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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산산맥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키르기스스탄은 국토의 무려 90%가 산으로 이루어진 ‘산의 나라’이다.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과 신비로운 빙하, 야생화와 조화를 이루는 계곡과 폭포는 키르기스스탄을 대표하는 풍경. 이런 천혜의 자연환경은 키르기스스탄으로 하여금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리게 했다.

<영상앨범 산>에서는 태고의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 키르기스스탄 톈산산맥을 2주에 걸쳐 만난다.

 ??? 이번 여정에는 산 노래를 부르는 산 사나이들 ‘알펜트리오’와 산악인 김태삼 씨가 함께했다.

대학 시절에 만나 산과 노래를 사랑하는 같은 마음으로 40년 넘게 우정을 지켜온 사람들, ‘알펜트리오’라는 3중주 팀을 만들어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산 노래를 지키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산 노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든 간다는 알펜트리오가 낯선 미지의 땅, 키르기스스탄을 찾았다.

 ??? 키르기스스탄은 산악 국가답게 수도 비슈케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푸른 초원과 웅장한 산군을 조망할 수 있다.

그중 해발 2,000m, 톈산산맥의 ‘소쿠루크 협곡’에 들어서는 일행. 알라르차 국립공원 방향으로 3박 4일의 여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마침 빙하와 눈이 많이 녹는 시기라서 계곡에 많은 물이 흘러내리며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 계곡 물길을 따라 트레킹을 이어가는 일행. 그동안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길에는 고운 빛깔로 반짝이는 야생화가 지천이고, 소쿠루크 협곡이 거느린 수많은 폭포는 연거푸 거침없는 물줄기를 쏟아내며 일행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그야말로 꽃 천지이자 물 천지. 어느덧 해발 2,500m 대의 고지에 오르니, 녹음으로 물든 산허리 너머로 만년설을 인 설봉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 오랜 세월 거센 물줄기가 스쳐간 길은 돌덩이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너덜 길의 연속. 앞서가는 가이드의 발걸음에 의지해 투박한 돌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세차게 내달리는 물길을 맨발로 가로지르기도 여러 번이다.

야생 그대로의 순수함이 살아 숨 쉬는 땅, 그 속에서 자연을 노래하는 알펜트리오의 목소리를 이번 주 <영상앨범 산>에서 만난다.

 ?? <다음 이야기> 키르기스스탄 2부작 ? 2부 원시 자연의 노래 (7월 24일) ?? 순수함이 흐르는 땅, 키르기스스탄의 여정은 소쿠루크 협곡 해발 2,800m에서 계속된다.

야생화가 흐드러진 푸른 초원과 웅장한 설봉이 조화롭게 빛나는 풍경 속을 거닌다.

하지만 고산지대에 다가설수록 키 큰 나무들은 차츰 사라지고 길은 한 층 더 투박해진다.

짙은 녹음의 길은 어느새 순백의 설원으로 표정을 바꾸어 버린다.

이윽고, 아죠르네 캠프(3,400m)에 도착한 일행. 더욱 고도를 높여 흰 눈이 수북이 쌓인 산비탈 위에 새로이 길을 내며 오른다.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설산의 전망대에 다다르자 만년설로 뒤덮인 새하얀 세상이 아늑한 품으로 일행을 반겨준다.

미지의 풍경을 찾아 나선 모험의 길, 원형 그대로의 자연과 호흡하는 그 남은 여정을 <영상앨범 산>이 함께한다.

 ?? ◆ 출연자 : 알펜트리오 유문환, 이영수, 이승구, 산악인 김태삼 ?◆ 이동코스 : 소쿠루크 협곡 트레일 / 왕복 약 50km, 4박 5일 소요1부 : 비슈케크 - 소쿠루크 협곡(2,800m)2부 : 소쿠루크 협곡(2,800m) - 아죠르네 캠프(3,400m)-----------------------------------------------------------------------------------------------------------------------------------------------------------------------------------------------------------------------방송 내용           ?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키르기스스탄은 국토의 무려 90%가 산으로 이루어진 ‘산의 나라’이다.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과 신비로운 빙하, 야생화와 조화를 이루는 계곡과 폭포는 키르기스스탄을 대표하는 풍경. 이런 천혜의 자연환경은 키르기스스탄으로 하여금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리게 했다.

<영상앨범 산>에서는 태고의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 키르기스스탄 톈산산맥을 2주에 걸쳐 만난다.

 ??? 이번 여정에는 산 노래를 부르는 산 사나이들 ‘알펜트리오’와 산악인 김태삼 씨가 함께했다.

대학 시절에 만나 산과 노래를 사랑하는 같은 마음으로 40년 넘게 우정을 지켜온 사람들, ‘알펜트리오’라는 3중주 팀을 만들어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산 노래를 지키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산 노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든 간다는 알펜트리오가 낯선 미지의 땅, 키르기스스탄을 찾았다.

 ??? 키르기스스탄은 산악 국가답게 수도 비슈케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푸른 초원과 웅장한 산군을 조망할 수 있다.

그중 해발 2,000m, 톈산산맥의 ‘소쿠루크 협곡’에 들어서는 일행. 알라르차 국립공원 방향으로 3박 4일의 여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마침 빙하와 눈이 많이 녹는 시기라서 계곡에 많은 물이 흘러내리며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 계곡 물길을 따라 트레킹을 이어가는 일행. 그동안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길에는 고운 빛깔로 반짝이는 야생화가 지천이고, 소쿠루크 협곡이 거느린 수많은 폭포는 연거푸 거침없는 물줄기를 쏟아내며 일행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그야말로 꽃 천지이자 물 천지. 어느덧 해발 2,500m 대의 고지에 오르니, 녹음으로 물든 산허리 너머로 만년설을 인 설봉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 오랜 세월 거센 물줄기가 스쳐간 길은 돌덩이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너덜 길의 연속. 앞서가는 가이드의 발걸음에 의지해 투박한 돌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세차게 내달리는 물길을 맨발로 가로지르기도 여러 번이다.

야생 그대로의 순수함이 살아 숨 쉬는 땅, 그 속에서 자연을 노래하는 알펜트리오의 목소리를 이번 주 <영상앨범 산>에서 만난다.

 ?? <다음 이야기> 키르기스스탄 2부작 ? 2부 원시 자연의 노래 (7월 24일) ?? 순수함이 흐르는 땅, 키르기스스탄의 여정은 소쿠루크 협곡 해발 2,800m에서 계속된다.

야생화가 흐드러진 푸른 초원과 웅장한 설봉이 조화롭게 빛나는 풍경 속을 거닌다.

하지만 고산지대에 다가설수록 키 큰 나무들은 차츰 사라지고 길은 한 층 더 투박해진다.

짙은 녹음의 길은 어느새 순백의 설원으로 표정을 바꾸어 버린다.

이윽고, 아죠르네 캠프(3,400m)에 도착한 일행. 더욱 고도를 높여 흰 눈이 수북이 쌓인 산비탈 위에 새로이 길을 내며 오른다.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설산의 전망대에 다다르자 만년설로 뒤덮인 새하얀 세상이 아늑한 품으로 일행을 반겨준다.

미지의 풍경을 찾아 나선 모험의 길, 원형 그대로의 자연과 호흡하는 그 남은 여정을 <영상앨범 산>이 함께한다.

