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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경적시위



이두용 감독은 1일 밤 전주 고사동 전주시네마타운에서 주연 배우였던 하명중 감독과 함께 영화 상영 후 관객들과 만나 촬영과 개봉 당시를 회상했다.

"개봉 첫날 명보극장에서 봤는데 내가 찍은 영화 같지가 않더군요. 나와서 상영표를 봤더니 1시간 40분으로 돼 있었습니다.

30분 보다가 나와 버렸어요. '이건 내 영화가 아니다' 싶어 20년간 다시는 보지 않았죠. 그리고 지난해 영상자료원에서 처음 본 겁니다.

" 이 감독은 충격이 큰 나머지 다시는 영화를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곧 "누구 좋으라고 영화를 안 하겠느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탄생한 영화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은 '피막'이다.

"그 일을 훈장처럼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열심히 만들었으면 다 보여주고 잘했다, 못했다 평가를 해야한다는 거죠. 그 다음 영화는 검열 걱정을 안 하고 편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역사로 올라가면 뭐라고 안하겠지, 생각에 40일 동안 편하게 찍은 영화가 '피막'이에요."영화 '최후의 증인'은 오형사(하명중)가 전국을 돌며 양조장 주인 살해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다가 6.25 전쟁, 이념 갈등 등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과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다.

이 사건의 뒤에는 기구한 운명의 여자 손지혜(정윤희), 그를 지키는 우직한 사내 황바우(최불암)가 있다.

"당시 사회상이 답답했어요. 정부가 인간보호를 먼저 해야 하는데 자연보호만 외치고 있었죠. 6.25 전쟁을 이념이나 전쟁이 아니라 그로 인한 사람들의 갈등, 사회의 부패한 모습을 그대로 그려보고 싶었죠. 하명중씨가 아주 잘했어요.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역할이었는데 120% 잘 표현했죠."주연을 맡았고 나중에 연출로도 데뷔해 활동 중인 하명중 감독은 "촬영 환경이 열악해서 아주 힘들었다"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날에 촬영을 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정윤희씨가 도망친 서울 동네를 촬영한 곳이 남산공원이었는데 계속 기침이 나와 촬영을 제대로 못했어요. 최루탄 때문이었죠. 그날이 바로 5.18 광주 사태가 벌어지는 날이었던 겁니다.

서울 대학생들이 광주에 가려고 하는데 군이 막으니까 남산으로 올라온 거죠. 오늘 영화를 보니 그 일이 먼저 생각납니다.

"이 자리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좋은 영화인이 되기 위한 조언을 구하자 대선배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소신을 펼쳤다.

"영화는 거짓말을 사실 같이 그려야 합니다.

그게 단지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 만들어야, 진실을 담아야 한다는 겁니다.

또 좋은 연기는 연기를 안 하는 것처럼 하는 겁니다.

그러니 감독은 서로 사귀는 사람처럼 배우를 가까이 대해야 하죠." (이두용)"사람들은 세상살이가 짜증나서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니까 꿈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미술, 문학, 사회 등 두루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또 감독은 만들어진 배우를 쓰는 게 아니라 배우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배우가 스스로 따라오게 돼 있어요." (하명중)cherora@yna.co.kr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둘러보기,찾기광주의 국립 5·18 묘지(구묘역)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또는 광주민중항쟁(光州民中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주의정부 수립,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과 12·12 군사 반란를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1].당시 공수부대 등을 계엄군으로 동원한 신군부의 유혈진압으로 피살자 191명, 부상자는 852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광주를 비롯한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으며,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현재까지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높은 편이다.

또, 이로 인해 대체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영남지역과의 갈등이 격화되어 지역 감정이 크게 확산되기도 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이후 반독재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일부 보수세력등에서는 북한군의 개입설을 주장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

목차

[숨기기]1 명칭2 발생 배경3 전개 3.1 전체 개요3.2 날짜별 상세 일지3.3 광주 오적4 피해5 사건 이후의 영향과 평가 5.1 일부 우익 단체의 주장5.2 관련 판례6 같이 보기 6.1 작품6.2 참고자료7 주석8 바깥 고리

[편집] 명칭

‘5?18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언론에 의하여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또는 ‘폭동’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2][3][4]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제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그렇게 불러 처음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화 되었다.

한편, 신군부와의 투쟁을 기층 민중이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 항쟁’이란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되어 왔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기타 ‘광주 의거’, ’광주 자유 민주 의거’, ’광주 민주 의거’, ’광주 자유 의거’, ‘광주 학살’, ‘5월 항쟁’ 등의 명칭도 존재한다.

[편집]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이후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으나, 그해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 본부장 전두환(국군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편집] 전개

[편집] 전체 개요

1980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5월 17일 전두환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자정 이후 서울 이외의 주요 도시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고 광주에 공수부대 병력이 도착한다.

비상계엄의 소식을 들은 대학생 100여 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했다.

