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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원 사망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사건의 개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 부장을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김재규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전했다.

   

사건의 진행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들어오고, 김계원 비서실장과 김재규 부장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 부장은 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 대통령과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가수 심수봉, 모델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 부장을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 경호실장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후 김재규 부장은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장군과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재규 부장은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 앞에서 총 점검을 하는 순간 차지철 경호실장이 나타났으나, 김재규 부장은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고 차지철 경호실장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경호관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연회장에 다시 들어온 시점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들어오자 김재규 부장이 나가 저녁 7시 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경호처장)과 안재송(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관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사건의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 부장이 총을 쏘아 차지철 경호실장의 오른쪽 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왼쪽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 역시 안전가옥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관들을 죽였다.

   김재규 부장이 총구를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조준했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김재규 부장에게 계속 저항하는 가운데 김재규 부장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되었으며 김재규 부장은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의전과장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 부장은 권총을 의전과장 박선호의 권총과 맞바꾸었다.

  의전과장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 부장은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심수봉과 신재순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박정희 대통령을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화장실에 숨었다 다시 나와 경호관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다시 김재규 부장이 들어왔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김재규 부장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 부장은 이를 피한 후 차지철 경호실장의 폐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 경호실장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김재규 부장은 쓰러져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장군과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성을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 부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차장보, 박흥주 대령과 함께 육군본부로 갔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급히 후송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사망한 상태로 후송되었던 것이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청와대로 들어와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범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이라고 말했고, 최규하 국무총리와 함께 육군본부로 가서정승화 육군참모총장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 부장이라고 말했다.

   박선호 의전과장의 명령을 받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하였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차지철경호실장 역시 확인 사살했다.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행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장군에게 김재규 부장의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 장군이 김재규 부장을 체포하자,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 부장을 인계받아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 부장은 용산구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 부장은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재규 부장은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에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0.26 사건의 원인

  김재규 부장은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 왔다는 설이 있다.

[ 재판 중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도 했다.

1심 보통군법회의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 부장은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 부장에 의하면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

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 부장에 의하면 차지철 경호실장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 대통령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 부장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응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와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10.26 사태 전 김재규 부장은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 부장은 군법회의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김재규 부장의 한미 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여파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했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갔다.

사건 관련자 명단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

박정희 - 대한민국 제5

9대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총을 맞아 살해당함.차지철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김재규 - 제8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을 궁정동 안전가옥 연회장에서 사살함.김계원 - 대통령비서실장, 사건 목격자.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사망자

박정희 - 대한민국 제5

9대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가슴과 머리를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차지철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안전가옥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정인형 - 대통령경호실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안재송 - 대통령경호실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김용섭 - 대통령경호실 경호관, 별관 식당에서 안전가옥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김용태 - 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전가옥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생존자

김계원 - 대통령비서실장, 사망한 박정희 대통령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함.박상범 - 대통령경호실 수행계장심수봉 - 가수신재순 - 모델

사건 처리자들

정승화 - 육군대장 육군참모총장, 박정희 대통령 유고후 계엄사령관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 유고 후 비상 국무회의 주관, 대통령 권한대행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전두환 - 육군소장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처벌

   박흥주 대령의 경우는 그 신분이 현역 군인이었던 관계로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육군교도소 내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김재규 - 제8대 중앙정보부장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대령, 중위 시절 김재규의 전속부관 - 1980년 3월 6일 총살형 집행박선호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대륜중학교 시절 김재규의 제자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유성옥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운전기사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이기주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김태원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유석술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서영준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위키백과   # 10.26 궁정동 사람들   # 10,26사건# 1    # 2  #3 10.26 궁정동 사람들   사진은 4일 저녁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장례식장 빈소 모습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이며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써의 말하기 어려웠을텐데 숨김없고 가감없는 증언이 감동을 주었다.

몇 번이나 울컥하는 순간에도 감정을 삭이면서 증언에 임해준 김계원씨는 역시 보통사람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다.

90살의 나이로 봤을 때 그래도 건강함을 유지할 때 이런 증언을 듣게 되고 기록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는 평가를 내려야할 것 같다.

삽교천방조제 개통식을 마치고 온 그날의 상황과 안가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사건이 발발할 때까지의 분위기와 대화내용 등 당시 분위기를 충분히 상상하게 된 증언들이었다.

그러면서 역사 속에서 조금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차지철은 왜 그렇게 지나쳤는가, 김재규는 왜 그렇게 초조했는가, 박대통령은 왜 야당의 행동에 예민했는가 그리고 대통령이 작고한 후에 정신을 가다듬고 잘 수습하면서 제대로 된 사람들(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이 이끌어 갈 수는 없었는가 등등  이 방송을 통하여 소개된 1970년대 말의 기념비적인 사진들을 감상하며 우리나라 현대정치사를 조망해 본다.

