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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광복군



본토에서 여운형의 건준이 세우려던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였는데, 건준이 중국 공산당의 적군인 광복군을 승인하는 것은 그가 중국 공산당 동지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좌우가 첨예하게 갈라져 있는 세계였다.

박정희 대통령 정권 초창기에 모 인사가 광복군 박정희의 활약상을 저술한 책을 대통령께 선사하였는데, 박대통령은 몹시 역정을 내며 책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독립운동 경력이 출세의 프레미엄이었던 시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평소의 과학도의 정직으로 무장되어 있던 박대통령이 그 책의 과장된 내용에 화를 내셨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이 일로 박정희의 광복군 활동상은 감히 아무도 언급할 수 없었으며 역사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광복군 박정희를 다시 추적해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자마자 상해임정의 김구 선생이 땅을 치며 한탄하였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미스테리이다.

평생을 온갖 고초를 겪으며 독립운동을 하였던 어른이 조국 해방 소식에 기뻐 춤을 추신 것이 아니라, 땅을 치며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것이 그의 눈물의 이유이다.

해방의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상해임정은 슬픈 분위기에 쌓였다.

1945년 4월 하순 독일의 항복 직후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하였으나, 일본 지상군의 위력을 일본과 연합국 모두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전과 달리 지상전에서는 미국이 몹시 불리하였다.

지상전을 위해 지상군을 미국 본토에서 아시아 대륙으로 수송할 방법이 없었으며, 또 그런 느린 병력 수송으로 막강한 일본군 사단들과 전투를 치룬다는 것은 몹시 불리한 여건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해병대 상륙 작전을 비밀리에 진행하였으며 중국 본토 상륙을 위한 파트너로 광복군은 선택하였었다.

그리고 8월 중에 광복군과 미해병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예정이었다.

아직 한번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광복군이 패망을 앞둔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을 갖는다는 것은 상해임정의 귀국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역시 일본군과 전투를 치룬 적이 없었던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지휘관도 일본 패망 이후 자신이 건국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군과의 전투 경력 기회를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이처럼 서로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경쟁하고 있었는데, 미해병과 광복군의 연합작전 수행을 불과 한 주 앞두고 일본이 항복을 해버렸으니, 김구 선생의 모든 수고가 헛탕이 되었다.

그날부터 상해임정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 즈음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광복군 중대장에 임명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이것은 매우 신중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1919년부터 1944년까지 상해임정은 외교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45년에는 광복군의 활동에 김구 선생이 정치 생명을 걸었다.

그래서 그 해에는 광복군이 상해임정의 전부였다.

해방 조국에서 상해임정이 건국의 꿈을 실현할 것이냐 아니면 국내파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몰락하느냐가 광복군에 달려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6일 전에 러시아군이 만주국을 침략하여 만주 사회가 급격히 붕괴되자 상해임정은 만주 인근 지역으로 모병단을 보냈다.

중국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도 병력 규모를 늘리기 위한 모병을 하였으므로 만주의 조선인들, 특히 조선인 장교들이나 군인들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이때까지 박정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주국 군관 박정희의 광복군 입대는 조선인들의 광복군 지지와 더불어 조선의용군이 광복군을 공격하는 것을 예방하는 의의가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박정희가 해방 전에도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 설에 반대하는 이들은 만주의 동포들은 1945년 8월 중순부터서야 광복군 명칭을 처음으로 들었으므로 그 이전에 광복군과 박정희 사이에 연락이 있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광복군 비밀요원 설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김구 선생이 청년 박정희의 유망함을 보고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권했다고 말한다.

그 시점은 실제로 박정희가 고향을 떠나 중국 대륙을 여행한 시점, 그리고 김구 선생이 광복군 창군 시점과 일치하기에 충분히 그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박정희가 작전장교였다는 사실이 그 개연성을 높인다.

만주국 보병8단 작전참모였던 박정희는 유능한 작전장교였다.

국군 하급장교 시절에 북한군 남침 예정을 그 시기와 침투 경로까지 정확하게 예측하였던 이가 바로 박정희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대륙의 일본군 동향 정보를 광복군에 의존하여야 하였다.

더욱이 8월 하순에 예정되어 있었던 미해병대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아주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였다.

그러면, 김구 선생은 일본군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겠는가? 첩보없는 광복군의 존재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첩보는 일본군 주둔 위치 지도였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는 박정희 뿐이었다.

박정희는 만주국군 작전참모였기에, 그리고 지리학과 지도와 측량 분야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능한 장교였기에 그의 만주국 보병8단 사무실에는 팔로군, 만주군, 일본군, 러시아군 등 배치도가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의 편지와 증언이 박정희의 독립운동설을 뒷받침한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는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보도하기 위해 특집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들을 대거 그의 고향에 보냈다.

그러나 증언은 뜻밖에도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일본인 몰래 학생들에게 한글과 애국가를 가르쳤고,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민족의 긍지를 일깨워주었으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떠났다.

그러면, 일본인 지인들은 박정희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가? 우리나라에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학하였으니 일본군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사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소리이다.

만약 조선인에게 일본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려 있다면 진학안할 이가 누가 있었는가? 조선인이 검사가 되면 조선인이 축하해 주던 시대였기에 김재규 아버지는 김재규를 일본 육사에 입학시키기 위해 일본에 가서 백방의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박정희 광복군] 한번 파해쳐 봅시다.


