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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딱 말한 그대로어릴적  그 시절 추억 속의 한 부분들로 알아보고 간다.

    경부고속도로는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거의 전구간이 완공을 하였고 경부고속도로에 관한 이야기들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당시 경제부흥 정팩으로 각종 공업단지들을 건립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 전반적으로 가옥과 마을,  도로 등의 개간과 정비와 함께 전반적인 의식구조 까지 개혁을 한다는 취지의 캠페인을 벌이는데그것이 바로 1970년 4월부터 시행하는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  '새마을 운동' 이다.

    새마을 운동   국민학교 들어가지 전이나 저학년이었을때 특히 많은 기억이 난다.

각종 매체, 특히 티비에서 홍보도 많이 한걸로 기억한다.

학교에서는 연일 새마을 운동에 대한 홍보와 교과서에도 실렸었고.시골을 개발하고 낙후된 도로 등을 개간하고 등등       새마을 운동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시작된 범국가적 시행 운동으로<근면·자조·협동> 의 기본 정신으로 농촌의 근대화,·환경개선, 지역의 균현적인 발전, 그리고 의식개혁을 목표로 하여 근대화시킨다는 취지의 1971년부터 전국적 범위에서 전개된 정부주도의 풀뿌리 지역사회 개발운동 이라 불리운 운동이다.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 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받 대통령은 한국 고유의 일종의 지방자치인 향약과 계·두레·품앗이 등을 지목하였고,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농민과 관계기관 및 지역사회 지도자간의 협조를 전제로 하는 농어촌 자조 노력의 진작방안을 강구' 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향약으로부터 민중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협동체를 조직하여 사회개혁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정부 당국에서는 먼저 해당 하급 공무원을 읍면으로 보내 맨땅에 헤딩 식으로 무조건 실적 세우기식의 행정을 펼쳤다고 한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관계 대학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전문집단을 활용하여 새마을운동의 기획전개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반 개발사업의 기획전개와는 달리, 권위주의적 또는 행정적으로 목표지향적 기획과 실천을 우선 명령하달식으로 발의한 뒤에, 이론적·실제적인 뒷받침을 행하고 공무원들을 훈련시키는, '까라면 깐다' 방법을 취하였다는.          새마을 운동은 1970년 5월 6일 새마을운동 추진방안이 마련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가 되었는데, 1972년 3월에는 박대통령이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

 1972년 4월 21일에는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였고 농어촌 근대화 관련 내용으로는 1969년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었다.

이 '새마을 노래' 는 어렸을 때 참 많이 틀어줬다.

아침마다 학교 등에서 스피커로 틀어줬던 기억이 난다.

티비에서도 자주 나오고.  이 운동은 새마을 운동으로 명명되었고, 전국적으로 시행,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으며,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새마을 운동 전진대회. 1978.2.22. 장충체육관.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

 5월에는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이에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의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3만3267개 이동(里洞)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무상으로 지급하여, 이동개발위원회(里洞開發委員會)를 중심으로 각기의 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을 주민협동으로 추진하도록 하였다.

   새마을 운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바로 기와집 제거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는 것과, 각 농촌의 비포장도로 등을 포장도로로 닦는 내용등, 지붕을 볏짚 대신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대체개량, 담장바로잡기, 마을 안길 정비 등이 주된 사업내용으로 시행이 되었다.

1972년부터는 주민지도자의 발굴·훈련 및 그 활용에 역점을 두면서 사업내용도 애당초의 환경개선사업, 즉 물리적인 생활 및 영농기반조성사업을 발전적으로 추진하면서, 의식계발사업, 그리고 생산소득사업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것으로 확대되었다.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초가집 지붕을 걷어내고 있는 모습.        1968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전신주를 세우고 있는 모습경상북도 울진군   하천의 보를 쌓는 모습   새마을 운동 전개로 환경이 바뀐 마을의 모습 전과 후 1972      새마을 운동 안길 포장  농어촌 도로정비 사업새마을운동의 성과인 농어촌도로정비. 전남 나주시 문평면 송산리 소재         1971년부터 1984년까지 새마을운동에 투입된 물량은 총 7조 2천억 원(연평균 5천 177억 원)으로, 총액의 57%가 정부투자, 11%가 주민부담, 나머지 32%는 민간단체의 희사로 이루어졌고, 용도별 투자내역은 생산기반 22.2%, 소득증대 42.8%, 복지환경 27.5%, 정신계발 2.8%, 도시 및 공장 새마을운동 4.7%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하천정비·교량건설·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기틀 마련, 농어촌 전화(電化), 농가소득 증대 등을 들 수 있다.

1971년 전국 3만 3,267개 행정리동(洞)에 시멘트 335포대씩 균일적으로 무상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체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낸 경우이고, 둘째는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지만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한 경우이다.

정부는 반응이 있는 1만 6600개 부락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원, 72년 33억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1974년 308억원, 1979년에는 4252억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원에서 1979년 2032억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새마을노래' 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면서 홍보가 되었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   어렸을 적 아침져넉마다 울려퍼졌던 노래아마도 각 동사무소나 국민학교에서 틀었던 걸로 아는데'새마을 운동' 이다.

   새벽 종이 울렸네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단순한 농가의 소득배가운동이었지만 이것을 통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부터는 도시·직장·공장에까지 확산되어 근면·자조·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선진국대열에 꼭 진입해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주기 위하여 새마을 운동은 정부주도하의 국민적 근대화운동을 기본목표로 삼도록 확대되었다.

 이어서도시새마을운동의 촉진을 위한 10대구심사업으로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목 정비, 도시환경정비, 생활오물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후진지역의 개발 등으로 전개하였다.

반상회의 새마을 모체화에 의한 지역적인 사업전개와 직장을 통한 사업전개를 주안으로 해서 전개 발전하게 되었던 것.그리하여 새마을운동은 지역새마을운동, 부녀새마을운동, 직장새마을운동, 공장새마을운동, 새마을청소년운동, 새마을체육운동, 새마을금고운동, 학교새마을운동, 새마을유아원운동 등으로 기본적인 틀 안에서 실천적면에서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도시 새마을 운동 (자연보호) 의 일환으로 서울 남산에서의 환경미화 작업.       농촌을 겨냥한 새마을운동의 발의·전개는 적지 않은 도전도 겪었지만, 전통적 체계의 농촌을 현대적으로 변환하도록 개몽하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농촌을 겨냥한 원래의 새마을운동이 도시지역으로 확대되어 거의 전방위적인 국가발전 사업을 기획, 집행한 이래, 공식적인 성과와 사업전개 대상자인 국민의 평가 사이에 적지 않은 괴리가 생겼다는 평가도 있다.

 이렇게 새마을 운동은 공업화 우선정책 하의 당시에 농촌이 후진성을 크게 드러냈기 때문에 농춘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는데, 반면 북한의 ‘천리마운동’ 등에 반응한 냉전의 한 산물로 새마을운동을 보는 사례도 있다.

  휴전 협정을 맺은 남북한은 각자의 체제 강화를 위한 작업을 하는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58년 '천리마 운동' 으로 농공업과 사상의 확립을 꾀하였고, 이에 남한에서는 이승만의 무능력 부패정권을 무너뜨리고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1962년부터 앞으로의 1981년까지의 '경제계발 5개년 계획' 을 발표하고 진행해 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새마을 운동이 그 어감부터 내용을 북한의 '천리마 운동' 에서 빌려왔다고 하는 설이 있다는 것.   http://blog.naver.com/beetle55/100160973635   * 천리마 운동 千里馬運動 노력 경쟁 勞力競爭 을 통하여 생산 증대를 꾀하려는 북한의 노동강화운동.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1958년 무력통일을 위한 작업으로 농업과 공업을 공영화하는 운동.  1956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초로 제창, 58년부터 본격화된 대중들의 증산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북한의 집단적 사회주의 노동경쟁운동이자 사상개조운동으로, 당시 ‘3개년계획 (1954∼1956)’ 의 수행으로 전후 복구 건설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고, 이 바탕 위에서 새로운 ‘인민경제5개년계획 (1957∼1961)’ 을 실시하려고 1956년 김일성 金日成 이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면서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함에 따라, 부득이 자체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있다.

