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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생애 및 업적  나혜석(羅蕙錫 : 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이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였다.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여성으로서는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서양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매 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경희」를 쓴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또한 3·1운동 때는   다섯달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으다.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현에서 살 때는 국경을  넘어 다니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보아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나혜석이 결혼 당시 요구 조건으로 내세운 위 세 가지 조건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나혜석의 표현대로 '선량한 남편'이었던 김우영은 신혼여행으로 죽은 애인인 최승구의 묘를 찾아가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여성을 현모양처로 교육하면서, 왜 남성은 현부양부로 교육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던 나혜석다운 일이었다.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다,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외교관의 아내로,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나혜석은 자신의 예술에대한 한계와고뇌, 아내의 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 하는 남편이 예술 세계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가중한 가사노동에 지치기  시작했다.

"...나는 내몸에 비단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다.

1분도 놀아 본 적이 없다.

."  마침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 과감하게  1년 8개월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혜석과 김우영(왼쪽 두사람)- 최린과의 연애 사건-독립선언서 33인중 1인 최린 (1878∼1958)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인간적 삶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그런데 그 파리에서 남편이 아닌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귀국 후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화가와 어머니의 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반민특위로 압송돼 가는 최린(뒷편).   ▲ 한국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의 생전 모습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인습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 나혜석이 머물었던 샬레씨 집의 가족사진(1920년대).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이 집 가족은 50여세 된 샬레씨, 40여세 된 부인, 18세, 16세 된 딸, 7세 된 아들, 나,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아래층은 서재 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씨가 여행 중에 수집한 남양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2층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나혜석의 글 중 ▲ 나혜석이 머물었던 샬레씨 집(1920년대).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구미 만유기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만나 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 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이었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무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중에서. <삼천리> 1932년 11월 발표) "생활 정도를 낮추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는 것처럼 비애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의사를 죽여 남의 의사를 좆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없는 것 같다…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 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 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이와 같이 활짝 피었던 꽃이 떨어지듯 푸근하고 늘씬하던 기분은 전후좌우로 바싹바싹 오그라들기를 시작하였다…아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리워…"('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구미 만유하고 온 후의 나' <삼천리> 1932년 1월 발표)<캉캉 무희>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세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나는 인형이었네,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나혜석의 시 <노라> 中   나혜석은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피력한, 당대로서는 대담한 이 글을 잡지에 발표한 후,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을 이유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반응조차 나혜석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일어난 사적인 일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그녀의 대담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욱이 결혼한 여자가 외간 남자와 바람피운 것을 창피하게 여기기는 커녕 도리어 당당하게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청구소송을 걸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한 고백장을 사회에 적나라하게 발표하는 당신의 태도에 반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필요 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적이다.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적 광태를 버렸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잡지에 여성들이 독자 투고 형식으로 나혜석에게 쏟아놓은 말들이었다.

      왼쪽부터,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소녀>, <금강산 만상정>, <창가에서>  나혜석이 이혼직후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우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다.

 해방 후에는 안양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자주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KBS 다큐에서 본 바에 의하면 당시 미대생이던 이응로씨의 부인 박인경씨가 나혜석의 편지도 대신 써 주고 전하는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나혜석은 당시 파킨슨병을 앓아서 손이 많이 떨렸었다고, 그녀의 나이 51세였다.

 금강산 만상정/나혜석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 그림 '화녕전의 작약'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 소송을 건 나혜석의 기사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며 취미일 뿐'이라는 역설적 글로 봉건적 유교 사회에 도전 �L던 그녀였다.

그러나 여성계들 조차 '노출등적 광태를 버리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자화상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나혜석의 유화 ‘정원’.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사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선죽교四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여라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에 오거든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송이 꽂아다오1935년 나혜석                       동경 유학시절 뭇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나혜석은 글 솜씨마저 뛰어나 최승구, 이광수 등과 교류하며 많은 글을 발표했다.

탁월한 문장력을 지닌 그는 이미 18세 때에 독립적 여성을 그린 '이상적인 부인'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신여자' 제4호(1920년 4월)에 실린 나혜석의 목판화<김일엽 선생의 가정 생활>   이 여성 잡지를 주재하던 김일엽 선생의 가사 노동과 독서, 집필을 병행하는   바쁜 하루를 경쾌하게 묘사했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장려한 것이다” 1914년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 나혜석.유학생 활을 통해 근대적 여성상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유 학생 잡지<학지광>에 현모양처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글을 싣는다.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학지광 1914년 12월호>   ▲ 매일신보에 실린 나혜석의 기사.   그녀는 조선 여학생 중 가장 학업이 출중한 학생으로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고, 행복했습니다”  나혜석이 쓴 편지와 함께 처음 공개되는 사진. 일본의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가 편지와 함께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왼쪽부터 나혜석, 야나기하라 기쓰베 부부, 그리고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 1927년 6월 편지에서 언급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 나혜석학회]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들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 부터 고립된다.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 모두가 떠 나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말하 기를 그치지 않는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은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사회는 그녀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혜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세상에 말을 걸고자 했다.

“당시에도 뭔가를 쓰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쓴 글씨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나보고 깨끗이 정서를 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당시 목격자 박인경씨의 증언 中>  ▲ 나혜석은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린                  ▲ 수덕사에서 그린 나혜석의 자화상        상태에서도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참고 출처 : 여성 중앙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KBS 1TV)나는 말한다-내게 금지된 것을                                   나혜석 우먼스 라이프 8월호 사진 학력경기도 수원 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 수료경성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졸업직업서양화가, 판화가, 교육자, 조각가, 소설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종교기독교(1917년)→불교(1935년)배우자김우영(이혼)자녀딸 김나열, 첫째아들 김선, 둘째아들 김진, 셋째아들 김건부모나기정(부), 최시의(모)친척나경석(동복 오빠)나계석(이복 언니)나지석(동복 남동생)나영완(할아버지)나기형(큰아버지)나홍석(법적 사촌 오빠)나영균(친정 조카딸)전민제(친정 조카사위)김재민(손자)김성민(손자)김황민(손자)나문희(친정 조카손녀)1920년 초의 나혜석 이제야 나혜석여사의 자녀와 손자들의 이름까지 다 알려지는 군요. 어머니를, 할머니를  부끄러워하지않고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어머니 나혜석’.-김진교수 :  http://blog.joins.com/liberum/10950378   생애 및 업적  나혜석(羅蕙錫 : 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이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였다.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여성으로서는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서양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매 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경희」를 쓴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또한 3·1운동 때는   다섯달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으다.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현에서 살 때는 국경을  넘어 다니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보아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나혜석이 결혼 당시 요구 조건으로 내세운 위 세 가지 조건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나혜석의 표현대로 '선량한 남편'이었던 김우영은 신혼여행으로 죽은 애인인 최승구의 묘를 찾아가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여성을 현모양처로 교육하면서, 왜 남성은 현부양부로 교육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던 나혜석다운 일이었다.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다,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외교관의 아내로,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나혜석은 자신의 예술에대한 한계와고뇌, 아내의 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 하는 남편이 예술 세계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가중한 가사노동에 지치기  시작했다.

"...나는 내몸에 비단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다.

1분도 놀아 본 적이 없다.