만약 조선인에게 일본 육사 진학의 길이 열려있었다면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완전 평등 대우였다.

그러나, 식민지화 초기에 왕족과 귀족에게 일본 육사 진학 특전을 베푼 적은 있었을 뿐 아무에게나 일본 육사 문이 열려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왕족이었는가? 더구나 황국신민교육을 완강히 거부하였던 박정희는 사상적으로 찍혀있던 자였는데. 일본 육사에 입학시키겠는가? 그렇지 않았다.

단지, 만주국 군관요원으로서 위탁교육을 2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면 대구사범학교 교련 교관이 본 박정희는 누구였는가? 박정희는 작사 작곡을 하는 음악가였으며, 어느 화가 못지 않은 미술 실력을 지녔고, 그의 서예 작품은 일품이다.

그리고 수학에도 천재였던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꼴찌를 유지하였다.

그 이유를 대구사범 교련 교관이었던 일본인 아리카와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교과과정이 황국시민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박정희는 백지 답안으로 항거하였다.

만주국 군관학교는 조선인 아무나 지원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다.

박정희의 문경 교사 시절 관동군 대좌로 부임하였던 '아리카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독립운동을 하라는 유언을 편지로 남겼다.

이무렵 '아리카와'는 남태평양에 출전하라는 명령을 받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로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이런 유언을 박정희에게 편지로 보냈다.

이 짧은 유언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직업적 군인은 이런 편지를 쓸 줄 모른다.

이것은 군인 정신에 관한 것이다.

박정희에게 군인이 되는 길을 열어준 이는 아리카와 대좌였다.

그리고, 만주국이 아닌 조선을 위한 군인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여기에 해방후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는 암시가 있었다.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려 하였는가? 바로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독립운동을 위해 준비할 때임을 유서로 남겼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광복군 비밀요원이 아닐까. 김구 선생의 광복군은 어떻게 일본군 동향에 대한 고급 정보를 입수하여 미국에 전달하였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조선인이 장교가 되는 기회가 극히 적었던 시대에 누가 일본군 핵심 정보를 광복군에 전달하였을까? 관동군 동맹군이었던 만주국 작전참모로서 박정희는 고급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박정희 광복군] 알고싶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신뢰한 청년으로, 일본군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는 박정희 외에 또 있다는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사석에서 "우리 조상이 나라를 잘못 가꾸어 일본에 빼앗겼어. 그 후 일본 돈을 끌어다 쓰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영원히 그들에게 굴종하고 있을 수는 없지. 꼭 따라잡아야 해. 그렇게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곤 했다.

또 "우리는 남북통일을 해야 해. 우리 힘으로 해야 해. 그 힘을 하루 빨리 길러야지"라고 했다.

이런것만 보아도 박정희의 애국애족 정신과 그의 정체성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저는 일제 때 친일 군인으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김구 선생님을 존경했지만 해방 후 한독당에 입당하지 못했고, 형제 때문에 남로당 입당해공산 활동을 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수를 해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라가 반공 정신이 미약해지고위기에 처해 이렇게 혁명을 일으켰습니다”라며 자신의 행적을 고백했다 라고 말을 하고 있어하지만 여기에 분명한 오류가 존재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남로당에 입당 한 사실이 없어 여기에 대한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 본인도당시 숙군작업에서 증언했고 집권중에도 직접 밝힌 바가 있어 여기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아래 링크 참고하면 된다http://blog.naver.com/angelove4u/220515268415물론 이 부분만 심정섭이 과장 왜곡한 것일 수도 있다면 적어도 조경환을 만난것은 사실이란 것이지 그런데 과거사위 조사위원 이였던고상만은 시사자키 정관용에 출연해서 만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버려 일본군 중좌가 아니라 만주군 소위였고 516 혁명때는대통령이 아니라 국가최고회의 의장 이였으니 사실 자체가 맞지 않다는 것이지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이 그 당시 (1944

