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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은 대사간을 지냈지만, 이익이 태어나기 한 해 전에 당파 싸움으로 인해 운산으로 귀향 갔다가 이익이 태어난 이듬해 그곳에서 죽었다.

또 1706년에는 형 이잠이 희빈 장씨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감옥에서 죽었다.

  이익은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에만 몰두했다.

처음에 이익은 성리학을 공부했는데 차차 실학자 유형원의 학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익은 뛰어난 실학자가 됐고, 천문, 지리 등에 이르기까지 실용적인 학문을 두루 다 꿰뚫었다.

  이익의 학문과 덕행이 널리 알려지자 1727년 영조는 이익을 선공감가감역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익은 평생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경기도 광주 첨성리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는데 힘썼다.

이익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유학과 불교를 물리치고, 실용적인 사상을 확립했다.

이익은 또 서학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천문략>, <천주실의>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익은 실학 정신을 토대로 많은 책을 썼는데 그 중 <성호사설>과 <곽우록>은 그의 실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책들은 당시 우리나라의 제도 가운데 불합리한 것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고칠 방법을 제시했다.

이익은 그의 책에서 노비를 점차적으로 해방시키고, 불합리한 토지제도를 개선해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노비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익은 당파 싸움의 원인은 양반들이 직접 일을 하지 않는 데서 생겨났다고, 그 해결책으로 양반도 농사를 짓는 등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익 자신도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을 연구했다.

또 인재를 뽑을 때도 과거제도와 함께 각 지방에서 우수한 인재를 추천받아 시험을 통해 등용하는 제도를 같이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1763년 이익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그의 학문적 연구를 기리기 위해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려줬다.

이익의 학문과 사상은 제자인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 등이 계승해 훗날 정약용이 집대성했다.

  지은 책으로는 <성호집>, <이선생예설>, <사서삼경>, <근사록> 등이 있고, 펴낸 책으로는 <사칠신편>, <상위전후록>, <자복편>, <관물편>, <백언해> 등이 있다.

?  <성호사설>?- 성리학: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희가 집대성한 유교 철학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안향이 들여왔고, 조선시대 때 이황, 서경덕, 이이 등이 발전시켰다.

다른 말로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이익] 생각의 끝은?


- <성호사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이 쓴 책이다.

이익이 평소에 기록해둔 글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1740년경 집안의 조카들이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나라의 사회제도에서부터 역사, 지리, 실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문제점을 분석하고 바로잡을 방향을 제시했다.

이 책은 이익의 실학사상을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다.

- 실학: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널리 퍼진 실학은 양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상공업을 장려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익, 박지원, 김정희, 정약용, 이덕무, 박제가 등이 있다.

- 안정복(1712

1791):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로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이익의 제자로 그의 학문을 이어받아 여러 학문을 두루 연구했고, 특히 경서와 역사에 뛰어났다.




그의 학문과 덕행이 알려져 1749년부터 사헌부 감찰, 목천 현감 등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동사강록>, <순암집>, <가례집해> 등이 있다.

- 이가환(1742

1801):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천주교도로 이익의 종손이다.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치다가 1791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이를 중단하고, 광주 부윤에 올라 천주교인들을 탄압했다.

벼슬에서 쫓겨난 뒤 다시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고, 신앙심이 깊은 교인이 됐다.

1801년 이승훈과 함께 붙잡혀 순교했다.

- 이중환(1690

1752):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이익에게 학문을 배워 1713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 인문 지리학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지은 책으로 <택리지>가 있다.

?- 이야기 - 당파 싸움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이익은 경기도 광주 첨성리로 이사를 했다.

첨성리 가까이에는 ‘성호’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이익은 그 호수의 이름을 따 자신의 호를 ‘성호’라 지었다.

 ?이익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남달리 비범해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특히 둘째 형인 잠을 따라 어릴 때부터 공부하기를 즐겨 밤낮으로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다.

이익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한번 읽으면 그 줄거리를 모둘 외울 정도였다.

시와 문장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효심 또한 대단했다.

 ?숙종 때 형 잠이 희빈 장씨를 위해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매를 맞아 죽었다.

그때 이익은 26세의 청년이었다.

총명하고 다정다감했던 이익에게 이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이익은 벼슬에 나가려는 뜻을 버렸다.

그리고 책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 괴로운 마음을 달랬다.

아침저녁으로 엄마에게 인사를 드리는 일 외에는 단정하게 앉아 성현들의 경전을 읽고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세상일에 환멸을 느끼고, 오로지 진리 탐구에만 열중하던 이익은 명예와 이익에 유혹되는 일 없이 성현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려고 힘썼다.

사람을 대할 때나 일을 처리할 때 예의와 법도가 밝아 선비들 사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됐다.

 ?이익이 35살 되던 해에 엄마가 돌아가시자 집안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다.

그러자 이익은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고아가 된 조카들을 데려다 길렀고, 집안에서 부리는 하인들까지 두루 돌봐주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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