경제건설 노선을 둘러싼 당내 권력투쟁과정에서김일성 반대파의 쿠데타와 이들을 지지하는 소련의 경제원조 삭감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북한은 자본·물자·기술의 부족 등 조건상의 열세를 「인민대중의 혁명적 열정과 창의적 능력」으로 극복하면서 경제건설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12월에 열린 당전원회의에서는 ‘최대한의 증산과 절약’을 내세워 종래의 노력경쟁운동을 한층 강화하기로 방침을 세웠으며, 이에 따라 평남청년탄광돌격대·강계청년발전소돌격대·청년철도건설돌격대 등을 동원, 경쟁을 통한 노동강화운동을 벌였다.

이들 돌격대의 노동강화운동을 모범으로 삼아 발달된 이 운동은 195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전국생산혁신자대회’를 계기로 북한 전체근로자의 노력경쟁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

 이에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와 같은 속도로 사회주의경제를 건설하자는 뜻의 '천리마 운동 千里馬運動' 은 1958년부터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1959년 3월, 강선제강소(降仙製鋼所 : 현재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의 진응원 陳應元 이라는 사람이 천리마작업반운동을 발기함으로써 공장뿐 아니라, 기업체·농장·학교 등 전분야에서 노력경쟁운동 형태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이 운동에 따른 천리마시대, 천리마속도, 천리마직장, 천리마기수, 이중천리마작업반 등 숱한 용어와 훈장·칭호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천리마의 속도로 진군하자> 는 구호를 광범하게 제창, 대중의 증산의욕을 고취시켰다.

 1972년 채택된 《인민민주주의헌법》 제13조에는 “천리마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대중적 열기가 크게 고양되어 1957년에서 1961년까지로 계획된 제1차 5개년계획은 전부문에 걸쳐 예정보다 1년 빠른 4년만에 목표를 달성하고, 주요 공업부문에서 5개년 계획의 목표가 2년 6개월에 달성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을 단순한 증산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공산주의 인간형의 창조를 목표로 한 사상개조운동으로 활용하는 한편, 공장·기업소·농업협동조합 등 좁은 의미의 생산현장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의 모든 분야를 포괄, 사회주의건설에 있어 <당의 총노선>으로까지 격상시켰으며, 개인간의 경쟁이 아닌 작업반·직장·공장단위의 집단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이후 <천리마작업반운동>으로 연결시켰다.

천리마운동은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주노선을 견지하면서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이루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강화운동의 한계성에 따라 천리마운동이 퇴색하는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1976년부터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이라는 이름의 경쟁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운동과 더불어 ‘80년대 속도’, ‘90년대 속도’ 등의 구호가 내걸리고 있는데, 그러나 북한이 목표로 하는 자립 경제건설은 세계와의 기술적 차이, 외화부족 등으로 요원한 실정이다 한편, 최근에는 “다시 한번 천리마를 타라.” 등 ‘새로운 천리마속도 창조운동’을 대중으로 전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천리마 포스터.   천리마 강철직장의 용해공들.   천리마동상칠성문거리에 천리마동상이 솟아있다.

   천리마 동상평양시의 만수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1961년 건립된 동상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치기 위하여 추진된 천리마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

당중앙위원회의 편지를 높이 들고 있는 노동자와 볏단을 안고 있는 여성이 날개를 펼친 천리마(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말)를 타고 있다.

높이 46m, 조각상의 높이 14m, 길이 16m.   6·25전쟁 후 북한 경제를 일으킨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와 같은 속도로 사회 주의 경제를 건설하자' 는 천리마 운동의 상징인 천리마 동상을 도안으로 삼은 북한의 화폐 - 1978년 발행.         또한 새마을 운동은 당시의 고도로 권위주의적이며 경직된 국내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긴장완화적인 정치적 조처라고 보는 이도 있다.

초기의 농촌개발사업에서 출발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엄청난 물량적·정신적 성과를 얻어가면서 점차 비농촌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물량적인 건설사업을 넘어 정치적 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따라 새마을운동의 정치적 의미가 중요시되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점차 국민적 저항에 부닥치는 상황을 농민과 서민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유신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돌파구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였다는 비판도 나왔는데, 바로 새마을 운동이 1969년의 3선개헌, 1971년의 대통령선거와 비상사태선포, 그리고 1972년의 유신헌법 통과와 같은 권위주의 정권의 형성과정에서 진행되었으며 새마을운동의 본격적 전개가 유신체제와 더불어 진행되었다는 점 등이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따라서 새마을운동의 발의 초기에 지식인들은 냉담한 반응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정치적 의미가 어떠하든 새마을운동은 대통령 박정희의 철저한 조국근대화정신의 소산으로 시작은 되었고, 1970년대의 대한민국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뒤에서 받들어 준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1978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경제정책이 바뀌면서 농축산물 가격이 곤두박질치고 돼지파동에 쌀수매가 동결마저 겹쳐 농촌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른데다, 내무부가 새마을 사업의 중점을 농촌주택개량에 둠으로써 농가마다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어 탈농.이농이 속출, 해마다 40여 만의 청장년층이 농촌을 등지게 되었다.

이후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지도자대회 등 겉치레 연중행사로 전락했고, 5공화국시절에는 그 본래의 뜻에서 더욱 벗어나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이 이 운동조직에 가담, 조직확대와 예산확충에 진력, 1천만 명의 조직원과 5백억 원에 달하는 자산, 각종 성금과 기금의 유용 등으로 부패의 온상이 된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1980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됨에 따라서 민간주도적인 추진조직으로의 정착을 위한 체제건설사업(體制建設事業)을 전개하면서, 새마을국민교육의 기획실시,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내외 홍보와 국제협력,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조사·연구사업 등을 다각적으로 베풀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립적이자 민간주도형적인 것으로 발전적인 전환을 꾀하던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방만하고도 정치권력형적인 일탈적 운영행태로 1987년 말 본격적으로 문제화되었다.

이는 새마을운동의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로 대체되고 기구조직도 대폭 정리, 조정하는 등, 진통기를 벗어나 발전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필요한 제반조정을 과감히 하면서 사업계획을 집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1988년에 들어서면서 새마을운동은 일대혁신과 개혁의 전환기를 맞아 자성적 평가와 자기갱생적 발전을 꾀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이 중절(中絶)을 볼 정도로 크나큰 문제에 부딪치고는 새마을운동센터(1989)로 바꿨으며, 도덕성회복 또는 의식개혁을 내세웠다.

또한 1993년에는 제2단계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고 다른 민간자원조직체와의 연계를 갖는 등 새로 태어나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발의시의 새마을 운동은 이제 끝난 역사적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제2 새마을운동 1988년 5공비리청문회에서 새마을운동중앙본부와 관련된 비리가 폭로되어 새마을 운동은 침체되고 민간 주도로 하는 등 그 양상이 변화하였다.

1998년 이후로는 '새마을운동 조직 육성법'에 의해 새마을운동중앙회를 중심으로 제2새마을운동을 벌이고 있다.

제2새마을운동은 문화·시민의식의 선진화, 서로 돕는 복지공동체 만들기, 지역 활력 찾기, 친환경 조성, 국제·통일 협력사업을 그 목표로 한다 평가새마을 운동은 단기간에 낙후되고 있던 농업 경쟁력을 향상시켰고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를 통하여 자신감과 공동체 의식, 자발적 참여 의식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가정 직장 등 한국사회전체의 근대화의 동력이 되었다(실제로 경제 호황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1970년대 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대통령의 강한 권력과 관치가 결합되어 진행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제5공화국 시절 중앙본부의 각종 이권개입과 공금횡령이 밝혀지면서 제5공화국 비리의 온상으로 낙인찍힌 적도 있었다.

