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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응답이 없자 예고한 대로 형사 고소를 진행키로 한 것이다.

 故 천경자 화백의 차녀 김정희 교수가 지난 2월에 제기한 친자확인 소송은 며칠전인 6월10일  "친자가 맞다"는 확정 판결이  나와 , 미인도 위작관련 소송에 힘을 얻게 되었으며, 지난 4월 같이 진행되어 온 "미인도 위작"관련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6명을 사자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혐의로 고소·고발건은(문제의 미인도)수사에 착수한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배용원 부장검사)는 지난 8일 그림을 감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 문제의 미인도를 제출받았으며,지난 8일에는 정희씨를 고소인 자격으로 불러 조사하였고, 현재  다각도로 조사 분석하며 수사가 진행중이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 - 천경자 화백-"진실은 언제나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에 주의하지 않을 뿐, 항상 진실을 찾아야 한다.

진실은 우리를 늘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파스칼-그럼, 그림보는 안목을 열기위해  천화백의 70

80 년대 초반의  인물화 미인도를 살펴보면,... [1973' 길례언니] * 학교 선배이며 간호사 였던  임길례 초상     어린 추억속의 선배를 그린작품  [1974년작 고(孤)] *  우측의 검은 머리결에는  서너 송이의 꽃들이 덮여진 흔적들이 남아있다.

 크고작은 꽃들로인해 시선흐름이 방해되어  검은색계열로 개(蓋)칠하다보니, 다른 작품들에 비해  모발색이 조금 탁하게 표현된 작품중 하나임을 기억해 두시고,...더불어, 조금 서툴게 서명한 "경자(鏡子)"라는 사인과 제작연도도 한 번씩 눈길주시길

^^[1974' "四月"]  컴 모니터나 화집을 통한,  선생의 작품감상 주요 포인트! 조금 뒤로 물러앉아 거리를 두고 보거나,.. 눈을 흐리게 뜨고, 보시길

! 그리해야만,  작품의 온전한 느낌들이 전해져 옵니다

ㅎ* 이점은 실제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의 눈 높이(거리)까지 생각한  선생의 의도적인 배려입니다.

 [1976' 여인] [1977' 유월의 신부] 이쯤에서,  잠시  우리의 전통 채색화 표현기법에 대해 살펴보죠 ^^*  채색화는 한 두번에  칠하는 "painting" 개념이 아니라 채색안료를 아교액에 묽게 개어, 원하는 색이 나올때까지 화지에 수없이 색을 올려 표현하는 전통방법으로단 기간에 쉽게 완성되는 그런 그림이 아니다.

 * 짝퉁을 구별하는 안목을 넓히고자 하시는 분들은 열어 만나 보시길

^^> 더 보기 └ 접기 앞서 더보기에 밝혀 두었듯이 천경자 화백의  채색화 작품들중  소품은  두 세 달, 대작은  해를 거듭넘긴, 긴 작업들이 대부분이다.

 * 위작 논란이 되고있는 미인도  공교롭게도  위,아래 소개한  1977년에 선생이 그린 "유월의 신부,멀리서 온 여인,미모사 향기,수녀 테레사,내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一九七七 로 연도 서명이 되어 있는데,...위 미인도?만  1977 아라비아 숫자로 아주 정성스레 또박또박 잘 쓰여있다

ㅎ아래 쪽에서 다시 설명해 올리겠지만,..뭔가 그리다만 그림이다! 눈을 흐리게 뜨고 보면,...그 미숙한 느낌이 더 드러나 보인다.

 [1977' 멀리서 온 여인] (1977" 수녀 테레사) [1977' 미모사 향기] (1977' 내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8' 탱고가 흐르는 황혼] 석판화  선과 점으로 간결하게 표현된 눈 그리고 입술과 코는  작가의 그것과 닮아있다! (1981' 미인도) (1981' 꽃을든 여인)   아래 작품은 눈의 촛점을 흐리고 살펴보면,  해부학적 골격과 근육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눈 주변의 안륜근과, 광대뼈, 미묘하게 올라간 입주변의 구륜근은 물론 쇄골과  가녀린 목의 근육,그리고 머리카락 표현! 자연스러운 바림으로 작품의 생기를 더해주고 있다.

* 바림: 일종의 그라데이션 개인적으로 퍽

마음가는 작품이다 ^^* [1981' 장미와 여인] 1976년경 천경자 선생이 둘째 딸을 모델로 그린  스케치 이 스케치는 “장미와 여인”의 바탕이 된 그림으로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데,..                                                                                           천화백의 장녀가 부경대학에 작품 기증하는 과정에서 다시 소개된 것으로 그사이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있다.

 헌데, 논란이 되고있는 그 문제의 미인도의 습작이 새롭게 발견되었다고 똥아에서 언론 플레이?하듯  기사화 되었고, 기사를 확인한  선생의 차녀 김정희 교수측은 “미인도”가 진품의 근거가 나온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보도는 명백히 허위보도이며, “미인도 습작”이 발견됐다는 의도적인 왜곡 보도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예를 또 한번 훼손하고   있다.

"고 반박한다.

관련기사=>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60525_0014107483&cID=10701&pID=10700 이어, 화가 천경자의  인물화 구도는 화면밖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결정되며, 그 응시하는 눈에는  작가의 내면세계가 아스라이 담겨있다.

 [1982' 황금의 비][1982' 두상(頭像)] 선생의 작품에서, 시선은 화면 전체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시발점이며화면밖  관람자의 내면 즉, 마음속 생각까지 들여다 보는 듯한,..그리하여 마음속 고민과 시름마져 잊게 해주는 그런 묘하고 기이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럼, 이제 선생의  미인도 속에 감춰진 진실을,...  지금까지 살펴본 천경자 선생 작품들의  공통점은  하루 이틀만에 쉽게 그려진 그림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래전 호암 미술관 전시장에서 실제 작품들을 접하며  받았던 20 여년 전의 그 감동이 지금도 뭉클하게 전해져온다.

당시, 전통채색화를 어설피 흉내내던  저 "다 사랑"은 이틀후 확대경을 챙겨 작품들을 다시 살펴본 적이 있었다.

 확대경속에 드러나던 조금 거친듯한 붓자국들은  서너 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탄력있는 피부가 되고,윤기흐르는 머리결로 드러나고, 피어나는 꽃잎들이 되는 것이 신기하여 한참을 들여다 보았던 기억이다.

  수많은 붓질로 켜켜이 쌓아 올린 깊은 색감들이 그윽하게 베어나오는 깊은 맛!우리의 전통 채색화들과  천경자 화백 채색그림의 특징중 하나이다.

  어설프게 그림을 그려 온 "다 사랑"이 보아도  위에서 설명한 그런 느낌들을 찾아 보기 어렵다는 생각웬지 마네킹을 보고 그린 듯한 느낌은, 저 만의 생각일ㄲㅏ요? "감춘 것이 깊으면,망하는 것도 깊다.

" - 명심보감- 시간이 허락되시는 분들은 지난 2월14일 SBS 스페셜에 방영되었던 "소문과 거짓말-미인도 스캔들"편을 아래 걸어 둔 링크를 통해 시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56 분 분량) 아직 접해보지 못한 미술학도들은 꼭! 열어 보세요 ^^* http://www.gomtv.com/view.gom?contentsid=14118022&auto=1  지난 2월 시청하며 들었던 생각   "보이지 않는 손"  그놈의 실체가 많이도 궁금했었던 1인 대학에서,채색화를 배우고 있는  예비작가들에게 물어 확인해 보아도 뻔

한  그림을 거짓이 진실로 포장되는 일들이 다시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제 그 근거들을  들추어 보겠습니다! 참고 (위에 소개한 sbs 스페셜  화면 캡쳐사진) *참고로 위작시비가 제기되어 온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미인도는 편의상  이하 "문제작"이라 표기하겠습니다.

 가) 1981년 장미와 여인 화관                                                   나)  1977 미인도 화관 (문제작)다) 1974년 바리의 처녀                                                         라) 1974년 고 (孤)의 화관 참고로,  다), 의 그림은 바로 아래 그림의 부분으로 진한채색이 아닌  엷은 채색작품이며 아래 좌측            나), 는 위작시비의 그  문제작 아래 우측의 화관부분으로  아래 좌.우 그림은 머리에 쓴 화관이 거의 흡사하다(두작품 모두 좌측 변각에 희미하게 표현된 하얀 꽃도 비슷함)더불어 아라비아 숫자도 비교해 보시길 1974 와 1977   그럼, 제작연도의 글씨들과 경자(鏡子)라 쓴 서명을 살펴 보시죠 먼저, 1991 년 천경자 선생이 밝힌 아라비아 숫자 연도를 쓴 적이 없다고  한부분은  비슷한 구도로 그시기에 그려진 그림에국한된 표현이었다고 짐작이 되는바, 사실확인코자 화집들과 인터넷에 상에 올려진 선생의 작품들을 분석확인해 보니 1977년도에 그려진 여인상은 모두 한자 연도로 쓰여졌고, 나비와 꽃을 그린  아래 작품에만 1977 이라 서명됨 (1977 년작 나비와 꽃)                                                                                                              "문제작"  위의 사진의 좌측 두장은 위의 "나비와 꽃" 그림 부분이며    우측 두장은 "문제작" 부분사진으로 각 한장은 채도를 낮춘 사진임아라비아 숫자들을 비교해 보시고, 무엇보다 이름자의 필획이 미숙하여 그려 쓴 듯 보인다.

(특히, 아들자 "子"字)  다음은  코와 입술 부분으로  좌측 첫번째가 문제작으로 코끝은 물론 코의 날개(비익) 부분이 때낀듯 어둡게 표현되어 있고무엇보다 위아래 입술의 중앙라인의 선과 입술라인이 두리뭉실 흐리게 표현되어 있다.

    故 천경자 선생의 작품들 속에는  인체의 해부학적 골격과 근육들이 숨어있으며, 수 많은 드로잉 작업에서 습득된동양화의 필선들이  감춰진 듯 살아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아래 1981년작  "장미와 여인"을  통해 눈을 지그시 감고 살펴보면,..   머리의 웨이브나,  화관의 꽃잎 테두리등 자연스러운 선들이 입체감을 살려주고 있으며, 해부학적 골격위로 근육을 붙여 가듯,  근육과 골격의 방향대로 겹겹이 켜를 이루며 붓질이 되어있다.

  좌측이 "문제작"  우측은 "장미와여인" 으로 두 작품 모두  채도만 낮춘 사진이다.

 진위여부를 떠나  좌측은 누가 보아도 미완성된 그림으로 보여 질 것이다.

