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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광



와우♥셀카도 이쁘게 잘찍으시네요:)웃으실때 입이 너무 자연스럽고 훈훈하게 벌어지시네요!웃는모습 참 보기좋아요

나..나두 빼빼로일상이 화보인것같아요ㅋㅋㅋ멋져!강아지 좋아하시나 보네ㅠㅠㅠㅠ동물하고도 사진 많이찍으시는듯!동물 좋아하는 남자 더 호감가요!밀린 드라마 아홉수소년 마저 봐야되는데..계속 미루고미루고 있어요ㅠㅠ수트도 멋짐 @_@핑크핑크어떻게 보면 제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연예인은김영광 오빠님(?) 이실거에요 ^O^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카와이★자연스러운 사진도 좋습니다♡사진찾아보다보니 알게된것인데 몸도 참 좋으시더라구..요 (쿨럭//)그.래.서!! 찾아본 복근사진들♡아니 절대로 뭔가에 이끌려서 찾아본것은 아닙니다^^ㅋㅋ긴말 안하겠습니다 (워후

)귀여운면도 가끔 보여주셔서 좋으네요(사심)뭔가 분위기 있는 사진들!!!화보들보면 역시 모델이구나라는 생각을 깨닫게되요ㅋㅋ예쁜 꽃을 든남자

멋진 남자들 화보에는 꼭 꽃든 화보가 있더라구요!키가 크다보니까 다리도 상당히 길어요!화보 정말 눈이부셔ㅠㅠ마무리도 훈훈하게 맺습니다 *^^*총 50장입니다:)대부분 인터넷이나 인스타그램에서 가져왔어요

사진저장이나 본문스크랩시 공감한번만 부탁드립니다!눈정화가 되셨다면 공감!.. 제가 더 좋아요ㅜㅜㅜㅜㅜㅜㅜㅜ? ?     여기는 양재 꽃 시장!!!올 하반기 개봉 예정인 김홍선 감동 신작 브로커브로커 촬영 중이라고 하네요    <출저_ 김영광인스타그램>   우월한 키를 자랑하는 김영광씨 그레이 컬러 맨투맨 하나에 모자만 썼는데눈부신 미모를 감출 수가 없군요 ㅠㅠ      잉 그러고 보니까 지프브랜드 맨투맨을 입으셨네요 하... 안되겠다 저거 사야겠어요힝! 너무 잘 어울려요  앞으로도 멋진 활동 기대할게요!!      조각 같은 모델 이수혁 의 옆에 있어도전혀 꿀리지 않고 비율과 피지컬로는 더 나아 보이기도 하는데요?? 목소리가 매력적인 성준 과도절친인 김영광평소 패션 감각도 깔끔하고세련되게 잘 매치해서 입고포인트로 패션센스를 내비치기도 한답니다? 이수혁, 성준, 홍종현, 김영광, 김우빈 이렇게 다섯 명이 모델 어벤져스라고 불리기도 하는데그 중 절친 홍종현과 찍은 사진이 좀 많아요.둘다 쌍꺼풀이 없지만 시원시원한 큰 눈에서글서글 좋은 인상을 가졌죠?  평소 김영광 이 캡모자를 쓰는 모습을 잘 못 보았던 것 같은데자주 쓰는  볼캡이 있어요.스트릿브랜드 바이브레이트 볼캡인데세련되고 감각적인 디자인과 스트릿스타일이 김영광 의 스타일과 일치하는 것 같죠?  ?앞서 말했던 홍종현 과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네요둘이 스타일도 비슷해 보이는데패션 또한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스트릿브랜드 바이브레이트바이브레이트의 모자를 패션아이템으로많이 착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지코, 씨엘의 브랜드로 알려진 바이브레이트그 외에도 모델 이성경, 제시, 샤이니 ㅋㅣ, EXo 이세훈 과 백현 등..패션 아이콘들의 관심을 받는 스트릿 브랜드랍니다.

