들 정숙(鄭淑)을 두는데 당진현감을 하였고, 둘째 부인이 1남 삼녀를 두었다.

그에 대해 《국조보감》에서도 ‘활동해도 공로를 말하지 않고 많은 것을 쌓아두고도 청렴을 취했도다’ 하여 좋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윤원형(尹元衡)은 경기도 파주군에서 파평윤씨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 전의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사이에서 네 아들 중 막내인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문하시중 윤관의 15대손이다.

아버지인 윤지임은 인품이 온화하고 공손했으며 평소 비단옷을 입지 않았을 정도로 검소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형인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윤원로가 있고, 손 윗누이로 두 명을 두었는데 둘째 누이가 바로 문정왕후이다.

?윤원형은 중종 23년인 152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둘째누이가 중종의 계비로 들어가서 왕후가 된 뒤, 중종 28년인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후 누이가 왕비로 책봉된 것을 발판으로 사관으로 관직을 시작해 1538년에 교리로 시독관을 겸직하고 사헌부지평, 홍문관 응교 등을 지내는 등 청요직을 거치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윤원형은 관직에 처음 진출하였을 때는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는 홍문관에서 젊은 관원들을 대상으로 치러진 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촉망을 받았으며, 대인관계 역시 원만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기묘사화에서 살아남은 정순붕, 정언각 등의 사림파 선비들과도 교분을 나누었고 후에는 이들과 을사사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있던 부서에서 근무하는 아전들의 관례적인 향응에도 응하지 않고 꾸짖어서 쫓아내기도 하는 등 청렴결백한 이미지를 쌓아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는 조카가 인종의 후궁인 숙빈 윤씨가 되고, 그리고 후에는 누이 문정왕후의 아들이던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면서 왕의 외삼촌인 외척이 되어서 막강한 권력을 잡아 휘둘러서 윤임, 김안로, 이량, 심통원 등과 함께 당시 대표적인 인척세력으로 꼽히게 된다.

?윤원형은 처음 현감이었던 김안수(金安遂)의 딸 연안김씨와 혼인해 연안김씨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는데 정적 김안로(金安老)당질녀이다.

그러나 난정을 알게 되면서 난정을 첩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후에 윤형원은 연안김씨를 내좇아 버리고 난정을 정실부인으로 맞았다.

 윤원형과 난정은 이후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의 권력에 의지하여 함께 불교부흥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아 ‘서얼허통법’ 실시를 추진하기도 하다가 조선 사대부의 반발에 따라 자결로 생을 마감하였다.

물론 이러한 생존 과정에서 당시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부정축재 등으로 많은 비난을 초래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생존 당시에도 난정의 친척인 초계정씨 항재(恒齋) 정종영(鄭宗榮)같은 인물은 서녀 누이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 이르는 길을 좁고 굽도록 하여 가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관리를 하였다는 이야기까지도 전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선조 22년인 1589년 8월 1일 1번째기사인「판중추부사로 치사한 정종영의 졸기」에 의하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한 정종영(鄭宗榮)이 졸하였다.

종영의 자는 인길(仁吉)이다.

도량이 넓고 굳세었으며 삼가고 부지런한 자세로 공사(公事)에 힘을 다하여 세 조정에 두루 벼슬하였다.

명종 초기에 윤원형(尹元衡)의 첩 정난정(鄭蘭貞)은 바로 종영의 서고모(庶姑母)였다.

원형이 상변(上變)하여 옥사를 일으킬 적에 논의에 참여하도록 넌지시 일깨워주었으나 종영은 거짓 모르는 체하고 응하지 않았다.

난정이 참람하게 정실(正室)이 되어 부인(夫人)에 봉해져서 외명부(外命婦)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자 사람들이 감히 항변하지 못하였으나 종영은 오히려 얼척(孼戚)으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원형이 크게 유감을 품어 매양 죄를 얽어 해치려 하였다.

난정의 어머니가 난정을 경계하기를,?“너는 종손을 해치지 말라. 내가 맹세코 죽음으로써 당하겠다.

” 면서 내가 죽어서 청계군(정윤겸)을 어떻게 보겠느냐 면서 만류하여, 화를 면하게 되고 4대에 걸쳐 벼슬하였으며 6조판서를 차례로 연임하는 등 현달(顯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정종영이 1562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할 때였는데 인종의 태봉이 있던 산에서 중들이 문정왕후의 명을 받들어 벌채를 하였는데 이들을 잡아 가두고 엄벌하자 문정왕후가 노하여 처벌하려 하였다.

이에 성균관 유생과 삼사가 들고 일어나서 처벌을 면하였다.

 그러면 우선 정난정과 윤원형이 만나게 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윤원형의 누이이던 문정왕후가 어떻게 중종의 왕비가 되었는지, 이러한 계기를 만들어 준 중종의 반정과정과 중종과 문정왕후, 윤원형과 난정의 만남의 과정 등을 살펴본다.

먼저 중종의 반정과정을 살펴보자.   중종의 반정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연산군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중종반정이 일어났는데, 사실 중종(中宗)은 반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중종반정은 이조팜판 성희안,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에 의한 주도로 일어났다.

성희안(成希顔)은 연산군과 함께 서울의 서대문구 망원동에서 열린 시회에 참석하였다가 연산군의 방탕과 폭정에 대하여 풍자하고 훈계하는 시를 지었다.

?그러나 이것이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데 되면서 종9품 말단직 ‘부사용’으로 강등을 하게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이를 억울하게 생각하여서 반정을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반정의 시작은 성희안이 연산군에게 원한관계에 있는 박원종에게 접근 하는데 박원종(朴元宗)은 성종의 형이던 월산대군의 부인이던 박씨의 남동생이었다.

 박원종의 누이이던 박씨는 연산군의 큰 어머니로서 어린 연산군을 키워서 길렀다.

그런데 연산군이 자신의 아들을 키워달라면서 큰 어머니인 박씨를 궁으로 불러들이고는 겁탈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이 거듭되자, 박씨부인은 수치스러워 하다가 이를 참지 못하고 자결하였는데, 죽기 전에 동생 박원종에게 유언을 남겨서 원수를 갚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성희안이 반정을 제의하자 폐출할 것을 밀약하고, 이들은 이조판서인 유순정을 참여시켜 반정을 일으키는 데 이들을 일러서 삼대장이라 통칭한다.

 ?유순정 초상화?당시 용산에 있던 제천정과 한강하류의 망원정(효령대군이 지은 정자)은 연산군이 향락을 많이 즐기던 장소로 이곳은 중국사신들에게 인기 높은 장소였다.

제천정에서 정자선(亭子船) 형태의 배를 띄워서 한강을 유람하는 것이 당시 사신들이나 사대부들이 즐기던 유람의 하나였다.

?연산군은 망원정에 관심이 깊어서 사냥을 위하여 망원정, 성산포, 연희궁 길을 폐쇄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이곳에 이르기 쉽도록 길 부근의 인가를 철거하게 하여서 숭례문에서 망원정까지 말 10마리가 나란히 걸을 수 있도록 하고 망원정 이남 100리 이내에 금표를 세워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막았고 망원정 일대를 넓혀 2천여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여 원망을 샀다.

 반정세력은 우선 삼정승이던 영의정 유순, 좌의정 신수근, 우의정 김수동에게 반정거사에 참여할 것인지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에 유순과 김수동 두 사람은 즉각 찬동을 하였다.

그리고 신수근을 찾아 이를 물었다.

당시에 신수근의 누이는 연산군의 부인이면서 딸은 진성대군(훗날에 중종으로 즉위한다)의 부인이었다.

반정세력이 “누이를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딸을 택하겠습니까?” 라고 양자택일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수근(愼守勤)의 입장에서 누이는 현재 왕의 부인이고, 딸은 반정군의 부인이니 굳이 반정에 참가하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고, 누이나 딸 어느 한편을 택헤 지지하기도 어려운 난처한 입장이었다, 신수근은 이에 “매부를 폐하고서 사위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

세자가 총명하다” 면서 거절한다.

 이에 반정세력은 신수근에게 거사의사를 밝혔으니 누설될 것이 두려워서 예정일에 비해 서둘러 창덕궁에 진을 치고 밤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거사를 결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군사력은 군자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영문, 형조정랑 장정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참여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중종은 왕으로 추대되던 날도 자신이 왕으로 추대된 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왕위를 올랐다고 전한다.

중종은 즉위하던 날 집밖이 소란하여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군사들이 집을 에워싸자 큰 일이 일어나서 죽음이라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었다.

형벌을 받느니 차라리 자결하려 하였다.

 이에, 부인 신씨가 밖을 에워싸고 있는 군사들이 자신의 집을 뒤로 하고 호위하는 자세를 취한 것을 알아보고 “죽더라도 웬일인지 알아나 보고 죽으시죠.” 하여 이를 확인하고서야 자신을 추대하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중중은 이로 인하여 집권초기에 반정을 자신이 주도하지 못하여서 모든 결정은 공신들의 의도대로 이루어지다 보니 왕권은 미약하여서 반정세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입장으로 지냈다.

 신수근이 반대하자 반정군은 서둘러 반정을 일으켜 신수근과 신수영 형제, 임사홍을 죽이고는 진성대군을 1506년 9월 4일 중종으로 추대하였으니 이를 일러서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종 역시 중종반정으로 즉위하였으나 사실 그는 반정 모의과정에서 반정의 주도자들로부터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반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반정 후에 19세의 나이로 반정 주도세력에 의하여 추대되어서 하늘에서 떨어진 왕위를 공짜로 주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는 반정 후에도 반정공신들에게 큰 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모든 결정에 있어서 공신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라야 하였다.

그가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세월이 흘러서 반정공신들인 박원종 등이 죽으면서 자기 소리를 낼 수가 있었고 개혁인물이던 조광조(趙光祖) 등을 등용하면서 가능할 수가 있었다.

 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세력 유순 및 박원종 등은 다음날 아침에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서 자순대비에게 반정을 승인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자순대비는 진성대군의 친 어머니이면서도 중종의 즉위를 반대하였다.

진성대군은 이와 같이 반정세력뿐만 아니라 친 어머니에게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당시 자순대비는 “진성이 어떻게 이런 중임을 감당할 수 있으리오.?지금 세자가 총명하니 경등은 그를 세우고 잘 보필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시오.” 라면서 자신의 친자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고 연산군의 아들인 세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을 말할 정도로 친어머니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영의정 유순이 강청하여 승인을 받았고 유순과 강흠 등이 진성대군의 사저로 가서 궐내에 모셔와 근정전에서 19세에 즉위하고 신씨도 왕비로 책봉이 되었으나 신씨는 반정 후에 반정세력이 왕비로 되는 것에 반대하여 7일만에 폐비가 되었다.

?이는 당시 반정군은 거사에 반대하였던 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을 남대문 근처에 있던 수각교에서 철퇴로 때려 죽이고는 이의 후환이 두려워 역적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면서 중종을 압박하자 중종은 기세등등한 반정군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중종은 신씨를 사랑하면서도 폐비할 수밖에 없었다.

  중종 당시의 정치상황 그러면 중종이 즉위할 당시의 정치상황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중종은 집권할 때 중종반정에 공헌도 없이 반정공신들의 등에 떠밀려 등극하였기 때문에 중종은 실권을 거의 갖지 못해 무슨 일을 추진하고자 하면 공신들의 저지와 수많은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중종은 집권하자 기존에 3포의 왜관에게 외교적 특권으로 면세 등의 혜택을 박탈하고 거주왜인을 60명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일본 왜선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법규를 엄격히 적용하자 1510년 4월에는 삼포에서 갑옷과 칼로 무장한 5천명의 왜군이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지원을 받아 민가를 약탈하면서 폭동을 일으키니 삼포왜란(三浦倭亂)이다.

왜인은 초기 일시적으로 제포와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을 공격하면서 경상도 해안일대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난으로 민간인 270명이 죽고 민가 796채가 불에 탔다.

이에 조선은 이 난후에 일본과 통교를 중단시킨다.

그러나 일본막부가 간청해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해 쓰시마가 파견하던 세견선(歲遣船)과 조선정부가 하사하던 세사미두(歲賜米豆)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제포 하나만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갑산·창성 등지에서 야인들이 침입해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자 조정은 여연·자성·무창 등 4군에 거주하는 야인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에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고, 의주산성을 수축해 북방방어에 진력하였다.

?1522년에 동래(東萊) 염장(鹽場)에서 왜변이 일어나고, 1524년에는 압록강 유역에서 야인을 적극적으로 몰아내는 등 외인의 침입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종은 병조와 대신이외에 변방의 장수들을 합좌하는 비변사를 설치하면서 비변사는 점차 정치적인 성격으로 변모해간다.

 중종 반정이후의 권력구조는 박원종·류순정·성희안·유순·김수동·송일 등 반정공신이 중종 8년이던 1513년까지 의정부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해 나갔으나 이 가운데 박원종·유순정·성희안이 삼공신으로 정국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중종 5년인 1510년 박원종, 중종 7년에는 유순정, 그리고 중종 8년에 성희안이 각각 사망하면서 종신중심체제가 점차 약화되자 훈구파 공신들의 힘이 빠지면서 1515년에는 사림파인 조광조를 조정에 등용되자 신진기예의 사람들이 현량과를 통하여 대거 등용되었고 이들은 주로 삼사의 언관직에 진출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며 표방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즉 경연의 활성화를 추진하고는 소격서를 폐지하도록 하였으며, 향약을 실시하는 한편, 《소학》의 보급 등을 추진하면서 철저한 유교정치를 펴나가게 됨에 따라서 공신세력을 견제하여 나갈 수 있었다.

이 후에는 의정부와 육조계통은 비공신계의 훈구계로 언관계통은 사리중심으로 정계의 구성이 바뀌었다.

?이렇게 사림세력의 성장이 가능하였던 것은 김광필, 정여창 등의 지속적인 교육활동과 훈구대신이었던 정광필·안당과 같은 사람에 의한 등용이 있었으나 가장 큰 원인은 중종이 왕권강화를 강화하려는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도학적인 정치이념을 내세워서 지나치게 과격하고도 급진적으로 추진하다기 보니 훈구파의 반발을 일으키고 나아가 이를 추진하는 중종까지도 염증을 일으켜서는 역풍을 일으킨다.

우선 향약은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도정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를 행하는 방법으로서는 자치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기본이어야 하나 신진 사람세력들에 의하여 강제로 추진되어서 반발이 끊이지 않았고, 이들이 주장하는 현량과(賢良科) 역시 과거를 폐지하기를 주장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조광조를 주종하는 신진 사람파들 위주로 등용되는 등 그 선발의 기준이 일정하지 못하였다.

현량과로 추천된 120명 가운데 28명을 선발하였는데 이 중에 21명이 기호지방출신이었다.

그리고 기존에 있었던 소격서를 폐지시키는 등 강제로 실시하다가 보니 반발이 거세었다.

 그런데 조광조 등은 1519년 중종반정 당시 공신으로 책록된 117명의 인사 중에서 75%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제하는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물론 중종반정의 공신들은 이전의 책봉에 비하여 인원수가 과다하게 많았고 그 대부분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위훈삭제는 이미 주어버린 상훈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조치이다 보니, 이는 남에게 준 떡을 다시 빼앗는 격으라서 반발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지사’ 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훈구 공신세력의 공신 칭호박탈에 머물지 않고 반정으로 신료들에 의하여 추대된 중종 자신의 왕위의 정당성마저도 부정하는 의미까지도 갖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중종 자신도 중종반정에 전혀 기여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조광조 초상화?중종은 사사건건 원칙을 내세우며 주장하는 사람파에 염증을 일으켜 급기야는 조광조 일파를 몰아 낼 계획을 내세워 중종은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신진사람들을 숙정하게 되는데 이를 일러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중종은 위훈삭제된 4일 후인 1519년 11월 15일밤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와 남곤, 심정 등을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통하여 몰래 불러들여서는 이들에게 밀지를 전달하였는데,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艸爲王)’ 이라고 꿀로 글자를 써 갉아먹게 한 다음 역모를 꾀한다고 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다.

?중종은 핵심인물로 사람파 8명을 거론하면서 이들을 체포하여 죄상을 밝히라고 의금부에 명령하는데 죄명이 붕당과 지나치게 격렬한 언사를 죄목으로 하는 것으로 이로 인하여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숙청되었다.

기묘사화로 인하여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가고, 김정, 기준, 한충, 김식, 김구,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은 귀양가서 사형당하는 등 70여명이 사약을 받고 죽었고 김구는 파직 당한다.

김안국, 김정국 형제 등도 파직되는데 당시 피해를 입은 선비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 이라 한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붕당을 결성해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인물들을 배척하였다는 것과 후진을 이끌어 지나치게 격렬한 인사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들이 추진하던 현량과는 폐지되고 삭탈된 공신들의 훈적도 다시 회복되었다.

?이어 중종 16년에는 1521년에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터지면서 안당 등이 제거되며 사림파는 연이어서 치명타를 당한다.

기묘사화이후에는 남곤·심정·김안로 등의 권신들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중종 25년인 1538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어 중종 33년인 1538년에서 중종이 죽는 중종 39년인 1544년까지는 김안로가 축출되고 기묘사회에서 물러났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중종의 여인들과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등장  중종은 12살 때 한 살 위이던 신씨부인과 혼인하여 매우 사이가 좋았다.

중종이 즉위하는데 신씨부인이 단경왕후였다.

그러나, 반정공신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이 반정과정에서 종종의 부인이 된 신씨는 자신들이 폐한 연산군 왕비 조카이고 자신들이 아버지인 신수근을 죽여 버렸으니 나중에 혹시라도 신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복수를 할지도 몰라 두려웠다.

?더구나 중종과 신씨 사이에는 소생이 없어 중종반정군의 입장에서 신씨를 내쳐도 뒷 탈이 없다고 보았다.

만약 후사라도 있다면 나중 즉위한 후에 어머니 복수를 할 수도 있으나 그럴 걱정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신씨를 안심하고 내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반정일에 중종과 신씨부인은 왕과 왕비로 즉위하기는 하였으나 반정 주도세력들에 의하여 신씨를 왕비에서 폐위할 것을 계속하여 요구하였다.

중종은 처음에는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 면서 이를 거절하고 버티면서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신씨부인에게 털어놓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오히려 신씨부인은 담담한 어조로,?“전하, 왕위만 보전된다면 신첩이야 어디 간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며 중종을 위로까지 하자, 중종은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고 반정 7일만에 신씨부인을 중전에서 폐하게 된다.

이에 단경왕후 신씨는 폐서인(廢庶人)이 된 후, 인왕산의 치마바위 근처 세조의 부마인 하성위 정현조 집으로 쫓겨나 살게 된다.

그러나 중종 역시도 신씨를 좇아내었으나 잊을 수 없어 수시로 경희루에 올라 신씨가 있는 인왕산방향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신씨 역시도 중종이 자신을 못 잊어서 애타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 뒤에 있는 인왕산에 올라가서 바위 위에다가 자신이 궁궐에서 입었던 분홍치마를 펼쳐 놓았다 하는데, 사람들은 신씨가 치마를 펼쳐 놓았던 바위를 일러서 ‘치마바위’ 라고 부르고 이후 ‘치마바위전설’ 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폐비신씨는 얼마 후 친정집이 있는 경기도 고양군 일영으로 거소를 옮겨서 살았는데, 그곳에는 고모인 연산군의 부인이 있어 폐위된 조카와 고모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사랑하던 남편의 정적으로서 원망이 앞섰으나 서로 쫓겨나게 된 신세를 생각하면 서로가 애처롭게 생각하여 서로 위로하며 지냈다고 한다.

?신씨는 이처럼 중종과 생이별하여 혼자 외롭게 살았는데, 1544년 11월에 중종이 57세로 죽고 난 후 13년동안 더 살다 명종 12년이던 1557년 12월 사저에서 72세로 죽었다.

그리고 그녀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아버지 신수근의 묘역인 거창신씨 선산에 묻혀 있다.

신씨는 영조 때에서야 복권돼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씨가 폐위된 후에는 파평윤씨인 장경왕후 윤씨가 중전으로 선발된다.

장경왕후 윤씨는 윤여필과 어머니 순천박씨 사이에서 한양의 호현방에서 1491년 태어났다.

그녀는 이모이던 월산대군 박씨에 의하여 양육이 되었는데 1506년에 16세로 궁중에 들어가서 숙의에 책봉이 되었다.

?그러나 중종의 부인 단경왕후 신씨가 왕비에 오른지 7일만에 폐위되면서 다음해 중종 2년인 1507년 8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박원종에 의해 천거되어 들어올 때 이미 궁에는 훈신세력들의 소실의 딸이나 양녀들 8명이 후궁으로 들어와 있었으나 이 중에 숙의 윤씨만이 정실부인소생이어서 그녀가 왕비로 간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종은 왕비가 된 윤씨를 별로 찾지를 않자 장경왕후는 오빠이던 윤임에게 이를 하소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를 그리워 잊지못하면서도 박원종의 민 인척인 경빈박씨와 희빈홍씨를 자주 찾았다.

경빈박씨는 연산군 11년에 채홍사에 의해 궁궐에 들어와서 이를 후에 알게 된 박원종이 양녀로 삼았는데 그녀는 타고난 미모로 인해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중종이 경빈박씨를 만난지 일주일도 안되어서 정국공신이던 홍경주의 첩의 딸이던 희빈홍씨가 두 번째 후궁으로 들어왔고, 이어 세 번째로 창빈안씨, 네 번쩨가 숙의 이씨, 다섯 번째로 숙의 홍씨, 여섯 번재인 숙원김씨, 일곱번째가 윤임의 누이이던 윤 숙의였다.

 그러나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중종 10년이던 1515년 3월 2일에 인종을 낳다가 25세에 산후병으로 인해 6일만에 죽었다.

그녀는 처음에 태종이 묻힌 헌릉 옆 자락에 묻혔다가 22년후인 1537년 9월에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중종이 1544년 11월 57세에 승하하자 윤비의 능이 있는 오른쪽에 묻히게 되었다.

? 그러나 명종 17년인 1562년 9월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봉은사의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하여서는 중종의 능이 풍수상 좇지 않다면서 중종을 삼성동에 있는 정릉으로 옮겨 자신과 묻히도록 하게 되면서 윤비의 능은 나 홀로 떨어져서 희릉으로 불리었다.

이는 문정왕후 윤씨가 자신이 죽은 뒤에는 중종의 곁에 묻히고 싶어서 중종의 곁에 있던 윤씨곁에 묻혀 있던 중종을 삼성동 정릉자리에 옮기도록 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도 남편의 곁에 묻히고자 중종의 능을 이장하였음에도 윤씨의 이 바람 역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삼성동의 중종 묘역자리가 상습 침수자리라서 언제나 비가 오면 침수될 수 있다는 논의 때문에 이곳으로 옮길 수 없게 되어 그녀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지금 노원구 공릉동 태릉에 홀로 외롭게 묻혀있다.

이로 인하여 남편인 중종 역시도 삼성동에 외롭게 홀로 묻혀 있도록 하였으니 이들의 인연은 묘하기만 하다.

 중종의 계비인 윤씨가 죽자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를 왕비로 복위하거나 후궁이던 경빈박씨를 왕비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킬 경우에는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원자인 인종의 지위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행, 권민수 등이 반대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하고, 경빈박씨는 아버지가 박수림으로서 군인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문이 한미하여 좋지 않다는 이유로 왕비가 되지는 못하였다.

? 경빈은 중종과의 사이에 복성군과 두 옹주를 두었다.

장경왕후 윤씨가 죽자 최종 간택에는 이조판서를 지냈던 윤근손의 딸과 윤지임의 딸로 압축이 되었으나 죽은 장경왕후인 윤비의 친정 아버지인 윤임이 자신과 가까운 친척이던 윤지임의 딸(윤원형의 누이)을 왕비로서 추천하는데 이 여인이 바로 문정왕후이다.

 그녀는 아버지 윤지임과 어머니 전의 이씨 사이에서 1501년 10월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중종 12년 1517년에 왕비로 책봉되는데 그녀는 당시에 17세였고 중종은 30세였다.

윤임이 문정왕후를 추천한 이유는 같은 파평윤씨 친척으로서 자신이 잘 아는 윤지임의 딸이어서 외손을 보호막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호랑이 새끼를 기르는 격이 되었다.

윤임은 후에 자신이 추천하였던 문정황후와 궈력을 다투다가는 문정왕후에 의하여 제거되기에 이른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중종의 맏딸이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가 권세를 얻자 심정과 남곤이 그를 견제했다.

이들의 이전투구가 극에 달하였던 중종재위의 중반 문정왕후의 척족인 윤임, 윤원형, 윤원로 등이 출사하면서 훈신과 척신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결과는 윤씨일가의 압승을 거두어 승부는 끝나게 된다.

그 여파로 인하여 사림의 일부가 조정에 복귀하였다.

?문정왕후 윤씨는 처음에 자신에게 소생이 없었을 때는 전 왕비윤씨가 낳은 인종을 애지중지하며 길렀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만은 꼭 갖고 싶어 자신과 중종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대하였으나 쉽사리 그녀의 뜻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윤씨는 한문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어 정치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고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후에는 수렴청정 등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중종 29년인 1534년 5월에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아들 경원대군을 낳았는데 이 때 장경왕후가 낳은 20세 되는 세자 인종이 있었으나 윤씨는 자신이 낳은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기로 마음먹고 이을 위해서 자신의 정적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기로 마음먹는다.

?그 첫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좌의정인 김안로였는데 그는 아들이 중종과 장경왕후가 낳은 효혜공주와 혼인하여 중종의 부마로 권력을 남용하였는데 영의정인 남곤, 심정 등의 탄핵을 받아 중종 19년인 1524년에 파직되었고 조정에 재기용되는데 세자를 보호한다며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옥사를 일으키자 윤씨는 김안로가 자신을 폐위시키려 한다며 중종에 호소하여 1537년에 김안로는 사사되고 그 일당은 유배되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에 명종이 된다)을 낳은 뒤에 중종의 후비 장경왕후 오빠인 윤임이 사돈 김안로와 공모하여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세자(후에 인종이 된다)을 폐위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음모를 꾸미므로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서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긴다.

윤임의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하여 세력다툼이 일어난다.

 문정왕후는 세자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을로 세우기 휘하여 중종 38년이던 1543년 1월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의 방문을 잠그고는 궁녀로 하여금 불을 질렀다.

그런데 세자는 효심이 강하여 문정왕후가 불을 놓은 것으로 알고서는 궁밖으로 탈출하지 않고 죽으려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으니 동궁빈이 나가자고 권하여도 나가지 않고 있다가 중종이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서야 나왔다 할 정도로 효성이 깊었다.

이것을 일러 ‘작서의 변’ 이라고 한다.

 중종은 동궁의 불을 지른 것이 문정왕후의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모른체 하였다는 데서도 알 수 듯이 아들과 부인 문정왕후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재위 초년에는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서 지내다 사림을 등용하였다 여의치 않아 이들을 제거하였으나 후에 이를 후회하기도 하는 등 정치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장경왕후가 낳은 세자와 문정왕후가 후에 낳은 경원대군 사이의 외척간 갈등에서 고민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중종은 중종 39년인 1544년 11월 14일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인 15일 57세를 일기로 죽는다.

 중중은 세자 인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재위한지 38년 2개월만에 죽는데 첫 부인 신씨를 비밀히 창경궁에 있는 환경전으로 불러서는 재회하여 회포를 풀었다고 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이별하고 죽을 때에야 40년이 지나 만났으니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중종은 죽어서 경기 고양 장경왕후곁에 묻혔다가 1562년 명종 17년에 정릉(靖陵)으로 이장하는데 서울시 강남구의 삼성동이다.

그러나 그는 3명이나 되는 왕비를 두고서도 죽어서 외로이 혼자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야말로 ‘풍요한 여인 속의 빈곤’ 이다.

중종의 여인은 왕비만 하여도 3명, 후궁이 9명이며 소생으로서는 9남 11녀를 두었다.

  중종의 여자들문정왕후 - 죽어서도 중종에 곁에 묻히련다, 선정릉의 수난사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종의 무덤 옆에는 인종의 생모인 제1계비 장경왕후가 지키고 있었다.

1542년 문정왕후는 보우와 의논해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성종의 무덤) 부근으로 옮겼다.

?중종의 무덤이 아버지인 성종의 곁에 가는 것이 합당하고 풍수상으로도 좋지 않다고 하는 명분을 걸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무덤(정릉, 선릉과 함께 보통은 선정릉이라 한다)은 지대가 낮아 침수 피해가 잦았다.

홍수때는 재실(齋室)까지 물이 차서 많은 경비를 들였음에도 중종의 곁에 머물 수가 없었다.

 결국 문정왕후 사후 아들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을 도봉구에 태릉(泰陵)으로 조성하였다.

명종은 중종의 곁에 묻히려던 어머니의 꿈을 지켜줄 수가 없었다.

대신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의 무덤인 강릉(康陵)이 태릉 옆에 조성되게 되었고 ?명종은 살아생전에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서 괴로움을 당하였는데 사후에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어머니의 곁에 묻히게 되었으니 죽어서도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도 1966년 태릉선수촌이 조성되며 두 모자는 서로를 쉽게 보지 못하는 형국으로 변모하게 된다.

 중종은 생전에는 여복이 많아 왕비만도 3명에다가, 후궁은 7명이나 둘 정도였는데, 문정왕후가 강제로 무덤을 옮기면서 중종은 생전에 같이 하였던 3명의 왕비 중의 어느 누구와도 같이 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문정왕후가 이장 명분으로 내건,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 무덤이 근처로 옮기게 된 것이 위안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할 수는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중종은 1544년 11월 57세로 죽어서 윤비의 능 오른쪽능선에 홀로 묻혀서 조용히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사후에 조용히 쉬는 것 역시도 뜻대로 실현될 수가 없었다.

 중종은 그곳에 묻히고 닌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맞아 아버지인 성종과 함께 또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는데 왜군에 의해 아버지인 성종과 중종의 능이 파헤쳐지고 성종과 왕비의 관인 재궁(梓宮)이 불에 타 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선조실록》선조 26년인 1593년 4월 13일과 8월 9일자의 기사의 보고의 내용을 보면 전 해인 1592년 겨울에 태릉과 강릉이 침범을 당하고 난 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에는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과 그녀의 아들 명종의 능인 강릉이 왜군들에 의하여 파 헤쳐지고 다음 해에 할아버지 성종과 아버지인 중종의 묘가 왜구에 의하여 파 헤쳐진다.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4월 13일 2번에 걸쳐 치계하는데,“왜적이 선릉(宣陵 : 성종의 능)과 정릉(靖陵 : 중종의 능)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梓宮)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

”“지난 겨울에 흉적이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을 범하는 변고가 있었는데 이제 선릉(宣陵)·정릉(靖陵)의 변고가 또 이와 같으니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이 왜적과는 한 하늘 아래 살 수가 없습니다.

..”. 선조 26년인 1593년 4월 26일자 7번째 기사는 대신이 유성룡 등 보고에 따르면 선릉과 정릉의 상태를 아뢰는 내용이다.

중종의 시신이 파 헤쳐져 임시로 그 시신을 양주의 송산에 있는 인가에 모셨다는 기사가 보인다.

