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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주



”은사인 금오 스님(1896∼1968·사진)은 마음밭의 이치를 이렇게 밝혔다.

금오(金烏)는 법호, 태전(太田)이 법명이다.

16세 때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서 도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충남 예산 보덕사의 보월 스님 곁에서 정진했다.

보월 스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만공 스님(1871∼1946)에게서 보월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제자임을 증명 받았다.

1954년 전국 비구승대회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돼 정화불사의 선봉이 됐고 종단의 부종정과 총무원장을 지냈다.

나는 1954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은사의 성품은 불같았다.

하도 엄한 데다 금산사, 화엄사 주지를 지내 ‘지리산 호랑이’로 불렸다.

지금도 은사를 생각하면 부리부리한 달마상이 떠오른다.

나의 사형 탄성 스님은 소문난 ‘효(孝)상좌’였다.

어느 날 사형이 솥을 놓는데, 은사가 “여기 놓아라, 저기 놓아라” 하며 수차례 말을 바꿨다.

그러다 은사는 사형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던지 그 자리에서 따귀를 때렸다.

이른바 솥을 아홉 차례나 옮겨 걸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구정(九鼎) 선사의 일화를 연상시키는 가르침이었다.

은사는 수행 잘하는 제자에게는 더 엄했다.

출가 초기 은사가 화엄사 주지로 있을 때 나는 교무 일을 보고 있었다.

실내에서는 삼배(三拜), 밖에서 마주치면 90도 각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게 예법이다.

무릎을 구부려 더욱 낮은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어느 날 내가 인사를 했더니, 은사는 “숙여라, 깊이 숙여라, 더 숙여라”고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다시 “네놈 전생에 아만(我慢·스스로 높은 척하는 교만)이 있어, 그걸 버리라”고 했다.

살면서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만을 버리는 것은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이다.

하심 없이 어찌 남을 설득하고, 종단을 개혁하고, 세상에서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굴곡이 많은 종단 개혁 과정에서 나를 원칙주의자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하심을 잊은 적이 없다.

은사의 하심에 대한 욕구는 너무나 강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행을 위해 거지들의 무리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첫째 어느 밥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다, 둘째 옷이 떨어져 살이 나와도 탓하지 않는다, 셋째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을 잔다고 결심했다.

움막을 짓고 2년간 거지 행세를 하며 수행해 ‘움막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훗날 은사는 “인간생활의 기본인 의식주에 매이지 않고 수행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당대의 선지식(善知識)인 수월 스님을 찾아 만주로 갔다가 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던 은사는 제자들의 교육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월산·범행·월남·탄성·이두·혜정·월성·월주·월서·월만·월탄 등 제자가 49명에 이른다.

손자상좌까지 합하면 600명이 넘는다.

특히 ‘월’ 자를 딴 제자가 많아 불교계에서는 ‘월자문중(月字門中)’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은사는 참선 공부를 소홀히 하는 제자에게 엄해 “나를 알려고 중노릇을 하는데 참선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다”며 크게 야단을 쳤다.

어느 날 용맹정진 기간에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는 한 제자를 불러 “네 이놈, 다음 생에 짐승이 되려고 수마에게 지느냐. 그러려면 차라리 목숨을 버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내가 깊은 산속에만 머물지 않고 종단 개혁과 비정부기구(NGO)를 통한 사회활동에 뛰어든 것은 은사의 영향이 적지 않다.

다만, ‘참선하라’ ‘계행(戒行)을 지켜라’ ‘보살행을 실천하라’라는 은사의 가르침은 내게 각각의 셋이 아니라 하나였다.

동아일보DB “성불(成佛)을 한 생 늦추더라도 중생을 건지겠다.

다시 생을 받아도 이 길을 다시 걷겠다.

육신은 죽어도 법신(法身)은 살아있다.

”비구승과 대처승의 대립 속에 불교 정화 운동을 이끌면서 대한불교 조계종의 기틀을 잡은 청담(靑潭) 스님(1902∼1971)의 말이다.

청담은 법호이며 순호(淳浩)가 법명이다.

25세 때인 1926년 경남 고성군 옥천사로 출가한 스님은 박한영 스님과 만공 스님을 사사했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회의장, 장로원장, 종정을 지냈으며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입적했다.