  김영광을 비롯한 패션인들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라면 어마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거겠죠?BAZAAR 김영광 Kim Young Kwang조각 같은 모델 이수혁 의 옆에 있어도전혀 꿀리지 않고 비율과 피지컬로는 더 나아 보이기도 하는데요?? 목소리가 매력적인 성준 과도절친인 김영광평소 패션 감각도 깔끔하고세련되게 잘 매치해서 입고포인트로 패션센스를 내비치기도 한답니다? 이수혁, 성준, 홍종현, 김영광, 김우빈 이렇게 다섯 명이 모델 어벤져스라고 불리기도 하는데그 중 절친 홍종현과 찍은 사진이 좀 많아요.둘다 쌍꺼풀이 없지만 시원시원한 큰 눈에서글서글 좋은 인상을 가졌죠?  평소 김영광 이 캡모자를 쓰는 모습을 잘 못 보았던 것 같은데자주 쓰는  볼캡이 있어요.스트릿브랜드 바이브레이트 볼캡인데세련되고 감각적인 디자인과 스트릿스타일이 김영광 의 스타일과 일치하는 것 같죠?  ?앞서 말했던 홍종현 과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네요둘이 스타일도 비슷해 보이는데패션 또한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스트릿브랜드 바이브레이트바이브레이트의 모자를 패션아이템으로많이 착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지코, 씨엘의 브랜드로 알려진 바이브레이트그 외에도 모델 이성경, 제시, 샤이니 ㅋㅣ, EXo 이세훈 과 백현 등..패션 아이콘들의 관심을 받는 스트릿 브랜드랍니다.

  김영광을 비롯한 패션인들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라면 어마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거겠죠? 누구나,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내가 정치판을 30년 넘게 지켜보면서 글을 쓰고, 어떤 때에는 안으로 들어가 나름대로 조금 직접 해 보고, 지금은 3년이 넘게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정치에 대해 숙고를 거듭한 끝에 확실한 결론에 이른 것, 그것은 정치를 하면 예외가 없다고 할 정도로 파멸적 삶으로 귀결된다는 것! 나 역시 이런 시련을 겪고 있는 것도 어쨌든 정치에 발을 디뎠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아니던가! 자업자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 쫓기다가 2009년 5월23일 불행하게도 자살을 선택하기 3개월 조금 못된 시점인 3월4일 봉하마을에서 써 올린 ‘정치하지 마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정치를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대통령을 지낸 것에 이르기까지 절절한 후회와 자책을 털어놓았다.

자살하기 전 남긴 회고록을 쓰기 위한 준비 메모 ‘성공과 좌절’에서도 한 정치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진솔한 진심을 담아 정치 하게 된 것을 통렬히 후회 하고 있다.

노무현이 만약 자신의 회고록을 완성했다면 흔히 자화자찬으로 가득찬 회고록이 아니라 정치의 본질에 관해 어느 정치인도 쓰기 어려울만큼 깊이 숙고한 내용들로 가득찼을 것인데, 아주 아쉽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려고 한 것이 가장 큰 오류”라고 솔직히 자기고백을 하면서 “(내 인생이)쑥밭이 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개인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준비된 세력도 없이 정권을 잡았고, 우리 사회가 미처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개혁을 하려고 한 것이 무리였을 것이다.

" 대통령이 되어 천하를 호령했던 노무현 자신의 인생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음으로써 비극의 씨앗이 잉태돼 결국 쑥대밭이 됐다고 고백하는 것보다 더 이상 진솔한 고백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대통령까지 지내놓고서도 ‘정치하지 마라’라고 공개적인 글을 통해 주장한 이유에 대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압축하고 있다.

좀 더 길게 인용해본다.

“성공을 위하여 쏟아야 하는 노력과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다.

”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하여,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을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열심이 싸우고, 허물고, 쌓아 올리면서 긴 세월을 달려왔지만, 그 흔적은 희미하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실패의 기록 뿐, 우리가 추구하던 목표는 그냥 저 멀리 있을 뿐”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를 안 했으면 꽤 괜찮은 지식인으로 살았을 것 같은데”라고 아쉬워했지만 그가 신문사 논설위원이라던가 대학교수 같은 직업을 택했다 해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치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상 정치인 보다 덜 많은 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가정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글 쓰는 인생으로 30년 넘게 살아보니 이 직업 역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뭔가 자기 목소리 확실히 내며 살고 싶은 사람의 경우에는 정치 못지않게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소름 끼쳐하는 반대자를 많이 갖게 될 수밖에 없는 직업임을 실감하게 된다.

내가 1981년 26살에 정치부를 시작한 이후 내가 취재했던 정치무대에서 가장 오랜 기간 화려한 삶을 살다가 노무현의 직설적 표현대로 말년에 ‘쑥밭’이 되어 가장 비극적 삶으로 마감한 대표적인 정치인을 꼽으라면 허주(虛舟) 김윤환!그는 비록 대통령까지 오르지는 않았지만 정치인이 한 번 하기에도 힘든 감투를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썼다.

