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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09 03:00

'박헌영 아들' 원경 스님 인터뷰

/김지호 지난달 29일 경기도 평택시 무봉산 야트막한 산자락. 만기사(萬奇寺) 주지이자 조계종 원로의원인 원경 스님(74·사진)은 부친의 처형 소식을 처음 전해 들었던 열여덟 살 무렵을 떠올리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버지가 개선장군으로 돌아오면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남부러울 것 없이 공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기대가 모두 무너진 거죠."원경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을 창설하고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을 이끌다가 1956년 북에서 김일성에게 처형당한 박헌영(1900

1956)의 아들이다.

박헌영은 1941년 일제의 검거를 피해 청주에 숨어 지내던 시절, 자기를 돌봐주던 스무 살 처녀 정순년과 사이에서 스님을 낳았다.

박헌영은 정씨에게 민들레 문양이 새겨진 가락지를 선물한 뒤, 점쟁이와 벽돌공으로 전국을 떠돌며 은신했다.

해방 후 서울 장충동에서 큰아버지와 살던 원경은 김삼룡·이주하·이현상 등 남로당 핵심 지도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70년이 흘렀지만 그는 이들을 부를 때 '선생'이라는 경칭(敬稱)을 빼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저씨'라고도 불렀다.

"여섯 살 무렵 대여섯 번쯤 만나 뵈었던 아버지 모습도 안개 속의 흐릿한 영상처럼 남아 있다"고 했다.

6·25가 터지자 당시 열 살 소년이었던 원경은 빨치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아저씨'를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3년간 '산 생활'을 했던 그는 '최연소 빨치산'으로 불렸다.

"총을 잡은 적은 없고, 마을에 내려가 찌그러진 주전자에 된장을 받아 오는 정도였죠. 눈과 바람과 비를 이불 삼아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전쟁이 끝날 무렵, 이현상 사령관이 "저 아이는 저 아이만의 세상이 따로 있다"며 하산(下山) 명령을 내리는 것도 직접 들었다.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는 북에서 '미제(美帝) 간첩' 혐의로 숙청된 이후, 남북에서 모두 잊혔다.

원경도 1972년과 1983년 수경사와 안기부에서 각각 조사받았다.

하지만 주민등록이 안 돼 있던 그는 동네 친구 이름을 빌려 해군 특수부대에 자원입대, 백령도에서 3년간 복무하기도 했다.

"(당시 북에 대한) 복수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김일성이 아버지를 열 번 죽였다 하더라도 그건 역사가 심판할 문제이지, 네가 가슴에 담아둘 건 아니다.

" 스승처럼 따랐던 한산 스님의 말씀에 원경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한 가닥 집착을 버렸다고 했다.

지금도 만기사 입구의 천왕문(天王門)에는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원경은 그때부터 아버지에 관한 기록과 사진 자료를 모았다.

1993년부터 시작된 '이정(而丁) 박헌영 전집' 출간 작업은 2004년 9권으로 완간됐다('이정'은 박헌영의 아호이자 지하 활동 당시 썼던 가명이다).원경은 아버지를 숙청한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1942

2011) 전 북한 국방위원장보다 한 살 위다.

"혹시 '북한의 저 자리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크게 웃었다.

"법회에서 신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파요. 제대로 된 중이 되지 못하고 속물이 되면, 저승의 어르신들께도 '못난 놈'이라고 혼쭐날 거요."·이현상 평전안재성 | 실천문학사 | 20070730 ·이정 박헌영 전집 (전9권)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 | 역사비평사 | 20040719 ·이정 박헌영 일대기 임경석 | 역사비평사 | 20040415 이글은"인터파크도서"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일제 때부터 항일 공산주의 혁명가로 널리 알려져 해방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월북 후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기 때문이다.

? 격정의 20세기가 열리던 1900년 5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박헌영은 경성고보 시절 삼일만세운동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해방되기까지 26년 간 오로지 항일투쟁에 헌신한다.

삼일운동 이듬해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 조봉암 등 선배운동가들의 지도로 공산주의자가 된 그는 이듬해 결성된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의 비서로 활동하다 체포된다.

  2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고 나온 후에는 동아일보 로 재직하면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결성을 주도하다가 또다시 체포돼 다시 2년여의 감옥살이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이때 정신병으로 위장하기 위해 자신의 똥까지 먹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석방된 그는 소련 모스크바로 건너가 공산당 고급간부 양성학교인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국내에 잠입하려다가 상해에서 체포돼 혹독한 고문과 함께 1939년까지 다시 6년여의 감옥살이를 한다.

     ? 세 번에 걸친 체포와 재판 소식은 매번 신문지상에 상세히 보도돼 조선인 지식인이라면 박헌영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첫 부인인 주세죽과의 결혼 소식까지 신문에 날 정도였다.

해방직후 지식인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지도자감으로 이승만, 김구, 여운형에 이어 박헌영이 꼽혔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석방되자마자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수배당한 상태에서 전라도 광주의 벽돌공장 인부로 은신하다 해방을 맞은 박헌영은 곧바로 결성된 조선공산당 책임자가 되고 이듬해 좌파연합으로 결성된 남로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한다.

그러나 미소의 냉전으로 공산주의자들이 혹독한 탄압을 당하면서 해방 1년 만에 월북을 하게 된다.

  월북한 박헌영은 북한 땅 해주에 거점을 두고 이후 수년 간 남한의 무장빨치산투쟁을 지원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맞게 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무렵 ‘박헌영이 전쟁을 선동했으며, 전쟁 중에는 미제의 간첩으로서 미국에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체포돼 처형된다.

? 북한은 제주도의 4.3 무장봉기와 여순반란으로 남한이 이미 내란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남한정부가 수차례나 대대급 병력을 동원해 38선 이북을 공격해왔다는 점에서 북침에 대한 응전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킨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이 박헌영이 아닌 김일성이란 점도 명백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고문서보관소의 기밀문건들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수차례나 스탈린과 모택동을 방문해 전면전을 허가,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헌영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켰음을 기록하고 있다.

? 간첩혐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북한정부 수립을 주도했던 소련교포들은 소련으로 돌아간 후 남한의 들에게 박헌영이 간첩이 아니며 누명을 썼을 뿐임을 거듭 증언한다.

그럼에도 북한의 재판기록만을 읽은 이들은 박헌영 간첩설을 아직도 믿는다.

  소련식 사회주의가 초라한 성적표를 낸 채 붕괴하고, 북한정권의 오류도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는 지경이 된 오늘날, 박헌영이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동조했다고 해도 잘못이라고 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끝까지 소련과 북한의 지도부를 믿었고, 그럼에도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으니 비운의 혁명가가 된 것이다.

오늘의 우리가 박헌영의 시대에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 있다면, 한국전쟁 발발 전에 김일성과 이승만은 똑같이 사흘이면 통일을 할 수 있다고 전면전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고, 김일성은 석 달을 두고도 부산까지 진격하지 못한 채 오히려 압록강 너머로 도망쳤다가 중국군의 도움을 받아서야 돌아온다.

그러고도 두 사람은 반성이라곤 모르는 채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김일성은 박헌영을 내부의 적으로 몰아 정치적 위기를 극복한다.

? 연평도 사태 이후 냉전으로 치닫는 남북의 정세를 보면서, 남북 지도자들의 무모한 허세를 보면서, 죽은 이승만과 김일성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안재성 저술가   구로공단 동일제강, 청계피복노동조합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다.

지은책에는 『박헌영 평전』 등이 있다.

인권과 역사에 관한 저술작업을 하고 있다.

      월북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시절의 박헌영...당시 여론조사서 대통령감 1 위였다고 한다.

  1917 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연합이 성립되어 '민족자결주의' 를 선언하였다.

두달 후 미국도 '민족자결주의' 를 발표하였다.

 소련이 선언한 '민족' 은 자본제국 식민지로 전락한 1 백여 약소민족인데 반하여,미국이 말하는 '민족' 은 1 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에 국한되었다.

일본은 미국과 연합국으로 조선은 애초에 윌슨 선언의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소련의 민족자결의 원칙에 쏠린 약소국의 민심을 흩어놓기 위한 교란작전에 불과했다.

조선을 필리핀과 맞바꿔 일본에 할애한 나라는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박헌영과 김일성...  윌슨의 선언에 고무된 조선의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은전국적인 만세운동을 벌여 국제사회에 조선 독립을 호소하고자고종 45 일장 장례식날인 1919 년 3 월 1 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막상 수십만의 애도 인파가 서울에 집결하자민족지도자로 나선 33 인은 크게 당황하여 탑골공원 옥외집회를 포기하고,대신 탑골공원 근처의 고급 한식당인 태화관에서 자기들끼리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낭독후 최린이 직접 총독부 경무총감에 전화를 걸어 자수, 투항하였다.

최린 등 이날 식당에서 연행된 이들의 대다수는 머지않아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정작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자는 학생들이었다.

3. 1. 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3. 1. 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48 년 박헌영...김일성 등이 묘향산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다.

  1926 년 순종 장례식날 6. 10. 만세운동 이후 항일운동은 온전히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으며,공산주의자 그들은 인본주의와 민주주의 신념을 가진,근본적으로 선량하고 온건한 고급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역사는 흘러 박헌영과 이현상 등은 실패한 혁명가가 되었고,남한은 친일 매국노들의 나라가 되었다.

    박헌영과 여운형...미군정 정보 당국은 여운형을 '정치적 기회주의자' 로 단정지었다.

여운형은 좌우의 정치세력뿐 아니라 미군정과 북한에까지 두루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하기야 당시의 모든 인물들은 미국과 소련의 조연에 불과하지만...  '해방 이후의 역사' 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매국노' 가 '애국자' 가 되고, 실제 '애국자' 는 역사 뒤로 사라져버렸다.

 역사가 왜곡되어있는 판에 사회의 가치를 말해서 무엇하랴.'뉴라이트' 같은 작자들이 설쳐대고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 의 이유이기도 하다, '친일' 과 '부일' 의 뿌리는 깊고, 넓고, 또 길다.

역사도 상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숙청되기 얼마 전의 박헌영...  부러져버린 ‘인민의 고무래’ 박헌영 약관의 21세 조선 최초 공산주의자 되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상록수’의 작가로 유명한 심훈(沈薰, 1901

1936)이 1927년 12월 2일에 쓴 시다.

‘박군의 얼굴’이라는 제목인데, 심훈의 슬픔과 노여움은 격렬하게 이어진다.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시에는 세 사람의 ‘박’이 나온다.

‘C사’는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몸담고 있던 ‘시대일보’로 보인다.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는 첫 번째 박군은 일본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째 복역 중인 박열(朴烈, 1902

1974)이고 두 번째 박은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잡혀 끔찍한 족대기질(고문)을 당하던 끝에 죽은 박순병(朴純秉, 1901

1926)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선 박’은 박헌영(朴憲永, 1900

1956)이다.

문학비판가 최원식(인하대 교수)의 연구에 따른 것인데, 시는 치떨리는 노여움을 넘어 굳은 마음다짐으로 이어진다.

박아 박군아 XX(헌영)아!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모로 흘긴 저 눈동자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오냐 박군아눈을 빼어서 갈고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너와 같이 모든 X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년 후배인 심훈이 노엽고 슬픈 목소리로 부르짖은 박헌영은 2년 만에 병보석으로 감옥을 나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심신상실’이라는 병명이었으니, 자기 배설물을 먹는 따위의 미친 증세를 심하게 보였던 까닭이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7년 10월 21일치 기사다.

