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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목사



2007년 5월 현재 107명의 단원들이 소속되어 있는데 그동안 수많은 국내 연주를 가졌고 태국,독일,괌,중국,싱가폴,인도네시아,등의 해외연주를 가졌습니다.

금년 연주회는 5.28

6.2일까지 캄보디아로 모두 112명의 일행이 동행했는데 단원 52명, 단원가족 55명, 카메라 1명, 동행가족(2명),여행사 직원 2명의 대가족이 함께 했습니다.

28명씩 4조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하나님의 은혜 중에 특별한 사고 없이 다녀올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일행 중에 장염과 식중독 증세를 보인 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앞으로 동남아를 여행하는 이들은 반드시 식중독과 장염을 염두에 두고 약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2007년 5월 28일 월요일, 8시에 인천공항에 집합하기로 약속되어 나는 6시 30분에 삼성동 공항사무실에서 리무진을 타고 출발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걸려 7시 30분에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마친 뒤 10시 50분에 베트남 항공기를 타고 호치민공항으로 떠났습니다.

(5시간 25분 소요)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우리나라보다 두시간 시차가 늦어 비행기 안에서 시계를 조정했습니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 호치민 공항 (사이공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3시간을 기다린 후 캄보디아의 프놈펜으로 떠났습니다.

5시 20분 50분정도 걸려 프놈펜공항에 도착하니 날씨가 흐리고 약간의 비가 내렸습니다.

그곳 날씨는 아열대성 기후여서 비가 자주 내리고 날씨의 변화가 심했습니다.

 공항에 내린 우리는 미니버스 4대에 28명씩 나눠 분승했는데 나는 3호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우리 차 가이드는 30대의 조정일씨가 맡게 되었는데 캄보디아 가이드 생활 4년째 되는 키가 크고 성실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우리나라 아시아나에서 만든 아주 오래된 차였습니다.

아마 20년은 된 차 같았습니다.

그런 차들을 잘 수리해서 사용하는걸 보니 수리 기술이 뛰어난 것 같았습니다.

에어컨도 잘 안되고 바닥이 스프링처럼 출렁거리는 차였죠. 다녀보니 우리나라 승합 중고차들은 거의 동남아로 수출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상호들을 그대로 안지우고 다니는 차들이 많았는데 그런 차가 나중에 팔아도 더 많은 값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토픽, 그레이스. 베스타, 이스타나... 얼마나 많은 차들이 돌아다니는지... 차에 새소망교회. 순복음 교회... 이름들을 버젓이 달고 다녀서 우리나라에서 선교 나왔나 착각할 정도였죠. 10년정도 된 차는 새차에 속한다 합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2)  우리의 일정은 5박 6일로 3박은 캄보디아에서, 1박은 베트남에서, 1박은 비행기내에서 머무는 것이었는데 그 기간 동안 캄보디아 연주 3회와 유명한 관광지나 역사적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과 베트남의 작전지역 한곳을 하루 일정으로 다녀가는 것으로 짜였습니다.

빡빡한 일정으로 거의 쉴 시간이 없어 몸들이 많이 지쳐 지내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첫날 우리는 베트남의 호치민 공항을 거쳐 다시 캄보디아의 프놈펜 공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 타이밍 프라자라는 호텔에 머물렀는데 오래 된 건물이었지만 지낼만 했습니다.

8시 30분 도착 예배를 드린 후 9시 30분 경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서쪽으로는 태국, 북쪽으로 라오스, 동쪽으로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타이랜드만에 접해 있는 나라입니다.

 캄보디아 국토의 총 면적은 한국의 약 두 배에 조금 못 미치며 남북으로 450km,동서로 580km에 달하는 크기로 국토의 75%가 평지이고 얕은 대접모양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쪽에 메콩 강을 지배하는 돈 레삽 호수가 있는데 그 크기가 3,000km로 캄보디아 국토의 1/6정도, 서울의 약 5배에 이르며 남서부에 카다몬스와 엘레판트라는 산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평지지만 농사에 필요한 물이 부족해서 인근의 태국이나 베트남처럼 다모작을 하는 지역은 적습니다.

 캄보디아는 역사적으로 앙코르왕국의 영광과 킬링필드라는 대학살의 슬픈 역사를 함께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온순하고 보수적인 크메르족이 95%를 이루며 (기타 소수민족 : 중국, 베트남, 참, 고산족) 오랜 역사를 갖고 살고 있고 국민의 90%이상이 불교를 믿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명은 캄보디아 왕국이며 입헌군주국으로 국왕과 수상이 나라를 다스리지만 국왕은 상징적인 인물이며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수상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양원제의 의회를 가지고 있고 의원은 123석으로 임기는 5년입니다.

 인구는 1,300 만 명 (2003년 말 기준)이며 수도는 프놈펜인데 인구는 120만 명입니다.

산업별 인구는 1차 산업인 농업, 어업, 산림업 등에 종사하는 이들이 77.5%이고 2차 산업인 제조업, 광업, 건설업 등에 종사하는 이가 4.3%, 3차 산업인 서비스업, 수송업 등에 종사하는 이들이 18.2%라 합니다.

 기후는 열대몬순으로 고온다습하고 온도는 년 평균 최저 20도, 최고 28도라 합니다.

5

10월이 우기로 평균 강수량 1,270

1.900mm이고, 10

2월이 건조기이며 3

4월은 건조한 혹서기로 최고온도 35

40도에 달한다 합니다.

우리가 방문한 이번 기간에도 얼마나 더운지…….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3)  캄보디아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1863년까지를 고대 앙코르 왕조시대라 부르는데 1

6세기까지 메콩 강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는 두 왕조가 존재했고 크메르 문자를 발전시켰습니다.

802년 자야 브라만 2세가 스스로를 신왕이라 칭하고 앙코르 왕조를 열어 1431년 삼족(스칸디나비아 북단과 러시아 접경에 살던 종족, 랄프족 이라고도 부름)의 침략으로 쇠퇴할 때가지 크메르 민족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이때 베트남 남부와 라오스, 미얀마, 태국 일부를 포함하는 대제국을 이루고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수많은 사원과 뛰어난 관개시설 등 세계적 문화유산들을 많이 남깁니다.

 1431년 샴족의 침략이후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까지 샴과 베트남의 지배를 번갈아 받으며 왕국의 명맥만 유지하고 사실상 몰락합니다.

1864년

1940년을 프랑스 통치시대라 부르는데 샴족과 베트남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프랑스의 보호령에 편입되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1941

1970,2. 이 시대를 시아누크왕정시대라 부릅니다.

1941년 프랑스는 조종이 쉬울 것으로 판단하고 시아누크를 왕으로 세우나 그는 1945년 일본의 후원 아래 독립을 선언합니다.

 1963년 대규모 좌익 숙청이 있었고 1965년 월맹에게 캄보디아 동부지역을 보급로로 내어주므로 1969

1973년까지 미국에게 엄청난 폭격을 받아 약80만 명의 사망자를 냅니다.

 1970

1975 크메르 공화국 시대 : 시아누크 왕이 외국에 나간 사이 1970.3.28. 론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고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그는 반정부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했는데 이때 베트남인들을 대량 학살하므로 대도시의 절반 이상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을 키워주는 계기를 만듭니다.

 1975

1978.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시대 : 1975. 4. 17 우익정권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심을 잃게 되고 크메르루즈군이 승리하여 프놈펜에 입성합니다.

정권을 잡은 지도자 폴포트는 급진적 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모택동의 협동 농장제도를 도입하여 당시 인구 700만 명 중 개혁에 방해되는 200만 명을 무참히 처형합니다.