또한 새마을 운동은 일본의 마치즈쿠리 운동과 비교되기도 한다.

   * 마치즈쿠리 町作り “일정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 지역의 거주성을 높이기 위해 지역자원의 공동관리를 지향하는 운동” 또는 “거주환경을 정비하기 위하여 주민의 다양한 운동을 말합니다  즉 지역환경개선과 우리동네 가꾸기로 주거환경을 높히자는 취지의 운동.  일본에서는 지방자치시대의 개막이후 각 지역의 자치단치단체들은 지역의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지역발전을 도모하고 있으나 자치경험미숙 및 인적·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다.

경제가 저성장기에 들어선 이후 대도시와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고 살기좋고 매력있는 지역만들기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방의 市·町·村 을 중심으로 '마치즈쿠리 (마을만들기)' 운동을 꾸준히 전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  마치즈쿠리 의 추진배경과 전개과정 ·오이타 大分縣 의 마치즈쿠리 (일촌일품 운동) - 시가(滋賀)縣 나가하마 (長浜市 의 마치즈쿠리 (박물관도시만들기 운동) - 돗토리 鳥取縣  치즈 智頭町 의 마찌즈쿠리 (0분의 1 운동) · 마찌즈쿠리는 “일정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 지역의 거주성을 높이기 위해 지역자원의 공동관리를 지향하는 운동” 또는 “거주환경을 정비하기 위하여 주민의 다양한 요구들을 받아들여 계획에 주민참여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 등으로 개념화된다.

 일본의 나가하마시와 돗토리현의 치즈정의 마찌즈쿠리 추진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마을 有志들의 활약” 이었다.

마을의 역사적인 재생을 위해 거액을 기부하고 외래자본의 유입에 대항해서 스스로 위험부담이 큰 자금을 출자하는 등 그들은 지역유지로서의 도의적 의무를 다했다.

주민참가형 마을계획은 말그대로 주민들의 적극적, 자주적 참여에 크게 의존하는 관계로 지역주민들이 마을 전체를 공동소유 개념으로 인식하는 의식의 전환이 무엇보다 강조된다.

즉, 주민참가에 의한 지역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역주민들의 “公共의 意識”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주민참가형 마을만들기의 정착을 위해서, 지역행정은 주민참가의 붐을 조성하고 또 주민들간의 경쟁도 유발할 수 있는 적절한 행정적 조치(지원)들이 요구된다.

나가하마시의 예로, 상점가의 경관조성사업의 주민참여 도모를 위해 전통가옥으로 개량시, 보조금을 지원한다든가, 치즈정의 “마을진흥협의회”의 예처럼 “참여와 변화의 의지가 있는 마을”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등 주민참여의 붐을 조성하고 또 마을간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행정차원의 전략도 요구된다.

사례분석을 통한 정책적 함의로는 마을문제지도 만들기, 마을 자랑거리 만들기, 사람 만들기, 주민밀착형 사무소 만들기, 지역우량기업 만들기, 고량자복지 만들기 등이 있다.

     또한 새마을운동은 세계적으로는 농촌 개발의 모델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유엔은 새마을 운동을 바탕으로 한 '새천년마을계획' 이라는 아프리카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추진할 만큼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또한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현재 해외 74개국으로 새마을 운동이 수출되었고, 후진국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배우겠다며 방한하는 해외지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탄자니아는 2012년까지 팡가웨 지역에 새마을 운동을 기반한 마을을 짓는다고 하였다.

   사건·사고 및 논란 새마을 운동 회원 자녀에 대한 장학금 지원 17개 광역자치단체에서 1년동안 60여억 원(서울 12억여원 등)의 세금이 법률과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의해 새마을 운동 회원들의 자녀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특혜라는 지적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 회원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근거는 '새마을운동육성법(1975년 제정)'과 각 지자체마다 있는 '새마을장학금지급조례(1988년 제정)'에 있다.

지자체는 조례에 따라 편성가능한 예산 범위안에서 장학생 자격, 선정, 정원, 지원 금액을 책정하게 된다.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와 서울 25개 기초자치단체의 '새마을장학금지급조례'는 공통적으로 장학금 지급대상을 '장학금의 지급은 새마을운동에 1년(혹은 2년)이상 봉사하고 있는 남ㆍ녀 새마을지도자의 자녀중 새마을유공서훈이나 표창을 받은 지도자의 자녀, 새마을사업중 사망 또한 부상당한 지도자의 자녀'로 한정하고 있다.

2011년에는 전국 새마을 운동 회원 200만 명(새마을운동중앙회 추산)의 자녀 중 4,40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다  참고문헌새마을운동(내무부, 1975·1979·1983)새마을運動10年史(내무부, 1980)새마을運動의 理念과 實際(서울大學校새마을綜合硏究所, 1981)새마을運動理論體系定立(새마을運動中央本部地域開發調査硏究團, 1984)現代의 農村社會學(王仁槿, 博英社, 1985)농촌의 발전(王仁槿,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다음은 당시 1970년대에 방송된 새마을 운동과 박정히 대통령 뉴스인지 다큐인지.      새마을운동 주제가  어렸을 적 아침져넉마다 울려퍼졌던 노래아마도 각 동사무소나 국민학교에서 틀었던 걸로 아는데'새마을 운동' 이다.

             도시 새마을 운동 (자연보호) 의 일환으로 서울 남산에서의 환경미화 작업          .        그리고 새마을 운동의 기억이 떠오르는 시절의 또 하나의 기억확실히 이건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다.

몇학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고..  어린 시절 추억 속에 기분 좋게 자리잡고 있는 추억 중 하나가 바로 국민교육헌장이다.

   Behold the past, towards the future...   KOICA가 이름도 좋고, 그 동안 많은 활동을 하여 세계 각국에 좋은 이미지도 심었습니만, KOICA는 우리보다 훨씬 더 먼저 전세계를 무대로 봉사활동을 시작한 미국의 PEACE CORPS를 생각나게 하여,미국의 피스코 한국지부 활동 같은 느낌도 주어 새마을운동이란 것을 더 알리기 위해 이름도 바꾸면 어떨까요??새마을 운동은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원조해주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실천경제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2016.4.28. ????308. 새마을 운동을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추천하면 어떨까

진선문 [進善門]2015.10.14. 21:46수정삭제   http://blog.naver.com/hjycs1217/220508917489 번역하기전용뷰어 보기 의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교수'에 대한 기사를 보고... 새마을 운동을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추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원조해주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실천경제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미 여러 나라가 새마을운동을 국가 부흥의 경제학으로 도입하였고,후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실천경제학입니다.

증거들을 모아 노벨경제학상을 요청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는 학자도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던데...  의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교수'에 대한 기사를 보고... 새마을 운동을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추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원조해주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실천경제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미 여러 나라가 새마을운동을 국가 부흥의 경제학으로 도입하였고,후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실천경제학입니다.

증거들을 모아 노벨경제학상을 요청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는 학자도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던데...  KOICA가 이름도 좋고, 그 동안 많은 활동을 하여 세계 각국에 좋은 이미지도 심었습니만, KOICA는 우리보다 훨씬 더 먼저 전세계를 무대로 봉사활동을 시작한 미국의 PEACE CORPS를 생각나게 하여,미국의 피스코 한국지부 활동 같은 느낌도 주어 새마을운동이란 것을 더 알리기 위해 이름도 바꾸면 어떨까요??새마을 운동은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원조해주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실천경제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2016.4.28. ????308. 새마을 운동을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추천하면 어떨까

진선문 [進善門]2015.10.14. 21:46수정삭제   http://blog.naver.com/hjycs1217/220508917489 번역하기전용뷰어 보기 의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교수'에 대한 기사를 보고... 새마을 운동을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추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원조해주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실천경제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미 여러 나라가 새마을운동을 국가 부흥의 경제학으로 도입하였고,후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실천경제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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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원조해주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실천경제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미 여러 나라가 새마을운동을 국가 부흥의 경제학으로 도입하였고,후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실천경제학입니다.