“서대문형무소 독감방에서 신음 중인 조선공산당사건 피고의 한 사람인 박헌영은 그동안 병세가 더욱 높아서 정신이 전혀 상실되어 식음을 전폐한 데다가, 더구나 독을 마시려고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므로, 형무소에서는 만일을 염려하여 두 손에 고랑을 채워서 경계 중이라는데, 이인, 허헌, 김병로, 후루야 네 변호사는 15일 오전에 재판소 당국에 보석원을 제출하였다는데, 병세가 그와 같이 위중한 터이므로 보석이 허가될 듯하다더라.”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받은 족대기질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다.

박헌영의 증언이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체포되기만 하면 그는 곧바로 예비심문이 이루어지는 경찰서의 비밀 장소로 끌려가게 된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 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려 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 8명의 경찰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 박헌영은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대흥보통학교를 나와 16살 때인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졸업하던 해에 일어난 3·1만세운동에 들었는데, 심훈이 이즈음 박헌영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있다.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 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더니라.”고보를 나온 다음 해 잡지 ‘녀자시론’에 편집원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뒤에 그를 ‘미제의 첩자’로 몰아붙이게 되는 빌미가 된다.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 사건 공판문헌’이라는 것을 보자. “피소자 박헌영은 1919년경 서울에서 잡지 ‘녀자시론’의 편집원으로 있을 때부터 동 잡지를 주간하는 친미분자 차마리사와 기독교 선교사로서 연희전문 교원(후에 교장)으로 있던 미국인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이용하여 숭미사상을 품게 되었고 1925년 11월 초순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각지의 지하 비밀조직을 고백하고 지도적 간부들을 고발함으로써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 탄압에 복무하였으며 그 대가로 ‘정신착란’이라는 구실 밑에 ‘보석’의 명목으로 석방되었고 1939년 9월에는 대전형무소에서 일제 앞에 혁명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사상전향’을 표명하고 출옥하였다.

”여기서부터 박헌영의 이른바 ‘정권전복음모’와 ‘간첩사건’들이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한마디로 줄이면 일제 때는 일제의 사주를 받는 일제 간첩이었고, 미제 때는 미제의 사주를 받는 악질반동 미제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녀자시론’은 제4호까지 발간되었던 월간 잡지였는데, 확인되지 않는 제2호를 빼고는 어디에도 박헌영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박헌영은 1920년 9월 고학을 해볼 작정으로 일본 동경으로 가서 두 달 동안 물색하다가 실패하고 나가사키를 거쳐 중국 상해로 간다.

친구인 김단야(金丹冶, 1900

1938)의 주선으로 이동휘(李東輝, 1873

1935)와 김만겸(金萬謙, 1886

?)이 지도하는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에 들어가 공산주의운동을 시작한다.

1921년 4월 상해상과대학에 들어갔으나 학자금을 댈 수 없어 서너 달 만에 그만두고, 고려공산청년단을 거쳐 고려공산당에 들어간다.

고려공산당은 이동휘, 김만겸, 안병찬(安炳瓚, ?

1922), 여운형(呂運亨, 1886

1947), 조동호(趙東祜, 1892

1954) 등이 주도하던 이르쿠츠파를 말한다.

박헌영은 당에서 내는 비합법 기관지 ‘올타’ 편집을 하면서 당에서 운영하던 사회주의연구소에서 사상연구에 힘쓴다.

같은 해에 주세죽(朱世竹, 1898

1953)과 내외가 되었다.

1930년 심훈이 첫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을 쓰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김동렬은 박헌영을, 김동렬의 연인 강세정은 주세죽을 모델로 한 것이다.

심훈은 그때 항주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벗 박헌영을 만나 혁명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던 피끓는 청춘이었다.

‘동방의 애인’을 보면 박헌영의 삶이 몹시 궁핍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심훈은 뒷날 쓴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에서 박헌영과 관계를 이렇게 읊었다.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사이었다.

)”1920년 11월부터 1922년 3월 말까지, 21살부터 23살까지 16개월 동안 박헌영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가하여 그 비서 자리를 맡은 것과 고려공산당에 들어감으로써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었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큰 일은 혼인을 한 것이었다.

 주세죽. 함남 함흥 출신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여학교를 나와 상해에서 음악학교를 다니고 있던 주의자였다.

박헌영은 모두 세 차례 공식, 비공식 혼인을 하게 되는데, 호적에 적힌 것으로는 두 살 더 많은 주세죽이 첫사랑이다.

박헌영 22세, 주세죽 24세. 이제 기준으로 보면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때에 뜻있는 이들은 10대 중·후반이면 벌써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고 20대로 접어들면 이미 당당한 혁명맹장이 되는 가열찬 혁명의 시대였다.

개인사 쪽으로만 보자면 박헌영은 불행한 남자였다.

세 차례 혼인을 했지만 식구들과 정답게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배다른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지만 2명만 살아 남았다.

주세죽과 사이에서 난 딸 비비안나(1928

)는 모이세예프 무용단 무용수를 하다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고, 1939년 출옥한 다음 지하생활을 하던 충북 청주 비밀 아지트에서 ‘해방일보’ 주필로 유명한 정태식(鄭泰植, 1910

)의 5촌 조카로 ‘하우스키퍼’를 하던 두 번째 부인 정순년(鄭順年, 1920

?)에게 낳은 아들 박병삼(朴秉三, 1941

)은 조계종 이름으로 중노릇을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상으로 있던 1949년 평양에서 혼인한 세 번째 부인 윤레나한테서 낳은 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는 그 자취를 모른다.

내무성 지하감옥에 3년 동안 갇혀 있던 박헌영이 1956년 7월 19일 평양 근교 숲 속에서 처형되기 직전 “집사람과 어린 두 자식은 외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언약을 지키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윤레나는 조선공산당 3대 이론가의 하나로 ‘노력인민’ 주필이었던 조두원(趙斗元, 1905

?)의 처제였다.

1922년 4월 2일, 국내에 혁명 거점을 마련하려고 압록강변 안동으로 갔다가 왜경에게 붙잡혔다.

상해 트로이카인 김단야, 임원근(林元根, 1900

1963)과 함께였다.

서울로 올라간 것은 평양 감옥에서 1년 10개월 징역을 마친 다음날이었다.

1월 20일, 이즈음 주세죽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고, 어머니가 성대한 혼례식을 새로 올려주었다.

이때가 무지갯빛 강철 같은 세계적 혁명가 박헌영에게는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당시 여론조사서 대통령감 1위로 1925년 4월 17일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화요회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것은 ‘동아일보’ 지방부 로 있을 때다.

초대 책임비서는 김재봉(金在鳳, 1890

1944)이다.

다음 날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를 김단야·조봉암(曺奉岩, 1899

1959)과 함께 치렀고 사흘 뒤에 열린 고려공청중앙간부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임됐다.

8월 ‘’ 사회부 로 들어갔다가 두 달 만에 해직됐는데, 사회주의 를 해직하지 않으면 발행 정지 처분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총독부의 희망에 따른 것이다.

10월 25일 한양청년연맹 주최로 ‘반기독교 대강연회’가 열렸다.

이때 강사와 강연 제목은 김단야 ‘기독교의 기원’, 박헌영 ‘과학과 종교’, 홍순준(洪淳俊)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다.

박헌영은 또 ‘개벽’에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줄거리를 보면 대략 이렇다.

“종교는 과학과 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 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

”11월 29일,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악랄한 고문과 취조를 받던 중 주세죽은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고, 박헌영은 열차편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박헌영이 쓴 ‘죽음의 집, 조선의 감옥에서’의 한 대목이다.

“내가 있었던 모든 감옥의 각 방에는 침대는 물론 의자도 없었고 맨바닥에 가마니만 깔려 있었다.

방 안의 온도는 보통 영하 5

6℃였다.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어망을 짜는 노역에 시달렸다.

수인들은 방한 효과가 전혀 없는 아주 얇은 겉옷 한 장을 입고 지냈다.

산책 시간은 전혀 없었고 목욕도 일 주일에 한 번밖에 할 수 없었다.

독서가 허용되는 책은 불교나 기독교 등의 종교서적과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팸플릿 정도였다.

편지와 면회는 두 달에 한 번 허락해주었다.

음식으로는 대두(大豆)로 만든 맛없는 수프에 종종 소금에 절인 배추가 나왔다.

 감옥의 규율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책을 압수하고 독방에 집어넣고 급식을 줄였다.

이외에도 손발을 묶고 짐승처럼 매질을 했다.

경찰서를 거쳐 오는 정치범들 가운데서 건강한 상태로 감옥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감옥에서 형편없는 음식과 힘겨운 노역으로 건강을 결정적으로 해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박순병·박광흠·박길양과 권오산 같은 프롤레타리아 용사들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양광(佯狂)이라는 것이 있다.

거짓으로 미친 척함으로써 잘못된 세상과 그런 세상에서 단물이나 빨아먹는 속악한 자들을 한껏 조롱하는 것이다.

기개 높던 옛 선비들이 쓰던 방편이었다.

세조 쿠데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매월당(梅月堂)이 그러하였다.

매월당의 그것은 그러나, 반정(反正)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따르지 않는 유가 먹물의 슬픈 몽니에 지나지 않았다.

박헌영의 그것은 달랐다.

양광을 담보로 삶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 길밖에 길이 없었다.

‘심신상실’ 판정을 받아 병보석 판정을 얻어낸 ‘세계사적 개인’이 함흥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것은 1928년 8월, 29살 난 세계적 혁명가의 위대한 탈출이었다.

‘통일 후 북한 동포와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게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김용호라는 이가 노랫말을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노랫말을 지은 이가 노래를 부른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박헌영과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원경 스님이다.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두만강 근처에서 들은 음악 천재 김용환은 두만강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푸른 강물 위에서 빈 배를 젓는 뱃사공을 보았고 배를 타고 탈출했다는 박헌영의 모습이 겹치면서 음악적 영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민족 해방을 위하여 온몸을 던져 싸우다가 강을 건너간 인민의 벗 박헌영이 돌아오기를 애태게 기다리는 마음이 절절히 녹아 있는 노랫말이다.

박헌영이 바로 ‘그리운 님’이었다는 것이다.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언제나 오려나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언제나 오려나님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밤 깊은 두만강에 밤새가 우니떠나던 그 님이 보고 싶구려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언제나 오려나 모스크바로 간 박헌영은 레닌대학에 들어가고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간다.

박헌영은 주세죽에게 ‘코레예바’라는 러시아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조선 여자’라는 뜻이다.

박헌영은 레닌대학을 마친 다음 상해로 갔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라는 코뮌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은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6년 징역을 살고 나온 것은 1939년 9월이다.

박헌영이 대전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던 1937년 11월 5일, 김단야가 소련비밀경찰에게 체포된다.

일제 경찰의 밀정이라는 이유였다.

곧바로 처형된 김단야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희생양이었다.

조선공산당원이었던 김춘성이라는 자가 투서를 했는데, 김단야는 한때 혁명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부유한 집안의 젊은이’가 젊은 혈기로 혁명을 가지고 놀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22년 이후 체포된 동지들이 동일한 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김단야가 가벼운 형을 받거나 무사히 도주할 수 있던 것이 밀정이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박헌영 또한 그로부터 19년 뒤 비슷한 이유로 처형되니, 똑같은 논리요 똑같은 수법이다.

‘아리랑’으로 유명한 김산, 곧 장지락(張志樂, 1905

1938)이 그러하였고 조명희(趙明熙, 1894

1942)가 그러했다.

스탈린문학상을 받았다고 서울 친구들이 축하모임을 연 것이 해방 다음 해였는데,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가 일제 첩자로 몰려 처형된 것은 그 4년 전이다.

박헌영이 상해에서 붙잡혀 조선으로 끌려간 다음 모스크바로 가서 김단야와 재혼한 주세죽도 체포됐다.

