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용문석굴



북위 때 효문제가 수도를 뤄양으로 옮긴 493년 이후 수·당까지 400여년 동안 만들어져 각 시대의 다양한 미술양식이 녹아 있다.

 이하(伊河)강을 사이에 있고 석회암 암벽을 깎아 만든 석굴의 길이가 1km나 되며 모두 약 1,350개의 석굴과 석굴 안에는 모두 10,000만개 정도의 크고 작은 불상이 있다고 한다.

작은 것은 2cm에서 17m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있어 찬찬히 구경하면 며칠을 두고 해야 하는데 오늘 가이드가 내게 준 시간은 1시간 30분밖에 없다.

쌍십절이라서 관광객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어디가 무엇이 있는지 어디부터 보아야 하는지 하는 것은 판단이 서지 않고 물결에 휩쓸리듯이 다녀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 쓴 글은 알량한 지식이거나 인터넷에 의존한 정보임을 밝혀 둔다.

 석굴은 불교초기의 양식으로 인도의 많은 수의 초기 사원이 이같은 동굴의 형태를 띤다.

동굴양식은 무더위가 긴 그곳의 기후 특성과 동굴 주변의 외진 환경에 기인하여 만들어 진다고 볼 수 있는데 요컨대 석굴 안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뿐만 아니라 주위가 조용해 수행에도 알맞다.

게다가 석굴 건축에는 많은 비용이 필요 없고, 동굴 특성상 견고하기 짝이 없어 오래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문석굴은 소림사에서도 보듯이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용문석굴관광은 잉어가 물턱을 넘으면 용으로 승천한다는 용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용문석굴의 용문이라는 명칭은 동한에 이르러 사용된 것으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이곳을 ‘궐새’라고 불렀다.

‘궐’은 장벽을 가리키는 말로 궁전의 문을 뜻한다.

‘새’란 글자 그대로 요새를 뜻한다.

수도 낙양의 남쪽을 지키는 곳이었다는 것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으며, 강의 명칭이 이수이기 때문에 ‘이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하(伊河)를 가로지르는 용문교를 지나 약 100m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석굴이 펼쳐진다.

이하(이허}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동산으로 나뉜다.

서산을 이궐산(이췌산)이라고도 하는데 용문입구의 안내문에는 용문산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서산을 향산이라고 부른다.

 석굴 대부분은 서산에 몰려 있고, 동산에는 석굴 일부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묘(백원)와 향산암이 있다.

석회암 절벽에 벌집처럼 크고 작은 구멍들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다.

높이 1m 남짓의 작은 구멍부터 석굴암 크기만한 굴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용문석굴에는 중요한 동굴이 7곳이 있다.

잠계사, 빈양삼동, 만불동, 연화동, 봉선사, 약방동, 고양동 등이다.

이 가운데 북위시대에 판 것은 고양동, 빈양중동, 연화동 등이고, 당시대에 판 것은 봉선사, 만불동, 잠계사 등이다.

 석불을 보기 위해서는 철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

 처음 만나는 석굴은 빈양삼동으로 용문석굴 중 가장 저명한 동굴이다.

특히 중동은 북위 경명원년부터 시작하여 정광4년까지 24년간에 걸쳐 개착한 것으로 북위 때 선무제가 그의 부모의 공덕을 기리고자 판 것이다.

용문석굴 가운데 제일 오랫동안 팠고, 힘들었지만, 제일 화려한 석굴이다.

본존은 석가모니불인데 높이가 8.4m다.

얼굴은 준수하고, 코가 높고, 눈은 크다.

1불2보살 형식이다.

빈양북동은 당시대 것이고, 빈양남동은 북위시대에 시작하여 수시대에 완공된 석굴이다.

빈양동은 찬란한 아침 햇살이 석굴 안창까지 비추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굴암의 건축과 유사하다.

아쉬운 점은 머리가 잘리거나 몸통이 깨지는 등 멀쩡한 불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전쟁·침략·도굴에 이어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남은 석상 대부분, 특히 머리 부분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시의 장인정신 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듯 조각 작품의 예술성은 1000년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다.

 두 번째에는 만불동과 연화동을 만난다.

만불동은 용문산의 서남부에 있는데 굴 안은 네모났고, 천정은 평평한 방형평정형이다.

천정의 중앙에는 커다란 연꽃이 새겨져 있어 만불동이라 하였다.

이 만불동 벽에는 불상, 연화, 음악인, 악기, 무용수 등이 있어 당대 예술의 진품이라고 한다.

 연화동은 석굴 천정에 커다란 연화가 있어서 생긴 말이다.

북위시대 작품인데 주존은 석가모니불이다.

협시보살은 문수와 보현이다.

불과 보살 사이에는 아난과 가섭 두 제자도 서 있다.

이 석굴의 바깥에는 관음보살상이 있는데 얼굴의 반 정도가 파손되었지만. 정병을 든 손이나 전체적인 자세가 우아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세 번째의 봉선사는 용문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있다.

당 고종 함령 3년부터 4년간 판 걸작이다.

옛날에는 그 앞에 목조 지붕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이 없어진 현재는 모든 조각상이 백일하에 드러난 형태로 남아있다.

본존인 비로자나불의 높이는 17.4m나 되면서도 얼굴은 풍만 수려하고, 자태는 단정하며, 옷 주름은 간결 유창하다.

따라서 형신을 겸비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본존불 양쪽으로 제자 둘과 보살 둘이 새겨져 있고, 양쪽 벽에 천왕과 역사상이 있다.

천왕은 마귀를 밟고 있다.

무측천황후가 당시에 조성할 때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담았다는 데 본존불의 얼굴이 그녀를 닮았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내가 볼 때는 콧날이 빼죽하고 큰 눈으로 보아서는 동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서구적인 면모가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이런 것도 측천무후를 신격화하여 폭정이나 패륜행위를 덮어 두려는 것은 아닐까? 허난성 서쪽에 접한 산시성 출신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다.

남편인 당나라 고종이 죽자 권력을 장악, 두 아들을 황제로 올렸다가 690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돼 죽을 때까지 약 15년 동안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동산에 가기 위해서는 검표소를 지나고 동산과 이어진 다리를 건너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 30분 중에 50분이 지나고 40분이 남았다.

마음도 급하고 우선 화장실에 들어갔다.

소변기는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대변기가 두 개가 있고 칸막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벌써 한사람이 쭈그려 앉아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나만 당황하다 뒤에 기다리는 이들이 많고해서 나오기도 뭐하고 “에라 모르겠다”하고 서서 볼 일을 보고 나왔다.

 동산은 벌집구조가 아니고 단순구조로 그리 복잡하지 않았고 길따라 석굴이 형성되었다.

석굴이 그다지 많지 않고 접근이 쉬워서 그런지 입구가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마치 감방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8세기가 되어 현종때에 이르러서는 점차 불상을 조각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 무렵에는 서산의 벼랑이 석굴로 가득 차 더 이상 조각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다.

그래서 현종 때에는 동산에 석굴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간경사 석굴이다.

동산의 석굴 형식은 서산의 석굴과는 약간 다르다.

서산 봉선사의 대불만 해도 본존은 석굴의 뒷면 벽에 조각되어 있는데 동산에서는 독립된 상으로 중앙에 안치되어 있다.

간경사 석굴은 측천무후의 후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천장에 새겨진 비천상이 굉장히 훌륭하며, 본존은 아미타불이다.

사방의 벽에는 나한상 29개가 새겨져 있다.

하나하나 표정이 다르고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시간이 임박해 옴에 따라 검표소에 가서 되돌아가려니 검표원이 안된다고 손짓을 한다.

원래 일방통행으로 온 방향으로 못 간다고 하는 모양이다.

마침 ‘노랑풍선 ’가이드가 지나가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설명을 해주니 차단봉을 열어주고 가라고 한다.

가는 길 중간에 봉선서 남쪽의 약방동을 보았다.

굴 안에 북제시대에 통용되던 1백40여개의 약방이 새겨졌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것은 의학연구에 주요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고양동은 보지는 못했는데 북위 태화 19년부터 북제 무평까지 판 것인데 용문석굴 가운데 가장 일찍 개착된 것 중 하나인 셈이다.

천정은 볼트형식을 이루고 벽면장식이 크게는 2개층으로 난간과 주두에까지 섬세한 조각장식이 있다.

또한 동굴의 안쪽 벽은 북위, 당, 송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단의 석불이 있고 심지어 2

3cm정도의 초미니 불상까지 불상군으로 메워져 있으며 인도의 불교장식과 흡사하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길이 일방통행이라 뚫고 나가기가 어렵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2

3분 늦었는데 일행 중의 일부가 나의 늦은 행동에 불만을 토로했는가 보다.

일행들은 괜찮다고는 하지만 눈치가 그게 아니다.

 식사는 용문석굴 입구의 ‘용문석루(龍門客樓)로 수석요리(水石料理)가 전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측천무후의 이름이 나오는데 측천무후가 가장 즐겨했다는 음식으로 탕종류가 8가지 종류로 전부 합치면 16가지 요리가 나온다.