나는 1950년대 중반 조계사와 선학원에서 스님을 만난 뒤 총무원 간부로 정화운동을 도우면서 오랜 시간 곁에서 스님을 지켜봤다.

참고 인내한다는 의미의 ‘인욕제일(忍辱第一) 이청담’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음은 나의 사형인 탄성 스님의 말이다.

“비구 수백 명이 정화를 촉구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있던 경무대로 몰려갔다.

그러나 경찰의 봉쇄로 가지 못했고 조계사로 돌아왔다.

서로 화가 나서 책임을 묻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젊은 비구가 통솔을 잘못했다며 대뜸 청담 스님의 뺨을 때렸다.

그런데 청담 스님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종정이던 동산 스님이 대처승 측과의 협상에 불만을 표시하며 청담 스님에게 “네 이놈, (넌) 대처승 편”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변명도 없었고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나중에 동산 스님은 “내가 성질이 급해 그랬네” 하며 미안함을 표했다.

청담 스님은 정화운동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나의 은사 금오 스님을 비롯해 동산, 성철 스님 등이 함께 정화운동의 씨앗을 뿌린 뒤 수행과 이런저런 이유로 산속으로 돌아갔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마다하지 않고 끝내 정화의 꽃봉오리를 피운 분이 청담 스님이다.

헌칠한 모습의 스님은 금강경과 능엄경 법문이 특히 뛰어났고, 신바람이 나면 30분의 법문이 세 시간, 네 시간으로 길어졌다.

30대 중반일 때 당대의 대소설가인 춘원 이광수를 만나서는 일주일간 불교사상에 관한 격론을 펼쳐 춘원이 불교에 귀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스님도 20대 초반 출가하려고 했지만 이미 처자가 있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가족사는 스님을 오랫동안 괴롭힌 고질이자 그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고리다.

있는 사실을 감춰 우상화하기보다는 언급해 스님의 뜻과 교훈을 읽는 게 낫겠다.

알려진 대로 스님은 출가 뒤 경남 진주의 속가를 찾았다가 유언이라며 가문의 대를 이어 달라는 노모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다.

지옥에 갈 각오를 하고 하룻밤 파계를 한 스님은 참회를 위해 10년 세월 동안 맨발의 고행을 감행한다.

그후 청담 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가 있다.

오대산에 머물던 스님은 속가로부터 딸을 낳았다는 전보를 받는다.

효도행(孝道行)을 위해 지옥행을 각오한 파계임에도 대를 잇지 못한 스님은 방성대곡하고 땅에 칼을 박아놓고 자결을 시도한다.

이때 오대산 원보산 스님이 ‘그 목숨을 불교를 위해 대신 써 달라’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훗날 청담 스님은 노모를 직지사로 모셔 출가하도록 했다.

하룻밤 파계로 얻은 둘째 딸은 성철 스님의 권유로 출가해 묘엄 스님이 됐다.

1971년 청담 스님 입적 뒤 묘엄 스님이 다시 속가 어머니를 삭발 출가시켜 청담 스님 집안에서 네 식구가 출가했다.

정화운동 초기 대처 쪽에서 청담 스님의 호적등본을 떼어 출가 뒤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정화를 이끄는 수장에 대한 공격으로, 비구 쪽에서는 몹시 난처한 일이었다.

젊은 스님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쌓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젊은 스님들 앞에서 “맞다.

난 파계승이다.

정화가 끝나면 난 뒷방으로 돌아가 참회하며 살겠다”고 선언했다.

순간, 그 자리는 얼어붙은 듯 침묵이 감돌았고 이후 스님들 사이에 시비가 없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다.

당시 청담 스님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당대의 어느 누가 이처럼 솔직하고 파격적일 수 있겠는가.나는 스님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아마 혁명가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철저한 수행과 뛰어난 법문,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인내, 남의 허물을 인정하는 그릇까지 세상을 바꿀 자질을 두루 갖췄다.

불교계의 시각에서 청담 스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큰 복이었다.