1945) 복무할때임시정부는 상해가 아니라 충칭에 있었거든하지만 우린 보통 임시정부는 보통 상해임시정부라 부르지 그 이동경로를 따라 항저우 임시정부 광저우 임시정부 충칭임시정부 이렇게부르지 않아 가 미국에 지부를 낸다고 뉴욕일보로 이름을 바꾸지 않듯이 보통 상해임시정부라고 다 총칭해서 부르는게보통이고 대통령이란 총칭도 3인칭 관점에서 이기청 사무총장이 혼용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그런데 지금 좌익언론은 웃기게 양립할 수 없는 고상만의 주장과 조경환의 외손자 심정섭의 주장을 동시에 근거로 내세우고 있어이러한 근본적 문제점에도 선동 당하는 좌좀들을 보면 그 뇌구조는 정말 인간의 것인지 그런 주장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좌익언론들은 얼마나 광적인 왜곡에 목숨을 걸고 선동하는지 혀를 찰 수 밖에 없다 이기야그리고 또 하나는 1980 년 8월에 만들어진 창군전사 라는 육군역사서에 나온 내용인데 이것은 2004년 노무현 정권에서 삭제해버려그 삭제의 근거는 2개인데 광복군이란 소설을 쓴 박영만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내가 무슨 광복군이야 집어치워 하면서 면박을당했다는 사실 (이것은 광복회장 김승곤씨 증언) 그리고 노무현 당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던 정운현이 미국 라스베가스 까지 날아가중국인 고경인( 만주군관학교 동기생) 의 증언을 듣고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어버려자신들에게 불리한 증언은 그저 증언이라 무시하면서 정작 정황적으로 군관학교 동기가 비밀광복군이란 존재를 알 수 있었다면그것은 비밀광복군이 아니라 공개 광복군인데도 유리한 증언은 모두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역사마저 바꾸어 버린것이지 그리고좌익 세력은 미국의 광복군 oss 비밀 문서가 해제되기 이전에는 이 비밀광복군 존재 자체를 전부 부정해 버렸어그러나 비밀광복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여운형의 친일행위는 비밀광복군 이란 주장을 다시 내세우며 근거도 없이본인의 주장만으로 비밀광복군 활동이라 인정해 버리는데 여운형 스스로도 일본군 내의 조선인 중 반은 비밀광복군 이라했으니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복군이란 확률은 절반인 셈이지더구나 고상만은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까지 박정희가 어떻게 비밀광복군 들을 수급할 수 있냐 이것은 불가능 하다 떠들며오히려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증언들이 밝혀졌다 주장하는데 정운현이 인터뷰한 모든 박정희 동료들은 한결같이 박정희는독립군 토벌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해 이건 상식적으로도 그 당시 충칭까지 이전한 임시정부 상황으로 봤을때 독립군이보병 8단 반벽산 근처에는 존재 할 수도 없었으며 좌익들 주장대로 조선의용대나 중공 8로군도 독립운동부대라 주장하고있지만 그 마저도 모두 떠나고 난 뒤 패잔병 탈주병이 남아서 확인 된 사료는 박정희가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기 6개월이전에 끝이 나 버려고상만은 장준하 의문사 조사위원장이며 오마이 뉴스 이기도 해 그는 인권운동가로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며민족문제 연구소는 한 술 더 떠서 박지만에게 박정희 대통령 친일 명예훼손 재판에서 무죄로 사법부도 박정희가 친일 인것을 인정했다고 언론에 떠들고 있어 하지만 그 판결문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친일파라 인정할 근거는 없다 하여도반대쪽 의견도 학문의 자유로서 보장되어야 하기에 명예훼손으로 볼 수가 없다 라고 되어있지다시 고상만의 총칭에 어떻게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보군을 보낼 수 있었냐 라는 부분은 백범일기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나오기도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는 광복군 oss 에 대한 미국 기밀 문서 해제에 나와있어 이것은 광복회 자료에 이미 있던내용으로 그 진위를 다시 확인한 거였는데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지 이 시기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보병8단에있던 때와 겹치고 있거든그리고 일본이 망할 것을 알고 국내진공 작전을 세웠던 그 정보는 지청천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의 정보력이라는 정황적증언들이 많아 그 당시 그런 고급 정보를 제공할 사람은 박정희 뿐이란 설과 지청천 장군의 독자적 정보력 이였단 설로나뉘는데 전자의 설도 상당히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당시 광복군이 가진 일본군 주둔 배치도는 당시 정보장교였고지리학에 식견이 풍부했던 박정희 가 없이는 입수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 참조) 확실하지 않고 근거는 부족해도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복군 이였단증언은 여기 다 쓸 수 없을만큼 많아 거기에는 육사 8기가 김종필 위주로 군사혁명을 모의했을때 미국에서 반대하며이한림과 박정희 대통령이 대표를 한다는 조건부로 승인을 했는데 이한림 역시 박정희의 비밀광복군을 증언했어 이한림 장군은정작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키자 반대 입장을 밝히고 진압하려 했지만 내전이 일어나면 북한의 침공이 염려되어군사행동은 하지 않았지 사실은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김종필을 만나 거사에 대한 모든 협의를 했기에 진압자체가 불가능 했던 것이며 김종필은 단신으로 찾아갔지만 체포 조차 되지 않았어지금의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미국의 cic 가 한국에 만든 지부였으며 국군소속은 커녕 대한민국 소속이 아니였어그 약자 조차 korcia 를 사용했거든 그리고 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복군에 있던 것은 일본에 패망하고 나서조선인 일본군들을 한국으로 귀국 시키기 위한 임시 귀국부대 란 설이 정설화 되었는데 패망하기 이전인 2월에 이미비밀광복군에서 직책을 주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 부분은 더 밝혀져야 하리라 본다아무튼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복군 이였단 증거는 철저히 무시 당하고 외면 받고 있지그 당시 좌익세력이 그렇게 찬양하는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오히려 중국이 조선의용대를 신뢰하고 비밀광복군을와해시키려 하는 등 승인 조차 안 해주는 일이 발생 광복군 2지대장에서 쫓겨나게 된다박정희는 실제로 일본 패망후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400 여 명의 인원을 철수하기 위한 광복군 제 3지대 내의1대대로 편입되었는데 만약 박정희가 친일파였다면 3지대장 김학규가 왜 박정희를 중대장으로 임명했을까?