 ?? ◆ 출연자 : 알펜트리오 유문환, 이영수, 이승구, 산악인 김태삼 ?◆ 이동코스 : 소쿠루크 협곡 트레일 / 왕복 약 50km, 4박 5일 소요1부 : 비슈케크 - 소쿠루크 협곡(2,800m)2부 : 소쿠루크 협곡(2,800m) - 아죠르네 캠프(3,400m)-----------------------------------------------------------------------------------------------------------------------------------------------------------------------------------------------------------------------방송 내용           ?물은 흘러서 남으로 가는데 우리는 거슬러서 올라가는 것이지요.양떼도 함께 오가는 길

잠시 쉬어가는 물가의 나무 그늘 ....... 돗자리 펴고 낮잠 한숨 자면 딱 좋겠습니다

!!경사를 휘돌아 올라가는 길, 삼단으로 좌우를 �y어올라갑니다.

그 중간에는 폭포 같은 물이 쏟아지고해발 약 3600미터를 넘어가기 위해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계곡의 초원은 타클라마칸의 분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지요.소룡지라는 호수가 나타나네요

대룡지대룡지를 지나자 계곡의 초원이 ........ 북으로 갈수록 가을빛이 선명해지네요

본격적인 경사가 나오네요

11킬로미터를 휘돌아간답니다.

뒤로 보이는 길이야


이게 동일한 한 가닥의 길이라는

대단하지요

어떻게 이 길이 한가닥일지, 사진으로 보면 상상이 쉽게 가질 않습니다.

드디어 고갯마루!1895미터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군요.고갯마루에서 잠시 쉬면서 내려다보면 아찔합니다.

설산도 보이고

내려가는 길넘어가면 초원입니다.

그러나 톈산산맥 넘어의 바인부루커는 외국인 미개방지역입니다.

 사전에 공안에서 발급받은 통행증이 있어야만 통과를 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쿠처로 백



다시 톈산산맥을 넘어서서 돌아가는 길

가을이 깊습니다!계곡에 물안개가 반겨주네요

.......................................그런데 고비 사막에 햇볕이 내리쬐면 텐산 산맥을 덮고있는 대량의 눈이 녹기 시작한다.

 그것이 지하 수맥으로 흘러나가 지하수의 출구인 오아시스에서 일제히 물이 뿜어나온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지도 133페이지.                                                          책에 이렇게 나와 이런 저런 검색을 해봤습니다.

덕분에 텐산산맥, 고비사막, 치렌산맥, 월아천을 다시 확인해봅니다.

중학생 딸아이와 함께 볼려고 구입했는데..... 제가 더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부담스럽지 않게 휘리릭



고비사막하면 실크로드 그리고 월아천.그런데 검색을 해보니 월아천은 치렌산맥의 만년설이 솟아오른는것이라고 합니다.

하여튼 만년설이 녹아 그 먼길을 달려 사막에서 솟아오른다.

그런데 그런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065256??? ?? ??-???(???)article.joins.com  그래서 옛 소련시절부터 소련 등반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어왔다.

키르기스스탄의 산군은 크게 톈산에 칸텡그리(6,995m)와 포베다(7,439m)가 있는 이닐첵 빙하, 떨스끼 알라투, 본 원정대가 방문했던 알라르챠 국립공원과 서부 콕샬투 산군 등이 있으며, 파미르에는 아칙타쉬(레닌봉, 7,134m)가 있는 자알라이스키, 거대한 북벽의 악수(Aksu, 5,217m)로 잘 알려진 레일렉 계곡과 카라슈빈 계곡, 알레이스키의 두가바 지방 등이 있다.

이밖에 아직 본격적으로 등반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 약 10여 곳 있으며 이곳들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4

5천 미터 급의 미답봉들이 등반가들을 기다리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은 연평균 강수량이 700밀리미터로 적은 편이며, 5

6월에 좀 많은 편이고 가을로 접어드는 9월부터는 연일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

 악사이 산군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유명한 악사이 산군은 수도 비쉬켁에서 30km 떨어진 알라르챠 국립공원 내에 있다.

알라르챠 국립공원에는 악사이 산군 외에도 알라메딘 산군과 아디진, 탑까라가이, 투육 등등 다른 대상지가 산재해 있다.

그리고 해발 4천 미터까지 리프트가 설치된 스키장도 있어 겨울엔 많은 스키어들이 이곳을 찾는다.

차량으로 약 50분을 이동한 뒤 도로에서 해발 3,200미터의 베이스캠프인 악사이 산장까지 약 4시간이 소요된다.

35명 정원의 산장 주변에는 많은 캠프사이트가 있다.

약간의 국립공원 입장료 외에 별도의 요금이나 허가 절차는 없다.

산장 요금은 특실 1000솜, 일반실 500솜(2010년 2월 당시 1솜은 약 30원).이곳에는 4천 미터 급의 산들이 약 15개 있으며 초보자 루트부터 벽길이 1,100미터의 고난도 벽등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루트가 약 160개 개척되어 있다.

단단한 화강암질에 대개 암·빙·설벽이 혼합되어 있다.

등반적기는 5월

10월이며, 여름에는 수백 명의 등반가들로 붐빈다.

평균기온은 겨울에 -12℃, 가을은 -7℃, 봄은 +3℃다.

 비쉬켁 시에서 바라본 알라르챠 국립공원 전경. 알라르챠 국립공원 주 계곡스보보드나야 까레야 (Free Korea, 4,740m)이 산은 한때 소련 전역을 통틀어 가장 많이 등반되기도 했다.

표고는 그리 높지 않지만, 무엇보다 접근이 가장 쉬운 악사이 산군에 있으면서 인근에서 제일 어려우면서도 멋진 루트가 북벽에 여러 개 개척되었던 것이다.

본문에 기록한 것처럼 1952년 화가이자 등반가였던 아파나시 슈빈 등 네 명이 남면을 통해 올랐으며 당시 시대정신에 걸맞게 사회주의적 염원을 담아 당시 한창이던 한국전의 북측 승리를 염원하며 산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2007년에도 하나의 루트가 추가되어 현재 총 18개의 루트가 개척되어 있다.

북벽의 6급 루트들은 가파른 빙벽구간과 오버행 구간을 포함하여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벽상에서 비박해야 한다.

1976년 미국의 제프 로우가 단독으로 오른 로우루트는 북벽 루트 중 가장 쉬운 5A급으로 하강루트로 이용되기도 한다.

 찾아가는 법키르기스스탄에서 등반하기 위해서는 일단 수도인 비쉬켁까지 항공편을 이용해 이동한다.

직항편은 없으며 현재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타를 경유하는 노선이 일주일에 3

4차례 있다.

왕복 항공권 가격은 대략 100만원 선.비쉬켁에서는 각 산군까지 국내선을 이용하거나 차량을 이용한다.

알라르챠 국립공원은 비쉬켁에서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다.

 행정절차키르기스스탄은 등반허가, 환경보호예치금 같은 행정절차가 필요 없다.

비자는 국내 대사관에서 발급받을 수도 있지만 공항에 도착해 즉석에서 발급받는 것이 편리하다.

국립공원은 약간의 입장료를 입구에서 내면 된다.

단, 국경에서 200km 내의 지역으로 진입하는 경우라면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지방 관청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 때 관련서류가 필요하다.

이런 경우 현지 가이드를 고용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기타○ 비쉬켁 시내에는 총 세 곳의 장비점이 있어, 이곳에서 간단한 장비 및 의류를 구할 수 있다.

EPI 가스도 이곳에서 구할 수 있다.

