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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도



어머니의 오남매중 사남매의 식구가 고향마을인 녹동의 신정 아니면 북촌이나 남촌에 살았는데 큰이모네만 녹동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인 득량도에 살았다.

득량도는 장흥군과 보성군, 고흥군 사이의 바다인 득량만 한 가운데 있는 섬으로 자료를 검색해 보니 예전에는 장흥군이었다가 완도군이었고, 지금은 고흥군 도양읍에 속해 있다.

섬의 행정구역은 예전엔 섬끼리 묶어서 이 쪽은 돌산군, 또 저쪽은 완도군 이렇게 했었는데 섬사람들이 뱃길이나 생활권과 행정구역이 서로 달라 불편 민원이 많자 수정되었다고 한다.

예전 득량도도 행정구역은 완도이고 시장은 녹동으로 보는데 등본한장을 때려해도 뱃길도 없는 완도까지 가야했으니 불편이 오죽했겠나?그리고 섬이름의 유래는, 대개 남쪽지방 섬들이 임진왜란, 특히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일화들이 많은데 득량도도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식량을 많이 얻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득량도라고 전해진다고 한다.

이모는 이 섬 득량도로 시집 보내졌다.

지금이야 결혼의 조건이 복잡다단하지만 당시 결혼조건이야 뭐 별거 있었겠는가? 먹고 살 논밭 있고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대대로 섬에서 살고 있는 정씨집안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집이었지.그러면 됐지 섬이라고 뭐 대수인가? 지금은 자녀들은 다 서울 아니면 녹동에 살고 있고, 이숙(이모부를 고향에선 이숙으로 부른다)도 돌아가셔서 이젠 섬에 홀로 사신다.

서울에 있는 사촌들이 동대문쪽에서 의류계통 일을 하는데, 다들 괜찮게 사는 것 같다.

그래서 홀로 계신 이모님을 서울서 같이 살자고 불러도 이모님은 마다 하신다.

그렇다고, 서울에 안올라가신것도 아니다.

예전에 서울에서 잠깐 사셨는데 이모님은 답답해서 못살겠다고 내려와 버리셨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때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은 이 득량도 이모네였다.

아버지쪽은 사촌에 육촌도 없고-그 단계만 넘어가면 동네의 절반이 우리 이씨였지만- 어머니쪽 친척들도 다들 녹동에 사셔서 갈만한 곳이 없었다.

가장 만만한 외가는 오히려 같은 마을이었다.

마을 우물과 우리집 사이에는 외가집이 있어서 물 길러간 어머니가 안오시면 할머니는 큰누나를 시켜 엄마한테 갔다오라고 했다.

큰누나는 외가를 먼저 들러 세랍문(사립문) 안에 우리집 물동이가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고 우물로 향했다고 한다.

나한테 외가집의 용도는 하나 더 있었다.

내가 밥을 잘 안먹을때면 어머니는 남의 집 가서 먹으면 밥이 맛있다며 가깝고 만만한 남의 집인 당신의 친정으로 나를 데려가곤 하셨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외가집 밥이라고 그다지 맛있는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름방학때 갈만한 곳이라곤 득량도 큰이모네밖에는 없었다.

이모네집이라고 뭐, 자주 간것도 아니다.

한 서너번 갔나? 남에게 폐끼치는 것을 싫어하시는 어머니 탓에 방학때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이모네도 고작 서너번밖에 못가봤다.

이모네는 주로 막내누나랑 사촌들과 갔었는데 배를 타면 누나들은 배안 객실에 주로 있었지만 머시메들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갑판위에서 언제 섬이 보이나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가 고향이어도 아이들은 배를 탈 일은 많지가 않았다.

부모님이 수산업에 종사한 친구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기껏 한다고 하는게 엄마 아부지의 배가 육지에 닿을 시간에 맞춰 리어카 끌고 물량장에 나가는 일정도였다.

물론 어린시절부터 뱃일을 하는 친구들도 있긴 했다.

지금도 배를 타면 재밌다.

소록도와 거금도가 다리가 놔지면서 아쉬운건 고향에 가도 가볍게 배 타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섬에도 육지처럼 논도 있고 밭도 있고 소를 데리고 풀을 뜯길 풀밭도 있었다.

섬 안에 관청, 선창 이렇게 마을도 두 개나 있었다.

