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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me/120037290145?★ 효자고황후 엽혁나랍 맹고(孝慈高皇后 葉赫那拉 孟古 1575

1603)?엽혁부 패륵(葉赫部 貝勒) 양길노(楊吉?)의 막내딸. 청나라에서 첫번째로 추봉된 황후.효자고황후는 1588년 10월 청태조 애신각라 노이합적(淸太祖 愛新覺羅 努爾哈赤)에게 출가했으나 당시 태조는 황제를 칭하고 있지 않아서 후궁 제도가 불완전했다.

그래서 그의 처들을 복진(福晉)이라고 불렀으며 정실실부인을 대복진(大福晉)이라 하고 나머지를 측복진(側福晉), 서복진(庶福晉)이라고 불렀다.

당시의 대복진인 부찰씨가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에 맹고는 단지 첫번째 측복진일 뿐이었다.

이후에 부찰씨가 서거하자, 청태조는 늦게 시집온 아파해를 거듭 대복진에 책립했다.

그랬지만 맹고는 1592년 아들 하나를 낳으니 후에 즉위할 청태종 황태극(皇太極)이었다.

그러나 맹고는 태조의 총애를 받지 못해 우울하고 즐겁지 못했고 1603년 서거하니 그 때 나이 28살이었다.

1636년 5월 16일 청태종 황태극이 등극하자 아들로 인해 어머니가 귀해지듯이 맹고는 추봉되어 시호를 효자고황후라고 하였다.

?★ 효원고황후 동가 합합납찰청(孝元高皇后 ?佳 哈哈納札靑)?청태조의 최초의 정실부인(적복진:嫡福晉)이다.

후세에 태조 원비(元妃)로 불려졌다.

동가씨는 보통의 유약한 여자들과는 틀려서, 그녀는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일으키는데 보좌하여 공이 없지 않고, 2남 1녀를 낳아서 청나라 역사에 명성이 대단했다.

적장자인 저영(?英), 차자는 유명한 예친왕 대선(禮親王 代善)이며, 여아는 여중호걸이라 불리는 동과격격(東果格格)이다.

그러나 후에 황태극이 등극하여 황제가 되자 생모의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생모 엽혁나랍씨를 황후로 추봉하고 세 명의 정실부인들을 나란히 추봉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가씨는 태조의 정실부인이라는 것 없애기 위해 사실이 말살되었으나 동가씨 일족은 청나라에서 명성이 대단했으므로 후에 효의인황후, 효신성황후 등의 황후가 또 나왔다.

?★ 효선고황후 부찰 곤대(孝宣高皇后 富察 袞代)?청태조 노이합적이 두 번째 정실부인인 대복진이었고, 후세에 태조 계비(太祖 繼妃)로 불려졌다.

두 명의 아들인 망고이태(莽古爾泰)와 덕격류(德格類)와 딸인 망고제(莽古濟)를 낳았다.

부찰씨는 매우 일찍 죽었다.

합합납찰청처럼 부찰씨도 존호를 받지 못했다.

?★ 효열무황후 오랍나랍 아파해(孝烈武皇后 烏拉那拉 阿巴亥 1590

1626)?청태조 애신각라 노이합적의 대비(大妃). 그 아버지는 오랍패륵 만태(烏拉貝勒 滿泰)이다.

아파해는 노이합적에게 시집왔을 때 겨우 12살이었다.

청태조 효자고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대비로 피봉되었다.

그녀는 노이합적의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즉 12남 아제격(阿濟格), 다이곤(多爾袞), 다탁(多鐸)이다.

아파해는 젊고 아름다웠기에 노이합적은 그녀는 매우 총애하였다.

한번은 저녁 연회가 있을 때, 노이합적은 젊고 아름다운 아파해를 자꾸 바라보았고 자기가 늙어서 죽었을 때를 염려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 아파해를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후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가 죽은 후 계모나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습속이 있었고, 그러므로 노이합적은 자신의 사후에 대패륵(大貝勒) 자리를 맡길 차남 대선이 아파해를 후처로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선도 부친의 이러한 생각을 알고 있었고, 아파해도 노이합적이 죽은 후에 후금 정권 속에서의 후원자를 찾길 바라고 있었다.