‘사회적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5년간 카자흐스탄에서 유배생활을 한 주세죽은 형기가 끝난 다음에도 보호감호법에 묶여 1946년까지 유배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박헌영 선생은 빨리 나타나서 우리들의 지도에 당(當)하라!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려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 8·15 이후 서울 종로 네거리에 나붙은 삐라였다.

전남 광주 시내 한 벽돌공장에 4년간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있던 박헌영이 전주형무소에서 나오는 김삼룡(金三龍, 1910

1950)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것은 8월 18일이다.

 경성콤그룹 동지 중심으로 감옥에서 나오고 지하에서 솟아나온 순정한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박헌영·이주상·이관술·김삼룡·이현상·홍증식·김형선·권오직·최원택 등 20명 안쪽이었다.

인류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일제의 야수적 폭압 아래서도 꿋꿋하게 절개를 지켜낸 주의자들 거의 전부였다.

이들 공산주의 핵심 역량들은 곧바로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를 만들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펴낼 것을 결의한다.

사회주의 선도국 소비에트와 연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소련 부영사 샤브신과 접촉했는데, 다음은 샤브신 부인인 역사학자 샤부시나가 본 박헌영의 첫 인상이다.

“지식인다운 외모와 다소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를 살피는 태도(지하활동의 오랜 습관으로 인한 듯)와 침착하고 과묵함, 이와 더불어 왠지 각별히 무게가 있어 보이는 모습. 이러한 특징들이 두드러졌다.

”박헌영은 미국 군용기를 타고 귀국한 이승만과 민족통일 문제를 놓고 회담했다.

이승만은 친일파의 즉각 숙청에 반대하며 독립국가 수립을 뒤로 미루자고 했고,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 문제는 잠시도 미룰 수 없는 민족사의 엄숙한 명령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좌우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갈라지니, 민족 분단 비극은 이미 예정된 명운이었다.

이우적(李友狄)·정태식(鄭泰植)과 함께 조선 공산당 3대 이론가였던 조두원(趙斗元)이 쓴 글이 있다.

박헌영을 가리켜 ‘조선 인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요, 친일파들에게는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수제국 침략을 격퇴한 을지문덕과 당제국 침략을 물리친 연개소문과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보기로 들었다.

그런 다음 일제 강점 36년간의 민족사 절명 위기에 나타나 나라를 구한 사람이 박헌영이라고 했다.

박헌영이 즐겨 쓴 이름은 이정(而丁)이다.

‘고무래가 되겠다’는 말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워서 행복한 불을 지펴야 되는 인민의 아궁이를 꽉 막고 있는 극우세력 잿더미를 긁어내는 고무래가 되겠다는 다짐에서 썼던 이름이다.

박헌영은 여론 조사에서 대통령감 1위로 뽑힌 사람이다.

여운형이 2위고 3위는 이관술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그 한참 밑이다.

그런 이정이 북으로 올라간 것이 1946년 9월 29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는 하나 객담이지만 그의 월북 자체가 이미 패배를 안고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조직이 있는 남반부에서 버텼어야 했다.

남로당 무장력이던 이현상 항미빨치산 부대가 무너져버린 것은 1953년 9월이다.

 김성동, 위클리경향 793 호, 2008. 9. 30.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위클리경향 현대사아리랑...http://weekly.khan.co.kr/khnm_serial.html?mode=series_sublist&s_code=nm020     박헌영은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다.

   월북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시절의 박헌영...당시 여론조사서 대통령감 1 위였다고 한다.

  1917 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연합이 성립되어 '민족자결주의' 를 선언하였다.

두달 후 미국도 '민족자결주의' 를 발표하였다.

 소련이 선언한 '민족' 은 자본제국 식민지로 전락한 1 백여 약소민족인데 반하여,미국이 말하는 '민족' 은 1 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에 국한되었다.

일본은 미국과 연합국으로 조선은 애초에 윌슨 선언의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소련의 민족자결의 원칙에 쏠린 약소국의 민심을 흩어놓기 위한 교란작전에 불과했다.

조선을 필리핀과 맞바꿔 일본에 할애한 나라는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박헌영과 김일성...  윌슨의 선언에 고무된 조선의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은전국적인 만세운동을 벌여 국제사회에 조선 독립을 호소하고자고종 45 일장 장례식날인 1919 년 3 월 1 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막상 수십만의 애도 인파가 서울에 집결하자민족지도자로 나선 33 인은 크게 당황하여 탑골공원 옥외집회를 포기하고,대신 탑골공원 근처의 고급 한식당인 태화관에서 자기들끼리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낭독후 최린이 직접 총독부 경무총감에 전화를 걸어 자수, 투항하였다.

최린 등 이날 식당에서 연행된 이들의 대다수는 머지않아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박헌영] 해부학


 정작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자는 학생들이었다.

3. 1. 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3. 1. 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48 년 박헌영...김일성 등이 묘향산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다.

  1926 년 순종 장례식날 6. 10. 만세운동 이후 항일운동은 온전히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으며,공산주의자 그들은 인본주의와 민주주의 신념을 가진,근본적으로 선량하고 온건한 고급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역사는 흘러 박헌영과 이현상 등은 실패한 혁명가가 되었고,남한은 친일 매국노들의 나라가 되었다.

    박헌영과 여운형...미군정 정보 당국은 여운형을 '정치적 기회주의자' 로 단정지었다.

여운형은 좌우의 정치세력뿐 아니라 미군정과 북한에까지 두루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하기야 당시의 모든 인물들은 미국과 소련의 조연에 불과하지만...  '해방 이후의 역사' 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매국노' 가 '애국자' 가 되고, 실제 '애국자' 는 역사 뒤로 사라져버렸다.

 역사가 왜곡되어있는 판에 사회의 가치를 말해서 무엇하랴.'뉴라이트' 같은 작자들이 설쳐대고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 의 이유이기도 하다, '친일' 과 '부일' 의 뿌리는 깊고, 넓고, 또 길다.

역사도 상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숙청되기 얼마 전의 박헌영...  부러져버린 ‘인민의 고무래’ 박헌영 약관의 21세 조선 최초 공산주의자 되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상록수’의 작가로 유명한 심훈(沈薰, 1901

1936)이 1927년 12월 2일에 쓴 시다.

‘박군의 얼굴’이라는 제목인데, 심훈의 슬픔과 노여움은 격렬하게 이어진다.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시에는 세 사람의 ‘박’이 나온다.

‘C사’는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몸담고 있던 ‘시대일보’로 보인다.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는 첫 번째 박군은 일본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째 복역 중인 박열(朴烈, 1902

1974)이고 두 번째 박은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잡혀 끔찍한 족대기질(고문)을 당하던 끝에 죽은 박순병(朴純秉, 1901

1926)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선 박’은 박헌영(朴憲永, 1900

1956)이다.

문학비판가 최원식(인하대 교수)의 연구에 따른 것인데, 시는 치떨리는 노여움을 넘어 굳은 마음다짐으로 이어진다.

박아 박군아 XX(헌영)아!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모로 흘긴 저 눈동자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오냐 박군아눈을 빼어서 갈고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너와 같이 모든 X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년 후배인 심훈이 노엽고 슬픈 목소리로 부르짖은 박헌영은 2년 만에 병보석으로 감옥을 나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심신상실’이라는 병명이었으니, 자기 배설물을 먹는 따위의 미친 증세를 심하게 보였던 까닭이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7년 10월 21일치 기사다.

“서대문형무소 독감방에서 신음 중인 조선공산당사건 피고의 한 사람인 박헌영은 그동안 병세가 더욱 높아서 정신이 전혀 상실되어 식음을 전폐한 데다가, 더구나 독을 마시려고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므로, 형무소에서는 만일을 염려하여 두 손에 고랑을 채워서 경계 중이라는데, 이인, 허헌, 김병로, 후루야 네 변호사는 15일 오전에 재판소 당국에 보석원을 제출하였다는데, 병세가 그와 같이 위중한 터이므로 보석이 허가될 듯하다더라.”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받은 족대기질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다.

박헌영의 증언이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체포되기만 하면 그는 곧바로 예비심문이 이루어지는 경찰서의 비밀 장소로 끌려가게 된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 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려 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 8명의 경찰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 박헌영은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대흥보통학교를 나와 16살 때인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졸업하던 해에 일어난 3·1만세운동에 들었는데, 심훈이 이즈음 박헌영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있다.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 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더니라.”고보를 나온 다음 해 잡지 ‘녀자시론’에 편집원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뒤에 그를 ‘미제의 첩자’로 몰아붙이게 되는 빌미가 된다.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 사건 공판문헌’이라는 것을 보자. “피소자 박헌영은 1919년경 서울에서 잡지 ‘녀자시론’의 편집원으로 있을 때부터 동 잡지를 주간하는 친미분자 차마리사와 기독교 선교사로서 연희전문 교원(후에 교장)으로 있던 미국인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이용하여 숭미사상을 품게 되었고 1925년 11월 초순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각지의 지하 비밀조직을 고백하고 지도적 간부들을 고발함으로써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 탄압에 복무하였으며 그 대가로 ‘정신착란’이라는 구실 밑에 ‘보석’의 명목으로 석방되었고 1939년 9월에는 대전형무소에서 일제 앞에 혁명운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사상전향’을 표명하고 출옥하였다.

”여기서부터 박헌영의 이른바 ‘정권전복음모’와 ‘간첩사건’들이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한마디로 줄이면 일제 때는 일제의 사주를 받는 일제 간첩이었고, 미제 때는 미제의 사주를 받는 악질반동 미제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녀자시론’은 제4호까지 발간되었던 월간 잡지였는데, 확인되지 않는 제2호를 빼고는 어디에도 박헌영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박헌영은 1920년 9월 고학을 해볼 작정으로 일본 동경으로 가서 두 달 동안 물색하다가 실패하고 나가사키를 거쳐 중국 상해로 간다.

친구인 김단야(金丹冶, 1900

1938)의 주선으로 이동휘(李東輝, 1873

1935)와 김만겸(金萬謙, 1886

?)이 지도하는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에 들어가 공산주의운동을 시작한다.

1921년 4월 상해상과대학에 들어갔으나 학자금을 댈 수 없어 서너 달 만에 그만두고, 고려공산청년단을 거쳐 고려공산당에 들어간다.

고려공산당은 이동휘, 김만겸, 안병찬(安炳瓚, ?

1922), 여운형(呂運亨, 1886

1947), 조동호(趙東祜, 1892

1954) 등이 주도하던 이르쿠츠파를 말한다.

박헌영은 당에서 내는 비합법 기관지 ‘올타’ 편집을 하면서 당에서 운영하던 사회주의연구소에서 사상연구에 힘쓴다.

같은 해에 주세죽(朱世竹, 1898

1953)과 내외가 되었다.

1930년 심훈이 첫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을 쓰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김동렬은 박헌영을, 김동렬의 연인 강세정은 주세죽을 모델로 한 것이다.

심훈은 그때 항주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벗 박헌영을 만나 혁명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던 피끓는 청춘이었다.

‘동방의 애인’을 보면 박헌영의 삶이 몹시 궁핍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심훈은 뒷날 쓴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에서 박헌영과 관계를 이렇게 읊었다.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사이었다.

)”1920년 11월부터 1922년 3월 말까지, 21살부터 23살까지 16개월 동안 박헌영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고려공산청년단 결성에 참가하여 그 비서 자리를 맡은 것과 고려공산당에 들어감으로써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었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큰 일은 혼인을 한 것이었다.

 주세죽. 함남 함흥 출신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여학교를 나와 상해에서 음악학교를 다니고 있던 주의자였다.