."  마침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 과감하게  1년 8개월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혜석과 김우영(왼쪽 두사람)- 최린과의 연애 사건-독립선언서 33인중 1인 최린 (1878∼1958)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인간적 삶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그런데 그 파리에서 남편이 아닌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귀국 후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화가와 어머니의 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반민특위로 압송돼 가는 최린(뒷편).   ▲ 한국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의 생전 모습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인습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 나혜석이 머물었던 샬레씨 집의 가족사진(1920년대).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이 집 가족은 50여세 된 샬레씨, 40여세 된 부인, 18세, 16세 된 딸, 7세 된 아들, 나,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아래층은 서재 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씨가 여행 중에 수집한 남양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2층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나혜석의 글 중 ▲ 나혜석이 머물었던 샬레씨 집(1920년대).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구미 만유기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만나 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 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이었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무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중에서. <삼천리> 1932년 11월 발표) "생활 정도를 낮추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는 것처럼 비애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의사를 죽여 남의 의사를 좆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없는 것 같다…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 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 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이와 같이 활짝 피었던 꽃이 떨어지듯 푸근하고 늘씬하던 기분은 전후좌우로 바싹바싹 오그라들기를 시작하였다…아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리워…"('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구미 만유하고 온 후의 나' <삼천리> 1932년 1월 발표)<캉캉 무희>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세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나는 인형이었네,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나혜석의 시 <노라> 中   나혜석은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피력한, 당대로서는 대담한 이 글을 잡지에 발표한 후,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을 이유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반응조차 나혜석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일어난 사적인 일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그녀의 대담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욱이 결혼한 여자가 외간 남자와 바람피운 것을 창피하게 여기기는 커녕 도리어 당당하게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청구소송을 걸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한 고백장을 사회에 적나라하게 발표하는 당신의 태도에 반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필요 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적이다.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적 광태를 버렸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잡지에 여성들이 독자 투고 형식으로 나혜석에게 쏟아놓은 말들이었다.

      왼쪽부터,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소녀>, <금강산 만상정>, <창가에서>  나혜석이 이혼직후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우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다.

 해방 후에는 안양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자주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KBS 다큐에서 본 바에 의하면 당시 미대생이던 이응로씨의 부인 박인경씨가 나혜석의 편지도 대신 써 주고 전하는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나혜석은 당시 파킨슨병을 앓아서 손이 많이 떨렸었다고, 그녀의 나이 51세였다.

 금강산 만상정/나혜석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 그림 '화녕전의 작약'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 소송을 건 나혜석의 기사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며 취미일 뿐'이라는 역설적 글로 봉건적 유교 사회에 도전 �L던 그녀였다.

그러나 여성계들 조차 '노출등적 광태를 버리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자화상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나혜석의 유화 ‘정원’.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사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선죽교四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여라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에 오거든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송이 꽂아다오1935년 나혜석                       동경 유학시절 뭇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나혜석은 글 솜씨마저 뛰어나 최승구, 이광수 등과 교류하며 많은 글을 발표했다.

탁월한 문장력을 지닌 그는 이미 18세 때에 독립적 여성을 그린 '이상적인 부인'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신여자' 제4호(1920년 4월)에 실린 나혜석의 목판화<김일엽 선생의 가정 생활>   이 여성 잡지를 주재하던 김일엽 선생의 가사 노동과 독서, 집필을 병행하는   바쁜 하루를 경쾌하게 묘사했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장려한 것이다” 1914년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 나혜석.유학생 활을 통해 근대적 여성상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유 학생 잡지<학지광>에 현모양처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글을 싣는다.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학지광 1914년 12월호>   ▲ 매일신보에 실린 나혜석의 기사.   그녀는 조선 여학생 중 가장 학업이 출중한 학생으로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고, 행복했습니다”  나혜석이 쓴 편지와 함께 처음 공개되는 사진. 일본의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가 편지와 함께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왼쪽부터 나혜석, 야나기하라 기쓰베 부부, 그리고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 1927년 6월 편지에서 언급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 나혜석학회]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들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 부터 고립된다.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 모두가 떠 나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말하 기를 그치지 않는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은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사회는 그녀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혜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세상에 말을 걸고자 했다.

“당시에도 뭔가를 쓰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쓴 글씨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나보고 깨끗이 정서를 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당시 목격자 박인경씨의 증언 中>  ▲ 나혜석은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린                  ▲ 수덕사에서 그린 나혜석의 자화상        상태에서도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참고 출처 : 여성 중앙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KBS 1TV)나는 말한다-내게 금지된 것을                                   나혜석 우먼스 라이프 8월호 사진 학력경기도 수원 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 수료경성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졸업직업서양화가, 판화가, 교육자, 조각가, 소설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종교기독교(1917년)→불교(1935년)배우자김우영(이혼)자녀딸 김나열, 첫째아들 김선, 둘째아들 김진, 셋째아들 김건부모나기정(부), 최시의(모)친척나경석(동복 오빠)나계석(이복 언니)나지석(동복 남동생)나영완(할아버지)나기형(큰아버지)나홍석(법적 사촌 오빠)나영균(친정 조카딸)전민제(친정 조카사위)김재민(손자)김성민(손자)김황민(손자)나문희(친정 조카손녀)1920년 초의 나혜석 이제야 나혜석여사의 자녀와 손자들의 이름까지 다 알려지는 군요. 어머니를, 할머니를  부끄러워하지않고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어머니 나혜석’.-김진교수 :  http://blog.joins.com/liberum/10950378   생애 및 업적  나혜석(羅蕙錫 : 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이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였다.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여성으로서는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서양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매 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경희」를 쓴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또한 3·1운동 때는   다섯달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으다.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현에서 살 때는 국경을  넘어 다니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보아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나혜석이 결혼 당시 요구 조건으로 내세운 위 세 가지 조건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나혜석의 표현대로 '선량한 남편'이었던 김우영은 신혼여행으로 죽은 애인인 최승구의 묘를 찾아가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여성을 현모양처로 교육하면서, 왜 남성은 현부양부로 교육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던 나혜석다운 일이었다.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다,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외교관의 아내로,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나혜석은 자신의 예술에대한 한계와고뇌, 아내의 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 하는 남편이 예술 세계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가중한 가사노동에 지치기  시작했다.

"...나는 내몸에 비단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다.

1분도 놀아 본 적이 없다.

."  마침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 과감하게  1년 8개월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혜석과 김우영(왼쪽 두사람)- 최린과의 연애 사건-독립선언서 33인중 1인 최린 (1878∼1958)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인간적 삶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그런데 그 파리에서 남편이 아닌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귀국 후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화가와 어머니의 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반민특위로 압송돼 가는 최린(뒷편).   ▲ 한국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의 생전 모습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인습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 나혜석이 머물었던 샬레씨 집의 가족사진(1920년대).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이 집 가족은 50여세 된 샬레씨, 40여세 된 부인, 18세, 16세 된 딸, 7세 된 아들, 나,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아래층은 서재 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씨가 여행 중에 수집한 남양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2층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나혜석의 글 중 ▲ 나혜석이 머물었던 샬레씨 집(1920년대).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구미 만유기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만나 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 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이었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무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중에서. <삼천리> 1932년 11월 발표) "생활 정도를 낮추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는 것처럼 비애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의사를 죽여 남의 의사를 좆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없는 것 같다…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 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 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나혜석] 진실 또는 거짓..


