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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하지만 관상학적인 접근에서는 그녀의 과거 약력만으로도 금방 정답이 나타난다.

 그녀의 약력을 기준으로한 관상학적 접근은 다음과 같다.

 [명성황후의 간략한 약력]1. 경기도 여주 출생으로 숙종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이다.

2. 귀족 가문으로서 부친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부친이었던 민유중의 5대손이다.

3. 명성황후는 무남독녀로서 8세 때 부친이 사망하였다.

4. 남자 형제가 없어 12촌인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가문의 제사를 지냈다.

5. 명성황후는 소녀시절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의 칭찬이 자자했다.

6. 16세 때 대원군의 아내 민씨의 눈에 띄어 고종과 결혼했다.

7. 고종은 상궁 출신의 궁인 이씨와 사랑에 빠져 명성황후를 등한시했다.

8.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생산하자 대원군은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9. 명성황후도 두 아들을 생산했으나 어린 나이에 모두 요절했다.

10. 황후가 된 후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인간적인 갈등이나 정치적 노선      차이로 결국 등을 돌렸다.

11. 개방정책을 고수하며 임오군란, 청나라와의 화친, 대원군과의 대립,     국고 탕진 등등 시대적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는 명성황후는     1895년 을미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 당하고 말았다.

  명성황후의 간략한 약력이다.

역사학자들은 수많은 사료를 근거로 2번 여인과 3번 여인을 명성황후로 추정하나 고위급 상궁들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명성황후의 관상과 이해]1. 명문 사대부 가문의 출신이라면 1번 여인은 이마가 뒤로 하향하여   우선 거리가 멀다.

평면적인 사진만으로 이마의 부실한 하향을 어찌   판단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수많은 관상을 보다보면 골격을 알 수가 있다.

2. 명성황후는 무남독녀로서 8세때 부친이 사망한다.

   이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4번 여인을 지목할 수 있다.

   가문의 유명무실을 떠나 조실부모하여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에    그 모친은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광활한 이마와 불길한 산근(山根)에다   두 눈의 거리가 멀어 태양과 달의 순리적인 조화가 불균을 이루어    그 생김새만으로도 모든 것을 말해 준다.

 3. 명성황후는 소녀시절부터 무척 총명했다는 점도 4번 여인이 가장 유력하다.

    청결하게 돌출된 이마와 후퇴된 화형 일간(火形 日干)이 정확히 일치한다.

 4. 무남독녀로서 남자 형제가 없는 점도 눈썹이 절단되어 상향하였고    광대와 턱선마저 부실하여 4번 여인이 정확하다.

 5. 자식을 둘이나 생산했으나 모두 저 세상을 보냈다는 점도    1번과 4번 여인에 해당된다.

하지만 광채의 눈빛과 아래 치아의 돌출,     협소한 식록(食祿)에다 산근(山根)마저 종(縱)으로 무너져 있어     4번 여인이 더욱 유력하다.

 6. 시아버지 대원군과 견원지간으로 지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비혈주(鼻穴柱)가 내려앉았고 독선을 뜻하는 재성(財星)과    준두(準頭) 또한 4번과 일치하며    1번 여인은 水形, 2번과 3번 여인은 土形, 4번 여인은 木形에    해당되는데 4번 여인은 얼굴의 화기(火氣)가 약하여 형살로     파극(破剋)하니 시부모와 인연이 없는 점도 4번 여인이 가장 유력하다.

 7. 또한 험난한 정치적 노선에서 한 평생 전략전술에 골머리를 앓았던    그녀의 역사도 4번 여인의 굴곡진 이목구비에서 잘 나타난다.

 역사학자들이 이 글을 본다면 여러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역사는 역사 일뿐 관상학적 접근 방식과는 전혀 별개다.

발본된 고증에 의존한다면 천년만년 고민하고 연구해도 그녀의 얼굴은 찾을 수가 없다.

한 여인의 역사가 그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의 입장에서 관상 자체를 부정하겠다면정말 무식한 아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확률상 4번 여인이 틀림없으나  이 후 그녀의 약력과 더욱 일치하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면 다시 감평해야할 문제다.

 하지만 4명의 여인 중에 명성황후를 찾는다면 4번 외는 결코 그녀의 정체성을 따를 여인이 없다.

명성황후는 4번 여인이 확실하다.

믿어도 좋다.

(스크랩 가능) -현산역리원 현산-   기와집으로 잘 정비된 여주의 명성후 생가는 명성황후의 삶과 어릴때의 모습을 연상케 할 수 있어서 들러볼만하다.

 명성황후에 대한 이미지에 일본이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을미사변때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 무리들은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작업을 했다.

1895년 새벽 미우라 고로의 지휘아래 시해에 참여했던 인물중에 낭인 기쿠치 겐조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명을 받아 명성황후에 대한 저술을 했다.

 기쿠치가 펴낸 책은 '조선잡기'와 '근대조선이면사'로 조선이 지배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기술되어 있다.

고종, 명성황후, 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집권층의 무능력함이나 부패상을 상세히 기술하였는데 실상 적지 않은 내용이 왜곡되어 있었다.

명성황후 생가를 들어가면 바로 옆에 한국어를 비롯한 영어를 포함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디지털 안내판이 있다.

 오른쪽에 열려 있는 대청마루를 통해 명성황후의 초상이 살짝 엿보인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유독 여성분들이 많이 명성황후를 생가를 찾아서 그런지 한나라의 국모이면서 여성으로의 삶을 보고 싶은 한국여성들의 욕구가 느껴졌다.

 명성황후가 되기전 전형적인 양반가에서 태어나 살았던 그녀는 어릴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작년은 광복 70주년과 명성황후 시해 120주기를 함께 맞이하는 해였다.

