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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net/pimg/blog4/skin/common/img_blank.gif" />싸이월드</a><a class="article_to_etc p11" href="#" onclick="shareSNS('me2day', '$snsurl', '$snstitle', '$snssummary', ''); return false;"><img class="me2day_icon" src="https://i1.daumcdn.net/pimg/blog4/skin/common/img_blank.gif" />미투데이</a></div></div></div></div>--> 차의 향기는 보통 300종 이상에 이르는 향기물질의 복합체로서, 각 성분 고유의 생리 활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차 전체의 향기도 수 천년 동안 인간에게 즐거움과 만족감, 흥분 또는 진정 작용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차의 기능성으로서는 영양 기능과 감각적인 기호 기능, 생체 조절 기능을 들 수 있지만. 차의 기호 기능이 없었다면 오늘날까지 차가 지속되어 왔을지도 의문시된다.

차의 풋풋한 그린계의 향기와 달콤한 후로랄계 향기는 삼림욕과 같이 스트레스 해소, 피로 회복, 기분 전환을 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최근 뇌파의 수반성 음성변동 측정에서 자스민, 장미, 박하의 향기는 흥분작용을 나타내고, 라벤더와 레몬향은 진정 작용을 나타낸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차에 대한 보고는 없는 상태지만 자스민과, 장미의 향기에 가까운 홍차나 중국의 포종차는 흥분 작용을 나타내고, 반대로 테르펜계 탄화수고가 많은 증제녹차와 덖음녹차는 진정효과가 기대된다고 볼 수 있다.

 고대부터 훈증이나 향유의 증기에는 살균력이 있다고 알려져 왔는데, 유카립스, 전나무, 장미, 마늘, 양파, 레몬 등을 특히 그 작용이 강하다.

차의 휘발성 성분의 경우도 살균효과를 가진 것이 많은데, 특히 테르페노이드계가 살균효과와 더불어 진정작용, 자극, 이뇨, 소염, 거담, 항 종양 등의 효과를 나타낸다.

 J.C.Marazzella 등에 의해 대장균과 고초균에 대한 살균효과가 인정된 휘발성 물질 중 차의 향기 성분에 함유되어 있는 성분은 도표와 같다.

또한 미생물을 번식시켜 만든 후발효차에는 휘발성 페놀화합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 성분 역시 강한 살균력을 가지고 있다.

 식물의 기능 중에서 생체 조절 기능은 크게 생체의 바란스를 취해 주는 기능으로서, 생체방어, 질병의 예방, 생체 조절 등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차의 향기 중에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흥분 작용과 진정작용이 있어 인간의 내분비선 계통과 호르몬의 변화에 의해 스트레스의 해소나 피로회복, 기분전환을 시켜주는 생체 조절 작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향기성분                 대장균       B.SubtilisLinalool                   ++            +    Geraniol                    -            +Cedrol                      -             ++Hexanol                   ++            ++ Heptanol                  ++            ++++Octanol                   ++            ++Nonanol                   -              +++Decanol                   -               +         Benzyl alcohok         -              +        Heptanal                  ++++         ++++Nonanal                   ++++         ++++Decanal                    -              ++++Undecanal                -              ++++Phenylacetaldehyde  -              +++       Isovaleric acid          ++             +++Hexanoic acid           ++             ++        Benzyl acetate         ++              ++Lineally acetate        -               +++Terpinyl acetate       -               ++       Acetophenone          -               ++       Isoeugenol                -              +            youtube.com/embed/GGjZfIpAgoo?wmode=transparent&wmode=opaque" frameborder="0" allowfullscreen="">[뉴스데스크]그들의 광주, 우리의 광주 - 김종태 편노동자 출신 시인이나 작가가 되었을까, 정년퇴직을 앞둔 고령의 노동자일까, 민주노총 지도부가 되었을까, 아니면 야무진 지방의회 의원이나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을 하고 있을까... 5.18 국립묘지 영안봉안소에 잠들어있는 고인의 젊디젊은 영정사진을 바라보면서 ‘지금 살아있다면?’이라는 부질없는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살아있다면 회갑을 바라볼 59세의 장년이 되었을 부산 출신의 김종태씨. 그는 1980년 6월 6일 서울 신촌에서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온몸을 불살랐습니다.

당시 23살의 청년이었습니다.

故 김종태(1958

1980)  “풀포기 같이 자라난 나의 삶/마음대로 베어내도 좋다 짓밟아도 좋다/하지만 나의 뿌리는 광야/우리의 대지 위에서 숨쉴지니 속살이라도 좋다” 김종태씨는 1958년 6월 부산 초량동에서 가난한 목수 김윤배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윤배씨는 가난을 벗어나려는 기대감으로 별다른 대책없이 가족을 이끌고 부산에서 상경했습니다.

서울의 변두리, 도봉구 미아리에 정착했습니다.

1980년대 서민들의 애환을 그려 화제가 됐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무대였던 쌍문동 부근의 서민촌이었지요. 종태씨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는 [응팔]보다 10년쯤 앞선 시대로, 가난과 재개발의 시대였습니다.

