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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우리는 흔히 무신으로 알고 있지만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셨으며 자신의 재주를 자부한 신동이었습니다.

장군의 부친께서 무과 출신이었으니 장군의 집안으로만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과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한 엄연한 문신이었습니다.

장군은 조선에서도 드물게 이직(李稷)과 함께 16세에 과거에 급제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인지가 19세, 이덕형이 20세에 급제한 것과 비교해도 상당히 빠른 시기였습니다.

                         김종서 장군 영정 : 사진출처 순천김씨 종친회 홈페이지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산45번지   공의 묘소는 계유정난의 수난시 참형을 당하셨기에 시신을 전부 거두지 못하고 한쪽 다리만을 이 곳묘소에 묻었다고 한다.

이에 얽힌 이야기로 대교리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야기인 즉 평소에 장군이 타고 다니던 말이 장군이 죽은것을 보고 다리 하나를 물었다.

그 말은 한쪽 다리를 가지고 밤낮으로 달려 고향으로 왔다.

고향에 한다리를 내려놓은 뒤 죽었다.

사람들은 다리 하나만을 묻고묘를 썼다.

그 무덤이 있는 곳을 "한다리"라고 하는데 한자어로 대교리(大橋里)라고 쓴다.

                                                                          글 출처  - 공주문화원-  처음에 묘를 쓰고는 표지석을 세우지 못하였다가 사진 맨오른쪽에 보이는 제일 작은 표지석을 공의 신원이 복권되고서 1748년(영조24년)에 공주판관 이익진과 지방유생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향사는 매년 음력 10월 3일에 모셔지고 있다.

     나라의 재상을 지낸 묘소로는 작게 느껴지지만 뒤에서 앞 전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음에 북방을 누비셨던 말발굽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듯 하다.

   입구 전경  왼쪽에 관리사옥이 있고 그 앞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특이한 것은 대개 신도비 밑 받침이 거북이형상인데 이곳은 두꺼비로 되어 있다.

신도비에 얽힌 이야기로는 "마을 입구의 지형이 풍수지리상 지내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지내와 거북이는 서로 상극이어서 부득이 신도비의 받침돌이 거북이가 아닌 두꺼비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묘소에 이르는 관리사옥 및 신도비 주변이 약간은 어수선한 느낌으로 정비의 필요성이 느껴진다.

그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가 세종시 출범으로 인해 해제 되었다가 세종시 문화재로 다시 지정되어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져 단장이 대대적으로이루어진다고 한다.

     입구에서 홍살문을 지나 들어가면 바로 나오는 김종서 장군과 아드님 김승규공의 정려각.  정려비는 세워져 있지 않고 정려각만 세워져 있다.

충신정려의 현판은 영조22년(1746년)에 세운 것이라한다.

      장군의 조부 김태영공과 부 김수공의 묘소가 같은 대교리 산45번지 내에 위치해 있다.

 두 분의 향사도 장군과 같은 음력 10월 3일에 모셔지고 있다.

    공의 묘소 먼발치 아래 2006년 5월에 건립된 큰아드님 김승규공 외 이하 3분의 묘소 실전으로 설단소가마련되어 있다.

      공의 묘소에 이르는 표지판이 있어 비교적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38-2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94호  김종서 장군 생가지터. 절재 김종서 장군의 생가지 마을사람들은 "정승의 집터" 라고 불러 왔는데 절재 조상의 순천김씨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한 이후 현재까지 다른 가옥이 들어서지 않으면서 "김종서 생가지"라고 부르고 있다.

가운데 1980년에 세운 행적비가 있고 위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생가지 전체 전경  인물개요 1. 공적과 관력 1383년(고려 우왕9년)도총제(都摠制)로 봉직하던 무관 김수의 아들로 공주군 요당면동혈산 하요당리(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태어나 중구 인현동 1가에서 거주하다가 서대문 마청동(지금의 의주로 1가, 충정로 1가 부근)으로 이사하여 거주했다.