말그대로 관청은 조선시대부터 있던 관청이 있었고, 선창은 배를 데는 선창이 오래전부터 있던 마을이었다.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미래소년 코난에서 라나가 살던 하이하바와 비슷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도 하나 있었다.

분교였었나? 지금도 있나 모르겠다.

겨울에도 이모네를 한번 간적이 있었다.

새로 받은 책에 두 살 위인 사촌누나가 모두 6학년 1반이라 쓰길래, 벌써 반 배정 받았느냐고 묻자 누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린 1반까지밖에 없어.우리들이 왔다는 소리에 옆집 아주머니가 고구마와 감자, 옥수수를 쪄오셨다.

'사둔네 큰애기랑 총각들 왔네.' 마을엔 거의가 이숙의 친척들이라 사돈은 사돈이지만 기껏해야 초딩, 중딩인 우리를 놀리려고 하신 말씀이다.

'강냉이랑 감재랑 하짓감재랑 묵어 보랑께.' 우리 시골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부르고 감자는 하지즈음에 난다고 하지감자라고 부른다.

이모네집에서의 하루하루는 재미있었다.

실컷 놀고 엄마 잔소리도 안들어도 되고... 숙제도 가져간 탐구생활만 조금 끄적거리기만 하면 될뿐....그런데 이모네집에서 불가능한 일이 몇 개 있었다.

아이스크림. 텔레비젼...섬엔 전기가 안들어왔다.

전기는 자가발전을 해서 일곱시부터 열시까지만 잠깐 들어왔다 다시 나갔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은 다른나라 이야기였다.

냉장고도 없으니 김치도 통에 담가 우물에 넣어다가 필요할때마다 꺼내어 먹었다.

티비도 그런 이유로 없었고, 커다란 밧데리가 붙어있는 라디오는 이모부가 독점하고 있었다.

그래도 방학때 갈 이모네집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삼십년이 지나도 추억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모에게는 섬으로 시집 간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나 보다.

'어매는 왜 나만 섬으로 시집을 보내갖고 어매도 못 보고 동상들도 못보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와 외삼촌이 돌아가셨을때 이모 곡소리의 주제는 왜 나만 섬으로 시집을 보냈느냐라는 탄식이었다.

언젠가 외삼촌 제사때도 그 얘기를 하셨다.

이모한테는 그게 평생 한이셨나 보다.

큰이모 뵌지도 오래 되었다.

큰이모 말마따나 섬에 사시니까 어머니, 동생들에 자식, 조카들도 잘 못 보게되는 것은 맞는 말이다.

언젠가 서울 사촌들 집을 다녀오며 우리집에 들렀다가 섬에 들어가시는 길이었는데, 짐이 있어 내가 선착장까지 모셔다 드린적이 있다.

숙명처럼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없는 섬으로 들어가시는 이모님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사진은 이번 추석에 고흥우주천문과학관 가는 길에 있는 편백숲에서 본 이모네 섬 득량도다.

추석때 이모 안부도 어머니께 물어보지 못했다.

저녁에 어머니께 전화드리며 이모님 안부라도 여쭤봐야겠다.

그런데 우리가 내린 곳은 아침의 그 장소가 아닌 처음 우리가 도착했던 장소다.

그만큼 물이 많이 들어왔다는 의미다.

한참을 걸어서 가야 할 판인데 마침 공사 관계자의 차가 있어 그 차로 이 연구원님이 가서 차를 갖고 오기로 하고 나는 이곳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같이 온 아주머니는 주차된 차를 이끌고는 나간다.

주변에 승용차들이 제법 많이 주차해있었다.

아침에는 뻘이었던 곳이 지금은 배들이 물 위로 둥둥 떠 있다.

저만치 모래등이 길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사라져버렸다.

오전에 열심히 만들던 양식장 시설이 다 만들어져 크레인으로 바다에 둥둥 띄우는 작업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을 바다로 가져갈 견인선도 바다에 떠있다.

?   선착장 바로 옆에는 구성횟집이 있는데 두 아주머니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골라내는 작업이다.

주변의 해안길을 배회하다가 마침 차가 온다.

2시 1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여기서 고흥으로 가야 한다.

고흥 녹동항에서 득량도 가는 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녹동까지 거리도 상당한 편이다.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다.