이때 죽은 시체를 묻은 장소를 킬링필드라 부르는데 캄보디아 도처에서 수많은 해골들이 발견되어 그때의 참혹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종교인들과 지식인들, 베트남에 관계한 사람들을 집중처형 했다고 합니다.

 1978. 11. 영토회복을 구실로 크메르루즈군이 베트남을 침공했으나 패퇴하고 1979. 1 베트남의 점령으로 헹삼린과 훈센을 앞세워 친 베트남 정권이 탄생합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4)  1982년 베트남의 무력침공으로 친 베트남 정권이 되었으나 시아누크, 손산을 중심으로 크메르루즈 반 베트남 연합정권을 구성함. 망명정부를 세우고 ‘민주 캄푸치아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유엔의석을 확보함. 1989.10. 소련 및 동구권의 몰락과 캄보디아 운영의 경제적 부담, 국제사회의 비난에 따라 베트남군 철수. 1989.4

1993.5 : 캄보디아국 수립 캄보디아 공산당은 탈 공산주의를 추진하고 투표에 의한 의회를 구성.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각종 법령을 정비. 1993.5

1998.7. 제1차 총선 및 정부수립. 시아누크 왕이 연합전선으로 선거에서 승리. 50년 만에 다시 왕이 됨. 훈센이 제2총리가 됨. 제1총리인 왕의 아들 나나리다당과 제2총리인 훈센당의 내전이 일어남. 1998.7 총선에서 훈센당이 다수당이 되어 안정을 찾음. 97.10. 한국과 수교를 맺음.  이상이 간추린 캄보디아의 역사입니다.

프랑스와 베트남의 지배, 공산주의로 인한 피의 숙청, 수많은 내전 등으로 많은 고통과 상처를 당했으나 지금은 안정되어 새로운 도약을 향해 나가고 있는 나라입니다.

 국왕은 생존 기간 중 국가수반으로 일하며 국회의 동의에 의해 각료 등 고위직 공무원, 군인, 대사, 법관 등을 임명하며 군 최고 통수권과 국제조약 최종 비준권을 갖고 있습니다.

국왕이 사망하면 7일 이내 국왕 선출 위원회 (국회의장, 총리, 불교종정 2명, 국회부의장 2명)에서 후계자를 선출합니다.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로 내각은 총리 ,부총리, 국방장관, 내무장관, 각료급 차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5년을 임기로 하는 122명의 국회의원들이 있습니다.

현재는 훈센 총리에 의해 안정된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년간 교역 규모는 약 41억불 정도로 주요 수출 품목은 외국인 투자기업에서 생산하는 의류, 천연고무와 농산물, 수산물 등이고 주요 수입 품목은 원유, 석유제품, 자동차 및 부품, 기계류, 전기기기, 담배, 의약품, 기타 섬유제품, 철강제품 등입니다.

 캄보디아의 군사력은 약 14만 명으로 되어 있으며, 관리들이 적은 월급( 20

25불 )때문에 부패가 만연되어 있다합니다.

 아직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나라인데 국민의 85%가 농업인구지만 식량이 자립되지 않아 굶주림에 시달리며 1995년 기준 GNP 285불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입니다.

오염된 식수를 마시므로 장티푸스, 이질, 말라리아가 많아 평균수명이 아시아에서 가장 낮은 49,7세이고 매달265명이 전쟁으로 인해 매설된 지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합니다.

농촌은 폴폿정권의 숙청으로 인해 남자가 없어 30%의 과부들이 가정을 꾸려 나가며 매춘이 성행하고 에이즈가 만연되어 있는 나라라 합니다.

교육시설이 부족하고 치안이 불안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5)  국민의 대부분이 불교인 캄보디아에는 1923년에 선교사가 들어가 사역을 시작하여 7명의 회심자를 얻은 이래 2차 대전이후 종교의 자유와 함께 활발하게 교회가 성장되다가 1965년 캄보디아의 공산화 이후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1970년 론놀 정권이 들어서며 다시 선교가 재개되어 300%의 성장을 가져왔으나 1975

79년 폴포트의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1만 명의 개신교 신자중 90%가 순교당합니다.

1979년 이후 다시 선교가 시작되고 1989년 베트남 정권이 물러간 후 1990년 정부가 교회를 인정하여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므로 현재 활발한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997년 개신교 통계에 의하면 102 교회에 3만명 정도의 교인이 있었으나 현재는 1000여개의 교회에 이르며 200여명의 훈련 받은 캄보디아 교역자들이 활동한다 합니다.

앞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소망 있는 땅이 캄보디아입니다.

더욱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와 후원이 있어야겠습니다.

 캄보디아의 수도는 프놈펜으로 인구가 200만 명이며 오토바이와 자동차, 자전거가 뒤섞여 다니지만 복잡한 중에 조화를 이루는 도시입니다.

차선은 있지만 아무데서나 유턴하고 차를 역방향으로 ( 가는 차선 쪽으로 오는 차가 다님 ) 가는 차들도 있어 무법천지 였습니다.

그들은 의례 그렇게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차를 몰다가는 사고내기 십상인 나라입니다.

사고 나면 외국인에게 절대 불리하고 …….  식당에는 작은 도마뱀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밤중 전기 불빛을 받으며 벽과 천정에 기어 다니며 붙어 있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캄보디아는 23년의 내전이 98년도에 끝났지만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 있고 법적으로 총기를 소유할 수 있어 치안이 어려우므로 밤중에 바깥출입을 삼가 해 달라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간혹 대낮에도 관광객들을 노리고 습격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토바이족들이 핸드백을 날치기해서 달아나기 때문에 핸드백을 목 위로 비스듬히 걸쳐 매라는 주의 사항도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 중에도 카메라를 찍고 있는데 오토바이가 갑자기 나타나 채서 달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리면 그 뿐 찾을 길이 없습니다.

캄보디아를 여행하는 이들은 꼭 명심하고 주의 할 일입니다.

 캄보디아의 공산품들은 거의 수입품이어서 값이 비쌉니다.

그러나 과일 값은 아주 싸서 망고 1kg에 1불(약 1,000원)이면 살 수 있습니다.

고기든 과일이든 kg단위를 씁니다.

그리고 상가가 일찍 5시에 문을 열고 오후 5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물건을 사려면 일찍 서둘러야합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6)  캄보디아 앙코르왓의 작년 관광객은 60

70만 명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고 해마다 그 숫자가 증가한다 합니다.

 캄보디아는 전기부족으로 호텔이 자가발전을 하고 있으며 소도시나 시골에서는 전기가 불편하여 호텔에서 전기를 공급받기도 합니다.

국민의 15%만 전기 혜택을 받고 있다 합니다.

식수가 부족하여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서 가라 앉혀 먹는데 오염된 물을 먹어 병에 걸려 죽는 사망률이 매우 높습니다.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가기 때문이지요. 유아 사망률이 1,000명중 14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군요. 캄보디아인들은 신체에 비해 손발이 큰데 남자의 키 170센티 몸무게50킬로면 큰 체격에 속합니다.

영양부족으로 키가 작은 것이지요. 우리나라 30

40년전 인60

70년 전 모습과 비슷하다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의 결혼은 프랑스 식민지로 지내서 서구적으로 행하며 파티를 2일정도 갖는다 합니다.

모계사회여서 남자가 지참금을 주어야 결혼을 할 수 있는데 시골에서는 2.000불 (200만원), 도시에서는 5,000

1만 불 (500

1,000만원)을 가져야 한다합니다.

