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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신라 금관스키타이와 시베리아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말 신라 김씨는 내물왕 비석의 내용처럼 흉노의 후예인가.황남대총신라의 가장 큰 무덤으로왕과 왕비의 부부능이다.

재밌는 것은 왕비 무덤이 더 높다.

신라는 고분문화로고분에서 많은 문화재가 출토되었다.

대릉원은 돌담이 둘러쳐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야 전체적인 시야가 확보되는 능. 신라시대 왕.왕비.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이다.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경주의 고분들은  당시의 다른 지역들에 견주어도 특이한 점이라고. 대릉원에 있는 능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천마총과 이곳에 대릉원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사연이 있는 미추왕릉 그리고 경주에 있는 고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능 두개가 붙어 있는 황남대총 이다.

남아있는 23기의 능말고도 무덤 자리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봉분이 있는 무덤들만 남겨두고 모두 지워버렸다고 한다.

                                                           연 락 처  :  054-772-6317이용시간 :  09 : 00

22 : 00 입 장 료  :   개인  -  성인   2,000원   /   군경 1,200원   /  청소년 1,200원   /    어린이  600원                  단체  -  성인   1,600원   /   군경 1,000원   /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500원주차요금 :   소형  2,000원    /  대형  4,000원  대릉원 안은 큰 나무들로 멋지게 조성되어 있고 산책하기 좋게바닥이 잘 다져져 있다.

사진에는 없지만 배롱나무(백일홍)도 여러 그루 심어져 있어서방문 했을 시 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예쁜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석굴암 방문 뒤 식사를 마치고 정오 12시 안팍인 시간이라 이미 기온은 더워진 상태.예쁜 꽃을 눈에 담는 것도 잠깐, 너무 더운 날씨로 인해 산책이고 뭐고 대릉원 방문 목적인 천마총을 향해 직진 직진. 천마총으로 가는 길에 있는 능 천마총 안에 있는 저수지 천마총 입구중학교 수행여행 왔을 때 천마총 앞에서 반 친구들과 단체 사진 찍었던 생각이 새록새록

^^돌을 쌓고 그 돌 무더기 안에 왕의 목관을 넣었던 곳출토된 금장류출토된 금장 제품을 볼 때마다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뛰어난 금 세공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을까 매번 넋을 잃고 뚫어져라 바라보게 된다.

보고 있으면 이런 걸 몸에 두른 그때의 왕.귀족들은 무겁지 않았을까 하는 재미있는 궁금증도 돋아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진품은 경주박물관에서 보관중이라고 한다

기온이 좋았다면 천마총 뒤에 대릉원 안을 천천히 산책했을텐데 너무 더워서 산책은 포기하고 다음 장소인보문단지로 출발

16년 여름은 모두에게 기억에 남을 폭염을 남겼으니.... 아 왜 더운 육지를 이리 헤메고 다니는 것인가... 구경이고 뭐고 힘들었던... 큽 천마총은 1973년 발굴되었고 신라 특유의 돌을 쌓고 그 안에 나무로 된 관을 넣은 적석목관분이라고 한다.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고 적석층 안에는 나무로 된 방이 있어 그 중앙에 목관을 놓고 시신을 안치했다.

출토된 유물이 만점이 넘으며 그 중 천마도는 우리나라 고분에서 처음 출토된 귀중한 그림이라고. 1970년대 공원화하기 전에는 멀리서도 황남대총의 우람하고 아름다운 능선이 한눈에 들어 왔으나, 담장을둘러치고 무덤 앞까지 주차시설을 만들어 무덤 안 길을 딱는 바람에 옛 정취는 사라져서 아쉬워하는 평도 있던데인공적 조성 전의 옛 모습은 어땠을지... 머릿속으로만 그려 보며, 그 정취는 사라져 아쉽지만 조성된 돌담이 주로 도시화된 딱딱함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또 다른 감흥을 주니 세월의 변화에 따라 나름의 긍정적의미가 생겼다고 본다.

봄, 가을 산책하기 좋은 계절에 대릉원을 둘러친 돌담을 자전거나 바이크를 대여해 타면서 느끼는 정취는더없이 좋아서 경주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는 분들께 꼭 추천해 봅니다.

몇 년 전 이서진과 김희선씨가 주연으로 나왔던 경주를 배경으로 했던 KBS의 드라마에서도 대릉원의 돌담길이나왔을 정도로 멋스럽고 분위기 있는 정취를 선사해 줍니다.

숙박을 경주터미널 부근으로 잡았다면 그 근처에서 자전거나 바이크를 대여해    대릉원 - 첨성대 - 안압지 - 경주박물관을관람하고 다시 숙박시설로 돌아가는 코스로 잡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랍니다

?높이 27.5㎝, 아래로 늘어뜨린 드리개(수식 : 늘어뜨린 장식)의 길이는 13cm ? 30.3㎝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정식 명칭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으로 되어있다.

(이 금관과 같이 발견된 허리띠는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라는 이름으로 국보 제192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이 금관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다.

) 같이 발견된 허리띠와 함께 이 금관은 신라 황금 문화와 최고의 금속 공예 기술을 보여준다.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올린 장식을 3곳에 두었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빛을 내는 곱은 옥을 山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또한 원형의 금장식을 균형있게 배치시켜 금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 세움 장식들 중에서 나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으로 왕을 상징한다.

사슴뿔의 형태는 시베리아 지역 샤먼(shaman)이 사용하는 모자에 등장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이 금관은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고, 신라 왕들의 힘과 권위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 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장식 끝부분 안쪽에는 머리띠 부분과 같은 푸른색 곱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발견 당시 금관과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것보다도 곱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이 돋보이고 있다.

    ????아래 사진은 같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인데,문화재청 홈페이지 > 문화유산 정보 > 우리지역 문화재 > 서울시 용산구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아래 사진은 금관 드리개 장식(수식)인데,문화재청 홈페이지 > 문화유산 정보 > 우리지역 문화재 > 서울시 용산구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옮겨온 것이다.

????? ?※ 황남대총이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은 '경주 대릉원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5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경주시내의 고분군들은 사적 제38호인 경주 노동리 고분군, 사적 제39호인 경주 노서리 고분군, 사적 제40호인 경주 황남리 고분군.사적 제41호인 경주 황오리 고분군, 사적 제42호인 경주 인왕리 고분군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경주 평야 한복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을 통합하여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이 중 사적 제40호였던 경주 황남리 고분군 안에 크고 작은 무덤 20여기가 있는데, 이 무덤들이 1973년 '대릉원'이라는 이름의 고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20여기의 황남리 고분군(대릉원) 안에 천마총, 황남대총, 검총 등과 미추왕릉이라고 전하는 무덤들이 포함되어 있다.

경주 여행을 가면, 대릉원이 필수 코스 중 하나인데, 이 대릉원 공원 안에 있는 무덤들 중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무덤이 천마총이고,황남대총과 같은 나머지 무덤들은 그 외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황남리 고분군 안에 있는 무덤들의 내부구조는 대부분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보인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나무로 덧널(곽)을 설치하고 자갈과 냇돌로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 중 천마총은 금관, 금제 허리띠(금제과대)등을 비롯하여 각종 호화로운 유물이 나왔으며, 색이 칠해진 천마도가 나와 신라시대 그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의 내부 구조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무덤이 대릉원 안에 있는 천마총이다.