   열심히 달려 녹동항에 닿은 것은 3시 50분. 득량도 가는 배가 닿는 곳은 녹동항 오른쪽, 소록대교를 바라보는 방면의 선착장이다.

차를 주차시킨 후 짐을 챙기고 선착장으로 가니 마침 철부선인 ‘득량5호’가 승객을 하선시키고 있었다.

지난번에 소록도를 가면서 몇 번이고 가고자 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맞지 않아 타지 못했던 그 배다.

   우리가 배에 올라타려고 하자 젊은 사람이 득량도로 갈거냐 묻는다.

선장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다른 배로 가야 한다고 한다.

이 배는 일이 있어 가지 못하고 선외기선으로 가야 한다고. 철부선인 탓에 사실 굳이 이 배를 두세 명이 타기에는 부담이 되는 배다.

마침 득량도 주민인 나이 많은 남자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선장이 운행하는 봉고를 타고 다른 선착장으로 향한다.

봉고차는 해안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장예마을에 닿는다.

이곳에 선외기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이 운항하는 것이 아닌 득량도 발전소 직원이 출퇴근용으로 가는 배라고 한다.

어떻든 우리는 득량도에 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   선착장 앞에는 장예마을 표지석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예자가 예사스럽지 않은데 전혀 다르다.

예술이나 예인을 뜻하는 것이 아닌 예절을 뜻하는 예(禮)자다.

그렇다면 ‘장예마을’이 아니라 ‘장례마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미지 상 장예마을로 표현하고 있었다.

300여 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마을 어귀에 긴 여가 있어 장여(長礖)로 불리다가 100여 년 전에 예절이 바른 마을이라는 의미로 장례(長禮)마을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음상이나 문법상 이것은 틀린 표현이다.

아마도 초상을 의미하는 장례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편법으로 부르는 것 같다.

   선외기가 맞은편 방파제에서 건너온다.

그리고 미끄러운 경사제에 배가 닿자 올라탄다.

배는 바로 출발한다.

아직 4시 20분이 안 된 시각. 여기서 바로 보이는 저 섬이 득량도다.

따라서 녹동항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빠르다.

거기에다 철부선이 아닌 선외기가 아닌가. 그래서인지 5분도 채 안되어 득량도에 닿았다.

?보성만 입구를 가로막는 바지락의 섬, 득량도    배가 득량도 선착장 해역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 방파제에서는 낚시꾼 한 명이 낚시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낚시꾼이 아니라 이곳 교회 목사님이라고 한다.

사람을 낚지 않고 고기를 낚는 목사님이라. 선착장에서는 젊은 여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곳 보건진료소 소장이라고 한다.

제법 젊은 여자인데 아주머니다.

물건을 찾아서 이곳 주민의 오토바이에 얹혀 타서는 안으로 들어간다.

시간을 보니 4시 25분. 장예마을에서 5분 정도 걸렸다.

   지도를 펴보면 전남 고흥과 보성 사이에 점 하나가 있는데 그곳이 득량도다.

소록도 가는 쪽 녹동항에서 여객선이 매일 왕복 두 번 다니는데 소요 시간은 약 40분 걸린다.

여객손님이 없다보니까 엄청나게 비싼 운임을 받고 있으며 그것도 비가 오면 운행을 하지 않는다.

?   면적 1.75㎢, 해안선길이 6.5㎞의 ‘득량도(得粮島)’. 도양읍 신흥마을 서쪽 3㎞ 해상에 위치한다.

보성만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교통상의 요충지이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도양 둔전에서 두 차례에 걸쳐 벼 300석과 820석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섬이 당시 장흥부의 목장과 함께 도양 둔전의 일부로 추정된다.

[득량도] 한번 파해쳐 봅시다.


이처럼 이 섬에서 식량을 얻었다 하여 득량도라고 부른다.

   득량만에 떠 있는 득량도라는 작은 섬. 득량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생각한다.

임진왜란 당시 지금의 득량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아군이 왜군과 대치하던 중 식량이 떨어졌다.

그래서 비봉리 선소(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배가 부서지면 고치던 곳)에서 식량을 조달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그때 식량을 얻은 지역이라 하여 얻을 득(得), 곡식 량(糧)을 써서 득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다.