조선대학교 및 전남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7 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는 ‘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명의 작전에 따라 주둔지 경비를 위해 일부 병력을 대학 구내에 남겨 놓고 금남로로 이동하여 계엄 반대를 정당하게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까지 학생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20일에는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지며 시위대의 규모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0일 밤 광주역, 21일 낮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를, 언론이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영합해 ‘불순 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광주 시청을 점거했다.

또한 21일에는 예비군 부대의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하면서 계엄군에 대항한 자유 민주화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자유 민주화 시민군은 전남도청 건물 안 계엄군 병력과 교전을 한 후 계엄군 병력이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한 후에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하여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자유 민주화 시민군 자체적으로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무정부 상태였던 이 기간 동안 광주 시민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 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시민의 자치가 실시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새벽,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대부분 살해하고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편집] 날짜별 상세 일지

5월 17일 토요일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24시 00분 -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했다.

5월 18일 일요일 0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10시 00분 -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10시 15분 -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위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첫 번째 부상자 발생)10시 20분 -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15시 40분 - 금남로 유동3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언어 장애인인 김경철 씨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당함.19시 02분 - 계엄사령부, 통금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03시 00분 -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김경철 씨 병원에서 사망 - 최초의 희생자).0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하였고, 3

4명이 한 조가 되어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14시 40분 -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16시 30분 -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20시 00분 -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타도"를 외침. 5월 20일 화요일 08시 00분 - 광주 시내 고등학교 휴교 조치 발령.10시 20분 -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마구잡이 구타 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18시 40분 - 택시 및 버스 200여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20시 10분 - 시위대, 도청으로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21시 05분 -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21시 50분 -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23시 00분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 수요일 00시 35분 :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02시 18분 : 시외전화 두절04시 00분 :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04시 30분 : 광주KBS건물 방화08시 00분 :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10시 15분 :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당시 광주 시내에 출동한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많지 않았음.10시 19분 : 광주세무서건물 전소11시 10분 :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12시 59분 :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13시 00분 :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13시 20분 :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14시 15분 :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14시 35분 :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14시 40분 :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15시 48분 :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16시 00분 :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16시 43분 :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17시 30분 :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09시 00분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10시 30분 :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11시 25분 :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12시 00분 :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13시 30분 :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15시 58분 :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 대회 개최17시 18분 :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17시 40분 :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19시 00분 :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를 보도하였다.

21시 30분 :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0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10시 00분 :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 시작11시 45분 :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13시 00분 :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13시 20분 : 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14시 20분 :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14시 50분 :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11시 00분 :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15시 00분 :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17시 00분 :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21시 10분 :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05시 20분 :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08시 00분 :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10시 00분 :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14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15시 00분 :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19시 10분 :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시킴.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03시 00분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04시 00분 :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04시 10분 :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05시 10분 :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06시 00분 :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07시 00분 :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08시 50분 : 시내전화 통화 재개

[편집] 광주 오적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당시 사건 발생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거론되는 인물 5명은 광주 5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정호용(당시 공수특전사령관)노태우(당시 수경사령관)박준병(당시 20사단장)이희성(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다음 2명을 포함하여 광주 7적이라는 명칭도 있다.

최규하(당시 대통령)존 위컴(John Wickam,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당시 미국이 전두환의 신군부 및 광주 학살을 묵인했다는 주장이 있다.

)

[편집] 피해

훗날 정부 발표 기준으로 계엄군의 광주민주화운동진압으로 인한 인명 피해자는 피살자 191명, 부상자는 852명이었다.

이 부분은 한국근현대사에 관한 부분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편집] 사건 이후의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미국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한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미국을 한국전쟁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재고되었다.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은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하였으나, 1988년 5공청문회를 거치고 제6공화국이 출범된 후인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여,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 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12.21)과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12.17)이 제정[5]되면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비(非)자유 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또한 계엄군들이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되었으며 그 자격도 박탈되었다.

또한 이 일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5]2007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였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하였다.

[6]

[편집] 일부 우익 단체의 주장

북조선군 개입설 조선인민군(북조선군) 특수부대 출신자 출신인 자유북한군인연합 등은 이 일에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세스토랑에서 회견을 열고 “5.18광주사태는 (북한의)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밝히며 의혹을 제기하였다.

[7] 이후 2008년에도 인민군 출신 탈북자들이 회견을 열어 당시 광주에 북조선 특수부대가 개입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8][9][10][11][12]2008년 6월에는 뉴라이트 연합의 서양사 전공자인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며, 북조선군 개입설을 다시 언급했다.

[13]대한민국의 공학박사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는 한편, 북조선군 개입설을 또 한번 주장하였다.

[14] 비판 보수단체 일각에서는 시민군의 무장 그 자체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군의 개입에 따른 폭동사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으나,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전무하기 때문에 신빙성은 없다.

