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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톤 공주



1979년에는 실빠꼰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동양어 비문 석사학위를 받았어요., 1981년에는 출랄롱꼰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동양어 석사학위를 받았어요. 1986년에는 시나카린위롯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시린톤 공주는 국왕의 관심사인 농촌개발사업 등 로열 프로젝트 추진에 적극 참여하고 있어요. 태국적십자사 부총재를 역임하고 있고 사이짜이타이재단 회장으로 있으면서 국토방위 희생자 및 부상자 지원 활동에 힘쓰고 잇어요. 한편 태국변호사협회와 태국건축가협회의 명예회원이기도 해요. 취미는 언어학 및 공학 연구와 노래 및 태국 음악 연주에요. 시린톤 공주는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이고 1991년 3월과 2004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어요.   또한 아래 사진의 뉴욕타임즈 검열 기사도 한몫했습니다.

 뉴욕타임즈 국제판은 지난 9월 22일 태국의 푸미폰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기사를 실었다가 태국에서 아예 발행도 되지 못했는데, 11월 29일 1면은 쿠데타 이후 태국 경제의 암울한 상황을 기사화했다가 태국에서는 이를 백지로 발행해야 했습니다.

12월 3일에도 뉴욕타임즈는 수난을 겪어야 했는데 왕실 재정 관리의 불투명성을 다루는 기사가 삭제된 것입니다.

* 2015년 11월 29일 뉴욕타임즈 아시아판 사진과 태국 발행판 사진 http://www.nytimes.com/2015/11/30/world/asia/thailand-economy-tourism.html?_r=0* 2015년 12월 3일 태국에서 발행된 뉴욕타임즈 아시아판의 사진http://www.nytimes.com/2015/12/04/opinion/the-thai-monarchy-and-its-money.html탁신의 등장과 평화로운(?) 쿠데타들2014년 5월 22일 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자 태국의 쿠데타는 평화롭다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오곤 했습니다.

 사실 작년 쿠데타는 1932년 파시즘 성향의 군인들이 쿠데타에 성공(결과적으로 입헌군주제 도입)한 이후 12번째의 성공한 쿠데타였는데, 2006년 9월에 벌어진 11번째 성공한 쿠데타와 함께 태국의 쿠데타는 평화적이라는 이미지에 일조하였습니다.

.* 태국의 쿠데타 성공과 실패 시도 연혁(상), 탁신계 정당과 왕당파 등 반탁신파의 지지 지역 분포(하)최근 10년간 일어난 두 건의 평화로운 쿠데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1년 탁신의 등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화교계인 탁신이 2001년 선거에 이기고 나름 의욕적으로 경제부흥과 빈곤구제에 힘쓰자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탁신은 2005년 기록적 지지율로 재집권에 성공하는 데, 민간 총리가 자신의 임기를 온전히 마친 것도 유례가 없었지만 재집권한 것은 1932년 입헌군주제 전환 이후 최초였습니다.

 당시 탁신의 자신감은 아시아 금융위기 해법으로 제시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의 적극적 행보에서도 잘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2005년 재집권에 성공한 탁신은 태국의 기득권층과 점점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탁신 소유 기업에 대한 특혜가 지속되다 보니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들과의 반목이 커진 것도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탁신은 전통적 기득권층과 멀어지면서 한편으로는 그동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절대다수의 농민들에게 다가서기 시작합니다.

이미 1차 집권 기간에도 부분적으로 선보이기는 했지만 탁신은 태국 정치사에서는 매우 급진적으로 보일 정도의 친 농민/빈민 정책인 30바트 의료보험, 농촌 부채 탕감, 시가 2배의 쌀 수매 정책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효과는 매우 즉각적이었는데 농민 및 빈민층에서 그에 대한 지지가 공고해졌으며 지역적으로는 북동부 이싼 지역이 그의 핵심적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탁신의 폭발적 인기에 위협을 느낀 왕가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층과 탁신 일족의 부패(특히 친코프의 매각)에 염증이 난 방콕 중산층의 탁신에 대한 반감이 커졌습니다.

여기에 마약과의 전쟁이나 남부 무슬림 탄압에서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이다 보니 피해자 가족이나 무슬림들의 탁신에 대한 반발도 증가하였습니다.

