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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



02.21(월) ‘안용복장군 연구소’ 개소_최재훈 기사.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2/21/2007022101063.html ++++++++++++++++++++++++++++++++++++++++++++++++++++++++++++++++++++++++++++++++++++ 그래서, 두 번째 사람으로 소개할 포스트로 12년전 스크랩해두었던 故 ‘이규태先生님’의 “안용복” 글이 생각나서 살펴보았습니다.

--------------------------------------------------------------------------    이규태코너 기사내용 ↓     정조때 편찬된 한국 역사의 분류사인 「증보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에 왜국이 울릉도의 섬들을 자기네의 땅이라고 두번 다시 말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안용복(安龍福)의 공이라고 했다.

     장보고(장보고)가 삼국시대때 바다의 영웅이라면 안용복은 조선시대 바다의 영웅이다.

    동래에서 편모슬하에서 자라던 용복에게 해양 진출의 모험심과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준 것은 그의 사춘기에 있었던 유유(유류)라는 이웃 마을 아가씨와의 로맨스 때문이었다.

가난에 쪼들린 유류는 외삼촌을 따라 다대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중병 때문에 심청이처럼 대마도로 팔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의협심이 대단했던 안용복은 단신 왜지에 들어가 유류를 탈환할 셈으로 무술을 익히는 한편 부산의 왜관 인근을 맴돌며 日本말을 익혔다.

그리고 대마도에 건너갈 기회를 잡고자 수영(수영)의 수군기지에 노젓는 노꾼 곧 수병으로 들어간다.

    숙종 19년(1693) 여름의 일이다.

     ▶ 안용복이 단 한 척의 배로 해양경비의 임무를 띠고      ▷ 울릉도 근해에 갔다가 불법어로를 하던 6척의 일본 어선단에게 납치...      ▷ 지금의 일본땅 시마네껜(도근현)인 백기주의 감사앞에 대령시키자            ▶ 안용복은 울릉도는 우리 땅에서 하루 걸이요 일본 땅에서 닷새 걸이인데 어찌 너희 땅이냐고 대어들었다.

    과오를 자인하고는 유화책을 써 돌려보내고자 은덩이를 주며 회유했으나 막무가내자 앞으로 그같은 분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계(서계)를 써주었다.

외교상 빌미를 잡힐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도중에 그 서계를 빼앗아 파기해버린 것이다.

← <자료> : 1996. 02. 13(화) 5面.     울분을 참지 못하던 안용복은 그 3년후에 송광사 소속 상선을 꾀어 다시 울릉도 근해에 출동해 어로중인 日本 어부들을 붙잡아 국경 침범을 추궁했다.

        ▷ 이에 우리 땅 송도(송도)로 가는 길일뿐 월경이 아니라 하자         ▷ 송도로 끌고 가보니 바로 당시 우산도로 불리던 지금의 독도였다.

        ▶ 그곳에 움막을 짓고 밥을 지어먹고 있는 것을 본 안용복이         ▷ 우산도는 우리 땅이다고 일갈 살림을 박살내고 일본 어부들을 돛대에 묶고서 다시 일본 땅에 들어갔다.

그리고 울릉 우산도 해역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 백기주수의 약속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독도 영토분쟁이 역사상 어느때보다 닳아오르고 있다.

    이 시점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독도를 둔 정부대책이 일개 서민인 안용복만도 못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끝”      <출처>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read_body.jsp?Y=1996&M=02&D=13&ID=9602130505 +++++++++++++++++++++++++++++++++++++++++++++++++++++++++++++++++++++++++++++++++++++++  울릉도 지킨 안용복 그에게 돌아온 건…      日本人들이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를 탐낸 역사는 기록상으로만 봐도 600년이 넘는다.

태종 7년(1407년) 대마도 족장 종정무(宗貞茂)는 사람을 보내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로 옮겨가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조선 조정에 요청했다.

물론 조정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후에도 주로 대마도 사람들이 중심이 된 日本 漁夫들이 종종 울릉도에 출몰해 노략질을 하기도 하면서 울릉도에 머물다 가는 일이 있었다.

     광해군 6년(1614년) 비변사에서는 "대마도 족장이 사신을 보내 자기 사람들이 울릉도에 옮겨가 살도록 해달라는 청을 해왔다"며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속해 있음은 '여지승람'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으니 족장으로 하여금 그 원칙을 준수토록 해야 합니다"고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이렇게 해서 예조에서는 외교문서를 통해 이 점을 대마도 족장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

    이런 엉거주춤한 상황이 조선시대 내내 지속됐다.

만일 숙종 때 안용복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울릉도와 독도는 어영부영하다가 日本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숙종 19년(1693년) 여름 경상도 동래부 수군 소속으로 노를 젓는 노군(櫓軍) 안용복(安龍福)은 표류 끝에 울릉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일본 배 7척이 와서 고기잡이를 하며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울릉도는 우리 땅"이라고 맞섰던 안용복은 일본인들에게 납치돼 오랑도(五浪島)를 거쳐 백기주도라는 섬에 끌려갔다.

    백기주도의 도주(島主)를 만난 안용복은 "울릉도는 조선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며 자신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도주는 안용복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서 에도막부에 이 같은 사실을 보고했고 막부에서는 안용복을 풀어주고 "앞으로 일본인은 더 이상 울릉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금령(禁令)까지 내렸다.

    그런데 귀국하던 안용복은 대마도 족장에게 감금당했고 금령이 담긴 막부의 문건도 빼앗겼다.

50일 동안 대마도에 억류돼 있던 안용복은 동래부 왜관으로 넘겨졌고 여기서도 40여 일간 억류돼 있어야 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왜관에서 풀려난 안용복이 동래부사를 찾아가 전말을 털어놓자 '다른 나라 국경을 범했다'며 안용복을 2년 동안 감옥에 넣어버렸다.

     옥중생활 2년은 오히려 안용복의 국토수호 의지를 더욱 다지는 기간이었다.

        ▶ 숙종 21년 여름 출옥한 그는         ▷ 떠돌이 중 5명과 사공 5명을 규합해 울릉도로 향했다.

    그들이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일본인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울릉도로 들어왔다.

싸움 끝에 일본인들이 도망치자 안용복 일행은 끝까지 추격했다.

이렇게 해서 백기주도에 다시 들어간 안용복은 스스로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을 자처했다.

안용복은 다시 만난 도주(島主)에게 그간의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한 다음 다시는 울릉도를 침범치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해 가을 강원도 양양으로 귀국했다.

                                                            <자료> : 2008.07.19(토) B2面. →     이번에는 강원도관찰사가 안용복의 보고 내용을 조정에 올렸다.

그를 기다린 것은 상이 아니라 중형이었다.

졸지에 안용복 일행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다.

조정에서는 안용복 일행이 불필요한 국경문제를 야기했다며 참형을 시키려 했다.

    다행히 1682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바 있는 정승 윤지완이 나서 막아주었다.

"그동안 대마도 족장의 농간에 놀아났는데 안용복으로 인해 막부와 직접 통할 수 있는 길이 생겼으니 안용복의 공이다.

" 그러나 결국 안용복은 목숨만 겨우 건진 채 귀양을 가야 했다.

울릉도에 대한 조선 조정의 무관심은 그 이후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영조 45년(1769년) 10월 사도세자의 장인이기도 한 영의정 홍봉한이 울릉도 문제와 관련해 올린 글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의 문헌이 부족하여 지금 울릉도의 일에 있어 고증(考證)할 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전후의 문적(文蹟)을 널리 채택하여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서 사대(事大) 교린(交隣)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     홍봉한의 말 중에서 '울릉도'를 '독도'로 바꾸면 지금 상황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그만큼 치밀한 연구조사와 국민들에 대한 계몽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독도를 지금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게 다행이다.

    그러나 실효적 지배를 영속화하려면 안용복에 못지않은 나라 사랑 의지가 필수적이다.

안용복과 함께 울릉도 수호에 나섰던 '떠돌이 중' 5인은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이고, 사공 5인은 유일부, 유봉석, 이인성, 김성길, 김순립이다.