음식이 물같이 흐르듯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탕종류의 음식이 맛잇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국물과 같이 건더기를 건져서 같이 먹으니 그런 요리명칭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Tip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용문석굴 관람순서는 용문(매표소)

빈양삼동

만불동

봉선사

약방동

고양동

검표소

만수교

동굴(東窟)

향산사

용문교

용문(매표소)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인데 그걸 몰라서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다리 2개만 더 건너면 되는 것이고 시간적으로 별로 차이가 없다.

강건너에서 서굴을 보는 풍경도 좋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음 여행 시 참고하기 바람.                ▼서산석굴(西山石窟)                                             ▼동산석굴(東山石窟)                  ▼용문객루의 수석요리(水石料理)        서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인근에 낙양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 그 곳에 3대 석굴 중 하나인 용문석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일정에 넣었습니다.

두 도시는 374km 거리로 서울 - 부산(400km)와 비슷한데 고속철도망이 생긴 덕에 2시간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울 부산 거리니 사실 가깝지는 않지만 외국여행에서는 갈만한 거리죠. ㅎㅎ*서안- 낙양 (西安- 洛?)고속열차 5시간 걸려 가는 침대차도 있는데 겨울이라 피하고 서안에서 D 열차(??)를 타고 이동。 용문석굴(??石窟)은 낙양시 남쪽, 낙양용문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고속열차는 기존 열차와 다른 곳에 새로 역이 만들어져 역사가 깨끗하고 공항터미널처럼 크기도 아주 큽니다.

D열차 차내에 표시된 속도는 시속 276km인데 승차감 좋고, 흔들림도 거의 없습니다.

차내 청소를 담당하는 직원도 어찌나 열심히 다니는지 쓰레기가 쌓일 틈이 없습니다.

G 열차는 속도가 300km 정도인데 역시 승차감 좋습니다.

한국내에서도 중국 기차표 운행 시간을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예약도 할 수 있습니다.

(2개월전부터 예매)  중국의 예매 사이트인 Ctrip www.ctrip.com 에서는 한글로도 볼 수 있습니다.

중국 포털인 바이두百度에서 검색하면 중국어로 기차표 판매하는 사이트를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서안에서 식사를 못하고 탑승. 식당칸도 있겠다 싶어 검색해보니 고속열차는 보통 5호차가 식당이라고 나오네요. 그래서 가서 주문하니 데워서 자리에까지 갖다준다고 하네요... 자리에 돌아가  데워진 도시락 배달을 받으니 항공기 기내식같은 느낌이 들 정도.  서비스에 감동하려고 기다렸건만,,,  데워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데도 10분 이상이나 걸린데다 그나마 하나 먼저 갖다주고 또 한참 있다가 다른 것 하나를 가져오네요..  아직 서비스로 감동주기에는 머네요.  중국은 하드웨어는 첨단인 것도 많은데 그것을 채울 서비스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는..저 도시락들이 하나에 15위안  ?* 용문석굴서안에서 낙양으로 이동한 후 용문석굴 근처 숙소에서 1박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석굴에 들어갑니다.

먼저 매표소에서 입장료부터 냅니다.

중국은 입장료가 정말 비싼데 겨울이라 비수기 할인으로 60위안으로 입장. ---------------------------------------* 입장료(1위안: 약 190원)(한국 여권으로 학생 할인 안됨)                성수기 (3월

11월)  120위안 (서산석굴, 동산석굴, 향산사, 백원 포함.西山石窟、?山石窟、香山寺、白?) ?                비수기 60위안 *개방시간 :3월

11월07:30

오후 6:30                    12월

2월:07:30

오후5:30야간개장: 4월

10월말( 이 기간중 온다면 야간에 오는 것도 멋지겠네요.)야간 매표시간: 저녁6:30

9:00; 점등: 저녁 7시폐장시간: 저녁 10:30--------------------------------------------------용문석굴은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데 서쪽에 유명한 대형 불상이 모여 있고, 동쪽에는 만들어지다만 석굴군과 절인 향산사,백거이의 정원이었다는 백원이 있습니다.

양쪽 다 둘러보긴 했는데 서쪽이 볼 것이 많고 동쪽에는 측천무후 상을 조망할 수 있는 조망대가 있습니다.

총 1.5km 거리 안에 불상의 수는 2만여개라 하네요. 물론 여기에는 손바닥만한 작은 불상 포함. ?석굴은 사람 앉은 크기의 공간에 불상을 모시고, 그 불상 주변에 자잘한 불상이 많이 새겨진 형태의 것이 많았습니다.

서기 500년

900년 사이에 위나라

당나라 시대에 조성되어 돌산에 석굴이 늘어간 것 같습니다.

귀족과 왕이 시주하면 그때그때 만들어진 듯 석굴의 군집 형태는 무질서합니다.

 여기저기에서 보수공사도 진행중이었는데 파괴된 모습도 다양하고 그 이유도 다양합니다.

불상의 머리를 떼어가서 모셔두면 좋다는 설에 따라 떼어가기도 하고, 전쟁으로 적군이 파괴하기도 했으며, 종교 탄압차원에서도 파괴되었고, 돈이 되서 약탈해간 사례도 많습니다.

이곳 대형 불상머리는 일본의 박물관에 모셔져 있고, 미국의 미술 상인이 불상을 떼내 팔기도 했다는군요.  이렇게 돌도 왜 부시고, 떼가긴 왜 떼가는 건지 원,,,   천정에도 그림을 그린 동굴도 많습니다.

과거에는 돌 불상에 채색도 했다는 군요. 이전에는 이런 석굴이 하나하나 실제로 절 하고 기도하는 공간으로 쓰인 듯 치장이 화려합니다.

 입구에  탑도 있구요.  돌산 여기저기에 크기도 제각각인 석굴이 많습니다.

 크고 작은 불상을 보면서 나아가니 드디어 뭔가... 나타납니다.

용문석굴 중 가장 크고 대표적인 불상.. 당나라 측천무후가 시주한 돈으로 만들어지고 얼굴도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는....계단을 오르니 높이 17미터에 달하는 불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학...표정이 쿨하시네요...  저 손과 무릎, 방석 부분은 또 누가 파괴했는지!!!'내가 1,500여년 이상 이곳에서 비바람 맞으며 살다보니 도 다 닦았다.

..'하는 듯.. 쿨하심.저도 저렇게 1,500여년 앉아 있으면 도를 깨칠듯...   생각해보니 끔찍 =33=33? 옆의 상들도 멋짐  석상의 윗 부분을 보면 네모난 기둥 자국이 보입니다.

건립 당시에는 누각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봐도 굉장한데 석상에 색도 칠해져있고, 누각까지 있었으니 그런 곳에서 불교 의식을 거행하면 그 화려함이 정말 대단했겠네요. 그래서 지금도 야간 조명도 하나봅니다.

장예모 감독이 야외 공연 만들면 보러 가고 싶네요.. <야간 조명- 자료 사진>여러 언어로 설명판이 있는데.. 한글은 한글이로되 한글같지 않은 설명이라 잘 이해는 안됩니다.

 이렇게 약간 떨어져서 보면 그 웅장함이 더하더군요. 깍!(가운데 불상 높이 17m임을 생각하고 보세요)이제부터는 바위산 따라 오르내립니다.

 강 건너 서쪽 풍경 강 건너 서쪽 편에서 본 모습. 500여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인간이 참 대단합니다.

 억소리나는 용문석굴... 규모도 엄청나지만 1500여년을 비바람 맞으며 야외에서 버티어 살아남아 오늘날 나와 눈을 맞추는데 새삼 전율을 느꼈습니다.

중국 역사상 유일의 여자 황제로 권력을 휘둘렸던 측천무후(중국명 武?天우즈어티엔). 측천무후는 생전에 많을 일을 했는데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인 나당연합군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멸망시킨 일도 했습니다.

교과서 속 묻혀있던 나당연합군.. 이런 단어도 깨어 살아나오고,, 1500여년의 역사가 갑자기 내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듯 하네요. 오늘날 나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구경하러온 관광객. 측천무후가 살았을 당시에는 이런 관광객이란 존재는 상상도 못했겠지요. 엄청난 돈과 인력을 동원해 거대한 불상까지 지어가며 복을 빌었을 측천무후..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니 그녀도 지나간 그 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많은 왕조가 지나가고, 외세의 침입,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아 오늘날 이렇게 외국에서 온 유료 관광객에게 모습을 보여준 이 거대한 불상 앞에 감사의 합장을 올립니다.

  북위 때 효문제가 수도를 뤄양으로 옮긴 493년 이후 수·당까지 400여년 동안 만들어져 각 시대의 다양한 미술양식이 녹아 있다.