2011-11-28 이 마을은 전주- 정읍간 도로에서 산외면 산외교 삼거리에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외교 아래를 흐르는 물을 도원천 혹은 평사천이라고 하는데 그 바로 옆의 삼거리는 완주- 전주, 칠보-정읍시내, 옥정호-임실로 향하는 분기점에 해당한다.

 산외교에서 전주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왼편에 '송월주스님 생가'라고 새겨진 표지판이 보이고 버스승강장이 보인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새로 만들어진 콘크리트제 다리 옆의 낡은 다리를 건너 제방을 따라 조금 달리면 여러 그루의 노거수가 보인다.

이 노거수들 옆에는 제법 넓은 마당(주차 가능)이 조성되어 있고 회관이 증축되고 있으니 이곳 전체가 바로 정량리 당산제가 행해지는 곳이다.

 용줄이 감겨진 곳 옆에는 연자매가 누워 있는데 잘보면 조그맣게 고누판이 새겨져 있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문인석 비슷한 작은 입상도 있고 오른편 나무에는 나뉘어진 큰줄기 사이에 작은 돌들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그루의 나무에는 각각 금줄이 둘려져 있으니 이는 당산제를 지낸 흔적이다.

[송월주] 대체 무엇때문에.


 마을 안쪽으로 진입하면 원정량마을회관이 있고 다시 안으로 쭈욱 올라가면 예전에 그릇을 굽던 산태동이라는 골짜기가 나온다.

논과 밭이 제법 되고 왼편으로 걸어 올라가면 민묘가 있는데 그 바로 앞의 밭에는 그릇파편이 무성하다.

 그곳에서 왼편으로 더 올라가면 아담한 정량제가 있는데 세 마리의 꼬리가 긴 짐승들이 인기척을 듣고 놀라 달아나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물을 마시러 내려온 듯 하지만 그 정체는 알 수가 없다.

마을 뒷편 산골짝에 있는 논들은 이곳 정량제의 물을 받아 벼농사를 짓고 있는 셈이다.

 한편, 정량제 아랫쪽 밭두렁 옆에 좁은 물길을 내어 콘크리트관을 다리겸 수로관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면 농부들의 지혜가 느껴지기도 한다.

 정량제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밭두렁에서 그릇편을 하나 주워 살펴보니 여러개의 태양 문양(혹은 해바라기 문양)이 그릇바닥에 한바퀴 돌아가며 그려진 것이 보인다.

이 그릇편은 제법 수준 높은 그릇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밭에 널려져 있는 그릇편은 흔히 볼 수 있는 약간 푸르스름한 빛깔의 그릇들이다.

빨갛게 불탄 흙덩이들도 여럿 보이고 옹기편도 흔하게 발견된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이 그릇을 굽던 곳임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낡은대로 낡아 무너져 가는 오두막집과 새로 지어진 양옥집이 대비되는 지점을 지나면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는 슬레이트를 얹힌 구조물이 보인다.

이 구조물은 말하자면 산태동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빨래를 하는 이들을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리라.  지난날 이곳에서 웃고 이야기 하며 빨래를 했을 마을여인네들의 모습을 연상하며 오른편 골목으로 접어든다.

마을 안쪽을 지나 노거수가 서있는 洞山을 향해 걸어가다가 조금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하였다.

 한쪽은 흙돌담벽이고 한쪽은 빨간벽돌담벼락인데 삼거리 건너편 담벽은 시멘트블록이다.

그순간흙돌담의 그림자와 햇살은 골목길을 양분하고 있다.

 언덕에 자리한 모정의 이름은 화수정이다.

기둥에는 화수정기문 등이 붙어 있고 모정 마루판에는 여러 개의 고누판이 새겨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마을 입구의 돌판에 새겨진 고누판을 보아도 민속적인 전통이 강한 이 마을 어른들은 꽤나 고누놀이를 즐긴 듯 하다.

 모정 옆에는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이 마을 집성의 하나인 여산송씨 정량문중인들이 만든 '흥학계'에서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석 뒷편으로 올라가면 잘 다듬어진 묘역이 펼쳐져 있다.

볼품이 두드러지는 소나무들이 여럿 서있고 잔디가 매끈한 이곳은 여산송씨 정량문중의 선산이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위치이며 뒷편 저멀리에는 상두산이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는 묵방산, 촛대봉(?) 등이 자리하고 있다.