  앞서 밝혀 두었듯 목의 흉쇄유돌근과 여인의 매력 포인트 쇄골은 물론눈주변의 안륜근, 입 주변을 감싸고 있는 구륜근등  해부학적 지식이 없는 이가 그린 그림이다.

* 반 고흐처럼 좌측 귀는 잘라 버린걸까? 머리는 어디 싸구려 미용실에서 했는지 웨이브는 다 풀려있고,  좌우 눈꼬리 옆트임과  하악각(양악 수술?)도잘 못 나온 것 같다

ㅎ 천에 하 나,  만에 하나,  저 "문제작"이  또 다시 "보이지 않는 손"의 압력으로  진작(眞作)이라  판정된다해도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려서는 안 될 일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 하지만,  마네킹같은  성형미인이 모셔질?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거짓이 세상을 돌아 다녔으니,..이젠 진실이 신발을 신고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 숨 죽이며 침묵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예술인들이여  깨어나라

!!  결코 왜곡되면 안될 진실들을 위하여 !!  이상으로 또 하나의  긴 포스팅을 사려가며   "짝퉁을 가려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명품을 자주 접해보며,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안목을 여는 것 입니다.

" 이 여름이 가기전 그 명품들을 만나러 길을 나서볼까 합니다!(故)천경자 선생의  1 주기 추모전 (서울 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2층) 6.14

8.7일까지1998년 작가가 시에 기증한 작품 93점과,  아래 개인 소장품도 만나 볼 수 있는기회 (1989' 막은내리고) 8억6천만원에 거래 개인소장(1978' 초원 2)2009년 K옥션을 통해 거래된 '초원Ⅱ'(1978, 105.5×130㎝)로 12억원에 거래된 개인소장품     참고문헌  이주헌: 내마음속의 그림 학고재 1997千鏡子: 그 생애 아름다운 찬가』, 2007 천경자의 혼, 서울시립미술관, 2002 천경자, 꿈과 情恨의 세계, 호암미술관, 1995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자유문학사 1984서성록: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 1995고흥군 문예지,,한겨레신문,sbs 스페셜.                                                        현이의 다락방에서    "다 사랑" _()_ 천경자 선생의 또 다른 위작 ( 뉴델리 와 기행 화첩, 그리고 "위작을 진품으로 둔갑?시키는 방법 등) 바로가기 => http://m.blog.naver.com/kuku_nine/220770160426   천 화백의 경매 최고가는 2009년 9월 거래되었던 1978년 작품 '초원 II'입니다.

당시 경매가는 12억이었는데요. 이번에 '정원(園)'이 낙찰되면 최고가를 경신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드디어 천경자 작품 최고가를 깨뜨렸습니다.

작품 가격은 무려 17억입니다.

^.^천경자는 1962년 옥인동에 정착하여 비교적 안정되고 행복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번 출품작 '정원(園)'의 화면 속 여인들은 꽃에 둘러쌓인 정원을 배경으로 식탁에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성이지만 마치 유화를 그리듯이 끊임없는 붓의 중첩에 의해서 은은하게 비쳐오르는 중간색의 미묘한 색감을 이용해 모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또한 여러색으로 구획된 부분이 한 화면에 드러나게 함으로써 구체적 인상이 있는 현실 공간과 환상의 무리가 있는 환상 공간이 함께 어울리는 독특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뛰어난 색채감각과 파스텔톤이 연상시키는 행복감은 이 작품을 단연 돋보이게 하며 작가의 1960년대 작품 중 수작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 설명 출처 : K옥션][ 천경자, 1962년.  《 정원 (園) 》  종이에 채색, 130 × 162 cm. <출처 : K-Auction> ]⊙ KRW 1,700,000,000  |  K옥션 2016년 3월    천경자의 독백입니다.

"한 인간의 인생과 예술은 情과 美, 無慾의 세 가지 신의 가호가 있어야 향기로운 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인 듯이 굳게 믿고 살아 왔다.

어쨌든 간에 이 三神님들이 뿌려주시는 빛을 받은 사람은 축복받은 예술가라고 믿고 싶다.

"'전생은 황후, 현생은 가난뱅이 화가'라고 했던 천경자 화백의 또 다른 작품들입니다.

[ 천경자, 1982년.  《 여인 》  종이에 채색, 47 x 34.7 cm. <출처 : Seoul Auction> ]⊙ KRW 780,000,000  |  서울옥션  2016년 3월   위의 작품은 2008년 서울옥션에서 5억원에 팔렸던 작품이군요.[ 천경자, 1975년.  《 여인 》  종이에 채색, 32 × 25 cm. <출처 : K-Auction> ]⊙ KRW 350,000,000

500,000,000  |  K옥션 2016년 3월[ 천경자.  《 여인 》  종이에 채색, 25.6 x 18.1 cm. <출처 : Seoul Auction> ]⊙ KRW 130,000,000

200,000,000  |  서울옥션  2016년 3월[ 천경자, 1979년.  《 아그라의 무희 》  종이에 채색, 32 × 24 cm. <출처 : K-Auction> ]⊙ KRW 120,000,000

180,000,000  |  K옥션 2016년 3월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는 부산의 한 다방에서 수많은 독사들을 그린 작품 <생태>를 출품하여 화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휴전 이후에는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며 4명의 자식들을 부양하다 수화(樹話) 김환기(1913

1974)의 추천을 받고 상경하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의 교수가 되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2. 또한 여러 잡지의 표지화를 그렸고, 국전의 추천작가/심사위원직 등을 역임하였으며, 일본가 한국을 오가며 여러 차례 개인전도 갖는 등 작품활동 역시 활발히 하였다.

그리고 1969년부터는 유럽, 타히티,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고 그곳의 이국적인 풍물을 작품 속에 담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화재를 불러일으켰고, 여행기 역시 책으로 출간하여 더더욱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91년에는 희대의 위작 사건인 '미인도 위작 사건'에 휘말려 일시적으로 절필을 선언하는 아픔도 겪었다3. 1995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최초로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채색화와 드로잉 93점, 그리고 저작권을 기증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2003년 뇌출혈로 병상에 눕게 된 뒤 외부와 연락을 끊고 칩거에 들어갔으며, 2015년 8월 사망하였음이 유족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초혼(招魂)>은 천경자의 독특한 화풍이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1960년대에 제작된 작품으로, <바다의 찬가>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 천경자의 작품세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대, 그것은 기존의 사실적인 묘사를 버리고 초현실적이고 설화적인 분위기의 소재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환상적인 분위기를 구현해냄과 동시에 물감을 짙은 농도로 수차례 덧칠하여 화려하고 강렬한 인상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천경자를 상징하는 환상적인 세계관이 드디어 완성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이라 하겠다.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은 어느 바다이다.

천경자의 고향인 고흥군은 지리적으로 바닷가와 인접한 곳인대,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작가에게 바다는 익숙함과 동시에 애착이 큰 장소였을 것이다4. 그래서 화면에는 바다의 짙은 푸른색이 하늘까지 가득 채우고 있다.

 제목인 <초혼(招魂)>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을 뜻하는 단어인대, 이로 그림속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나룻배 위에 타고 있는 네 사람들은 죽은 이의 혼을 부르기 위해 바다로 나왔을 것이다.

왼쪽 상단으로 솟아오르고 있는 가면을 쓴 형상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는 그 영혼인 것처럼 보이며, 비록 죽었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 것이 기쁜 듯, 온 몸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고 그 주위에는 꽃잎도 흩날리고 있다.

또 아래에는 거대한 물고기도 보이는대, 이는 얼핏 보기엔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어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찰의 목어를 보는 듯 해학적이기도 하다.

마치 거센 파도를 일으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만, 수많은 물고기들을 인간에게 배푸는 바다의 두 가지 모습을 동물로 구현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도상들을 통해 종합적으로 유추해 본다면, 이 작품은 한국의 샤머니즘과 무속 신앙을 토대로 작가만의 주관적인 환상적 세계관을 더한 것이라 하겠다.

도판을 제공해주신 서울시립미술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명은 천옥자(千玉子).한국의 여류 채색화가인 이숙자(1942

), 이화자(1943

) 등도 그녀의 제자이다.

다만 대중들에게는 절필한 뒤 바로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대, 사실은 절필 선언을 하고 얼마 뒤 재기하여 다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작품 외에도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여럿 있다.

1967년 국전에 출품한 <만선>, 1968년 국전에 출품한 <수향의 노래>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어렸을 적에는 연극배우를 지망했지만 이후 미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1943년 <조부>, 1944년 <노부>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이어 입선하여 화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는 부산의 한 다방에서 수많은 독사들을 그린 작품 <생태>를 출품하여 화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휴전 이후에는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며 4명의 자식들을 부양하다 수화(樹話) 김환기(1913

1974)의 추천을 받고 상경하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의 교수가 되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2. 또한 여러 잡지의 표지화를 그렸고, 국전의 추천작가/심사위원직 등을 역임하였으며, 일본가 한국을 오가며 여러 차례 개인전도 갖는 등 작품활동 역시 활발히 하였다.

그리고 1969년부터는 유럽, 타히티,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고 그곳의 이국적인 풍물을 작품 속에 담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화재를 불러일으켰고, 여행기 역시 책으로 출간하여 더더욱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91년에는 희대의 위작 사건인 '미인도 위작 사건'에 휘말려 일시적으로 절필을 선언하는 아픔도 겪었다3. 1995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최초로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채색화와 드로잉 93점, 그리고 저작권을 기증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2003년 뇌출혈로 병상에 눕게 된 뒤 외부와 연락을 끊고 칩거에 들어갔으며, 2015년 8월 사망하였음이 유족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환상여행>은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천경자의 회고전에 출품된 작품으로4, 비록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할 때까지 완성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최만년에 천경자의 작품세계가 다다른 곳이 무엇이였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100호 크기의 대작이다5. 1980년대에 들어서부터 천경자의 작품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이전까지의 달콤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어둡고 씁쓸한 분위기가 강조되었는대, 이는 작가가 점차 나이가 들어가며 자식들도 성장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 점점 외로워 진 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1991년에 터진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인하여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일단 제목은 <환상여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림 속 풍경은 여행지의 발랄한 분위기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피안(彼岸)이나 지옥에 온 것만 같은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하단에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나름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전혀 생기가 없고, 맨 왼쪽에 위치한 여인은 아예 웅크린 채 절망하고 있으며, 여인들과 함께 있는 강아지 3마리 조차도 전혀 생기가 없이 쭈그리고 있을 뿐이고, 한켠에 놓인 꽃다발 역시 원래의 빛을 잃은 채 말라 있다.

멀리 보이는 강물 위에는 사람들이 쪽배를 타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 조차도 살아있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죽은 자의 혼을 저승으로 이끄는 뱃사공들처럼 보인다.