이후, 노이합적의 복진 덕인택(德因澤)의 고발로 천명 5년 대비 사건이 일어났다.

아파패가 대선과 4패륵 황태극에게 음식을 보내 먹게 했는데, 황태극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먹지 않았고 대선은 이를 먹었다.

또한 아파해가 자주 심야에 출궁해서 대선의 집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고발은 모임이 실행되면서 되돌아왔다.

아파해가 옷차림에 정성을 들이고 대선과 서로 눈으로 정을 주고받는다는 것이었다.

노이합적은 사실을 조사할 사람을 파견했으나, 단지 집안의 추한 소문이 퍼뜨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에 기초한 조사였고, 곧 금은의 죄명을 은닉하기 위한 것이라며 포기했다.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덕인택의 고발은 황태극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으며, 대선을 재베하는 것을 달성했고, 아파해의 목적에 타격을 주었다.

천명 11년 노이합적은 중병에 걸렸고, 아파해는 가다가 도중에 노이합적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황태극은 노이합적의 운명을 구실로 삼아, 강제로 순장을 다짐받았다.

같이 순장당하는 두 사람은 서비(庶妃)와 덕인택이었다.

이와 같이, 황태극은 겨우 15살이었던 다이곤의 등극의 가능성을 박탈했다.

아파해는 그 때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온전한 시호는 효열공민헌철인화찬천려성무황후(?孝烈恭敏獻哲仁和贊天儷聖武皇后)이다.

그의 아들 중 하나인 다이곤은 후에 청조 순치황제(順治皇帝)의 섭정왕이 되었으며, 순치황제는 다이곤에게 심한 압박을 받았고, 그 때문에 순치황제는 다이곤이 바라는 대로 그녀를 황후에 책봉했다.

그러나 세조의 폐후 박이제길특씨가 순치 10년 정비로 강등될 때 다이곤의 어머니 대비 아파해도 황태극의 태묘에서 축출하고 나란히 일체의 존호를 박탈하였다.

?★ 수강태비 박이제길특씨(壽康太妃 博爾濟吉特氏)?청태조 노이합적의 많은 비 중 서열 1위. 태비는 몽고 과이심부(科爾沁部)의 사람으로 당시 몽고 과이심과 후금은 인척 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이합적이 박이제길특씨를 아내로 맞이해서, 청태종 황태극의 오대복진(五大福晉)도 박이제길특씨였다.

태비는 천명, 숭덕 연간 내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순치제 즉위에 이를 때에야 서조모를 수강태비에 봉해졌다.

?★? 덕인택(德因澤)?청태조 노이합적의 복진. 성씨 불명. 자녀 불명, 대복진 아파해와 노이합적의 차남 대선의 애매한 관계를 고발했으며 대비가 순장 당할 때 덕인택도 순장당했다.

? me/120037290145?★ 효자고황후 엽혁나랍 맹고(孝慈高皇后 葉赫那拉 孟古 1575

1603)?엽혁부 패륵(葉赫部 貝勒) 양길노(楊吉?)의 막내딸. 청나라에서 첫번째로 추봉된 황후.효자고황후는 1588년 10월 청태조 애신각라 노이합적(淸太祖 愛新覺羅 努爾哈赤)에게 출가했으나 당시 태조는 황제를 칭하고 있지 않아서 후궁 제도가 불완전했다.

그래서 그의 처들을 복진(福晉)이라고 불렀으며 정실실부인을 대복진(大福晉)이라 하고 나머지를 측복진(側福晉), 서복진(庶福晉)이라고 불렀다.

당시의 대복진인 부찰씨가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에 맹고는 단지 첫번째 측복진일 뿐이었다.

이후에 부찰씨가 서거하자, 청태조는 늦게 시집온 아파해를 거듭 대복진에 책립했다.

그랬지만 맹고는 1592년 아들 하나를 낳으니 후에 즉위할 청태종 황태극(皇太極)이었다.