 이하(伊河)강을 사이에 있고 석회암 암벽을 깎아 만든 석굴의 길이가 1km나 되며 모두 약 1,350개의 석굴과 석굴 안에는 모두 10,000만개 정도의 크고 작은 불상이 있다고 한다.

작은 것은 2cm에서 17m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있어 찬찬히 구경하면 며칠을 두고 해야 하는데 오늘 가이드가 내게 준 시간은 1시간 30분밖에 없다.

쌍십절이라서 관광객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어디가 무엇이 있는지 어디부터 보아야 하는지 하는 것은 판단이 서지 않고 물결에 휩쓸리듯이 다녀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 쓴 글은 알량한 지식이거나 인터넷에 의존한 정보임을 밝혀 둔다.

 석굴은 불교초기의 양식으로 인도의 많은 수의 초기 사원이 이같은 동굴의 형태를 띤다.

동굴양식은 무더위가 긴 그곳의 기후 특성과 동굴 주변의 외진 환경에 기인하여 만들어 진다고 볼 수 있는데 요컨대 석굴 안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뿐만 아니라 주위가 조용해 수행에도 알맞다.

게다가 석굴 건축에는 많은 비용이 필요 없고, 동굴 특성상 견고하기 짝이 없어 오래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문석굴은 소림사에서도 보듯이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용문석굴관광은 잉어가 물턱을 넘으면 용으로 승천한다는 용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용문석굴의 용문이라는 명칭은 동한에 이르러 사용된 것으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이곳을 ‘궐새’라고 불렀다.

‘궐’은 장벽을 가리키는 말로 궁전의 문을 뜻한다.

‘새’란 글자 그대로 요새를 뜻한다.

수도 낙양의 남쪽을 지키는 곳이었다는 것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으며, 강의 명칭이 이수이기 때문에 ‘이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하(伊河)를 가로지르는 용문교를 지나 약 100m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석굴이 펼쳐진다.

이하(이허}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동산으로 나뉜다.

서산을 이궐산(이췌산)이라고도 하는데 용문입구의 안내문에는 용문산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서산을 향산이라고 부른다.

 석굴 대부분은 서산에 몰려 있고, 동산에는 석굴 일부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묘(백원)와 향산암이 있다.

석회암 절벽에 벌집처럼 크고 작은 구멍들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다.

높이 1m 남짓의 작은 구멍부터 석굴암 크기만한 굴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용문석굴에는 중요한 동굴이 7곳이 있다.

잠계사, 빈양삼동, 만불동, 연화동, 봉선사, 약방동, 고양동 등이다.

이 가운데 북위시대에 판 것은 고양동, 빈양중동, 연화동 등이고, 당시대에 판 것은 봉선사, 만불동, 잠계사 등이다.

 석불을 보기 위해서는 철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

 처음 만나는 석굴은 빈양삼동으로 용문석굴 중 가장 저명한 동굴이다.

특히 중동은 북위 경명원년부터 시작하여 정광4년까지 24년간에 걸쳐 개착한 것으로 북위 때 선무제가 그의 부모의 공덕을 기리고자 판 것이다.

용문석굴 가운데 제일 오랫동안 팠고, 힘들었지만, 제일 화려한 석굴이다.

본존은 석가모니불인데 높이가 8.4m다.

얼굴은 준수하고, 코가 높고, 눈은 크다.

1불2보살 형식이다.

빈양북동은 당시대 것이고, 빈양남동은 북위시대에 시작하여 수시대에 완공된 석굴이다.

빈양동은 찬란한 아침 햇살이 석굴 안창까지 비추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굴암의 건축과 유사하다.

아쉬운 점은 머리가 잘리거나 몸통이 깨지는 등 멀쩡한 불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전쟁·침략·도굴에 이어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남은 석상 대부분, 특히 머리 부분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시의 장인정신 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듯 조각 작품의 예술성은 1000년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다.

 두 번째에는 만불동과 연화동을 만난다.

만불동은 용문산의 서남부에 있는데 굴 안은 네모났고, 천정은 평평한 방형평정형이다.

천정의 중앙에는 커다란 연꽃이 새겨져 있어 만불동이라 하였다.

이 만불동 벽에는 불상, 연화, 음악인, 악기, 무용수 등이 있어 당대 예술의 진품이라고 한다.

 연화동은 석굴 천정에 커다란 연화가 있어서 생긴 말이다.

북위시대 작품인데 주존은 석가모니불이다.

협시보살은 문수와 보현이다.

불과 보살 사이에는 아난과 가섭 두 제자도 서 있다.

이 석굴의 바깥에는 관음보살상이 있는데 얼굴의 반 정도가 파손되었지만. 정병을 든 손이나 전체적인 자세가 우아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세 번째의 봉선사는 용문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있다.

당 고종 함령 3년부터 4년간 판 걸작이다.

옛날에는 그 앞에 목조 지붕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이 없어진 현재는 모든 조각상이 백일하에 드러난 형태로 남아있다.

본존인 비로자나불의 높이는 17.4m나 되면서도 얼굴은 풍만 수려하고, 자태는 단정하며, 옷 주름은 간결 유창하다.

따라서 형신을 겸비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본존불 양쪽으로 제자 둘과 보살 둘이 새겨져 있고, 양쪽 벽에 천왕과 역사상이 있다.

천왕은 마귀를 밟고 있다.

무측천황후가 당시에 조성할 때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담았다는 데 본존불의 얼굴이 그녀를 닮았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내가 볼 때는 콧날이 빼죽하고 큰 눈으로 보아서는 동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서구적인 면모가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이런 것도 측천무후를 신격화하여 폭정이나 패륜행위를 덮어 두려는 것은 아닐까? 허난성 서쪽에 접한 산시성 출신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다.

남편인 당나라 고종이 죽자 권력을 장악, 두 아들을 황제로 올렸다가 690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돼 죽을 때까지 약 15년 동안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동산에 가기 위해서는 검표소를 지나고 동산과 이어진 다리를 건너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 30분 중에 50분이 지나고 40분이 남았다.

마음도 급하고 우선 화장실에 들어갔다.

소변기는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대변기가 두 개가 있고 칸막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벌써 한사람이 쭈그려 앉아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나만 당황하다 뒤에 기다리는 이들이 많고해서 나오기도 뭐하고 “에라 모르겠다”하고 서서 볼 일을 보고 나왔다.

 동산은 벌집구조가 아니고 단순구조로 그리 복잡하지 않았고 길따라 석굴이 형성되었다.

석굴이 그다지 많지 않고 접근이 쉬워서 그런지 입구가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마치 감방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8세기가 되어 현종때에 이르러서는 점차 불상을 조각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 무렵에는 서산의 벼랑이 석굴로 가득 차 더 이상 조각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다.

그래서 현종 때에는 동산에 석굴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간경사 석굴이다.

[용문석굴] 완전 대박


동산의 석굴 형식은 서산의 석굴과는 약간 다르다.

서산 봉선사의 대불만 해도 본존은 석굴의 뒷면 벽에 조각되어 있는데 동산에서는 독립된 상으로 중앙에 안치되어 있다.

간경사 석굴은 측천무후의 후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천장에 새겨진 비천상이 굉장히 훌륭하며, 본존은 아미타불이다.

사방의 벽에는 나한상 29개가 새겨져 있다.

하나하나 표정이 다르고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시간이 임박해 옴에 따라 검표소에 가서 되돌아가려니 검표원이 안된다고 손짓을 한다.

원래 일방통행으로 온 방향으로 못 간다고 하는 모양이다.

마침 ‘노랑풍선 ’가이드가 지나가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설명을 해주니 차단봉을 열어주고 가라고 한다.

가는 길 중간에 봉선서 남쪽의 약방동을 보았다.

굴 안에 북제시대에 통용되던 1백40여개의 약방이 새겨졌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것은 의학연구에 주요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고양동은 보지는 못했는데 북위 태화 19년부터 북제 무평까지 판 것인데 용문석굴 가운데 가장 일찍 개착된 것 중 하나인 셈이다.

천정은 볼트형식을 이루고 벽면장식이 크게는 2개층으로 난간과 주두에까지 섬세한 조각장식이 있다.

또한 동굴의 안쪽 벽은 북위, 당, 송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단의 석불이 있고 심지어 2

3cm정도의 초미니 불상까지 불상군으로 메워져 있으며 인도의 불교장식과 흡사하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길이 일방통행이라 뚫고 나가기가 어렵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2

3분 늦었는데 일행 중의 일부가 나의 늦은 행동에 불만을 토로했는가 보다.

일행들은 괜찮다고는 하지만 눈치가 그게 아니다.

 식사는 용문석굴 입구의 ‘용문석루(龍門客樓)로 수석요리(水石料理)가 전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측천무후의 이름이 나오는데 측천무후가 가장 즐겨했다는 음식으로 탕종류가 8가지 종류로 전부 합치면 16가지 요리가 나온다.