 미국 카터대통령과 미군 철수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 사이에서 김계원씨도 불편했다고 한다.

1970년대 말 박정희대통령 다음의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권력의 2인자들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자는 역시 차지철이었다.

이런 연유로 차지철과 김재규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런 감정의 골은 결국은 파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970년대 말의 용호상박을 이루었던 두 사람, 차지철은 자꾸만 박정희대통령의 신임을 얻어가는 때였고, 김재규는 자꾸만 박대통령으로부터 지적 당하면서 점수가 잃어가는 때였기에 김재규는 좌천의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운명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의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업무가 된 충남 아산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서의 모습이다.

불과 8

9시간 후면 벌어질 비운을 박정희대통령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10월 26일 그날의 분위기:대통령은 아주 기분이 좋으셨고 모두 그걸 보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통하여 방송되는 삽교천준공식 장면을 보고 즐거워하던 분위기는 서서히 가시면서 다른 화제가 대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신민당에 대하여 좀 비난하게 되면서 화제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정보부에 책임이 가야되는 상황에서 김계원씨는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나름대로 무척이나 애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부질없이 분위기는 더욱 안좋게 바뀌어 갔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부장에게 "김재규 네가 있는 정보부가 약해서 이렇게 된 건데, 왜 좀 더 강하게 못 하느냐?" 그렇게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핀잔을 주었더니 바로 옆에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이 "그렇습니다"라고 바람을 넣는 바람에 김재규의 감정이 격화되었고 김재규는 화를 삭히려는 의도에서인지 힐난의 소리를 듣다가 몇 번을 자리를 비우고 자리를 피했다가 왔다고 한다.

물론 당연히 대통령을 모시는 자리에서 자리를 함부로 뜨는 것은 경우에서 벗어난 것인데 그렇다는 것은 김재규가 이미 이성을 잃었고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거사를 거행하려고 마음을 굳혔을 것이란다.

사건 다음날 비서실장을 그만둔 후 후임이 된 촤광수 ------------------------------------------------------------------------------군인. 경북 풍기(豊基)에서 출생. 1942년 서울 배재(培材) 중학교를 마치고 연희(延禧) 전문학교 상학과에 입학했으나 학병(學兵)으로 강모(强募)되어 입대, 육군 소위가 되었다.

해방 후 복교, 1950년 동교를 마치고 그동안 한국 국방 경비대에 입대, 1951년 육군 포병학교 교장이 되었다.

1952년 미국 포병학교에 유학, 1953년 육군 본부 기술 참모가 되고 1954년 사단장을 거쳐 1956년 육군 본부 일반 참모가 되었다.

1957년 미국 참모 대학에 유학, 1960년 육군 대학 총장ㆍ1966년 육군 참모 총장(육군 대장), 1969년 예편된 후 중앙정보부장 역임. 1971년 주중대사를 거쳐 비서실장 재임 중 10.26 발생. ------------------------------------------------------------------------------<김형욱> <이후락> <차지철> <김재규> <정승화> <최규하> <박근혜> <516혁명> <삽교천 준공식> <1026사태> <심수봉>        보안사령관 전두환은박정희 사망 소식에 기분이 착잡했다.

 전두환"아..!"그는 박정희가 의도적으로자신의 친위부대로 키운군부 내 사조직이었던'하나회'의 선두주자였다.

사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항상 뒷목이 시렸다.

 박정희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어." 박정희 "혹시 알아?군인들이 딴 생각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지.." 박정희 "군부 내에서 반란을 감시하고충성을 바칠 세력이 필요해.."그래서 하나회에게힘을 실어줄 목적으로79년부터 전두환이군부 내 중앙정보부라 할 수 있는'보안사령부'의 사령관으로취임하게 됐으니,그런 전두환에게 박정희의 죽음은든든한 후원자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전두환"아놔!"때문에 긴급 국무회의가 열렸던육본의 벙커로 본능적으로 달려갔던 전두환이었다.

도착해서 보니, 육본의 벙커에는여러 각료들이 긴급히 소집되어 있었고..시해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을 통해서범인이 김재규라는 사실을이미 알고 있었던 이들도 여럿 있었으나,당사자 김재규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모두들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김재규"어서 빨리 비상계엄령을 내려야만 합니다.

" 최규하 (국무총리)"..."그러던 중, 김계원이국방장관과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몰래 사실을 알려줬으니, 김계원 "김재규가 쐈어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헐! 그게 정말입니까?" 노재현 (국방부장관)"그럼, 여기 와 있는 김재규를 어서 잡아들여야겠습니다.

