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순원왕후



    그러나 삼정의 문란과 과거제도의 부정과 비리가 판을 치자 사회적으로 불만이 팽배해지면서 이양선이 출현하고 민심이 어지러워진다.

헌종은 순조 때의 천구교탄압정책을 이어 받아서 많은 신자를 학살하고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탄압하였다.

 ?  그리고 헌종 15년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의 나이로 후사도 없이 죽는다.

  ?    조선 제24대 헌종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와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 풍양조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 30년인 1830년에 왕세손에 책봉이 되고, 아버지 효명세자가 불과 5세로 죽는 바람에 1834년 순조가 죽자 손자로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의 비인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맡아서 하게 된다.

 ?   그동안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통하여 정국을 농단하는 동안 헌종은 그동안 숨을 죽이고 이를 그냥 지켜보아야 하였다.

1837년 안동김씨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자 안동김씨 세도가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순조가 죽으면서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경에게 헌종을 돌보아 주기를 청하여 풍양조씨가 득세하고 순원왕후가 1840년 수렴청정을 끝내면서 1841년부터 헌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풍양조씨의 세도가 시작되어서 신정왕후의 오빠 조병구, 조득영의 아들 조병현 등이 조인영과 같이 세도정치를 이끌어 나간다.

  ?  조병구의 필적   헌종 때에도 풍양조씨와 함께 천주교 탄압을 계속하여 1839년에 유학을 정학으로 규정하고 서학은 사학으로 배척한다는 《척사윤음》을 발표하고, 1940년까지 외국인 주교인 앙베르 신부, 샤스탕과 모방 신부, 유진길, 정하상 등이 처형당하는 기해박해를 하였고,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다섯집에 대하여 연좌제를 적용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적용하여 처벌하면서 그 처벌자는 확대되었다.

 ?      그리고 그의 치세기간 동안인 1846년 프랑스 해군함장 세실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에 있는 외연도에 정박해 조선정부에 기유박해때 프랑스인들이 처형받은 사실을 항의하고 문호를 개방할 것을 제의하는 답변서를 두고 떠난다.

 ?   이에 헌종은 당시 체포되었던 김대건 신부와 여러 천주교신자를 처형하였다.

다음해에는 세실함장이 전하고 간 국서에 대한 답변을 받아가겠다고 글로아르호가 나타났다 전라도 만경에서 폭풍으로 침몰되어 다른 배를 타고 돌아갔다.

 ?   이와 함께 헌종도 나이가 들면서 외척 풍양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면서 이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 헌종과 조병구 사이에 안경과 관련한 재미난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조병구는 조만영의 아들로 눈이 매우 나빠서 오늘날로 말하면 고도근시에 해당하였는데 우리나라 경우 1970년대만 하더라도 안경에 대하여 한가지 금기시하는 터부가 있었는데 어른들이나 자신보다 높은 사람앞에서는 안경을 끼지 못하였다.

 ?    정조 역시 눈이 나빠서 안경을 끼어야 하는데 나이 많은 신하들 앞에서 건방지다고 생각하여 안경을 끼어야 할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였고 순종 역시 고종을 뵈울 때 어려움을 겪었다.

 ?   조선말 우리나라에 와 있던 묄렌도르프도 고도근시인데 안경을 끼지 않고 왕을 뵈어야 하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다고 하며 나중에 고종이 특별히 안경끼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조병구는 자신이 고도근시여서 헌종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안경을 끼고 헌종을 만나는데, 헌종은 외삼촌인 조병구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외삼촌에게 외숙의 몸에는 칼이 들거가지 않습니까?” 하여 조병구에게 말하였는데,    얼마 후에 신정왕후를 뵐 때에도 안경을 끼고 있자 다시 질책을 들어 조병구는 집으로 돌아가 음독자살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헌종이 외숙의 안경에 대하여 한 말이지만 풍양조씨에 대한 경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풍양조씨의 권세도 1846년 조만영이 죽는 등 그 일문이 죽으면서 다시 정권은 안동김씨한테 넘어간다.

 ?   그리고 헌종 자신이 나이가 들어 새로이 뜻을 펼쳐볼 나이가 되자 뜻을 펼쳐볼 새도 없이 헌종 15년인 1849년 6월 6일 23세 젊은 나이로 창덕궁 중희당에서 병사한다.

     헌종은 여인을 좋아하여 왕비가 2명이고 후궁이 3명이나 될 정도이고 궁중에 그가 가까이 하지 않은 궁녀가 드물 정도로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하였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의 후사하나 두지 못하여 6촌이내에 아무도 없을 정도로 손이 귀하였다.

 ?  헌종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며느리 풍양조씨집안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막아서 안동김씨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옥쇄부터 챙겼다고 한다.

    영조의 유일한 혈손이 되는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찾아 내어서 자신의 아들로 한 다음에 후사로 삼으니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강화도령 이원범’ ? 바로 철종이다.

   헌종은 죽어 경기도 구리시에 자리잡은 동구릉 내에 있는 경릉景陵에 묻힌다.

  동구릉에 있는 경릉(순조, 효현왕후, 효정왕후) ? ?      추존된 헌종의 부모 익종과 신정왕후     신정왕후神貞王后 풍양조씨(헌종의 어머니)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후에 익종 또는 문조로 추존)의 부인 신정왕후 풍양조씨는 순조 8년인 1808년 한양의 한강동쪽에 위치한 두모포(지금의 옥수동 295번지 일대 부근)에서 태어난다.

    어머니는 송시연의 딸 은진송씨이다.

그녀는 순조 19년 10월 12세때 1살이 어린 11세 세자빈으로 간택이 되었다.

    순조 30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23세로 홀몸이 되었으며 효명세자와 사이에 아들을 두었는데 바로 헌종憲宗이다.

   신정왕후가 태어난 옥수동에는 ‘쌍호정’ 이 있었는데 이 명칭은 신정왕후 조씨가 태어날 때 태몽을 꾸었는데 쌍호랑이 두 마리가 정자 옆에 앉아 있었다고 하여 ‘쌍호정’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정왕후는 1808년 순조 8년 12월 6일에 태어나 12세인 1819년 10월11일 왕세자빈으로 책봉돼 1827년 헌종을 낳았다.

헌종이 왕통을 이어받자 왕대비가 된다.

 ?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며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조씨는 대비가 된다.

그리하여 일시적으로 풍양조씨가 집권을 하나 철종이 즉위하며 신정왕후는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1857년 8월에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된다.

그리고 1863년 8월에 철종이 후사도 없이 죽자 안동김씨세도에 대한 반감이 큰 흥선대원군과 친정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의 2자 명복을 익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으니 바로 고종이다.

    그러나 고종이 나이가 어려서 자신이 고종 3년인 1866년 2월까지 수렴청정한다.

이후에 흥선대원군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고 고종 27년인 1855년 4월 17일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에 죽어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역내에서 초입에 위치한 곳에 있는 수릉綏陵에 헌종과 함께 묻힌다.

 ?    익종翼宗(효명세자)    효명세자는 1809년에 태어나 순조의 원자가 되고 왕세자로 책봉되어서 순조가 재위하던 시절에 순조 대신 대리청정을 하던 중에 순조 30년인 1830년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숨을 거둔다.

    같은 해 8월 4일 서울 동대문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 무덤 의릉懿陵 오른쪽에다가 묘를 조성하였는데 연경묘延慶墓라고 하였다.

    그러나 1835년에 헌종이 즉위하면서 5월 19일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이 되면서 연경묘는 수릉綏陵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러나 풍수상의 문제가 있다하여 1846년 5월 양주에 있는 용마산 아래로 이장하였다.

 ?   그러나 다시 철종 6년인 1855년 8월 현재의 위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내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사적 제193호)의 태조능인 건원릉 좌측에 자리를 잡는다.

신정왕후가 1890년 죽자 같은 해 8월 30일에 합장이 된다.

    수릉은 효명세자가 세자로 죽어 격식에 있어 다른 조선 왕릉이 일반적으로 3단으로 구성된 데 비해 2단으로 구성되고, 다른 왕릉들이 ‘우상좌하’ 라 하여 왕이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왕비가 왼쪽에 배치되는 것과는 달리 수릉은 반대로 배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효명세자는 세자 시절에 죽었으나 신정왕후는 대왕대비로 죽어서 신분상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헌종의 비와 후궁들   헌종憲宗은 헌칠한 키에다 이목구비가 수려해 뭇 여성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궁녀치고 순조의 성은을 입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여성편력이 많을 정도로 자유분방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헌종이 여자를 좋아한 데는 당시 외척의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있어 왕으로서 할 일이 없었던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울안에 있는 궁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민간에 있는 규수중 인물이 출중하다고 알려진 예쁜 여인들을 선발하여 ‘반월’ 이라고 하는 곳을 창덕궁 건양재 동쪽에 ‘기정’ 이라고 하는 지금으로 본다면 주막이나 까폐비슷한 장소를 만든다.

 ?   또한 자신은 변복을 하고 궁녀는 주모로 분장을 하게 하여 운영하게 하였고 좀 한가하거나 고민을 할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아서 쉬면서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헌종은 서화를 좋아하고 청동기, 비석 등에 새겨진 금석학을 연구하기를 즐기고 겼는데 자신이 수집한 물품은 궁중에 소장하였다.

 ?   그는 서화 및 인장을 수집해 창덕궁 뒤편에 있는 승화루承華樓에 보관을 하고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을 만나고 추사, 단원, 겸재 등의 그림뿐 아니라 북송 때 휘종황제 그림, 문징명, 남영 등 명·청 대의 화가나 글까지 소장해 수시로 이곳에 들러서 이를 감상하였다고 한다.

 ?   지금도 승화루에 소장되어 있던 목록집인《승화루서목》이 전하는데 4,555점이 기록되어 있고 그 중 900점이 서화이다.

 ? ?? 승화루 서목   특히 당시 이곳을 방문한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허련은 김정희의 주선으로 헌종을 찾게 되는데 평민으로 궁중에 출입할 수 없자 무과에 급제시켜 궁에 출입을 시킬 정도로 헌종은 허련을 아꼈다고 하는데 이런 영향이어서 인지 헌종이 거주하는 곳에는 완당 추사의 글씨로 가득 찼다고 한다.

 ? ?허련의 초상화 ?   헌종은 이외에 허련에게 《시법입문》이란 서책과 3백금을 하사하여 허련이 한양에 거주할 수 있는 초가집을 구입하게 하고 귀양가 있던 김정희 안부도 물었다고 한다.

 ?   이처럼 헌종은 시, 서, 화를 좋아하여 ‘낙선재’ 에 걸려 있는 편액은 청나라 금석학대가 섭지선의 글씨이고 대청마루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라고 하며 낙선재 뒤편에 있는 육각형의 정자인 평원루도 청의 옹수곤의 글씨이다.

                                김정희 초상화     효현황후 ?   순조의 비인 효현왕후孝顯王后는 안동김씨 김조근金祖根과 어머니 한산이씨 사이에서 순조 28년인 1828년 3월 한양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   당시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서로 세력을 다투는 과정에 있었는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자신의 친정집안 안동김씨 집안에서 간택하였다.

김씨는 10살 때인 1837년 3월 왕비로 책봉되고 4년후에는 가례를 올리고 왕후가 된다.

 ?  그러나 그녀는 왕비가 된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아 1843년 8월 소생도 없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숨을 거둔다.

    죽어서 그녀는 경기도 구리시 용두동에 위치하고 있는 경릉景陵에 묻히게 되는데 다른 능과 달리 헌종과 계비 효정황후와 나란히 묻혀있는 삼련릉三連陵의 형식으로 묻힌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죽어서 부인간의 갈등은 없는지 모르겠다.

   고종 때 대한제국이 되면서 순종 때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로 추존된다.

      효정황후   효정왕후孝定王后 남양홍씨는 효현왕후가 죽자 새로 간택하여 얻은 계비로서 홍재룡洪在龍과 어머니 죽산안씨 사이에서 순조 31년인 1831년 1월 태어났다.

 ?   그녀는 1844년 9월 14세살 때 4살이 더 많은 18세의 헌종의 비로 간택이 되었으나 헌종이 자신이 간택되었을 때 제외되었던 경빈김씨를 다시 후궁으로 맞아 들이면서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헌종으로부터 딸 1명을 얻었다고 하는데 일찍 죽는다.

  ?? 헌종의 가례도 병풍도   1849년에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19세의 어린 나이로 대비가 되어서 어른 노릇을 하여야 하였다.

광무 8년인 1903년 11월 73세로 죽는다.

   무덤은 효현왕후와 같이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내에 있는 삼연릉 경릉에 나란히 묻히는데 오른편부터 현종, 효현왕후, 효정왕후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후궁 경빈김씨와 궁인김씨   이외에 후궁으로는 경빈김씨와 궁인김씨, 정빈윤씨 등 3명이 있었다.

그 중에 숙의김씨는 딸 1명을 낳았으나 일찍 요절하였다.

그리고 간택한 후궁으로서 윤치수의 딸 정빈윤씨가 있었으나, 정사 실록에도 그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헌종이 어떤 다른 여인보다도 마음 속으로 사랑한 여인은 경빈김씨가 있는데 헌종은 그녀를 매우 사랑하였다고 하는데 그 일화를 간단히 살펴보자.       헌종 재위 4년에 1838년 간택령을 내려서 첫번째 왕비 효현성황후를 왕비로 간택하였으며 4년뒤 왕비로 책봉을 하였으나 3년뒤에 요절하였고, 자식도 없어서 1년후에 다시 왕비 간택령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때 다른 간택과 달리 헌종이 직접 간택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헌종은 당시 삼간택에 올라온 처녀 중에서 김재청의 딸인 김씨를 마음에 들어 하였으나, 순원왕후와 수빈박씨는 이들 중에서 경빈김씨보다 홍씨가 더 참하다는 이유로 왕비로 간택한 여인은 홍재룡의 딸이었다.

    당시 왕실에는 사도세자의 서자들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다음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어서 후궁을 간택하여 들이기로 하였는데 당시 헌종은 계비를 맞을 때 본 바 있는 사가에 나가 있던 김씨를 간택하여 궁안으로 불러들인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김씨측도 왕후의 친정인 남양홍씨가문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을 경계해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헌종은 경빈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이자 경빈김씨가 왕비와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1847년에 창경궁(지금은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서 자신의 서재와 사랑채로서 지어 자신과 경빈김씨가 함께 살았다.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 ?   헌종이 화려한 것을 경계하여 단청을 사용하지 않은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헌종이 서화를 좋아하다보니 회랑을 만들어 작품을 걸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할머니 순원왕후와 경빈김씨의의 거처로 수강재와 석복헌을 새로 지어서 선물하였다.

헌종은 간택된 후궁은 종2품인 숙의로 책봉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김씨를 바로 정1품 빈에 책봉하였다.

  ?                                        창덕궁의 석복헌   그런데 지금 낙선재의 위치는 창덕궁의 정문을 통하여 들어 갈 경우 창덕궁 끝자락에 위치하여 창덕궁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   경빈김씨는 사계 김장생의 8대손인 주부 김재청과 평산신씨 신명하의 딸 사이에서 1831년에 태어나 정식으로 간택하여 들인 후궁으로 궁호는 순화궁이다.

 순화궁 건물은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 근처이다.

 ?   헌종 13년인 1847년인 10월 20일에 16세때에 입궁하여 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소생이 없었다 하며 헌종이 죽자 궁밖 사가로 나와 살았다고 하는데 검소하게 홀로 지내며 생활하다 고종 44년 1907년 6월 1일에 77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경빈김씨는 죽어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에 묻히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경빈김씨가 살던 낙선재 석복헌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왕후 윤비가 1966년까지 살다가 죽었고 이어서 영왕과 이방자 여사가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사회복지에 헌신하다가 그리고 이어 덕혜옹주가 수강재에서 기거하다가 죽는다.