더구나 박정희는 이 광복군에서 바로 귀국하지 않고 철수가 다 이루어 지고도 6개월간을 비밀광복군이 해산될 때까지 끝까지 남아서 활동한다그리고 패전후 비밀광복군에 합류할 동안 최용덕 장군은 북경의 덕경루에 박정희 이주일 신현준의 숙소까지친히 마련해준다 귀국부대는 일본군 만주군 뿐만이 아니라 조선의용군 팔로군 장개석군 모두가 포함된 인원들이므로 굳이 친일파라면 박정희를 중대장으로 두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래의 학병출신이 중대장인 경우도보아서 중위란 계급을 우선한 편제도 아니였다특히나 최용덕 장군은 장개석의 전용기 조종사로 중국에 망명한 중국군 출신으로  광복군 총사령관을 했던 분인데어떻게 박정희를 위해 북경에 고급 음식점에 기거를 위한 장소를 친히 마련하여 준다는 것은 말이 될 수가 없는 일이다그리고 함께 기거했던 신현준 이주일은 모두 광복군 1지대의 간부로 대접 받았다여기서 그냥 개인의 증언이 아니라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백범 김구의 비서이며 광복군 비밀첩보원인김정균의 일기에서도 박정희의 비밀광복군 기록이 나와있다 그리고 여운형과 함께 좌익 사학계의 대부인 송남헌의해방3년사 에도 박정희는 비밀광보군 이란 기록이 있다 송남헌은 박정희 정권때 국가보안법 위반과 시위법 위반으로2년이나 옥살이를 했던 반박정희 성향이였다더구나 김정균의 일기는 의 증언과 일치하며 장창국 저 육사 졸업생 에서도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라고 나와있다실제 광복군 출신인 박영만의 오류가 있어 인정을 못하는 부분 (더구나 이건 소설 형식의 글) 을 제외하더라도김정균의 일기는 문용채의 증언과도 전부 사실관계가 일치하며 이러한 증언들은 여기 다 소개할 수 없을 만큼 많다이러한 증언들을 전부 부정한다는 것은 광복군 출신들이 전부 박정희 미화에 입을 맞춘 사기꾼 이란 사실밖에는해석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 모든 언론들이 이러한 사실규명을 오로지 박정희는 친일파란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게다양성은 커녕 하나의 금기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노무현 정권이 만든기준에서도 광복군 출신이 맞다실제 많은 일제 패망후 잠시 광복군에 머물렀던 사람들조차 노무현 정부는 근거 없는 증언만으로도 독립유공자로선정했다 더구나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 한 여운형마저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국2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서훈기준은 2002년 1회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광복군 출신자에 한하여 직속 상관을 포함한 2명 이상 광복군 동지의 증언을증거자료로 채택하기로 되어있다한겨레 21의 링크 현재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으로 보면 광복군 박정희 대통령도 독립유공자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8597박정희는 항상 나폴레옹 전기를 보며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인이기 이전에 그 아버지카를로 부오나파르테  는 프랑스 식민지인 코르시카의 의원인 동시에 독립운동가 였다 영국의 북아일랜드 독립운동테러단체인 IRA 는 영국 식민지 부대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운동 단체로 만들어졌다이승만의 친미독립 외교노선이 유효했듯이 항일 운동을 하기위해 비밀광복군으로 일본군 만주군으로 활동하며 군사학을배우고 군사 기밀정보를 독립군에게 제공하는 것이 과연 친일 활동일까? 친일 전력이 있는 여운형이나 오히려광복군을 와해한 김원봉 같은 북한의 공산당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찬양하는게 올바른 역사일까? 오히려박정희 대통령의 동료 교사나 제자들의 증언에 보면 대구사범 문경 초등학교 교사시절 학생들에게 한글과태극기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에 앞장섰단 증언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모든 증언을 무시하고 좌익세력은 대한민국의위인들에 대해 광기어린 김일성보다 더 큰 증오를 심도록 역사를 조작하고 선동해왔다박정희 대통령의 소서루 광복군 저자 박영만에 대하여 내가 광복군이냐? 라는 호통은 철저하게 믿으면서 박정희 시대에 역사는 모두 정권에 의하여 조작된 역사라고 떠든다 사실 박정희 정권의 독립유공자 찾기와역사 밝히기도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 독립운동사 라는 부분은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헌법에서계승하는 임시정부의 정신은 사실 31 독립운동에 의해 임시정부가 탄생했음에도 좌익들은 유관순을 우리역사에서 지워내고 그 자리를 좌익 사회주의 계열이 주인공인 것 처럼 채워 넣었다그 뿐만이 아니다 박정희를 유일한 친일파로 만들기 위해 한겨레는 김윤희를 내세워 이완용 평전을 만들어미화했고 민족문제연구소도 윤덕환 상임연구원이 이완용 평전을 만들어 그의 친일 행위를 미화하였다대한민국에는 이완용 평전이 이 2개 뿐이다 그들에게는 김일성은 독재자가 아니지만 박정희는 독재자요이완용은 친일파가 아니지만 이승만은 친일파 여만 한다 그리고 민족 문제연구소는 이완용 평전을추천도서로 지정까지 한다우리는 지금 박정희 대통령이 친일파였냐 광복군 이였나의 역사적 펙트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를 친파로메도하려는 종북좌익 세력의 선동과 광기에 맞서 싸우고 있다 하지만 언제인가 역사는 진실만이 남을 것이며 반드시 우리의 후세들은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만 한다 올바른 역사를 세운다는 것은 지금의 좌익세력의 광기어린, 역사마저 이념의 수단으로 왜곡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3줄요약1 박정희는 비밀광복군 이란것은 사의 정설이다2 박정희가 친일파 라는 것은 좌익들의 선동이다3 국정교과서는 반드시 통과되어야 한다 [출처]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 광복군이였나 정말 제대로 알아보자 스압주의 [링크] http://www.ilbe.com/6808849155  저는 일제 때 친일 군인으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김구 선생님을 존경했지만 해방 후 한독당에 입당하지 못했고, 형제 때문에 남로당 입당해공산 활동을 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수를 해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라가 반공 정신이 미약해지고위기에 처해 이렇게 혁명을 일으켰습니다”라며 자신의 행적을 고백했다 라고 말을 하고 있어하지만 여기에 분명한 오류가 존재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남로당에 입당 한 사실이 없어 여기에 대한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 본인도당시 숙군작업에서 증언했고 집권중에도 직접 밝힌 바가 있어 여기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아래 링크 참고하면 된다http://blog.naver.com/angelove4u/220515268415물론 이 부분만 심정섭이 과장 왜곡한 것일 수도 있다면 적어도 조경환을 만난것은 사실이란 것이지 그런데 과거사위 조사위원 이였던고상만은 시사자키 정관용에 출연해서 만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버려 일본군 중좌가 아니라 만주군 소위였고 516 혁명때는대통령이 아니라 국가최고회의 의장 이였으니 사실 자체가 맞지 않다는 것이지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이 그 당시 (1944