  <자료> :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_2008.07.19(토).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8/2008071800946.html  +++++++++++++++++++++++++++++++++++++++++++++++++++++++++++++++++++++++     안용복은 에도에서 관백을 만났을까? 권오엽 충남대 교수 안용복 일본행 근거 발표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안용복)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ㆍ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숙종실록 30권 9월)’     숙종 22년(1696) 9월 비변사는 조정의 허락없이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돌아온 안용복을 체포ㆍ추궁한다.

당시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진술한 내용은 숙종실록에 그대로 실려있다.

    안용복의 진술 가운데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와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다.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2차례에 걸쳐 일본 땅을 밟는다.

        ▶ 안용복이 말한 근년은         ▷ 1693년의 일로 안용복은         ▷ 나라에서 출입을 금지한 울릉도에서 조업을 하다         ▷ 물개잡이를 하던 日本人에게 납치돼 日本으로 끌려간다.

    안용복은 이후의 일에 대해 “조취번(鳥取藩)에서 심문을 받은 뒤 막부가 있는 강호(江戶=에도, 현재 도쿄)에 가서 관백(일본 막부의 최고책임자)을 만나 울릉도와 자산도(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했다”고 진술한다.

    안용복은 또 “일본 관백이 울릉도와 자산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고 증서를 써줬으나 대마도 사람에게 관백의 서계를 뺐겼다”고 덧붙인다.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은 독도에 대해 ‘무주지선점(無主地先占)’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에 결정적인 반박 근거가 된다.

    안용복이 에도에서 관백을 만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은 독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살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본을 통해 독도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을 허구라고 단정한다.

안용복의 진술만을 미루어 에도에 갔다고 인정할 수 없으며 정부 관리도 아닌 안용복을 일본의 최고실력자가 만났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국내 학계도 그동안 숙종실록에 실린 안용복의 말을 뒷받침할 만할 마땅한 근거가 없어 안용복의 에도행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충남대 권오엽 교수는 8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제3회 한국영토학회 학술토론회에서 발표할 논문 ‘안용복의 도일(渡日)활동에 대한 사적(史的) 검증’을 통해 안용복의 에도행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발표할 예정이다.

    권 교수는 안용복을 납치한 오야(大谷) 가문이 남긴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島度海由來記拔書控)’에서 안용복을 납치해 에도에 보냈다는 구절인 ‘당인강부강어인도 즉강호표어천착 상제순 어증귀(唐人江府江御引渡 則江戶表御穿鑿 相濟順 御贈歸)’를 찾아냈다.

    ‘당인(唐人=조선인)을 에도 막부에 인도하고, 에도 막부는 즉시 심문했다.

조사가 끝나 순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내려주고 귀국시켰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다.

    권 교수는 호키(伯耆 현재 일본 시마네 현 일대)번의 역사를 기록한 이본백기지(異本伯耆志)에서도 안용복의 에도행을 기록한 구절을 발견했다.

    이본백기지에는 ‘명을 받아 무기를 싣고 이르렀다.

조선인이 그 섬의 오사카포(大坂浦)에 숨었다.

남은 두 사람(안용복ㆍ박어둔)이 있었다.

즉시 그들을 잡아 귀항하여 관에 고소했다.

명이 있어 토베에(藤兵衛)가 이인(異人)을 거느리고 본부에 갔다.

번사 가노와 오제키가 수호해 이인을 에도에 불러들였다가 조선으로 보냈다.

그 후 나라에서는 죽도는 조선의 땅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말하기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책은 또 쓰시마 번사(藩士) 히라타 시게 자에몬(平田茂 左衛門)과 로 로쿠로 우에몬(瀧六郞 右衛門)이 “안과 박은 에도에 보내졌다.

에도 막부는 죽도는 조선의 땅으로 그들을 납치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데려 온 자를 참죄에 처했다.

안과 박은 에도에서 대접을 받았는데 쓰시마에서는 점점 죄인처럼 취급됐다”고 말한 내용을 전한다.

    숙종실록과 발해공, 이본백기지 등을 종합하면 안용복을 납치해 심문한 자의 기록, 납치당한 안용복의 진술, 안용복을 조선에 송환시키는 임무를 맡은 쓰시마의 기록 모두가 안용복의 에도행을 인정한 셈이다.

    안용복의 에도행이 사실이라면 안용복이 관백을 만났으며 관백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인정했다는 기록 역시 사실일 수 있다.

    권 교수는 “일본학계는 그동안 안용복을 범법자로 취급하며 그의 진술을 면죄를 위한 발언으로 치부해왔다”며 “이제 편향된 사고를 버리고 안용복의 진술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료> 연합뉴스 : 2007.06.01(일)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01/2007060100793.html  +++++++++++++++++++++++++++++++++++++++++++++++++++++++++++++++++++++++++++++++ 안용복 “일본인은 울릉도 접근말라” 에도 막부와 약속 숙종 때 노를 젓는 병사였다가 울릉도 수호신이 돼… 사공을 규합해 왜적의 침입 막아내 상은 커녕 국경 침범ㆍ관직 사칭으로 사형당할 뻔… 이익 “안용복은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     우리 역사를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자탄을 하게 되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럴 때마다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 그나마 나라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의병이 그런 경우다.

    독도문제로 지금 日本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울릉도도 방치하다시피 해서 일본인이 수시로 점령을 하곤 했다.

실록에 그대로 나온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런 일이 훨씬 잦았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울릉도도 대마도처럼 일본땅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숙종 때 사람 안용복(安龍福)이라는 민초의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따질 것 없이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의 전함에서 노를 젓는 병사인 노군(櫓軍)이었다.

일본인 거주지인 왜관에 드나들면서 일본어를 익혔다고 한다.

    숙종 19년(1693) 여름에 안용복은 표류를 하다가 울릉도에 다달랐다.

        ▶ 그런데 이때 울릉도에서 일본 배 7척이 와서         ▷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안용복은 그에 맞서다가 일본인에게 납치되어 오랑도(五浪島)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 그림·안영태     도주(島主)에게 끌려간 안용복은 “울릉도는 원래 조선에 속한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

그런데 왜 나를 잡아가두고 돌려보내주지 않는가”라고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오랑도 도주는 안용복을 백기주도(伯耆州島)라는 섬으로 넘겨버렸다.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어본 다음 안용복의 말에 동의를 하고서 에도막부에게 그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에도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낼 것을 명했다.

특히 막부는 더 이상 울릉도에 日本人이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까지 담아주었다.

    귀국길에 장기도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도주가 대마도와 작당을 해서 울릉도 침략을 금하는 내용의 문건을 압수하고 안용복은 대마도로 보냈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대마도의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재차 안용복을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대한 접근을 금한다고 밝혔다.

    조선과 일본을 이간질해오던 대마도주는 이번에도 다시 막부의 문건을 빼앗고 안용복을 50일 동안 감금해두었다가 동래부 왜관(倭館)으로 돌려 보낸다.

안용복은 왜관에서도 40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다가 풀려났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 안용복이 이상의 일을 상세하게 동래부에 보고하자         ▷ 동래부사는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죄목을 걸어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상을 줘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옥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울릉도 사수의 전사(戰士)로 다시 태어났다.

        ▶ 숙종 21년 여름 안용복은 떠돌이 중 5명과 사공 6명을 규합해         ▷ 울릉도로 향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필요가 있다.

중 5명은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이고 사공 6명은 흥해 사람 유일부, 영해 사람 유봉석, 평산포 사람 이인성, 낙안 사람 김성길, 연안사람 김순립이다.

    때마침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로 들어왔다.

안용복은 당시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왔던 조선 선원과 함께 일본인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인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용복은 배를 몰아 이들을 끝까지 따라갔다.

  <자료> 주간조선 : 제1933호_2006.12.11_이한우_ 경영기획실 의 朝鮮이야기(12).             <출처>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2/06/2006120677016.html  [출처] 우리나라 사람_독도 守護神(안용복)|작성자 돈키호테 안용복’ 그립습니다 안용복’ 1

2부 ‘일본 땅에 울린 외침’에서는 안용복의 1차 도일(1693) 행적과 이후 울릉도 영유권을 놓고 한·일간 외교전이 치열해지는 시점(1695)까지의 흔적을 살핀다.

‘독도 안용복’ 그...굿데이스포츠 보러가기 오랜 세월을 거치며 독도와 울릉도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불법조업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안용복입니다.

독도 문제에 있어서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이지요.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강한 적에 대항하였다.