박헌영은 모두 세 차례 공식, 비공식 혼인을 하게 되는데, 호적에 적힌 것으로는 두 살 더 많은 주세죽이 첫사랑이다.

박헌영 22세, 주세죽 24세. 이제 기준으로 보면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때에 뜻있는 이들은 10대 중·후반이면 벌써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고 20대로 접어들면 이미 당당한 혁명맹장이 되는 가열찬 혁명의 시대였다.

개인사 쪽으로만 보자면 박헌영은 불행한 남자였다.

세 차례 혼인을 했지만 식구들과 정답게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배다른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지만 2명만 살아 남았다.

주세죽과 사이에서 난 딸 비비안나(1928

)는 모이세예프 무용단 무용수를 하다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고, 1939년 출옥한 다음 지하생활을 하던 충북 청주 비밀 아지트에서 ‘해방일보’ 주필로 유명한 정태식(鄭泰植, 1910

)의 5촌 조카로 ‘하우스키퍼’를 하던 두 번째 부인 정순년(鄭順年, 1920

?)에게 낳은 아들 박병삼(朴秉三, 1941

)은 조계종 이름으로 중노릇을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상으로 있던 1949년 평양에서 혼인한 세 번째 부인 윤레나한테서 낳은 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는 그 자취를 모른다.

내무성 지하감옥에 3년 동안 갇혀 있던 박헌영이 1956년 7월 19일 평양 근교 숲 속에서 처형되기 직전 “집사람과 어린 두 자식은 외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언약을 지키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윤레나는 조선공산당 3대 이론가의 하나로 ‘노력인민’ 주필이었던 조두원(趙斗元, 1905

?)의 처제였다.

1922년 4월 2일, 국내에 혁명 거점을 마련하려고 압록강변 안동으로 갔다가 왜경에게 붙잡혔다.

상해 트로이카인 김단야, 임원근(林元根, 1900

1963)과 함께였다.

서울로 올라간 것은 평양 감옥에서 1년 10개월 징역을 마친 다음날이었다.

1월 20일, 이즈음 주세죽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고, 어머니가 성대한 혼례식을 새로 올려주었다.

이때가 무지갯빛 강철 같은 세계적 혁명가 박헌영에게는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당시 여론조사서 대통령감 1위로 1925년 4월 17일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화요회 야체이카’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것은 ‘동아일보’ 지방부 로 있을 때다.

초대 책임비서는 김재봉(金在鳳, 1890

1944)이다.

다음 날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제1차 창립대표회를 김단야·조봉암(曺奉岩, 1899

1959)과 함께 치렀고 사흘 뒤에 열린 고려공청중앙간부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임됐다.

8월 ‘’ 사회부 로 들어갔다가 두 달 만에 해직됐는데, 사회주의 를 해직하지 않으면 발행 정지 처분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총독부의 희망에 따른 것이다.

10월 25일 한양청년연맹 주최로 ‘반기독교 대강연회’가 열렸다.

이때 강사와 강연 제목은 김단야 ‘기독교의 기원’, 박헌영 ‘과학과 종교’, 홍순준(洪淳俊)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다.

박헌영은 또 ‘개벽’에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줄거리를 보면 대략 이렇다.

“종교는 과학과 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 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

”11월 29일,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악랄한 고문과 취조를 받던 중 주세죽은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고, 박헌영은 열차편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박헌영이 쓴 ‘죽음의 집, 조선의 감옥에서’의 한 대목이다.

“내가 있었던 모든 감옥의 각 방에는 침대는 물론 의자도 없었고 맨바닥에 가마니만 깔려 있었다.

방 안의 온도는 보통 영하 5

6℃였다.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어망을 짜는 노역에 시달렸다.

수인들은 방한 효과가 전혀 없는 아주 얇은 겉옷 한 장을 입고 지냈다.

산책 시간은 전혀 없었고 목욕도 일 주일에 한 번밖에 할 수 없었다.

독서가 허용되는 책은 불교나 기독교 등의 종교서적과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팸플릿 정도였다.

편지와 면회는 두 달에 한 번 허락해주었다.

음식으로는 대두(大豆)로 만든 맛없는 수프에 종종 소금에 절인 배추가 나왔다.

 감옥의 규율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책을 압수하고 독방에 집어넣고 급식을 줄였다.

이외에도 손발을 묶고 짐승처럼 매질을 했다.

경찰서를 거쳐 오는 정치범들 가운데서 건강한 상태로 감옥에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감옥에서 형편없는 음식과 힘겨운 노역으로 건강을 결정적으로 해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박순병·박광흠·박길양과 권오산 같은 프롤레타리아 용사들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양광(佯狂)이라는 것이 있다.

거짓으로 미친 척함으로써 잘못된 세상과 그런 세상에서 단물이나 빨아먹는 속악한 자들을 한껏 조롱하는 것이다.

기개 높던 옛 선비들이 쓰던 방편이었다.

세조 쿠데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매월당(梅月堂)이 그러하였다.

매월당의 그것은 그러나, 반정(反正)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따르지 않는 유가 먹물의 슬픈 몽니에 지나지 않았다.

박헌영의 그것은 달랐다.

양광을 담보로 삶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 길밖에 길이 없었다.

‘심신상실’ 판정을 받아 병보석 판정을 얻어낸 ‘세계사적 개인’이 함흥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것은 1928년 8월, 29살 난 세계적 혁명가의 위대한 탈출이었다.

‘통일 후 북한 동포와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게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고 한다.

김용호라는 이가 노랫말을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노랫말을 지은 이가 노래를 부른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박헌영과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원경 스님이다.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두만강 근처에서 들은 음악 천재 김용환은 두만강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푸른 강물 위에서 빈 배를 젓는 뱃사공을 보았고 배를 타고 탈출했다는 박헌영의 모습이 겹치면서 음악적 영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박헌영] 진실 또는 거짓..



민족 해방을 위하여 온몸을 던져 싸우다가 강을 건너간 인민의 벗 박헌영이 돌아오기를 애태게 기다리는 마음이 절절히 녹아 있는 노랫말이다.

박헌영이 바로 ‘그리운 님’이었다는 것이다.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언제나 오려나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언제나 오려나님 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밤 깊은 두만강에 밤새가 우니떠나던 그 님이 보고 싶구려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언제나 오려나 모스크바로 간 박헌영은 레닌대학에 들어가고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들어간다.

박헌영은 주세죽에게 ‘코레예바’라는 러시아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조선 여자’라는 뜻이다.

박헌영은 레닌대학을 마친 다음 상해로 갔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라는 코뮌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1933년 7월 5일, 박헌영은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6년 징역을 살고 나온 것은 1939년 9월이다.

박헌영이 대전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던 1937년 11월 5일, 김단야가 소련비밀경찰에게 체포된다.

일제 경찰의 밀정이라는 이유였다.

곧바로 처형된 김단야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희생양이었다.

조선공산당원이었던 김춘성이라는 자가 투서를 했는데, 김단야는 한때 혁명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부유한 집안의 젊은이’가 젊은 혈기로 혁명을 가지고 놀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22년 이후 체포된 동지들이 동일한 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김단야가 가벼운 형을 받거나 무사히 도주할 수 있던 것이 밀정이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박헌영 또한 그로부터 19년 뒤 비슷한 이유로 처형되니, 똑같은 논리요 똑같은 수법이다.

‘아리랑’으로 유명한 김산, 곧 장지락(張志樂, 1905

1938)이 그러하였고 조명희(趙明熙, 1894

1942)가 그러했다.

스탈린문학상을 받았다고 서울 친구들이 축하모임을 연 것이 해방 다음 해였는데,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가 일제 첩자로 몰려 처형된 것은 그 4년 전이다.

박헌영이 상해에서 붙잡혀 조선으로 끌려간 다음 모스크바로 가서 김단야와 재혼한 주세죽도 체포됐다.

‘사회적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5년간 카자흐스탄에서 유배생활을 한 주세죽은 형기가 끝난 다음에도 보호감호법에 묶여 1946년까지 유배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박헌영 선생은 빨리 나타나서 우리들의 지도에 당(當)하라!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려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 8·15 이후 서울 종로 네거리에 나붙은 삐라였다.

전남 광주 시내 한 벽돌공장에 4년간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있던 박헌영이 전주형무소에서 나오는 김삼룡(金三龍, 1910

1950)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것은 8월 18일이다.

 경성콤그룹 동지 중심으로 감옥에서 나오고 지하에서 솟아나온 순정한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박헌영·이주상·이관술·김삼룡·이현상·홍증식·김형선·권오직·최원택 등 20명 안쪽이었다.

인류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일제의 야수적 폭압 아래서도 꿋꿋하게 절개를 지켜낸 주의자들 거의 전부였다.

이들 공산주의 핵심 역량들은 곧바로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를 만들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펴낼 것을 결의한다.

사회주의 선도국 소비에트와 연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소련 부영사 샤브신과 접촉했는데, 다음은 샤브신 부인인 역사학자 샤부시나가 본 박헌영의 첫 인상이다.

“지식인다운 외모와 다소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를 살피는 태도(지하활동의 오랜 습관으로 인한 듯)와 침착하고 과묵함, 이와 더불어 왠지 각별히 무게가 있어 보이는 모습. 이러한 특징들이 두드러졌다.

”박헌영은 미국 군용기를 타고 귀국한 이승만과 민족통일 문제를 놓고 회담했다.

이승만은 친일파의 즉각 숙청에 반대하며 독립국가 수립을 뒤로 미루자고 했고,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 문제는 잠시도 미룰 수 없는 민족사의 엄숙한 명령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좌우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갈라지니, 민족 분단 비극은 이미 예정된 명운이었다.

이우적(李友狄)·정태식(鄭泰植)과 함께 조선 공산당 3대 이론가였던 조두원(趙斗元)이 쓴 글이 있다.

박헌영을 가리켜 ‘조선 인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요, 친일파들에게는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는데, 수제국 침략을 격퇴한 을지문덕과 당제국 침략을 물리친 연개소문과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보기로 들었다.

그런 다음 일제 강점 36년간의 민족사 절명 위기에 나타나 나라를 구한 사람이 박헌영이라고 했다.

박헌영이 즐겨 쓴 이름은 이정(而丁)이다.

‘고무래가 되겠다’는 말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워서 행복한 불을 지펴야 되는 인민의 아궁이를 꽉 막고 있는 극우세력 잿더미를 긁어내는 고무래가 되겠다는 다짐에서 썼던 이름이다.

박헌영은 여론 조사에서 대통령감 1위로 뽑힌 사람이다.

여운형이 2위고 3위는 이관술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그 한참 밑이다.

그런 이정이 북으로 올라간 것이 1946년 9월 29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는 하나 객담이지만 그의 월북 자체가 이미 패배를 안고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조직이 있는 남반부에서 버텼어야 했다.

남로당 무장력이던 이현상 항미빨치산 부대가 무너져버린 것은 1953년 9월이다.

 김성동, 위클리경향 793 호, 2008. 9. 30.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위클리경향 현대사아리랑...http://weekly.khan.co.kr/khnm_serial.html?mode=series_sublist&s_code=nm020     박헌영은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다.

그는 1930년 2월 3일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1941년 3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하고 주석 자리에 올랐다.

호치민은 20세기 최대 강국 미국과 싸워 이긴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늘 검소한 옷차림과 따뜻한 웃음으로, 사람들은 주석이 된 그를 ‘호 아저씨’ 또는 존경의 의미로 ‘깨우치는 자’라는 뜻의 ‘호치민’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프랑스에 타협적이었다.

그러나 1946년 11월 우발적인 사고로 프랑스군이 6천 명의 베트남인을 학살하자 대불 항전을 선언했다.