..황후(의수)가 황후(순원)을 죽여요....그래서 릉용이 그런 말을 한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뿐 ... 증거가 없잖소역시나 신중한 단비는 한방을 노리며 기다리자고 하오 견환은 또 임신을 했소하지만 쌍둥이를 출산한 뒤라 몸이 예전같지 않다고 걱정을 하는 견환견환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경비는 롱월에게 너를 임신했을때도 힘들었다며 생모인 견환을 지켜주라고 말한다오 역시나 아이는 문제가 있었소 5개월을 넘기지 못할 거란 소식을 전하는 온대인 4개월차에 들어선 견환은 아이를 유산시키는 약을 준비해 달라고 말하고 계획을 세운다오 법사가 평안부적을 만들어줬는데 자신의 침실에 높은 신분의 사람이 그 복주머니를 달아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황제에게 슬며시 황후에게 부탁하고 싶다고 말하고 뭔 일 생길까봐 견환 근처에 얼씬도 안하던 황후는 황제가 부르니 갈 수 밖에 없었소 먼저 단비, 경비가 복주머니를 달고 있을때 온대인에게 부탁한 약을 마치 보약인듯 가져온 근석 이걸 마시면 이젠 뱃속의 아이와도 안녕이오 ㅠ견환은 약을 들이키고 안으로 들어가오 황후와 복주머니를 달면서 슬슬 시동거는 견환 내 아이의 운명은 너에게 달렸다 얘가 약을 잘못먹었나 뭔소리야?황후와 견환이 말싸움중인것을 보고 있는 롱월맞는 말 아니야?니가 죽인 후궁의 아이가 몇이고 불임 시킨 후궁이 몇인데 시치미야??이거 왜이래 하며 황후가 손을 뿌리치차 그러췌!!! 하면서 헐리웃 액션으로 쓰러지는 견환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자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들어와 기절한 견환을 데려가오 아이는 유산되었고 깨어난 견환은 황후가 자신을 밀어서 이런일이 생겼다고 울부짖소 곁에 있던 온대인도 아이는 건강했다며 사고가 문제였다고 힘을 실어주고 둘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며 지원사격 나오는 경비 견환은 당하는 쪽이었다고 확인사살하는 단비 하지만 진짜 안밀었던 황후는 억울하오 ㅎㅎ아무리 생각해도 범인은 넌뒈???  황제의 의심이 확신이 되자....롱월이 울음을 터트리며 황후가 그랬다고 ?�!!!! 게임을 종결하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리 황후라도 이번 일은 피할 수가 없었소대신 죄를 뒤집어 쓸 시녀도 없고, 6살짜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갈 수도 없으니....경인궁 감금 ㅠ 한편 황제의 형제들중 8숙과 14숙이 허튼짓을 하다가 눈밖에 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4황자는 우리가 아버지에게 대신 용서를 빌면 어떠냐면서  형인 3황자에게 의견을 구하오 그러자 너는 거기까지 생각했냐며 감탄하곤 지가 먼저 가서 쫑알쫑알 용서 어찌구 얘기하면서 용서하는 김에 황후도 용서해주시고 뭐 어쩌고 하다가 오히려 황제에게 밉보여서 그냥 아웃되고 마오 ㅋ황후의 마지막 희망은 그렇게 생각없이 입을 놀리다가 사라졌구랴 ㅠ황후의 심복들은 은밀히 작전을 모의하오 견환과 견환의 아들을 독살 시킬 생각이었소 하지만 놀러온 과군왕의 부인이 견환 대신 견환의 아들에게 밥을 먹여준다고 먼저 한입 먹은게........그대로 저승행 ㅠㅠㅠㅠㅠㅠㅠㅠㅠ참 지지리도 복이 없구랴 ㅠ결국 독을 탄 심복들이 잡히고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순원황후 죽인 일까지 불어버렸다오 ㅋㅋㅋ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가지고 일을 더 크게 만든 심복들 때문에 황후는 황제앞에 불려오고 니가 순원에게 빠져서 내가 낳은 아들이 죽던 말던 신경도 안썼는데 내가 뭐가 모자라서 순원이 아이를 낳는걸 에헤라디야 하겠냐고 오열하오 그러면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미워할수가 없었다.

순원은 미워도 당신은 사랑했다어느 여자가 남편이 다른 여자랑 놀아냐는걸 참느냐며  일부일처제 이론을 펼치시고 그저 금사빠인 황제는 그 이론이 맘에 들지 않소 하지만 평소 황후의 숨겨진 이목을 알고 있던 태후는 이런날을 미리 걱정했는지 유서로 황후는 절대 폐위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소 ㅠ마마보이지만  오늘은 거역하고 싶어!!!!그러자  아들이 그렇게 굴것을 미리 알았는지 준비한 순원의 유서도 공개 한다오 동생의 손에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남긴 유서에는 의수는 내 동생이니 절대 버리지 말고 위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소 ㅠ결국 황후는 그냥 경인궁에 갇혔고 황제는 두번다시 찾지 않았다오. 한편 황제는 견환과 과군왕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과군왕을 독살 견환이 낳은 쌍둥이 피검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우연히 녕빈이 알게 된다오녕빈은 입궁전부터 과군왕을 짝사랑했던 여자라 황제에겐 심드렁한 사람이었소 과군왕이 죽어 세상 낙이 없다가 그의 후손이 있다는 말에 반가웠지만 이게 알려지면 다 죽는다는 생각에그냥 한큐에 황제를 독살하오!!!!!!!!!!!!황후가 사라지고 견환은 과군왕과의 사이를 의심받는 위기가 생기지만 이야기가 길어져서 생략하였소이일로  과군왕을 잃고, 과군왕과 결혼한 완벽을 자살로 이어지게 했고 결국 황제의 죽음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례했지라황제가 죽어갈때 견환은 미장이 온대인의 자식을 낳은것과 나도 환궁 후 너를 상대하는게 구역질 났다며 황제의 마지막 순간을 빡치게 만드오그리고 견환은 4황자를 황위에 세우고 자신은 황태후가 되오 과군왕과 사이에서 낳은 자기 아들은 과군왕이 죽고 그 집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그 곳으로 보낸다오황위싸움에 휘말리는 것도 막고, 과군왕이 죽어서라도 자기 아들의 제사를 받으라는 견환의 생각이었소무엇보다 황제의 자리가 얼마나 별로인지 알기에 자기 아들을 세우지 않은것 같소새 황제의 책봉식이 끝나자 견환은 황후를 찾소 내가 황후였으니까 저절로 난 태후가 된거야 !!! 누가 황위에 올랐어도 난 태후야.웃기고 있네 ...이름만 황후인 주제에죽은 황제는 순원황후와 합장하고 니가 죽으면 넌 따로 묻을꺼야넌 죽어서도 황제를 가질 수 없숴!!! 라며 황후를 비웃는 견환 그러고보니 니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엔 답응도 되고 싶지 않았던 내가 내명부 최고인 황태후라니 ㅋㅋㅋ 그래 ... 이름뿐인 황후라도 니가 좋다면 계속 황후하라며 오래 오래 살라는 덕담인듯 덕담아닌 덕담같은 한마디를 남기며 경인궁을 떠나오 모든 일을 끝낸 견환이 마지막 남긴 말은 피곤하다는 말이었소 비록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결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주지 않았던 운명 고귀한 그녀의 신분을 알려주는 화려한 옷자락엔 왠지 고단함이 느껴지는구랴...처음 입궁했을때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람은 모두 죽고 근석만이 남았소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견환 그간의 궁궐생활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드라마는 끝이 나오 견환의 주요 퐈이트에 나오지 않아 언급이 안된 후궁들도 많고 그 에피소드들도 재밌고 품계나 총애 성격에 따른 복식이나 악세사리 보는 재미도 크다  꼭 드라마로 보기를^^(** 또 태클 들어올까봐---> 그 사이 경비는 경귀비,단비는 단황귀비가 되었으나 편의상 경비, 단비로 썼소 )최미적시광때부터 느꼈지만... 이렇게 자세하고 긴 리뷰를 쓸때마다 부족함을 느끼며다음엔 이렇게 길게 쓰지 말아야지 하곤 했는데 또 재밌는 드라마를 만나면 고걸 홀랑있고 덤빈다 ㅠ특히 후궁견환전은 5년전 처음보고 지금까지 이렇게 재밌는 사극은 보지 못해서 꼭 쓰고 싶었는데76회의 드라마를 정리하는 일이라 부족한 부분 투성이지만 ;;;;;리뷰 쓰면서 빡치는 일이 몇개 있어 좀 힘들었다 ㅠ늘 그런 맘으로 쓰고 있지만 가볍게 읽어주시고 진짜 재미는 드라마에서 느끼셨음 좋겠다.

잘 알듯이 수렴청정은 국왕이 어릴 경우 대비가 일정 기간 동안 정무를 대신 처리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비의 가문, 즉 외척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는 소지를 본원적으로 안고 있는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수렴청정은 모두 7차례 시행되었는데, 19세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성종 때 세조비 정희왕후(7년), 명종 때 중종비 문정왕후(8년), 선조 때 명종비 인순왕후(8개월), 순조 때 영조비 정순왕후(4년), 헌종·철종 때 순조비 순원왕후(각 7년, 3년), 고종 때 익종비 신정왕후(4년)).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가 만연한 것은 그 시기에 수렴청정이 특히 자주 시행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두 제도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당시의 정치를 장악했다.

 제23대 국왕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씨(본관 안동)는 68세의 긴 생애 동안 두 번의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특별한 경력을 남겼다.

그녀의 청정은 친정인 안동 김씨가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화려한 가문적 배경 순원왕후는 1789년(정조 13) 5월 15일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

1832)과 청송 심씨(정랑(正郞) 심건지(沈健之)의 딸)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었지만(1800년(정조 24) 2월 26일 초간택, 윤4월 9일 재간택) 그 직후에  정조가 승하(6월 28일)하는 바람에 순조가 즉위한 뒤 바로 왕비에 책봉되었다(1802년(순조 2) 10월 13일).  순조 초기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

1805) 김씨(본관 경주)였다.

그 때 그녀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정국을 장악했다.

그 권력의 크기는 스스로 ‘여주(女主)’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1800년 7월 20일). 정순왕후는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2년 뒤 승하했다(1805년 1월).  그 공백을 메운 것은 그러나 국왕이 아니라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그 첫 인물은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이었다.

 그의 가계는 대단히 화려해서, 김상헌(金尙憲. 좌의정. 7대조)부터 시작해서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5대조)·김창집(金昌集. 고조. 영의정이자 노론 4대신)·김제겸(金濟謙. 증조. 예조참의)에 이르는 선조들은 서인(노론)의 가장 굵은 줄기를 이뤘다.

조부(추증 좌찬성 김달행(金達行))와 부친(서흥(瑞興)부사 김이중(金履中))은 고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김조순의 정계 진출을 계기로 그런 침체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때 안동 김씨는 순원왕후를 비롯해 헌종비 효현(孝顯)왕후와 철종비 철인(哲仁)왕후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효현·철인왕후는 각각 김조근(金祖根)과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는데, 김조근은 김조순과 7촌간이고 김문근(金汶根)과는 8촌간이었다.

 뒤에서 보듯이 이런 국혼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결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안동 김씨의 세력을 크게 팽창시켰다.

 행복과 불행의 교차 순원왕후의 왕실 생활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녀는 가례를 올린 지 7년 만인 20세 때 효명(孝明)세자(1809년(순조 9) 8월 9일)를 낳았고, 그 뒤에도 명온(明溫. 1810년 10월)·복온(福溫. 1818년 10월)·덕온(德溫. 1822년 6월)공주를 계속 순산했다.

대군을 낳았다가(1820년 2월) 석 달 만에 사망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다복한 생활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40대 이후 개인적 슬픔이 연이어 닥쳤다.

1827년(순조 27) 2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했지만 3년 뒤 세상을 떠났으며(1830년 5월), 2년 뒤에는 명온·복온공주가 거의 동시에 사망했다(1832년 6월과 5월). 2년 뒤에는 순조도 승하했고(1834년 11월), 막내 덕온공주도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1844년 5월). 그러니까 순원왕후는 남편과 자녀가 모두 자신보다 일찍 사망하는 깊은 인간적 슬픔을 겪은 것이다.

맏아들과 지아비를 잃었을 때 왕후의 나이는 45세였다.

 두 번의 수렴청정 순원왕후는 그 뒤에도 20여 년을 더 살면서 두 번에 걸쳐 10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 청정은 1834년 11월 18일 헌종이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해 7년 동안 시행되었다(1840년(헌종 6) 12월).  두 번째 청정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 헌종이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61세의 대왕대비는 그날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25대 왕 철종으로 등극시킨 뒤 3년 동안 청정했다(1851년). 왕후의 청정은 몇 가지 특징과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우선 그녀는 정치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신하들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려고 했다.

그 까닭은, 스스로의 신중한 판단과 처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는 물론 그들과 가까운 인물들이 이미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봉조하 남공철(南公轍), 영중추부사 이상황(李相璜), 영의정 심상규(沈象奎)는 김조순의 오랜 지기였고, 김유근(金?根. 판중추부사)·김난순(金蘭淳. 우참찬)·김이재(金履載. 이조판서) 등 안동 김씨의 중심 인물은 요직을 맡아 활발히 움직였다.

 다음으로 왕후는 세도정치의 여파 속에서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효명세자를 추숭(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을 칭호를 내림)하고 종묘를 확장해 순조와 익종을 세실(世室- 종묘의 정전(正殿)에 안치한 신위)로 모신 것은 그런 주요한 시책이다.

종묘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이때였다.

 아울러 그녀는 안동 김씨 출신이었지만, 외척 가문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된다.

예컨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유근과 조만영을 어영대장과 호위대장에 번갈아 임명해 군권의 편중을 막았고, 이조판서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출신을 교대로 제수했다.

 왕후가 수렴청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현안은 민생이었다.

왕후는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조세를 탕감해 주고, 다른 지방의 곡식을 이용해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움)했으며, 부족한 재정은 내탕(內帑- 왕실 재정)으로 해결했다.

수령의 탐학을 적발하지 않는 대신은 강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그녀가 일원이었던 세도정치에 있었다.

그런 구조적 폐단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시책은 부분적인 효과밖에 거둘 수 없었다.

 순원왕후는 1850년(철종 1) 국모로 임어(臨御)한 지 50년이 되었고, 그 한 해 뒤 두 번째 수렴청정을 끝내고 물러났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68세로 승하한 왕후는 지금 인릉(仁陵.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에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10년에 걸친 두 번의 수렴청정이라는 이례적 기록상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순원왕후는 적지 않은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 자취가 담겨 있는 주목할 만한 자료는 한글 편지다.

규장각에 57점을 비롯해 여러 개인들도 소장하고 있는 그 편지는 당시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국어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대리청정을 통해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비운의 세자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승하하고 순조(純祖, 재위: 1800∼1834)가 즉위한 19세기 이후 조선은 ‘세도(勢道)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말 그대로 유력한 가문이 정치를 주도한 그런 현상은 국정의 혼란과 민생의 파탄을 가져왔다.

널리 알듯이, 이때의 유력한 가문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였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

1830)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정의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21세의 이른 나이로 훙서(薨逝- 왕이나 왕족의 죽음)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이름은 대부분 좋은 뜻을 담고 있지만, ‘효명(孝明)’이라는 이름대로 그는 효성스럽고 명민했다고 판단된다.

그 명민함의 핵심은 뛰어난 문학·예술적 능력이었다.

 탄생과 순조로운 성장 효명세자는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와 순원(純元)왕후 김씨의 맏아들로 1809년(순조 9) 8월 9일에 탄생했다.

3세 때 이름을 영(?. 원래 발음은 ‘대’지만 ‘영’으로 부르도록 했다)이라고 정하고(1812년 6월 2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7월 6일). 함경도 관찰사 김이영(金履永)은 세자의 휘와 같다는 이유에서 이름을 ‘이양(履陽)’으로 고치기도 했다(8월 21일). 그 뒤 성균관에 입학하고(8세. 1817년 3월 11일) 관례(冠禮- 성년식)를 거행했다(10세. 1819년 3월 20일).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세자의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풍양 조씨와의 국혼 이때의 중요한 일은 국혼이 이뤄졌다는 사실이었다.

국혼은 늘 중요하지만, 세도정치가 시작되던 이 시기에는 그 의미가 더욱 컸다.

세자는 부사직(副司直. 종5품 무반) 조만영(趙萬永. 1776

1846)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1819년 10월 11일).  뒤에 신정(神貞)왕후(1808

1890)로 책봉된 그녀는 요절한 남편과 달리 82세까지 장수하면서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인 고종에게 왕위를 승계시키고(1863년 12월 8일) 3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등 뚜렷한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이때의 국혼에서 핵심적인 사항은 이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가 세도정치의 한 주역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이었다.

조만영은 조부가 이조판서 조엄(趙?. 1719

1777)이고, 아버지는 판돈녕부사를 지낸 조진관(趙鎭寬. 1739

1808)이었다.

그와 함께 활동한 동생 조인영(趙寅永. 1782

1850)은 순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고 순조 묘정에도 배향되었으며, 추사 김정희와 금석문을 연구하기도 했다.