  결국 2006년 9월 19일 탁신이 유엔 연설을 하기 위해 뉴욕에 머문 시점에 군부는 무혈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 2006년 9월, 평화로운 쿠데타 사진* 2006년 9월, 평화로운 쿠데타 군을 배경으로 관광객의 기념사진, 그녀가 들고 있는 방콕 영자지 네이션의 1면은 쿠데타 기사입니다.

쿠데타의 관광상품화가 가능할까요? * 쿠데타는 관광상품을 넘어서 업소 홍보용으로도 좋습니다.

방콕판 코요테 어글리 종업원들이 쿠데타 군을 배경으로 춤을 추고 있습니다.

 2006년 9월의 평화로운 쿠데타는 8년 만인 2014년 5월 다시 재현되었습니다.

 * 2014년 5월 20일 새벽 계엄군 차량 모습: 계엄군의 모습에 긴장이 전혀 없고 시민들의 사진촬영 모습이 눈에 띕니다.

 * 평화로운(?) 계엄군과 이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방콕 시민들입니다.

  * 쿠데타 군인 아저씨와 기념사진을 찍는 아이* 2014년 쿠데타 직전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관광객의 천진난만한 행동과 이를 용인하는 배려심 많은 쿠데타 군인의 정겨운(?) 모습입니다.

  2014년 쿠데타는 당시 레드와 옐로우로 대변되었던 탁신계 지지자들과 왕당파 및 방콕 중산층의 반탁신계 그룹의 대치 국면에서 발생했는데 쿠데타로 인해 양측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 방콕 운동장에 집결한 레드 진영이 쿠데타 군인들에 의해 해산되는 장면(그나마 폭력적 방식은 아니었고 단상에 일부 군인들이 들어와 지휘부만 연행해 갔습니다.

)  * 낙담에 빠진 레드 * 레드들과 대조적으로 쿠데타에 환호성을 보내는 옐로우 진영하지만 결코 평화롭지 않은 태국의 정치 현실일면 평화로워 보이는 쿠데타들이 이어졌지만 기층 민중에 직접 호소하며 자신의 권력을 키워가는 탁신과 근 60년간 유지되어 온 공고한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파와 탁신의 부정부패와 전횡에 신물이 난 방콕 중산층의 대결은 결코 평화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 2013년 말부터 2014년 5월 쿠데타까지 이어진 옐로우 세력의 잉락 정부 무력화 시위 과정만 해도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6개월의 기간 중에 40-5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더 참혹한 살육 사태는 2006년 쿠데타 이후 4년이 지난 2010년 5월에 발생하였습니다.

 2006년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2007년 선거에서 탁신은 대리인을 내새워서 집권에 성공합니다.

 탁신계의 집권으로 맨붕에 빠진 보수파는 이제 옐로우셔츠라는 대중 조직을 만들어 시위로 탁신계 사막 총리를 압박합니다.

실제 총리 관저를 옐로우들이 점거하면서 사막 총리는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면 일을 봐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 방콕 및 푸켓 공항까지 옐로우셔츠 세력이 점거하는 상황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태는 2014년 5월과 마찬가지로 사법부가 탁신계 정당을 해산함으로써 선출 권력을 사법부가 전복시키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이때 선거를 통하지 않고 집권한 보수세력 민주당의 총리가 아래 사진의 아피싯입니다.

정말 인물로만 보면 국가 정상들 중 탑급에 속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외모에 비한 실제 능력과 철학은 당명과 실제 대변 계층의 부조화처럼 형편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2010년 5월 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 합니다.

  * 민주당의 미남 (전)총리 아피싯 탁신이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탁신의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자신들의 투표력을 확인한 북동부의 농민들은 옐로우의 집결에 자극을 받아 붉은 셔츠로 통일한 레드라는 친 탁신 그룹을 구성합니다.

 * 방콕 상경 시위에 나서고 있는 레드들 참고로 매 총선에서 탁신계(2011년 기준 48.4%)와 민주당(2011년 기준 35.1%)은 맨위 지도처럼 지역별로 확연히 구분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세를 형성한 레드들은 옐로우와 달리 공항을 점거하지는 않았지만 2009년 4월 파타야 아세안+3 정상 회의장을 급습하여 각국 정상들이 호텔 옥상의 헬기를 이용하여 탈출하는 긴박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 파타야 아세안+3 정상 회의에 나타난 레드 시위대들 장기간 이어진 레드 시위는 결국 2010년 5월 파국적 결말을 보게 됩니다.

