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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초코 식빵을 먹으면서 녹은 초콜렛을 더불어 같이 먹는 식빵이 인기인듯 해서 저두 비슷하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냥 초콜렛을 반죽속에 넣어 성형하는것 보다 가나슈를 만들어서 초코 크림처럼반죽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가나슈 필링을 선택했지요

?????  ?고배합이라 그런지 반죽도 질고

반죽 만지기도 쉬지않았습니다.

?????        ?1차 발효시간을 충분히 갖고 중간에 펀치도 넣어 주었어요

??????  큐브 팬에 팬닝하고

  ???? 2차 발효.?????? ?구워져 나온 모양입니다.

????  ??식빵 단면입니다.

가나슈가 보이시지요? ^^? ?? ??데코에 좀더 욕심을 부려서 윗면에 초콜렛 코팅을 하고 슈가파우더를 뿌려 보았습니다.

?굽는 도중 가나슈가 흘러 내려 팬이 초콜렛 범벅이 되어서 설거지도 귀찮고 손이 많이 가기도하지만, 초코빵은 맛있게 만들기가 쉽지않아서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 초코칩이나 코코아, 호두, 가나슈? 등 여러가지 재료가 많이 들어가서 식빵 보다는 과자 식감에 가깝네요

ㅋ?    ? 이미지와 콘텐츠를 무단으로 복사하거나, 도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  "앙꼬의 쉬운 홈베이킹" 이라는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제과 제빵에 관심 있으신 분들 함께해요! :-D http://cafe.naver.com/bakingnsugar 중종의 비는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제1계비는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제2계비는 윤지임의 딸 ‘문정왕후’(1501

1565)입니다.

 중종은 제12대 왕 인종,제13대 왕 명종 등9남 11녀를 두고1544년 11월 14일창경궁에서 57세의 나이에승하합니다.

  중종의 능은 정릉입니다.

현재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선정릉이 바로 그곳입니다.

???선정릉에는?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그리고 중종의 능인 정릉이 있습니다.

정릉은 단릉으로?왕이나 왕비단독으로 모셔져 있는 능을말합니다.

중종의 능은 원래 1545년 2월 고양시 서삼릉 구역에장경왕후 윤씨와 함께동원이강릉으로 모셔졌 있다가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1562년 9월 4일 문정왕후의 주도로지금의 선정릉에 옮겨졌습니다.

?????? ??????? ???? ?? 1??? ??????? ???? ?? 1 ??? 2?? ??? 8????? ??? 7? ?? ??? ??? ...blog.naver.com?문정왕후는 합장을 원했으나낮은 지대로 침수가 자주 발생해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은어머니 문정왕후를태릉에 모셨습니다.

?문정왕후(1501

1565)는 1517년 왕비가 되었고문정왕후가 35세 때?명종(1534

1567, 재위 1545

1567)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1545년부터 1553년까지수렴청정을 합니다.

? 03.26 '장경왕후 윤씨'의 생몰년에 오타가 있어 수정합니다  ■ 11대 중종(진성대군) - 휘 : 역/ 자 : 낙천- 1488

1544년 (57세)- 재위기간 :  1506년 9월

1544년 11월(38년 2개월)- 부인 : 12명 (정비3, 후궁 9)- 할아버지 : 덕종(의경세자), 할머니 :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아버지 : 성종(9대), 어머니 : 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 이복형 : 연산군(10대)- 아들 : 인종(12대), 명종(13대) - 적자, 덕흥대원군(서자, 선조의 아버지)- 손자 : 선조(14대)  9대 성종과 3번째 정비 정현왕후 윤씨의 장남으로 성종의 차남이다.

1506년 이복형인 연산군이 박원종 일파에게 폐위되는 「 중종반정 」 1으로 인해 19세때 왕위에 올랐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두번째 왕이다.

집권 전반에는 공신 세력에 의해,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능호 :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삼성동에 위치한 정릉은 중종의 아버지 선종의 묘와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선릉과 함께 있어`선정릉'으로 불리우고 있고, `선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 단경왕후 신씨 (정비)- 1487년

1557년 12월 27일 (71세)- 1499년(12세) 진성대군과 가례- 자녀없음- 1506년 9월 폐위* 능호 : 온릉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익창부원군 신수근2의 딸, 연산군의 비 신씨의 외질녀(외 조카)1506년 중종이 왕위에 올라 왕비가 되었으나, 고모부가 연산군이고 고모가 연산군의 비라는 이유로왕비에 오른 7일만에 폐위되었다.

이 때 중종은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1515년 중종의 1대 계비가 사망하자 복위하자는 세력이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훗날 단경왕후의 복위를 간한 사람들은 유배되었다.

 인종(12대) 즉위  후 거처하는 곳을 '폐비궁' 이라 저하고 생활보조하기 시작하다.

1557년(명종 12년) 12월 사망하자 왕후 시부모의 예에 따라 이등례로 초상을 치뤘다.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 혹은 신비로 불라다가 1739년(영조 15년) 5월 김태남 등의 건의로 왕후로 복위되었다.

 공신들의 압력에 의해 폐위하긴 했지만 중종의 애정이 남달라 중종은 그녀가 보고 싶으면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 그녀의 본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 사실을 전해들은 신씨가 궁중에 있을때 즐겨 입던 분홍색치마를 펼쳐놓았고, 중종은 그 치마를 바라보며 보고픈 마음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 장경왕후 윤씨 (1계비)- 1491년 8월 10일

1515년 3월 16일(25세)- 1506년 숙의(후궁) 신분으로 입궁하였다 - 1506년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반정공신인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이듬해 왕비에 책봉되었다.

(박원종이 외숙부)- 자녀 : 1남 1녀(12대 인조) *능호 : 희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1491년 호현방에서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인 승평부부인 박씨(박원종의 누나)에 의해 양육되었다.

1511년에 중종의 맏딸인 효헤공주를 1515년에는 '인종(12대)'를 낳았으녀 산후병으로 6세 만에 죽었다.

  ■ 문정왕후 윤씨(2 계비)- 1501년 12월 2일

1565년 5월 5일(65세)- 1517년(17세) 중종의 3번째 비로 간택, 책봉되었다.

- 1534년(34세) 경원대군(명종) 출산 (이복형인 '인종'과는 20살차이)- 1543년(43세) '인종'이 즉위하자 대비- 1545년(44세) 아들 경원대군이 13세에 왕위에 오르자 바로 섭정에 들어가 8년 동안 막강권력을 행사하였고,                      명종이 성인이 된 후에도 5년동안 섭정했다.