○ 다양한 등반 대행사가 현지에 성업 중이다.

이용객은 주로 러시아인과 유럽인이며 악사이 산군 외에 칸텡그리, 포베다, 아칙타쉬(레닌) 등반을 지원한다.

일반 여행사를 통하기보다는 전문 업체를 물색해 등반가이드 자격이 있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좋다.

○ 물가는 한국에 비해 대체로 싼 편인데, 공산품의 경우 대개 수입품이기 때문에 별 차이가 없다.

○ 러시아어와 키르기즈어가 사용된다.

영어를 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 현지에 사업가, 선교사, 유학생 등 점차 많은 한국인들이 진출하고 있다.

이들과 연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악사이 산군 개념도 악사이 산장. (이 사이트의 이름은 라첵 스톱) 산장 내부(2층 일반실)산장 부엌에는 인근 봉우리들의 개념도가 붙어있다.

바취취케이(4515m). 눈 속에서 피는 꽃 이름이란다.

과연 산 생김새가 꽃을 닮았다.

중앙의 빙벽은 600m의 일루셴코루트(5A). 우측 암릉으로 세 개의 암벽등반 루트가 개척되어 있다.

베이스캠프에서 당일로 등반이 가능할 만한 루트들.악사이 빙하 상부. 라첵스톱에서 코로나, 프리코리아 등을 등반하려면 먼저 악사이 빙하를 따라 약 4시간 가량 올라 코로나 무인대피소까지 이동한다.

프리코리아 북벽 전경. 표고차 900미터의 벽등반이다.

프리코리아 개념도.코로나 무인대피소 창으로 프리코리아 북벽을 내다볼 수 있다.

 * 키르기스스탄 전역에 대한 보다 자세한 등반정보는 '산악연감 2010 (대한산악연맹 편) - 정보: 키르기스스탄의 등반대상지'를 참고.* 악사이 산군 등반(2010.2)기는 http://blog.naver.com/7mmrope/40105579094 26리뷰보기? - 계속 -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우루무치까지.   시안에서 황하유역, 황토고원 그리고 화서회랑을 거치는 동안 중국 문명의 발상지, 북방 유목민족 간의 분쟁지인 황하유역, 고비 사막과 하서회랑을 거쳐 왔다.

둔황은 본격적인 사막의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둔황을 떠나 서역으로 가려면 톈산산맥을 따라 가는 길과 쿤룬산맥 밑을 따라 가는 길로 갈라진다.

나는 둔황과 우루무치 사이의 톈산 남북로를 두 번 오갔다.

중국 실크로드는 이들 산맥사이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일명 타림 분지)의 주변 산 밑 오아시스를 통과하는 기나긴 교역 루트이다.

인도양 대륙판과 유라시아 대륙판이 부딪히면서 융기하여 생긴 산맥이 히말라야 산맥이다.

티베트 고원과 타림 분지는 원래는 바다였는데, 이 충돌로 말미암아 올라오면서 바닷물이 증발해 버리고 말랐기 때문에 도처에 호수가 있지만 대부분 소금호수이다.

쿤룬 산맥과 치롄 산맥에서, 톈산 산맥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강은 도중에 모두 사막 모래 속에서 사라져 없어진다.

거대한 분지를 둘러싼 산으로부터 얼음과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물길을 만들고 수십 킬로미터 또는 수백 킬로미터 동남북으로 흐르다가 모래 위에서 혹은 딱딱한 암염지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더러는 롭 노르(사막 속의 염호)와 같은 호수를 이룬다.

호수에서 소금을 긁어 모을 수 있는 것은 흔한 일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크게 조망하면 대충 북위 40도를 기준으로 초원지대와 사막지대가 갈린다.

사막지대는 지중해 연안 터키 남단에서 시리아 사막, 아라비아 사막, 이란 사막, 카라코룸 사막, 타클라마칸 사막, 고비 사막 등으로 이어진다.

이 사막지대의 북단과 타이거 또는 수해지대 사이에 광활한 초원지대가 벌어진다.

톈산 산맥과 쿤룬 산맥은 타림 분지의 생명줄이다.

톈산 산맥은 파미르 고원 북쪽에서 시작되는 길이 2천 킬로미터, 폭 4백 킬로미터, 높이가 5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연이어 있으며, 3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에는 만년설이 덮여 있다.

이 산맥의 남과 북쪽 산록에는 눈이 녹아 흐르는 물로 인하여 오아시스가 점점이 산재해 있다.

톈산 북로냐 남로냐 하는 것은, 이러한 톈산산 밑의 오아시스를 연결하면 톈산 남로와 북로가 된다.

쿤룬 산맥은 파미르 고원에서 치롄 산맥까지 4천 킬로미터 면면이 이어지는 장대한 산맥이며, 그 너머로 티베트 고원이 펼쳐진다.

동쪽은 하서회랑과 고비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면적은 53만 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5.5배에 해당된다.

여름 하늘에서 본 톈산 산맥의 연봉과 고비 사막, 톈산 산맥에는 삐죽삐죽 봉우리마다 눈이 하얗게 덮여 있고, 능선이 끝나는 부분서부터 비탈이 완만하게 내려간다.

눈 없는 곳은 시커먼 흙더미 위에 뿌연 흙물을 부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말라 버린 개울은 고운 물줄기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다시 검은 바위와 돌들이 불쑥 나와 있고 고원은 검푸른 자갈밭 같다.

[텐산산맥] 하지만 현실은


군데군데 드러나는 색다른 지층은 참으로 예쁜 디자인 패턴을 만들어 놓았다.

하늘에서 본 톈산 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은 물과 바람이 오랜 동안 빚어 낸 작품에 빛을 조명해 만든 걸작 중의 걸작 같았다.

내려다본 지점이 아마도 투루판이나 하미가 아닌가 싶었다.

비행기가 진행하는 오른쪽에 치롄산의 높은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본 산지와 사막은 도무지 사람 살 것 같은 곳이 아니었다.

우루무치 근처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많은지 땅은 초록색을 띄었으며, 물이 흘러내린 흔적을 직감할 수 있었고, 개간된 농토와 수로. 저수지도 보였다.

자위관 근처에서 끝없이 전개되는 타클라마칸 사막 동단에서, 비행기는 곧 톈산 산맥과 나란히 하면서 비행한다.

눈 덮인 연봉의 계속이다.

그 밑에, 위에서 보면 보잘것없는 사막 속 공항의 활주로가 하나 보였다.

  실크로드 지역은 당대에 전성기를 이루다가 9세기 말부터 중국의 지배가 약화되자 카라반에 의해 이어져 왔던 교역이 쇠퇴하였다.

그러다가 13세기 몽고족이 지배한 원대에 다시 회복되었고, 원이 망하자 다시 쇠퇴의 길로 들어갔다.

15세기 이후에는 해양 실크로드가 열렸고, 이 길을 통하여 동양의 차와 도자기 등이 서양으로 건너가면서 내륙 실크로드는 잊혀진 세계가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부터 동양에 대한 관심이 일고 몇몇 서양의 탐험가가 이 지역을 탐사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으며, 실크로드에 관한 보고를 쏟아내어 세계의 관심이 제고되었다.

옛 시절 현대적인 교통수단이 없을 당시에, 이곳을 여행하려면 수개월에 걸쳐 목숨을 걸고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헤쳐 나가야만 했다.