[새마을운동] 그것을 알려줍니다.


증거들을 모아 노벨경제학상을 요청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는 학자도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던데...  이때 전체적인 줄거리나 제목 따위는 예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원작 재구성’, ‘재구성’으로 순화등로해석 되는데 원작 재구성 으로 최대한 기획 해보기로 하였다.

전국 철도 노선으로 기존선과 시공중, 설계중, 계획선,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철도산업 육성으로 빠른 교통망 확충과 친환경 조성 그리고 지역 경제 발전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역 경제 발전의 일환으로 전철 역사내 250m,500m,1000m 역세권 설정 지역으로 정하여 주거지와 상업지로 용도 변경 가능한 지역이 된다.

쉽게 말하면 논밭 토지들이 아파트,주상복합,상가 등으로 건축할수 있는 토지로 변경 할수 있도록 2014년11월 역세권법으로 정한것으로 보시면 된다.

위 전국 철도 노선의 빨간색이 시공중인 철도 이다.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의 원안 농촌 재건운동으로 새마을 역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쉽게 말하면 기존 시공중인 빨간색 포승역 - 안중역 - 평택역으로 말한다면 포승역 - 안중역, 논밭이 많은 포승역 주변 희곡리를 새마을역을 만드는데역 이름은 희곡리 새마을역으로 명칭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원주 -강릉 빨간색에서 적합한 농어촌 개발 지역을 선택한다면 안흥면이 있다.

안흥면 새마을역으로 칭한다.

 새마을 운동 리메이크안1. 정부,지자체,민간기업 3인 공동체로 주거 환경과 논밭 또는 농산물단지 어울리는 구역 계획안의 개선책이 첫번째이다.

 2. 수출 농산물 품목을 정하여 지자체별로 발전 육성이 두번째이다.

3. 품목별 농산물전문가를 교육할 메뉴얼을 작성하고 각 지자체 새마을 역 주변으로 토론과 실험할수 있는 공간을 세번째로 정한다.

새마을의 상징물은 새마을기 또는 새마을 깃발로 초록색 바탕에 노란색 동그라미 그리고 그 안에 초록색 새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담은 모습에 하얀색 글씨로 새마을이라는 궁서체가 써진 깃발로 1970년 새마을운동 초창기 때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초록색은 농업, 농민, 자연, 산촌마을 등을 상징하고 노란 동그라미는 햇볕과 밝은 미래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초록색 새싹은 새마을의 대표 상징물로 농업의 발전과 농민의 미래를 상징한다고 한다.

새마을을 상징물 새마을기는 새마을역으로 계승되고 역마다 각 지자체의 새마을 운동 사진등으로 새마을 역사내에 전시 건설 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미지 로고와 명칭은 새롭게 변화 하기로 했다.

새싹은 유지시키고 색깔과 명칭은 국제화 시대를 선도 할수 있도록 글로벌 전문가에 의뢰 하도록 한다.

유엔 환경 계획 (UNEP)는 지구 환경 의제를 설정하는 유엔 시스템 내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의 환경 적 차원의 일관된 이행을 촉진하고 지구 환경에 대해 신뢰할 수 옹호자 역할을하는 선도적 인 글로벌 환경 기관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농촌재건 운동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품목별 농산물 전문가 육성을 통해 유엔 환경계획 UNEP 추구하는 지구환경의 추구를 우선시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품목별 농산물 전문가들이 자연 환경의 연구 자료들을  매년 발표할수 있도록 지자체와 정부는 교육 협조한다.

     기아에 어린아이들이 굶주림에 앙상하게 남은 뼈를 내보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 눈물이 고여지는것은 사람이라면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지구 한쪽에서는 기아에 먹을것을 못 먹고 추위와 먹을것이 없어서 헤매는 장면들이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폐허로 먹을것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면서 원조를 받아왔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발전하면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뀐것을 볼때 그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먹을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아이들이나 개발도상국의 어려움으로 도움을 주어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과 도움을 주어야 할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져서 북한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이제는 없어져야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정치권에서도 자기의 계파들의 이익을 위해서 싸움만 일삼을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위하여 정치를 할 수 있는 체제로 바뀌어야 되는것은 당연한 이치일것입니다.

남북이 통일되는 기간을 앞당기려면 정신들을 차리고 정상적인 정치와 정상적인 생각들로 바뀌어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더욱 더 발전하여 못사는 나라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카톡으로 들어온 내용을 캡쳐하여 포스팅에 올리오니 참담한 현실의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카톡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듯이 정말로 우리들은 복에 겨운것입니다.

왜 서로 싸우고 있는것인지? 왜 서로 탓하고 있는것인지? 베풀고 살아야 할것입니다.

마음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것이 얼마나 행복한것인지를 알아야할 것입니다.

어제 뉴스에도 잠깐동안 나온 사진이 있기에 바로 촬영하여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이 우간다에서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호응으로 발전적으로 진전이 있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네요.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을 촬영하다보면 저절로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을것입니다.

 ??유니세프에서는 월 30,000원의 정기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080-749-1004로 연락을 하시기 바랍니다.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에게는 먹고 자는것이 아주 중요한 일들입니다.

?[유니세프 캠페인] 2016 #IMAGINE project의 동영상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https://youtu.be/RZ5MhMmQ-44동영상[???? ???] 2016 #IMAGINE project???? 2016 #IMAGINE ???? SM?????? ?? ?????? ?? ??? ? ? ??? ?Imagine?. 2015? ?? ??? 2016 ...www.youtube.com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에 의해 재탄생 한 존 레논의 ‘Imagine’.2015년 부터 준비한 2016 #IMAGINE 프로젝트가 드디어 공개됩니다.

유니세프는 #2016 IMAGINE 프로젝트를 통해 모든 어린이가 공평한 기회를 갖고 행복해지는 세상을 응원합니다.

2016 #IMAGINE 프로젝트에는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특별대표이자 슈퍼주니어 멤버인 최시원과 동방신기 최강창민, 소녀시대 서현, 샤이니 민호, EXO 첸과 백현, 이동우, 트렉스 제이, 제이민 등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 9인?을 비롯하여 해외 유명 아티스트인 케이티 페리, 데이비드 게타 등이 동참하였습니다.

 ? 옛 사진을 다루다 보니 수집한 사진중많은 비율을 차지 하는 사진중의 하나가 바로 새마을 운동에 관련된 사진입니다.

 격동의 시기우리네 이야기먼저, 새마을운동에 대해 알아볼까요?새마을 운동( - 運動, 영어: Saemaul Undong, New Community Movement, New Village Movement, Saemaul Movement)은 1970년 초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시작되어 범국가적으로 시행된 운동 이다.

새마을 운동은 풀뿌리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정의 되기도 한다.

새마을 운동 계획자는 농업전문가로 유명한 류태영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1년 새마을 운동으로 명명되었고, 전국적으로 시행,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1973년 1월 16일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 중략-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

- 출처 : 위키백과우리 이천에서도 1976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가 창립되면서 조직적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 전에도 근대화가 진행되었지만, 외형적으로 급속한 변화를 격은것은1960년

70년대의 새마을운동이 계기였다고 합니다.

 #이천의 새마을운동 #출처_이천시지여기 두 장의 사진이있습니다.

[새마을운동] 세상에. 왜..



앞에서 본 사진보다 훨씬 오래돼 보이는사진#이천의 새마을운동 #이천읍 증포리 #경기도인재개발원사진이 조금 더 흐릿해 아련한 느낌까지물씬 나는 사진이네요. 건장한 남성들이 길 만들기를 하고 있는듯한사진입니다.

