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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그런후 인터넷 서핑 중 한편의 동영상을 접하게되면서 스티브는 나를 눈물나도록 감동시킨 그리고 나의 존경하는 인물 그리고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스티브잡스의 창조카스리스마는 간략화된 스티브의 일대기와 iPod의 개발에 얽힌 에피소드 등에 대해 기술된 책이다.

 개인적으로 좀 더 스티브의 인간적인 면에 깊숙히 파고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함께 남는다.

   그 중 장필준과 홍정우는 꾸준히 선발로테이션을 돌고 있고최정용, 김기환, 최민구, 배진호는 꾸준히 주전으로 나오고 있고 윤영수도 스팟스타터로 자리잡았죠.권정웅과 김찬도 가끔씩 2군에 출장하고 있고요. 이 중 요즘 삼성팬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받고있는 신인은 장필준 정도일텐데전 김영한과 최정용도 한 번 눈여겨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영한은 설악고를 졸업한 2015 1차지명으로 삼성에 뽑힌 우완 기교파 투수입니다.

기교파라고 하기도 어려운게 삼성에 입단하기 전에만 해도 제대로된 투수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고고등학교 시절에도 좌익수가 주포지션이었습니다.

  투수로서 고등학교 성적은 볼품 없습니다.

제대로된 투수훈련을 안 받았다고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삼성은 1차지명에서 외야수 김영한이 아닌 투수 김영한을 뽑았고 지명 직후 수술한 뒤 재활을 거쳐 요즘 가끔씩 2군에 나오고 있죠.근데 똥볼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퓨처스에 관심 좀 있으신 분들은 장필준과 정인욱이 2군에서조차 얼마나 고전하고 있는지 아실텝니다.

근데 이 김영한은 ERA 4.50, 6이닝동안 3실점하며 잘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최근엔 퓨처스에서 보기 힘든데아마 3군이나 BB Ark에서 구속증가를 위한 훈련을 하고있지 않을까 싶네요.구속증가만 한다면, 상당히 좋은 투수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삼성에서도 김영한을 1, 2년내 즉전감으로 보고 뽑은 건 아닙니다.

애당초 뽑을 때부터 3, 4년뒤부터 쓸거라고 뽑았기 때문에 요몇년 사이에 1군에서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오지랖 넓게 나대는 걸 수도 있지만무조건 장필준 장필준 거리지 말고 김영한이라는 장필준보다도 나은 투수가 있다는 사실이나마 알고 계셨음 하는 바람에 이런 글을 씁니다.

 김영한의 스카우팅리포트입니다.

최고구속은 139에 평균직구구속은 130대 중반에다가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던질 줄 알죠.윤성환의 커브를 본받고싶다고 하던데꼭 좋은 투수가 돼 1군에서 삼성팬들을 맞이할 수 있었음 합니다.

  다음은 최정용입니다.

최정용은 2015 2차지명 2라운드로 입단한, '유격수'를 볼 수 있는 선수입니다.

 사실 퓨처스 유격수하면 삼팬들 머릿속엔 끔찍한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지실겁니다.

'박계범'이라고 공수주 모두가 안 되는 선수가 2군 주전유격수로 나오는 것도 모자라 1군에도 올라오며삼팬들에게 단단히 찍혔었죠.  최정용은 어찌보면 그다지 임팩트가 큰 선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유격수는 수비가 중시되는 포지션인 걸 감안하고, 또 올해 처음으로 프로에서 뛰고 있는 신인이란 걸 감안하면 상당히 잘하죠.  그리고 지금 퓨처스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는 박계범이 이런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와중에 최정용은 상당히 좋은 픽이었죠.뭐, 몇몇 분들은 박계범이 팀내 최다 3루타에 도루도 1위, 득점도 2위, 타점도 4위라고 하시는데이건 그냥 박계범이 1군의 김상수가 류중일 빽 얻고 출장하듯이 장태수 빽 힘입어 꾸준히 출장한 덕택입니다.

 퓨처스감독인 장태수도 돌머리인게, 최정용과 박계범을 딱 놓고보면 분명 최정용이 주전감이고타격이 안 되면 수비라도 잘해야함에 불구 박계범은 실책도 번번히 저지르는데최정용을 주전으로 쓸 생각은 안 하고 박계범을 꾸준히 주전 유격수로 기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즘은 최정용과 번갈아가며 출장하고 있는데이것도 박계범이 얼마 전 허리가 아파 잠시 빠진 뒤 돌아와서 그런 거지 최정용을 주전으로 기용하고 싶어서는 아닌 듯 합니다.

하여튼 최정용은 박계범보단 좋은 선수인 듯 합니다.