낙타에 식량과 장비를 싣고 오아시스에서 쉬어 가면서 계속 가야 하는 힘든 여정으로서, 20세기 초까지도 그런 여행방법이 계속되었다.

기차로 이틀이면 충분한 길을, 뤄양에서 중국 변방 카슈가르까지 5개월이나 걸렸다.

우리는 기차와 잘 정비된 도로를(버스로) 두 번이나 왕복했는데, 현대인이 누리는 호강이다.

  톈산 남북로를 여행하면서 한국 사람으로서 관심을 가질 만한 역사가 하나 있다.

당말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이야기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677년에 당이 고구려 유민들을 중국의 하남과 간쑤성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킬 당시 강제로 이주당한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선지는 이곳에서 태어나 당의 장수가 되어 중앙아시아를 석권하고 실크로드를 개척했던 위대한 장수가 되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747년에 현종은 안서도호부에 토번을 정벌하라는 조서를 내렸고, 이에 따라 고선지는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출전했다.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원정군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의 험로를 넘어 파미르 고원의 최고지점을 통과하여 파미르 천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강행군하여 파미르 고원의 남단으로 가 현재 아프가니스탄 영토로서 당시에는 토번의 서북방 요새였던 곳을 공략했다.

고선지의 당군은 난공불락의 산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길기트까지 원정했다.

이 원정은 해발 4천7백 미터나 되는 험준한 파미르 고원을 넘어야 하는 고행이며 강행군이었다.

토번 군에 대승한 그는 당의 우도 장안으로 개선했다.

747년 현종은 고선지를 다시 안서도호부 절도사로 삼았다.

고선지는 750년 사이에 다시 한 번 톈산산맥을 넘어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 있던 대식국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런데 서역 여러 나라가 연합새서 당나라에 대항했다.

751년 말에 탈라스 전투가 벌어지는데 고선지의 당군과 이슬람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퇴하게 된다.

고선지의 당군이 패배함으로써 당나라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졌고, 서역은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전쟁은 문화를 주고받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아랍 지역으로 끌려간 당나라 사람에 의해 중국의 제지술과 화약 제조술이 처음으로 서양에 전파하게 되었다.

타림 분지의 북쪽 끝부분 투루판 근처의 해발고도는 해면보다 낮다.

가장 낮은 곳인 아이딘 호는 바다보다 154미터나 낮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무척 덥고 견디기 힘든 곳이다.

투루판은 우루무치와는 톈산 산맥을 사이에 두고 2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서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사막에서 흥망한 고창왕국과 11세기 위구르족이 세운 교하왕국의 옛터이다.

시내에서 약 40킬로미터 서쪽으로 나오면 화염산(산의 모양이 마치 불길이 타오르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서유기>에도 나온다)이 왼쪽에 수 킬로미터에 걸쳐 전개된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이곳에서 들러 사진을 찍게 마련인데, 한낮에는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맑은 날 오전 또는 오후 늦게 햇빛이 적당한 사광이 되어 명암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화염산의 사진 효과를 얻기가 힘들다.

이 곳에서 얼마 더 가면 폐허만 남아 있는 고창고성에 이른다.

고성은 바다표면보다 40미터 낮은 곳이다.

고성은 동서남북이 1.5킬로미터 정도의 규모가 큰 성곽인데, 성곽의 높이는 10미터는 되어 보였고, 성 안에는 왕궁 터로 보이는 내성이 별로로 있다.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현장은 629년 이곳에 와서 국왕에게 붙잡혀 있다가 국왕을 애달프게 설득하여 간신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고창국 사람들은 이란계 백인으로 알려졌지만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듯하다.

고창은 640년 당에 의해 정벌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 후 당이 망하고 난 후에 위루르족 한국으로 존재하다가 몽고에 의하여 재정복되었다.

성 안은 나귀 마차를 타고 돌아볼 수 있었는데, 지금 폐허이긴 하지만 1400년 이상 오래된 고성 유적에서 나는 사람들이 살던 번화한 도성을 떠올려 보았다.

헐린 성곽 한쪽으로 성 밖으로 나오니 푸른 포도밭이 전개되고 그 뒤로 화염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장은 동 투르키스탄으로 불려왔던 곳이며, 18세기 약 200년 전에 청나라 건륭제 때 확장된 것이다.

이때 청은 톈산 산맥 북쪽 중가르 분지에 존재하던 투르크족 연합국가를 멸망시키고 지역을 복속시킨 다음 새로운 영토라는 의미에서 신장이라고 명명했다.

신장의 면적은 168만 제곱킬로미터로서 우리나라 면적의 약 17배이나 인구는 약 2천만, 이 중에 위구르족이 대부분이고 회족. 몽고족. 한족이 섞여 살고 있다.

위구르인들은 10세기경에 이곳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처음에는 불교를 신봉하다가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개종했다.

위구르족은 터키계 황색인종으로 돌궐 인이 조상이다.

하지만 서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서양인의 체구와 모습을 많이 지니게 되었다.

돌궐은 5세기에서 8세기에 이르기까지 흉노에게 밀려 서역 초원과 오아시스 지역에 돌궐로 알려진 강력한 부족국가를 건설하여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다.

근년에 사막 가운데서 많은 유전과 광물자원이 발견되면서 신장지구의 경제적 가치를 새롭게 해주고 정부의 투자도 많아 한족의 이주가 두드러지고 있다.

중국은 1962년 란저우에서 둔황을 거쳐 우루무치로 연결되는 장장 3천 킬로미터의 난강(란저우=신장)철도를 부설하였고, 2006년에는 칭장(칭하이-티베트) 열차가 개통되어 티베트까지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 한가운데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타림 분지 종관 국도가 부설되어, 톈산 남로 구처에서 서역남로 민평까지 버스로도 관광이 가능하다.

근래에 들어 이 드넓은 타클라마칸 사막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위구르족의 독립 요구도 티베트 못지않게 강한 듯하다.

마중영의 반란 이후에도 기회 있으면 위구르족은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신장에서는 몇 번의 테러 공격이 있었다고 보도되었는데, 이는 보두 위구르족의 독립 요구였다.

  투루판을 떠나 우루무치로 가자면 톈산 계곡을 2시간 정도 지나야 된다.

톈산은 사막과 초원의 경계가 되는 길고 커다란 산괴로서 톈산 산맥 북쪽과 알타이 산맥 사이에 커다란 초원지대가 이루어져 있으며, 톈산 산맥의 크기는 연장 2천 킬로미터, 폭은 거의 4백 킬로미터로서 한반도보다 훨씬 크다.

톈산 산맥은 서쪽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의 북단에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데 군데군데 단절되어 계곡과 초원을 이루면서 신장성을 가로질러 몽골 고원의 앞에서 끝난다.

산맥에는 보고타 봉(5,545m)을 비롯하여 4-5천 미터의 준봉이 이어지며, 산봉우리에 부딪친 구름이 눈비가 되고 눈 녹은 물이 흘러 타림 분지 사막과 중가리아 분지 초원을 이룬다.

지도를 보면 톈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강을 이루고 커다란 호수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양하를 좇아 난 톈산의 고속도로와 저지대에서 이미 오르기 시작하는 철도가 쌍으로 톈산의 남과 북을 연결해 준다.

우루무치에서 투루판으로 가는 도중 소초호 톨게이트 앞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하여 산과 고비 사막을 찍으려고 휴게소 뒤로 돌아가니 바람이 어찌나 센지 걷기조차 힘들었다.