촛대봉의 봉우리들은 일견 내장산의 써래봉을 닮았고 이곳 묘역의 무덤들은 그 산을 약간 비켜 자리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촛대봉 혹은 써래봉과 송월주 스님을 연결하여 생각하노라니 스님의 생가를 구경하고픈 마음이 급해진다.

 기둥이 굵은 집의 마루에 앉아 계시는 할머님께 스님의 생가를 여쭈니, '이왕이면 확실하게 알려줘야 한다'며 친히 노구를 이끌고 앞장을 서신다.

그리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스님의 생가는 예상대로 흙돌담이 쳐지고 전통성이 엿보이는 옛날풍의 집이다.

 골목 위아래로 두 개의 대문이 있는데 아랫편 대문으로 들어가면 스님의 집 마당이고, 마당에는 작은 비닐하우스와 개장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스님이 태어난 집은 낡았고 잡동사니가 그득하다.

또다른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있으니 이는 큰집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랫쪽 건너편에는 작은 집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집에서 현재 스님의 생가터를 사용하고 있다.

 스님의 생가를 나와 정읍시내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김선생님 댁을 찾아간다.

처음 만나뵌 선생님은 알고보니 나의 9년 고향선배이셨다.

 ㅇㅇㅇ편집위원이 김선생님이 진짜 ㅇㅇㅇ반이라고 했을만치 원칙에 충실하다고 하는 선생님은 고향인 들판을 떠나 산외라 불리우는 산골에 집을 짓고 살고 계신다.

  이 마을 이야기를 잘알고 계시는 선생님의 조언을 구해 기회가 되면 이 마을을 소개하는 글을 써볼 생각이다.

이번 첫 만남을 통해서는 '불당골'이라는 소지명을 당장 얻어 들었는데, 절이 있었다는 곳을 찾아 봐야겠다.

 *송월주 스님: 법호는 太空, 법명은 月珠이다.

아버지 송영조(여산인) 어머니 최종을(전주인)의 5남 4녀 중 다섯째 아들로 1935년 정량리 977번지에서 태어났다.

유교가정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22세에 입산하여 불가에 귀의하여 이후 금산사 주지를 18년간 역임하였다.

재임 중에 금산사 중창불사를 완성하였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과 한국불교종단협의회장을 역임하였다.

스님은 불교 대중화 생활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왔으며 경실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환경운동 등 사회시민운동의 중추적인 대표 지도자로 활동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김개남 동학농민혁명장:정량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고 혼인 후 분가하여 976-1번지에서 살았다.

동학혁명 당시 정량리 청년 수십명이 김개남군에 종군하였다.

김개남은 정읍 태인에서 농민을 이끈 동학대장이었다.

1894년(고종31) 조선의 동학접주 전봉준 다음 가는 남접의 실력자로서 동학혁명 초기에 태인의 두령 김낙삼, 김눈행 등 1300여명을 이끌고 백산에 모인 뒤 남원을 점거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갔다.

[송월주] 세상에. 왜..



이때 양호 토초사 홍게훈과 타협하여 동학도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확약받고 전주성을 관군에 내주고 농민군을 해산했다.

그러나 청과 일본의 군대가 이에 개입하자 다시 떨쳐 일어나 5,6만의 병력으로 남원에서 전주까지 위협하였다.

김개남 부대는 남원부사 이용헌을 처단하고 동학군정을 실시하는 등 관헌이 가장 무서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이었다.

이해 10월 하순 전주 수비군 5천을 이끌고 북상하여 공주 회전에 참가하여 우금치 전투에 임했으나 패하였다.

패전한 다음 직속 부대를 거느리고 청주에 진격했다가 일본군과 관군에 다시 대패하고, 남하하여 11월 금구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패주했다가 12월 태인(현재의 산내 종성리)에서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측결 처분을 받아 효수 당했다.

이후 맏형 영백의 후계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 이곳 정량리에서 태어났다고 마을 사람들이 주장하는 김개남장군의 탄생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 마을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이 문제는 하나의 과제라 할 것이다.