 지금 1군에서 유격수백업을 보고있는 선수가 김재현인데 1군 타율이 1할이 채 안 되죠.물론 김재현이 2군 타율이 3할을 훌쩍 넘긴 하지만김재현이 이렇다면 최정용을 1군에서 써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고 막 올리자는 소리는 아니고요,김재현이 타격에서 지금보다 더한 삽질을 하고 수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9월 확대엔트리 때 충분히 올려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죠. 최정용의 스카우팅 리포트입니다.

주력이 우수하다고 하는데, 일단 퓨처스에선 도루를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김재현과 마찬가지로 유격수, 2루, 3루 모두 볼 수 있죠. 최정용이 지금수준만 유지하고 실책만 많이 저지르지 않는다면유격수 성애자인 류중일인 만큼 9월엔 1군에서 볼 확률이 낮지많은 않죠.  그리고 번외로 김호재입니다.

  저도 김호재는 에릭비숍님을 통해 알게됐는데 상당히 좋은 선수더군요.작년엔 백업으로 나와 3할 5푼, 올해도 그렇게 백업으로 나와 4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홈런도 하나 있고요.그리고 무엇보다도 유격수, 3루 모두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희한한 건 고등학교 시절에는 삽질을 제대로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성선수로 입단을 했겠다만은, 프로와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김호재란 이름은 퓨처스 기록지에서도 보기 힘든 이름입니다.

3군에서 주로 뛰는 듯 한데 이런 선수를 3군같은데 박아놓지 말고퓨처스에서 기량을 제대로 테스트한 뒤 좋은 선수라면 미련없이 밀어주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모든 고객을 만족시킬 제품이나 서비스는 존배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장을 세분화하여 목표고객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알맞은 최적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

122p 중에서..뜨내기 고객을 평생고객 만드는 7단계 고객경험관리1. 고객가치 비전을 설정하라.2.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라.3. 품질은 보이지 않는 고객 경험이다.

4. 고객이 느끼는 서비스로 바꿔라.5. 내부 고객부터 감동 시켜라.6. 전원참여로 실행하다.

7. 고객 경험을 모니터링 하라.고객경험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경쟁해야 할 승부처이다.

: 델컴퓨터 CIO, 제리 그레고어 '고객의 소리'와 경쟁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없다 :  스타벅스 회장 하워드 슐츠고객 경험 관리 사례로 쉽기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자료 참고해주시면 됩니다.

    고객경험 사이클 참고해보세요

25 10:12:12   곽재훈   추모 글…"대쪽같은 친구였다"               새누리당 내 비박계 대선 주자로 평가받는 유승민 의원(4선, 대구 동을)이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추모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유 의원은 25일 새벽 올린 글에서 "저의 오랜 친구 김영한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오늘 들었다.

날카로운 칼에 제 가슴이 찔린 거 같았다"며 "이 슬픈 죽음을 꼭 추모하고 싶은 마음에 두서없이 쓴다"고 했다.

유 의원은 "영한이는 제 경북고 친구"라며 "너무 곧고,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대쪽같은 성격 때문에 친한 친구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성격이 그렇게 까칠했으니 검사로서도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저와는 무척 친했다.

뭔가 서로 당기는 게 있었던 것 같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유 의원은 그러면서 김 전 수석이 이른바 '항명 파동' 후 사표를 쓴 일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털어놔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영한이가 2년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되었다"며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었던 이 친구가 어떻게 민정수석이 됐는지 저는 아직도 모른다.

녀석이 얘기 안 하길래, 저는 묻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 작년 1월 갑자기 사표를 던졌다.

그날 밤 저는 녀석과 방배동 허름한 술집에서 통음(痛飮)했다"고 썼다.

 별 것 아닌 추억담처럼 보이기도 하는 에피소드지만, 정치적 함의는 적지 않다.

김 전 수석은 이른바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과 관련, 국회 운영위원회 출석 요구를 거부하면서 사표를 썼다.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자신이 국회 출석을 지시했는데 김 당시 민정수석이 이를 거부했다고 국회에서 밝혔다.

(☞관련 기사 :김영한 민정수석 "국회 못 간다" 사의 표명)청와대가 정윤회 문건 관련 의혹을 덮기 위해 민정수석에게 사표를 받으면서까지 그의 국회 출석을 막은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반대편에서는 오히려 김 전 수석이 문건 파동 조사 과정에서 수석인 자신을 배제하고 김 당시 실장 등이 사건을 직접 챙겨 놓고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을 '방패막이'로 국회에 내세우려 한 데 대한 반발이 사표의 원인이라는 풀이도 나왔다.