음식이 물같이 흐르듯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탕종류의 음식이 맛잇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국물과 같이 건더기를 건져서 같이 먹으니 그런 요리명칭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Tip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용문석굴 관람순서는 용문(매표소)

빈양삼동

만불동

봉선사

약방동

고양동

검표소

만수교

동굴(東窟)

향산사

용문교

용문(매표소)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인데 그걸 몰라서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다리 2개만 더 건너면 되는 것이고 시간적으로 별로 차이가 없다.

강건너에서 서굴을 보는 풍경도 좋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음 여행 시 참고하기 바람.                ▼서산석굴(西山石窟)                                             ▼동산석굴(東山石窟)                  ▼용문객루의 수석요리(水石料理)        어쩌다 보니 저 세 곳은 여러 번 다녀왔어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사람은 비교하는 심리가 있잖아요. 저는 세 석굴의 감상을 비교해보곤 했어요. 둔황의 막고굴은 벽화가 아름답고, 다퉁의 윈강 석굴은 초기 석굴이라 다소 투박하지만 그게 정감이 가고, 뤄양의 룽먼 석굴은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조각이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세 석굴 중에 더 끌리는 곳도 있죠. 처음에는 막고굴을 가장 좋아했다가, 다음에는 윈강 석굴을 제일 좋아했다가, 이번에 다녀와서는 룽먼 석굴이 참 좋았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했었죠.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어쩜 저는 이렇게 한결같이 이랬다저랬다 하는지 모르겠어요. ^^  세 석굴을 사진으로 비교해서 올리면 좋겠으나, 아시다시피 막고굴은 촬영을 할 수 없습니다.

석굴 안으로 사진기 반입이 아예 안 됩니다.

여하튼 둔황의 막고굴이 화려한 벽화가 하이라이트라면, 윈강 석굴과 룽먼 석굴은 조각이 빼어납니다.

그리고 윈강 석굴과 룽먼 석굴은 닮은 듯 다른 매력을 지녔어요. 두 곳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포스팅합니다.

 ?불교는 기원 전 6세기에 인도에서 창시된 종교,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후한 시대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 거치면서 발전기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던 종교예요. 그래서 중국의 초창기 불교 석굴은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3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해서 5

8세기에 꽃을 활짝 피웠고요,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석굴 조성은 쇠퇴하였습니다.

 불교는 신강으로 들어와서 동쪽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석굴이 많아요. 둔황의 막고굴이 벽화와 진흙으로 만든 조소로써 예술의 정수를 보여줬다면, 중원 지역인 다퉁의 윈강 석굴과 뤄양의 룽먼 석굴은 석조 예술의 발전사를 보여줍니다.

  룽먼 석굴보다 반세기 먼저 조성된 윈강 석굴  ??▲ 윈강 석굴의 외관  ▲ 황실의 후원으로 조성된 윈강석굴의 내부  ▲ 윈강 석굴 조성이 성숙기로 접어든 5세기 후반의 작품  윈강 석굴의 조각을 보면 대체적으로 직선이 강해요.  옷의 주름이나 팔, 손바닥의 주름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다기 단순한 선으로 되어 있어요. 뒤에 등장하는 룽먼 석굴과 비교하면 곡선이 단조롭다는 것이 한눈에 팍 느껴집니다.

  그래서 룽먼 석굴의 조각상에 비해 투박하고, 다소 촌스럽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 예전에는 주요 석굴들도 사진 촬영이 자유로웠는데, 지금은 주요 석굴 내부는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어요.윈강 석굴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9

13번 굴은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을 올려 봅니다.

  룽먼 석굴에서는 볼 수 없는 채색 조소를 볼 수 있답니다.

  이곳의 조각상은 섬세하게 조각되었어요.  어째 오래 전 캐논 뚝딱이가 이번에 사용한 소니 알파보다 화질이 더 선명한 느낌이네요.  옷의 주름도 제법 리얼하죠?  미륵보살의 오른손을 떠받치고 있는 작은 조각이 눈길을 끕니다.

벽면에 작은 불상이 무수히 많이 조각되어 있지만,윈강 석굴의 또 다른 개성이 드러나는 16

20번 굴이에요. ↓↓↓↓  불상은 크고 높아 보이도록, 불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 왜소하게 느껴지도록 조성했습니다.

  고개를 치켜들고 봐야 하는 대불이 많습니다.

 카메라에 몸 전체가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귓볼은 늘어져라 크게, 코는 오독하게, 가사의 주름은 단순하지만 선명하게!가 특징이에요.  동굴 밖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대불의 얼굴을 볼 수도 있습니다.

 ▲ 윈강석굴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노천 대불입니다.

귓볼이 엄청나죠? 중국 전통미가 한층 더 짙어진 룽먼 석굴   ▲ 윈강 석굴에 비해서 룽먼 석굴은 돌이 훨씬 단단해 보였어요.  ▲ 초창기의 조각을 보면 윈강석굴과 큰 차이점이 눈에 띄지 않아요.  ▲ 그러나 본격적으로 룽먼석굴이 조성되기 시작했을 때의 조각들을 보면 확연히 달라진 특징이 눈에 들어와요.근엄했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옷의 주름이 풍성해지고, 소매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 외부로 드러난 불상 중에는 파손된 것들도 많아요.  ▲ 그럼에도 신기한 건 어쩌면 이렇게도 많은 감실을 만들고 조각을 했을까? 정말 벌집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석굴이 많아요.  ▲ 이렇게 단단한 돌에 조각을 하려면 힘 꽤나 들었겠죠?매우 작은 조각상이 벽면에 가득합니다.

작은 것은 2

 4cm짜리도 있어요.  룽먼 석굴은 중국 불교 석굴 예술에 있어서 전반기와 후반기를 이어주는 가교이자 분기점입니다.

  천정의 연꽃무늬보다 눈에 더 들어온 입식 불상불상은 좌식이 대부분이었는데, 서 있는 모습이 특이했어요.   룽먼 석굴의 하이라이트는 당대에 조각한 대불 '봉선사의 비로자나불'이에요.  ▲ 당시 여 황제였던 측천무후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비로자나불, 그러고 보니까 대불이 귀족적이면서도 여성스럽죠?  윈강 석굴에 비해 몸의 비례도 신경 많이 썼죠?  크고 작은 감실이 2,300개에 달하는 룽먼 석굴 ▲ 강 건너 동쪽에서 바라본 서쪽의 봉선사 ?400년의 세월에 걸쳐 조성된 룽먼석굴은 동·서로 나뉜 두 산의 절벽을 따라 1km 이어집니다.

 운강 석굴이 대불이 많아서 웅장하다면, 룽먼 석굴은 조각이 한층 더 세련되고 섬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두 곳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북위 때 효문제가 수도를 뤄양으로 옮긴 493년 이후 수·당까지 400여년 동안 만들어져 각 시대의 다양한 미술양식이 녹아 있다.

 이하(伊河)강을 사이에 있고 석회암 암벽을 깎아 만든 석굴의 길이가 1km나 되며 모두 약 1,350개의 석굴과 석굴 안에는 모두 10,000만개 정도의 크고 작은 불상이 있다고 한다.

작은 것은 2cm에서 17m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있어 찬찬히 구경하면 며칠을 두고 해야 하는데 오늘 가이드가 내게 준 시간은 1시간 30분밖에 없다.

쌍십절이라서 관광객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어디가 무엇이 있는지 어디부터 보아야 하는지 하는 것은 판단이 서지 않고 물결에 휩쓸리듯이 다녀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 쓴 글은 알량한 지식이거나 인터넷에 의존한 정보임을 밝혀 둔다.

 석굴은 불교초기의 양식으로 인도의 많은 수의 초기 사원이 이같은 동굴의 형태를 띤다.

동굴양식은 무더위가 긴 그곳의 기후 특성과 동굴 주변의 외진 환경에 기인하여 만들어 진다고 볼 수 있는데 요컨대 석굴 안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뿐만 아니라 주위가 조용해 수행에도 알맞다.

게다가 석굴 건축에는 많은 비용이 필요 없고, 동굴 특성상 견고하기 짝이 없어 오래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문석굴은 소림사에서도 보듯이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용문석굴관광은 잉어가 물턱을 넘으면 용으로 승천한다는 용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용문석굴의 용문이라는 명칭은 동한에 이르러 사용된 것으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이곳을 ‘궐새’라고 불렀다.

‘궐’은 장벽을 가리키는 말로 궁전의 문을 뜻한다.

‘새’란 글자 그대로 요새를 뜻한다.

수도 낙양의 남쪽을 지키는 곳이었다는 것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으며, 강의 명칭이 이수이기 때문에 ‘이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하(伊河)를 가로지르는 용문교를 지나 약 100m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석굴이 펼쳐진다.

이하(이허}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동산으로 나뉜다.

서산을 이궐산(이췌산)이라고도 하는데 용문입구의 안내문에는 용문산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서산을 향산이라고 부른다.

 석굴 대부분은 서산에 몰려 있고, 동산에는 석굴 일부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묘(백원)와 향산암이 있다.