남자들의 결혼이 그만큼 힘들지요. 결혼식에 여자들은 드레스를 세벌 정도 준비하고 아침 점심 식사를 대접하며 저녁엔 댄스파티를 연다합니다.

잘 사는 집은 2,000

3,000명 정도의 손님이 온다는군요. 결혼은 시골에서는 18살부터 하고 도시에서는 좀 늦지만 25살 안에 대부분 한다합니다.

 인터넷은 아직 잘 안되고 전화는 유선보다 핸드폰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핸드폰은 카드를 사서 전화기에 하여 사용한다합니다.

 자체 방송이 세 개 있는데 8개 채널 중에 우리나라 방송이 4개나 들어온다 합니다.

우리나라 교민들은 프놈펜에 약 1,000명, 시엔립에 약 500

600명 정도로 많지 않은데 우리 방송 채널이 그렇게 많다니 놀라운 일이지요. 그만큼 캄보디아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좋아한다합니다.

 징집제도나 군사력은 없으며 전투기가 1

2대 정도 있다합니다.

군인들은 있으나 월급 타는 사람이 없는데 군인으로 등록만 되어있고 장군출신들이 월급을 다 타먹는다니 기가 막힌 일이지요. 교통을 위반해도 돈이면 다 통하고 관공서도 돈을 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니 부정부패의 정도를 인수 없고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갈지 생각할수록 걱정인 나라입니다.

빈민국들의 특징은 잘 사는 이들은 아주 잘산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부정부패가 심하다는 뜻이지요. 그 가난한 나라에서 4,

5천만 원짜리 차들을 몰고 다니는 이들이 많다니 놀라운 일이지요. 공산주의가 끝나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과도기 현상인 듯하다.

군 출신들이 출세를 했다는군요.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7)  몇 주 동안 참고로 캄보디아의 역사와 지리, 풍습 등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합창단 연주 여행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행 첫 날인 5월 28일 인천공항을 떠나 베트남의 호치민 공항을 거쳐 캄보디아의 프놈펜에 도착한 우리는 저녁 식사 후 간단히 예배드리고 타이밍 플라자라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이튿날 5월 29일. 우리는 아침 경건회를 마치고 식사 후 캄보디아의 왕궁과 실버 파고다, 공산주의 풀폿 정권 때 있었던 툼슬렘이라는 크메르루즈군들의 잔인한 고문 현장을 돌아보고 캄보디아 기술 대학교에서 첫 번째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 첼라 극장에서 두 번째 연주를 하게 됩니다.

 아침 경건회에서 설삼용 단장님의 백두산 천지 모자 부메랑 사건 예화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모자를 손에 드시고 이 모자를 바람에 날렸는데 바람에 의해 모자가 다시 위로 날아 올라와 기적적으로 모자를 되찾게 된 사연을 말씀하며 오늘 우리의 찬양선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들어와 가능했던 것처럼 이 땅에 뿌려지는 복음의 씨앗이 다시 다른 나라로 부메랑에 되어 돌아 갈 것이라는 내용 이였습니다.

예배우 이번 연주회를 도와주신 몇 분의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인사하시고 동행한 합창단 가족 소개가 있었고 …….  그곳 날씨는 거의 30도에 가까운 더운 온도로 아침부터 무더위를 느끼게 했습니다.

차안에서 가이드로부터 그곳 말을 배웠는데 “안녕하세요?”라는 말을“섭섭하이”라하고“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업군지랄”이라 한다 해서 한바탕 웃고는 가는 곳마다 그곳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며 재미있어 했습니다.

여행해보면 우리나라 말로 재미있는 단어들이 있어서 사용할 때마다 웃음 짓는 일들이 많습니다.

 캄보디아인들은 주로 밥을 주식으로 하는데 야채를 대부분 날로 먹지 않고 쇼트링이라는 기름에 볶아 먹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기에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현지식은 식당과 좀 다르겠지만...  캄보디아인들은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 북한과도 가깝다합니다.

중국은 13세기부터 들락날락하며 교제를 해왔는데 상권의 80%를 중국인들이 잡고 있다합니다.

[캄보디아 목사] 할말이 없네요.


지도자였던 시아누크와 김일성이 친하게 지냈는데 내전이 벌어졌을 때 북한으로 망명을 했었다합니다.

왕의 경호원들도 북한인들이라는군요.  외국인들도 땅을 살 수 있는데 그곳도 부동산 투기로 땅 값이 계속 오르고 있는데 값이 자꾸 오르니까 땅을 잘 팔지 않는다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교회 건축비가 비싸지겠지요. 외국인들에게는 집값과 전기세를 훨씬 많이 받는다하고…….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8)  5월 29일. 화요일 둘째 날, 우리는 먼저 캄보디아 국립 과학 기술대에서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산뜻한 건물로 되어 있는 광장에 태극기와 캄보디아 국기가 함께 게양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교 건물은 국가에서 짓고 (3,400만 불을 들여 지은 현대식 건물임) 전주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온누리 교회와 기타 단체에서 후원을 해서 운영하기에 두 개의 깃발을 꽂은 것입니다.

 캄보디아 피어린 총장과 우리나라 김선철 두 분의 총장이 있는데 우리나라 선교사 31명이 교수진으로 (캄보디아 교수 40명) 들어와 학생들을 가르치며 선교하는 이상적인 학원선교의 현장을 방문한 것입니다.

이 학교는 정규대학으로 2년제와 4년제 두 개의 과정으로 나뉘며 11개과로 되어 있는데 기술계가 9개. 전자, 관광, 조리과가 있고 작년에 230명, 올해 317명이 입학을 했는데 1년 6개월밖에 안되었지만 인기가 대단하다합니다.

장차 캄보디아의 기술을 주도하는 인재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카이스트로 학교이름을 개명하려 추진 중에 있다합니다.

선교를 위해 교수들과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한국에 기술 연수를 시키고 한국교회를 방불케 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열고 있으며 캄보디아 최초의 야구단과 태권선 교단을 만들었는데 태권도는 금메달을 세 개나 땄다합니다.

또 많은 장학금을 학생들에게 후원하고 자전거를 500대 기증하고 지역 주민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하며 찬양단을 만들어 선교하므로 학원선교에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합니다.

 학교강당이 4

500석 쯤 되었는데 우리가 부르는 합창단의 찬양을 듣는 학생들 모습이 너무 진지하고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개교 이래 이런 찬양단의 방문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찬양이 끝나고 밖에 나와 고맙다고 인사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찬양을 마친 후 우리는 세미나실에서 선교사들이 준비한 학교에 대한 영상물을 보고 선교사들로부터 학원선교 현황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빛나는 선교의 열매를 기대합니다.

점심 식사는 학교에서 준비한 학생들이 먹는 간단한 음식을 먹고 학생들이 파는 장학금을 위한 무방부제 빵을 샀는데 한 봉지 1달러로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학교를 떠난 시간은 오후 1시 30분. 온도는 35도 정도로 아주 뜨거웠습니다.

후덥지근한 날씨였는데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습니다.

이런 현상은 열대지방에선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런 기후 때문에 냉장고가 없어도 3일 정도는 고기가 썩지 않는다니 신기한 일이지요. 더운 날씨에 음식이 빨리 상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도 다 살 수 있게 돌보시는 하나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9)  오전에 캄보디아 국립과학 기술대학에서 공연을 마친 우리 일행은 캄보디아 크메르즈군 대학살 현장인 톰슬램 고문 형무소로 이동을 했습니다.