그러나 맹고는 태조의 총애를 받지 못해 우울하고 즐겁지 못했고 1603년 서거하니 그 때 나이 28살이었다.

1636년 5월 16일 청태종 황태극이 등극하자 아들로 인해 어머니가 귀해지듯이 맹고는 추봉되어 시호를 효자고황후라고 하였다.

?★ 효원고황후 동가 합합납찰청(孝元高皇后 ?佳 哈哈納札靑)?청태조의 최초의 정실부인(적복진:嫡福晉)이다.

후세에 태조 원비(元妃)로 불려졌다.

동가씨는 보통의 유약한 여자들과는 틀려서, 그녀는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일으키는데 보좌하여 공이 없지 않고, 2남 1녀를 낳아서 청나라 역사에 명성이 대단했다.

적장자인 저영(?英), 차자는 유명한 예친왕 대선(禮親王 代善)이며, 여아는 여중호걸이라 불리는 동과격격(東果格格)이다.

그러나 후에 황태극이 등극하여 황제가 되자 생모의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생모 엽혁나랍씨를 황후로 추봉하고 세 명의 정실부인들을 나란히 추봉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가씨는 태조의 정실부인이라는 것 없애기 위해 사실이 말살되었으나 동가씨 일족은 청나라에서 명성이 대단했으므로 후에 효의인황후, 효신성황후 등의 황후가 또 나왔다.

[누르하치] 는 진정 무엇인가.


?★ 효선고황후 부찰 곤대(孝宣高皇后 富察 袞代)?청태조 노이합적이 두 번째 정실부인인 대복진이었고, 후세에 태조 계비(太祖 繼妃)로 불려졌다.

두 명의 아들인 망고이태(莽古爾泰)와 덕격류(德格類)와 딸인 망고제(莽古濟)를 낳았다.

부찰씨는 매우 일찍 죽었다.

합합납찰청처럼 부찰씨도 존호를 받지 못했다.

?★ 효열무황후 오랍나랍 아파해(孝烈武皇后 烏拉那拉 阿巴亥 1590

1626)?청태조 애신각라 노이합적의 대비(大妃). 그 아버지는 오랍패륵 만태(烏拉貝勒 滿泰)이다.

아파해는 노이합적에게 시집왔을 때 겨우 12살이었다.

청태조 효자고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대비로 피봉되었다.

그녀는 노이합적의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즉 12남 아제격(阿濟格), 다이곤(多爾袞), 다탁(多鐸)이다.

아파해는 젊고 아름다웠기에 노이합적은 그녀는 매우 총애하였다.

한번은 저녁 연회가 있을 때, 노이합적은 젊고 아름다운 아파해를 자꾸 바라보았고 자기가 늙어서 죽었을 때를 염려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 아파해를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후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가 죽은 후 계모나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습속이 있었고, 그러므로 노이합적은 자신의 사후에 대패륵(大貝勒) 자리를 맡길 차남 대선이 아파해를 후처로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선도 부친의 이러한 생각을 알고 있었고, 아파해도 노이합적이 죽은 후에 후금 정권 속에서의 후원자를 찾길 바라고 있었다.

이후, 노이합적의 복진 덕인택(德因澤)의 고발로 천명 5년 대비 사건이 일어났다.

아파패가 대선과 4패륵 황태극에게 음식을 보내 먹게 했는데, 황태극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먹지 않았고 대선은 이를 먹었다.

또한 아파해가 자주 심야에 출궁해서 대선의 집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고발은 모임이 실행되면서 되돌아왔다.

아파해가 옷차림에 정성을 들이고 대선과 서로 눈으로 정을 주고받는다는 것이었다.

노이합적은 사실을 조사할 사람을 파견했으나, 단지 집안의 추한 소문이 퍼뜨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에 기초한 조사였고, 곧 금은의 죄명을 은닉하기 위한 것이라며 포기했다.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덕인택의 고발은 황태극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으며, 대선을 재베하는 것을 달성했고, 아파해의 목적에 타격을 주었다.

