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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우



03)] / 누가 친구인가?(이장우 목사)  욥기 6:1-30 누가 친구인가? 2016. 2. 3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오늘 본문은 엘리바스가 욥을 충고한 내용에 대하여 욥의 답변입니다.

욥의 답변이 6장부터 7장까지 계속됩니다만 그 양이 많아서 두 번에 나누어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은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악인에게 벌을 주시고 선인에게는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적은 판단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다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충고는 죄 없이 벌을 받는 사람이 없으니 잘못을 인정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하여 욥의 대답이 시작됩니다.

 본문 1

3절입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듣고서 친구라고 와서 하는 말이 그 정도냐고 하면서 자신의 괴로움을 저울에 달아본다면 바닷가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합니다.

어쭙잖은 충고는 그만두고 나의 말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4

7절입니다.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욥은 자신의 고난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이 자신을 과녁 삼아 화살을 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울부짖음은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들 나귀나 소는 먹을 풀이 있다면 어찌 울겠느냐고 하면서 너희가 하는 말은 나에게 아무른 소용없는 위로라는 것입니다.

그런 위로나 충고라는 것이 싱거운 음식과 같고 알의 흰자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른 맛이 없기에 만지기도 싫어하는 거리끼는 음식과 같은 것이 친구의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누가 무슨 말이 위로가 됩니까? 차라리 아무른 말도 없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다 알기나 한 것처럼 충고하는 말이 얼마나 역겨운 것이냐는 말입니다.

 8

10절입니다.

“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공동번역입니다.

“8 오, 나 청을 올릴 수 있어 하느님께서 나의 그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면, 9 그리하여 나를 산산이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죽여주신다면, 10 차라리 그것으로 나는 위로를 받고 견딜 수 없이 괴롭지만, 오히려 기뻐 뛰리라.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나 아직 어긴 일이 없네.” 욥은 하나님께 직접 호소를 합니다.

나의 간구를 들어주셔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끊어버리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을 차라리 죽여주신다면 위로를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고통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스스로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그렇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시면 오히려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통이 끝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아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더 기겁할 말이지만 욥은 진심입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은 욥의 친구들의 주장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1

13절입니다.

“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공동번역입니다.

“11 나에게 무슨 힘이 있어 더 견디며 무슨 좋은 수가 있겠다고 더 살겠는가. 12 나의 힘이 바위란 말인가? 나의 살이 놋쇠란 말인가? 13 나 이제 아무 의지도 없어 살아날 길이 아득 하다네”  욥의 이러한 탄식은 친구들에게도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간구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기운은 바위 같이 든든하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의 살이 놋쇠 같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날 아무른 힘도 의지도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욥의 탄식은 단지 한 개인의 탄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탄식입니다.

욥이 선자지임을 이미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의 이러한 탄식을 예레미야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함으로 오는 비방과 고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렘20:14

18). 지금 욥은 자신의 살은 놋쇠가 아니라는 탄식이 예레미야의 탄식과 함께 연결되는 부분을 봅니다.

 예레미야 15:20

21절입니다.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지만 그러나 예레미야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이 자신에게는 마치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15:16

18절입니다.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때에는 자신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었지만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자신에게 오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즐거운 모임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있는데 주의 분노로 자신에게 채우셨다고 합니다.

욥의 표현으로는 자신을 과녁삼아 하나님께서 화살을 쏘았다고 합니다.

그 고통과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않는 것이 어찌 된 일이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백성들 앞에서 놋 성벽과 같이 해 주시다고 하시고서는 오히려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며 죽임의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속이는 시내 같다고 항의를 합니다.

 14

20절입니다.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예레미야가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탄식을 합니다.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고 온 친구들이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합니다.