줄다리기 당산제와 송월주, 김개남 두 분의 사연이 전해오는 정량리는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이 마을은 전주- 정읍간 도로에서 산외면 산외교 삼거리에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외교 아래를 흐르는 물을 도원천 혹은 평사천이라고 하는데 그 바로 옆의 삼거리는 완주- 전주, 칠보-정읍시내, 옥정호-임실로 향하는 분기점에 해당한다.

 산외교에서 전주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왼편에 '송월주스님 생가'라고 새겨진 표지판이 보이고 버스승강장이 보인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새로 만들어진 콘크리트제 다리 옆의 낡은 다리를 건너 제방을 따라 조금 달리면 여러 그루의 노거수가 보인다.

이 노거수들 옆에는 제법 넓은 마당(주차 가능)이 조성되어 있고 회관이 증축되고 있으니 이곳 전체가 바로 정량리 당산제가 행해지는 곳이다.

 용줄이 감겨진 곳 옆에는 연자매가 누워 있는데 잘보면 조그맣게 고누판이 새겨져 있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문인석 비슷한 작은 입상도 있고 오른편 나무에는 나뉘어진 큰줄기 사이에 작은 돌들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그루의 나무에는 각각 금줄이 둘려져 있으니 이는 당산제를 지낸 흔적이다.

 마을 안쪽으로 진입하면 원정량마을회관이 있고 다시 안으로 쭈욱 올라가면 예전에 그릇을 굽던 산태동이라는 골짜기가 나온다.

논과 밭이 제법 되고 왼편으로 걸어 올라가면 민묘가 있는데 그 바로 앞의 밭에는 그릇파편이 무성하다.

 그곳에서 왼편으로 더 올라가면 아담한 정량제가 있는데 세 마리의 꼬리가 긴 짐승들이 인기척을 듣고 놀라 달아나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물을 마시러 내려온 듯 하지만 그 정체는 알 수가 없다.

마을 뒷편 산골짝에 있는 논들은 이곳 정량제의 물을 받아 벼농사를 짓고 있는 셈이다.

 한편, 정량제 아랫쪽 밭두렁 옆에 좁은 물길을 내어 콘크리트관을 다리겸 수로관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면 농부들의 지혜가 느껴지기도 한다.

 정량제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밭두렁에서 그릇편을 하나 주워 살펴보니 여러개의 태양 문양(혹은 해바라기 문양)이 그릇바닥에 한바퀴 돌아가며 그려진 것이 보인다.

이 그릇편은 제법 수준 높은 그릇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밭에 널려져 있는 그릇편은 흔히 볼 수 있는 약간 푸르스름한 빛깔의 그릇들이다.

빨갛게 불탄 흙덩이들도 여럿 보이고 옹기편도 흔하게 발견된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이 그릇을 굽던 곳임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낡은대로 낡아 무너져 가는 오두막집과 새로 지어진 양옥집이 대비되는 지점을 지나면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는 슬레이트를 얹힌 구조물이 보인다.

이 구조물은 말하자면 산태동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빨래를 하는 이들을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리라.  지난날 이곳에서 웃고 이야기 하며 빨래를 했을 마을여인네들의 모습을 연상하며 오른편 골목으로 접어든다.

마을 안쪽을 지나 노거수가 서있는 洞山을 향해 걸어가다가 조금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하였다.

 한쪽은 흙돌담벽이고 한쪽은 빨간벽돌담벼락인데 삼거리 건너편 담벽은 시멘트블록이다.

그순간흙돌담의 그림자와 햇살은 골목길을 양분하고 있다.

 언덕에 자리한 모정의 이름은 화수정이다.

기둥에는 화수정기문 등이 붙어 있고 모정 마루판에는 여러 개의 고누판이 새겨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마을 입구의 돌판에 새겨진 고누판을 보아도 민속적인 전통이 강한 이 마을 어른들은 꽤나 고누놀이를 즐긴 듯 하다.

 모정 옆에는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이 마을 집성의 하나인 여산송씨 정량문중인들이 만든 '흥학계'에서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석 뒷편으로 올라가면 잘 다듬어진 묘역이 펼쳐져 있다.

볼품이 두드러지는 소나무들이 여럿 서있고 잔디가 매끈한 이곳은 여산송씨 정량문중의 선산이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위치이며 뒷편 저멀리에는 상두산이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는 묵방산, 촛대봉(?) 등이 자리하고 있다.