한편 만을 막아 생긴 넓은 간척지에서 곡식을 구할 수 있게 되어 득량(得糧)이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   우리가 내린 곳은 섬의 최남서쪽. 선착장은 마을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왼쪽으로 방파제가 있고 그 옆으로 경사제와 함께 철부선이 닿는 선착장이 있다.

선착장에 올라서면 제법 넓은 물양장이 있다.

방파제 입구에 도로명 주소표지판이 가로등에 걸려있다.

‘득량관선길 1-370’로 상당히 많은 번지수가 존재한다.

아직은 늦은 오후라 가로등은 아직 불이 켜있지 않았다.

물양장에서 나오면 붉은 벽돌로 된 건물 한 채가 있다.

대합실이다.

상태로 보아 건립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아 보인다.

그 앞으로 작은 남방파제가 있다.

이 방파제는 포장을 하지 않은 돌로 된 방파제였다.

서로 마주보는 방파제가 같다.

   여기서부터 집이 몇 채 있지만 한 채 외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보인다.

부채꼴 형태의 계류장에는 작은 선외기 몇 척이 있을 뿐. 절반 이상은 갯벌이다.

여기서 길은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는데 이 앞 왼쪽에 건물 한 채와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앞에는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정면에는 ‘정수천’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이 물에 대한 안내문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은 득량도의 물의 깨끗함을 칭송하는 글이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건물은 재가 즉 재실이다.

득량도에는 재실이 다른 섬에 비해 많은 편이다.

철제 대문이 굳게 닫힌 이곳은 장씨 문중의 재가라고 한다.

문 위에 걸었던 편액은 떨어져 있어 의미를 알 수 없었다.

?   재실을 지나면 바로 앞에 반대편 방파제가 있고 그 앞에는 옛 대합실이 있다.

지금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깐 이 앞 방파제가 예전에는 선착장으로 사용되었던 방파제다.

옛 대합실 옆에 마을표지석이 있다.

왼쪽에 큰 자연석과 함께 그 옆에 대리석으로 된 ‘관청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마을로 가는 해안길은 오른쪽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길 따라 왼쪽은 밭이 있는데 아주머니가 열심히 물을 퍼서 뿌리고 있었다.

최근에 비가 오지 않아 물을 뿌려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다.

아주머니의 집은 대합실 옆에 위치한 집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수천이라고 새겨진 표지석 뒤의 우물은 자기 집 것이라고 하면서 이곳 지하수가 아주 좋다고 자랑한다.

우물물을 밭에 퍼 넣는 거예요? 하니 아니라고 한다.

밭 옆 도랑물을 끌어다 뿌리고 있다고 한다.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인사를 하고는 가던 길을 걷는다.

얼마를 걸으니 해안길에 가는 모래들이 수북하게 깔려 있었다.

이곳에 모래사장이 없는 것 같은데 하면서 둘러보니 바로 아래 해안은 모래가 섞인 해변이었다.

태풍으로 인해 모래가 이곳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래가 너무 가늘다.

여기서 어느 정도 걸어가면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왼쪽은 발전소 가는 길이고 직진이 마을로 가는 길이다.

1976년경 섬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연발전시설로 전기가 24시간 공급된다.

?   발전소는 바로 위에 위치해있다.

발전소 옆으로 해안도로와 별도로 좁은 포장도로가 나 있는데 이 길로 해서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올라가는 길목에 할아버지 한 분이 서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인사를 하고 그냥 지나친다.

왼쪽은 발전소, 오른쪽은 밭이 있는데 밭 너머로 교회가 있다.

득량도교회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잠을 해결한다고 하는데.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새 건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보건진료소다.

단층건물의 붉은 벽돌이다.

준공기념식수가 있는데 2011년 1월이란다.

이제 1년 반 이상이 된 건물인 셈이다.

[득량도] 선택의 여지가 ...



   보건소 앞 왼쪽으로 포장도로가 이어지고 보건진료소 앞을 지나면 길은 좁은 길이 이어진다.

이어 조금 더 올라가면 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데 직진하는 길은 학교터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교회 앞을 지난다.

왼쪽 밭 뒤로 높은 돌 축대가 있고 그 왼쪽으로 건물 한 채가 보이는데 재실로 보인다.

이곳 밭들은 층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 갈림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학교 정문이 있다.

철제 아치형을 이루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을 가진 학교 정문은 왼쪽 기둥에는 ‘득량초등학교’ 교명이 아직도 그대로 붙어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폐교 안내문이 붙어있다.