석회암 절벽에 벌집처럼 크고 작은 구멍들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다.

높이 1m 남짓의 작은 구멍부터 석굴암 크기만한 굴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용문석굴에는 중요한 동굴이 7곳이 있다.

잠계사, 빈양삼동, 만불동, 연화동, 봉선사, 약방동, 고양동 등이다.

이 가운데 북위시대에 판 것은 고양동, 빈양중동, 연화동 등이고, 당시대에 판 것은 봉선사, 만불동, 잠계사 등이다.

 석불을 보기 위해서는 철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

 처음 만나는 석굴은 빈양삼동으로 용문석굴 중 가장 저명한 동굴이다.

특히 중동은 북위 경명원년부터 시작하여 정광4년까지 24년간에 걸쳐 개착한 것으로 북위 때 선무제가 그의 부모의 공덕을 기리고자 판 것이다.

용문석굴 가운데 제일 오랫동안 팠고, 힘들었지만, 제일 화려한 석굴이다.

본존은 석가모니불인데 높이가 8.4m다.

얼굴은 준수하고, 코가 높고, 눈은 크다.

1불2보살 형식이다.

빈양북동은 당시대 것이고, 빈양남동은 북위시대에 시작하여 수시대에 완공된 석굴이다.

빈양동은 찬란한 아침 햇살이 석굴 안창까지 비추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굴암의 건축과 유사하다.

아쉬운 점은 머리가 잘리거나 몸통이 깨지는 등 멀쩡한 불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전쟁·침략·도굴에 이어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남은 석상 대부분, 특히 머리 부분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시의 장인정신 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듯 조각 작품의 예술성은 1000년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다.

 두 번째에는 만불동과 연화동을 만난다.

만불동은 용문산의 서남부에 있는데 굴 안은 네모났고, 천정은 평평한 방형평정형이다.

천정의 중앙에는 커다란 연꽃이 새겨져 있어 만불동이라 하였다.

이 만불동 벽에는 불상, 연화, 음악인, 악기, 무용수 등이 있어 당대 예술의 진품이라고 한다.

 연화동은 석굴 천정에 커다란 연화가 있어서 생긴 말이다.

북위시대 작품인데 주존은 석가모니불이다.

협시보살은 문수와 보현이다.

[용문석굴] 분석을 해보면



불과 보살 사이에는 아난과 가섭 두 제자도 서 있다.

이 석굴의 바깥에는 관음보살상이 있는데 얼굴의 반 정도가 파손되었지만. 정병을 든 손이나 전체적인 자세가 우아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세 번째의 봉선사는 용문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있다.

당 고종 함령 3년부터 4년간 판 걸작이다.

옛날에는 그 앞에 목조 지붕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이 없어진 현재는 모든 조각상이 백일하에 드러난 형태로 남아있다.

본존인 비로자나불의 높이는 17.4m나 되면서도 얼굴은 풍만 수려하고, 자태는 단정하며, 옷 주름은 간결 유창하다.

따라서 형신을 겸비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본존불 양쪽으로 제자 둘과 보살 둘이 새겨져 있고, 양쪽 벽에 천왕과 역사상이 있다.

천왕은 마귀를 밟고 있다.

무측천황후가 당시에 조성할 때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담았다는 데 본존불의 얼굴이 그녀를 닮았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내가 볼 때는 콧날이 빼죽하고 큰 눈으로 보아서는 동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서구적인 면모가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이런 것도 측천무후를 신격화하여 폭정이나 패륜행위를 덮어 두려는 것은 아닐까? 허난성 서쪽에 접한 산시성 출신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다.

남편인 당나라 고종이 죽자 권력을 장악, 두 아들을 황제로 올렸다가 690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돼 죽을 때까지 약 15년 동안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동산에 가기 위해서는 검표소를 지나고 동산과 이어진 다리를 건너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 30분 중에 50분이 지나고 40분이 남았다.

마음도 급하고 우선 화장실에 들어갔다.

소변기는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대변기가 두 개가 있고 칸막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벌써 한사람이 쭈그려 앉아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나만 당황하다 뒤에 기다리는 이들이 많고해서 나오기도 뭐하고 “에라 모르겠다”하고 서서 볼 일을 보고 나왔다.

 동산은 벌집구조가 아니고 단순구조로 그리 복잡하지 않았고 길따라 석굴이 형성되었다.

석굴이 그다지 많지 않고 접근이 쉬워서 그런지 입구가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마치 감방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8세기가 되어 현종때에 이르러서는 점차 불상을 조각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 무렵에는 서산의 벼랑이 석굴로 가득 차 더 이상 조각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다.

그래서 현종 때에는 동산에 석굴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간경사 석굴이다.

동산의 석굴 형식은 서산의 석굴과는 약간 다르다.

서산 봉선사의 대불만 해도 본존은 석굴의 뒷면 벽에 조각되어 있는데 동산에서는 독립된 상으로 중앙에 안치되어 있다.

간경사 석굴은 측천무후의 후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천장에 새겨진 비천상이 굉장히 훌륭하며, 본존은 아미타불이다.

사방의 벽에는 나한상 29개가 새겨져 있다.

하나하나 표정이 다르고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시간이 임박해 옴에 따라 검표소에 가서 되돌아가려니 검표원이 안된다고 손짓을 한다.

원래 일방통행으로 온 방향으로 못 간다고 하는 모양이다.

마침 ‘노랑풍선 ’가이드가 지나가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설명을 해주니 차단봉을 열어주고 가라고 한다.

가는 길 중간에 봉선서 남쪽의 약방동을 보았다.

굴 안에 북제시대에 통용되던 1백40여개의 약방이 새겨졌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것은 의학연구에 주요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고양동은 보지는 못했는데 북위 태화 19년부터 북제 무평까지 판 것인데 용문석굴 가운데 가장 일찍 개착된 것 중 하나인 셈이다.

천정은 볼트형식을 이루고 벽면장식이 크게는 2개층으로 난간과 주두에까지 섬세한 조각장식이 있다.

또한 동굴의 안쪽 벽은 북위, 당, 송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단의 석불이 있고 심지어 2

3cm정도의 초미니 불상까지 불상군으로 메워져 있으며 인도의 불교장식과 흡사하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길이 일방통행이라 뚫고 나가기가 어렵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2

3분 늦었는데 일행 중의 일부가 나의 늦은 행동에 불만을 토로했는가 보다.

일행들은 괜찮다고는 하지만 눈치가 그게 아니다.

 식사는 용문석굴 입구의 ‘용문석루(龍門客樓)로 수석요리(水石料理)가 전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측천무후의 이름이 나오는데 측천무후가 가장 즐겨했다는 음식으로 탕종류가 8가지 종류로 전부 합치면 16가지 요리가 나온다.

음식이 물같이 흐르듯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탕종류의 음식이 맛잇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국물과 같이 건더기를 건져서 같이 먹으니 그런 요리명칭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Tip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용문석굴 관람순서는 용문(매표소)

빈양삼동

만불동

봉선사

약방동

고양동

검표소

만수교

동굴(東窟)

향산사

용문교

용문(매표소)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인데 그걸 몰라서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다리 2개만 더 건너면 되는 것이고 시간적으로 별로 차이가 없다.

강건너에서 서굴을 보는 풍경도 좋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음 여행 시 참고하기 바람.                ▼서산석굴(西山石窟)                                             ▼동산석굴(東山石窟)                  ▼용문객루의 수석요리(水石料理)         낙양의 마지막 코스, 용문석굴의 위치.낙양 시내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다.

  되도록 일찍 용문석굴로 향하기 위해 6:00에 호텔을 나서 낙양역 시내버스센터로 간다.

  분명히 낙양역에서 용문석굴 간다는 81번 버스가 있다고 했는데 정류장이 어디인지를 통 모르겠어서일단 용문석굴 방향으로 가는 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가다가 81번으로 갈아탄다.

  종점인 용문석굴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81번.낙양역에서 용문석굴까지 버스로 50분 소요.  용문석굴 버스정류장에 내린다고 석굴이 바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약 1.2km 정도를 더 걸어가야 입구가 나온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매표소 앞까지 전동차가 영업을 하는 모양인데, 이 시간에는 아직 운행을 안하는 듯...  이른 시간이라 아직 진입로 양편의 상점들도 거의 문을 열지 않았다.

  와

고요하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관광객으로 북적거릴 거리인데, 이 시간엔 오직 나 혼자다.

  상점가가 끝나는 지점에 세계문화유산 기념비가 세워진 큰 광장이 나온다.

이름하여 청석광장/칭스광창(靑石廣場).  약간 종종걸음으로 14분만에 도착한 용문석굴 매표소 앞.관광객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아 혹시 문을 안 열었나 했더니내가 정확히 개장시간인 7:30에 맞춰 도착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블로그들에서 익히 봐서 눈에 익은 용문석굴의 아치형 입구로이날 입장객 1번으로 들어간다.