"정승화는 마침 육본에 와 있었던전두환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정승화"마침 보안사령관도 왔군요." 정승화"곧 계엄령이 선포될 게요.그러면 내가 계엄사령관이 될 테고.." 정승화"계엄법에 따라 보안사령관인 전 장군이합동수사본부장이 될게요." 정승화"그러니 김재규에 대한 수사를지금부터 서둘러 맡아주길 바라오." 전두환"네,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10월 27일 0시,사건 4시간 만에 김재규는 체포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국의 주도권은군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어째서 말인가?서거 직전 박정희는크게 3개의 친위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계원 사망] 세상에. 왜..


"차지철을 경호실, 김재규의 정보부(중정),전두환의 보안사."▲ 유신정권의 3대 친위부대그런데 박정희 시해 사건으로중정과 경호실이 날아가 버렸다.

"중정부장 김재규가 범인이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죽었고.."또 박정희가 사라진 상황에서 내각도 힘을 못 썼다.

 김종필이 공화당을 장악했다지만, 유신 체제에서 이미 실권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김종필"유신 체제에서 정당은 구색맞추기일 뿐.."결국 10.26 이후 힘을 유지한 세력은박정희의 친위부대인 '보안사'와정승화의 '육본'과 같은 '군부 세력'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에 앉혔으니,이는 전두환에게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진배없었던 것이다.

 전두환"이제 모든 수사와 정보는내가 독차지할 수 있게 됐어."그에 반해 정승화 총장은시해 현장인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는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 최규하 대통령 대행과 비상계엄령 선포10월 27일 새벽 4시국방부 회의실,김재규가 체포된 뒤각료들은 서둘러 비상조치를 내렸다.

 신현확 (부총리)"대통령 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범인은 중정부장 김재규였고요."각료"헐!" 신현확 "어쨌든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가원수 직에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 신현확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 유고시 국무총리가 승계하도록 돼 있으니," 신현확 "지금 이 순간부터 최규하 국무총리가대통령 권한 대한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최규하가대통령 대행을 맡게 되었다.

(최영태, 5.18 그리고 역사 p.49)▲ 최규하 대행에게 경례를 하는 장면 최규하 (대통령 대행)"알겠습니다.

내가 이제부터 대행직을 맡겠습니다.

" 최규하"그러면 지금부터 제주도를 제외한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겠슴돠."그런데 이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최규하 스스로 대통령 대행직의 권한을 놓아버린 결과였기 때문이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되지만,""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국방부 장관이 총 책임을 맡게 된다능.""그런데 최규하는 정치적 부담감 때문에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해버렸던 것임."때문에 계엄령 이후'계엄사'가 유일한 권력이 중심이 되었고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이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70년대 3편 p.267)반면에 전두환과 각별했던국방부 장관 노재현은 애초에 능력이 부족했고전두환을 두둔하기에만 바빴다.

 노재현 (국방부장관)"..."● 김재규의 수사와 미국의 대처김재규는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조사를 받았다.

 이때 전두환은고민이 하나 있었다.

  허삼수"장군님, 김재규 혼자서저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전두환"글쎄 군과 연계됐다고 보기엔너무 조용한데.."  전두환"그래! 미국!김재규는 미국과 친하잖아." 전두환"지난주에도 김재규는 미국대사와 CIA 지부장을 만났어."때문에 김재규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가혹한 고문이 가해졌고전두환은 이를모니터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나중에 김재규의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눈자위의 피멍은 바로 그때 생긴 상처였다.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2권 p.329) "배후가 어디야?" "단독으로 했다.

""이 XX가! 배후가 누구냐고?군내부에 널 따르는 놈들이 있을 거 아냐!""혹시 미군하고 손잡았어?너 미국하고 친하잖아."결국 김재규는 전기 고문을 받고 나서야2시간만에 사건을 모두 털어놨다.

 전두환"뭐? 정승화 총장이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고?" 전두환"하지만 김재규 체포 지시는분명히 정 총장이 내렸는데.." 전두환".."어쨌든 수사를 통해보안사는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편 미국의 CIA는 사건 3시간 만에 피살 소식을 타전했고"한국에서 쿠데타 가능성이 있다.

"워싱턴에서는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 3'을 발동,미 항공모함이한반도로 급거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월 27일 새벽 6시에미국 전역에 박정희 사망 뉴스가톱뉴스로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1시간 반 뒤에보도가 나갔다.

때문에 이날 아침,미국에 친지가 있던 사람들은미국에서 연락을 받고대통령의 시해 사실을 알게 되는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두환의 월권● 박정희의 시해 소식을 들은 국민들27일 새벽에 국민들은 아리송한 속보를 접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 유고가 뭐야?"유고슬라비아는 들어봤어도.""큰 변이 생겼다는 뜻인데.."때문에 신문사와 방송국에대통령의 유고가 무엇인지 묻는 전화가 빗발치기도 했다.