자동차가 마른 내 옆 고속화도로를 한창 올라가니 톈산의 최고봉 보고타 봉이 수려하게 보이다 말다 한다.

달판성까지 오면 계곡이 끝나고 탁 트인 초원 벌판이 나오는데 톈산 입구 일대에는 수백 개의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1935년 마중영이 신장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제스 국민당 정부와 대결할 때에 대격전이 벌어진 곳이라 한다.

국민당 정부는 힘이 모자라 스탈린의 소련 정부까지 끌어들여 진압했고, 소련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러시아의 영향이 많았던 곳이다.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를 옆으로 하고 한참 달리니 왼쪽으로 커다란 염호가 나타나는데 호수에서는 소금 채취가 한창이었다.

[텐산산맥] 진실 또는 거짓..



  남산목장에 이르니 지금까지 보던 사막 풍경은 아니다.

산비탈에는 낙엽송과 여러 나무들이 빼곡하다.

산 아래로 내려가자 골짜기에서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 왔으니 수량이 풍부함을 알 수 있었다.

관광사업화가 꽤 진행되어 마을 안에 들어가면 손님용 화장실이 따로 있었고, 관광 전시용 유르트로 들어가 카자크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으며, 마부가 이끌어 주는 승마 체험도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북으로 알타이 산맥까지,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까지, 동으로 고비사막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초원지대 중가리아 분지가 전개된다.

이른바 스텝 지대로 불리는 건조한 온대 초원지대이다.

연간 강우량은 500밀리 이하이지만 광활한 목초지가 이루어져 가축을 기르면서 풀을 찾아 이동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유목민족은 항상 이동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주낵도 설치. 해제가 쉽고 간단해야 한다.

땅을 소유할 필요가 없고 가구도 이사하는데 번거롭다.

그래서 농경민족과 달리 주거건축, 농구와 같은 문화를 남겨 놓은 일이 없다.

유목민은 물을 얻기가 편한 강과 호수나 아니면 드센 바람을 피하기 쉬운 산록의 좋은 초지를 찾아서 이동한다.

유목 단위는 몇 십 명이란 집단 단위가 생기며, 비상시에 유목민 단위가 연합하면 조직화. 군대화도 쉽게 이루어진다.

이들의 주거지는 풀을 먹일 수 있는 여름의 하영지와 겨울을 지내는 동영지를 오가면서 산다.

유목민들에게는 영토에 대한 자기들만의 전유 개념은 없다.

그들이 사는 일 년 사이클은, 봄엔 양을 낳고 여름에 크게 키우고 가을엔 도촉하고 다시 봄에는 털을 깍는 순서이다.

그들의 생활은 모든 것을 주어진 범위 안에서 자족해야 하기 때문에 넉넉함은 없게 마련이다.

유목민은 교환할 물건이 빈약하고, 극심한 한발이 닥쳐오기라도 하면 목초지가 메마르게 되고, 가축과 더불어 살기가 어려워진다.

이러한 실상을 치롄 산지나 내몽고 초원지대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가리아 분지에서 몽골 초원지대에 이르는 대공간은 흉노. 선비. 돌궐. 몽고족들이 본거지로 삼았던 목축 기마민족의 땅이다.

유목민족 문화는 말을 길들여서 사람들의 이동수단과 전쟁도루로 삼았고, 금의 문화를 남겨 놓은 것이 특징이다.

말을 생활수단으로 삼으면서 기마유목민족이 되었는데, 유물은 간혹 발견되는 고분 이외에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곳에서 살던 역사에 나오는 민족은 다 어디로 갔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고비 사막에 햇볕이 내리쬐면 텐산 산맥을 덮고있는 대량의 눈이 녹기 시작한다.

 그것이 지하 수맥으로 흘러나가 지하수의 출구인 오아시스에서 일제히 물이 뿜어나온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지도 133페이지.                                                          책에 이렇게 나와 이런 저런 검색을 해봤습니다.

덕분에 텐산산맥, 고비사막, 치렌산맥, 월아천을 다시 확인해봅니다.

중학생 딸아이와 함께 볼려고 구입했는데..... 제가 더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부담스럽지 않게 휘리릭



고비사막하면 실크로드 그리고 월아천.그런데 검색을 해보니 월아천은 치렌산맥의 만년설이 솟아오른는것이라고 합니다.

하여튼 만년설이 녹아 그 먼길을 달려 사막에서 솟아오른다.

그런데 그런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065256??? ?? ??-???(???)article.joins.com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변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이것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敦煌]까지 이르는 구간으로, 역대에 장안(長安 : 지금의 시안[西安] 또는 뤄양[洛陽])을 기점으로 했고, 허시후이랑이 중요한 길목이었다.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이며,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로막혀 사막 남쪽(쿤룬 산맥[崑崙山脈] 북쪽)과 사막 북쪽(톈산 산맥[天山山脈] 남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서쪽 부분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갈래가 있어서 남로는 파미르 고원의 쿠시쿠르간에서 서쪽으로 쿠샨 왕국에 이르고,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천축(天竺 : 인도의 옛 이름)에 들어갈 수 있다.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지중해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른다.

북로는 강거(康居 : 漢魏시대 중앙 아시아의 키르기스 평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투르크계 유목민족국가)에서 서쪽으로 이란을 지나 곧장 지중해와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거의 수천 리로 이어져 지금의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여 개 국가를 거쳐간다.

이 세 부분 가운데 동쪽 부분은 역사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중앙과 서쪽 부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개통과 발전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 한(前漢 : BC 206

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大月氏)·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2차례에 걸쳐 장건(張騫)을 중앙 아시아로 파견했다.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당시 서역(西域)이라고 칭해지던 중앙 아시아 및 서방 각지와 사절을 교환하게 되었고, 여러 문물이 왕래하게 되었다.

당시에 실크로드는 남·북 양 도로 나뉘어 있었다.

중국의 서쪽 관문이었던 위먼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는 로프노르 호 남안의 미란으로부터 쿤룬 산맥의 북쪽을 지나 야르칸드에 이른 후 파미르 고원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나가는 남로(南路)였고, 또 하나는 투루판[吐魯蕃]에서 톈산 산맥 남쪽을 지나 카슈가르에서 파미르를 넘어 페르가나로 가는 북로(北路)였다.

남로에는 다시 야르칸드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 북쪽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

전한 때에는 반초(班超)가 서역으로 출사(出使)하여 전한말 이래 중단되었던 서역과의 관계를 개선시켰고, 나아가 AD 97년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 로마)으로 파견했다.

감영은 결국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파르티아와 시리아 및 페르시아 만까지 갔다옴으로써 실크로드의 서쪽 끝을 연장시키고 중국인들의 서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당대(唐代 : 618

907)였다.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돌궐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마침 돌궐이 동·서 양국으로 분열되고 서돌궐에 내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하여 서돌궐을 제압했다.

이무렵 로프노르 호 일대의 건조화(乾燥化)가 진행되어 남도의 이용도가 낮아졌고, 북도는 둔황에서 북상하여 하미[哈密]를 경유해 투루판에서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톈산 남로)과 톈산 산맥 북쪽을 지나는 길(톈산 북로)이 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구자(龜玆 : 한대의 서역국가)와 북정(北庭 : 짐사)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설치하여 톈산 남·북로를 관장하게 했다.

이후로는 비단 무역을 비롯한 동서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소그디아나(서투르키스탄)를 본거지로 하는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했다.