 어쩌면 하단에 그려진 인물들은 죽은 뒤 저승에 묶여 있는 자들의 혼일지도 모르는 일으로, 작가는 생전 '앞으로의 그림은 저승과 같은 세계를 그린 그림이 될 것 같아요6'라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또 작품의 이곳저곳을 보면 지워지거나 추가적으로 덧칠되어 수정된 부분을 여럿 확인할 수 있는대, 이렇게 작품을 계속해서 수정해 나간 흔적은 천경자의 작품 속에서 빈번하게 확인되는 것으로,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면서 철저히 완벽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7.도판을 제공해주신 서울시립미술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본명은 천옥자(千玉子).한국의 여류 채색화가인 이숙자(1942

), 이화자(1943

) 등도 그녀의 제자이다.

다만 대중들에게는 절필한 뒤 바로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대, 사실은 절필 선언을 하고 얼마 뒤 재기하여 다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완성 상태였지만 큐레이터의 권유로 출품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경자는 100호 이상의 대작을 몇 점 남기지 않았다.

출저: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실제로 천경자는 완성하여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이라 하더라도 여러 차례 고치곤 했다.

이는 당시 촬영되었던 사진과 현재 작품의 모습과 비교해보는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안타깝게도 비교적 최근인 2015년 8월 6일에미국에 자택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당시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천경자화백의 마음고생이 심할때여서모두가 더욱 안타까워했죠(*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따 다시 얘기해보도록 해요!)천경자 <생태>포스팅의 제목에 멕시코의 국보급 화가 '프리다칼로' 와'천경자'를 함께 언급했죠?두 사람의 삶은 묘하게 닮아있는데요,특히 삶의 굴곡이 남들보다 대단히 깊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징그러운 뱀이라도 무더기로 그리지 않고서는목숨을 이을 수 없었어요 천경자화백은 위와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뱀 무더기를 저렇게 그림으로 그리며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해요.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그녀의 인생에 있었던 수많은 굴곡.어린나이에 한 결혼,그리고 폭력을 일삼던 남편과의 이혼,사랑하던 여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유부남과의 연애,마지막에는 미인도위작 사건까지.그녀가 그림을 붙들고 놓지않았던 이유는,'그림이라도 그리지 않으면 죽을것같아서' 였습니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했던말이 생각나네요.'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천경자 <팔도>색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그림이죠?천경자화백의 그림은,처음 세상에 나올 당시왜색이 짙다고 하여많은 괄시를 받았다고 해요.천경자 화백은 예술계에서 외톨이가 되기도 했었지요.천경자 <황금의 비>그렇지만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며결국은한국 미술계에 가장 굵은 한 획을 그은화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한국 미술계의 거장이었던 그녀가갑자기 미국으로 칩거해 생을 마감한데에는'미인도 위작논란'이 있었지요.그 얘기를 좀 해볼까요?이것이 문제가 된 천경자의 <미인도>입니다.

위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해오고 있던 작품인데요,천경자 화백은 미술관포스터에 나와있는 이 그림을 보고는"이 그림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은,그림의 제작연도와 소장경위등을 밝히며"이것은 틀림없는 천경자의 그림이다"라고 맞섰지요.몇년후에 고서화를 위작해 판매하던 권모씨가본인이 이 미인도를 조작했다고 말하며다시한번 미인도 위작문제가 재 점화 되었습니다.

이에,국립현대미술관은 국과수 등에 의뢰하여이 작품이 진품인 증거를 다시한번 제출하였고,한국화랑협회에서는 이를 인정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이같은 일에"자기 자식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있느냐" 며대단히 반발했지만,한국미술계에서는 그녀를'자기 작품도 몰라보는 화가' 취급을 했다고 해요.이러한 미술계의 태도에 충격을 받고실망을 금치못한 천경자는"이런 한국에 있을 의미를 모르겠다" 며미국으로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천경자 <그라나다의 여도서관장>천경자화백은 죽기 전 본인의 그림을모두 박물관에 기증했는데요,천경자화백 사후, 그녀의 큰딸이관리소홀을 이유로 반환해줄것을 요청해서또 한번 이슈가 되었습니다.

천경자 <황혼의 통곡>이 사건은,우리나라 미술사에 계속 남겨진 미스터리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천경자,그녀의 인생이 참 모질죠?그렇지만 그 아픔속에서도저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니정말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오는 8월 7일까지 천경자화백 1주기 추모전이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기증한 모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많은 분들이 가서 관람하시면참 좋을것 같네요!오늘 포스팅도 즐거우셨나요?저는 다음번에 더 즐거운 포스팅으로 돌아올게요!다들 더위조심! 장마조심!즐거운 하루 보내세요!10                                  <미인도> 진위 논쟁의 시발점은 2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를 기획했다.

이때 10여 년간 미술관 수장고에 있던 <미인도>가 서울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 전시됐다.

<미인도>가 처음 대중에 공개된 것이다.

당시 언론 기사에 따르면 <미인도>는 1979년 천 화백이 오모씨에게 줬고, 오씨가 다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준 걸 정부가 압류해 문화공보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됐다.

천 화백은 당시 어떤 그림인가를 오씨에게 준 건 맞지만 <미인도>는 아니라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인도>가 맞다”고 했다.

91년 전시된 미인도는 포스터로도 제작돼 일반인에게 판매됐다.

총 900장을 인쇄해 일부는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5만원에 판매했다.

이때 일이 터졌다.

한 사우나에서 액자에 걸린 미인도 포스터를 본 천 화백의 지인이 천 화백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천 화백은 인쇄물을 보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미술관에 전했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에 화랑협회 감정위원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결론은 ‘진품’이라는 거였다.

화풍과 천 화백 작품을 주로 표구한 동산방화랑의 표구가 장부에 기록돼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천 화백은 그해 4월 절필을 선언하며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정신적 고초를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천 화백은 98년 자신의 주요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큰딸 이혜선 씨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천 화백은 2003년 병환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91년 사건 이후 <미인도>는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됐고 위작 논란도 잊혀지는 듯했다.

잠복했던 논란은 99년 서화 위조범 권춘식(69) 씨를 검찰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다시 떠올랐다.

권씨가 “<미인도>는 내가 그렸다”고 주장한 것이다.

미술계에서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다가 국가에 환수된 <미인도>를 국립현대미술관이 인수한 건 80년 5월인데 권씨가 그렸다고 주장한 시점이 84년이어서 권씨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보았다.

검찰은 공소 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며 수사를 접었다.

[천경자] 대체 무엇때문에.


천 화백 사망과 함께 다시 살아난 논란이렇게 또 16년이 흐른 지난해 10월, 천 화백이 두 달 전 타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시 <미인도> 위작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천 화백의 삶을 조명하면서 언론에서 이 작품 위작 논란까지 끄집어냈다.

  [출처: ] [심층취재] 법정으로 간 천경자 <미인도> 위작논쟁 【SBS 스페셜】 : ‘천경자 미인도 스캔들’ - 소문과  거짓말  1991년 4월, 대한민국 미술계가 당대 최고의 여류 화가 천경자와 국립현대미술관의 날 선 대립으로 발칵 뒤집혔다!  사건의 주인공은 <미인도>라는 한 점의 그림!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인도>를 진품으로 결론 내렸으나, 생전 천 화백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고 2015년  10월 하순 천경자(1924

2015) 화백이 두 달 전인 8월 6일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사건 발생 후 25년, 천 화백의 죽음으로 다시금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미인도> 위작 사건! SBS 스페셜이 25년 만에 입을 연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거짓과 소문 속에 감춰진 <미인도>의 진실을 추적한다.

▣ 1991년 <미인도>감정단은 만장일치로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알려져 왔는데   당시 <미인도>가 위작이라는 의견을 냈다는 화랑대표(공창호씨)가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장하는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거짓 근거와 이에 대한 반박 증언들첫번째  거짓 근거는 천경자화백의 화집(금성출판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 천경자화백의 사망소식과 함께 <미인도>에 대한 의혹들이 수면으로 떠오르자 국회에서도 재감정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국립현대미술관은 최근 한 국회의원실에 보낸 답변서에 <미인도>를 진품으로보는 근거들이 적혀 있는데 그중 하나가 1990년 발행된 천경자화백의 화집(금성출판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위장논란이 터지기 1년전에 발행된 이 책에 <나비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미인도>가 실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책이 나올때 이미 화가가 <미인도>를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한것이 아니겠냐는 주장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최근 이석현 국회의원실에 보낸 답변서에 쓰여있는 <미인도>를 진품으로보는 근거☞유족측 반박내용유족들은 <미인도>가 실린 선집이 발간될때 천화백이  <미인도>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주장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책에 대해서는 저희도 존재를 알고 있었어요 그때.  그런데 그것이 제일뒤에 흑백으로 조그맣게 실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미인도 사진의)존재를 몰랐어요. 거기 그런 사진이 실려있다는  자체를"다른 작품과는 달리 제일 뒤쪽 그것도 서편끝에 삽입된 작은 흑백사진이라 보지못했다는 겁니다.

이 책의 편집자도 <미인도>를 (천화백이)보여주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 <나비와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인건 누구입니까?두번째 거짓 근거는 <미인도>"액자" 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출신 한 미술평론가는 이 내용을 기사로도 썼습니다.

 천화백 작품을 도맡아 표구하던 D화랑에 <미인도>에 대한 장부가 있고  <미인도>액자속에서 천경자의 고유번호(표구번호)까지 확인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유족측이 반박자료로 처음 공개한 영상에는..   미인도를 표구했다는 D화랑대표는 "천경자화백의 고유번호 같은 것은 없다"고 잘라말합니다.

  세번째 : 그런데 당시 현대미술관이 위작이 아니라며 강조한 거짓 증언이 하나 있었습니다.

  미인도는 분명 스승님의 작품이라고 증언한 제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경성 1991년 당시 현대미술관관장# 천 화백의 제자 25년 만에 입을 열다!천 화백의 제자인 A 씨가 자신이 미인도를 진품으로 감정했다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장에 대해 25년 만에 직접 입을 열었다.