 조만영은 딸이 세자빈에 간택된 뒤 대사성·금위대장(禁衛大將)·비변사 제조·예조판서·어영(御營)대장 같은 요직을 두루 거쳤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했을 때는(1827. 순조 27) 이조판서와 어영대장을 겸임해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하는 막중한 권력을 갖기도 했다.

그는 효명세자가 붕어한 뒤 안동 김씨에 밀렸지만, 형조·호조·예조판서·한성부 판윤·판의금부사·지중추부사 등 요직을 계속 지키면서 풍양 조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효명세자나 왕세손(헌종)의 신변 보호와 왕실 안전을 명분으로 오랫동안 군사권을 장악해 풍양 조씨 세도의 군사적 배경을 형성했다고 평가된다.

 대리청정과 붕어 효명세자는 18세인 1827년 2월 부왕 순조의 건강 악화를 이유로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었다.

뒤에서 보듯이 그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청정 1년 전부터는 시작(詩作)보다 경세에 관련된 독서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순조에게서 청정을 미리 통보 받고 대비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미래의 국왕답게 젊은 세자는 의욕적으로 청정을 시작했다.

우선 일련의 인사를 단행해 안동 김씨 계열을 배제하고 새로운 인물을 널리 등용했다.

홍기섭(洪起燮. 예조판서 역임)·김노경(金魯敬. 이조판서 역임) 등이 측근에서 보좌했고, 장인 조만영을 비롯한 조인영(영의정 역임)·조종영(趙鍾永. 우참찬 역임)·조병현(趙秉鉉. 이조판서 역임) 등 풍양 조씨 출신도 비중 있게 활동했다.

김정희·권돈인(權敦仁. 영의정 역임)은 조인영과 친구 사이였고, 이지연(李止淵. 우의정 역임)·이기연(李紀淵. 형조판서 역임) 형제는 조만영과 사돈이었다.

호적법을 정비하고 형옥(刑獄- 형별과 옥사)을 신중하게 한 것은 의미 있는 시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제는 건강이었다.

이전에도 수두(3세. 1812년 10월 18일)와 홍역(13세. 1822년 11월 24일)을 앓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순조롭게 왕자를 낳는 등(1827년 7월 18일 헌종 출생)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였지만, 1830년(순조 30) 윤4월 말에 각혈한 뒤 며칠 만에 승하한 것이다(5월 6일). 왕실 중흥의 기대를 무산시킨 허망한 결과였다.

 세자는 ‘효명’이라는 시호를 받은 뒤(1830년 7월 15일) 익종(翼宗)을 거쳐 문조(文祖) 익황제(翼皇帝)로 추존되었다.

수릉(綏陵.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소재)에 신정왕후와 합장되어 있다.

 뛰어난 문학·예술적 재능 앞서 말했듯이 효명세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짧은 생애에도 문학과 예술에서 남다른 성취를 이뤘다는 것이었다.

세자는 [경헌시초(敬軒詩抄)], [학석집(鶴石集)], [담여헌시집(談如軒詩集)], [경헌집(敬軒集)] 등의 여러 문집을 남겼다.

거기에는 시조(9수)와 ‘목멱산(木覓山)’, ‘한강(漢江)’, ‘춘당대(春塘臺)’ 등의 국문 악장을 비롯해 40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시는 연작이 많아 실제 편수는 이것을 훨씬 넘는다.

 시는 자연을 감상한 내용이 많은데, 주로 신하들과 그런 내용을 주고받거나 궁궐 내외의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에서 풍광을 읊었다.

또 다른 특징은 누이와의 우애를 그린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명온(明溫)·복온(福溫)·덕온(德溫)공주 등 누이동생만 셋이 있었는데, 그들과 각별한 정을 나눴다.

‘사매씨(思妹氏)’는 그 제목처럼 누이를 그리는 마음이 담뿍 담긴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자연과 누이를 사랑하는 작품이 많다는 사실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짐작케 한다.

 좀더 중요한 분야는 연회와 관련된 예술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청정한 3년 동안 해마다 부왕과 모후를 위해 큰 연회를 열었는데, 순조의 존호(尊號-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던 칭호)를 올리는 ‘자경전 진작정례의(慈慶殿進爵整禮儀. 1827)’,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하는 ‘무자진작의(戊子進爵儀. 1828)’, 순조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하는 ‘기축진찬의(己丑進饌儀. 1829)’가 그것이다(궁중 연회는 ‘연향[宴享]’이라고 통칭되는데, 그 규모가 큰 순서대로 진풍정〔進豊呈〕·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으로 나뉜다). 효명세자는 이런 큰 궁중 행사를 직접 관장하면서 상당수의 악장과 가사를 만들었다.

특히 중요하게 평가되는 부분은 궁중 무용인 정재무(呈才舞)를 다수 창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규모와 복식을 더욱 크고 화려하게 설정한 정재무를 여럿 창작했다.

해당 연회의 각종 사항을 자세하게 기록한 의궤(儀軌)에 남아 있는 그런 업적은 그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이렇게 대규모의 궁중 연회를 거행하는 데 주력한 까닭은 효심의 발로와 정치적 포석으로 해석된다.

세자는 유교의 근본인 예악(禮樂)을 중시하는 덕망 있는 군주의 존재를 널리 알려 세도정치를 억제하고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아무튼 효명세자는 그런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4년 뒤 순조가 붕어하자 7세의 헌종(憲宗, 재위: 1834∼1849)이 왕위를 이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즉위한 국왕이었다(그 이전에 어린 나이로 즉위한 국왕은 순조〔10세〕·명종〔11세〕·성종〔12세〕·숙종〔13세〕 등이 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본관 안동. 김조순(金祖淳)의 딸)의 수렴청정이 시행되면서 세도정치는 더욱 심화되었다.

서양 열강의 본격적인 동점(東漸)으로 평가되는 아편전쟁(1840)을 6년 앞둔 시점이었다.

조선의 국운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암행어사 파견,《만기요람》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출생-사망1790

1834재위기간1800년

1834년가족관계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아버지 정조(正祖), 어머니 수빈박씨(綏嬪朴氏), 인릉이름 공(?). 자 공보(公寶). 호 순재(純齋).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尊號)가 바쳐져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영조비정순왕후(貞純王后)의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경주김씨김관주(金觀柱)와심환지(沈煥之) 등의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 후로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재위 8년 이후로 정승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래 강화되어 왔고영조 ·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꺾이지 않은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건강을 상한데다가,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

그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른바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1827년에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대로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태도와 권한이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세실(世室)로 모셔졌으며, 저술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묶여진 데 더하여 문집으로 《순재고(純齋稿)》도 있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인릉(仁陵)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조 [純祖] (두산백과)----------------------------------------------------------------------------------------------------19세기 조선의 정치를 규정하는 용어는 ‘세도정치’였다.

그것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수렴청정’이었다.

잘 알듯이 수렴청정은 국왕이 어릴 경우 대비가 일정 기간 동안 정무를 대신 처리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비의 가문, 즉 외척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는 소지를 본원적으로 안고 있는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수렴청정은 모두 7차례 시행되었는데, 19세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성종 때 세조비 정희왕후(7년), 명종 때 중종비 문정왕후(8년), 선조 때 명종비 인순왕후(8개월), 순조 때 영조비 정순왕후(4년), 헌종·철종 때 순조비 순원왕후(각 7년, 3년), 고종 때 익종비 신정왕후(4년)).조선 말기에 세도정치가 만연한 것은 그 시기에 수렴청정이 특히 자주 시행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두 제도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당시의 정치를 장악했다.

제23대 국왕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씨(본관 안동)는 68세의 긴 생애 동안 두 번의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특별한 경력을 남겼다.

그녀의 청정은 친정인 안동 김씨가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화려한 가문적 배경

순원왕후는 1789년(정조 13) 5월 15일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

1832)과 청송 심씨(정랑(正郞) 심건지(沈健之)의 딸)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었지만(1800년(정조 24) 2월 26일 초간택, 윤4월 9일 재간택)그 직후에 정조가 승하(6월 28일)하는 바람에 순조가 즉위한 뒤 바로 왕비에 책봉되었다(1802년(순조 2) 10월 13일).순조 초기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

1805) 김씨(본관 경주)였다.

그 때 그녀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정국을 장악했다.

그 권력의 크기는 스스로 ‘여주(女主)’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1800년 7월 20일). 정순왕후는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2년 뒤 승하했다(1805년 1월).그 공백을 메운 것은 그러나 국왕이 아니라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그 첫 인물은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이었다.

그의 가계는 대단히 화려해서, 김상헌(金尙憲. 좌의정. 7대조)부터 시작해서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5대조)·김창집(金昌集. 고조. 영의정이자 노론 4대신)·김제겸(金濟謙. 증조. 예조참의)에 이르는 선조들은 서인(노론)의 가장 굵은 줄기를 이뤘다.

조부(추증 좌찬성 김달행(金達行))와 부친(서흥(瑞興)부사 김이중(金履中))은 고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김조순의 정계 진출을 계기로 그런 침체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때 안동 김씨는 순원왕후를 비롯해 헌종비 효현(孝顯)왕후와 철종비 철인(哲仁)왕후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효현·철인왕후는 각각 김조근(金祖根)과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는데, 김조근은 김조순과 7촌간이고 김문근(金汶根)과는 8촌간이었다.

뒤에서 보듯이 이런 국혼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결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안동 김씨의 세력을 크게 팽창시켰다.

행복과 불행의 교차

순원왕후의 왕실 생활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녀는 가례를 올린 지 7년 만인 20세 때 효명(孝明)세자(1809년(순조 9) 8월 9일)를 낳았고, 그 뒤에도 명온(明溫. 1810년 10월)·복온(福溫. 1818년 10월)·덕온(德溫. 1822년 6월)공주를 계속 순산했다.

대군을 낳았다가(1820년 2월) 석 달 만에 사망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다복한 생활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40대 이후 개인적 슬픔이 연이어 닥쳤다.

1827년(순조 27) 2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했지만 3년 뒤 세상을 떠났으며(1830년 5월), 2년 뒤에는 명온·복온공주가 거의 동시에 사망했다(1832년 6월과 5월). 2년 뒤에는 순조도 승하했고(1834년 11월), 막내 덕온공주도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1844년 5월). 그러니까 순원왕후는 남편과 자녀가 모두 자신보다 일찍 사망하는 깊은 인간적 슬픔을 겪은 것이다.

맏아들과 지아비를 잃었을 때 왕후의 나이는 45세였다.

두번의 수렴청정 ??순원왕후의 한글편지. 19세기 중엽의 세도정치와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국어사적으로도 귀중한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순원왕후는 그 뒤에도 20여 년을 더 살면서 두 번에 걸쳐 10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 청정은 1834년 11월 18일 헌종이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해 7년 동안 시행되었다(1840년(헌종 6) 12월).두 번째 청정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 헌종이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61세의 대왕대비는 그날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25대 왕 철종으로 등극시킨 뒤 3년 동안 청정했다(1851년).왕후의 청정은 몇 가지 특징과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우선 그녀는 정치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신하들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려고 했다.

그 까닭은, 스스로의 신중한 판단과 처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는 물론 그들과 가까운 인물들이 이미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봉조하 남공철(南公轍), 영중추부사 이상황(李相璜), 영의정 심상규(沈象奎)는 김조순의 오랜 지기였고, 김유근(金?根. 판중추부사)·김난순(金蘭淳. 우참찬)·김이재(金履載. 이조판서) 등 안동 김씨의 중심 인물은 요직을 맡아 활발히 움직였다.

다음으로 왕후는 세도정치의 여파 속에서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효명세자를 추숭(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을 칭호를 내림)하고 종묘를 확장해 순조와 익종을 세실(世室- 종묘의 정전(正殿)에 안치한 신위)로 모신 것은 그런 주요한 시책이다.

종묘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이때였다.

아울러 그녀는 안동 김씨 출신이었지만, 외척 가문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된다.

예컨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유근과 조만영을 어영대장과 호위대장에 번갈아 임명해 군권의 편중을 막았고, 이조판서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출신을 교대로 제수했다.

왕후가 수렴청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현안은 민생이었다.

왕후는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조세를 탕감해 주고, 다른 지방의 곡식을 이용해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움)했으며, 부족한 재정은 내탕(內帑- 왕실 재정)으로 해결했다.

수령의 탐학을 적발하지 않는 대신은 강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그녀가 일원이었던 세도정치에 있었다.

그런 구조적 폐단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시책은 부분적인 효과밖에 거둘 수 없었다.

순원왕후는 1850년(철종 1) 국모로 임어(臨御)한 지 50년이 되었고, 그 한 해 뒤 두 번째 수렴청정을 끝내고 물러났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68세로 승하한 왕후는 지금 인릉(仁陵.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에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10년에 걸친 두 번의 수렴청정이라는 이례적 기록상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순원왕후는 적지 않은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 자취가 담겨 있는 주목할 만한 자료는 한글 편지다.

규장각에 57점을 비롯해 여러 개인들도 소장하고 있는 그 편지는 당시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국어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글-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그림-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서울 인릉 -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이다.

?  순원왕후 김씨의 한글 서체?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나 삼정의 문란과 과거제도의 부정과 비리가 판을 치자 사회적으로 불만이 팽배해지면서 이양선이 출현하고 민심이 어지러워진다.

헌종은 순조 때의 천구교탄압정책을 이어 받아서 많은 신자를 학살하고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탄압하였다.

 ?  그리고 헌종 15년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의 나이로 후사도 없이 죽는다.

  ?    조선 제24대 헌종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와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 풍양조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 30년인 1830년에 왕세손에 책봉이 되고, 아버지 효명세자가 불과 5세로 죽는 바람에 1834년 순조가 죽자 손자로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의 비인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맡아서 하게 된다.

 ?   그동안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통하여 정국을 농단하는 동안 헌종은 그동안 숨을 죽이고 이를 그냥 지켜보아야 하였다.

1837년 안동김씨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자 안동김씨 세도가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순조가 죽으면서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경에게 헌종을 돌보아 주기를 청하여 풍양조씨가 득세하고 순원왕후가 1840년 수렴청정을 끝내면서 1841년부터 헌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풍양조씨의 세도가 시작되어서 신정왕후의 오빠 조병구, 조득영의 아들 조병현 등이 조인영과 같이 세도정치를 이끌어 나간다.

  ?  조병구의 필적   헌종 때에도 풍양조씨와 함께 천주교 탄압을 계속하여 1839년에 유학을 정학으로 규정하고 서학은 사학으로 배척한다는 《척사윤음》을 발표하고, 1940년까지 외국인 주교인 앙베르 신부, 샤스탕과 모방 신부, 유진길, 정하상 등이 처형당하는 기해박해를 하였고,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다섯집에 대하여 연좌제를 적용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적용하여 처벌하면서 그 처벌자는 확대되었다.

 ?      그리고 그의 치세기간 동안인 1846년 프랑스 해군함장 세실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에 있는 외연도에 정박해 조선정부에 기유박해때 프랑스인들이 처형받은 사실을 항의하고 문호를 개방할 것을 제의하는 답변서를 두고 떠난다.

 ?   이에 헌종은 당시 체포되었던 김대건 신부와 여러 천주교신자를 처형하였다.

다음해에는 세실함장이 전하고 간 국서에 대한 답변을 받아가겠다고 글로아르호가 나타났다 전라도 만경에서 폭풍으로 침몰되어 다른 배를 타고 돌아갔다.

 ?   이와 함께 헌종도 나이가 들면서 외척 풍양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면서 이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 헌종과 조병구 사이에 안경과 관련한 재미난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조병구는 조만영의 아들로 눈이 매우 나빠서 오늘날로 말하면 고도근시에 해당하였는데 우리나라 경우 1970년대만 하더라도 안경에 대하여 한가지 금기시하는 터부가 있었는데 어른들이나 자신보다 높은 사람앞에서는 안경을 끼지 못하였다.

 ?    정조 역시 눈이 나빠서 안경을 끼어야 하는데 나이 많은 신하들 앞에서 건방지다고 생각하여 안경을 끼어야 할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였고 순종 역시 고종을 뵈울 때 어려움을 겪었다.

 ?   조선말 우리나라에 와 있던 묄렌도르프도 고도근시인데 안경을 끼지 않고 왕을 뵈어야 하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다고 하며 나중에 고종이 특별히 안경끼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조병구는 자신이 고도근시여서 헌종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안경을 끼고 헌종을 만나는데, 헌종은 외삼촌인 조병구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외삼촌에게 외숙의 몸에는 칼이 들거가지 않습니까?” 하여 조병구에게 말하였는데,    얼마 후에 신정왕후를 뵐 때에도 안경을 끼고 있자 다시 질책을 들어 조병구는 집으로 돌아가 음독자살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헌종이 외숙의 안경에 대하여 한 말이지만 풍양조씨에 대한 경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풍양조씨의 권세도 1846년 조만영이 죽는 등 그 일문이 죽으면서 다시 정권은 안동김씨한테 넘어간다.