1405년(태종5년) 문과에 급제 1415년 상서원 직장을 지냈고,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손실(踏驗損實)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1419년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상황을 조사하였고, 같은해 10월에 사간원 우정언이 되었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이 되었고 봉상판관으로 있으면서 의주 삭주도의 진제 경차관으로 파견되었으며,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좌대언인 그에게 이부지선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같은해 12월 함길도 도관찰사가 된 뒤 7,8년간 북변에서 육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지방의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방마가 가능한 곳의 수효를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 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를 심정하였다.

1449년 8월 달달 야선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짐에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평안도 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에 소환되었다.

1451년(문종 1년)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를 찬진하였고, 같은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찬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2. 면모육진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로서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편찬책임자로서의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개척에서 이룩한 공로로 해서 그를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 엄정하고 밝은 문인 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기개 높은 사헌부 간부는 북방개척의 영웅으로 유명하였다.

무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사헌부에서 잔뼈가 굵은 문신이었다.

그는 사헌부 감찰과 집의 시절 좌우를 돌아보지 않는 거침없는탄핵 발언으로 명성을 떨쳤다.

사헌부 집의로 있던 세종 10년(1428년) 양녕대군이 좌군비 윤이와 사통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양녕 탄핵을 주장했다.

세종에게 양녕을 탄핵하지 않으면 “전하와 영원히 이별입니다.

”라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세종이 양녕 탄핵과 관련해 “다시 말하지 말라”고 명했음에도불구하고 양녕대군을 국문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결국 이로 인해 파면까지 당했지만 조선 사헌부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사헌부가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국왕에게 맞서면서까지 원칙과 정의실현의 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강직 엄정한 면모는 사헌부 사간원의 이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육진개척의 일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1446년에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한 일 등은 그가 고제(古制)와 의례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그의 위세는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한 위세는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하여져서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 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하였다.

 3. 고려사, 세종실록편찬세종은 권제, 안지 등의 <고려사> 개수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1449년 김종서 등에게 고쳐 쓰기를 명하였다.

[김종서] 대박이네요.


그 작업은 2년 뒤에 완성되었는데 이때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 집현전의 관료출신들이었다.

집현전 출신이 아니면서도 당시 최고수준의 학자 관료였던 집현전학사와 그 출신들을 지휘하여 <고려사> 편찬의 책임을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는 면이라 할수 있다.

1451년 새로 편찬된<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편년체의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자 왕은 즉시 그 편찬의 착수를 명하여 이듬해에 <고려사절요>가 이루어졌다.

같은해 <세종실록>의 편찬 때에는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실록에는 따로 지(志)를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지의 의견을지지하여 <세종실록>에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 등의 전문적인 자료가 정리되어 실리게 하는 데영향을 주었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사서제 아래에서의 의정부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공의 위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에 제거되었다.

  4.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수난과 가문의 피화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김종서 등 수십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은 그가 1453년 4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급진전되었다.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의 심복 무사를 양성해 거사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이 해 10월 10일 발 마침내 유숙,양정,어을운 등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간계를 써서 철퇴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황보 인, 조극관, 이양 등 여러 대신을 왕명으로 밀소하여 궁문에서퇴살하였다.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사사하였다.

정분,조수량,안완경 등은 귀양보냈다가 곧 교살하였다.

이와 같이 김종서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무참하게 죽인 것은 수양대군 일파가 그들을 제거하기위해 조작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공이 있다 하여 수양대군, 정인지, 한확, 이사철, 박종우, 이계전, 박중손, 김효성, 권람, 홍달손, 최항, 한명회 등 37명은 정난공신이 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공은 주사되고 그의 아들 김승규와 김승규의 아우 김승벽 사위 박금손, 김자청, 김승규의 아들 김조동, 김수동,과 김승벽의 아들 김석동 등은 연좌되어 참형과 교형에 처해지거나 관노로영속되어 졌다.

가문의 피화 가운데 공의 손자 김행남, 김중남, 김팽, 김효달 공은 은거하여 은진, 익산,순창, 담양 등지로 이거하여 세거하였다.

그뒤 1678년(숙종 4년)에 그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22년)에 복관되었다.

 본관은 순천(順天 ),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忠翼) 이시다.