그는 늘 다산 선생이 쓴 ‘목민심서’를 탐독했다고 한다.

ⓒ매일신문 - www.imaeil.com #2 호치민과 박헌영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박헌영이 얽힌 이야기 1, 2, 3편>[출처]http://mnd-nara.tistory.com/1179????? ???? ???? ?? ??? -1?-80????? ?? ???? ? ?? ???? ?? ?? ???. ?? ?? ???? ??(??)?? ??? ???? ?? ??? ??? ??? ...mnd-nara.tistory.com   80년대인가?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들었다.

 이미 죽은 베트남의 국부(國父)적인 존재인 호치민이 근세 조선의 석학인 정약용 선생의 명저(名著)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애독했다는 말이었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에 썼던 책으로 일선 지방 관리의 행정 매뉴얼과 윤리 지침서격의 책이다.

  요즈음도 꾸준한 독자가 있는 스티디 셀러로써 여러 다산 연구가들이 다산 최고 수작(秀作)중의 하나로 꼽는 명저다.

 그 때는 30만 명의 국군이 파월되어 싸웠던 치열한 월남전의 기억이 생생했을 때였다.

 주월(駐越) 한국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공격했었던 베트콩들과 정규 월맹군들이 자기들 아비처럼 존경하는 공산당의 괴수 호치민(胡 志明)이 정약용 선생의 책을 애독했다니 도대체가 맞지 않은 소리로 들렸다.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  처음에는 목민심서가 어떻게 해서 월남어로 번역 되었을까하는 치졸한 상상을 하다가 그 쪽 방향으로 지식이 축적되면서 호치민이 우리 할아버지 세대처럼 한문에 능했었고 그가 중국에 머무를 때 목민심서를 구입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하게 되었다.

(실제로 호치민은 다량의 한시를 남길만큼 한문에 능했었다.

)  동아시아 최고 걸작 의술서인 허준의 동의보감이 진작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상당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목민심서도 중국에서 수입되어 팔릴 수가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관련된 토픽성 일화가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가끔씩 점멸하듯 떠올랐다.

  호치민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한 정도가 아니라 평생 통치의 정신적 바이블로 삼아 머리맡에 놓고 수시로 가까이 했다는 것이다.

 또 죽고 나서 그가 즐겨 읽던 목민심서가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말도 들었다.

호치민은 북쪽의 무식한 김일성처럼 개인 숭배 같은 것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릇이 크고 겸손하고 소박해 베트남 인민의 존경을 받았었다.

  그런 자가 목민심서를 크게 평가했다고 하니 한 때는 우리와 피나게 싸운 적국의 우두머리인 그에게 친근한 마음도 들었다.

 세월이 지나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인 남양주군과 베트남의 하노이 시가 이 목민심서를 인연으로 자매결연을 했다는 기사도 볼 수 있었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서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관계를 의심하는 글이 뜨기 시작했다.

 어느 연구심 많은 분이 여기에 의심을 품고 베트남까지 찾아가 호치민 기념관을 조사해보니 전시되었다는 목민심서도 보이지 않았고 박물관 직원에게 물어봐도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는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관계가 뜬소문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의심의 것이었다.

 글쎄? 아직도 살아 계신 관계자 분이 많은 한국 전쟁사에서도 아는 사람을 눈뜨고 병신 만드는 거짓 이야기들이 하도 많이 겪어 본 나로서 그 분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손에 넣어서 읽게 된 한 책에서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사한 사람이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남로당의 괴수였다가, 후에 김일성에게 잔인하게 제거당한 박헌영임을 알게 되어 적지 않게 놀랐다.

 20세기가 개화하는 1900년, 양반 출신으로 미곡상이었던 유부남 아버지와 과부로서 주막집 주모였던 어머니 사이에 서자(庶子)로 태어난 박헌영은 일생을 공산당 운동에 투신해 파란만장하게 살았으나 결국 1957년 미제 간첩으로 몰려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공산주의의 이상은 그에게 비참한 죽음과 가족의 불행한 파탄을 선물했을 따름이었다.

 박헌영은 경성고보 (현 경기 고등학교) 졸업 후 1920년 상해로 가, 이루츠크 파인 고려 공산당에 입당해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두 번이나 체포되어 형을 살았지만 1926년 두 번째 체포 된 뒤에 형을 살다가 거짓으로 미친 행색을 해 가석방 되었다.

석방된 그는 1928년 국내 공산당 조직의 도움을 받아 부인인 주세죽(朱世竹)과 함께 두만강을 거쳐 모스크바로 밀출국했다.

 --------------------------------------------------------주세죽은 함흥 영생여고보 출신으로 허정숙, 고명자등과 함께 조선 공산주의 활동 초기 여성 지도자 3 총사 중 한 명이었다.

상해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갔다가 그 곳에서 박헌영과 만나 여운형의 주례로 결혼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3인의 여성들   당시 경성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자 지성인이었으나 모진 인간을 만나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못 생긴 허정숙이 김 일성의 총애를 받아 북한의 여러 요직을 다 거치고 천수를 다한 사실과 대조가 된다.

 그녀는 박헌영이 귀국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 현재 4.19 도서관 앞의 양복점에서 점원 노릇까지 하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박헌영은 세 번 체포되어 10년 가까운 형을 살았다.

그리고 이것이 1차 체포 때였다.

) 더 이야기 하겠지만 주세죽은 1953년 모스크바에서 늙고 병들어 객사(客死)하였다.

---------------------------------------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 지도자들 교육을 위해서 만든 최고 교육 기관인 국제 레닌 학교에 입학을 했다.

박헌영은 이 학교에서 1929년 1월에 입학하여 1931년 말까지 3 년간을 다녔다.

(조선인으로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나중에 그의 아내 주세죽을 빼앗아 간 김단야가 있다.

)  그가 이곳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중에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 호치민이 있었다.

 호치민은 상당한 국제파다.

그는 20세가 넘자 국제 여객선 주방 보조로 취직해 세계 각국을 여행했다.

타고난 역마살이 있었고 요리 솜씨가 있어 밥 벌어먹을 걱정이 없었던 배경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는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했고, 그 후 영국으로 가 1919년까지 살았다.

그 뒤에 프랑스와 소련, 홍콩, 광동 등지에서 젊은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계속)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박헌영이 얽힌 이야기 -2편-

이야기 N.A.R.A/울프독의 War History2012/12/04 18:10 [출처]? http://story.aladin.co.kr/narawolfdog/79783?link=http://mnd-nara.tistory.com/1181                   [????? ???? ???? ?? ??? -2?-] "??? ?????"story.aladin.co.kr         호치민이 베트남 혁명에 매진하고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광저우 생활 당시인 1926년 36세 때 21세의 중국인 증설명[曾雪明-Tang Tuyet Minh]과 최초의 결혼 생활을 했다.

 장개석의 공산당 탄압으로 호치민이 도주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고 그녀는 호치민을 만나지 못한 채 1991년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호치민은 증설명[曾雪明-Tang Tuyet Minh]과 최초의 결혼 생활을 했다.

  호치민 전기에 아주 기묘한 글이 나온다.

미국에서 살던 1911-13시기 한국의 민족주의자를 만나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것이 당시 행적을 숨긴채 활동한 박헌영을 말하며 그의 입장을 살려주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닌가 한다.

 (박헌영은 모스크바 학교 졸업후 공산주의 운동을 본격화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적이 있었는데 본인의 모스크바 체류 사실만은 끝까지 숨길 정도로 행적을 숨긴 채 활동했다.

부인 증설명(曾雪明)에게 보낸 호 치민의 한문 편지 - 대단한 달필이다.

이 정도이니 목민심서는 문제없이 읽었을 것이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박헌영은 그에게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그가 전해 받은 목민심서는 우리말 번역판이 아니라 순수한 한자의 원본이었으리라고 본다.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 교육자와 말단 관리를 지낸 그의 아비가 실력있는 유학자여서 호치민은 한학을 배워 열 살 무렵에 한시(漢詩)를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한문에도 능했다.

) 그는 이 책에 막역한 친분이 있는 친구를 일컫는 붕우[朋友] 라는 단어를 서명으로 써주었다.

  책에 붕우(朋友)라는 서명이 있었다는 세밀한 사실까지 알려진 것을 보면 호치민에게 책을 선사한 사실을 최초로 발설한 사람은 당사자인 박헌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러면 한국에 박헌영이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사했다는사실이 알려진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또한 이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인연에 대한 일화가 왜 월남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세계의 이목이 호치민에게 집중되고 있던 60년대에 전혀 노출되지 않고 있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80년대에야 나타나서 지금까지 띄엄띄엄 세간에 알리게 된 이유도 궁금하다.

 아직까지 이에 관한 자료를 구할 길이 없으니 추리를 할 수밖에 없다.

 김일성(左)과 박헌영(右)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가 퇴색되고 한국과 공산주의와의 접촉이 시작되면서야 호치민과 목민심서의 이야기가 언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가능성있는 추리는 이렇다.

박헌영은 1946년 월북한 후에 김일성 밑에서 외무상을 지냈다.

그리고 소련과 중국을 자주 왕래했다.

  남쪽을 침공하였던 김일성이 유엔군의 개입으로 북으로 패주할 때 모택동을 찾아가 지원을 애걸한 사람도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호치민 뿐만 아니라 모택동과도 인연이 있었다.

 --------------------------------------------박헌영과 모택동간의 인연을 소개하기 위해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  박헌영이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밀출국을 하던 때에 주세죽은 임신 6개월의 임신 상태였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삭이라서 함경선 열차에서 딸을 낳았다는 설도 있는데 내생각에는 만삭의 몸으로 장거리 여행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박헌영은 이 딸에게 비비안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32년 박헌영의 졸업 후 부부는 상해로 가서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했다.

딸은 모스크바의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겨졌다.

스타소바 육아원은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가들 자녀를 위한 고급 육아원이었다.

     그러나 1933년 박헌영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왔다.

그로서는 세 번째 체포였다.

 홀로 남은 주세죽은 할 수없이 소련으로 돌아가 동료 공산주의 운동가 김단야와 눈이 맞아 동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 김 비탈리라는 아들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때 김단야는 일본 간첩 혐의로 체포 되어 총살되고 외국인 노동자 출판부에서 조선어 교정원으로 일하던 주세죽은 중앙 아시아 크질오르다의 방직공장 개찰원(開札員)이라는 한직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는 15년간 그 곳에서 유형 생활을 해야 했다.

김단야와 주세죽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곧 죽고 말았다.

  그녀는 힘든 고생 끝에 박헌영이가 북한의 요직에 있다는 말을 듣고 스타린에게 몇 번이나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이미 젊은 내연의 처가 있던 박헌영은 그녀를 외면했다.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겨진 비비안나는 틈을 내 크질오르다에서 찾아온 주세죽과는 몇 년에 한 번 씩은 만났지만 아버지 박헌영과는 해방 후 그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와 비비안나가 그가 외상으로 있던 북한으로 갔을 때에만 만났을 뿐이었다.

 비비안나는 비록 고아원에서 컸지만 소련 민속 무용의 천재로서 일찍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고급 육아원에는 모택동의 두 아들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폭격으로 죽은 큰아들 모안영과 조금 정신이 부실한 둘째 아들 모안청이었다.

두 사람은 모택동이 혁명을 한답시고 일찍 집을 나갔고 어머지 양개혜가 장개석군에 총살당하자 상해의 거리에서 고아처럼 살다가 공산당 조직에 의해서 구출되어 극비리에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두 아들들은 전후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모택동(左)과 모안영(右) - 모택동과 만났을 때 박헌영은 두 사람의 자식이 얽힌 인연을 틀림없이 들먹였을 것으로 본다.