 2010년 5월 방콕 시위에서 레드셔츠 시위대와 군의 대치 중 군인들에 대한 수류탄 공격이 수차례 발생합니다.

여러 명의 지휘관과 군인들이 죽거나 다칩니다.

아직 누가 공격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레드 중 무장한 급진 자경단이 저질렀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군부 내 다툼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 2010년 5월 대치 중인 군인들에게 수류탄이 날아든 장면  당시 레드 쪽 시위대의 무장과 폭력 수준도 점점 격화되었습니다.

 * 칼을 든 레드 시위대원 결국 2010년 5월 19일 방콕 상업지구에 집결한 레드셔츠에 대해 군의 발포가 시작되었고 무려 90명이 피살되었습니다.

외신도 3명이나 피살됩니다.

  * 레드는 타이어를 태우며 저격수의 시야를 괴롭혔고 도심은 검은 연기에 며칠 동안 휩싸였습니다.

  * 진압군의 모습 * 희생자를 옆에 둔 진압군인 * 레드 시위대들의 시신들 따지고 보면 태국 정치사에서 폭력은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2010년 유혈 사태 이전 시기에서 대표적 유혈 폭력 사건은 1976년 탐마삿 대학 학살입니다.

 국제적으로 좌파 학생운동이 거세던 시절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모두 공산화되면서 남쪽 말레이시아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태국만 자본주의 진영에 남게 됩니다.

사실 왕실도 유일하게 생존합니다.

 따라서 태국 보수파의 위기감은 매우 컸습니다.

극우 민병대가 조직될 정도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탐마삿 대학에서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2명의 노동자가 효수되는 사태)을 비난하는 연극이 열렸는데 연극 중 퍼포먼스로 2명을 교수형 시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공교롭게 와치라롱꼰 왕자와 닮았다는 소문(극우 신문이 얼굴 이미지를 조작하여 선동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돌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좌파 학생들이 군주제를 폐지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자 1976년 10월 6일 군경과 극우 민병대가 대학을 포위 공격하는데 실탄 발사로 인한 사살뿐만 아니라 사지 절단과 강간이 횡행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사망자가 46명에 불과하지만 비공식 사망자는 100명을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퓰리처상을 받은 종군 울비치의 아래 사진은 세계적으로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시린톤 공주] 이유가 무엇일까요?


 좌파 대학생으로 몰린 여학생을 교수형에 처한 것도 모자라 의자로 다시 공격하는 장면입니다.

이 사진이 끔찍한 것은 어쩌면 의자를 들고 시신을 공격하는 남자의 모습보다도 주위를 둘러싼 참관인의 나이와 모습들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탐마삿 학살시 울비치 의 사진 * 구경꾼들을 보면 나이대가 매우 어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제일 해맑게 웃는 친구는 10살 남짓으로 보입니다.

  * 당시 자료 동영상입니다.

일부 화면을 보면 대학생들이 남녀 구분없이 가슴이 풀어헤쳐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96년 그나마 기념비가 세워졌지만 어떤 가해자도 처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도 의문입니다.

   38년 전의 사건이지만 태국 정치를 보면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잔혹한 폭력의 끊임없는 반복입니다.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적 사건마다 방콕 거리에서는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중 하나는 2007년 12월 선거로 다시 집권에 성공한 탁신계의 총리가 사막인데 이 양반은 탐마삿 대학 학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시 군부의 진압을 자극한 인사 중 하나로 사막이 꼽히고 있으며 그가 다시 총리가 되었을 때 외신이 학살에 대해 묻자 운나쁜 한명이 죽은 사건에 불과하고 자기는 관련이 없다고 한 말은 유명합니다.

 사막 총리 사례를 보면 탁신이 민주주의와 얼마나 거리가 먼 인사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또 다른 어둠의 세력이 태국 정치사에 웅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태국 정치의 해석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사태의 배후에 있는 푸미폰과 가족들: 생명을 다해가는 위장된 입헌민주주의 체제태국 정치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폭력성이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따지고 보면 1946년부터 세계 가장 오랜 재위기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라마 9세 푸미폰 국왕을 빼놓고 태국 정치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태국이 시암국에서 타일랜드로 이름을 바꾸도록 한 파시즘 추종자였던 쏭크람 장군은 1932년 쿠데타를 통해 태국을 입헌군주제로 바꾸었지만 푸미폰 국왕의 개인적 인기가 높아지고 1960년대까지 이어진 공산주의 반군들에 대한 피의 소탕이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자 태국 정치는 점점 푸미폰 국왕을 신격화하고 이를 통해 통일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가속화되었습니다.