 게다가 유 의원에 대해 당시 청와대는 '문건 파동의 배후'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김영한]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의 수첩에 "문건 파동 배후는 K와 Y.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글귀가 적힌 것이 취재진의 카메라에 담겨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때 K는 김 당시 대표, Y는 바로 유 의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관련 기사 :수첩 속 K는 김무성 Y는 유승민…與 막장 내분) 즉 청와대가 '문건 파동 배후'로 의심하고 있는 유 의원의 고교 동창 '절친'이 바로 현직 청와대 민정수석이었고, 결국 사표를 쓴 김 전 수석이 그날 밤 유 의원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다는 얘기다.

 당시 <동아일보>는 지난해 1월 12일자 기사에서 "김 전 수석은 사석에서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에 대한 불만을 여과 없이 토로했다고 한다.

김 실장이 박 대통령을 잘못 모시고 있다는 취지의 얘기였다.

그는 9일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뒤 통음을 했다고 한다"며 "김 전 수석은 사석에서 '민정수석 7개월 하면서 대통령에게 대면 보고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정윤회 동향 문건 사건 조사에서도 완전히 배제됐다'고 털어놨다"고 보도했다.

(☞관련 기사 :[동아일보] 김영한, 문건 조사에서 완전 배제됐다며 김기춘 비판)유 의원이 이날 페이스북 글에서 언급한 '통음'은 바로 이 술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 의원은 "(술자리) 그 다음날 언론은 '항명 사태'라고 썼는데, 공직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고 자존심 강한 녀석은 많이 속상했을 것"이라며 "그날 후 제 친구는 방황도 하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던 것 같다"고 재삼 추모의 정을 드러냈다.

그는 "간암으로 갑자기 갔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해서 영한이를 좋아하고 아끼는 저희들은 문병도, 문상도 못 갔고, 꽃도 못 놓고, 부의금도 아직 못 했다"며 "마지막 가는 녀석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고 애끓는 심경을 밝혔다.

그는 고인에 대해 "참 좋은 친구였고, 훌륭한 공직자였고, 항상 제 편을 들어주던 든든한 후원자였다"고 기리며 "외로운 영혼이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하기를 빈다"고 했다.

관련기사- 김영한 민정수석 "국회 못 간다" 사의 표명- 김영한 靑수석, 김기춘 실장 지시 거부 파문- [전문] 정윤회 비선논란 관련 검찰 수사결과 중간발표            민정수석 3기|朴槿惠靑瓦臺/東亞70 2014.09.16. 16:39 노사모 괴롭혔던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 아이엠피터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진정한 힘은 바로 돈? | 그대안의...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백용삼은 한국 사진계의 초기적인 인물로<>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나, 퇴임 후에는 귀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치며 생활했다고 한다.

1924년(13세) 오산 학교 입학했는데,  재학시절 오산 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동문들은 회고한다.

오산학교 졸업후 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에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  그의 멋진 헤어스타일이  그의 감각을 말해준다.

그는 함흥시의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자주 나가 러시아말도 배웠다.

백석과 김영한의 운명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 재직 중에 이루어진다.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서 사랑에 빠졌는데, 이때 김진향에게 그는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진향은 우연히 함흥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18세때의 자야인 김진향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김영한] 에 대한 몇가지 이슈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나중에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여성’에 발표한 ‘바다’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하고 웃었다 ..." -자야의 글 중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초례만 치른후 도망쳐나와 자야품으로 돌아오곤 했다.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金英韓, 본명: 김진향,법명: 吉祥華,1916

1999)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

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녀는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기생이기도했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많은 시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진위를 알 수는 없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하였으며,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다.

그녀는 백석과의 사랑을 나누었던 인연으로 1997년 11월 사재 2억을 출연, 백석문학상 (창작과 비평사 주관)을 제정하기도 했다.

-길상사 극락전에 봉안된 길상화 김영한 영정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월북작가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자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고 자야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자야여사(김영한)는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이 많은 사랑의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이동순시인은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의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생전의 자야 여사(김영한)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詩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그녀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출연해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5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고재종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백석은 기생과의 동거를 한사코 반대하는 부모와 장남으로서의 갈등,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백석이 태어난 정주는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 문단사적으로 대가들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백석은 반세기 가까이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었다.

시집도 <사슴> 한 권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이 이토록 수많은 시인들과 문학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 그의 노력과 시를 읽을때마다 묻어나오는 솔직함과 서민적(방언)이고도 아주 서정적인 시를 백석만의 언어로 쓴 이유가 크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조만식선생의 사랑을 받아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다.

,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 작가였다.

고당 조만식선생의 비서로 그는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번역하며 북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2000년 4월에 세운 원로조각가 서울대 최종태교수의 작품 관세음보살상.성모상을 닮은 관세음보살님은 아주 유명하다.