 글출처 자료 : 순천김씨 종친회 홈페이지                                     주소: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산45번지                                              주소:충남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38-2번지         [가사]기억이 눈을 뜰 때 날 데려가 나를 데리고 가바람이 날 부를 때 눈 감아봐 get back home again너에게 달려갈게 날 기다려 날 기다려나를 깨우는 노래turn it up now! burning up!깊은 어둠 속으로 내버려둬 나를 내 버려둬눈 감으면 보이는 그 곳으로 그 품속으로너에게 달려갈게 날 기다려 날 기다려나를 깨우는 노래turn it up now! burning up!세상 끝에 버려져 짓밟히고 꺾여져 다시 돌아갈래 turning back! turning back on!하늘 높이 올라가 cross the waters! cross the border!너무 커버린 아이 날 수 없어 갈 수 없어너에게 달려갈게 날 기다려 날 기다려나를 깨우는 노래 [가사]힘없이 멈춰진 하얀손 싸늘히 식어가는 눈빛 작은 그 무엇도 해줄수가 없었던 나 비라도 내리길 바랬지 몇일이 갔는지 몰랐어 그저 숨 쉬는게 허무한듯 느껴질뿐 이제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 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비라도 내리길 바랬지 몇일이 갔는지 몰랐어 그저 숨 쉬는게 허무한듯 느껴질뿐 이제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 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이제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 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여담으로 김종서가 1383년생으로 이당시 40대 후반인데 이병욱씨의 김종서는 안티에이징^^;;;)공주의 남자 8회에서의 김종서(이순재)와 수양대군(김영철)-1453년. 단종 시대때 서로 극한 대립을 이어가게 되었는데..... 이후에 수양이 군사들을 이용해 김종서를 잔인하게 제거하면서.....같은 조선초기를 다루었지만 엄연히 다른 작품인 대세와 공남. 하지만 이 두 장면은 아이러니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묘한장면이었죠...대세 속 김종서와 수양은 왕자와 신하의 평범한 관계였으나 세월이 지난 뒤엔 공남처럼 정적이 되어버렸으니....(결국에 수양이 김종서를 역적누명을 씌워 죽이는...)4군은 압록강 상류에 설치되었으며, 6진은 두만강 하류에 설치되었는데, 4군6진의 개척 경과를 아래와 같이요약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압록강 상류 4군 - 여연, 무창, 자성, 우예>4군은 압록강 상류인 여연, 무창, 자성, 우예 지역을 말합니다.

이 곳은 조선 초기부터 여진족의 침입이 잦던지역으로 1차 야인 정벌과 2차 야인 정벌을 통해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1차 야인 정벌)압록강 부근의 여진족들은 사납게 굴었으며, 1432년 여진족의 추장 이만주가 칩입해 왔습니다.

이를 계기로이듬해 1433년(세종 15년),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삼아 압록강 부근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최윤덕은 황해도와 평안도의 병사 1만 5,000여 명을 이끌고 나가 압록강을 건너 파저강까지 진격했으며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1차 야인 정벌이며, 최윤덕은 태종대에 이미 설치되었던 여연군과 강계부 사이에 자성군을 설치하고 돌아왔습니다.

(2차 야인 정벌)1차 야인 정벌 이후 또 여진족이 압록강 너머로 칩입하자 세종은 1437년 9월, 도절제사 이천에게 명하여 여진 세력을 완전히 꺾도록 하였습니다.

이천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여진족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바로 2차 야인 정벌입니다.

[김종서] 최고의 방법은?



이천의 2차 야인 정벌 후 조선은 여연군 동쪽에 무창군을 설치했으며, 1443년 여연군과 자성군 사에에 우예군을 설치하여 4군을 완성하므로써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조선의 영토가 탄생하였습니다.

<두만강 하류 6진 -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두만강 방면은 조선 왕조 초기부터 이성계 부자가 이미 닦아 놓은 터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력이 미치고 있었습니다.

태조는 여진족 출신 장수인 이지란으로 하여금 공주와 갑주에 성을 쌓도록 하여 그 일대를 조선의영토로 끌어들였습니다.

그 뒤 여진의 침입이 잦자 동북 방면의 국경선을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종 4년(1422년)에는 국경선을더 남쪽의 융성으로 후퇴하자는 대신들의 논의가 있었습니다.

 김종서가 반대했고, 세종 역시 조상의 강토를한 치도 내줄 수 없다며 북쪽 국경을 굳게 지킬 것을 명했습니다.