그동안 알려진 것과 완전히 다른 증언을 한 A 씨. 그녀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들은 말로 인해 지금껏 자신도 미인도가 진품이었다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과연 A 씨는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에게 어떤 말을 들은 것일까?  그녀는 25년만의 증언에서..그러자 가만히 듣고있던 관장..▣국립현대미술관의 또 하나의 조작그러나 진실은...1991년4월2일 천경자화백의 집을 방문해 만나주지 않는 천화백에게  편지로 스스로 위작이라고 밝힌 당시 미술관 학예관B씨# 미리 맞춰진 퍼즐(?)천경자 화백의 지인이자 당시 언론사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그 무렵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미인도를) 진짜로 만들지 못하면 7명의 목을 치겠다고 했어요”<미인도>의 감정은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퍼즐이었던 것일까. 사건발생의 시작은....위작자 권춘식의 등장달력과 화집에 실린 천경자화백의  작품 서너점을 재조합해 2

3일만에 <미인도>를 완성했다고故 천경자 화백 장녀, 천 화백 작품·개인소장품 4천여점 기증 [울산매일 20151214][단독] “천경자, 위작 주장 번복” 허위 보고한 국립현대미술관 [ 2016.3.29]"미인도 위작 맞다, 화랑협 임원 회유로 거짓 진술"- 위작범 권춘식 [중앙 2016.4.28][단독] 천경자 “미인도 눈에 힘 없고 코도 벙벙” [ 20160526] < 2016.07.22> 지난 10년 동안 근황은 물론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가신지 두 달이나 지나서 별세 소식이 알려졌다는 사실도 그렇고 미인도 위작 논란에 절필 선언까지 모든 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주무시듯 평안하게 눈을 감으셨다고 하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ㅠ  ???   ?천경자 화백은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화가입니다.

 미인도 위작 사건은 화가 스스로가 자신이 그린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미술관과 정부기관에서 진품이 맞다고 주장한, 말하는 저도 참 어이가 없는 사건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으면 이 사건으로 천경자 화백은 절필을 선언했고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보는 일은 절대 없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지요. ??사건의 발단은 1979년 10·26 사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미술품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바로 문제의 미인도가 있었습니다.

작품은 국가로 환수됐고 절차에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됐습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91년 국립 미술관이 미인도를 공개 전시했는데, 작품을 본 천 화백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미술관은 진위 감정을 의뢰했고 감정단은 3차에 걸린 감정 끝에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끝까지 자신이 그린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이 사건은 법정까지 가기에 이릅니다.

당시 법원은 '판단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화가가 아니라고 하는데 주위에서 진품을 확정 지어 버리는, 어때요? 희대의 사건 아닌가요? ㅎㅎ ?????논란이 된 미인도 ?????분노한 천 화백은 결국 절필을 선언했고 자신의 그림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질 바란다는 말과 함께 작품 98점을 서울 시립미술관에 기증한 후 한국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까지 사퇴하면서 말이지요.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거 아니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등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 재밌는 것은 그로부터 8년 후인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자신이 논란의 미인도를 위작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에 국립 미술관은 국립 과학 연구소, 한국 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또다시 진품 결론이 나옵니다.

 화가는 내가 안 그렸다고 주장하고 위작범이 내가 그렸다고 주장하는 와중에 정부 기관에서만 진품이라고 우기는 희한하고 어이없는 사건. 하지만 이에 대한 재수사는 없었으며 수많은 의혹을 간직한 채 이 그림은 여전히 진품으로 소장되고 있습니다.

그 후 천 화백에 대한 소식은 끊겼고 올 8월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 개인적으로 이 사건은 국내 미술 시장에 위작이 범람할 가능성을 열어준 아주 위험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계의 높으신 분들의 주장이라면, 비록 원작가가 반대 의견을 낸다고 해도 위작도 진품이 되고 진품도 위작이 될 수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죠. 모르긴해도 우리나라 미술관들 소장품에 위작으로 추정되는  작품들이 꽤 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런 작품들은 대개 공개를 잘 안하고 수장고에 처박아 두지요. 미술관 측은 미인도 역시 공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 ??? ? 강렬한 채색화로 꽃과 여성을 그리며 한국 화단에 큰 자취를 남긴 천경자 화백. 별세 소식을 듣고 난 후 가장 먼저 그녀의 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몽환적이로 애틋한 눈빛의 여인이 떠올랐습니다.

작품 속 여인은 바로 화가의 자화상이었지요. 서울시립미술관에 갈 때마다 그녀의 작품을 일부러 찾아 보고 왔었는데.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망 기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작품 금액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천박함은 잔인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 종이에 채색 / 43.5x36cm / 1977 /  ??천 화백은 당대를 풍미했던 여류 화가였지만 개인사는 부침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혼도 했고 이래저래 맘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래서 혹자는 그녀의 삶을 멕시코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프리다 칼로처럼 그녀도 정신적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한국 여성 특유의 정(情)과 한(恨)의 정서를 작품에 꾹꾹 담았습니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화려한 꽃은 '꿈'이고 뱀과 여성은 자신의 운명적 현실에서 오는 짙은 고독을 담고 있습니다.

특유의 진한 색채와 강렬한 필력은 마음을 울리기 충분했지요. 그래서인지 천 화백의 작품은 유독 여성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평생을 고독과 한을 가슴에 품고 사랑을 갈망했던 여인, 저세상에서는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편안히 지내시길 바래봅니다.

?? ??여인의 시Ⅱ / 종이에 채색 / 60x44.5cm / 1985 /  ?생태 / 종이에 채색 / 51.5x87cm / 1951 /  ? ?황혼의 통곡 / 종이에 채색 / 96x129cm / 1995 / ?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 / 종이에 채색 / 40x31.5cm / 1989 /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안타깝게도 비교적 최근인 2015년 8월 6일에미국에 자택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당시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천경자화백의 마음고생이 심할때여서모두가 더욱 안타까워했죠(*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따 다시 얘기해보도록 해요!)천경자 <생태>포스팅의 제목에 멕시코의 국보급 화가 '프리다칼로' 와'천경자'를 함께 언급했죠?두 사람의 삶은 묘하게 닮아있는데요,특히 삶의 굴곡이 남들보다 대단히 깊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징그러운 뱀이라도 무더기로 그리지 않고서는목숨을 이을 수 없었어요 천경자화백은 위와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뱀 무더기를 저렇게 그림으로 그리며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해요.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그녀의 인생에 있었던 수많은 굴곡.어린나이에 한 결혼,그리고 폭력을 일삼던 남편과의 이혼,사랑하던 여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유부남과의 연애,마지막에는 미인도위작 사건까지.그녀가 그림을 붙들고 놓지않았던 이유는,'그림이라도 그리지 않으면 죽을것같아서' 였습니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했던말이 생각나네요.'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천경자 <팔도>색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그림이죠?천경자화백의 그림은,처음 세상에 나올 당시왜색이 짙다고 하여많은 괄시를 받았다고 해요.천경자 화백은 예술계에서 외톨이가 되기도 했었지요.천경자 <황금의 비>그렇지만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며결국은한국 미술계에 가장 굵은 한 획을 그은화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한국 미술계의 거장이었던 그녀가갑자기 미국으로 칩거해 생을 마감한데에는'미인도 위작논란'이 있었지요.그 얘기를 좀 해볼까요?이것이 문제가 된 천경자의 <미인도>입니다.

위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해오고 있던 작품인데요,천경자 화백은 미술관포스터에 나와있는 이 그림을 보고는"이 그림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은,그림의 제작연도와 소장경위등을 밝히며"이것은 틀림없는 천경자의 그림이다"라고 맞섰지요.몇년후에 고서화를 위작해 판매하던 권모씨가본인이 이 미인도를 조작했다고 말하며다시한번 미인도 위작문제가 재 점화 되었습니다.

이에,국립현대미술관은 국과수 등에 의뢰하여이 작품이 진품인 증거를 다시한번 제출하였고,한국화랑협회에서는 이를 인정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이같은 일에"자기 자식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있느냐" 며대단히 반발했지만,한국미술계에서는 그녀를'자기 작품도 몰라보는 화가' 취급을 했다고 해요.이러한 미술계의 태도에 충격을 받고실망을 금치못한 천경자는"이런 한국에 있을 의미를 모르겠다" 며미국으로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천경자 <그라나다의 여도서관장>천경자화백은 죽기 전 본인의 그림을모두 박물관에 기증했는데요,천경자화백 사후, 그녀의 큰딸이관리소홀을 이유로 반환해줄것을 요청해서또 한번 이슈가 되었습니다.

천경자 <황혼의 통곡>이 사건은,우리나라 미술사에 계속 남겨진 미스터리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천경자,그녀의 인생이 참 모질죠?그렇지만 그 아픔속에서도저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니정말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오는 8월 7일까지 천경자화백 1주기 추모전이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기증한 모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많은 분들이 가서 관람하시면참 좋을것 같네요!오늘 포스팅도 즐거우셨나요?저는 다음번에 더 즐거운 포스팅으로 돌아올게요!다들 더위조심! 장마조심!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부친 천성욱은 한때 상여 (喪輿 )가게와 단청을 했으며, 이후  처가의 도움으로 양말공장을 운영하였으나, 술과 도박등으로   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어린 천경자는 어머니와 더불어 외가살이를 시작하게 됨 ?외동딸을(어머니 박운아)  남장을 시켜 서당에까지 보낼 정도로 깨어 있던 외할아버지는 그 딸이 낳은 큰 손녀를 금지옥엽으로 예뻐하며 옥자(玉子) 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손녀는 밤마다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심청전' '흥부전' '수호지' '춘향전'을 듣다 잠이 들었고 천자문과 창까지 배우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보통학교 1학년 때 일본인 담임 선생이 그림에 소질을 발견해냈고 대청마루 흰 회벽에 (전근 간 여선생을 그리워하며) 그린 여인상이 외할머니 눈에 띄어 매를 맞기도 한다.

?(전남 고흥? 팔영산 자락)?어린 옥자는 아버지 천성욱을 원망하며 성장했지만, 그의 타고난 색채감과과 끼는 전통안료를 다루던아버지에게 온 것이다.

?이후,?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에 다니며, 그 끼를 키우게 되는데,..." 물리시험 시간에 출제된 "물 펌프의 원리를 설명"하라는 문제의 답안에  "펌프 물 깃는 여인을 그려 제출했었다"는 일화 도 있으니,..^^*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시절 혼담이 오가던 무렵??"나는 아버지로부터 유학 건으로 꾸중을 듣다가 다듬잇돌 위에 앉아 '히히 하하하' 미친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마늘쪽처럼 세모진 눈을 하고 나를 슬프게 쏘아보셨고 미친 시늉을 하던 나는 정말로 울음이 터져 큰 소리로 통곡해 버렸다.

어쨌든 그 슬픈 연극으로 나는 일본 동경여자 미술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결국 일본 유학을 적극 지지한 김임년 선생의 당부대로  1940년 17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도쿄 유학길에 오른다.

[천경자] 의 매력 포인트

?(스승? 김임년 선생 개인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천화백 (1992 년 )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하던 이 무렵 본명이던 옥자(玉子)를 버리고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인다.