천명 11년 노이합적은 중병에 걸렸고, 아파해는 가다가 도중에 노이합적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황태극은 노이합적의 운명을 구실로 삼아, 강제로 순장을 다짐받았다.

같이 순장당하는 두 사람은 서비(庶妃)와 덕인택이었다.

이와 같이, 황태극은 겨우 15살이었던 다이곤의 등극의 가능성을 박탈했다.

아파해는 그 때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온전한 시호는 효열공민헌철인화찬천려성무황후(?孝烈恭敏獻哲仁和贊天儷聖武皇后)이다.

그의 아들 중 하나인 다이곤은 후에 청조 순치황제(順治皇帝)의 섭정왕이 되었으며, 순치황제는 다이곤에게 심한 압박을 받았고, 그 때문에 순치황제는 다이곤이 바라는 대로 그녀를 황후에 책봉했다.

그러나 세조의 폐후 박이제길특씨가 순치 10년 정비로 강등될 때 다이곤의 어머니 대비 아파해도 황태극의 태묘에서 축출하고 나란히 일체의 존호를 박탈하였다.

?★ 수강태비 박이제길특씨(壽康太妃 博爾濟吉特氏)?청태조 노이합적의 많은 비 중 서열 1위. 태비는 몽고 과이심부(科爾沁部)의 사람으로 당시 몽고 과이심과 후금은 인척 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이합적이 박이제길특씨를 아내로 맞이해서, 청태종 황태극의 오대복진(五大福晉)도 박이제길특씨였다.

[누르하치] 보면 볼수록..



태비는 천명, 숭덕 연간 내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순치제 즉위에 이를 때에야 서조모를 수강태비에 봉해졌다.

?★? 덕인택(德因澤)?청태조 노이합적의 복진. 성씨 불명. 자녀 불명, 대복진 아파해와 노이합적의 차남 대선의 애매한 관계를 고발했으며 대비가 순장 당할 때 덕인택도 순장당했다.

? 이때 천은 주로 天時..-지합(地合): 지형과 지세 또는 지역-인합(人合): 인간관계, 단결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 명나라의 분화책에 대해 통합책을 사용, 전투 중 자신을 화살을 쏜 적군 용사를 용서, 약혼녀의 몽고 출가를 용서, 재세와 화목을 중시-기합(己合): 넓은 가슴과 활달한 심경으로 자신을 억제, 건강과 장수에도 영향, 홍타이지는 불같은 성격으로 돌연사 ○ 영원성 전투 패배와 비극의 원인-명의 원숭환은 영원성을 보수하고 전력을 강화, 서양대포를 이용하여 방어-68세의 누르하치는 6만 팔기군과 20만 대군으로 영원성 공격하나 실패, 최초의 패전 -> 우울과 울분으로 사망-만년에 승리와 권력으로 자만하고 총기가 흐려짐  me/120037290145?★ 효자고황후 엽혁나랍 맹고(孝慈高皇后 葉赫那拉 孟古 1575

1603)?엽혁부 패륵(葉赫部 貝勒) 양길노(楊吉?)의 막내딸. 청나라에서 첫번째로 추봉된 황후.효자고황후는 1588년 10월 청태조 애신각라 노이합적(淸太祖 愛新覺羅 努爾哈赤)에게 출가했으나 당시 태조는 황제를 칭하고 있지 않아서 후궁 제도가 불완전했다.

그래서 그의 처들을 복진(福晉)이라고 불렀으며 정실실부인을 대복진(大福晉)이라 하고 나머지를 측복진(側福晉), 서복진(庶福晉)이라고 불렀다.

당시의 대복진인 부찰씨가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에 맹고는 단지 첫번째 측복진일 뿐이었다.

이후에 부찰씨가 서거하자, 청태조는 늦게 시집온 아파해를 거듭 대복진에 책립했다.

그랬지만 맹고는 1592년 아들 하나를 낳으니 후에 즉위할 청태종 황태극(皇太極)이었다.