특히, 당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대로 사살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고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경찰서 등의 무기고를 습격하는 것은 굳이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고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에 보수단체의 주장에는 허점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특히 광주에서 40여명의 북한군이 사상했으며, 이들을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켰다는 우파들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반박을 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계엄군에 의해 사살된 민주화 열사들의 신분은 모두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것도 이 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하는 입장도 있다.

[12] 이러한 주장 자체가 상식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는 반박도 대두되었다.

[15]게다가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개 시로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무려 300km나 떨어진 소도시였을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북한측에서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별다른 이익을 얻거나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줄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특히 광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북 군산에 주한 미군 공군기지가 있는 상황에서 북한군이 정말 개입했다면 주한미군 사령부나 미국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했을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북한군 개입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2008년 5월 5.18 관련단체들은 전사모, 지만원, 역사학도 등에 대한 법적 대응절차를 거쳐[16]고소한 바 있다.

[17][18] 기타 시스템클럽의 논객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19]2009년 1월 전사모, 지만원, 역사학도 등의 주장이 왜곡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20]

[편집] 관련 판례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95년 말 12·12 군사 반란 및 5·18 내란혐의 등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이 처벌된 일이 있었다.

이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전주 경적시위] 매력을 알아보자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되고, 국회에서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이들의 처벌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당시 대법원은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하였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원, 노태우는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 받았다.

이후 징역형은 사면되었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납부하고 있다.

[21]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 준 천주교 신부에 대해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대한민국의 대표적 인권변호사인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

[22][23]

[편집] 같이 보기

민주화운동 전남도청 본관 10·26 사건 12·12 군사 반란 5·17 군사 반란 노태우 전두환 박희도 제4공화국 제5공화국

[편집] 작품

드라마 모래시계 드라마 제4공화국 드라마 제5공화국 영화 《화려한 휴가》 영화 《박하사탕》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만화 26년

[편집] 참고자료

김양오, 《光州 보고서》, 도서출판 청음, 1988

[편집] 주석

↑ 브리태니커 사전의 광주민중항쟁 설명 ↑ 노컷뉴스 ↑ 해외촛불 파도타기, 다시 타올랐습니다 - 오마이뉴스 ↑ 한국아이닷컴 뉴스부. “광주사태야? 5.18민주화운동이야?”, 《》, 2005년 7월 11일 작성. 2009년 3월 21일 확인. ↑ 가 나 현대호 (2006년 12월 1일). 광주민주화운동. 나라기록포털. 국가기록원. 2009년 3월 21일에 확인. ↑ 김동현. “박근혜, "5.18은 민주화 운동"”, 《views&news》, 《뷰스앤 뉴스》, 2007년 8월 5일 작성. 2009년 3월 21일 확인. ↑ 윤경원,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됐다"”, 《데일리안》, 《(주)이비뉴스》, 2006년 12월 20일 작성. 2009년 3월 21일 확인.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올인코리아 ↑ 세상을 밝히는 자유언론 - 프리존뉴스 ↑ 가 나 김동현 . “탈북자들 “5.18때 북한군 6백여명 개입” 파문”, 《뷰스앤뉴스》, 2006년 12월 20일 작성. 2008년 10월 31일 확인. ↑ 뉴라이트대표 "광주사태때 북한군 5, 6백명 들어왔다더라" 뷰스앤뉴스 2008-06-02자 기사 ↑ http://www.systemclub.co.kr/[모호한 표현] ↑ ID '민주시민'. “북한군 침투 주장이 거짓인 이유 5가지....”,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의 자유발언대》, 2006년 12월 22일 작성. 2008년 10월 31일 확인. ↑ 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80515_0007584524 ↑ 5·18 단체, 지만원씨 등 고소 왜곡·비방글 명예훼손 혐의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 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80603_0007811324 ↑ 시스템클럽 ↑ 5·18 왜곡 '도 넘었다' 광주드림 2009년 01월 06일자 ↑ 당시 대법원 판결문 ↑ 대법원 1983.3.8. 선고 82도3248 판결 【국가보안법위반·현주건조물방화치상·현주건조물방화예비·계엄법위반·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특수공무집행방해·범인은닉·범인도피】 ↑ 이회창 총재가 참여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대법원 상고심 판결문 (요약)

[편집] 바깥 고리

518 기념 재단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광주 5.18 민주묘지 5.18 기념문화센터 518 민주유공자유족회 518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오월의 인연, 다음까페 80518 26년 - 강도영의 만화 작품. [숨기기]v ? d ? e12·12 군사 반란 및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자 처벌전두환(무기징역, 추징금 2천2백5억원) 노태우(징역 17년형, 추징금 2천6백28억원) 황영시·허화평·이학봉(징역 8년) 정호용·이희성·주영복(징역 7년) 허삼수(징역 6년) 최세창(징역 5년) 차규헌·장세동·신윤희·박종규(징역 3년 6월)대법원 판결문:1997년4월 17일출처:NAVER지식iN   출처:http://blog.daum.net/ss1119/1678                                                                                                        [출처] [펌] 사진: 광주 무장시민군의 실체 - 이것이 광주 사태다 !|작성자 한글별명             http://cafe.daum.net/issue21출처:http://cafe.naver.com/lomofriends/16491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묘역5.18광주민주화운동 추모탑추념문유영봉안소 무장항쟁군상출처:http://blog.daum.net/bookxy1005/16893972   

광주시 5월정신 속으로…헌혈.주먹밥.안내책자 등 다채

기사 2009-05-13 14:53 【광주=뉴시스】5.18민주화운동 29주년을 맞아 광주시청 공무원들이 헌혈과 주먹밥 체험 등 5월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펼치고 있다.