 ?   그리고 헌종 자신이 나이가 들어 새로이 뜻을 펼쳐볼 나이가 되자 뜻을 펼쳐볼 새도 없이 헌종 15년인 1849년 6월 6일 23세 젊은 나이로 창덕궁 중희당에서 병사한다.

     헌종은 여인을 좋아하여 왕비가 2명이고 후궁이 3명이나 될 정도이고 궁중에 그가 가까이 하지 않은 궁녀가 드물 정도로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하였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의 후사하나 두지 못하여 6촌이내에 아무도 없을 정도로 손이 귀하였다.

 ?  헌종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며느리 풍양조씨집안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막아서 안동김씨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옥쇄부터 챙겼다고 한다.

    영조의 유일한 혈손이 되는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찾아 내어서 자신의 아들로 한 다음에 후사로 삼으니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강화도령 이원범’ ? 바로 철종이다.

   헌종은 죽어 경기도 구리시에 자리잡은 동구릉 내에 있는 경릉景陵에 묻힌다.

  동구릉에 있는 경릉(순조, 효현왕후, 효정왕후) ? ?      추존된 헌종의 부모 익종과 신정왕후     신정왕후神貞王后 풍양조씨(헌종의 어머니)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후에 익종 또는 문조로 추존)의 부인 신정왕후 풍양조씨는 순조 8년인 1808년 한양의 한강동쪽에 위치한 두모포(지금의 옥수동 295번지 일대 부근)에서 태어난다.

    어머니는 송시연의 딸 은진송씨이다.

그녀는 순조 19년 10월 12세때 1살이 어린 11세 세자빈으로 간택이 되었다.

    순조 30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23세로 홀몸이 되었으며 효명세자와 사이에 아들을 두었는데 바로 헌종憲宗이다.

   신정왕후가 태어난 옥수동에는 ‘쌍호정’ 이 있었는데 이 명칭은 신정왕후 조씨가 태어날 때 태몽을 꾸었는데 쌍호랑이 두 마리가 정자 옆에 앉아 있었다고 하여 ‘쌍호정’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정왕후는 1808년 순조 8년 12월 6일에 태어나 12세인 1819년 10월11일 왕세자빈으로 책봉돼 1827년 헌종을 낳았다.

헌종이 왕통을 이어받자 왕대비가 된다.

 ?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며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조씨는 대비가 된다.

그리하여 일시적으로 풍양조씨가 집권을 하나 철종이 즉위하며 신정왕후는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1857년 8월에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된다.

그리고 1863년 8월에 철종이 후사도 없이 죽자 안동김씨세도에 대한 반감이 큰 흥선대원군과 친정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의 2자 명복을 익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으니 바로 고종이다.

    그러나 고종이 나이가 어려서 자신이 고종 3년인 1866년 2월까지 수렴청정한다.

이후에 흥선대원군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고 고종 27년인 1855년 4월 17일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에 죽어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역내에서 초입에 위치한 곳에 있는 수릉綏陵에 헌종과 함께 묻힌다.

 ?    익종翼宗(효명세자)    효명세자는 1809년에 태어나 순조의 원자가 되고 왕세자로 책봉되어서 순조가 재위하던 시절에 순조 대신 대리청정을 하던 중에 순조 30년인 1830년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숨을 거둔다.

    같은 해 8월 4일 서울 동대문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 무덤 의릉懿陵 오른쪽에다가 묘를 조성하였는데 연경묘延慶墓라고 하였다.

    그러나 1835년에 헌종이 즉위하면서 5월 19일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이 되면서 연경묘는 수릉綏陵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러나 풍수상의 문제가 있다하여 1846년 5월 양주에 있는 용마산 아래로 이장하였다.

 ?   그러나 다시 철종 6년인 1855년 8월 현재의 위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내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사적 제193호)의 태조능인 건원릉 좌측에 자리를 잡는다.

신정왕후가 1890년 죽자 같은 해 8월 30일에 합장이 된다.

[순원왕후] 알아보자


    수릉은 효명세자가 세자로 죽어 격식에 있어 다른 조선 왕릉이 일반적으로 3단으로 구성된 데 비해 2단으로 구성되고, 다른 왕릉들이 ‘우상좌하’ 라 하여 왕이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왕비가 왼쪽에 배치되는 것과는 달리 수릉은 반대로 배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효명세자는 세자 시절에 죽었으나 신정왕후는 대왕대비로 죽어서 신분상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헌종의 비와 후궁들   헌종憲宗은 헌칠한 키에다 이목구비가 수려해 뭇 여성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궁녀치고 순조의 성은을 입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여성편력이 많을 정도로 자유분방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헌종이 여자를 좋아한 데는 당시 외척의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있어 왕으로서 할 일이 없었던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울안에 있는 궁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민간에 있는 규수중 인물이 출중하다고 알려진 예쁜 여인들을 선발하여 ‘반월’ 이라고 하는 곳을 창덕궁 건양재 동쪽에 ‘기정’ 이라고 하는 지금으로 본다면 주막이나 까폐비슷한 장소를 만든다.

 ?   또한 자신은 변복을 하고 궁녀는 주모로 분장을 하게 하여 운영하게 하였고 좀 한가하거나 고민을 할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아서 쉬면서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헌종은 서화를 좋아하고 청동기, 비석 등에 새겨진 금석학을 연구하기를 즐기고 겼는데 자신이 수집한 물품은 궁중에 소장하였다.

 ?   그는 서화 및 인장을 수집해 창덕궁 뒤편에 있는 승화루承華樓에 보관을 하고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을 만나고 추사, 단원, 겸재 등의 그림뿐 아니라 북송 때 휘종황제 그림, 문징명, 남영 등 명·청 대의 화가나 글까지 소장해 수시로 이곳에 들러서 이를 감상하였다고 한다.

 ?   지금도 승화루에 소장되어 있던 목록집인《승화루서목》이 전하는데 4,555점이 기록되어 있고 그 중 900점이 서화이다.

 ? ?? 승화루 서목   특히 당시 이곳을 방문한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허련은 김정희의 주선으로 헌종을 찾게 되는데 평민으로 궁중에 출입할 수 없자 무과에 급제시켜 궁에 출입을 시킬 정도로 헌종은 허련을 아꼈다고 하는데 이런 영향이어서 인지 헌종이 거주하는 곳에는 완당 추사의 글씨로 가득 찼다고 한다.

 ? ?허련의 초상화 ?   헌종은 이외에 허련에게 《시법입문》이란 서책과 3백금을 하사하여 허련이 한양에 거주할 수 있는 초가집을 구입하게 하고 귀양가 있던 김정희 안부도 물었다고 한다.

 ?   이처럼 헌종은 시, 서, 화를 좋아하여 ‘낙선재’ 에 걸려 있는 편액은 청나라 금석학대가 섭지선의 글씨이고 대청마루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라고 하며 낙선재 뒤편에 있는 육각형의 정자인 평원루도 청의 옹수곤의 글씨이다.

                                김정희 초상화     효현황후 ?   순조의 비인 효현왕후孝顯王后는 안동김씨 김조근金祖根과 어머니 한산이씨 사이에서 순조 28년인 1828년 3월 한양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   당시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서로 세력을 다투는 과정에 있었는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자신의 친정집안 안동김씨 집안에서 간택하였다.

김씨는 10살 때인 1837년 3월 왕비로 책봉되고 4년후에는 가례를 올리고 왕후가 된다.

 ?  그러나 그녀는 왕비가 된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아 1843년 8월 소생도 없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숨을 거둔다.

    죽어서 그녀는 경기도 구리시 용두동에 위치하고 있는 경릉景陵에 묻히게 되는데 다른 능과 달리 헌종과 계비 효정황후와 나란히 묻혀있는 삼련릉三連陵의 형식으로 묻힌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죽어서 부인간의 갈등은 없는지 모르겠다.

   고종 때 대한제국이 되면서 순종 때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로 추존된다.

      효정황후   효정왕후孝定王后 남양홍씨는 효현왕후가 죽자 새로 간택하여 얻은 계비로서 홍재룡洪在龍과 어머니 죽산안씨 사이에서 순조 31년인 1831년 1월 태어났다.

 ?   그녀는 1844년 9월 14세살 때 4살이 더 많은 18세의 헌종의 비로 간택이 되었으나 헌종이 자신이 간택되었을 때 제외되었던 경빈김씨를 다시 후궁으로 맞아 들이면서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헌종으로부터 딸 1명을 얻었다고 하는데 일찍 죽는다.

  ?? 헌종의 가례도 병풍도   1849년에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19세의 어린 나이로 대비가 되어서 어른 노릇을 하여야 하였다.

광무 8년인 1903년 11월 73세로 죽는다.

   무덤은 효현왕후와 같이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내에 있는 삼연릉 경릉에 나란히 묻히는데 오른편부터 현종, 효현왕후, 효정왕후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후궁 경빈김씨와 궁인김씨   이외에 후궁으로는 경빈김씨와 궁인김씨, 정빈윤씨 등 3명이 있었다.

그 중에 숙의김씨는 딸 1명을 낳았으나 일찍 요절하였다.

그리고 간택한 후궁으로서 윤치수의 딸 정빈윤씨가 있었으나, 정사 실록에도 그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헌종이 어떤 다른 여인보다도 마음 속으로 사랑한 여인은 경빈김씨가 있는데 헌종은 그녀를 매우 사랑하였다고 하는데 그 일화를 간단히 살펴보자.       헌종 재위 4년에 1838년 간택령을 내려서 첫번째 왕비 효현성황후를 왕비로 간택하였으며 4년뒤 왕비로 책봉을 하였으나 3년뒤에 요절하였고, 자식도 없어서 1년후에 다시 왕비 간택령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때 다른 간택과 달리 헌종이 직접 간택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헌종은 당시 삼간택에 올라온 처녀 중에서 김재청의 딸인 김씨를 마음에 들어 하였으나, 순원왕후와 수빈박씨는 이들 중에서 경빈김씨보다 홍씨가 더 참하다는 이유로 왕비로 간택한 여인은 홍재룡의 딸이었다.

    당시 왕실에는 사도세자의 서자들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다음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어서 후궁을 간택하여 들이기로 하였는데 당시 헌종은 계비를 맞을 때 본 바 있는 사가에 나가 있던 김씨를 간택하여 궁안으로 불러들인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김씨측도 왕후의 친정인 남양홍씨가문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을 경계해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헌종은 경빈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이자 경빈김씨가 왕비와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1847년에 창경궁(지금은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서 자신의 서재와 사랑채로서 지어 자신과 경빈김씨가 함께 살았다.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 ?   헌종이 화려한 것을 경계하여 단청을 사용하지 않은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헌종이 서화를 좋아하다보니 회랑을 만들어 작품을 걸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할머니 순원왕후와 경빈김씨의의 거처로 수강재와 석복헌을 새로 지어서 선물하였다.

헌종은 간택된 후궁은 종2품인 숙의로 책봉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김씨를 바로 정1품 빈에 책봉하였다.

  ?                                        창덕궁의 석복헌   그런데 지금 낙선재의 위치는 창덕궁의 정문을 통하여 들어 갈 경우 창덕궁 끝자락에 위치하여 창덕궁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   경빈김씨는 사계 김장생의 8대손인 주부 김재청과 평산신씨 신명하의 딸 사이에서 1831년에 태어나 정식으로 간택하여 들인 후궁으로 궁호는 순화궁이다.

 순화궁 건물은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 근처이다.

 ?   헌종 13년인 1847년인 10월 20일에 16세때에 입궁하여 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소생이 없었다 하며 헌종이 죽자 궁밖 사가로 나와 살았다고 하는데 검소하게 홀로 지내며 생활하다 고종 44년 1907년 6월 1일에 77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경빈김씨는 죽어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에 묻히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경빈김씨가 살던 낙선재 석복헌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왕후 윤비가 1966년까지 살다가 죽었고 이어서 영왕과 이방자 여사가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사회복지에 헌신하다가 그리고 이어 덕혜옹주가 수강재에서 기거하다가 죽는다.

  순원왕후는 훗날 손자 헌종과 철종의 수렴청정을 하다가 1857년 승하하여 인릉에 합장 되었다.

  ㅇ 증조할머니의 수렴청정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이다.

정조는 정비 효의왕후에게서는 후사가 없었으며, 후궁 의빈 성씨가 아들을 낳아 세자(문효세자)로 삼았으나 5세에 일찍 죽었으며 4년후 수빈 박씨가 둘째 아들을 낳아 1800년(정조 24) 1월 세자로 책봉하였고, 6월 정조가 승하하자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23대 순조이다.

 순조 즉위시 왕실은 여인천하로 불리우니, 증조할머니 격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할머니인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친어머니 수빈 박씨와 어머니 격인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또 자신의 부인이 되는 순원왕후까지 4대 다섯 여인들이 순조를 에워싼 것이다.

 순조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5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영조의 정비 정성황후 서씨가 죽자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에 51세 연상인 66세 영조와 결혼한 젊은 계비가 정순왕후이다.

아버지 한구의 사주를 받아, 나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자 서인(庶人)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으며 손자 정조가 집권시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증손자 순조 즉위후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하니 스스로를 女君이라 부르면서 정조의 개혁정치가 무색하게 피로 얼룩진 폭정을 일삼는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 기간 동안 벽파(僻派)를 등에 업고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하였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그 뒤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검거되어 박해받고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하였으며,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순조는 3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세도정치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고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ㅇ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 정조가 승하하기 4개월전인 1800년 2월 26일 세자빈(순조 비) 간택이 있었다.

초간택과 재간택을 거쳐 김조순의 딸이 사실상 세자빈으로 확정되었으나 그때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최종적인 삼간택이 미루어졌고 우의정 김관주가 '세자빈 간택은 무효다 왕비간택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즉, 이제는 세자빈이 아니라 왕비 간택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순조 즉위 2년 뒤인 1802년, 영조계비 정순왕후의 지원하에 결국 김조순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니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 김씨로, 드디어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1804년(순조 4)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자 정국의 주도권은 장인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정의 요직은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혈연을 중심으로 독점되었고, 척신들 사이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더불어 수해와 전염병 등으로 민심이 피폐해지자 홍경래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김조순은 김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의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고 김이익과 김이도 등의 안동 김씨 시파를 등용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ㅇ 조선왕조의 내리막길 순조와 순원왕후는 1809년에 효명세자(孝明世子)를 낳았는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순조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당시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819년, 풍양 조씨인 조만영의 딸을 효명세자빈(신정왕후)으로 맞아들인다.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는데 이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세자는 현재(賢材)를 등용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나 1830년, 대리청정 4년 만에 갑작스럽게 급서하니 순조는 자신보다 앞서 자식을 보내는 부모가 되고 말았다.

4년후(1834년)에는 순조마저 승하하자 당시 8세였던 왕세손이 24대 헌종(憲宗)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순조 인릉 산릉도감의궤 헌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정조비 순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헌종의 왕비(王妃)를 자신의 친척인 김조근의 딸로 맞았으니 이가 헌종의 정비인 효현왕후(孝顯王后)이다.

 그러나 헌종도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1849년) 그녀는 친가(안동 김씨)와 결탁하여 장헌(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 원범(元範)을 강화도에서 궁으로 데려와 덕완군(德完君)으로 책봉하고 자신과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시키니 조선의 제25대 왕 강화도령 철종(哲宗)이다.

 철종을 즉위 시킨 뒤 그녀는 안동 김씨인 김문근의 딸을 철인왕후(哲仁王后)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이어나갔으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1857년, 창덕궁 양심각(養心閣)에서 69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이후 철종도 후사를 잇지못해 고종과 순종에게 왕위가 이어지며 마침내 조선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되니 사실상 조선의 내리막길은 정조이후 순조부터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것이다.

  참으로 박복한 순조임금이다.

   ㅇ 국정원에 눌린 인릉 석관동 의릉에 있던 옛 중앙정보부가 이사 간곳이 헌인릉 바로 옆이다.

헌릉은 그나마 산줄기 하나 벗어나 있어 괜찮은데 인릉은 국정원과 맞닿아 있다.

그쪽으로 사진 찍으면 안된다는 신신당부를 듣고서야 릉에 오를수 있었다.

꼭 이쪽 지형을 사용해야했다면 지하건물로 하고 시야를 틔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인릉의 능역에는 곡장 3면을 둘러치고 병풍석은 없이 난간석 12칸을 둘렀다.