그러나 맹고는 태조의 총애를 받지 못해 우울하고 즐겁지 못했고 1603년 서거하니 그 때 나이 28살이었다.

1636년 5월 16일 청태종 황태극이 등극하자 아들로 인해 어머니가 귀해지듯이 맹고는 추봉되어 시호를 효자고황후라고 하였다.

?★ 효원고황후 동가 합합납찰청(孝元高皇后 ?佳 哈哈納札靑)?청태조의 최초의 정실부인(적복진:嫡福晉)이다.

후세에 태조 원비(元妃)로 불려졌다.

동가씨는 보통의 유약한 여자들과는 틀려서, 그녀는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일으키는데 보좌하여 공이 없지 않고, 2남 1녀를 낳아서 청나라 역사에 명성이 대단했다.

적장자인 저영(?英), 차자는 유명한 예친왕 대선(禮親王 代善)이며, 여아는 여중호걸이라 불리는 동과격격(東果格格)이다.

그러나 후에 황태극이 등극하여 황제가 되자 생모의 신분을 높이기 위하여 생모 엽혁나랍씨를 황후로 추봉하고 세 명의 정실부인들을 나란히 추봉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가씨는 태조의 정실부인이라는 것 없애기 위해 사실이 말살되었으나 동가씨 일족은 청나라에서 명성이 대단했으므로 후에 효의인황후, 효신성황후 등의 황후가 또 나왔다.

?★ 효선고황후 부찰 곤대(孝宣高皇后 富察 袞代)?청태조 노이합적이 두 번째 정실부인인 대복진이었고, 후세에 태조 계비(太祖 繼妃)로 불려졌다.

두 명의 아들인 망고이태(莽古爾泰)와 덕격류(德格類)와 딸인 망고제(莽古濟)를 낳았다.

부찰씨는 매우 일찍 죽었다.

합합납찰청처럼 부찰씨도 존호를 받지 못했다.

?★ 효열무황후 오랍나랍 아파해(孝烈武皇后 烏拉那拉 阿巴亥 1590

1626)?청태조 애신각라 노이합적의 대비(大妃). 그 아버지는 오랍패륵 만태(烏拉貝勒 滿泰)이다.

아파해는 노이합적에게 시집왔을 때 겨우 12살이었다.

청태조 효자고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대비로 피봉되었다.

그녀는 노이합적의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즉 12남 아제격(阿濟格), 다이곤(多爾袞), 다탁(多鐸)이다.

아파해는 젊고 아름다웠기에 노이합적은 그녀는 매우 총애하였다.

한번은 저녁 연회가 있을 때, 노이합적은 젊고 아름다운 아파해를 자꾸 바라보았고 자기가 늙어서 죽었을 때를 염려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 아파해를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후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가 죽은 후 계모나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습속이 있었고, 그러므로 노이합적은 자신의 사후에 대패륵(大貝勒) 자리를 맡길 차남 대선이 아파해를 후처로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선도 부친의 이러한 생각을 알고 있었고, 아파해도 노이합적이 죽은 후에 후금 정권 속에서의 후원자를 찾길 바라고 있었다.

이후, 노이합적의 복진 덕인택(德因澤)의 고발로 천명 5년 대비 사건이 일어났다.

아파패가 대선과 4패륵 황태극에게 음식을 보내 먹게 했는데, 황태극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먹지 않았고 대선은 이를 먹었다.

또한 아파해가 자주 심야에 출궁해서 대선의 집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고발은 모임이 실행되면서 되돌아왔다.

아파해가 옷차림에 정성을 들이고 대선과 서로 눈으로 정을 주고받는다는 것이었다.

노이합적은 사실을 조사할 사람을 파견했으나, 단지 집안의 추한 소문이 퍼뜨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에 기초한 조사였고, 곧 금은의 죄명을 은닉하기 위한 것이라며 포기했다.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덕인택의 고발은 황태극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으며, 대선을 재베하는 것을 달성했고, 아파해의 목적에 타격을 주었다.