1999년에 폐교되었다고 한다.

?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나무 사이로 다른 학교에서는 보기 힘든 ‘어린이헌장탑’이 세워져 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초상이 새겨진 헌장탑이다.

그 왼쪽으로 교실로 들어가는 계단길이 있다.

운동장 입구에는 역시 무성한 나무 숲 안으로 이승복 군 동상이 있고 그 뒤편에 학교 연혁비가 세워져 있다.

1944년에 득량국민학교로 개교하여 1983년에는 병설유치원까지 운영했었다.

그러다가 1989년에 녹동국민학교 득량분교장으로 격화된 후 1999년에 2명으로 1학급 2부 복식으로 운영했으나 1년도 채 안되어 그해 9월에 폐교되었다.

한창 번성할 때는 6학급에 학생 수만도 270명일 때가 있었다고 한다.

졸업 48회 동안 총 1,04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교운동장은 완전히 잡초더미 속에 파묻혔다.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하다.

운동장 양쪽 끝단에는 각종 철봉과 놀이시설이 색이 바랜 채 세월의 깊이만큼 녹이 슨 상태다.

운동장 서쪽 끝단, 교실로 가는 길 왼쪽으로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잇는데 이 길이 재실로 가는 길이다.

이곳 역시 샤시로 된 문이 굳게 닫혀 있고 현판마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김씨 재실인 듯싶다.

여기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김씨 부부묘가 있다.

?   여기서 나와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왼쪽 교실로 들어가는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학교 건물이 보인다.

뒤쪽 복도로 해서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건물의 너비가 넓은 탓에 교실 크기도 상당히 넓은 편이다.

나무로 된 바닥에 게시판과 칠판 등이 흔적만 남았을 뿐이다.

일부 실험실에는 실험도구가 남아 방치되고 있다.

일부 교실에는 칠판이 온전히 남아 있는데 학생들이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있다.

사실은 방문객들이 남긴 흔적들이다.

학교 교사는 두 개의 건물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폐교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교실도 있다.

태극기가 있는 그 아래 칠판에는 1999년 7월 15일자 글이 있다.

떠든 사람 이름과 착한 사람 이름 그리고 방학안내와 교실청소 그리고 이날 통지표를 전달했나 보다.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을 통해 다시 밖으로 나온다.

?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kt기지국을 지나면 앞에 공터와 함께 일군의 비석군이 보인다.

일종의 사적비다.

3개의 비석이 좌우로 나란히 놓여 있는데 중앙의 가장 큰 비석에는 ‘선진23공서계사적비’라고 새겨져 있다.

오른쪽에는 별도의 안내석이, 그리고 이 앞에는 두 그루의 나무와 함께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나무를 심은 헌수자 명단이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별도의 영역에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이 있는데 역시 재실로 사당이다.

‘신모사(?慕祠)’. 규모가 제법 큰 편이다.

?   여기서 되돌아와서는 학교 앞 갈림길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선다.

이 입구에도 재실이 하나 있다.

‘세덕사(世德祠)’라는 하동 정씨 문중의 재실이다.

득량도에 사람이 처음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로 황해도 금천에 거주하던 정륜이 임진왜란 때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원래 장흥군에 속하다 완도군에 편입되어 완도군 득량면 사무소가 관청마을에 있었다.

1914년 고흥군 도양읍에 편입되면서 득량리로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장흥부에 속한 목장이 있었다.

득량도는 마을에서 좋은 집은 제각이다.

(4채가 제각), 그 중 한 채는 산신제사당으로 매년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   이 앞에서 골목을 누빈다.

빈집도 더러 있지만 살고 있는 집들이 더 많다.

겨우 경운기 한 대 정도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골목길인데 오르막길이다.

마을 끝길로 해서 한 바퀴 돌다가 내려가는데 우물이 몇 개 보인다.

그리고 그 옆으로 지붕으로 큰 보호각을 한 두 개의 큰 우물이 보인다.

일종의 배수지라고 해야 할 듯한 그런 구조물이다.

사각형의 우물에 판넬로 뚜껑을 만들어 덮고 있었다.

마침 그 옆에 집에서 아저씨가 일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에게 우물에 대해 물었더니 친절하게 이야기해준다.

?   두 개의 우물은 이 섬의 주요 식수원이라고 한다.