9세기 무렵에는 당의 세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북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족과 서쪽에서 진출해온 이슬람 상인이 그들을 대신했다.

송대 이후로는 광저우[廣州]를 지나 스리랑카·파르티아·홍해를 지나 카이로에 도달한 후 다시 이곳을 거쳐 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했다.

이와 함께 육로는 점차 쇠퇴해갔다.

역사적 의의장건이 서역을 처음 개척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앙 아시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끊임없이 사절을 교환했고, 민간인들의 왕래도 빈번하게 되었다.

또한 사신과 민간인의 잦은 왕래는 문물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는 많은 구법승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각국에서 불교를 지원하는 풍조에 힘입어 많은 인도 승려들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왔다.

당대에는 불교가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고, 현장(玄?)의 역경사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중국 고유의 유교·도교와 함께 당대의 3대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시켜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불교 이외에도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로마에서 이단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景敎), 이슬람교 등도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전해졌다.

또한 당대의 장안에는 페르시아인을 비롯해 적지 않은 수의 서역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호복(胡服)·호모(胡帽)·호악(胡樂)·호무(胡舞)·호병(胡餠) 등 각종 호풍(胡風)을 유행시켰다.

서역의 문물이 중국 사회에 전파되는 한편, 중국의 주철(鑄鐵) 기술, 양잠, 제지법 등이 서방으로 전달되었다.

실크로드는 이같이 상업면에서뿐만 아니라 동서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실크로드는 현재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吳爾自治區]를 잇는 포장도로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출처 : [기타]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1391&page=1&sm=&key*************************************************************************************************************************실크로드 [Silk Road] 요약내륙(內陸)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통상로(東西通商路). ↑ 캬라반 숙소의 정문 / 아나톨리아 지방을 방문하는 대상(隊商, 캬라반)들의 숙소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할 뿐 아니라 물건 매매, 여행 루트 안전 확보 등 종합 서비스가 이루어졌다.

보통 20

30km마다 대상 숙소들이 있는데, 이 거리는 낙타가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이다.

본문비단길이라는 뜻이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 상품이 중국산의 비단이었던 데에서 유래하는데 서방으로부터도 보석·옥·직물 등의 산물이나 불교·이슬람교 등도 이 길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이 통상로에는 타클라마칸사막의 북변을 통과하는 서역북도(西道)와, 남변을 경유하는 서역남도(西道)가 있다.

똑같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西)투르키스탄의 시장에 이르며, 또한 동방으로는 간쑤성[省] 둔황[煌]에서 합해져 외길로 되어 황허강[河] 유역까지 이르렀다.

다만 초기의 것은 둔황의 서방에 위치하는 로브노르의 동단(端)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북도는 후베이[北]의 누란(蘭), 남도는 후난[南]의 미란을 경유하여, 두 오아시스를 국제시장으로 번영하게 하였다.

그러나 3세기경부터 로브노르 일대의 건조화(化)가 진행되면서, 북도는 둔황에서 북행하여 톈산산맥[脈]의 동단, 투루판분지[地]를 경유하여, 카라샤르[耆]·쿠차[玆]·카슈가르[勒]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로브노르의 남안을 서쪽으로 향하여 우전[于?]에 이르는 남도는 점차 이용도가 낮아졌다.

그 때문에 당(唐)나라의 서역경영은 제2차의 서역북도에 따라 행하여졌으며, 후대에 톈산남로[路]의 호칭이 생기게 된 것도 같은 서역북도였다.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사막의 주변에 산재한 다수의 오아시스 나라들의 대상활동으로 유지되었으며, 그 무역의 이익은 동방에서 중국인을, 북방에서 유목민을, 또 남방에서는 티베트인을 끌어들여 그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와 같은 외부세력에 의하여 시장이나 상로를 독점하려는 군사적 진출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의 형세를 좌우할 만큼 되어 있었다.

이 길의 동방과의 연결은 BC 2세기 후반의 한무제(帝) 때라고 하지만, 그보다 2세기 앞서서 이미 동서의 교섭이 있었던 증거가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전국시대(代)부터 한대(代) 초기에 걸쳐 간쑤성 서부를 점거하고 있던 월지(氏:?氏)가 비단의 중계무역에 종사하였기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서역의 옥(玉)이 월지의 중계로써 활발히 중국으로 수입되었고 이것을 중국인이 우씨(?氏)의 옥이라고 부른 데에서 추측된다.

그 옥의 대가로서 당연히 비단의 수출을 생각하게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동서무역은, 한무제 때에 이르러 크게 조정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장건(騫)이 서역으로 특파(BC 139∼BC 126)된 것을 계기로 하여 처음으로 서방의 사정이 공적 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역대의 왕조는 동서의 무역에 열의를 나타내어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여러 오아시스 나라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서방의 물건이 활발히 중국으로 도래하였으며 서방의 문물, 특히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마니교 및 로마에서 이단시(視)되었던 그리스도교의 한 파인 네스토리우스파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7세기 중엽 당나라가 타림 분지에 안서도호부(西府)를 설치한 무렵은 실크로드의 최성기(期)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녹산(祿山)의 난이 일어나고(755), 티베트군의 진출로 당나라와 서역과의 직접적인 교섭이 단절되자, 서역 동부는 위구르인(人)이 점거하고 고대부터의 문화를 계승하였으나 서부에는 이슬람 세력이 진전하고 있어서 실크로드는 중간의 파미르 근처에서 중단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이 결국 정치적으로 투르키스탄이 동서 2분으로 연계되어 오늘에 이른다.

또한 중국의 비단을 서방으로 운반한 점을 중시한다면, 실크로드가 점하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이란이나 지중해 연안까지 연장되기도 하고, 북아시아의 유목민을 매개로 하는 스텝지대를 관통하는 교역로(스텝 루트)나 남방의 남해제국(國)을 매개로 하는 해상교역로(시 루트)를 포함해야 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저작권 안내[출처]실크로드 [Silk Road ] |네이버 백과사전 ?톈산산맥 (Tian Shan, 天山山脈)은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와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의 4개국에 걸쳐 있는 장대한 산맥이다.

최고봉은 키르기스스탄과 중국 국경에 있는 해발 7435.3m의 포베다산[Pobeda Mt, 중국명은 퉈무얼봉(托木?峰)]이다.

시안에서 출발하여 실크로드를 가기 위한여 이 설산을 넘어야 하는 대상들이 바라보는 느낌은 어떠했을까?우즈베키스탄은 강수량이 적은데 톈산산맥의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내려 이루는 시르다리야강·이리강·추강 등이 흘러든다.

일조량이 많은 땅에 물이 흘러 들어 과일과 곡식이 풍족하다.

이 오아시스는 실크로드의 전략적 거점이 되었고고대부터 현대에까지 수 많은 세력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많은 문화가 융합되고, 많은 유적을 남겼다.

    길이만도 2,400km에 달하며 최고봉은 7천미터를 넘는 고산입니다.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알려진 옛 동서 교역로였던 비단길이 지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천산산맥은 동양과 서양을 경계짓는 장벽이었고, 중국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서역으로 진출하려던 중국의 시도가 번번히 이 곳 천산산맥에서 번번히 막히고 말았습니다.

당의 전성기였던 8세기 초에 잠시 천산산맥을 넘어지금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진출한 적은 있었으나 중국의 영향력은 천산산맥을 넘지 못했습니다.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곧장 서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입니다.