이에 김종서는 스스로 함길도 절제사를 청하여 1433년 동북면의 야인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 뒤 여진족 간의내분을 틈타 공격하여 여진족을 정벌하고 회령 서쪽의 여진족 진지를 모두 차지하고 동북의 옛 경원 땅을되찾았습니다.

김종서는 두만강 부근에 여섯 곳의 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6진(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입니다.

 김종서의 6진 개척에 발맞추어 세종은 함길도 지방의 백성을 6진에 옮겨 살도록 했으며, 각 지방에서이민을 모집했고, 남족 백성들도 6진에 옮겨 살자 두만강 부근은 조선의 영토로 굳혀졌습니다.

4군6진의 개척으로 세종대왕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실상 한반도의 국경선으로 확정짓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당시 고려는 국운이 다했고,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김종서는 1405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에 나아갔다.

김종서의 됨됨이를 알아본 것은 세종이었다.

김종서는 세종 때 이르러 사간원 우정언을 거쳐 여러 벼슬을 맡았다.

  북방 오랑캐들의 침입이 잦자, 김종서는 1433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오랑캐를 물리치고 북방을 개척했다.

이후 7년동안 회령, 경흥, 종성, 온성, 경원, 부령에 육진을 설치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 함경도 병마도절제사를 맡아 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해 그 대비책을 건의했다.

그 후 세종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진 김종서는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거쳐 우람찬이 됐다.

  1449년에는 왕명을 받아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를 다시 간행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451년 <고려사>를 완성했고, 같은 해 10월에 우의정이 됐다.

새로 편찬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고려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다시 정리해 편찬할 것을 건의해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

또 1452년에는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자로 임명돼 <세종실록> 편찬에 힘썼다.

  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단종이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김종서는 단종을 잘 보필해달라는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황보인 등과 함께 어린 왕을 충심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1453년 왕위를 탐내고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에게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 뒤 300여 년이 지난 1746년에서야 김종서는 억울한 죄에서 풀려났고 관직을 되찾는 등 명예가 회복됐다.

  김종서가 지은 책으로는 <제승방략>이 있고, 시조로 <장백산에 기를 꽂고>, <삭풍은 나무 끝에 붙고> 등이 전해져온다.

  김종서는 북쪽 오랑캐를 무찌르고 우리나라의 영토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국경의 방비를 철저히 한 명장이었다.

또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역사책을 펴냈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어린 왕을 보필한 충성스러운 신하이기도 했다.

?<- 김종서의 묘 - 계유정난: 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대신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한 사건을 말한다.

1452년에 문종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우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12살의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모든 권력은 원로대신들에게 집중됐고 왕권은 매우 약해졌다.

이에 수양대군은 신하들의 막강한 권력을 빼앗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역모를 꾀했다는 구실로 죽였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과 친분이 두터운 동생 안평대군마저 귀양을 보냈다.

이 사건으로 수양대군은 권력을 독차지했고, 훗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 <?고려사>: 세종의 명으로 김종서, 정인지 등이 예전에 권제가 지은 <고려사>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1451년에 펴낸 고려의 역사책이다.

고려에 대한 자료를 충실하게 수집해 기록했기 때문에 오늘날 고려시대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다.

모두 139권으로 돼있다.

- 문종(1414

1452): 조선 제5대 왕으로 세종의 아들이다.

1421년에 왕세자가 되어, 1450년 왕위에 올랐다.

천문, 역법, 산술에 정통했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지만 몸이 약해서 왕위에 오른 지 3년만에 병으로 죽었다.

- <?세종실록>: 조선 세종 때의 역사를 김종서와 정인지가 중심이 되어 기록한 책으로 1454년 완성됐다.

이 책은 세종 때만이 아니라 조선 초기의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다.

1977년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에서 한글로 옮겨 펴냈다.

- 육진: 조선 세종 때 동북 방면 여진족 침입에 대비해 두만강 하류 지역에 설치한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의 여섯 진을 말한다.

1433년 세종이 김종서에게 설치하게 해 1449년에 완성됐다.

이로써 동량북(무산)을 제외한 두만강 유역을 회복했고, 회복한 땅에 남쪽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개척하게 했다.