 한 인물이 신으로 올라선 마당에 입헌군주제로 인해 그의 공식 권력이 제한되고 있다는 조문은 실제로 큰 의미가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어쩌면 맨 위 뉴욕타임즈의 검열 기사에서도 다루고 있는 왕실재산국(Crown Property Bureau, CPB)이 통제하고 있는 가늠도 안되는 막대한 왕실 재산이 푸미폰과 가족들 그리고 추밀원을 구성하고 있는 귀족들의 실제 권력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태국 정치를 논하는 과정에서 푸미폰과 왕실을 빼놓을 수는 없지만 외국인 및 역외적용이 가능한 왕실모독금지법(les majeste)에 저촉되는 이야기여서 조심스러운 주제입니다.

   * 푸미폰 국왕의 젊은 시절 가족사진: 세딸과 아들 하나위 사진에는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비, 그 사이 뒤로 유일한 왕자인 와치라롱꼰, 그 오른쪽 후미에 장녀인 우본랏 공주, 왕 바로 옆은 시린톤 차녀, 왕비 옆은 3녀인 쭐라폰 공주가 있습니다.

 현재 태국 정국을 더 복잡하고 어둡게 만드는 것은 1927년 생으로 이제 88세를 넘은 푸미폰 국왕의 후계자가 누가 되어 이 허울뿐인 입헌군주제를 계속 떠받들 것인 가입니다.

이제 태국 후계 문제가 왜 복잡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위 사진에서 느껴지는 것이 장녀가 다소 떨어져 있는 것인데 실제 장녀는 왕가의 특권을 포기하고 UCLA 유학 중에 만난 미국인 젠센과 1972년 결혼합니다.

다만 1998년 이혼을 하고 2001년에는 귀국하였습니다.

 막내인 3녀 쭐라폰은 공군대위와 결혼하지만 과학 분야를 전공한 박사로 학계에서 크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쫄라폰의 결혼도 평탄하지는 않아서 결국 이혼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인물은 장남과 차녀인데, 당연히 후계 1순위인 장남 와치라롱꼰 왕자가 후계자가 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

 아래는 프랑스-독일 합작 방송국인 Arte TV의 태국 왕가 현황에 대한 자료 그림입니다.

다소 부적절한(?) 부분이 있어 약간의 덧칠을 했습니다.

 * Arte TV가 풍자한 막장 왕실 모습푸미폰 국왕우선 많은 한국인이 알고 있듯이 푸미폰 국왕(1927년생)은 태국에서 살아있는 신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푸미폰 국왕은 라마 8세인 형이 의문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1946년에 갑자기 왕위에 올랐는데 타살로 보이는 형의 죽음에 연루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평생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시린톤 공주] 보면 볼수록..



 사실 그의 우상화는 그의 냉철하면서도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 그리고 쿠데타 등으로 인한 사회혼란시 성공적으로 중재한 2-3차례 사례가 크긴 했지만 무엇보다 권력기반이 약한 군부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대외홍보와 특히 인도차이나 공산화 국면에서 공산 반군 활동 지역에 대한 민심 확보 차원의 접근 전략이 컸다는 분석이 유력합니다.

 그런데 푸미폰 국왕은 향년 88세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5년 전부터 입원과 칩거를 반복하면서 일체의 공식 발언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와치라롱꼰 왕자 영국의 찰스 왕자와 마찬가지로 양위를 기다리다 62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찰스 왕자도 여러 추문에 휩쌓였지만 태국 왕자를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양반은 아주 문란한 성생활로 유명하며 결국 AIDS 감염자라는 소문이 아주 설득력 있게 돌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C형 간염에 걸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중적으로는 AIDS 환자라는 시각이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아르떼 TV 그림에서 왕자 옆에 토플리스 차림의 여인을 두고 있는데 이 여인은 왕자의 세 번째 부인으로 그의 시녀 중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왕자는 첫째 부인과 왕자와 공주들을 여럿 두었으나 왕세자비가 공군 장교와 바람이 나면서 이혼과 함께 자기 자식들과도 절연합니다.

즉 적법한 후계자를 두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 위 여인과 만나면서 2005년에 아들을 얻습니다.