왕릉의 규범에 맞게 석양 2쌍, 석호 2쌍, 혼유석 1개, 망주석 1쌍, 장명등 1개, 문석인과 석마 각 1쌍, 무석인과 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과 재실 등이 있다.

 장명등은 정조때의 모습에서 다시 초기양식을 따른것으로 보이며 석물들의 조각이 아주 사실적으로 잘 되어 있다.

비각에는 최초 세운 비석과 고종 때 순조숙황제로 추존되면서 추가로 세운 비석까지 2개가 있다.

  헌인릉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인릉 전경   정자각과 비각 사이로 사초지와 능침이 보인다    <비각.... 2개의 비석을 세웠다.

>       처음 왕릉 조영시 세운 <조선국 순조대왕 인릉 순원왕후 부좌> 비석?   능침 전경?  병풍석 없이 난간석을 둘렀다.

조각도 세련되고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을 준다      귀면을 새긴 고석이 받치고 있다  ?능침 앞의 석물군-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문인석, 무인석, 석마   능침 왼쪽의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석마  능침의 왼쪽 무인석과 석마    ?왕릉중에 가장 잉이 발달한 지형으로 꼽히는 인릉 - 곡장 안으로 석양과 석호가 지키고 있다  능침 뒷면의 석호    <12지신 글자로 난간석에 방위를 표시....>  순조는 결코 짧지 않은 34년의 재위기간을 탐욕스러운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이렇다할 치적이 없었다.

정치기간은 문란해졌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순조비 순원왕후는 본격적인 세도정치의 시조인 김조순의 딸로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몸을 던진 여인이었다.

 오죽하면 순조가 안동김씨의 전횡을 막고져 세자빈을 조만영의 딸로 맞았는데 결국 풍양 조씨의 득세로 이어지고 두가문은 서로의 이전투구에 몰두하여 나라 꼴은 더욱 어려워졌다  순원왕후는 훗날 대왕대비 시절 가문을 위해 강화도령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녀는 영조비 정순왕후와 함께 조선왕조의 파국에 적지않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잉에서 바라본 모습 오가작통법 : 1485년 한명회에 의해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등재, 5개의 호(戶)를 1개의 통(統)으로, 리(里)는 5개의 통(統)으로, 면(面)은 3

4개의 리(里)로 구성하며 통에는 통주(統主) 또는 통수(統首)를 두고,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이라는 관리관을 두었으나 초기에는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조선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오가작통법은 주로 호구를 밝히는 동시에 범죄자의 색출과 조세 징수, 부역 동원 등을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호패(戶牌)와 함께 호적의 보조수단이 되었으며 역(役)을 피하여 호구의 등재없이 이사와 유랑을 반복하는 유민(流民)들과 도적들의 행태를 방지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고 순조(純祖)와 헌종(憲宗) 때에는 오가작통제의 연대 책임을 강화하여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적발되면 다섯 집을 모조리 처벌하는 방식’으로 천주교도를 색출하는데 이용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신유사옥(신유교난) : 1801년(순조 1) 조선시대 이단 탄압과 집권층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천주교도와 남인(南人) 세력에 대한 탄압 사건으로 신유교난(辛酉敎難)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집권자들은 성리학을 한층 교조적으로 신봉하면서, 그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되는 이념을 배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하나의 학문에서 신앙으로, 소수의 지식인들로부터 민중 사이로 널리 퍼졌다.

특히 1794년(정조 18) 중국 베이징[北京] 교구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한 이후, 약 4,000명이던 신자가 수년 만에 1만 명으로 증가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당시 남인들은 정치적·이념적으로 노론(老論) 집권세력과 지향점이 달라 갈등이 깊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천주교를 탐구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한편 영조 말년 이후 정계에서는 벽파(僻派)와 시파(時派)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그 중심 인물이 모두 노론 계열이었고, 쟁점도 주로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 및 그에 대해 정조가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한 것이었지만, 시파는 벽파와 달리 정조의 정책을 따라 천주교와 남인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대립은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여 김구주(金龜株)의 누이인 영조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하면서 벽파가 일시에 정권을 잡았다.

벽파 정권은 먼저 시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으며, 이단의 배격이라는 원론적 입장에서 천주교와 남인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1801년 1월 정순왕후는 사학(邪學:천주교)을 엄금하고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며, 전국적으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철저하게 실시해 신자의 씨를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천주교가 혈연과 군신의 관계를 부정하여 인륜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을 오랑캐나 금수의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교에 관여했던 남인 인사와 당시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그해 2월에 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民)·이승훈(李承薰)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은 옥사했으며, 이존창(李存昌)은 충청도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는 유배당했다.

여주와 양근 감옥에 갇혔던 이중배(李中培)·최필제(崔必悌) 등의 경기지방 천주교도들도 다수 처형당했으며, 황주까지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도 자수하여 효수되었다.

 가을에는 황사영(黃嗣永)이 탄압의 전말을 보고하고 중국이나 서양의 힘을 동원하여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베이징의 교회에 보내려 한 일이 발각되어, 이에 관계된 인물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신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같은 해 12월에 척사윤음(斥邪綸音)이 공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다.

 삼정(三政의 문란) :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이 문란해졌음을 말한다.

 홍경래의 난조선 후기 순조의 재위 기간은 안동 김씨, 반남 박씨등 척신들의 횡포와 자연 재해 등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가운데 잦은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 1811년 12월 홍경래가 평안도 가산 다복동에서 일으킨 반란은 근대 이전 조선시대에 일어난 최대의 민중반란이었다.

 평안도 용강 출신의 홍경래는 1811년(순조 11) 군대를 일으켜 8개 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남쪽으로 진출하다가 정부군에게 패한 끝에 농민들과 함께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하였다.

봉기군은 저항을 계속 하였으나, 1812년(순조 12) 4월 19일, 정부군이 화약을 터뜨려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였다.

 홍경래는 전사하고 우군칙 등 다수가 체포되었으며, 봉기군 잔존 세력 중 1,917명이 효수 당했다.

홍경래의 난은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무력도 구성하지 못하여 정부군에게 패배하였지만, 낡은 지배체제에 저항한 사건으로써 후대 민중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처] :김신묵의 해피투어 (Happy-tour)  blog.chosun.com/ksmm2000      인릉(仁陵) - 전북도민일보,  2010. 7. 23.    즉위한 지 6년이 넘도록 아들이 없었던 정조에게 궁녀 성씨(成氏)가 1782년(정조 6) 9월 7일 아들을 낳아 주었다.

정조는 그 녀를 내명부 정3품의 벼슬인 소용(昭容)으로 삼았고, 이듬해 2월 19일에는 소용성씨에게 의빈(宜嬪)이란 칭호를 내리고, 의빈이 낳은 아들을 1784년(정조 8) 7월 2일 왕세자로 삼았다.

 왕세자가 1786년(정조 10) 5월 3일 홍역에 걸리자 정조는 의약청을 설치하여 치료에 전념 한 결과 호전되어 5월 6일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그런데 며칠 후인 5월 10일 왕세자가 갑자기 심각한 또 다른 증세를 보이자 정조는 약원에는 알리지 못하게 하고 “이런 때에 내가 모두 몸소 점검하는 것은 대체로 지극한 정이 있기 때문이지만, 또한 뜻이 있어서이다.

”라고 하면서 본인이 직접 간병을 하였다.

그러나 왕세자는 이튿날 승하하고 말았다.

 왕세자의 시호를 문효(文孝), 묘호를 효창(孝昌)이라 하고 그 해 윤 7월 19일에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 해 9월 14일에는 의빈성씨가 임신 중에 갑자기 또 승하를 하자 당시에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지 않은 가?”라고 의심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 20일에 의빈성씨를 문효세자의 무덤 왼쪽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그 뒤 한동안 아들이 없었던 정조는 1789년(정조 13) 10월 7일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긴 다음 해 6월 18일 창경궁에서 수빈박씨(綏嬪朴氏)가 아들을 낳자 정조는 “나라의 형세는 유지해 나아갈 기쁨이 있고 전궁(殿宮)은 손자를 안는 경사가 났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칭호를 원자로 정하여 종묘에 고하고 대사면 령을 내려 1천 1백 54명이 풀려났다.

 그 후 1800년(정조 14) 1월 1일에 원자를 왕세자로 삼았는데, 그 해 정조가 승하를 하자 왕세자가 조선 23대 왕으로 즉위를 하니 그가 순조(純祖) 임금이다.

즉위 할 때 순조의 나이가 어리니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2년(순조 2) 10월 13일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로 책봉을 하여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효명세자(孝明世子)이고 차남은 일찍 죽었다.

불행하게도 효명세자가 1830년(순조 30) 5월 6일 승하하자 원손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였고, 장녀와 차녀 역시 출가를 하였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후사가 없다.

 순조 임금이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자 장지를 파주 옛 장릉(長陵, 인조 옛 무덤) 왼쪽 언덕에 정하여 조성 작업을 하던 중 수렴청정을 하던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 비)가 흙의 빛깔이 좋지 않고, 뇌석이 깨져 불안하니 다른 곳으로 장지를 정할 것을 지시하면서, 상지관 이시복(李時復)을 처형하였다.

 이시복은 감여술(風水)로 입신출세한 양덕현감(陽德縣監)으로 장지의 일을 독단하였는데, 장지의 흙빛이 좋지 않자 천광의 위치를 위 아래로 옮겨 도처에 구멍을 뚫고 헐면서 속이고 감추기를 일삼은 죄를 물은 것이다.

 장지를 교하(交河) 장릉(長陵)의 국내로 다시 정하여 1835년 4월 9일 순조를 장사(乙坐辛向) 지내고 능호를 인릉(仁陵)이라 하였다.

1855년(철종 6년)에 인릉은 청룡이 낮고 혈의 전순(氈脣)이 길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천장이 결정되었다.

 천장 후보지 중 하나였던 후릉(厚陵, 정종 무덤) 양쪽 언덕은 무학대사가 점지한 자리라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철종(哲宗)은 헌릉의 오른쪽 언덕(세종의 옛 무덤자리로 추정)을 천장지로 정하여 1856년 10월 11일 남향(子坐午向)으로 천장을 하였다.

 이듬해인 1857(철종 8) 8월 4일 순원왕후가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승하하자 인릉의 혈 왼쪽의 뭉친 곳이 풍만하여 합봉으로 장사를 지내면 십분대길(十分大吉)하다는 상지관들의 의견에 따라 그 해 12월 17일에 순조 왼쪽 옆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출처] : 최낙기 풍수지리연구소  http://www.cnk-fs.com/597   순조와 순정왕후의 인릉(仁陵) - 수렴청정과 세도정치 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홍경래의 난 등 내란을 막은 순조대의 무석인은 장엄하고 근엄한 모습이다  인릉(仁陵)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 1790

1834, 재위 1800

1834)와 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

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자리한 이곳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다가 강남 개발과 함께 서울로 편입된 지역이다.

제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獻陵)이 능역 안에 함께 있어 조선 초기와 후기의 능원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수빈박씨다.

배다른 형 문효세자(1782

1786)가 일찍 죽고 난 후 정조 나이 39세에 귀하게 얻은 아들이다.

순조는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나 10년 후인 1800년 2월 11세로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왕에 등극했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 승하 4개월 전에 세자 책봉이 이뤄졌다.

 순조는 11세의 나이로 정조 승하 6일째 되는 날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즉위했다.

조선의 역대 왕은 대부분 인정문 앞에서 즉위했다.

어린 나이에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대왕대비는 희정당의 동쪽에서 남쪽을 향해 앉아 전영(前楹·기둥 앞)에 발을 늘어뜨리고(垂簾), 어린 순조는 발 건너편의 서쪽에서 남쪽을 향해 앉아 수렴청정의 예를 갖추었다.

이는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가 성종 때 수렴청정을 한 예를 따른 것이었다.

 11세에 즉위 정순왕후가 조종 중국에서는 수렴청정 결재 때 구중궁궐의 안채에서 대비가 내시를 시켜 결재하나, 조선 왕실에서는 발 뒤에서 직접 결재를 해 번거로움과 전달상의 오류를 막았다.

수렴 청대(請對·뵙기를 청함)는 한 달에 6회씩이었고, 병관(兵官)과 같은 중요한 결재는 왕에게 직접 고하고 대비가 재결했다.

 순조가 수렴청정을 받을 때는 서증조모 정순왕후, 조모 사도세자 비 혜경궁 홍씨, 서모 효의왕후, 친모 수빈박씨 등 4대의 왕실 웃어른이 있었으나 정치 세도가들의 위력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순원왕후] 전략은 무엇이었길레



 수렴청정은 얼마 가지 못했다.

경주김씨로 영조의 사랑을 받으며 아들뻘인 사도세자, 손주뻘인 정조와 정치적 경쟁관계를 이뤘던 서증조모 정순왕후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순조 나이 16세 때였다.

일반적으로 수렴청정은 20세까지지만 대비인 정조비 효의왕후는 세도가들의 압력으로 순조가 친정에 들어가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등 순조비 순원왕후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다.

원래 세도(世道)는 말 그대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의미하지만 정조 때 홍국영 등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한 데다, 노론 중심의 몇몇 가문에 권력이 집중돼 삼정의 문란이 생기면서는 한자어가 세도(勢道)로 변질됐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때문일까.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정치와 사회 기강은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무너져내렸다.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각종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이 시작됐는데 오가작통법이 그것이다.

 34년 4개월을 재위한 순조는 수렴청정과 세도정치로 많은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그 때문인지 한창 일할 나이인 45세에 생을 마감했다.

 순조의 부인 순원왕후는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실세였던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그는 정조 24년 세자빈 삼간택 중에 갑자기 정조가 승하한 뒤 정순왕후의 오빠인 경주김씨 김관주 등의 방해로 간택에 어려움을 겪다가 순조 2년에 이르러서야 왕비로 채택됐다.

 한때 자신의 며느리(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인 풍양조씨(후에 추존 익종비 신정왕후)가 헌종의 대리청정을 빌미로 세력을 확장해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효명세자가 죽자 헌종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세도정치는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김씨와 신정왕후의 친정인 풍양조씨 의 세력싸움으로 난국을 맞았다.

 헌종이 자식 없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자 다시 수렴청정을 하게 된 순원왕후는 자신의 친정세력 안동김씨를 원상(院相·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사를 다스리던 것) 정치세력으로 만들었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강화에서 농사를 짓던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해 왕위를 잇게 하고 그의 비를 자신의 친가인 김문근의 딸로 간택해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누렸다.

 안동김씨 득세 정치적 혼란 불러   조선 후기 대표적 합장릉의 형식으로 평가받는 인릉 전경. 이곳은 근래까지 1653만㎡ 이상의 넓은 정원이었다 순조는 그의 보위 34년(1834) 11월 13일 해시(亥時·밤 11시경)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정조, 순조대의 대학자이자 의리(醫理)에도 정통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명의들과 진언해 강귤차(薑橘茶·생강과 감귤차) 등을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순조가 경희궁에서 승하한 것은 당시 정궁이던 창덕궁에 불이 나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해 있었기 때문이다.

순조의 장례는 왕세손이었던 헌종이 대보를 이어받아 국장을 치러야 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해 치렀다.

 순조의 능역이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터 잡고 조영된 것도 그 때문이다.

순조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인 파주 교하의 장릉(長陵) 왼쪽 구읍지 뒷산 산줄기에 을좌신향(乙坐申向·동남을 등지고 북서향)으로 모셔졌으나 22년 뒤 순원왕후 안동김씨의 세력이 약해지고, 반대로 세력이 커진 신정왕후의 친정 풍양조씨가 순조의 인릉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며 철종 7년(1856) 현재의 내곡동 헌릉 서측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북을 등지고 남향)으로 천장했다.

 세도정치의 무리가 순조대 능묘에 대한 풍수 논리를 부정적으로 몰아 정치적 공격을 한 결과였다.

 이런 세력싸움은 순조의 능원 터를 잡을 때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파주 장릉의 우강에 자리 잡아 공사를 했지만, 산릉의 흙빛이 흡족하지 못하고 뇌석(腦石)이 깨져 상할 염려가 있다고 해 장릉의 국내(局內)로 옮겼다.

 당시 풍양조씨 줄에 섰던 상지관 이시복은 흙빛을 은폐했다는 명목으로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이때 산릉도감(능역 조영 총책임자)을 맡았던 이면승은 이중 공사의 고통 때문에 현장에서 과로사하기도 했다.

 서초동 헌릉 우강으로 천장된 후 순원왕후의 국장을 치르면서 태조, 세조, 선조, 인조에 이어 순종(純宗)이었던 묘호는 순조(純祖)로 바뀌었다.