미아초등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지만 종태씨에게 평탄한 학생의 길은 허락되지 않았지요.1970년대초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 서울에서는 도시미관 정리계획이 실시됐습니다.

그가 살던 미아리를 비롯해 청계천, 종로 5/6가, 하일동, 상계동 등 빈민촌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아초등학교 5학년, 졸업을 1년 앞둔 종태씨는 생활터전에서 쫓겨나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로 강제이주하게 됩니다.

이런 폭력적인 조치는 어린 종태씨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열망했던 배움의 길이 좌절당하고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됩니다.

성남 수진리고개에 조성된 이주민들의 천막촌에 철물가게를 낸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연탄가스 중독과 중풍으로 쓰러지고 종태씨는 열서너 살부터 ‘소년가장’의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 어둠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단체로 뭉쳐서 임금투쟁을 하고, 생계비를 보장받고, 모든 정치 문화 사회의 실정에 맞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어둠에 잠긴 한국 노동 사회의 빛이 됩시다.

[김종태] 분석을 해보면


” 노동자로서의 삶이 계속됩니다.

16살 때 성남 은행동의 목걸이 공장에서 8개월간 일하다가, 서울 신당동 삼진특수칠에 도장공 견습생으로 입사해 한동안 일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노동자의 길, 17살이 된 6월 성남 제일실업학교의 학생 모집광고를 본 종태씨는 그 학교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 학교에서 김희복 담임을 만나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동아일보 [고바우영감] [학생과 사회정의] [노동자의 길잡이] 등을 읽고 토론하면서 사회를 보는 시각이 확장되고 뛰어난 글쓰기 솜씨를 보여주는 종태씨. 공동체생활을 통해 안정감을 갖고 공부에 전념하면서 이듬해 18세에 검정고시에 합격하기도 합니다.

 제일학교 시절 19세가 되어서는 다시 서울 신당동에 있는 현대특수철 도장공으로 다시 입사해 일합니다.

그즈음 그의 자질을 눈여겨보던 김희복씨는 종태씨에게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유합니다.

농군학교를 마친 종태씨는 공동체적 삶의 가능성과 실천방안에 몰두하고, 제일실업학교 출신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형제단]에 가입해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기독교적 공동체와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종태씨는 전태일을 흠모하는 노동전문가로 성장하게 되지요. 김종태씨에게 영웅이었던 전태일 열사. 종태씨는 현실인식이 날카로웠을 뿐만 아니라 생활 태도 역시 불의를 참지 못했습니다.

금마실업이라는 곳에서 일할 때의 일입니다.

동료 여공이 조장에게 겁탈당하는 걸 본 종태씨는 울분을 참지 못해 조장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무자비에게 두들겨 맞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항의하고 문제를 제기해 조장의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종태씨는 주민교회의 교인으로 등록을 하는데, 여기에서 평생의 멘토라 할 만한 이해학 목사를 만납니다.

[김종태] 에 대한 몇가지 이슈



사회과학적 통찰력을 가진 노동자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인이었던 종태씨의 스승이자 친형님 이상이었던 사람, 광주항쟁 이후 분신을 결심하고 쓴 유서를 전한 사람, 그가 바로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였습니다.

이해학 목사는 김종태씨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 김종태의 인상은 대단히 맑았어요. 맑고 청아한 그런 모습이였어요. 웃는 모습은 꼭 여자모습 비슷하게 그려지는데 아주 참 깨끗한 영혼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었어요. 김종태는 우리나라 가난의 바닥, 밑바닥 생활을 했던 사람이고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학교보다는 노동현장에 가서 노동을 했던 사람인데 그런데도 그냥 거기서 먹고 살기위해서 돈을 버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고, 의문하고, 고민하고 그러면서 그 노동현장의 부당감에 분노하고 힘있는 자들의 횡포 특히 여성노동자에 대한 남성들의 횡포, 이런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분노하면서 거기에 맞서서 싸우기도 했던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 1979년 4월, 22살이 된 종태씨는 연고지인 미아리에서 방위로 군복무를 시작합니다.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많았지만 그는 미아리에서 같이 철거를 당한 동네 친구와 후배들을 중심으로 [조나단 독서회]를 꾸립니다.

후배들에게 종태씨는 “반드시 후배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모든 일의 뒤처리를 도맡아 하는 등 인간적으로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고, 신군부의 12.12 쿠데타, 서울의 봄, 5.17 비상계엄령 선포, 5월 18일 이후 지속된 광주항쟁... 숨가쁘게 전개된 1979

1980년의 시간은 종태씨의 운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80년 5월의 광주. 이 사건을 알게 된 김종태씨는 결국 목숨을 걸고 진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종태씨의 방위 제대는 1980년 6월 16일이었습니다.