1945) 복무할때임시정부는 상해가 아니라 충칭에 있었거든하지만 우린 보통 임시정부는 보통 상해임시정부라 부르지 그 이동경로를 따라 항저우 임시정부 광저우 임시정부 충칭임시정부 이렇게부르지 않아 가 미국에 지부를 낸다고 뉴욕일보로 이름을 바꾸지 않듯이 보통 상해임시정부라고 다 총칭해서 부르는게보통이고 대통령이란 총칭도 3인칭 관점에서 이기청 사무총장이 혼용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그런데 지금 좌익언론은 웃기게 양립할 수 없는 고상만의 주장과 조경환의 외손자 심정섭의 주장을 동시에 근거로 내세우고 있어이러한 근본적 문제점에도 선동 당하는 좌좀들을 보면 그 뇌구조는 정말 인간의 것인지 그런 주장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좌익언론들은 얼마나 광적인 왜곡에 목숨을 걸고 선동하는지 혀를 찰 수 밖에 없다 이기야그리고 또 하나는 1980 년 8월에 만들어진 창군전사 라는 육군역사서에 나온 내용인데 이것은 2004년 노무현 정권에서 삭제해버려그 삭제의 근거는 2개인데 광복군이란 소설을 쓴 박영만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내가 무슨 광복군이야 집어치워 하면서 면박을당했다는 사실 (이것은 광복회장 김승곤씨 증언) 그리고 노무현 당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던 정운현이 미국 라스베가스 까지 날아가중국인 고경인( 만주군관학교 동기생) 의 증언을 듣고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어버려자신들에게 불리한 증언은 그저 증언이라 무시하면서 정작 정황적으로 군관학교 동기가 비밀광복군이란 존재를 알 수 있었다면그것은 비밀광복군이 아니라 공개 광복군인데도 유리한 증언은 모두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역사마저 바꾸어 버린것이지 그리고좌익 세력은 미국의 광복군 oss 비밀 문서가 해제되기 이전에는 이 비밀광복군 존재 자체를 전부 부정해 버렸어그러나 비밀광복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여운형의 친일행위는 비밀광복군 이란 주장을 다시 내세우며 근거도 없이본인의 주장만으로 비밀광복군 활동이라 인정해 버리는데 여운형 스스로도 일본군 내의 조선인 중 반은 비밀광복군 이라했으니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복군이란 확률은 절반인 셈이지더구나 고상만은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까지 박정희가 어떻게 비밀광복군 들을 수급할 수 있냐 이것은 불가능 하다 떠들며오히려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증언들이 밝혀졌다 주장하는데 정운현이 인터뷰한 모든 박정희 동료들은 한결같이 박정희는독립군 토벌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해 이건 상식적으로도 그 당시 충칭까지 이전한 임시정부 상황으로 봤을때 독립군이보병 8단 반벽산 근처에는 존재 할 수도 없었으며 좌익들 주장대로 조선의용대나 중공 8로군도 독립운동부대라 주장하고있지만 그 마저도 모두 떠나고 난 뒤 패잔병 탈주병이 남아서 확인 된 사료는 박정희가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기 6개월이전에 끝이 나 버려고상만은 장준하 의문사 조사위원장이며 오마이 뉴스 이기도 해 그는 인권운동가로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며민족문제 연구소는 한 술 더 떠서 박지만에게 박정희 대통령 친일 명예훼손 재판에서 무죄로 사법부도 박정희가 친일 인것을 인정했다고 언론에 떠들고 있어 하지만 그 판결문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친일파라 인정할 근거는 없다 하여도반대쪽 의견도 학문의 자유로서 보장되어야 하기에 명예훼손으로 볼 수가 없다 라고 되어있지다시 고상만의 총칭에 어떻게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보군을 보낼 수 있었냐 라는 부분은 백범일기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나오기도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는 광복군 oss 에 대한 미국 기밀 문서 해제에 나와있어 이것은 광복회 자료에 이미 있던내용으로 그 진위를 다시 확인한 거였는데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지 이 시기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보병8단에있던 때와 겹치고 있거든그리고 일본이 망할 것을 알고 국내진공 작전을 세웠던 그 정보는 지청천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의 정보력이라는 정황적증언들이 많아 그 당시 그런 고급 정보를 제공할 사람은 박정희 뿐이란 설과 지청천 장군의 독자적 정보력 이였단 설로나뉘는데 전자의 설도 상당히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왜냐면 당시 광복군이 가진 일본군 주둔 배치도는 당시 정보장교였고지리학에 식견이 풍부했던 박정희 가 없이는 입수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 참조) 확실하지 않고 근거는 부족해도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복군 이였단증언은 여기 다 쓸 수 없을만큼 많아 거기에는 육사 8기가 김종필 위주로 군사혁명을 모의했을때 미국에서 반대하며이한림과 박정희 대통령이 대표를 한다는 조건부로 승인을 했는데 이한림 역시 박정희의 비밀광복군을 증언했어 이한림 장군은정작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키자 반대 입장을 밝히고 진압하려 했지만 내전이 일어나면 북한의 침공이 염려되어군사행동은 하지 않았지 사실은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김종필을 만나 거사에 대한 모든 협의를 했기에 진압자체가 불가능 했던 것이며 김종필은 단신으로 찾아갔지만 체포 조차 되지 않았어지금의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미국의 cic 가 한국에 만든 지부였으며 국군소속은 커녕 대한민국 소속이 아니였어그 약자 조차 korcia 를 사용했거든 그리고 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복군에 있던 것은 일본에 패망하고 나서조선인 일본군들을 한국으로 귀국 시키기 위한 임시 귀국부대 란 설이 정설화 되었는데 패망하기 이전인 2월에 이미비밀광복군에서 직책을 주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 부분은 더 밝혀져야 하리라 본다아무튼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이 비밀광복군 이였단 증거는 철저히 무시 당하고 외면 받고 있지그 당시 좌익세력이 그렇게 찬양하는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오히려 중국이 조선의용대를 신뢰하고 비밀광복군을와해시키려 하는 등 승인 조차 안 해주는 일이 발생 광복군 2지대장에서 쫓겨나게 된다박정희는 실제로 일본 패망후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400 여 명의 인원을 철수하기 위한 광복군 제 3지대 내의1대대로 편입되었는데 만약 박정희가 친일파였다면 3지대장 김학규가 왜 박정희를 중대장으로 임명했을까?