- 자녀 : 1남 4녀(14대 명종) *능호 :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  연돈녕부사 윤지임의 딸로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빠는 윤원형(첩 정난정) 동생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하고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 」 3 을 일으며 윤임을 죽이고윤원로를 귀양보냈다.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해 인종집권시에는 "우리 모자(명종)를 언제 죽일 거냐?" 며 괴롭혔다고 한다.

명종 즉위 후 왕권을 완전히 장악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수렴청정에서 손을 땐 후에도 정사 운영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놓기도 했는데, 이러한 집권욕은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 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사림파 성리학자로 부터 악녀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 경빈 박씨 - ?

1533년- 중종반정을 주도한 정국공신 '박원종'의 수양딸로 친아버지는 '박수림'이다.

- 연산군 재위시절 흥청4 으로 들어와 궁에서 지내다가 중종의 눈에들었고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의 수양딸이 되어 정식 후궁이 되었다.

  (경빈 박씨는 밀양박씨이고 박원종은 순전박씨이다.

)- 자녀 : 1남 2녀(복성군 사사)  1509년 숙의 시절에 중종의 장자 ‘ 서성군(훗날 복성군)’ 을 낳았고, 1512년 혜순옹주, 1514년 혜정옹주를 출산하여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 '호'를 낳고 죽자 맏아들을 다음 중전의 재목으로 거론되었으나 흥청이라는 출신과 원자와 복성군 간의 왕위 쟁탈을 염려한 신하들에 의해 성사되지 못하고 빈으로 승격시켰다.

  1527년 「 작서의 변 」5 에 연류되어 아들 복성군과 함께 서인으로 강등당하고 상주로 유배되었다.

1533년 「 목패의 변」혹은 「 가작인두의 변 」 에 배후로 지목되 사약을 받았고, 이후 복성군 역시 사사되었다.

이 후 김안로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의 남편인 '연성위 김휘'가 한 짓이 밝혀지며 복권되었다.

   ■ 창빈 안씨- 1499년 9월 2일

1549년(51세)- 중종의 후궁으로 '덕흥대원군' 의 생모이자 '선조(14대)'의 할머니- 자녀 : 2남 1녀(차남 덕흥대원군) *능호 :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 1507년에 궁인으로 들어가 '자순대비 윤씨(정현왕후 윤씨, 성종의 비)' 에 눈에 들어 스무살에 중종의 승은을 입었다.

1521년 "영양군"을 생산, 1526년에 "정신옹주"를 1530년에 "덕흥군"을 생산했다.

'문정왕후'와의 사이도 돈독하여 중종 사후에도 관례대로 승려가 되지 않고 궐 안에 머물렀다.

창빈안씨가 죽은 후에도 문정왕후는 그녀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었고 후사 없이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비 '인순왕후'는 안씨의 자손인 "하성군"을 즉위시켰다.

   > 관련드라마/영화 └ 접기     ‘ 중종반정 ’ 1506년 9월 18일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10대)를 폐위하고 '진성대군(11 중종)을 올립한 두번째 반정.박원종,성희안,유순정, 장정, 박영문, 홍경주등이 왕비 신씨의 오라버니 신수근과 그 아우 신수영 및 임사홍 등 연산군의 측근을 제거한뒤,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으로 들어가 자순왕대비(정현왕후 윤씨)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하여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였다.

다음날 진성대군이 왕위에 올르니 그가 바로 11대 중종이다.

'신수근'- 1450

1506년연산군의 처남(폐비 신씨의 오빠) 중종의 장인, 세종의 외증손 왕실과는 이중 인천관계 "을사사화"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장경왕후 윤씨),소윤)(문정왕후 윤씨)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람의 화옥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장경왕후 윤씨에게는 동생 윤임이문정왕후 윤씨에게는 동생 윤원형이 있었다.

윤임과 윤원형은 같은 종씨였으나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대립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이 득세하여 사림의 명사를 많이 등용 그 기세를 회복하였는데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형세가 역전. 윤임일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명종의 이복동생이 '봉성군'을 왕위로 옹립한다는 소문을 퍼트려 유배지에서 사사시켰다"흥청"1504년 연산군(10년) 나라에서 모아들이 기녀로, 연산군은 조선팔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 아름다운 처녀와 건강한 말을 뽑고 각 고을에서 관리하게 했는다.

부녀자를 운평, 계평, 채홍, 속평 등 려러단계의 호칭으로 분류 관리하였으며 이 중 제일나은 자드을 '흥청'이라 했고, 이 중 연산군과 동참 성적으로 만족시켜준 여자는 '천과흥청'이라 했다.

"작서의 변" 동궁전 후원에 불에 태워 마치 돼지와 같은 형사을 하게 된 쥐와 방서를 매달아 세자를 저주한 사건 사람에 따라 스타일이 있는걸까요? 저는 이상하게 중종법으로 반죽 일부를 미리 발효시켜서 사용하는 방법이 좋네요. ^^ 빵맛도 마음에 들구요

?    ? 하루전에 미리 만들어서 냉장고에서 발효시킨 중종 반죽입니다.

?      글루텐이 잘 형성 되었지요?       중종반죽 넣어서 본반죽 만들기

???????  곡물 치아바타라 커런츠, 흑미, 귀리를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흑미랑 귀리는 미리 삶아 두었다가 사용했어요

 ?????  반죽 막바지에 넣어서 반죽 완료.  ???? ??1차 발효.    ?? 성형하고 굽는 사진은 없네요. ㅋ ?패쓰 패쓰

  ???     ??      ????호밀가루랑 곡물이 들어가서  구수해서 맛있는 곡물 치아바타. ^^ 앞전에 올렸던올리브 치아바타랑 먹물 치아바타보다 개인적으로는 더 맛있었어요. 저는 담백한 맛보다는?충전물이 많거나 달달한 맛을 좋아해서인지 곡물 치아바타가 제 입맛에 맛더라구용