도쿄에서는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일본화 고등과로 가서(우향 박래현과 동문수학) 모델을 보고 관찰해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게 되는데,..?그의 인물수업을 지도하던 "고바야가와 기요시 선생은 "조선 사람이 일본인을 그리려고 하면,제대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니, 조선 사람을 그려야 한다" 며 그 틀을 깨주었다 한다.

? [1942 년 작 조부(祖父)]?그리하여 일본 유학 중에 그린 작품  '조부(祖父)' 는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게되며?*당시 '조부'는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모델이 되어준 외할아버지의 초상화 일본 유학시절 그린 [외할아버지 지인의 초상화] 사진출처:최경필 의 "남도 야그" *20 살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구한말 어진화사 석지(石芝 蔡龍臣) 채용신의 작품을 마주한 듯  주인공 내면의 심상까지 담아낸  공필초상이다.

 [1943년 '노부(老婦) ]  이어 그 다음해인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졸업 작품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게되며,고흥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면서 하이힐에 양장을 차려입었던 천경자의 청년기는 그가 평생 간직했던 자부심의 바탕이 되었다.

? 결혼?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자신을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명문대생 이철식과 1944년 결혼을 하고 1945년 첫 딸 이혜선.,이후 둘째 이남훈을 낳았다.

??[전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앞줄 중앙이 천경자 화백,바로뒤 좌측이 동생 옥희"]?*우애가 깊었던 동생 "옥희"의 폐렴치료를 위해  모교에서 작품판매 개인전을 했었던 언니 ?1946년부터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지만, 학생운동을 해오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1947' 조락] [1950' 단장] *새색시 시절의 모습을 그린 화가 천경자의 자화상 6.25 전쟁 통에, 아끼던 동생 천옥희마저 폐병으로 숨진 후??[1952' 내가 죽은 뒤]?? 전남 모 신문 사회부 였던 두 번째 남편 김남중을 만난다.

남편 없이 두 아이를 기르던 천경자 화백은,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그에게 푹 빠지게 되는데,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고 ,..그러나, 그는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이 있었다.

또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 때문에 천경자는 그를 기다리면서도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이어간다.

?[1950' 생태 (生態)]?여동생마저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첫 남편과 이혼을 한후그려진 작품 .실제로 뱀을 커다란 유리상자에 넣어두고 관찰해 가며 완성한 작품으로 현실적인 비애와 고통들이 꿈틀거리 듯 화면가득  기운생동한 느낌들이 전해져 온다.

 * 최초 그려진 33 마리의 뱀은,  상단에 서로 뒤엉켜  사랑을 나누는 두 마리를 추가로 그려주며  완성되는데,.. 새롭게 시작된  35 세 뱀띠 남자와 사랑을 위한 작가의 염원이 담겨있다.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그림 '생태(生態)'는 천경자 화백의 작업을 다시금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 아래 개구리 그림도 이 무렵에 선지에 수묵담채로 그려진 작품인데,..?더러 위작인 짝퉁그림들이 경매 사이트에 나돌고 있으니 주의를 요하며,...아래 참고작 과 비교해 보시길 참고작> 더 보기 └ 접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 된 나는 끝없이 두 갈래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길을 아득히 바라보다가  그가 다가오는 소리에 가슴 설레고 형용할 수 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두 번째 사랑!?[1954년 목화밭에서]   천경자 화백은 자녀 2남 2녀를 낳았다.

첫 남편 이철식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김남중과 사이에 1남 1녀를 둔다.

  이 가운데 맏딸이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이혜선이다.

  2006년 갤러리현대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 "모기장 안의 쫑쫑이"에 등장하는 김종우는 천경자의 막내 아들  아이들에게는 남미짱(이혜선), 후닷닷(장남 이남훈), 미도파(둘째딸 김정희), 쫑쫑이(막내 김종우)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자식들을 모델로,  때로는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1954 년 홍익대학교 미대교수가 되었으며, 이후,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1954

1974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 ???[1955'정(靜)]1955년 이 작품 '정(靜)' 으로천경자 화백은 대한미술협회전에서 '대통령상' 을 수상하게되며,??[1960' 놀이][1961' 전설(傳說)]?[1962' 두 사람] [1962' 비 개인 뒤][1963' 원(園)130*120]위의 작품은 2007년 국내 경매에서 11억 5천만원에 낙찰금년 3월  경매에서 17 억에 낙찰? 1963 년 日 동경 서촌화랑에서 개인전 ?[1964'여인들] 1965년 동경 이도 화랑(?廊)에서 개인전?[1966' 숙(宿)]?1967 말레이시아 정부초청 초대전 출품?[1968' 청춘의 문(靑春의 門)] 이 작품은 영화 '청춘의 문' 에 등장하는 여배우의 초상을 그린 작품으로,마치 꿈 속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인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1968' 자살의 미(自殺의 美)]?1969 제10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출품 [1969' 자화상][1969'모래아 섬에서][1969' 타히티 소녀]  천경자 화백의 작품세계는?1942년부터 세계여행을 시작하는 1969년까지를 '전기', 1970년 서초동 시절부터 1990년대까지를 '후기' 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전기'(1942

1969년) 에는 주로 현실의 삶과 일상에서 느낀 체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등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보여 주고 있다.

 '후기' (1970

1990년)는 외부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꿈과 낭만을 실현하려는 시기로 볼 수 있는데,  특히 후기는 꽃과 여인을 소재로 환상을 표현하거나 해외 여행에서 느낀 이국적 정취를 통해 원시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고 있다.

 작가의 소장품  큰 키에 파격적인 색깔과 무늬의 옷, 위태로울 정도로 뾰족했던 하이힐, 머리를 둘러싸는 커다란 화관이나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선글라스, 가늘게 그린 눈썹과 붉게 칠한 입술, 담배를 문 모습으로 주변의 시선을 한몸에 받아오던 스타였다.

?? 반달형의 눈과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당대의 패션리더이기도 했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담긴 입담을 자랑한 그는 같은 시대를 살던 문인ㆍ화가들과도 진한 우정을 나눴다.

? 김환기, 박고석, 최순우, 김흥수, 유영국, 김현승, 고은 ,고바우 김성환등의 남성 예술인과 박경리, 한말숙, 전숙희 등 여성 문인들과 단짝이었다.

또 세대를 뛰어넘어  이덕화, 조용필 등 연예인들과 함께한 시간들도 사진으로 남아있다.

 소설가 박경리가 말하는 화가 천경자 오랜 지기인 화가 천경자를 '고약한 예술가'로 부른 시    '천경자를 노래함' 화가 천경자는가까이 갈 수도 없고멀리 갈 수도 없고매일 만나다시피했던 명동시절이나이십년 넘게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거리는 멀어지지도가까와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걸친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허기도 탐욕도 아닌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그의 언어를 시적이라한다면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들쑥날쑥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세월의 찬 바람을 더욱 배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시름은 담배에 있고용기있는 자유주의자정직한 생애?그러나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 '후기' (1970

1990년)와 1990 년 이후의 작품들은 차후 다시 시간을 내어 소개해 놓을 것을 약속드리며?

^^*  전시 및 초대전 * 55-1981 국전 추천, 초대작가 현대화랑 초대전 4회 * 1963 동경 서촌화랑에서 개인전 * 1965 동경 「이또」화랑에서 개인전 * 1967 말레시아 정부초청 초대전 출품 * 1969 제10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출품 * 1970 남태평양 풍물 시리이즈 스케치전 (신문회관화랑)  * 1973 천경자 화랑(현대화랑)   * 1974 아프리카 풍물 시리이즈 스케치전(현대화랑)   * 1977 한국현대동양화 유럽 巡廻展출전  * 1995 천경자 회고작품전 (호암갤러리) 당시 8 만 여명이 관람  * 2006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현대화랑)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던  천경자 화백?1955년의 '여인소묘'를 시작으로 단행본 15건과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 건 등으로 우리 일반 대중들과 함께해 왔다.

 저서?  1995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 1989 수필집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1981 수필집 <캔맥주 한 잔의 유희> | 1980 화문집 <꿈과 바람의 세계> | 1978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 1974 화문집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 1973수필 단행본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 1966 수필집 <언덕 위의 양옥집> | 1960 수필집 <유성이 가는 길> | 1955 수필집 <여인소묘>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했었던 글을 모아 1978년 초판본   2006년에 새로 편집돼 나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아래)    이상으로 천경자 화백의 삶과 작품 [1]을 사려가며바로 이어갈 다음 포스팅  "천경자 미인도에 감춰진 진실"에 앞서  끝으로 선생의 노년의 삶을  더듬어 보고  맺을까 합니다!   노년(老年)의 삶  천경자 화백의 노년에  찾아 온 큰 고비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이었다.

당시 68세였던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절필을 선언??[문제의 그 미인도]? 천 화백은 4개월 후 다시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72세 때인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가진 대규모 전시는 8만명이 모여 줄을 서서 볼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1998년 채색화와 스케치 등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뉴욕에 사는 장녀 이혜선과 살다가,...그곳에서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다.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2003년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까지, 뉴욕에서 드로잉과 미완성되었던 그림들을 작업하며       위작시비의 상처를 치유해? 가고 있었다 한다.

???2003 년 이후 장녀 이혜선은 어머니 천경자? 선생의 작품관리 권한을 대행하며 대리인으로서?어머니 작품들을 모실 미술관 건립에 열정을 가지고 물색하던중?2007년 3월 경기도 양주시와 협의.계약하며 (총 사업비 97 억) 대규모 미술관 건립이 추진된다.

?이와 더불어 ?2007 년  어머니의 고향 전남 고흥군과 협의.계약하고  드로잉 55점, 판화 11점 등 총 66점의 작품과작가의 소장품 일부를 기증 [천경자 전시관]이 개관된다.

 [고흥군에 전시된 선생의 드로잉作]   장녀 이혜선은 양주시 협약에 앞서 어머니 고향 고흥군에 미술관 건립제안을 했었으나 최초 군 예산부족으로 결렬된 후, 군에서 다시 요청해와 전시관이 마련 됨.  [고흥 천경자전시관. 일반 판매용 아트상품들]??이후, 전시장 여건과 (전시실조명 및 통풍,온.습도등) 수장고등 작품 보존,훼손 우려등의 이유로 ???개관후 ?4 년이 지난 2012 년에 모두 반환하고, 천경자 전시실은 아쉽게 문을 닫게된다.