천명 11년 노이합적은 중병에 걸렸고, 아파해는 가다가 도중에 노이합적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황태극은 노이합적의 운명을 구실로 삼아, 강제로 순장을 다짐받았다.

같이 순장당하는 두 사람은 서비(庶妃)와 덕인택이었다.

이와 같이, 황태극은 겨우 15살이었던 다이곤의 등극의 가능성을 박탈했다.

아파해는 그 때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온전한 시호는 효열공민헌철인화찬천려성무황후(?孝烈恭敏獻哲仁和贊天儷聖武皇后)이다.

그의 아들 중 하나인 다이곤은 후에 청조 순치황제(順治皇帝)의 섭정왕이 되었으며, 순치황제는 다이곤에게 심한 압박을 받았고, 그 때문에 순치황제는 다이곤이 바라는 대로 그녀를 황후에 책봉했다.

그러나 세조의 폐후 박이제길특씨가 순치 10년 정비로 강등될 때 다이곤의 어머니 대비 아파해도 황태극의 태묘에서 축출하고 나란히 일체의 존호를 박탈하였다.

?★ 수강태비 박이제길특씨(壽康太妃 博爾濟吉特氏)?청태조 노이합적의 많은 비 중 서열 1위. 태비는 몽고 과이심부(科爾沁部)의 사람으로 당시 몽고 과이심과 후금은 인척 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노이합적이 박이제길특씨를 아내로 맞이해서, 청태종 황태극의 오대복진(五大福晉)도 박이제길특씨였다.

태비는 천명, 숭덕 연간 내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순치제 즉위에 이를 때에야 서조모를 수강태비에 봉해졌다.

?★? 덕인택(德因澤)?청태조 노이합적의 복진. 성씨 불명. 자녀 불명, 대복진 아파해와 노이합적의 차남 대선의 애매한 관계를 고발했으며 대비가 순장 당할 때 덕인택도 순장당했다.

? 이때 천은 주로 天時..-지합(地合): 지형과 지세 또는 지역-인합(人合): 인간관계, 단결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 명나라의 분화책에 대해 통합책을 사용, 전투 중 자신을 화살을 쏜 적군 용사를 용서, 약혼녀의 몽고 출가를 용서, 재세와 화목을 중시-기합(己合): 넓은 가슴과 활달한 심경으로 자신을 억제, 건강과 장수에도 영향, 홍타이지는 불같은 성격으로 돌연사 ○ 영원성 전투 패배와 비극의 원인-명의 원숭환은 영원성을 보수하고 전력을 강화, 서양대포를 이용하여 방어-68세의 누르하치는 6만 팔기군과 20만 대군으로 영원성 공격하나 실패, 최초의 패전 -> 우울과 울분으로 사망-만년에 승리와 권력으로 자만하고 총기가 흐려짐   도시 점령 불가. 고유 유닛 2 : 파벌 - 개척자 대체 유닛. 생산력 106에서 148로 증가. 인구수 2이상 도시에서 생산 가능. 건설한 도시에 기념비+곡창+시장 기본 부여. 시작 지점:만주2011년 8월 12일 발매된 《사무라이의 한국 침략》 DLC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문명. 지도자의 외형은칭기즈 칸과 같다.

청의 시조이자 여진족을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한 만주족의 영웅 누르하치가 지도자이다.

역사에서는 끝내만리장성을 넘지 못하고 홍이포에 맞아죽은 그의 한을 시나리오에서나마 풀 수 있게 되었다.

문명 특성은 한마디로독일의 상위호환. 유유상종이라고 야만족 진지를 접수하면 확률 그딴거 없이 보이는 족족 죄다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독일은 군비 절감 및 야만족에게서 금 추가 특성이 있으므로 둘중 어느쪽이 더 낫다 보기는 힘들지만 100% 확률로 중립 세력을 아군에 편입시킨다는 특성은 굉장한 것이다.

고유 유닛인 정예 기병대는 한마디로만주판 케시크. 개발자가 유닛을 새로 만들기 귀찮았는지(…) 이름만 바꾸고 나머지는 케시크와 전혀 차이 없게 만들었다.