 왜 아르떼 TV가 왕세자비를 토플리스로 묘사하고 있는지는 아래 동영상에 잘 나와있습니다.

위 자료화면의 강아지가 이 부부가 아끼는 애견인데 한 살 생일 파티 영상입니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와치라롱꼰 왕자는 그동안 독일과 태국 공군기지 내 전용 시설을 보잉 737기로 전전하면서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왕자를 태국 국민들이 엄청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총각 때 엽색행각이 지나치다 보니 권문세가에서 딸들을 조기 유학을 시키는 게 유행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타이에어라인 여승무원 출신이 특히 많은 애첩들을 결혼 후에도 늘 데리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습니다.

 또한 푸미폰 국왕도 아들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왕위 승계 1순위라는 사실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사실 옐로우셔츠로 대별되는 보수파의 공포는 와치라롱꼰 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군주제가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보수파가 왕자를 경계한 것 중에는 탁신과의 친분 때문이었습니다.

탁신이 총리 시절 왕자의 사치벽을 도와주기 위해 복권사업비의 일부를 왕자가 쓰도록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기득권의 반 탁신 감정에는 탁신이 절대 금기시되는 왕위 후계 문제에 은밀히 개입하려 했다는 점도 컸습니다.

  시린톤 공주독신으로 왕 주위를 떠난 적이 없으며, 국민들로부터도 절대적 사랑을 얻고 있습니다.

푸미폰 국왕이 결심에 따라서는 차기 여왕으로 지명될 수도 있다는 분석입니다.

보수파들이 원하는 하나의 옵션이기도 하지만 결국 시린톤이 여왕이 되어도 후계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될 것입니다.

 시리낏 왕비왕비와 왕과는 20여 년 전부터 불화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 왕비가 공군 장교와 연정에 빠지기도 했는데 해당 공군 대령은 미국으로 발령받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여 뒷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한편 시리낏 왕비는 권력욕도 매우 커서 2008년 10월 시위 중에 사망한 옐로우 셔츠 시위대 장례식에 막내딸을 데리고 참여하는 등 여러 정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장례식 참여에도 엿볼 수 있지만 왕비는 매우 보수적 인물로 옐로우의 핵심 배후로 꼽히고 있습니다.

 시리낏 왕비의 노골적 옐로우 지지는 역으로 레드의 군주제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2010년 5월 학살의 배후에 시리낏이 있다는 이야기가 레드들에게는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 2008년 옐로우 시위대 장례식에 참여한 시리낏 왕비와 막내딸 한때는 시리낏 왕비가 이미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조종하여 후계를 아들이 아닌 어린 손자에게로 돌리고 자신이 섭정이 되어 실권을 갖겠다는 설이 돌기도 하였으나 그녀 역시 고령으로 이제는 적극적 실력행사를 할 여력은 없어 보인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 1979년 BBC가 제작한 1시간 50분의 다큐를 보면 차녀만 동반한 카퍼레이드 영상이 8분 30초쯤 나옵니다.

그리고 7분쯤부터 보여주는 제식 행사가 영국 왕실의 행사와 매우 유사한 것도 흥미 있는 대목입니다.

   태국 왕가의 후계 문제는 결국 보수파의 근심이기도 합니다.

반탁신 열풍도 알고 보면 꺼져가는 왕가에 대한 불안감의 극단적 반영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탁신 자체가 주는 혐오감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권력욕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부 행위와 마약과의 전쟁에서 묻지마식 처형과 무슬림 폭압은 또 다른 태국 정치사의 어두운 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탁신의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자각하기 시작한 북동부 농민층과 너무나 완벽했던 기득권의 영구 집권 계획이 점점 충돌하며서 태국 정치는 불확실성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실모독금지법(les majeste)이 보호하고 있는 막대한 왕실 재산과 부패의 고리들태국 군주제를 떠받들고 있는 왕실모독금지법(les majeste)의 황당함은 상상 이상입니다.

왕당파 세력이 탁신파의 왕실모독 비판을 인용해 벌을 주라고 한 것조차도 죄가 되어 왕당파 시위대 지도자가 2년형에 처해지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법의 적용은 외국 관광객과 외국에서 벌어진 행위에도 적용되므로 외신들마저 제대로 비판을 못하는 상황입니다.