 “선릉과 정릉의 변고에 대해서 지금 도체찰사 유성룡과 순령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의 장계를 보고 이홍국(李弘國) 과 서개똥(徐介叱同)의 말을 참고해 보건대, 정릉의 옥체(玉體)는 이미 양주(楊州)의 송산(松山)에 있는 인가(人家)에 옮겨 모셨고, 선릉은 두 능을 판 구덩이가 현궁(玄宮)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선조 26년 6월 28일 신해 2번째 기사는 영의정 최흥원이 선릉과 정릉의 상태를 봉심하고 치계하는 내용이다.

파 혜쳐진 무덤에서 나온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 몰라 알아보기 위하여 생전에 이들을 아는 덕양부인과 서릉군의 어미니 상궁박씨 등을 동원하여 임금의 모습을 그려내도록 하여 이를 토대로 시신확인 작업에 참고하게 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서 시신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신이 여러 재신들과 더불어 선릉·정릉을 봉심하여 보니 3릉의 불탄 재속에 백골이 모두 연소된 상태로 있었는데 이는 옥회(玉灰)인 듯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바도 대략 일치하였습니다.

또 제신들이 송산(松山)에 가서 봉심하기 전에 옥체(玉體)상에 혹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하여, 덕양 부인(德陽夫人)과 서릉군(西陵君)의 어머니, 상궁 박씨, 부안도정(扶安都正) 석수(碩壽), 영원수(永原守) 덕수(德壽)로 하여금 먼저 옥체의 모습을 그려 내도록 하여 제신들에게 미리 보여 봉심할 때에 의거할 자료로 삼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옥체는 모발이 모두 빠졌고 콧등은 깨지고 이지러졌으며 면상의 피부도 모두 녹아 없어져 한 곳도 알아볼 만한 곳이 없어 판별하기가 매우 어려워 사람들은 모두 의심을 가졌습니다.

이와 같이 막대한 변을 당했으니 민망한 마음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제신이 봉심할 때 본 바를 각각 서정(書呈)하였으므로 이를 모두 빈청에 봉송(封送)하니, 아직 봉심하지 않은 행조(行朝)에 있는 재신(宰臣)과 삼사(三司)에 상의하여 참작해서 정하도록 명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 심수경은 송산의 옥체를 봉심하고 기록하여 아뢰기를, 재궁은 탔는데 시신은 보존 되고 성종의 능인 선릉의 시신은 없어졌는데, 중종의 능인 정릉은 시신이 보존되어 있는 등 상식과는 다르게 나타나서 이들 시신이 다른 데서 시신을 구해다가 넣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의심이 된다고 보고한다.

 영중추부사 심수경(沈守慶)이 의논드렸다.

“송산에 있는 옥체를 봉심했는데, 신은 일찍이 한 번도 중종의 천안을 뵙지 못한 자로서 실로 논할 자격이 없으되 다만 피부가 깡마르고 용모가 수척함을 보았을 뿐입니다.

누차 입시했던 사람들도 모두 알아볼 수 없다고 하니, 이제는 진위를 변별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다만 사리로써 추측해 보면, 안팎의 재궁(梓宮)은 모두 불에 탔는데 옥체는 오히려 보존되었으니 그런 이치는 없을 것이요, 옥체를 꺼내 놓고 재궁만 불태우고 나서 다시 옥체를 광중에 넣었다 해도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흉적들의 행위를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으니, 세월이 오래된 마른 시체를 다른 곳에서 구해다가 광중에 넣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일도 혹 있을 법합니다.

 선릉(宣陵)의 두 능은 모두 옥체가 없어졌는데 정릉(靖陵)만이 홀로 보존되었으니 더욱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선릉·정릉을 봉심해 보니 3릉 모두 발굴하고 파괴한 형태가 대략 비슷한 모양이었습니다.

소위 불탄 재라는 것을 반복하여 상세히 살펴보니 흑색과 백색이 섞여 있었고, 또 백골이 부숴진 조각도 있었으며, 간간이 피부같은 것도 있어서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종이 위에 떨어뜨리면 그 소리가 자못 무거웠으니 의복이나 목석 등의 재는 아닌 듯 하였습니다.

3릉의 재는 대체로 같은 모양이었으니 만약 선릉의 두 능에 있는 재가 옥체의 재라고 한다면 정릉의 재도 옥체의 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단지 본 바대로 이같이 기록할 뿐입니다“ 이외에도 우찬성 최황, 지중추부사 성혼 등의 의견도 선왕을 본 적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거나 이미 기록된 내용과 살펴본 바가 다르고 어려 가지 의문점이 생겨서 믿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보다 며칠전, 선조 26년 8월 9일 1번 째 기사에는. 구성이 돌아와 정릉 개장에 대해 아뢰는 데. 도체찰사(都體察使)의 군관으로 수문장(守門將)인 이홍국(李弘國), 안세희와 양주(楊州)에 사는 지천령(池千齡) 이 누구의 시체인지 모를 시신이 정릉 근처에 버려져 있어서 이를 왕의 옥체라고 생각하여 이 옥체를 봉안하는 공을 세우기 위해 몇몇 군사들이 경쟁하였다는 내용을 보고한다.

?이를 확인해보니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은 불에 타 능침에서는 시신이 사라지고 타다 만 뼈 잿더미만 나오고 무덤 속은 비었고, 중종의 능인 정릉은 염할 때 입혔던 옷이 벗겨진 시신이 무덤속에 가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누구의 시신인지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영의정 최홍원, 좌의정 윤두수, 부원군 정철 등과 당시에 모셨던 궁녀까지 불러서 대조작업을 벌였으나 다른 시신 같다고 하여 다시 염을 하여 안장을 하였다.

 중종 여인의 능묘와 가계그런데 중종의 정식 후비(后妃)로서는 단경왕후 신씨(1487∼1557년)와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1491∼1515년), 제 2계비인 문정왕후(1501∼1565년) 등의 세 명의 비가 있었다.

장경왕후 윤씨와 문정왕후 윤씨는 모두 파평윤씨이다.

이들 세 왕비의 능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첫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신수근(愼守勤)의 딸로서 13세때 12세인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린다.

1506년 9월 4일에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20세에 왕비가 되나 7일만에 쫓겨나고 1557년 72세에 죽어서 친정집의 선산인 경기도 양주군의 장흥면 일영리에 묻히게 되는데 죽은지 180년이 지난 영조 15년이 돼서야 승격되어 온릉으로 승격된다.

 이어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는 윤여필(尹汝弼)과 순천박씨사이에서 1491년 7월에 태어났으며 윤씨는 중종 1년 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가 되는데 마침 중종부인 신씨가 궁에서 쫓겨나자 다음해 8월에 왕비로 된다.

?이어 효혜공주를 낳았고 중종 10년 2월에 원자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6일만에 경복궁에서 25세로 세상을 떠난다.

윤비는 처음에 죽어서 태종이 묻힌 헌릉 옆에 묻히게 되나 22년 후인 1537년 9월에 고양시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장한다.

 제2계비는 문정왕후(文定王后)로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과 전의이씨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중종 12년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당시 윤씨는 17세였고 중종은 30세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고 1545년 명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한다.

그녀는 조선의 ‘측천무후’, 혹은 ‘철의 여인’이라는 세간의 평을 받아서 죽어서 주어진 ‘묘호’ 역시 ‘태릉’으로 클 태자를 쓴 데서도 그 의미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의 위세는 대단하다.

   문정왕후의 태릉?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을 옮긴지 3년 후인 명종 20년 1565년 4월에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죽어서 중종옆에 묻히기를 원하여 서오릉에 있던 중종의 능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자신도 함께 묻히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명종의 꿈에 중종이 나타나 지적한 곳을 보니 물이 흘러나오는 등 지대가 낮아서 서울 노원구 태릉으로 정하였다.

?소생으로는 1남 4녀 즉 경원대군(慶原大君) 환(?, 명종), 의혜공주(懿惠公主) 옥희, 효순공주(孝順公主) 옥련, 경현공주(敬顯公主) 옥현, 인순공주(仁順公主)를 두었다.

 그리고 왕비 세 사람을 두었고 이외에 중종은 창빈안씨, 경빈박씨, 희빈홍씨, 숙의이씨, 숙의홍씨,숙원김씨 등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다.

이들을 간단히 살펴보면,?창빈 안씨(昌嬪 安氏 : 1499년

1549년)가 영양군(永陽君) 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와 정신옹주(靜愼翁主) 선환을 낳았으며 살아서는 숙용 안씨였으며, 죽어서 손자이던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창빈안씨로 승격되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이다.

창빈안씨의 묘는 현재 동작동의 국립묘지가 있는 현충원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선조의 할머니가 된다.

 경빈 박씨(敬嬪 朴氏)가 복성군(福城君) 미(嵋), 혜순옹주(惠順翁主) 철환, 혜정옹주(惠靜翁主) 석환을 낳았다.

경빈박씨의 묘소는 남양주시 연평 3리에 있으며 아들인 복성군의 묘와 같은 묘역에 있다.

 희빈 홍씨(熙嬪 洪氏)는 금원군(錦原君) 영(?), 봉성군(鳳城君) 완(?)을 낳았고, 숙의 홍씨는 해안군(海顔君) 희를, 숙의 이씨(淑儀 李氏)는 덕양군(德陽君) 기(岐)글, 숙원 이씨는 정순옹주(貞順翁主) 정환을, 효정옹주(孝靜翁主) 순환을, 숙원 김씨는 숙정옹주(淑靜翁主) 수환을 두었다  문정왕후 경원대군을 낳다.

 문정왕후가 35세의 늦은 나이로 경원대군(후에는 명종이 되었다) 이환을 낳으면서 먼저 인종이 세자로 책봉이 된 상황에서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기존의 세자를 폐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小尹)과 기존의 세자를 지키려는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간의 권력싸움이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당시에 중종의 딸 효혜공주의 남편 김회의 아버지로 권세가인 김안로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장경왕후가 낳은 아들이 1520년 6세로 세자로 책봉되면서 중종을 이을 후계자인 세자의 앞날에 대한 후계구도는 탄탄대로로 보였다.

문정왕후가 소생이 없을 때는 세자(후에 인종이 된다)의 외삼촌인 윤임과 경원대군의 외삼촌이던 윤원형 간에는 친척사이로서 갈등이 없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1534년 경원대군을 낳게 되면서 윤원형과 친족인 윤임, 처당숙인 김안로 등과의 사이에서는 갈등의 골이 싹튼다.

?사실상 조선시대에는 윤원형의 아버지인 윤지임과 윤임은 8촌 지간의 친척이었다.

조선시대 당시에 8촌지간은 당사자가 사망할 경우에는 ‘유복친(有服親 : 같은 고조부를 모시고 상복을 같이 입는 8촌이내 사이를 말함)’ 에 해당되는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이들은 친척끼리 권력을 앞에 두고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이처럼 세자의 외삼촌 윤임과 경원대군의 외삼촌인 윤원형간의 갈등은 각기 자신의 누이가 낳은 아들을 지지하는 외척세력간의 다툼으로서 외삼촌간의 권력투쟁인데 훈구파와 사람세력 간에 세력다움도 한 몫 하게 되었다.

이때 같은 파평윤씨 친척간의 이 갈등에서 윤임의 일파를 대윤(大尹)이라 하였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고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 중간에 인종의 사돈간인 권신 김안로가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임이 김안로를 부추겨서 공세를 취하자 윤원형은 중종 32년인 1537년 사헌부를 동원하여서 김안로(金安老)를 축출하여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중종은 1542년 두 외척이 당파를 지어 조정을 분열시킨다는 공론이 불거지자 윤임과 윤원형을 파직시킨다.

그러나 곧 윤원형을 복직시켜 명나라에 성절사로 파견한 이후에는 승정원 좌부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등에 연이어 제수하여 소윤 편에다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종이 1544년 11월 사망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권력투쟁은 자연스럽게 끝나고 인종이 권력을 잡게 된다.

  인종의 즉위와 요절 제 12대의 인종이 30세로 즉위하면서 외삼촌인 윤임이 정권을 장악한다.

인종(仁宗)이 즉위하면서 세력은 급격히 인종의 외척인 대윤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그의 조카딸이자 형 윤원량의 딸이 인종의 후궁이 되어 입궐, 숙빈 윤씨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이언적, 송인수, 김인후 등 사림파를 등용하고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관시키는 조치를 취하면서 외척정치를 청산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윤원형은 송인수로부터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고 그의 형인 윤원로도 역시 파직이 된다.

이어서 윤임은 무과로 진출하였음에도 사람파에 대하여 호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언적, 유관 등 사림파를 조정에 받아들여 세를 확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인종이 유교에 호의적이어서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한 사림의 신원을 풀어주면서 대윤이 사림파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인종은 어려서부터 효자로 알려졌는데 그로 인해 그의 시호 역시 ‘어질 인(仁)자’ 를 사용하였고 그가 죽어서 묻힌 무덤인 능의 이름조차도 효릉(孝陵)이라 이름이 붙을 정도로 효심이 매우 깊은 인물이었다.

동궁이었을 때에는 문정왕후의 소행인 줄 알고서 나오지 않아 세자빈이 빨리 나가자고 재촉을 하는데도 나오지 않다가 중종이 안타까워 소리쳐서 부른 뒤에야 나왔다 한다.

?그는 계모 문정왕후의 의하여 길러졌는데 문정왕후는 성격이 표독스럽고 시기심이 많아서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불을 지른 배후가 문정왕후인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중종이 죽자 보위에 무사히 올랐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권력을 잡게 되자 노골적으로 인종에게 반감을 드러냈다.

“주상, 나는 이제는 자식도 보전치 못 하겠고. 조정에 대윤이 득세하니 앞길이 캄캄하오, 나는 아예 절에 들어가 선왕의 명복이나 빌어야 겠소 ” 이에 인종은 대비전 앞에 석고대죄하며 며칠 동안 빌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시기와 질투는 더욱 심해져 걸핏하면 ‘나를 죽이라’ 고 소리쳐 인종을 윽박질렀다고 전하며 인종은 문정왕후의 이러한 뜻을 알고는 경원대군을 의식하여 세자로 책봉한 아들이 죽은 후에도 후손을 두지 않았다고 전한다.

 인종(仁宗)은 재위기간 동안에 조광조를 비롯하여 기묘사화 당시에 죽은 사람들을 신원하고 현량과를 복원하였으며 이언적, 유관 등 사람파 학자들을 조정에 등용하였으나 그는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재위 9개월만에 1545년 7월에 31세를 일기로 세상을 죽었다.

그가 죽은 이유에 대해 야사에서는, 어느 날 인종이 문안인사차 대비전에 찾아 가니 문정왕후가 왕에게 떡을 대접하자, 인종은 계모가 자신을 반긴 것이 기뻐 기분이 좋아서 아무 의심 없이 떡을 먹었다고 한다.

?이후 인종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 그의 효성이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주장도 있다.

인종은 워낙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의 부음을 듣자 슬퍼하여 엿새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였고, 5개월 동안 매일 호곡하며 지친 몸을 돌보지 않았다고 하였다.

《인종실록》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인종은 ‘국왕의 집상’ 으로 기력이 쇠하였다고 하는 등 상례에 관한 기사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 대신들을 불러 당부하기를, “내가 죽게 되어서 경원대군(명종)에게 왕위를 전위하니 경들은 더욱 힘써 그를 도와서 과인의 뜻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을 정도로 효를 실천한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다 한다.

그의 부인 인성왕후 박씨 역시 너그러운 성품의 인물로 인종의 뜻에 따라 슬하에 자녀를 더 낳지도 않은 채 살다가 인종이 죽은 지 32년 후인 1577년 11월 64세로 죽었다.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인 1545년 7월 경복궁 청연루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죽을 때 부모 옆에 묻어달라고 한 유언에 따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562년 정릉이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 옆으로 옮겨가면서,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다.

?인종이 자신의 장사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하였고 당시 인종의 외가인 대윤?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과 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줄이고 능역 조성은 소홀히 다루어졌다.

1577년 11월 29일 인성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서 왕비릉을 조성했을 때 왕릉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다른 석물들도 개수하였다.

왕비릉에는 병풍석이 없다.

인종과 박씨의 효릉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의 서삼릉역의 효릉내에 나란히 묻혀 있으나 비 공개릉으로 서삼릉 젖소 개량소 안에 위치하여 관람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종의 치세와 문정왕후의 섭정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서 난정과 윤원형 및 문정왕후의 만나는 과정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윤원형과 난정의 만남 문정왕후는 1534년 7월 3일 35세가 되어서야 늦둥이 아들 경원대군을 두었는데 그녀에게는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있었으며 당시 정난정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수태 불공을 드리려 봉은사에 갔다가 보우대사 소개로 그녀를 알게 되었다.

윤원형은 정난정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리고는, 정난정의 아버지이던 정윤겸을 찾아 가서는 그녀를 소실로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를 전해들은 정난정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내가 당신의 후사를 이어주면 나를 정실로 맞이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주세요. 평생동안 무시당하는 소실로 살 바에는 차라리 비구니가 되겠어요.” 윤원형은 이미 정실이 있었기에 정난정의 당돌한 태도에 매우 곤혹스러웠으나 물러설 수 없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서약서를 써 주었다.

 당시 정난정이 윤원형을 택한 이유는 윤원형은 적자출신이었지만 양반 사대부들이 으레 가졌던 양반과 적자를 차별하는 의식이 강하지 않아서 좋았고 다른 양반사대부들은 불교를 경멸하였으나 그 역시 불교를 신봉한다는 점에 있어 매력을 느꼈다.

윤원형역시 누이인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불교도였기 때문이다.

?《명종실록》은 윤원형에 대하여 비난하면서, 그가 중에게 시주하고 부처에 비는가 하면 산에 제사를 지내고 불경을 외는 등 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또 그의 집 대청을 신 받드는 곳으로 만들어 굳게 닫아걸고 그의 첩 난정만 그곳을 출입하였다.

이러한 점은 당시에 불교에 심취하였던 문정왕후와 난정에게 신분의 차이를 뛰어 넘는 동지의식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난정] 대단하네요.


 정난정은 비록 원치 않게 소실이 되었으나 집안에서 당당하게 행동하였다고 한다.

윤원형의 본처인 연안김씨는 안주인으로서 질서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난정이 너무도 당당하여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연안김씨는 안주인이기는 하였으나 소생을 두지 못하여 큰 소리 칠 수 있는 입장이 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씨부인은 남편 윤원형에게 정난정의 버릇없이 굴고 당당한 태도를 혼내주고 싶어 역성들어주기를 기대하면서 윤원형에게 하소연하였으나 남편 윤원형은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명종의 즉위와 문정왕후의 섭정 인종이 즉위한지 불과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세력은 역전된다.

인종이 요절하자, 인종의 동생 경원대군이 다음해 1545년 7월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12세에 불과하여 관례에 따라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8년동안에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된다.

?이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하였다.

그는 군기시첨정이었던 형 윤원로와 같이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은 군왕의 예로서 장사지낼 수 없다고 주장하여서 인종의 국장을 가볍게 치르도록 하여 비난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명종은 1545년 12세로 즉위하나 나이가 어려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여 전권을 쥐게 된다.

수렴청정은 세조가 죽으면서 정희왕후 윤씨가 잠시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당시에는 한명희, 신숙주 등 훈구대신들의 뜻을 들어 정치를 하였을 뿐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나, 문정왕후는 자신의 뜻대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한다.

?물론 명종은 총명하였고 학문이 깊었지만 드센 어머니인 문정왕후 밑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명목상의 임금에 불과하였고 그는 극성스러운 어머니 밑에서 평생을 눌려 지내며 왕위를 지켜나가야 하였다.

왕이 돼서도 문정왕후로부터 뺨을 맞았고 욕을 들었으며, 회초리를 맞았다고 하였다.

괄괄한 성격의 문정대비 윤씨가 자신의 정책에 대하여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사림에 대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일대 철퇴를 휘둘렀다.

 그녀는 형제들인 윤원형과 윤원로를 등용하여 집권초기에 자신의 정적에 해당하는 초기의 반대파들을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한 뒤에는 자신이 신봉하는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승과를 두었고 선과 양종을 부활시키는 등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행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명종이 사람인 ‘조식(曹植)을 등용하려고 하자, 조식은 자신에게 내린 벼슬을 사양하면서 상소를 올린 내용이 유명하여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전하의 국사가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하여 하늘의 뜻이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중략)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가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가지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당대 문정왕후의 성격이 워낙 강한 여장부이다가 보니 당대 언론들조차도 그녀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금기가 될 정도로 그녀의 힘은 막강하였다.

그런데 조식은 이처럼 직설적인 상소를 하고서도 문정왕후로부터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당시 선비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어 그를 처벌하기에는 너무나 큰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문정왕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소윤의 대표자였던 윤원형은 중종의 사후 윤임이 중종의 여덟 째 아들인 봉성군 이완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으며, 인종이 죽었을 때 성종의 셋째아들인 계성군 이순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를 빌미로 하여서 문정왕후는 윤임과 유관 및 유인숙을 사사하게 하고는 이들과 손잡았던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났던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권력의 중심으로 전면 부상한 윤원형은 대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실행하였다.

그런데 윤원로는 과격한 성격이어서 성급하게 나서 대윤이 경원대군(명종)을 해치려고 한다고 무고하다가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이, 외척임을 의지하여 골육을 이간하는 방언이라고 탄핵하자 오히려 자신이 파직당하는 처지가 되어 해남으로 유배되면서 권력 다툼은 처음 대윤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대윤의 이러한 승리가 오래갈 수는 없었으며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이에 윤원형은 작전을 바꿔,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지중추부사 정순붕, 대사헌 허자 등과 합세하여 문정 대왕대비와 밀약을 마치고는 대왕대비와 임금을 알현한다는 상주를 올려 명종과 대비가 수렴첨정하는 충순당으로 나왔다.

?대신들을 모두 불러서 “우찬성 윤임이 계림군 유를 대행왕의 양자로 삼아 그를 옹립하고자 여러 차례 모의를 하였다면서,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인 유인숙동과도 공모한 사실이 있사옵니다” 하면서 무고하자, 사헌부 헌납 백인걸이 대비의 밀지에 따라서 정당한 절차도 없이 대신들을 벌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윤원형을 공박하였다.

 그러자 대윤파들은 유인숙, 유관 등과 함께 중종의 8자인 봉성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였다고 하면서 사림이 역적을 비호하고 대왕대비를 능멸했다 하여 백인걸의 견해에 동조한 조광조의 잔당을 물리쳐야 한다고 반격을 하였다.

인종이 승하하면 성종의 서자 계림군 이유를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에 문정대비에게 그 소문을 고하는데 이는 계림군이 윤임의 3촌 조카라는 사실을 이용한 무고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봉성군의 어머니인 희빈 홍씨가 아버지 홍경주와 함께 중종에게 참소한 사림파를 몰아내려 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무고이다.

 이로 인하여 대윤의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사림의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 이문건 등 10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수많은 관련자들이 유배되거나 파직되었다.

계림군 유를 고문하여 대역의 사실을 자백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봉성군 완은 평창으로 귀양을 갔다가 2년후에 사사되었고 계림군 유는 군기시 앞에서 효수되었다,?윤임과 그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사약을 받아서 죽었고 유관·유인숙 등도 사약을 받는 등 대윤의 거목들은 모두 참형을 당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하나인 을사사화이다.

이 사건은 정확히는 소윤이 대윤을 몰락시킨 사건이나 일부 사림 세력이 동조했다가 함께 변을 당하였기 때문에 사화(士禍) 라고 한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윤원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게 되어 보익공신, 위사공신이 됨에 따라서, 한성부윤, 서원군에 봉군이 되었으며, 그해 12월이 되어서는 종2품인 호조참판이 된다.

이로 인해 28인이 녹훈되었고 1,400명의 원종공신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서 기묘사화에서 겨우 소생하려하던 사림세력은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윤원형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켜서 아예 이들 세력들이 자라날 싹조차 잘라 버리려고 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난지 2년후인 1547년 9월에는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군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하는 내용의 벽서가 붙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로 인하여 을사사화 때 어리다는 이유로 살아남아서 귀양을 갔던 봉성군,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케 하였던 송인수, 윤임과 혼인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 3인이 사형을 당하였다.

윤원형일파는 이 사건을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하여서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잔당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하였다.

 이에 따라 이언적 등 3명은 극변안치(極邊安置)되었고, 임형수·노수신· 등의 4명은 절도안치(絶島安置), 권응정·권응찬 등 8명은 먼 지방부처(地方付處), 권벌·송희규·백인걸 등 14명은 중도부처(中途付處) 형을 받는 등 20여명이 유배형을 받았다.

?명종 3년에는 전 사관이던 안명세가 “중종의 소상도 지나지 않았고 인종의 발인도 끝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빈전 앞에서 대신들을 죽였다” 라는 사초를 썼다가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윤원형은 이와 같이 정적들을 처리한 다음에 거칠 것이 없어지자 정2품 중추부지사에 임명되어 짐짓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까지 올린다.

 신은 척리(戚里)의 한사람으로서 외람되게 공신의 대열에 참여하여 벼슬이 이미 종2품에 이르렀는데, 이제 대신이 신을 공이 있다고 아뢰어 다시 정2품에 올랐습니다.

벼슬을 이렇게 헤프게 준다면 조정의 명기(名器)가 이로부터 무겁지 않게 됩니다.

개정하소서. 이후 윤원형과 그의 형 윤원로의 앞길을 막아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윤원형의 출세가도는 끝없이 계속되는데, 예조판서와 경연특진관을 거쳐서 1547년에는 동지춘추관사가 되어《중종실록》,《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윤원형은 형과 불화하며 극단적으로 권력을 다투게 된다.

윤원형은 수시로 자신을 음해하는 윤원로에게 측근 병조좌랑 윤춘년으로 하여금 탄핵하도록 하였다.

?문정대비는 윤원로를 남원으로 귀양 보냈다 이듬해 사사하였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권력에는 부모형제도 없다고 세간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1551년 이후 윤원형은 수차례 우의정에 제수되나 계속 반려하다 1557년에 영중추부사를 거쳐서 정1품 우의정이 된다.

그러나 이후 윤원형은 근 20년간 절대권력을 쥔다.

1563년 1월에는 최고의 직인 의정부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이토록 흔들릴 것 같지 않게 보였던 윤원형의 절대권력도 명종이 장성하여 감에 따라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 두 사람이 조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언젠가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이를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명종이 마침내 20살이 되면서 문정왕후는 더 이상 수렴청정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명종은 자신이 장성하는 동안 어머니 문정대비가 맡아 운영하던 국정운영권을 돌려받자 자신의 친정체제를 만들어 나간다.

  명종의 친정 명종 8년이 되는 1553년 명종의 나이 20세가 되자 문정왕후는 7월에 수렴청정을 거두어야 하였다.

물론 이후에도 직·간접적으로 온갖 참견을 다 하였으나 이전처럼 자신이 마음대로 전횡할 수는 없었다.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동안 외삼촌 윤원형에게 권력을 내 줘 전횡하도록 하는 것을 보아 왔기에 윤원형을 견제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데 적합한 인물을 찾는다.

?우선 가장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중전 인순왕후의 친정인 심씨 집안에서 인척인 이량을 추천하는데 이량(李樑)은 전주이씨로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沈氏)의 외숙이다.

 명종은 부인의 외척인 이량(李樑)이 외척인 윤원형의 독주를 견제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며 임명하였다.

그런데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이량은 조정에 들어온 뒤에는 곧 헌납·수찬·교리·지평 등 청요직을 거치면서 이감·신사헌·권신·윤백헌 등의 수많은 추종자를 모아 나갔다.

?그런데 이들이 정치에 쇄신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요직을 독차지하고 부정축재에 혈안이 되었다.

도적을 막기 위한 감시자를 배치하였는데 오히려 도적 1명을 더 늘린 격이 되었다.

정치에 가장 쇄신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인사와 재정의 투명성이다.

 그런데 이량은 문무관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와 병조에다가 심복을 배치하고서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과거를 조작하여 자신의 아들 이정빈을 합격시킨 뒤 이조전랑에다 앉히기까지 했다.

나아가 자기편인 김명윤을 재상으로 삼아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우의정 이준경의 사직을 간언하기도 하였다.

?그의 집은 항상 저자거리와 같이 들끊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릉 윤원형, 심통원 등과 함께 ‘조선의 3흉(兇)이라고 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전횡이 심하여 지자, 이들은 사림파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견제하려던 윤원형의 탄핵을 받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이량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사림파의 박소립과 윤두수,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이 이에 반발하고, 윤원형도 문정대비를 통하여 그를 탄핵하였다.

명종은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이량을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해 외직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곧 중앙으로 불러들여서 이조참판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량은 돌아와서도 근신할 생각은 없이 더욱 더 세도를 부리기 시작하여 예조, 공조판서를 거치고서 이조판서를 거치면서 더욱 더 기승을 부렸다.

그의 부패는 점점 심해져 지자 그의 조카인 심의겸에게 발각되어 사회를 획책한 혐의로 삭탈관직 된다.

 그런데 명종 재위시에는 잇단 흉년이 계속되면서 나라안은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맥성들은 학정과 수탈이 계속되자 유랑민이 들끓고 임꺽정 등 도적떼가 창궐하여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탐관오리의 창고에는 곡식이 썩어나가는데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 상황에 1555년에는 왜구들이 70척의 배를 끌고 전라도일대를 휩쓴 을묘왜변이 일어났고, 양주의 백정이었던 임꺽정이 이끄는 도적떼가 1559년부터 1562년까지 3년여에 걸쳐서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그 때문에 명종은 중종 때 임시로 설치했던 비변사를 상설기구화하고 외침에 대비하도록 했다.

 명종 18년인 1563년 명종은 이량이 박소립과 윤두수를 제거하려 하자 심의겸의 도움으로 홍문관을 움직여 이량을 숙청하여 버렸다.

그런데 당시 그의 정적이었던 실권자 윤원형은 자신의 집안과 왕실의 외척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자신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과 혼인시켜서 명종 사후를 대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종의 반대에 부닺쳐서 무산되었다.

이에 윤원형은 우군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조판서 권철을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이것 역시 여의치 않게 실패하게 되면서 몰락의 전조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였다.

  문정왕후 난정과 손잡고 불교부흥에 앞서다.

 정난정과 윤원형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문정왕후 역시 불심이 깊어서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통하여 보우대사를 소개받은 뒤에는 봉은사에서 수시로 만나서는 친분을 다졌다.

그리고 난정은 수시로 입궐해 문정대비를 알현하였다.

?불교에 심취하였던 대비는 그녀를 소실이라고 차별하지 않았고, 정난정은 그런 대비를 지성으로 받들었다.

정난정은 문정대비에게 보우대사를 소개하여 불교 부흥의 기회를 제공하고 보우대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 불교를 부흥시켜 나간다.

 1550년에는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는데 선종의 본사로 봉은사, 교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삼게 하였다.

연산군 때 폐지시켰던 승과제도를 부활시키고, 사찰들이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하게 만들었고 전국에 3백여 개의 사찰을 공인하고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정난정은 윤원형과 문정대비의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조선의 상단에서 모리 등을 통하여 엄청난 축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축적한 자금을 마련한 다음에 이 자금을 활용하여 불사 중창에 거금을 기부하고 무차대회 등의 다양한 불교 행사를 마련하여 불교를 포교하는데 전념하였다.