가면서 차안에서 우리 3호차 안내를 맡은 조정일 가이드가 자신이 보고 들으며 느낀 합창단 연주에 대한 감상을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교회에 다녔으나 캄보디아에 와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나가지 못했는데 이런 공연은 난생 처음 보았다며 너무도 감동되어 합창을 들으며 뒤에서 혼자 남몰래 울었다했습니다.

가슴이 찡 해오는 감동을 견딜 수 없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며 자기도 이젠 이번 주부터 교회에 가야겠노라 고백했습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하는 여행 기간 동안 신 진수 목사님과 박 사택 목사님에 의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공연도 중요하지만 이국땅 캄보디아에서 수많은 이들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우리를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 받게 된 것은 얼마나 뜻있는 일입니까? 키가 크고 좀 투박스러워 보이는, 마음이 착하고 순수한 그분을 만난 것이 우리의 또 다른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방문한 톰슬램 고문 형무소 현장은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고등학교 건물을 고문 형무소로 개조해서 사용했다는데 5평정도의 작은 방안에 쇠침대가 하나 있고 그 옆에 쇠막대기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을 쇠침대에 눕혀 묶어 놓고 마구 개 잡듯 때렸다합니다.

꼼짝 못하고 묶인 채 두들겨 맞으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마당에는 커다란 물 항아리가 두 개 놓여 있고 옆에는 나무 기둥이 있었는데 그 위에 죄수의 발을 묶어 매달고 아래로 떨어트려 물속에 머리를 처박게 하고 숨을 쉬지 못하고 물을 먹이는 고문도 행했답니다.

  그리고 각 방에 그때 죄수들이 맞아서 부러지고 깨진 얼굴들과 몸, 고문에 의해 죽은 시체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해 놓았습니다.

형무소에는 전속 사진사가 있어 고문 현장들을 사진으로 찍게 하고 죄수들의 얼굴을 모두 번호를 매겨 사진으로 찍어 근거를 남기게 했다합니다.

사진 중에는 여자 죄수를 의자에 앉히고 뒤에서 드릴로 머리를 뚫어 죽이는 학살현장 사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행한 크메르즈군의 모습들이 사진으로 찍혀 있었는데 모두 15세 미만의 어린 소년소녀들이었습니다.

판단력이 약하고 무서움을 무르는 어린애들을 이용해서 그런 끔찍한 짓들을 저지른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한창 번영을 향해 달리던 75

79년에 풀폿 정권에 의해 공산주의에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이처럼 무차별 학살한 것입니다.

지식인, 종교인, 부자 등을 무차별로 붙잡아다 두들겨 패니 누가 죄인이 아니라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죄를 인정하면 들로 끌고 가 생매장을 했다니 인간의 삶과 죽음이 얼마나 허무하며 인간의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했습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0)  75

79년까지 풀폿 공산 정권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이 700만명의 인구 중 200만명이라니 그 참상을 미루어 짐작케 됩니다.

우리가 방문한 톰슬램 고문 형무소에서도 21,000명이 들어와 6명이 생존했다니 얼마나 잔혹한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잔혹한 살인자 폴폿도 도망 다니다 붙잡혀 국제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중에 자연사를 하게 됩니다.

정글에 숨어 살다 붙잡혀 우는 늙은 모습이 사진에 찍힌 모습을 보며 인간의 권력이 얼마나 무상한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얼마 누리지도 못할 권력을 영원히 누릴 것처럼 휘두르며 그렇게 사람들을 파리 목숨처럼 죽이다니……. 풀폿 정권의 후유증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죽어 문맹률이 아주 높고 국가의 핵심 인물들이 거의 죽어 역사가 얼마나 뒤로 퇴보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보다 잘살던 나라가 이제는 국민소득 400불의 세계 최고 후진국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며 나라의 안정과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톰슬램 형무소 방문을 마친 우리는 한아 봉사회 프놈펜 기독교 연합 봉사관을 방문했습니다.

장신대 80기 목사님으로 총회에서 파송한 송준섭 목사님이 사역하고 있었는데 톰슬램 형무소 바로 앞에 부지를 확보하고 연면적 1,000평의 5층 건물을 짓고 있었습니다.

대학살의 현장 바로 옆에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건물이 섬을 보며 감격이 새로웠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후 캄보디아정부에서 기독교 선교를 금한다 발표했다는 신문 보도를 보면서 앞으로 선교사들이 당하게 될 어려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선교관을 방문한 우리는 캄보디아 왕궁을 방문했습니다.

왕궁은 반바지 차림으로 들어 갈 수 없고 슬리퍼도 신어선 안된다 합니다.

캠코더를 찍다 발각되면 3불, 사진은 2불의 벌금을 문다하는데 말만 그렇지 어느 정도 묵인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왕궁은 뾰족 건물의 기와로 지어졌는데 그 안에 왕이 앉는 빛나는 의자가 있었습니다.

캄보디아의 왕은 실권은 별로 없으나 상징적인 인물로 온 국민의 존경과 사람을 받고 있었습니다.

 모든 건 물중 특이한 것은 어디나 코브라 뱀의 형상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뱀을 나라의 신으로 섬기는데 건국신화에 따르면 왕의 혈통에 뱀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뱀을 사단의 상징으로 여기는데 그들은 뱀을 우상으로 받들며 섬김을 보며 어서 속히 하나님을 섬기고 우상을 부수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수천 연전에 이미 세워진 건물들의 뱀 형상들은 어쩔 수 없이 지난날의 문화유산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겠지만…….주님 어서 속히 그 땅에 다시 복음의 문이 열리게 하옵소서!!!!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1)  캄보디아 왕궁 방문을 마친 일행은 저녁 첼라극장 연주회를 위해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가는 도중 공장 일을 마친 사람들이 엄청난 숫자로 도로를 메우고 퇴근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70년대 봉제공장이나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이들이 길게 줄을 서서 퇴근하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도 저런 시대를 살았는데 얼마나 발전했나를 생각하며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오토바이 위에 대나무나 나무 널판자로 선반을 매고 10명이상의 사람들이 타고 가는 모습, 작은 트럭 위에 널판자를 대고 30

40명이 앉아 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돼지를 오토바이 위에 발랑 뉘어서 싣고 가는 모습은 얼마나 신기한지……. 두 마리의 돼지를 실었는데 꼼짝 못하고 누워서 소리만 지르고 움직이지 못하니 싣고 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오토바이를 타서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달하는걸 보면 신기에 가깝다합니다.

캄보디아는 소나 돼지 닭 등을 방목하는데 기름기가 적어 아주 맛이 있었습니다.

 극장에서는 주로 귀신 영화들을 상영한다하며 자가용의 세금은 배기량에 따라 다르며 오토바이는 배기량이 큰 차를 타지 못하고 주로 50CC 를 탄다 합니다.

기름 값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저녁 식사는 야채와 생선을 데쳐 먹는 ‘수키’라는 음식이었는데 아주 우리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드디어 밤 7시 첼라 극장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약 700

[캄보디아 목사] 진실 또는 거짓..



800석인 극장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찼습니다.

캄보디아 역사상 음악회 행사로 이렇게 모인 적이 없었다합니다.

공연을 위해 현지 선교사님들이 많이 애를 썼지요. 많은 성도들이 각처에서 모여와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연주에 앞서 캄보디아 감리교 찬양단의 찬양과 청중들의 찬양이 있었는데 너무도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감리교 찬양단은 찬양대회에서 1등을 해서 한국교회 순회 연주까지 다녀왔다 합니다.