 주요 외신도 태국 사태에 대한 기사에서 왕실 관련성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단의 뉴욕타임즈 기사 삭제도 결국 이 법에 저촉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스위스 관광객이 비행기에서 태국 공주를 욕했다고 구금을 당했다가 풀려난 적도 있고 10년 형을 받은 외국인도 있습니다.

왕실모독금지법은 또한 얼마나 많은 부가 있을지 파악도 안되는 왕실 재산의 관리에 대한 견제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한때 한국 국채의 주요 투자자로 태국이 떠오른 적이 있는데 과연 중앙은행의 돈으로만 이루어진 것인지는 의문이었습니다.

 * 부자 왕 순위: 푸미폰 왕실의 추정된 재산만으로도 300억 달러에 이르고 있으며 브루나이 국왕을 가볍게 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 법에 저촉되어 수감된 군부 관련 인사들이 잇따라 감옥에서 사망하면서 정국을 더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의 Mor Yong은 군 장성들과 매우 친했던 점쟁이였는데 최근의 왕실 관련 프로젝트에서 돈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11월 9일 독약을 먹고 사망하였습니다.

같은 혐의로 구속된 고위 경찰 Prakrom Warunprapa가 10월 말 감옥에서 목을 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Mor Young 마저 사망하자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 음독으로 사망하기 전 Mor Yong의 마지막 모습* 푸미폰 왕의 88세 생일을 축하하는 Bike for Dad 사업은 또 하나의 부패추문을 낳고 있습니다.

* 최근 문제가 된 대표적 뇌물 사건: 후아힌에 세워진 7명의 위대한 태국 왕들 청동상들은 군부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제작 과정에서 막대한 뇌물이 건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축구장에 나타난 공주 때문에 외국인 선수까지 절을 해야 하는 상황쿠데타 정권의 초라한 경제 성적표와 어두운 미래정치적/경제적 안정을 부르짖으며 쿠데타를 감행한 현 집권세력은 1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경제적 부흥을 이끌지 못하고 있으며 민정이양 시기도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아마 후계구도의 불확실성까지 겹치다 보니 현 상황이 자발적으로는 쉽게 바뀌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그나마 지난 쿠데타 이후 FDI 투자가 증가하고 있고 관광객이 다시 늘어나는 추세지만 뉴욕타임즈의 삭제된 기사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태국 경제의 활력은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 태국 FDI와 GDP 성장률 추이* 검열로 삭제된 NYT 기사 속의 임대료를 못내어 문을 닫은 방콕 Khlong San 주변 상가들이제 태국은 10년간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태국에 한참 뒤처졌던 이웃들에게 거센 추격을 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 최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성장률 추이(2014 시점)  * 태국은 2010년 대비 아세안 이웃 국가 중 가장 낮은 성장을 보였으며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 이어 불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상황임  결국 잃어버린 시간 속에 태국은 1990년대 중반만 해도 1인당 소득이 말레이시아와 견줄 정도였으나 지난 18년간 소득 증가율이 82%에 멈추면서 현재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와 더 가까워졌습니다.

 * 1인당 GNI 비교더욱이 태국은 90세를 바라보는 푸미폰 국왕처럼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 중에서 가장 늙어버린 국가가 되면서 성장 동력의 불꽃이 점화되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 연령대별 인구 분표어쩌면 60년 전 엇비슷했던 세 나라 중에서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국 및 일본과 매우 가까웠던 태국이야말로 경제 발전에 가장 유리한 위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태국은 이제 필리핀의 추격을 거세게 받는 처지로 전락하였습니다.

 살아있는 신이 존재하는 가장 안정적인 국가가 가장 쿠데타가 많이 일어나는 국가이자 성장이 멈춰버린 국가로 전락한 데는 신성 권력의 단맛에 취한 기득권의 소아적 욕심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신성 권력 이면의 허약함을 꿰뚫어 본 탁신의 권력욕과 포퓰리즘도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구조적인 극한 대립이 후계구도의 불확실성까지 맞물리면서 태국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필리핀(녹색), 태국(청색), 한국(오렌지색)의 인구변화 * 1인당 소득 추이: 필리핀(녹색), 태국(청색), 한국(오렌지색)두 대륙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반기득권과 반부패(레드와 옐로우)의 불행한 대립구도한편 태국의 레드와 옐로우의 극한 충돌은 아래 그래프에서 보이듯이 더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소수에 대부분의 부가 쏠려있는 태국의 불평등에 따른 쉽게 봉합되기 어려운 구조적 갈등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또한 소외된 농민들에게 재정이 감당하기 힘든 파격적 조건의 의료보험이나 시가 대비 2배나 높은 쌀 수매 정책은 결과적으로 이들의 정치적 각성을 이끌어내면서 반기득권 세력을 결집시켰고 탁신계의 고질적 부패는 도시 중산층을 보수파와 한편으로 만들면서 이들에게 반부패라는 정당성을 부여하였습니다.