) 이 고분군 안에 무덤들 중 높이 23m, 남북 길이 120m, 동서 직경 80m로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이 바로 황남대총이다.

이 황남대총은 표주박 모양으로 연결된 두 개의 무덤으로, 각각 남자와 여자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이 중 북쪽에 있는 무덤이 북분은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북분에서 발견된 대표적 유물이 바로 지금 포스팅하고 있는 국보 제191호인 '황남대총 북분 금관'과 다음에 포스팅할 국보 제192호인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이다 ????길찾기 (네이버 지도)? 거의 원형이 유지된 무덤의 규모는 동서 80m, 남북 120m, 높이 22.2m(南墳) ·23m(北墳)로 1973년도부터 1975년도까지 문화재관리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의 발굴조사에 의해 남분이 북분보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남분은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T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으뜸덧널은 당시의 지표(地表)를 45cm 깊이로 파고 그 위에 맷돌과 자갈을 깔아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덧널[木槨]은 내외 이중으로 설치되었는데, 내외덧널 사이는 잔자갈로 채워져 있었다.

다시 안쪽 덧널 안에는 널과 껴묻거리[副葬品] 칸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널 안의 피장자(被葬者)는 금동핀 ·목걸이 ·허리띠 ·고리자루칼[環頭大刀]을 착용하고 있었고, 껴묻거리 칸에는 은관 ·금제관장식 등의 무기류가 들어 있었다.

피장자는 머리를 동쪽으로 둔 유골(遺骨) 일부가 남아 있어 60살 전후의 남자로 밝혀졌는데, 그 외에 20대의 여자 유골 일부가 안쪽덧널 안에서 더 수습되어 한 무덤덧널 안에 순장(殉葬)된 여자가 있었다고 판단되었다.

으뜸덧널과 3m 두께의 돌벽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딸린덧널에서는 둥근밑항아리와 굽다리접시를 비롯한 토기류, 덩이쇠[鐵鋌]를 비롯한 철기, 안장 등의 말갖춤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북분은 남분의 봉토를 일부 제거하고 연이어 축조되었는데 남분과는 달리 딸린덧널이 없는 외널무덤[單槨墳]이다.

남분과 마찬가지로 덧널 안에는 널이 안치되어 있고 널 위 동쪽에 따로 껴묻거리 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널과 껴묻거리 칸에는 금관 ·목걸이 ·허리띠 등의 장신구, 유리와 토제 등의 용기, 고리칼 등의 무기가 들어 있었다.

또한 덧널 위에서도 귀걸이 ·옥제품 ·말갖춤 ·토기 등 신라고분에서는 가장 많은 금제(金製)장신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북분은 남분에 비해 장신구가 많은 반면 무기류가 적었으며 또한 ‘夫人帶(부인대)’라는 명문이 있는 허리띠끝꾸미개가 출토되어 부부묘(夫婦墓)인 북분과 남분 중 북분이 부인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황남대총은 신라고분을 여리널무덤[合葬墓]과 홑무덤[單葬墓]으로 구분할 경우 어울무덤에 속하며, 형태상 표형분에 속하는 무덤으로 돌무지덧널무덤의 형식상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기원 4

5세기내 돌무지덧널무덤의 등장과 그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두산백과)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 고분공원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황남동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40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만 2,908㎡이다.

이 고분군 내에 있는 황남대총의 일련번호는 ‘황남동 98호분’이다.

황남대총은 1973년 7월과 1975년 10월에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이 발굴조사하고, 1980년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붙여진 별칭으로 황남동에 소재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의미다.

현재 외형이 복원되어 있는 황남대총은 2개의 원분(圓墳)이 남북으로 연접된 표형분(瓢形墳)으로 동서 지름 80m, 남북 지름 120m, 남분 높이 23m, 북분 높이 22m에 이르는 신라 최대의 봉토분(封土墳)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는 남자, 북분의 피장자는 여자이며 신라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봉토와 봉토의 기저부(基底部) 주위에 쌓은 바깥 둘레돌〔護石〕의 남·북분 연접상태로 볼 때, 먼저 남분이 축조되었고 뒤에 북분이 남분에 잇닿아 축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북분 각각 봉토의 중심부에 덧널과 돌무지〔積石〕가 설치된 고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두 고분 모두 돌무지 부분 내부에서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횡가목(橫架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목조가구(木組架構)를 먼저 설치하고 그에 맞춰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돌무지 부분 안에 설치된 이러한 목조가구는 고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을 계보상으로 북아시아 덧널무덤과 더욱 가깝게 접근시키는 중요한 근거로서 주목받고 있다.

남분의 돌무지 부분 안에는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동서로 배치되어 T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장축방향은 으뜸덧널이 동서로, 딸린덧널은 남북으로 두었다.

으뜸덧널은 원지표를 약 45㎝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 위에 세운 내외 2중의 덧널으로 되어 있었다.

바깥덧널〔外槨〕은 동서 길이 6.5m, 남북 너비 4.1m, 높이 약 3.5m이고, 안덧널〔內槨〕은 동서 길이 4.7m, 남북 너비 2.3m, 높이 약 1.8m이다.

안·바깥덧널 사이에는 잔자갈이 채워져 있었다.

안덧널의 가운데에는 내외 이중의 널〔木棺〕이 동서로 놓여 있었다.

바깥널〔外棺〕은 동서 길이 3.6m, 남북 너비 1m, 높이 약 0.8m이다.

안에 칸막이를 세워 동쪽은 껴묻거리 수장부〔副葬品收藏部〕로 되어 있었고, 서쪽에는 안널〔內棺〕이 안치되어 있었다.

안널 안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로 판단되는 피장자의 유골 일부가 출토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피장자가 착장했던 금동관·금제관드리개〔金製冠垂飾〕·금제목걸이·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가슴장식, 금제허리띠〔?帶〕와 띠드리개〔腰佩〕등의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金銅裝環頭大刀〕1개가 출토되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에는 윗부분에 금제관식·금동관·은관(銀冠)·은모(銀帽)·금동신·은제허리띠와 띠드리개·금은반지·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10여 개의 금은장고리자루큰칼, 은제정강이가리개〔銀製脛甲〕가 놓여 있었다.

그 밑에는 각종 금속용기, 칠기(漆器), 봉황머리모양병〔鳳首形甁〕등의 유리용기 등이 담겨 있었다.

바닥부분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놓여 있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윗부분의 바깥널 뚜껑 위에도 금동제 정강이가리개, 비단벌레날개로 장식된 금동허리띠 등이 놓여 있었다.

바깥널과 안덧널 사이의 잔자갈층 위에서도 각종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

으뜸덧널 내부에서는 순장(殉葬)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었다.

바깥덧널의 뚜껑부분에도 금제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토기, 철제무기, 마구류가 배치되어 있었고, 새무늬〔鳥文〕가 새겨진 청동제거울 1점도 출토되었다.

딸린덧널은 으뜸덧널과 3m 두께의 냇돌벽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에 설치되었으며, 규모는 남북 길이 5.2m, 동서 너비 3.8m, 높이 약 1.3m이다.

흙바닥에는 각종 껴묻거리가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다.