촛대봉의 봉우리들은 일견 내장산의 써래봉을 닮았고 이곳 묘역의 무덤들은 그 산을 약간 비켜 자리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촛대봉 혹은 써래봉과 송월주 스님을 연결하여 생각하노라니 스님의 생가를 구경하고픈 마음이 급해진다.

 기둥이 굵은 집의 마루에 앉아 계시는 할머님께 스님의 생가를 여쭈니, '이왕이면 확실하게 알려줘야 한다'며 친히 노구를 이끌고 앞장을 서신다.

그리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스님의 생가는 예상대로 흙돌담이 쳐지고 전통성이 엿보이는 옛날풍의 집이다.

 골목 위아래로 두 개의 대문이 있는데 아랫편 대문으로 들어가면 스님의 집 마당이고, 마당에는 작은 비닐하우스와 개장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스님이 태어난 집은 낡았고 잡동사니가 그득하다.

또다른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있으니 이는 큰집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랫쪽 건너편에는 작은 집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집에서 현재 스님의 생가터를 사용하고 있다.

 스님의 생가를 나와 정읍시내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김선생님 댁을 찾아간다.

처음 만나뵌 선생님은 알고보니 나의 9년 고향선배이셨다.

 ㅇㅇㅇ편집위원이 김선생님이 진짜 ㅇㅇㅇ반이라고 했을만치 원칙에 충실하다고 하는 선생님은 고향인 들판을 떠나 산외라 불리우는 산골에 집을 짓고 살고 계신다.

  이 마을 이야기를 잘알고 계시는 선생님의 조언을 구해 기회가 되면 이 마을을 소개하는 글을 써볼 생각이다.

이번 첫 만남을 통해서는 '불당골'이라는 소지명을 당장 얻어 들었는데, 절이 있었다는 곳을 찾아 봐야겠다.

 *송월주 스님: 법호는 太空, 법명은 月珠이다.

아버지 송영조(여산인) 어머니 최종을(전주인)의 5남 4녀 중 다섯째 아들로 1935년 정량리 977번지에서 태어났다.

유교가정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22세에 입산하여 불가에 귀의하여 이후 금산사 주지를 18년간 역임하였다.

재임 중에 금산사 중창불사를 완성하였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과 한국불교종단협의회장을 역임하였다.

스님은 불교 대중화 생활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왔으며 경실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환경운동 등 사회시민운동의 중추적인 대표 지도자로 활동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김개남 동학농민혁명장:정량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고 혼인 후 분가하여 976-1번지에서 살았다.

동학혁명 당시 정량리 청년 수십명이 김개남군에 종군하였다.

김개남은 정읍 태인에서 농민을 이끈 동학대장이었다.

1894년(고종31) 조선의 동학접주 전봉준 다음 가는 남접의 실력자로서 동학혁명 초기에 태인의 두령 김낙삼, 김눈행 등 1300여명을 이끌고 백산에 모인 뒤 남원을 점거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갔다.

이때 양호 토초사 홍게훈과 타협하여 동학도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확약받고 전주성을 관군에 내주고 농민군을 해산했다.

그러나 청과 일본의 군대가 이에 개입하자 다시 떨쳐 일어나 5,6만의 병력으로 남원에서 전주까지 위협하였다.

김개남 부대는 남원부사 이용헌을 처단하고 동학군정을 실시하는 등 관헌이 가장 무서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이었다.

이해 10월 하순 전주 수비군 5천을 이끌고 북상하여 공주 회전에 참가하여 우금치 전투에 임했으나 패하였다.

패전한 다음 직속 부대를 거느리고 청주에 진격했다가 일본군과 관군에 다시 대패하고, 남하하여 11월 금구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패주했다가 12월 태인(현재의 산내 종성리)에서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측결 처분을 받아 효수 당했다.

이후 맏형 영백의 후계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 이곳 정량리에서 태어났다고 마을 사람들이 주장하는 김개남장군의 탄생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 마을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이 문제는 하나의 과제라 할 것이다.