 이곳이 이천읍 증포리, 지금으로 따지면이천시 증포동이라고 합니다.

 증포동의 어디쯤인지 감도 오지 않지만아파트 마천루가 끝없이 이어진지금의 증포동을 생각해보면불과 40여년전의 증포동은참.. 옛스럽네요.. ^^#이천시 증포동 #2009년이 당시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면미국 잉여농산물인 밀가루를나눠줘 이른바 '밀가루 공사'라고 불리기도 했답니다.

 밀가루 공사..시대상과 사회상을 알 것같은 이름이네요.#이천의 새마을운동 #공동우물 #빨래터 #이천 소고리 #용인신원리 #출처_경기도인재개발원이 사진은 어떠세요?언뜻 보면 조선시대 풍속화에 나오는그런 빨래터의 풍경같지 않나요?#김홍도_빨래터 #출처_뉴시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1970년대만해도 개별 수도보다마을 공동우물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빨래를 했다고합니다.

물론 어르신들 이야길 들어보면1980년대 이후도 동네 어귀의빨래터가 있었다고 하니.지금보다 물이 흔한 그 시절빨래터는 우리네 사랑방 역할을했던것 같습니다.

우리네 할머니들의서로 일상을 알아가는사랑방설봉산 올라가는 길의지금은 거의 말라가는 작은내마전터도 인근 주민들의 빨래터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쉽게 빨래할 만큼의 물을볼 수 없지만, '예전 우리 할머니들은여기서 이야기를 나눴겠구나

' 하고한번쯤 되새겨 보는것도 의미있을 것 같아요. #이천의 새마을운동 #출처_경기도인재개발원이 사진은 경기도 인재개발원에 전시되어있다고 하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직접보시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내용 참고 - 이천 시지시지 :: E-Bookmedia.icheon.go.kr #잘안보이면 사진을 꾸

KOICA가 이름도 좋고, 그 동안 많은 활동을 하여 세계 각국에 좋은 이미지도 심었습니만, KOICA는 우리보다 훨씬 더 먼저 전세계를 무대로 봉사활동을 시작한 미국의 PEACE CORPS를 생각나게 하여,미국의 피스코 한국지부 활동 같은 느낌도 주어 새마을운동이란 것을 더 알리기 위해 이름도 바꾸면 어떨까요??새마을 운동은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원조해주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실천경제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2016.4.28. ????308. 새마을 운동을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추천하면 어떨까

진선문 [進善門]2015.10.14. 21:46수정삭제   http://blog.naver.com/hjycs1217/220508917489 번역하기전용뷰어 보기 의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교수'에 대한 기사를 보고... 새마을 운동을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추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원조해주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실천경제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미 여러 나라가 새마을운동을 국가 부흥의 경제학으로 도입하였고,후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실천경제학입니다.

증거들을 모아 노벨경제학상을 요청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는 학자도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던데...  의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교수'에 대한 기사를 보고... 새마을 운동을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추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원조해주는 나라로 탈바꿈 시킨 실천경제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미 여러 나라가 새마을운동을 국가 부흥의 경제학으로 도입하였고,후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실천경제학입니다.

증거들을 모아 노벨경제학상을 요청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는 학자도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던데...  딱 말한 그대로어릴적  그 시절 추억 속의 한 부분들로 알아보고 간다.

    경부고속도로는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거의 전구간이 완공을 하였고 경부고속도로에 관한 이야기들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당시 경제부흥 정팩으로 각종 공업단지들을 건립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 전반적으로 가옥과 마을,  도로 등의 개간과 정비와 함께 전반적인 의식구조 까지 개혁을 한다는 취지의 캠페인을 벌이는데그것이 바로 1970년 4월부터 시행하는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  '새마을 운동' 이다.

    새마을 운동   국민학교 들어가지 전이나 저학년이었을때 특히 많은 기억이 난다.

각종 매체, 특히 티비에서 홍보도 많이 한걸로 기억한다.

학교에서는 연일 새마을 운동에 대한 홍보와 교과서에도 실렸었고.시골을 개발하고 낙후된 도로 등을 개간하고 등등       새마을 운동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시작된 범국가적 시행 운동으로<근면·자조·협동> 의 기본 정신으로 농촌의 근대화,·환경개선, 지역의 균현적인 발전, 그리고 의식개혁을 목표로 하여 근대화시킨다는 취지의 1971년부터 전국적 범위에서 전개된 정부주도의 풀뿌리 지역사회 개발운동 이라 불리운 운동이다.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 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받 대통령은 한국 고유의 일종의 지방자치인 향약과 계·두레·품앗이 등을 지목하였고,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농민과 관계기관 및 지역사회 지도자간의 협조를 전제로 하는 농어촌 자조 노력의 진작방안을 강구' 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향약으로부터 민중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협동체를 조직하여 사회개혁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정부 당국에서는 먼저 해당 하급 공무원을 읍면으로 보내 맨땅에 헤딩 식으로 무조건 실적 세우기식의 행정을 펼쳤다고 한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관계 대학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전문집단을 활용하여 새마을운동의 기획전개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반 개발사업의 기획전개와는 달리, 권위주의적 또는 행정적으로 목표지향적 기획과 실천을 우선 명령하달식으로 발의한 뒤에, 이론적·실제적인 뒷받침을 행하고 공무원들을 훈련시키는, '까라면 깐다' 방법을 취하였다는.          새마을 운동은 1970년 5월 6일 새마을운동 추진방안이 마련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가 되었는데, 1972년 3월에는 박대통령이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

 1972년 4월 21일에는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였고 농어촌 근대화 관련 내용으로는 1969년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었다.

이 '새마을 노래' 는 어렸을 때 참 많이 틀어줬다.

아침마다 학교 등에서 스피커로 틀어줬던 기억이 난다.

티비에서도 자주 나오고.  이 운동은 새마을 운동으로 명명되었고, 전국적으로 시행,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으며,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새마을 운동 전진대회. 1978.2.22. 장충체육관.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

 5월에는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이에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의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3만3267개 이동(里洞)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무상으로 지급하여, 이동개발위원회(里洞開發委員會)를 중심으로 각기의 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을 주민협동으로 추진하도록 하였다.

   새마을 운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바로 기와집 제거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는 것과, 각 농촌의 비포장도로 등을 포장도로로 닦는 내용등, 지붕을 볏짚 대신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대체개량, 담장바로잡기, 마을 안길 정비 등이 주된 사업내용으로 시행이 되었다.

1972년부터는 주민지도자의 발굴·훈련 및 그 활용에 역점을 두면서 사업내용도 애당초의 환경개선사업, 즉 물리적인 생활 및 영농기반조성사업을 발전적으로 추진하면서, 의식계발사업, 그리고 생산소득사업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것으로 확대되었다.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초가집 지붕을 걷어내고 있는 모습.        1968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전신주를 세우고 있는 모습경상북도 울진군   하천의 보를 쌓는 모습   새마을 운동 전개로 환경이 바뀐 마을의 모습 전과 후 1972      새마을 운동 안길 포장  농어촌 도로정비 사업새마을운동의 성과인 농어촌도로정비. 전남 나주시 문평면 송산리 소재         1971년부터 1984년까지 새마을운동에 투입된 물량은 총 7조 2천억 원(연평균 5천 177억 원)으로, 총액의 57%가 정부투자, 11%가 주민부담, 나머지 32%는 민간단체의 희사로 이루어졌고, 용도별 투자내역은 생산기반 22.2%, 소득증대 42.8%, 복지환경 27.5%, 정신계발 2.8%, 도시 및 공장 새마을운동 4.7%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로는 하천정비·교량건설·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기틀 마련, 농어촌 전화(電化), 농가소득 증대 등을 들 수 있다.

1971년 전국 3만 3,267개 행정리동(洞)에 시멘트 335포대씩 균일적으로 무상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첫째는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체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낸 경우이고, 둘째는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지만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한 경우이다.