(KBS 영상실록 1978

1979년편)그리고 오전 7시 반,박정희 대통령이 총탄에 맞아서거했다는 속보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합동수사본부가 사태에 대한 수사보고를 발표하게 된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김재규가 은연중 계획하에 자행된 범행이었음이 수사 결과 드러났다.

" 전두환"김재규는 평소 대통령께 건의하는 정책에 대해서 불신을 받아왔고.."그것은 전두환이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순간이기도 했으니,이때 그는 단호한 어투와 차가운 인상으로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당시 TV를 본 국민들은저마다 놀라며 한마디씩 했다.

☞  "잘

죽었다.

""뭐요? 박 대통령 때문에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 건데 그게 뭔 소리요?""여태까지 할 말도 못하고 산 세월이 얼마요?""그리고 박정희가 아니더라고이정도는 살게 돼 있었어요.""평생 혼자서 대통령 해먹을려고 하다가총맞고 저꼴됐지. 내 말이 틀려요?""아니, 이 사람이..대통령이면 이 나라 아버지인데..""아버지가 죽었는데 자식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하지만 애초에 사건 수사를 맡은 이들이대통령의 최측근 친위부대였다는 점이커다란 비극이었으니,(최영태, 5.18 그리고 역사 p.50)"하나회로 대표되는 전두환 세력들은(신군부)유신체제가 붕괴되면," "자신들의 특혜 조직도 와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었다능.."이들은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대통령의 과오와 비리는 덮어두고김재규의 만행만을 부각시키기에만 급급했다.

때문에 가뜩이나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일천하고봉건의식의 잔재가 남아있던당시의 국민들은상당수가 대통령의 죽음을그저 안타깝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당시 방송의 내용은 이러했다.

(KBS 영상실록 1978

1979년편)"태산이 무너진 듯눈물이 갈라진 듯..""이 충격, 이 비통어디다 비기리까!"● 전두환의 월권대통령 대행이 된 최규하는철저한 원칙론자로,그는 정치에 휘말리기 싫어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스스로 막았다.

 정승화"계엄사의 업무는 어떻게 할까요?" 최규하"지금은 전국계엄이 아니라부분 계엄이잖아요." 최규하"나한테 보고하지 말고국방장관에게 보고하세요."그런 상황에서쾌재를 부른 것은 전두환이었다.

 전두환"하하하"그는 10.26 사태 다음날,사건 수사를 빙자하여중정 차장, 검찰 총장, 치안본부장 등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이들을 보안사로 불러들였으니,전두환은 어느새 고압적인 자세가 되어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  전두환"중앙정보부는 국가원수의 시해 책임을 물어.." 전두환"다 잡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정상을 참작해서 수사하기로 했소." 전두환"그러니 정보부 차장들은 이번 수사에 적극 협조하시길 바래요." 중정 차장"네.."그렇게 전두환은박정희라는 절대권력이 무너진 지 '만 하루'가 지나기 전에중정, 검찰, 경찰, 헌병까지 장악한막강한 실력자로부상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정부 각 부서의 차관들을 불러들인 후실력을 과시하며어느새 대통령 흉내를 내고 있었다.

때문에 정승화 총장에게이런저런 불만이 제기됐다.

 정승화"보고서가 계엄사에 오르지 않는이유가 뭔가?""전두환 장군이 합수부에서 먼저 검토한 뒤 올리겠답니다.

" 정승화"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저도 이상해서 알아보니까..""합수부에서 먼저 검토해서 취사선택해서 계엄사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 정승화"그건 말이 안 되지 않소?" 정승화"합수부가 계엄사 통제를 받고 있는데오히려 합수부가 계엄사를 통제하다니..""사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전 장군이 각 부서의 차관들을 불러서 회의를 해서..""이래저래 차관들의 불만이 많다고 합니다.

" 정승화"아니, 전 장군이 정치까지 관여한다는 말이요?"화가 난 정승화는전두환을 불러들였다.

[김계원 사망] 대체 무엇때문에.



 정승화"당신, 요즘 뭐 하는 거야?" 정승화"내가 김재규 조사하라고 했지누가 당신 보러 정보부장 역할까지 하라고 했어?" 전두환"총장님, 그건 김재규가 구속되니까정보부 기능이 잘 돌아가지 않아서.." 정승화"전장군이 왜 차관회의를 하고 있는가?전장군이 지금 대통령이라도 되는 줄 알아?" 전두환"그건 지금이 비상시국이기 때문에차관들에게 지침도 내리고, 사정도 알아볼 겸 해서.." 정승화"지금 제정신인 게요?당신은 군인이지 정치인이 아냐!" 전두환"..."하지만  10.26 사건이 불과 1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이미 이러한 기사를 송고하고 있었다.