욥의 탄식은 친구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시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비가 올 때에 물이 콸콸 내려가는 시내가 비만 그치면 바로 마른 시내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음이 녹아서 흐르는 물들이 곧 말라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막을 다니는 대상들이나 광야로 다니는 행인들이 물이 떨어지면 물이 있는 개울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물이 있을 줄 알고 찾아왔는데 그 개울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와보니 벌써 말라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낙심되는 일이며 결국 목이 말라 죽어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속이는 시내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친구라면 14절처럼 동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정이라는 말이 ‘헤세드’입니다.

언약적인 사랑이며 언약을 맺었기에 신실하고 충성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친구가 지금 너무 심한 고난을 당하여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버렸다고 할지라도 친구라면 동정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교리로 무장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면 바른 충고를 하여 돌아서게 해야지 친구라고 그 말에 동의해 주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은 태도입니다.

목사들도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충고하고 권면한다고 하는 말이지만 그 상대방은 그런 말들이 다 속이는 시내와 같이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저도 설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나 설교할 때나 설교를 하고 나서도 좌절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란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게 먼저 합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서 교인들에게 설교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기도 하지만 가장 우선은 내가 납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본문을 이렇게 이해하고 납득이 되고 이렇게 은혜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전하는 순간에 달라지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고 나서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였다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저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설교하는 자 따로, 듣는 자 따로, 하나님의 뜻대로 다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하는 자나 듣는 자에게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있었다면 이것은 전적인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21절입니다.

“21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처음 한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지만 다른 친구들도 다 포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목이 말라 시내를 찾아 갔는데 물이 없어 속이는 시내처럼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것이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내가 있다거나 위로를 한다는 말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차라리 아무른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친구들이 위로하고 충고하려고 한 논리들이 다 무너져 내렸기에 너희가 두려워서 겁을 낸다고 한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위로하려고 하였는데 그 논리가 욥에게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말에 설득을 당하게 되면 자신들의 논리가 무너지기에 겁이 나는 것입니다.

모든 논쟁이 치열한 이유는 그 논쟁에서 지면 자기 자신이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기에 치열합니다.

특히나 진리를 다룬다는 자들은 더 치열합니다.

복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복음의 논쟁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진리의 문제보다 결국 자존심과 감정싸움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 됨을 주장하는 일이 됩니다.

내가 그것은 잘 못 보았다는 말을 도저히 못하는 자들이 목사들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는 줄 압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논쟁에서 지는 것은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온갖 지혜와 경험으로 욥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진리 관을 고수하기 위한 것입니다.

욥이 엘리바스에게 말합니다.

 22

27절입니다.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넘기는구나” 욥이 재앙을 당하고 있을 때에 친구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한 것이 없습니다.

선물을 구한 적도 없고 원수나 폭군의 손에서 구하여 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들이 먼저 와서 위로한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똑 바로 말하여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잠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옳은 말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너희의 책망이라는 것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고아를 제비 뽑고 친구를 팔아넘기는 짓이라고 합니다.

 28

30절입니다.

“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욥이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들의 욥을 공격하는 것이 오히려 행악 자가 된다고 합니다.

욥의 말에 나의 의가 아직 건재하니 돌아오라고 합니다.

자신의 혀에 불의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이러면서 7장까지 계속하여 욥의 말이 이어집니다.

방금 본 28

30절의 내용을 보면 우리도 욥이 좀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기가 무엇이라고 자신의 의가 건재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혀에서는 불의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어찌 사람의 말에 불의한 것이 없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야고보서의 말씀에 보면 사람의 혀 자체가 불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들이 무너져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믿을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서 보든지 다른 성경을 통하여서 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지 못하면 성경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한 말로서는 십자가가 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까닭 없이 당하는 고통 속에서 친구들의 논리를 혼자서 막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기에 욥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한 친구들의 공격에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백성들의 그러한 공격에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이기시고 예레미야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십자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주 보는 이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무른 표적도 아닐 뿐 아니라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 대신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십자가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고 친구들에게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은 지금 욥의 친구가 아니라 오히려 대적이 됩니다.

그러면 누가 욥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욥기 42:1

6절입니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의 결론입니다만 앞으로 계속 볼 내용입니다.