정부는 반응이 있는 1만 6600개 부락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원, 72년 33억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1974년 308억원, 1979년에는 4252억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원에서 1979년 2032억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새마을노래' 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면서 홍보가 되었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   어렸을 적 아침져넉마다 울려퍼졌던 노래아마도 각 동사무소나 국민학교에서 틀었던 걸로 아는데'새마을 운동' 이다.

   새벽 종이 울렸네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단순한 농가의 소득배가운동이었지만 이것을 통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면서부터는 도시·직장·공장에까지 확산되어 근면·자조·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선진국대열에 꼭 진입해야 한다는 의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주기 위하여 새마을 운동은 정부주도하의 국민적 근대화운동을 기본목표로 삼도록 확대되었다.

 이어서도시새마을운동의 촉진을 위한 10대구심사업으로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목 정비, 도시환경정비, 생활오물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후진지역의 개발 등으로 전개하였다.

반상회의 새마을 모체화에 의한 지역적인 사업전개와 직장을 통한 사업전개를 주안으로 해서 전개 발전하게 되었던 것.그리하여 새마을운동은 지역새마을운동, 부녀새마을운동, 직장새마을운동, 공장새마을운동, 새마을청소년운동, 새마을체육운동, 새마을금고운동, 학교새마을운동, 새마을유아원운동 등으로 기본적인 틀 안에서 실천적면에서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도시 새마을 운동 (자연보호) 의 일환으로 서울 남산에서의 환경미화 작업.       농촌을 겨냥한 새마을운동의 발의·전개는 적지 않은 도전도 겪었지만, 전통적 체계의 농촌을 현대적으로 변환하도록 개몽하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농촌을 겨냥한 원래의 새마을운동이 도시지역으로 확대되어 거의 전방위적인 국가발전 사업을 기획, 집행한 이래, 공식적인 성과와 사업전개 대상자인 국민의 평가 사이에 적지 않은 괴리가 생겼다는 평가도 있다.

 이렇게 새마을 운동은 공업화 우선정책 하의 당시에 농촌이 후진성을 크게 드러냈기 때문에 농춘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는데, 반면 북한의 ‘천리마운동’ 등에 반응한 냉전의 한 산물로 새마을운동을 보는 사례도 있다.

  휴전 협정을 맺은 남북한은 각자의 체제 강화를 위한 작업을 하는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58년 '천리마 운동' 으로 농공업과 사상의 확립을 꾀하였고, 이에 남한에서는 이승만의 무능력 부패정권을 무너뜨리고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1962년부터 앞으로의 1981년까지의 '경제계발 5개년 계획' 을 발표하고 진행해 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새마을 운동이 그 어감부터 내용을 북한의 '천리마 운동' 에서 빌려왔다고 하는 설이 있다는 것.   http://blog.naver.com/beetle55/100160973635   * 천리마 운동 千里馬運動 노력 경쟁 勞力競爭 을 통하여 생산 증대를 꾀하려는 북한의 노동강화운동.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1958년 무력통일을 위한 작업으로 농업과 공업을 공영화하는 운동.  1956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초로 제창, 58년부터 본격화된 대중들의 증산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북한의 집단적 사회주의 노동경쟁운동이자 사상개조운동으로, 당시 ‘3개년계획 (1954∼1956)’ 의 수행으로 전후 복구 건설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고, 이 바탕 위에서 새로운 ‘인민경제5개년계획 (1957∼1961)’ 을 실시하려고 1956년 김일성 金日成 이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면서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함에 따라, 부득이 자체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있다.

경제건설 노선을 둘러싼 당내 권력투쟁과정에서김일성 반대파의 쿠데타와 이들을 지지하는 소련의 경제원조 삭감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북한은 자본·물자·기술의 부족 등 조건상의 열세를 「인민대중의 혁명적 열정과 창의적 능력」으로 극복하면서 경제건설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12월에 열린 당전원회의에서는 ‘최대한의 증산과 절약’을 내세워 종래의 노력경쟁운동을 한층 강화하기로 방침을 세웠으며, 이에 따라 평남청년탄광돌격대·강계청년발전소돌격대·청년철도건설돌격대 등을 동원, 경쟁을 통한 노동강화운동을 벌였다.

이들 돌격대의 노동강화운동을 모범으로 삼아 발달된 이 운동은 195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전국생산혁신자대회’를 계기로 북한 전체근로자의 노력경쟁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

 이에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와 같은 속도로 사회주의경제를 건설하자는 뜻의 '천리마 운동 千里馬運動' 은 1958년부터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1959년 3월, 강선제강소(降仙製鋼所 : 현재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의 진응원 陳應元 이라는 사람이 천리마작업반운동을 발기함으로써 공장뿐 아니라, 기업체·농장·학교 등 전분야에서 노력경쟁운동 형태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이 운동에 따른 천리마시대, 천리마속도, 천리마직장, 천리마기수, 이중천리마작업반 등 숱한 용어와 훈장·칭호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천리마의 속도로 진군하자> 는 구호를 광범하게 제창, 대중의 증산의욕을 고취시켰다.

 1972년 채택된 《인민민주주의헌법》 제13조에는 “천리마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대중적 열기가 크게 고양되어 1957년에서 1961년까지로 계획된 제1차 5개년계획은 전부문에 걸쳐 예정보다 1년 빠른 4년만에 목표를 달성하고, 주요 공업부문에서 5개년 계획의 목표가 2년 6개월에 달성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을 단순한 증산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공산주의 인간형의 창조를 목표로 한 사상개조운동으로 활용하는 한편, 공장·기업소·농업협동조합 등 좁은 의미의 생산현장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의 모든 분야를 포괄, 사회주의건설에 있어 <당의 총노선>으로까지 격상시켰으며, 개인간의 경쟁이 아닌 작업반·직장·공장단위의 집단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이후 <천리마작업반운동>으로 연결시켰다.

천리마운동은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자주노선을 견지하면서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이루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강화운동의 한계성에 따라 천리마운동이 퇴색하는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1976년부터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이라는 이름의 경쟁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운동과 더불어 ‘80년대 속도’, ‘90년대 속도’ 등의 구호가 내걸리고 있는데, 그러나 북한이 목표로 하는 자립 경제건설은 세계와의 기술적 차이, 외화부족 등으로 요원한 실정이다 한편, 최근에는 “다시 한번 천리마를 타라.” 등 ‘새로운 천리마속도 창조운동’을 대중으로 전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천리마 포스터.   천리마 강철직장의 용해공들.   천리마동상칠성문거리에 천리마동상이 솟아있다.

   천리마 동상평양시의 만수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1961년 건립된 동상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치기 위하여 추진된 천리마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

당중앙위원회의 편지를 높이 들고 있는 노동자와 볏단을 안고 있는 여성이 날개를 펼친 천리마(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말)를 타고 있다.

높이 46m, 조각상의 높이 14m, 길이 16m.   6·25전쟁 후 북한 경제를 일으킨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와 같은 속도로 사회 주의 경제를 건설하자' 는 천리마 운동의 상징인 천리마 동상을 도안으로 삼은 북한의 화폐 - 1978년 발행.         또한 새마을 운동은 당시의 고도로 권위주의적이며 경직된 국내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긴장완화적인 정치적 조처라고 보는 이도 있다.