딸린덧널 안에서는 7구분의 안장틀〔鞍橋〕과 거기에 부속된 각종 마구류, 300여 점의 철제무기와 이기(利器), 1,500여 점의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 안장틀을 비롯한 1세트의 마구는 모두 용(龍)무늬가 투조된 금동판 밑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한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쇠투겁창〔鐵矛〕는 형식이 10여 종이었다.

쇠스랑·가래끝 등의 농기구도 30여 점 포함되어 있었다.

북분은 남분의 북쪽 끝 봉토 일부를 절개하고 축조한 돌무지 부분 가운데에 장축을 동서로 둔 덧널이 하나만 설치되어 있었다.

동서 길이 6.8m, 남북 너비 4.6m, 높이 약 4m 규모의 외덧널〔單槨〕로 되어 있는 덧널의 바닥은 지반을 약 50㎝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되었다.

덧널 안에는 동쪽을 제외하고 잔자갈로 쌓은 너비 80㎝, 높이 55㎝의 ‘ㄷ’자형 석단(石壇)이 돌려지고 그 안에 널이 놓여 있었다.

널은 남분과 같은 구조의 이중 널으로 길이 3.3m, 너비 80㎝, 높이 약 80㎝였다.

바깥널의 서쪽 부분에 안치된 안널 안에서는 동쪽에서부터 금관과 3쌍의 금제관드리개, 금구슬과 유리구슬로 된 목걸이, 금제허리띠와 띠드리개, 11개의 금팔찌, 12개의 금반지 등 피장자가 착장했던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안널에서는 장신구만 출토되었으며, 허리띠의 좌우 양편에 5쌍의 귀걸이형 장신구가 띠드리개와 함께 수장되어 있어 이채로웠다.

바깥널의 동쪽 부분인 껴묻거리 수장부에서는 윗단에서 각종 장신구, 그 아래에서 금은장고리자루큰칼, 타출무늬은잔〔打出文銀杯〕등의 금속용기, 4개의 유리잔, 중국 육조시대의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 등이, 바닥부분에서 쇠솥과 각종 토기, 그림이 그려진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되었다.

타출문은잔덧널 뚜껑부분에도 각종 장신구, 토기,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마구류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은 남분에 비해 장신구가 월등히 많은 반면, 무기와 마구가 적었다.

또한 피장자가 큰칼을 착장하지 않은 대신 덧널 내에서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피장자가 여자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에서 ‘부인대(夫人帶)’의 명문(銘文)이 있는 은제허리띠의 끝장식이 출토된 것도 이 고분의 피장자가 여자였음을 뒷받침해준다.

결국, 이 표형분은 부부총(夫婦塚)임을 알 수 있다.

남·북분 모두 봉분 정상부에 마구류를 위주로 하는 일괄유물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분조성 마지막 단계에서 의도적으로 매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의 출토상태는 고분 조성 당시 덧널 내부, 덧널 상부, 봉분 정상부 등 당시의 장의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부장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을 보여 준다.

황남대총은 그 형태가 형분에 속하는 부부총으로서 어울무덤〔合葬墳〕이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신라에 있어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 상한연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발굴조사자는 무덤덧널 형식의 변천, 고식(古式) 마구(馬具)의 등장시기, 신라토기의 편년, 북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의 매납시기 등을 근거로 남분은 4세기 중엽경, 북분은 4세기 말∼5세기 초경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반하여 고구려남정설이라는 고대사 연구성과를 근거로 삼는 연구자나 중국에서의 고식 마구 출현에 대한 다른 해석을 근거로 삼는 연구자들은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중·후반, 북분을 6세기 초로 편년하기도 한다.

이밖에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사료상에 나오는 왕세계와 혼인관계 등을 비교하여 남분의 피장자를 나물마립간이나 눌지마립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릉원 현판,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이다 ?  * 이 사진은 2015년 11월 8일 찍은 것입니다.

      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황남대총

황남동 제98호무덤이라고도 불리는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경주시 황남동 고분공원[大陵園] 안에 있는 고분으로, 1973년 6월(북쪽무덤)과 1975년 10월(남쪽무덤)에 발굴조사되었다.

고분의 형식은 두 고분이 서로 붙은 표주박 모양의 돌무지덧널무덤[瓢形積石木槨墳]으로 남·북 고분의 높이는 각각 23m와 22m, 전체 길이가 120m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고분이다.

남쪽무덤[南墳]은 왕으로 추정되는 남편의 고분이고, 북쪽무덤[北墳]은 왕비로 추정되는 부인의 무덤이며, 북쪽의 부인 무덤이 나중에 만든 것이다.

남쪽무덤은 주곽(主槨)과 부곽(副槨)이 동서 T자형으로 배치되었다.

주곽의 나무널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널과 덧널 사이에서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도 일부 발견되었다.

 황남대총 북쪽무덤  덧널에서는 금동관, 금제 드리개[金製垂飾], 금목걸이, 금·은제 허리띠, 허리띠 드리개[腰佩], 금귀걸이 등의 화려한치레걸이와 금·은으로 장식된고리장식칼[環頭大刀],은제 팔뚝가리개[脛甲] 등의 무구류와 용무늬가 투조(透彫)된 금동판에 비단벌레[玉蟲]의 날개로 장식한 각종 말갖춤[馬具], 그리고 봉황머리 모양을 한 병[鳳首形甁] 등의 유리 용기와청동거울[銅鏡]이 출토되었다.

부곽에는 1,500여 점에 이르는 많은 토기와 철기 300여 점이 쌓여 있었다.

  황남대총 북쪽무덤 유물 출토 현황  북쪽무덤은 남쪽무덤과는 달리 유물 부장을 위한 별도의 부곽 없이 하나의 덧널만 설치된 형식을 취하였다.

덧널 안에 안치된 나무널에서는금관, 금관 드리개 장식, 금구슬, 목걸이,금제 허리띠와 허리띠 드리개, 금반지, 금팔찌 등의 치레걸이류들만 출토되었다.

덧널 안의 부장 공간에서는 갖가지 꾸미개와 타출무늬 은잔[打出文銀杯],유리잔,검은간토기[黑褐釉甁] 등의 각종 용기류와 쇠솥, 토기, 무늬가 새겨진가락바퀴[紡錘車], 말갖춤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북쪽무덤이 남쪽무덤에 비하여 장신구가 많은 반면 무기와 말갖춤 장식이 적고, 피장자가 긴칼을 장착하지 않은 대신 가락바퀴를 소지하였으며, 은제 허리띠의 끝장식에 '부인대(夫人帶)'라는 명문(銘文)이 있는 점으로 보아 북쪽무덤의 주인공은 여자였음을 알 수 있다.

  황남대총 북쪽무덤 유물 출토현황[네이버 지식백과] 황남대총 (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2005. 1. 10., 솔출판사)   

[이한상 교수의 영원을 꿈꾼 천년왕국 신라]

<2>1975년 황남대총 발굴

박정희 대통령 방문 전날, 기대했던 금관 대신 인골 출토?1970년대 발굴 전 황남대총 전경(위쪽 사진)과 출토된 왕의 유골을 재안장하는 모습. 유골은 당시 사회 정서를 고려해 결국 무덤 속에 다시 안장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무덤 속을 조금씩 파내려가던 고고학자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여기쯤 금관이 묻혀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이지?’ 도굴된 흔적이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1975년 6월 30일 오후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발굴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황남동 제98호분 혹은 신라쌍분이라고 불린 이 무덤은 신라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 봐도 가장 크다.