왜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하였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하였다.

 이는 부개자와 진탕(중국 한나라의 흉노 정벌 시 활약한 인물들로 서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이 한 일들에 비해서도 더욱 뛰어난 업적으로, 걸출한 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형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까지 보내어 그의 뜻을 꺾고 그를 무함하기에 바빴으니, 애석하구나.-성호 이익, <성호사설> 중에서 안용복은 부산태생의 어부로 원래 어떤 신분이었는지,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사료를 참고한 결과 그가 평민 이하의 신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안용복은 한때 조선 수군으로 근무하며 일본과의 무역을 담당하던 왜관에도 자주 들렀기에 일본어에 능통하였죠. 그가 독도 문제로 일본에 갔다 온 것은 두 차례입니다.

첫 번째는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일본인들과 마주친 것이 발단이지요.안용복은 우리 땅에 일본인들이 왜 들어왔냐며 호통을 칩니다.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울릉도에서 어업을 행해왔고 쇼군에게 받은 허가증까지 있다며 항변했지요. 안용복은 그 허가증 좀 확인하자며 동료인 박어둔과 함께 일본의 오키섬으로 향했다고 일본의 역사서는 기록합니다.

 ?안용복은 오키도주 앞에서도 당당하고 논리정연하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합니다.

당황한 오키도주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일본의 중앙정부라고 할 수 있는 막부에 보내지요. 이때 막부는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 란 편지를 써줍니다.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가 일본 스스로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인한 중요한 사건이지요.  안용복은 9개월 간 일본에서 머물렀고, 대마도에서 50일간, 그리고 부산의 왜관에서 40일 간 갇히게 됩니다.

이때 막부에서 준 편지도 빼앗기지요.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지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었습니다.

안용복과 동료 박어둔은 조정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은 죄목으로 곤장형을 받게 되지요.  안용복을 벌하기는 했지만 조선은 울릉도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대일외교는 강격책으로 변하지요.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 및 고기잡이를 금지하고 장한상이란 사람을 보내 울릉도를 수색케 합니다.

장한상은 조사 이후 <울릉도사적>이란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여기에는 ‘울릉도 동남쪽 300여리에 섬 하나가 있다.

’ ‘일본의 섬은 보이는 것이 없다.

’라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이 섬이 바로 독도입니다.

그리고 독도가 일본의 섬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이지요. 한편 안용복은 벌을 받은 후에도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조선 정부는 강경책을 내세웠지만 협상은 지지부진 했지요. 안용복은 본인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울릉도로 향합니다.

울릉도에서는 여전히 일본어민들이 조업 중이었습니다.

안용복은 본인을 '울릉우산양도감세장'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인들을 쫓아내었음은 물론, 일본의 오키섬을 다시 방문해 오키도주와 담판을 벌입니다.

이번에도 오키도주는 막부에 이에 대한 문제를 보고했고,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사과를 받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안용복에게는 또다시 처벌이 내려집니다.

이번에는 곤장형으로 끝날만한 게 아니었죠. 이미 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었고, 이번에는 본인을 고위관리라고 사칭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영의정 유상운 등을 필두로 한 노론의 대신들은 태종 때부터 내려온 공도정책을 어긴 안용복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남구만 등의 소론 대신들은 국가에서도 제기하기 힘든 문제를 안용복 개인이 해결했음을 높이 사서 죄를 사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결국 안용복은 유배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안용복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요. 안용복에게 벌을 준 것 때문에 당시의 조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사실 조정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숙종 대의 대일외교관계는 매우 복잡했었던 시기입니다.

조선통신사, 쇼군의 명칭문제, 징비록 유출 문제 등이 산적해있었지요. 실제로 실록에서 ‘왜관’이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은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 숙종 대입니다.

조선이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본 문제를 정부의 관리 하에 놓으려고 집중하던 시기지요. 이런 상황에서 웬 평민이 조선 정부 관리의 이름을 칭하여 개인적으로 외교 관계를 결정지으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반 시민이 외교부, 혹은 내무부 관계자임을 주장하며 외국의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만나서 영토 문제에 대해 강하게 항의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고, 처벌의 강도도 이에 맞춰 강해지는 것이 당연하기는 합니다.

단순히 조선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해서 안용복을 귀양 보냈다고 하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이 워낙 복잡했다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관련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론과 소론을 막론한 모든 대신들이 안용복의 공적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죄가 크냐 공이 크냐에 따른 의견 차이일 뿐이었죠.  결과적으로 안용복은 유배당했지만 그가 세운 공은 분명합니다.

이후로 조선은 3년에 한 번씩 울릉도를 조사하도록 공론화하지요. 또한 안용복이 '울릉우산양도감세장'이라고 자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인들이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을 모두 자국의 영토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지요. 무엇보다 안용복의 활약을 통해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후 20세기가 될 때까지 독도에 대한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지요. 한가지 예를 볼까요. 1876년,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질의서를 접수한 일본 내무성은 조사 결과 두 섬은 일본과 관계가 전무하다고 결론짓고, 이듬해 3월 17일 메이지 정부의 최고 결정 기관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하여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승인을 받습니다.

이로서 일본은 근대적 국가로의 영토 재편 과정에서도 오늘날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국외의 땅으로 규정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이 모든 것이 안용복의 활약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독도는 국제법상 일본의 영토로 인정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일본이 반대의 입장에 놓였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안용복은 분명히 정식으로 관직을 받은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공을 생각한다면 장군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입니다.

?현재 울릉도에는 안용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상태지만 홍보 부족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울릉도가 방문하기 쉬운 곳이 아니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보가 너무 부족하지요. 결국 우리들의 관심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안용복] 생각의 끝은?


02.21(월) ‘안용복장군 연구소’ 개소_최재훈 기사.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2/21/2007022101063.html ++++++++++++++++++++++++++++++++++++++++++++++++++++++++++++++++++++++++++++++++++++ 그래서, 두 번째 사람으로 소개할 포스트로 12년전 스크랩해두었던 故 ‘이규태先生님’의 “안용복” 글이 생각나서 살펴보았습니다.

--------------------------------------------------------------------------    이규태코너 기사내용 ↓     정조때 편찬된 한국 역사의 분류사인 「증보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에 왜국이 울릉도의 섬들을 자기네의 땅이라고 두번 다시 말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안용복(安龍福)의 공이라고 했다.

     장보고(장보고)가 삼국시대때 바다의 영웅이라면 안용복은 조선시대 바다의 영웅이다.

    동래에서 편모슬하에서 자라던 용복에게 해양 진출의 모험심과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준 것은 그의 사춘기에 있었던 유유(유류)라는 이웃 마을 아가씨와의 로맨스 때문이었다.

가난에 쪼들린 유류는 외삼촌을 따라 다대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중병 때문에 심청이처럼 대마도로 팔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의협심이 대단했던 안용복은 단신 왜지에 들어가 유류를 탈환할 셈으로 무술을 익히는 한편 부산의 왜관 인근을 맴돌며 日本말을 익혔다.

그리고 대마도에 건너갈 기회를 잡고자 수영(수영)의 수군기지에 노젓는 노꾼 곧 수병으로 들어간다.

    숙종 19년(1693) 여름의 일이다.

     ▶ 안용복이 단 한 척의 배로 해양경비의 임무를 띠고      ▷ 울릉도 근해에 갔다가 불법어로를 하던 6척의 일본 어선단에게 납치...      ▷ 지금의 일본땅 시마네껜(도근현)인 백기주의 감사앞에 대령시키자            ▶ 안용복은 울릉도는 우리 땅에서 하루 걸이요 일본 땅에서 닷새 걸이인데 어찌 너희 땅이냐고 대어들었다.

    과오를 자인하고는 유화책을 써 돌려보내고자 은덩이를 주며 회유했으나 막무가내자 앞으로 그같은 분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계(서계)를 써주었다.

외교상 빌미를 잡힐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도중에 그 서계를 빼앗아 파기해버린 것이다.

← <자료> : 1996. 02. 13(화) 5面.     울분을 참지 못하던 안용복은 그 3년후에 송광사 소속 상선을 꾀어 다시 울릉도 근해에 출동해 어로중인 日本 어부들을 붙잡아 국경 침범을 추궁했다.