시호를 내리는 의전은 지극히 엄중했는데 조(祖)는 일반적으로 왕업을 창시하거나 큰 업적이 있을 때 붙였다.

 태조는 왕업을 창시했다 해서, 세조와 인조는 정권을 바꿨다는 이유로 조를 붙였다.

선조는 좀 복잡한데 태조를 조선의 왕업 창시자로 인정하지 않던 중국을 설득해 인정받은 공적, 임진왜란 등을 평정한 공적 등으로 조라는 묘호를 붙였다.

 순조는 당시 최장수 조정정략가인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 1783

1873) 등이 홍경래의 난 등을 평정한 공적으로 조(祖)로 할 것을 주청해 이뤄졌다.

이것도 세도정치에 의한 아부성 묘호 수정으로 추정된다.

 순조를 천장한 이듬해인 철종 8년(1857) 8월 4일 술시에 창덕궁 양심합에서 순원왕후가 승하했다.

친정인 안동김씨 일가이며 정국의 실세인 김병기, 김병국(고종 때 김옥균의 양부) 등이 인릉의 국내(局內)로 자리할 것을 주장해 순조와 함께 자좌오향으로 합장됐다.

  합장할 때 지관들은 이곳을 ‘혈이 뭉친 곳이 풍만하고 십분대길(十分大吉)’이라 호평했다.

이 자리는 400여 년 전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침이 있던 자리였는데 좋지 않다고 해 세조가 천장을 주장하고 예종 때 실행에 옮긴 그 터다.

하지만 지금 가보아도 길지임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터가 좋다.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인릉의 문석인(오른쪽)과 무인상은 매우 사실적인 표정으로 묘사돼 있다.

  매우 사실적 표정의 문무석 인릉은 겉으로 봐서는 혼유석을 하나만 설치해 단릉과 같은 형식이다.

합장릉은 혼유석을 왕과 왕비의 것 2개를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합장릉 형식으로,. 이는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문무석인의 생기 있는 표정과 이목구비의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이고 정교해 조선 후기 석물조각의 대표적 문무석으로 꼽힌다.

특히 무석인은 순조 때 홍경래의 난 등 각종 민란을 물리친 무인상의 모습처럼 우람하고 근엄하게 조각돼 있다.

 인릉의 비각에는 2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천장 후 조영을 할 때 철종이 자신을 일개 농군 강화도령에서 왕으로 발탁해준 순원왕후에 대한 고마움에서 직접 표석의 글을 써서 세운 것이고, 또 하나는 고종이 순조를 순조숙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 것이다.

 인릉의 석물 일부는 선대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 바로 옆에 조영됐던 희릉 초장지의 석물을 사용해 조영한 것으로 ‘산릉도감의궤’와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이러한 기록물은 조선 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때 진정성을 인정받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헌·인릉 지구는 세계유산 등재 때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능역 앞 비닐하우스촌의 경관 계획 및 사신사(四神沙·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주산) 등의 보존 대책 마련, 일부 국가기관이 쓰는 주차시설 등의 원형 복원을 권고받았다.

 이에 대한 보존 대책과 복원 계획을 철저히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렵게 얻은 세계유산이 위험유산이 될 수도 있다.

세계유산 등재 후 국제기구 각종 위원회는 이들의 이행 여부를 계속 모니터링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인릉 매표소 앞에 묻힌 금천교와 재실과 능원을 잇는 제례 동선의 복원도 이루어져야 한다.

 순조는 순원왕후와 숙의박씨 사이에서 1남 4녀를 뒀으나, 유일한 아들인 효명세자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손자인 헌종이 왕통을 이었다.

헌종의 능호는 경릉(景陵)이며 구리시 동구릉의 서측 언덕에 있다.

헌종의 즉위와 더불어 추존된 익종(문조익황제)의 능호는 수릉(綏陵)으로 동구릉 동측 언덕에 있다.

    헌인릉 지구 오리나무 숲 - 1653만㎡ 최고의 숲…일제강점기 때 파괴  우수한 생태자원으로 생태경관보전지구로 지정돼 특별관리를 받고 있는 오리나무숲. 헌·인릉 지구의 오리나무 숲은 서울시에서 생태경관보전지구로 지정해 특별 관리한다.

이곳은 조선 초기 태종의 헌릉과 세종의 영릉 능침이 있었고, 이후 조선 말기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침 정원이 있던 곳이다.

 조선 왕실이 능원의 나무 하나, 풀뿌리 하나까지 보호 관리했던 천연의 숲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파괴돼 오리나무 숲만 남았다.

그 전까지는 1653만㎡가 넘는 넓고 잘 가꿔진 최고의 숲이었다.

지금까지 잘 보전됐다면 수도 서울에 광릉 숲 같은 녹지가 있었을 터. 다행히도 이번에 세계유산에 포함돼 영원히 보전할 기회를 잡았다.

여기에는 남아 있는 오리나무 숲도 한목했다.

오리나무는 장수목으로 옛날에 도로의 오리(五里)마다 심어놓고 거리 표시를 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조선시대에는 오리나무를 능역의 입구 습한 지역에 인위적으로 심어 관리했는데, 낙엽활엽수의 교목(큰나무)으로 습하고 비옥한 정체수(停滯水)가 있는 토양에서 잘 자란다.

 목질부가 견고하고 붉은색을 띤 이 나무는 양수로 능역 남측의 합수지(명당수) 연못(주작) 근처에 심어 관리했다.

목질이 붉은 것은 오행 중 남측을 상징하며, 목질은 말라도 갈라지지 않아 목가구 제조용으로도 많이 쓴다.

한자 이름은 ‘五里木’ ‘赤陽’ ‘茶條’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시호는 정희(貞熹), 생전의 존호는 자성(慈聖)이다.

세종(世宗) 때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낸 윤번(尹?)의 딸이며, 1418년(태종 18) 당시 청주판관(淸州判官)으로 근무하던 부친의 근무지인 홍천(洪川) 관아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지낸 이문화(李文和)의 딸인 인천 이씨(仁川李氏)이다.

1428년(세종 10)세조(世祖)와 결혼하여 의경세자(懿敬世子, 덕종)와 예종(睿宗),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 1녀를 낳았다.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성격이 강하여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 미리 정보가 누설되어 거병을 망설이는세조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내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계유년에세조께서 기회를 잡아 정난하였으며, 태후도 계책을 같이 해서 임금을 도와 큰 일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1455년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457년(세조 3)에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존호를 받았다.

1468년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자성왕태비(慈聖王太妃)의 존호를 받았다.

1469년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죽자 정희왕후는 당시 4살이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 1466

1525)을 대신해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잘산군(?山君) 이혈(李?)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새로 왕위에 오른성종(成宗)도 당시 13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대왕대비(大王大妃)로서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정희왕후의수렴청정은 1469년부터 1476년(성종 7) 2월 8일(음력 1월 13일)까지 약 8년 동안 이루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조정은 비교적 평안히 유지되었다.

1482년(성종 13)에 경복궁(景福宮)으로 거처를 옮긴 정희왕후는 건강이 악화되자 이듬해 봄에 치료를 위해 온양(溫陽)으로 떠났다.

 하지만 1483년 5월 6일(음력 3월 30일)에 온양에서 사망해 남양주(南楊州)의 광릉(光陵)에 매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희왕후 [貞熹王后] (두산백과) ------------------------------------------------------------------------------------------------------------------------------------☆ 문정왕후 [文定王后] (1501

1565)※ 조선시대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繼妃). 명종의 어머니. 명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였다.

 남동생 윤원형이 권력을 쥐고 대윤이라고 하는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숭유배불을 무시, 불교중흥을 도모했다.

본관은 파평(坡平), 성은 윤(尹),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며 명종의 어머니이다.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죽고 12살에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숭유배불(崇儒排佛)을 무시하고 불교중흥을 도모하였다.

승려보우를봉은사(奉恩寺)주지로 임명하고봉은사 근처(정릉)로 중종의 능을 이장(移葬)시켰다.

 이는 문정왕후가 자신이 죽은 뒤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함이었으나 정릉의 지대가 낮아 해마다 재실까지 물이 차는 상태에서 보토(補土)하기에 많은 비용이 들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53년(명종 8) 명종에게 친정(親政)을 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윤원형과 협력하여 정사에 계속 관여하였다.

소생으로는 명종 이외에 의혜(懿惠)·효순(孝順)·경현(敬顯)·인순(仁順) 공주 등 1남 4녀를 두었다.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孔陵洞)의 태릉(泰陵)이다.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 사적 제201호.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의 능.[네이버 지식백과] 문정왕후 [文定王后] (두산백과)-------------------------------------------------------------------------------------------------------------------------------------------- ☆ 인순왕후 [仁順王后] (1532

1575)※ 조선 제13대 명종의 비(妃).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성은 심씨(沈氏)이다.

 시호 선열(宣烈). 1532년 (중종27) 5월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과 전주 이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12세때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인종이 죽은 후 1545년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시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으로 명종과 인순왕후는 허수아비였으며  윤원형 등의 외척세력이 득세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하자 백정출신 임꺽정이 의적행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551년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3세에 죽고 말았다.

후궁들에게서도 후사가 없자 인순왕후는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군의 3째 아들 하성군(선조)를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즉위켜 하였다.

 선조 즉위 후 잠시수렴청정을 하였으나 곧 청정을 철회하였다.

1569년(선조 2) 의성(懿聖)의 존호(尊號)가 진상(進上)되었다.

1575년 1월 44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승하하여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강릉(康陵)에 명종과 나란히 묻혀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순왕후 [仁順王后] (두산백과)----------------------------------------------------------------------------------------------------------------------------------------☆ 정순왕후 [貞純王后] ( 1745

1805)※ 조선 제21대 영조의 계비.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 수령 등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다.

본관 경주(慶州). 성 김(金).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의 딸. 정식 칭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소숙정헌정순왕후김씨(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王后金氏)이며, 정순이 시호이다.

영조비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자 1759년(영조 35) 15세로 51세 연상인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친정이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음에 비해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 그 내외가 어머니뻘인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 데서 빚어지는 갈등 때문에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오빠김구주(金龜柱)가 이끄는 세력이 영조 말년에 사도세자의 장인인홍봉한(洪鳳漢) 중심세력과 맞서고, 친정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벽파(僻派)가 정조대에 시파(時派)와 대립하는 데 중요한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는데, 스스로 여자국왕[女主 ·女君]을 칭하고 신하들도 그의 신하임을 공언하는 등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때 정조의 이복동생은언군 인(恩彦君 ?)과 정조의 친모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 등은 처형되었다.

다음해에는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정약용(丁若鏞) 등의 남인(南人)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친정인물인 김관주(金觀柱) ·김일주(金日柱) ·김용주(金龍柱) 및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등이 뒷받침하였다.

일반 국정에서는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수령으로 이어지는 통치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시파 김조순(金祖淳)이 벽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결정대로 딸을 순조(純祖)의 비로 들여 국왕의 장인이 된 상황에서 1803년 12월에 수렴청정을 그치게 되자, 정세가 바뀌어 벽파가 조정에서 숙청되고 친정인물들도 대부분 도태되었다.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정순왕후 생가 -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音岩面) 유계리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순왕후 [貞純王后] (두산백과)-----------------------------------------------------------------------------------------------------------------------------------------------순원왕후 [純元王后](1789

1857)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1789년 6월 8일/음력 5월 15일

1857년 9월 21일/음력 8월 4일)는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정비(正妃)이자 문조(효명세자, 文祖)의 어머니이며 헌종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정식시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예성홍정순원왕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王后)이며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씨(靑陽府夫人 沈氏) 사이에서 태어났다생애1789년 6월 8일(음력 5월 15일)에 태어났다.

 시파 계열이자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아버지 김조순의 영향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순조의 유력한 세자빈으로 떠올랐고 초간택과 재간택을 거쳐 사실상 세자빈으로 확정되었으나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최종적인 삼간택이 미루어졌고 결국 순조의 즉위 2년 뒤인 180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05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순조의 장인이자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은 김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의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고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등의 안동 김씨 시파를 등용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대규모 숙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순원왕후는 1809년에 맏아들인 효명세자를 낳았는데 효명세자는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순조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당시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819년, 풍양 조씨인 조만영의 딸을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는데 훗날의 신정왕후이다.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는데 이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세자는 현재(賢材)를 등용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으나 1830년, 대리청정 4년 만에 갑작스럽게 급서하였고 1834년에는 순조마저 승하하자 당시 8세였던 왕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순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헌종의 왕비를 자신의 친척인 김조근의 딸로 맞아들였으니, 이가 헌종의 정비인 효현왕후이다.

순원왕후어필봉서.그러나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녀는 친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결탁하여 장헌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원범(元範)을 강화도에서 궁으로 데려와 덕완군(德完君)으로 책봉하고 자신과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시키니 조선의 제25대 왕인 철종이다.

철종을 즉위시킨 뒤에도 그녀는 철종의 왕비를 다시금 안동 김씨인 김문근의 딸(철인왕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이어나갔으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1857년 9월 21일(음력 8월 4일),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69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위치한 인릉(仁陵)으로 남편인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이후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년)에 남편 순조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추존되자 그녀도 함께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되었고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에는 '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皇帝 仁陵 純元肅皇后 ?左)'라는 묘비가 새로 세워졌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33통의 편지로 구성된 《순원왕후어필봉서》(純元王后御筆封書)가 있는데 가문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당대 정치에 대한 관심 등을 표현하였고 글씨도 우아한 궁체(宮體)로 되어 19세기 한글 편지의 특징과 언어, 서체 이해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가족관계조부 : 서흥부사 증 영의정김이중(瑞興府使 贈 領議政 金履中, 1736

1793)조모 : 부사 신사적(牧使 申思迪, 1683

?)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아버지 : 영안부원군 충문공 김조순(永安府院君 忠文公 金祖淳, 1765

1832)외조부 : 증 좌찬성 심건지(贈 左贊成 沈健之, 1733

?)외조모 : 현감 이윤언(縣監 李胤彦, 1686

?)의 딸 전주 이씨(全州 李氏)어머니 :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靑陽府夫人 靑松 沈氏, 1766

1828)오빠 : 영돈녕판사 김유근(領敦寧判事 金?根, 1785

1840)오빠 : 증 이조판서 김원근(贈 吏曹判書 金元根1786

1832)동생 : 영돈녕부사 충익공 김좌근(領敦寧府事 忠翼公 金左根, 1797

1869)시아버지 : 제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1752

1800)시어머니 : 효의선황후 김씨(孝懿宣皇后 金氏, 1753

1821)서시어머니 : 의비 성씨(宜嬪 成氏, 1753

1786)시아주버니 :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

1786)생시어머니 : 현목수빈 박씨(顯穆綏嬪 朴氏, 1770

1822)남편 : 제23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

1834)장남 : 추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1809

1830)며느리 : 신정익황후 조씨(神貞翼皇后 趙氏, 1808

1890)손자 : 제24대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1827

1849)차남 : 대군(요절)장녀 :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

1832)부마 : 안동인 김한순(金漢淳)의 아들 동녕위 김현근(東寧尉 金賢根 ?

1868)차녀 :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

1832)부마 : 안동인 김연근(金淵根)의 아들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3녀 :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

1844)부마 : 해평인 윤치승(尹致承)의 아들 남녕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양자 : 제25대 철종정황제(哲宗章皇帝, 1831

1864)며느리 : 철인장황후 김씨(哲仁章皇后 金氏, 1837

1878)출처- 위키백과--------------------------------------------------------------------------------------------------------------------------------------------------- ☆ 신정왕후 [神貞王后] (1808

1890)※ 조선 익종의 비. 1819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 대왕대비로 진봉되었다.

본관 풍양(豊壤). 성 조씨(趙氏).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만영(萬永)의 딸. 1819년(순조 19) 세자빈에 책봉되고,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철종 8) 대왕대비로 진봉되었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고종)을 즉위하게 하여 대왕대비로서수렴청정하였고, 흥선대원군에게 정책결정권을 주어대원군의 집정을 이루게 하였다.

 1873년(고종 10)까지 효유(孝裕) ·헌성(獻聖) ·선경(宣敬) ·정인(正仁)의 존호와 대왕대비에 진호되어 자혜(慈惠) ·홍덕(弘德) ·순화(純化) ·문광(文光) ·원성(元成) ·숙렬(肅烈) ·명수(明粹) ·협천(協天) 등의 존호를 받았다.