초기의 농촌개발사업에서 출발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엄청난 물량적·정신적 성과를 얻어가면서 점차 비농촌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물량적인 건설사업을 넘어 정치적 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따라 새마을운동의 정치적 의미가 중요시되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점차 국민적 저항에 부닥치는 상황을 농민과 서민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유신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돌파구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였다는 비판도 나왔는데, 바로 새마을 운동이 1969년의 3선개헌, 1971년의 대통령선거와 비상사태선포, 그리고 1972년의 유신헌법 통과와 같은 권위주의 정권의 형성과정에서 진행되었으며 새마을운동의 본격적 전개가 유신체제와 더불어 진행되었다는 점 등이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따라서 새마을운동의 발의 초기에 지식인들은 냉담한 반응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정치적 의미가 어떠하든 새마을운동은 대통령 박정희의 철저한 조국근대화정신의 소산으로 시작은 되었고, 1970년대의 대한민국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뒤에서 받들어 준 정신적인 힘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한  1978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경제정책이 바뀌면서 농축산물 가격이 곤두박질치고 돼지파동에 쌀수매가 동결마저 겹쳐 농촌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른데다, 내무부가 새마을 사업의 중점을 농촌주택개량에 둠으로써 농가마다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어 탈농.이농이 속출, 해마다 40여 만의 청장년층이 농촌을 등지게 되었다.

이후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지도자대회 등 겉치레 연중행사로 전락했고, 5공화국시절에는 그 본래의 뜻에서 더욱 벗어나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이 이 운동조직에 가담, 조직확대와 예산확충에 진력, 1천만 명의 조직원과 5백억 원에 달하는 자산, 각종 성금과 기금의 유용 등으로 부패의 온상이 된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1980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됨에 따라서 민간주도적인 추진조직으로의 정착을 위한 체제건설사업(體制建設事業)을 전개하면서, 새마을국민교육의 기획실시,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내외 홍보와 국제협력,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조사·연구사업 등을 다각적으로 베풀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립적이자 민간주도형적인 것으로 발전적인 전환을 꾀하던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방만하고도 정치권력형적인 일탈적 운영행태로 1987년 말 본격적으로 문제화되었다.

이는 새마을운동의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로 대체되고 기구조직도 대폭 정리, 조정하는 등, 진통기를 벗어나 발전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필요한 제반조정을 과감히 하면서 사업계획을 집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1988년에 들어서면서 새마을운동은 일대혁신과 개혁의 전환기를 맞아 자성적 평가와 자기갱생적 발전을 꾀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이 중절(中絶)을 볼 정도로 크나큰 문제에 부딪치고는 새마을운동센터(1989)로 바꿨으며, 도덕성회복 또는 의식개혁을 내세웠다.

또한 1993년에는 제2단계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고 다른 민간자원조직체와의 연계를 갖는 등 새로 태어나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발의시의 새마을 운동은 이제 끝난 역사적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제2 새마을운동 1988년 5공비리청문회에서 새마을운동중앙본부와 관련된 비리가 폭로되어 새마을 운동은 침체되고 민간 주도로 하는 등 그 양상이 변화하였다.

1998년 이후로는 '새마을운동 조직 육성법'에 의해 새마을운동중앙회를 중심으로 제2새마을운동을 벌이고 있다.

제2새마을운동은 문화·시민의식의 선진화, 서로 돕는 복지공동체 만들기, 지역 활력 찾기, 친환경 조성, 국제·통일 협력사업을 그 목표로 한다 평가새마을 운동은 단기간에 낙후되고 있던 농업 경쟁력을 향상시켰고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를 통하여 자신감과 공동체 의식, 자발적 참여 의식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가정 직장 등 한국사회전체의 근대화의 동력이 되었다(실제로 경제 호황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1970년대 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대통령의 강한 권력과 관치가 결합되어 진행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제5공화국 시절 중앙본부의 각종 이권개입과 공금횡령이 밝혀지면서 제5공화국 비리의 온상으로 낙인찍힌 적도 있었다.

또한 새마을 운동은 일본의 마치즈쿠리 운동과 비교되기도 한다.

   * 마치즈쿠리 町作り “일정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 지역의 거주성을 높이기 위해 지역자원의 공동관리를 지향하는 운동” 또는 “거주환경을 정비하기 위하여 주민의 다양한 운동을 말합니다  즉 지역환경개선과 우리동네 가꾸기로 주거환경을 높히자는 취지의 운동.  일본에서는 지방자치시대의 개막이후 각 지역의 자치단치단체들은 지역의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지역발전을 도모하고 있으나 자치경험미숙 및 인적·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다.

경제가 저성장기에 들어선 이후 대도시와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고 살기좋고 매력있는 지역만들기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방의 市·町·村 을 중심으로 '마치즈쿠리 (마을만들기)' 운동을 꾸준히 전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  마치즈쿠리 의 추진배경과 전개과정 ·오이타 大分縣 의 마치즈쿠리 (일촌일품 운동) - 시가(滋賀)縣 나가하마 (長浜市 의 마치즈쿠리 (박물관도시만들기 운동) - 돗토리 鳥取縣  치즈 智頭町 의 마찌즈쿠리 (0분의 1 운동) · 마찌즈쿠리는 “일정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 지역의 거주성을 높이기 위해 지역자원의 공동관리를 지향하는 운동” 또는 “거주환경을 정비하기 위하여 주민의 다양한 요구들을 받아들여 계획에 주민참여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 등으로 개념화된다.

 일본의 나가하마시와 돗토리현의 치즈정의 마찌즈쿠리 추진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마을 有志들의 활약” 이었다.

마을의 역사적인 재생을 위해 거액을 기부하고 외래자본의 유입에 대항해서 스스로 위험부담이 큰 자금을 출자하는 등 그들은 지역유지로서의 도의적 의무를 다했다.

주민참가형 마을계획은 말그대로 주민들의 적극적, 자주적 참여에 크게 의존하는 관계로 지역주민들이 마을 전체를 공동소유 개념으로 인식하는 의식의 전환이 무엇보다 강조된다.

즉, 주민참가에 의한 지역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역주민들의 “公共의 意識”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주민참가형 마을만들기의 정착을 위해서, 지역행정은 주민참가의 붐을 조성하고 또 주민들간의 경쟁도 유발할 수 있는 적절한 행정적 조치(지원)들이 요구된다.

나가하마시의 예로, 상점가의 경관조성사업의 주민참여 도모를 위해 전통가옥으로 개량시, 보조금을 지원한다든가, 치즈정의 “마을진흥협의회”의 예처럼 “참여와 변화의 의지가 있는 마을”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등 주민참여의 붐을 조성하고 또 마을간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행정차원의 전략도 요구된다.

사례분석을 통한 정책적 함의로는 마을문제지도 만들기, 마을 자랑거리 만들기, 사람 만들기, 주민밀착형 사무소 만들기, 지역우량기업 만들기, 고량자복지 만들기 등이 있다.

     또한 새마을운동은 세계적으로는 농촌 개발의 모델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유엔은 새마을 운동을 바탕으로 한 '새천년마을계획' 이라는 아프리카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추진할 만큼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또한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현재 해외 74개국으로 새마을 운동이 수출되었고, 후진국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배우겠다며 방한하는 해외지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탄자니아는 2012년까지 팡가웨 지역에 새마을 운동을 기반한 마을을 짓는다고 하였다.

   사건·사고 및 논란 새마을 운동 회원 자녀에 대한 장학금 지원 17개 광역자치단체에서 1년동안 60여억 원(서울 12억여원 등)의 세금이 법률과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의해 새마을 운동 회원들의 자녀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특혜라는 지적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 회원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근거는 '새마을운동육성법(1975년 제정)'과 각 지자체마다 있는 '새마을장학금지급조례(1988년 제정)'에 있다.

지자체는 조례에 따라 편성가능한 예산 범위안에서 장학생 자격, 선정, 정원, 지원 금액을 책정하게 된다.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와 서울 25개 기초자치단체의 '새마을장학금지급조례'는 공통적으로 장학금 지급대상을 '장학금의 지급은 새마을운동에 1년(혹은 2년)이상 봉사하고 있는 남ㆍ녀 새마을지도자의 자녀중 새마을유공서훈이나 표창을 받은 지도자의 자녀, 새마을사업중 사망 또한 부상당한 지도자의 자녀'로 한정하고 있다.