이와 같이 활짝 피었던 꽃이 떨어지듯 푸근하고 늘씬하던 기분은 전후좌우로 바싹바싹 오그라들기를 시작하였다…아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리워…"('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구미 만유하고 온 후의 나' <삼천리> 1932년 1월 발표)<캉캉 무희>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세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나는 인형이었네,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나혜석의 시 <노라> 中   나혜석은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피력한, 당대로서는 대담한 이 글을 잡지에 발표한 후,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을 이유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반응조차 나혜석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일어난 사적인 일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그녀의 대담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욱이 결혼한 여자가 외간 남자와 바람피운 것을 창피하게 여기기는 커녕 도리어 당당하게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청구소송을 걸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한 고백장을 사회에 적나라하게 발표하는 당신의 태도에 반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필요 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적이다.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적 광태를 버렸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잡지에 여성들이 독자 투고 형식으로 나혜석에게 쏟아놓은 말들이었다.

      왼쪽부터,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소녀>, <금강산 만상정>, <창가에서>  나혜석이 이혼직후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우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다.

 해방 후에는 안양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자주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KBS 다큐에서 본 바에 의하면 당시 미대생이던 이응로씨의 부인 박인경씨가 나혜석의 편지도 대신 써 주고 전하는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나혜석은 당시 파킨슨병을 앓아서 손이 많이 떨렸었다고, 그녀의 나이 51세였다.

 금강산 만상정/나혜석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 그림 '화녕전의 작약'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 소송을 건 나혜석의 기사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며 취미일 뿐'이라는 역설적 글로 봉건적 유교 사회에 도전 �L던 그녀였다.

그러나 여성계들 조차 '노출등적 광태를 버리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자화상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나혜석의 유화 ‘정원’.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사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선죽교四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여라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에 오거든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송이 꽂아다오1935년 나혜석                       동경 유학시절 뭇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나혜석은 글 솜씨마저 뛰어나 최승구, 이광수 등과 교류하며 많은 글을 발표했다.

탁월한 문장력을 지닌 그는 이미 18세 때에 독립적 여성을 그린 '이상적인 부인'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신여자' 제4호(1920년 4월)에 실린 나혜석의 목판화<김일엽 선생의 가정 생활>   이 여성 잡지를 주재하던 김일엽 선생의 가사 노동과 독서, 집필을 병행하는   바쁜 하루를 경쾌하게 묘사했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장려한 것이다” 1914년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 나혜석.유학생 활을 통해 근대적 여성상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유 학생 잡지<학지광>에 현모양처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글을 싣는다.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학지광 1914년 12월호>   ▲ 매일신보에 실린 나혜석의 기사.   그녀는 조선 여학생 중 가장 학업이 출중한 학생으로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고, 행복했습니다”  나혜석이 쓴 편지와 함께 처음 공개되는 사진. 일본의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가 편지와 함께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왼쪽부터 나혜석, 야나기하라 기쓰베 부부, 그리고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 1927년 6월 편지에서 언급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 나혜석학회]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들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 부터 고립된다.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 모두가 떠 나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말하 기를 그치지 않는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은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사회는 그녀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혜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세상에 말을 걸고자 했다.

“당시에도 뭔가를 쓰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쓴 글씨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나보고 깨끗이 정서를 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당시 목격자 박인경씨의 증언 中>  ▲ 나혜석은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린                  ▲ 수덕사에서 그린 나혜석의 자화상        상태에서도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참고 출처 : 여성 중앙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KBS 1TV)나는 말한다-내게 금지된 것을                                   나혜석 우먼스 라이프 8월호 사진 학력경기도 수원 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 수료경성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졸업직업서양화가, 판화가, 교육자, 조각가, 소설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종교기독교(1917년)→불교(1935년)배우자김우영(이혼)자녀딸 김나열, 첫째아들 김선, 둘째아들 김진, 셋째아들 김건부모나기정(부), 최시의(모)친척나경석(동복 오빠)나계석(이복 언니)나지석(동복 남동생)나영완(할아버지)나기형(큰아버지)나홍석(법적 사촌 오빠)나영균(친정 조카딸)전민제(친정 조카사위)김재민(손자)김성민(손자)김황민(손자)나문희(친정 조카손녀)1920년 초의 나혜석 이제야 나혜석여사의 자녀와 손자들의 이름까지 다 알려지는 군요. 어머니를, 할머니를  부끄러워하지않고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어머니 나혜석’.-김진교수 :  http://blog.joins.com/liberum/10950378  프랑스 파리로 유학해서 인상파와 야수파 등의 서양 현대미술을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했다.

 미술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 여러 여학교에서 미술을 강의했으며, 직접 국내에 여자미술 학사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남긴 미술작품이 800여 점이라고 하는데, 특히 6 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1/10에 불과하다.

 그녀는 서양화가이면서 한국 최초의 여류 단편 소설가로 지력과 필력을 겸비한 당대의 지성인이었다.

일본 유학 때부터 여권신장의 글을 발표하여 여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특히 자신의 연애, 결혼,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심리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식민지 조선사회의 가부장제가 가지는 모순을 비판한 글 "이혼고백장"(1934)과 "신생활에 들면서"(1935)을 발표하여 이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이상경(李相瓊,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께서 강동성심병원에 초청받아[2015년 6월11일]「나혜석의 삶과 글 읽기」라는 제목의 특강을 해주셨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 나혜석의 인생역정, 문학세계 뿐만 아니라 그 녀의 미술세계까지 이해하고 관심가질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상경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에서「강경애 연구」로 석사논문을 썼고,「이기영 소설의 변모과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근대문학사를 새로운 눈으로 그려내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한국 근대 민족문학사」를 썼다.

그 후 특히 여성작가들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강경애 전집」,「한국 근대 여성문학사론」「나혜석 전집」을 펴냈고 나혜석 평전 「인간으로 살고싶다 -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을 출간하였다.

  나혜석 자화상, 그리고 무희(캉캉)정월(晶月) 나혜석의 작품 중 1928년에 그린 '자화상'은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한다.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그가 강렬한 색채와 거친 질감으로 신(新)여성의 세련된 자태에 무겁고 어두운 감정을 담아낸 한국 최초의 여성 자화상이다.

미술 외적으로도 각별한 의미가 담겼다.

 여성은 초상화를 남기는 일조차 쉽지 않을 만큼 봉건적이었던 한국 사회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인습에 대한 도전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한 점도 없다고 생각한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천재 화가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나혜석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작품명은 스페인항구, 만주봉천 풍경, 파리 풍경, 스페인국경, 스페인 해수욕장, 불란스 마을풍경, 미국풍경, 별장, 풍경, 이화원 등. 세계일주 후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는 평가이다.

이상경 교수는 나혜석의 작품으로 알려진 유화는 20여 점이지만 진위가 불분명하여 논란이 되는 섯도 있고, 전시회에 나온 뒤 소재가 모호해진 것도 많아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진품은 매우 드물다고 했다.

 나혜석은 1927년 남편과 함께 만주,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세계여행길에 나섰다.

자식까지 두고 세계 일주를 한 것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녀는 어떻게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을까, 여자의 지위는 과연 어떤 것인가, 나의 그림은 어떤가” 하는 철학적·예술가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세계여행은 그녀에게 미술과 세계관에 대해 새롭고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구사했고, 유럽 여행 기간 중에는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다.