광주시는 13일 오전 10부터 오후 5시까지 시청 1층 행정홀에서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 혈액원' 주관으로 사랑의 헌혈행사를 가졌다.

1980년 5월 당시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너나없이 헌혈에 나섰던 그날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취지다.

이날 헌혈행사에는 오전 일찍부터 사랑의 헌혈에 참가하려는 공무원과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광주시는 또 14일 구내식당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주먹밥 나눠먹기' 체험행사를 갖는다.

1980년 당시 민주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며 시민 모두 하나가 됐던 대동정신을 다시 되살리겠다는 취지다.

광주시 관계자는 "세계속의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로 우뚝 서게 한 광주의 5.18정신을 공무원들이 몸소 느끼고 실천하기 위해 민주정신 계승 체험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5.18주간 동안 광주를 찾는 방문객들을 위해 오월 대동정신을 알리는 안내 책자도 제작했다.

5.18기념문화센터는 홍보용 소책자 2000부와 센터 홍보리플릿 8000매를 제작해 국립5.18민주묘지와 5.18자유공원 등에 비치한다.

홍보책자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성격과 의의, 정신을 소개하고 사진으로 보는 오월화보와 함께 5월 당시 10일간의 상황을 일자별로 정리했다.

외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계엄군 지휘도와 12.12쿠데타 체계도, 시간대별로 보는 10일간의 민주화운동 부록도 함께 실었다.

광주시는 영어, 일어, 중국어 등 번역판도 발간할 계획이다.

<관련기사 있음>구길용 kykoo1@newsis.com  이두용 감독은 1일 밤 전주 고사동 전주시네마타운에서 주연 배우였던 하명중 감독과 함께 영화 상영 후 관객들과 만나 촬영과 개봉 당시를 회상했다.

"개봉 첫날 명보극장에서 봤는데 내가 찍은 영화 같지가 않더군요. 나와서 상영표를 봤더니 1시간 40분으로 돼 있었습니다.

30분 보다가 나와 버렸어요. '이건 내 영화가 아니다' 싶어 20년간 다시는 보지 않았죠. 그리고 지난해 영상자료원에서 처음 본 겁니다.

" 이 감독은 충격이 큰 나머지 다시는 영화를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곧 "누구 좋으라고 영화를 안 하겠느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탄생한 영화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은 '피막'이다.

"그 일을 훈장처럼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열심히 만들었으면 다 보여주고 잘했다, 못했다 평가를 해야한다는 거죠. 그 다음 영화는 검열 걱정을 안 하고 편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역사로 올라가면 뭐라고 안하겠지, 생각에 40일 동안 편하게 찍은 영화가 '피막'이에요."영화 '최후의 증인'은 오형사(하명중)가 전국을 돌며 양조장 주인 살해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다가 6.25 전쟁, 이념 갈등 등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과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다.

이 사건의 뒤에는 기구한 운명의 여자 손지혜(정윤희), 그를 지키는 우직한 사내 황바우(최불암)가 있다.

"당시 사회상이 답답했어요. 정부가 인간보호를 먼저 해야 하는데 자연보호만 외치고 있었죠. 6.25 전쟁을 이념이나 전쟁이 아니라 그로 인한 사람들의 갈등, 사회의 부패한 모습을 그대로 그려보고 싶었죠. 하명중씨가 아주 잘했어요.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역할이었는데 120% 잘 표현했죠."주연을 맡았고 나중에 연출로도 데뷔해 활동 중인 하명중 감독은 "촬영 환경이 열악해서 아주 힘들었다"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날에 촬영을 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정윤희씨가 도망친 서울 동네를 촬영한 곳이 남산공원이었는데 계속 기침이 나와 촬영을 제대로 못했어요. 최루탄 때문이었죠. 그날이 바로 5.18 광주 사태가 벌어지는 날이었던 겁니다.

서울 대학생들이 광주에 가려고 하는데 군이 막으니까 남산으로 올라온 거죠. 오늘 영화를 보니 그 일이 먼저 생각납니다.

"이 자리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좋은 영화인이 되기 위한 조언을 구하자 대선배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소신을 펼쳤다.

"영화는 거짓말을 사실 같이 그려야 합니다.

그게 단지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 만들어야, 진실을 담아야 한다는 겁니다.

또 좋은 연기는 연기를 안 하는 것처럼 하는 겁니다.