그 오랫동안의 공격과 방어를 마치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이후에 욥의 고백입니다.

주께 대하여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합니다.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욥의 친구들만이 아니라 욥마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의 고난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고 위로하겠습니까? 저도 친구가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같은 뜻을 품고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런 친구들이 고정된 것이 아님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친구를 스스로 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도 우리의 이웃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격이 소극적이라서 친구를 사귀는 일에 많이 서툽니다.

친구하자고 오면 거절하지 않지만 떠난다고 해도 잡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나 이웃을 내가 고정되게 붙드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친구라고 왔다가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누구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2

14절입니다.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친구가 참된 친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친구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어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참된 친구가 되십니다.

그 친구가 우리에게 와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이미 생명에서 잘려진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여주신 그 사랑만이 참된 사랑이며 참된 친구가 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친구로 맞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친구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명에 접속된 자들입니다.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 음원을 다운 받을 수도 없고 음반을 구입할 수 도 없었는데 3번 트랙이 너무 듣고 싶고 ...드디어 돌고 돌아 어렵게 내 손으로 들어왔다!구식이고 다소 촌스럽긴 하지만..  순수한 느낌이 물씬 드는 음악들...미성으로 돌아와줘를 부르는... 이장우님의 목소리는 정말 최고  유희열님이 작사작곡한 것에 한 번 더 놀란다.

그래서 내가 이 음악을 그렇게 좋아한 건가... 싶다.

이장우 김병만이 12월1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공항패션을 선보이며 귀국했습니다.

이날 정글의 법칙 후발대 멤버들이 입국장을 나오며 환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번 파나마 편 멤버는 오지호, 이장우, 홍종현, 환희, 황우슬혜, 박유환, 안세하, 인피니트 성열, 씨스타 보라, 이종원, 손은서 등 총 11명입니다.

이들은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뉘어 족장 김병만과 함께 정글 생존기를 펼쳤습니다.

한편 '정글의 법칙'은 족장 김병만을 필두로 병만족들의 자연속 생존기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예능프로입니다.

정글의 법칙 팀 복귀했네요

[이장우] 대박이네요.


이장우 , 정글의법칙 , 이장우 정글의법칙 , 정글의법칙 이장우  03)] / 누가 친구인가?(이장우 목사)  욥기 6:1-30 누가 친구인가? 2016. 2. 3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오늘 본문은 엘리바스가 욥을 충고한 내용에 대하여 욥의 답변입니다.

욥의 답변이 6장부터 7장까지 계속됩니다만 그 양이 많아서 두 번에 나누어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은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악인에게 벌을 주시고 선인에게는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적은 판단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다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충고는 죄 없이 벌을 받는 사람이 없으니 잘못을 인정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하여 욥의 대답이 시작됩니다.

 본문 1

3절입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듣고서 친구라고 와서 하는 말이 그 정도냐고 하면서 자신의 괴로움을 저울에 달아본다면 바닷가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합니다.

어쭙잖은 충고는 그만두고 나의 말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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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입니다.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욥은 자신의 고난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이 자신을 과녁 삼아 화살을 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울부짖음은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들 나귀나 소는 먹을 풀이 있다면 어찌 울겠느냐고 하면서 너희가 하는 말은 나에게 아무른 소용없는 위로라는 것입니다.

그런 위로나 충고라는 것이 싱거운 음식과 같고 알의 흰자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른 맛이 없기에 만지기도 싫어하는 거리끼는 음식과 같은 것이 친구의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누가 무슨 말이 위로가 됩니까? 차라리 아무른 말도 없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다 알기나 한 것처럼 충고하는 말이 얼마나 역겨운 것이냐는 말입니다.

 8

10절입니다.

“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공동번역입니다.

“8 오, 나 청을 올릴 수 있어 하느님께서 나의 그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면, 9 그리하여 나를 산산이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죽여주신다면, 10 차라리 그것으로 나는 위로를 받고 견딜 수 없이 괴롭지만, 오히려 기뻐 뛰리라.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나 아직 어긴 일이 없네.” 욥은 하나님께 직접 호소를 합니다.