그가 언론계에 있을 때에도 영남일보, 대구일보 를 하다가 동화통신 로 상경해 정치부 , 주일특파원, 주미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안 해본 자리가 없다가, 41살에 정계에 발을 디딘 뒤에는 문화공보부 차관, 청와대 정무수석, 청와대 비서실장, 정무장관, 집권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 사무총장, 집권당 대표, 제1야당 대표, 국회의원을 다섯 번이나 지낸 대한민국 현대정치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황홀한 정치이력을 풍미했던 허주.그는 2000년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노정 속에서 가장 믿었던 대표적인 ‘꼬붕’ 중의 한 사람이 당시 이회창 총재의 ‘책사’로 들어가 휘두른 비수(匕首)에 맞아 공천 탈락이라는 날벼락을 맞고 정치생명을 마감하면서 71세에 신장암으로 서거하는 비참한 최후로 인생에 종언을 고했다.

이회창으로 하여금 허주의 정치생명의 목줄을 끊도록 기획해 관철시킨 사람이 윤여준이다.

윤여준은 작년 8월 이 마련한 한 좌담에서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입으로 증언한다.

자신이 이회창의 한나라당에서 총선기획단장을 맡아 내로라하는 정객들을 사멸(死滅)시켰던 공천학살의 기획자였음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털어놓는 무용담을 공개한다.

“그때 제가 이(회창) 총재에게 가서 그랬죠. 자, 이제 개혁공천을 해야 합니다.

(중략) 소수의 상징성이 강한 인물을 바꾸는 거…. 그게 누구냐고 묻기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거명했죠. 제가 김윤환, 이기택, 황낙주까지 언급하니깐 이 총재가 말을 자르면서 ‘당신 미쳤구만’ 이래요. (중략) 그래서 그렇지 않다는 설명을 다시 드렸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만요. 당신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못 한다.

내가 비록 정치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그 어려운 기간 동안 내가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이 허주와 이기택씨야. 그런데 어떻게 목을 치나. 난 인간적으로 못한다.

”윤여준의 회고가 계속된다.

“저도 인간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죠. 그런 개인적인 인연으로 따지면 제가 더 괴롭습니다.

허주가 대통령 비서실장할 때 제가 비서관으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정무1장관으로 갈 때도 저를 차관으로 데리고 간 사이입니다.

이기택씨는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람입니다.

” 끝내 이회창은 윤여준이 만들어 준 살생부에 도장을 찍었다.

김윤환은 물론 한나라당이라는 당명까지 자신의 손으로 지어 대선 때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합당하며 지지 선언을 했던 조순, 그리고 한 때 야당 권력가를 풍미했던 이기택·신상우를 공천탈락시켜 버렸다.

그러자 김윤환은 이들을 모두 묶어 민주국민당을 창당해 고향인 경부 구미에서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야 말았다.

정치는 비정한 것이고, 국민 역시 비정한 것이 그렇게 잘 나가던 정치인이라 해도 일단 고꾸라지기 시작하면 외면하는 것도 역시 국민이다.

야멸차게.박정희 대통령만 자신의 최측근이 쏜 총알에 맞아 운명했던 것이 아니라 정치판에서 제명에 살지 못하는 정객 대부분은 자신의 심복에 의해 절명(絶命)하는 것이 거의 예외가 없다.

한 방에 가는 것! 김윤환은 윤여준에 의해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윤여준이 넘겨 준 이회창의 비수에 맞아 자신의 정치 운명이 절명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게 감히 말하건대 5천 년 간 도도히 이어져 내려오며 한반도에서 전개되어 온 ‘정치’의 본질이라고 말하면 과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과장이겠는가?나는 단언하건대, 이회창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패한 원인 중 하나는 개혁공천이라는 이름의 ‘공천살인’이라고 본다.

그 때 피 흘린 정객들이 곧 닥쳐온 대선에서 어디에 갔겠는가? 죄다 노무현 진영으로 가서 죽기살기식으로 이회창으로 하여금 대통령이 되지 못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고도 남지 않았겠는가. 나는 김윤환 전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하고 민국당을 만들었지만 허사로 돌아간 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권력의 끈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을 때인 3년 간, 누구도 찾지 않던 왕년의 최고 권력자 김윤환과 그가 잘 나갔던 시절보다 더 자주 만나 그의 울분을 경청해주고, 때로는 위로해주곤 하며 대한민국 현대정치사 중에 박정희 정권 말기에서부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야당 이회창에 이르는 긴 세월 이른바 킹메이커로서 남긴 숱한 비사를 내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곤 했다.