 정월(晶月) 나혜석(羅惠錫, 1896-1948) 연보 1896  경기도 수원에서 용인과 시흥 군수를 지낸 개명관료 나기정(羅基貞)의 2남 3녀 중 둘째딸로 출생1913  진명여고보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동경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1914  재일본 동경조선유학생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에「이상적 부인」 발표1915  휴학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돈을 모아 다음 해 복학1916   첫사랑이자 근대시의 개척자였던 시인 소월 최승구(素月 崔承九)가 결핵으로 병사1918   동경여자친목회가 발간한 <여자계>에 단편소설 「경희」 발표.          동경여자미술학교 졸업한 후 귀국하여 미술교사1919   3.1운동에 여학생의 조직적 참가를 논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1920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의 김우영(金雨英)과 결혼1921  유화 개인전 개최. 만주 안동현(현재의 단동시)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과 함께 안동으로 이주1923  「어머니 된 감상기」 발표. 조선미술전람회 입선1926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으로 특선1927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남편은 독일과 영국에서 법학 공부        천도교 지도자인 최린(崔麟)을 만나 예술을 논하면서 파리 관광1929  미국을 거쳐 귀국하여 부산 시댁에서 생활. 수원에서 구미사생화 전람회 개최1930  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이혼1931  제10회 조선미전에「정원」이 입선, 같은 그림이 제12회 제국미전에서도 입선1933  여자미술 학사를 열었으나 실패, 그림이 불타는 불운을 겪으면서 건강 악화1934   <삼천리 잡지에「이혼고백서」을 발표함.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김우영이 보인 편협함, 그리고 남성이기주의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현모양처를 최고로 치는 그 당시에 그녀의 고백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 1935  「신생활에 들면서」 발표. 서울에서 소품전을 개최했으나 외면당함1938  「해인사의 풍광」발표. 일엽 스님을 찾아 수덕사 견성암과 수덕여관에서 1943년까지 생활1944   서울 인왕산 청운양로원에서 생활1948   원효로 시립 자제원에서 사망.        1920년 신여자라는 잡지에 기고한 그림과 글이다.

내용인즉저것이 무엇인가. 시속 양금(바이얼린)이라든가. 앗다 그 계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  - 두 양반의 평그것 참 예쁘다.

장가나 안들었다면 --- 쳐다나 보아야 인사나 좀 해보지 - 어느 청년의 큰 걱정 참고 1) 네이버캐스트 - 서양화가이자 문학가, 근대 신여성의 효시2) 나혜석 둘째아들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가 띄우는 고백[여성동아 2009년 5월호]3) 위키백과 나혜석 : 나혜석의 삶을 가장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4) 이상경 저 한길사 출판 (2000) - "인간으로 살고 싶다-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이상경 교수의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영원한 신여성 나혜석」<도서출판 한길사>(2009년)을 접했다.

[2015년 7월 31일]  프랑스 파리로 유학해서 인상파와 야수파 등의 서양 현대미술을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했다.

 미술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 여러 여학교에서 미술을 강의했으며, 직접 국내에 여자미술 학사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남긴 미술작품이 800여 점이라고 하는데, 특히 6 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1/10에 불과하다.

 그녀는 서양화가이면서 한국 최초의 여류 단편 소설가로 지력과 필력을 겸비한 당대의 지성인이었다.

일본 유학 때부터 여권신장의 글을 발표하여 여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특히 자신의 연애, 결혼,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심리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식민지 조선사회의 가부장제가 가지는 모순을 비판한 글 "이혼고백장"(1934)과 "신생활에 들면서"(1935)을 발표하여 이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이상경(李相瓊,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께서 강동성심병원에 초청받아[2015년 6월11일]「나혜석의 삶과 글 읽기」라는 제목의 특강을 해주셨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 나혜석의 인생역정, 문학세계 뿐만 아니라 그 녀의 미술세계까지 이해하고 관심가질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상경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에서「강경애 연구」로 석사논문을 썼고,「이기영 소설의 변모과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근대문학사를 새로운 눈으로 그려내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한국 근대 민족문학사」를 썼다.

그 후 특히 여성작가들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강경애 전집」,「한국 근대 여성문학사론」「나혜석 전집」을 펴냈고 나혜석 평전 「인간으로 살고싶다 -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을 출간하였다.

  나혜석 자화상, 그리고 무희(캉캉)정월(晶月) 나혜석의 작품 중 1928년에 그린 '자화상'은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한다.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그가 강렬한 색채와 거친 질감으로 신(新)여성의 세련된 자태에 무겁고 어두운 감정을 담아낸 한국 최초의 여성 자화상이다.

미술 외적으로도 각별한 의미가 담겼다.

 여성은 초상화를 남기는 일조차 쉽지 않을 만큼 봉건적이었던 한국 사회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인습에 대한 도전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한 점도 없다고 생각한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천재 화가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나혜석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작품명은 스페인항구, 만주봉천 풍경, 파리 풍경, 스페인국경, 스페인 해수욕장, 불란스 마을풍경, 미국풍경, 별장, 풍경, 이화원 등. 세계일주 후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는 평가이다.

[나혜석] 알고싶다.



이상경 교수는 나혜석의 작품으로 알려진 유화는 20여 점이지만 진위가 불분명하여 논란이 되는 섯도 있고, 전시회에 나온 뒤 소재가 모호해진 것도 많아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진품은 매우 드물다고 했다.

 나혜석은 1927년 남편과 함께 만주,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세계여행길에 나섰다.

자식까지 두고 세계 일주를 한 것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녀는 어떻게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을까, 여자의 지위는 과연 어떤 것인가, 나의 그림은 어떤가” 하는 철학적·예술가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세계여행은 그녀에게 미술과 세계관에 대해 새롭고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구사했고, 유럽 여행 기간 중에는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다.

 정월(晶月) 나혜석(羅惠錫, 1896-1948) 연보 1896  경기도 수원에서 용인과 시흥 군수를 지낸 개명관료 나기정(羅基貞)의 2남 3녀 중 둘째딸로 출생1913  진명여고보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동경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1914  재일본 동경조선유학생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에「이상적 부인」 발표1915  휴학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돈을 모아 다음 해 복학1916   첫사랑이자 근대시의 개척자였던 시인 소월 최승구(素月 崔承九)가 결핵으로 병사1918   동경여자친목회가 발간한 <여자계>에 단편소설 「경희」 발표.          동경여자미술학교 졸업한 후 귀국하여 미술교사1919   3.1운동에 여학생의 조직적 참가를 논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1920  경성제대 법학부 출신의 김우영(金雨英)과 결혼1921  유화 개인전 개최. 만주 안동현(현재의 단동시)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과 함께 안동으로 이주1923  「어머니 된 감상기」 발표. 조선미술전람회 입선1926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으로 특선1927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남편은 독일과 영국에서 법학 공부        천도교 지도자인 최린(崔麟)을 만나 예술을 논하면서 파리 관광1929  미국을 거쳐 귀국하여 부산 시댁에서 생활. 수원에서 구미사생화 전람회 개최1930  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이혼1931  제10회 조선미전에「정원」이 입선, 같은 그림이 제12회 제국미전에서도 입선1933  여자미술 학사를 열었으나 실패, 그림이 불타는 불운을 겪으면서 건강 악화1934   <삼천리 잡지에「이혼고백서」을 발표함.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김우영이 보인 편협함, 그리고 남성이기주의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현모양처를 최고로 치는 그 당시에 그녀의 고백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 1935  「신생활에 들면서」 발표. 서울에서 소품전을 개최했으나 외면당함1938  「해인사의 풍광」발표. 일엽 스님을 찾아 수덕사 견성암과 수덕여관에서 1943년까지 생활1944   서울 인왕산 청운양로원에서 생활1948   원효로 시립 자제원에서 사망.        1920년 신여자라는 잡지에 기고한 그림과 글이다.