        ▷ 이에 우리 땅 송도(송도)로 가는 길일뿐 월경이 아니라 하자         ▷ 송도로 끌고 가보니 바로 당시 우산도로 불리던 지금의 독도였다.

        ▶ 그곳에 움막을 짓고 밥을 지어먹고 있는 것을 본 안용복이         ▷ 우산도는 우리 땅이다고 일갈 살림을 박살내고 일본 어부들을 돛대에 묶고서 다시 일본 땅에 들어갔다.

그리고 울릉 우산도 해역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 백기주수의 약속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독도 영토분쟁이 역사상 어느때보다 닳아오르고 있다.

    이 시점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독도를 둔 정부대책이 일개 서민인 안용복만도 못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끝”      <출처>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read_body.jsp?Y=1996&M=02&D=13&ID=9602130505 +++++++++++++++++++++++++++++++++++++++++++++++++++++++++++++++++++++++++++++++++++++++  울릉도 지킨 안용복 그에게 돌아온 건…      日本人들이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를 탐낸 역사는 기록상으로만 봐도 600년이 넘는다.

태종 7년(1407년) 대마도 족장 종정무(宗貞茂)는 사람을 보내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로 옮겨가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조선 조정에 요청했다.

물론 조정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후에도 주로 대마도 사람들이 중심이 된 日本 漁夫들이 종종 울릉도에 출몰해 노략질을 하기도 하면서 울릉도에 머물다 가는 일이 있었다.

     광해군 6년(1614년) 비변사에서는 "대마도 족장이 사신을 보내 자기 사람들이 울릉도에 옮겨가 살도록 해달라는 청을 해왔다"며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속해 있음은 '여지승람'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으니 족장으로 하여금 그 원칙을 준수토록 해야 합니다"고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이렇게 해서 예조에서는 외교문서를 통해 이 점을 대마도 족장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

    이런 엉거주춤한 상황이 조선시대 내내 지속됐다.

만일 숙종 때 안용복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울릉도와 독도는 어영부영하다가 日本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숙종 19년(1693년) 여름 경상도 동래부 수군 소속으로 노를 젓는 노군(櫓軍) 안용복(安龍福)은 표류 끝에 울릉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일본 배 7척이 와서 고기잡이를 하며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울릉도는 우리 땅"이라고 맞섰던 안용복은 일본인들에게 납치돼 오랑도(五浪島)를 거쳐 백기주도라는 섬에 끌려갔다.

    백기주도의 도주(島主)를 만난 안용복은 "울릉도는 조선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며 자신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도주는 안용복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서 에도막부에 이 같은 사실을 보고했고 막부에서는 안용복을 풀어주고 "앞으로 일본인은 더 이상 울릉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금령(禁令)까지 내렸다.

    그런데 귀국하던 안용복은 대마도 족장에게 감금당했고 금령이 담긴 막부의 문건도 빼앗겼다.

50일 동안 대마도에 억류돼 있던 안용복은 동래부 왜관으로 넘겨졌고 여기서도 40여 일간 억류돼 있어야 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왜관에서 풀려난 안용복이 동래부사를 찾아가 전말을 털어놓자 '다른 나라 국경을 범했다'며 안용복을 2년 동안 감옥에 넣어버렸다.

     옥중생활 2년은 오히려 안용복의 국토수호 의지를 더욱 다지는 기간이었다.

        ▶ 숙종 21년 여름 출옥한 그는         ▷ 떠돌이 중 5명과 사공 5명을 규합해 울릉도로 향했다.

    그들이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일본인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울릉도로 들어왔다.

싸움 끝에 일본인들이 도망치자 안용복 일행은 끝까지 추격했다.

이렇게 해서 백기주도에 다시 들어간 안용복은 스스로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을 자처했다.

안용복은 다시 만난 도주(島主)에게 그간의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한 다음 다시는 울릉도를 침범치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해 가을 강원도 양양으로 귀국했다.

                                                            <자료> : 2008.07.19(토) B2面. →     이번에는 강원도관찰사가 안용복의 보고 내용을 조정에 올렸다.

그를 기다린 것은 상이 아니라 중형이었다.

졸지에 안용복 일행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다.

조정에서는 안용복 일행이 불필요한 국경문제를 야기했다며 참형을 시키려 했다.

    다행히 1682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바 있는 정승 윤지완이 나서 막아주었다.

"그동안 대마도 족장의 농간에 놀아났는데 안용복으로 인해 막부와 직접 통할 수 있는 길이 생겼으니 안용복의 공이다.

" 그러나 결국 안용복은 목숨만 겨우 건진 채 귀양을 가야 했다.

울릉도에 대한 조선 조정의 무관심은 그 이후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영조 45년(1769년) 10월 사도세자의 장인이기도 한 영의정 홍봉한이 울릉도 문제와 관련해 올린 글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의 문헌이 부족하여 지금 울릉도의 일에 있어 고증(考證)할 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전후의 문적(文蹟)을 널리 채택하여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서 사대(事大) 교린(交隣)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     홍봉한의 말 중에서 '울릉도'를 '독도'로 바꾸면 지금 상황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그만큼 치밀한 연구조사와 국민들에 대한 계몽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독도를 지금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게 다행이다.

    그러나 실효적 지배를 영속화하려면 안용복에 못지않은 나라 사랑 의지가 필수적이다.

안용복과 함께 울릉도 수호에 나섰던 '떠돌이 중' 5인은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이고, 사공 5인은 유일부, 유봉석, 이인성, 김성길, 김순립이다.

  <자료> :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_2008.07.19(토).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8/2008071800946.html  +++++++++++++++++++++++++++++++++++++++++++++++++++++++++++++++++++++++     안용복은 에도에서 관백을 만났을까? 권오엽 충남대 교수 안용복 일본행 근거 발표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안용복)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ㆍ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숙종실록 30권 9월)’     숙종 22년(1696) 9월 비변사는 조정의 허락없이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돌아온 안용복을 체포ㆍ추궁한다.

당시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진술한 내용은 숙종실록에 그대로 실려있다.

    안용복의 진술 가운데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와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다.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2차례에 걸쳐 일본 땅을 밟는다.

        ▶ 안용복이 말한 근년은         ▷ 1693년의 일로 안용복은         ▷ 나라에서 출입을 금지한 울릉도에서 조업을 하다         ▷ 물개잡이를 하던 日本人에게 납치돼 日本으로 끌려간다.

    안용복은 이후의 일에 대해 “조취번(鳥取藩)에서 심문을 받은 뒤 막부가 있는 강호(江戶=에도, 현재 도쿄)에 가서 관백(일본 막부의 최고책임자)을 만나 울릉도와 자산도(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했다”고 진술한다.

    안용복은 또 “일본 관백이 울릉도와 자산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고 증서를 써줬으나 대마도 사람에게 관백의 서계를 뺐겼다”고 덧붙인다.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은 독도에 대해 ‘무주지선점(無主地先占)’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에 결정적인 반박 근거가 된다.

    안용복이 에도에서 관백을 만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은 독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살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본을 통해 독도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을 허구라고 단정한다.

안용복의 진술만을 미루어 에도에 갔다고 인정할 수 없으며 정부 관리도 아닌 안용복을 일본의 최고실력자가 만났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국내 학계도 그동안 숙종실록에 실린 안용복의 말을 뒷받침할 만할 마땅한 근거가 없어 안용복의 에도행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충남대 권오엽 교수는 8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제3회 한국영토학회 학술토론회에서 발표할 논문 ‘안용복의 도일(渡日)활동에 대한 사적(史的) 검증’을 통해 안용복의 에도행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발표할 예정이다.

    권 교수는 안용복을 납치한 오야(大谷) 가문이 남긴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島度海由來記拔書控)’에서 안용복을 납치해 에도에 보냈다는 구절인 ‘당인강부강어인도 즉강호표어천착 상제순 어증귀(唐人江府江御引渡 則江戶表御穿鑿 相濟順 御贈歸)’를 찾아냈다.

    ‘당인(唐人=조선인)을 에도 막부에 인도하고, 에도 막부는 즉시 심문했다.

조사가 끝나 순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내려주고 귀국시켰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다.

    권 교수는 호키(伯耆 현재 일본 시마네 현 일대)번의 역사를 기록한 이본백기지(異本伯耆志)에서도 안용복의 에도행을 기록한 구절을 발견했다.