그런데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는 불교의 진흥과 불사에는 열심이었지만 국가의 운영에 있어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정 대신들은 물론 일반백성들에게서 까지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한 예로서 보우대사를 군사를 관할하는 병조판서로 임명하는 한편 도선사의 주지로 삼고는 도대선사에 올려놓기도 하는 등 국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행위를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중흥정책은 조선이 건국이래 국시로 삼을 만큼 중시해온 배불 숭유정책의 근간을 정면으로 흔드는 정책들이다가 보니 이에 대한 조선 사대부와 국정운영자인 신료들의 반대는 지대하였다.

신하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 동맹휴학으로 맞섰다.

?그러나 강단 있는 문정왕후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뚝심 있게 불교 진흥사업을 밀어 붙였다.

특히나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보우대사는 온갖 비난에 직면하게 되어 보우를 죽이라는 장계가 75건이나 올라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불교 부흥정책을 실질적으로 추진한 것은 윤원형이었으니 이들에 대한 조선 양반들의 반발과 비판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정은 매년 두세 차례씩 두모포(현재 옥수동 부근)에 가서 방생을 하고는 쌀밥을 지어놓고 물고기에게 밥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워낙 귀해서 왕실에서밖에 먹지 못하는 타락(우유)을 집에서 종들까지도 실컷 먹게 하였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는 그 두모포에서 큰 물고기가 낚여 올라오면서 윤원형과 정난정의 몰락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어우야담》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강 두모포에서 한 어부가 물고기를 잡다가 큰 물고기를 낚았다.

바다에서도 잡히기 어려운 큰 물고기가 잡히자 누군가 파자(破字)점을 치니, 윤원형의 형(衡)을 파자하면 다닐 행(行)이 나오고 큰 대(大)가 나오며 나머지 부분은 물고기 어(魚)에서 연화발(火→?)이 빠진 글자가 된다.

지금 크고(大) 이상한 물고기(魚)가 잡혀 올라온(行)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진다.

즉 윤원형의 운명이 이 물고기와 같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일 후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윤원형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두모포(豆毛浦) 어부가 큰 물고기를 잡았다.

【이때 자전이 편치 못하여 붕어[?魚]를 먹고 싶어하므로 사람을 시켜 두루 구하였다.

이 때문에 두모포의 어부가 두모포에 그물을 쳤더니, 어떤 물체 하나가 그물 안에 들어왔는데 그 크기가 배만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힘껏 강가에 끌어내 놓고 보니 곧 하나의 큰 물고기였다.

길이가 포백척(布帛尺)으로 10여 척이고 너비가 3척이었다.

흰 빛깔에 비늘이 없고 턱 밑에 지느러미 세 개가 있으며 꼬리가 키처럼 크고 머리 위에 구멍이 있어 물을 빗물처럼 내뿜으며, 눈과 코가 물고기처럼 생기지 않았다.

강가의 늙은 어부들도 그것이 무슨 고기인지 알지 못하였다.

】(《명종실록》의 기록)  문정왕후는 정난정의 깊은 불심에 감동하여서, 명종 4년이던 1549년에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그의 첩인 난정의 소생이 다른 집의 적자와 통혼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은전을 베풀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에 권력을 탐한 사람들은 난정의 자녀들과 다투어서 혼인을 하려 하였다고 한다.

문정왕후는 당시 윤원형의 애첩인 난정이 낳은 아들들을 적자로 만들어 혼인하도록 하였다.

 서원군 윤원형은 종사에 큰 공로가 있는데도 스스로 사양하여 1등공에 참여하지 않았다.

근래 윤인서가 말한 것을 보면 나라에 공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모르는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막대한 공에 대하여 달리 갚을 길이 없으므로 그의 양첩(良妾) 자녀를 적(嫡)으로 만들어 허통하게 하고자 한다.

 윤원형은 명종 6년이던 1551년 2월 명종에게 청원하여 조강지처인 김씨의 악행을 고발해 집안에서 내치게 해달라고 하였다.

명종이 이 청원을 받아들이자 윤원형은 즉시 김씨를 쫓아내고 노비출신 정난정을 정실로 맞았다.

이후 김씨는 가난과 모멸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다가 정난정이 보낸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면서 그녀는 요녀이자 독녀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녀는 윤원형 권세를 활용해 전매와 모리행위로 상단을 조직하고 수 없이 뇌물을 받아 챙기었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집이 10채나 되었다 한다.

 문정대비는 1553년 3월에, 명종에게 ‘윤원형의 첩에게 직첩을 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림에 따라 정난정은 합법적으로 윤원형의 부인이 되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어서 그녀는 일약 외명부 종 1품의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고, 윤원형사이서 낳은 아들 윤효와 윤충원은 천역에서 벗어나 어엿한 양반이 되었다.

?그러나 난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어서 그해 10월 남편인 윤원형으로 하여금 서얼허통법을 시행하자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윤원형은 영의정인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서얼들도 적자들처럼 과거를 볼 수 있게 해 주도록 청원하였다.

당시에 이들이 올린 상소 내용은,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윤원형 등이 상소한 내용에 대하여 이조판서 안현 등을 비롯한 여러 신료들이 반대하고 나섰지만 문정왕후의 뜻이었는데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문정대비의 결단으로 서얼허통법은 통과 되었으며 이에 그 동안 음지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수많은 서얼들은 환호성을 올리면서 쌍 수를 들어서 기뻐하였다.

양반 사대부인 적자들은 이에 반대하였지만 수많은 서얼들은 가슴 속에 맺힌 큰 한을 풀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문정대비의 죽음과 윤원형의 몰락 문정왕후의 태릉 문정왕후의 태릉 중종 계비 문정왕후의 태릉(1565), 사적 제201호,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윤원형은 당시 성리학의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난정과 같이 살면서 본처인 연안김씨부인을 내좇은 뒤에 난정을 정실부인으로 삼았고 1563년에는 윤원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이 되었고, 정난정은 정1품 정경부인으로 외명부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 윤원형은 난정과 함께 왕실의 외척으로서 누이의 문정대비를 지지해 조선의 공고한 신분체제를 뒤흔들고 불교를 진흥정책을 밀어붙이는 등 사림파에게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주도하였다.

이들에게 성리학의 가치관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관을 넘어선 것이었으니 이들이 윤원형과 정난정에 대한 적대감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조선은 거듭된 흉년으로 유랑민이 들끓고 도적떼가 창궐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탐관오리의 창고에서는 곡식이 썩어가는데 백성들은 먹을 게 없어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참상에서 명종 10년에는 왜구들이 을묘왜변을 일으켜 전라도 일대를 휘젓고 다니고, 1559년부터 1562년까지 3년여에 걸쳐 양주의 백정출신이던 임꺽정이 이끄는 도적떼가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속에서 명종 20년인 1565년 4월 6일 문정대비가 65세로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있었던 불교의 무차대회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병세가 심각해지자 4월 5일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중지시키고 사월 초파일을 이틀 앞두고서 죽었다.

?그녀가 무차대회를 앞두고 음식을 간소히 들었는데 이로 인하여 늙은 문정왕후가 죽었다고 많은 대신들은 이를 주관하였던 보우대사의 처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당시《왕조실록》에서는 무차대회를 중단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당시에 무차대회가 화려하게 거행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서 무차 대회를 베풀었는데, 내관(內官)을 보내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때 세자를 갓 잃자 요승 보우(普雨)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는 말을 떠벌여 무차 대회를 베풀기를 청하였는데, 자전(慈殿)이 그 말에 혹하여 그대로 따랐다.

승려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였으며, 조각 장식의 물건을 극도로 화려 사치하게 하여 옛날에도 보지 못하던 정도였다.

?또 붉은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고 황금으로 연(輦)을 꾸미고 앞뒤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 대가(大駕)가 친히 임어하는 상황처럼 베풀었으며, 또 배위(拜位)를 마련하여 마치 상이 부처에게 배례하게 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 흉패(兇悖)함을 형언할 수 없었다.

창고의 재정이 고갈되고 종실·척리(戚里)도 또한 곡식과 비단을 내어 그 일을 도왔다.

자전이 그 계율(戒律)을 따라 목욕 재계하고 소식(素食)하기를 수십여 일동안 하다가 병환이 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병세가 위독하게 되자 내관을 보내어 중지하게 하였는데, 무차 대회를 베푼 지 이미 며칠이 되었다.

】  문정대비는 1464년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자 보우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고 하여 무차대회(불교 법회의 한 종류) 베풀기를 청하자, 문정왕후는 이에 따라서 소선(素膳 : 어물이나 육류를 쓰지 아니한 간소한 반찬)을 행하면서 수천명의 승려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차대회를 행하다 병세가 깊어지자 4월 6일 언서 유교(諺書遺敎)를 남기고 4월 6일에 죽었다.

 문정대비는 자신이 죽은 후 명종이 건강을 위하여 소선(素膳)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한 후 자신이 부리던 나인과 각 사의 사람에게 신역을 면제하고 양식을 나누어 줄 것을 명령하고, 효혜공주(장경왕후의 딸로 김안로 며느리)의 아들 윤백원(尹百源)을 가까운 곳으로 이배하여 줄 것을 당부한 다음,?불교는 이단이나 부모의 뜻에 따라 불교의 양종과 불교를 예전과 같이 유지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는 문정대비의 바람이었을 뿐 그녀가 죽자 가장 먼저 상소로 올라온 것이 바로 보우대사를 죽이자는 것이었다.

 문정대비가 숨을 거두면서, 명종에게 불교를 온전히 보존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대신들이 처음으로 요구한 것은 보우대사의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가며 명종에게 여러 당부를 하였으나 명종의 치세는 명종이 처리할 몫이었다.

이에 대하여 사관은 평가하기를, 《명종실록》 문정왕후에 대해 평가하며 ‘서경(書經)’을 인용해 ‘암탉이 우는 것은 새벽의 다함이다’ 라 평가하였다.

명종 20년 1565년 4월 6일 2번째 기사 사시(巳時)에 대왕 대비가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윤씨가 그를 꺼리자, 그 아우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아우 윤임(尹任)과 틈이 벌어져, 윤씨와 세자의 양쪽 사이를 얽어 모함하여 드디어 대윤(大尹)·소윤(小尹)의 설이 있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고위(孤危)를 근심하였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효도를 극진히 하여 윤씨를 섬겼다.

그러나 삼조(三朝)할 즈음에 빈번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官家. 조정) 는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 말하기까지 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하고 또 상중에 과도히 슬퍼한 나머지 이어 우상(憂傷)이 되어 승하하게 되었다.

 주상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당시 제공(諸公)들이 그의 강한(剛?)함이 반드시 나라를 해칠 것을 근심하여 임조(臨朝)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대개 그 시세가 부득이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곧 화를 부를 뿐이었다.

얼마 못 가서 문득 큰 옥사를 일으켜 전에 인종을 부호한 사람을 모두 역적으로 지목하였다.

슬프다! ?윤임(尹任) 같은 사람은 소윤에게 미움을 당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무지한 무부(武夫)로서 혹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품었지만 반역한 형적(形迹)이 또한 나타나지 않았고, 유관(柳灌)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본디 청직(淸直)하여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또한 무슨 죄인가? 대개 윤 왕후(尹王后)가 전에 감정이 쌓이었고 뒤에 화를 얽어 만들었는데, 이기(李?)의 무리가 또 따라서 이를 도와 이룩하였다.

그래서 그 화가 길게 뻗치어 10여 년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사림(士林)을 짓밟고 으깨어 거의 다 쳐죽이기에 이르렀으니, 이를 말하자니 슬퍼할 만한 일이다.

?그 뒤에 불사(佛事)를 숭봉함이 한도가 없어서 내외의 창고가 남김없이 다 고갈되고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고 백성의 전지를 마구 빼앗으며 내수사(內需司)의 노비(奴婢)가 제도(諸道)에서 방자히 굴고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이 못에 고기가 모이듯 숲에 짐승이 우글거리듯 절에 모여들었다.

 그의 아우 윤원형(尹元衡)과 중외에서 권력을 전천(專擅)하매 20년 사이에 조정의 정사가 탁란(濁亂)하고 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지며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졌으니,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더구나 정릉(靖陵)은 안장(安葬)한 지 거의 20년이나 되었는데, 장경 왕후와 같은 무덤인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옮기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차마 그렇게 했단 말인가. 또한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사신은 논한다.

윤비(尹妃)는 천성이 엄의(嚴毅)하여 비록 상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수렴청정(垂簾聽政)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하는 것도 모두 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불교에 마음이 고혹(蠱惑)되고 환관을 신임해 나라의 창고를 다 기울여 승도(僧徒)들을 봉양하고 남의 전지와 노복을 빼앗아 내수(內需)를 부유하게 하며 상벌(賞罰)이 참람해 사람들이 권계(權戒)되지 않았다.

?게다가 권세가 외척으로 돌아가 정사가 사문(私門)에서 나오고 뇌물이 공공연 행해지며 기강이 문란하고 국세(國勢)가 무너져 장차 구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명종 대왕이 전의 잘못을 깨달음에 따라 장차 크게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는데, 정령(政令)을 베푼지 오래지 않아 문득 승하하니, 아, 슬픈 일이다.

 문정대비의 능호는 논의 끝에 태릉(泰陵)으로 결정되고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하고 있는 곳에 묻힌다.

그녀의 아들인 명종은 평상시에도 병약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명종실록》에 의하면, 어머니인 문정대비의 발인이 명종 20년 7월 13일 자시(子時)에 거행이 되었는데, 명종은 “병환으로 문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최질(衰?) 만 갖추고 빈전(殯殿)의 동쪽 뜰에서 곡송(哭送)할 뿐이었다.

” 하였다.

 문정대비가 죽자 조선의 불교 배척을 막아줄 가림막은 없어져 연이어 보우대사를 처형하라고 요구하는 상소가 줄을 잇는다.

그러나 처음 명종의 심사를 알지 못하여 잠시 머뭇하자 명종은 경연에서 한나라 문제가 외삼촌 박소를 죽인 사례를 언급하면서 이를 윤원형 공격의 신호탄으로 여겨서 모두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보우대사가 문정대비를 꾀어서 소선의 상태로 무차대회를 열게 하여 건강을 해쳐 일찍 죽게 하였다는 죄목을 걸어서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소가 연일 거듭되자, 명종은 처음 승직(僧職)만 삭제하여 서울 근처의 사찰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도록 명하나?유생들의 탄핵상소가 계속 이어지고, 그해 6월 율곡 이이가〈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로서 그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명종은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보우대사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1565년 8월 3일, 대사헌 이탁·대사간 박순 등이 윤원형의 죄악을 26개의 죄목을 적시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윤원형에 대한 탄핵을 요구하는 상소가 연일 이어진다.

대사헌 이탁·박순이 올린 윤원형의 주요 혐의의 내용은 첩으로 정처를 삼고, 그녀의 딸과 덕흥군 이초의 아들과 혼사를 의논한 것에 대하여 가장 먼저 언급하면서, 천출의 자식을 감히 왕가에 들여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실부인 김씨의 재산을 빼앗아 굶어 죽게 했고, 도망노비들을 비호했으며,?난정이 궁중출입을 마음대로 하였다며 비판하고 있다.

상소의 내용은 강상(綱常)의 죄를 가장 먼저 적어 신분질서의 파괴가 가장 중요한 죄목임을 보이고 있다.

대사헌 이탁(李鐸), 대사간 박순(朴淳) 등이 아뢰기를,  “영의정 윤원형은 왕실(王室)의 골육지친으로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령(政令)을 제 마음대로 결정하여 행하고 보위(寶位)를 농락하였으며, 임금의 위엄과 권세를 장악하고 기세등등해 거리낌없이 날뛰었으며, 임금을 위협하여 제압하고 궁금(宮禁)을 곁눈질해 신하로서의 예절을 조금도 지키지 않았으며,?심지어 모든 신료들의 입을 틀어막고 나라 안의 모든 이권(利權)을 긁어모아 팔도(八道)에서 보내오는 물건이 봉진(封進)하는 것보다 백배나 되며, 모든 관리들이 임금보다 그를 더 두려워하여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이 사람에게 보고한 뒤에 행함으로써, 전하는 위에서 고립되어 실권없는 빈 자리만 지키시고 벼슬아치들은 아래에서 몹시 두려워하여 조석(朝夕)을 보존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중략) 첩으로 정처(正妻)를 삼는 것은 《춘추(春秋)》에서 크게 경계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이런 일이 더러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모두 제왕이 한 일이고 신하로서는 차마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윤원형은 방자하게 명분을 무시하고 조정을 협박하여 임금의 총명을 속여 첩으로 부인을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법도를 무너뜨리고 기강을 문란시켜 위로는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래로는 만세의 비난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 좋은 것만 알았고 그 이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으니, 우리나라가 개국한 이래로 신하로서 감히 이와 같은 일을 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의 아들은 중묘(中廟)의 손자인데 감히 자기 첩의 딸로 혼사를 의논했습니다.

대체로 측실(側室)의 딸을 사대부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옹주(翁主)를 하가(下嫁)하는 예법인데, 윤원형이 이 예로 자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가짐과 처사가 걸핏하면 스스로 궁금(宮禁)에 비기니, 신하로서 하는 짓이 이와 같고서 임금을 업신여기고 핍박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또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환후가 크게 악화되었을 때, 첩을 보내어 사가와 다름없이 제멋대로 대내로 들어가서 날마다 3전(殿)에게 직접 문안드리게 하였습니다.

나인들이 좌우로 열 지어 늘어서 있는데 외신(外臣)의 소첩이 조금도 거리낌없이 당돌하게 곧바로 들어가고, 심지어는 내의(內醫)에게 호령하며 함부로 잡약(雜藥)을 올렸는데 의관(醫官)이나 제조(提調)들은 그 약이 맞지 않는 것인 줄 아나 감히 말리지 못하였습니다.

?옛날에 교활하고 방자하기로 소문이 났던 중국의 왕망(王?)이나 동탁(董卓)의 처첩들이라도 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을 캐어보면 일조 일석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윤원형은 평생에 임금을 안중에 두지 않았고 궁금을 업신여겼으니 그의 생각은 모두가 오만 무례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런 일을 편안히 여기고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팔도의 진영(鎭營)과 여러 고을에는 추종하는 사람을 여기저기 배치해 놓고 바다와 육지로 끊임없이 그 집 문에다 물건을 수송해 10여 채의 커다란 집에는 진기한 보화들이 가득 차 있으니, 사가(私家)가 나라보다도 부자이고 개인이 임금보다도 사치스러우며 여러 고을은 황폐하여지고 나라의 근본은 날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집에는 항상 거처하는 곳처럼 공장(供帳)·집기·노비·음식을 빠진 것 없이 고루 갖추어놓고 마음 내키는 집에 가서 침식하였습니다.

곡식이 썩어나자 흙같이 천하게 여겨 ‘이런 것은 오래 저장하기 곤란하다.

’ 하고, 유기(鍮器) 장사를 모두 부르자, 온 시장이 이름 있는 좋은 그릇을 모두 수레와 말에 싣고서 구름처럼 그의 대문 앞으로 모여들어 쌀과 교환하니 그릇더미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기는데도 윤원형은 스스로 훌륭한 계책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수상(首相)의 신분으로 감히 장사꾼처럼 행동하였으니 얼마나 나라를 욕되게 한 것입니까. 간석지를 많이 막고 연해(沿海)와 내지(內地)에 있는 양전(良田)을 점령하여 관(官)에서 종자를 대어주고 수령이 농사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니, 백성은 모두 경작 개간하는 종이 되고, 온 나라의 죄짓고 도망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들었습니다.

더구나 팔도에 반력(伴力)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고을이 없으니 이는 참으로 나라를 나누어 스스로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억세고 사나운 종을 조종하여 남의 아내를 약탈하고 남의 농토를 강탈하였으며,?심지어 세도를 믿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데도 수령이 감히 막지를 못하고 조정이 감히 말하지 못하며 부모를 죽여도 감히 고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윤원형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렇게 극도에 달했으니 전하의 세력이 날로 고립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문정 왕후께서 승하하시던 날 부음을 듣고 입궐하였으면, 당연히 가슴을 치고 땅을 구르며 통곡해야 할 것인데 평시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밥을 먹었고, 또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 산릉 도감(山陵都監)에게 부탁하여 감역(監役) 등의 벼슬을 시키게 하였으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의 행동거지가 이처럼 태연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대행(大行)을 재궁(梓宮)에 모실 때에도 들어가 참관하였는데,?다른 사람은 모두 실성 통곡하는데도 윤원형은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상사(喪事)는 속히 진행하는 것이 좋다.

’고 말하고, 재촉하여 관 뚜껑을 덮었으니, 당시에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놀랐습니다.

 문정 왕후가 윤원형에게 지위로는 국모(國母)이시고 친분으로는 동기(同氣)이시며, 평생에 받은 은총은 하늘과 같이 넓고 커서 망극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건만 슬퍼하는 마음이 없으니, 이는 심장이 얄팍하고 아주 포학한 소인의 소행이라 아무리 윤원형이라도 자기 마음이 이런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윤원형을 속히 귀양보내시어 재앙의 빌미를 막으소서.“ 하니, 【이날 양사(兩司)가 모두 정원 문 밖에 모여 있었는데 소매 속에 품고 간 탄핵문을 정원에 내놓지 아니하고 곧바로 승전 색에게 주어 입계하도록 청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기미가 중대한 데에 관계되는 일이라 경솔하게 누설시킬 수 없다고는 하더라도 정원은 직책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곳인데 지금 정원에 들이지 않았으니 승지가 장차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는가? 큰 위세에 겁을 먹고 잘못 처리하였으니, 이것이 한때 우연한 실수이기는 하나 후일에 구실을 붙일 자가 없을 것인가?】답하기를,  “이 아뢴 내용을 살펴보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첩을 정처로 삼은 것은 첩이 이미 천인이 아니므로 가모(家母)를 삼은 것이다.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와 혼인을 의논한 것은 첩의 자식이라고는 하더라도 이미 허통(許通)하였으므로 의논한 것이다.

또 문정 왕후께서 미령하실 적에 첩이 와서 약을 의논한 일을 영상이 어찌 알았겠는가.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은 영상이 몰랐을 것이다.

?비록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가는 먼저 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니 원훈 대신(元勳大臣)을 귀양보내는 이치가 어디 있는가? 평상시에도 대신을 경솔하게 진퇴(進退)시킬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내가 상중(喪中)에 있는 지금에랴. 윤허하지 않는다.

” 하였다.

두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원형의 권력은 매우 커서 한 때에는 선조 때 동인의 영수이던 김효원(金孝元)이 윤원형의 집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이던 이조민의 친구였는데, 뒷날 심의겸이 면전에서 공박하고 이를 공론화하면서 두 사림의 사이가 벌어져 동서 분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 당시 동서 분당의 주역은 김효원과 심의겸이었다.

그 갈등의 원인은 심의겸이 우연히 윤원형 집 앞을 지나다가 김효원이 그 집 대문에서 나오는 걸 보고 시작되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같은 소인배 집에서 식객으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여 김효원은 소인배라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자 소인배라 맹비난하여 두 사람이 다투면서 동서분당의 원인이 되었다.

 이를 심의겸이 서류결재를 위해 윤원형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을 드나드는 식객들에게 쓸 무수한 이부자리를 보았다.

심의겸은 한심하여 그 이부자리가 누구 것인지를 하나하나 물었는데 그 중 김효원의 이름이 있었다.

이에 심의겸은 김효원이 벼슬자리 얻자고 권력자 집에 드나드는 소인배로 보았다.

?당시 김효원은 아직 벼슬이 없었으나 재야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의겸은 이를 기억하였다가 후에 김효원이 과거급제하고 신고식 할 때, 김효원이 윤원형이네 집에서 빌어먹던 식객이라고 하였다.

이에 김효원은 장원급제하고도 몇년간 한직을 머물렀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러나 문정대비가 죽자, 문정대비에 의지하여 승승장구하였던 윤원형의 운명도 ‘끈 떨어진 연’ 이요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고 만다.

문정대비의 국상기간에는 그래도 상소가 잠시 주춤하였으나 국상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림파는 척신 세력의 상징인 윤원형과 보우대사에게 화살을 겨누어서 집중공격하기 시작한다.

?9월 8일에는 형조에서 윤원형의 처인 김씨의 독살을 호소하는 장모 강씨의 소장을 올리며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친다.

 형조가 아뢰기를, “고(故) 현감 김안수(金安遂)의 처 강씨(姜氏)가 전후로 소장을 올리기를 ‘사위 윤원형은 젊었을 때 딸 김씨와 결혼하여 여러 해를 함께 살았는데, 정윤겸(鄭允謙)의 서녀 정난정(鄭蘭貞)을 얻은 이후 임금을 속여 내쫓고, 김씨의 사환(使喚) 비(婢) 구슬이(仇瑟伊)·가이(加伊)·복한(福漢)·복이(福伊)와 노(奴) 향년(香年)·복년(福年)·허년(許年)·명장(命長) 등을 잡아두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도리어 종들로 하여금 원주인을 능멸하고 모욕하게 하였고, 그의 가산(家産)을 모두 빼앗고 마침내 종적을 없애 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씨가 매우 굶주려서 정난정에게 먹을 것을 구하자 정난정이 음식 속에 독약을 집어넣고 몰래 구슬을 시켜 김씨에게 올리게 하여 김씨가 먹고 즉시 죽었습니다.

온 집안이 모두 그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나 대단한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소장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 하였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본조가 마음대로 처단할 수 없으니 금부로 보내겠습니다.

"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명종실록》 명종 20년 1565년 9월 8일 신축 1번째기사) 모든 대신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자신들을 공격하자, 이러한 윤원형과 정난정은 벼랑끝에 선 심정이었으나 그래도 외조카 명종이 결코 자신들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 부부가 간과하였던 것은 성리학의 유교 국가인 조선의 가치관에 비추어 볼 때 불교의 부흥을 꾀하였으며 적처를 내치고 정부인이 되고 서얼차대법을 개정하는 것은 신분질서에 도전한 것으로 얼마나 큰 죄악인지 간과한 것이 이들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형조는 난정이 윤원형의 부인인 김씨를 독살혐의를 수사하기 위하여 김씨의 종이던 구슬이 등을 문조하여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두 죽고 주거리(注巨里)하나만 남고 모두 맞아 죽였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결정적인 자백을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심한 고문에도 의도한 결과가 나오지 않자 ?10월 14일 좌부승지 홍인경이 직접 정난정의 추국을 청하고 윤원형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종은 한동안 시간을 끌면서 외삼촌의 처벌에 대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상소가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윤원형의 관직을 삭탈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인 1565년 8월 21일, 윤원형은 결국 파직되어 황해도에 있는 강음 땅으로 방귀전리(放歸田里) 되었다.

‘방귀전리’ 라고 하는 것은 ‘풀어 고향에 돌아가게 한다’ 는 뜻이니, 유배형보다 한 등급 아래 가벼운 조치로서 벼슬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내쫓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이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윤원형의 목숨을 요구했으나 명종입장에서 문정대비의 3년상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외숙을 죽인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 사관은 《명종실록》명종 20년 10월 22일 1번째 기사를 통하여 이를 평가하고 있는데, 윤원형이 첩으로 처를 삼도록 하여 ‘적첩의 명분이 문란하게 되어 기강이 무너졌고, 정난정이 김씨에게 독을 넣어 죽인 것이 강상(綱常)의 변’ 이나 바로잡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윤원형이 첩으로 처를 삼고자 은밀히 문정 왕후에게 부탁하여 정난정을 부인(夫人)으로 명하니, 적첩(嫡妾)의 명분이 문란하게 되어 인륜의 기강이 무너졌다.

정난정이 이미 부인이 되고 보니, 또 김씨가 그대로 있으면 자신에게 해로움이 있을 것을 염려해 독을 넣어 그를 죽였다.

?살인한 자를 죽이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상법(常法)이다.

길가는 사람이 길가는 사람을 죽여도 참혹하다 하거늘 하물며 얼첩(孼妾)이 주모(主母)를 해쳤으니 이는 강상(綱常)의 일대 변이다.

윤원형이 이미 몰락했고 공론이 계속 일어났으니 또한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직도 그 죄를 국문해 율(律)을 바로잡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런데 명종 20년인 1565년 11월 13일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이 자살했다.

정난정은 연일 대신들이 남편인 윤원형과 자신의 처벌을 주장하고 자신에게도 역시 직접 추국하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이어지는 것을 보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에는 의금부로 끌려가서 고문을 받아 추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정난정은 죽음을 예감하고는 항상 품속에는 항시 독약을 품에다 지니고 다니면서 자신의 최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주변의 측근들에게 만약 자신을 잡으러 누가 오면 이를 알려달라고 부탁하여 놓고 있었다.

그녀는 죽더라도 소나 개 돼지처럼 추한 꼴로 죽기는 싫었다.

더구나 연일 상소를 통해 적처 자격을 박탈할 것을 요구하여 정경부인 자격을 잃은 천첩신분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금부도사가 평안도 진장(鎭將)을 잡아 가지고 금교역(金郊驛)에서 말을 바꾸어 타고 있었는데, 윤원형의 집종이 이를 보고 달려와 고하기를 ‘도사가 금방 오고 있다.

’ 고 이를 고하자, 난정은 금부도사가 자신을 죽이려고 온 것으로 알고 착각하여, 남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차라리 자살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해 독약을 마시고는 자살한 것이다.

당시 11월 13일 정난정의 죽음의 상황에 대해《명종실록》은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김씨를 독살한 정상은 환하게 드러나 의심이 없어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인데, 다만 윤원형을 두려워해 감히 신인(神人)이 함께 격분할 죄상을 발설치 못함이 여러 날이었다.

그 일에 간여된 계집종들을 다 문초했는데 그 음흉한 비계(秘計)는 정난정도 스스로 천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항상 독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나를 잡으러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약을 먹고 죽을 것이다.

’라고 하였었다.

마침 금부 도사가 평안도 진장(鎭將)을 잡아 가지고 금교역(金郊驛)에서 말을 바꾸어 타고 있었는데, 윤원형의 집 종이 이를 보고 달려와 고하기를 ‘도사가 금방 오고 있다.

’하니, 윤원형은 소리내 울며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정난정은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음만 못하다.

’ 하고 약을 마시고 바로 죽었다.

(하략)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넋을 잃은 윤원형은 그녀를 장사지낸 뒤 닷새 후인 11월 18일 똑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윤원형과 난정 부부의 동반자살 소식을 들은 신료들은 쾌재를 부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양반사대부들은 정난정이 죽은 후 천민으로 환원시켰지만 자식들만은 양반으로서 남았다.

?부모가 죄인으로 되기 전에 죽었으므로 그들은 공식적으로 죄인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종실록》명종 20년 11월 18일 5번째기사는 ‘윤원형의 졸기’ 가 실려 있다.

 윤원형의 졸기 윤원형이 강음(江陰)에서 죽었다.

처음 윤원형은 물론을 입어 재상에서 파면되었는데도 며칠을 지체하며 머물러 있다가 동문 교외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그치지 않고 공론이 더욱 격렬함을 듣고 끝내 면하기 어려움을 알았으나, 또 가산이 흩어질 것을 염려해 어둠을 틈타 부인의 행색처럼 밤에 교자를 타고 도성에 들어와 집으로 돌아왔었다.

이어 그의 첩 정난정과 더불어 강음 전사(田舍)에 가서 거처하였는데, 정난정의 죽음을 보고 드디어 분울해 하다가 또한 죽었다.