김윤환은 말년에 다른 음식점보다는 그의 방배동 자택으로 나를 자주 불렀다.

조금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이지만 그는 보신탕을 전골로 요리해 먹는 것을 대단히 즐겼다.

집에서도. 그가 보신탕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전두환 초기 갑자기 폐병을 앓게 됐고, 그러자 경북고 동기인 정호용 전 의원의 권유로 서울 송파구에 있는 보신탕집을 찾게 된 이후 줄곧 그 집을 들락거렸고, 마침내 그 집에서 개고기, 육수, 야채 등을 가져다가 자택에서 가까운 정치인이나 들을 불러 직접 자신이 큰 냄비에 넣어 끓이며 접시에 담아주는 파티를 열곤 했다.

나는 솔직히 보신탕은 조금 뭐했지만 고기를 넣고 깻잎이나 파 같은 야채들을 길다란 튀김용 나무 젓가락으로 썩썩 젓다가 다 익은 것 같으면 “자, 접시, 윤 위원”하며 그 크고 선한 눈망울로 음식을 권하는 모습에 취해 그의 방배동 자택을 방문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유쾌하고, 정치권을 조망해야 하는 칼럼니스트로서는 더 할 나위 없는 값진 시간들이었다.

일본에 가면 한 1리터 좀 안 되는 유리병 그 안에 뚫어놓은 조그마한 유리 주머니 속에 얼음을 넣어 병 안의 사케를 지속적으로 차갑게 하는 데, 그 병을 구해다가 소주를 넣어 천천히 맛있게 즐기셨다.

김윤환은 정갈하게 보신탕 재료들이 준비되고 있는 데 대해 “내가 폐병을 앓을 때 보신탕이 몸에 좋다고 해서 서울 송파구에 있는 보신탕집에 처음으로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집에서 가져오는 거다.

양주도 보내고 해서 잘 해 준다”며 씩하고 웃곤 했다.

[김영광] 는 진정 무엇인가.


그의 호(號) 허주(虛舟)처럼 악의가 없이 뭔가를 해탈한 듯한 ‘빈배’가 김윤환이었다.

허주는 이회창이 자신을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시키자 무척 괴로워하며 재기를 모색하기 위해 고심했다.

윤여준 말고도 자신의 충성스러운 계보, 이른바 ‘허주계’였던 사람들이 이회창으로 넘어가 공천학살을 주도한 점에 대해 인간적으로 괴로워했다.

민정당 시절 ‘허주계’ 중에서 몇 명의 충성파에게는 ‘5분 대기조’라는 별명이 붙어 다닐 정도로 허주가 부르면 어딘가에서 기다리다가 바로 나타나는 의원들이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이회창 진영에 가담해 역으로 허주를 살생부에 올리는 것을 보고 나는 논설위원이었지만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주계의 한 의원은 허주가 신라호텔 1층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뒤로 돌아서자 세면기 옆에 있는 수건을 들고 서 있는 모습도 목격될 만큼 충성파들이 줄을 섰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김윤환이 윤여준을 비롯한 허주계의 배신에 크게 분노하고 있을 때 그와 만난 자리에서 “윤여준이가 왜 그랬다고 보세요?”라고 물었더니 “윤여준이 그 놈아는 내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정치라고 하지만 어떻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회창 총재에 대한 배신감, 원한을 쏟아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곤 했다.

이회창에 대한 김윤환의 ‘레퍼토리’가 또 나온다.