    이본백기지에는 ‘명을 받아 무기를 싣고 이르렀다.

조선인이 그 섬의 오사카포(大坂浦)에 숨었다.

남은 두 사람(안용복ㆍ박어둔)이 있었다.

즉시 그들을 잡아 귀항하여 관에 고소했다.

명이 있어 토베에(藤兵衛)가 이인(異人)을 거느리고 본부에 갔다.

번사 가노와 오제키가 수호해 이인을 에도에 불러들였다가 조선으로 보냈다.

그 후 나라에서는 죽도는 조선의 땅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말하기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책은 또 쓰시마 번사(藩士) 히라타 시게 자에몬(平田茂 左衛門)과 로 로쿠로 우에몬(瀧六郞 右衛門)이 “안과 박은 에도에 보내졌다.

에도 막부는 죽도는 조선의 땅으로 그들을 납치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데려 온 자를 참죄에 처했다.

안과 박은 에도에서 대접을 받았는데 쓰시마에서는 점점 죄인처럼 취급됐다”고 말한 내용을 전한다.

    숙종실록과 발해공, 이본백기지 등을 종합하면 안용복을 납치해 심문한 자의 기록, 납치당한 안용복의 진술, 안용복을 조선에 송환시키는 임무를 맡은 쓰시마의 기록 모두가 안용복의 에도행을 인정한 셈이다.

    안용복의 에도행이 사실이라면 안용복이 관백을 만났으며 관백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인정했다는 기록 역시 사실일 수 있다.

[안용복] 세상에. 왜..



    권 교수는 “일본학계는 그동안 안용복을 범법자로 취급하며 그의 진술을 면죄를 위한 발언으로 치부해왔다”며 “이제 편향된 사고를 버리고 안용복의 진술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료> 연합뉴스 : 2007.06.01(일)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01/2007060100793.html  +++++++++++++++++++++++++++++++++++++++++++++++++++++++++++++++++++++++++++++++ 안용복 “일본인은 울릉도 접근말라” 에도 막부와 약속 숙종 때 노를 젓는 병사였다가 울릉도 수호신이 돼… 사공을 규합해 왜적의 침입 막아내 상은 커녕 국경 침범ㆍ관직 사칭으로 사형당할 뻔… 이익 “안용복은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     우리 역사를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자탄을 하게 되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럴 때마다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 그나마 나라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의병이 그런 경우다.

    독도문제로 지금 日本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울릉도도 방치하다시피 해서 일본인이 수시로 점령을 하곤 했다.

실록에 그대로 나온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런 일이 훨씬 잦았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울릉도도 대마도처럼 일본땅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숙종 때 사람 안용복(安龍福)이라는 민초의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따질 것 없이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의 전함에서 노를 젓는 병사인 노군(櫓軍)이었다.

일본인 거주지인 왜관에 드나들면서 일본어를 익혔다고 한다.

    숙종 19년(1693) 여름에 안용복은 표류를 하다가 울릉도에 다달랐다.

        ▶ 그런데 이때 울릉도에서 일본 배 7척이 와서         ▷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안용복은 그에 맞서다가 일본인에게 납치되어 오랑도(五浪島)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 그림·안영태     도주(島主)에게 끌려간 안용복은 “울릉도는 원래 조선에 속한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

그런데 왜 나를 잡아가두고 돌려보내주지 않는가”라고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오랑도 도주는 안용복을 백기주도(伯耆州島)라는 섬으로 넘겨버렸다.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어본 다음 안용복의 말에 동의를 하고서 에도막부에게 그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에도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낼 것을 명했다.

특히 막부는 더 이상 울릉도에 日本人이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까지 담아주었다.

    귀국길에 장기도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도주가 대마도와 작당을 해서 울릉도 침략을 금하는 내용의 문건을 압수하고 안용복은 대마도로 보냈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대마도의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재차 안용복을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대한 접근을 금한다고 밝혔다.

    조선과 일본을 이간질해오던 대마도주는 이번에도 다시 막부의 문건을 빼앗고 안용복을 50일 동안 감금해두었다가 동래부 왜관(倭館)으로 돌려 보낸다.

안용복은 왜관에서도 40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다가 풀려났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 안용복이 이상의 일을 상세하게 동래부에 보고하자         ▷ 동래부사는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죄목을 걸어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상을 줘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옥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울릉도 사수의 전사(戰士)로 다시 태어났다.

        ▶ 숙종 21년 여름 안용복은 떠돌이 중 5명과 사공 6명을 규합해         ▷ 울릉도로 향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필요가 있다.

중 5명은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이고 사공 6명은 흥해 사람 유일부, 영해 사람 유봉석, 평산포 사람 이인성, 낙안 사람 김성길, 연안사람 김순립이다.

    때마침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로 들어왔다.

안용복은 당시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왔던 조선 선원과 함께 일본인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인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용복은 배를 몰아 이들을 끝까지 따라갔다.

  <자료> 주간조선 : 제1933호_2006.12.11_이한우_ 경영기획실 의 朝鮮이야기(12).             <출처>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2/06/2006120677016.html  [출처] 우리나라 사람_독도 守護神(안용복)|작성자 돈키호테 오랜 세월을 거치며 독도와 울릉도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불법조업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안용복입니다.

독도 문제에 있어서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이지요.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강한 적에 대항하였다.

왜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하였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하였다.

 이는 부개자와 진탕(중국 한나라의 흉노 정벌 시 활약한 인물들로 서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이 한 일들에 비해서도 더욱 뛰어난 업적으로, 걸출한 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형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까지 보내어 그의 뜻을 꺾고 그를 무함하기에 바빴으니, 애석하구나.-성호 이익, <성호사설> 중에서 안용복은 부산태생의 어부로 원래 어떤 신분이었는지,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사료를 참고한 결과 그가 평민 이하의 신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안용복은 한때 조선 수군으로 근무하며 일본과의 무역을 담당하던 왜관에도 자주 들렀기에 일본어에 능통하였죠. 그가 독도 문제로 일본에 갔다 온 것은 두 차례입니다.

첫 번째는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일본인들과 마주친 것이 발단이지요.안용복은 우리 땅에 일본인들이 왜 들어왔냐며 호통을 칩니다.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울릉도에서 어업을 행해왔고 쇼군에게 받은 허가증까지 있다며 항변했지요. 안용복은 그 허가증 좀 확인하자며 동료인 박어둔과 함께 일본의 오키섬으로 향했다고 일본의 역사서는 기록합니다.

 ?안용복은 오키도주 앞에서도 당당하고 논리정연하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합니다.

당황한 오키도주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일본의 중앙정부라고 할 수 있는 막부에 보내지요. 이때 막부는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 란 편지를 써줍니다.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가 일본 스스로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인한 중요한 사건이지요.  안용복은 9개월 간 일본에서 머물렀고, 대마도에서 50일간, 그리고 부산의 왜관에서 40일 간 갇히게 됩니다.

이때 막부에서 준 편지도 빼앗기지요.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지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었습니다.

안용복과 동료 박어둔은 조정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은 죄목으로 곤장형을 받게 되지요.  안용복을 벌하기는 했지만 조선은 울릉도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대일외교는 강격책으로 변하지요.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 및 고기잡이를 금지하고 장한상이란 사람을 보내 울릉도를 수색케 합니다.

장한상은 조사 이후 <울릉도사적>이란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여기에는 ‘울릉도 동남쪽 300여리에 섬 하나가 있다.

’ ‘일본의 섬은 보이는 것이 없다.

’라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이 섬이 바로 독도입니다.

그리고 독도가 일본의 섬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이지요. 한편 안용복은 벌을 받은 후에도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조선 정부는 강경책을 내세웠지만 협상은 지지부진 했지요. 안용복은 본인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울릉도로 향합니다.

울릉도에서는 여전히 일본어민들이 조업 중이었습니다.

안용복은 본인을 '울릉우산양도감세장'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인들을 쫓아내었음은 물론, 일본의 오키섬을 다시 방문해 오키도주와 담판을 벌입니다.

이번에도 오키도주는 막부에 이에 대한 문제를 보고했고,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사과를 받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안용복에게는 또다시 처벌이 내려집니다.