 윤원형이 사림들을 풀베듯 죽이며 흉악한 짓을 있는 대로 다했는데,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더니 금일에 이르러 마침내 핍박으로 죽으니, 조야가 모두 쾌하게 여겼다.

윤원형이 일단 패하고 나니 원수졌던 집에서 떼를 지어 빼앗겼던 재물에 대한 송사를 다투어 일으켰다.

?조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바로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관원을 차출해 재물들을 본주인에게 돌려주게 하니 그 집안에서도 온갖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임금은 위사(衛社)의 공이 있다 하여 3등의 장례를 하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전대의 권간으로 그 죄악이 하늘까지 닿기로는 윤원형 같은 자가 드물 것이다.

중종 말년,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사자(嗣子)가 없음을 보고, 그의 형 윤원로(尹元老)와 더불어 서로 어울려 헛소문을 만들어 동궁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문정 왕후가 안에서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대윤(大尹)이니 소윤(小尹)이니 하는 말이 있게 되어 중종이 이 걱정으로 승하하였다.

혹자는 동궁이 실화한 것이 모두가 윤원형 등의 행위라고 하였다.

그 뜻이 또한 흉참하다.

[정난정] 세상에나..

 인종이 승하함에 미쳐, 윤임(尹任)을 핍박해 내쫓고는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다가 끝내는 윤임이 다른 마음을 가졌다 하였으니, 실은 윤원형 등이 빚어낸 말이었다.

이 이후로 사림들 가운데 당시 명망이 있던 사람들을 일체 배척해 모두 역적의 무리로 몰아, 죽는 자가 계속되었다.

명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문정 왕후의 제재를 받아 자유롭지 못했는데, 윤원형은 무슨 일이고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 왕후와 내통해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해 임금의 우분(憂憤)이 언사와 안색에까지 나타나게 하였다.

 내수(內竪) 중 혹 이를 아는 자가 있으면 윤원형은 궁인들에게 후히 베풀어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때문에 임금의 일동일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상이 내수에게 ‘외친이 대죄가 있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 하였는데, 이는 대개 윤원형을 지칭한 것이다.

이 말이 누설되어 문정 왕후에게 알려졌는데 문정 왕후가 이를 크게 꾸짖어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다면 상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하니, 상이 감히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군국(軍國)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와 상은 내심 그를 미워하여 이양(李樑)을 신임해 그 권한을 분산시켰다.

 정사를 잡은 지 20년, 그의 권세는 임금을 기울게 하였고 중외가 몰려가니 뇌물이 문에 가득해 국고보다 더 많았다.

윤원로의 권세가 자기와 비슷해짐을 저어해,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해 그 죄목을 열거해 글을 올리게 해 죽게 하였고, 천첩을 몹시 사랑해 정처를 버리더니 필경 그를 독살하는 변을 빚었고 이어 첩으로 부인을 삼았다.

첩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모두 사대부가에 혼인시켰고?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 첩의 자식도 벼슬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을 힘써 내세워, 이를 미봉하였다.

당시의 재집(宰執)들이 휩쓸려 그를 따랐지만 오직 임권(任權)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기타 흉악한 죄들은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 해도 다 셀 수 없다.

비록 견출(譴黜)이 가해졌으나 체형(體刑)을 면했으니, 세상인심의 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들이 죽자 이들이 뇌물과 각종 이권을 통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하였던 물건들은 원주인에게 돌려졌다.

이들의 시신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산 4-20에 자리잡고 있는 파평윤씨 정정공(貞靖公) 윤번(尹?)을 중시조로 하는 정정공파 묘역(경기도 기념물 182호)에 묻혀있다.

?이곳의 비석에는 ‘ 정윤겸의 서녀, 초계정씨 난정지 묘’ 라고 씌어 있고, 약간 밑에는 윤원형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옆으로 자리잡고 있는 비석의 글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파평 윤공 원형지 묘’ 라고 씌어 있다.

 이들 부부는 사후 역적으로 매도되었으나 융희 1년인 1907년 11월부터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1월 작위와 직책이 회복되고, 4월에 죄적에서 삭제되며 명예 회복하였다.

그가 죽고 난 후 자신의 조타 명종에 의하여 다시 복권될 수 있었으나 명종이 문정대비 사후 2년만에 요절하면서 그에 대한 복권의 가능성은 사라져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조선말에 이르러서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이완용의 힘을 빌려서야 그는 사후 복권되었다.

  《참고》윤원형과 정난정 관련 드라마 윤원형과 정난정에 대한 이야기로 제작된 드라마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교동 마님》 (MBC, 1981년, 배우: 오지명)《풍란》 (MBC, 1985년

1985년, 배우:한인수)《조광조》 (KBS, 1996년

1996년, 배우:이영후)《임꺽정》 (SBS, 1996년

1997년, 배우:박근형)《여인천하》 (SBS, 2001년

2002년, 배우:이덕화)《불멸의 이순신》 (KBS, 2004년

2005년, 배우:최병학)《천명》 (KBS, 2013년

2013년, 배우:김정균)《옥중화》 (MBC, 2016년

2016년, 배우:정준호)  《후기(後記)》  윤원형과 난정은 오늘날까까지도 누이 문정왕후에 의지해 권력을 장악하고 수많은 사림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후 이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상단에서 이권을 도모해 부를 쌓아 축재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긁어모아 요부 정난정과 함께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은 간신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들이 부와 영화를 누리는 과정에서 사회윤리를 저버리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였던 점은 사회적으로 비난반아서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5백년동안 권력을 독점하여 살면서 유교를 신봉하던 일부 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만이 반영된 역사적 산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고려 당시 끼친 해악이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 내내 불승은 천역을 담당하고 멸시를 받으면서 양반사대부로부터 핍박받았던 불교의 시각에 있어서나, 부모를 잘못 만난 죄로 엄격한 신분제도의 굴레에서 고통받으며 신음하였던 서얼과 민초의 입장에서 이를 재조명 하여 보면. 일면 사회개혁가로서의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 땅에 사는 사람들간에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어 하나로 뭉치게 하는 동질감내지 연대감을 희석내지 없애서 조선의 역사발전을 가로막아서 근대화를 늦추어 일본의 식민지화를 초래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조선이 일본에 침탈당할 때 매천 황현이, 나라가 망하여도 자결하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라도 자결한다고 말하였듯이 조선이 정작 망할 때 그토록 신분질서를 목숨과 같이 중히 하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일부 사대부들만이 의병운동과 국권수복운동에 참가하였을 뿐이었다.

?조선 양반들은 귄리만 있고 백성으로서의 나라를 지탱하게 하는 세금과 나라를 지키는 국방의 의무는 저버렸기에 양반의 수족이었던 천민에게서나 국가의 평민들은 나라를 뺏기는 것도 다른 지배자들의 전환에 다름 아니라는 시각을 가졌을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관이 윤원형의 ‘서얼차대법’ 폐지가 자신의 소생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할지라도 그가 추구하려던 이러한 신분제도의 철폐를 위한 ‘서얼허통제’ 는 조선사회의 나갈 방향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한 사람은 요부, 한 사람은 간신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었기는 하였지만 이들은 일시적이나마 이와 같은 신분의 연좌제와 같은 제도속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빛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어제 채널돌리다가 옥중화 포착연기들이 장난아니심왕기대되는 작품입니다옥중화 정난정 박주미인데요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첩으로 나오는데나중엔 안방까지 차지한다네요미모와 연기 다되는줄은 알았지만 이정도인줄은 몰랐네요당찬연기 오오소름돋았음이분은 전옥서서리인데요남들이 인정하는 옥녀의 양아버지입니다거리에서 옥녀엄마 배그린을 만나는데요임신중 거리를 헤메는 배그린을 내치지만 결국 전옥서에서 출산을 하도록 도와주죠첨엔 옥중화 옥녀를 내버리지만 어쩌다 다시 전옥서로 돌아온 옥녀를 내칠수없어 그곳에서 키우게 됩니다옥중화 줄거리에서 궁금한게 있어요배그린은 누구고, 옥녀는 누구아이인가요?옥중화 2회 줄거리보면 옥녀가 나의아버지는 윤원형이라고 하는데..그래서인가요?부하들을 시켜 배그린을 잡아오라 명하지만 작전실패하고 그런 부하를 단칼에 베어버린 정준호옥중화 정준호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온갖권력을 다 행세하고 있죠어느덧 15년이지났습니다그동안 어린옥녀 정다빈은 잘자라주었습니다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며 옥중에서 온갖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지식까지 쌓았습니다이분은 전우치영화 전우치? 그 ..분?활약기대할게욥어느날 윤원형이 전옥서를 찾아 신통방통한 누군가를 찾는데, 거기서 옥녀를 만나게됩니다옥녀가 앞으로도 전옥서에서 살수있을지고수와는 어떤인연을 맺을지 기대해봅니다옥중화 2회 에서는 큰 옥녀 진세연과 고수가 나오겠죠?근데 어린옥녀랑 큰옥녀 완전 닮았음^^옥중에서 동냥젖먹으며 잘자라준 옥중화 옥녀이야기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옥중화 줄거리 끄읏또가져올게요 ㅎ

    -2015 드라마 <옥중화>에서 정난정-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평소에 선비들을 도륙한 것을 언짢아하던 명종은  자신의 외삼촌인 윤원형과 정난정을 황해로 유배보냈고 문정왕후가 아꼈던 승려 <보우>를 죽이고 불교를 탄압했죠.   .         정난정 죽음? 윤원형 죽음?  결국, 정난정은 자살하고  윤원형은 정난정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다가 얼마 후 죽자 모두가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이 후로는,,  사림파가 조선 정계의 주도세력이 되었고 ?저희끼리 권력을 놓고 다투어,  동인, 서인, 남인, 북인, 탁남, 청남, 대북, 소북, 노론, 소론, 벽파, 시파 등,, 수많은 파벌들이 등장해 죽고 죽이는 당쟁에 몰두하여 국력을 소모하게 되었죠.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후, 2년 뒤


 1567년 34세에 죽고,


  얼떨결에 잿팟터진,, 하성군(훗날 선조)가 왕위에 즉위하게 되죠

    http://ceo_zeus.blog.me/70168224771?? ??? & ??(??? ??) ???? ?????? ????] <?? ??> <?? ?? ??> ?? ??? & ??(??? ??) ??...blog.naver.com       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학습|구독자:953|구독하기 인종 독살설, 문정왕후와 정난정 죽음 인종 가계도, 인종 죽음은 독살??인종 죽음 후, 명종 어머니 문정왕후 섭정명종, 을사사화는 문정왕후 노림수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 1. 인종가계도와 인종의 죽음은 독살설(?)2. 인종 죽음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3. 정치적음모 을사사화의 뒷배는 문정왕후...더보기 2016.05.24 11:47      Zeus' History in Drama (드라마속 역사)학습|구독자:953|구독하기 인종 독살설, 문정왕후와 정난정 죽음 인종 가계도, 인종 죽음은 독살??인종 죽음 후, 명종 어머니 문정왕후 섭정명종, 을사사화는 문정왕후 노림수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 1. 인종가계도와 인종의 죽음은 독살설(?)2. 인종 죽음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3. 정치적음모 을사사화의 뒷배는 문정왕후...더보기 2016.05.24 11:47 com/msk7613   1552년 3월 14일 명종이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입시한 시강관(侍講官)은 정준(鄭浚)이었다.

정준(鄭浚)은 윤원형(尹元衡)의 첩 정난정(鄭蘭貞)의 종형(從兄)으로 사람들이 그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비행을 규탄하지 못하였다.

6월 18일 정준(鄭浚)을 사헌부 집의로 삼았다.

정준은 윤원형을 상전처럼 섬겼다.

정준(鄭浚)의 서얼(庶?) 종매(從妹)인 정난정(鄭蘭貞)은 바로 윤원형의 첩이었다가 처가 되어 부인(夫人)에 봉해진 여인이다.

정준은 음험하고 경박한 성품으로 윤원형의 위엄을 빌어 대관(臺官)이 되어 마음내키는 대로 인물들을 공격하였다.

그래서 정준과 의견을 달리하는 자로서 욕을 당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다.

1563년 1월 17일 윤원형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삼았다.

윤원형(尹元衡)의 집 대청을 신 받드는 곳으로 만들어 굳게 닫아 걸고 그의 첩 정난정(鄭蘭貞)만이 윤원형(尹元衡)의 집을 출입하면서 음탕하고 간악한 짓을 자행하였다.

  5월 17일 간원이 아뢰기를 “남원 부사(南原 府使) 황윤관(黃允寬)은 본래 탐욕많은 비루한 사람으로 이르는 곳마다 폐단을 지어 모두 쇠잔하게 만들었으므로 공론에 용납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남원부사 직을 제수한 당초에도 거듭 탄박(彈駁)을 받았으니 의당 두려워하며 중지하였어야 하는데 부임한 이래로 범람한 형상이 전보다 배나 더하여 관고(官庫)의 저장물을 자기 물건처럼 여기고 육로(陸路)와 해로(海路)로 거리낌없이 수송하며 한없이 거두어 들이므로 온 경내가 원망하고 고통스러워 하며 물의가 들끊어 통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를 파직하여 나머지 사람을 징계하게 하소서.”하였다.

황윤관이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의 딸을 양녀로 삼아 부아(府衙)로 데리고 가서는 그 세력을 믿고 탐욕하고 방종하여 관고의 물건을 육로와 해로로 실어 나르는가 하면 물건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온 경내가 원망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1565년 8월 27일 양사가 아뢰기를 “국가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명분과 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실과 첩실은 분별이 엄중하여 명호가 한번 정하여지면 하늘과 땅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귀천과 존비의 예절이 한 번 뒤바뀌게 되면 기강(紀綱)을 세울 수가 없어서 끝내는 문란하게 될 것입니다.

윤원형의 첩 정난정은 관비 소생인데 윤원형이 자기에게 고혹된 것을 믿고서 적실 자리를 빼앗을 계책을 세워 온갖 방법으로 참소하여 윤원형으로 하여금 정처를 내쫓고 자기를 올려 부인을 삼게 하였으니 개정하지 않는다면 3강 5륜(三綱 五倫)이 이로부터 질서를 잃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정처와 첩실인 적첩(嫡妾)을 구분하기 위해 부인첩(夫人帖)을 환수(還收)하소서.”하였다.

  9월 8일 대사헌 이탁(李鐸), 대사간 박순(朴淳) 등이 아뢰기를 “윤원형의 첩 정난정은 영비(營婢)의 소생인데 윤원형이 정처를 버리고 부인으로 올리기를 도모했으니 이는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할 수 없는 강상(綱常)에 큰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데도 즉시 개정하지 않으면 이륜(?倫)의 차서를 잃어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은 ‘만약 정난정의 작첩(爵帖)을 거둔다면 정실과 첩실의 명분이 저절로 바른 데로 돌아갈 것이다.

’고 생각했는데 물의가 ‘남편이 죄를 지어 이미 관작을 삭탈당했으니 첩의 작첩은 해 조가 자연히 환수해야 하는 것이니 논계할 필요조차 없다.

’고 합니다.

신들은 외람되게 언관의 자리에서 정처와 첩실의 대사를 논하며 그 글의 문자를 구성할 적에 내용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니 미안합니다.

그리고 또 지난 날 윤원형의 죄목을 논할 때 윤원형이 처 김씨를 버려 독물에 의해 죽은 것은 중외에 전파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신들은 사실을 잘못 듣고 굶어 죽었다고 힘써 아뢰었습니다.

지금 형조가 입계한 말을 보니 신들이 실상을 잘 모르고 매우 잘못 아뢰었으니 신들을 체직하소서.”하였다.

  10월 14일 좌부승지 홍인경(洪仁慶)이 위관(委官) 이명(李蓂)의 뜻으로 아뢰기를 “모든 옥사는 먼저 정범부터 가둔 다음에 사간(事干)을 추열하는 것이 예입니다.

김씨(金氏)를 해친 사람은 도피할 의심이 없기 때문에 우선 사간 구슬(仇瑟) 등 각 인을 추문했더니 정난정(鄭蘭貞)의 지휘를 받아 김씨를 살해하였다는 사건의 정상이 명백해져서 의심이 없습니다.

정난정을 잡아 가두고 추국하소서.”하니 명종이 전교하기를 “근년에 인심이 완악하고 거짓스럽다.

구슬 등이 비록 정난정에게 핑계를 대고 있으나 정난정이 어찌 직접 김씨를 죽였겠으며 또 어찌 아랫 것들을 교사하기까지 하였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0월 22일 위관(委官) 이명이 아뢰기를 “전일 형문(刑問)한 사람은 이제 모두 죽고 단지 주거리(注巨里)만 남았습니다.

정난정(鄭蘭貞)이 김씨를 독살한 일의 정상은 온 집안 여종들이 이미 다 이실직고하여 분명히 드러나 의심이 없습니다.

정난정을 잡아들여 옥사를 끝내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이 옥사의 내용을 보니 원한에서 나온 것 같다.

여종들이 이제 다 죽었으니 여기에서 그쳐야 한다.

정난정을 잡아다 추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아뢰기를 “정난정이 주모를 독살한 죄상은 비복들의 초사(招辭)에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즉시 법에 의해 잡아들여 국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간은 거의 다 장하(杖下)에서 죽고 정범은 아직도 잡아다 문초를 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죄수를 신문하는 법에 어긋날 뿐 아니라 강상을 범한 중죄인을 천지간에 숨을 쉬며 오래도록 살게 하므로 여론이 매우 울분해 합니다.

정난정을 잡아다 추고하여 왕법을 바로잡으소서.”하였다.

   10월 25일 홍문관 직제학 이식(李拭) 등이 상차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의 죄이지만 관계되는 바는 매우 무겁고, 한 법이 폐지되지만 관련되는 바는 지극히 중대합니다.

만약 혹시라도 사(私)를 따라 법을 무너뜨리고 죄가 있어도 죄를 묻지 않는다면 악을 행한 자를 징계할 길이 없어 장차 인륜을 없애고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데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지금 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한 것에 대해 온 나라 사람이 통분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간의 공술이 하나도 의심할 것이 없다면 정범을 잡아 국문하는 것은 사법상 당연한 일인데 대신들이 누차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고 양사(兩司)가 번갈아 글을 올려도 따르지 않으니 이 것이 모든 심정이 함께 민울해 하는 바입니다.

첩의 신분으로 주인의 부인인 주모(主母)를 살해하였다는 것은 강상의 큰 변고입니다.

죄수를 신문함에 3성(三省) 교좌(交坐)함은 왕옥(王獄)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간의 공술이 혹시 미비하더라도 정범을 또한 신문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증좌(證左)가 분명한데도 그 정범을 신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구슬(仇瑟)의 공초는 이미 형조의 일반 신문 때 다하였고, 손비(孫非)의 공술도 의금부인 왕부(王府)가 처음 국문하던 날에 끝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것이 수원(?怨)과 전파(傳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난정은 요망하고 음란한 인물로 고혹의 술수를 부려 총애를 독점하고 적실(嫡室)을 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부인(夫人)이 되었으니 이 것이 그 주모를 살해할 조짐이었습니다.

명분을 범하였으니 뜻이 이미 참람해져서 공모하여 독을 넣은 것은 그 화가 비로소 커진 것입니다.

이 것이 어찌 1조 1석에 생긴 일이겠습니까. 총애를 독차지하고서도 부족해 그 적실을 폐하고자 하였다면 그를 폐하고 또 살해할 것을 모의해 후일의 계책으로 삼았다는 것에 무슨 의심이 있겠습니까. ?순(舜) 임금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을 하면 법(法)을 세워 형벌을 제정하고 옥(獄)을 만든 순(舜) 임금의 신하인 고요(皐陶)가 잡아들이더라도 순(舜)이 이를 금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법에도 일정함이 있어 천자도 사사로이 할 수 없고 유사(有司)도 감히 폐할 수 없어 오직 천하가 공평히 할 따름인 것입니다.

천자의 아버지가 살인을 해도 용서가 안되는데 하물며 외척의 한 천첩이겠습니까. 근래 세상의 도덕이 날로 쇠퇴하고 풍속이 점점 사악해져 종이 주인을 모해해도 이를 징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강상에 관한 막대한 죄가 있는데도 왕법을 바루지 않는다면 이는 법과 기강의 괴란(壞亂)을 조정에서부터 여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속히 공론을 따라 왕법을 바루소서.”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11월 13일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이 자살했다.

김씨를 독살한 정상은 환하게 드러나는 소저(昭著)하여 의심이 없어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지만 윤원형을 두려워해 감히 신인(神人)이 함께 격분할 죄상을 발설치 못함이 여러 날이었다.

그 일에 간여된 계집종들을 다 문초했는데 그 음흉한 비계(秘計)는 정난정도 스스로 천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항상 독약(毒藥)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나를 잡으로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약을 먹고 죽을 것이다.

’라고 하였었다.

마침 임금의 특명에 따라 중죄인을 신문(訊間)하는 금부도사(禁府都事)가 평안도 진장(鎭將)을 잡아 가지고 금교역(金郊驛)에서 말을 바꾸어 타고 있었는데, 윤원형의 집 종이 이를 보고 달려와 고하기를 ‘도사가 금방 오고 있다.

’하니, 윤원형은 소리내 울며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정난정은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느니만 못하다.

’하고 약을 마시는 음약(飮藥)하고 바로 죽었다.

옥중화도 시청률이 거의 20%니 음.. 좋아요 좋아

사극을 안 좋아하는 미니도 잘 보는 사극이니.. 괜찮은거겠지요

체탐인 - 조선시대의 첩보원체탐인은 어떤 사람이 되는거에요??부모형제가 없는 사람 중에 출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네요.절대 해서는 안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험한 일이니까..젊었을때는 내가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었지만.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고 하네요.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때이기도 했지만.. 가장 가슴 아팠던 시절이기도 하다는...성공을 하면.. 외롭다고 하던데..저는 평생을 전옥서 다모로 살까봐.. 막막하다는 옥녀..전옥서에서 태어나서 이름마저 옥녀인 그녀..지난번 끝날때에 옥녀 주변에 남자들이 둘러싸면서 끝이났었는데..체탐인을 하겠다고 몰래 나름 몰래 불러들인 포도청 부장의 행동이었네요.그때 윤태원은 그런 옥녀를 봤었지만, 공재명이 말리는 바람에.. 옥녀를 도와주지는 못 했어요.이런..이런...그래도 도와줘야 하는건데...그렇게 포도청 부장인지? 대장인지? 만나고 전광렬아저씨한테 복잡한 마음을..상의했었더랬지요.만난것은 말하지 않구요..흠..이런..암살.그에게 주어진 임무옥녀와 얘기하고 있는데 내금위 종사관이 와서 얘기를 전달하네요.내금위는 조선시대에 왕과 궁궐을 호위하던 군대임무를 하나 주겠는데 그 임무를 완수하면 풀어주겠다고 하네요.이제 와서 내게 오명을 안겨준 사람들에게 또다시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며그 제안을 거절하네요... 전광렬아저씨 여전히 멋지세요!!ㅎㅎㅎ 대박에서보다 훨씬 멋진 인간적인 남자

아.. 이것은 문정왕후가 내린 지시였었네요...전우치가 잠깐 등장


전우치는 옥중화에서 별로 좋은 일이나 비중있는 역할을 아직까지는 하지 못 하고 있어요.물방개가 가는 곳을 따라 하는 내기

ㅎㅎ 예전에도 내기는 많이 했었나봐요.저렇게 사람들이 둘러 모여서


물방개가 어딜가나 그 곳에 돈을 거는 내기였지요.ㅎㅎㅎ기방 소소루에 이뿐 기생이 오고


명나라 사신과 대행수가 만나요.명나라 사신이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대행수라니..예전에 자신이 빚진 사람이라며...대행수는 고수의 말을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가 평생 모은 돈을 고수에게 맡기지요


ㅎㅎㅎㅎ뭔가 또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한편.. 옥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요.포도청 대장이 몰래 오셔서 체탐인을 하겠냐는 제안을 생각하며..포도청 다모가 되는 것보다 체탐인이 되는 것이 엄마의 죽음을 알아내는데 더 빠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옥녀한참..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더니...결국엔 포도청에 가서 포도청 대장을 만나 체탐인이 되겠다고 말하네요.사흘씩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왔습니다.

그가 포도청에서 일을 하듯 옥녀도 원래 하던 일을 하면서 임무가 주어지면 그 때 하면 된다고 하네요.임무를 수행하려면 신분을 위장해야 한다고요..그러면서 여러 훈련을 배우기로 해요.문정왕후 친히.. 전광렬 찾아가시어.. 당신을 보는게 가슴이 아프다고...하면서..그 일을 해 달라고 하시네요.세월도 비껴갈 수 없다며.. 입을 떼네요..소인을 살려주신 것이 마마라는 것을 알고 많이 원망했습니다.

차마.. 내 입으로 참형하라고 명할수는 없었소.. 미안하오..전광렬아저씨는 내금위를 통해 자신의 뜻을 밝혔다고..둘이 예전에 무슨 관계가 있긴 있었나봐요..옥녀.. 체탐인이 되기 위해 훈련도 하고..마지막 관문이 남았는데.. 실전이었지요.하지만.. 옥녀.. 어떤 남자의 침소에 가서 그를 제거해야 하는 것 같은데..결국 잡혀서 맞고.. 물고문을 당해요..이런이런...여기서 좀 .. 어색어색..ㅎㅎㅎ그 사이 전광렬 아저씨는.. 내금위 종사관을 불러..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해요.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뜬 옥녀..마지막 관문을 통과한거였네요.눈을 뜨니 앞에, 그녀의 앞에 포도청 대장이 있었으니까요..ㅎㅎㅎ기뻐서였을까요.. 무엇때문이었을까요..우는.. 옥녀...그렇게 또 토요일 방송도 끝이 났어요.음. 오늘은. 사실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어요..이런... 역시.. 다른 분들도 고문장면에 조금 말도 있구..미니도 그랬지요..ㅎㅎㅎ 사람 마음은.. 눈은 똑같다니까요


어린 옥녀도 보고 싶구


고수도 조금 더 큰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구..원래 저만큼의 비중인건가요???오늘은 정난정에 대해서 공부 좀 하고 가요


정난정의 아버지는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 그리고 어머니는 관비출신이었어요.그래서 그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 싶어서 기생이 되어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에게 다가가서 그의 첩이 되지요.1545년 12세 어린 나이에 즉위한 명종.그 뒤에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정의 척족 윤임에게 왕위를 잇게하려한다고 무고를 했었다고 하네요.이로써 을사사화가 일어났지요.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반목으로 빚어진 권력다툼으로,대윤의 머리였던 윤임과 영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이 반역음모죄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하지요.1551년 결국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밀어내고 적처 자리에 앉아요.윤원형의 권세를 등에 지고, 상권을 장악하고 전매, 모리 행위를 해서 많은 부를 쌓지요.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으며 궁궐을 출입하다가1553년엔 마침내 정경부인이 된 정난정.(꿈은 이루어진다.

한다고 마음먹으니 저렇게 되네요..ㅎㅎㅎ)또한, 윤원형이 상소를 해서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는데,그 당시에는 신분제도를 뒤흔드는 큰 정책이었고, 신분제도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큰 힘을 받았었지요.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서 본래의 신분인 천인으로 강등이 되었지요.그후에도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윤원형과 같이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되었지요.윤원형의 처를 독살했다는 의심과, 사대부의 심한 공격을 받던 정난정은 독약을 먹고 스스로 독약을 먹었지요.이 후 조선의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으로... 여겼다고 하네요..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미니는 역사를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이지는 않는지라..뭐.. 이게 맞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요.누가 알겠어요??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서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지금 일어나는 일들도, 알면서도 묻히고 있는 사실들도, 아닌데도 버젓이 거짓으로 알려지는 일들도 있는걸요.그냥.. 그냥.. 그런가보다.

. 하고 받아들이지요.그래서.. 이글.. 보시고 이건 이게 맞네, 저건 저게 맞네.. 그러지 말아주세요.전.. 그냥.. 그렇다는 걸루 그렇게 쓰는거니까요..그리고,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로 보는 걸루








이 글은 지난주 5월 2번째주에 보고 쓴글인것 같아요


어젠.. 보고 마지막쯤엔 화가 났어요.체탐인으로  옥녀에게 일을 시키더니만..나중엔 전광렬아저씨를 죽인(물론 죽진 않았을것 같은데..당연히..) 사람으로 옥녀를 몰고가요..그리고 포도청 부장은... 옥녀에게 누가 뭐라해도 받아들이라고..그게 체탐인의 임무에 포함되는거라고..체탐인은 정치적으로도 이용된다고 하고..뭐.. 체탐인은.. 그냥.. 필요에 의해 쓰여지고..필요없으면 버려지는 존재네요..세상에.......그런 것이니.. 전광렬아저씨.. 옥녀와 헤어질때..돌아가거든 절대 체탐인은 하지 말라고 하네요

그런건.. 하지 말아야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그런 사람과는 아예 인연을 맺지 말아야해요!!!!나 행복한 일

나 좋은 일만 해도 부족하니까요




옥중화도 시청률이 거의 20%니 음.. 좋아요 좋아

사극을 안 좋아하는 미니도 잘 보는 사극이니.. 괜찮은거겠지요

체탐인 - 조선시대의 첩보원체탐인은 어떤 사람이 되는거에요??부모형제가 없는 사람 중에 출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네요.절대 해서는 안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험한 일이니까..젊었을때는 내가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었지만.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고 하네요.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때이기도 했지만.. 가장 가슴 아팠던 시절이기도 하다는...성공을 하면.. 외롭다고 하던데..저는 평생을 전옥서 다모로 살까봐.. 막막하다는 옥녀..전옥서에서 태어나서 이름마저 옥녀인 그녀..지난번 끝날때에 옥녀 주변에 남자들이 둘러싸면서 끝이났었는데..체탐인을 하겠다고 몰래 나름 몰래 불러들인 포도청 부장의 행동이었네요.그때 윤태원은 그런 옥녀를 봤었지만, 공재명이 말리는 바람에.. 옥녀를 도와주지는 못 했어요.이런..이런...그래도 도와줘야 하는건데...그렇게 포도청 부장인지? 대장인지? 만나고 전광렬아저씨한테 복잡한 마음을..상의했었더랬지요.만난것은 말하지 않구요..흠..이런..암살.그에게 주어진 임무옥녀와 얘기하고 있는데 내금위 종사관이 와서 얘기를 전달하네요.내금위는 조선시대에 왕과 궁궐을 호위하던 군대임무를 하나 주겠는데 그 임무를 완수하면 풀어주겠다고 하네요.이제 와서 내게 오명을 안겨준 사람들에게 또다시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며그 제안을 거절하네요... 전광렬아저씨 여전히 멋지세요!!ㅎㅎㅎ 대박에서보다 훨씬 멋진 인간적인 남자

아.. 이것은 문정왕후가 내린 지시였었네요...전우치가 잠깐 등장


전우치는 옥중화에서 별로 좋은 일이나 비중있는 역할을 아직까지는 하지 못 하고 있어요.물방개가 가는 곳을 따라 하는 내기

ㅎㅎ 예전에도 내기는 많이 했었나봐요.저렇게 사람들이 둘러 모여서


물방개가 어딜가나 그 곳에 돈을 거는 내기였지요.ㅎㅎㅎ기방 소소루에 이뿐 기생이 오고


명나라 사신과 대행수가 만나요.명나라 사신이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대행수라니..예전에 자신이 빚진 사람이라며...대행수는 고수의 말을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가 평생 모은 돈을 고수에게 맡기지요


ㅎㅎㅎㅎ뭔가 또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한편.. 옥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요.포도청 대장이 몰래 오셔서 체탐인을 하겠냐는 제안을 생각하며..포도청 다모가 되는 것보다 체탐인이 되는 것이 엄마의 죽음을 알아내는데 더 빠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옥녀한참..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더니...결국엔 포도청에 가서 포도청 대장을 만나 체탐인이 되겠다고 말하네요.사흘씩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왔습니다.