2011년에는 전국 새마을 운동 회원 200만 명(새마을운동중앙회 추산)의 자녀 중 4,40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다  참고문헌새마을운동(내무부, 1975·1979·1983)새마을運動10年史(내무부, 1980)새마을運動의 理念과 實際(서울大學校새마을綜合硏究所, 1981)새마을運動理論體系定立(새마을運動中央本部地域開發調査硏究團, 1984)現代의 農村社會學(王仁槿, 博英社, 1985)농촌의 발전(王仁槿,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다음은 당시 1970년대에 방송된 새마을 운동과 박정히 대통령 뉴스인지 다큐인지.      새마을운동 주제가  어렸을 적 아침져넉마다 울려퍼졌던 노래아마도 각 동사무소나 국민학교에서 틀었던 걸로 아는데'새마을 운동' 이다.

             도시 새마을 운동 (자연보호) 의 일환으로 서울 남산에서의 환경미화 작업          .        그리고 새마을 운동의 기억이 떠오르는 시절의 또 하나의 기억확실히 이건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다.

몇학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고..  어린 시절 추억 속에 기분 좋게 자리잡고 있는 추억 중 하나가 바로 국민교육헌장이다.

   Behold the past, towards the future...    근데 우연히 이 지역을 지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모습을 본 거에요.”경북 청도군 신도1리경로당 이종두(77) 회장은 반세기 가까이 지났음에도 당시 수마에 마을이 휩쓸려간 풍경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에 따르면 길은 끊어지고 둑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범람한 물에 휩쓸려온 쓰레기가 농작물들과 뒤엉키고 키우던 가축들은 진흙더미에 깔리는 등 한국전쟁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비가 그친 후 주민들의 협동으로 마을은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더 나아가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 ‘신거역’이란 간이역도 개설했다.

 간이역이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박 전 대통령이 이곳을 지나다 재건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이 마을의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고민이었던 농촌 발전의 해법을 찾았다.

이후 1970년 4월 22일 전국 지방장관회의를 개최한 박 전 대통령은 신도1리의 사례를 소개하며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한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새마을운동을 제창하다2011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새마을의 날’이 오는 4월 22일 5주년을 맞는다.

1972년부터 지자체별로 제정?운영한 새마을의 날을 정부 차원에서 실시하고자 2011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을 개정 시행함으로써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새마을운동은 1960년대 발생한 심각한 도농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실시됐다.

당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연평균 9%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산업화와 이농형상으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새마을운동은 초기 사업의 단위를 협동 풍습이 남아 있는 ‘마을 단위’로 정했다는 점이 성공요인으로 분석된다.

정부는 1970년 4월 22일을 기점으로 새마을운동을 국가정책사업으로 정하고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각각 시멘트 335포대와 철근 1톤을 공급했다.

이듬해 사업성과가 우수한 마을 1만6600개를 재선정해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톤씩 추가로 지원하며 새마을운동의 성공 기틀을 다진다.

애초에 새마을운동은 초가집을 없애고, 좁은 골목길과 비좁은 농로를 확장하고, 농기구를 근대화하는 등 농촌을 살리기 위해 시작됐다.

1974년부터는 산업현장의 생산성을 높이고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한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확대됐고 1976년에는 도시지역의 공동체의식을 높이고 새마을운동의 범국민화를 위해 ‘도시 새마을운동’으로 발전한다.

이후 1980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해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돼 민간주도 운동으로 전환됐다.

 ▲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북 청도군 신도1리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수해를 복구하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진행한 사업이다.

이 운동을 통해 농촌의 근대화가 성공했고 이는 국가발전으로 이어진다.

 사진은 1970년대 신도1리 주민들이 농수로를 정비하는 모습.농촌 근대화 발상지, 신도1리이 운동의 시발점이 신도1리였다.

신도1리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1957년부터 마을 자체적으로 농촌 환경 개선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젊은피’였던 이종두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먼저 실시한 건 도로 확장이었다.

마을 뒷쪽 골짜기 뒤실마을과 현재 위치인 새터마을을 잇는 2.5km의 길이 있었는데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어 토끼길로 불렸다.

 이 회장은 “주민들이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밀양 등지에 팔았는데 산으로 통하는 마을 어귀 길이 좁아서 지게로 간신히 드나들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길을 넓히려면 담장을 뒤로 물리고 감나무도 잘라내야 했지만 주민들은 이런 피해를 감수하고 힘을 합쳤고 한 달여 만에 폭 4m의 농로를 만들었다.

1959년부터는 부엌을 개량하고 돌담을 블록 담장으로 바꾸는 등의 마을 개선 작업을 진행했다.

 신도1리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1년에는 부업장려 사업으로 가구당 감 묘목 50그루, 복숭아 10그루, 사과 1000그루 이상 갖기 운동도 진행해 농가 소득을 올리는 효과를 냈다.

이 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지은 새마을노래에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라는 가사가 있는데 우리 마을은 1950년대 말부터 이를 실천했다”고 말했다.

성공 모델 제시한 문성동신도1리가 새마을운동의 진원지였다면 첫 성공사례로는 경북 포항시 북구 문성동(당시 영일군 기계면 문성리)이 거론된다.

한때 신도1리와 함께 발상지를 두고 논란이 될 정도로 초반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역으로 손꼽힌다.

초창기 문성동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며 마을 발전의 초석을 일군 이석걸(88) 어르신은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박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제창 후 배포된 시멘트 335포대와 철근 1톤을 어디에 써야 할지 다른 마을이 우왕좌왕했던 것과 달리 이 어르신을 비롯한 문성동 주민들은 공동우물과 하수도·소하천을 정비하고 마을 안길을 넓히는데 사용했다.

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농한기인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6개월 동안 사업을 추진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의 첫 성공사례인 경북 포항시 북구 문성동을 시찰하는 모습이 어르신은 “당시 ‘남보다 앞장서자’, ‘남에게 의존하지 말자’, ‘농한기에 노름을 하지말자’를 마을 지표로 삼아 단결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자신의 집에 ‘새마을가꾸기 상담소’를 설치하고 사업추진에 따른 애로사항과 문제점을 해결해 주며 슬레트·리어카를 공동구매하고 시멘트 블록과 거푸집을 제작하는 등 어려운 일을 도맡았다.

지역 유지들을 일일이 만나 성금을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문성동 새마을운동은 1970년 11월 마을진입로 개설을 시작으로 당시 영일군 지역 새마을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로 인해 마을마다 선의의 경쟁이 시작됐고 문성동의 눈부신 활동상이 방송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지기도 했다.

 문성동은 주변 마을보다 먼저 기계천에서 마을 안까지 이어진 논두렁길을 확장했다.

마을진입로는 폭 5m, 길이 800m 직선도로를 개설하고 국도에서 하천까지 1km를 확장했다.

이를 통해 자동차·농기계·리어카 운행이 가능하게 했고 사료·비료·퇴비·양곡 등 농자재를 원활하게 수급 받아 마을 발전의 디딤돌을 놓을 수 있었다.

 1971년 8월 열린 경제기획원회의실에서 열린 경제동향보고 때 문성동의 성공사례가 발표됐고 이 어르신은 성과를 인정받아 국민 포장을 받았다.

 이 어르신은 “문성동이 주변 마을 중에 가장 못사는 마을이었는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룩한 성과로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이 남긴 성과는 눈부시다.

먼저 수리시설확충·농경지확장 등을 통한 식량자급 기틀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영농의 과학화, 새마을금고 육성, 농수산물 유통구조개선, 생산품 품질개선과 생산성 향상 등을 통해 농촌 혁명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성과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유엔세계식량기구와 유엔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 등은 빈곤퇴치 모델로 새마을운동을 채택했다.

현재 140여 국가에서 새마을 교육을 이수했고 50여개 국가에서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3년 6월에는 새마을운동 기록물 2만2084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새마을운동을 당시 최빈곤 국가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는데 초석이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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