?내일이이사라서 정신어 없네요.  버릴 가구만해두 6개나 되어서 좀전에 폐기물 신고하고 왔어요. 셀프 인테리어에 도전해볼려고 공부중인데... ㅋ 잘 될지 모르겠어요. 셀프 인테리어로 집 꾸미신 분 혹시 계세요? TV에서 보면서 공부하고 있는데 어려울 것 같아요. ㅋ이사하고 새집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 ^^ ?  ??이미지와 콘텐츠를 무단으로 복사하거나, 도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  "앙꼬의 쉬운 홈베이킹" 이라는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제과 제빵에 관심 있으신 분들 함께해요! :-D http://cafe.naver.com/bakingnsugar.. 그래서,, 시호에.. 어정쩡한 "중"자 들어간건 아닌지???  -좌) 여인천하,,, 중종           우) 대장금,,, 중종 -     반정 당일,,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집으로 몰려와, 에워쌌죠.... 호위를 하기 위해서,,    멍청이(?) 진성대군 중종은,,, 연산군(10대)이 자신을 죽이려고 군사를 보낸 줄 알고,, 자살하려 했죠..  그러자,, 부인 신씨(단경왕후 신씨)가 말리면서,, 군사들의 말머리가 이곳을 향해 있으면,,,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지만,,, 말머리가 밖으로 향해 있으면,,대군을 호위하려는 뜻이니...잘 살펴보고,, 나중에 죽는게 어때요?  라고 말했죠..    하인을 내보내,, 자세히 살피게 하니말머리가 모두 집 밖으로 향해 잇어서,, 진성대군은 자살하지 않고,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하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죠.  -치마바위 01-    이 스토리에서 보다시피,, 진성대군은 좀 모자라고 부인은 야물딱졌는데,,,  아쉽게도,,, 진성대군이 중종이 된 후,, 반정세력의 강요로 중종과 금슬이 좋았던 신씨는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궁에서 내쫓기죠..   -치마바위 02-    이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 '치마바위 전설' 이 전해지구요.. 중종은 신씨(단경왕후 신씨)가 그리워지면,,높은 누각에 올라가 사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는데,,  -치마바위 03-     이 소식을 들은 신씨는 인왕산 바위위에다 평소에 즐겨 입던 치마를 펼쳐놓았고, 중종은 바람에 날리는 신씨의 치마를 보고 신씨에 대한 애뜻한 감정을 달랬다고 하네요.  -드라마 대장금에서,,, 중종-     아무것도 모른 채,,, 반정세력에 의해,, 즉위한 중종은,,, 이렇게 멍(?)한 데다,, 완전히 허수아비(?) 였죠.      반정이 마무리된 후,  정국공신 117명이 책봉되었는데,, 이 중 공도 없이 낀 자들이 많았죠.  반정 삼대장은 반정 삼정승이 되고,,, 박원종은 병조판서까지 겸임했죠...  반정 삼대장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죠.    이에 비해,, 나이 어린 중종은,,, 이 들 삼대장이 조회에 참석한 후, 물러갈 때면,, 꼭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들이 문에 나간 후에야 비로소 자리에 앉는 등... 왕권의 대하락...!!      반정 삼대장은 권세와 부귀를 누렸으나,, 명은 길지 못했고,,, 중종 8년까지 모조리 병사했죠.   이때 중종의 나이,, 25세였으니,, 이들이 장악했던 권력에 공백이 생기면서,, 권력투쟁의 서막이 오르죠.      여기서,, 잠깐,,,  중종 가계도를 볼게요.. ^^ - 중종(성종 아들, 연산군 이복동생) 가계도 -       이로써,,, 조선 10대왕,,  연산군에 대한 포스팅을 마칩니다.

   그동안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라마속 조선역사의 다음 포스팅은, 효종, 현종, 숙종시대를 포스팅이 될 것 같네요..  2012 드라마(사극)속 역사포스팅 예정표 ---> [ 클릭 ]    COMMING SOOOOOOOON !  유익하고,,재미있었다면,,??오색향기(스덧공,미투,뷰온) ..기본매너 !!,, *^^*    누른다고해치지 않아요  포스팅 만드는데 3시간오색향기 뿌리는데..10초  -오색향기 도우미-       ??초코 식빵을 먹으면서 녹은 초콜렛을 더불어 같이 먹는 식빵이 인기인듯 해서 저두 비슷하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냥 초콜렛을 반죽속에 넣어 성형하는것 보다 가나슈를 만들어서 초코 크림처럼반죽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가나슈 필링을 선택했지요

?????  ?고배합이라 그런지 반죽도 질고

반죽 만지기도 쉬지않았습니다.

?????        ?1차 발효시간을 충분히 갖고 중간에 펀치도 넣어 주었어요

??????  큐브 팬에 팬닝하고

  ???? 2차 발효.?????? ?구워져 나온 모양입니다.

????  ??식빵 단면입니다.

가나슈가 보이시지요? ^^? ?? ??데코에 좀더 욕심을 부려서 윗면에 초콜렛 코팅을 하고 슈가파우더를 뿌려 보았습니다.

?굽는 도중 가나슈가 흘러 내려 팬이 초콜렛 범벅이 되어서 설거지도 귀찮고 손이 많이 가기도하지만, 초코빵은 맛있게 만들기가 쉽지않아서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 초코칩이나 코코아, 호두, 가나슈? 등 여러가지 재료가 많이 들어가서 식빵 보다는 과자 식감에 가깝네요

ㅋ?    ? 이미지와 콘텐츠를 무단으로 복사하거나, 도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  "앙꼬의 쉬운 홈베이킹" 이라는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제과 제빵에 관심 있으신 분들 함께해요! :-D http://cafe.naver.com/bakingnsugar.. 그래서,, 시호에.. 어정쩡한 "중"자 들어간건 아닌지???  -좌) 여인천하,,, 중종           우) 대장금,,, 중종 -     반정 당일,,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집으로 몰려와, 에워쌌죠.... 호위를 하기 위해서,,    멍청이(?) 진성대군 중종은,,, 연산군(10대)이 자신을 죽이려고 군사를 보낸 줄 알고,, 자살하려 했죠..  그러자,, 부인 신씨(단경왕후 신씨)가 말리면서,, 군사들의 말머리가 이곳을 향해 있으면,,,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지만,,, 말머리가 밖으로 향해 있으면,,대군을 호위하려는 뜻이니...잘 살펴보고,, 나중에 죽는게 어때요?  라고 말했죠..    하인을 내보내,, 자세히 살피게 하니말머리가 모두 집 밖으로 향해 잇어서,, 진성대군은 자살하지 않고,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하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죠.  -치마바위 01-    이 스토리에서 보다시피,, 진성대군은 좀 모자라고 부인은 야물딱졌는데,,,  아쉽게도,,, 진성대군이 중종이 된 후,, 반정세력의 강요로 중종과 금슬이 좋았던 신씨는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궁에서 내쫓기죠..   -치마바위 02-    이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 '치마바위 전설' 이 전해지구요.. 중종은 신씨(단경왕후 신씨)가 그리워지면,,높은 누각에 올라가 사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는데,,  -치마바위 03-     이 소식을 들은 신씨는 인왕산 바위위에다 평소에 즐겨 입던 치마를 펼쳐놓았고, 중종은 바람에 날리는 신씨의 치마를 보고 신씨에 대한 애뜻한 감정을 달랬다고 하네요.  -드라마 대장금에서,,, 중종-     아무것도 모른 채,,, 반정세력에 의해,, 즉위한 중종은,,, 이렇게 멍(?)한 데다,, 완전히 허수아비(?) 였죠.      반정이 마무리된 후,  정국공신 117명이 책봉되었는데,, 이 중 공도 없이 낀 자들이 많았죠.  반정 삼대장은 반정 삼정승이 되고,,, 박원종은 병조판서까지 겸임했죠...  반정 삼대장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죠.    이에 비해,, 나이 어린 중종은,,, 이 들 삼대장이 조회에 참석한 후, 물러갈 때면,, 꼭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들이 문에 나간 후에야 비로소 자리에 앉는 등... 왕권의 대하락...!!      반정 삼대장은 권세와 부귀를 누렸으나,, 명은 길지 못했고,,, 중종 8년까지 모조리 병사했죠.   이때 중종의 나이,, 25세였으니,, 이들이 장악했던 권력에 공백이 생기면서,, 권력투쟁의 서막이 오르죠.      여기서,, 잠깐,,,  중종 가계도를 볼게요.. ^^ - 중종(성종 아들, 연산군 이복동생) 가계도 -       이로써,,, 조선 10대왕,,  연산군에 대한 포스팅을 마칩니다.