??한편 양주시의 미술관 건립은  단체장교체 및 예산확보등으로 지연되다가  부지로 최종 선정된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  지하1층 지상2층 (연면적 2,900 제곱미터)로뒤늦게 2009 년 착공하게 되는데,..터파기에서 드러난 암반층과 연접해 있던, 권율장군 묘역(문화재 보호구역)관련 문제로착공후 얼마되지 않아 ? 전면 백지화 되었고, 그 대신  연접한 다른 부지에???2014년 양주시립 장욱진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지난해 가을 ?10월 22일 천경자 가족은 어머니가 지난 8월 6일 새벽에타계하셨다고 국내에 밝혀왔다 _()_??그후 장녀 이혜선은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작품들과  유품들을 기증하고 전시할 미술관을 물색해 오던중 ? 다시 인연이 닿은 곳은  피란시절  첫 전람회를 열며 작품 활동의 발판으로 삼았던 부산  어린 천경자에게 화가의 길을 가도록 격려하고 이끌어 주셨던 김임년 선생이 사셨던 곳이며, 그의 아들  윤광운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부산 부경대 ?지난해 12 월 ?10 일  부경대 총장과 천 화백의 작품 및 개인소장품 기증을 위한 협약을 맺고,그 다음날인 11일 ?회견을 열고 “어머니가 남긴 작품과 소장 중인 유품들( 드로잉과 미완성 작품 1000여 점을 비롯해 천 화백의 옷 컵 신발 안경 등 개인 소장품 3000여 점 등 모두 4000여 점)모두 부경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대학 측은 6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캠퍼스 내에 독립 건물 형태로 ‘천경자 기념미술관’을 짓기로 했으며,  기념관은 전시실, 영상 실, 수장고 등으로 구획하여 2020 년까지 완공하기로 협약하고,... (1986 년작 "막간") 당시 공개된 약속이행으로   금년, 4월26일 청운관 건물 1층 임시 전시실에서  고(故) 천경자 화백의 미완성 그림과 애장품등 *(부산에서 처음 공개되는 채색화 ‘막간’을 비롯해 꽃과 인물 등을 소재로 한 드로잉 등 모두 66점)이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최종 점검차 들린 장녀 이혜선의 지적처럼, 전시장 시설미비로 하루전에 전면 취소되었다'??이런 일련의 사안들과 더불어 고(故) 천경자 화백과 그의 두번째 남편인 고 김남중 전 전일그룹 회장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 김정희씨(63)는 지난 2월 부터,자신을 법적 자녀로 인정해달라는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  며칠전 6월10일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서울가정법원 가사3단독 김수정 판사는 정희씨와 동생 고 종우씨의 아들 등이 낸 친생자관계확인 소송에서 "정희씨 등과 천 화백에 사이에 친생자관계가 존재함을 확인한다"고 판결했다.

)??(1981년작 "장미와 여인")  *눈을 흐리게 뜨고 주시해 보시길 ^^? 또한,정희씨 측은 명백한 위작인 미인도를 계속해서 진품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명예훼손이자 저작권 침해라 판단하여 지난 4월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6명을 사자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혐의로 고소·고발하였고, ?     수사에 착수한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배용원 부장검사)는 지난 8일 그림을 감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 문제의 미인도를 제출받았으며,지난 8일에는 정희씨를 고소인 자격으로 불러 조사하였고, 현재  다각도로 조사 분석하며 수사가 진행중이다.

? 수사가 진행중인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해 두었 듯바로 이어지게 될 다음 포스팅은  "미인도 속에 감춰진 진실"들과  위작을 구분해내는안목과 방법을 다루어 갈 예정입니다.

    늦었지만,  永眠에 드신 故 천경자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드리며 _()_???"가장 나쁜 거짓말은 진실에 가까운 거짓말이다"? - 앙드레 지드-??                                                                                            현이의 다락방에서  "다 사랑"? ?   사진은 서울시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천경자 1주기 추모전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는 1998년 천경자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 93점 전체와 다른 작가들이 소장한 고(1974년), 막은내리고(1989년) 등 작품들이 전시됩니다.

오는 8월7일까지 서소문 본관 2층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전시회는 ‘인생’, ‘여행’, ‘환상’ 등 3개의 주제와 아카이브로 구성돼 천경자의 학생 시절 작품부터 이후 60여년간 작품 세계, 관련 기록물 등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기존에 천경자 상설전시실로 사용되던 공간은 아카아브 섹션으로 연출돼 어린시절부터 별세 전까지 천경자 화백의 사진과 수필집, 기고문, 기사, 삽화, 영상 등을 둘러볼 수 있도록 구성됩니다.

     그라나다 두자매. 사진: 서울시스카프를 쓴 엔자. 사진:서울시여인의시. 사진:서울시황혼의통곡.사진:서울시  백남준 타계 10주기를 맞아 열리는 ‘백남준 ∞ 플럭서스’ 추모전은 7월 31일까지 서소문 본관 3층에서 개최합니다.

    전시는 독일 쿤스트할레 미술관과 국내 소장가들로부터 대여한 소장품 200여점으로 구성됩니다.

백남준과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오노 요코 등 1960

1990년대 플럭서스 일원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과 대형 멀티 모니터 설치작품들이 한 자리에 선보입니다.

백남준과 플럭서스, 백남준이 미술계에 미친 영향력과 순환적인 연결고리를 주제로 총 4개의 섹션을 시작과 끝의 구분 없이 자유로운 관람할 수 있습니다.

    백남준,태내기 자서전, 1981,1932년 뉴욕타임즈에 드로잉 후 양장제본, 사진:서울시W3, 1994, 64대의 모니터, dimensions variable with specific installations. 사진:서울시이와함께 서울시립미술관은 백남준 작가 서거 10주기를 기념해 백남준이 1937년부터 1949년까지 12년간 성장기를 보낸 종로구 창신동 집터에 ‘백남준기념관’을 조성합니다.

기념관 건물은 음식점으로 쓰였던 총면적 93.9㎡(약 28평)의 단층 한옥을 리모델링해 올해 11월 개관할 예정입니다.

   백남준,보이스 복스, 1961-1986,설치,병품, 빈티지TV, 액자, 판화, 드로잉, 사진 등 , 서울시립미술관 소장백남준,세 대의 카메라 참여, 1969작품 2001 재설치,CCTV,RGB 프로젝터, CRT모니터,아베 변환기, 사진:서울시  관심있으신 이웃님들은 한번 돌아보세요

^^*     지도보기50m� NAVER Corp.??? /OpenStreet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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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VER Corp. /OpenStreetMap서울시립미술관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61 서울시립미술관전화상세보기지도보기.?"때로는 많은 말보다 한 장의 그림이 나를 위로합니다.

나를 위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 보세요."http://goo.gl/tAfOKQ????? ??? ??? ??? 04. ??? by ???????? 2? 14?, SBS ????'???? ??? ?? ??'? ???. ??? ?? ???,"?? ?? ?...m.post.naver.com?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는 부산의 한 다방에서 수많은 독사들을 그린 작품 <생태>를 출품하여 화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휴전 이후에는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며 4명의 자식들을 부양하다 수화(樹話) 김환기(1913

1974)의 추천을 받고 상경하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의 교수가 되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2. 또한 여러 잡지의 표지화를 그렸고, 국전의 추천작가/심사위원직 등을 역임하였으며, 일본가 한국을 오가며 여러 차례 개인전도 갖는 등 작품활동 역시 활발히 하였다.

그리고 1969년부터는 유럽, 타히티,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고 그곳의 이국적인 풍물을 작품 속에 담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화재를 불러일으켰고, 여행기 역시 책으로 출간하여 더더욱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91년에는 희대의 위작 사건인 '미인도 위작 사건'에 휘말려 일시적으로 절필을 선언하는 아픔도 겪었다3. 1995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최초로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채색화와 드로잉 93점, 그리고 저작권을 기증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2003년 뇌출혈로 병상에 눕게 된 뒤 외부와 연락을 끊고 칩거에 들어갔으며, 2015년 8월 사망하였음이 유족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초혼(招魂)>은 천경자의 독특한 화풍이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1960년대에 제작된 작품으로, <바다의 찬가>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 천경자의 작품세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대, 그것은 기존의 사실적인 묘사를 버리고 초현실적이고 설화적인 분위기의 소재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환상적인 분위기를 구현해냄과 동시에 물감을 짙은 농도로 수차례 덧칠하여 화려하고 강렬한 인상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천경자를 상징하는 환상적인 세계관이 드디어 완성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이라 하겠다.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은 어느 바다이다.

천경자의 고향인 고흥군은 지리적으로 바닷가와 인접한 곳인대,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작가에게 바다는 익숙함과 동시에 애착이 큰 장소였을 것이다4. 그래서 화면에는 바다의 짙은 푸른색이 하늘까지 가득 채우고 있다.

 제목인 <초혼(招魂)>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을 뜻하는 단어인대, 이로 그림속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나룻배 위에 타고 있는 네 사람들은 죽은 이의 혼을 부르기 위해 바다로 나왔을 것이다.

왼쪽 상단으로 솟아오르고 있는 가면을 쓴 형상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는 그 영혼인 것처럼 보이며, 비록 죽었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 것이 기쁜 듯, 온 몸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고 그 주위에는 꽃잎도 흩날리고 있다.

또 아래에는 거대한 물고기도 보이는대, 이는 얼핏 보기엔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어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찰의 목어를 보는 듯 해학적이기도 하다.

마치 거센 파도를 일으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만, 수많은 물고기들을 인간에게 배푸는 바다의 두 가지 모습을 동물로 구현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도상들을 통해 종합적으로 유추해 본다면, 이 작품은 한국의 샤머니즘과 무속 신앙을 토대로 작가만의 주관적인 환상적 세계관을 더한 것이라 하겠다.

도판을 제공해주신 서울시립미술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명은 천옥자(千玉子).한국의 여류 채색화가인 이숙자(1942

), 이화자(1943

) 등도 그녀의 제자이다.

다만 대중들에게는 절필한 뒤 바로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대, 사실은 절필 선언을 하고 얼마 뒤 재기하여 다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작품 외에도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여럿 있다.

1967년 국전에 출품한 <만선>, 1968년 국전에 출품한 <수향의 노래>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천 화백의 경매 최고가는 2009년 9월 거래되었던 1978년 작품 '초원 II'입니다.

당시 경매가는 12억이었는데요. 이번에 '정원(園)'이 낙찰되면 최고가를 경신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드디어 천경자 작품 최고가를 깨뜨렸습니다.

작품 가격은 무려 17억입니다.

^.^천경자는 1962년 옥인동에 정착하여 비교적 안정되고 행복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번 출품작 '정원(園)'의 화면 속 여인들은 꽃에 둘러쌓인 정원을 배경으로 식탁에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성이지만 마치 유화를 그리듯이 끊임없는 붓의 중첩에 의해서 은은하게 비쳐오르는 중간색의 미묘한 색감을 이용해 모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또한 여러색으로 구획된 부분이 한 화면에 드러나게 함으로써 구체적 인상이 있는 현실 공간과 환상의 무리가 있는 환상 공간이 함께 어울리는 독특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뛰어난 색채감각과 파스텔톤이 연상시키는 행복감은 이 작품을 단연 돋보이게 하며 작가의 1960년대 작품 중 수작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 설명 출처 : K옥션][ 천경자, 1962년.  《 정원 (園) 》  종이에 채색, 130 × 162 cm. <출처 : K-Auction> ]⊙ KRW 1,700,000,000  |  K옥션 2016년 3월    천경자의 독백입니다.