   스타소바 육아원에서 박헌영의 딸 비비안나와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은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

 모택동 아들 모안영은 한국 전쟁때 미군기의 네이팜탄에 죽었다.

  ? ?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박헌영이 얽힌 이야기 -3편-

이야기 N.A.R.A/울프독의 War History2012/12/07 11:47 [출처]  http://story.aladin.co.kr/narawolfdog/79912?link=http://mnd-nara.tistory.com/1184                  [????? ???? ???? ?? ??? -3?-] "??? ?????"story.aladin.co.kr         박헌영은 외상으로서 국제 활동중에 소련 아니면 중국에서 호치민과 상봉했거나 제 삼자를 통해서 연락을 취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여기에 그럴 가능성이 있을꺼라 예상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중.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김단야,박헌영,양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뒷줄 맨 오른쪽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주세죽이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무려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스타린을 세 번이나 만나 남한 침공 허락을 졸라댔다.

스타린의 허락을 받자 다시 두 사람은 5월 13일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나 남한 침공의 동의를 받았다.

 당시 호치민도 1950년 2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같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모택동과 스타린의 대 프랑스 항쟁에 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었다.

   박헌영 그가 어느 정도 오래 모스크바에 머물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기간에 박헌영과 만났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양국의 거물이 되어 상봉했을 때 호치민은 사실이건 아니건 인사치레라도 그가 선사한 목민심서를 잘 읽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것이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사실의 시초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박헌영은 호치민과 접촉 후 이런 사실을 김일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했을 것이다.

현대는 자기 PR 시대라는데 공산주의자들도 예외일 리가 없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1949년 방문때이다.

    박헌영과 목민심서의 일화를 포함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많은 북의 남로당 간부들은 거의 처형당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또 북에서 알만한 인간이 있다해도 김일성의 치하에서 감히 미제 간첩으로 몰려죽은 박헌영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김일성에 반대하다가 탄압 당하자 북한에서 중국이나 소련으로 탈출해나간 인사중에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세월이 흐르고 한국의 같은 사람들을 만난 기회에 이 사실을 털어놨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럴만한 사람들을 보면 남로당의 신진 간부로 활동하다가 월북해서 노동당 유럽국장까지 지냈지만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중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탈출한 박갑동씨나 소련파였으나 박헌영과 막역한 사이였던 강동 정치 학원장 박병률씨 등을 예상한다.

   박갑동 씨는 한국에 여러 번 왔었고, 국내 주요 신문에 자기의 회고록을 연재 하는 등 한국 언론과 관계가 깊었었다.

소련으로 망명했던 박병률 씨도 한국에 다녀간바 있다.

 이런 연유로 탄생한 목민심서의 일화가 연줄을 타고 한국 사회에 한 역사 정보로써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추리다.

  --------------------------------박갑동 씨는 국내에서 1983년에 박헌영에 관한 책을 출판했었다.

이 책에는 목민심서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생존한 남로당원으로서 박헌영이 아끼는 후배였던 그가 목민심서의 일화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 박헌영이 자기의 최후를 부르는 짓인지도 모르고 김일성을 부추겨서 남침을 주도한 것은 우리로서는 용납할 수없는 민족 범죄 행위다.

 ------------------------------무지한 김일성은 대남 침략을 생각했을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예상과 박헌영이 큰 소리를 친 20만 명의 지하 남로당원의 봉기를 기대하고 남한 붕괴는 서울만 점령하면 다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전쟁이 빠르면 3일 이내에 끝나리라고 기대했다.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김일성이 그가 월북 남로당을 사냥할 때 한 구실이 되었다.

두 한심한 인간들의 치졸한 욕심이 남북 민족에게 끔찍한 3년의 전란의 고통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김일성(좌)과 박헌영(우) 하지만 목민심서의 일화를 떠나서 박헌영을 보면 참 기구한 인생을 살다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박헌영을 소개하는 김에 여기에 한마디 더 그의 가족과 그의 최후를 말해본다.

박헌영이 마지막 순간에 추구했던 것은 인민의 해방이니 노동자의 천하니하는 거창한 이데올로기도 아니었고, 목민심서가 가르치는 치민(治民)의 철학도 아니었다.

세상에 내동댕이 치고 떠나야 하는 처와 두 명의 자식들에 대한 근심과 애정이었다.

  그가 남긴 여러 자식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가 추구하다가 죽음으로 보답받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이었다.

 첫 부인 주세죽과의 사이에 낳은 박비비안나라는 딸은 고아원에서 부모없이 불운하게 자라야했다.

 (그래도 천부적인 무용솜씨로 이 불행을 극복하고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인 남편과 잘 살고 있다.

)  소련 유학후 박헌영은 상해에서 체포되어 조선에 돌아온 1933년으로 부터 6년간의 형무소살이를 하고 1939년에 출감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재개하였다.

이 무렵 비밀 아지트의 위장생활을 위해서 조직에서 알선해주어 위장 동거하던 10대 산골처녀 정순년과 눈이 맞아 아들 박병삼을 낳았다.

  그러나 정순년은 아기를 두고 아버지에게 끌려가 다시 시집을 가야했고 박헌영이 월북 후 버려진 아들은 박헌영의 어머니와 그의 이복형 박지영이 기르다가 다시 박헌영의 남로당 동지인 김삼룡과 김제술이 맡아 길렀다.

아들 박병삼은 김제술이 지리산 남부군 이현상을 만나려고 찾아간 화엄사에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원경 스님이 된 박병삼은 나중에 어머니를 찾아 만났고 세월이 지나자 다시 언론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를 찾아가 누나 박비비안나와 상봉하였다.

누나 비비안나가 동생인 그의 초청으로 한국에 한 번 왔을 때 박헌영의 딸이 왔다고 언론의 대단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었다.

  원경 스님은 아직도 오산의 어느 절 주지스님으로 잘 지내고 있다.

박헌영의 윗 자녀는 그래도 이데올로기를 살다가 죽은 아버지가 남겨준 운명을 비교적 잘 극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박헌영에게는 이미 한국 언론에 잘 알려진 두 자녀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낳은 아들, 딸의 남매가 있었다.

 박헌영이 첫째 주세죽과 중간의 여인 정순년외에 북한 외무상 때 김일성도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윤옥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박헌영과 윤옥   미모의 그녀는 남한에서부터 박헌영의 비서였다가 박헌영을 찾아 월북해서 역시 외무상인 그의 비서를 하다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무려 25살이나 되었지만 금슬이 좋아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었다.

 알려지기는 박헌영은 윤옥과의 사이에 낳은 첫 딸에게는 나타샤라는 이름을 주었고 두 번째 아들에게는 세르게이라는 소련식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김일성 세상에서 불안해지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자식들만은 김일성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기르고 싶은 생각에서 그렇게 작명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박헌영에게 최후가 왔다.

한국전이 끝나가는 1952년 3월 김 일성은 그와 남로당 일파를 몽땅 체포하여 미제국주의자의 간첩이라는 단체 누명을 씌워주고 숙청을 개시했다.

  이강국, 이승엽, 임화, 한설야, 설정식등 한 때 남한의 지성인으로 행세했었던 그들은 명분뿐인 재판을 받고 줄줄이 처형당했다.

그래도 소련과 중국의 참견으로 박헌영은 1957년까지 그런대로 감옥에서 실낱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처형일은 부정확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일 늦은 1957년 설을 채택한다.

)  1957년 7월 연안파와 소련파가 주도한 8월 종파 사업에 놀라 발광한 김일성은 박헌영을 처형할 것을 소련 비밀경찰 출신 이며 내무상인 방학세에게 지시하였다.

 1957년 7월 19일 밤에 박헌영을 끌어내서 야산으로 데려가는 방학세에게 박 헌영은 일제나 김일성의 재판정에서 쏟아내던 독한 사자후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나약한 넋두리를 했다.

 “오늘 죽을 것은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 주시오. 그런데 수상(김일성)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 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애뜻한 애정은 마지막으로 그를 김일성 같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에게 매달리는 환상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방학세는 못 들은 척하고 그의 머리에 두 발의 권총 실탄을 안겼다.

 그리고 한반도를 소란스럽게 뒤흔들던 인간중의 하나가 가족에 대한 걱정을 품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아내 윤옥과 두 자녀의 소식은 어디에도 흘러나오고 있지 않다.

  (완)        그는 1930년 2월 3일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1941년 3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하고 주석 자리에 올랐다.

호치민은 20세기 최대 강국 미국과 싸워 이긴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늘 검소한 옷차림과 따뜻한 웃음으로, 사람들은 주석이 된 그를 ‘호 아저씨’ 또는 존경의 의미로 ‘깨우치는 자’라는 뜻의 ‘호치민’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프랑스에 타협적이었다.

그러나 1946년 11월 우발적인 사고로 프랑스군이 6천 명의 베트남인을 학살하자 대불 항전을 선언했다.

그는 늘 다산 선생이 쓴 ‘목민심서’를 탐독했다고 한다.

ⓒ매일신문 - www.imaeil.com #2 호치민과 박헌영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박헌영이 얽힌 이야기 1, 2, 3편>[출처]http://mnd-nara.tistory.com/1179????? ???? ???? ?? ??? -1?-80????? ?? ???? ? ?? ???? ?? ?? ???. ?? ?? ???? ??(??)?? ??? ???? ?? ??? ??? ??? ...mnd-nara.tistory.com   80년대인가?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들었다.

 이미 죽은 베트남의 국부(國父)적인 존재인 호치민이 근세 조선의 석학인 정약용 선생의 명저(名著)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애독했다는 말이었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에 썼던 책으로 일선 지방 관리의 행정 매뉴얼과 윤리 지침서격의 책이다.

  요즈음도 꾸준한 독자가 있는 스티디 셀러로써 여러 다산 연구가들이 다산 최고 수작(秀作)중의 하나로 꼽는 명저다.

 그 때는 30만 명의 국군이 파월되어 싸웠던 치열한 월남전의 기억이 생생했을 때였다.

 주월(駐越) 한국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공격했었던 베트콩들과 정규 월맹군들이 자기들 아비처럼 존경하는 공산당의 괴수 호치민(胡 志明)이 정약용 선생의 책을 애독했다니 도대체가 맞지 않은 소리로 들렸다.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  처음에는 목민심서가 어떻게 해서 월남어로 번역 되었을까하는 치졸한 상상을 하다가 그 쪽 방향으로 지식이 축적되면서 호치민이 우리 할아버지 세대처럼 한문에 능했었고 그가 중국에 머무를 때 목민심서를 구입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하게 되었다.

(실제로 호치민은 다량의 한시를 남길만큼 한문에 능했었다.

)  동아시아 최고 걸작 의술서인 허준의 동의보감이 진작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상당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목민심서도 중국에서 수입되어 팔릴 수가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관련된 토픽성 일화가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가끔씩 점멸하듯 떠올랐다.

  호치민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한 정도가 아니라 평생 통치의 정신적 바이블로 삼아 머리맡에 놓고 수시로 가까이 했다는 것이다.

 또 죽고 나서 그가 즐겨 읽던 목민심서가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말도 들었다.

호치민은 북쪽의 무식한 김일성처럼 개인 숭배 같은 것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릇이 크고 겸손하고 소박해 베트남 인민의 존경을 받았었다.

  그런 자가 목민심서를 크게 평가했다고 하니 한 때는 우리와 피나게 싸운 적국의 우두머리인 그에게 친근한 마음도 들었다.

 세월이 지나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인 남양주군과 베트남의 하노이 시가 이 목민심서를 인연으로 자매결연을 했다는 기사도 볼 수 있었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서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관계를 의심하는 글이 뜨기 시작했다.