  용문석굴 바로 옆으로 흐르는 이하/이허(伊河)를 가로지르는 웅장한 돌다리. 용문석굴은 이하의 동서 양편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서서쪽 기슭의 것을 서산(西山)석굴, 동쪽 기슭의 것을 동산(東山)석굴이라 하는데이 중 서산석굴부터 먼저 돌아보게 된다.

  또 입구를 지나간다.

중국 유적지들은 문을 참 많이 만들어 놔서 어디가 정문인지 헛갈리게 만든다.

 용문석굴은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듯, 돈황 막고굴(莫高窟), 운강석굴(雲崗石窟)과 함께중국 3대 석굴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하 강변으로 버들이 우거진 한적한 아침의 용문석굴 풍경.이 한적함은 1시간 내로 엄청난 인파로 인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불교가 성했던 북위(北魏) 때 명군 효문제(孝文帝)가지금의 대동/다퉁(大同)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한 493년부터 일찌감치 석굴을 짓기 시작하여수(隋)·당(唐)을 거쳐 북송(北宋)대까지 무려 400여년간 이하 양쪽 기슭에 건설한 이 석굴에는숫자로 가늠하기 힘든 2,345개의 석굴과 142,289좌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역시 스케일 하면 중국....!  석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석탑도 서 있고, 수많은 석굴에는 도굴과 파괴의 흔적이 완연하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한 불상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빈양삼동(賓陽三洞)이라는 세 석굴이 나란히 자리한 곳에 도달했다.

 위 사진은 그 중에서도 빈양중동(賓陽中洞)의 것으로,내부의 11좌 불상들 가운데 자리한 본존불은 북위 선무제(宣武帝, 낙양고묘박물관 옆 경릉景陵에 묻힌 황제)가아버지 효문제의 모습을 모델로 축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500

523년 사이에 조성.  북위 때 굴착을 시작하여 당나라 고종(高宗, 649

683) 때 완공되었다고 전해지는 빈양북동(賓陽北洞).천정벽화의 화려한 색감이 아직도 살아 있다.

  빈양삼동 석굴의 옆면을 채우는 부처님의 제자와 보살상들.  틀림없이 문화혁명 때 파괴된 것일 것이다.

이런 불상이 한두개가 아니다.

  빈양삼동 중 남쪽에 있는 빈양남동(賓陽南洞)이다.

가까이 붙어 있는 비슷한 시기의 세 본존불의 표정이 크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재미있다.

  본래는 저 많은 미니 석굴들에도 정성스레 불상이 모셔져 있었을 것이나...지금은 저렇게 훼손되고 도난당해버렸다.

  계속해서 석굴군을 오른쪽으로 보며 남쪽으로 향한다.

용문석굴은 많은 계단들을 오르내리며 감상하게 되어 있었다.

  불두와 입구의 역사(力士)상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 석굴.  경선사동(敬善寺洞).당나라 고종 즉위 초반에 해당하는 서기 656

663년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사진에서 짤렸지만 양측을 지키는 두 역사의 모습이 매우 위엄있다.

  마애삼불감(磨崖三佛龕).당나라 문을 잠시 닫고 무주(武周)를 세운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조성된 석감이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을 상징하는 불상 3좌가 새겨져 있는데,무씨 왕조가 단명으로 끝남에 따라, 이 불상들의 하단부는 미완성 상태로 남아버렸다고 한다.

  현 위치와 주변 석굴들의 이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이런 안내판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만불동 방향으로 올라간다.

  만불동(萬佛洞)에 이르렀다.

  이 석굴의 이름이 만불동인 것은 이렇게 벽면에 세밀한 작은 불상들이...  저처럼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실제 불상의 수는 1만 5천여 좌를 넘는다고 한다.

  1400년 세월의 풍상으로 불상들이 많이 닳았으나 아직도 섬세한 무늬를 곳곳에 간직하고 있다.

작은 글씨로 무언가를 새겨놓은 것도 보이고...  천불동 바깥쪽에도 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대단한 불심의 표상이다.

  계속 남쪽으로... 저 석굴들은 정말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

  연화동 가는 길에 눈길을 끌었던 노룡동(老龍洞) 석굴 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무규칙적으로 배열된 54좌의 불상이 인상적인 당나라 때의 석굴이다.

  여기가 유명한 연화동(蓮花洞)이다.

 천장의 거대하고도 사실적인 연꽃 문양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조성시기가 북위 때인 525

527년 사이로 비교적 구체적이다.

정면에 불두가 훼손된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치되어 있고, 좌측 상단에는 크기가 2cm에 불과한용문석굴 최소크기의 불상들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사진상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연꽃조각이 선명하게 보이는 연화동의 바깥쪽도 꽤 공들여 조각해 놓았다.

오른쪽에는 이하의 이름과 관련있는 듯한 '이궐(伊闕)'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제 서산석굴 남측에 있는 하이라이트, 봉선사동을 향해 간다.

저기 보이는 가파른 큰 돌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저기 보이는 사람들은 직원들로, 여기 올 때까지도 관광객은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용문석굴의 상징과도 같은 봉선사동(奉先寺洞) 석굴이다.

 가장 큰 석굴로 당나라 불교예술의 금자탑이라 평가받는 명작이다.

  가운데 위치한 본존불은,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삼신불(三身佛) 중 한 분인 노사나불(盧舍那佛)로,높이가 17m에 귀의 길이만 1.9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특히 저 노사나불은 측천무후의 모습을 본따 조성되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한데...과연 야심가 측천무후의 표정이 저리도 온화할 수 있었을지가 의심스럽다.

제위를 찬탈하기 전에, 태종과 고종의 눈에 띄기 위해서는 본성을 숨긴 저런 단아한 표정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본존불 말고 좌우를 지키는 사천왕상도 대단히 상태가 훌륭하다.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용문석굴.  관광객이 아무도 없어 마침 주변에 있던 공식가이드로 보이는 직원에게 사진을 부탁했더니제법 괜찮은 구도로 사진이 나왔다.

보통 남한테 사진 부탁해서 찍고 보면 맘에 안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블로그에는 잘 안 올리는데, 이 사진은 마음에 든다.

^^  봉선사동 위에서는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뭔가를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그 공사 때문에 돌덩이 같은 것이 자꾸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아예 불상으로의 접근을 막아 놓앗다.

  봉선사동 앞에서 바라보는 이하의 아침햇살.강 건너에는 동산석굴이 있다.

  계속해서 봉선사동을 지나 남쪽으로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전진한다.

  또다른 유명한 석굴, 고양동(古陽洞)에 이르렀다.

가장 오래된 석굴 중 하나로, 바로 이 용문석굴군이 조성되기 시작한 493년에 착공한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식 불교예술형식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인도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앞서 언급했듯, 북위 효문제는 493년에 북쪽 대동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를 감행했는데,그에 따라 낙양으로 이사해 온 왕족, 귀족들이 이 고양동의 양측 벽면에발을 새겨넣은 것이 유명하다고 하였으나...('용문이십품龍門二十品')석굴 안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있어 눈으로 확인은 어려웠다.

  서산석굴의 마지막 코스, 약방동(藥方洞).북위 때 공사가 시작되어 북제(北齊, 550

577) 때 완공된 이 작은 석굴은이름처럼 옛 한방 처방이 석굴 벽면에 새겨져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데,도대체 왜 약 처방이 불교석굴 벽면에 가득 새겨져 있는지는 수수께끼라고. 직업상 관심이 많이 갔던 석굴이었으나 위 사진처럼 막아놓고 있어 처방은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서산석굴의 출구로 나왔다.

이제 이하를 건너 동산석굴로 향할 차례다.

하지만 용문석굴의 주요 볼거리는 다 본 상태.빠른 걸음으로 동산석굴로 향한다.

  낙양의 마지막 코스, 용문석굴의 위치.낙양 시내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다.

  되도록 일찍 용문석굴로 향하기 위해 6:00에 호텔을 나서 낙양역 시내버스센터로 간다.

  분명히 낙양역에서 용문석굴 간다는 81번 버스가 있다고 했는데 정류장이 어디인지를 통 모르겠어서일단 용문석굴 방향으로 가는 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가다가 81번으로 갈아탄다.

  종점인 용문석굴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81번.낙양역에서 용문석굴까지 버스로 50분 소요.  용문석굴 버스정류장에 내린다고 석굴이 바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부터 약 1.2km 정도를 더 걸어가야 입구가 나온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매표소 앞까지 전동차가 영업을 하는 모양인데, 이 시간에는 아직 운행을 안하는 듯...  이른 시간이라 아직 진입로 양편의 상점들도 거의 문을 열지 않았다.

  와

고요하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관광객으로 북적거릴 거리인데, 이 시간엔 오직 나 혼자다.

  상점가가 끝나는 지점에 세계문화유산 기념비가 세워진 큰 광장이 나온다.