더구나 박정희는 이 광복군에서 바로 귀국하지 않고 철수가 다 이루어 지고도 6개월간을 비밀광복군이 해산될 때까지 끝까지 남아서 활동한다그리고 패전후 비밀광복군에 합류할 동안 최용덕 장군은 북경의 덕경루에 박정희 이주일 신현준의 숙소까지친히 마련해준다 귀국부대는 일본군 만주군 뿐만이 아니라 조선의용군 팔로군 장개석군 모두가 포함된 인원들이므로 굳이 친일파라면 박정희를 중대장으로 두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래의 학병출신이 중대장인 경우도보아서 중위란 계급을 우선한 편제도 아니였다특히나 최용덕 장군은 장개석의 전용기 조종사로 중국에 망명한 중국군 출신으로  광복군 총사령관을 했던 분인데어떻게 박정희를 위해 북경에 고급 음식점에 기거를 위한 장소를 친히 마련하여 준다는 것은 말이 될 수가 없는 일이다그리고 함께 기거했던 신현준 이주일은 모두 광복군 1지대의 간부로 대접 받았다여기서 그냥 개인의 증언이 아니라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백범 김구의 비서이며 광복군 비밀첩보원인김정균의 일기에서도 박정희의 비밀광복군 기록이 나와있다 그리고 여운형과 함께 좌익 사학계의 대부인 송남헌의해방3년사 에도 박정희는 비밀광보군 이란 기록이 있다 송남헌은 박정희 정권때 국가보안법 위반과 시위법 위반으로2년이나 옥살이를 했던 반박정희 성향이였다더구나 김정균의 일기는 의 증언과 일치하며 장창국 저 육사 졸업생 에서도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라고 나와있다실제 광복군 출신인 박영만의 오류가 있어 인정을 못하는 부분 (더구나 이건 소설 형식의 글) 을 제외하더라도김정균의 일기는 문용채의 증언과도 전부 사실관계가 일치하며 이러한 증언들은 여기 다 소개할 수 없을 만큼 많다이러한 증언들을 전부 부정한다는 것은 광복군 출신들이 전부 박정희 미화에 입을 맞춘 사기꾼 이란 사실밖에는해석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 모든 언론들이 이러한 사실규명을 오로지 박정희는 친일파란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게다양성은 커녕 하나의 금기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노무현 정권이 만든기준에서도 광복군 출신이 맞다실제 많은 일제 패망후 잠시 광복군에 머물렀던 사람들조차 노무현 정부는 근거 없는 증언만으로도 독립유공자로선정했다 더구나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 한 여운형마저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국2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서훈기준은 2002년 1회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광복군 출신자에 한하여 직속 상관을 포함한 2명 이상 광복군 동지의 증언을증거자료로 채택하기로 되어있다한겨레 21의 링크 현재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으로 보면 광복군 박정희 대통령도 독립유공자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8597박정희는 항상 나폴레옹 전기를 보며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인이기 이전에 그 아버지카를로 부오나파르테  는 프랑스 식민지인 코르시카의 의원인 동시에 독립운동가 였다 영국의 북아일랜드 독립운동테러단체인 IRA 는 영국 식민지 부대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운동 단체로 만들어졌다이승만의 친미독립 외교노선이 유효했듯이 항일 운동을 하기위해 비밀광복군으로 일본군 만주군으로 활동하며 군사학을배우고 군사 기밀정보를 독립군에게 제공하는 것이 과연 친일 활동일까? 친일 전력이 있는 여운형이나 오히려광복군을 와해한 김원봉 같은 북한의 공산당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찬양하는게 올바른 역사일까? 오히려박정희 대통령의 동료 교사나 제자들의 증언에 보면 대구사범 문경 초등학교 교사시절 학생들에게 한글과태극기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에 앞장섰단 증언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모든 증언을 무시하고 좌익세력은 대한민국의위인들에 대해 광기어린 김일성보다 더 큰 증오를 심도록 역사를 조작하고 선동해왔다박정희 대통령의 소서루 광복군 저자 박영만에 대하여 내가 광복군이냐? 라는 호통은 철저하게 믿으면서 박정희 시대에 역사는 모두 정권에 의하여 조작된 역사라고 떠든다 사실 박정희 정권의 독립유공자 찾기와역사 밝히기도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 독립운동사 라는 부분은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헌법에서계승하는 임시정부의 정신은 사실 31 독립운동에 의해 임시정부가 탄생했음에도 좌익들은 유관순을 우리역사에서 지워내고 그 자리를 좌익 사회주의 계열이 주인공인 것 처럼 채워 넣었다그 뿐만이 아니다 박정희를 유일한 친일파로 만들기 위해 한겨레는 김윤희를 내세워 이완용 평전을 만들어미화했고 민족문제연구소도 윤덕환 상임연구원이 이완용 평전을 만들어 그의 친일 행위를 미화하였다대한민국에는 이완용 평전이 이 2개 뿐이다 그들에게는 김일성은 독재자가 아니지만 박정희는 독재자요이완용은 친일파가 아니지만 이승만은 친일파 여만 한다 그리고 민족 문제연구소는 이완용 평전을추천도서로 지정까지 한다우리는 지금 박정희 대통령이 친일파였냐 광복군 이였나의 역사적 펙트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를 친파로메도하려는 종북좌익 세력의 선동과 광기에 맞서 싸우고 있다 하지만 언제인가 역사는 진실만이 남을 것이며 반드시 우리의 후세들은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만 한다 올바른 역사를 세운다는 것은 지금의 좌익세력의 광기어린, 역사마저 이념의 수단으로 왜곡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3줄요약1 박정희는 비밀광복군 이란것은 사의 정설이다2 박정희가 친일파 라는 것은 좌익들의 선동이다3 국정교과서는 반드시 통과되어야 한다 [출처]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 광복군이였나 정말 제대로 알아보자 스압주의 [링크] http://www.ilbe.com/6808849155   1980년 8월18일 육군본부가 펴낸 이 책에서 박정희는 해방 전 만주군으로 위장한 비밀광복군으로 등장한다.