나의 간구를 들어주셔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끊어버리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을 차라리 죽여주신다면 위로를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고통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스스로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그렇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시면 오히려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통이 끝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아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더 기겁할 말이지만 욥은 진심입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은 욥의 친구들의 주장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1

13절입니다.

“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공동번역입니다.

“11 나에게 무슨 힘이 있어 더 견디며 무슨 좋은 수가 있겠다고 더 살겠는가. 12 나의 힘이 바위란 말인가? 나의 살이 놋쇠란 말인가? 13 나 이제 아무 의지도 없어 살아날 길이 아득 하다네”  욥의 이러한 탄식은 친구들에게도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간구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기운은 바위 같이 든든하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의 살이 놋쇠 같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날 아무른 힘도 의지도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욥의 탄식은 단지 한 개인의 탄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탄식입니다.

욥이 선자지임을 이미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의 이러한 탄식을 예레미야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함으로 오는 비방과 고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렘20:14

18). 지금 욥은 자신의 살은 놋쇠가 아니라는 탄식이 예레미야의 탄식과 함께 연결되는 부분을 봅니다.

 예레미야 15:20

21절입니다.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지만 그러나 예레미야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이 자신에게는 마치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15:16

18절입니다.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때에는 자신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었지만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자신에게 오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즐거운 모임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있는데 주의 분노로 자신에게 채우셨다고 합니다.

욥의 표현으로는 자신을 과녁삼아 하나님께서 화살을 쏘았다고 합니다.

그 고통과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않는 것이 어찌 된 일이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백성들 앞에서 놋 성벽과 같이 해 주시다고 하시고서는 오히려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며 죽임의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속이는 시내 같다고 항의를 합니다.

 14

20절입니다.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예레미야가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탄식을 합니다.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고 온 친구들이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합니다.

욥의 탄식은 친구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시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비가 올 때에 물이 콸콸 내려가는 시내가 비만 그치면 바로 마른 시내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음이 녹아서 흐르는 물들이 곧 말라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막을 다니는 대상들이나 광야로 다니는 행인들이 물이 떨어지면 물이 있는 개울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물이 있을 줄 알고 찾아왔는데 그 개울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와보니 벌써 말라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낙심되는 일이며 결국 목이 말라 죽어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속이는 시내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친구라면 14절처럼 동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정이라는 말이 ‘헤세드’입니다.

언약적인 사랑이며 언약을 맺었기에 신실하고 충성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친구가 지금 너무 심한 고난을 당하여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버렸다고 할지라도 친구라면 동정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교리로 무장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면 바른 충고를 하여 돌아서게 해야지 친구라고 그 말에 동의해 주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은 태도입니다.

목사들도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충고하고 권면한다고 하는 말이지만 그 상대방은 그런 말들이 다 속이는 시내와 같이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저도 설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나 설교할 때나 설교를 하고 나서도 좌절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란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게 먼저 합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서 교인들에게 설교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기도 하지만 가장 우선은 내가 납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본문을 이렇게 이해하고 납득이 되고 이렇게 은혜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전하는 순간에 달라지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고 나서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였다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저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설교하는 자 따로, 듣는 자 따로, 하나님의 뜻대로 다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하는 자나 듣는 자에게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있었다면 이것은 전적인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21절입니다.

[이장우] 최선의 선택



“21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처음 한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지만 다른 친구들도 다 포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목이 말라 시내를 찾아 갔는데 물이 없어 속이는 시내처럼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것이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내가 있다거나 위로를 한다는 말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차라리 아무른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친구들이 위로하고 충고하려고 한 논리들이 다 무너져 내렸기에 너희가 두려워서 겁을 낸다고 한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위로하려고 하였는데 그 논리가 욥에게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말에 설득을 당하게 되면 자신들의 논리가 무너지기에 겁이 나는 것입니다.