 어느 연구심 많은 분이 여기에 의심을 품고 베트남까지 찾아가 호치민 기념관을 조사해보니 전시되었다는 목민심서도 보이지 않았고 박물관 직원에게 물어봐도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는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관계가 뜬소문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의심의 것이었다.

 글쎄? 아직도 살아 계신 관계자 분이 많은 한국 전쟁사에서도 아는 사람을 눈뜨고 병신 만드는 거짓 이야기들이 하도 많이 겪어 본 나로서 그 분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손에 넣어서 읽게 된 한 책에서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사한 사람이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남로당의 괴수였다가, 후에 김일성에게 잔인하게 제거당한 박헌영임을 알게 되어 적지 않게 놀랐다.

 20세기가 개화하는 1900년, 양반 출신으로 미곡상이었던 유부남 아버지와 과부로서 주막집 주모였던 어머니 사이에 서자(庶子)로 태어난 박헌영은 일생을 공산당 운동에 투신해 파란만장하게 살았으나 결국 1957년 미제 간첩으로 몰려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공산주의의 이상은 그에게 비참한 죽음과 가족의 불행한 파탄을 선물했을 따름이었다.

 박헌영은 경성고보 (현 경기 고등학교) 졸업 후 1920년 상해로 가, 이루츠크 파인 고려 공산당에 입당해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두 번이나 체포되어 형을 살았지만 1926년 두 번째 체포 된 뒤에 형을 살다가 거짓으로 미친 행색을 해 가석방 되었다.

석방된 그는 1928년 국내 공산당 조직의 도움을 받아 부인인 주세죽(朱世竹)과 함께 두만강을 거쳐 모스크바로 밀출국했다.

 --------------------------------------------------------주세죽은 함흥 영생여고보 출신으로 허정숙, 고명자등과 함께 조선 공산주의 활동 초기 여성 지도자 3 총사 중 한 명이었다.

상해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갔다가 그 곳에서 박헌영과 만나 여운형의 주례로 결혼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3인의 여성들   당시 경성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자 지성인이었으나 모진 인간을 만나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못 생긴 허정숙이 김 일성의 총애를 받아 북한의 여러 요직을 다 거치고 천수를 다한 사실과 대조가 된다.

 그녀는 박헌영이 귀국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 현재 4.19 도서관 앞의 양복점에서 점원 노릇까지 하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박헌영은 세 번 체포되어 10년 가까운 형을 살았다.

그리고 이것이 1차 체포 때였다.

) 더 이야기 하겠지만 주세죽은 1953년 모스크바에서 늙고 병들어 객사(客死)하였다.

---------------------------------------  그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 지도자들 교육을 위해서 만든 최고 교육 기관인 국제 레닌 학교에 입학을 했다.

박헌영은 이 학교에서 1929년 1월에 입학하여 1931년 말까지 3 년간을 다녔다.

(조선인으로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나중에 그의 아내 주세죽을 빼앗아 간 김단야가 있다.

)  그가 이곳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중에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 호치민이 있었다.

 호치민은 상당한 국제파다.

그는 20세가 넘자 국제 여객선 주방 보조로 취직해 세계 각국을 여행했다.

타고난 역마살이 있었고 요리 솜씨가 있어 밥 벌어먹을 걱정이 없었던 배경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는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했고, 그 후 영국으로 가 1919년까지 살았다.

그 뒤에 프랑스와 소련, 홍콩, 광동 등지에서 젊은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계속)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박헌영이 얽힌 이야기 -2편-

이야기 N.A.R.A/울프독의 War History2012/12/04 18:10 [출처]? http://story.aladin.co.kr/narawolfdog/79783?link=http://mnd-nara.tistory.com/1181                   [????? ???? ???? ?? ??? -2?-] "??? ?????"story.aladin.co.kr         호치민이 베트남 혁명에 매진하고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광저우 생활 당시인 1926년 36세 때 21세의 중국인 증설명[曾雪明-Tang Tuyet Minh]과 최초의 결혼 생활을 했다.

 장개석의 공산당 탄압으로 호치민이 도주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고 그녀는 호치민을 만나지 못한 채 1991년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호치민은 증설명[曾雪明-Tang Tuyet Minh]과 최초의 결혼 생활을 했다.

  호치민 전기에 아주 기묘한 글이 나온다.

미국에서 살던 1911-13시기 한국의 민족주의자를 만나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것이 당시 행적을 숨긴채 활동한 박헌영을 말하며 그의 입장을 살려주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닌가 한다.

 (박헌영은 모스크바 학교 졸업후 공산주의 운동을 본격화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적이 있었는데 본인의 모스크바 체류 사실만은 끝까지 숨길 정도로 행적을 숨긴 채 활동했다.

부인 증설명(曾雪明)에게 보낸 호 치민의 한문 편지 - 대단한 달필이다.

이 정도이니 목민심서는 문제없이 읽었을 것이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박헌영은 그에게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그가 전해 받은 목민심서는 우리말 번역판이 아니라 순수한 한자의 원본이었으리라고 본다.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 교육자와 말단 관리를 지낸 그의 아비가 실력있는 유학자여서 호치민은 한학을 배워 열 살 무렵에 한시(漢詩)를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한문에도 능했다.

) 그는 이 책에 막역한 친분이 있는 친구를 일컫는 붕우[朋友] 라는 단어를 서명으로 써주었다.

  책에 붕우(朋友)라는 서명이 있었다는 세밀한 사실까지 알려진 것을 보면 호치민에게 책을 선사한 사실을 최초로 발설한 사람은 당사자인 박헌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러면 한국에 박헌영이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사했다는사실이 알려진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또한 이 목민심서와 호치민의 인연에 대한 일화가 왜 월남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세계의 이목이 호치민에게 집중되고 있던 60년대에 전혀 노출되지 않고 있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80년대에야 나타나서 지금까지 띄엄띄엄 세간에 알리게 된 이유도 궁금하다.

 아직까지 이에 관한 자료를 구할 길이 없으니 추리를 할 수밖에 없다.

 김일성(左)과 박헌영(右)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가 퇴색되고 한국과 공산주의와의 접촉이 시작되면서야 호치민과 목민심서의 이야기가 언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가능성있는 추리는 이렇다.

박헌영은 1946년 월북한 후에 김일성 밑에서 외무상을 지냈다.

그리고 소련과 중국을 자주 왕래했다.

  남쪽을 침공하였던 김일성이 유엔군의 개입으로 북으로 패주할 때 모택동을 찾아가 지원을 애걸한 사람도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호치민 뿐만 아니라 모택동과도 인연이 있었다.

 --------------------------------------------박헌영과 모택동간의 인연을 소개하기 위해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  박헌영이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밀출국을 하던 때에 주세죽은 임신 6개월의 임신 상태였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삭이라서 함경선 열차에서 딸을 낳았다는 설도 있는데 내생각에는 만삭의 몸으로 장거리 여행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박헌영은 이 딸에게 비비안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32년 박헌영의 졸업 후 부부는 상해로 가서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했다.

딸은 모스크바의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겨졌다.

스타소바 육아원은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가들 자녀를 위한 고급 육아원이었다.

     그러나 1933년 박헌영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왔다.

그로서는 세 번째 체포였다.

 홀로 남은 주세죽은 할 수없이 소련으로 돌아가 동료 공산주의 운동가 김단야와 눈이 맞아 동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 김 비탈리라는 아들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때 김단야는 일본 간첩 혐의로 체포 되어 총살되고 외국인 노동자 출판부에서 조선어 교정원으로 일하던 주세죽은 중앙 아시아 크질오르다의 방직공장 개찰원(開札員)이라는 한직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는 15년간 그 곳에서 유형 생활을 해야 했다.

김단야와 주세죽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곧 죽고 말았다.

  그녀는 힘든 고생 끝에 박헌영이가 북한의 요직에 있다는 말을 듣고 스타린에게 몇 번이나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이미 젊은 내연의 처가 있던 박헌영은 그녀를 외면했다.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겨진 비비안나는 틈을 내 크질오르다에서 찾아온 주세죽과는 몇 년에 한 번 씩은 만났지만 아버지 박헌영과는 해방 후 그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와 비비안나가 그가 외상으로 있던 북한으로 갔을 때에만 만났을 뿐이었다.

 비비안나는 비록 고아원에서 컸지만 소련 민속 무용의 천재로서 일찍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고급 육아원에는 모택동의 두 아들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폭격으로 죽은 큰아들 모안영과 조금 정신이 부실한 둘째 아들 모안청이었다.

두 사람은 모택동이 혁명을 한답시고 일찍 집을 나갔고 어머지 양개혜가 장개석군에 총살당하자 상해의 거리에서 고아처럼 살다가 공산당 조직에 의해서 구출되어 극비리에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두 아들들은 전후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모택동(左)과 모안영(右) - 모택동과 만났을 때 박헌영은 두 사람의 자식이 얽힌 인연을 틀림없이 들먹였을 것으로 본다.

   스타소바 육아원에서 박헌영의 딸 비비안나와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은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

 모택동 아들 모안영은 한국 전쟁때 미군기의 네이팜탄에 죽었다.

  ? ?

목민심서와 호치민과 박헌영이 얽힌 이야기 -3편-

이야기 N.A.R.A/울프독의 War History2012/12/07 11:47 [출처]  http://story.aladin.co.kr/narawolfdog/79912?link=http://mnd-nara.tistory.com/1184                  [????? ???? ???? ?? ??? -3?-] "??? ?????"story.aladin.co.kr         박헌영은 외상으로서 국제 활동중에 소련 아니면 중국에서 호치민과 상봉했거나 제 삼자를 통해서 연락을 취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여기에 그럴 가능성이 있을꺼라 예상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중.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김단야,박헌영,양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뒷줄 맨 오른쪽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주세죽이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무려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스타린을 세 번이나 만나 남한 침공 허락을 졸라댔다.

스타린의 허락을 받자 다시 두 사람은 5월 13일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나 남한 침공의 동의를 받았다.

 당시 호치민도 1950년 2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같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모택동과 스타린의 대 프랑스 항쟁에 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었다.

   박헌영 그가 어느 정도 오래 모스크바에 머물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기간에 박헌영과 만났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양국의 거물이 되어 상봉했을 때 호치민은 사실이건 아니건 인사치레라도 그가 선사한 목민심서를 잘 읽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것이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사실의 시초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박헌영은 호치민과 접촉 후 이런 사실을 김일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했을 것이다.

현대는 자기 PR 시대라는데 공산주의자들도 예외일 리가 없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1949년 방문때이다.

    박헌영과 목민심서의 일화를 포함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많은 북의 남로당 간부들은 거의 처형당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또 북에서 알만한 인간이 있다해도 김일성의 치하에서 감히 미제 간첩으로 몰려죽은 박헌영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김일성에 반대하다가 탄압 당하자 북한에서 중국이나 소련으로 탈출해나간 인사중에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세월이 흐르고 한국의 같은 사람들을 만난 기회에 이 사실을 털어놨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럴만한 사람들을 보면 남로당의 신진 간부로 활동하다가 월북해서 노동당 유럽국장까지 지냈지만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중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탈출한 박갑동씨나 소련파였으나 박헌영과 막역한 사이였던 강동 정치 학원장 박병률씨 등을 예상한다.

   박갑동 씨는 한국에 여러 번 왔었고, 국내 주요 신문에 자기의 회고록을 연재 하는 등 한국 언론과 관계가 깊었었다.

소련으로 망명했던 박병률 씨도 한국에 다녀간바 있다.

 이런 연유로 탄생한 목민심서의 일화가 연줄을 타고 한국 사회에 한 역사 정보로써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추리다.