"한 인간의 인생과 예술은 情과 美, 無慾의 세 가지 신의 가호가 있어야 향기로운 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인 듯이 굳게 믿고 살아 왔다.

어쨌든 간에 이 三神님들이 뿌려주시는 빛을 받은 사람은 축복받은 예술가라고 믿고 싶다.

"'전생은 황후, 현생은 가난뱅이 화가'라고 했던 천경자 화백의 또 다른 작품들입니다.

[ 천경자, 1982년.  《 여인 》  종이에 채색, 47 x 34.7 cm. <출처 : Seoul Auction> ]⊙ KRW 780,000,000  |  서울옥션  2016년 3월   위의 작품은 2008년 서울옥션에서 5억원에 팔렸던 작품이군요.[ 천경자, 1975년.  《 여인 》  종이에 채색, 32 × 25 cm. <출처 : K-Auction> ]⊙ KRW 350,000,000

500,000,000  |  K옥션 2016년 3월[ 천경자.  《 여인 》  종이에 채색, 25.6 x 18.1 cm. <출처 : Seoul Auction> ]⊙ KRW 130,000,000

200,000,000  |  서울옥션  2016년 3월[ 천경자, 1979년.  《 아그라의 무희 》  종이에 채색, 32 × 24 cm. <출처 : K-Auction> ]⊙ KRW 120,000,000

180,000,000  |  K옥션 2016년 3월 그녀의 여행화첩에는 놀라운 풍경들이 많다.

헤밍웨이가 살았던 키웨스트, 고갱이 있었던 타히티, 흑인 오르페를 콧노래로 부르며 들렀던 세네갈 그리고 탱고 <카미니토>를 듣기 위해 다다른 아르헨테나의 라 보카. 지금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지만 1979년에 탱고를 듣기 위해 여성 홀로 아르헨티나의 항구로 떠났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천경자의 수필 중 '외로운 화가의 길' 어딘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빨갛게 핀 영산홍 앞에서 아버지는 뒷집을 지고 "노류장화를 꺾어들고...."하는 애조의 콧노래를 불렀다.

(중략)나는 남도 잡자가 좋다.

내 생활에 배인 노래들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사발가나 서도민요가 좋다 해도 나에게 정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의 노래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탱고나, 스페인의 민요, 아일랜드의 창가 곡들도 남도 잡가 못지않게 다 좋다.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천경자, 랜덤하우스 중앙, 2006>천경자의 그림 '탱고를 찾아서'는 아르헨티나의 라 보카에 위치한 카미니토 거리를 방문하여 그린 그림이다.

해방 전후로 우리나라에는 김광수가 이끄는 탱고밴드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 아마도 <카미니토>를 상당히 연주했으리라는 추측을 해본다.

천경자는 글 "탱고를 춤추는 카미니토의 여인들" 에서 이렇게 적었다.

?단조로우면서 애상이 흐르는 탱고 카미니토는 괴로울 때 들으면 뭐든 초월할 수 있었고, 누구든 사랑하고 싶어지고, 하여튼 좋지 않았던가?탱고 카미니토는 아르헨티니의 성악가이며 배우인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의 음악이 상당히 인기를 얻었다.

그가 부른 <카미니토>를 들으며 천경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필자가 1979년에 그녀와 함께 카미니토 거리에서 함께 탱고를 추었으리라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그림은 빨강, 파랑 등 원색으로 벽과 대문을 칠한 보기 드문 풍경을 천경자는 동양화의 단아한 색매김으로 화폭에 담았다.

1979년의 카미니토 거리. 그리고 아르헨티나. 그곳 이과수 폭포에서 그녀는 "내 인생에 미련이 없는가" 하고 자꾸 스스로 되물었다고 한다.

    최근 천경자 화백의 죽음의 공식화 되면서 미인도의 표절의혹에 대해서만 방송에서 주로 다뤄지지만 천경자의 동양화 채색과 화법은 국보급이며 국제적이다.

하지만  고흐, 피카소, 달리에 영향을 받아 그들을 지칭한 노래를 만든 힙합뮤지션도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림하면 떠오르는 화가는 고흐, 피카소 등의 서양화가가 우리나라 화가 보다 앞서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데려가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보여주며 천화백이 미인도 사건으로 충격받아 모든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도미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천경자란 화가를 처음 들어 본 지인들도 많았다.

천경자의 그림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되어 있으며 무료이다.

그녀의 색은 석채와 아교로 만들어낸 동양화의 걸작들이며 우리 현대사와도 맞물린 역사적 작품들이다.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갈등을 미적 표현으로 드러낸 작품 중에서도 고흐 만큼이나 뛰어난 작품들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시간나실 때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한 번 들러보시길 추천드린다.

?* 위에서 언급하 천경자의 부친이 "노류장화를 꺽어들고..." 흥얼거린 남도잡가는 <새타령>이다 Inolvidable V아티스트Carlos Gardel발매2015.06.22., KDM장르월드뮤직평점리뷰보기Carinito남도민요 Vol.2아티스트김소희발매, 한국음원제작자협회장르기타평점리뷰보기새타령 쓱쓱싹싹 싸리빗자루로 보도블럭을 쓰는 소리가 귀에 청아하게 들려오고, 나뒹구는 낙엽을 쓸고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으로 와닿는 순간 남모를 연민을 느껴본다.

.  영혼한 나르시시스트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화백

!오늘은 현재 생존의 여부가 밝혀지지 않고 베일에 가려 있는 천경자 화백의 경매작품을 올려본다   천경자, 여인, 1974종이에 채색, 13.2 x 12 cmK옥션 낙찰가:  ₩ 90,000,000 (2014.09.25)  천경자 화백은 '페미니즘' 그리고 '상징성'등 여러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분의 작품성을 들여다 보면 나의 '슬픈전설의 22페이지' 와 같은 제목들이 보여 주듯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과 꽃, 동물의 소재는 아름다움 그자체를 나탸내면서도, 작가 자신의 감정과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내면세계와 생명의 신비 등 문학적 세계등을 상징하기도 하다   천경자, 내 슬픈전설의 40페이지, 1976천경자화백은 '수필'을 통해서도 자신을 표현해 냈다.

 특히 오월초 작품은 옛날의 추억을 되씹으며 화필(?筆)을 들어야 하는 오늘을 간결하고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작자의 모습이 그대로 노출(露出)되고, 또 화가다운 감각적인 표현으로 그린 《오월초》는 수필이 개성의 문학임을 알게 하는 작품이다.

 천경자, 그라나다 시장 천경자, 소녀와 바나나천경자의 작품세계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눠볼 수 있다.

 전기: 세계여행을 시작하는 1942년부터 1969년까지. 전기에는 주로 현실의 삶과 일상에서 느낀 체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등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보여 주고 있다.

 후기: 1970년 서초동 시절부터 1990년대 까지. 후기는 외부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꿈과 낭만을 실현하려는 시기로 볼 수 있다.

후기에는 특히 꽃과 여인을 소재로 환상을 표현하거나 해외 여행에서 느낀 이국적 정취를 통해 원시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고 있다천경자, 인도구델리, 1973 천경자, 헤밍웨이의 집, 1989천경자 화백은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접근과 다채로운 색감과 주제가 두드러진 수사적인 접근으로 표현 방식을 통한그녀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했다는 평을 받는다.

   천경자, 뉴욕센트럴파크, 1951   천경자, 인도 갠지즈강에서삶에는 여러가지 모습이 있듯이 천경자 화백의 삶도 매우 굴곡이 있는 사연이 많은 삶을 살았다.

.첫 결혼을 실패하고 두번째 사랑을 하지만 그 또한 유부남이었기에 자유로운 사랑을 나눌 수 가 없었다.

.그때의 우울한 잔상들이 머리에 꽃뱀을 쓰게 했고 가슴에 장미 꽃을 단 목이 긴 슬픈 여인상으로 형상화된 그림이다이런 시가 떠오르는 작품이기도 하다 목이 길어서 슬픈 여인이여..노천명의 시를 편집해 봤다이 그림은 천경자화백의 자화상으로 22살때를 회상하며 그린작품이다    천경자, 내 슬픈전설의 22페이지천경자작품엔 유독 '뱀'이 많이 나오는데 그 동기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을 위함이었다고 한다.

 1946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수많은 전시는 물론 지구를 몇 바퀴나 돌면서 쓴 해외여행기와 수필자서전 등 글로도 필명을 날렸던 여류화백이다.

    천경자, 아그라의 무희, 1979끝으로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작품을 올려본다.

 천경자 화백은 이 작품으로 인해 붓을 꺾고 평생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고 돌연 한국을 떠나게 되는데...-이사건의 개요는 이렇다-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소장하고 있던 미인도를 포스터로 제작, 판매하고 있었다.

 대량 프린트된 이 미인도 포스터가 이곳 저곳에 걸려있다는 소식을 접한 천경자 화백은 1991년 국립현대 미술관 소장품인 '미인도'진위를 밝히고자 했다.

 그런데 결국 미술관 측에서 x-레이, 적외선, 자외선 촬영 등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며 진위 여부를 조사했지만 결국 위작을 증명할 수 없다며 천경자 작가가 직접 그린 작품이라 했다.

이에 천경자 화백은 절필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곤 이 후 잠적해서 지금은 생존의 여부도 불분명 한 상태이다-천경자 화백의 말씀-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 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나는 절대 머릿결을 새카�О� 개칠하듯 그리지 않아요머리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달라요. 작품 사인과 연도 표시도 내 것이 아닙니다난 작품 년도를 한자로 적는데, 이 그림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 있어요.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 보는 일은 없습니다결국 1998년 서울 시립미술관에 92점의 작품과 자신이 썼던 화구등을 기증하며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현재 천경자 화백은 생존하신지에 대한 여부도 TV에서 조망할 정도로 초미의 관심사다.

더불어 위작의 논란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미제다.

..아마도 다음 세대에서...   미인도- 위작논란의 작품-참고할 만한 사이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 http://www.artprice.kr/아트프라이스: http://www.artprice.com/K옥션: http://www.k-auction.com/Main/Main.aspx함께 보면 좋은 글: http://blog.naver.com/shnt13333/220509773472   천경자 화가의 미인도는 진자일까

가짜일가?   ◆  문제의 <미인도> 작품        ▲  천경자 화가의 미인도 진실게임 (동영상 Part-1)??  \      ▲  천경자  화가의 미인도 위작 진실게임 (동영상 Part-2) 10                                  <미인도> 진위 논쟁의 시발점은 2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를 기획했다.