모든 논쟁이 치열한 이유는 그 논쟁에서 지면 자기 자신이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기에 치열합니다.

특히나 진리를 다룬다는 자들은 더 치열합니다.

복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복음의 논쟁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진리의 문제보다 결국 자존심과 감정싸움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 됨을 주장하는 일이 됩니다.

내가 그것은 잘 못 보았다는 말을 도저히 못하는 자들이 목사들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는 줄 압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논쟁에서 지는 것은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온갖 지혜와 경험으로 욥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진리 관을 고수하기 위한 것입니다.

욥이 엘리바스에게 말합니다.

 22

27절입니다.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넘기는구나” 욥이 재앙을 당하고 있을 때에 친구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한 것이 없습니다.

선물을 구한 적도 없고 원수나 폭군의 손에서 구하여 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들이 먼저 와서 위로한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똑 바로 말하여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잠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옳은 말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너희의 책망이라는 것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고아를 제비 뽑고 친구를 팔아넘기는 짓이라고 합니다.

 28

30절입니다.

“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욥이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들의 욥을 공격하는 것이 오히려 행악 자가 된다고 합니다.

욥의 말에 나의 의가 아직 건재하니 돌아오라고 합니다.

자신의 혀에 불의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이러면서 7장까지 계속하여 욥의 말이 이어집니다.

방금 본 28

30절의 내용을 보면 우리도 욥이 좀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기가 무엇이라고 자신의 의가 건재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혀에서는 불의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어찌 사람의 말에 불의한 것이 없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야고보서의 말씀에 보면 사람의 혀 자체가 불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들이 무너져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믿을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서 보든지 다른 성경을 통하여서 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지 못하면 성경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한 말로서는 십자가가 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까닭 없이 당하는 고통 속에서 친구들의 논리를 혼자서 막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기에 욥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한 친구들의 공격에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백성들의 그러한 공격에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이기시고 예레미야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십자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주 보는 이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무른 표적도 아닐 뿐 아니라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 대신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십자가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고 친구들에게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은 지금 욥의 친구가 아니라 오히려 대적이 됩니다.

그러면 누가 욥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욥기 42:1

6절입니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의 결론입니다만 앞으로 계속 볼 내용입니다.

그 오랫동안의 공격과 방어를 마치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이후에 욥의 고백입니다.

주께 대하여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합니다.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욥의 친구들만이 아니라 욥마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의 고난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고 위로하겠습니까? 저도 친구가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같은 뜻을 품고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런 친구들이 고정된 것이 아님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친구를 스스로 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도 우리의 이웃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격이 소극적이라서 친구를 사귀는 일에 많이 서툽니다.

친구하자고 오면 거절하지 않지만 떠난다고 해도 잡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나 이웃을 내가 고정되게 붙드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친구라고 왔다가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누구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2

14절입니다.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친구가 참된 친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친구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어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참된 친구가 되십니다.

그 친구가 우리에게 와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이미 생명에서 잘려진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여주신 그 사랑만이 참된 사랑이며 참된 친구가 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친구로 맞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친구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명에 접속된 자들입니다.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이장우 환희 사촌지간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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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 누가 친구인가?(이장우 목사)  욥기 6:1-30 누가 친구인가? 2016. 2. 3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오늘 본문은 엘리바스가 욥을 충고한 내용에 대하여 욥의 답변입니다.

욥의 답변이 6장부터 7장까지 계속됩니다만 그 양이 많아서 두 번에 나누어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은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악인에게 벌을 주시고 선인에게는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적은 판단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다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충고는 죄 없이 벌을 받는 사람이 없으니 잘못을 인정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하여 욥의 대답이 시작됩니다.

 본문 1

3절입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듣고서 친구라고 와서 하는 말이 그 정도냐고 하면서 자신의 괴로움을 저울에 달아본다면 바닷가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합니다.