길이가 자그마치 120m, 높이가 22.24m에 달한다.

쌍분 가운데 왕비 무덤인 북분에서는 금관이 이미 출토됐고 남분은 규모나 출토 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왕릉임에 분명한데도 금관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당혹스러운 건 다음 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었던 것. 대통령 일정은 대외비였지만 발굴조사단은 이를 대략 짐작하고 보고를 준비했다.

발굴의 하이라이트가 될 금관을 공개할 계획이었는데 정작 금관이 없다니!이래저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조사는 이어졌다.

당초 금관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곳에는 금동관 조각이 흩어져 있었는데 신라 금동관 가운데 유일하게 비취곡옥과 순금제 수식을 갖춘 고급품이었다.

그런데 조심스레 주변을 파내던 조사자가 이내 탄성을 내질렀다.

치아가 촘촘하게 박힌 하악골과 함께 금, 유리, 비취를 엮어 만든 장식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남대총] 매력을 알아보자


드디어 디데이(D-day)가 밝았다.

조사단은 현장 정리에 만전을 기하고 깔끔한 복장을 갖춰 입었다.

금관이 출토되지 않아 대통령의 방문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4시경 박 전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고분공원 정문에서부터 도보로 이동해 발굴 현장을 참관하고 조사원들을 일일이 격려했다.

무덤 주인공의 유골을 보면서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금관의 빈자리를 무려 1500년 동안 썩지 않고 버텨준 왕의 뼈가 채워준 것이다.

조사단은 48편의 뼈를 수습해 서울대 의대와 경희대 치대 교수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5개의 두개골편과 치아 12개는 무덤 주인공인 60대 남성의 유골이었고 나머지는 순장된 10대 여성의 뼈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인골은 피장자의 성별이나 나이, 질병, 사망 원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먹었고 무덤 속에 함께 묻힌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정보까지 담고 있는 특급 자료다.

그런데 지금 이 뼈는 연구소나 박물관 어디에도 보관돼 있지 않다.

황남대총을 발굴하던 시절만 해도 인골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라왕의 뼈를 발굴기관이 보관할 순 없다고 해 원래의 무덤 속에 다시 묻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 덕분에 유골을 안치한 석관을 집어넣고 그 위에 봉분을 쌓아 올린 황남대총은 여전히 당당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마치 석탑에서 부처님 사리가 출토되면 사리구만 새로 만들어 사리를 다시 봉안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신라왕의 뼈를 무덤 속에 다시 묻은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지만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불가피한 판단이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 내물왕인지, 눌지왕인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해답은 밖으로 잠시 외출했다가 거대한 지하 궁전 속으로 돌아간 왕의 뼈에 담겨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대전대 ?이한상 교수)    ?뒤에 보이는 산이 남산이다.

  ? 대릉원 후문으로 황남대총과 천마총이 가깝고, 정문은 미추왕릉이 가깝다.

대릉원은 경주 시내 중심에 위치한, 약 12만평의 공간에 30여기의 왕릉과 고분이 밀접된 최대 고분군이다.

미추왕 재위 23년에 왕이 별세하니 대릉에 장사를 지냈다는 『삼국사기』기록에 의해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고분별 위치도  ?현재 지상에 남아있는 봉분의 수는 20여기이나 1973년도 고분공원 조성당시 지상에는 흔적도 없는 고분들이 지하에서 수백기 발견된 바 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대형 고분들 사이사이 지표 아래에는 봉분이 파괴된 고분 또는 원래에 봉분이 없었거나 작았던 소형 고분들이 무수히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직경 80m 높이20m에 이르는 왕릉급의 대형분에서부터 불과 수m의 소형분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다양한데 여기에는 미추왕릉, 검총(100호분), 황남대총, 천마총 등의 고분이 포함되어 있다.

 ?대릉원 후문쪽 황남대총 담장 쪽에 널려 있는 석물들.아마도 대릉원 고분공원을 조성하면서 발굴된 유적들인 것 같다.

?대릉원을 방문했을 때는 4.21(화)이었고 찰쭉이 한참 피었을 때이다.

후문에서 들어가면 왼쪽에 황남대총이, 오른쪽에 천마총이 위치하고 있다.

표주박처럼 생긴 이 고분은 황남대총으로 쌍분으로 부부릉으로 왼쪽은 북쪽방향으로 남편의 무덤, 오른쪽은 남쪽방향으로 부인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황남동 고분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표주박처럼 조형한 고분이 98호 고분이며, 황남대총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남분의 높이는 23m이고, 북분의 높이는 22m로서 남분이 조금 높다.

황남대총의 긴지름은 120m이고 짧은지름은 80m로서 고분공원 뿐만 아니라 신라의 모든 고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분이다.

1973년 7월과 1975년 10월에 문화재 관리국 조사단이 발굴조사하고 황남대총으로 명명하였으며, 현재는 외형이 복원되어 있다.

  남분과 북분중 남분이 먼저 축조되었고, 얼마후 남분을 북분에 연결시켜 축조하여 표형분의 형태가 된 것이다.

남분에서는 60세 전후로 판단되는 남자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금동관, 금허리띠, 금으로 된 장식과 칼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북분에서는 금관, 은허리띠, 금구슬, 금팔찌, 금반지,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은 남분에 비해서 장신구가 월등히 많은 반면 무기와 마구가 적고 피장자가 칼을 착용하지 않은 대신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락바퀴란 방추차라고도 하며, 실을 잦는데 쓰이는 도구이다.

게다가 은허리띠에 부인대라고 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여자의 무덤이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황남대총은 부부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남편이 먼저 죽어 남분을 쌓았으며 그 뒤 아내가 죽자 남분과 연결시켜 북분을 쌓아 전체모습이 표주박처럼 생긴 표형분이 되었다.

또한 남분주곽 내부에는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어 순장의 실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 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남편의무덤에서는 금동관이 나오고 부인의 무덤에서 금관이 나온 것을 근거로 , 부인이 남편보다 신분이 높은 혈통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금동관이나 금관은 실제 일상생활에서 항상 쓰는 것이 아니라 무덤 속에 묻기 위해 만든 경우도 있고, 부인이 남편보다 나중에 죽었기 때문에 부장물의 차이가 생길 수도 있다.

 모두 1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피장자다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고 , 다만 자비왕?소지왕?지증왕 가운데 어느 한분을 모신 능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남분을 내물마립간의 능으로 보는 의견도 있는데, 『삼국유사』의 "내물마립간의 능은 첨성대 서남쪽에 있다.

"는 기록과 모순되므로 확신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내물왕릉'으로 알려온 계림 서쪽의 고분도 진위를 확인할 증거는 없다(출처:경주역사기행/하일식 지음)그러나 일부의 주장이지만 북분에서 칼(대도)이 나오지 않고  '부인대'나 가락바퀴(방추차)로 부인고분으로 주장했지만 이것은 의식용도로 넣은 부장품이고 선후대 왕들의 기념비적 무덤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즉 왕권을 강화하고 부자세습제를 확립한 눌지왕에 주목하고 남분은 자비마립간이 쌓은 부왕 눌지마립간의 것이 되며 북분은 소지마립간이 쌓은 자비마립간의 능이 된다는 것이다.