내용인즉저것이 무엇인가. 시속 양금(바이얼린)이라든가. 앗다 그 계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  - 두 양반의 평그것 참 예쁘다.

장가나 안들었다면 --- 쳐다나 보아야 인사나 좀 해보지 - 어느 청년의 큰 걱정 참고 1) 네이버캐스트 - 서양화가이자 문학가, 근대 신여성의 효시2) 나혜석 둘째아들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가 띄우는 고백[여성동아 2009년 5월호]3) 위키백과 나혜석 : 나혜석의 삶을 가장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4) 이상경 저 한길사 출판 (2000) - "인간으로 살고 싶다-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이상경 교수의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영원한 신여성 나혜석」<도서출판 한길사>(2009년)을 접했다.

[2015년 7월 31일] 이를 계기로 수원아이파크미술관에서는나혜석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고,기증 작품을 대중에 선보이는 기획전을개최합니다!나혜석 자화상-캔버스 유채-72x59cm, 1928 무렵김우영의 초상-캔버스 유채-63.5.x55cm, 1928 무렵나혜석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서양 여류 화가로, 수원에는 나혜석 선생을기리기 위해 조성된 나혜석 거리가 있습니다.

나혜석 선생은 대표적인 신여성이자화가이자 독립운동가, 여권운동가,문필가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나혜석 거리와 나혜석 선생에 대해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글을 참고!▼▼▼http://bit.ly/1Sv0yZC국내 초기 서양화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역할을 수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나혜석이라는 인물을 전적으로 이해하기에는여러 방면의 어려움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나혜석 선생의생애와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를선정하여 기획전으로 선보이고자 합니다.

기증 작품 특별전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
●전시기간: 2016.4.28(목)

8.21(일)●전시장소: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_1전시실●전시부문: 회화, 문학작품, 사진, 신문,칠팔 서신, 영상아크이브 등
수원역에서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가는 법
●버스: 34,11,13,17번 탑승→팔달구청,화성행궁,수원성지 정류장 하차7-2번 탑승→화성행궁 정류장 하차●자가용: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33지도보기50m� NAVER Corp.??? /OpenStreet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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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VER Corp. /OpenStreetMap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238-1상세보기지도보기  생애 및 업적  나혜석(羅蕙錫 : 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이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였다.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여성으로서는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서양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매 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경희」를 쓴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또한 3·1운동 때는   다섯달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으다.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현에서 살 때는 국경을  넘어 다니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보아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나혜석이 결혼 당시 요구 조건으로 내세운 위 세 가지 조건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나혜석의 표현대로 '선량한 남편'이었던 김우영은 신혼여행으로 죽은 애인인 최승구의 묘를 찾아가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여성을 현모양처로 교육하면서, 왜 남성은 현부양부로 교육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던 나혜석다운 일이었다.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다,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외교관의 아내로,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나혜석은 자신의 예술에대한 한계와고뇌, 아내의 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 하는 남편이 예술 세계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가중한 가사노동에 지치기  시작했다.

"...나는 내몸에 비단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다.

1분도 놀아 본 적이 없다.

."  마침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 과감하게  1년 8개월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혜석과 김우영(왼쪽 두사람)- 최린과의 연애 사건-독립선언서 33인중 1인 최린 (1878∼1958)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인간적 삶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그런데 그 파리에서 남편이 아닌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귀국 후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화가와 어머니의 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반민특위로 압송돼 가는 최린(뒷편).   ▲ 한국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의 생전 모습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인습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 나혜석이 머물었던 샬레씨 집의 가족사진(1920년대).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이 집 가족은 50여세 된 샬레씨, 40여세 된 부인, 18세, 16세 된 딸, 7세 된 아들, 나,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아래층은 서재 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씨가 여행 중에 수집한 남양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2층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나혜석의 글 중 ▲ 나혜석이 머물었던 샬레씨 집(1920년대). 출처 :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구미 만유기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만나 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 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이었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무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중에서. <삼천리> 1932년 11월 발표) "생활 정도를 낮추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는 것처럼 비애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의사를 죽여 남의 의사를 좆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없는 것 같다…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 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 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이와 같이 활짝 피었던 꽃이 떨어지듯 푸근하고 늘씬하던 기분은 전후좌우로 바싹바싹 오그라들기를 시작하였다…아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리워…"('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구미 만유하고 온 후의 나' <삼천리> 1932년 1월 발표)<캉캉 무희>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세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다.

 나는 인형이었네,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나혜석의 시 <노라> 中   나혜석은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피력한, 당대로서는 대담한 이 글을 잡지에 발표한 후,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을 이유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반응조차 나혜석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일어난 사적인 일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그녀의 대담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욱이 결혼한 여자가 외간 남자와 바람피운 것을 창피하게 여기기는 커녕 도리어 당당하게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청구소송을 걸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한 고백장을 사회에 적나라하게 발표하는 당신의 태도에 반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필요 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적이다.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적 광태를 버렸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잡지에 여성들이 독자 투고 형식으로 나혜석에게 쏟아놓은 말들이었다.

      왼쪽부터,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소녀>, <금강산 만상정>, <창가에서>  나혜석이 이혼직후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우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다.

 해방 후에는 안양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자주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KBS 다큐에서 본 바에 의하면 당시 미대생이던 이응로씨의 부인 박인경씨가 나혜석의 편지도 대신 써 주고 전하는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나혜석은 당시 파킨슨병을 앓아서 손이 많이 떨렸었다고, 그녀의 나이 51세였다.

 금강산 만상정/나혜석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 그림 '화녕전의 작약'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 소송을 건 나혜석의 기사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며 취미일 뿐'이라는 역설적 글로 봉건적 유교 사회에 도전 �L던 그녀였다.

그러나 여성계들 조차 '노출등적 광태를 버리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자화상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나혜석의 유화 ‘정원’.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사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선죽교四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여라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에 오거든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송이 꽂아다오1935년 나혜석                       동경 유학시절 뭇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나혜석은 글 솜씨마저 뛰어나 최승구, 이광수 등과 교류하며 많은 글을 발표했다.

탁월한 문장력을 지닌 그는 이미 18세 때에 독립적 여성을 그린 '이상적인 부인'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신여자' 제4호(1920년 4월)에 실린 나혜석의 목판화<김일엽 선생의 가정 생활>   이 여성 잡지를 주재하던 김일엽 선생의 가사 노동과 독서, 집필을 병행하는   바쁜 하루를 경쾌하게 묘사했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장려한 것이다” 1914년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 나혜석.유학생 활을 통해 근대적 여성상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유 학생 잡지<학지광>에 현모양처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글을 싣는다.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학지광 1914년 12월호>   ▲ 매일신보에 실린 나혜석의 기사.   그녀는 조선 여학생 중 가장 학업이 출중한 학생으로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고, 행복했습니다”  나혜석이 쓴 편지와 함께 처음 공개되는 사진. 일본의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쓰베가 편지와 함께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왼쪽부터 나혜석, 야나기하라 기쓰베 부부, 그리고 부부 사이에 미상의 남자. 1927년 6월 편지에서 언급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 나혜석학회]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들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 부터 고립된다.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 모두가 떠 나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말하 기를 그치지 않는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은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사회는 그녀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혜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세상에 말을 걸고자 했다.