종태씨의 동생 종수씨는 당시 형의 말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형이 제대를 한달쯤 앞두고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제대를 하고 나면 자기가 집안 생계를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항상 가난에 찌들려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지요. 목수 재능이 있으니까 목공소에 취직해 어머니를 잘 모시고 살겠다는 거였어요.”하지만 종태씨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광주에서의 학살을 알고 난 그의 이성과 감성은 제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습니다.

  전남도청의 시민군들이 진압된 1980년 5월 27일로부터 닷새 뒤인 1980년 6월 1일 일요일, 경기도 성남 주민교회에서는 광주를 탈출한 이들의 증언을 듣는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1편 김의기 편에서도 소개됐던 동화작가 윤기현씨가 설교단에 증언자로 섰는데요요. 광주에서 일어났던 참상을 듣던 신자들이 모두 울음바다가 됐을 때 다른 교인들과 함께 증언을 듣던 김종태씨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윤기현 :"어떻게 한국 군인이 국민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고 그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냐. 당신의 증언은 다 날조된 것이다.

이걸 선동해서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러느냐고 저한테 항의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못 믿겠으면 지금 광주에 내려가서 아무 병원이라도 가봐라. 각종 부상자와 사망자들로 넘쳐날 것이다.

그러면 확인되는 것 아니냐."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나온 탈출자의 증언은 종태씨를 광주로 이끌었고 과연 광주를 직접 찾아간 종태씨는 울분에 차 다시 성남으로 올라옵니다.

윤기현씨의 증언이 사실임을 알게 된 종태씨. 밤마다 광주학살의 내용을 알리는 전단지를 만들어 서울 시내에 뿌리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동생인 김종수씨의 말입니다.

김종수: "종태형이 매일 5.18 유인물을 만들었어요. 매일 유인물을 만들어가지고 직접 쓴 유인물이죠. 등사기 있는 데 가서 밤을 새워서 등사기를 이용해서 그걸 종로서적 이런 데 가서 사람들이 많이 보는 책에다가 유인물을 계속 혼자서 뿌리고 다녔는데 아무도 안 들어줬죠."1980년 6월 9일 오후 5시 50분경. 방위 군복을 입은 종태씨는 서울 신촌4거리에서 광주학살을 규탄하고 민주인사 석방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행인들에게 나눠줍니다.

그의 모습은 대학가에 잠복해 있던 형사의 눈에 띄고, 그들이 뒤쫓는 것을 눈치챈 그는 유인물을 한꺼번에 뿌린 후 미리 준비해온 석유를 온몸에 뿌리고 불을 당겼습니다.

온몸에 불기둥이 치솟았습니다.

마침 약국에 있던 약사가 비상용 소화기를 들고 나와 진화를 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숯덩이가 된 후였습니다.

당시 김종태씨 몸에 붙은 불을 꺼 준 약사는 상황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이계신 약사:(분신 목격자):"깜짝놀랐어요. 그 때는 누구든지 그 상황에서는 불을 꺼줘야겠다고 생각하죠. 마침 약국에 소화기가 있어가지고 꺼줬습니다.

불을 끄고 나자 김종태씨의 몸이 막 퉁퉁 부어오르더라고요. 옷에 인화물질을 뿌리고 불을 붙였기 때문에 아주 치명적이었습니다.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이렇게 외친 후 의식을 잃은 종태씨는 지나가던 트럭에 실려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숨이 끊어지지 않는 고통을 겪은 지 5일 후. 23년의 짧고도 뜨거운 생애를 마감합니다.

 김종태씨의 장례식 장면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질러서 국민 몇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저는 몸을 던지겠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질러 광주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댓가없이 이 민족을 위하여 몸을 던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과분한, 너무 거룩한 말이기에 가까이 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힘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

”그는 분신하면서 '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남겼습니다.

김종태씨가 남긴 성명서 정의로웠던 노동자는 왜 광주시민들의 넋을 위로하며 스스로 몸을 태웠을까.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던 그 때 그는 어떻게 광주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일까.김종태씨가 그린 자화상  [라면신경]“구수하사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여 주시는 라면님이여/라면님을 내가 믿사오며/그의 자매품 소고기라면을 믿사오니/이는 공장에서 생산되어 상인들의손을 거쳐/식순이의 손에 들어가 고난을 당하사/끓는 물에 죽으시고 끓으신 지 3분 만에 상에 오르사/유능하신 젓가락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써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심이라/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위 속으로 소화되는 것과/항문을 통해 나와 거름이 되는 것을 영원히 믿사옵나이다” 종태씨가 자취시절에 쓴 [라면]이라는 시입니다.

비유와 해학의 솜씨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던 노동자. 그는 시인이나 작가로서의 소질은 물론, 자화상을 그려서 남겼을 만큼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습니다.

시, 르포, 생활수기, 일기 등 많은 기록도 남겼습니다.

광주시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남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나의 문제'로 받아들인 23살의 가슴 뜨거운 청년. 평생 가난 속에 산 어머니를 잘 모시고 살고 싶었던 종태씨의 소박한 꿈은 민주주의를 짓밟은 신군부의 총칼 앞에 부서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3화: 서울대생들에게 무슨 일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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