저러다가 건강이 나빠져 쓰러지지.김윤환이 이회창을 향해 욕을 해대는, 뒤바뀐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김윤환은 공천 탈락하기 불과 1년 전, 내가 일본 게이오대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지낼 때 나리타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됐는데, “내가 이회창이 (한나라당)총재로 다시 만들어 주려고 한다”며 마치 자신이 이회창에게 한나라당 총재 자리를 주고 싶으면 주고 안 주고 싶으면 안 주는 막강한 권력자임을 은근히 내비치며 여유 있게 눈웃음을 지었던 허주. 무슨 얘기냐 하면 이회창이 1997년 대선에서 낙선하자 한나라당 총재 자리를 보장하고 합당한 조순이 이회창의 정계복귀에 걸림돌이 됐기 때문에 김윤환이 다시 정치력을 발휘해 이회창이 총재로 컴백하도록 조순을 옆으로 밀어 내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 실제로 이회창이 아무런 잡음 없이 총재로 복귀하는 것을 보고 김윤환의 건재한 존재감을 실감했었는데.만약 허주가 당시 이회창을 총재로 복귀시키지 않고 조순을 계속 총재로 지지해 총선 때까지 그 체제가 이어졌다면 적어도 공천만은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허주는 이회창을 너무 믿었고, 이회창 밑으로 들어간 과거 '꼬붕'들을 너무 믿었다.

 그랬던 허주가 이회창으로부터 비수를 맞고 쓰러지게 된 것. 정치라는 것은 그렇게 잔인한 직업이고, 잔인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직업임을 실감하게 됐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전설적 텍스트를 남긴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대한민국 정계의 이같은 잔혹한 배반을 직접 목격했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치적 패륜을 저지른 윤여준을 향해 정치부 들은 보수든 진보든 가릴 것 없이 이회창의 책사니 뭐니 치켜 세웠다.

근본적으로 대한민국 언론은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넘어뜨려 해코지 하는 것으로 직성을 풀려하는 못된 직업적 근성을 갖고 있는데, 이런 언론의 파괴적인 심성에 영합한 윤여준을 그래서 책사라고 부르는 것! 일본의 정계라면? 감히 그런 배신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언론도 그런 칭송을 써대지 않는다.

아예 국민과 언론은 그런 배신자에 대해서는 매장을 시켜버린다.

일본을 오랜 세월 주목해 온 내 눈과 귀로는 이게 대한민국과 일본의 정치인, 정치부 간의 근본적인 차이! 참으로 한심한 것이다!그 후 윤여준은 새누리당을 나와 안철수로 갔다가, 문재인으로 가고, 다시 안철수로 갔다가 지금은 남경필에게 갔는데도 여전히 책사라는 훈장을 달아주는 대한민국 정치부 집단!나는 김윤환의 자택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럼에도 한나라당에 남아 계셨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라고 물었다.

허주는 자신이 공천에서 탈락한 뒤 곧바로 신당 창당에 나섰던 것이 아니라 이회창과 물밑 딜을 시도하려 했다고 고백했다.

지역구 공천에서는 낙천했지만 비례대표 한 자리를 주면 한나라당에 잔류할 의향이었음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김윤환은 식탁에서 내가 앉은 자리를 가리키며 “그 자리에 내 경북고 16년 후배인 강재섭이가 앉아 있었는데, 재섭아 니 내 좀 도와줘. 창(이회창)한테 말 좀 해줘라. 허주가 전국구라도 받으면 탈당하지 않는다고. 니 지금까지 정치하면서 내 신세 지지 않았나”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나는 허주와의 만남을 이어가면서 정치에 관한 내 안목을 크게 키워나갔다.

몇 대의 정권을 거치며 대권의 향배와 정권 안정을 좌지우지 하는 킹메이커로서 정치무대를 주름잡았던 정치가 김윤환을 통해. 세상을 한탄하며 원외 정치인으로 살아가던 허주는 2002년 12월 대선에서 다시 이회창을 지지하는 것으로 돌아섰지만 노무현의 승리가 확정된 대선일 다음 날 새벽 방배동 자택에서 연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됐다.

진땀을 흘려 탈수가 심한 상태에서 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채 침대에 누워 있다가. 그의 부인이 나에게 전해 준 내용이었다.

검진 결과 신장암 말기라는 것! 김윤환은 연대 세브란스 병원을 자주 다니면서 건강을 챙겨왔는데, 허리가 아플 때마다 요통이나 신경통으로 알고 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김영광] 사실은.



그런데 알고 보니 신장암 말기라니. 김영삼 대통령 못지않게 김윤환 대표도 건강을 챙기며 살았는데, 병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김윤환은 미국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으나 한 두 달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귀국해 방배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나는 허겁지겁 김윤환을 만나러 방배동을 찾았다.