☞ 참고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한국의 실권을 잡다.

"● 비자금 9억 원을 제멋대로 처리한 전두환당시 합수부(보안사)는정치인들의 약점을 잡아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부정축재 수사'에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신, 중정으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거 다 알아!"정치인"에겅.."그런데 이때,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그날 사건 현장에 있었던 점,김재규가 차지철은 쏘았으면서김계원은 쏘지 않았던 점을 의심해서김계원을잡아들였다.

"혹시 김재규랑공모한 거 아님?" 김계원 "아녜요! 당치도 않아요."이후 합수부 요원들은 김계원이 근무하던 대통령 집무실을 뒤졌고뜻밖에도 거기서엄청난 비자금을 발견하게 된다.

 "뜨아! 9억 원어치 수표 뭉치!"당시 직장인의 월급이 평균 10만 원,서울 아파트 1채 값이 1000만 원이던 때였다.

"아파트 90채!"그런데 더 놀라운 건,이 돈을 모두전두환 임의로 처분했다는 것이다.

"?�?"그는 먼저 박대통령 큰 딸에게 6억 원을 전달했다.

☞   전두환"받아주십시오. 6억입니다.

" 박근혜"!"박근혜는 평소 전두환을 '오빠'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소문이 있다.

 ☞ 참고 전두환"이젠 근혜 양께서 가장이십니다.

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받아주십시오." 박근혜"너무 큰 돈인데요.." 전두환"아닙니다.

 곧 청와대를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전두환"내가 각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는 5천만 원을 국방장관인 노재현에게 뇌물로 바치고 노재현"하하하. 전 장군 ♥"나머지 5천만 원을 합동수사부(보안사)의 수사비 명목으로 빼놓고나머지 2억 원만을정승화 총장에게 내놨다.

  전두환"2억입니다.

" 정승화"2억이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돈이야?" 전두환"청와대 비서실을 수사하던 중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9억 원을 발견했습니다.

" 전두환"이 중에서 6억을 박 대통령 큰딸에게 전달했고," 전두환"1억은 합동수사부의 수사비로 빼놓고나머지 2억을 가져왔습니다.

" 정승화"뭐야?" 정승화"수사 도중에서 나온 돈을 어떻게 전장군 맘대로 썼단 말야?" 정승화"청와대에서 그런 돈이 나왔다면당연히 국고에 귀속시키는게 순리 아닌가?" 전두환"각하 살아생전에 은혜를 입었던 사람으로서유족들이 걱정이 돼서.." 정승화"전 장군! 당신은 공과 사도 구분 못하시오?" 정승화"합수부도 그래. 이미 수사비가 지급되고 있지 않은가!" 정승화"만약 부족하더라도,적법한 절차를 놔두고 이게 뭐야?"답답한 정승화 총장은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 하지만 전두환에게 이미 뇌물을 받은 국방장관이 아니던가! 정승화"장관님. 전 장군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습니다.

" 노재현"아냐. 전 장군 사람 좋아." 노재현"정 총장, 이번 한 번만 넘어갑시다.

" 노재현"내 얼굴을 봐서라도 조금만 더 데리고 써 봐요." 정승화"..."YWCA 위장결혼식 사건● 유신체제 유지 발표박 대통령이 시해된 지 2주 후인, 11월 10일.최규하 대행은이러한 담화를 발표했다.

(최영태, 5.18 그리고 역사 p.49) 최규하"새 대통령은 기존의 유신헌법 방식에 의해뽑기로 하고.." 최규하"선출된 대통령은 헌법에 명시된 임기에 따르지 않고," 최규하"빠른 기간 내에 헌법을 개정해서새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하겠다.

"그러자 반응이엇갈렸다.

"뭐야? 또 체육관 대통령 뽑겠다는 말이네.""그래도 빠른 시일 내에헌법을 고쳐서..""새로운 방식으로대통령을 뽑겠다고 하지 않았는가!""다시 예전처럼 직선제로 돌아가려는 모양임."담화문을 발표하고 난 다음,최규하는 김종필을 불렀다.

☞  최규하"부탁이 있습니다.

김 총재께서 대통령 후보에 나서 주시죠." 김종필"왜요? 최 대행님께서 그냥 나서지요." 최규하"제 생각에는 김 총재께서는유신헌법 속에서 당선되시는 게," 최규하"정부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종필은임시직에 불과한 대통령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다.