   그동안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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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라마속 조선역사의 다음 포스팅은, 효종, 현종, 숙종시대를 포스팅이 될 것 같네요..  2012 드라마(사극)속 역사포스팅 예정표 ---> [ 클릭 ]    COMMING SOOOOOOOON !  유익하고,,재미있었다면,,??오색향기(스덧공,미투,뷰온) ..기본매너 !!,, *^^*    누른다고해치지 않아요  포스팅 만드는데 3시간오색향기 뿌리는데..10초  -오색향기 도우미-         조선왕릉중 단릉은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 그리고 중종의 정릉이다.

왕비릉은 태조 정비의 제릉과 계비의 정릉, 단종비 사릉, 예종비 한씨의 공릉, 성종비 한씨의 순릉, 중종 정비의 온릉, 1계비의 희릉, 2계비의 태릉과 인조 계비의 휘릉, 숙종 정비의 익릉, 경종 정비 혜릉, 영조 정비의 홍릉이 있다.

그러고보면 임금을 계비에게 내주고 홀로 묻힌 정비도 5명이나 된다.

  그러나 단릉이라 할지라도 왕릉군에 속하여 있는 경우가 많으며 홀로 외따로 떨어진 릉은 태조비 제릉과 정릉, 단종의 장릉, 단종비 사릉, 그리고 중종비 온릉이 있다.

중종처럼 왕과 왕비 3명이 각각 묻힌것도 아주 보기 드문 예이다.

    ㅇ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   중종은 성종과 2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는 후사없이 일찍 죽었고, 1계비 폐비 윤씨는 연산군을 낳고 사사되었으며, 그 후에 정현왕후 윤씨가 중종이 된 진성대군을 낳았으니 10대 왕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연산군의 폭압정치 동안 그와 어머니 정현왕후는 숨을 죽이고 지내야 했으며, 1506년에 박원종,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조선왕조중 처음으로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중종] 의 매력 포인트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중추부지사 박원종이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 등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에 힘입어 조선 11대 왕 중종으로 등극하였다.

  박원종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연산군이 누이(월산대군 박씨부인)를 겁탈하였다거나 부정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고 자결하기에 이르자 연산을 배반하고 반정의 선봉에 서서 연산군을 쫓아내는데 앞장을 섰다는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중종은 즉위 초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1515년(중종 10) 이후에는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하였으나, 과격한 개혁정치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당파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등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화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ㅇ 3명의 왕비 연산군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왕(중종)이 되자 대군부인이었던 부인 신씨는 왕비(단경왕후)에 오르지만 그의 아버지 좌의정 신수근이 연산군의 폐위를 반대한 역적이 되어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죄인의 딸을 내치라는 혁명군의 강요에 의해 중종은 조강지처인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시키니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7일을 왕비에 있었던 사람이 되었다.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거창군부인 신씨의 오빠)이었으며 중정반정에 가담하지 않아 죽임을 당한다.

누이(연산군 부인)를 생각하자니 딸(중종 부인)이 걸리고, 딸을 생각하자니 누이가 걸리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고 반정을 거부하여 죽임을 당하고 누이와 딸은 모두 폐비가 된다.

  조강지처를 사랑했던 중종은 매일 부인의 私家쪽을 바라다보고 신씨 집에서는 부인이 입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걸쳐놓아 임금에게 화답하니 바로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이다.

본인의 힘으로 쟁취한 권력이 아니니 부인도 지켜줄 수 없었던 왕, 중종. 조강지처를 폐비시킨 중종은 반정세력 윤여필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1계비 장경왕후 윤씨이며 1515년 2월에 세자를 낳은 뒤 7일 만에 산후병으로 죽으니 그 세자가 훗날 12대 인종이다.

 그 후 1517년 2계비를 들이니 후일 13대 명종을 낳은 문정왕후로 1계비 장경왕후 윤씨와는 같은 파평윤씨로 고모-조카뻘이 된다.

 이렇게 3명의 왕비를 둔 중종은   1544년 11월 15일 19살로 왕위에 오른지 39년만인 보령 57세로 승하한다.

장경왕후 소생 인종은 1545년(인종 1) 1월 5일 아버지 중종을 고양에 예장하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하였다가 약 한 달 후,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생모 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오른쪽에 능을 새로 조영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고쳤다.

(이처럼 고양에 예장하고 희릉이라 했다가 한달후 장경왕후 윤씨 곁으로 옮겼다는 기록과 승하후 바로 장경왕후 윤씨 곁에 묻혀서 그때까지 희릉이었던 왕비릉에 왕이 왔으므로 왕비의 능호를 쓸 수 없어 정릉으로 고쳤다는 기록도 보인다.

>  ㅇ 질투심으로 왕릉을 옮긴 문정왕후... 1계비 장경왕후 소생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죽자 자신의 소생을 왕(13대 명종)으로 즉위시킨 2계비 문정왕후는 8년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들게 된다.

뿐만아니라 1계비 장경왕후 옆에 중종이 묻혀있는 꼴을 보지 못하고 7년만인 1562년(명종 17년) 9월 4일 지금의 선정릉 자리로 천장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천장의 이유는 능지가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한 땅이라 선왕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질투심이며, 왕릉을 옮겨놓고는 자신이 죽어서 그 옆에 묻히므로써 후손들이 발복한다는 생각으로 중종 곁에 자신의 수릉지까지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2계비 문정왕후가 죽자 막상 그지역은 지대가 낮아 상습적으로 물이 차고 조금만 비가와도 침수되는 좋지 않은곳이라는 평가에 따라 지금의 태릉에 혼자 묻히게 되었다.