 능은 수릉(綏陵)으로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정왕후 [神貞王后] (두산백과)------------------------------------------------------------------------------------------------------------------------익종 [翼宗]1809년(순조 9)

1830년(순조 30)??※ 1809(순조 9)∼1830(순조 30). 조선 후기의 추존왕.  문조. 효명세자.이름은 영(? : 원래의 음은 대이나 영으로 부르도록 정하였음.),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 제23대왕인 순조의 세자(世子)로 어머니는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로 조순(祖淳)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趙萬永)의 딸인 풍양조씨(豊壤趙氏)를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인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의 구현에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자빈인 조씨 일족들이 그 뒤 대거 진출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 일파와의 정치적 세력투쟁이 시작되어 정국을 혼란상태로 이끌어갔고, 이와 같은 사실은 지배층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켜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민생을 도탄상태에 몰아넣고 말았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왕으로 추존되어 익종이라 하였다.

묘호는 문호(文祜),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수릉(綏陵)이며, 시호는 효명(孝明)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익종 [翼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스토리가 있는 조선왕릉 테마 기행(추존테마), 추존황제 문조와 신정왕후 수릉.?       출처- 두산백과 1800년 2월 26일(정조 24년), 정조는 관상감 제조 이만수(李晩秀), 예조참판 이노춘(李魯春)에게 국복(國卜, 왕실 역술가)인 김해담(金海淡)을 데리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국복에게 묻기를, "오늘 간택한 처자들의 사주(四柱)에 대해 묻는 것이니 그대들은 상세하게 아뢰라. 기유년 5월 15일 유시(酉時)면 사주가 어떤가?" 하니, 해담이 아뢰기를, "그 사주는 기유·경오·신미·정유이온데 바로 대길 대귀 격입니다.

이 사주를 가지고 이러한 지위에 있게 되면 수와 귀를 겸하고 복록도 끝이 없으며 백자천손을 둘 사주여서 다시 평할 것이 없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김조순 가문에 대해 처음에 별 마음을 두지 않았었는데 현륭원 참배를 하던 날 밤에 꿈이 너무 좋아 마치 직접 나를 대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 같았었다.

오늘 간택 때도 그가 들어왔을 때 보니 얼굴에는 복이 가득하고 행동거지도 타고나, 궁중 사람들 모두가 관심이 쏠렸으며, 어머니도 한 번 보시고는 첫눈에 좋아하셨다.

종묘사직의 끝없는 복이 오늘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정조는 며느리를 간택하기 위해 신미일주인 순원왕후의 사주를 국복(왕실역술가)에 직접 묻는다.

정조가 마음 속으로 찍었던지, 아니면 10살된 아들(순조)를 맡길 사람이 김조순밖에 없다고 판단했던지, 정조는 순원왕후 사주만 꼭 집어서 물어본다.

  이런 상황에서 나쁘게 사주풀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실록에 나와있는 사주풀이대로  순원왕후는 순조의 비, 왕비가 되었다.

이후 안동 김씨의 핵심 인물로 20여 년간 수렴청정을 두 번이나 한 여성 최고 권력자로, 69살로 장수하였다.

부와 귀, 장수를 누렸다.

정조 며느리 순원왕후의 사주이다(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사주이다). 순원왕후는 신미일주이며 정화가 있는 사주이다.

따라서 외모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다운 그녀의 사주”와 "신미일주" 란 포스팅에서도 올렸지만 정화, 병화, 신금 일간에 병, 신, 정, 계가 함께 있으면 미인이 많다.

또한 무진, 경술 등 홍염살, 괴강살이 겹쳐있으면 미인일 경우가 높다.

순원왕후 사주는 편관격에 비겁과 편관, 편인으로만 이루어진 사주다.

단아하고 냉철하면서도 과감하게 치고 나가는 성격으로 경쟁이나 승부욕 등도 강했을 것이다.

 주변에 협력자를 만들고 관리하고 다스리는 정치력 역시 강했을 것이다.

 순원왕후의 글씨는 지금도 한글 교본으로 쓰일 정도로 단아하고 반듯하고 유려하다.

글씨를 보아도 성격이 단아하고 냉철 과감했을 것이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순원왕후의 묘(인릉, 순조와 합장)과 단아하고 유려한 순원왕후 한글 문서 순원왕후 사주에는 식상과 재성이 전혀 없다.

따라서 정책이나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경제관념을 가지고 아이디어를 현실화하여 차분하게 마무리는 못 했을 것이다.

식상이 없어 아래 사람에게 따뜻하게 챙기거나 베푸는 성품도 아니다.

자식운은 좋지 못했다.

아들과 딸이 일찍 죽고, 손주와 증손자(양자)의 수렴청정을 했고, 미약하지만 독수공방하는 과숙살도 있다.

60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민초에게 고통스러운 시기였고, 홍경래의 난 등 민란이 빈번했다.

 고달픈 민중의 삶, 그 이면에는 순원왕후의 사주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아이디어도 경제관념도 없고, 아래 사람을 관리도 베풀지도 못하는 권력자가 20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했으니 말이다.

  1) 사주로 미인을 찾아내려면? http://blog.naver.com/develop-your-life/2206058093532) 신미일주 사주가 궁금하면? http://blog.naver.com/develop-your-life/220753746130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시호는 정희(貞熹), 생전의 존호는 자성(慈聖)이다.

세종(世宗) 때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낸 윤번(尹?)의 딸이며, 1418년(태종 18) 당시 청주판관(淸州判官)으로 근무하던 부친의 근무지인 홍천(洪川) 관아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지낸 이문화(李文和)의 딸인 인천 이씨(仁川李氏)이다.

1428년(세종 10)세조(世祖)와 결혼하여 의경세자(懿敬世子, 덕종)와 예종(睿宗),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 1녀를 낳았다.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성격이 강하여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 미리 정보가 누설되어 거병을 망설이는세조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내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계유년에세조께서 기회를 잡아 정난하였으며, 태후도 계책을 같이 해서 임금을 도와 큰 일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1455년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457년(세조 3)에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존호를 받았다.

1468년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자성왕태비(慈聖王太妃)의 존호를 받았다.

1469년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죽자 정희왕후는 당시 4살이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 1466

1525)을 대신해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잘산군(?山君) 이혈(李?)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새로 왕위에 오른성종(成宗)도 당시 13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대왕대비(大王大妃)로서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정희왕후의수렴청정은 1469년부터 1476년(성종 7) 2월 8일(음력 1월 13일)까지 약 8년 동안 이루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조정은 비교적 평안히 유지되었다.

1482년(성종 13)에 경복궁(景福宮)으로 거처를 옮긴 정희왕후는 건강이 악화되자 이듬해 봄에 치료를 위해 온양(溫陽)으로 떠났다.

 하지만 1483년 5월 6일(음력 3월 30일)에 온양에서 사망해 남양주(南楊州)의 광릉(光陵)에 매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희왕후 [貞熹王后] (두산백과) ------------------------------------------------------------------------------------------------------------------------------------☆ 문정왕후 [文定王后] (1501

1565)※ 조선시대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繼妃). 명종의 어머니. 명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였다.

 남동생 윤원형이 권력을 쥐고 대윤이라고 하는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숭유배불을 무시, 불교중흥을 도모했다.

본관은 파평(坡平), 성은 윤(尹),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며 명종의 어머니이다.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죽고 12살에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숭유배불(崇儒排佛)을 무시하고 불교중흥을 도모하였다.

승려보우를봉은사(奉恩寺)주지로 임명하고봉은사 근처(정릉)로 중종의 능을 이장(移葬)시켰다.

 이는 문정왕후가 자신이 죽은 뒤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함이었으나 정릉의 지대가 낮아 해마다 재실까지 물이 차는 상태에서 보토(補土)하기에 많은 비용이 들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53년(명종 8) 명종에게 친정(親政)을 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윤원형과 협력하여 정사에 계속 관여하였다.

소생으로는 명종 이외에 의혜(懿惠)·효순(孝順)·경현(敬顯)·인순(仁順) 공주 등 1남 4녀를 두었다.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孔陵洞)의 태릉(泰陵)이다.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 사적 제201호.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의 능.[네이버 지식백과] 문정왕후 [文定王后] (두산백과)-------------------------------------------------------------------------------------------------------------------------------------------- ☆ 인순왕후 [仁順王后] (1532

1575)※ 조선 제13대 명종의 비(妃).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성은 심씨(沈氏)이다.

 시호 선열(宣烈). 1532년 (중종27) 5월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과 전주 이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12세때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인종이 죽은 후 1545년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시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으로 명종과 인순왕후는 허수아비였으며  윤원형 등의 외척세력이 득세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하자 백정출신 임꺽정이 의적행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551년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3세에 죽고 말았다.

후궁들에게서도 후사가 없자 인순왕후는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군의 3째 아들 하성군(선조)를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즉위켜 하였다.

 선조 즉위 후 잠시수렴청정을 하였으나 곧 청정을 철회하였다.

1569년(선조 2) 의성(懿聖)의 존호(尊號)가 진상(進上)되었다.

1575년 1월 44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승하하여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강릉(康陵)에 명종과 나란히 묻혀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순왕후 [仁順王后] (두산백과)----------------------------------------------------------------------------------------------------------------------------------------☆ 정순왕후 [貞純王后] ( 1745

1805)※ 조선 제21대 영조의 계비.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 수령 등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다.

본관 경주(慶州). 성 김(金).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의 딸. 정식 칭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소숙정헌정순왕후김씨(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王后金氏)이며, 정순이 시호이다.

영조비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자 1759년(영조 35) 15세로 51세 연상인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친정이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음에 비해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 그 내외가 어머니뻘인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 데서 빚어지는 갈등 때문에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오빠김구주(金龜柱)가 이끄는 세력이 영조 말년에 사도세자의 장인인홍봉한(洪鳳漢) 중심세력과 맞서고, 친정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벽파(僻派)가 정조대에 시파(時派)와 대립하는 데 중요한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는데, 스스로 여자국왕[女主 ·女君]을 칭하고 신하들도 그의 신하임을 공언하는 등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때 정조의 이복동생은언군 인(恩彦君 ?)과 정조의 친모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 등은 처형되었다.

다음해에는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정약용(丁若鏞) 등의 남인(南人)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친정인물인 김관주(金觀柱) ·김일주(金日柱) ·김용주(金龍柱) 및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등이 뒷받침하였다.

일반 국정에서는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수령으로 이어지는 통치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시파 김조순(金祖淳)이 벽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결정대로 딸을 순조(純祖)의 비로 들여 국왕의 장인이 된 상황에서 1803년 12월에 수렴청정을 그치게 되자, 정세가 바뀌어 벽파가 조정에서 숙청되고 친정인물들도 대부분 도태되었다.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정순왕후 생가 -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音岩面) 유계리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순왕후 [貞純王后] (두산백과)-----------------------------------------------------------------------------------------------------------------------------------------------순원왕후 [純元王后](1789

1857)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1789년 6월 8일/음력 5월 15일

1857년 9월 21일/음력 8월 4일)는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정비(正妃)이자 문조(효명세자, 文祖)의 어머니이며 헌종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정식시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예성홍정순원왕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王后)이며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씨(靑陽府夫人 沈氏) 사이에서 태어났다생애1789년 6월 8일(음력 5월 15일)에 태어났다.

 시파 계열이자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아버지 김조순의 영향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순조의 유력한 세자빈으로 떠올랐고 초간택과 재간택을 거쳐 사실상 세자빈으로 확정되었으나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최종적인 삼간택이 미루어졌고 결국 순조의 즉위 2년 뒤인 180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05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순조의 장인이자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은 김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의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고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등의 안동 김씨 시파를 등용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대규모 숙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순원왕후는 1809년에 맏아들인 효명세자를 낳았는데 효명세자는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순조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당시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819년, 풍양 조씨인 조만영의 딸을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는데 훗날의 신정왕후이다.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는데 이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세자는 현재(賢材)를 등용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으나 1830년, 대리청정 4년 만에 갑작스럽게 급서하였고 1834년에는 순조마저 승하하자 당시 8세였던 왕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순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헌종의 왕비를 자신의 친척인 김조근의 딸로 맞아들였으니, 이가 헌종의 정비인 효현왕후이다.

순원왕후어필봉서.그러나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녀는 친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결탁하여 장헌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원범(元範)을 강화도에서 궁으로 데려와 덕완군(德完君)으로 책봉하고 자신과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시키니 조선의 제25대 왕인 철종이다.

철종을 즉위시킨 뒤에도 그녀는 철종의 왕비를 다시금 안동 김씨인 김문근의 딸(철인왕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이어나갔으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1857년 9월 21일(음력 8월 4일),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69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위치한 인릉(仁陵)으로 남편인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이후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년)에 남편 순조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추존되자 그녀도 함께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되었고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에는 '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皇帝 仁陵 純元肅皇后 ?左)'라는 묘비가 새로 세워졌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33통의 편지로 구성된 《순원왕후어필봉서》(純元王后御筆封書)가 있는데 가문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당대 정치에 대한 관심 등을 표현하였고 글씨도 우아한 궁체(宮體)로 되어 19세기 한글 편지의 특징과 언어, 서체 이해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가족관계조부 : 서흥부사 증 영의정김이중(瑞興府使 贈 領議政 金履中, 1736

1793)조모 : 부사 신사적(牧使 申思迪, 1683

?)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아버지 : 영안부원군 충문공 김조순(永安府院君 忠文公 金祖淳, 1765

1832)외조부 : 증 좌찬성 심건지(贈 左贊成 沈健之, 1733

?)외조모 : 현감 이윤언(縣監 李胤彦, 1686

?)의 딸 전주 이씨(全州 李氏)어머니 :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靑陽府夫人 靑松 沈氏, 1766

1828)오빠 : 영돈녕판사 김유근(領敦寧判事 金?根, 1785

1840)오빠 : 증 이조판서 김원근(贈 吏曹判書 金元根1786

1832)동생 : 영돈녕부사 충익공 김좌근(領敦寧府事 忠翼公 金左根, 1797

1869)시아버지 : 제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1752

1800)시어머니 : 효의선황후 김씨(孝懿宣皇后 金氏, 1753

1821)서시어머니 : 의비 성씨(宜嬪 成氏, 1753

1786)시아주버니 :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

1786)생시어머니 : 현목수빈 박씨(顯穆綏嬪 朴氏, 1770

1822)남편 : 제23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

1834)장남 : 추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1809

1830)며느리 : 신정익황후 조씨(神貞翼皇后 趙氏, 1808

1890)손자 : 제24대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1827

1849)차남 : 대군(요절)장녀 :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

1832)부마 : 안동인 김한순(金漢淳)의 아들 동녕위 김현근(東寧尉 金賢根 ?

1868)차녀 :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

1832)부마 : 안동인 김연근(金淵根)의 아들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3녀 :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

1844)부마 : 해평인 윤치승(尹致承)의 아들 남녕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양자 : 제25대 철종정황제(哲宗章皇帝, 1831

1864)며느리 : 철인장황후 김씨(哲仁章皇后 金氏, 1837

1878)출처- 위키백과--------------------------------------------------------------------------------------------------------------------------------------------------- ☆ 신정왕후 [神貞王后] (1808

1890)※ 조선 익종의 비. 1819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 대왕대비로 진봉되었다.

본관 풍양(豊壤). 성 조씨(趙氏).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만영(萬永)의 딸. 1819년(순조 19) 세자빈에 책봉되고,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철종 8) 대왕대비로 진봉되었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고종)을 즉위하게 하여 대왕대비로서수렴청정하였고, 흥선대원군에게 정책결정권을 주어대원군의 집정을 이루게 하였다.

 1873년(고종 10)까지 효유(孝裕) ·헌성(獻聖) ·선경(宣敬) ·정인(正仁)의 존호와 대왕대비에 진호되어 자혜(慈惠) ·홍덕(弘德) ·순화(純化) ·문광(文光) ·원성(元成) ·숙렬(肅烈) ·명수(明粹) ·협천(協天) 등의 존호를 받았다.

 능은 수릉(綏陵)으로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정왕후 [神貞王后] (두산백과)------------------------------------------------------------------------------------------------------------------------익종 [翼宗]1809년(순조 9)

1830년(순조 30)??※ 1809(순조 9)∼1830(순조 30). 조선 후기의 추존왕.  문조. 효명세자.이름은 영(? : 원래의 음은 대이나 영으로 부르도록 정하였음.),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 제23대왕인 순조의 세자(世子)로 어머니는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로 조순(祖淳)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趙萬永)의 딸인 풍양조씨(豊壤趙氏)를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인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어진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백성을 위하는 정책의 구현에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자빈인 조씨 일족들이 그 뒤 대거 진출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 일파와의 정치적 세력투쟁이 시작되어 정국을 혼란상태로 이끌어갔고, 이와 같은 사실은 지배층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켜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민생을 도탄상태에 몰아넣고 말았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왕으로 추존되어 익종이라 하였다.