 

 그런후 인터넷 서핑 중 한편의 동영상을 접하게되면서 스티브는 나를 눈물나도록 감동시킨 그리고 나의 존경하는 인물 그리고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스티브잡스의 창조카스리스마는 간략화된 스티브의 일대기와 iPod의 개발에 얽힌 에피소드 등에 대해 기술된 책이다.

 개인적으로 좀 더 스티브의 인간적인 면에 깊숙히 파고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함께 남는다.

  25 10:12:12   곽재훈   추모 글…"대쪽같은 친구였다"               새누리당 내 비박계 대선 주자로 평가받는 유승민 의원(4선, 대구 동을)이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추모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유 의원은 25일 새벽 올린 글에서 "저의 오랜 친구 김영한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오늘 들었다.

날카로운 칼에 제 가슴이 찔린 거 같았다"며 "이 슬픈 죽음을 꼭 추모하고 싶은 마음에 두서없이 쓴다"고 했다.

유 의원은 "영한이는 제 경북고 친구"라며 "너무 곧고,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대쪽같은 성격 때문에 친한 친구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성격이 그렇게 까칠했으니 검사로서도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저와는 무척 친했다.

뭔가 서로 당기는 게 있었던 것 같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유 의원은 그러면서 김 전 수석이 이른바 '항명 파동' 후 사표를 쓴 일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털어놔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영한이가 2년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되었다"며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었던 이 친구가 어떻게 민정수석이 됐는지 저는 아직도 모른다.

녀석이 얘기 안 하길래, 저는 묻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 작년 1월 갑자기 사표를 던졌다.

그날 밤 저는 녀석과 방배동 허름한 술집에서 통음(痛飮)했다"고 썼다.

 별 것 아닌 추억담처럼 보이기도 하는 에피소드지만, 정치적 함의는 적지 않다.

김 전 수석은 이른바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과 관련, 국회 운영위원회 출석 요구를 거부하면서 사표를 썼다.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자신이 국회 출석을 지시했는데 김 당시 민정수석이 이를 거부했다고 국회에서 밝혔다.

(☞관련 기사 :김영한 민정수석 "국회 못 간다" 사의 표명)청와대가 정윤회 문건 관련 의혹을 덮기 위해 민정수석에게 사표를 받으면서까지 그의 국회 출석을 막은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반대편에서는 오히려 김 전 수석이 문건 파동 조사 과정에서 수석인 자신을 배제하고 김 당시 실장 등이 사건을 직접 챙겨 놓고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을 '방패막이'로 국회에 내세우려 한 데 대한 반발이 사표의 원인이라는 풀이도 나왔다.

 게다가 유 의원에 대해 당시 청와대는 '문건 파동의 배후'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의 수첩에 "문건 파동 배후는 K와 Y.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글귀가 적힌 것이 취재진의 카메라에 담겨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때 K는 김 당시 대표, Y는 바로 유 의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관련 기사 :수첩 속 K는 김무성 Y는 유승민…與 막장 내분) 즉 청와대가 '문건 파동 배후'로 의심하고 있는 유 의원의 고교 동창 '절친'이 바로 현직 청와대 민정수석이었고, 결국 사표를 쓴 김 전 수석이 그날 밤 유 의원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다는 얘기다.

 당시 <동아일보>는 지난해 1월 12일자 기사에서 "김 전 수석은 사석에서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에 대한 불만을 여과 없이 토로했다고 한다.

김 실장이 박 대통령을 잘못 모시고 있다는 취지의 얘기였다.

그는 9일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뒤 통음을 했다고 한다"며 "김 전 수석은 사석에서 '민정수석 7개월 하면서 대통령에게 대면 보고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정윤회 동향 문건 사건 조사에서도 완전히 배제됐다'고 털어놨다"고 보도했다.

(☞관련 기사 :[동아일보] 김영한, 문건 조사에서 완전 배제됐다며 김기춘 비판)유 의원이 이날 페이스북 글에서 언급한 '통음'은 바로 이 술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 의원은 "(술자리) 그 다음날 언론은 '항명 사태'라고 썼는데, 공직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고 자존심 강한 녀석은 많이 속상했을 것"이라며 "그날 후 제 친구는 방황도 하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던 것 같다"고 재삼 추모의 정을 드러냈다.

그는 "간암으로 갑자기 갔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해서 영한이를 좋아하고 아끼는 저희들은 문병도, 문상도 못 갔고, 꽃도 못 놓고, 부의금도 아직 못 했다"며 "마지막 가는 녀석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고 애끓는 심경을 밝혔다.

그는 고인에 대해 "참 좋은 친구였고, 훌륭한 공직자였고, 항상 제 편을 들어주던 든든한 후원자였다"고 기리며 "외로운 영혼이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하기를 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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