   ㅇ 결국 좋지 않은 땅에 혼자 묻힌 중종    정비 단경왕후는 일찍 승하하여 온릉에 혼자 묻혀 있으며, 1계비 장경왕후는 희릉에서 7년여 지아비와 함께 있다가 중종이 옮겨가는 바람에 혼자가 되었으며, 2계비 문정왕후는 중종을 옮겨 놓고도 결국은 그 옆에 묻히지 못하고 태릉에 혼자 있게되니 정작 정릉의 중종도 혼자가 된것이다.

  2계비 문정왕후가 봉은사 보우스님과 힘을 합쳐 남편 중종을 정릉으로 옮겼지만 결국 그자리는 상습적으로 물에 잠기는 조선왕릉중 가장 낮은자리이며 좋지 못한 자리라는것이 일부의 평가이다.

그 자리가 원래는 봉은사의 자리였는데 중종에게 내주고 봉은사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갔지만 중종의 천장은 잘못된 것이어서 그 후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인종은 조선임금중 가장 짧은 즉위기간인 9개월만에 승하하였고, 그 뒤를 이은 명종의 세자인 순회세자가 요절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가, 또 2년 뒤에는 명종이 승하하게 된것도 다 그런 이유라고들 말한다.

뿐만아니라 결임진왜란 당시에는 왜적에게 도굴을 당하여 시신이 불태워지는 비운의 능이 된다.

    ㅇ 시신이 없는 무덤   1593년 임진왜란중 선릉과 정릉이 왜군에 의해 파헤쳐지고, 왕의 시신은 불에 타버렸다.

선릉(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은 불에 타 능침에서 시신이 사라진 채 타다 만 뼈 잿더미들만 나오고 무덤 속은 이미 비었으며, 정릉(중종의 능)에서는 염할 때 입혔던 옷이 벗겨진 시신이 무덤 속에 가로 놓여 있었다.

부자간에 죽어서도 능욕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이를 가려내기 위해 선조는 영의정 최홍원, 좌의정 윤두수, 부원군 정철 등 원로대신부터 전에 중종의 얼굴을 보았던 궁녀들까지 동원해 확인했지만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돼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고령이라 그 확인이 쉽지 않았다.

 시신의 확인이 쉽지 않자 조정에서는 일찍이 왕의 체격을 잘 알고 있는 덕양부인과 궁녀 등을 시켜 왕의 모습을 글로 적게 한 다음 시신과 대조토록 했다.

이들 보고서에 따르면 왕은 중키로 이마에 검은 사마귀가 있었는데, 녹두보다 조금 작았고, 살찌지도 여위지도 않았으며, 얼굴은 길고 콧마루는 높았다고 했다.

하지만 중종의 능침에서 나온 시신은 살은 썩어서 떨어졌고, 검은 사마귀는 알아볼 수 없고, 왕의 얼굴은 길고 턱뼈도 길었는데 이 시신은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배 위에 대여섯 군데 칼 맞은 흔적 등 여러 정황으로 볼때 다른 사람의 시신 같다며 시신 확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혹시나 중종의 시신일지도 모르기에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뼈와 타다 남은 재를 가지고 다시 오례의에 맞춰 염을 해 안장한다.

 그래서 조선왕릉 중에서 선릉과 정릉은 시신이 없는 무덤이 된 것이다.

     정릉의 상설은 성종의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 제11대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부인 10명, 자녀 9남 11녀      <복잡한 중종의 가계도>      중종은 성종과 2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는 후사없이 일찍 죽었고, 1계비 폐비 윤씨는 연산군을 낳고 사사되었으며, 그 후에 정현왕후 윤씨가 중종이 된 진성대군을 낳았으니 10대 왕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연산군의 폭압정치 동안 그와 어머니 정현왕후(자순대비)는 숨을 죽이고 지내야 했으며, 1506년에 박원종,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중종반정 (中宗反正)   1506년(연산군 12) 중추부지사 박원종 등이 밀약 후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 등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어 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에 힘입어 조선 11대 왕 중종으로 등극하였다.

  반정(反正)인가 ? 혁명(革命)인가 ?  전통사회에서는 천명(天命)이 다한 왕조를 교체한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뜻하는 말로 혁명을 쓰고, 반정은 왕조의 정통성은 유지한 채 왕위만 교체하는 것이므로 혁명이라 하지 않았다.

역사상 반정은 2번이 있는데, 1506년 9월 연산군을 축출한 중종반정과 1623년 3월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이다.

  이때 '반'(反)은 돌이킨다는 뜻으로 정통으로 돌아가거나 어긋난 정도(正道)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중종] 근본적 원인은 ?



이는 정권교체의 명분을 연산군은 난정(亂政)과 패륜, 광해군은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의 폐비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묘호(廟號:태조·태종 등과 같은 명칭)를 받지 못해 '군'(君)으로 불렸으며, '실록'도 '일기'(日記)라고 부르고 여기에 실린 각자의 전기에 패륜행위를 강조한 것도 반정의 근거를 분명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종을 몰아낸 태종과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세조의 경우는 반정이라고 하지 않는데 이는 두 사람이 모두 선왕으로부터 선양(禪讓:왕위를 양도하는 것) 받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종과 단종 모두 묘호를 추증 받지 못해, 정종은 공정대왕(恭靖大王),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렸다.

이들의 묘호는 각각 1681년(숙종 7)과 1698년(숙종 24)에 추증한 것이다.

   ㅇ 중종의 업적 중종은 즉위 초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1515년(중종 10) 이후에는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하였으나, 과격한 개혁정치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당파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등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화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ㅇ 기묘사화 (己卯士禍)와 조광조

1519년(중종 14) 기묘년에 남곤(南袞) 등의 훈구재상에 의해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사건이다.

<배경> 반정으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중종은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 및 명분과 인륜을 중시하는 성리학 장려에 힘써 신진사류의 등용에 적극적이었다.

이때 등용된 대표적인 인물이 조광조로서 그는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그 구현과정에서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

)타인의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다.

급기야 중종까지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하여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경과>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만은 반정공신의 약 4분의 3인 76명의 공훈은 자격이 없는 가짜이니 삭제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남곤과 심정(沈貞) 등은 희빈 홍씨를 이용하여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

"고 왕에게 밤낮으로 진언하거나, 또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趙)의 파자(破字)인 주초(走肖),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말)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에 흔적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어 드디어 중종도 이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치죄하게 하였다.

<결과>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綾州 : 전라남도 화순)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었고, 김정(金淨)·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金湜)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또 이를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김정국 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옥사 이후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 박유청이 우의정이 되었다.

<영향> 조광조는 국왕의 신임과 사림들의 공론의 지지 이외에는 개혁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기반이 취약하였다.