그가 포도청에서 일을 하듯 옥녀도 원래 하던 일을 하면서 임무가 주어지면 그 때 하면 된다고 하네요.임무를 수행하려면 신분을 위장해야 한다고요..그러면서 여러 훈련을 배우기로 해요.문정왕후 친히.. 전광렬 찾아가시어.. 당신을 보는게 가슴이 아프다고...하면서..그 일을 해 달라고 하시네요.세월도 비껴갈 수 없다며.. 입을 떼네요..소인을 살려주신 것이 마마라는 것을 알고 많이 원망했습니다.

차마.. 내 입으로 참형하라고 명할수는 없었소.. 미안하오..전광렬아저씨는 내금위를 통해 자신의 뜻을 밝혔다고..둘이 예전에 무슨 관계가 있긴 있었나봐요..옥녀.. 체탐인이 되기 위해 훈련도 하고..마지막 관문이 남았는데.. 실전이었지요.하지만.. 옥녀.. 어떤 남자의 침소에 가서 그를 제거해야 하는 것 같은데..결국 잡혀서 맞고.. 물고문을 당해요..이런이런...여기서 좀 .. 어색어색..ㅎㅎㅎ그 사이 전광렬 아저씨는.. 내금위 종사관을 불러..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해요.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뜬 옥녀..마지막 관문을 통과한거였네요.눈을 뜨니 앞에, 그녀의 앞에 포도청 대장이 있었으니까요..ㅎㅎㅎ기뻐서였을까요.. 무엇때문이었을까요..우는.. 옥녀...그렇게 또 토요일 방송도 끝이 났어요.음. 오늘은. 사실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어요..이런... 역시.. 다른 분들도 고문장면에 조금 말도 있구..미니도 그랬지요..ㅎㅎㅎ 사람 마음은.. 눈은 똑같다니까요


어린 옥녀도 보고 싶구


고수도 조금 더 큰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구..원래 저만큼의 비중인건가요???오늘은 정난정에 대해서 공부 좀 하고 가요


정난정의 아버지는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 그리고 어머니는 관비출신이었어요.그래서 그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 싶어서 기생이 되어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에게 다가가서 그의 첩이 되지요.1545년 12세 어린 나이에 즉위한 명종.그 뒤에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정의 척족 윤임에게 왕위를 잇게하려한다고 무고를 했었다고 하네요.이로써 을사사화가 일어났지요.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반목으로 빚어진 권력다툼으로,대윤의 머리였던 윤임과 영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이 반역음모죄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하지요.1551년 결국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밀어내고 적처 자리에 앉아요.윤원형의 권세를 등에 지고, 상권을 장악하고 전매, 모리 행위를 해서 많은 부를 쌓지요.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으며 궁궐을 출입하다가1553년엔 마침내 정경부인이 된 정난정.(꿈은 이루어진다.

한다고 마음먹으니 저렇게 되네요..ㅎㅎㅎ)또한, 윤원형이 상소를 해서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는데,그 당시에는 신분제도를 뒤흔드는 큰 정책이었고, 신분제도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큰 힘을 받았었지요.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서 본래의 신분인 천인으로 강등이 되었지요.그후에도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윤원형과 같이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되었지요.윤원형의 처를 독살했다는 의심과, 사대부의 심한 공격을 받던 정난정은 독약을 먹고 스스로 독약을 먹었지요.이 후 조선의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으로... 여겼다고 하네요..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미니는 역사를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이지는 않는지라..뭐.. 이게 맞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요.누가 알겠어요??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서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지금 일어나는 일들도, 알면서도 묻히고 있는 사실들도, 아닌데도 버젓이 거짓으로 알려지는 일들도 있는걸요.그냥.. 그냥.. 그런가보다.

. 하고 받아들이지요.그래서.. 이글.. 보시고 이건 이게 맞네, 저건 저게 맞네.. 그러지 말아주세요.전.. 그냥.. 그렇다는 걸루 그렇게 쓰는거니까요..그리고,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로 보는 걸루








이 글은 지난주 5월 2번째주에 보고 쓴글인것 같아요


어젠.. 보고 마지막쯤엔 화가 났어요.체탐인으로  옥녀에게 일을 시키더니만..나중엔 전광렬아저씨를 죽인(물론 죽진 않았을것 같은데..당연히..) 사람으로 옥녀를 몰고가요..그리고 포도청 부장은... 옥녀에게 누가 뭐라해도 받아들이라고..그게 체탐인의 임무에 포함되는거라고..체탐인은 정치적으로도 이용된다고 하고..뭐.. 체탐인은.. 그냥.. 필요에 의해 쓰여지고..필요없으면 버려지는 존재네요..세상에.......그런 것이니.. 전광렬아저씨.. 옥녀와 헤어질때..돌아가거든 절대 체탐인은 하지 말라고 하네요

그런건.. 하지 말아야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그런 사람과는 아예 인연을 맺지 말아야해요!!!!나 행복한 일

나 좋은 일만 해도 부족하니까요




 그녀는 자신이 노비라는 신분의 굴레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타고난 미모를 통해 이를 극복하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미모를 밑바탕으로 삼고 희대의 걸출한 양반출신의 윤원형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문정왕후와 남편 윤원형의 부와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펴나갈 수가 있었다.

나아가 남편 윤원형과 시누이의 문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잘 보필하였고 불교의 진흥을 위하여 보우대사를 막후 지원하였고 신분제 사회의 타파를 시도하여 강고한 유교 사회에 일대 변혁을 꾀하였던 여인이었다.

?당시 조선의 유학자들은 중국보다 골수까지 성리학의 유학에 물들어 집착하였으며 사대명문에 빠져 있으면서도 종주국인 중국에도 없는 적서간 차별을 두는 노비제도라는 신분제도를 고수하였다.

결국 적자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맞서 싸우는 정난정의 이러한 도전에 반발하여 그녀를 희대의 요녀이자 탕녀로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노비출신으로 천첩에 불과한 그녀가 남편인 윤원형의 권세에 기대 본부인을 독살하고 정실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을사사화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는 그녀를 맹비난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희대의 악녀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던 여인으로 역사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정난정과 윤원형의 출생과 가계 정난정(鄭蘭貞)은 조선 명종 때 윤원형의 애첩으로 아버지는 초계정씨(草溪鄭氏)로서 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던 양반출신의 정윤겸(鄭允謙, 1463

1536)으로 무관이었다.

정난정은 아버지가 당당한 무반이었으나 어머니는 군영에 소속되었던 관비 출신이다가 보니 당연히 종모법에 따라 태어나 천민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조선은 양반만의 권력을 갖기 위하여 양반수의 증가를 막도록 신분제의 사회를 고수하였기때문에, 정난정은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쳐 그녀의 꿈은 높았고 넘쳐났으나 자신의 갈 길은 종모법에 의하여 어머니가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걸어서 천역으로 살아야만 하는 길이 이미 정하여져 있는 외길 수순이었다.

 아버지는 엄연한 양반신분임에도 어머니가 천민이었으니 이로 인하여 천민이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의 피붙이들에게 까지도 이어져 대대손손 노비생활을 잇게 해야 하는 숙명이었다.

노비는 소 돼지와 같은 물건과 같이 사고 팔리는 가축과 다를 바가 없는 물건이었다.

노비이던 자신의 기구한 팔자가 원망스럽다 못하여 절망스러웠으며 저주스럽기까지 하였을 것이다.

?당시 동북아 국가들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전쟁 포로나 죄지은 당사자 자신만은 노비가 되도록 하였으나 자손에게까지 굴레를 씌워 대를 이어 가면서 노비로 삼지는 않았다.

오직 조선만이 적자인 양반만이 권력을 쥐는 가장 심한 신분제사회를 고수하였다.

 조선은 적자와 양반만을 위한 나라였다고 할 수가 있다.

양반만의 신분사회 절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서얼차대법(庶孼差代法)이란 장치로 얽어매어서 신분의 차별을 두었다.

당초 서얼차대법은 태종 이방원이 자신과 자식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등장하였는데, 서얼은 정처의 자식과는 달리 관직진출이 원칙적으로 금지당하고, 재산상속과 가족 내의 위치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허균(許筠)이 지은 소설인〈홍길동전〉에서도 홍길동이 양반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호부호형(呼父呼兄)조차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서얼차별은 중국에도 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차별적 제도이다.

다른 것은 중국 것이라면 다 따르면서도 양반만의 특권을 유지키 위하여 종부법을 따르지 않고 종모법을 따르면서도 부모 중 한편이 천민이면 천민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이 ‘서얼차대법’ 을 시행하였던 이유는 조선사회가 양반층을 지배계급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를 보다 철저히 강화·유지해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같은 지배층인 사족(士族) 혈통이지만 어머니가 첩이거나, 양인이 아닌 천인출신일 경우에는 더 큰 차별 대우를 받았다.

즉 “재가(再嫁) 하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의 자손과 서얼자손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성리학을 지향한 조선사회에서는 만약 여인들이 조금이라도 큰 목소리를 낼라 치면 여지없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면서 이들을 악녀와 요녀로서 몰아붙이는 사회였다.

남성우위 사회유지를 위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부부유별(夫婦有別). 여필종부(女必從夫), 개가금지법(改嫁禁止法) 등과 같은 제도를 실시하면서, 이러한 전 근대적인 사회의 차별로 인해 유능한 인재들이 사장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사족들의 지배력만 높여서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는 덕목을 멀리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발전을 더디게 만든 폐단이 되었다고 지적을 받는다.

 조선사회에서 양반들은 자신은 물론 자신들이 부리는 노비들까지도 세금과 국방의 의무는 지지 않도록 하고 오직 평민들만이 세금과 국방의 의무를 지도록 하는 사회였다.

즉 양반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서 사회연대 의식을 약하게 만들어서 국가는 수탈의 도구에 불과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평민과 노비에게 ‘나라가 멸망하여 외적에 점령당해도 다른 수탈하는 대상의 교체에 다름에 아니다’ 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로마가 번성하였던 것도 귀족들만이 국방의 의무를 져서 전쟁에 참여하여 지켰다.

노비나 평민에게는 국방의 의무를 맡기지 않고 손수 나라를 지켰다.

후기에 국방의 의무를 게르만 용병에게 맡기면서 로마 멸망은 예고 되었는데 조선의 양반은 아예 이 두 가지 의무 중 어느 하나도 떠맡지 않고서 단지 백성위에 군림하려고만 하였다.

 조선의 노비제도가 종부법에서 후기에는 종모법을 따르면서도 부모의 한쪽이 노비이면 노비로 만드는 제도야말로 자신들이 부리는 노비를 늘리기 위한 제도에 다름아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후기에 사회공동체의 유대인식의 해이를 불러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불렀다고 지적하는 것도 일응 일리가 있다.

 이러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재기있는 정난정 그녀가 신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냥 정상적인 신분제 사회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설 수가 없다면 남의 힘에 의지하여서라도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서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고심 끝에 그는 자신이 남보다 뛰어난 미모를 이용하여서 권세 있는 남자를 사로잡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음에 그의 권력에 의지하여 자신의 뜻한바 대로 자신의 꿈을 펼쳐서 뜻을 이루어 살다가 간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이던 정윤겸(1463-1536, 鄭允謙) 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정윤겸은 아버지 정온과 어머니 원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지 첫돌도 안되어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도 양반사대부와 같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앉자 후에 뜻을 바꿔 무과공부를 하였다.

?성종 23년인 1492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에 보직을 받아 참군으로 승진하였고, 이후에는 사헌부의 감찰, 군기시 주부, 사복시 판관을 거쳤고. 중종 1년이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서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에 3등에 녹훈이 되고,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이 되었다.

 이듬해 공신에게 특별히 품계를 받아서 통정대부로 당상관에 올랐으며, 간성군수에 임명되었고, 4년 뒤 웅천부사로 옮겨 삼포왜란 이후의 민심수습과 복구에 힘썼다.

1519년에는 회령부사로 복무하였고 청계군(淸溪君)에 봉하여진다.

?정윤겸은 1523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근무하였는데, 명나라에서 약탈하고 돌아가는 왜구를 소탕해 임금에게 궁시(弓矢)와 의대(衣帶)를 하사받기도 하였고, 명나라로부터 백금을 하사받았다.

1524년에 훈련원 도정이 되었고 1526년에는 훈련원 도정의 신분으로 성절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는 오위도총부의 정2품 무관 부총관이 되었다.

 그에 관한 기사는 중종 재위 당시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강직한 성격으로서 매우 책임감이 강하였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1528년에는 당시 병사로 근무하였는데 당시 정윤겸의 부하로 만포첨사이던 심사손(沈思遜)이 야인의 급습을 받아 죽었고 이로 인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 가을에 방면돼 돌아왔으며 다음 해에는 서용되어서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1530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연좌로 인해 횡성에 유배되었다가 겨울에 풀려난다.

1532년 부총관이 되고 1535년에 영해부사가 되었다가 1536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서울에 올라가 치료를 받다 죽는데 향년 74세였다.

《중종실록》중종 31년 6월 12일자의 기사를 보면 정윤겸의 ‘졸기’ 가 나오는데,  청계군 정윤겸이 졸했다.

윤겸은 굳세고 날램이 남보다 뛰어나서 적진에 임해서는 분기(용맹)하였으므로 공적이 많았다.

또한 성품이 검소해 사치를 일삼지 않았고, 청렴결백을 좋아한 사람이었다.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윤겸은 죽어서 강원도 원주시 격동산에 묻히었다.

그의 묘는 원주시 호저면에 부인 원주이씨와 함께 묻혀 있다.

첫 부인으로부터 아들 정숙(鄭淑)을 두는데 당진현감을 하였고, 둘째 부인이 1남 삼녀를 두었다.

그에 대해 《국조보감》에서도 ‘활동해도 공로를 말하지 않고 많은 것을 쌓아두고도 청렴을 취했도다’ 하여 좋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윤원형(尹元衡)은 경기도 파주군에서 파평윤씨 파산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 전의이씨(全城府夫人 全義李氏)사이에서 네 아들 중 막내인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문하시중 윤관의 15대손이다.

아버지인 윤지임은 인품이 온화하고 공손했으며 평소 비단옷을 입지 않았을 정도로 검소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형인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윤원로가 있고, 손 윗누이로 두 명을 두었는데 둘째 누이가 바로 문정왕후이다.

?윤원형은 중종 23년인 152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둘째누이가 중종의 계비로 들어가서 왕후가 된 뒤, 중종 28년인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후 누이가 왕비로 책봉된 것을 발판으로 사관으로 관직을 시작해 1538년에 교리로 시독관을 겸직하고 사헌부지평, 홍문관 응교 등을 지내는 등 청요직을 거치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윤원형은 관직에 처음 진출하였을 때는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는 홍문관에서 젊은 관원들을 대상으로 치러진 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촉망을 받았으며, 대인관계 역시 원만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기묘사화에서 살아남은 정순붕, 정언각 등의 사림파 선비들과도 교분을 나누었고 후에는 이들과 을사사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있던 부서에서 근무하는 아전들의 관례적인 향응에도 응하지 않고 꾸짖어서 쫓아내기도 하는 등 청렴결백한 이미지를 쌓아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는 조카가 인종의 후궁인 숙빈 윤씨가 되고, 그리고 후에는 누이 문정왕후의 아들이던 경원대군이 명종이 되면서 왕의 외삼촌인 외척이 되어서 막강한 권력을 잡아 휘둘러서 윤임, 김안로, 이량, 심통원 등과 함께 당시 대표적인 인척세력으로 꼽히게 된다.

?윤원형은 처음 현감이었던 김안수(金安遂)의 딸 연안김씨와 혼인해 연안김씨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는데 정적 김안로(金安老)당질녀이다.

그러나 난정을 알게 되면서 난정을 첩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후에 윤형원은 연안김씨를 내좇아 버리고 난정을 정실부인으로 맞았다.

 윤원형과 난정은 이후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의 권력에 의지하여 함께 불교부흥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아 ‘서얼허통법’ 실시를 추진하기도 하다가 조선 사대부의 반발에 따라 자결로 생을 마감하였다.

물론 이러한 생존 과정에서 당시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부정축재 등으로 많은 비난을 초래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생존 당시에도 난정의 친척인 초계정씨 항재(恒齋) 정종영(鄭宗榮)같은 인물은 서녀 누이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 이르는 길을 좁고 굽도록 하여 가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관리를 하였다는 이야기까지도 전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선조 22년인 1589년 8월 1일 1번째기사인「판중추부사로 치사한 정종영의 졸기」에 의하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한 정종영(鄭宗榮)이 졸하였다.

종영의 자는 인길(仁吉)이다.

도량이 넓고 굳세었으며 삼가고 부지런한 자세로 공사(公事)에 힘을 다하여 세 조정에 두루 벼슬하였다.

명종 초기에 윤원형(尹元衡)의 첩 정난정(鄭蘭貞)은 바로 종영의 서고모(庶姑母)였다.

원형이 상변(上變)하여 옥사를 일으킬 적에 논의에 참여하도록 넌지시 일깨워주었으나 종영은 거짓 모르는 체하고 응하지 않았다.

난정이 참람하게 정실(正室)이 되어 부인(夫人)에 봉해져서 외명부(外命婦)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자 사람들이 감히 항변하지 못하였으나 종영은 오히려 얼척(孼戚)으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원형이 크게 유감을 품어 매양 죄를 얽어 해치려 하였다.

난정의 어머니가 난정을 경계하기를,?“너는 종손을 해치지 말라. 내가 맹세코 죽음으로써 당하겠다.

” 면서 내가 죽어서 청계군(정윤겸)을 어떻게 보겠느냐 면서 만류하여, 화를 면하게 되고 4대에 걸쳐 벼슬하였으며 6조판서를 차례로 연임하는 등 현달(顯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정종영이 1562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할 때였는데 인종의 태봉이 있던 산에서 중들이 문정왕후의 명을 받들어 벌채를 하였는데 이들을 잡아 가두고 엄벌하자 문정왕후가 노하여 처벌하려 하였다.

이에 성균관 유생과 삼사가 들고 일어나서 처벌을 면하였다.

 그러면 우선 정난정과 윤원형이 만나게 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윤원형의 누이이던 문정왕후가 어떻게 중종의 왕비가 되었는지, 이러한 계기를 만들어 준 중종의 반정과정과 중종과 문정왕후, 윤원형과 난정의 만남의 과정 등을 살펴본다.

먼저 중종의 반정과정을 살펴보자.   중종의 반정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연산군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중종반정이 일어났는데, 사실 중종(中宗)은 반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중종반정은 이조팜판 성희안,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에 의한 주도로 일어났다.

성희안(成希顔)은 연산군과 함께 서울의 서대문구 망원동에서 열린 시회에 참석하였다가 연산군의 방탕과 폭정에 대하여 풍자하고 훈계하는 시를 지었다.

?그러나 이것이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데 되면서 종9품 말단직 ‘부사용’으로 강등을 하게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이를 억울하게 생각하여서 반정을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반정의 시작은 성희안이 연산군에게 원한관계에 있는 박원종에게 접근 하는데 박원종(朴元宗)은 성종의 형이던 월산대군의 부인이던 박씨의 남동생이었다.

 박원종의 누이이던 박씨는 연산군의 큰 어머니로서 어린 연산군을 키워서 길렀다.

그런데 연산군이 자신의 아들을 키워달라면서 큰 어머니인 박씨를 궁으로 불러들이고는 겁탈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이 거듭되자, 박씨부인은 수치스러워 하다가 이를 참지 못하고 자결하였는데, 죽기 전에 동생 박원종에게 유언을 남겨서 원수를 갚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성희안이 반정을 제의하자 폐출할 것을 밀약하고, 이들은 이조판서인 유순정을 참여시켜 반정을 일으키는 데 이들을 일러서 삼대장이라 통칭한다.

 ?유순정 초상화?당시 용산에 있던 제천정과 한강하류의 망원정(효령대군이 지은 정자)은 연산군이 향락을 많이 즐기던 장소로 이곳은 중국사신들에게 인기 높은 장소였다.

제천정에서 정자선(亭子船) 형태의 배를 띄워서 한강을 유람하는 것이 당시 사신들이나 사대부들이 즐기던 유람의 하나였다.

?연산군은 망원정에 관심이 깊어서 사냥을 위하여 망원정, 성산포, 연희궁 길을 폐쇄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이곳에 이르기 쉽도록 길 부근의 인가를 철거하게 하여서 숭례문에서 망원정까지 말 10마리가 나란히 걸을 수 있도록 하고 망원정 이남 100리 이내에 금표를 세워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막았고 망원정 일대를 넓혀 2천여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여 원망을 샀다.

 반정세력은 우선 삼정승이던 영의정 유순, 좌의정 신수근, 우의정 김수동에게 반정거사에 참여할 것인지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에 유순과 김수동 두 사람은 즉각 찬동을 하였다.

그리고 신수근을 찾아 이를 물었다.

당시에 신수근의 누이는 연산군의 부인이면서 딸은 진성대군(훗날에 중종으로 즉위한다)의 부인이었다.

반정세력이 “누이를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딸을 택하겠습니까?” 라고 양자택일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수근(愼守勤)의 입장에서 누이는 현재 왕의 부인이고, 딸은 반정군의 부인이니 굳이 반정에 참가하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고, 누이나 딸 어느 한편을 택헤 지지하기도 어려운 난처한 입장이었다, 신수근은 이에 “매부를 폐하고서 사위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

세자가 총명하다” 면서 거절한다.

 이에 반정세력은 신수근에게 거사의사를 밝혔으니 누설될 것이 두려워서 예정일에 비해 서둘러 창덕궁에 진을 치고 밤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거사를 결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군사력은 군자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영문, 형조정랑 장정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참여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중종은 왕으로 추대되던 날도 자신이 왕으로 추대된 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왕위를 올랐다고 전한다.

중종은 즉위하던 날 집밖이 소란하여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군사들이 집을 에워싸자 큰 일이 일어나서 죽음이라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었다.

형벌을 받느니 차라리 자결하려 하였다.

 이에, 부인 신씨가 밖을 에워싸고 있는 군사들이 자신의 집을 뒤로 하고 호위하는 자세를 취한 것을 알아보고 “죽더라도 웬일인지 알아나 보고 죽으시죠.” 하여 이를 확인하고서야 자신을 추대하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중중은 이로 인하여 집권초기에 반정을 자신이 주도하지 못하여서 모든 결정은 공신들의 의도대로 이루어지다 보니 왕권은 미약하여서 반정세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입장으로 지냈다.

 신수근이 반대하자 반정군은 서둘러 반정을 일으켜 신수근과 신수영 형제, 임사홍을 죽이고는 진성대군을 1506년 9월 4일 중종으로 추대하였으니 이를 일러서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종 역시 중종반정으로 즉위하였으나 사실 그는 반정 모의과정에서 반정의 주도자들로부터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반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반정 후에 19세의 나이로 반정 주도세력에 의하여 추대되어서 하늘에서 떨어진 왕위를 공짜로 주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는 반정 후에도 반정공신들에게 큰 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모든 결정에 있어서 공신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라야 하였다.

그가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세월이 흘러서 반정공신들인 박원종 등이 죽으면서 자기 소리를 낼 수가 있었고 개혁인물이던 조광조(趙光祖) 등을 등용하면서 가능할 수가 있었다.

 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세력 유순 및 박원종 등은 다음날 아침에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서 자순대비에게 반정을 승인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자순대비는 진성대군의 친 어머니이면서도 중종의 즉위를 반대하였다.

진성대군은 이와 같이 반정세력뿐만 아니라 친 어머니에게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당시 자순대비는 “진성이 어떻게 이런 중임을 감당할 수 있으리오.?지금 세자가 총명하니 경등은 그를 세우고 잘 보필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시오.” 라면서 자신의 친자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고 연산군의 아들인 세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을 말할 정도로 친어머니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영의정 유순이 강청하여 승인을 받았고 유순과 강흠 등이 진성대군의 사저로 가서 궐내에 모셔와 근정전에서 19세에 즉위하고 신씨도 왕비로 책봉이 되었으나 신씨는 반정 후에 반정세력이 왕비로 되는 것에 반대하여 7일만에 폐비가 되었다.

?이는 당시 반정군은 거사에 반대하였던 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을 남대문 근처에 있던 수각교에서 철퇴로 때려 죽이고는 이의 후환이 두려워 역적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면서 중종을 압박하자 중종은 기세등등한 반정군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중종은 신씨를 사랑하면서도 폐비할 수밖에 없었다.

  중종 당시의 정치상황 그러면 중종이 즉위할 당시의 정치상황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중종은 집권할 때 중종반정에 공헌도 없이 반정공신들의 등에 떠밀려 등극하였기 때문에 중종은 실권을 거의 갖지 못해 무슨 일을 추진하고자 하면 공신들의 저지와 수많은 내외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중종은 집권하자 기존에 3포의 왜관에게 외교적 특권으로 면세 등의 혜택을 박탈하고 거주왜인을 60명으로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일본 왜선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법규를 엄격히 적용하자 1510년 4월에는 삼포에서 갑옷과 칼로 무장한 5천명의 왜군이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지원을 받아 민가를 약탈하면서 폭동을 일으키니 삼포왜란(三浦倭亂)이다.

왜인은 초기 일시적으로 제포와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을 공격하면서 경상도 해안일대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난으로 민간인 270명이 죽고 민가 796채가 불에 탔다.

이에 조선은 이 난후에 일본과 통교를 중단시킨다.

그러나 일본막부가 간청해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해 쓰시마가 파견하던 세견선(歲遣船)과 조선정부가 하사하던 세사미두(歲賜米豆)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제포 하나만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갑산·창성 등지에서 야인들이 침입해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자 조정은 여연·자성·무창 등 4군에 거주하는 야인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에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고, 의주산성을 수축해 북방방어에 진력하였다.

?1522년에 동래(東萊) 염장(鹽場)에서 왜변이 일어나고, 1524년에는 압록강 유역에서 야인을 적극적으로 몰아내는 등 외인의 침입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종은 병조와 대신이외에 변방의 장수들을 합좌하는 비변사를 설치하면서 비변사는 점차 정치적인 성격으로 변모해간다.

 중종 반정이후의 권력구조는 박원종·류순정·성희안·유순·김수동·송일 등 반정공신이 중종 8년이던 1513년까지 의정부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해 나갔으나 이 가운데 박원종·유순정·성희안이 삼공신으로 정국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중종 5년인 1510년 박원종, 중종 7년에는 유순정, 그리고 중종 8년에 성희안이 각각 사망하면서 종신중심체제가 점차 약화되자 훈구파 공신들의 힘이 빠지면서 1515년에는 사림파인 조광조를 조정에 등용되자 신진기예의 사람들이 현량과를 통하여 대거 등용되었고 이들은 주로 삼사의 언관직에 진출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며 표방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즉 경연의 활성화를 추진하고는 소격서를 폐지하도록 하였으며, 향약을 실시하는 한편, 《소학》의 보급 등을 추진하면서 철저한 유교정치를 펴나가게 됨에 따라서 공신세력을 견제하여 나갈 수 있었다.

이 후에는 의정부와 육조계통은 비공신계의 훈구계로 언관계통은 사리중심으로 정계의 구성이 바뀌었다.

?이렇게 사림세력의 성장이 가능하였던 것은 김광필, 정여창 등의 지속적인 교육활동과 훈구대신이었던 정광필·안당과 같은 사람에 의한 등용이 있었으나 가장 큰 원인은 중종이 왕권강화를 강화하려는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도학적인 정치이념을 내세워서 지나치게 과격하고도 급진적으로 추진하다기 보니 훈구파의 반발을 일으키고 나아가 이를 추진하는 중종까지도 염증을 일으켜서는 역풍을 일으킨다.

우선 향약은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도정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를 행하는 방법으로서는 자치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기본이어야 하나 신진 사람세력들에 의하여 강제로 추진되어서 반발이 끊이지 않았고, 이들이 주장하는 현량과(賢良科) 역시 과거를 폐지하기를 주장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조광조를 주종하는 신진 사람파들 위주로 등용되는 등 그 선발의 기준이 일정하지 못하였다.

현량과로 추천된 120명 가운데 28명을 선발하였는데 이 중에 21명이 기호지방출신이었다.

그리고 기존에 있었던 소격서를 폐지시키는 등 강제로 실시하다가 보니 반발이 거세었다.

 그런데 조광조 등은 1519년 중종반정 당시 공신으로 책록된 117명의 인사 중에서 75%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제하는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물론 중종반정의 공신들은 이전의 책봉에 비하여 인원수가 과다하게 많았고 그 대부분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위훈삭제는 이미 주어버린 상훈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조치이다 보니, 이는 남에게 준 떡을 다시 빼앗는 격으라서 반발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지사’ 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훈구 공신세력의 공신 칭호박탈에 머물지 않고 반정으로 신료들에 의하여 추대된 중종 자신의 왕위의 정당성마저도 부정하는 의미까지도 갖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중종 자신도 중종반정에 전혀 기여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조광조 초상화?중종은 사사건건 원칙을 내세우며 주장하는 사람파에 염증을 일으켜 급기야는 조광조 일파를 몰아 낼 계획을 내세워 중종은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신진사람들을 숙정하게 되는데 이를 일러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중종은 위훈삭제된 4일 후인 1519년 11월 15일밤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와 남곤, 심정 등을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통하여 몰래 불러들여서는 이들에게 밀지를 전달하였는데,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艸爲王)’ 이라고 꿀로 글자를 써 갉아먹게 한 다음 역모를 꾀한다고 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다.

?중종은 핵심인물로 사람파 8명을 거론하면서 이들을 체포하여 죄상을 밝히라고 의금부에 명령하는데 죄명이 붕당과 지나치게 격렬한 언사를 죄목으로 하는 것으로 이로 인하여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숙청되었다.

기묘사화로 인하여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가고, 김정, 기준, 한충, 김식, 김구,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은 귀양가서 사형당하는 등 70여명이 사약을 받고 죽었고 김구는 파직 당한다.

김안국, 김정국 형제 등도 파직되는데 당시 피해를 입은 선비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 이라 한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붕당을 결성해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인물들을 배척하였다는 것과 후진을 이끌어 지나치게 격렬한 인사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들이 추진하던 현량과는 폐지되고 삭탈된 공신들의 훈적도 다시 회복되었다.

?이어 중종 16년에는 1521년에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터지면서 안당 등이 제거되며 사림파는 연이어서 치명타를 당한다.

기묘사화이후에는 남곤·심정·김안로 등의 권신들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중종 25년인 1538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어 중종 33년인 1538년에서 중종이 죽는 중종 39년인 1544년까지는 김안로가 축출되고 기묘사회에서 물러났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중종의 여인들과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등장  중종은 12살 때 한 살 위이던 신씨부인과 혼인하여 매우 사이가 좋았다.