 단장님의 어디나 함께 계신 주님에 대한 유머와 감동이 넘치는 설교가 있은 후 우리의 찬양이 있었습니다.

찬양을 듣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고 아름다운지……. 앙코르곡이 끝나도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그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지만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겠지요.  돌아오는 차안에서 가이드가 오늘밤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밤이었다 했습니다.

이번 주에 꼭 교회에 나가겠다 다시 한 번 약속 했는데 과연 그 약속이 지켜졌을지…….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노점에서 과일을 샀는데 망고가 3달러에 6개였습니다.

둘리안이라는 냄새 나면서도 기막히게 맛있는 과일을 몇 쪽씩 사서 나눠 먹었고……. 역시 열대 지방 여행은 과일을 먹는 기쁨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가져와 여러분께 드렸으면 좋으련만…….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2)  여행 세째날 수요일. 오전 5시 30분. 아침 경건회를 마친 우리는 식사 후 7시 10분에 전용버스로 6시간 동안 시엔립으로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가도 가도 산은 거의 없고 들과 논, 밭, 풀들이 우거진 모습만 계속 눈에 들어오는 길이었습니다.

도로는 1차선으로 포장이 되기 도하고 안 되기도 한 너무도 불편한 길이었습니다.

  도로에는 해가 떨어지면 거의 차들이 다니지 않는다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도로에 나와 잠을 자기도 하고 놀기도 해서 사고의 위험이 많다 했습니다.

길가에는 대부분 나무로 얽어 지은 집들이 지어져 있었는데 아래는 공간을 비워두고 위에 사람이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아래는 소나 짐승들이 살거나 사람들이 낮에 시원한 그늘 아래 지내다가 밤에 벌레나 뱀을 피해 위로 올라간다합니다.

화장실은거의 없고 숲이 자연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이라는군요. 집 옆에는 커다란 물독이 몇 개씩 놓여 있었는데 집 앞에 파 놓은 웅덩이의 물을 길어 가라 앉혀 끓여 먹는다합니디. 오리나 짐승들이 들어가 노는 더러운 물을 먹으니 온갖 질병에 걸려 일찍 죽을 수밖에 없지요. 우리 차 가이드가 200불이면 우물을 팔 수 있는데 자기가 개인적으로 우물을 세 개 파주었다 해서 감동된 우리 차 일행들이 돈을 모아 두 개의 우물을 파는 돈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 돈으로 두 개의 우물을 파주어 약 500명의 마음 사람들이 혜택을 입게 되어 너무도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왔습니다.

 오후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11시 - 2시 30분까지로 날씨가 더워 낮잠 시간까지 준다합니다.

자전거가 없는 아이들이 뒤에 타고 몇 십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가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자전거 없는 아이들은 오토바이위에 나무를 얹은 자리에 타고 가고……. 우리가 가는 씨엔립은 관광지로 8-15세기에는 캄보디아의 수도였다 합니다.

작년에 관관객이 170만 명이나 왔다는데 호텔이나 음식이 좋다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 불리는 앙코르왓이 그곳에 있는데 인구는 28만의 작은 도시입니다.

(프놈펜은 200만) 작지만 활기 있고 관광객으로 늘 붐비는 도시랍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는 신호등이 5개 밖에 없으며 신호체계도 잘 모른다합니다.

경찰이 곤봉으로 때리며 잘못을 가르쳐준다는군요. 1시 30분에 식당에 도착해서 돼지 갈비를 먹었는데 기름기가 별로 없고 아주 맛이 있었습니다.

2시에 호텔로 이동한 우리는 3시 50분에 전원이 승차했습니다.

우리 차는 늦으면 1불 내기로 벌금을 정했는데 그 덕분에 거의 늦는 일이 없었습니다.

단체 생활에선 꼭 벌금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아마 실천해보면 벌금의 위력을 실감하게 될 겁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3)  셋째날 우리들의 씨엔립 마지막 공연은 앙코르 몬디알 레스토랑에서 캄보디아 선교사들의 선교지역에 있는 이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하며 연주를 했습니다.

경비를 많이 들여 선교를 돕는 행사입니다.

 가기 전 5시경 킬링필드 해골 전시소를 방문했습니다.

사원안에 있는 우물 속에 사람들을 쓸어 넣고 대창으로 찔러 죽였는데 그 숫자가 8,000

10,000구나 된다합니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는 유골탑 안에 수천명의 유골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인간이 악해지면 얼마나 무서운가 잔혹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 목숨을 파리 죽이듯하는 잔인함이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낮에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날 밤 숙소에서 자다가 적들이 나를 해치러 오는 꿈을 꾸고 순식간에 언덕을 구르는 동작을 연출하다 ‘꽝’하고 침대 아래로 떨어져 깜짝 놀란 아내와 함께 얼마나 웃었던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며 한바탕 웃곤 합니다.

하하…….  저녁 7시. 500명을 수용한다는 식당에 청중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이찼습니다.

식당에 비해 공연무대가 너무 비좁아 무대 아래로 늘어서서 연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캄보디아 전통 춤을 구경했는데 아마 교인들이 준비한 것 같았습니다.

소쿠리를 들고 하는 무용과 어린이들의 손동작 발동작을 통한 춤을 구경했습니다.

아이들이 추는 춤은 마치 살모사나 코브라의 동작을 묘사한 것 같았습니다.

저들의 조상이 뱀이라 믿어선지 뱀들의 모양과 동작이 모든 삶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어서 우리들의 공연이 있었는데 테이블에 둘러 앉아 식사를 나누며 공연을 보느라 좀 어수선한 느낌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비싼 음식을 먹어보는 그들에겐 어쩌면 음악보다 끓는 생선 냄비에 더 관심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분위기는 근사했지만 공연장으로는 그리 좋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연주를 듣는 이들은 열심히 들었지만……. 난생 처음 보는 음식과 생전, 처음 듣는 음악……. 여러분 같으면 어느 곳에 더 관심을 두었을까요?  연주 후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선택에 의해 마사지를 받았습니다.

30분 정도 온몸을 마사지하는 캄보디아의 마사지는 마사지의 원조로 유명하다 합니다.

받아보니 시원은 하지만 기대만큼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20불(2,만원)이 마사지 요금이고 팁이 1불(천원)인데 가이드가 더 주지 말라해서 그것만 주고 나오니 좀 서운해 하는 모습인것 같아 찜찜했습니다.

기왕에 수고하는 거 1불정도 더 주고 올걸…….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다 인심이 후한 한국인의 성품이겠죠.  셋째날은 긴 여정과 해골탑의 충격으로 몸과 마음이 피곤한 하루였습니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곯아 떨어졌죠.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4)  5.31일 넷쩨날. 우리는 세게 7대 불가사의라 불리는 유명한 캄보디아 관광지 씨엔립의 앙코르와트 유적지와 고대 왕궁터, 여러 사원들을 둘러보고 베트남으로 이동하게 여정을 짰습니다.

본래는 캄보디아 여행만으로 되어 있었지만 호산나 투어 사장님의 배려로 베트남까지 다녀가게 짰다합니다.

 아침 일찍 경건회를 마친 우리는 식사 후 7시 30분, 앙코르와트를 향해 떠났습니다.

앙코르와트 계곡은 캄보디아가 세워지는 8세기에서 15세기까지 왕들이 새운 사원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28명의 왕들을 거치는 동안 힌두교와 불교의 신들을 주제로 시원을 경쟁적으로 지었다 합니다.