1939년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로 간 것도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이며, 1945년 초 광복군에 가입해 제3 지대장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절한 시기에 일본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가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해방 이후이며, 그 전엔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검증된 학계 정설이다.

 박정희 본인도 1967년 자신의 비밀광복군설에 대해 부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승곤(93) 전 광복회장은 최근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광복군 선배들이 직접 박 대통령에게 ‘광복군이었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광복군사를 전공한 단국대 한시준 교수는 이와 관련해 “그릇된 기록을 바로잡지 않고 놔두면 후손들이 역사를 잘못 이해할 수 있는 만큼 개정판 발행 등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은 출세 노린 작가가 쓴 허구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었나. 적어도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공식 기록에선 그렇다.

‘만주에 있던 장교들은 그들대로의 지하조직이 있었다.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은 광복군 제3지대의 비밀 광복군으로서 거사 직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 (육군본부 발간 ‘창군전사’ 265쪽) 창군전사 말고도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묘사한 책은 더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사망)씨는 1984년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서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에 가담한 경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신태양악극단이 1945년 2월9일 (만주군) 7연대에 들어가 공연을 했다.

광복군은 이 악극단에 잡역부를 가장한 공작원 이용기를 투입했다.

이씨는 부대 간부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 중위와 신 대위에게 줬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 (‘육사 졸업생’ 26쪽)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밀광복군으로 묘사한 ‘광복군’(1967년), ‘창군전사’(1980년), ‘육사 졸업생’(1984년). 이 세 권의 책은 한 번 날조된 역사가 수정되지 않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박정희를 처음으로 광복군으로 묘사한 소설 ‘광복군’.비밀광복군설의 ‘원전(原典)’은 1967년 박영만(사망)씨가 쓴 소설 ‘광복군’이다.

광복군 출신인 박씨는 이 책에서 박정희의 일제 말기 행적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소상히 묘사했다.

‘광복군’에 따르면 만군 중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게 골자다.

 “대통령이란 그분의 위치가 위치니만큼 오해를 사기 쉬워 도에 넘칠 정도로 그분에 관한 것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본인의 교열까지 받았다.

박정희 동지는 격무 속에서도 원고를 자세히 읽어 주셨으며, 몇 군데 고쳐 달라는 당부까지 하셨다.