어쭙잖은 충고는 그만두고 나의 말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4

7절입니다.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욥은 자신의 고난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이 자신을 과녁 삼아 화살을 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울부짖음은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들 나귀나 소는 먹을 풀이 있다면 어찌 울겠느냐고 하면서 너희가 하는 말은 나에게 아무른 소용없는 위로라는 것입니다.

그런 위로나 충고라는 것이 싱거운 음식과 같고 알의 흰자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른 맛이 없기에 만지기도 싫어하는 거리끼는 음식과 같은 것이 친구의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누가 무슨 말이 위로가 됩니까? 차라리 아무른 말도 없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다 알기나 한 것처럼 충고하는 말이 얼마나 역겨운 것이냐는 말입니다.

 8

10절입니다.

“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공동번역입니다.

“8 오, 나 청을 올릴 수 있어 하느님께서 나의 그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면, 9 그리하여 나를 산산이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죽여주신다면, 10 차라리 그것으로 나는 위로를 받고 견딜 수 없이 괴롭지만, 오히려 기뻐 뛰리라.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나 아직 어긴 일이 없네.” 욥은 하나님께 직접 호소를 합니다.

나의 간구를 들어주셔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끊어버리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을 차라리 죽여주신다면 위로를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고통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스스로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그렇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시면 오히려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통이 끝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아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더 기겁할 말이지만 욥은 진심입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은 욥의 친구들의 주장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1

13절입니다.

“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공동번역입니다.

“11 나에게 무슨 힘이 있어 더 견디며 무슨 좋은 수가 있겠다고 더 살겠는가. 12 나의 힘이 바위란 말인가? 나의 살이 놋쇠란 말인가? 13 나 이제 아무 의지도 없어 살아날 길이 아득 하다네”  욥의 이러한 탄식은 친구들에게도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간구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기운은 바위 같이 든든하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의 살이 놋쇠 같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날 아무른 힘도 의지도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욥의 탄식은 단지 한 개인의 탄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탄식입니다.

욥이 선자지임을 이미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의 이러한 탄식을 예레미야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함으로 오는 비방과 고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렘20:14

18). 지금 욥은 자신의 살은 놋쇠가 아니라는 탄식이 예레미야의 탄식과 함께 연결되는 부분을 봅니다.

 예레미야 15:20

21절입니다.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지만 그러나 예레미야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이 자신에게는 마치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15:16

18절입니다.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때에는 자신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었지만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자신에게 오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즐거운 모임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있는데 주의 분노로 자신에게 채우셨다고 합니다.

욥의 표현으로는 자신을 과녁삼아 하나님께서 화살을 쏘았다고 합니다.

그 고통과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않는 것이 어찌 된 일이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백성들 앞에서 놋 성벽과 같이 해 주시다고 하시고서는 오히려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며 죽임의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속이는 시내 같다고 항의를 합니다.

 14

20절입니다.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예레미야가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탄식을 합니다.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고 온 친구들이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합니다.

욥의 탄식은 친구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시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비가 올 때에 물이 콸콸 내려가는 시내가 비만 그치면 바로 마른 시내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음이 녹아서 흐르는 물들이 곧 말라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막을 다니는 대상들이나 광야로 다니는 행인들이 물이 떨어지면 물이 있는 개울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물이 있을 줄 알고 찾아왔는데 그 개울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와보니 벌써 말라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낙심되는 일이며 결국 목이 말라 죽어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속이는 시내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친구라면 14절처럼 동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정이라는 말이 ‘헤세드’입니다.

언약적인 사랑이며 언약을 맺었기에 신실하고 충성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친구가 지금 너무 심한 고난을 당하여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버렸다고 할지라도 친구라면 동정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교리로 무장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면 바른 충고를 하여 돌아서게 해야지 친구라고 그 말에 동의해 주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은 태도입니다.