묘호는 문호(文祜),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수릉(綏陵)이며, 시호는 효명(孝明)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익종 [翼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스토리가 있는 조선왕릉 테마 기행(추존테마), 추존황제 문조와 신정왕후 수릉.?       출처- 두산백과 암행어사 파견,《만기요람》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출생-사망1790

1834재위기간1800년

1834년가족관계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아버지 정조(正祖), 어머니 수빈박씨(綏嬪朴氏), 인릉이름 공(?). 자 공보(公寶). 호 순재(純齋).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尊號)가 바쳐져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영조비정순왕후(貞純王后)의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경주김씨김관주(金觀柱)와심환지(沈煥之) 등의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 후로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재위 8년 이후로 정승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래 강화되어 왔고영조 ·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꺾이지 않은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건강을 상한데다가,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

그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른바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1827년에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대로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태도와 권한이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세실(世室)로 모셔졌으며, 저술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묶여진 데 더하여 문집으로 《순재고(純齋稿)》도 있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인릉(仁陵)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조 [純祖] (두산백과)----------------------------------------------------------------------------------------------------19세기 조선의 정치를 규정하는 용어는 ‘세도정치’였다.

그것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수렴청정’이었다.

잘 알듯이 수렴청정은 국왕이 어릴 경우 대비가 일정 기간 동안 정무를 대신 처리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비의 가문, 즉 외척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는 소지를 본원적으로 안고 있는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수렴청정은 모두 7차례 시행되었는데, 19세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성종 때 세조비 정희왕후(7년), 명종 때 중종비 문정왕후(8년), 선조 때 명종비 인순왕후(8개월), 순조 때 영조비 정순왕후(4년), 헌종·철종 때 순조비 순원왕후(각 7년, 3년), 고종 때 익종비 신정왕후(4년)).조선 말기에 세도정치가 만연한 것은 그 시기에 수렴청정이 특히 자주 시행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두 제도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당시의 정치를 장악했다.

제23대 국왕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씨(본관 안동)는 68세의 긴 생애 동안 두 번의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특별한 경력을 남겼다.

그녀의 청정은 친정인 안동 김씨가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화려한 가문적 배경

순원왕후는 1789년(정조 13) 5월 15일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

1832)과 청송 심씨(정랑(正郞) 심건지(沈健之)의 딸)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었지만(1800년(정조 24) 2월 26일 초간택, 윤4월 9일 재간택)그 직후에 정조가 승하(6월 28일)하는 바람에 순조가 즉위한 뒤 바로 왕비에 책봉되었다(1802년(순조 2) 10월 13일).순조 초기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

1805) 김씨(본관 경주)였다.

그 때 그녀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정국을 장악했다.

그 권력의 크기는 스스로 ‘여주(女主)’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1800년 7월 20일). 정순왕후는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2년 뒤 승하했다(1805년 1월).그 공백을 메운 것은 그러나 국왕이 아니라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그 첫 인물은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이었다.

그의 가계는 대단히 화려해서, 김상헌(金尙憲. 좌의정. 7대조)부터 시작해서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5대조)·김창집(金昌集. 고조. 영의정이자 노론 4대신)·김제겸(金濟謙. 증조. 예조참의)에 이르는 선조들은 서인(노론)의 가장 굵은 줄기를 이뤘다.

조부(추증 좌찬성 김달행(金達行))와 부친(서흥(瑞興)부사 김이중(金履中))은 고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김조순의 정계 진출을 계기로 그런 침체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때 안동 김씨는 순원왕후를 비롯해 헌종비 효현(孝顯)왕후와 철종비 철인(哲仁)왕후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효현·철인왕후는 각각 김조근(金祖根)과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는데, 김조근은 김조순과 7촌간이고 김문근(金汶根)과는 8촌간이었다.

뒤에서 보듯이 이런 국혼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결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안동 김씨의 세력을 크게 팽창시켰다.

행복과 불행의 교차

순원왕후의 왕실 생활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녀는 가례를 올린 지 7년 만인 20세 때 효명(孝明)세자(1809년(순조 9) 8월 9일)를 낳았고, 그 뒤에도 명온(明溫. 1810년 10월)·복온(福溫. 1818년 10월)·덕온(德溫. 1822년 6월)공주를 계속 순산했다.

대군을 낳았다가(1820년 2월) 석 달 만에 사망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다복한 생활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40대 이후 개인적 슬픔이 연이어 닥쳤다.

1827년(순조 27) 2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했지만 3년 뒤 세상을 떠났으며(1830년 5월), 2년 뒤에는 명온·복온공주가 거의 동시에 사망했다(1832년 6월과 5월). 2년 뒤에는 순조도 승하했고(1834년 11월), 막내 덕온공주도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1844년 5월). 그러니까 순원왕후는 남편과 자녀가 모두 자신보다 일찍 사망하는 깊은 인간적 슬픔을 겪은 것이다.

맏아들과 지아비를 잃었을 때 왕후의 나이는 45세였다.

두번의 수렴청정 ??순원왕후의 한글편지. 19세기 중엽의 세도정치와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국어사적으로도 귀중한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순원왕후는 그 뒤에도 20여 년을 더 살면서 두 번에 걸쳐 10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 청정은 1834년 11월 18일 헌종이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해 7년 동안 시행되었다(1840년(헌종 6) 12월).두 번째 청정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 헌종이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61세의 대왕대비는 그날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25대 왕 철종으로 등극시킨 뒤 3년 동안 청정했다(1851년).왕후의 청정은 몇 가지 특징과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우선 그녀는 정치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신하들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려고 했다.

그 까닭은, 스스로의 신중한 판단과 처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는 물론 그들과 가까운 인물들이 이미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봉조하 남공철(南公轍), 영중추부사 이상황(李相璜), 영의정 심상규(沈象奎)는 김조순의 오랜 지기였고, 김유근(金?根. 판중추부사)·김난순(金蘭淳. 우참찬)·김이재(金履載. 이조판서) 등 안동 김씨의 중심 인물은 요직을 맡아 활발히 움직였다.

다음으로 왕후는 세도정치의 여파 속에서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효명세자를 추숭(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을 칭호를 내림)하고 종묘를 확장해 순조와 익종을 세실(世室- 종묘의 정전(正殿)에 안치한 신위)로 모신 것은 그런 주요한 시책이다.

종묘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이때였다.

아울러 그녀는 안동 김씨 출신이었지만, 외척 가문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된다.

예컨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유근과 조만영을 어영대장과 호위대장에 번갈아 임명해 군권의 편중을 막았고, 이조판서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출신을 교대로 제수했다.

왕후가 수렴청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현안은 민생이었다.

왕후는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조세를 탕감해 주고, 다른 지방의 곡식을 이용해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움)했으며, 부족한 재정은 내탕(內帑- 왕실 재정)으로 해결했다.

수령의 탐학을 적발하지 않는 대신은 강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그녀가 일원이었던 세도정치에 있었다.

그런 구조적 폐단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시책은 부분적인 효과밖에 거둘 수 없었다.

순원왕후는 1850년(철종 1) 국모로 임어(臨御)한 지 50년이 되었고, 그 한 해 뒤 두 번째 수렴청정을 끝내고 물러났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68세로 승하한 왕후는 지금 인릉(仁陵.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에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10년에 걸친 두 번의 수렴청정이라는 이례적 기록상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순원왕후는 적지 않은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 자취가 담겨 있는 주목할 만한 자료는 한글 편지다.

규장각에 57점을 비롯해 여러 개인들도 소장하고 있는 그 편지는 당시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국어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글-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그림-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서울 인릉 -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이다.

?  순원왕후 김씨의 한글 서체?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암행어사 파견,《만기요람》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출생-사망1790

1834재위기간1800년

1834년가족관계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아버지 정조(正祖), 어머니 수빈박씨(綏嬪朴氏), 인릉이름 공(?). 자 공보(公寶). 호 순재(純齋).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尊號)가 바쳐져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영조비정순왕후(貞純王后)의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경주김씨김관주(金觀柱)와심환지(沈煥之) 등의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 후로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재위 8년 이후로 정승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래 강화되어 왔고영조 ·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꺾이지 않은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건강을 상한데다가,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

그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른바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1827년에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대로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태도와 권한이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세실(世室)로 모셔졌으며, 저술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묶여진 데 더하여 문집으로 《순재고(純齋稿)》도 있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인릉(仁陵)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조 [純祖] (두산백과)----------------------------------------------------------------------------------------------------19세기 조선의 정치를 규정하는 용어는 ‘세도정치’였다.

그것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수렴청정’이었다.

잘 알듯이 수렴청정은 국왕이 어릴 경우 대비가 일정 기간 동안 정무를 대신 처리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비의 가문, 즉 외척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는 소지를 본원적으로 안고 있는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수렴청정은 모두 7차례 시행되었는데, 19세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성종 때 세조비 정희왕후(7년), 명종 때 중종비 문정왕후(8년), 선조 때 명종비 인순왕후(8개월), 순조 때 영조비 정순왕후(4년), 헌종·철종 때 순조비 순원왕후(각 7년, 3년), 고종 때 익종비 신정왕후(4년)).조선 말기에 세도정치가 만연한 것은 그 시기에 수렴청정이 특히 자주 시행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두 제도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당시의 정치를 장악했다.

제23대 국왕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씨(본관 안동)는 68세의 긴 생애 동안 두 번의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특별한 경력을 남겼다.

그녀의 청정은 친정인 안동 김씨가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화려한 가문적 배경

순원왕후는 1789년(정조 13) 5월 15일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

1832)과 청송 심씨(정랑(正郞) 심건지(沈健之)의 딸)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었지만(1800년(정조 24) 2월 26일 초간택, 윤4월 9일 재간택)그 직후에 정조가 승하(6월 28일)하는 바람에 순조가 즉위한 뒤 바로 왕비에 책봉되었다(1802년(순조 2) 10월 13일).순조 초기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

1805) 김씨(본관 경주)였다.

그 때 그녀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정국을 장악했다.

그 권력의 크기는 스스로 ‘여주(女主)’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1800년 7월 20일). 정순왕후는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2년 뒤 승하했다(1805년 1월).그 공백을 메운 것은 그러나 국왕이 아니라 안동 김씨 세력이었다.

그 첫 인물은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이었다.

그의 가계는 대단히 화려해서, 김상헌(金尙憲. 좌의정. 7대조)부터 시작해서 김수항(金壽恒. 우의정. 5대조)·김창집(金昌集. 고조. 영의정이자 노론 4대신)·김제겸(金濟謙. 증조. 예조참의)에 이르는 선조들은 서인(노론)의 가장 굵은 줄기를 이뤘다.

조부(추증 좌찬성 김달행(金達行))와 부친(서흥(瑞興)부사 김이중(金履中))은 고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김조순의 정계 진출을 계기로 그런 침체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때 안동 김씨는 순원왕후를 비롯해 헌종비 효현(孝顯)왕후와 철종비 철인(哲仁)왕후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효현·철인왕후는 각각 김조근(金祖根)과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는데, 김조근은 김조순과 7촌간이고 김문근(金汶根)과는 8촌간이었다.

뒤에서 보듯이 이런 국혼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결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안동 김씨의 세력을 크게 팽창시켰다.

행복과 불행의 교차

순원왕후의 왕실 생활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녀는 가례를 올린 지 7년 만인 20세 때 효명(孝明)세자(1809년(순조 9) 8월 9일)를 낳았고, 그 뒤에도 명온(明溫. 1810년 10월)·복온(福溫. 1818년 10월)·덕온(德溫. 1822년 6월)공주를 계속 순산했다.

대군을 낳았다가(1820년 2월) 석 달 만에 사망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다복한 생활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40대 이후 개인적 슬픔이 연이어 닥쳤다.

1827년(순조 27) 2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했지만 3년 뒤 세상을 떠났으며(1830년 5월), 2년 뒤에는 명온·복온공주가 거의 동시에 사망했다(1832년 6월과 5월). 2년 뒤에는 순조도 승하했고(1834년 11월), 막내 덕온공주도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1844년 5월). 그러니까 순원왕후는 남편과 자녀가 모두 자신보다 일찍 사망하는 깊은 인간적 슬픔을 겪은 것이다.

맏아들과 지아비를 잃었을 때 왕후의 나이는 45세였다.

두번의 수렴청정 ??순원왕후의 한글편지. 19세기 중엽의 세도정치와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국어사적으로도 귀중한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순원왕후는 그 뒤에도 20여 년을 더 살면서 두 번에 걸쳐 10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 청정은 1834년 11월 18일 헌종이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해 7년 동안 시행되었다(1840년(헌종 6) 12월).두 번째 청정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 헌종이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61세의 대왕대비는 그날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25대 왕 철종으로 등극시킨 뒤 3년 동안 청정했다(1851년).왕후의 청정은 몇 가지 특징과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우선 그녀는 정치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신하들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려고 했다.

그 까닭은, 스스로의 신중한 판단과 처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는 물론 그들과 가까운 인물들이 이미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봉조하 남공철(南公轍), 영중추부사 이상황(李相璜), 영의정 심상규(沈象奎)는 김조순의 오랜 지기였고, 김유근(金?根. 판중추부사)·김난순(金蘭淳. 우참찬)·김이재(金履載. 이조판서) 등 안동 김씨의 중심 인물은 요직을 맡아 활발히 움직였다.

다음으로 왕후는 세도정치의 여파 속에서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효명세자를 추숭(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을 칭호를 내림)하고 종묘를 확장해 순조와 익종을 세실(世室- 종묘의 정전(正殿)에 안치한 신위)로 모신 것은 그런 주요한 시책이다.

종묘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이때였다.

아울러 그녀는 안동 김씨 출신이었지만, 외척 가문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된다.

예컨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유근과 조만영을 어영대장과 호위대장에 번갈아 임명해 군권의 편중을 막았고, 이조판서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출신을 교대로 제수했다.

왕후가 수렴청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현안은 민생이었다.

왕후는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조세를 탕감해 주고, 다른 지방의 곡식을 이용해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움)했으며, 부족한 재정은 내탕(內帑- 왕실 재정)으로 해결했다.

수령의 탐학을 적발하지 않는 대신은 강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그녀가 일원이었던 세도정치에 있었다.

그런 구조적 폐단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시책은 부분적인 효과밖에 거둘 수 없었다.

순원왕후는 1850년(철종 1) 국모로 임어(臨御)한 지 50년이 되었고, 그 한 해 뒤 두 번째 수렴청정을 끝내고 물러났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68세로 승하한 왕후는 지금 인릉(仁陵.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에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10년에 걸친 두 번의 수렴청정이라는 이례적 기록상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순원왕후는 적지 않은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 자취가 담겨 있는 주목할 만한 자료는 한글 편지다.

규장각에 57점을 비롯해 여러 개인들도 소장하고 있는 그 편지는 당시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국어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글-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그림-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서울 인릉 -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이다.

?  순원왕후 김씨의 한글 서체?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드라마 전체 감상평과는 달리 왜 그땐 보관 안하다가 이제와서 옮겼냐면...죽어가는 블로그 살릴겸?참고로 다른 카페에 그대로 올렸습니다.

제가 쓴 글이니 제 블로그에 옮겨도 문제없을것 같아서.===========================================================================================================================(드라마 버전 팬아트. 상상도. 드라마의 배경이 청나라라서 의상도 그에 맞춰 치파오로 그리셨다.

근데 분위기가 보보경심스러운건 좀..)?? (코믹스 버전인 <견환전 서화열>에 나오는 순원황후. 이 여자의 얼굴이 어떻게든 등장하는 매체는 만화가 유일하다고. 참고로 만화책은 드라마보단 원작에 맞춰서 진행되는데, 그래서 의상도 한족풍이다.

원작의 배경이 가상의 한족국가이기 때문.)> 숨기기 └ 접기 > 참고로 순원황후가 못하는 것. └ 접기 ====================================================================================================================== 사실 진짜 쓰고싶은건 화비나 의수 등 본편시점에서 등장한 인물들 분석하거나, 아님 제 생각에 모티브가 된걸로 보이는 실존인물들에 대해 정리하는건데(특히 후자!) 요즘 주말에도 컴퓨터 오래 하기가 힘들어서 그건 무기한 보류합니다ㅠ 순원황후 인물분석부터 쓴 가장 큰 이유가, 캡처나 자료조사를 따로 할 필요가 없는데다 전에 써둔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어서 후딱 쓸 수 있어서일 정도니..*이미지 출처는 둘 다 엔하위키 미러.*야심침의 출처에 대해서는 블로그에 링크스크랩을 해놨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공유하기 링크
TAG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