 * 태국 탁신계 정당과 보수파 민주당의 득표율 및 GDP 비중그런데 이런 반기득권과 반부패의 대립은 태국과는 지정학적 관련도 없는 지구 정 반대 위치의 브라질에서도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2014년 호세프(51.64%), 네베스(48.36%) 지지 지역 분포: 가난한 북부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호세프와 대도시와 남부의 지지를 받는 야당 주자 초대형 스캔들과 경제 침체 속에 거리로 나선 노란색의 반정부 시위대 중 일부는 급기야 군부 쿠데타를 촉구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급기야 군부의 개입(쿠데타)을 호소하는 노란색이 많은 반정부 시위대 그러자 2015년 8월 20일에는 룰라-호세프 정권 시절 가족기금 등 여러 복지정책의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빈곤층과 노동자당(PT) 지지자들, 그리고 전통적으로 무장투쟁도 마다하지 않던 무토지노동자운동단체(MST) 등이 거리에 나와 호세프 탄핵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 2015년 8월 20일 적색의 호세프 지지 시위대브라질은 2015년 12월 2일 대통령 탄핵 절차가 정식으로 개시되면서 앞으로 양측의 극한 세대결이 빈발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브라질 상황은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필리핀과 태국 두 나라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anta_croce.blog.me/220558812733? ?? ???: ???? ????????? ??? ???? ? ?? ???? ?? ??? ? ??? ??? ??? ??? ????? ??...blog.naver.comhttp://www.theguardian.com/world/2015/dec/01/thai-printer-international-new-york-times-blank-spaceThai printer replaces International New York Times article with blank spaceWith media freedoms increasingly curtailed under military junta, local printer removes critical piece on stagnant Thai economywww.theguardian.comhttp://www.ft.com/intl/cms/s/0/af9e6bbe-996b-11e5-9228-87e603d47bdc.htmlStatue scandal casts shadow over Thai junta?s morale drive - FT.comIt was to have been a powerful public statement of the ultraroyalist credentials of Thailand?s ruling military: seven giant bronze sta...www.ft.comhttp://www.economist.com/news/asia/21678277-purge-prominent-people-causing-alarm-thailand-never-saw-it-comingNever saw it comingA purge of prominent people is causing alarm in Thailandwww.economist.comhttp://www.economist.com/blogs/graphicdetail/2015/09/graphicsExplaining Thailand?s volatile politicsA graphical primer on Thailand?s politics and economywww.economist.comhttp://santa_croce.blog.me/220482498594??? ?? ??: ??? ???? ??????? ?? ??? ??? ??? ?????. ?? ?? ??? ???? ?? ???? ??? ?? ??...blog.naver.com 지난해 4월과 8월에도 포스텍 및 성균관대, 녹십자 등을 방문했다.

태국에 한국의 대학을 벤치마킹한 기술대학 건립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태국 공주의 방문은 전재만 대사의 초청으로 이뤄졌으며, 시린톤 공주는 만찬을 함께 하며 대사관 직원들이 준비한 문화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사진=주태 한국대사관>출처: http://www.thebridgesmagazine.com/contentkr.php?id=596     1979년에는 실빠꼰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동양어 비문 석사학위를 받았어요., 1981년에는 출랄롱꼰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동양어 석사학위를 받았어요. 1986년에는 시나카린위롯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시린톤 공주는 국왕의 관심사인 농촌개발사업 등 로열 프로젝트 추진에 적극 참여하고 있어요. 태국적십자사 부총재를 역임하고 있고 사이짜이타이재단 회장으로 있으면서 국토방위 희생자 및 부상자 지원 활동에 힘쓰고 잇어요. 한편 태국변호사협회와 태국건축가협회의 명예회원이기도 해요. 취미는 언어학 및 공학 연구와 노래 및 태국 음악 연주에요. 시린톤 공주는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이고 1991년 3월과 2004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어요.    PTT그룹은 2011년에 두 차례 걸쳐 성균관대학을 방문하여 산학협력에 대해 벤치마킹을 한바 있다.