중종이 즉위하는데 신씨부인이 단경왕후였다.

그러나, 반정공신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이 반정과정에서 종종의 부인이 된 신씨는 자신들이 폐한 연산군 왕비 조카이고 자신들이 아버지인 신수근을 죽여 버렸으니 나중에 혹시라도 신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복수를 할지도 몰라 두려웠다.

?더구나 중종과 신씨 사이에는 소생이 없어 중종반정군의 입장에서 신씨를 내쳐도 뒷 탈이 없다고 보았다.

만약 후사라도 있다면 나중 즉위한 후에 어머니 복수를 할 수도 있으나 그럴 걱정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신씨를 안심하고 내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반정일에 중종과 신씨부인은 왕과 왕비로 즉위하기는 하였으나 반정 주도세력들에 의하여 신씨를 왕비에서 폐위할 것을 계속하여 요구하였다.

중종은 처음에는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 면서 이를 거절하고 버티면서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신씨부인에게 털어놓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오히려 신씨부인은 담담한 어조로,?“전하, 왕위만 보전된다면 신첩이야 어디 간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며 중종을 위로까지 하자, 중종은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고 반정 7일만에 신씨부인을 중전에서 폐하게 된다.

이에 단경왕후 신씨는 폐서인(廢庶人)이 된 후, 인왕산의 치마바위 근처 세조의 부마인 하성위 정현조 집으로 쫓겨나 살게 된다.

그러나 중종 역시도 신씨를 좇아내었으나 잊을 수 없어 수시로 경희루에 올라 신씨가 있는 인왕산방향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신씨 역시도 중종이 자신을 못 잊어서 애타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 뒤에 있는 인왕산에 올라가서 바위 위에다가 자신이 궁궐에서 입었던 분홍치마를 펼쳐 놓았다 하는데, 사람들은 신씨가 치마를 펼쳐 놓았던 바위를 일러서 ‘치마바위’ 라고 부르고 이후 ‘치마바위전설’ 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폐비신씨는 얼마 후 친정집이 있는 경기도 고양군 일영으로 거소를 옮겨서 살았는데, 그곳에는 고모인 연산군의 부인이 있어 폐위된 조카와 고모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사랑하던 남편의 정적으로서 원망이 앞섰으나 서로 쫓겨나게 된 신세를 생각하면 서로가 애처롭게 생각하여 서로 위로하며 지냈다고 한다.

?신씨는 이처럼 중종과 생이별하여 혼자 외롭게 살았는데, 1544년 11월에 중종이 57세로 죽고 난 후 13년동안 더 살다 명종 12년이던 1557년 12월 사저에서 72세로 죽었다.

그리고 그녀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아버지 신수근의 묘역인 거창신씨 선산에 묻혀 있다.

신씨는 영조 때에서야 복권돼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씨가 폐위된 후에는 파평윤씨인 장경왕후 윤씨가 중전으로 선발된다.

장경왕후 윤씨는 윤여필과 어머니 순천박씨 사이에서 한양의 호현방에서 1491년 태어났다.

그녀는 이모이던 월산대군 박씨에 의하여 양육이 되었는데 1506년에 16세로 궁중에 들어가서 숙의에 책봉이 되었다.

?그러나 중종의 부인 단경왕후 신씨가 왕비에 오른지 7일만에 폐위되면서 다음해 중종 2년인 1507년 8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박원종에 의해 천거되어 들어올 때 이미 궁에는 훈신세력들의 소실의 딸이나 양녀들 8명이 후궁으로 들어와 있었으나 이 중에 숙의 윤씨만이 정실부인소생이어서 그녀가 왕비로 간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종은 왕비가 된 윤씨를 별로 찾지를 않자 장경왕후는 오빠이던 윤임에게 이를 하소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를 그리워 잊지못하면서도 박원종의 민 인척인 경빈박씨와 희빈홍씨를 자주 찾았다.

경빈박씨는 연산군 11년에 채홍사에 의해 궁궐에 들어와서 이를 후에 알게 된 박원종이 양녀로 삼았는데 그녀는 타고난 미모로 인해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중종이 경빈박씨를 만난지 일주일도 안되어서 정국공신이던 홍경주의 첩의 딸이던 희빈홍씨가 두 번째 후궁으로 들어왔고, 이어 세 번째로 창빈안씨, 네 번쩨가 숙의 이씨, 다섯 번째로 숙의 홍씨, 여섯 번재인 숙원김씨, 일곱번째가 윤임의 누이이던 윤 숙의였다.

 그러나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중종 10년이던 1515년 3월 2일에 인종을 낳다가 25세에 산후병으로 인해 6일만에 죽었다.

그녀는 처음에 태종이 묻힌 헌릉 옆 자락에 묻혔다가 22년후인 1537년 9월에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중종이 1544년 11월 57세에 승하하자 윤비의 능이 있는 오른쪽에 묻히게 되었다.

? 그러나 명종 17년인 1562년 9월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봉은사의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하여서는 중종의 능이 풍수상 좇지 않다면서 중종을 삼성동에 있는 정릉으로 옮겨 자신과 묻히도록 하게 되면서 윤비의 능은 나 홀로 떨어져서 희릉으로 불리었다.

이는 문정왕후 윤씨가 자신이 죽은 뒤에는 중종의 곁에 묻히고 싶어서 중종의 곁에 있던 윤씨곁에 묻혀 있던 중종을 삼성동 정릉자리에 옮기도록 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도 남편의 곁에 묻히고자 중종의 능을 이장하였음에도 윤씨의 이 바람 역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삼성동의 중종 묘역자리가 상습 침수자리라서 언제나 비가 오면 침수될 수 있다는 논의 때문에 이곳으로 옮길 수 없게 되어 그녀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지금 노원구 공릉동 태릉에 홀로 외롭게 묻혀있다.

이로 인하여 남편인 중종 역시도 삼성동에 외롭게 홀로 묻혀 있도록 하였으니 이들의 인연은 묘하기만 하다.

 중종의 계비인 윤씨가 죽자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를 왕비로 복위하거나 후궁이던 경빈박씨를 왕비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킬 경우에는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원자인 인종의 지위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행, 권민수 등이 반대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하고, 경빈박씨는 아버지가 박수림으로서 군인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문이 한미하여 좋지 않다는 이유로 왕비가 되지는 못하였다.

? 경빈은 중종과의 사이에 복성군과 두 옹주를 두었다.

장경왕후 윤씨가 죽자 최종 간택에는 이조판서를 지냈던 윤근손의 딸과 윤지임의 딸로 압축이 되었으나 죽은 장경왕후인 윤비의 친정 아버지인 윤임이 자신과 가까운 친척이던 윤지임의 딸(윤원형의 누이)을 왕비로서 추천하는데 이 여인이 바로 문정왕후이다.

 그녀는 아버지 윤지임과 어머니 전의 이씨 사이에서 1501년 10월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중종 12년 1517년에 왕비로 책봉되는데 그녀는 당시에 17세였고 중종은 30세였다.

윤임이 문정왕후를 추천한 이유는 같은 파평윤씨 친척으로서 자신이 잘 아는 윤지임의 딸이어서 외손을 보호막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호랑이 새끼를 기르는 격이 되었다.

윤임은 후에 자신이 추천하였던 문정황후와 궈력을 다투다가는 문정왕후에 의하여 제거되기에 이른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중종의 맏딸이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가 권세를 얻자 심정과 남곤이 그를 견제했다.

이들의 이전투구가 극에 달하였던 중종재위의 중반 문정왕후의 척족인 윤임, 윤원형, 윤원로 등이 출사하면서 훈신과 척신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결과는 윤씨일가의 압승을 거두어 승부는 끝나게 된다.

그 여파로 인하여 사림의 일부가 조정에 복귀하였다.

?문정왕후 윤씨는 처음에 자신에게 소생이 없었을 때는 전 왕비윤씨가 낳은 인종을 애지중지하며 길렀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만은 꼭 갖고 싶어 자신과 중종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대하였으나 쉽사리 그녀의 뜻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윤씨는 한문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어 정치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고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후에는 수렴청정 등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중종 29년인 1534년 5월에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아들 경원대군을 낳았는데 이 때 장경왕후가 낳은 20세 되는 세자 인종이 있었으나 윤씨는 자신이 낳은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기로 마음먹고 이을 위해서 자신의 정적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기로 마음먹는다.

?그 첫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좌의정인 김안로였는데 그는 아들이 중종과 장경왕후가 낳은 효혜공주와 혼인하여 중종의 부마로 권력을 남용하였는데 영의정인 남곤, 심정 등의 탄핵을 받아 중종 19년인 1524년에 파직되었고 조정에 재기용되는데 세자를 보호한다며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옥사를 일으키자 윤씨는 김안로가 자신을 폐위시키려 한다며 중종에 호소하여 1537년에 김안로는 사사되고 그 일당은 유배되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에 명종이 된다)을 낳은 뒤에 중종의 후비 장경왕후 오빠인 윤임이 사돈 김안로와 공모하여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세자(후에 인종이 된다)을 폐위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음모를 꾸미므로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서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긴다.

윤임의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하여 세력다툼이 일어난다.

 문정왕후는 세자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을로 세우기 휘하여 중종 38년이던 1543년 1월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의 방문을 잠그고는 궁녀로 하여금 불을 질렀다.

그런데 세자는 효심이 강하여 문정왕후가 불을 놓은 것으로 알고서는 궁밖으로 탈출하지 않고 죽으려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으니 동궁빈이 나가자고 권하여도 나가지 않고 있다가 중종이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서야 나왔다 할 정도로 효성이 깊었다.

이것을 일러 ‘작서의 변’ 이라고 한다.

 중종은 동궁의 불을 지른 것이 문정왕후의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모른체 하였다는 데서도 알 수 듯이 아들과 부인 문정왕후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재위 초년에는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서 지내다 사림을 등용하였다 여의치 않아 이들을 제거하였으나 후에 이를 후회하기도 하는 등 정치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장경왕후가 낳은 세자와 문정왕후가 후에 낳은 경원대군 사이의 외척간 갈등에서 고민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중종은 중종 39년인 1544년 11월 14일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인 15일 57세를 일기로 죽는다.

 중중은 세자 인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재위한지 38년 2개월만에 죽는데 첫 부인 신씨를 비밀히 창경궁에 있는 환경전으로 불러서는 재회하여 회포를 풀었다고 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이별하고 죽을 때에야 40년이 지나 만났으니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중종은 죽어서 경기 고양 장경왕후곁에 묻혔다가 1562년 명종 17년에 정릉(靖陵)으로 이장하는데 서울시 강남구의 삼성동이다.

그러나 그는 3명이나 되는 왕비를 두고서도 죽어서 외로이 혼자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야말로 ‘풍요한 여인 속의 빈곤’ 이다.

중종의 여인은 왕비만 하여도 3명, 후궁이 9명이며 소생으로서는 9남 11녀를 두었다.

  중종의 여자들문정왕후 - 죽어서도 중종에 곁에 묻히련다, 선정릉의 수난사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종의 무덤 옆에는 인종의 생모인 제1계비 장경왕후가 지키고 있었다.

1542년 문정왕후는 보우와 의논해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성종의 무덤) 부근으로 옮겼다.

?중종의 무덤이 아버지인 성종의 곁에 가는 것이 합당하고 풍수상으로도 좋지 않다고 하는 명분을 걸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무덤(정릉, 선릉과 함께 보통은 선정릉이라 한다)은 지대가 낮아 침수 피해가 잦았다.

홍수때는 재실(齋室)까지 물이 차서 많은 경비를 들였음에도 중종의 곁에 머물 수가 없었다.

 결국 문정왕후 사후 아들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을 도봉구에 태릉(泰陵)으로 조성하였다.

명종은 중종의 곁에 묻히려던 어머니의 꿈을 지켜줄 수가 없었다.

대신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의 무덤인 강릉(康陵)이 태릉 옆에 조성되게 되었고 ?명종은 살아생전에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서 괴로움을 당하였는데 사후에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어머니의 곁에 묻히게 되었으니 죽어서도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도 1966년 태릉선수촌이 조성되며 두 모자는 서로를 쉽게 보지 못하는 형국으로 변모하게 된다.

 중종은 생전에는 여복이 많아 왕비만도 3명에다가, 후궁은 7명이나 둘 정도였는데, 문정왕후가 강제로 무덤을 옮기면서 중종은 생전에 같이 하였던 3명의 왕비 중의 어느 누구와도 같이 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문정왕후가 이장 명분으로 내건,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 무덤이 근처로 옮기게 된 것이 위안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할 수는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중종은 1544년 11월 57세로 죽어서 윤비의 능 오른쪽능선에 홀로 묻혀서 조용히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사후에 조용히 쉬는 것 역시도 뜻대로 실현될 수가 없었다.

 중종은 그곳에 묻히고 닌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맞아 아버지인 성종과 함께 또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는데 왜군에 의해 아버지인 성종과 중종의 능이 파헤쳐지고 성종과 왕비의 관인 재궁(梓宮)이 불에 타 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선조실록》선조 26년인 1593년 4월 13일과 8월 9일자의 기사의 보고의 내용을 보면 전 해인 1592년 겨울에 태릉과 강릉이 침범을 당하고 난 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에는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과 그녀의 아들 명종의 능인 강릉이 왜군들에 의하여 파 헤쳐지고 다음 해에 할아버지 성종과 아버지인 중종의 묘가 왜구에 의하여 파 헤쳐진다.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4월 13일 2번에 걸쳐 치계하는데,“왜적이 선릉(宣陵 : 성종의 능)과 정릉(靖陵 : 중종의 능)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梓宮)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

”“지난 겨울에 흉적이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을 범하는 변고가 있었는데 이제 선릉(宣陵)·정릉(靖陵)의 변고가 또 이와 같으니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이 왜적과는 한 하늘 아래 살 수가 없습니다.

..”. 선조 26년인 1593년 4월 26일자 7번째 기사는 대신이 유성룡 등 보고에 따르면 선릉과 정릉의 상태를 아뢰는 내용이다.

중종의 시신이 파 헤쳐져 임시로 그 시신을 양주의 송산에 있는 인가에 모셨다는 기사가 보인다.

 “선릉과 정릉의 변고에 대해서 지금 도체찰사 유성룡과 순령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의 장계를 보고 이홍국(李弘國) 과 서개똥(徐介叱同)의 말을 참고해 보건대, 정릉의 옥체(玉體)는 이미 양주(楊州)의 송산(松山)에 있는 인가(人家)에 옮겨 모셨고, 선릉은 두 능을 판 구덩이가 현궁(玄宮)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선조 26년 6월 28일 신해 2번째 기사는 영의정 최흥원이 선릉과 정릉의 상태를 봉심하고 치계하는 내용이다.

파 혜쳐진 무덤에서 나온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 몰라 알아보기 위하여 생전에 이들을 아는 덕양부인과 서릉군의 어미니 상궁박씨 등을 동원하여 임금의 모습을 그려내도록 하여 이를 토대로 시신확인 작업에 참고하게 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서 시신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신이 여러 재신들과 더불어 선릉·정릉을 봉심하여 보니 3릉의 불탄 재속에 백골이 모두 연소된 상태로 있었는데 이는 옥회(玉灰)인 듯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바도 대략 일치하였습니다.

또 제신들이 송산(松山)에 가서 봉심하기 전에 옥체(玉體)상에 혹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하여, 덕양 부인(德陽夫人)과 서릉군(西陵君)의 어머니, 상궁 박씨, 부안도정(扶安都正) 석수(碩壽), 영원수(永原守) 덕수(德壽)로 하여금 먼저 옥체의 모습을 그려 내도록 하여 제신들에게 미리 보여 봉심할 때에 의거할 자료로 삼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옥체는 모발이 모두 빠졌고 콧등은 깨지고 이지러졌으며 면상의 피부도 모두 녹아 없어져 한 곳도 알아볼 만한 곳이 없어 판별하기가 매우 어려워 사람들은 모두 의심을 가졌습니다.

이와 같이 막대한 변을 당했으니 민망한 마음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제신이 봉심할 때 본 바를 각각 서정(書呈)하였으므로 이를 모두 빈청에 봉송(封送)하니, 아직 봉심하지 않은 행조(行朝)에 있는 재신(宰臣)과 삼사(三司)에 상의하여 참작해서 정하도록 명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 심수경은 송산의 옥체를 봉심하고 기록하여 아뢰기를, 재궁은 탔는데 시신은 보존 되고 성종의 능인 선릉의 시신은 없어졌는데, 중종의 능인 정릉은 시신이 보존되어 있는 등 상식과는 다르게 나타나서 이들 시신이 다른 데서 시신을 구해다가 넣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의심이 된다고 보고한다.

 영중추부사 심수경(沈守慶)이 의논드렸다.

“송산에 있는 옥체를 봉심했는데, 신은 일찍이 한 번도 중종의 천안을 뵙지 못한 자로서 실로 논할 자격이 없으되 다만 피부가 깡마르고 용모가 수척함을 보았을 뿐입니다.

누차 입시했던 사람들도 모두 알아볼 수 없다고 하니, 이제는 진위를 변별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다만 사리로써 추측해 보면, 안팎의 재궁(梓宮)은 모두 불에 탔는데 옥체는 오히려 보존되었으니 그런 이치는 없을 것이요, 옥체를 꺼내 놓고 재궁만 불태우고 나서 다시 옥체를 광중에 넣었다 해도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흉적들의 행위를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으니, 세월이 오래된 마른 시체를 다른 곳에서 구해다가 광중에 넣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일도 혹 있을 법합니다.

 선릉(宣陵)의 두 능은 모두 옥체가 없어졌는데 정릉(靖陵)만이 홀로 보존되었으니 더욱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선릉·정릉을 봉심해 보니 3릉 모두 발굴하고 파괴한 형태가 대략 비슷한 모양이었습니다.

소위 불탄 재라는 것을 반복하여 상세히 살펴보니 흑색과 백색이 섞여 있었고, 또 백골이 부숴진 조각도 있었으며, 간간이 피부같은 것도 있어서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종이 위에 떨어뜨리면 그 소리가 자못 무거웠으니 의복이나 목석 등의 재는 아닌 듯 하였습니다.

3릉의 재는 대체로 같은 모양이었으니 만약 선릉의 두 능에 있는 재가 옥체의 재라고 한다면 정릉의 재도 옥체의 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단지 본 바대로 이같이 기록할 뿐입니다“ 이외에도 우찬성 최황, 지중추부사 성혼 등의 의견도 선왕을 본 적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거나 이미 기록된 내용과 살펴본 바가 다르고 어려 가지 의문점이 생겨서 믿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보다 며칠전, 선조 26년 8월 9일 1번 째 기사에는. 구성이 돌아와 정릉 개장에 대해 아뢰는 데. 도체찰사(都體察使)의 군관으로 수문장(守門將)인 이홍국(李弘國), 안세희와 양주(楊州)에 사는 지천령(池千齡) 이 누구의 시체인지 모를 시신이 정릉 근처에 버려져 있어서 이를 왕의 옥체라고 생각하여 이 옥체를 봉안하는 공을 세우기 위해 몇몇 군사들이 경쟁하였다는 내용을 보고한다.

?이를 확인해보니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은 불에 타 능침에서는 시신이 사라지고 타다 만 뼈 잿더미만 나오고 무덤 속은 비었고, 중종의 능인 정릉은 염할 때 입혔던 옷이 벗겨진 시신이 무덤속에 가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누구의 시신인지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영의정 최홍원, 좌의정 윤두수, 부원군 정철 등과 당시에 모셨던 궁녀까지 불러서 대조작업을 벌였으나 다른 시신 같다고 하여 다시 염을 하여 안장을 하였다.

 중종 여인의 능묘와 가계그런데 중종의 정식 후비(后妃)로서는 단경왕후 신씨(1487∼1557년)와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1491∼1515년), 제 2계비인 문정왕후(1501∼1565년) 등의 세 명의 비가 있었다.

장경왕후 윤씨와 문정왕후 윤씨는 모두 파평윤씨이다.

이들 세 왕비의 능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첫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신수근(愼守勤)의 딸로서 13세때 12세인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린다.

1506년 9월 4일에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20세에 왕비가 되나 7일만에 쫓겨나고 1557년 72세에 죽어서 친정집의 선산인 경기도 양주군의 장흥면 일영리에 묻히게 되는데 죽은지 180년이 지난 영조 15년이 돼서야 승격되어 온릉으로 승격된다.

 이어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는 윤여필(尹汝弼)과 순천박씨사이에서 1491년 7월에 태어났으며 윤씨는 중종 1년 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가 되는데 마침 중종부인 신씨가 궁에서 쫓겨나자 다음해 8월에 왕비로 된다.

?이어 효혜공주를 낳았고 중종 10년 2월에 원자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6일만에 경복궁에서 25세로 세상을 떠난다.

윤비는 처음에 죽어서 태종이 묻힌 헌릉 옆에 묻히게 되나 22년 후인 1537년 9월에 고양시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장한다.

 제2계비는 문정왕후(文定王后)로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과 전의이씨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중종 12년에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당시 윤씨는 17세였고 중종은 30세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고 1545년 명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한다.

그녀는 조선의 ‘측천무후’, 혹은 ‘철의 여인’이라는 세간의 평을 받아서 죽어서 주어진 ‘묘호’ 역시 ‘태릉’으로 클 태자를 쓴 데서도 그 의미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의 위세는 대단하다.

   문정왕후의 태릉?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을 옮긴지 3년 후인 명종 20년 1565년 4월에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로 죽어서 중종옆에 묻히기를 원하여 서오릉에 있던 중종의 능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자신도 함께 묻히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명종의 꿈에 중종이 나타나 지적한 곳을 보니 물이 흘러나오는 등 지대가 낮아서 서울 노원구 태릉으로 정하였다.

?소생으로는 1남 4녀 즉 경원대군(慶原大君) 환(?, 명종), 의혜공주(懿惠公主) 옥희, 효순공주(孝順公主) 옥련, 경현공주(敬顯公主) 옥현, 인순공주(仁順公主)를 두었다.

 그리고 왕비 세 사람을 두었고 이외에 중종은 창빈안씨, 경빈박씨, 희빈홍씨, 숙의이씨, 숙의홍씨,숙원김씨 등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다.

이들을 간단히 살펴보면,?창빈 안씨(昌嬪 安氏 : 1499년

1549년)가 영양군(永陽君) 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와 정신옹주(靜愼翁主) 선환을 낳았으며 살아서는 숙용 안씨였으며, 죽어서 손자이던 하성군이 선조로 즉위하면서 창빈안씨로 승격되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이다.

창빈안씨의 묘는 현재 동작동의 국립묘지가 있는 현충원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선조의 할머니가 된다.

 경빈 박씨(敬嬪 朴氏)가 복성군(福城君) 미(嵋), 혜순옹주(惠順翁主) 철환, 혜정옹주(惠靜翁主) 석환을 낳았다.

경빈박씨의 묘소는 남양주시 연평 3리에 있으며 아들인 복성군의 묘와 같은 묘역에 있다.

 희빈 홍씨(熙嬪 洪氏)는 금원군(錦原君) 영(?), 봉성군(鳳城君) 완(?)을 낳았고, 숙의 홍씨는 해안군(海顔君) 희를, 숙의 이씨(淑儀 李氏)는 덕양군(德陽君) 기(岐)글, 숙원 이씨는 정순옹주(貞順翁主) 정환을, 효정옹주(孝靜翁主) 순환을, 숙원 김씨는 숙정옹주(淑靜翁主) 수환을 두었다  문정왕후 경원대군을 낳다.

 문정왕후가 35세의 늦은 나이로 경원대군(후에는 명종이 되었다) 이환을 낳으면서 먼저 인종이 세자로 책봉이 된 상황에서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기존의 세자를 폐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小尹)과 기존의 세자를 지키려는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간의 권력싸움이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당시에 중종의 딸 효혜공주의 남편 김회의 아버지로 권세가인 김안로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장경왕후가 낳은 아들이 1520년 6세로 세자로 책봉되면서 중종을 이을 후계자인 세자의 앞날에 대한 후계구도는 탄탄대로로 보였다.

문정왕후가 소생이 없을 때는 세자(후에 인종이 된다)의 외삼촌인 윤임과 경원대군의 외삼촌이던 윤원형 간에는 친척사이로서 갈등이 없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1534년 경원대군을 낳게 되면서 윤원형과 친족인 윤임, 처당숙인 김안로 등과의 사이에서는 갈등의 골이 싹튼다.

?사실상 조선시대에는 윤원형의 아버지인 윤지임과 윤임은 8촌 지간의 친척이었다.

조선시대 당시에 8촌지간은 당사자가 사망할 경우에는 ‘유복친(有服親 : 같은 고조부를 모시고 상복을 같이 입는 8촌이내 사이를 말함)’ 에 해당되는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이들은 친척끼리 권력을 앞에 두고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이처럼 세자의 외삼촌 윤임과 경원대군의 외삼촌인 윤원형간의 갈등은 각기 자신의 누이가 낳은 아들을 지지하는 외척세력간의 다툼으로서 외삼촌간의 권력투쟁인데 훈구파와 사람세력 간에 세력다움도 한 몫 하게 되었다.

이때 같은 파평윤씨 친척간의 이 갈등에서 윤임의 일파를 대윤(大尹)이라 하였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고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 중간에 인종의 사돈간인 권신 김안로가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임이 김안로를 부추겨서 공세를 취하자 윤원형은 중종 32년인 1537년 사헌부를 동원하여서 김안로(金安老)를 축출하여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중종은 1542년 두 외척이 당파를 지어 조정을 분열시킨다는 공론이 불거지자 윤임과 윤원형을 파직시킨다.

그러나 곧 윤원형을 복직시켜 명나라에 성절사로 파견한 이후에는 승정원 좌부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등에 연이어 제수하여 소윤 편에다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종이 1544년 11월 사망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권력투쟁은 자연스럽게 끝나고 인종이 권력을 잡게 된다.

  인종의 즉위와 요절 제 12대의 인종이 30세로 즉위하면서 외삼촌인 윤임이 정권을 장악한다.

인종(仁宗)이 즉위하면서 세력은 급격히 인종의 외척인 대윤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그의 조카딸이자 형 윤원량의 딸이 인종의 후궁이 되어 입궐, 숙빈 윤씨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이언적, 송인수, 김인후 등 사림파를 등용하고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관시키는 조치를 취하면서 외척정치를 청산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윤원형은 송인수로부터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고 그의 형인 윤원로도 역시 파직이 된다.

이어서 윤임은 무과로 진출하였음에도 사람파에 대하여 호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언적, 유관 등 사림파를 조정에 받아들여 세를 확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인종이 유교에 호의적이어서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한 사림의 신원을 풀어주면서 대윤이 사림파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인종은 어려서부터 효자로 알려졌는데 그로 인해 그의 시호 역시 ‘어질 인(仁)자’ 를 사용하였고 그가 죽어서 묻힌 무덤인 능의 이름조차도 효릉(孝陵)이라 이름이 붙을 정도로 효심이 매우 깊은 인물이었다.

동궁이었을 때에는 문정왕후의 소행인 줄 알고서 나오지 않아 세자빈이 빨리 나가자고 재촉을 하는데도 나오지 않다가 중종이 안타까워 소리쳐서 부른 뒤에야 나왔다 한다.

?그는 계모 문정왕후의 의하여 길러졌는데 문정왕후는 성격이 표독스럽고 시기심이 많아서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불을 지른 배후가 문정왕후인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중종이 죽자 보위에 무사히 올랐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권력을 잡게 되자 노골적으로 인종에게 반감을 드러냈다.

“주상, 나는 이제는 자식도 보전치 못 하겠고. 조정에 대윤이 득세하니 앞길이 캄캄하오, 나는 아예 절에 들어가 선왕의 명복이나 빌어야 겠소 ” 이에 인종은 대비전 앞에 석고대죄하며 며칠 동안 빌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시기와 질투는 더욱 심해져 걸핏하면 ‘나를 죽이라’ 고 소리쳐 인종을 윽박질렀다고 전하며 인종은 문정왕후의 이러한 뜻을 알고는 경원대군을 의식하여 세자로 책봉한 아들이 죽은 후에도 후손을 두지 않았다고 전한다.

 인종(仁宗)은 재위기간 동안에 조광조를 비롯하여 기묘사화 당시에 죽은 사람들을 신원하고 현량과를 복원하였으며 이언적, 유관 등 사람파 학자들을 조정에 등용하였으나 그는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재위 9개월만에 1545년 7월에 31세를 일기로 세상을 죽었다.

그가 죽은 이유에 대해 야사에서는, 어느 날 인종이 문안인사차 대비전에 찾아 가니 문정왕후가 왕에게 떡을 대접하자, 인종은 계모가 자신을 반긴 것이 기뻐 기분이 좋아서 아무 의심 없이 떡을 먹었다고 한다.

?이후 인종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 그의 효성이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주장도 있다.

인종은 워낙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의 부음을 듣자 슬퍼하여 엿새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였고, 5개월 동안 매일 호곡하며 지친 몸을 돌보지 않았다고 하였다.

《인종실록》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인종은 ‘국왕의 집상’ 으로 기력이 쇠하였다고 하는 등 상례에 관한 기사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 대신들을 불러 당부하기를, “내가 죽게 되어서 경원대군(명종)에게 왕위를 전위하니 경들은 더욱 힘써 그를 도와서 과인의 뜻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을 정도로 효를 실천한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다 한다.

그의 부인 인성왕후 박씨 역시 너그러운 성품의 인물로 인종의 뜻에 따라 슬하에 자녀를 더 낳지도 않은 채 살다가 인종이 죽은 지 32년 후인 1577년 11월 64세로 죽었다.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인 1545년 7월 경복궁 청연루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죽을 때 부모 옆에 묻어달라고 한 유언에 따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 옆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562년 정릉이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 옆으로 옮겨가면서,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다.

?인종이 자신의 장사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명하였고 당시 인종의 외가인 대윤?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명종과 문정왕후 측에서 상례절차를 줄이고 능역 조성은 소홀히 다루어졌다.

1577년 11월 29일 인성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서 왕비릉을 조성했을 때 왕릉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다른 석물들도 개수하였다.

왕비릉에는 병풍석이 없다.

인종과 박씨의 효릉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의 서삼릉역의 효릉내에 나란히 묻혀 있으나 비 공개릉으로 서삼릉 젖소 개량소 안에 위치하여 관람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종의 치세와 문정왕후의 섭정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서 난정과 윤원형 및 문정왕후의 만나는 과정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윤원형과 난정의 만남 문정왕후는 1534년 7월 3일 35세가 되어서야 늦둥이 아들 경원대군을 두었는데 그녀에게는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있었으며 당시 정난정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수태 불공을 드리려 봉은사에 갔다가 보우대사 소개로 그녀를 알게 되었다.

윤원형은 정난정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리고는, 정난정의 아버지이던 정윤겸을 찾아 가서는 그녀를 소실로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를 전해들은 정난정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내가 당신의 후사를 이어주면 나를 정실로 맞이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주세요. 평생동안 무시당하는 소실로 살 바에는 차라리 비구니가 되겠어요.” 윤원형은 이미 정실이 있었기에 정난정의 당돌한 태도에 매우 곤혹스러웠으나 물러설 수 없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서약서를 써 주었다.