이름하여 청석광장/칭스광창(靑石廣場).  약간 종종걸음으로 14분만에 도착한 용문석굴 매표소 앞.관광객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아 혹시 문을 안 열었나 했더니내가 정확히 개장시간인 7:30에 맞춰 도착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블로그들에서 익히 봐서 눈에 익은 용문석굴의 아치형 입구로이날 입장객 1번으로 들어간다.

  용문석굴 바로 옆으로 흐르는 이하/이허(伊河)를 가로지르는 웅장한 돌다리. 용문석굴은 이하의 동서 양편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서서쪽 기슭의 것을 서산(西山)석굴, 동쪽 기슭의 것을 동산(東山)석굴이라 하는데이 중 서산석굴부터 먼저 돌아보게 된다.

  또 입구를 지나간다.

중국 유적지들은 문을 참 많이 만들어 놔서 어디가 정문인지 헛갈리게 만든다.

 용문석굴은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듯, 돈황 막고굴(莫高窟), 운강석굴(雲崗石窟)과 함께중국 3대 석굴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하 강변으로 버들이 우거진 한적한 아침의 용문석굴 풍경.이 한적함은 1시간 내로 엄청난 인파로 인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불교가 성했던 북위(北魏) 때 명군 효문제(孝文帝)가지금의 대동/다퉁(大同)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한 493년부터 일찌감치 석굴을 짓기 시작하여수(隋)·당(唐)을 거쳐 북송(北宋)대까지 무려 400여년간 이하 양쪽 기슭에 건설한 이 석굴에는숫자로 가늠하기 힘든 2,345개의 석굴과 142,289좌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역시 스케일 하면 중국....!  석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석탑도 서 있고, 수많은 석굴에는 도굴과 파괴의 흔적이 완연하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한 불상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빈양삼동(賓陽三洞)이라는 세 석굴이 나란히 자리한 곳에 도달했다.

 위 사진은 그 중에서도 빈양중동(賓陽中洞)의 것으로,내부의 11좌 불상들 가운데 자리한 본존불은 북위 선무제(宣武帝, 낙양고묘박물관 옆 경릉景陵에 묻힌 황제)가아버지 효문제의 모습을 모델로 축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500

523년 사이에 조성.  북위 때 굴착을 시작하여 당나라 고종(高宗, 649

683) 때 완공되었다고 전해지는 빈양북동(賓陽北洞).천정벽화의 화려한 색감이 아직도 살아 있다.

  빈양삼동 석굴의 옆면을 채우는 부처님의 제자와 보살상들.  틀림없이 문화혁명 때 파괴된 것일 것이다.

이런 불상이 한두개가 아니다.

  빈양삼동 중 남쪽에 있는 빈양남동(賓陽南洞)이다.

가까이 붙어 있는 비슷한 시기의 세 본존불의 표정이 크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재미있다.

  본래는 저 많은 미니 석굴들에도 정성스레 불상이 모셔져 있었을 것이나...지금은 저렇게 훼손되고 도난당해버렸다.

  계속해서 석굴군을 오른쪽으로 보며 남쪽으로 향한다.

용문석굴은 많은 계단들을 오르내리며 감상하게 되어 있었다.

  불두와 입구의 역사(力士)상 중 하나가 사라져버린 석굴.  경선사동(敬善寺洞).당나라 고종 즉위 초반에 해당하는 서기 656

663년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사진에서 짤렸지만 양측을 지키는 두 역사의 모습이 매우 위엄있다.

  마애삼불감(磨崖三佛龕).당나라 문을 잠시 닫고 무주(武周)를 세운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조성된 석감이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을 상징하는 불상 3좌가 새겨져 있는데,무씨 왕조가 단명으로 끝남에 따라, 이 불상들의 하단부는 미완성 상태로 남아버렸다고 한다.

  현 위치와 주변 석굴들의 이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이런 안내판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만불동 방향으로 올라간다.

  만불동(萬佛洞)에 이르렀다.

  이 석굴의 이름이 만불동인 것은 이렇게 벽면에 세밀한 작은 불상들이...  저처럼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실제 불상의 수는 1만 5천여 좌를 넘는다고 한다.

  1400년 세월의 풍상으로 불상들이 많이 닳았으나 아직도 섬세한 무늬를 곳곳에 간직하고 있다.

작은 글씨로 무언가를 새겨놓은 것도 보이고...  천불동 바깥쪽에도 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대단한 불심의 표상이다.

  계속 남쪽으로... 저 석굴들은 정말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

  연화동 가는 길에 눈길을 끌었던 노룡동(老龍洞) 석굴 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무규칙적으로 배열된 54좌의 불상이 인상적인 당나라 때의 석굴이다.

  여기가 유명한 연화동(蓮花洞)이다.

 천장의 거대하고도 사실적인 연꽃 문양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조성시기가 북위 때인 525

527년 사이로 비교적 구체적이다.

정면에 불두가 훼손된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치되어 있고, 좌측 상단에는 크기가 2cm에 불과한용문석굴 최소크기의 불상들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사진상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연꽃조각이 선명하게 보이는 연화동의 바깥쪽도 꽤 공들여 조각해 놓았다.

오른쪽에는 이하의 이름과 관련있는 듯한 '이궐(伊闕)'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제 서산석굴 남측에 있는 하이라이트, 봉선사동을 향해 간다.

저기 보이는 가파른 큰 돌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저기 보이는 사람들은 직원들로, 여기 올 때까지도 관광객은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용문석굴의 상징과도 같은 봉선사동(奉先寺洞) 석굴이다.

 가장 큰 석굴로 당나라 불교예술의 금자탑이라 평가받는 명작이다.

  가운데 위치한 본존불은,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삼신불(三身佛) 중 한 분인 노사나불(盧舍那佛)로,높이가 17m에 귀의 길이만 1.9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특히 저 노사나불은 측천무후의 모습을 본따 조성되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한데...과연 야심가 측천무후의 표정이 저리도 온화할 수 있었을지가 의심스럽다.

제위를 찬탈하기 전에, 태종과 고종의 눈에 띄기 위해서는 본성을 숨긴 저런 단아한 표정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본존불 말고 좌우를 지키는 사천왕상도 대단히 상태가 훌륭하다.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용문석굴.  관광객이 아무도 없어 마침 주변에 있던 공식가이드로 보이는 직원에게 사진을 부탁했더니제법 괜찮은 구도로 사진이 나왔다.

보통 남한테 사진 부탁해서 찍고 보면 맘에 안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블로그에는 잘 안 올리는데, 이 사진은 마음에 든다.

^^  봉선사동 위에서는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뭔가를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그 공사 때문에 돌덩이 같은 것이 자꾸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아예 불상으로의 접근을 막아 놓앗다.

  봉선사동 앞에서 바라보는 이하의 아침햇살.강 건너에는 동산석굴이 있다.

  계속해서 봉선사동을 지나 남쪽으로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전진한다.

  또다른 유명한 석굴, 고양동(古陽洞)에 이르렀다.

가장 오래된 석굴 중 하나로, 바로 이 용문석굴군이 조성되기 시작한 493년에 착공한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식 불교예술형식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인도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앞서 언급했듯, 북위 효문제는 493년에 북쪽 대동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를 감행했는데,그에 따라 낙양으로 이사해 온 왕족, 귀족들이 이 고양동의 양측 벽면에발을 새겨넣은 것이 유명하다고 하였으나...('용문이십품龍門二十品')석굴 안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있어 눈으로 확인은 어려웠다.

  서산석굴의 마지막 코스, 약방동(藥方洞).북위 때 공사가 시작되어 북제(北齊, 550

577) 때 완공된 이 작은 석굴은이름처럼 옛 한방 처방이 석굴 벽면에 새겨져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데,도대체 왜 약 처방이 불교석굴 벽면에 가득 새겨져 있는지는 수수께끼라고. 직업상 관심이 많이 갔던 석굴이었으나 위 사진처럼 막아놓고 있어 처방은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서산석굴의 출구로 나왔다.

이제 이하를 건너 동산석굴로 향할 차례다.

하지만 용문석굴의 주요 볼거리는 다 본 상태.빠른 걸음으로 동산석굴로 향한다.

북위 때 효문제가 수도를 뤄양으로 옮긴 493년 이후 수·당까지 400여년 동안 만들어져 각 시대의 다양한 미술양식이 녹아 있다.

 이하(伊河)강을 사이에 있고 석회암 암벽을 깎아 만든 석굴의 길이가 1km나 되며 모두 약 1,350개의 석굴과 석굴 안에는 모두 10,000만개 정도의 크고 작은 불상이 있다고 한다.

작은 것은 2cm에서 17m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있어 찬찬히 구경하면 며칠을 두고 해야 하는데 오늘 가이드가 내게 준 시간은 1시간 30분밖에 없다.

쌍십절이라서 관광객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어디가 무엇이 있는지 어디부터 보아야 하는지 하는 것은 판단이 서지 않고 물결에 휩쓸리듯이 다녀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 쓴 글은 알량한 지식이거나 인터넷에 의존한 정보임을 밝혀 둔다.