심지어 위대한 장군도칸이고 기병 이동 보너스까지 적용받는 등몽골의 종특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시나리오에 도시국가가 없어 관련 종특은 못쓰지만 사실상 몽골 상위호환.그리고 개척자가 파벌로 대체되었는데, 이걸로 이 시나리오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

나머지 문명들은 개발제한(…)에 묶여서 주어진 도시만 갖고 시작해야 하기에 혼자 원하는만큼 세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만주만의 이점은 대단한 것이다.

또한 이 파벌은 개척자보다 생산에 힘이 조금 더 드는 대신 생산도시에 3개의 기본 건물(기념비, 곡창, 시장)을 기본으로 넣는 능력이 있어 도시를 짓는 즉시 문화+식량+금 확보가 용이하다.

한마디로 몽골처럼 끝없이 확장, 확장, 확장하는 것만이 활로인전투종족. 야만인 편입 보너스와 정예 기병대, 그리고 도시 건설을 잘 사용해야 한다.

초반 공략 대상은 면적이 작은 한반도보다 아군으로 편입할 야만족이 많은 중국 대륙을 노리는 편이 더 좋다.

또한 너무 일찍 조선을 털면 일본과 국경이 맞닿게 되어 조기에 전선이 확대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엔하위키 누르하치는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웠고 무예도 익혔다.

누르하치가 25살 되던 해 그의 조부와 부친이 투룬호트 성주 니칸외란과 명나라 군대한테 살해 되었다.

 누르하치는 부친이 남겨놓은 13벌의 갑옷을 꺼내여 수하 병사들에게 나눠준후 니칸외란을 공격했다.

니칸외란을 죽인후 누르하치는 파죽지세로 기타 부락을 정벌해 몇년 지나지 않아 건주여진을 통일하였다.

 당시 여진족은 건주여진외에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이 있었다.

해서여진중 가장 강대한 부족은 예허부락이였다.

1593년 예허부락은 예진, 몽골 등 9개 부락과 연맹을 맺고 3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공격해왔다.

 이에 맞서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군사를 이끌고 연합군과 싸워 끝내 승전을 거두고 여진족의 각 부락들을  통일하여 통치하였다.

 여진을 통일하는 과정에 누르하치는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였다.

기는 행정단위 일뿐만아니라 군사조직이기도 하다.

매 기 아래에는 우록(牛綠)을 두었는데 300명을 한 개 우록씩 하여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수렵도 하고 전시에는 싸울수 있게끔 하였다.

8기 제도는 생산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력도 강화하였다.

 1616년 누르하치는 8기 귀족들의 옹호를 받아 헤투알라(지금의 요녕성 신빈부근)에서 스스로 칸(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립한 후 2년 남짓한 시간을 들여 내부를 정돈하고 각 방면의 생산을 발전 시켰으며 병력을 확충하였다.

 1618년 그는 직접 2만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 정벌에 나섰다.

먼저 무순을 공략한후 누르하치는 6만의 병력으로 후금을 토벌하러 오는 세갈래 명나라 군대를 각기 격파하였다.

이 전쟁을 역사에서 <싸르후대전>이라고 한다.

 싸르후대전 이후 명왕조의 원기가 크게 상했다.

누르하치는 2년후 8기군을 거느리고 요동의 중요한 요충지인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였으며, 1625년 누르하치는 후금의 서울을 심양으로 옮기고 이름을 성경이라 고쳤다.

 1626년 누르하치는 직접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녕원성(寧遠城)을 들이쳤다.

녕원에 남은 명나라 군사는 만여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녕안성 백성들과 함께 끝까지 녕원성을 사수했다.

후금 군대는 큰 손실을 보았고 누르하치도 중상을 입어 부득히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누르하치는 속이 상하고 화가 나기도 한데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 때 나이 68살이었다.

그후, 그의 여덟째 아들 황태극이 후금의 칸위를 이어받았다.

 누루하치의 시신을 모신 칸능은 현재 심양의 유원지화된 한 공원(북능공원)내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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