 당시 정난정이 윤원형을 택한 이유는 윤원형은 적자출신이었지만 양반 사대부들이 으레 가졌던 양반과 적자를 차별하는 의식이 강하지 않아서 좋았고 다른 양반사대부들은 불교를 경멸하였으나 그 역시 불교를 신봉한다는 점에 있어 매력을 느꼈다.

윤원형역시 누이인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불교도였기 때문이다.

?《명종실록》은 윤원형에 대하여 비난하면서, 그가 중에게 시주하고 부처에 비는가 하면 산에 제사를 지내고 불경을 외는 등 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또 그의 집 대청을 신 받드는 곳으로 만들어 굳게 닫아걸고 그의 첩 난정만 그곳을 출입하였다.

이러한 점은 당시에 불교에 심취하였던 문정왕후와 난정에게 신분의 차이를 뛰어 넘는 동지의식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난정은 비록 원치 않게 소실이 되었으나 집안에서 당당하게 행동하였다고 한다.

윤원형의 본처인 연안김씨는 안주인으로서 질서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난정이 너무도 당당하여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연안김씨는 안주인이기는 하였으나 소생을 두지 못하여 큰 소리 칠 수 있는 입장이 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씨부인은 남편 윤원형에게 정난정의 버릇없이 굴고 당당한 태도를 혼내주고 싶어 역성들어주기를 기대하면서 윤원형에게 하소연하였으나 남편 윤원형은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명종의 즉위와 문정왕후의 섭정 인종이 즉위한지 불과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세력은 역전된다.

인종이 요절하자, 인종의 동생 경원대군이 다음해 1545년 7월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12세에 불과하여 관례에 따라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8년동안에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된다.

?이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하였다.

그는 군기시첨정이었던 형 윤원로와 같이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은 군왕의 예로서 장사지낼 수 없다고 주장하여서 인종의 국장을 가볍게 치르도록 하여 비난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명종은 1545년 12세로 즉위하나 나이가 어려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여 전권을 쥐게 된다.

수렴청정은 세조가 죽으면서 정희왕후 윤씨가 잠시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당시에는 한명희, 신숙주 등 훈구대신들의 뜻을 들어 정치를 하였을 뿐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나, 문정왕후는 자신의 뜻대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한다.

?물론 명종은 총명하였고 학문이 깊었지만 드센 어머니인 문정왕후 밑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명목상의 임금에 불과하였고 그는 극성스러운 어머니 밑에서 평생을 눌려 지내며 왕위를 지켜나가야 하였다.

왕이 돼서도 문정왕후로부터 뺨을 맞았고 욕을 들었으며, 회초리를 맞았다고 하였다.

괄괄한 성격의 문정대비 윤씨가 자신의 정책에 대하여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사림에 대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일대 철퇴를 휘둘렀다.

 그녀는 형제들인 윤원형과 윤원로를 등용하여 집권초기에 자신의 정적에 해당하는 초기의 반대파들을 유배 보내거나 죽이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한 뒤에는 자신이 신봉하는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승과를 두었고 선과 양종을 부활시키는 등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행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명종이 사람인 ‘조식(曹植)을 등용하려고 하자, 조식은 자신에게 내린 벼슬을 사양하면서 상소를 올린 내용이 유명하여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전하의 국사가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하여 하늘의 뜻이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중략)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가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가지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당대 문정왕후의 성격이 워낙 강한 여장부이다가 보니 당대 언론들조차도 그녀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금기가 될 정도로 그녀의 힘은 막강하였다.

그런데 조식은 이처럼 직설적인 상소를 하고서도 문정왕후로부터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당시 선비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어 그를 처벌하기에는 너무나 큰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문정왕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소윤의 대표자였던 윤원형은 중종의 사후 윤임이 중종의 여덟 째 아들인 봉성군 이완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으며, 인종이 죽었을 때 성종의 셋째아들인 계성군 이순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를 빌미로 하여서 문정왕후는 윤임과 유관 및 유인숙을 사사하게 하고는 이들과 손잡았던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났던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권력의 중심으로 전면 부상한 윤원형은 대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실행하였다.

그런데 윤원로는 과격한 성격이어서 성급하게 나서 대윤이 경원대군(명종)을 해치려고 한다고 무고하다가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이, 외척임을 의지하여 골육을 이간하는 방언이라고 탄핵하자 오히려 자신이 파직당하는 처지가 되어 해남으로 유배되면서 권력 다툼은 처음 대윤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대윤의 이러한 승리가 오래갈 수는 없었으며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이에 윤원형은 작전을 바꿔,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지중추부사 정순붕, 대사헌 허자 등과 합세하여 문정 대왕대비와 밀약을 마치고는 대왕대비와 임금을 알현한다는 상주를 올려 명종과 대비가 수렴첨정하는 충순당으로 나왔다.

?대신들을 모두 불러서 “우찬성 윤임이 계림군 유를 대행왕의 양자로 삼아 그를 옹립하고자 여러 차례 모의를 하였다면서,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인 유인숙동과도 공모한 사실이 있사옵니다” 하면서 무고하자, 사헌부 헌납 백인걸이 대비의 밀지에 따라서 정당한 절차도 없이 대신들을 벌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윤원형을 공박하였다.

 그러자 대윤파들은 유인숙, 유관 등과 함께 중종의 8자인 봉성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였다고 하면서 사림이 역적을 비호하고 대왕대비를 능멸했다 하여 백인걸의 견해에 동조한 조광조의 잔당을 물리쳐야 한다고 반격을 하였다.

인종이 승하하면 성종의 서자 계림군 이유를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에 문정대비에게 그 소문을 고하는데 이는 계림군이 윤임의 3촌 조카라는 사실을 이용한 무고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봉성군의 어머니인 희빈 홍씨가 아버지 홍경주와 함께 중종에게 참소한 사림파를 몰아내려 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무고이다.

 이로 인하여 대윤의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사림의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 이문건 등 10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수많은 관련자들이 유배되거나 파직되었다.

계림군 유를 고문하여 대역의 사실을 자백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봉성군 완은 평창으로 귀양을 갔다가 2년후에 사사되었고 계림군 유는 군기시 앞에서 효수되었다,?윤임과 그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사약을 받아서 죽었고 유관·유인숙 등도 사약을 받는 등 대윤의 거목들은 모두 참형을 당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하나인 을사사화이다.

이 사건은 정확히는 소윤이 대윤을 몰락시킨 사건이나 일부 사림 세력이 동조했다가 함께 변을 당하였기 때문에 사화(士禍) 라고 한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윤원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게 되어 보익공신, 위사공신이 됨에 따라서, 한성부윤, 서원군에 봉군이 되었으며, 그해 12월이 되어서는 종2품인 호조참판이 된다.

이로 인해 28인이 녹훈되었고 1,400명의 원종공신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서 기묘사화에서 겨우 소생하려하던 사림세력은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윤원형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켜서 아예 이들 세력들이 자라날 싹조차 잘라 버리려고 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난지 2년후인 1547년 9월에는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군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하는 내용의 벽서가 붙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로 인하여 을사사화 때 어리다는 이유로 살아남아서 귀양을 갔던 봉성군,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케 하였던 송인수, 윤임과 혼인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 3인이 사형을 당하였다.

윤원형일파는 이 사건을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하여서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잔당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하였다.

 이에 따라 이언적 등 3명은 극변안치(極邊安置)되었고, 임형수·노수신· 등의 4명은 절도안치(絶島安置), 권응정·권응찬 등 8명은 먼 지방부처(地方付處), 권벌·송희규·백인걸 등 14명은 중도부처(中途付處) 형을 받는 등 20여명이 유배형을 받았다.

?명종 3년에는 전 사관이던 안명세가 “중종의 소상도 지나지 않았고 인종의 발인도 끝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빈전 앞에서 대신들을 죽였다” 라는 사초를 썼다가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윤원형은 이와 같이 정적들을 처리한 다음에 거칠 것이 없어지자 정2품 중추부지사에 임명되어 짐짓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까지 올린다.

 신은 척리(戚里)의 한사람으로서 외람되게 공신의 대열에 참여하여 벼슬이 이미 종2품에 이르렀는데, 이제 대신이 신을 공이 있다고 아뢰어 다시 정2품에 올랐습니다.

벼슬을 이렇게 헤프게 준다면 조정의 명기(名器)가 이로부터 무겁지 않게 됩니다.

개정하소서. 이후 윤원형과 그의 형 윤원로의 앞길을 막아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윤원형의 출세가도는 끝없이 계속되는데, 예조판서와 경연특진관을 거쳐서 1547년에는 동지춘추관사가 되어《중종실록》,《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윤원형은 형과 불화하며 극단적으로 권력을 다투게 된다.

윤원형은 수시로 자신을 음해하는 윤원로에게 측근 병조좌랑 윤춘년으로 하여금 탄핵하도록 하였다.

?문정대비는 윤원로를 남원으로 귀양 보냈다 이듬해 사사하였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권력에는 부모형제도 없다고 세간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1551년 이후 윤원형은 수차례 우의정에 제수되나 계속 반려하다 1557년에 영중추부사를 거쳐서 정1품 우의정이 된다.

그러나 이후 윤원형은 근 20년간 절대권력을 쥔다.

1563년 1월에는 최고의 직인 의정부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이토록 흔들릴 것 같지 않게 보였던 윤원형의 절대권력도 명종이 장성하여 감에 따라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 두 사람이 조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언젠가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이를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명종이 마침내 20살이 되면서 문정왕후는 더 이상 수렴청정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명종은 자신이 장성하는 동안 어머니 문정대비가 맡아 운영하던 국정운영권을 돌려받자 자신의 친정체제를 만들어 나간다.

  명종의 친정 명종 8년이 되는 1553년 명종의 나이 20세가 되자 문정왕후는 7월에 수렴청정을 거두어야 하였다.

물론 이후에도 직·간접적으로 온갖 참견을 다 하였으나 이전처럼 자신이 마음대로 전횡할 수는 없었다.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동안 외삼촌 윤원형에게 권력을 내 줘 전횡하도록 하는 것을 보아 왔기에 윤원형을 견제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데 적합한 인물을 찾는다.

?우선 가장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중전 인순왕후의 친정인 심씨 집안에서 인척인 이량을 추천하는데 이량(李樑)은 전주이씨로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沈氏)의 외숙이다.

 명종은 부인의 외척인 이량(李樑)이 외척인 윤원형의 독주를 견제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며 임명하였다.

그런데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이량은 조정에 들어온 뒤에는 곧 헌납·수찬·교리·지평 등 청요직을 거치면서 이감·신사헌·권신·윤백헌 등의 수많은 추종자를 모아 나갔다.

?그런데 이들이 정치에 쇄신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요직을 독차지하고 부정축재에 혈안이 되었다.

도적을 막기 위한 감시자를 배치하였는데 오히려 도적 1명을 더 늘린 격이 되었다.

정치에 가장 쇄신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인사와 재정의 투명성이다.

 그런데 이량은 문무관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와 병조에다가 심복을 배치하고서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과거를 조작하여 자신의 아들 이정빈을 합격시킨 뒤 이조전랑에다 앉히기까지 했다.

나아가 자기편인 김명윤을 재상으로 삼아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우의정 이준경의 사직을 간언하기도 하였다.

?그의 집은 항상 저자거리와 같이 들끊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릉 윤원형, 심통원 등과 함께 ‘조선의 3흉(兇)이라고 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전횡이 심하여 지자, 이들은 사림파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견제하려던 윤원형의 탄핵을 받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이량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사림파의 박소립과 윤두수,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이 이에 반발하고, 윤원형도 문정대비를 통하여 그를 탄핵하였다.

명종은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이량을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해 외직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곧 중앙으로 불러들여서 이조참판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량은 돌아와서도 근신할 생각은 없이 더욱 더 세도를 부리기 시작하여 예조, 공조판서를 거치고서 이조판서를 거치면서 더욱 더 기승을 부렸다.

그의 부패는 점점 심해져 지자 그의 조카인 심의겸에게 발각되어 사회를 획책한 혐의로 삭탈관직 된다.

 그런데 명종 재위시에는 잇단 흉년이 계속되면서 나라안은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맥성들은 학정과 수탈이 계속되자 유랑민이 들끓고 임꺽정 등 도적떼가 창궐하여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탐관오리의 창고에는 곡식이 썩어나가는데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 상황에 1555년에는 왜구들이 70척의 배를 끌고 전라도일대를 휩쓴 을묘왜변이 일어났고, 양주의 백정이었던 임꺽정이 이끄는 도적떼가 1559년부터 1562년까지 3년여에 걸쳐서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그 때문에 명종은 중종 때 임시로 설치했던 비변사를 상설기구화하고 외침에 대비하도록 했다.

 명종 18년인 1563년 명종은 이량이 박소립과 윤두수를 제거하려 하자 심의겸의 도움으로 홍문관을 움직여 이량을 숙청하여 버렸다.

그런데 당시 그의 정적이었던 실권자 윤원형은 자신의 집안과 왕실의 외척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자신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과 혼인시켜서 명종 사후를 대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종의 반대에 부닺쳐서 무산되었다.

이에 윤원형은 우군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조판서 권철을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이것 역시 여의치 않게 실패하게 되면서 몰락의 전조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였다.

  문정왕후 난정과 손잡고 불교부흥에 앞서다.

 정난정과 윤원형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문정왕후 역시 불심이 깊어서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통하여 보우대사를 소개받은 뒤에는 봉은사에서 수시로 만나서는 친분을 다졌다.

그리고 난정은 수시로 입궐해 문정대비를 알현하였다.

?불교에 심취하였던 대비는 그녀를 소실이라고 차별하지 않았고, 정난정은 그런 대비를 지성으로 받들었다.

정난정은 문정대비에게 보우대사를 소개하여 불교 부흥의 기회를 제공하고 보우대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 불교를 부흥시켜 나간다.

 1550년에는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는데 선종의 본사로 봉은사, 교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삼게 하였다.

연산군 때 폐지시켰던 승과제도를 부활시키고, 사찰들이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하게 만들었고 전국에 3백여 개의 사찰을 공인하고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정난정은 윤원형과 문정대비의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조선의 상단에서 모리 등을 통하여 엄청난 축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축적한 자금을 마련한 다음에 이 자금을 활용하여 불사 중창에 거금을 기부하고 무차대회 등의 다양한 불교 행사를 마련하여 불교를 포교하는데 전념하였다.

그런데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는 불교의 진흥과 불사에는 열심이었지만 국가의 운영에 있어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정 대신들은 물론 일반백성들에게서 까지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한 예로서 보우대사를 군사를 관할하는 병조판서로 임명하는 한편 도선사의 주지로 삼고는 도대선사에 올려놓기도 하는 등 국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행위를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중흥정책은 조선이 건국이래 국시로 삼을 만큼 중시해온 배불 숭유정책의 근간을 정면으로 흔드는 정책들이다가 보니 이에 대한 조선 사대부와 국정운영자인 신료들의 반대는 지대하였다.

신하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 동맹휴학으로 맞섰다.

?그러나 강단 있는 문정왕후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뚝심 있게 불교 진흥사업을 밀어 붙였다.

특히나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보우대사는 온갖 비난에 직면하게 되어 보우를 죽이라는 장계가 75건이나 올라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불교 부흥정책을 실질적으로 추진한 것은 윤원형이었으니 이들에 대한 조선 양반들의 반발과 비판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정은 매년 두세 차례씩 두모포(현재 옥수동 부근)에 가서 방생을 하고는 쌀밥을 지어놓고 물고기에게 밥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워낙 귀해서 왕실에서밖에 먹지 못하는 타락(우유)을 집에서 종들까지도 실컷 먹게 하였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는 그 두모포에서 큰 물고기가 낚여 올라오면서 윤원형과 정난정의 몰락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어우야담》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강 두모포에서 한 어부가 물고기를 잡다가 큰 물고기를 낚았다.

바다에서도 잡히기 어려운 큰 물고기가 잡히자 누군가 파자(破字)점을 치니, 윤원형의 형(衡)을 파자하면 다닐 행(行)이 나오고 큰 대(大)가 나오며 나머지 부분은 물고기 어(魚)에서 연화발(火→?)이 빠진 글자가 된다.

지금 크고(大) 이상한 물고기(魚)가 잡혀 올라온(行)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진다.

즉 윤원형의 운명이 이 물고기와 같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일 후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윤원형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두모포(豆毛浦) 어부가 큰 물고기를 잡았다.

【이때 자전이 편치 못하여 붕어[?魚]를 먹고 싶어하므로 사람을 시켜 두루 구하였다.

이 때문에 두모포의 어부가 두모포에 그물을 쳤더니, 어떤 물체 하나가 그물 안에 들어왔는데 그 크기가 배만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힘껏 강가에 끌어내 놓고 보니 곧 하나의 큰 물고기였다.

길이가 포백척(布帛尺)으로 10여 척이고 너비가 3척이었다.

흰 빛깔에 비늘이 없고 턱 밑에 지느러미 세 개가 있으며 꼬리가 키처럼 크고 머리 위에 구멍이 있어 물을 빗물처럼 내뿜으며, 눈과 코가 물고기처럼 생기지 않았다.

강가의 늙은 어부들도 그것이 무슨 고기인지 알지 못하였다.

】(《명종실록》의 기록)  문정왕후는 정난정의 깊은 불심에 감동하여서, 명종 4년이던 1549년에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그의 첩인 난정의 소생이 다른 집의 적자와 통혼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은전을 베풀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에 권력을 탐한 사람들은 난정의 자녀들과 다투어서 혼인을 하려 하였다고 한다.

문정왕후는 당시 윤원형의 애첩인 난정이 낳은 아들들을 적자로 만들어 혼인하도록 하였다.

 서원군 윤원형은 종사에 큰 공로가 있는데도 스스로 사양하여 1등공에 참여하지 않았다.

근래 윤인서가 말한 것을 보면 나라에 공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모르는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막대한 공에 대하여 달리 갚을 길이 없으므로 그의 양첩(良妾) 자녀를 적(嫡)으로 만들어 허통하게 하고자 한다.

 윤원형은 명종 6년이던 1551년 2월 명종에게 청원하여 조강지처인 김씨의 악행을 고발해 집안에서 내치게 해달라고 하였다.

명종이 이 청원을 받아들이자 윤원형은 즉시 김씨를 쫓아내고 노비출신 정난정을 정실로 맞았다.

이후 김씨는 가난과 모멸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다가 정난정이 보낸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면서 그녀는 요녀이자 독녀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녀는 윤원형 권세를 활용해 전매와 모리행위로 상단을 조직하고 수 없이 뇌물을 받아 챙기었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집이 10채나 되었다 한다.

 문정대비는 1553년 3월에, 명종에게 ‘윤원형의 첩에게 직첩을 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림에 따라 정난정은 합법적으로 윤원형의 부인이 되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어서 그녀는 일약 외명부 종 1품의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고, 윤원형사이서 낳은 아들 윤효와 윤충원은 천역에서 벗어나 어엿한 양반이 되었다.

?그러나 난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어서 그해 10월 남편인 윤원형으로 하여금 서얼허통법을 시행하자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윤원형은 영의정인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서얼들도 적자들처럼 과거를 볼 수 있게 해 주도록 청원하였다.

당시에 이들이 올린 상소 내용은,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윤원형 등이 상소한 내용에 대하여 이조판서 안현 등을 비롯한 여러 신료들이 반대하고 나섰지만 문정왕후의 뜻이었는데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문정대비의 결단으로 서얼허통법은 통과 되었으며 이에 그 동안 음지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수많은 서얼들은 환호성을 올리면서 쌍 수를 들어서 기뻐하였다.

양반 사대부인 적자들은 이에 반대하였지만 수많은 서얼들은 가슴 속에 맺힌 큰 한을 풀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문정대비의 죽음과 윤원형의 몰락 문정왕후의 태릉 문정왕후의 태릉 중종 계비 문정왕후의 태릉(1565), 사적 제201호,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윤원형은 당시 성리학의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난정과 같이 살면서 본처인 연안김씨부인을 내좇은 뒤에 난정을 정실부인으로 삼았고 1563년에는 윤원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이 되었고, 정난정은 정1품 정경부인으로 외명부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 윤원형은 난정과 함께 왕실의 외척으로서 누이의 문정대비를 지지해 조선의 공고한 신분체제를 뒤흔들고 불교를 진흥정책을 밀어붙이는 등 사림파에게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주도하였다.

이들에게 성리학의 가치관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관을 넘어선 것이었으니 이들이 윤원형과 정난정에 대한 적대감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조선은 거듭된 흉년으로 유랑민이 들끓고 도적떼가 창궐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탐관오리의 창고에서는 곡식이 썩어가는데 백성들은 먹을 게 없어 굶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참상에서 명종 10년에는 왜구들이 을묘왜변을 일으켜 전라도 일대를 휘젓고 다니고, 1559년부터 1562년까지 3년여에 걸쳐 양주의 백정출신이던 임꺽정이 이끄는 도적떼가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속에서 명종 20년인 1565년 4월 6일 문정대비가 65세로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있었던 불교의 무차대회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병세가 심각해지자 4월 5일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중지시키고 사월 초파일을 이틀 앞두고서 죽었다.

?그녀가 무차대회를 앞두고 음식을 간소히 들었는데 이로 인하여 늙은 문정왕후가 죽었다고 많은 대신들은 이를 주관하였던 보우대사의 처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당시《왕조실록》에서는 무차대회를 중단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당시에 무차대회가 화려하게 거행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서 무차 대회를 베풀었는데, 내관(內官)을 보내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때 세자를 갓 잃자 요승 보우(普雨)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는 말을 떠벌여 무차 대회를 베풀기를 청하였는데, 자전(慈殿)이 그 말에 혹하여 그대로 따랐다.

승려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였으며, 조각 장식의 물건을 극도로 화려 사치하게 하여 옛날에도 보지 못하던 정도였다.

?또 붉은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고 황금으로 연(輦)을 꾸미고 앞뒤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 대가(大駕)가 친히 임어하는 상황처럼 베풀었으며, 또 배위(拜位)를 마련하여 마치 상이 부처에게 배례하게 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 흉패(兇悖)함을 형언할 수 없었다.

창고의 재정이 고갈되고 종실·척리(戚里)도 또한 곡식과 비단을 내어 그 일을 도왔다.

자전이 그 계율(戒律)을 따라 목욕 재계하고 소식(素食)하기를 수십여 일동안 하다가 병환이 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병세가 위독하게 되자 내관을 보내어 중지하게 하였는데, 무차 대회를 베푼 지 이미 며칠이 되었다.

】  문정대비는 1464년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자 보우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고 하여 무차대회(불교 법회의 한 종류) 베풀기를 청하자, 문정왕후는 이에 따라서 소선(素膳 : 어물이나 육류를 쓰지 아니한 간소한 반찬)을 행하면서 수천명의 승려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차대회를 행하다 병세가 깊어지자 4월 6일 언서 유교(諺書遺敎)를 남기고 4월 6일에 죽었다.

 문정대비는 자신이 죽은 후 명종이 건강을 위하여 소선(素膳)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한 후 자신이 부리던 나인과 각 사의 사람에게 신역을 면제하고 양식을 나누어 줄 것을 명령하고, 효혜공주(장경왕후의 딸로 김안로 며느리)의 아들 윤백원(尹百源)을 가까운 곳으로 이배하여 줄 것을 당부한 다음,?불교는 이단이나 부모의 뜻에 따라 불교의 양종과 불교를 예전과 같이 유지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는 문정대비의 바람이었을 뿐 그녀가 죽자 가장 먼저 상소로 올라온 것이 바로 보우대사를 죽이자는 것이었다.

 문정대비가 숨을 거두면서, 명종에게 불교를 온전히 보존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대신들이 처음으로 요구한 것은 보우대사의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가며 명종에게 여러 당부를 하였으나 명종의 치세는 명종이 처리할 몫이었다.

이에 대하여 사관은 평가하기를, 《명종실록》 문정왕후에 대해 평가하며 ‘서경(書經)’을 인용해 ‘암탉이 우는 것은 새벽의 다함이다’ 라 평가하였다.

명종 20년 1565년 4월 6일 2번째 기사 사시(巳時)에 대왕 대비가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윤씨가 그를 꺼리자, 그 아우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아우 윤임(尹任)과 틈이 벌어져, 윤씨와 세자의 양쪽 사이를 얽어 모함하여 드디어 대윤(大尹)·소윤(小尹)의 설이 있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고위(孤危)를 근심하였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효도를 극진히 하여 윤씨를 섬겼다.

그러나 삼조(三朝)할 즈음에 빈번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官家. 조정) 는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 말하기까지 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하고 또 상중에 과도히 슬퍼한 나머지 이어 우상(憂傷)이 되어 승하하게 되었다.

 주상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당시 제공(諸公)들이 그의 강한(剛?)함이 반드시 나라를 해칠 것을 근심하여 임조(臨朝)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대개 그 시세가 부득이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곧 화를 부를 뿐이었다.

얼마 못 가서 문득 큰 옥사를 일으켜 전에 인종을 부호한 사람을 모두 역적으로 지목하였다.

슬프다! ?윤임(尹任) 같은 사람은 소윤에게 미움을 당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무지한 무부(武夫)로서 혹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품었지만 반역한 형적(形迹)이 또한 나타나지 않았고, 유관(柳灌)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본디 청직(淸直)하여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또한 무슨 죄인가? 대개 윤 왕후(尹王后)가 전에 감정이 쌓이었고 뒤에 화를 얽어 만들었는데, 이기(李?)의 무리가 또 따라서 이를 도와 이룩하였다.

그래서 그 화가 길게 뻗치어 10여 년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사림(士林)을 짓밟고 으깨어 거의 다 쳐죽이기에 이르렀으니, 이를 말하자니 슬퍼할 만한 일이다.

?그 뒤에 불사(佛事)를 숭봉함이 한도가 없어서 내외의 창고가 남김없이 다 고갈되고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고 백성의 전지를 마구 빼앗으며 내수사(內需司)의 노비(奴婢)가 제도(諸道)에서 방자히 굴고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이 못에 고기가 모이듯 숲에 짐승이 우글거리듯 절에 모여들었다.

 그의 아우 윤원형(尹元衡)과 중외에서 권력을 전천(專擅)하매 20년 사이에 조정의 정사가 탁란(濁亂)하고 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지며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졌으니,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더구나 정릉(靖陵)은 안장(安葬)한 지 거의 20년이나 되었는데, 장경 왕후와 같은 무덤인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옮기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차마 그렇게 했단 말인가. 또한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사신은 논한다.

윤비(尹妃)는 천성이 엄의(嚴毅)하여 비록 상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수렴청정(垂簾聽政)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하는 것도 모두 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불교에 마음이 고혹(蠱惑)되고 환관을 신임해 나라의 창고를 다 기울여 승도(僧徒)들을 봉양하고 남의 전지와 노복을 빼앗아 내수(內需)를 부유하게 하며 상벌(賞罰)이 참람해 사람들이 권계(權戒)되지 않았다.

?게다가 권세가 외척으로 돌아가 정사가 사문(私門)에서 나오고 뇌물이 공공연 행해지며 기강이 문란하고 국세(國勢)가 무너져 장차 구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명종 대왕이 전의 잘못을 깨달음에 따라 장차 크게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는데, 정령(政令)을 베푼지 오래지 않아 문득 승하하니, 아, 슬픈 일이다.

 문정대비의 능호는 논의 끝에 태릉(泰陵)으로 결정되고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하고 있는 곳에 묻힌다.

그녀의 아들인 명종은 평상시에도 병약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명종실록》에 의하면, 어머니인 문정대비의 발인이 명종 20년 7월 13일 자시(子時)에 거행이 되었는데, 명종은 “병환으로 문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최질(衰?) 만 갖추고 빈전(殯殿)의 동쪽 뜰에서 곡송(哭送)할 뿐이었다.

” 하였다.

 문정대비가 죽자 조선의 불교 배척을 막아줄 가림막은 없어져 연이어 보우대사를 처형하라고 요구하는 상소가 줄을 잇는다.

그러나 처음 명종의 심사를 알지 못하여 잠시 머뭇하자 명종은 경연에서 한나라 문제가 외삼촌 박소를 죽인 사례를 언급하면서 이를 윤원형 공격의 신호탄으로 여겨서 모두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보우대사가 문정대비를 꾀어서 소선의 상태로 무차대회를 열게 하여 건강을 해쳐 일찍 죽게 하였다는 죄목을 걸어서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소가 연일 거듭되자, 명종은 처음 승직(僧職)만 삭제하여 서울 근처의 사찰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도록 명하나?유생들의 탄핵상소가 계속 이어지고, 그해 6월 율곡 이이가〈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로서 그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명종은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보우대사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1565년 8월 3일, 대사헌 이탁·대사간 박순 등이 윤원형의 죄악을 26개의 죄목을 적시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윤원형에 대한 탄핵을 요구하는 상소가 연일 이어진다.

대사헌 이탁·박순이 올린 윤원형의 주요 혐의의 내용은 첩으로 정처를 삼고, 그녀의 딸과 덕흥군 이초의 아들과 혼사를 의논한 것에 대하여 가장 먼저 언급하면서, 천출의 자식을 감히 왕가에 들여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실부인 김씨의 재산을 빼앗아 굶어 죽게 했고, 도망노비들을 비호했으며,?난정이 궁중출입을 마음대로 하였다며 비판하고 있다.

상소의 내용은 강상(綱常)의 죄를 가장 먼저 적어 신분질서의 파괴가 가장 중요한 죄목임을 보이고 있다.

대사헌 이탁(李鐸), 대사간 박순(朴淳) 등이 아뢰기를,  “영의정 윤원형은 왕실(王室)의 골육지친으로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령(政令)을 제 마음대로 결정하여 행하고 보위(寶位)를 농락하였으며, 임금의 위엄과 권세를 장악하고 기세등등해 거리낌없이 날뛰었으며, 임금을 위협하여 제압하고 궁금(宮禁)을 곁눈질해 신하로서의 예절을 조금도 지키지 않았으며,?심지어 모든 신료들의 입을 틀어막고 나라 안의 모든 이권(利權)을 긁어모아 팔도(八道)에서 보내오는 물건이 봉진(封進)하는 것보다 백배나 되며, 모든 관리들이 임금보다 그를 더 두려워하여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이 사람에게 보고한 뒤에 행함으로써, 전하는 위에서 고립되어 실권없는 빈 자리만 지키시고 벼슬아치들은 아래에서 몹시 두려워하여 조석(朝夕)을 보존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중략) 첩으로 정처(正妻)를 삼는 것은 《춘추(春秋)》에서 크게 경계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이런 일이 더러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모두 제왕이 한 일이고 신하로서는 차마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윤원형은 방자하게 명분을 무시하고 조정을 협박하여 임금의 총명을 속여 첩으로 부인을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법도를 무너뜨리고 기강을 문란시켜 위로는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래로는 만세의 비난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 좋은 것만 알았고 그 이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으니, 우리나라가 개국한 이래로 신하로서 감히 이와 같은 일을 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의 아들은 중묘(中廟)의 손자인데 감히 자기 첩의 딸로 혼사를 의논했습니다.