 석굴은 불교초기의 양식으로 인도의 많은 수의 초기 사원이 이같은 동굴의 형태를 띤다.

동굴양식은 무더위가 긴 그곳의 기후 특성과 동굴 주변의 외진 환경에 기인하여 만들어 진다고 볼 수 있는데 요컨대 석굴 안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뿐만 아니라 주위가 조용해 수행에도 알맞다.

게다가 석굴 건축에는 많은 비용이 필요 없고, 동굴 특성상 견고하기 짝이 없어 오래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문석굴은 소림사에서도 보듯이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용문석굴관광은 잉어가 물턱을 넘으면 용으로 승천한다는 용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용문석굴의 용문이라는 명칭은 동한에 이르러 사용된 것으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이곳을 ‘궐새’라고 불렀다.

‘궐’은 장벽을 가리키는 말로 궁전의 문을 뜻한다.

‘새’란 글자 그대로 요새를 뜻한다.

수도 낙양의 남쪽을 지키는 곳이었다는 것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으며, 강의 명칭이 이수이기 때문에 ‘이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하(伊河)를 가로지르는 용문교를 지나 약 100m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석굴이 펼쳐진다.

이하(이허}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동산으로 나뉜다.

서산을 이궐산(이췌산)이라고도 하는데 용문입구의 안내문에는 용문산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서산을 향산이라고 부른다.

 석굴 대부분은 서산에 몰려 있고, 동산에는 석굴 일부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묘(백원)와 향산암이 있다.

석회암 절벽에 벌집처럼 크고 작은 구멍들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다.

높이 1m 남짓의 작은 구멍부터 석굴암 크기만한 굴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용문석굴에는 중요한 동굴이 7곳이 있다.

잠계사, 빈양삼동, 만불동, 연화동, 봉선사, 약방동, 고양동 등이다.

이 가운데 북위시대에 판 것은 고양동, 빈양중동, 연화동 등이고, 당시대에 판 것은 봉선사, 만불동, 잠계사 등이다.

 석불을 보기 위해서는 철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

 처음 만나는 석굴은 빈양삼동으로 용문석굴 중 가장 저명한 동굴이다.

특히 중동은 북위 경명원년부터 시작하여 정광4년까지 24년간에 걸쳐 개착한 것으로 북위 때 선무제가 그의 부모의 공덕을 기리고자 판 것이다.

용문석굴 가운데 제일 오랫동안 팠고, 힘들었지만, 제일 화려한 석굴이다.

본존은 석가모니불인데 높이가 8.4m다.

얼굴은 준수하고, 코가 높고, 눈은 크다.

1불2보살 형식이다.

빈양북동은 당시대 것이고, 빈양남동은 북위시대에 시작하여 수시대에 완공된 석굴이다.

빈양동은 찬란한 아침 햇살이 석굴 안창까지 비추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굴암의 건축과 유사하다.

아쉬운 점은 머리가 잘리거나 몸통이 깨지는 등 멀쩡한 불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전쟁·침략·도굴에 이어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남은 석상 대부분, 특히 머리 부분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시의 장인정신 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듯 조각 작품의 예술성은 1000년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다.

 두 번째에는 만불동과 연화동을 만난다.

만불동은 용문산의 서남부에 있는데 굴 안은 네모났고, 천정은 평평한 방형평정형이다.

천정의 중앙에는 커다란 연꽃이 새겨져 있어 만불동이라 하였다.

이 만불동 벽에는 불상, 연화, 음악인, 악기, 무용수 등이 있어 당대 예술의 진품이라고 한다.

 연화동은 석굴 천정에 커다란 연화가 있어서 생긴 말이다.

북위시대 작품인데 주존은 석가모니불이다.

협시보살은 문수와 보현이다.

불과 보살 사이에는 아난과 가섭 두 제자도 서 있다.

이 석굴의 바깥에는 관음보살상이 있는데 얼굴의 반 정도가 파손되었지만. 정병을 든 손이나 전체적인 자세가 우아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세 번째의 봉선사는 용문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있다.

당 고종 함령 3년부터 4년간 판 걸작이다.

옛날에는 그 앞에 목조 지붕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이 없어진 현재는 모든 조각상이 백일하에 드러난 형태로 남아있다.

본존인 비로자나불의 높이는 17.4m나 되면서도 얼굴은 풍만 수려하고, 자태는 단정하며, 옷 주름은 간결 유창하다.

따라서 형신을 겸비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본존불 양쪽으로 제자 둘과 보살 둘이 새겨져 있고, 양쪽 벽에 천왕과 역사상이 있다.

천왕은 마귀를 밟고 있다.

무측천황후가 당시에 조성할 때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담았다는 데 본존불의 얼굴이 그녀를 닮았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내가 볼 때는 콧날이 빼죽하고 큰 눈으로 보아서는 동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서구적인 면모가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이런 것도 측천무후를 신격화하여 폭정이나 패륜행위를 덮어 두려는 것은 아닐까? 허난성 서쪽에 접한 산시성 출신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다.

남편인 당나라 고종이 죽자 권력을 장악, 두 아들을 황제로 올렸다가 690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돼 죽을 때까지 약 15년 동안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동산에 가기 위해서는 검표소를 지나고 동산과 이어진 다리를 건너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 30분 중에 50분이 지나고 40분이 남았다.

마음도 급하고 우선 화장실에 들어갔다.

소변기는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대변기가 두 개가 있고 칸막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벌써 한사람이 쭈그려 앉아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나만 당황하다 뒤에 기다리는 이들이 많고해서 나오기도 뭐하고 “에라 모르겠다”하고 서서 볼 일을 보고 나왔다.

 동산은 벌집구조가 아니고 단순구조로 그리 복잡하지 않았고 길따라 석굴이 형성되었다.

석굴이 그다지 많지 않고 접근이 쉬워서 그런지 입구가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마치 감방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8세기가 되어 현종때에 이르러서는 점차 불상을 조각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 무렵에는 서산의 벼랑이 석굴로 가득 차 더 이상 조각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다.

그래서 현종 때에는 동산에 석굴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간경사 석굴이다.

동산의 석굴 형식은 서산의 석굴과는 약간 다르다.

서산 봉선사의 대불만 해도 본존은 석굴의 뒷면 벽에 조각되어 있는데 동산에서는 독립된 상으로 중앙에 안치되어 있다.

간경사 석굴은 측천무후의 후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천장에 새겨진 비천상이 굉장히 훌륭하며, 본존은 아미타불이다.

사방의 벽에는 나한상 29개가 새겨져 있다.

하나하나 표정이 다르고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시간이 임박해 옴에 따라 검표소에 가서 되돌아가려니 검표원이 안된다고 손짓을 한다.

원래 일방통행으로 온 방향으로 못 간다고 하는 모양이다.

마침 ‘노랑풍선 ’가이드가 지나가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설명을 해주니 차단봉을 열어주고 가라고 한다.

가는 길 중간에 봉선서 남쪽의 약방동을 보았다.

굴 안에 북제시대에 통용되던 1백40여개의 약방이 새겨졌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것은 의학연구에 주요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고양동은 보지는 못했는데 북위 태화 19년부터 북제 무평까지 판 것인데 용문석굴 가운데 가장 일찍 개착된 것 중 하나인 셈이다.

천정은 볼트형식을 이루고 벽면장식이 크게는 2개층으로 난간과 주두에까지 섬세한 조각장식이 있다.

또한 동굴의 안쪽 벽은 북위, 당, 송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단의 석불이 있고 심지어 2

3cm정도의 초미니 불상까지 불상군으로 메워져 있으며 인도의 불교장식과 흡사하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길이 일방통행이라 뚫고 나가기가 어렵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2

3분 늦었는데 일행 중의 일부가 나의 늦은 행동에 불만을 토로했는가 보다.

일행들은 괜찮다고는 하지만 눈치가 그게 아니다.

 식사는 용문석굴 입구의 ‘용문석루(龍門客樓)로 수석요리(水石料理)가 전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측천무후의 이름이 나오는데 측천무후가 가장 즐겨했다는 음식으로 탕종류가 8가지 종류로 전부 합치면 16가지 요리가 나온다.

음식이 물같이 흐르듯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탕종류의 음식이 맛잇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국물과 같이 건더기를 건져서 같이 먹으니 그런 요리명칭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Tip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용문석굴 관람순서는 용문(매표소)

빈양삼동

만불동

봉선사

약방동

고양동

검표소

만수교

동굴(東窟)

향산사

용문교

용문(매표소)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인데 그걸 몰라서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다리 2개만 더 건너면 되는 것이고 시간적으로 별로 차이가 없다.

강건너에서 서굴을 보는 풍경도 좋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음 여행 시 참고하기 바람.                ▼서산석굴(西山石窟)                                             ▼동산석굴(東山石窟)                  ▼용문객루의 수석요리(水石料理)       
공유하기 링크
TAG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