이 우물을 주민들이 대부분 먹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양쪽으로 많은 호스들이 들어있고 우물 바닥은 자갈들로 만들었다.

각 가정마다 펌프가 있어 이 물을 퍼간다고 한다.

물맛이 그렇게 좋다고 하기에 바가지도 없고 하여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하니 아래에도 같은 시설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형 저수통이 있는데 이 통에는 두 개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모아두는 것으로 넘치는 것은 흘러나가도록 호수로 연결하여 배출하도록 했다.

그래서 이 호스로 나오는 물을 마시면 된다고 한다.

?   보호각 기둥에는 이 물에 대한 안내판이 걸려있다.

양철판에 새겨진 글로 고향을 떠난 사람이 이곳 물 자랑을 하고 있는 글이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표지석 뒷면에 있는 그 내용일 듯싶다.

서울 성북동에 살고 있는 이 섬 출신이 쓴 ‘내 고장 물자랑’이라는 글이다.

   푸른 물 넘실대는 남해바다    그 고흥 반도 끝자락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득량만에    우뚝 솟은 작은 섬    얻을 得 어질 良    득량리지    높고 높은 봉우리는 성재봉이고    성재봉 기슭 아래 관청 마을은    우리들이 나서 자란 정겨운 고향    성재봉의 정기 받아 아름답고 늘 푸른 그리운 고향 산세    사방에서 솟구친 자연 생수 마을 샘물    보는 이는 깜짝 놀라 눈이 휘등글고    마신 이는 감탄하여 다시 찾으니    내 고장 섬 사랑 생수인가 하노라    물의 맛은 생수지요    생수맛은 득량이라    약수물이 따로 있나    득량 생수 약수로다    - 서울 성북동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장영재 글 ?   섬에는 식수 사정이 좋다.

졸졸 흘러내리는 물을 그러나 힘들게 먹어야 했다.

아주 낮은 자세로 받아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별도의 물그릇 같은 것이 없었기에. 물맛이 그렇다고 탁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런대로 맛은 있었다.

이 섬에서는 웬만해서는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폭우가 내릴 때는 흙탕물이 나와서 그렇지 그 이후는 늘 깨끗한 물이란다.

그런 면에서 득량도는 물이 풍부한 섬이다.

<계속> 어머니의 오남매중 사남매의 식구가 고향마을인 녹동의 신정 아니면 북촌이나 남촌에 살았는데 큰이모네만 녹동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인 득량도에 살았다.

득량도는 장흥군과 보성군, 고흥군 사이의 바다인 득량만 한 가운데 있는 섬으로 자료를 검색해 보니 예전에는 장흥군이었다가 완도군이었고, 지금은 고흥군 도양읍에 속해 있다.

섬의 행정구역은 예전엔 섬끼리 묶어서 이 쪽은 돌산군, 또 저쪽은 완도군 이렇게 했었는데 섬사람들이 뱃길이나 생활권과 행정구역이 서로 달라 불편 민원이 많자 수정되었다고 한다.

예전 득량도도 행정구역은 완도이고 시장은 녹동으로 보는데 등본한장을 때려해도 뱃길도 없는 완도까지 가야했으니 불편이 오죽했겠나?그리고 섬이름의 유래는, 대개 남쪽지방 섬들이 임진왜란, 특히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일화들이 많은데 득량도도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식량을 많이 얻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득량도라고 전해진다고 한다.

이모는 이 섬 득량도로 시집 보내졌다.

지금이야 결혼의 조건이 복잡다단하지만 당시 결혼조건이야 뭐 별거 있었겠는가? 먹고 살 논밭 있고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대대로 섬에서 살고 있는 정씨집안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집이었지.그러면 됐지 섬이라고 뭐 대수인가? 지금은 자녀들은 다 서울 아니면 녹동에 살고 있고, 이숙(이모부를 고향에선 이숙으로 부른다)도 돌아가셔서 이젠 섬에 홀로 사신다.

서울에 있는 사촌들이 동대문쪽에서 의류계통 일을 하는데, 다들 괜찮게 사는 것 같다.

그래서 홀로 계신 이모님을 서울서 같이 살자고 불러도 이모님은 마다 하신다.

그렇다고, 서울에 안올라가신것도 아니다.

예전에 서울에서 잠깐 사셨는데 이모님은 답답해서 못살겠다고 내려와 버리셨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때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은 이 득량도 이모네였다.