이번에는 곤장형으로 끝날만한 게 아니었죠. 이미 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었고, 이번에는 본인을 고위관리라고 사칭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영의정 유상운 등을 필두로 한 노론의 대신들은 태종 때부터 내려온 공도정책을 어긴 안용복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남구만 등의 소론 대신들은 국가에서도 제기하기 힘든 문제를 안용복 개인이 해결했음을 높이 사서 죄를 사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결국 안용복은 유배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안용복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요. 안용복에게 벌을 준 것 때문에 당시의 조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사실 조정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숙종 대의 대일외교관계는 매우 복잡했었던 시기입니다.

조선통신사, 쇼군의 명칭문제, 징비록 유출 문제 등이 산적해있었지요. 실제로 실록에서 ‘왜관’이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은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 숙종 대입니다.

조선이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본 문제를 정부의 관리 하에 놓으려고 집중하던 시기지요. 이런 상황에서 웬 평민이 조선 정부 관리의 이름을 칭하여 개인적으로 외교 관계를 결정지으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반 시민이 외교부, 혹은 내무부 관계자임을 주장하며 외국의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만나서 영토 문제에 대해 강하게 항의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고, 처벌의 강도도 이에 맞춰 강해지는 것이 당연하기는 합니다.

단순히 조선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해서 안용복을 귀양 보냈다고 하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이 워낙 복잡했다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관련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론과 소론을 막론한 모든 대신들이 안용복의 공적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죄가 크냐 공이 크냐에 따른 의견 차이일 뿐이었죠.  결과적으로 안용복은 유배당했지만 그가 세운 공은 분명합니다.

이후로 조선은 3년에 한 번씩 울릉도를 조사하도록 공론화하지요. 또한 안용복이 '울릉우산양도감세장'이라고 자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인들이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을 모두 자국의 영토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지요. 무엇보다 안용복의 활약을 통해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후 20세기가 될 때까지 독도에 대한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지요. 한가지 예를 볼까요. 1876년,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질의서를 접수한 일본 내무성은 조사 결과 두 섬은 일본과 관계가 전무하다고 결론짓고, 이듬해 3월 17일 메이지 정부의 최고 결정 기관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하여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승인을 받습니다.

이로서 일본은 근대적 국가로의 영토 재편 과정에서도 오늘날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국외의 땅으로 규정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이 모든 것이 안용복의 활약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독도는 국제법상 일본의 영토로 인정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일본이 반대의 입장에 놓였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안용복은 분명히 정식으로 관직을 받은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공을 생각한다면 장군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입니다.

?현재 울릉도에는 안용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상태지만 홍보 부족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울릉도가 방문하기 쉬운 곳이 아니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보가 너무 부족하지요. 결국 우리들의 관심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02.21(월) ‘안용복장군 연구소’ 개소_최재훈 기사.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2/21/2007022101063.html ++++++++++++++++++++++++++++++++++++++++++++++++++++++++++++++++++++++++++++++++++++ 그래서, 두 번째 사람으로 소개할 포스트로 12년전 스크랩해두었던 故 ‘이규태先生님’의 “안용복” 글이 생각나서 살펴보았습니다.

--------------------------------------------------------------------------    이규태코너 기사내용 ↓     정조때 편찬된 한국 역사의 분류사인 「증보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에 왜국이 울릉도의 섬들을 자기네의 땅이라고 두번 다시 말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안용복(安龍福)의 공이라고 했다.

     장보고(장보고)가 삼국시대때 바다의 영웅이라면 안용복은 조선시대 바다의 영웅이다.

    동래에서 편모슬하에서 자라던 용복에게 해양 진출의 모험심과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준 것은 그의 사춘기에 있었던 유유(유류)라는 이웃 마을 아가씨와의 로맨스 때문이었다.

가난에 쪼들린 유류는 외삼촌을 따라 다대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중병 때문에 심청이처럼 대마도로 팔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의협심이 대단했던 안용복은 단신 왜지에 들어가 유류를 탈환할 셈으로 무술을 익히는 한편 부산의 왜관 인근을 맴돌며 日本말을 익혔다.

그리고 대마도에 건너갈 기회를 잡고자 수영(수영)의 수군기지에 노젓는 노꾼 곧 수병으로 들어간다.

    숙종 19년(1693) 여름의 일이다.

     ▶ 안용복이 단 한 척의 배로 해양경비의 임무를 띠고      ▷ 울릉도 근해에 갔다가 불법어로를 하던 6척의 일본 어선단에게 납치...      ▷ 지금의 일본땅 시마네껜(도근현)인 백기주의 감사앞에 대령시키자            ▶ 안용복은 울릉도는 우리 땅에서 하루 걸이요 일본 땅에서 닷새 걸이인데 어찌 너희 땅이냐고 대어들었다.

    과오를 자인하고는 유화책을 써 돌려보내고자 은덩이를 주며 회유했으나 막무가내자 앞으로 그같은 분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계(서계)를 써주었다.

외교상 빌미를 잡힐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도중에 그 서계를 빼앗아 파기해버린 것이다.

← <자료> : 1996. 02. 13(화) 5面.     울분을 참지 못하던 안용복은 그 3년후에 송광사 소속 상선을 꾀어 다시 울릉도 근해에 출동해 어로중인 日本 어부들을 붙잡아 국경 침범을 추궁했다.

        ▷ 이에 우리 땅 송도(송도)로 가는 길일뿐 월경이 아니라 하자         ▷ 송도로 끌고 가보니 바로 당시 우산도로 불리던 지금의 독도였다.

        ▶ 그곳에 움막을 짓고 밥을 지어먹고 있는 것을 본 안용복이         ▷ 우산도는 우리 땅이다고 일갈 살림을 박살내고 일본 어부들을 돛대에 묶고서 다시 일본 땅에 들어갔다.

그리고 울릉 우산도 해역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 백기주수의 약속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독도 영토분쟁이 역사상 어느때보다 닳아오르고 있다.

    이 시점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독도를 둔 정부대책이 일개 서민인 안용복만도 못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끝”      <출처>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read_body.jsp?Y=1996&M=02&D=13&ID=9602130505 +++++++++++++++++++++++++++++++++++++++++++++++++++++++++++++++++++++++++++++++++++++++  울릉도 지킨 안용복 그에게 돌아온 건…      日本人들이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를 탐낸 역사는 기록상으로만 봐도 600년이 넘는다.

태종 7년(1407년) 대마도 족장 종정무(宗貞茂)는 사람을 보내 대마도 사람들이 울릉도로 옮겨가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조선 조정에 요청했다.

물론 조정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후에도 주로 대마도 사람들이 중심이 된 日本 漁夫들이 종종 울릉도에 출몰해 노략질을 하기도 하면서 울릉도에 머물다 가는 일이 있었다.

     광해군 6년(1614년) 비변사에서는 "대마도 족장이 사신을 보내 자기 사람들이 울릉도에 옮겨가 살도록 해달라는 청을 해왔다"며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속해 있음은 '여지승람'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으니 족장으로 하여금 그 원칙을 준수토록 해야 합니다"고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이렇게 해서 예조에서는 외교문서를 통해 이 점을 대마도 족장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

    이런 엉거주춤한 상황이 조선시대 내내 지속됐다.

만일 숙종 때 안용복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울릉도와 독도는 어영부영하다가 日本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숙종 19년(1693년) 여름 경상도 동래부 수군 소속으로 노를 젓는 노군(櫓軍) 안용복(安龍福)은 표류 끝에 울릉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일본 배 7척이 와서 고기잡이를 하며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울릉도는 우리 땅"이라고 맞섰던 안용복은 일본인들에게 납치돼 오랑도(五浪島)를 거쳐 백기주도라는 섬에 끌려갔다.

    백기주도의 도주(島主)를 만난 안용복은 "울릉도는 조선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며 자신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도주는 안용복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서 에도막부에 이 같은 사실을 보고했고 막부에서는 안용복을 풀어주고 "앞으로 일본인은 더 이상 울릉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금령(禁令)까지 내렸다.

    그런데 귀국하던 안용복은 대마도 족장에게 감금당했고 금령이 담긴 막부의 문건도 빼앗겼다.

50일 동안 대마도에 억류돼 있던 안용복은 동래부 왜관으로 넘겨졌고 여기서도 40여 일간 억류돼 있어야 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왜관에서 풀려난 안용복이 동래부사를 찾아가 전말을 털어놓자 '다른 나라 국경을 범했다'며 안용복을 2년 동안 감옥에 넣어버렸다.