기가 막히는 현실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계신 허주를 보고 그야말로 인생무상이요, 정치무상이구나,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71살이셨는데 틀니를 하고 계셨던 모양인데, 틀니를 빼고 얼굴 팔자주름 근처가 홀쭉해진 모습의 완전히 노쇠한 할아버지, 저렇게 돌아가시게 되다니. 그 침대 옆 탁자에는 젊은 시절 영화배우 최무룡 뺨칠 만큼 ‘한 얼굴’ 하는 밝은 표정으로 외동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액자에 담겨져 있었다.

젊은 시절 자신의 독사진과 함께. 지금도 눈에 선하다.

허주!훤칠한 키에 몸에 군살 하나 없이 호리호리한 체격에 곤색 양복을 입고 선하고 큰 눈에 약간 경상도 억양이 있는 목소리로 조근 조근 상황을 설명하는 김윤환, 사람을 홀리고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던 사나이 중의 사나이! 너무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 세상과 하직하는 김윤환과는 긴 대화를 하지 못하고 방에서 나왔다.

그가 침대 탁자에 딸과 함께 밝게 웃으며 찍은 사진을 액자에 담아 놓은 걸 보고 딸이 없는 나는 집에 돌아와 아내의 30대 초반 사진을 찾아 액자에 넣어 내 침대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무상한 인생을 찬찬히 음미하고 싶어서! 아내는 왜 그런 사진을 갖다 놓느냐고 아우성이고.    이회창은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김윤환을 방배동 자택으로 찾아가 화해를 시도했다고 하는데, 무상한 인생 앞에서 화해하면 또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어차피 세상 떠나면 다 잊혀 질 것인데! 내가 긴 세월 논설위원으로 지내는 과정에서 또 하나 인간적 만남에서 잊지 못할 축복이 있다면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서 ‘판단기획국장’이라는 직함으로 박정희 정권의 막후 브레인 역할을 하는 데 일생을 바친 김영광 전 의원이다.

판단기획국장이란? 중정 안에서 정보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 정국을 돌파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박정희에게 보고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조직이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에서 1979년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나올 때까지, 그 오랜 세월 최고 권력기관에서 박정희 정권의 막강한 설계사로 근무했는데도 자신보다 25살이나 아래인 나를 만날 때면 언제나 고개 숙여 인사하고, 헤어질 때에도 두 손을 앞에 가지런히 모아 인사할 정도로 세련되고 겸손하고 실력 있는 분이셨다.

나는 문화일보 논설위원 시절 그 어느 아버지와 아들, 그 어느 선생님과 제자 관계보다 자주 만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수많은 대화를 이어갔다.

18년 간 격동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중앙정보부의 핵심 간부로서 개입했던 수많은 뒷이야기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나에게 회고하곤 했다.

내가 문화일보 논설위원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칼럼 대부분이 김영광 의원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쓴 것. 이렇게 경험이 풍부하고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하지는 않는다 해도 깊은 관심을 갖고 정치현실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분들과 오랜 기간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글을 쓰는 나에게 엄청난 도움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그의 개인사무실이 있는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 호텔 1층 커피숍에서 만나 수많은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 토론을 벌여왔기 때문에 내가 문화일보에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치칼럼을 쓰면서도 소재가 마르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런 재사(才士)를 볼 줄 아는 눈이 있고, 또 그런 인재를 기용할 줄 아는 용인술이 있기 때문에 18년 장기집권이 가능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한두 번 아니다.

김영광이 정치를 보는 눈에는 요새 잘 쓰는 ‘반전의 상상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가 대한민국에 남겨놓은 작품 중 하나는 1975년 재일동포 조총련의 모국 방문과 경부고속도로 서울에서 천안 못 미쳐 있는 ‘망향의 동산’이다.

국모로까지 추앙받던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1974년 8·15 경축행사장에서 북한이 보낸 재일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저격으로 비명에 간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 당연히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지 않았겠는가? 이 때 조총련의 모국 방문을 성사시킴으로써 북한에 대한 체제 우위를 과시하자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해 성사시킨 장본인이 김영광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장. 처음에 이 제안을 보고받고 손을 부르르 떨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내가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 나라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결심했다”며 추진하라고 지시하자 김영광은 온갖 아이디어를 준비하는데, 그 중 하나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야당 총재 출신으로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웠던 박순천 여사를 간신히 설득해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조총련 모국 방문단 환영행사에서 환영사를 하게 하는 것.박순천 여사는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고국에 오신 동포 여러분! 일본으로 돌아가실 때 고국의 흙 한줌씩을 봉투에 담아가셔서 이 땅을 생각하고 일본에 묻힐 때 그 흙과 함께…”, 라는 명연설을 했다.