   ?황남대총은 어떻게 발굴하게 됐나?    경주 지역 고분 발굴은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보문리 부부총(夫婦塚), 1921년 금관총(金冠塚),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 등을 발굴했다.

광복 이후엔 우리의 손으로 고분 발굴이 이뤄져 1946년 호우총(壺우塚) 발굴, 1973년 천마총(天馬塚) 발굴, 1973

75년 황남대총(皇南大塚) 발굴이 됐다.

황남대총이 발굴이 된 계기는 평소 경주의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신라 천년고도를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경주관광개발계획을 지시했다.

그래서 마련된 청사진에는 신라 최대의 무덤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고 내부를 공개해 관광자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안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고고학계나 문화재 관련 부서는 높이 22미터의 거대한 황남대총의 쌍무덤을 발굴한 능력도 경험도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발굴이 있었지만, 발굴을 진행한 일인들은 철저하게 작업인부 외에는 자신들의 손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황남대총 바로 앞에 있는 작은 155호(천마총)고분을 우선 시험삼아 발굴한다는 것이었다.

연습삼아 발굴한 고분에서 기존의 발굴된 3개의 금관보다 훨씬 발전된 금관과 금은제품 등 약 25,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천마도가 그려진 자작나무 말다래까지 나와 모든 국민의 관심이 경주에 쏠렸다.

 이러한 이유로 천마총보다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의 발굴에 거는 기대가 매우 높았다.

98호분의 조성은 남분이 먼저 조성이 되고 이후에 북분이 조성되었다.

그래서 발굴은 그 역순인 북분, 남분순으로 진행이 되었다.

   황남대총을 발굴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박정희 대통령 방문 전날, 기대했던 금관 대신 인골 출토     1970년대 발굴 전 황남대총 전경(위쪽 사진)과 출토된 왕의 유골을 재안장하는 모습. 유골은 당시 사회 정서를 고려해 결국 무덤 속에 다시 안장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무덤 속을 조금씩 파내려가던 고고학자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여기쯤 금관이 묻혀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이지?’ 도굴된 흔적이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1975년 6월 30일 오후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발굴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황남동 제98호분 혹은 신라쌍분이라고 불린 이 무덤은 신라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 봐도 가장 크다.

길이가 자그마치 120m, 높이가 22.24m에 달한다.

쌍분 가운데 왕비 무덤인 북분에서는 금관이 이미 출토됐고 남분은 규모나 출토 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왕릉임에 분명한데도 금관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당혹스러운 건 다음 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었던 것. 대통령 일정은 대외비였지만 발굴조사단은 이를 대략 짐작하고 보고를 준비했다.

[황남대총] 그것을 알려줍니다.



발굴의 하이라이트가 될 금관을 공개할 계획이었는데 정작 금관이 없다니!   이래저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조사는 이어졌다.

당초 금관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곳에는 금동관 조각이 흩어져 있었는데 신라 금동관 가운데 유일하게 비취곡옥과 순금제 수식을 갖춘 고급품이었다.

그런데 조심스레 주변을 파내던 조사자가 이내 탄성을 내질렀다.

치아가 촘촘하게 박힌 하악골과 함께 금, 유리, 비취를 엮어 만든 장식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드디어 디데이(D-day)가 밝았다.

조사단은 현장 정리에 만전을 기하고 깔끔한 복장을 갖춰 입었다.

금관이 출토되지 않아 대통령의 방문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4시경 박 전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고분공원 정문에서부터 도보로 이동해 발굴 현장을 참관하고 조사원들을 일일이 격려했다.

무덤 주인공의 유골을 보면서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금관의 빈자리를 무려 1500년 동안 썩지 않고 버텨준 왕의 뼈가 채워준 것이다.

  조사단은 48편의 뼈를 수습해 서울대 의대와 경희대 치대 교수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5개의 두개골편과 치아 12개는 무덤 주인공인 60대 남성의 유골이었고 나머지는 순장된 10대 여성의 뼈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인골은 피장자의 성별이나 나이, 질병, 사망 원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먹었고 무덤 속에 함께 묻힌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정보까지 담고 있는 특급 자료다.

  그런데 지금 이 뼈는 연구소나 박물관 어디에도 보관돼 있지 않다.

황남대총을 발굴하던 시절만 해도 인골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라왕의 뼈를 발굴기관이 보관할 순 없다고 해 원래의 무덤 속에 다시 묻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 덕분에 유골을 안치한 석관을 집어넣고 그 위에 봉분을 쌓아 올린 황남대총은 여전히 당당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마치 석탑에서 부처님 사리가 출토되면 사리구만 새로 만들어 사리를 다시 봉안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신라왕의 뼈를 무덤 속에 다시 묻은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지만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불가피한 판단이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 내물왕인지, 눌지왕인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해답은 밖으로 잠시 외출했다가 거대한 지하 궁전 속으로 돌아간 왕의 뼈에 담겨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이한상 교수(2015.3.30.동아일보기사)      ♣천마총  천마총을 뒤쪽에서 본 모습 ?경주 대릉원에 위치한 천마총은 박정희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주관광개발계획 일환으로 황남대총이라는 초대형 고분 발굴에 앞서 그 경험을 쌓을 요량으로 1973년 4월6일에 발굴 첫 삽을 떴다.

이후 약 8개월 만인 같은 해 12월4일에 조사가 완료됐다.

그 결과 금관을 비롯한 출토유물만 1만1천526점에 달한 이른바 '대박' 발굴을 기록했다.

  봉분은 지름 약 47m에 높이 12.7m이며 도굴 흔적이 전연 없었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하는 무덤 축조 연대는 5세기 후반 이래 6세기 초로 추정된다.

출토품 양상이나 무덤 규모로 보아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무덤이다.

따라서 이를 왕릉으로 본다면 이에 묻힌 주인공은 소지왕(재위 479

499) 또는 지증왕(재위 500

513)일 가능성이 있다.

 천마총은 1974년 발굴단과 학계는 그때까지 155호분으로 불리던 무덤을 발굴한 결과, 대표 출토품인 천마도를 내세워 천마총이라 이름 붙였었다.

금관도 출토되었고 중요한 유물이지만 금관총이란 이름이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에 천마도를 내세운 것이다.

    천마총 입구 천마총은 발굴 후 바굴유물을 중심으로 전시관으로 꾸며 일반인들에게 개관했다.

들어가는 통로. 전사관의 유물은 사진촬영이 금지됐으나 가이드가 이것은 진짜?라고 하는 말에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이는 천마총의 명칭이 있게 된 천마도이다.

  국보 제 207호인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 위에 흰색으로 천마를 그린 말다래(장니)를 말하며, 5

6세기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대는 기구를 말한다.

이런 천마도는 신라인의 회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데 진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자작나무는 신라지역에는 자생하지 않아 고구려로부터 수입했을 것이라 추정을 한다.

     천마총의 무덤을 발굴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천마총은 교과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90cm 금관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하다.

천마총 금관은 앞면에 4단의 出자 모양의 장식이 있으며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있다.

크기는 다른 종류의 신라 금관에 비해 조금 크고 생김새가 장엄하다.

여기서 발굴된 천마총 금관 역시 경주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외에도 천마총에서는 그릇에 담긴 채 발견된 달걀이나 마구(馬具) 등 다양한 유물 등이 많이 나왔다.