     옥중생활 2년은 오히려 안용복의 국토수호 의지를 더욱 다지는 기간이었다.

        ▶ 숙종 21년 여름 출옥한 그는         ▷ 떠돌이 중 5명과 사공 5명을 규합해 울릉도로 향했다.

    그들이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마침 일본인들이 고기잡이를 위해 울릉도로 들어왔다.

싸움 끝에 일본인들이 도망치자 안용복 일행은 끝까지 추격했다.

이렇게 해서 백기주도에 다시 들어간 안용복은 스스로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을 자처했다.

안용복은 다시 만난 도주(島主)에게 그간의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한 다음 다시는 울릉도를 침범치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해 가을 강원도 양양으로 귀국했다.

                                                            <자료> : 2008.07.19(토) B2面. →     이번에는 강원도관찰사가 안용복의 보고 내용을 조정에 올렸다.

그를 기다린 것은 상이 아니라 중형이었다.

졸지에 안용복 일행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다.

조정에서는 안용복 일행이 불필요한 국경문제를 야기했다며 참형을 시키려 했다.

    다행히 1682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바 있는 정승 윤지완이 나서 막아주었다.

"그동안 대마도 족장의 농간에 놀아났는데 안용복으로 인해 막부와 직접 통할 수 있는 길이 생겼으니 안용복의 공이다.

" 그러나 결국 안용복은 목숨만 겨우 건진 채 귀양을 가야 했다.

울릉도에 대한 조선 조정의 무관심은 그 이후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영조 45년(1769년) 10월 사도세자의 장인이기도 한 영의정 홍봉한이 울릉도 문제와 관련해 올린 글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의 문헌이 부족하여 지금 울릉도의 일에 있어 고증(考證)할 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전후의 문적(文蹟)을 널리 채택하여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서 사대(事大) 교린(交隣)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     홍봉한의 말 중에서 '울릉도'를 '독도'로 바꾸면 지금 상황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그만큼 치밀한 연구조사와 국민들에 대한 계몽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독도를 지금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게 다행이다.

    그러나 실효적 지배를 영속화하려면 안용복에 못지않은 나라 사랑 의지가 필수적이다.

안용복과 함께 울릉도 수호에 나섰던 '떠돌이 중' 5인은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이고, 사공 5인은 유일부, 유봉석, 이인성, 김성길, 김순립이다.

  <자료> :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_2008.07.19(토).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8/2008071800946.html  +++++++++++++++++++++++++++++++++++++++++++++++++++++++++++++++++++++++     안용복은 에도에서 관백을 만났을까? 권오엽 충남대 교수 안용복 일본행 근거 발표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안용복)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ㆍ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숙종실록 30권 9월)’     숙종 22년(1696) 9월 비변사는 조정의 허락없이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돌아온 안용복을 체포ㆍ추궁한다.

당시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진술한 내용은 숙종실록에 그대로 실려있다.

    안용복의 진술 가운데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와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다.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2차례에 걸쳐 일본 땅을 밟는다.

        ▶ 안용복이 말한 근년은         ▷ 1693년의 일로 안용복은         ▷ 나라에서 출입을 금지한 울릉도에서 조업을 하다         ▷ 물개잡이를 하던 日本人에게 납치돼 日本으로 끌려간다.

    안용복은 이후의 일에 대해 “조취번(鳥取藩)에서 심문을 받은 뒤 막부가 있는 강호(江戶=에도, 현재 도쿄)에 가서 관백(일본 막부의 최고책임자)을 만나 울릉도와 자산도(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했다”고 진술한다.

    안용복은 또 “일본 관백이 울릉도와 자산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고 증서를 써줬으나 대마도 사람에게 관백의 서계를 뺐겼다”고 덧붙인다.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은 독도에 대해 ‘무주지선점(無主地先占)’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에 결정적인 반박 근거가 된다.

    안용복이 에도에서 관백을 만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은 독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살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본을 통해 독도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을 허구라고 단정한다.

안용복의 진술만을 미루어 에도에 갔다고 인정할 수 없으며 정부 관리도 아닌 안용복을 일본의 최고실력자가 만났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국내 학계도 그동안 숙종실록에 실린 안용복의 말을 뒷받침할 만할 마땅한 근거가 없어 안용복의 에도행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충남대 권오엽 교수는 8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제3회 한국영토학회 학술토론회에서 발표할 논문 ‘안용복의 도일(渡日)활동에 대한 사적(史的) 검증’을 통해 안용복의 에도행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발표할 예정이다.

    권 교수는 안용복을 납치한 오야(大谷) 가문이 남긴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島度海由來記拔書控)’에서 안용복을 납치해 에도에 보냈다는 구절인 ‘당인강부강어인도 즉강호표어천착 상제순 어증귀(唐人江府江御引渡 則江戶表御穿鑿 相濟順 御贈歸)’를 찾아냈다.

    ‘당인(唐人=조선인)을 에도 막부에 인도하고, 에도 막부는 즉시 심문했다.

조사가 끝나 순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내려주고 귀국시켰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다.

    권 교수는 호키(伯耆 현재 일본 시마네 현 일대)번의 역사를 기록한 이본백기지(異本伯耆志)에서도 안용복의 에도행을 기록한 구절을 발견했다.

    이본백기지에는 ‘명을 받아 무기를 싣고 이르렀다.

조선인이 그 섬의 오사카포(大坂浦)에 숨었다.

남은 두 사람(안용복ㆍ박어둔)이 있었다.

즉시 그들을 잡아 귀항하여 관에 고소했다.

명이 있어 토베에(藤兵衛)가 이인(異人)을 거느리고 본부에 갔다.

번사 가노와 오제키가 수호해 이인을 에도에 불러들였다가 조선으로 보냈다.

그 후 나라에서는 죽도는 조선의 땅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말하기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책은 또 쓰시마 번사(藩士) 히라타 시게 자에몬(平田茂 左衛門)과 로 로쿠로 우에몬(瀧六郞 右衛門)이 “안과 박은 에도에 보내졌다.

에도 막부는 죽도는 조선의 땅으로 그들을 납치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데려 온 자를 참죄에 처했다.

안과 박은 에도에서 대접을 받았는데 쓰시마에서는 점점 죄인처럼 취급됐다”고 말한 내용을 전한다.

    숙종실록과 발해공, 이본백기지 등을 종합하면 안용복을 납치해 심문한 자의 기록, 납치당한 안용복의 진술, 안용복을 조선에 송환시키는 임무를 맡은 쓰시마의 기록 모두가 안용복의 에도행을 인정한 셈이다.

    안용복의 에도행이 사실이라면 안용복이 관백을 만났으며 관백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인정했다는 기록 역시 사실일 수 있다.

    권 교수는 “일본학계는 그동안 안용복을 범법자로 취급하며 그의 진술을 면죄를 위한 발언으로 치부해왔다”며 “이제 편향된 사고를 버리고 안용복의 진술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료> 연합뉴스 : 2007.06.01(일)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01/2007060100793.html  +++++++++++++++++++++++++++++++++++++++++++++++++++++++++++++++++++++++++++++++ 안용복 “일본인은 울릉도 접근말라” 에도 막부와 약속 숙종 때 노를 젓는 병사였다가 울릉도 수호신이 돼… 사공을 규합해 왜적의 침입 막아내 상은 커녕 국경 침범ㆍ관직 사칭으로 사형당할 뻔… 이익 “안용복은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     우리 역사를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자탄을 하게 되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럴 때마다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 그나마 나라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의병이 그런 경우다.

    독도문제로 지금 日本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울릉도도 방치하다시피 해서 일본인이 수시로 점령을 하곤 했다.

실록에 그대로 나온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런 일이 훨씬 잦았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울릉도도 대마도처럼 일본땅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숙종 때 사람 안용복(安龍福)이라는 민초의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따질 것 없이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의 전함에서 노를 젓는 병사인 노군(櫓軍)이었다.

일본인 거주지인 왜관에 드나들면서 일본어를 익혔다고 한다.

    숙종 19년(1693) 여름에 안용복은 표류를 하다가 울릉도에 다달랐다.