“당시에도 뭔가를 쓰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쓴 글씨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나보고 깨끗이 정서를 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당시 목격자 박인경씨의 증언 中>  ▲ 나혜석은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린                  ▲ 수덕사에서 그린 나혜석의 자화상        상태에서도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참고 출처 : 여성 중앙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 오마이뉴스(KBS 1TV)나는 말한다-내게 금지된 것을                                   나혜석 우먼스 라이프 8월호 사진 학력경기도 수원 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 수료경성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졸업직업서양화가, 판화가, 교육자, 조각가, 소설가, 시인,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종교기독교(1917년)→불교(1935년)배우자김우영(이혼)자녀딸 김나열, 첫째아들 김선, 둘째아들 김진, 셋째아들 김건부모나기정(부), 최시의(모)친척나경석(동복 오빠)나계석(이복 언니)나지석(동복 남동생)나영완(할아버지)나기형(큰아버지)나홍석(법적 사촌 오빠)나영균(친정 조카딸)전민제(친정 조카사위)김재민(손자)김성민(손자)김황민(손자)나문희(친정 조카손녀)1920년 초의 나혜석 이제야 나혜석여사의 자녀와 손자들의 이름까지 다 알려지는 군요. 어머니를, 할머니를  부끄러워하지않고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어머니 나혜석’.-김진교수 :  http://blog.joins.com/liberum/10950378  여러 분야에서 그녀는 '연구대상'이다.

 그 중에 '여성인권운동가로서 나혜석'을 많이 얘기하는 것 같다.

소설과 시, 만평 등 글에서 여성인권운동가로서 나혜석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술영역에서는 그녀의 현존하는 그림이 얼마 없어서 작품세계와 철학을 추출하기가 어렵다.

 여성운동, 페미니즘 이런 거 관심이 없어서 사실 '근대 여성운동가로서 나혜석'보다는 '미술가로서 나혜석'을 알아보고자 전시를 찾았다.

 올해는 나혜석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이를 챙겨주는 이유는, 나혜석이 수원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다.

수원 지역작가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정월 나혜석(1896

1948)은 한국근대사에서 특이할만한 여러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녀를 수식하는 표현에는 항상 '최초', '1등'이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서양화가, 여류문학의 개척자, 최초의 여성해방운동가 등등.하지만 이 간단명료한 수식어들이 그 사람의 본질을 제대로 반영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누구나 선망하는 화려한 수식어에 비해 내용물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 조금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나혜석은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원 지방의 지주였다.

 부유할 뿐만 아니라 집안이 자식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투자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5남매 중 아들 3명을 일본과 중국으로 유학을 보냈고, 게다가 당시 여아교육에 무관심하던 시대였음에도 딸을 해외유학 보내주었다.

 그 딸이 나혜석이었다.

공부도 우등, 그림 그리기도 우수였던 나혜석은 1913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이 학력이 나혜석에게 우리나라 최초 서양화 전공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주었다.

이구열 선생의 저서(『그녀, 불꽃같은 생애를 그리다-나혜석』)에는 나혜석의 학교 성적까지 자세히 알려준다.

 음, 어쨌든 나혜석은 서양화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에서 미술만 배웠던 게 아니었다.

그녀가 이후에 여성인권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주장할 수 있었던 토대 또한 일본에서 배웠다.

「세이토靑踏」라고 하는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를 통해 나혜석은 친구 김일엽과 함께 여성해방에 눈뜨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잡지의 사상은 '예술을 통해 여성의 천재성을 구현하는 것', '예술을 통해 여성해방, 사람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후 미술과 문학에서 활약한 그녀의 행적을 보면 잡지의 사상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김우영', 1928년 무렵 (사진출처 :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홈페이지)나혜석은 도쿄 유학 중 사귄 첫사랑 게이오대 유학생 최승구와 약혼했으나 그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녀의 다재다능함은 남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였다.

애인이 죽은 후 나혜석은 춘원 이광수와 썸을 타기도 했다.

이광수는 이 팔방미인 아가씨를 매우 좋아해 애인인 허영숙과 삼각관계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혜석은 이광수와 사귀면서 그로부터 문장을 배우는 등 문학도로서 감각을 키웠다고 한다.

나혜석의 매력에 빠진 남자가 또 있었으니 바로 엘리트 변호사 김우영이었다.

김우영은 나혜석이 3.1운동으로 붙잡혀 투옥되었을 때 그녀를 변호해 구출시켜주는 등 헌신적인 구애로 결혼을 승낙받았다.

  나혜석이 김우영의 결혼을 받아들이면서 3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째,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둘째, 그림 그리는 걸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김우영은 이전에 한번 결혼했으나 상처하였다)과 별거하게 해주시오."결혼하면서 여자가 조건을 거는 모습이 1920년대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조건 내용의 당당함도 대단하다.

나혜석이 요구한 조건은 지금 부부관계에서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인데..남편 김우영은 나혜석을 많이 사랑했고 나혜석이 요구한 조건들을 꽤 잘 들어주었다고 한다.

 위의 그림을 보면 하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림과 달리 김우영은 꽤 잘생겼다.

사진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1921년, 나혜석에게 또다른 '최초'의 타이틀이 붙었다.

나혜석은 식민지 조선 경성에서 최초의 유화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기록된다.

 이 시기의 식민지 조선은 아직 서양미술이 생소하고 그것을 전공한 사람도 적었는데 처음 개인전을 가진 작가가 여성이었다는 게 신기하다.

전시는 큰 인기를 끌었고 성황리에 마쳤다.

개인전을 시작으로 나혜석은 조선미전에 매년 작품을 출품해 입선 및 특선을 거듭하였다.

실로 엄친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남겨진 나혜석 작품은 30여 점도 안된다.

그런데 그 남겨진 작품도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어 나혜석의 그림인지 의심받고 있는 실정이고 또 일부는 흑백 도판사진으로만 존재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나혜석 뿐만 아니라 한국근대 작가들의 공통된 문제이다.

정작 중요한 작품의 원본은 없고 작가들의 개인사와 시대상에 관한 텍스트만이 이를 대체하고 있다.

이 문제는 마지막에 다시 한번 얘기하겠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1923년 남편 김우영이 일제의 중국 만주 부영사로 전근을 발령받자 나혜석도 남편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의 광활함으로 넓어진 그녀의 눈에 조선은 매우 좁고 답답한 곳으로만 비쳐졌다.

  어렸을 적 유학의 영향인지 타고나길 큰 세계관을 갖고 있어서인지, 여러모로 조선은 그녀에게 작고 답답한 공간이었던 것 같다.

 남편의 만주 전근이 끝나고 드디어 나혜석은 그녀가 꿈에 바라던 세계일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27년부터 2년 간 나혜석과 김우영 부부는 하얼빈,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였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아카데미 랑송Ranson에 수학하여 유럽 미술의 야수파와 입체파 경향을 접하기도 하였다.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 쓴 그녀의 일기 한 단락이 인상적이었다.

 '네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었다.

즉 1.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사나? 2. 남녀간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3.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4. 그림의 요점이 무엇인가? 이것은 실로 알기 어려운 문제다.

''자화상', 1928년 무렵 (사진 출처 :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홈페이지)얼마 안되는 작품과 기록을 추적해 나혜석의 미술세계를 시대별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일본 유학 직후인 1920

23년시기는 '농촌실경 시기'라고 한다.