  --------------------------------박갑동 씨는 국내에서 1983년에 박헌영에 관한 책을 출판했었다.

이 책에는 목민심서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생존한 남로당원으로서 박헌영이 아끼는 후배였던 그가 목민심서의 일화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 박헌영이 자기의 최후를 부르는 짓인지도 모르고 김일성을 부추겨서 남침을 주도한 것은 우리로서는 용납할 수없는 민족 범죄 행위다.

 ------------------------------무지한 김일성은 대남 침략을 생각했을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예상과 박헌영이 큰 소리를 친 20만 명의 지하 남로당원의 봉기를 기대하고 남한 붕괴는 서울만 점령하면 다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전쟁이 빠르면 3일 이내에 끝나리라고 기대했다.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김일성이 그가 월북 남로당을 사냥할 때 한 구실이 되었다.

두 한심한 인간들의 치졸한 욕심이 남북 민족에게 끔찍한 3년의 전란의 고통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김일성(좌)과 박헌영(우) 하지만 목민심서의 일화를 떠나서 박헌영을 보면 참 기구한 인생을 살다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박헌영을 소개하는 김에 여기에 한마디 더 그의 가족과 그의 최후를 말해본다.

박헌영이 마지막 순간에 추구했던 것은 인민의 해방이니 노동자의 천하니하는 거창한 이데올로기도 아니었고, 목민심서가 가르치는 치민(治民)의 철학도 아니었다.

세상에 내동댕이 치고 떠나야 하는 처와 두 명의 자식들에 대한 근심과 애정이었다.

  그가 남긴 여러 자식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가 추구하다가 죽음으로 보답받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이었다.

 첫 부인 주세죽과의 사이에 낳은 박비비안나라는 딸은 고아원에서 부모없이 불운하게 자라야했다.

 (그래도 천부적인 무용솜씨로 이 불행을 극복하고 이름을 날렸으며 현재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인 남편과 잘 살고 있다.

)  소련 유학후 박헌영은 상해에서 체포되어 조선에 돌아온 1933년으로 부터 6년간의 형무소살이를 하고 1939년에 출감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재개하였다.

이 무렵 비밀 아지트의 위장생활을 위해서 조직에서 알선해주어 위장 동거하던 10대 산골처녀 정순년과 눈이 맞아 아들 박병삼을 낳았다.

  그러나 정순년은 아기를 두고 아버지에게 끌려가 다시 시집을 가야했고 박헌영이 월북 후 버려진 아들은 박헌영의 어머니와 그의 이복형 박지영이 기르다가 다시 박헌영의 남로당 동지인 김삼룡과 김제술이 맡아 길렀다.

아들 박병삼은 김제술이 지리산 남부군 이현상을 만나려고 찾아간 화엄사에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원경 스님이 된 박병삼은 나중에 어머니를 찾아 만났고 세월이 지나자 다시 언론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를 찾아가 누나 박비비안나와 상봉하였다.

누나 비비안나가 동생인 그의 초청으로 한국에 한 번 왔을 때 박헌영의 딸이 왔다고 언론의 대단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었다.

  원경 스님은 아직도 오산의 어느 절 주지스님으로 잘 지내고 있다.

박헌영의 윗 자녀는 그래도 이데올로기를 살다가 죽은 아버지가 남겨준 운명을 비교적 잘 극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박헌영에게는 이미 한국 언론에 잘 알려진 두 자녀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낳은 아들, 딸의 남매가 있었다.

 박헌영이 첫째 주세죽과 중간의 여인 정순년외에 북한 외무상 때 김일성도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윤옥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박헌영과 윤옥   미모의 그녀는 남한에서부터 박헌영의 비서였다가 박헌영을 찾아 월북해서 역시 외무상인 그의 비서를 하다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무려 25살이나 되었지만 금슬이 좋아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었다.

 알려지기는 박헌영은 윤옥과의 사이에 낳은 첫 딸에게는 나타샤라는 이름을 주었고 두 번째 아들에게는 세르게이라는 소련식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김일성 세상에서 불안해지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자식들만은 김일성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기르고 싶은 생각에서 그렇게 작명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박헌영에게 최후가 왔다.

한국전이 끝나가는 1952년 3월 김 일성은 그와 남로당 일파를 몽땅 체포하여 미제국주의자의 간첩이라는 단체 누명을 씌워주고 숙청을 개시했다.

  이강국, 이승엽, 임화, 한설야, 설정식등 한 때 남한의 지성인으로 행세했었던 그들은 명분뿐인 재판을 받고 줄줄이 처형당했다.

그래도 소련과 중국의 참견으로 박헌영은 1957년까지 그런대로 감옥에서 실낱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처형일은 부정확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일 늦은 1957년 설을 채택한다.

)  1957년 7월 연안파와 소련파가 주도한 8월 종파 사업에 놀라 발광한 김일성은 박헌영을 처형할 것을 소련 비밀경찰 출신 이며 내무상인 방학세에게 지시하였다.

 1957년 7월 19일 밤에 박헌영을 끌어내서 야산으로 데려가는 방학세에게 박 헌영은 일제나 김일성의 재판정에서 쏟아내던 독한 사자후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나약한 넋두리를 했다.

 “오늘 죽을 것은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 주시오. 그런데 수상(김일성)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 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애뜻한 애정은 마지막으로 그를 김일성 같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에게 매달리는 환상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방학세는 못 들은 척하고 그의 머리에 두 발의 권총 실탄을 안겼다.

 그리고 한반도를 소란스럽게 뒤흔들던 인간중의 하나가 가족에 대한 걱정을 품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아내 윤옥과 두 자녀의 소식은 어디에도 흘러나오고 있지 않다.

  (완)        한 번은 태블릿PC 충전기를 구해오라고 했다’고 대답하는 시나리오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 인터뷰는 <>가 청문회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 17일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실제 청문회를 보면, 박헌영 전 과장은 “최근 종편에서 무제가 된 태블릿PC 본 적이 있나”라는 이만희 의원의 질문에 “본 적 있다.

제가 본 PC가 종편에 공개된 PC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고영태가 태블릿을 들고 다녔고, 저에게 충전기를 사 오라고 지시해서다.

아무거나 꽂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일반 충전기가 아니다.

보니까 핀이 예전 거더라. 그래서 제가 못 사갔다.

고영태씨가 저에게 그걸로 핀잔을 했고 그래서 기억한다”고 답했다.

고영태씨가 청문회 이틀 전에 예측한 그대로 묻고 답한 셈이다.

  이만희 의원은 청문회 도중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K스포츠재단의 청문회 대책 문건에서 같은 친박계인 이완영, 최교일 의원과 함께 K스포츠재단에 우호적이라는 걸 의미하는 ‘파란색’ 표시가 되어 있던 인물이다.

4차에 걸친 청문회에서 이완영, 최교일 의원과 함께 증인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을 덜어내는 식의 질문을 던져 누리꾼들의 비판을 사기도 했다.

 이만희 의원은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내고 ‘위증 모의’ 의혹에 대해 “명백한 허위 사실”이라고 주장한 뒤 “이 시간까지 박헌영 전 과장과 만나거나 전화통화조차도 한 사실이 없다.

더욱이 사전에 입을 맞추거나 태블릿PC에 대해 고씨가 들고 다녔다거나 고씨의 것으로 박 전 과장에게 위증을 하라고 지시하거나 교사한 사실은 더더욱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4차 청문회를 앞둔 지난 12일 더블루K 직원과 고씨의 펜싱 선배가 찾아와 해준 말들을 토대로 청문회에서 질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하는 15일 4차 청문회 오후 질의 당시 이만희 의원과 박헌영 전 K스포츠 과장의 질의 응답 전문  이만희 : 오전 질의에서 박헌영 증인은 일주일에 세번 정도 최순실을 만났다고 했죠 ? 박헌영 : 네 이만희 : 2016년도 올해 1월달에 청담동 더블루 K가 설립이 되고 사무실이 열리고 9월 3일 정도에 청담동에 있는 그 사무실을 철수하지요 . 그러면 그 사무실에 비록 우리 박헌영 증인이 케이스포츠 소속이지만 자주 가서 업무를 본 게 맞죠 ? 박헌영 : 네 , 그렇습니다 . 이만희 : 혹시 그 사무실에서 근무하시면서 최근 종편에서 문제된 그 태블릿 PC를 본 적 있습니까 ? 박헌영 : 네 이만희 : 아 , 그 말씀은 그 태블릿 PC가 이번에 종편에서 문제된 그 태블릿 PC가 맞습니까 ? 박헌영 : 그건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 제가 봤던 PC가 종편에 공개된 PC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태블릿을 고영태가 들고 다녔었고 , 저한테 충전기를 사오라고 시켰었습니다 . 그래서 제가 충전기는 아무거나 꽂으면 되지않냐고 했더니 . 그 충전기가 아니다 . 일반 충전기가 아니다 . 그러면서 보여주길래 보니까 그거에 맞는 충전기를 사 오라고 , 그래서 보니까 핀이 예전 거였고요 . 제가 그걸 사오겠다 했는데 못 사 갔습니다 . 고영태씨가 저에게 그걸로 핀잔을 좀 했고 . 그런 관계로 제가 그거를 좀 기억을 하는 이만희 : 박헌영 증인은 고영태하고는 상당히 친분이 있지 않습니까 . 그런데 고영태씨는 지난번 청문회에 나와서 그 태블릿 모른다고 했습니다 .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하나 아무것도 없는 것을 검찰에 제출했다고 했는데 . 왜 그렇게 진술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박헌영 :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 그 증언하신 걸 보고 , 저도 청문회 볼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 공태블릿을 , 제가 본 게 그 공태블릿인가 보다고 생각했고 , 최종적으로 그 사무실을 비울 때 그 책상 안에 들어있던 태블릿을 봤기 때문에 . 그 태블릿이 고영태씨가 얘기하는그 공태블릿인가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 그런데 검찰에서는 확보된 태블릿이 한대라는 얘기를 보고 무엇이 진실인지 저도 미스터리였습니다 . 이만희 : 검찰에서는 최순실 사진이 거기 들어있고 태블릿의 위치정보가 최순실 동선과 일치한다는 근거를 내세우면서 최순실 것이 맞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 혹시 제가 고영태와 가까이 지낸 고영태 차은택 두 사람한테 최순실이 태블릿 PC를 자유롭게 사용할 능력있냐고 물어봤는데 그분들은 두 분 다 그 내용을 부인했습니다 . 박헌영 증인은 어떻습니까 . 8개월이나 9개월 가까운 시간을 일주일에 3번 정도 최순실을 만났는데 그 최순실이가 그 종류는 아니겠지만 다른 태블릿 PC나 아니면 PC를 다루는 모습 본 적 있습니까 ? 박헌영 : 최순실씨가 태블릿 쓰는 모습은 저는 한 번도 보질 못했고요 . 이만희 : 그럼 다른 일반 PC는 잘 활용하던가요 ? 박헌영 : 컴퓨터는 어느 정도 쓰시는 것 같았습니다 . 이만희 : 그러면 태블릿 PC를 갖고 다니거나 그것을 쓰고 있는 모습은 못 봤다 ? 박헌영 : 못 봤습니다 . 이만희 : 제가 사실은 이 부분의 질의를 하는 것은 , 태블릿 PC에 대해 질의하면 , 많은 분들이 전화번호가 공개되어 가지고 욕설문자가 포함되어서 옵니다 . 제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이 자리가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하나의 사실로서 점검하듯이 거기서 시작이 됐다고 얘기하는 스모킹건이라고까지 얘기하는 그 태블릿 PC의 진실도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역사 속에 기록하는 것이 저는 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 질의를 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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