줄다리기 당산제와 송월주, 김개남 두 분의 사연이 전해오는 정량리는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이 마을은 전주- 정읍간 도로에서 산외면 산외교 삼거리에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외교 아래를 흐르는 물을 도원천 혹은 평사천이라고 하는데 그 바로 옆의 삼거리는 완주- 전주, 칠보-정읍시내, 옥정호-임실로 향하는 분기점에 해당한다.

 산외교에서 전주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왼편에 '송월주스님 생가'라고 새겨진 표지판이 보이고 버스승강장이 보인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새로 만들어진 콘크리트제 다리 옆의 낡은 다리를 건너 제방을 따라 조금 달리면 여러 그루의 노거수가 보인다.

이 노거수들 옆에는 제법 넓은 마당(주차 가능)이 조성되어 있고 회관이 증축되고 있으니 이곳 전체가 바로 정량리 당산제가 행해지는 곳이다.

 용줄이 감겨진 곳 옆에는 연자매가 누워 있는데 잘보면 조그맣게 고누판이 새겨져 있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문인석 비슷한 작은 입상도 있고 오른편 나무에는 나뉘어진 큰줄기 사이에 작은 돌들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그루의 나무에는 각각 금줄이 둘려져 있으니 이는 당산제를 지낸 흔적이다.

 마을 안쪽으로 진입하면 원정량마을회관이 있고 다시 안으로 쭈욱 올라가면 예전에 그릇을 굽던 산태동이라는 골짜기가 나온다.

논과 밭이 제법 되고 왼편으로 걸어 올라가면 민묘가 있는데 그 바로 앞의 밭에는 그릇파편이 무성하다.

 그곳에서 왼편으로 더 올라가면 아담한 정량제가 있는데 세 마리의 꼬리가 긴 짐승들이 인기척을 듣고 놀라 달아나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물을 마시러 내려온 듯 하지만 그 정체는 알 수가 없다.

마을 뒷편 산골짝에 있는 논들은 이곳 정량제의 물을 받아 벼농사를 짓고 있는 셈이다.

 한편, 정량제 아랫쪽 밭두렁 옆에 좁은 물길을 내어 콘크리트관을 다리겸 수로관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면 농부들의 지혜가 느껴지기도 한다.

 정량제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밭두렁에서 그릇편을 하나 주워 살펴보니 여러개의 태양 문양(혹은 해바라기 문양)이 그릇바닥에 한바퀴 돌아가며 그려진 것이 보인다.

이 그릇편은 제법 수준 높은 그릇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밭에 널려져 있는 그릇편은 흔히 볼 수 있는 약간 푸르스름한 빛깔의 그릇들이다.

빨갛게 불탄 흙덩이들도 여럿 보이고 옹기편도 흔하게 발견된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이 그릇을 굽던 곳임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낡은대로 낡아 무너져 가는 오두막집과 새로 지어진 양옥집이 대비되는 지점을 지나면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는 슬레이트를 얹힌 구조물이 보인다.

이 구조물은 말하자면 산태동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빨래를 하는 이들을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리라.  지난날 이곳에서 웃고 이야기 하며 빨래를 했을 마을여인네들의 모습을 연상하며 오른편 골목으로 접어든다.

마을 안쪽을 지나 노거수가 서있는 洞山을 향해 걸어가다가 조금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하였다.

 한쪽은 흙돌담벽이고 한쪽은 빨간벽돌담벼락인데 삼거리 건너편 담벽은 시멘트블록이다.

그순간흙돌담의 그림자와 햇살은 골목길을 양분하고 있다.

 언덕에 자리한 모정의 이름은 화수정이다.

기둥에는 화수정기문 등이 붙어 있고 모정 마루판에는 여러 개의 고누판이 새겨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마을 입구의 돌판에 새겨진 고누판을 보아도 민속적인 전통이 강한 이 마을 어른들은 꽤나 고누놀이를 즐긴 듯 하다.

 모정 옆에는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이 마을 집성의 하나인 여산송씨 정량문중인들이 만든 '흥학계'에서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석 뒷편으로 올라가면 잘 다듬어진 묘역이 펼쳐져 있다.

볼품이 두드러지는 소나무들이 여럿 서있고 잔디가 매끈한 이곳은 여산송씨 정량문중의 선산이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위치이며 뒷편 저멀리에는 상두산이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는 묵방산, 촛대봉(?) 등이 자리하고 있다.