 그런데 태국의 침략을 받아 얼마동안 재배를 당합니다.

태국은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앙코르와트는 거대한 건물들이 있어 부러운 나머지 앙코르와트를 빼앗기 위해 침략했다합니다.

씨엔립이란 태국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침략하여 지배하는 동안 지명을 바꾸었다는군요. 그만큼 앙코르와트의 유적들이 유명하다는 뜻이지요. 후에 국가의 종교가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뀌어지며 불교 양식의 건물들이 서게 되는데 대부분 건물 양식은 비슷합니다.

불교의 원조가 힌두교이기 때문이지요. 어마어마한 돌들을 잘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수많은 돌들로 된 조각들을 만들어 건물을 세웠는데 그 규모가 그야말로 엄청 납니다.

건물에 사용된 돌들은 모래가 굳어서 이루어진 사암이라는데 어디서 그런 엄청난 돌들을 잘라 날라다 건물을 세웠는지 방문객들의 탄성을 자아냅니다.

입구는 주로 코브라 모양의 뱀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커다란 돌 위에 수많은 신상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마치 커다란 성과 같습니다.

그리고 신전의 벽에는 수많은 조각 그림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 병사들의 이야기, 수많은 신들의 이야기들이 새겨져 있어 얼마나 건물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들어 있나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전들이나 신, 왕들의 얼굴들이 대부분 깨어지고 비바람에 퇴색되어 이처럼 허물어질 영광을 위해 그토록 엄청난 돈과 노력을 쏟았나 생각하니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건물을 짓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일하다 죽어가고, 왕들은 사원을 짓기 위해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이고…….  사원 내에는 700

800년 된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고 어느 사원은 특이한 나무가 담장을 휘감으며 자라 건물을 무너뜨리고 있어 자연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오랜 유적들이 다 그렇지만 앙코르와트의 엄청난 유적들은 다시 한 번 인생의 무상을 깊이 느끼게 했습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5)  5. 31일 목요일. 캄보디아의 씨엔립 앙코르왓 일대의 관광을 마친 우리 일행은 베트남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여행사 사장님의 특별 배려로 이루어졌다합니다.

월남 파병으로 우리나라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나라이기에 목사님들이 한번 여행을 할 필요가 있다 느껴서 일정에 넣었다는 사장님의 설명이었습니다.

 5시 15분에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친 뒤 8시 15분 씨엔립 공항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약 한시간 뒤 베트남의 호치민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호치민시는 베트남의 제2도시로 원래는 사이공시 였는데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치민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합니다.

호치민시는 관광사업과 외국 기업의 유치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보다 활발한 경제도시가 되어 소득이 훨씬 높은 도시가 되었다합니다.

 우리는 공항에서 20분 거리인 한국 식당으로 늦은 저녁을 먹으러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거리거리마다 오토바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일행의 눈을 휘둥거리게 했습니다.

베트남은 오토바이 왕국으로 앞으로 10년 후 2400만대의 오토바이 보유국이 되리라 했습니다.

동남아시아에 오토바이들이 많지만 베트남이 세계제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까맣게 밀려가는 오토바이의 물결을 보고 외국인들은 모두 다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합니다.

그들에게 오토바이는 재산목록 1호이고 100미터 이상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니 그 선호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차를 몰고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 였습니다.

사고가 나도 사람보다 오토바이가 안부서졌나를 먼저 본다니 오토바이광인 나라죠.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인건비는 싸지만 물가가 비싼 나라라 합니다.

식비가 비싸고 반찬을 시키면 가짓수에 따라 돈을 더 내야 한다는군요. 후진국들이 대부분 그렇듯 경찰이나 공무원들의 비리가 심해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니 문제가 심각한 나라입니다.

공무원들의 비리를 어떻게 잡느냐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권력형 부조리가 문제되고 있으니 누구 말할 처지도 못되지만…….  그곳 호치민시에는 교민교회가 5개 정도 있는데 교회가면 식사를 무료로 제공해서 교민들이 많이 다닌다 합니다.

그리고 보면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선교의 중요한 요소가 됨을 봅니다.

외로운 외국생활에 교민들이 만나 서로 위로도 되고 한국 음식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이웃에게 베푸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랑의 바자회도 열심히 해야겠죠? 이번 11회 바자회가 이웃 사랑의 기회가 되어 베스트들의 마음 문을 여는 기회가 되게 합시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합하여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6)  베트남은 남북한을 합친 크기의 1. 5배의 크기인 나라로 길게 S자형으로 이루어져 총길이 6,000기로에 걸쳐(15,000리)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국과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와 붙어 있으며 국토의 3/1이 산악지대이며 약 3,000개의 강이 흐릅니다.

 인구는 8,000만인데 비공식 집게로는 1억이 넘을 것이라 합니다.

약 80%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다더군요. 수도는 하노이이지만 대표적인 도시는 호치민시랍니다.

 종교는 불교가 80%고 카토릭이 9%라 가이드북에 소개 되는데 가이드의 말로는 불교가 60

70%, 카토릭이 2%, 정도이고 기독교는 아직 미미한 단계라 합니다.

공식적으로 허가 난 교회가 몇 개 있는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면서도 선교는 금지된 나라입니다.

선교하다 들키면 추방령이 내려진다해서 조심스럽게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주로 개안수술이나 봉사활동을 통해 선교한다 합니다.

 교육열이 높아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과외수업을 받으며 문맹률이 10%밖에 안된다합니다.

베트남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영어, 불어, 러시아어를 약간씩 사용한다 합니다.

화폐는 1불에 16,000동이고 1,000동이 우리 돈으로 76원정도 된다는군요. 그리고 보면 달러로 바꿔가는 것이 여행에 더 이익이 될 것 같습니다.

오토바이 때문인지 공기가 안 좋아 밖에서는 마스크를 써야한답니다.

기후는 고온다습하고 소낙비가 갑자기 내립니다.

우리나라도 점점 그렇게 되어간다니 걱정이군요. 여름은 5 - 11월이며 년중 평균기온이 24 - 31도라 합니다.

베트남인은 가족간의 결속력이 강하고 연장자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합니다.

가부장적인 요소가 약하고 남녀 평등의식이 강하는군요. 베트남의 수출 시장이 좁아지며 무역적자가 10억불에 달하는데 경제는 안정되고 성장을 거듭하며 외국기업들이 많은 투자를 계속하고 있으며 작년엔 7%의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합니다.

월남전의 영향으로 인구의 60% 이하가 30세 미만이어서 노동력이 풍부하고 석유 같은 천연자원이 많아 발전 가능성이 아주 높은 나라라 합니다.

 주식은 쌀이며 간식으로 쌀국수를 먹는다 합니다.

밥을 집에서 안해 먹고 사다가 집에서 먹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군요.  공산국가여서 치안은 잘 되어 있는데 가방을 날치기 당하는 일이 자주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한류 열풍이 불어 장동건 ,김남주가 인기 1위 였는데 지금은 송혜교와 가수 비의 인기가 최고랍니다.

티켓 한장에 15만원이나 하는데 완전 매진이라니 알만하죠.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7)  6.1일 제 6일째 금요일 아침이 밝아 왔습니다.

이제 오늘을 보내면 여행을 끝내고 귀국해야합니다.

 오늘은 베트남 전쟁시 월맹군 지하 사령부였던 구찌터널을 방문하게 됨. 호찌민 시에서 약 90리 정도 떨어진 구찌라는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유명한 땅굴입니다.