- 정인지(1396

1498):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1414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세종의 사랑을 받아 집현전 학사가 됐다.

세종을 도와 성삼문, 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고, 권제,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또 김종서와 함께 <고려사>를 펴내는 일에 참여했고, 천문, 역법, 아악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펴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고,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우의정에 올랐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의정에 올랐다.

- 황보인(?

1453):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고, 김종서와 함께 육진을 개척했다.

우의정을 거쳐 1452년 영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살피다가 계유정난 때 두 아들 및 손자와 함께 죽었다.

?- 이야기 - 김종서가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처음 부임했을 때의 이야기다.

 “적은 결코 쳐들어오는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 ?김종서는 부임한 첫날부터 그곳 사정을 자세하게 조사하고, 마치 호랑이처럼 군사들도 무섭게 다스렸다.

 ?어느 날, 고된 훈련이 끝난 뒤 김종서는 고기와 술을 푸짐하게 마련해 잔치를 베풀었다.

군사들은 흥이 나서 한창 고기와 술을 마시면서 즐겼다.

그때 어디선가 화살 하나가 날아오더니 김종서 바로 옆에 놓인 커다란 술독을 쨍그랑 하고 깨뜨리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 이게 웬 날벼락이냐?” ?군사들은 놀라 몸을 피하기 바빴다.

그러나 김종서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마시던 술잔을 비웠다.

 “장군님,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허허허!” ?김종서는 부하 장수들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탕하게 웃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화살은 틀림없이 나 김종서를 해치려는 오랑캐들이 쏜 것이다.

내가 만일 당황하여 도망한다면, 오랑캐들이 그 꼴을 보고 얼마나 비웃을 것이냐? 그러면 우리는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싸움에서 지는 것이 아니냐?” ?김종서의 담대함을 믿은 군사들은 이후 김종서의 명령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따랐다.

...(여담으로 김종서가 1383년생으로 이당시 40대 후반인데 이병욱씨의 김종서는 안티에이징^^;;;)공주의 남자 8회에서의 김종서(이순재)와 수양대군(김영철)-1453년. 단종 시대때 서로 극한 대립을 이어가게 되었는데..... 이후에 수양이 군사들을 이용해 김종서를 잔인하게 제거하면서.....같은 조선초기를 다루었지만 엄연히 다른 작품인 대세와 공남. 하지만 이 두 장면은 아이러니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묘한장면이었죠...대세 속 김종서와 수양은 왕자와 신하의 평범한 관계였으나 세월이 지난 뒤엔 공남처럼 정적이 되어버렸으니....(결국에 수양이 김종서를 역적누명을 씌워 죽이는...)김종서 그래도 이제는 처음들었네요 며칠전에 친구들이랑 술한껏 취해서 노래방에 갔따가 친구가 부르는거보고 가사가 너무좋아반해버렸어요

제가 오늘 준비한건 노래방버전 이니 멜로디를 잘 보고 기억하셨다가다음번에 노래방가셔서 김종서 그래도 이제는 꼭한번 불러보세요



 김종서 그래도 이제는 고음을 저로써는 완전 불가한 일이라 듣는거만즐기지만, 어느정도의스킬만있으시다면 가성으로도 부를수있찌않을까 내심 기대해보네요 ㅎㅎㅎ 며칠전 요거불렀떤 그 녀석은 보이스도 타고나서 완전 멋지더라구요

ㅋㅋㅋ그냥 모르는 남자였다면 아마 반해버렸을지도 몰라용


히히 ^^ 김종서가 부르는건 거의다좋아하는편이고 가사가 좋아서 즐겨듣게?榮쨉�

너무 매력적인거 같아요

이웃님들도 ??한번들어보시면 완전 좋을듯 싶네요 ^0^[가사]힘없이 멈춰진 하얀손 싸늘히 식어가는 눈빛 작은 그 무엇도 해줄수가 없었던 나 비라도 내리길 바랬지 몇일이 갔는지 몰랐어 그저 숨 쉬는게 허무한듯 느껴질뿐 이제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 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비라도 내리길 바랬지 몇일이 갔는지 몰랐어 그저 숨 쉬는게 허무한듯 느껴질뿐 이제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 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이제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 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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