장내가 울음바다가 되고. 조총련 동포 환영식에서 노래가 빠질 수 없다고 본 김영광은 중앙정보부가 있던 남산에서 12시가 넘어 퇴근하던 길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를 들었다.

저게 무슨 노래인데 저렇게 구슬플까? 즉각 알아보니 당시 ‘진방남 작사, 이재호 작곡 가수 진방남’이 부른 것으로 남한에서는 북한을 연상하게 하는 애절한 곡이라고 해서 방송금지곡으로 딱지를 붙여 틀지 못하게 하고 심야 시간대 대북방송에서만 심리전 차원에서 틀게 했던 것. 진방남은 수 천곡의 유행가를 작사한 예명 반야월 선생이 가수 활동을 할 때 사용했던 또 다른 예명이다.

김영광은 이 노래를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김희갑 선생에게 부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바로 연락해보니 강원도에서 영화 팔도강산 시리즈를 황정순 여사와 함께 찍고 있기에 새벽에 짚 차에 태워 상경하게 했다고 한다.

김희갑은 이 노래를 밤을 새워 외웠다가 환영식에서 부르게 되는데? 그만 가사를 깜박 잊어버리는 것 아닌가? 당시 장면을 어제 일처럼 회상하는 김영광 의원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난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여기까지 부르던 김희갑 선생은 그 다음 대목이 생각나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다가 “제가 이북 출신이라 그만 설움이 북받쳐 와 노래를…”하며 울음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연기’를 한 뒤 다시 처음부터 부르니 그게 더 교포들의 울컥한 감정에 불을 질렀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원통해 불러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전곡을 불러 장내를 그야말로 울음바다로 만들었다고 전했다.

내친김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재일교포들이 묻힐 수 있는 ‘망향의 동산’을 만들어 놓았다.

김영광은 웬만한 현역 정치인을 능가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역시 박정희 정권을 유지시킨 중앙정보부의 판단기획국장 다운 정보력과 판단력을 갖춘 유능한 정치 분석가라고 할까? 내가 칼럼을 쓰면서 정국을 분석하며 대책을 제시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김영광의 안목과 조언, 그리고 그가 전해준 생생한 정보가 실로 큰 영향을 주었다.

자신이 칼럼을 쓰는 것처럼 고민하면서 성의를 다해 나에게 견해를 전달해 주려고 노력했다.

김영광은 참으로 멋쟁이였다.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영화배우를 능가할 정도의 얼굴과 체격을 갖춘, 요즘 말로 조각 미남의 수준이었으니 대한민국에서 첫 성형외과를 개업한 일본 의과대학 출신의 재원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것 같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김영광 의원이 중앙정보부 요원 시절 결혼할 때 자신의 신분을 잡지사 사장으로 속이고 결혼한 점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는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에 맞서기 위해 ‘신사조’라는 잡지를 만들었는데 그 사장에 젊은 김영광을 앉혔고, 성형외과 의사인 부인은 김영광 의원이 지성인의 상징인 잡지사 사장인 줄 알고 결혼했다고 한다.

김영광 의원은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면서 "사기결혼이지?"라고 웃곤 했다.

 그는 자신이 일제 때인 수원농고 시절 연극반에서 안중근 의사 역을 맡은 인연으로 평생 사재를 털어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를 추진하는 데 앞장 서온 애국자였다.

그가 안중근 의사의 유해 찾기를 위해 수십 년 간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는 2010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즈가 1면 고정 기획기사 ‘칼럼 원’에서 자세히 소개할 정도였다.

이런 애국적인 활동에 대해 미국의 유력 언론이 대서특필하다니, 도대체 한국 언론이라는 것은 뭘하고 있었는지.60대 후반이 넘어서는 나이에도 젊은이들이 입는 파커나 패딩과 같은 차림으로 빨간 머플러를 휘감고 약속 장소에 나오곤 했던 멋쟁이. 나는 김영광 의원이 다니던 남산의 서울클럽에서 함께 오순도순 식사를 하며 인생 이야기, 정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다.

나이 차이가 25살, 그러니까 한 세대가 되는데도. 그가 2010년 작고하시기 한 1년 전부터 자꾸 일본에 들러 한 참 만에 오시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김영광 의원 본인이 말하는 대로 자주 일본 여행을 다녀오시는 줄 알았는데 엄청나게 시달린 혈색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 분명히 중병에 걸려 일본에서 치료를 받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됐다.