이때 나혜석의 작품은 농촌 무대를 배경으로 일하는 사람, 특히 일하는 여성을 주제로 한 삽화와 판화를 많이 그렸다.

  두번째 '건축물 풍경시기'는 남편의 만주 전근 시기로, 만주의 고건축과 서양식 건축을 주제로 많이 그린 때였다.

건축물에 큰 감동을 받아서였을까, 이 시기 그녀의 그림에는 인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다음 '세계일주 시기 이후'는 남편과 동반한 유럽, 미국 여행시기와 귀국 후를 말한다.

여행에서 접한 서양미술과 교육의 영향으로 나혜석은 인물, 건축, 정물, 풍경 등 다양한 소재를 모색한다.

위의 자화상은 그녀가 파리에 있었을 때 그려진 것으로 전해진다.

자화상이라고 하는데 서양여인같은 생김새다.

전시장 전경 (사진 출처 :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홈페이지)전시장엔 얼마 안되는 나혜석의 작품이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그럴듯해 보이는 게 없었다, 내 눈에는..초창기에 그려졌다고 전해지는 삽화는 구한말, 일제시기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삽화와 다를 게 없었고, 유화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나혜석 그녀에 한해서만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파리에 있을 때 나혜석은 18세 연상인 최린(천도교 지도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과 불륜을 벌인다.

남편에게 들통 나 경고를 받았음에도 나혜석은 최린과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남편 김우영과 이혼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찍나요?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김우영은 그녀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거의 빈털터리로 쫓겨나다시피 이혼당한 나혜석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혼 3년 후, 나혜석은 잡지에 「이혼고백장」을 발표해 자신의 부부생활과 최린과의 관계를 공개하였다.

너무도 사적인 자신의 일을 세상에 폭로한 것인데 이 '고백'에 어떤 울분이 담겨있는 것 같다.

 남편은 자신이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고 빈털터리로 쫓아내고 애인 최린은 불똥 안 맞으려는 듯이 자신을 피했다.

가족들로부터 버림 받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그녀는 전 남편과 애인, 그리고 자신을 버린 두 생물의 性 '남자'와 그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식기 중심'의 조선 사회가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나혜석은 한순간에 몰락한 자신의 삶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불평등한 성의식을 갖고 있는 조선 사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혼고백장」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상대자의 불품행을 논할진대 자기 자신이 청백할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남자라는 명목하에 이성과 놀고 자도 관계없다는 당당한 권리를 가졌으니 사회제도도 제도려니와 몰상식한 태도에는 웃음이 나옵니다.

"나혜석이 이런 말을 한지 지금 100여 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도 이 말이 곳곳에서 쓰이고 있다.

이 「이혼고백장」은 그러나 그녀에게 사회의 싸늘한 시선을 더 짐지우는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

1931년 이혼 이후 그녀의 삶은 점차 퇴조기에 들어가게 된다.

미술가로서 재기를 위해 나혜석은 1935년 전시를 개최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혜석의 '작품'을 볼 눈은 일찌감치 거두고 '이혼고백장의 나혜석'으로 보았다.

전시에 대한 혹평과 함께 재기는 실패했고 이 35년 전시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미술 활동은 막을 내린다.

 전시장 전경 (사진 출처 :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홈페이지)전시장 한 코너는 나혜석을 주제로 한 책들을 비치한 미디어테이블이 마련되어있었다.

매우 알찬 코너였다.

이 터치스크린은 나혜석 연보와 그녀의 관련 작품들을 깔끔하게 정리해놔서 보기 편했다.

나혜석 연보.나혜석의 글과 관련 영상들을 볼 수 있다.

나혜석은 소설, 시, 수필, 만평, 평론 등 다양한 글을 썼다.

그녀에게 글은 자신의 사고방식과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체였다.

나혜석은 글로 조선 사회의 여성인권을 말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계몽시키려고 했다.

나혜석이 쓴 여러 글 중 몇몇 주장은 개인적으로 많이 공감되었다.

예를 들어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말하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남성의 정조개념처럼 여성의 정조 해방을 주장한 말, "현모양처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말. 또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여자 공창뿐 아니라 남자 공창도 두어서 성욕을 해결'하자는 남녀공창제를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건 나도 평소에 생각했던거라서 찬성이다.

독신이라면 괜찮지 않을까.나혜석은 더 나가서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각자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을 만나 사교를 하는 것이 쉽사리 권태에 빠지지 않는 길'이라는 주장까지 했다.

아깐 영화 찍더니 이젠 영화감독까지?(ㅎㅅㅅ..)출산의 고통을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는 과격한 표현으로 썼고, '모성애란 모든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교육되는 관념이며 자식을 기르는 동안에 가지게 되는 것' 이라고 주장했다.

'모성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동안 알게모르게 교육받아온 바대로 여성의 타고난 본능, 아름다운 본능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머리가 띵하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엄청 긴 시간이고 그 안에 많은 변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의식면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를 100년 전 사람들과 같은 시대 안에 구분지어놔도 할말 없는 지경이다.

 그녀의 주장은 시대를 너무도 앞서나간 것이었다.

지금 카페에 지인들을 불러 이 얘기를 해도 반은 공감 반은 반감, 아니 반감이 더 많을 주장들인데.. 나혜석 그녀는 한편으론 정말 용감했고, 또 다른 한편으론 주변의 냉대를 예상했음에도 이를 무릅쓰고 소리질러야 했던 그녀의 울분이 느껴져 안타깝다.

사회와 그녀 개인의 철학이 일으킨 마찰로 불행을 겪게 되었고 이 불행에 대한 억울함과 답답함이 '생식기 중심'의 조선 사회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다.

간혹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점점 더 심해진 울분과 답답함에 의해 잠깐 자기 생각의 철로를 벗어난 심리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혜석의 소설 중 대표작인 『경희』를 배우 윤석화가 낭독한 오디오북을 들을 수 있었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받는 소설이라고 한다.

아아, 그나저나 오디오북 녹음 작업이란 일도 있구나

요새 단편소설을 낭독 연습하고 있다.

그냥.. 심심해서 하고 있다.

요즘 말할 일이 별로 없어서(?告�? 뭐가 문제일까 나..) 입이 심심해 혼자라도 떠들어볼까 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큰소리로 낭독하면 글이 더 잘 이해되고 책읽는 게 훨씬 재밌다.

여러 등장인물들 대사가 나오면 목소리 바꿔서 1인 연극하듯이 생쇼를 해보기도 한다.

 나름 목소리 다르게 냈다고 생각했는데 녹음한 걸 들으면 똑같.. -_- 나혜석은 35년 전시를 마지막으로 그림활동을 끝냈고, 38년에는 <해인사의 풍광>을 마지막으로 문단에서도 종지부를 찍었다.

 1938년 이후 그녀는 종적을 감추었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그리고 1948년 한 병원에서 무연고행려병자로 숨을 거두었다.

 35년에 기고한 한 글에는 그녀의 유언과 같은 말이 있다.

 "4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자신을 변호하는 항변이자 자신의 짧고 불꽃같던 인생을 요약해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다.

무연고자로 죽어 시신을 거둔 사람도 없고 무덤 또한 없다.

만약 무덤이라도 있다면 위의 글을 그녀의 묘비명으로 써주고 싶다.

 그외 나혜석의 일대기는 위키백과에 꽤 자세히 나와있다.

그녀의 말년을 서술한 일화들은 너무 슬프다.