 이 땅굴은 약 250키로 ( 420리 )나 되며 30미터 이상의 깊이로 뚫려 있으며 지하 공간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마다 서로 연결 통로로 되어 있어서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가 베트콩을 잡을 수 없는 지하 요새입니다.

그 입구는 나뭇잎과 흙으로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으며 여기저기 함정을 파놓고 죽창이나 쇠꼬챙이를 설치해 놓아 함부로 들어가다가는 함정에 빠져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구가 너무 비좁아 미국인이나 체형이 큰 사람들은 들어 갈 수 없게 되어 있고 들어가다 통로를 찾지 못하거나 비좁아 나오다가는 기다리던 베트콩에 의해 찔려 죽음을 당하게 되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원래는 프랑스가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3국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을 점령하기 위해 침공한 1948 -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 때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서 캄보디아 국경 근처 마을에 48키로 (120리)의 땅굴을 팠었는데 1965 - 75년까지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 때 다시200키로 (500리)를 더 팠다 합니다.

지금 보는 구찌 터널은 관광용으로 약간 넓게 구멍을 팠다는데도 들어가 보면 덥고 캄캄해서 숨이 막혀 얼마 들어갈 수 없습니다.

3미터, 5미터, 10미터, 100미터 자기가 원하는 거리를 체함 할 수 있다는데 우리는 5미터만 가도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당시에 이 땅굴이 얼마나 무서웠는지를 실감케 했습니다.

밀림 속에 이런 땅굴을 파서 숨어 다니며 활동했다니 미국이 포기하고 손을 들 수밖에 없었구나! 감탄하게 됩니다.

  가보기 전에는 실감할 수 없었던 밀림전의 우리 국군들의 모습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십 미터 땅굴 속에 숨어 있는 적들에게 아무리 많은 포탄을 퍼부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 맹호, 청룡부대는 귀신까지 잡는다는 별명이 있을 만큼 싸움을 잘했어도 엄청난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어갔습니다.

베트콩들은 뚱뚱한 사람들이 한사람도 없답니다.

피부가 까맣고 작은 체구의 사람들이 땅굴 속에 숨어서 신출귀몰하게 나타났으니 기가 막힌 일이지요.  그들은 당시의 영웅적인 전투를 보여주기 위해 땅굴 안내소를 만들어 현역 군인들이 직접 안내를 하고 비디오나 홍보용 사진으로 당시의 전투 상황이나 땅굴생활 등을 상세하게 홍보했습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8)  우리는 전 월맹군 지하 사령부였던 구찌 터널을 방문했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들이 전쟁에 참여해서 피를 흘린 월남을 꼭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당시 저는 월남전 거의 막바지에 현역 군인으로 중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69년도 입대) 월남전에 참여 했던 군인들이 돌아와 부대에 배치되는 이들도 있었고 상부의 지시를 받아 월남전에 참여하기 원하는 이들을 차출하여 보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부대가 포병부대라서 덜 위험하다 여겼는지 당시에는 월남 가려고 서로 담당자에게 돈을 쓰기도 했습니다.

월남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이 있어 가난한 이들이 지원을 많이 했었습니다.

 우리는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 구찌터널의 한 참호에서 10분간‘구찌 유격대’라 한글 자막이 나오는 홍보 비디오를 감상했습니다.

한국인들이 그만큼 그곳을 많이 방문한다는 뜻이겠지요. 3층 구조로 된 땅굴의 모형도를 보여주며 당시 그들의 영웅적 활약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숲속에 파놓은 터널들을 미군들이 파괴하려고 포탄을 퍼붓고 수많은 고엽제를 퍼부으며 15차례나 공격 했지만 실패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온 마을과 농산물, 집, 사원은 초토화 되었지만 유격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웠다 했습니다.

그들의 자랑은‘잔 티근’이라는 여자 유격전사 였는데 그녀는 아버지가 전쟁으로 죽자 복수를 결의하고 유격대에 들어가 투지와 기지를 발휘하여 수류탄과 소총으로 무려 118명의 미군들을 죽였다 했습니다.

여자의 영웅적 활동을 강조하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여자들도 이렇게 나서서 용감하게 싸웠다고 자랑하며 애국심을 고취 시키는 것이지요.  호미와 망태를 사용해서 어떻게 400리가 넘는 땅굴을 3층으로 팠는지 그들의 끈기와 노력이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학생들과 농부들이 망태나 가방에 담아 밖으로 나가 사이공 강에 몰래 뿌렸다합니다.

 곳곳에 함정을 파고 위에 나뭇잎을 덮어 위장한 부비트랩을 설치해서 밟으면 뒤집히며 함정에 빠지는데 그 속에는 대나무 창을 박아 놓거나 날카로운 쇠창살을 박아 놓고 거기에 쇠똥을 발라 찔리면 파상풍에 걸려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찔리면 즉시 후송을 해야 되어 적들의 인력을 흩게 하는 전술을 썼다합니다.

 참호 곁에 숨구멍을 조그맣게 뚫어 놓았는데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밥은 한 끼만 먹도록 아침에 한번만 하는데 안개가 자욱한 숲속에서 숨구멍으로 연기가 조금씩 뿜어 나오기에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합니다.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19)  월남인들은 뚱뚱한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들이 생산하는 쌀 안남미가 다이어트 식품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작고 가냘픈 몸으로 터널 안을 다니니 체형이 큰 미국인들은 땅굴 속을 들어 갈 수 없어 공격이 어려운 것이지요.  구찌터널은 고무나무 숲속에 있었는데 베트남은 고무나무를 많이 심습니다.

3개월에 한 나무에서 한통의 원액을 채취한다는데 나무에 상처를 내어 긁어 놓으면 하얀 원액이 흘러내립니다.

그 아래 작은 통을 매달아 놓아 고이게 되어 있습니다.

년간 원액을 7만톤이나 수출한다는데 국가 수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효자 종목이라 합니다.

 가로수에는 하얀색 페인트를 칠해 놓았는데 밤에 라이트 역할을 해서 사고를 예방한다 합니다.

특이한 것은 나무에 고유번호들을 붙여 놓았는데 몇 번 나무에 병이 들었는지 알려줄 수 있어 관리하기에 편하다 합니다.

그런 점은 우리나라가 배울 좋은 점이지요.  그들의 학제는 5학년, 4학년, 3학년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와 고등학교까지의 햇수는 같습니다.

그들도 과외수업에 열심이고 문맹률도 10% 밖에 안된다합니다.

가난해도 열심히 가르치려는 생각을 부모들이 갖고 있다합니다.

가르쳐야 가족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한자를 많이 알면 베트남어를 배우기 쉽다합니다.

주의라는 말은 그들도 ‘주의’라 발음하고 감동도 ‘감동’이라 발음한다 합니다.

 한국인들이 월남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들은 한국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합니다.

우리나라가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가했다 생각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싫어하는데 일본인들이 그 나라에서 300만 명을 학살하고 잔인한 짓들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처럼 식민지 사람들을 괴롭혔겠지요.  한국인들은 성질이 급하지만 정이 많다며 좋아한다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월남전에 참여하면서 베트남 여인들과 사랑을 나눠 많은 2세들 라이 따이한들이 생겨났는데 그들 중에는 한국인 아버지를 찾아 한국으로 초청되어 가서 기술을 배워 돌아 온 사람들도 많고 매달 10만원씩 돈을 보내주는 사람들도 있다 합니다.

전쟁 때문에 생긴 비극이지만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고 돌보는 마음이 귀하고 아름답다 여겨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요즘은 베트남 여인들과 결혼하는 이들도 많다합니다.