그러니 감독은 서로 사귀는 사람처럼 배우를 가까이 대해야 하죠." (이두용)"사람들은 세상살이가 짜증나서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니까 꿈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미술, 문학, 사회 등 두루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또 감독은 만들어진 배우를 쓰는 게 아니라 배우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배우가 스스로 따라오게 돼 있어요." (하명중)cherora@yna.co.kr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둘러보기,찾기광주의 국립 5·18 묘지(구묘역)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또는 광주민중항쟁(光州民中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주의정부 수립,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과 12·12 군사 반란를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1].당시 공수부대 등을 계엄군으로 동원한 신군부의 유혈진압으로 피살자 191명, 부상자는 852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광주를 비롯한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으며,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현재까지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높은 편이다.

또, 이로 인해 대체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영남지역과의 갈등이 격화되어 지역 감정이 크게 확산되기도 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이후 반독재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전주 경적시위] 에 대한 몇가지 이슈



일부 보수세력등에서는 북한군의 개입설을 주장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

목차

[숨기기]1 명칭2 발생 배경3 전개 3.1 전체 개요3.2 날짜별 상세 일지3.3 광주 오적4 피해5 사건 이후의 영향과 평가 5.1 일부 우익 단체의 주장5.2 관련 판례6 같이 보기 6.1 작품6.2 참고자료7 주석8 바깥 고리

[편집] 명칭

‘5?18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언론에 의하여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또는 ‘폭동’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2][3][4]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제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그렇게 불러 처음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화 되었다.

한편, 신군부와의 투쟁을 기층 민중이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 항쟁’이란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되어 왔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기타 ‘광주 의거’, ’광주 자유 민주 의거’, ’광주 민주 의거’, ’광주 자유 의거’, ‘광주 학살’, ‘5월 항쟁’ 등의 명칭도 존재한다.

[편집]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이후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으나, 그해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 본부장 전두환(국군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편집] 전개

[편집] 전체 개요

1980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5월 17일 전두환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자정 이후 서울 이외의 주요 도시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고 광주에 공수부대 병력이 도착한다.

비상계엄의 소식을 들은 대학생 100여 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했다.

조선대학교 및 전남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7 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는 ‘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명의 작전에 따라 주둔지 경비를 위해 일부 병력을 대학 구내에 남겨 놓고 금남로로 이동하여 계엄 반대를 정당하게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까지 학생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20일에는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지며 시위대의 규모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0일 밤 광주역, 21일 낮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를, 언론이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영합해 ‘불순 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광주 시청을 점거했다.

또한 21일에는 예비군 부대의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하면서 계엄군에 대항한 자유 민주화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자유 민주화 시민군은 전남도청 건물 안 계엄군 병력과 교전을 한 후 계엄군 병력이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한 후에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하여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자유 민주화 시민군 자체적으로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무정부 상태였던 이 기간 동안 광주 시민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 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시민의 자치가 실시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새벽,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대부분 살해하고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편집] 날짜별 상세 일지

5월 17일 토요일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24시 00분 -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했다.

5월 18일 일요일 0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10시 00분 -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10시 15분 -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위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첫 번째 부상자 발생)10시 20분 -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15시 40분 - 금남로 유동3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언어 장애인인 김경철 씨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당함.19시 02분 - 계엄사령부, 통금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03시 00분 -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김경철 씨 병원에서 사망 - 최초의 희생자).0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하였고, 3

4명이 한 조가 되어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14시 40분 -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16시 30분 -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20시 00분 -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타도"를 외침. 5월 20일 화요일 08시 00분 - 광주 시내 고등학교 휴교 조치 발령.10시 20분 -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마구잡이 구타 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18시 40분 - 택시 및 버스 200여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20시 10분 - 시위대, 도청으로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21시 05분 -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21시 50분 -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23시 00분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 수요일 00시 35분 :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02시 18분 : 시외전화 두절04시 00분 :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04시 30분 : 광주KBS건물 방화08시 00분 :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10시 15분 :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당시 광주 시내에 출동한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많지 않았음.10시 19분 : 광주세무서건물 전소11시 10분 :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12시 59분 :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13시 00분 :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13시 20분 :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14시 15분 :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14시 35분 :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14시 40분 :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15시 48분 :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16시 00분 :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16시 43분 :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17시 30분 :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09시 00분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10시 30분 :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11시 25분 :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12시 00분 :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13시 30분 :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15시 58분 :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 대회 개최17시 18분 :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17시 40분 :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19시 00분 :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를 보도하였다.