대체로 측실(側室)의 딸을 사대부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옹주(翁主)를 하가(下嫁)하는 예법인데, 윤원형이 이 예로 자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가짐과 처사가 걸핏하면 스스로 궁금(宮禁)에 비기니, 신하로서 하는 짓이 이와 같고서 임금을 업신여기고 핍박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또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환후가 크게 악화되었을 때, 첩을 보내어 사가와 다름없이 제멋대로 대내로 들어가서 날마다 3전(殿)에게 직접 문안드리게 하였습니다.

나인들이 좌우로 열 지어 늘어서 있는데 외신(外臣)의 소첩이 조금도 거리낌없이 당돌하게 곧바로 들어가고, 심지어는 내의(內醫)에게 호령하며 함부로 잡약(雜藥)을 올렸는데 의관(醫官)이나 제조(提調)들은 그 약이 맞지 않는 것인 줄 아나 감히 말리지 못하였습니다.

?옛날에 교활하고 방자하기로 소문이 났던 중국의 왕망(王?)이나 동탁(董卓)의 처첩들이라도 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을 캐어보면 일조 일석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윤원형은 평생에 임금을 안중에 두지 않았고 궁금을 업신여겼으니 그의 생각은 모두가 오만 무례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런 일을 편안히 여기고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팔도의 진영(鎭營)과 여러 고을에는 추종하는 사람을 여기저기 배치해 놓고 바다와 육지로 끊임없이 그 집 문에다 물건을 수송해 10여 채의 커다란 집에는 진기한 보화들이 가득 차 있으니, 사가(私家)가 나라보다도 부자이고 개인이 임금보다도 사치스러우며 여러 고을은 황폐하여지고 나라의 근본은 날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집에는 항상 거처하는 곳처럼 공장(供帳)·집기·노비·음식을 빠진 것 없이 고루 갖추어놓고 마음 내키는 집에 가서 침식하였습니다.

곡식이 썩어나자 흙같이 천하게 여겨 ‘이런 것은 오래 저장하기 곤란하다.

’ 하고, 유기(鍮器) 장사를 모두 부르자, 온 시장이 이름 있는 좋은 그릇을 모두 수레와 말에 싣고서 구름처럼 그의 대문 앞으로 모여들어 쌀과 교환하니 그릇더미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기는데도 윤원형은 스스로 훌륭한 계책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수상(首相)의 신분으로 감히 장사꾼처럼 행동하였으니 얼마나 나라를 욕되게 한 것입니까. 간석지를 많이 막고 연해(沿海)와 내지(內地)에 있는 양전(良田)을 점령하여 관(官)에서 종자를 대어주고 수령이 농사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니, 백성은 모두 경작 개간하는 종이 되고, 온 나라의 죄짓고 도망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들었습니다.

더구나 팔도에 반력(伴力)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고을이 없으니 이는 참으로 나라를 나누어 스스로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억세고 사나운 종을 조종하여 남의 아내를 약탈하고 남의 농토를 강탈하였으며,?심지어 세도를 믿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데도 수령이 감히 막지를 못하고 조정이 감히 말하지 못하며 부모를 죽여도 감히 고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윤원형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렇게 극도에 달했으니 전하의 세력이 날로 고립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문정 왕후께서 승하하시던 날 부음을 듣고 입궐하였으면, 당연히 가슴을 치고 땅을 구르며 통곡해야 할 것인데 평시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밥을 먹었고, 또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 산릉 도감(山陵都監)에게 부탁하여 감역(監役) 등의 벼슬을 시키게 하였으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의 행동거지가 이처럼 태연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대행(大行)을 재궁(梓宮)에 모실 때에도 들어가 참관하였는데,?다른 사람은 모두 실성 통곡하는데도 윤원형은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상사(喪事)는 속히 진행하는 것이 좋다.

’고 말하고, 재촉하여 관 뚜껑을 덮었으니, 당시에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놀랐습니다.

 문정 왕후가 윤원형에게 지위로는 국모(國母)이시고 친분으로는 동기(同氣)이시며, 평생에 받은 은총은 하늘과 같이 넓고 커서 망극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건만 슬퍼하는 마음이 없으니, 이는 심장이 얄팍하고 아주 포학한 소인의 소행이라 아무리 윤원형이라도 자기 마음이 이런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윤원형을 속히 귀양보내시어 재앙의 빌미를 막으소서.“ 하니, 【이날 양사(兩司)가 모두 정원 문 밖에 모여 있었는데 소매 속에 품고 간 탄핵문을 정원에 내놓지 아니하고 곧바로 승전 색에게 주어 입계하도록 청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기미가 중대한 데에 관계되는 일이라 경솔하게 누설시킬 수 없다고는 하더라도 정원은 직책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곳인데 지금 정원에 들이지 않았으니 승지가 장차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는가? 큰 위세에 겁을 먹고 잘못 처리하였으니, 이것이 한때 우연한 실수이기는 하나 후일에 구실을 붙일 자가 없을 것인가?】답하기를,  “이 아뢴 내용을 살펴보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첩을 정처로 삼은 것은 첩이 이미 천인이 아니므로 가모(家母)를 삼은 것이다.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와 혼인을 의논한 것은 첩의 자식이라고는 하더라도 이미 허통(許通)하였으므로 의논한 것이다.

또 문정 왕후께서 미령하실 적에 첩이 와서 약을 의논한 일을 영상이 어찌 알았겠는가.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은 영상이 몰랐을 것이다.

?비록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가는 먼저 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니 원훈 대신(元勳大臣)을 귀양보내는 이치가 어디 있는가? 평상시에도 대신을 경솔하게 진퇴(進退)시킬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내가 상중(喪中)에 있는 지금에랴. 윤허하지 않는다.

” 하였다.

두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원형의 권력은 매우 커서 한 때에는 선조 때 동인의 영수이던 김효원(金孝元)이 윤원형의 집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이던 이조민의 친구였는데, 뒷날 심의겸이 면전에서 공박하고 이를 공론화하면서 두 사림의 사이가 벌어져 동서 분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 당시 동서 분당의 주역은 김효원과 심의겸이었다.

그 갈등의 원인은 심의겸이 우연히 윤원형 집 앞을 지나다가 김효원이 그 집 대문에서 나오는 걸 보고 시작되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같은 소인배 집에서 식객으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여 김효원은 소인배라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자 소인배라 맹비난하여 두 사람이 다투면서 동서분당의 원인이 되었다.

 이를 심의겸이 서류결재를 위해 윤원형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을 드나드는 식객들에게 쓸 무수한 이부자리를 보았다.

심의겸은 한심하여 그 이부자리가 누구 것인지를 하나하나 물었는데 그 중 김효원의 이름이 있었다.

이에 심의겸은 김효원이 벼슬자리 얻자고 권력자 집에 드나드는 소인배로 보았다.

?당시 김효원은 아직 벼슬이 없었으나 재야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의겸은 이를 기억하였다가 후에 김효원이 과거급제하고 신고식 할 때, 김효원이 윤원형이네 집에서 빌어먹던 식객이라고 하였다.

이에 김효원은 장원급제하고도 몇년간 한직을 머물렀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러나 문정대비가 죽자, 문정대비에 의지하여 승승장구하였던 윤원형의 운명도 ‘끈 떨어진 연’ 이요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고 만다.

문정대비의 국상기간에는 그래도 상소가 잠시 주춤하였으나 국상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림파는 척신 세력의 상징인 윤원형과 보우대사에게 화살을 겨누어서 집중공격하기 시작한다.

?9월 8일에는 형조에서 윤원형의 처인 김씨의 독살을 호소하는 장모 강씨의 소장을 올리며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친다.

 형조가 아뢰기를, “고(故) 현감 김안수(金安遂)의 처 강씨(姜氏)가 전후로 소장을 올리기를 ‘사위 윤원형은 젊었을 때 딸 김씨와 결혼하여 여러 해를 함께 살았는데, 정윤겸(鄭允謙)의 서녀 정난정(鄭蘭貞)을 얻은 이후 임금을 속여 내쫓고, 김씨의 사환(使喚) 비(婢) 구슬이(仇瑟伊)·가이(加伊)·복한(福漢)·복이(福伊)와 노(奴) 향년(香年)·복년(福年)·허년(許年)·명장(命長) 등을 잡아두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도리어 종들로 하여금 원주인을 능멸하고 모욕하게 하였고, 그의 가산(家産)을 모두 빼앗고 마침내 종적을 없애 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씨가 매우 굶주려서 정난정에게 먹을 것을 구하자 정난정이 음식 속에 독약을 집어넣고 몰래 구슬을 시켜 김씨에게 올리게 하여 김씨가 먹고 즉시 죽었습니다.

온 집안이 모두 그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나 대단한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소장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 하였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본조가 마음대로 처단할 수 없으니 금부로 보내겠습니다.

"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명종실록》 명종 20년 1565년 9월 8일 신축 1번째기사) 모든 대신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자신들을 공격하자, 이러한 윤원형과 정난정은 벼랑끝에 선 심정이었으나 그래도 외조카 명종이 결코 자신들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 부부가 간과하였던 것은 성리학의 유교 국가인 조선의 가치관에 비추어 볼 때 불교의 부흥을 꾀하였으며 적처를 내치고 정부인이 되고 서얼차대법을 개정하는 것은 신분질서에 도전한 것으로 얼마나 큰 죄악인지 간과한 것이 이들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형조는 난정이 윤원형의 부인인 김씨를 독살혐의를 수사하기 위하여 김씨의 종이던 구슬이 등을 문조하여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두 죽고 주거리(注巨里)하나만 남고 모두 맞아 죽였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결정적인 자백을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심한 고문에도 의도한 결과가 나오지 않자 ?10월 14일 좌부승지 홍인경이 직접 정난정의 추국을 청하고 윤원형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종은 한동안 시간을 끌면서 외삼촌의 처벌에 대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상소가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윤원형의 관직을 삭탈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인 1565년 8월 21일, 윤원형은 결국 파직되어 황해도에 있는 강음 땅으로 방귀전리(放歸田里) 되었다.

‘방귀전리’ 라고 하는 것은 ‘풀어 고향에 돌아가게 한다’ 는 뜻이니, 유배형보다 한 등급 아래 가벼운 조치로서 벼슬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내쫓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이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윤원형의 목숨을 요구했으나 명종입장에서 문정대비의 3년상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외숙을 죽인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 사관은 《명종실록》명종 20년 10월 22일 1번째 기사를 통하여 이를 평가하고 있는데, 윤원형이 첩으로 처를 삼도록 하여 ‘적첩의 명분이 문란하게 되어 기강이 무너졌고, 정난정이 김씨에게 독을 넣어 죽인 것이 강상(綱常)의 변’ 이나 바로잡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윤원형이 첩으로 처를 삼고자 은밀히 문정 왕후에게 부탁하여 정난정을 부인(夫人)으로 명하니, 적첩(嫡妾)의 명분이 문란하게 되어 인륜의 기강이 무너졌다.

정난정이 이미 부인이 되고 보니, 또 김씨가 그대로 있으면 자신에게 해로움이 있을 것을 염려해 독을 넣어 그를 죽였다.

?살인한 자를 죽이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상법(常法)이다.

길가는 사람이 길가는 사람을 죽여도 참혹하다 하거늘 하물며 얼첩(孼妾)이 주모(主母)를 해쳤으니 이는 강상(綱常)의 일대 변이다.

윤원형이 이미 몰락했고 공론이 계속 일어났으니 또한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직도 그 죄를 국문해 율(律)을 바로잡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런데 명종 20년인 1565년 11월 13일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이 자살했다.

정난정은 연일 대신들이 남편인 윤원형과 자신의 처벌을 주장하고 자신에게도 역시 직접 추국하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이어지는 것을 보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에는 의금부로 끌려가서 고문을 받아 추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정난정은 죽음을 예감하고는 항상 품속에는 항시 독약을 품에다 지니고 다니면서 자신의 최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주변의 측근들에게 만약 자신을 잡으러 누가 오면 이를 알려달라고 부탁하여 놓고 있었다.

그녀는 죽더라도 소나 개 돼지처럼 추한 꼴로 죽기는 싫었다.

더구나 연일 상소를 통해 적처 자격을 박탈할 것을 요구하여 정경부인 자격을 잃은 천첩신분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금부도사가 평안도 진장(鎭將)을 잡아 가지고 금교역(金郊驛)에서 말을 바꾸어 타고 있었는데, 윤원형의 집종이 이를 보고 달려와 고하기를 ‘도사가 금방 오고 있다.

’ 고 이를 고하자, 난정은 금부도사가 자신을 죽이려고 온 것으로 알고 착각하여, 남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차라리 자살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해 독약을 마시고는 자살한 것이다.

당시 11월 13일 정난정의 죽음의 상황에 대해《명종실록》은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김씨를 독살한 정상은 환하게 드러나 의심이 없어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인데, 다만 윤원형을 두려워해 감히 신인(神人)이 함께 격분할 죄상을 발설치 못함이 여러 날이었다.

그 일에 간여된 계집종들을 다 문초했는데 그 음흉한 비계(秘計)는 정난정도 스스로 천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항상 독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나를 잡으러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약을 먹고 죽을 것이다.

’라고 하였었다.

마침 금부 도사가 평안도 진장(鎭將)을 잡아 가지고 금교역(金郊驛)에서 말을 바꾸어 타고 있었는데, 윤원형의 집 종이 이를 보고 달려와 고하기를 ‘도사가 금방 오고 있다.

’하니, 윤원형은 소리내 울며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정난정은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음만 못하다.

’ 하고 약을 마시고 바로 죽었다.

(하략)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넋을 잃은 윤원형은 그녀를 장사지낸 뒤 닷새 후인 11월 18일 똑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윤원형과 난정 부부의 동반자살 소식을 들은 신료들은 쾌재를 부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양반사대부들은 정난정이 죽은 후 천민으로 환원시켰지만 자식들만은 양반으로서 남았다.

?부모가 죄인으로 되기 전에 죽었으므로 그들은 공식적으로 죄인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종실록》명종 20년 11월 18일 5번째기사는 ‘윤원형의 졸기’ 가 실려 있다.

 윤원형의 졸기 윤원형이 강음(江陰)에서 죽었다.

처음 윤원형은 물론을 입어 재상에서 파면되었는데도 며칠을 지체하며 머물러 있다가 동문 교외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그치지 않고 공론이 더욱 격렬함을 듣고 끝내 면하기 어려움을 알았으나, 또 가산이 흩어질 것을 염려해 어둠을 틈타 부인의 행색처럼 밤에 교자를 타고 도성에 들어와 집으로 돌아왔었다.

이어 그의 첩 정난정과 더불어 강음 전사(田舍)에 가서 거처하였는데, 정난정의 죽음을 보고 드디어 분울해 하다가 또한 죽었다.

 윤원형이 사림들을 풀베듯 죽이며 흉악한 짓을 있는 대로 다했는데,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더니 금일에 이르러 마침내 핍박으로 죽으니, 조야가 모두 쾌하게 여겼다.

윤원형이 일단 패하고 나니 원수졌던 집에서 떼를 지어 빼앗겼던 재물에 대한 송사를 다투어 일으켰다.

?조정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바로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관원을 차출해 재물들을 본주인에게 돌려주게 하니 그 집안에서도 온갖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임금은 위사(衛社)의 공이 있다 하여 3등의 장례를 하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전대의 권간으로 그 죄악이 하늘까지 닿기로는 윤원형 같은 자가 드물 것이다.

중종 말년,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사자(嗣子)가 없음을 보고, 그의 형 윤원로(尹元老)와 더불어 서로 어울려 헛소문을 만들어 동궁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문정 왕후가 안에서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대윤(大尹)이니 소윤(小尹)이니 하는 말이 있게 되어 중종이 이 걱정으로 승하하였다.

혹자는 동궁이 실화한 것이 모두가 윤원형 등의 행위라고 하였다.

그 뜻이 또한 흉참하다.

 인종이 승하함에 미쳐, 윤임(尹任)을 핍박해 내쫓고는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다가 끝내는 윤임이 다른 마음을 가졌다 하였으니, 실은 윤원형 등이 빚어낸 말이었다.

이 이후로 사림들 가운데 당시 명망이 있던 사람들을 일체 배척해 모두 역적의 무리로 몰아, 죽는 자가 계속되었다.

명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문정 왕후의 제재를 받아 자유롭지 못했는데, 윤원형은 무슨 일이고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 왕후와 내통해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해 임금의 우분(憂憤)이 언사와 안색에까지 나타나게 하였다.

 내수(內竪) 중 혹 이를 아는 자가 있으면 윤원형은 궁인들에게 후히 베풀어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때문에 임금의 일동일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상이 내수에게 ‘외친이 대죄가 있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 하였는데, 이는 대개 윤원형을 지칭한 것이다.

이 말이 누설되어 문정 왕후에게 알려졌는데 문정 왕후가 이를 크게 꾸짖어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다면 상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하니, 상이 감히 할 말이 없었다.

모든 군국(軍國)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와 상은 내심 그를 미워하여 이양(李樑)을 신임해 그 권한을 분산시켰다.

 정사를 잡은 지 20년, 그의 권세는 임금을 기울게 하였고 중외가 몰려가니 뇌물이 문에 가득해 국고보다 더 많았다.

윤원로의 권세가 자기와 비슷해짐을 저어해,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해 그 죄목을 열거해 글을 올리게 해 죽게 하였고, 천첩을 몹시 사랑해 정처를 버리더니 필경 그를 독살하는 변을 빚었고 이어 첩으로 부인을 삼았다.

첩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모두 사대부가에 혼인시켰고?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 첩의 자식도 벼슬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을 힘써 내세워, 이를 미봉하였다.

당시의 재집(宰執)들이 휩쓸려 그를 따랐지만 오직 임권(任權)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기타 흉악한 죄들은 머리털을 뽑아 헤아린다 해도 다 셀 수 없다.

비록 견출(譴黜)이 가해졌으나 체형(體刑)을 면했으니, 세상인심의 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들이 죽자 이들이 뇌물과 각종 이권을 통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하였던 물건들은 원주인에게 돌려졌다.

이들의 시신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산 4-20에 자리잡고 있는 파평윤씨 정정공(貞靖公) 윤번(尹?)을 중시조로 하는 정정공파 묘역(경기도 기념물 182호)에 묻혀있다.

?이곳의 비석에는 ‘ 정윤겸의 서녀, 초계정씨 난정지 묘’ 라고 씌어 있고, 약간 밑에는 윤원형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옆으로 자리잡고 있는 비석의 글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파평 윤공 원형지 묘’ 라고 씌어 있다.

 이들 부부는 사후 역적으로 매도되었으나 융희 1년인 1907년 11월부터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의 건의로, 1908년 1월 작위와 직책이 회복되고, 4월에 죄적에서 삭제되며 명예 회복하였다.

그가 죽고 난 후 자신의 조타 명종에 의하여 다시 복권될 수 있었으나 명종이 문정대비 사후 2년만에 요절하면서 그에 대한 복권의 가능성은 사라져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조선말에 이르러서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이완용의 힘을 빌려서야 그는 사후 복권되었다.

  《참고》윤원형과 정난정 관련 드라마 윤원형과 정난정에 대한 이야기로 제작된 드라마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교동 마님》 (MBC, 1981년, 배우: 오지명)《풍란》 (MBC, 1985년

1985년, 배우:한인수)《조광조》 (KBS, 1996년

1996년, 배우:이영후)《임꺽정》 (SBS, 1996년

1997년, 배우:박근형)《여인천하》 (SBS, 2001년

2002년, 배우:이덕화)《불멸의 이순신》 (KBS, 2004년

2005년, 배우:최병학)《천명》 (KBS, 2013년

2013년, 배우:김정균)《옥중화》 (MBC, 2016년

2016년, 배우:정준호)  《후기(後記)》  윤원형과 난정은 오늘날까까지도 누이 문정왕후에 의지해 권력을 장악하고 수많은 사림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후 이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상단에서 이권을 도모해 부를 쌓아 축재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긁어모아 요부 정난정과 함께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은 간신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들이 부와 영화를 누리는 과정에서 사회윤리를 저버리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였던 점은 사회적으로 비난반아서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5백년동안 권력을 독점하여 살면서 유교를 신봉하던 일부 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만이 반영된 역사적 산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고려 당시 끼친 해악이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 내내 불승은 천역을 담당하고 멸시를 받으면서 양반사대부로부터 핍박받았던 불교의 시각에 있어서나, 부모를 잘못 만난 죄로 엄격한 신분제도의 굴레에서 고통받으며 신음하였던 서얼과 민초의 입장에서 이를 재조명 하여 보면. 일면 사회개혁가로서의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 땅에 사는 사람들간에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어 하나로 뭉치게 하는 동질감내지 연대감을 희석내지 없애서 조선의 역사발전을 가로막아서 근대화를 늦추어 일본의 식민지화를 초래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조선이 일본에 침탈당할 때 매천 황현이, 나라가 망하여도 자결하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라도 자결한다고 말하였듯이 조선이 정작 망할 때 그토록 신분질서를 목숨과 같이 중히 하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일부 사대부들만이 의병운동과 국권수복운동에 참가하였을 뿐이었다.

?조선 양반들은 귄리만 있고 백성으로서의 나라를 지탱하게 하는 세금과 나라를 지키는 국방의 의무는 저버렸기에 양반의 수족이었던 천민에게서나 국가의 평민들은 나라를 뺏기는 것도 다른 지배자들의 전환에 다름 아니라는 시각을 가졌을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관이 윤원형의 ‘서얼차대법’ 폐지가 자신의 소생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할지라도 그가 추구하려던 이러한 신분제도의 철폐를 위한 ‘서얼허통제’ 는 조선사회의 나갈 방향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한 사람은 요부, 한 사람은 간신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었기는 하였지만 이들은 일시적이나마 이와 같은 신분의 연좌제와 같은 제도속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빛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왕 산국을 따는 길에 후배 태하랑 함께 하기로 하고, 답사를 겸하기로 했다.

이곳 고양시보다는 아무래도 자연이 덜 훼손되지 않은 파주가 산국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윤원형과 정난정의 무덤이 있는 파주 교하를 선택했다.

 정난정의 무덤/ 첩의 몸으로 정경부인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남편 윤원형 무덤 바로 옆에 있다.

 파주시청 홈페이지 안내는 참으로 불친절했다.

윤원형네 집안 무덤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넓이만도 22만평에 이른다고 하는데,홈페이지가 알려주는대로 따르다가 목적지를 가운데 두고 크게 한바퀴 돌았다.

 윤원형과 정난정, 그리고 문정왕후.그들의 극적인 삶만큼이나 TV 사극에 여러 번 등장했던 인물들이다.

 일명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은 파주시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안내도조차 없다.

 파평윤씨는 조선의 대표적인 왕비족이다.

특히 이곳에 있는 윤번(정정공)의 후손 중에 3명의 왕비가 나온다.

그러니 그 위세가 짐작하고 남음이 있겠다.

  조선 전기의 왕실혼인도/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윤번의 따님이다.

그리고 중종의 비인 대윤의 장경왕후와 소윤의 문정왕후가 모두 윤번의 후손이다.

 윤번을 중심으로 가계도를 그리면, 윤번 --- 사윤(士?, 2번째 아들) - 보(甫) --- 장경왕후(보의 손녀)         |                                                 |         |                                                  -   윤임(보의 손자)         |          - 사흔(士?, 3번째 아들) - (계겸, 사흔의 둘째아들) --- 문정왕후(계겸의 증손녀)         |                                                                       |         |                                                                        - 윤원형(문정왕후의 4째 동생)          - 정희왕후 윤씨 이와 같다.

즉 윤임과 윤원형은 9촌 관계이고, 윤임이 아저씨다.

그러나 윤원형 세력에 의해 윤임과 그의 세 아들이 사형을 당했다.

자신의 조카가 왕위(명종)에 오르면서 윤원형은 승승장구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른다.

정난정은 첩에서 정경부인으로 신분상승을 한다.

 윤원형의 무덤/ 비석 뒤로 숨어 있는 무덤이 정난정의 무덤이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스스로 자살하였기 때문에 삭탈관직만 되고 후손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문정왕후의 9년간에 걸친 섭정이 있었고,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과를 부활하였고,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는 이때 승과 부활로 승과에 급제한 승려들이다.

)윤원형은 권력을 한손에 잡았고,정난정은 첩에서 정경부인이 되었으니그 과정에서 무리가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기와 원한 또한 막대하였을 것이다.

 물론 동정 따위를 하자는 게 아니다.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한 동안 축재하여 서울에 16채의 저택이 있었다고 하는데 동정할 이유가 뭐가 있으랴. 다만 권력을 장악한 자들에 대하여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폄하하였던 권력자들 또한 믿지 않을 따름이다.

   이곳 묘역에 있는 무인석 이곳 정정공파 묘역을 들러보니 의외로 무인석이 많다.

무덤 앞에 세우는 인물상은 왕실이 아니면 무인석을 세울 수 없었다고 하는데이들은 문인석 대신에 무인석을 많이 세웠다.

권력의 중심이면서도 그 권력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는 것은그때에도 종종 있었나보다.

 윤지임의 무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아버지 무덤이다.

남의 처첩을 가로채는 등 전횡을 많이 했지만, 아들과 달리 외척은 정치와 멀어야 된다는 신조로 살았다고 한다.

덕분에 후손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의정을 지낸 이 치고는 초라한 윤원형의 무덤과 달리 그의 아버지 윤지임과 그의 큰형 윤원필의 무덤은 아주 당당하다.

 정정공 윤번의 묘(뒷편)와 그의 부인 인천이씨의 무덤/ 인천이씨는 따님(정희왕후)이 왕후가 된 후 죽었기 때문에 남편보다 장명등이 더 장대(민간 무덤에서 가장 크다고 함)하다고 한다.

 산국은 어떻게 됐을까.이상하게 이곳에서 그렇게 많이 돌아다녔는데도 산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주에 산국 따러 또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이곳은 넓은 산들이 높지도 않고, 포장되지 않은 길들이 능선에서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산책이나 자전거 타기 참 좋을 것 같다.

 가장 찾기 쉬운 방법은 교하 이마트 안쪽 마을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길(막힌 것 같지만 있음)이 있는데, 그리로 넘어가면 된다.

워낙 넓으니 혹시 가게되면 먹을 것 싸가지고 가시길...   장녹수 장녹수는 드라마로도 있었고  영화 간신에서도 나오게 됩니다.

우선 장녹수는 가난하게 태어나서 몸을 팔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여인이였습니다.

이쁜 외모로 양반대감 가노들의 부인으로 살아가며 아들도 낳았는데요그리고 나서 노래와 춤을 배우고 몸도 팔며 창기가 되었습니다? 연산군 시절의 여인인데요흥청 망청 이라는 말이 나올때 흥청으로 궁에 들어와서 연산군에 눈에 들어  말그대로 권력에 중심에 서게 되었고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부추겨서 더더욱 국고를 낭비하고 문란하고 부패한 폭군으로 만들었습니다.

30살에 나이에도 기생으로 들어와서연산군을 꼬신 그녀..30대나이에도 16살의 외모처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을정도니어마어마한 동안이네요애엄마인데...허허? 하지만 권력을 손에 진 시절도 지나고...폭정 연산군과 장녹수는 패망의 길로 걷게 됩니다.

바로  조선 11대 왕  중종이 반정을 일으킨 사건이죠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새 시대를 열겠다는 이 반정은성공하게 되었고연산군과 함께 가장  권력을 휘둘렀던 장녹수는 그렇게 참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흥청망청 이라는 말은 바로 연산군 시대에 생겨난 말로서 흥청 과 망청 을 개설하여국고를  놀고 마시고 유흥하는곳에 탕진하게 되면서 생겨 난 말이죠정말 저시대에 얼마나  놀았으면 국고가 부족할 정도였다고 하네요개인적으로  조선시대 3대악녀중에서  장녹수가 저는 제일  살벌한거같아요 ㅎ30대 여인이 기생이 될려고 춤과 노래를 배워서 궁에 들어와서 연산군까지 꼬시고권력을 휘두를정도 ㅎㅎㅎ ㄷㄷㄷㄷ남자였으면 아마 최소 연산군일듯 ㅋ  둘이 잘 어울리네...ㅋㅋ다음 조선시대 3대악녀        2. 정난정? 정난정... 이 여인도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시대상으로는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였으나,명종의 나이가 어려서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절 입니다.

출세를 하고 싶었던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첩이 됩니다.

 정난정은 첩이 된 후에도 문정왕후에게  잘 보여 궁궐출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잇는 권한까지도 갖게 되었고첩 이라는 타이틀이 싫어서  윤원형의 본처를 독살하였습니다.

그후에 문정와후에게   외명부 품계인  정.종 1품  정경부인의 봉해졌습니다.

정경부인은  대략적으로 옹주, 공주 들과 동등한 등급의 품계 라고 하니 여인으로서 내명부가 아닌 외명부로는  최고의 직분이라고 볼 수 있는거죠 ? 하지만.... 역시 이여인도 조선시대 악녀에 걸맞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권력의 중심인 문정왕후가 죽게 되자   탄핵을 받아 천인으로 강등되었고윤원형과 함께 유배를 갔으나,갖은 멸시와 탄핵등이 빗발치게 되자 독약을 먹고 스스로 자결하엿다고 합니다.

정난정 ...이여자도 살벌하네요..암튼 외모와 지략은 있으니 저만큼 올라간거겠죠....여자들은 무서워;...조선시대 3대악녀       마지막 ... 장옥정(장희빈)? 며칠 전 장옥정 사랑에 살다 로 포스팅을 따로 하기도 하엿는데요장옥정은 정말 다양하고 격번의 시대를 살아간 여인이죠솔직히 저는  조선시대3대악녀 로 장옥정을 꼽고 싶지는 않았어요다른 악녀들에 비해서  그나마...순하다고 할까요??그리고  다른 조선시대 악녀 들 중에서기생이 아닌 나인인 궁녀신분으로 입궐한 나름 출신성분이 좋은 여인이였습니다.

? 숙종에 눈에 들어서  총애를 받은 장희빈.개인적으로 내가 장희빈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자리 그리고자신의 자식을 왕위에 올리기위해서 저도 어느정도는장희빈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싶어요그리고 자신의 남자인 숙종이 다른 여인과 있는걸 보면눈이 뒤집힐테니까요..ㅎㅎ? 조선시대 임금들이 의외로 독살당해서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모략과 반대새력 그리고 다음 임금을 향항 왕위쟁탈전이 난무하는곳이 궁 이기 때문이죠장희빈 역시 그런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고 생각해요..물론 행동들이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중전 인 인현왕후를 죽이고자하엿고, 저주하였고숙종을 꼬셔서 중전을 폐위하고 자신이 중전의 자리 까지 올랐다는 점..어찌보면 여인으로 최고의 권력을 차지한 그녀지만.결국 잘못된 행동들이 발각되면서 사약을 먹고 죽게 됩니다.

?조선시대 3대악녀 들에 대해서 소개를 했습니다.

장녹수, 정난정, 장옥정 하지만 그중에서 저는 장녹수가 가장 얄밉고 ...정난정이 가장 독해보이네요장옥정은 김태희 때문인가....마음이 약해 봅� 내가 ㅋㅋㅋㅋㅋㅠㅠㅠ김태희가 장옥정 하니..뭐 그럴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구요 ㅋㅋㅋㅋㅋ나란남자... 악녀들에게 휘둘릴 남자 ㅋㅋㅋㅋ조선시대 3대악녀 여러분들은 누가 가장 악녀 라고 생각이 드시나요??^^
공유하기 링크
TAG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