촛대봉의 봉우리들은 일견 내장산의 써래봉을 닮았고 이곳 묘역의 무덤들은 그 산을 약간 비켜 자리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촛대봉 혹은 써래봉과 송월주 스님을 연결하여 생각하노라니 스님의 생가를 구경하고픈 마음이 급해진다.

 기둥이 굵은 집의 마루에 앉아 계시는 할머님께 스님의 생가를 여쭈니, '이왕이면 확실하게 알려줘야 한다'며 친히 노구를 이끌고 앞장을 서신다.

그리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스님의 생가는 예상대로 흙돌담이 쳐지고 전통성이 엿보이는 옛날풍의 집이다.

 골목 위아래로 두 개의 대문이 있는데 아랫편 대문으로 들어가면 스님의 집 마당이고, 마당에는 작은 비닐하우스와 개장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스님이 태어난 집은 낡았고 잡동사니가 그득하다.

또다른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있으니 이는 큰집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랫쪽 건너편에는 작은 집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집에서 현재 스님의 생가터를 사용하고 있다.

 스님의 생가를 나와 정읍시내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김선생님 댁을 찾아간다.

처음 만나뵌 선생님은 알고보니 나의 9년 고향선배이셨다.

 ㅇㅇㅇ편집위원이 김선생님이 진짜 ㅇㅇㅇ반이라고 했을만치 원칙에 충실하다고 하는 선생님은 고향인 들판을 떠나 산외라 불리우는 산골에 집을 짓고 살고 계신다.

  이 마을 이야기를 잘알고 계시는 선생님의 조언을 구해 기회가 되면 이 마을을 소개하는 글을 써볼 생각이다.

이번 첫 만남을 통해서는 '불당골'이라는 소지명을 당장 얻어 들었는데, 절이 있었다는 곳을 찾아 봐야겠다.

 *송월주 스님: 법호는 太空, 법명은 月珠이다.

아버지 송영조(여산인) 어머니 최종을(전주인)의 5남 4녀 중 다섯째 아들로 1935년 정량리 977번지에서 태어났다.

유교가정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22세에 입산하여 불가에 귀의하여 이후 금산사 주지를 18년간 역임하였다.

재임 중에 금산사 중창불사를 완성하였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과 한국불교종단협의회장을 역임하였다.

스님은 불교 대중화 생활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왔으며 경실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환경운동 등 사회시민운동의 중추적인 대표 지도자로 활동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김개남 동학농민혁명장:정량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고 혼인 후 분가하여 976-1번지에서 살았다.

동학혁명 당시 정량리 청년 수십명이 김개남군에 종군하였다.

김개남은 정읍 태인에서 농민을 이끈 동학대장이었다.

1894년(고종31) 조선의 동학접주 전봉준 다음 가는 남접의 실력자로서 동학혁명 초기에 태인의 두령 김낙삼, 김눈행 등 1300여명을 이끌고 백산에 모인 뒤 남원을 점거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갔다.

이때 양호 토초사 홍게훈과 타협하여 동학도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확약받고 전주성을 관군에 내주고 농민군을 해산했다.

그러나 청과 일본의 군대가 이에 개입하자 다시 떨쳐 일어나 5,6만의 병력으로 남원에서 전주까지 위협하였다.

김개남 부대는 남원부사 이용헌을 처단하고 동학군정을 실시하는 등 관헌이 가장 무서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이었다.

이해 10월 하순 전주 수비군 5천을 이끌고 북상하여 공주 회전에 참가하여 우금치 전투에 임했으나 패하였다.

패전한 다음 직속 부대를 거느리고 청주에 진격했다가 일본군과 관군에 다시 대패하고, 남하하여 11월 금구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패주했다가 12월 태인(현재의 산내 종성리)에서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측결 처분을 받아 효수 당했다.

이후 맏형 영백의 후계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 이곳 정량리에서 태어났다고 마을 사람들이 주장하는 김개남장군의 탄생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 마을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이 문제는 하나의 과제라 할 것이다.

줄다리기 당산제와 송월주, 김개남 두 분의 사연이 전해오는 정량리는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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