 이 방문을 통해서 초일류기업 삼성그룹과 성균관대 간의 파트너십, 산학협력, 인재육성, 대학의 경영기법에 대한 Know-how에 대한 벤치마킹과 성균관대와의 상호 교류 추진에 대해 협의할 예정이다.

 성균관대 김준영총장은 “글로벌 리딩대학으로 도약하는 우리 대학을 주목하여 벤치마킹 하러 온 태국공주와 관계자들의 예방을 환영한다”며 “우리의 교육과정을 전파하는 동시에 거점파트너대학으로 위상을 새로이 할 것”이라고 밝혔다.

??nemopan.com/community_issue/8545308 포브스 기사를 인용한 한국 기사 '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왕'은 순재산 약 38조원으로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다.

푸미폰 국왕의 재산은 알려진 것만 방콕 부동산 3329에이커, 태국 내 부동산 13200에이커, 태국 최대 시멘트 회사 시암 시멘트사의 지분 32%, 태국 최대 은행 시암 상업은행 지분 23%, 태국 건설업체 크리스티아니&닐슨, 방�  보험사 데베스, 태국 대기업 친코포레이션 지분 등 그가 가진 재산은 어마어마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세계 최다면체 다이아몬드 '골든 주빌리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실이 아닌 단순 개인 소유 자산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말할 수 있는 태국 왕입니다.

물론 석유나 왕가의 재산은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만수르 아랍에미리트 부총리가순위에서 제외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태국에 딱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던 사람이라면 일본과 영국 왕실을제친 형국이라 살짝 놀랄만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또한 태국의 왕인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1950년 5월 5일 즉위이래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왕위에 올라 있는 왕이자많은 태국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불교에서 나온 이상적인 국왕의 상인 '???????? 탐마라차 (국왕은아버지가 자식을 다스리는 것 처럼 통치하고 국민은 국왕을 아버지 처럼 존경한다' 를 통치 이념으로 삼는 모범적인왕의 상) 라고 평가되며 태국이 현재 입헌 군주제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왕실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이유이기도 합니다.

 세계 최장수 국왕이자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태국을 통치하고 있으며 1969년 부터 시작된 국왕 개발 계획(Royal Development Project) 를 실시하여 도심에 비해 낙후된 농촌 지역에 특산물 개발과 보건, 위생교육을 실시하여태국 내 각 지역의 개발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하였으며 태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을 위한 정책을 많이실시하였기 때문에 태국민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왕입니다.

 슬하에 1남 3녀의 자제를 두고 있으며 와찌랄 롱꼰 왕세자와 둘째 공주인 시린톤 공주가 다음 대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거론되고 있습니다.

1924년 제정된 왕실승계법은 국왕이 왕실 가족 중 누구라도 후계자로 지목할 수 있고, 후계자 지목을 철회할 수도 있기때문에 태국 국민들은 여러 구설수에 올라있는 와찌랄 롱꼰 왕세자 보다는 시린톤 공주를 성원하는 분위기이지만현재까지는 정식으로 와찌랄 롱꼰 왕세자가 다음대 왕위 계승자이기 때문에 다음 왕위가 누구에게 돌아갈지는알 수 없습니다.

태국의 짝끄리 왕조는 1782년 개국 이후 현재까지 총 9명의 왕이 다스리며 왕조를 이어 나가고 있는데일반적으로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라마 1세 - 3세의 건국 후 이전 국가였던 아유타야 왕조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받아나라를 만들어 나갔다면 중기였던 라마 4세 부터 6세 까지는 서구 열강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서구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급격한 사회와 문화가 변화하는 시기였고 마지막 시기는 1932년입헌 혁명을 통하여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변화하며 현재 라마 9세까지 이어지는 시기입니다.

 (사진 출처 - google.co.th) 특히 아직까지도 쭐라롱컨 대왕으로 불리며 태국인들에게 가장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왕으로는라마 5세를 꼽을 수 있는데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하여 도로와 운하의 건설, 화폐 유통을 통한 현대식 경제 체제를도입하고 행정과 군대의 서구식 개편은 물론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노예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현재까지도태국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는 쭐라롱컨 대학의 전신인 롱리안 마핫렉을 세워 현대적인 공식 교육 기관을창설하였습니다.

 (사진 출처 - 쭐라롱컨 대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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