베트남 여인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곳에 가서 결혼해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러면 2세가 한국어를 모르게 되어 돌아오기가 어렵다더군요. 여기 와서 적응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라 합니다.

 2007년 목사합창단 연주여행기(20)  구찌 터널을 방문한 우리 일행은 점심으로 한식을 먹었습니다.

돼지고기 삼겹살에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식당 옆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곰의 쓸개즙을 파는 동물 농장이 있었습니다.

직접 반달곰을 철창에 가두어 놓고 주사를 놓은 뒤 정신을 잃게 해서 웅담을 뽑아 파는 것인데 효능을 열심히 설명하고 그 자리에서 뽑아 주었습니다.

설명을 들으면 만병통치 같던데…….  고무나무 밭을 구경한 뒤 시내를 관광했습니다.

프랑서 식민시대에 지은 중앙우체국과 노트르담 성당을 보았는데 1880년대에 지었는데도 너무 아름답고 튼튼한 건물이었습니다.

그 때 지은 오페라 하우스는 지금 시청 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호치민이 아이를 안고 있는 자애로운 사진을 크게 게시하고 있어 너무 정치 선전장 같았습니다.

근처에 백화점이 있기에 들어갔더니 값이 얼마나 비싼지 살 물건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가격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달리 부유층의 사치가 대단한 듯 보였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선상에서 디너쇼를 감상하며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강물 위에 띄워진 3층으로 된 배위에서 선원복을 한 종업원들의 서빙을 받으며 근사한 저녁을 먹었습니다.

잠시 배안을 둘러보니 한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베트남 가수들이 우리 일행을 위해 쇼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한국에서 연예 활동을 하다 왔는지 한국 노래들을 너무 잘 불렀습니다.

아마 관광객들을 위해 연습한 것이겠지요. 아파트, 사랑해 당신을, 남행열차 등 한국 가수 못지않은 실력으로 열창 했습니다.

불춤을 추는 베트남 여자 무용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그 자리에서 우리 일행 중 회갑을 맞은 정종림 목사님과 민영희 사모님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는데 얼마나 분위기가 근사한지……. 단장님의 기도와 정 웅조 목사님의 색소폰 연주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악단의 팡파레가 울리며 꽃다발을 받고 케익을 자르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도 1년만 늦게 왔으면 회갑 축하를 받을 텐데……. 점심에 커피를 마신 것이 잘못됐는지 배앓이를 한 나는 우황청심환을 먹고 정로환을 먹어도 아픔이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다행히 단장님이 주신 장염 약을 먹고 가라 앉아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때는 장염 약을 필수적으로 갖고 가야겠습니다.

일행 중 많은 이들이 탈을 일으켜 너무 고생들을 해서……. 10시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1시에 베트남을 떠나 돌아 왔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기도해 주신 성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킬링 필드>는 이런저런 일로 학살 당한 민간인을 한꺼번에 묻은 집단 매장지를 가리키는 데 현재까지 20,000개 이상의 킬링 필드가 발견되었다.

총 희생자 수(병사자와 아사자 포함)는 800만 명 중 170

250만 명가량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 <킬링 필드>를 넘어 <생명의 마을>을 만들어가는 놀라운 선교 현장이 있다.

이야기는 캄보디아를 사랑하는 한 현지 목사와 오직 같은 신앙과 신뢰 하나로 뭉친 한국의 한 작은 교회의 목사(실은, 나의 가형이시다)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시엠립교회와 플랑교회 산사코나 목사 & 청주 선교중앙교회 이 현 목사이들의 만남과 변함없는 협력은 벌써 7년째, 처음에는 단순히 적은 선교비를 지원하려는 것었지만 이제는 그곳의 사회 공동체 전체를 바꾸어가는 놀라운 일들을 소리 소문도 없이 해내고 있다.

나의 가형이 그곳을 방문하여 맨 처음에 겪은 일은 놀랍기만 하다.

캄보디아 사람들과 아이들, 특히 한창 사춘기였던 현지 산사코나 목사님의 아들이 '한국인 목사'에게 보인 매우 단호한 적대감 때문이었다.

이런 사진은, 한국에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 결코 아니다그 이유는 더 놀랍다.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수많은 한국의 목사나 교인들이 말만 화려하게 대단한 지원을 남발하고 귀국 후 망각해 버리는 일들이 부지기수, 역겨운 우월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태도...현지 목사님은 어떤 일에도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 마을 주민들의 생각을 바꾸고자 직접 도전하고 실천한다.

게다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현금 뭉치를 대 놓고 자랑질 해대는 이런 웃지 못할 일로 그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준 일 등으로.... 사실 오늘날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람' 특히 '한국 교인과 목사들'은 "멸시하는 눈빛 가득하고 돈만 아는 결코 믿지 못할 자들"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걸 한국 교회나 목사들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로 기막히고 웃푼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의 가형이 이런 장벽을 허물기 위해 오랜 세월 신뢰를 쌓으며 그곳 현지 목사와 가정 그러니까 '그의 현지 목회 활동'을 속속들이 지원해 온 이야기 중 가장 안타깝고 또 화나는 이야기는 이렇다.

현지 목사님은 마을 주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살려고 하지 않는 태도'를 바꾸려, 모든 일에 직접 나선다.

첫째는 '킬링 필드'라는 어마어마한 비극을 겪어야 했던 캄보디아 사람들은 무엇에도 서로를 신뢰하며 노력하거나 스스로 책임을 지고 행동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 오늘날의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라는 것.먼저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을 변화시켰고, 서서히 마을 주민들이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둘째는 '일하지 않고 남의 돈으로 먹고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이고, 그 가장 선봉에 있는 자들이 바로 '목사'라고 여기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덕분에 그곳의 목사 후보생들은 이런 썩은 정신을 가진 이들이 많이 몰려 있다고. 그런데 이게 과연 남의 일일까???오늘날 캄보디아 기독교계는 한 번의 제대로 된 부흥기도 맞지 못하고, 그런 '못된 기독교', '못된 목사의 모습'이 먼저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한국 교회와 목사들'의 공이라고... 현지 목사님은 개탄을 하고 있다는 것!이 두 분 목사들의 캄보디아 선교 사역이 그 지역의 마을을 살리고,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 태도를 변화시키고, 그곳 아이들이 보다 실질적인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큰 감명을 받고 있다.

캄보디아 농촌 지역 곳곳에 자라고 있는 토란과 같은 천연자원을 온 마을 사람들의 협동으로 채취하고 가공하여 수입을 늘리고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산사코나 목사는 캄보디아의 현실에 가장 필요한 성서 말씀은 이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사실 루터의 기독교 개혁도 기독교의 현세성을 되찾은 것이고, 바울의 선교의 생애 또한 헬라 철학적 관념론의 파고로부터 기독교의 특성인 현세성을 지켜낸 것이고,특히 갈릴리 예수님의 개혁 운동 또한 저 비 현실을 숨 가쁜 현세의 언어와 실천으로 다시 구성해 낸 것(그랬으니 종교는 비 현실에만 있어줘야 맘껏 해 먹을 수 있던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엄청난 위험이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오늘 한국 기독교의 온갖 문제들은, 설교자들의 노동 없는 호의호식과 그런 설교 덕분일 것! 우리 기독교에 가장 무서운 적은 '현실성을 죄악시 하는 못된 풍조'이다.

그걸로 호의호식하는 자들은 늘 따로 있다.

그들은 가장 '영적인(?) 설교'를 하면서 실은 가장 '속된 욕심'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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