당시의 정치체제가 왕도정치를 실현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하였으므로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왕도정치의 이상이 무산됨으로써 성리학은 학문적으로 발전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왕도정치 구현을 목적으로 실천에 옮기다가 희생당한 이상적인 선비상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   ㅇ 3명의 왕비.....女人天下   연산군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왕(중종)이 되자 대군부인이었던 부인 신씨는 왕비(단경왕후)에 오르지만 그의 아버지 좌의정 신수근이 연산군의 폐위를 반대한 역적이 되어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죄인의 딸을 내치라는 혁명군의 강요에 의해 중종은 조강지처인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시키니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7일을 왕비에 있었던 사람이 되었다.

중종은 사랑하는 그녀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조강지처를 폐비시킨 중종은 반정세력 윤여필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1계비 장경왕후 윤씨이며 1515년 2월에 세자를 낳은 뒤 7일 만에 산후병으로 죽으니 그 세자가 훗날 12대 인종이다.

  그 후 1517년 2계비를 들이니 후일 13대 명종을 낳은 문정왕후로 1계비 장경왕후 윤씨와는 같은 파평윤씨로 고모-조카뻘이 된다.

 절대강자의 등장이다.

  중종은 부인 10명을 두었다.

호색해서가 아니고, 막강한 반정공신이 추천하는 후궁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외 수많은 후궁들...국사를 논해야 할 궁궐이 여인천하가 된 셈이다.

왕의 총애는 차기 왕통에 까지 영향을 미치니 여인들의 시기와 암투는 불을 보듯 뻔했다.

    ㅇ 질투심으로 왕릉을 옮긴 2계비 문정왕후1계비 장경왕후 소생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죽자 자신의 소생을 왕(13대 명종)으로 즉위시킨 2계비 문정왕후는 8년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들게 된다.

뿐만아니라 1계비 장경왕후 옆(서삼릉능역 희릉禧陵)에 중종이 묻혀있는 꼴을 보지 못하고 7년만인 1562년(명종 17년) 9월 4일 지금의 선정릉 자리로 천장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천장의 이유는 능지가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한 땅이라 선왕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질투심이며, 왕릉을 옮겨놓고는 자신이 죽어서 그 옆에 묻히므로써 후손들이 발복한다는 생각으로 중종 곁에 자신의 수릉지까지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2계비 문정왕후가 죽자 막상 그지역은 지대가 낮아 상습적으로 물이 차고 조금만 비가와도 침수되는 좋지 않은곳이라는 평가에 따라 지금의 태릉에 혼자 묻히게 되었다.

    ㅇ 결국 좋지 않은 땅에 혼자 묻힌 중종    이렇게 3명의 왕비를 둔 중종은 1544년 11월 19살로 왕위에 오른지 39년만인 보령 57세로 승하한다.

정비 단경왕후는 일찍 승하하여 온릉에 혼자 묻혀 있으며, 1계비 장경왕후는 희릉에서 7년여 지아비와 함께 있다가 중종이 옮겨가는 바람에 혼자가 되었으며, 2계비 문정왕후는 중종을 옮겨 놓고도 결국은 그 옆에 묻히지 못하고 태릉에 혼자 있게되니 정작 정릉의 중종도 혼자가 된 것이다.

  2계비 문정왕후가 봉은사 보우스님과 힘을 합쳐 남편 중종을 정릉으로 옮겼지만 결국 그자리는 상습적 으로 물에 잠기는 조선왕릉 중 가장 낮은 자리이며 좋지 못한 자리라는 것이다.

<선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물이 불어 났을때는 재실 아래까지 잠기고, 홍살문 근처에는 배를 띄울 정도이므로 보기에 민망할 따름이옵니다.

" 그 자리가 원래는 봉은사의 자리였는데 중종에게 내주고 봉은사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갔지만 중종의 천장은 잘못된 것이어서 그 후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인종은 조선임금중 가장 짧은 즉위기간인  9개월만에 승하하였고, 그 뒤를 이은 명종의 세자인 순회세자가 요절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가, 또 2년 뒤에는 명종이 승하하게 된것도 다 그런 이유라고들 말한다.

뿐만아니라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적에게 도굴을 당하여 시신이 불태워져   조선왕릉 중에서 선릉과 정릉은 시신이 없는 무덤이 된 것이다.

                    정릉(靖陵) :  11대 임금 중종의 단릉 중종은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사후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혀, 조선시대의 몇 안되는 단릉이 되고 말았다.

 조선왕릉중 단릉은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 그리고 중종의 정릉이다.

왕비릉은 태조 정비의 제릉과 계비의 정릉, 단종비 사릉, 예종비 한씨의 공릉, 성종비 한씨의 순릉, 중종 정비의 온릉, 1계비의 희릉, 2계비의 태릉과 인조 계비의 휘릉, 숙종 정비의 익릉, 경종 정비 혜릉, 영조 정비의 홍릉이 있다.

그러고보면 임금을 계비에게 내주고 홀로 묻힌 정비도 5명이나 된다.

  중종처럼 왕과 왕비 3명이 각각 묻힌 것도 아주 보기 드문 예이다.

  정릉의 상설은 성종의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정릉부근의 숲길 정릉의 전경정자각 바로 옆까지 상가 등이 인접해 있다.

그래선지 정릉은 절대로 능침공개를 해주지 않는 곳으로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못 올라 본 유일한 능침이다.

<조선국 중종대왕 정릉>이라 새겨져 잇다.

정자각 어칸 을 통해 본 능침의 모습. 무인석등 석물의 상태가 좋아보인다.

 정자각을 지나 돌아본 모습. 강남구 테헤란로 고층빌딩이 탁 막아선다.

  구테타 세력에 의해 옹립된 중종은 첫 사랑 단경왕후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또 조광조를 내세워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스스로 포기했다.

(최인호의 소설 '유림' 제1권은 조광조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중종처럼 의외의 인물에게 대권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런 大運을 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조선중기 백성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군역(병역)의 폐단이었다.

 중종 36년(1541) 군적수포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은 군역에서 합법적으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양인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1년에 포 2필을 납부하는 것으로 군역의무를 대신했는데 양반사대부들은 납부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던 사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중종의 정릉 - 3명 왕후 7명 후궁 거느렸지만 홀로 안장에 도굴 수모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의 아픔을 잊고 현란한 도심을 지키는 중종의 능침  정릉(靖陵)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 1488

1544)의 능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에 있다.

조선 왕릉으로는 드물게 왕의 무덤만 단출하게 있는 단릉 형식인데,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아들로 계비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태어나 휘는 역()이요, 자는 낙천(樂天)이다.

1494년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다가 1506년 연산군의 폐위로 제11대 왕으로 추대됐다.

중종의 이복형인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을 조영하다 생모가 폐비된 사실을 알고 폭군으로 돌변했다.