흑백사진을 보는 것처럼 온통 사막이거나 사막 한가운데 말라버린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서 흘러내려온 빙하호도 보입니다.

               천산산맥.   산맥의 북쪽과 남쪽 끝에는 중요한 동서교역로로천산북로와 천산남로로 불리던 실크로드가 있었습니다.

실크로드, 즉 비단길은 근대 이전의 동서양의 교역로로 중국과 유럽을 잇는 길로 중국의 비단이 이 길을 거쳐 로마에 이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실크로드의 시작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장건이라는 사람입니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 중앙아시아를 석권하고 있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서역으로 떠났으나 흉노의 포로가 되어 10여년을 살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한무제는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장건을 다시 서역으로 보내 길을 뚫게 했고 이 때 장건의 여행경로가 천산산맥의 북쪽인 천산북로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중앙 아시아로 들어갔다가 천산남로를 통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장건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지나 카스피해 연안의 이란과 더 멀리 시리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도 방문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장건은 이 길을 무려 네 번이나 다시 여행했습니다.

그가 개척한 길이 고대의 동서 교역로, 실크로드입니다.

                     천산산맥. 흰 눈에 덮혀있는 고봉들이 즐비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지구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는 히말라야에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덕훈의 여행일기]        ..?-텐산산맥 1권-작가 백한이 선생은 일찍이 1993년, 페레스트로이카로 막 개방한 러시아와 수교 직후 발 빠르게도 일제하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을 등지고 연해주로 간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관련 작품인 태백산맥 5부작을 펴내 기민한 역사의식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2년 후 이원규 작가의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라는, 9부에 이르는 대하 장편을 선보이게 된다.

태백산맥 1권에서는 경남 의령 한실마을에서 소월 선생이 운영하는 한 서당을 중심으로 한말의 풍운을 예고하는 서막이 펼쳐지고, 2권에서는 이 서당 출신 명회와 조선총독부 고관의 딸 혜인의 인연이 맺어지면서 겪게 되는 파란만장한 이역만리 디아스포라 생활의 전주곡이 일본과 국내에서 펼쳐진다.

?텐산산맥 3, 4, 5권텐산산맥 3권에서는 명회와 혜인, 그리고 송월 선생, 춘식과 을미 부부가 일제하에서 연해주로 이주하여 겪게 되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어려운 삶을 그리고 있다.

민족얼을 심으려 노력하던 백명회와 송월 선생이 강제이주 전초작업으로 단행한 한민족 지식인 일제검거 선풍에 휘말려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편 혜인은 남편 명회를 구하러 친지인 유세프를 찾아갔다가 데리고 간 딸 친하가 병이나서 잠시 맡기고 온 사이 두 아들과 함께 강제이주대열에 끼여 죽을 고비를 넘기며 황량한 카자흐스탄에 내리게 된다.

그들은 크즐오르다에서 춘식-을미 부부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해 가며 유세프로부터 명회와 소월 선생의 소식을 듣게 되지만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유세프 가족과 함께 살던 딸 친하는 그의 도움으로 장성한 처녀가 되어 크wmf오르다로 찾아와서 농장지배인과 결혼하게 되고, 소련정권의 변화로 죽은 백명회는 반동에서 복권된다.

사할린으로 이주해 간 김장호와 유금자는 미즈호마을에서 한민마을을 일구어 살며 목사와 산파로 각각 신망을 얻고 살았다.

드디어 1945년 8월15일 조국은 일제에서해방이 되었으나 이 오지에서는 소식을 못 듣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자신들이 탄압해온 한민족으로부터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한 헌병 몇이 들이닥쳐 김장호를 비롯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학살을 자행했다.

이른 바 미즈호학살 사건으로서 모두 27명이 희생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텐산산맥 4권에서는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내용이 무슨 여행기 같아 기대했던 독자를 실망케 한다.

모스크바를 시발로 상트페텔스부르크-알마아타-타슈켄트-사마르칸트-이르쿠츠크-바이칼호수-하바롭스크-사할린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발자취를 더듬는 여정은 주마간산 격이 되어 밀도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5권에서는 전혀 다르게 장시로써 한 권의 분량을 다루어 시적 감회를 겻들인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것이다.

 물은 흘러서 남으로 가는데 우리는 거슬러서 올라가는 것이지요.양떼도 함께 오가는 길

잠시 쉬어가는 물가의 나무 그늘 ....... 돗자리 펴고 낮잠 한숨 자면 딱 좋겠습니다

!!경사를 휘돌아 올라가는 길, 삼단으로 좌우를 �y어올라갑니다.

그 중간에는 폭포 같은 물이 쏟아지고해발 약 3600미터를 넘어가기 위해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계곡의 초원은 타클라마칸의 분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지요.소룡지라는 호수가 나타나네요

대룡지대룡지를 지나자 계곡의 초원이 ........ 북으로 갈수록 가을빛이 선명해지네요

본격적인 경사가 나오네요

11킬로미터를 휘돌아간답니다.

뒤로 보이는 길이야


이게 동일한 한 가닥의 길이라는

대단하지요

어떻게 이 길이 한가닥일지, 사진으로 보면 상상이 쉽게 가질 않습니다.

드디어 고갯마루!1895미터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군요.고갯마루에서 잠시 쉬면서 내려다보면 아찔합니다.

설산도 보이고

내려가는 길넘어가면 초원입니다.

그러나 톈산산맥 넘어의 바인부루커는 외국인 미개방지역입니다.

 사전에 공안에서 발급받은 통행증이 있어야만 통과를 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쿠처로 백



다시 톈산산맥을 넘어서서 돌아가는 길

가을이 깊습니다!계곡에 물안개가 반겨주네요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中原)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변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이것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敦煌]까지 이르는 구간으로, 역대에 장안(長安 : 지금의 시안[西安] 또는 뤄양[洛陽])을 기점으로 했고, 허시후이랑이 중요한 길목이었다.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이며, 이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로막혀 사막 남쪽(쿤룬 산맥[崑崙山脈] 북쪽)과 사막 북쪽(톈산 산맥[天山山脈] 남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서쪽 부분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갈래가 있어서 남로는 파미르 고원의 쿠시쿠르간에서 서쪽으로 쿠샨 왕국에 이르고,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천축(天竺 : 인도의 옛 이름)에 들어갈 수 있다.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아라비아 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지중해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른다.

북로는 강거(康居 : 漢魏시대 중앙 아시아의 키르기스 평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투르크계 유목민족국가)에서 서쪽으로 이란을 지나 곧장 지중해와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거의 수천 리로 이어져 지금의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여 개 국가를 거쳐간다.

이 세 부분 가운데 동쪽 부분은 역사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중앙과 서쪽 부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개통과 발전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전 한(前漢 : BC 206

AD 25) 때이다.

한 무제(武帝)는 대월지(大月氏)·오손(鳥孫)과 같은 나라와 연합하여 중국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흉노를 제압하고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2차례에 걸쳐 장건(張騫)을 중앙 아시아로 파견했다.

장건의 원정을 계기로 당시 서역(西域)이라고 칭해지던 중앙 아시아 및 서방 각지와 사절을 교환하게 되었고, 여러 문물이 왕래하게 되었다.

당시에 실크로드는 남·북 양 도로 나뉘어 있었다.