” 박씨는 ‘광복군’ 서문에 이렇게 썼다.

박정희 본인의 확인을 거쳤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93)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이 거짓임은 기존의 연구에서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5·16 이후 반혁명사건으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영만이 찾아왔다.

대뜸 ‘같이 박 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어느 지하운동 리더의 공적을 박 대통령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박창암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1967년 박영만은 기어이 ‘광복군’을 출간했다.

(…) 박영만은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호통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 (정운현 저 ‘실록 군인 박정희’ 118쪽)  박정희가 한때 광복군에 가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해방 이후의 일이다.

1945년 8월 이전에 그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박정희는 일제가 패망하자 중국인 장교들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피난하다 김학규 지대장이 지휘하는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었다.

말이 광복군이었지 일제의 만주군에 근무했던 그들로서는 쑥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그것은 광복군이라기보다 고향에 돌아오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귀향대였던 것이다.

  결국 육군본부의 ‘창군전사’는 한 출세지향적 작가의 상상력이 빚은 허구를 그대로 인용한 셈이다.

‘창군전사’보다 4년 늦게 나온 ‘육사 졸업생’ 또한 같은 오류를 되풀이했다.

 ◇중국 옌지(延吉) 옌볜대학 내 항일무명영웅기념비. 일제와 싸우다 숨진 수많은 무명 항일투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하지만 날조·왜곡된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는 한 이들의 넋은 저세상에서도 편치 않을 것이다.

일제 때 만주군에 속한 한국인들의 활동을 독립운동과 결부지으려는 시도는 1987년 김석범(전 해병대사령관)과 정일권이 함께 펴낸 ‘만주국군지(滿州國軍誌)’에서도 발견된다.

만주군 장교란 일본 괴뢰정권인 만주국 군관학교를 나와 주로 항일세력 토벌에 종사하며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동참한 이들인데도, 이들은 서문에서 “우리 만주군 출신은 일제 탄압 하에서 조국 땅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한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왜곡 사례는 이뿐이 아니다.

독립군 탄압에 앞장선 간도특설대에 대해 “토벌작전에서 다대한 전과를 올려 용명을 떨쳤다”(35쪽)는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일본군 중장까지 올랐다가 전후 전범으로 사형당한 홍사익 장군을 “몸은 일본군에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민족의 장래를 위해 힘쓴 분”(80쪽)으로 묘사했다.

평화재향군인회 표명렬(67·예비역 준장) 상임대표는 “그런 잘못된 기록들이 고쳐지지 않은 채 몇십년 지나면 사실로 굳어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개탄했다.

 특별취재팀=류순열·김태훈 세계일보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시작부터 오류군요. 박정희의 계급은 중위였지 중좌(중령)가 아닙니다.

광복이 되지 않았다면 일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중좌가 아니라 별까지 달 인물이었지면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 지요. 우리가 청산하고자하는 친일파는 창씨개명이나 강제징용에 의한 소극적 친일파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박정희와 같은 적극적 친일파 입니다.

 사실 창씨개명만으로 친일파라 단정하긴 어렵지만 일제강점기 때 창씨개명을 두 번씩이나 한 인물은 박정희외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위 글을 쓴 <의병정신선양회>나 <윤봉길기념사업회>, <광복회> 등은 '전애국·후부일' 우익(?)들이 다 점령한 상태입니다.

 대표적인 항일 생존독립운동가와 유족단체인 <광복회> 조차도 초대 회장이 민족대표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인 이갑성인데, 그는 후에 '이와모토 쇼이치'라는 창씨개명으로 밀정 노릇을 한 '전애국·후부일'을 정당화시킨 장본인 입니다.

 이 인간때문에 <광복회>는 항일인사와 친일인사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광복회>라는 한 울타리에 뒤섞이게 되었죠.  <광복회>는 1965년 이후 역대 독재정권 시절을 지나면서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독립운동가라면 해방 후 분단 조국의 통일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에 당연히 참여했어야 함에도 그런 인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독재정권에 얼굴을 내민 이들이 적지 않았어요. 조경환씨나 김정균씨의 발언들은 글쓴이에 의해 왜곡됐거나 박정희를 미화해서 한자리 챙겨보고자 하는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이었겠지요. 참 마음 아픈 현실 입니다.

 이미 돌아가셔서 증언을 할 수 없는 김구 선생님을 끌어들여 박정희를  미화시킬려는 작태를 보면 참 가증스럽습니다.

무덤에서 뛰쳐나와 호통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박정희가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등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백범일지]의  『아. 그리운 조국 산하』를 근거로 들었는데, 내용중에 그런 글이 어디 있으며 '박정희'가 일본군 군대에서 탈출했다는 말이 어디 있나요?  탈출한 50 여명 청년중에 박정희가 있었다고 [백범일지]에 나와 있나요? 김구 선생님을 팔아 박정희를 미화하고 싶어도 자료가 없어, 기껏 자료란 게 [백범일지]의 말도 안되는 근거나 들이대니 참 안타깝습니다.

 박정희가 독립투사들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는 등 노력한 점은 인정하지만, 상대적으로 취약한 도덕적 정통성을 보완하고 싶은 필요성과 일왕의 충성스런 군인이었던 박정희가 친일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픈 상처를 덮어줄 장치가 필요했을 겁니다.

  < http://blog.naver.com/one2only/90014977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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