21시 30분 :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0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10시 00분 :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 시작11시 45분 :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13시 00분 :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13시 20분 : 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14시 20분 :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14시 50분 :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11시 00분 :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15시 00분 :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17시 00분 :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21시 10분 :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05시 20분 :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08시 00분 :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10시 00분 :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14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15시 00분 :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19시 10분 :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시킴.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03시 00분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04시 00분 :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04시 10분 :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05시 10분 :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06시 00분 :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07시 00분 :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08시 50분 : 시내전화 통화 재개

[편집] 광주 오적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당시 사건 발생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거론되는 인물 5명은 광주 5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정호용(당시 공수특전사령관)노태우(당시 수경사령관)박준병(당시 20사단장)이희성(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다음 2명을 포함하여 광주 7적이라는 명칭도 있다.

최규하(당시 대통령)존 위컴(John Wickam,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당시 미국이 전두환의 신군부 및 광주 학살을 묵인했다는 주장이 있다.

)

[편집] 피해

훗날 정부 발표 기준으로 계엄군의 광주민주화운동진압으로 인한 인명 피해자는 피살자 191명, 부상자는 852명이었다.

이 부분은 한국근현대사에 관한 부분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편집] 사건 이후의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미국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한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미국을 한국전쟁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재고되었다.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은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하였으나, 1988년 5공청문회를 거치고 제6공화국이 출범된 후인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여,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 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12.21)과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12.17)이 제정[5]되면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비(非)자유 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또한 계엄군들이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되었으며 그 자격도 박탈되었다.

또한 이 일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5]2007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였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하였다.

[6]

[편집] 일부 우익 단체의 주장

북조선군 개입설 조선인민군(북조선군) 특수부대 출신자 출신인 자유북한군인연합 등은 이 일에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세스토랑에서 회견을 열고 “5.18광주사태는 (북한의)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밝히며 의혹을 제기하였다.

[7] 이후 2008년에도 인민군 출신 탈북자들이 회견을 열어 당시 광주에 북조선 특수부대가 개입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8][9][10][11][12]2008년 6월에는 뉴라이트 연합의 서양사 전공자인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며, 북조선군 개입설을 다시 언급했다.

[13]대한민국의 공학박사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는 한편, 북조선군 개입설을 또 한번 주장하였다.

[14] 비판 보수단체 일각에서는 시민군의 무장 그 자체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군의 개입에 따른 폭동사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으나,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전무하기 때문에 신빙성은 없다.

특히, 당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대로 사살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고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경찰서 등의 무기고를 습격하는 것은 굳이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고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에 보수단체의 주장에는 허점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특히 광주에서 40여명의 북한군이 사상했으며, 이들을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켰다는 우파들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반박을 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계엄군에 의해 사살된 민주화 열사들의 신분은 모두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것도 이 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하는 입장도 있다.

[12] 이러한 주장 자체가 상식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는 반박도 대두되었다.

[15]게다가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개 시로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무려 300km나 떨어진 소도시였을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북한측에서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별다른 이익을 얻거나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줄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특히 광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북 군산에 주한 미군 공군기지가 있는 상황에서 북한군이 정말 개입했다면 주한미군 사령부나 미국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했을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북한군 개입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2008년 5월 5.18 관련단체들은 전사모, 지만원, 역사학도 등에 대한 법적 대응절차를 거쳐[16]고소한 바 있다.

[17][18] 기타 시스템클럽의 논객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19]2009년 1월 전사모, 지만원, 역사학도 등의 주장이 왜곡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20]

[편집] 관련 판례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95년 말 12·12 군사 반란 및 5·18 내란혐의 등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이 처벌된 일이 있었다.

이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되고, 국회에서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이들의 처벌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당시 대법원은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하였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원, 노태우는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 받았다.

이후 징역형은 사면되었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납부하고 있다.

[21]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 준 천주교 신부에 대해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대한민국의 대표적 인권변호사인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

[22][23]

[편집] 같이 보기

민주화운동 전남도청 본관 10·26 사건 12·12 군사 반란 5·17 군사 반란 노태우 전두환 박희도 제4공화국 제5공화국

[편집] 작품

드라마 모래시계 드라마 제4공화국 드라마 제5공화국 영화 《화려한 휴가》 영화 《박하사탕》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만화 26년