목사들도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충고하고 권면한다고 하는 말이지만 그 상대방은 그런 말들이 다 속이는 시내와 같이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저도 설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나 설교할 때나 설교를 하고 나서도 좌절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란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게 먼저 합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서 교인들에게 설교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기도 하지만 가장 우선은 내가 납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본문을 이렇게 이해하고 납득이 되고 이렇게 은혜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전하는 순간에 달라지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고 나서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였다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저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설교하는 자 따로, 듣는 자 따로, 하나님의 뜻대로 다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하는 자나 듣는 자에게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있었다면 이것은 전적인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21절입니다.

“21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처음 한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지만 다른 친구들도 다 포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목이 말라 시내를 찾아 갔는데 물이 없어 속이는 시내처럼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것이 속이는 시내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내가 있다거나 위로를 한다는 말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차라리 아무른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친구들이 위로하고 충고하려고 한 논리들이 다 무너져 내렸기에 너희가 두려워서 겁을 낸다고 한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위로하려고 하였는데 그 논리가 욥에게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말에 설득을 당하게 되면 자신들의 논리가 무너지기에 겁이 나는 것입니다.

모든 논쟁이 치열한 이유는 그 논쟁에서 지면 자기 자신이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기에 치열합니다.

특히나 진리를 다룬다는 자들은 더 치열합니다.

복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복음의 논쟁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진리의 문제보다 결국 자존심과 감정싸움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 됨을 주장하는 일이 됩니다.

내가 그것은 잘 못 보았다는 말을 도저히 못하는 자들이 목사들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는 줄 압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논쟁에서 지는 것은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온갖 지혜와 경험으로 욥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진리 관을 고수하기 위한 것입니다.

욥이 엘리바스에게 말합니다.

 22

27절입니다.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넘기는구나” 욥이 재앙을 당하고 있을 때에 친구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한 것이 없습니다.

선물을 구한 적도 없고 원수나 폭군의 손에서 구하여 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들이 먼저 와서 위로한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똑 바로 말하여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잠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옳은 말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너희의 책망이라는 것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고아를 제비 뽑고 친구를 팔아넘기는 짓이라고 합니다.

 28

30절입니다.

“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욥이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들의 욥을 공격하는 것이 오히려 행악 자가 된다고 합니다.

욥의 말에 나의 의가 아직 건재하니 돌아오라고 합니다.

자신의 혀에 불의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이러면서 7장까지 계속하여 욥의 말이 이어집니다.

방금 본 28

30절의 내용을 보면 우리도 욥이 좀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기가 무엇이라고 자신의 의가 건재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혀에서는 불의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어찌 사람의 말에 불의한 것이 없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야고보서의 말씀에 보면 사람의 혀 자체가 불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들이 무너져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믿을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서 보든지 다른 성경을 통하여서 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지 못하면 성경은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한 말로서는 십자가가 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까닭 없이 당하는 고통 속에서 친구들의 논리를 혼자서 막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기에 욥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한 친구들의 공격에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백성들의 그러한 공격에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이기시고 예레미야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십자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주 보는 이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무른 표적도 아닐 뿐 아니라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 대신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십자가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고 친구들에게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은 지금 욥의 친구가 아니라 오히려 대적이 됩니다.

그러면 누가 욥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욥기 42:1

6절입니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의 결론입니다만 앞으로 계속 볼 내용입니다.

그 오랫동안의 공격과 방어를 마치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이후에 욥의 고백입니다.

주께 대하여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합니다.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욥의 친구들만이 아니라 욥마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의 고난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고 위로하겠습니까? 저도 친구가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같은 뜻을 품고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런 친구들이 고정된 것이 아님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친구를 스스로 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도 우리의 이웃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격이 소극적이라서 친구를 사귀는 일에 많이 서툽니다.

친구하자고 오면 거절하지 않지만 떠난다고 해도 잡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나 이웃을 내가 고정되게 붙드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친구라고 왔다가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누구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2

14절입니다.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친구가 참된 친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친구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어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참된 친구가 되십니다.

그 친구가 우리에게 와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이미 생명에서 잘려진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여주신 그 사랑만이 참된 사랑이며 참된 친구가 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친구로 맞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친구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명에 접속된 자들입니다.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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