이때 10여 년간 미술관 수장고에 있던 <미인도>가 서울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 전시됐다.

<미인도>가 처음 대중에 공개된 것이다.

당시 언론 기사에 따르면 <미인도>는 1979년 천 화백이 오모씨에게 줬고, 오씨가 다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준 걸 정부가 압류해 문화공보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됐다.

천 화백은 당시 어떤 그림인가를 오씨에게 준 건 맞지만 <미인도>는 아니라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인도>가 맞다”고 했다.

91년 전시된 미인도는 포스터로도 제작돼 일반인에게 판매됐다.

총 900장을 인쇄해 일부는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5만원에 판매했다.

이때 일이 터졌다.

한 사우나에서 액자에 걸린 미인도 포스터를 본 천 화백의 지인이 천 화백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천 화백은 인쇄물을 보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미술관에 전했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에 화랑협회 감정위원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결론은 ‘진품’이라는 거였다.

화풍과 천 화백 작품을 주로 표구한 동산방화랑의 표구가 장부에 기록돼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천 화백은 그해 4월 절필을 선언하며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정신적 고초를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천 화백은 98년 자신의 주요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큰딸 이혜선 씨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천 화백은 2003년 병환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91년 사건 이후 <미인도>는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됐고 위작 논란도 잊혀지는 듯했다.

잠복했던 논란은 99년 서화 위조범 권춘식(69) 씨를 검찰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다시 떠올랐다.

권씨가 “<미인도>는 내가 그렸다”고 주장한 것이다.

미술계에서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다가 국가에 환수된 <미인도>를 국립현대미술관이 인수한 건 80년 5월인데 권씨가 그렸다고 주장한 시점이 84년이어서 권씨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보았다.

검찰은 공소 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며 수사를 접었다.

천 화백 사망과 함께 다시 살아난 논란이렇게 또 16년이 흐른 지난해 10월, 천 화백이 두 달 전 타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시 <미인도> 위작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천 화백의 삶을 조명하면서 언론에서 이 작품 위작 논란까지 끄집어냈다.

  [출처: ] [심층취재] 법정으로 간 천경자 <미인도> 위작논쟁 【SBS 스페셜】 : ‘천경자 미인도 스캔들’ - 소문과  거짓말  1991년 4월, 대한민국 미술계가 당대 최고의 여류 화가 천경자와 국립현대미술관의 날 선 대립으로 발칵 뒤집혔다!  사건의 주인공은 <미인도>라는 한 점의 그림!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인도>를 진품으로 결론 내렸으나, 생전 천 화백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고 2015년  10월 하순 천경자(1924

2015) 화백이 두 달 전인 8월 6일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사건 발생 후 25년, 천 화백의 죽음으로 다시금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미인도> 위작 사건! SBS 스페셜이 25년 만에 입을 연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거짓과 소문 속에 감춰진 <미인도>의 진실을 추적한다.

▣ 1991년 <미인도>감정단은 만장일치로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알려져 왔는데   당시 <미인도>가 위작이라는 의견을 냈다는 화랑대표(공창호씨)가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장하는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거짓 근거와 이에 대한 반박 증언들첫번째  거짓 근거는 천경자화백의 화집(금성출판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 천경자화백의 사망소식과 함께 <미인도>에 대한 의혹들이 수면으로 떠오르자 국회에서도 재감정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국립현대미술관은 최근 한 국회의원실에 보낸 답변서에 <미인도>를 진품으로보는 근거들이 적혀 있는데 그중 하나가 1990년 발행된 천경자화백의 화집(금성출판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위장논란이 터지기 1년전에 발행된 이 책에 <나비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미인도>가 실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책이 나올때 이미 화가가 <미인도>를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한것이 아니겠냐는 주장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최근 이석현 국회의원실에 보낸 답변서에 쓰여있는 <미인도>를 진품으로보는 근거☞유족측 반박내용유족들은 <미인도>가 실린 선집이 발간될때 천화백이  <미인도>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주장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책에 대해서는 저희도 존재를 알고 있었어요 그때.  그런데 그것이 제일뒤에 흑백으로 조그맣게 실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미인도 사진의)존재를 몰랐어요. 거기 그런 사진이 실려있다는  자체를"다른 작품과는 달리 제일 뒤쪽 그것도 서편끝에 삽입된 작은 흑백사진이라 보지못했다는 겁니다.

이 책의 편집자도 <미인도>를 (천화백이)보여주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 <나비와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인건 누구입니까?두번째 거짓 근거는 <미인도>"액자" 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출신 한 미술평론가는 이 내용을 기사로도 썼습니다.

 천화백 작품을 도맡아 표구하던 D화랑에 <미인도>에 대한 장부가 있고  <미인도>액자속에서 천경자의 고유번호(표구번호)까지 확인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유족측이 반박자료로 처음 공개한 영상에는..   미인도를 표구했다는 D화랑대표는 "천경자화백의 고유번호 같은 것은 없다"고 잘라말합니다.

  세번째 : 그런데 당시 현대미술관이 위작이 아니라며 강조한 거짓 증언이 하나 있었습니다.

  미인도는 분명 스승님의 작품이라고 증언한 제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경성 1991년 당시 현대미술관관장# 천 화백의 제자 25년 만에 입을 열다!천 화백의 제자인 A 씨가 자신이 미인도를 진품으로 감정했다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장에 대해 25년 만에 직접 입을 열었다.

그동안 알려진 것과 완전히 다른 증언을 한 A 씨. 그녀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들은 말로 인해 지금껏 자신도 미인도가 진품이었다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과연 A 씨는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에게 어떤 말을 들은 것일까?  그녀는 25년만의 증언에서..그러자 가만히 듣고있던 관장..▣국립현대미술관의 또 하나의 조작그러나 진실은...1991년4월2일 천경자화백의 집을 방문해 만나주지 않는 천화백에게  편지로 스스로 위작이라고 밝힌 당시 미술관 학예관B씨# 미리 맞춰진 퍼즐(?)천경자 화백의 지인이자 당시 언론사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그 무렵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미인도를) 진짜로 만들지 못하면 7명의 목을 치겠다고 했어요”<미인도>의 감정은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퍼즐이었던 것일까. 사건발생의 시작은....위작자 권춘식의 등장달력과 화집에 실린 천경자화백의  작품 서너점을 재조합해 2

3일만에 <미인도>를 완성했다고故 천경자 화백 장녀, 천 화백 작품·개인소장품 4천여점 기증 [울산매일 20151214][단독] “천경자, 위작 주장 번복” 허위 보고한 국립현대미술관 [ 2016.3.29]"미인도 위작 맞다, 화랑협 임원 회유로 거짓 진술"- 위작범 권춘식 [중앙 2016.4.28][단독] 천경자 “미인도 눈에 힘 없고 코도 벙벙” [ 20160526] < 2016.07.22> 작가는 어렸을 적에는 연극배우를 지망했지만 이후 미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1943년 <조부>, 1944년 <노부>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이어 입선하여 화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는 부산의 한 다방에서 수많은 독사들을 그린 작품 <생태>를 출품하여 화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휴전 이후에는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며 4명의 자식들을 부양하다 수화(樹話) 김환기(1913

1974)의 추천을 받고 상경하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의 교수가 되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2. 또한 여러 잡지의 표지화를 그렸고, 국전의 추천작가/심사위원직 등을 역임하였으며, 일본가 한국을 오가며 여러 차례 개인전도 갖는 등 작품활동 역시 활발히 하였다.

그리고 1969년부터는 유럽, 타히티,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고 그곳의 이국적인 풍물을 작품 속에 담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화재를 불러일으켰고, 여행기 역시 책으로 출간하여 더더욱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1991년에는 희대의 위작 사건인 '미인도 위작 사건'에 휘말려 일시적으로 절필을 선언하는 아픔도 겪었다3. 1995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최초로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채색화와 드로잉 93점, 그리고 저작권을 기증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2003년 뇌출혈로 병상에 눕게 된 뒤 외부와 연락을 끊고 칩거에 들어갔으며, 2015년 8월 사망하였음이 유족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환상여행>은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천경자의 회고전에 출품된 작품으로4, 비록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할 때까지 완성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최만년에 천경자의 작품세계가 다다른 곳이 무엇이였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100호 크기의 대작이다5. 1980년대에 들어서부터 천경자의 작품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이전까지의 달콤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어둡고 씁쓸한 분위기가 강조되었는대, 이는 작가가 점차 나이가 들어가며 자식들도 성장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 점점 외로워 진 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1991년에 터진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인하여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일단 제목은 <환상여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림 속 풍경은 여행지의 발랄한 분위기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피안(彼岸)이나 지옥에 온 것만 같은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하단에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나름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전혀 생기가 없고, 맨 왼쪽에 위치한 여인은 아예 웅크린 채 절망하고 있으며, 여인들과 함께 있는 강아지 3마리 조차도 전혀 생기가 없이 쭈그리고 있을 뿐이고, 한켠에 놓인 꽃다발 역시 원래의 빛을 잃은 채 말라 있다.

멀리 보이는 강물 위에는 사람들이 쪽배를 타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 조차도 살아있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죽은 자의 혼을 저승으로 이끄는 뱃사공들처럼 보인다.

 어쩌면 하단에 그려진 인물들은 죽은 뒤 저승에 묶여 있는 자들의 혼일지도 모르는 일으로, 작가는 생전 '앞으로의 그림은 저승과 같은 세계를 그린 그림이 될 것 같아요6'라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또 작품의 이곳저곳을 보면 지워지거나 추가적으로 덧칠되어 수정된 부분을 여럿 확인할 수 있는대, 이렇게 작품을 계속해서 수정해 나간 흔적은 천경자의 작품 속에서 빈번하게 확인되는 것으로,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면서 철저히 완벽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7.도판을 제공해주신 서울시립미술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본명은 천옥자(千玉子).한국의 여류 채색화가인 이숙자(1942

), 이화자(1943

) 등도 그녀의 제자이다.

다만 대중들에게는 절필한 뒤 바로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대, 사실은 절필 선언을 하고 얼마 뒤 재기하여 다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완성 상태였지만 큐레이터의 권유로 출품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경자는 100호 이상의 대작을 몇 점 남기지 않았다.

출저: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실제로 천경자는 완성하여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이라 하더라도 여러 차례 고치곤 했다.

이는 당시 촬영되었던 사진과 현재 작품의 모습과 비교해보는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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