나는 아내에게 “김 의원님이 자꾸 일본을 갔다오시면 얼굴색이 흙색이 되어 돌아오시네. 어디 큰 병이 있으신 것 같은데 큰일 났구만”이라고 걱정했다.

그 의심은 적중한 것 같았다.

가끔 전화를 걸어올 뿐 소식이 뜸하다가 갑자기 그의 오랜 세월 운전기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작고하셨다는 전갈! 2010년 9월이었다.

79세로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정말 할 말을 못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시기 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운전기사에게 함구하라고 함구령을 내렸고, 자신이 세상을 뜨면 일체 외부에 알리지 말고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김종필 총리가 2008년 뇌중풍으로 쓰러져 순천향병원에 입원했을 때 JP가 면회를 허용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김영광 의원이었다.

그만큼 JP가 쓰러지기 전 JP와 김영광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때로는 JP가 자신을 청구동 자택으로 불러들여 자신이 바둑을 이길 때까지 붙잡아 둔다고 나에게 불평하곤 했다.

“어떻게 JP가 새벽까지 못가게 하는지, 귀찮아 죽을 뻔 했어요.” 지금에서 밝히는 것이지만, 김영광 의원은 재활을 위해 애쓰고 있는 JP를 만나고 올 때마다 JP의 건강에 대해 매우 걱정스러워했다.

참으로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은 예측 불허인 것이, JP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것이라고 김영광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먼저 세상을 하직했다.

 내가 “JP가 혼자 일어서서 걸을 수 있어요?”하고 물으면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혼자서는 몇 발짝도 걷지 못 합디다”고 마지못해 근황을 전해 주곤하셨다.

그런데 JP가 퇴원한 뒤 어느 날, 김영광 의원은 나에게 놀란 표정으로 “역시 혁명한 사람은 독해요. 독해! JP가 매일 4시간씩 미사리를 걸으며 재활운동을 하고 있답디다.

2시간 걸어갔다가 2시간 걸어 돌아온다는 거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라고 말했다.

그렇게 쌩쌩했던 김영광 의원이 JP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역시 살아남는 자가 승자다(Survival is victory). 정치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퇴장한 것 같았던 JP가 최근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보고 지긋지긋하게 질긴 정치적 생명에 대해 감탄하고 질려 하면서도, 3김씨 중에 최후의 승자는  대통령을 하지 못했지만 나이 90을 넘게 살아가고 있는 JP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JP의 팔자가 이럴지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생이란, 정치란 다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가 보다.

    김영광은 나에게 아버지처럼, 스승처럼, 형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우러러 보이고 친근해 보였던 멘토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 국회의원 지역구였던 경기도 평택에 있는 고향 마을에 잠든 지 보름 후, 그의 묘소를 찾아 인생무상, 정치무상 속에서 깊은 상념에 빠진 적이 엊그제 같다.

그냥 그 황망한 산속에 홀로 흙더미를 지고 누워계셨다.

참말로 허무한 인생이여! 김영광은 자신의 지인들이나 선거구민들에게 엽서나 편지를 많이 보내는 것으로 유명한 정치인이다.

특히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 수많은 엽서에 직접 주소와 이름을 써서 보내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 여름에 나에게 보낸 엽서 한 장이 지금도 내 책꽂이에 꽂혀 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습니다.

매미 울음소리마저 뜨겁게 느껴지는 삼복에 즈음하여 문안드리면서 더욱 건안 하시기를 빕니다.

용출하는 그 건필을 또 기대하며…” 나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넘쳐나고 있다.

나 윤창중의 인생관, 철학관, 정치관 등에 가장 결정적이고도 풍부한 영향을 준 인물은 김영삼 전 대통령님에 이어, 김윤환 대표님 , 김영광 의원님 세분임이 틀림없다.

내 손으로 이분들을 평가해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세월은 흐르고 마는 것! 인생은 열어놓은 문 사이로 달려가는 마차처럼 짧다더니 그 분들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말이 없으시다.

글쓴이 윤창중칼럼세상 윤창중 cjyoon214@naver.com------------------------------------------------------------이 글의 무단전재는 지적 소유권과 출판물 간행 관련 법률에 의해 엄히 금지됨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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