 김종필"당신이 대통령이 되시오." 김종필"최 대행께서는 최근까지박 대통령을 모시고 있었으니,"  김종필"유신시대를 마감하는 대통령이 되시고.." 김종필"1년 안에 새 헌법을 만들어서직선제로 바꾸는 게 좋을 듯합니다.

" 최규하"근데, 전 정치를 잘 몰라서 말입니다.

"그러나 김종필은 끝내 거부했다.

그는 야심가였다.

유신헌법을 고친 뒤떳떳하게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 YWCA 위장결혼식 사건하지만 이런 소식에재야와 야권 인사들은 크게 분노하여윤보선 집에 모였다.

☞   백기완 (재야 인사)"이건 배신입니다.

"  백기완"뭐가 아쉬워서 또 유신헌법체제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겠다는 얘깁니까?" 김상현 (김대중 측근)"시방, 김대중 선생께서는 이러셨구먼요." 김상현"야권이 반대를 혀서최 대행 체제를 무너트리면," 김상현"무정부 상태가 되어서리군부가 나설 가능성이 있응게," 김상현"그냥 최 대행 체제에서 새 헌법을 만드는 게 좋겠다, 요로코롬 말입니다.

" 윤보선"대중이가 원래 지나치게 신중한 면이 있어." 백기완"정 그렇다면 우리가 나서서.." 백기완"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저울질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윤보선"어떻게?" 백기완"통일주체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반대하는 시위를 해보는 겁니다.

" 윤보선"음.."그리하여 결혼식을 위장한 민주 시위가예식장에서 벌어지게 된다.

장소는 명동성당 옆에 자리한YWCA 회관,(주의 : YMCA가 아님!)회관에는 400여 명의 재야인사들이 참석했다.

     ▲ 좌측부터 : 윤보선, 함석헌, 문동환, 김상현, 한명숙, 백기완 등 "지금부터 신랑 홍 XX 군과 신부 윤 XX 양의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먼저 신랑 입장!""다음은 신부 입장...아,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부가 미처 웨딩드레스를 만들지 못해이곳에 올 수 없다고 합니다.

""하하하""자자, 그럼 지금부터 선언문 낭독으로 본 결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연사 "동지 여러분 반갑습니다.

" 연사"우리가 꼭 이런 속임수를 써가면서집회를 열어야만 하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 연사"유신독재가 물러났는데도우리가 염원하는 민주화는 오리무중인 상태입니다.

" 연사"유신 잔당들은 현체제 유지 후 개헌이라는기만적인 정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 연사"따라서 우리는 민주화 열기를 앞당기기 위해서적극 투쟁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유신잔당 물러가라!""통대선거 결사반대!"(통대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의 줄임말)"거국내각 돌입하라!"하지만 계엄령 하에서집회는 불법이었으니,곧 전경들이 식장에 들이닥쳤고이들 중 200여 명이 닭장차에 태워져경찰서로 압송되게 된다.

(정병진, 실록 청와대 : 궁정동 총소리 p.328) ▲ 윤보선과 함석헌은 고령인 관계로 서면조사로 끝났다● 뜻밖의 고문하지만 경찰서에 끌려가면서잡혀가는 사람들이나경찰들 모두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잡아가는 경찰들이 미안해했을 정도다.

(정병진, 실록 청와대 : 궁정동 총소리 p.328)그도 그럴 것이,11월 들어 '해빙 무드'가 역력했기 때문이다.

"곧 민주시대가 도래할 텐데.."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내일이면풀어주겠지 하면서경찰서 유치장에서 편안히 잠을 청하던 민주 인사들은,야밤에 들이닥친군인들에 의해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면서사태가 급반전된 것이다.

이후 군인들은 가혹한 고문을 가하면서'내란음모', '국가반역죄'로몰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고문이 가해졌던 것일까?당시의 증언들이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p.294

295) 백기완 (재야 인사)"그때 하도 두들겨맞아서 완전 폐인이 됐지요." 백기완"기억상실증, 정신착란증, 협심증 등의 합병증에.." 백기완"고관절, 무릎 관절, 5번째 요추가다 망가졌고.." 백기완"병보석으로 풀려났을 때체중이 40kg이었어요." 김병걸 (교수)"처음에는 오자마자 5명으로부터 발길질, 몽둥이질, 고무신짝으로 얼굴 후려맞기 등.." 김병걸 "1시간 정도 사정없이 맞고기절했습니다.

" 김병걸 "그다음 조사실에서도 2시간 정도정신없이 맞았어요." 김병걸 "양무릎 사이에 굵은 몽둥이를 끼운 채무릎을 꿇려 앉혀 놓고," 김병걸 "허벅지를 군화로 지근지근 밟는 데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고 데굴데굴 구르면," 김병걸 "몽둥이로 사정없이온몸을 내리쳤습니다.