[편집] 참고자료

김양오, 《光州 보고서》, 도서출판 청음, 1988

[편집] 주석

↑ 브리태니커 사전의 광주민중항쟁 설명 ↑ 노컷뉴스 ↑ 해외촛불 파도타기, 다시 타올랐습니다 - 오마이뉴스 ↑ 한국아이닷컴 뉴스부. “광주사태야? 5.18민주화운동이야?”, 《》, 2005년 7월 11일 작성. 2009년 3월 21일 확인. ↑ 가 나 현대호 (2006년 12월 1일). 광주민주화운동. 나라기록포털. 국가기록원. 2009년 3월 21일에 확인. ↑ 김동현. “박근혜, "5.18은 민주화 운동"”, 《views&news》, 《뷰스앤 뉴스》, 2007년 8월 5일 작성. 2009년 3월 21일 확인. ↑ 윤경원,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됐다"”, 《데일리안》, 《(주)이비뉴스》, 2006년 12월 20일 작성. 2009년 3월 21일 확인.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올인코리아 ↑ 세상을 밝히는 자유언론 - 프리존뉴스 ↑ 가 나 김동현 . “탈북자들 “5.18때 북한군 6백여명 개입” 파문”, 《뷰스앤뉴스》, 2006년 12월 20일 작성. 2008년 10월 31일 확인. ↑ 뉴라이트대표 "광주사태때 북한군 5, 6백명 들어왔다더라" 뷰스앤뉴스 2008-06-02자 기사 ↑ http://www.systemclub.co.kr/[모호한 표현] ↑ ID '민주시민'. “북한군 침투 주장이 거짓인 이유 5가지....”,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의 자유발언대》, 2006년 12월 22일 작성. 2008년 10월 31일 확인. ↑ 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80515_0007584524 ↑ 5·18 단체, 지만원씨 등 고소 왜곡·비방글 명예훼손 혐의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 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80603_0007811324 ↑ 시스템클럽 ↑ 5·18 왜곡 '도 넘었다' 광주드림 2009년 01월 06일자 ↑ 당시 대법원 판결문 ↑ 대법원 1983.3.8. 선고 82도3248 판결 【국가보안법위반·현주건조물방화치상·현주건조물방화예비·계엄법위반·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특수공무집행방해·범인은닉·범인도피】 ↑ 이회창 총재가 참여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대법원 상고심 판결문 (요약)

[편집] 바깥 고리

518 기념 재단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광주 5.18 민주묘지 5.18 기념문화센터 518 민주유공자유족회 518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오월의 인연, 다음까페 80518 26년 - 강도영의 만화 작품. [숨기기]v ? d ? e12·12 군사 반란 및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자 처벌전두환(무기징역, 추징금 2천2백5억원) 노태우(징역 17년형, 추징금 2천6백28억원) 황영시·허화평·이학봉(징역 8년) 정호용·이희성·주영복(징역 7년) 허삼수(징역 6년) 최세창(징역 5년) 차규헌·장세동·신윤희·박종규(징역 3년 6월)대법원 판결문:1997년4월 17일출처:NAVER지식iN   출처:http://blog.daum.net/ss1119/1678                                                                                                        [출처] [펌] 사진: 광주 무장시민군의 실체 - 이것이 광주 사태다 !|작성자 한글별명             http://cafe.daum.net/issue21출처:http://cafe.naver.com/lomofriends/16491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묘역5.18광주민주화운동 추모탑추념문유영봉안소 무장항쟁군상출처:http://blog.daum.net/bookxy1005/16893972   

광주시 5월정신 속으로…헌혈.주먹밥.안내책자 등 다채

기사 2009-05-13 14:53 【광주=뉴시스】5.18민주화운동 29주년을 맞아 광주시청 공무원들이 헌혈과 주먹밥 체험 등 5월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펼치고 있다.

광주시는 13일 오전 10부터 오후 5시까지 시청 1층 행정홀에서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 혈액원' 주관으로 사랑의 헌혈행사를 가졌다.

1980년 5월 당시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너나없이 헌혈에 나섰던 그날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취지다.

이날 헌혈행사에는 오전 일찍부터 사랑의 헌혈에 참가하려는 공무원과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광주시는 또 14일 구내식당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주먹밥 나눠먹기' 체험행사를 갖는다.

1980년 당시 민주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며 시민 모두 하나가 됐던 대동정신을 다시 되살리겠다는 취지다.

광주시 관계자는 "세계속의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로 우뚝 서게 한 광주의 5.18정신을 공무원들이 몸소 느끼고 실천하기 위해 민주정신 계승 체험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5.18주간 동안 광주를 찾는 방문객들을 위해 오월 대동정신을 알리는 안내 책자도 제작했다.

5.18기념문화센터는 홍보용 소책자 2000부와 센터 홍보리플릿 8000매를 제작해 국립5.18민주묘지와 5.18자유공원 등에 비치한다.

홍보책자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성격과 의의, 정신을 소개하고 사진으로 보는 오월화보와 함께 5월 당시 10일간의 상황을 일자별로 정리했다.

외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계엄군 지휘도와 12.12쿠데타 체계도, 시간대별로 보는 10일간의 민주화운동 부록도 함께 실었다.

광주시는 영어, 일어, 중국어 등 번역판도 발간할 계획이다.

<관련기사 있음>구길용 kykoo1@newsis.com  11.22. <변조, 절대불허: 저작권자, Daum Cafe: '한국 네티즌본부'> 천주교 정의구현 전주교구사제단은 이날 오후 7시 전북 군산시 수송동성당에서 ‘불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할 예정이다군산 수송동성당 마귀 쫓기 대선부정 대통령 사퇴 요구 정의구현사제단 마지막 발악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소속 사제들은 11월22일 전북 군산 수송동성당 본당에서 불법 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치올렸다.

“전주교구의 대통령 사퇴 촉구 미사는 전주교구의 단독결정”이라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은 주체 행사는 아니라고 했으나 정의구현사제단 단골 문정현신부가 이끌고 있었다.