아버지쪽은 사촌에 육촌도 없고-그 단계만 넘어가면 동네의 절반이 우리 이씨였지만- 어머니쪽 친척들도 다들 녹동에 사셔서 갈만한 곳이 없었다.

가장 만만한 외가는 오히려 같은 마을이었다.

마을 우물과 우리집 사이에는 외가집이 있어서 물 길러간 어머니가 안오시면 할머니는 큰누나를 시켜 엄마한테 갔다오라고 했다.

큰누나는 외가를 먼저 들러 세랍문(사립문) 안에 우리집 물동이가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고 우물로 향했다고 한다.

나한테 외가집의 용도는 하나 더 있었다.

내가 밥을 잘 안먹을때면 어머니는 남의 집 가서 먹으면 밥이 맛있다며 가깝고 만만한 남의 집인 당신의 친정으로 나를 데려가곤 하셨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외가집 밥이라고 그다지 맛있는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름방학때 갈만한 곳이라곤 득량도 큰이모네밖에는 없었다.

이모네집이라고 뭐, 자주 간것도 아니다.

한 서너번 갔나? 남에게 폐끼치는 것을 싫어하시는 어머니 탓에 방학때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이모네도 고작 서너번밖에 못가봤다.

이모네는 주로 막내누나랑 사촌들과 갔었는데 배를 타면 누나들은 배안 객실에 주로 있었지만 머시메들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갑판위에서 언제 섬이 보이나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가 고향이어도 아이들은 배를 탈 일은 많지가 않았다.

부모님이 수산업에 종사한 친구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기껏 한다고 하는게 엄마 아부지의 배가 육지에 닿을 시간에 맞춰 리어카 끌고 물량장에 나가는 일정도였다.

물론 어린시절부터 뱃일을 하는 친구들도 있긴 했다.

지금도 배를 타면 재밌다.

소록도와 거금도가 다리가 놔지면서 아쉬운건 고향에 가도 가볍게 배 타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섬에도 육지처럼 논도 있고 밭도 있고 소를 데리고 풀을 뜯길 풀밭도 있었다.

섬 안에 관청, 선창 이렇게 마을도 두 개나 있었다.

말그대로 관청은 조선시대부터 있던 관청이 있었고, 선창은 배를 데는 선창이 오래전부터 있던 마을이었다.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미래소년 코난에서 라나가 살던 하이하바와 비슷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도 하나 있었다.

분교였었나? 지금도 있나 모르겠다.

겨울에도 이모네를 한번 간적이 있었다.

새로 받은 책에 두 살 위인 사촌누나가 모두 6학년 1반이라 쓰길래, 벌써 반 배정 받았느냐고 묻자 누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린 1반까지밖에 없어.우리들이 왔다는 소리에 옆집 아주머니가 고구마와 감자, 옥수수를 쪄오셨다.

'사둔네 큰애기랑 총각들 왔네.' 마을엔 거의가 이숙의 친척들이라 사돈은 사돈이지만 기껏해야 초딩, 중딩인 우리를 놀리려고 하신 말씀이다.

'강냉이랑 감재랑 하짓감재랑 묵어 보랑께.' 우리 시골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부르고 감자는 하지즈음에 난다고 하지감자라고 부른다.

이모네집에서의 하루하루는 재미있었다.

실컷 놀고 엄마 잔소리도 안들어도 되고... 숙제도 가져간 탐구생활만 조금 끄적거리기만 하면 될뿐....그런데 이모네집에서 불가능한 일이 몇 개 있었다.

아이스크림. 텔레비젼...섬엔 전기가 안들어왔다.

전기는 자가발전을 해서 일곱시부터 열시까지만 잠깐 들어왔다 다시 나갔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은 다른나라 이야기였다.

냉장고도 없으니 김치도 통에 담가 우물에 넣어다가 필요할때마다 꺼내어 먹었다.

티비도 그런 이유로 없었고, 커다란 밧데리가 붙어있는 라디오는 이모부가 독점하고 있었다.

그래도 방학때 갈 이모네집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삼십년이 지나도 추억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모에게는 섬으로 시집 간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나 보다.

'어매는 왜 나만 섬으로 시집을 보내갖고 어매도 못 보고 동상들도 못보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와 외삼촌이 돌아가셨을때 이모 곡소리의 주제는 왜 나만 섬으로 시집을 보냈느냐라는 탄식이었다.