" 김병걸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똑같은 고문이 자행됐고.." 김병걸 "고문을 당한 후에야 조사를 했는데,조사 과정 중에도 구타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 김병걸 "그런 고문을 3일간이나 받았어요."전 국회의원임채정의 증언이다.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3권 p.59) 임채정"조사실에 들어서자마자"너 언제 이북 갔다 왔어!"라는 고함과 함께.." 임채정"각목 세례가 시작되는데,기절하면 찬물을 끼얹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 임채정"얼마나 맞았던지 귀가 찢어지고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는데," 임채정"그 얼굴로 감방으로 돌아오니깐아무도 제 얼굴을 못 알아보는 거예요."당시 국회의원이던김상현의 증언이다.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2권 p.347

348) 김상현"그때 보안사는 김대중 진영에서재야와 학생들을 동원해,"  김상현"정권 타도를 시도하는 것으로헛다리 짚고 있었어요." 김상현"그랬기 때문에 끌려온 사람들은지은 '죄' 이상으로 얻어맞고 고문을 당했던 거죠." 어쨌든 민주 인사들은YWCA 사건을 계기로'군부는 결코 민주화에 호의적이지 않더라'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 때문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삼국지의 이각과 곽사로 비유하기도 한다다만 그런 사실을알 턱이 없었던 대부분의 국민들은 곧 민주화가 올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암울했던 70년대 말,권력은 총구에서 나왔고총은 군인들만 갖고 있었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사건의 개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 부장을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김재규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전했다.

   

사건의 진행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들어오고, 김계원 비서실장과 김재규 부장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 부장은 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 대통령과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가수 심수봉, 모델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 부장을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 경호실장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후 김재규 부장은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장군과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재규 부장은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 앞에서 총 점검을 하는 순간 차지철 경호실장이 나타났으나, 김재규 부장은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고 차지철 경호실장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경호관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연회장에 다시 들어온 시점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들어오자 김재규 부장이 나가 저녁 7시 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경호처장)과 안재송(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관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사건의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 부장이 총을 쏘아 차지철 경호실장의 오른쪽 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왼쪽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 역시 안전가옥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관들을 죽였다.

   김재규 부장이 총구를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조준했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김재규 부장에게 계속 저항하는 가운데 김재규 부장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되었으며 김재규 부장은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의전과장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 부장은 권총을 의전과장 박선호의 권총과 맞바꾸었다.

  의전과장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 부장은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심수봉과 신재순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박정희 대통령을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화장실에 숨었다 다시 나와 경호관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다시 김재규 부장이 들어왔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김재규 부장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 부장은 이를 피한 후 차지철 경호실장의 폐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 경호실장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김재규 부장은 쓰러져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장군과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성을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 부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차장보, 박흥주 대령과 함께 육군본부로 갔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급히 후송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사망한 상태로 후송되었던 것이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청와대로 들어와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범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이라고 말했고, 최규하 국무총리와 함께 육군본부로 가서정승화 육군참모총장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 부장이라고 말했다.

   박선호 의전과장의 명령을 받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하였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차지철경호실장 역시 확인 사살했다.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행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장군에게 김재규 부장의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 장군이 김재규 부장을 체포하자,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 부장을 인계받아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 부장은 용산구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 부장은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재규 부장은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에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0.26 사건의 원인

  김재규 부장은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 왔다는 설이 있다.

[ 재판 중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도 했다.

1심 보통군법회의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 부장은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 부장에 의하면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

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 부장에 의하면 차지철 경호실장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 대통령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 부장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응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와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10.26 사태 전 김재규 부장은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 부장은 군법회의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김재규 부장의 한미 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여파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했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갔다.

사건 관련자 명단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

박정희 - 대한민국 제5

9대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총을 맞아 살해당함.차지철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김재규 - 제8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을 궁정동 안전가옥 연회장에서 사살함.김계원 - 대통령비서실장, 사건 목격자.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사망자

박정희 - 대한민국 제5

9대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가슴과 머리를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차지철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안전가옥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정인형 - 대통령경호실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안재송 - 대통령경호실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김용섭 - 대통령경호실 경호관, 별관 식당에서 안전가옥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김용태 - 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전가옥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생존자

김계원 - 대통령비서실장, 사망한 박정희 대통령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함.박상범 - 대통령경호실 수행계장심수봉 - 가수신재순 - 모델

사건 처리자들

정승화 - 육군대장 육군참모총장, 박정희 대통령 유고후 계엄사령관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 유고 후 비상 국무회의 주관, 대통령 권한대행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전두환 - 육군소장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처벌

   박흥주 대령의 경우는 그 신분이 현역 군인이었던 관계로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육군교도소 내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김재규 - 제8대 중앙정보부장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대령, 중위 시절 김재규의 전속부관 - 1980년 3월 6일 총살형 집행박선호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대륜중학교 시절 김재규의 제자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유성옥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운전기사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이기주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김태원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유석술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서영준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위키백과   # 10.26 궁정동 사람들   # 10,26사건# 1    # 2  #3 10.26 궁정동 사람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이며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써의 말하기 어려웠을텐데 숨김없고 가감없는 증언이 감동을 주었다.