  고대인들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알을 매우 신비하게 생각하였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달걀도 부활을 바라는 마음으로 껴묻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과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도 이러한 생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천마총 무덤 꼭대기의 봉토 속에서는 마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말을 순장(殉葬)시키던 풍습이 변하여 말을 탈 때 필요한 물건들을 대신 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마구를 껴묻은 것은 천마도와 마찬가지로 무덤주인공의 영혼이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풀이된다.

  현재 천마총 안에는 모형전시관이 있어 발굴 당시의 유물이 놓여 있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출처:경주역사기행/하일식지음)    무덤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드는 순서는 시신을 넣은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궤를 안치한다.

이어 목관과 궤를 둘러싸는 목곽(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를 돌로 촘촘히 쌓고 다시 흙으로 둥글게 봉분(封墳)을 다져 마무리한다.

이런 무덤양식은 5

6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성이 됐는데 다른 고분들은 도굴이 거의 다 됐는데 이 고분들만은 도굴을 면할 수 있었다.

무덤구조자체가 도굴을 하려면 중장비를 동원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도굴꾼들은 주로 고분의 바깥 아래쪽에 한 사람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고 그리로 들어가 관 속에 있는 유물을 훔쳐 가는데 돌무지덧널무덤은 애초부터 그게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구멍을 뚫다 보면 관 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돌의 일부를 빼내야 한다.

하지만 돌을 빼내다 보면 그 위에 쌓여 있는 엄청난 양의 돌들이 밑으로 쏟아져 내리고. 도굴꾼들은 그 자리에서 돌 더미에 깔려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연관된 천마총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의 글이 있어 소개한다.

  천마총을 만드는 데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시간이 걸렸을까?   천마총의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천마총을 만드는 데 쓰인 흙과 돌?나무를 모두 합친 부피는 9,612㎡에 달한다.

이 자재들은 천마총 반경 50m 안에 놓여 있다고 가정하면 흙과 돌?점토를 옮겨 쌓는데는 6,673명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를 하루 100명의 인부가 계속 작업한다고 가정한다면 90일 가까이 걸린다는 결론이 나와 있다.

  그러나 흙과 돌을 비롯한 자재들을 더 먼 곳에서 옮겨 왔을 것이며, 무덤을 쌓을 때 흙을 고르고 다지는 데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오랫동안 일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재를 헛되이 쓰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도록 화장하라"고 유언한 문무왕의 뜻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 곳에서 흙을 옮기는 수고를 덜기 위해 무덤 주위의 흙을 파서 봉토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의 대형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주위에 있는 호수는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인데, 신라 고분의 주위에도 그러한 흔적이 발견된다.

(출처:경주역사기행/하일식 지음)    ?뒤에 보이는 산이 남산이다.

  ? 대릉원 후문으로 황남대총과 천마총이 가깝고, 정문은 미추왕릉이 가깝다.

대릉원은 경주 시내 중심에 위치한, 약 12만평의 공간에 30여기의 왕릉과 고분이 밀접된 최대 고분군이다.

미추왕 재위 23년에 왕이 별세하니 대릉에 장사를 지냈다는 『삼국사기』기록에 의해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고분별 위치도  ?현재 지상에 남아있는 봉분의 수는 20여기이나 1973년도 고분공원 조성당시 지상에는 흔적도 없는 고분들이 지하에서 수백기 발견된 바 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대형 고분들 사이사이 지표 아래에는 봉분이 파괴된 고분 또는 원래에 봉분이 없었거나 작았던 소형 고분들이 무수히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직경 80m 높이20m에 이르는 왕릉급의 대형분에서부터 불과 수m의 소형분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다양한데 여기에는 미추왕릉, 검총(100호분), 황남대총, 천마총 등의 고분이 포함되어 있다.

 ?대릉원 후문쪽 황남대총 담장 쪽에 널려 있는 석물들.아마도 대릉원 고분공원을 조성하면서 발굴된 유적들인 것 같다.

?대릉원을 방문했을 때는 4.21(화)이었고 찰쭉이 한참 피었을 때이다.

후문에서 들어가면 왼쪽에 황남대총이, 오른쪽에 천마총이 위치하고 있다.

표주박처럼 생긴 이 고분은 황남대총으로 쌍분으로 부부릉으로 왼쪽은 북쪽방향으로 남편의 무덤, 오른쪽은 남쪽방향으로 부인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황남동 고분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표주박처럼 조형한 고분이 98호 고분이며, 황남대총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남분의 높이는 23m이고, 북분의 높이는 22m로서 남분이 조금 높다.

황남대총의 긴지름은 120m이고 짧은지름은 80m로서 고분공원 뿐만 아니라 신라의 모든 고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분이다.

1973년 7월과 1975년 10월에 문화재 관리국 조사단이 발굴조사하고 황남대총으로 명명하였으며, 현재는 외형이 복원되어 있다.

  남분과 북분중 남분이 먼저 축조되었고, 얼마후 남분을 북분에 연결시켜 축조하여 표형분의 형태가 된 것이다.

남분에서는 60세 전후로 판단되는 남자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금동관, 금허리띠, 금으로 된 장식과 칼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북분에서는 금관, 은허리띠, 금구슬, 금팔찌, 금반지,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은 남분에 비해서 장신구가 월등히 많은 반면 무기와 마구가 적고 피장자가 칼을 착용하지 않은 대신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락바퀴란 방추차라고도 하며, 실을 잦는데 쓰이는 도구이다.

게다가 은허리띠에 부인대라고 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여자의 무덤이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따라서 황남대총은 부부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남편이 먼저 죽어 남분을 쌓았으며 그 뒤 아내가 죽자 남분과 연결시켜 북분을 쌓아 전체모습이 표주박처럼 생긴 표형분이 되었다.

또한 남분주곽 내부에는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어 순장의 실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 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남편의무덤에서는 금동관이 나오고 부인의 무덤에서 금관이 나온 것을 근거로 , 부인이 남편보다 신분이 높은 혈통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금동관이나 금관은 실제 일상생활에서 항상 쓰는 것이 아니라 무덤 속에 묻기 위해 만든 경우도 있고, 부인이 남편보다 나중에 죽었기 때문에 부장물의 차이가 생길 수도 있다.

 모두 1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피장자다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고 , 다만 자비왕?소지왕?지증왕 가운데 어느 한분을 모신 능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남분을 내물마립간의 능으로 보는 의견도 있는데, 『삼국유사』의 "내물마립간의 능은 첨성대 서남쪽에 있다.

"는 기록과 모순되므로 확신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내물왕릉'으로 알려온 계림 서쪽의 고분도 진위를 확인할 증거는 없다(출처:경주역사기행/하일식 지음)그러나 일부의 주장이지만 북분에서 칼(대도)이 나오지 않고  '부인대'나 가락바퀴(방추차)로 부인고분으로 주장했지만 이것은 의식용도로 넣은 부장품이고 선후대 왕들의 기념비적 무덤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즉 왕권을 강화하고 부자세습제를 확립한 눌지왕에 주목하고 남분은 자비마립간이 쌓은 부왕 눌지마립간의 것이 되며 북분은 소지마립간이 쌓은 자비마립간의 능이 된다는 것이다.