중국의 서쪽 관문이었던 위먼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는 로프노르 호 남안의 미란으로부터 쿤룬 산맥의 북쪽을 지나 야르칸드에 이른 후 파미르 고원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나가는 남로(南路)였고, 또 하나는 투루판[吐魯蕃]에서 톈산 산맥 남쪽을 지나 카슈가르에서 파미르를 넘어 페르가나로 가는 북로(北路)였다.

남로에는 다시 야르칸드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 북쪽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

전한 때에는 반초(班超)가 서역으로 출사(出使)하여 전한말 이래 중단되었던 서역과의 관계를 개선시켰고, 나아가 AD 97년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 로마)으로 파견했다.

감영은 결국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파르티아와 시리아 및 페르시아 만까지 갔다옴으로써 실크로드의 서쪽 끝을 연장시키고 중국인들의 서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당대(唐代 : 618

907)였다.

당시 중국 북방에서는 돌궐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중원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마침 돌궐이 동·서 양국으로 분열되고 서돌궐에 내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당 태종은 군대를 파견하여 서돌궐을 제압했다.

이무렵 로프노르 호 일대의 건조화(乾燥化)가 진행되어 남도의 이용도가 낮아졌고, 북도는 둔황에서 북상하여 하미[哈密]를 경유해 투루판에서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톈산 남로)과 톈산 산맥 북쪽을 지나는 길(톈산 북로)이 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구자(龜玆 : 한대의 서역국가)와 북정(北庭 : 짐사)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설치하여 톈산 남·북로를 관장하게 했다.

이후로는 비단 무역을 비롯한 동서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소그디아나(서투르키스탄)를 본거지로 하는 소그드 상인이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했다.

9세기 무렵에는 당의 세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북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위구르족과 서쪽에서 진출해온 이슬람 상인이 그들을 대신했다.

송대 이후로는 광저우[廣州]를 지나 스리랑카·파르티아·홍해를 지나 카이로에 도달한 후 다시 이곳을 거쳐 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했다.

이와 함께 육로는 점차 쇠퇴해갔다.

역사적 의의장건이 서역을 처음 개척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는 중앙 아시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끊임없이 사절을 교환했고, 민간인들의 왕래도 빈번하게 되었다.

또한 사신과 민간인의 잦은 왕래는 문물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는 많은 구법승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각국에서 불교를 지원하는 풍조에 힘입어 많은 인도 승려들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왔다.

당대에는 불교가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고, 현장(玄?)의 역경사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중국 고유의 유교·도교와 함께 당대의 3대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시켜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불교 이외에도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로마에서 이단시되었던 네스토리우스교(景敎), 이슬람교 등도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전해졌다.

또한 당대의 장안에는 페르시아인을 비롯해 적지 않은 수의 서역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호복(胡服)·호모(胡帽)·호악(胡樂)·호무(胡舞)·호병(胡餠) 등 각종 호풍(胡風)을 유행시켰다.

서역의 문물이 중국 사회에 전파되는 한편, 중국의 주철(鑄鐵) 기술, 양잠, 제지법 등이 서방으로 전달되었다.

실크로드는 이같이 상업면에서뿐만 아니라 동서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실크로드는 현재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吳爾自治區]를 잇는 포장도로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출처 : [기타]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1391&page=1&sm=&key*************************************************************************************************************************실크로드 [Silk Road] 요약내륙(內陸)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통상로(東西通商路). ↑ 캬라반 숙소의 정문 / 아나톨리아 지방을 방문하는 대상(隊商, 캬라반)들의 숙소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할 뿐 아니라 물건 매매, 여행 루트 안전 확보 등 종합 서비스가 이루어졌다.

보통 20

30km마다 대상 숙소들이 있는데, 이 거리는 낙타가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이다.

본문비단길이라는 뜻이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 상품이 중국산의 비단이었던 데에서 유래하는데 서방으로부터도 보석·옥·직물 등의 산물이나 불교·이슬람교 등도 이 길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이 통상로에는 타클라마칸사막의 북변을 통과하는 서역북도(西道)와, 남변을 경유하는 서역남도(西道)가 있다.

똑같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西)투르키스탄의 시장에 이르며, 또한 동방으로는 간쑤성[省] 둔황[煌]에서 합해져 외길로 되어 황허강[河] 유역까지 이르렀다.

다만 초기의 것은 둔황의 서방에 위치하는 로브노르의 동단(端)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북도는 후베이[北]의 누란(蘭), 남도는 후난[南]의 미란을 경유하여, 두 오아시스를 국제시장으로 번영하게 하였다.

그러나 3세기경부터 로브노르 일대의 건조화(化)가 진행되면서, 북도는 둔황에서 북행하여 톈산산맥[脈]의 동단, 투루판분지[地]를 경유하여, 카라샤르[耆]·쿠차[玆]·카슈가르[勒]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로브노르의 남안을 서쪽으로 향하여 우전[于?]에 이르는 남도는 점차 이용도가 낮아졌다.

그 때문에 당(唐)나라의 서역경영은 제2차의 서역북도에 따라 행하여졌으며, 후대에 톈산남로[路]의 호칭이 생기게 된 것도 같은 서역북도였다.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사막의 주변에 산재한 다수의 오아시스 나라들의 대상활동으로 유지되었으며, 그 무역의 이익은 동방에서 중국인을, 북방에서 유목민을, 또 남방에서는 티베트인을 끌어들여 그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와 같은 외부세력에 의하여 시장이나 상로를 독점하려는 군사적 진출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의 형세를 좌우할 만큼 되어 있었다.

이 길의 동방과의 연결은 BC 2세기 후반의 한무제(帝) 때라고 하지만, 그보다 2세기 앞서서 이미 동서의 교섭이 있었던 증거가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전국시대(代)부터 한대(代) 초기에 걸쳐 간쑤성 서부를 점거하고 있던 월지(氏:?氏)가 비단의 중계무역에 종사하였기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서역의 옥(玉)이 월지의 중계로써 활발히 중국으로 수입되었고 이것을 중국인이 우씨(?氏)의 옥이라고 부른 데에서 추측된다.

그 옥의 대가로서 당연히 비단의 수출을 생각하게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동서무역은, 한무제 때에 이르러 크게 조정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장건(騫)이 서역으로 특파(BC 139∼BC 126)된 것을 계기로 하여 처음으로 서방의 사정이 공적 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역대의 왕조는 동서의 무역에 열의를 나타내어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여러 오아시스 나라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서방의 물건이 활발히 중국으로 도래하였으며 서방의 문물, 특히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마니교 및 로마에서 이단시(視)되었던 그리스도교의 한 파인 네스토리우스파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7세기 중엽 당나라가 타림 분지에 안서도호부(西府)를 설치한 무렵은 실크로드의 최성기(期)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녹산(祿山)의 난이 일어나고(755), 티베트군의 진출로 당나라와 서역과의 직접적인 교섭이 단절되자, 서역 동부는 위구르인(人)이 점거하고 고대부터의 문화를 계승하였으나 서부에는 이슬람 세력이 진전하고 있어서 실크로드는 중간의 파미르 근처에서 중단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이 결국 정치적으로 투르키스탄이 동서 2분으로 연계되어 오늘에 이른다.

또한 중국의 비단을 서방으로 운반한 점을 중시한다면, 실크로드가 점하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이란이나 지중해 연안까지 연장되기도 하고, 북아시아의 유목민을 매개로 하는 스텝지대를 관통하는 교역로(스텝 루트)나 남방의 남해제국(國)을 매개로 하는 해상교역로(시 루트)를 포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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