결국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중종은 38년 2개월간 재위하면서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문벌세도가들의 권력을 누르고자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조광조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등용,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으나 당파싸움을 종식하지는 못했다.

1544년 11월 15일 중종은 죽음이 임박하자 마지막으로 폐위된 왕비 신씨(단경왕후)를 찾았다.

신씨는 왕비에 책봉되자마자 당쟁으로 7일 만에 폐위된 불운한 왕비였다.

신씨를 만난 뒤 중종은 유시(酉時·오후 7

9시)에 환경전에서 승하했다.

  문정왕후의 압력으로 강 건너 천장중종 사후 맏아들 인종(仁宗, 1515

1545·중종의 제1 계비 장경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중종의 비 문정왕후는 사왕(嗣王·신임 왕) 인종이 병약하다는 이유로 내전에서 나와 의주(儀註·가례 서적)를 들여오게 하고 찬궁(宮·장례식까지 빈전 안에 임금의 관을 놓아두던 곳)을 내전 깊숙한 통명전에 설치하게 하는 등 남편의 국장을 주도했다.

심지어 재궁(梓宮·관)도 115번 옻칠한 것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신하들은 ‘예의 문란함’을 지적하며 문정왕후를 성토했다.

문정왕후의 주도적이고 독단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종의 능은 오늘날 경기도 고양 서삼릉(西三陵) 능역에 있는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禧陵)에 동원이강으로 모시고, 능호를 정릉이라 고쳤다.

처음에는 시호를 국가 중흥의 공이 크다 하여 중조(中祖)로 하고자 했으나 폐왕 연산이 아니라 성종의 대를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종으로 결정했다.

인종은 중종이 위독할 때 늘 먼저 약을 맛보고, 잠자리를 살피는 등 효성이 지극했지만 병약했다.

결국 능역 조영 한 달 후 배알을 했지만 재임 8개월 만에 31세로 승하했다.

인종은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기록하고, 아버지 중종의 능 옆에 안장됐다.

인종의 뒤를 이어 동생 명종(明宗·중종의 제2 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중종이 묻힌 정릉 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일찍이 세조가 며느리 장순왕후의 공릉 터를 잡으면서 이 땅을 직접 보고 좋지 않다 했고, 당대 최고의 풍수가인 임원준도 불길하다고 했음을 이유로 정릉을 천장했다.

옮긴 곳이 오늘날 서울 강남구 삼성동이다.

이때 문정왕후의 압력에 못 이겨 명종이 억지로 능을 옮긴 것에 대해 백성이 한탄했다고 한다.

제2 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사후 남편과 같은 유택에 묻히고자, 억지로 장경왕후의 희릉과 아들 인종의 효릉으로부터 강을 건너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옮겼다는 것이다.

이때 애달픔이 사림의 울음으로 변했고, 밤이면 경기도 고양에 있는 희릉 숲 속의 울음소리가 한강 건너 정릉까지 이르렀으며, 안개가 세 능을 감싸고 구름 속을 떠다녔다고 한다.

모두 정릉의 천장을 슬퍼하는 이야기다.

사림들은 “고금을 막론하고 유명을 달리한 남편의 무덤을 옮겨 전처의 무덤과 멀리 떨어지게 하는 투기는 듣지 못했다”며 문정왕후를 비꼬았다    문정왕후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강을 건너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온 중종의 정릉   천장을 할 때 한강을 건너는 데 비협조적이었던 수원 목사가 하옥되고 경기 감사는 파직됐으며, 선창(船槍)들도 협조하지 않아 벌을 받는 이가 속출했다.

그러나 사림과 중신들의 반대에도 중종의 능은 1562년 8월 22일 문정왕후와 봉은사 주지 보우가 은밀히 계획해 봉은사 곁으로 옮겼다.

구릉 터가 득수득파(得水得破)가 좋지 않아 옮긴다는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문정왕후 후손의 번영을 위한 신후지계(身後之計·죽은 뒤 자손을 위한 계획)였다.

천장 후 문정왕후가 선릉과 정릉에 친제를 행하려 하나 조정에서 후비 단독으로는 할 수 없다 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옥체 훼손 변고중종의 능을 어렵게 옮겼으나 지세가 낮아 장마 때마다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됐다.

3년 내 변고가 두 번이나 일어나자 명종은 또다시 천장을 하려 하나 이루지 못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으나 정릉이 물이 차고 변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태릉(泰陵)에 안장됐다.

중종은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을 거느렸으나, 죽어서는 홀로 안장돼 조선 역대 왕 중 태조의 건원릉과 함께 단 둘뿐인 단릉이 되고 말았다.

정릉의 상설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과 장경왕후의 희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른다.

석양과 석호의 자세는 선릉과 비슷한데 세부적인 표현에서 좀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 이상일 만큼 크고,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임진왜란 당시 수난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주변 지역은 1970년대에 집중 개발되면서 고층 빌딩이 들어서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세계문화유산 실사자도 빌딩 숲과 야경을 보고 감탄했다.

선·정릉은 특별히 저녁 9시까지 개장해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조선 왕릉은 오랜 세월을 이어온 한국인의 자연관과 장례문화, 40기의 왕릉을 보존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다른 나라 왕릉 관리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왕릉 관리의 어려움으로 도굴을 꼽는다.

세계 학자들도 우리나라 왕릉에 대해 이 문제를 많이 염려했다.

그러나 조선 왕릉은 능역 조영 간소화와 회격실 구조 덕분에 지금까지도 온전히 보존됐음을 확인하고 우리의 보존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곳 선·정릉만은 예외다.

1593년 4월 13일 선조 일행이 평안도 가산을 출발해 박천(博川), 안주(安州)에 도착했다.

왜군이 쳐들어와 임란 중이었다.

경기좌도관찰사 성영(成泳)이 선릉과 정릉이 파헤쳐져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다고 보고하면서 속히 경성을 수복하자고 했다.

1592년 8월 태릉과 강릉도 왜적 50명과 동원병 50여 명이 도굴하려 했으나 회격이 단단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선·정릉은 왜군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선조의 증조부모(선릉)와 조부모(정릉과 태릉) 등 직전 조상의 유택이 파헤쳐진 것이다.

전쟁 통에 일어난 변고라 조정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선릉 왕의 능침과 왕비 능침은 광중에 불이 나서 전소됐고, 정릉 현궁은 소실돼 훼손되고 소실되지 않은 옥체가 있어 중종의 옥체인지 가리고자 중종 때 신하와 궁인들을 동원해 확인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미확인 옥체는 관에 넣어 깨끗한 곳에 묻었다.

그리고 성종과 정현왕후, 중종의 유골은 소실된 유회와 재흙을 수습해 각각의 현궁에 봉안했다.