   ?황남대총은 어떻게 발굴하게 됐나?    경주 지역 고분 발굴은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보문리 부부총(夫婦塚), 1921년 금관총(金冠塚),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 등을 발굴했다.

광복 이후엔 우리의 손으로 고분 발굴이 이뤄져 1946년 호우총(壺우塚) 발굴, 1973년 천마총(天馬塚) 발굴, 1973

75년 황남대총(皇南大塚) 발굴이 됐다.

황남대총이 발굴이 된 계기는 평소 경주의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신라 천년고도를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경주관광개발계획을 지시했다.

그래서 마련된 청사진에는 신라 최대의 무덤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고 내부를 공개해 관광자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안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고고학계나 문화재 관련 부서는 높이 22미터의 거대한 황남대총의 쌍무덤을 발굴한 능력도 경험도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발굴이 있었지만, 발굴을 진행한 일인들은 철저하게 작업인부 외에는 자신들의 손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황남대총 바로 앞에 있는 작은 155호(천마총)고분을 우선 시험삼아 발굴한다는 것이었다.

연습삼아 발굴한 고분에서 기존의 발굴된 3개의 금관보다 훨씬 발전된 금관과 금은제품 등 약 25,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천마도가 그려진 자작나무 말다래까지 나와 모든 국민의 관심이 경주에 쏠렸다.

 이러한 이유로 천마총보다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의 발굴에 거는 기대가 매우 높았다.

98호분의 조성은 남분이 먼저 조성이 되고 이후에 북분이 조성되었다.

그래서 발굴은 그 역순인 북분, 남분순으로 진행이 되었다.

   황남대총을 발굴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박정희 대통령 방문 전날, 기대했던 금관 대신 인골 출토     1970년대 발굴 전 황남대총 전경(위쪽 사진)과 출토된 왕의 유골을 재안장하는 모습. 유골은 당시 사회 정서를 고려해 결국 무덤 속에 다시 안장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무덤 속을 조금씩 파내려가던 고고학자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여기쯤 금관이 묻혀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이지?’ 도굴된 흔적이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1975년 6월 30일 오후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발굴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황남동 제98호분 혹은 신라쌍분이라고 불린 이 무덤은 신라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 봐도 가장 크다.

길이가 자그마치 120m, 높이가 22.24m에 달한다.

쌍분 가운데 왕비 무덤인 북분에서는 금관이 이미 출토됐고 남분은 규모나 출토 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왕릉임에 분명한데도 금관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당혹스러운 건 다음 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었던 것. 대통령 일정은 대외비였지만 발굴조사단은 이를 대략 짐작하고 보고를 준비했다.

발굴의 하이라이트가 될 금관을 공개할 계획이었는데 정작 금관이 없다니!   이래저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조사는 이어졌다.

당초 금관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곳에는 금동관 조각이 흩어져 있었는데 신라 금동관 가운데 유일하게 비취곡옥과 순금제 수식을 갖춘 고급품이었다.

그런데 조심스레 주변을 파내던 조사자가 이내 탄성을 내질렀다.

치아가 촘촘하게 박힌 하악골과 함께 금, 유리, 비취를 엮어 만든 장식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드디어 디데이(D-day)가 밝았다.

조사단은 현장 정리에 만전을 기하고 깔끔한 복장을 갖춰 입었다.

금관이 출토되지 않아 대통령의 방문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4시경 박 전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고분공원 정문에서부터 도보로 이동해 발굴 현장을 참관하고 조사원들을 일일이 격려했다.

무덤 주인공의 유골을 보면서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금관의 빈자리를 무려 1500년 동안 썩지 않고 버텨준 왕의 뼈가 채워준 것이다.

  조사단은 48편의 뼈를 수습해 서울대 의대와 경희대 치대 교수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5개의 두개골편과 치아 12개는 무덤 주인공인 60대 남성의 유골이었고 나머지는 순장된 10대 여성의 뼈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인골은 피장자의 성별이나 나이, 질병, 사망 원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먹었고 무덤 속에 함께 묻힌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정보까지 담고 있는 특급 자료다.

  그런데 지금 이 뼈는 연구소나 박물관 어디에도 보관돼 있지 않다.

황남대총을 발굴하던 시절만 해도 인골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라왕의 뼈를 발굴기관이 보관할 순 없다고 해 원래의 무덤 속에 다시 묻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 덕분에 유골을 안치한 석관을 집어넣고 그 위에 봉분을 쌓아 올린 황남대총은 여전히 당당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마치 석탑에서 부처님 사리가 출토되면 사리구만 새로 만들어 사리를 다시 봉안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신라왕의 뼈를 무덤 속에 다시 묻은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지만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불가피한 판단이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 내물왕인지, 눌지왕인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해답은 밖으로 잠시 외출했다가 거대한 지하 궁전 속으로 돌아간 왕의 뼈에 담겨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이한상 교수(2015.3.30.동아일보기사)      ♣천마총  천마총을 뒤쪽에서 본 모습 ?경주 대릉원에 위치한 천마총은 박정희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주관광개발계획 일환으로 황남대총이라는 초대형 고분 발굴에 앞서 그 경험을 쌓을 요량으로 1973년 4월6일에 발굴 첫 삽을 떴다.

이후 약 8개월 만인 같은 해 12월4일에 조사가 완료됐다.

그 결과 금관을 비롯한 출토유물만 1만1천526점에 달한 이른바 '대박' 발굴을 기록했다.

  봉분은 지름 약 47m에 높이 12.7m이며 도굴 흔적이 전연 없었다.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하는 무덤 축조 연대는 5세기 후반 이래 6세기 초로 추정된다.

출토품 양상이나 무덤 규모로 보아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무덤이다.

따라서 이를 왕릉으로 본다면 이에 묻힌 주인공은 소지왕(재위 479

499) 또는 지증왕(재위 500

513)일 가능성이 있다.

 천마총은 1974년 발굴단과 학계는 그때까지 155호분으로 불리던 무덤을 발굴한 결과, 대표 출토품인 천마도를 내세워 천마총이라 이름 붙였었다.

금관도 출토되었고 중요한 유물이지만 금관총이란 이름이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에 천마도를 내세운 것이다.

    천마총 입구 천마총은 발굴 후 바굴유물을 중심으로 전시관으로 꾸며 일반인들에게 개관했다.

들어가는 통로. 전사관의 유물은 사진촬영이 금지됐으나 가이드가 이것은 진짜?라고 하는 말에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이는 천마총의 명칭이 있게 된 천마도이다.

  국보 제 207호인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 위에 흰색으로 천마를 그린 말다래(장니)를 말하며, 5

6세기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대는 기구를 말한다.

이런 천마도는 신라인의 회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데 진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자작나무는 신라지역에는 자생하지 않아 고구려로부터 수입했을 것이라 추정을 한다.

     천마총의 무덤을 발굴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천마총은 교과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90cm 금관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하다.

천마총 금관은 앞면에 4단의 出자 모양의 장식이 있으며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있다.

크기는 다른 종류의 신라 금관에 비해 조금 크고 생김새가 장엄하다.

여기서 발굴된 천마총 금관 역시 경주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외에도 천마총에서는 그릇에 담긴 채 발견된 달걀이나 마구(馬具) 등 다양한 유물 등이 많이 나왔다.