        ▶ 그런데 이때 울릉도에서 일본 배 7척이 와서         ▷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안용복은 그에 맞서다가 일본인에게 납치되어 오랑도(五浪島)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 그림·안영태     도주(島主)에게 끌려간 안용복은 “울릉도는 원래 조선에 속한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

그런데 왜 나를 잡아가두고 돌려보내주지 않는가”라고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오랑도 도주는 안용복을 백기주도(伯耆州島)라는 섬으로 넘겨버렸다.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어본 다음 안용복의 말에 동의를 하고서 에도막부에게 그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에도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낼 것을 명했다.

특히 막부는 더 이상 울릉도에 日本人이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까지 담아주었다.

    귀국길에 장기도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도주가 대마도와 작당을 해서 울릉도 침략을 금하는 내용의 문건을 압수하고 안용복은 대마도로 보냈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대마도의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재차 안용복을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대한 접근을 금한다고 밝혔다.

    조선과 일본을 이간질해오던 대마도주는 이번에도 다시 막부의 문건을 빼앗고 안용복을 50일 동안 감금해두었다가 동래부 왜관(倭館)으로 돌려 보낸다.

안용복은 왜관에서도 40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다가 풀려났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 안용복이 이상의 일을 상세하게 동래부에 보고하자         ▷ 동래부사는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죄목을 걸어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상을 줘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옥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울릉도 사수의 전사(戰士)로 다시 태어났다.

        ▶ 숙종 21년 여름 안용복은 떠돌이 중 5명과 사공 6명을 규합해         ▷ 울릉도로 향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필요가 있다.

중 5명은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이고 사공 6명은 흥해 사람 유일부, 영해 사람 유봉석, 평산포 사람 이인성, 낙안 사람 김성길, 연안사람 김순립이다.

    때마침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로 들어왔다.

안용복은 당시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왔던 조선 선원과 함께 일본인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인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용복은 배를 몰아 이들을 끝까지 따라갔다.

  <자료> 주간조선 : 제1933호_2006.12.11_이한우_ 경영기획실 의 朝鮮이야기(12).             <출처>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2/06/2006120677016.html  [출처] 우리나라 사람_독도 守護神(안용복)|작성자 돈키호테 안용복’ 그립습니다 안용복’ 1

2부 ‘일본 땅에 울린 외침’에서는 안용복의 1차 도일(1693) 행적과 이후 울릉도 영유권을 놓고 한·일간 외교전이 치열해지는 시점(1695)까지의 흔적을 살핀다.

‘독도 안용복’ 그...굿데이스포츠 보러가기 오랜 세월을 거치며 독도와 울릉도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불법조업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안용복입니다.

독도 문제에 있어서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이지요.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계책을 내어 강한 적에 대항하였다.

왜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하였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하였다.

 이는 부개자와 진탕(중국 한나라의 흉노 정벌 시 활약한 인물들로 서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이 한 일들에 비해서도 더욱 뛰어난 업적으로, 걸출한 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형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까지 보내어 그의 뜻을 꺾고 그를 무함하기에 바빴으니, 애석하구나.-성호 이익, <성호사설> 중에서 안용복은 부산태생의 어부로 원래 어떤 신분이었는지,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사료를 참고한 결과 그가 평민 이하의 신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안용복은 한때 조선 수군으로 근무하며 일본과의 무역을 담당하던 왜관에도 자주 들렀기에 일본어에 능통하였죠. 그가 독도 문제로 일본에 갔다 온 것은 두 차례입니다.

첫 번째는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일본인들과 마주친 것이 발단이지요.안용복은 우리 땅에 일본인들이 왜 들어왔냐며 호통을 칩니다.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울릉도에서 어업을 행해왔고 쇼군에게 받은 허가증까지 있다며 항변했지요. 안용복은 그 허가증 좀 확인하자며 동료인 박어둔과 함께 일본의 오키섬으로 향했다고 일본의 역사서는 기록합니다.

 ?안용복은 오키도주 앞에서도 당당하고 논리정연하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합니다.

당황한 오키도주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일본의 중앙정부라고 할 수 있는 막부에 보내지요. 이때 막부는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 란 편지를 써줍니다.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가 일본 스스로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확인한 중요한 사건이지요.  안용복은 9개월 간 일본에서 머물렀고, 대마도에서 50일간, 그리고 부산의 왜관에서 40일 간 갇히게 됩니다.

이때 막부에서 준 편지도 빼앗기지요.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지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었습니다.

안용복과 동료 박어둔은 조정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은 죄목으로 곤장형을 받게 되지요.  안용복을 벌하기는 했지만 조선은 울릉도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대일외교는 강격책으로 변하지요.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 및 고기잡이를 금지하고 장한상이란 사람을 보내 울릉도를 수색케 합니다.

장한상은 조사 이후 <울릉도사적>이란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여기에는 ‘울릉도 동남쪽 300여리에 섬 하나가 있다.

’ ‘일본의 섬은 보이는 것이 없다.

’라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이 섬이 바로 독도입니다.

그리고 독도가 일본의 섬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이지요. 한편 안용복은 벌을 받은 후에도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조선 정부는 강경책을 내세웠지만 협상은 지지부진 했지요. 안용복은 본인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울릉도로 향합니다.

울릉도에서는 여전히 일본어민들이 조업 중이었습니다.

안용복은 본인을 '울릉우산양도감세장'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인들을 쫓아내었음은 물론, 일본의 오키섬을 다시 방문해 오키도주와 담판을 벌입니다.

이번에도 오키도주는 막부에 이에 대한 문제를 보고했고,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사과를 받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안용복에게는 또다시 처벌이 내려집니다.

이번에는 곤장형으로 끝날만한 게 아니었죠. 이미 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었고, 이번에는 본인을 고위관리라고 사칭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영의정 유상운 등을 필두로 한 노론의 대신들은 태종 때부터 내려온 공도정책을 어긴 안용복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남구만 등의 소론 대신들은 국가에서도 제기하기 힘든 문제를 안용복 개인이 해결했음을 높이 사서 죄를 사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결국 안용복은 유배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안용복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요. 안용복에게 벌을 준 것 때문에 당시의 조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사실 조정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숙종 대의 대일외교관계는 매우 복잡했었던 시기입니다.

조선통신사, 쇼군의 명칭문제, 징비록 유출 문제 등이 산적해있었지요. 실제로 실록에서 ‘왜관’이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은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 숙종 대입니다.

조선이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본 문제를 정부의 관리 하에 놓으려고 집중하던 시기지요. 이런 상황에서 웬 평민이 조선 정부 관리의 이름을 칭하여 개인적으로 외교 관계를 결정지으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반 시민이 외교부, 혹은 내무부 관계자임을 주장하며 외국의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만나서 영토 문제에 대해 강하게 항의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고, 처벌의 강도도 이에 맞춰 강해지는 것이 당연하기는 합니다.

단순히 조선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해서 안용복을 귀양 보냈다고 하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이 워낙 복잡했다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관련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론과 소론을 막론한 모든 대신들이 안용복의 공적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죄가 크냐 공이 크냐에 따른 의견 차이일 뿐이었죠.  결과적으로 안용복은 유배당했지만 그가 세운 공은 분명합니다.

이후로 조선은 3년에 한 번씩 울릉도를 조사하도록 공론화하지요. 또한 안용복이 '울릉우산양도감세장'이라고 자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인들이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을 모두 자국의 영토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지요. 무엇보다 안용복의 활약을 통해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후 20세기가 될 때까지 독도에 대한 영토분쟁은 일어나지 않지요. 한가지 예를 볼까요. 1876년,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질의서를 접수한 일본 내무성은 조사 결과 두 섬은 일본과 관계가 전무하다고 결론짓고, 이듬해 3월 17일 메이지 정부의 최고 결정 기관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하여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승인을 받습니다.

이로서 일본은 근대적 국가로의 영토 재편 과정에서도 오늘날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국외의 땅으로 규정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이 모든 것이 안용복의 활약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독도는 국제법상 일본의 영토로 인정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일본이 반대의 입장에 놓였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안용복은 분명히 정식으로 관직을 받은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공을 생각한다면 장군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입니다.

?현재 울릉도에는 안용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상태지만 홍보 부족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울릉도가 방문하기 쉬운 곳이 아니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보가 너무 부족하지요. 결국 우리들의 관심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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