소실된 지석과 옥책은 전주 사고의 실록을 보고 재작성했다.

기록으로 남긴 사고의 중요성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정왕후의 투기와 법석으로 천장을 하고 병풍석을 둘러친 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타는 변고를 겪었다.

만약 세조의 유시대로 회격실로 조영하고 난간석을 설치했다면 어땠을까? 때늦은 유감일 뿐이다.

정릉은 조선시대 왕릉 중 바로 옆의 선릉과 더불어 유일하게 도굴됐다.

특히 중종의 정릉은 천장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문정왕후가 정성 들여 만든 능원이라 대단히 견고한데도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광주목사는 하옥되고 경기관찰사는 파직됐다.

변고 후 정릉을 옛 터(고양)로 다시 옮는 주장도 나왔으나 현장에 재봉안했다    1 많은 개발압력에도 도심을 지켜온 조선 왕릉은 역사경관림으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2 정릉의 석호는 퉁방울눈이 특이하다.

이전 석호와는 다른 형태의 조각이다.

3 임진왜란의 수난을 겪고 500여 년을 지켜온 중종 정릉의 문석인은 할 말이 많은 듯하다   정릉 능침사찰 봉은사에서 두부 만들어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는 794년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후 1498년(연산군 4년)에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개칭했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국가 통치철학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택했으나, 정작 능원을 조영할 때 선왕의 안식과 왕권의 영원성을 위해 사찰을 지었다.

이것이 능침사찰이다.

능침사찰은 조선 초기에는 능원마다 한 곳 이상씩 두었다.

태조 건원릉의 개경사, 신덕왕후 정릉의 흥천사,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의 신륵사, 세조와 정희왕후 광릉의 봉선사가 대표적이다.

특히 중종 때 문정왕후는 정릉을 삼성동으로 천장하고 두부를 만든다는 이유를 대서 봉은사를 중건하고 번성케 했다.

이때 봉은사 주지 스님을 병조판서에 앉히고, 조선시대 내내 시행하지 않던 승과시험을 부활했다.

그리고 승과시험을 봉은사 앞에서 행하기도 했다.

능침사찰은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造泡寺)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능원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두부는 스님 두 분이 만든다.

제례물 중 두부가 쉽게 변질, 부패해 능원 근처의 스님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은 3명의 왕비와 7명의 후궁에게서 9남 11녀를 두었다.

정비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고, 그의 고모와 아버지가 연산군과 관련돼 폐위됐다가 영조 때 복위돼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중종의 제1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1506년 후궁으로 들어와 1507년 왕비가 됐다.

1515년 세자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25세에 승하해 능호를 희릉이라 하고,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지역에 묻혔다.

제2 계비 문정왕후의 무덤은 능호가 태릉이며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정릉(靖陵) -전북도민일보,  2010. 2. 5.                   중종(中宗)은 성종(成宗)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사이에서 성종 19년(1488) 3월 5일에 태어나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1506년 9월 2일 조선(朝鮮) 1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연산군(燕山君)으로 봉해진 이융(李?)은 성종과 계비 숙의윤씨(淑儀尹氏) 사이에서 태어난 성종의 장남으로 중종의 이복형(異腹兄)이다.

  중종과 그 왕비의 능은 총 4기로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제일 많다.

왕후로 책봉된 3명의 부인과 중종의 무덤이 각기 다른 장소에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중종의 무덤 정릉(靖陵), 1499년 신수근(愼守勤)의 딸과 결혼을 하여 즉위 초기에 왕후로 책봉되었다가 후환이 두려운 대신들의 건의로 폐출된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무덤인 온릉(溫陵), 단경왕후를 폐하고 왕후로 책봉한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무덤 희릉(禧陵), 인종(仁宗)을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한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1517년(중종 12)에 왕후로 책봉된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명종(明宗)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무덤 태릉(泰陵) 등이다.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아 어진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뒤섞어 등용하는 바람에 재위 38년 동안 정치적으로 혼란한 때가 더 많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중종이 1544년 11월 15일 유시(酉時)에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서 승하였다.

  당시에 중종의 국장(國葬)때 3가지 논란이 있었다.

첫째는 문정왕후가 대신들과 의논을 하지 않고 빈전(殯殿)의 설치장소를 일방적으로 결정을 한데 있었고, 둘째는 장지(葬地) 문제였다.

  이미 결정된 장지를 두고 다른 곳을 찾아보라는 인종의 지시로 논란이 있었다.

총호사(摠護使) 윤인경(尹仁鏡)이 양주(楊州)·광주(廣州)·고양(高陽)에 있는 장지를 둘러보고 희릉(禧陵) 근처에 쓸 만한 땅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중종이 생전에 보아 두었던 곳으로 인종도 그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인경이 대동하였던 윤림(尹霖)이 처음과는 달리 말을 바꾸는 바람에 다른 장소를 찾아보도록 지시를 하였던 것이다.

  세 번째는 묘호(廟號)를 중종으로 정하였으나, 중종은 공(功)과 덕(德)을 모두 갖추었는데 특히 덕보다는 공이 크니 종호(宗號)보다는 조호(祖號)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인종의 지시 때문이었다.

결국은 논란 끝에 처음에 결정된 대로 묘호는 중종으로, 장지는 희릉의 오른쪽으로 결정이 되어 이듬해 2월 9일에 장사를 지내고 능호(陵號)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이 채 1년도 되기 전에 승하하자 명종은 문정왕후의 지시로 중종의 무덤을 1562년 9월 4일에 선릉(宣陵)의 왼쪽 언덕에 남동향(乾坐巽向)으로 이장을 하였다.

문정왕후는 중종이 장경왕후와 나란히 있음을 시기하고, 사후에 자신이 중종의 옆에 묻히고 싶은 계략으로 이장을 하도록 하였다.

  봉은사(奉恩寺) 주지 보우(普雨)가 밖에서 조종하고, 안에서는 문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친정아우 윤원형(尹元衡)이 이장을 도왔다.

  그러나 정릉을 옮긴 이듬해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는 등 큰 변고가 잇따랐고, 문정왕후의 광중에서 돌이 나와 장지를 태릉(泰陵)으로 옮겨 장사지내니 중종의 옆에 묻히고 싶은 문정왕후는 그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장마 때마다 한강물이 불어나 홍살문까지 범람하여 제사 음식을 배(舟)로 옮겨야 하는 등 피해가 잇따랐고, 급기야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적군들이 능을 파헤치고 광중에 불을 지르는 일이 발생하였다.

대신들이 정릉을 이장한 뒤에 흉한 일이 많으니 희릉 옆으로 다시 옮는 상언을 하여 이장(移葬) 논의가 있었으나 끝내 이루지는 못하였다.

정릉(靖陵) - 11대 중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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