김찬수 대표와 시민애국운동가 3분 그리고 새마음 포럼 이신훈 사무총장이 승용차로 2시 서울을 출발해 군산으로 갔다.

군산 가는 도중에 제주 교구에서 냉담중이라는 교우 한분이 우리의 팸플릿을 보고 전화를 했다.

팸플릿 읽어 보니 속 시원하다고 했다.

강우일 주교가 제주에 부임하며 성당이 정치선전장이 되었다고 개탄 했다.

자기는 40명의 교우를 입교시켜 교구청 표창가지 받은 모범신자였는데 신부님들이 정치선전을 해서 언쟁을 벌이다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냉담을 풀고 교회에 돌아가 정의구현사제단과 투쟁을 하라고 했더니 내일 당장 중앙성당에가서 고백성사보고 성당에 다니면서 이 팸플릿으로 신자들을 설득하겠다고 했다.

자주연락해서 도움을 받고 싶다고 했다.

계속 내 스마트폰에는 팸플릿 본애달라는 문자가 이어지고 있다.

팸플릿이 냉담자들에게 큰 희망을 준 것 같다.

청와대에서도 보내달라고 연락이 와서 30부를 보냈다.

서울에서 4시간30분 걸려 군산 수송동 성당에 6시30분경에 도착했다.

성당 벽에는 “불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라”라고 쓴 초라한 현수막이 걸려 있고 성당 문 앞에서 10여명의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서 있는데 손에는 “18대 대선 총체적 부정선거” “ 국정원해체” “대통령 퇴진” 작은 피켓을 들고 있었다.

몇 명은 의식화 된 청년 같이 보였으나 대부분은 강제 동원된 청소년들로 보였다.

내가 우리 피켓을 들고 촛불 든 청년들 옆에 가서 서니 많은 사진들이 시진을 찍었다.

규모가 작은 성당 안에는 60여명의 신자와 10여명의 사제와 5-6명의 수녀들이 있었다.

한 청년이 우리 피켓시위를 방해는 못하고 피켓 내용을 보며 제주 해군기지가 해적기지라며 해군과 경찰이 양민을 폭행 했으니 해적기지라고 억지를 부려 대꾸를 안 했더니 그대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애국단 홍정식대표가 혼자 왔다며 인사를 했다.

몇 명의 신자들은 내가 든 피켓 내용(추경을 막말로 매도, 칼기폭파범 김현희 가짜 만들기, 국정원해체, 국가보안법폐지, 제주 해군기지가 해적기지 이것이 정의인가)을 읽어보고 엄지를 들어 최고라는 신호를 보내 나도 엄지를 들어 답해 주었다.

미사가 시작될 무렵 전주에서 조형곤 대표가 몇 사람과 같이 승용차로 와서 한참동안 경적을 울리며 시위를 해 주었고 대구에서도 새마음 포럼 이익선 대표도와 주었다.

7시에 미사가 시작되자 사제 10명과 흰 사제복을 걸친 10여명이 뒤를 따라 성당으로 들어 갔다.

언제나 선동에 앞장서는 문정현신부가 이곳에서도 앞잡이 노릇을 했다.

문정현 신부가 이성당 초임신부라고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반정부 미사를 드리는 것 같다.

미사가 작되자 정의구현사제단 강론은 밖에서도 드렸다.

모두 통합진보당이 주장하는 민중혁명론 그대로 였다.

노동자 농민이 착취당하고,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국정원 동원 부정선거하고 상투적이 선동 미사 였다.

8시경에 미사가 끝나고 시가행진이 있었다.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들 앞에 피켓을 들고 서려 했으나 경찰 사고 생기면 안 되니 팸플릿이나 돌리라고 해서 피켓은 들지 않고 팸플릿만 돌렸다.

청년들이나 중장년들이 팸플릿은 잘 받아가지고 열심히 읽었다.

탑 차까지 동원해 큰 동영상으로 부정선거 대통령 퇴진을 계속 반복했다.

그러나 50여명이 시가행진을 하는데 전혀 열기도 없고 인형들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지시에 다라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사진 불러 놓고 여론을 조성하려는 요식해위 같았다.

8시30분경에 모두 끝냈다.

군산 수송성당 정의구현 사제단 대통령 퇴진 미사는 국민들이 등 돌린 자기들만의 잔치였다.

우리가 조금만 더 정의구현사제단 척결에 힘을 모으면 퇴출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1시가 되었다.

우리가 큰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에 피곤도 잊었다.

2013. 11. 22. 이계성(시몬기)팸플릿 필요하신분 연락 주시면 무제한 보내드립니다.

(010-3874-5613 이계성)      “기도란 잘 되기를 바라면서 은총을 기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민이 뽑은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것은 잘되라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지난 10개월간 참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 국민 행복을 위해 진력해왔다” 엉터리전도사는 “이런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고 도와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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