 여성인권운동가로서 나혜석에 대해서 관심없다고 초반에 말했었지만, 그녀의 인생 자체가 여성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탐구하고 자신의 철학을 무기로 사회와 싸웠던 것이기에 '나혜석'과 '여성인권운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행적을 보니 한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고 그를 철저히 버리는 사람들과 사회가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다시 돌아가 '미술가로서 나혜석'과 한국근대미술에 대해서 살짝 딴지를 걸어보려고 하는데..  한국근대시대 미술 작품들을 보면 그 얕고 엉성한 태가 자주 눈에 띈다.

대세여서 배우고 따라하지만 얻기 힘든 교육의 기회와 교육기관의 부재로 인한 기량 미달, 유실된 수많은 원본들 등등. 그림들을 보면서 이 작품들을 예술적 가치로 따지기 보다는 미술사에서 어떤 지위였다, 어떤 사건이었다,

에서 최초였다 등의 텍스트로 평가할 때가 많다.

미술을 이렇게 작품이 아니라 작가 개개인의 일대기로 서술하고 평가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그러면 예술적 가치로 평가하자고 하면 거기에서 살아남을 그림들이 손에 꼽힐 것이라는 안쓰러운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 위험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혜석 그림에서만 느낀 게 아니라 그 전에 본 그림들, 포스팅했던 전시 속 작가와 작품들에서도 간혹 느꼈다.

나는 이 작가 그림을 예술적 가치로 보고 감상하는건지 아니면 작가의 이야기, 슬픈 시대에 살았다는 동정의 마음으로 보는건지 스스로 애매할 때가 많다.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 실력보다는 슬픈 사연을 듣고 눈물 흘리면서 합격 버튼 눌러주는 것 같은? 열심히 작가의 이력과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알아보지만 한편으론 이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인지 예술적 가치가 있는 그림인지 자신있게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애초에 남아있는 작품이 턱없이 부족하고 마땅히 평가해야 할 작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작가 개개인들 위주로 서술하다보니 어떤 책이든 그냥 역사책같은 장르를 취하고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제목은 미술 어쩌고저쩌고인데 내용은 한국근대사 역사책. 작품이 적으니 그 작가의 미술세계를 온존히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나혜석을 예로만 봐도 그녀의 삶과 문학활동은 여성의 지위가 가장 핵심적인 주제였지만 그림에서는 그런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림에서만은 그녀가 여성인권에 대해 일부러 별개의 영역으로 벽을 쳐서 그런건지 아니면 작품들이 유실되서 그런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연쇄작용으로, 한 작가의 미술세계를 알지 못하는데 다른 작가의 그것과 서로 비교 연관해 그 시대 미술상을 거시적으로 보는 건 더욱 불가능해진다.

작품의 부재, 이를 대체하기 위한 텍스트 중심의 작가 개인 역사 서술로 인해 한국근대미술사는 구멍이 숭숭 난 스펀지 같이 빈약하고 엉성할 수밖에 없다.

시대를 탓해야 할지, 실력을 탓해야 할지, 나의 무지를 탓해야 할지.  더 공부해봐야겠다.

 참고자료 : 강준만, 『한국근대사산책 - 9권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2008, 인물과 사상사이구열, 『그녀, 불꽃같은 생애를 그리다 - 나혜석』, 2011, 서해문집박영택 공저, 『나혜석, 한국근대사를 거닐다』, 2011, 푸른사상                    (박영택, 「한국근대미술사에서 나혜석의 위치」 / 윤범모, 「나혜석의 조선미전 출품작 고찰」 / 서정자, 「나혜석의 문학과 미술 이어읽기」)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이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였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 이혼고백장 中」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04.28.

1948.12.10.)은 살아있을 당시에는 정조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혼의 과정과 경험을 담은 ‘이혼고백장’을 발표하여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후에는 남녀평등론을 주장하고, 여성에게만 정조와 순결을 강요하는 세태를 비판한,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이라는 재평가를 받았습니다.

한국여성 최초 서양미술 전공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서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나기정(羅基貞)은 대한제국 때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군수를 지냈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용인군수를 역임했습니다.

상류층 집안에서 부유하게 자란 나혜석은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예술가적 자질을 드러냈습니다.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최우등 성적으로 수석 졸업한 후 둘째 오빠인 나경석(羅景錫)의 권유로 동경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나혜석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한국 여성 최초로 서양미술을 전공한 여성이 되었습니다.

▲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사진출처: 위키백과)활발한 작품 활동과 함께 여류화가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화가로서 역사를 써나가던 그녀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시인이었던 최승구(崔承九)로 천재라고 불렸던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최승구에게 조혼한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인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최승구의 집안에서 나혜석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폐결핵을 앓고 있던 최승구가 투병을 하다 결국 세상을 떠나고만 것입니다.

나혜석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작품 활동에 몰두했습니다.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1918)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현실에 대항하기보다는 타협하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 4월에는 일본유학생 출신으로 변호사인 김우영(金宇英)과 결혼하였습니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년 연상으로 한 번 결혼했다가 사별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6년 동안이나 나혜석에게 구애를 했으며, 그녀가 3.1운동으로 투옥되자 한 걸음에 달려와 변호를 맡기도 했습니다.

 나혜석은 김우영의 사랑을 받아주면서 결혼조건으로 4가지를 요구했습니다.

평생 자신만을 사랑해줄 것,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그리고 첫사랑인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등이었습니다.

김우영은 애처가, 졸장부라는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나혜석의 요구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신혼여행 길에 최승구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워줄 만큼 김우영은 나혜석의 예술적 재능과 자유분방함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부장제가 가지는 모순 비판 나혜석의 삶은 1927년 김우영과 함께 세계여행길에 나서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혜석 부부는 16개월 동안 파리를 기점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미국 등지를 둘러보는 여행을 하였습니다.

나혜석은 유럽문화를 접하며 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화가로서 위치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파리에 체류하며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법을 배웠습니다.

이 경험은 그녀가 화가로서 한 단계 발전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여행은 나혜석에게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파리에서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을 만나 불륜관계로 발전한 것입니다.

김우영과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던 최린과의 만남은 파리 한인사회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나혜석과 최린은 파리에서 식당, 극장, 뱃놀이, 시외 구경을 다녔습니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내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친지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한 후에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아 지내면 부도덕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자기 남편과 더 잘 지낼 수 있게 하는 활력을 얻는다”고 자신의 연애관을 당당하게 피력했습니다.

▲ 나혜석의 작품 자화상(사진출처: 위키백과)그러나 당시 나혜석의 이런 행동과 생각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이혼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발하겠다고 압박하여 결혼생활을 청산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자녀들을 볼 수 있는 권한마저 빼앗았습니다.

나혜석은 결혼생활 실패 후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몰두했습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도 입선하였습니다.

또한 여성적 글쓰기를 함께해 나갔습니다.

식민지 조선사회의 가부장제가 가진 모순을 비판한 글 ‘이혼고백장’(1934)과 ‘신생활에 들면서’(1935)를 발표하면서 세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나혜석은 이후에도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 “자식은 어머니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 같은 존재다”라며 정조관과 모성애 강요를 비판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었습니다.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비난받고 가족에게도 외면 받으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병들어갔습니다.

자녀들을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1948년 12월 10일, 서울 원효로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실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세간에 잊혔던 나혜석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재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에 반기를 든 앞서간 여성이었습니다.

진보적인 여성관을 가진 나혜석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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