  고대인들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알을 매우 신비하게 생각하였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달걀도 부활을 바라는 마음으로 껴묻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과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도 이러한 생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천마총 무덤 꼭대기의 봉토 속에서는 마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말을 순장(殉葬)시키던 풍습이 변하여 말을 탈 때 필요한 물건들을 대신 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마구를 껴묻은 것은 천마도와 마찬가지로 무덤주인공의 영혼이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풀이된다.

  현재 천마총 안에는 모형전시관이 있어 발굴 당시의 유물이 놓여 있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출처:경주역사기행/하일식지음)    무덤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드는 순서는 시신을 넣은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궤를 안치한다.

이어 목관과 궤를 둘러싸는 목곽(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를 돌로 촘촘히 쌓고 다시 흙으로 둥글게 봉분(封墳)을 다져 마무리한다.

이런 무덤양식은 5

6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성이 됐는데 다른 고분들은 도굴이 거의 다 됐는데 이 고분들만은 도굴을 면할 수 있었다.

무덤구조자체가 도굴을 하려면 중장비를 동원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도굴꾼들은 주로 고분의 바깥 아래쪽에 한 사람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고 그리로 들어가 관 속에 있는 유물을 훔쳐 가는데 돌무지덧널무덤은 애초부터 그게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구멍을 뚫다 보면 관 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돌의 일부를 빼내야 한다.

하지만 돌을 빼내다 보면 그 위에 쌓여 있는 엄청난 양의 돌들이 밑으로 쏟아져 내리고. 도굴꾼들은 그 자리에서 돌 더미에 깔려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연관된 천마총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의 글이 있어 소개한다.

  천마총을 만드는 데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시간이 걸렸을까?   천마총의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천마총을 만드는 데 쓰인 흙과 돌?나무를 모두 합친 부피는 9,612㎡에 달한다.

이 자재들은 천마총 반경 50m 안에 놓여 있다고 가정하면 흙과 돌?점토를 옮겨 쌓는데는 6,673명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를 하루 100명의 인부가 계속 작업한다고 가정한다면 90일 가까이 걸린다는 결론이 나와 있다.

  그러나 흙과 돌을 비롯한 자재들을 더 먼 곳에서 옮겨 왔을 것이며, 무덤을 쌓을 때 흙을 고르고 다지는 데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오랫동안 일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재를 헛되이 쓰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도록 화장하라"고 유언한 문무왕의 뜻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 곳에서 흙을 옮기는 수고를 덜기 위해 무덤 주위의 흙을 파서 봉토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의 대형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주위에 있는 호수는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인데, 신라 고분의 주위에도 그러한 흔적이 발견된다.

(출처:경주역사기행/하일식 지음)     대릉원은 돌담이 둘러쳐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야 전체적인 시야가 확보되는 능. 신라시대 왕.왕비.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이다.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경주의 고분들은  당시의 다른 지역들에 견주어도 특이한 점이라고. 대릉원에 있는 능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천마총과 이곳에 대릉원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사연이 있는 미추왕릉 그리고 경주에 있는 고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능 두개가 붙어 있는 황남대총 이다.

남아있는 23기의 능말고도 무덤 자리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봉분이 있는 무덤들만 남겨두고 모두 지워버렸다고 한다.

                                                           연 락 처  :  054-772-6317이용시간 :  09 : 00

22 : 00 입 장 료  :   개인  -  성인   2,000원   /   군경 1,200원   /  청소년 1,200원   /    어린이  600원                  단체  -  성인   1,600원   /   군경 1,000원   /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500원주차요금 :   소형  2,000원    /  대형  4,000원  대릉원 안은 큰 나무들로 멋지게 조성되어 있고 산책하기 좋게바닥이 잘 다져져 있다.

사진에는 없지만 배롱나무(백일홍)도 여러 그루 심어져 있어서방문 했을 시 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예쁜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석굴암 방문 뒤 식사를 마치고 정오 12시 안팍인 시간이라 이미 기온은 더워진 상태.예쁜 꽃을 눈에 담는 것도 잠깐, 너무 더운 날씨로 인해 산책이고 뭐고 대릉원 방문 목적인 천마총을 향해 직진 직진. 천마총으로 가는 길에 있는 능 천마총 안에 있는 저수지 천마총 입구중학교 수행여행 왔을 때 천마총 앞에서 반 친구들과 단체 사진 찍었던 생각이 새록새록

^^돌을 쌓고 그 돌 무더기 안에 왕의 목관을 넣었던 곳출토된 금장류출토된 금장 제품을 볼 때마다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뛰어난 금 세공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을까 매번 넋을 잃고 뚫어져라 바라보게 된다.

보고 있으면 이런 걸 몸에 두른 그때의 왕.귀족들은 무겁지 않았을까 하는 재미있는 궁금증도 돋아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진품은 경주박물관에서 보관중이라고 한다

기온이 좋았다면 천마총 뒤에 대릉원 안을 천천히 산책했을텐데 너무 더워서 산책은 포기하고 다음 장소인보문단지로 출발

16년 여름은 모두에게 기억에 남을 폭염을 남겼으니.... 아 왜 더운 육지를 이리 헤메고 다니는 것인가... 구경이고 뭐고 힘들었던... 큽 천마총은 1973년 발굴되었고 신라 특유의 돌을 쌓고 그 안에 나무로 된 관을 넣은 적석목관분이라고 한다.

냇가의 돌로 쌓은 적석층이 있고 적석층 안에는 나무로 된 방이 있어 그 중앙에 목관을 놓고 시신을 안치했다.

출토된 유물이 만점이 넘으며 그 중 천마도는 우리나라 고분에서 처음 출토된 귀중한 그림이라고. 1970년대 공원화하기 전에는 멀리서도 황남대총의 우람하고 아름다운 능선이 한눈에 들어 왔으나, 담장을둘러치고 무덤 앞까지 주차시설을 만들어 무덤 안 길을 딱는 바람에 옛 정취는 사라져서 아쉬워하는 평도 있던데인공적 조성 전의 옛 모습은 어땠을지... 머릿속으로만 그려 보며, 그 정취는 사라져 아쉽지만 조성된 돌담이 주로 도시화된 딱딱함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또 다른 감흥을 주니 세월의 변화에 따라 나름의 긍정적의미가 생겼다고 본다.

봄, 가을 산책하기 좋은 계절에 대릉원을 둘러친 돌담을 자전거나 바이크를 대여해 타면서 느끼는 정취는더없이 좋아서 경주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는 분들께 꼭 추천해 봅니다.

몇 년 전 이서진과 김희선씨가 주연으로 나왔던 경주를 배경으로 했던 KBS의 드라마에서도 대릉원의 돌담길이나왔을 정도로 멋스럽고 분위기 있는 정취를 선사해 줍니다.

숙박을 경주터미널 부근으로 잡았다면 그 근처에서 자전거나 바이크를 대여해    대릉원 - 첨성대 - 안압지 - 경주박물관을관람하고 다시 숙박시설로 돌아가는 코스로 잡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랍니다

신라 금관스키타이와 시베리아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말 신라 김씨는 내물왕 비석의 내용처럼 흉노의 후예인가.황남대총신라의 가장 큰 무덤으로왕과 왕비의 부부능이다.

재밌는 것은 왕비 무덤이 더 높다.

신라는 고분문화로고분에서 많은 문화재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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