몇 번이나 울컥하는 순간에도 감정을 삭이면서 증언에 임해준 김계원씨는 역시 보통사람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다.

90살의 나이로 봤을 때 그래도 건강함을 유지할 때 이런 증언을 듣게 되고 기록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는 평가를 내려야할 것 같다.

삽교천방조제 개통식을 마치고 온 그날의 상황과 안가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사건이 발발할 때까지의 분위기와 대화내용 등 당시 분위기를 충분히 상상하게 된 증언들이었다.

그러면서 역사 속에서 조금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차지철은 왜 그렇게 지나쳤는가, 김재규는 왜 그렇게 초조했는가, 박대통령은 왜 야당의 행동에 예민했는가 그리고 대통령이 작고한 후에 정신을 가다듬고 잘 수습하면서 제대로 된 사람들(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이 이끌어 갈 수는 없었는가 등등  이 방송을 통하여 소개된 1970년대 말의 기념비적인 사진들을 감상하며 우리나라 현대정치사를 조망해 본다.

 미국 카터대통령과 미군 철수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 사이에서 김계원씨도 불편했다고 한다.

1970년대 말 박정희대통령 다음의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권력의 2인자들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자는 역시 차지철이었다.

이런 연유로 차지철과 김재규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런 감정의 골은 결국은 파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970년대 말의 용호상박을 이루었던 두 사람, 차지철은 자꾸만 박정희대통령의 신임을 얻어가는 때였고, 김재규는 자꾸만 박대통령으로부터 지적 당하면서 점수가 잃어가는 때였기에 김재규는 좌천의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운명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의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업무가 된 충남 아산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서의 모습이다.

불과 8

9시간 후면 벌어질 비운을 박정희대통령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10월 26일 그날의 분위기:대통령은 아주 기분이 좋으셨고 모두 그걸 보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통하여 방송되는 삽교천준공식 장면을 보고 즐거워하던 분위기는 서서히 가시면서 다른 화제가 대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신민당에 대하여 좀 비난하게 되면서 화제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정보부에 책임이 가야되는 상황에서 김계원씨는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나름대로 무척이나 애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부질없이 분위기는 더욱 안좋게 바뀌어 갔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부장에게 "김재규 네가 있는 정보부가 약해서 이렇게 된 건데, 왜 좀 더 강하게 못 하느냐?" 그렇게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핀잔을 주었더니 바로 옆에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이 "그렇습니다"라고 바람을 넣는 바람에 김재규의 감정이 격화되었고 김재규는 화를 삭히려는 의도에서인지 힐난의 소리를 듣다가 몇 번을 자리를 비우고 자리를 피했다가 왔다고 한다.

물론 당연히 대통령을 모시는 자리에서 자리를 함부로 뜨는 것은 경우에서 벗어난 것인데 그렇다는 것은 김재규가 이미 이성을 잃었고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거사를 거행하려고 마음을 굳혔을 것이란다.

사건 다음날 비서실장을 그만둔 후 후임이 된 촤광수 ------------------------------------------------------------------------------군인. 경북 풍기(豊基)에서 출생. 1942년 서울 배재(培材) 중학교를 마치고 연희(延禧) 전문학교 상학과에 입학했으나 학병(學兵)으로 강모(强募)되어 입대, 육군 소위가 되었다.

해방 후 복교, 1950년 동교를 마치고 그동안 한국 국방 경비대에 입대, 1951년 육군 포병학교 교장이 되었다.

1952년 미국 포병학교에 유학, 1953년 육군 본부 기술 참모가 되고 1954년 사단장을 거쳐 1956년 육군 본부 일반 참모가 되었다.

1957년 미국 참모 대학에 유학, 1960년 육군 대학 총장ㆍ1966년 육군 참모 총장(육군 대장), 1969년 예편된 후 중앙정보부장 역임. 1971년 주중대사를 거쳐 비서실장 재임 중 10.26 발생. ------------------------------------------------------------------------------<김형욱> <이후락> <차지철> <김재규> <정승화> <최규하> <박근혜> <516혁명> <삽교천 준공식> <1026사태> <심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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