언젠가 외삼촌 제사때도 그 얘기를 하셨다.

이모한테는 그게 평생 한이셨나 보다.

큰이모 뵌지도 오래 되었다.

큰이모 말마따나 섬에 사시니까 어머니, 동생들에 자식, 조카들도 잘 못 보게되는 것은 맞는 말이다.

언젠가 서울 사촌들 집을 다녀오며 우리집에 들렀다가 섬에 들어가시는 길이었는데, 짐이 있어 내가 선착장까지 모셔다 드린적이 있다.

숙명처럼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없는 섬으로 들어가시는 이모님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사진은 이번 추석에 고흥우주천문과학관 가는 길에 있는 편백숲에서 본 이모네 섬 득량도다.

추석때 이모 안부도 어머니께 물어보지 못했다.

저녁에 어머니께 전화드리며 이모님 안부라도 여쭤봐야겠다.

 ㅋㅋㅋ득량도 울 친정에 가면 낙지도 유명하지만



득량도 개불도 유명하다는


ㅋㅋㅋ 지금부턴 노약자나 임산부는 보지마셔요  ㅋㅋㅋ참 횟집에 나오는 개불을 엄청시리 조아라하시는 분들도 요 포스팅은 보지 말아주시길 ㅋㅋㅋ담에 못 드실수도 있어용 ㅋㅋㅋ       개불이에요 ㅋㅋ횟집에 나오는 개불은 이것보다 3/1로 잘라 나오지요 ㅋㅋ  자 그럼 개불한마리 잡으러 가볼 까요 ㅋ    이케 긴 응가들이 뭉쳐있지요 ㅋㅋ이게 바로 그 유명한 개불 응가에요



요 응가를 보고 개불의 위치를 찾을수 있지용 ㅋㅋ   개불 응가 옆엔 항상 이런 구멍이 있다는 ㅋㅋ개불은 요 구멍안에서 살고 있어요 ㅋㅋㅋㅋㅋ고로 요 구멍이 개불의 집인거지요 ㅋㅋㅋ    손가락으로 개불구멍을 따라 호미로 조심히 파다보면 이케 커다란 개불을 잡을수 있다는 ㅋㅋ아무나 쉽게 잡을수 있냐구요


 노노노노





 나처럼 나름 고수들만 쉽게 잡을수 있다는 ㅋㅋㅋㅋ(자칭고수임당


)    10분 사이에 마니 잡았지요 ㅋㅋ날도 따뜻허니 잡을만 하더라구요 ㅋㅋㅋ    집에와서 엄마가 개불을 손질했어요 ㅋㅋㅋ잡아보기만 했지 아직까진 손질은 못하겠다는 ㅠㅠㅠ나름 내가 봐도 징글징글



ㅠㅠ    이케 개불 속 창자를 모조리 깨끗하게 빼 줘야하는데 ㅠㅠ이건 나름 나도 못하겠다는 ㅠㅠㅠ나도 나름 여자라는 ㅋㅋㅋ     1시간도 못되서 들어왔는데 30마리나 된다는 ㅋㅋ우왕 마니도 잡았지요 ㅋㅋ나름 엄마보다 잘 잡는다는 ㅋㅋㅋㅋ    시골에선 이케 한마리씩 한입에 먹어요



근데 울 신랑은 아직 개불초보라 ㅋㅋㅋ엄마가 반씩 잘라주지요 ㅋㅋ구워서 먹음 완존 대박 더 맛있는 개불이네요 ㅋㅋ    울 엄마가 따온 홍합이에요 ㅋㅋ음



따왔다기엔 쫌



주워왔다해야 맞을듯ㅋㅋㅋ바닷가에 굴러다니더라구요 ㅋㅋㅋ모두들 개불 파느라 홍합은 무시당허고


ㅠㅠ알고보니 홍합이 더 맛있었다는



    엄마 말로는 자연산 홍합 치곤 엄청 크다고 하네요 ㅋㅋㅋ그러고 보니 그런듯 ㅋㅋ완존 맛있었다는 ㅋㅋㅋ주워다 먹은 홍합치곤 완존 득템이지용 ㅋㅋㅋ 즐건 삶의 체험현장을 하고 왔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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