사람들은 명성황후를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로 가장 많이 접해서 그런지 비극적인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때 그녀의 생애는 많이 주목 받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생가에서 8살까지만 살았다.

조선중기 이후 양반가의 살림이 어떠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면서 일찍 아버지를 여읜 소녀 민정호(자영)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유추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보통은 대원군이 집안의 기가 쇠한 양반가의 여식을 선택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실제 명성황후의 가문은 명문가였다.

 관리가 잘되어 있어서 그런지 다른 한옥이나 고택에 비해 깔끔하면서도 관리상태가 양호하다.

여흥 민씨는 고려 충선왕은 고려 왕실의 족내혼을 금지하면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을 공표하였는데 이중에 여흥 민씨 가문도 속해이었다.

조선뿐만이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명문으로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렸던 가문이다.

 양반가는 그 일을 대신해줄 노비가 필요할 수 밖에 없었다.

자고로 양반이라함은 손에 물을 묻힌다던가 힘든일을 하는 계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딸이 훗날 명성황후에 오르게 된다.

자식을 가지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인 53세에 본 늦둥이 자영은 집안의 이쁨을 독차지하면서 자라난다.

어릴때부터 남다른 영리함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일찍부터 아버지의 철학과 교육관을 받으면서 컸다.

그러나 그녀가 어릴때 아버지가 세상을 뜬다.

다행히도 양오빠를 통해 역사나 경전 등을 섭렵하면서 왕실에 들어가기에 부족할 것이 없을 정도의 소양을 쌓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명성황후 생가에는 조선시대의 삶이 어떠했을지 알 수 있는 살림 가재도구들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중에 실제 사용했던 물건도 있고 다른 곳에서 공수해서 가져다 놓은 것들도 같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왕실의 처가가 살던 집인데 불구하고 조금 초라해보였다.

원래 이곳의 생가는 숙종의 비였던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지어졌던 곳이다.

묘막은 빈소 옆에 지어놓고 돌아가신 분을 모시며 지내는 장소로 보통은 조그마한 초가살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왕비의 부원군이었던 만큼 민유중의 묘막은 크게 지어졌다.

 3년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지어진 묘막은 남겨진 가족들의 생활장소이기도 하고 거주공간이기도 하다.

명성황후가 거주할 때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여주군이 매입하면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기존의 안채를 수리하고 사랑채, 행랑채, 별당까지 중건해놓은 상태이다.

안채에는 명성황후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ㄱ자형 문간채와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서 ㅁ자형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의 사랑방은 쪽마루를 두른 두 칸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공간이 독립적으로 되어 있어서 공부할 때 있어서 적합한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녀가 밀어주었던 세력은 갑신정변에서 실패하게 되고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청세력에 의해 다시 권력을 잡게 된다.

청나라등에 의지하는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였던 일본은 결국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되고 이곳에서 태어나서 왕후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막을 내리게 된다.

 ..    그녀는 고종의 부인이었으며   경복궁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조를 굽히지 않은 ' 조선의 국모' 라는 평판으로 알려져있습니다.

  ???????????  ?      그런데 후세에 전해진 '국모' 라는 명성황후의 이미지와 다르게    그녀에겐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경악스러운 이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명성황후]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은 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해 재평가 논란이 되고 있는    명성황후의 실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       중앙의 요직을 자신과의 친분을 기준으로 등용  ?????     100만냥 = 쌀 2천만kg ( 국가 예산의 약 1/5 ) 을 결혼식 축의금으로 전달    ????       백성들의 세금으로  ? 막대한 사치를 즐겼던 명성황후  ????????     명성황후가 국고를 물쓰듯이 낭비한 결과    흥선대원군이 10년간 쌓은 예산이 고갈되었고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매관매직이라는 불법 행위를    왕과 함께 직접 주도하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발생합니다.

        ??- 미국 의료 선교사 알렌 ?( 1895.01.30 )??  그로인해 ??가뜩이나 열강 세력의 횡포로 궁핍하던 민중생활은 더욱 피폐해져   조선은 가난과 질병의 나락으로 추락한  지옥의 땅으로 변하게 됩니다.

  ???    현명하지 못한 정치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던 명성황후는   그런 탄식조차 용인하지 않고 자신을 험담한  백성들을 죽이고 마을에는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    파탄난 재정으로 군인들의 월급도 1년이 넘게 밀렸으며  ?이는 임오군란 원인이 되었습니다.

 ???  그러던 와중    명성황후는 청나라 세력에 가담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후에는 친일파를 등한시하고 친러파를 등용하는   노골적인 이이제이 정책으로 일본의 분노를 사   밤중에 침입한 일본의 낭인들에의해 무참히 살해당합니다.

   ( 1895.08.20 - 을미사변 )  ???????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명성황후의 악행이 조선을 망국에 이르기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드라마, 뮤지컬 등의 서브컬처로 그녀의 면모가 각색되는 것이    심각한 역사 왜곡의 문제라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 내가 조선의 국모다 " 라는 말도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유명 뮤지컬에서 연출한 대사이지    실제로 그녀가 그런 기개를 보였다는 기록은 전해진바가 없습니다.

   ???? ???????명성황후가 국왕의 ' 부인 ' 이라는 위치를 가지고 일본인들에게 암살당했다는것은 ???굉장히 굴욕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명백하게 별개로? ?? 현대에선 그녀가 사리에 밝은 유능한 정치인이었다는 그릇된 해석으로 맹신되고있으니??? 이보다 황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 명성황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그녀의 적나라한 악행들이 ??날조라고 판명되지 않는 한  절대로 추앙되서는 안될 인물...    바로 명성황후입니다.

   명성황후라는 이름 자체도 그녀에겐 너무 과분하다 생각될 정도입니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조선을 그 지경까지 몰고간것이 민비 ( 명성황후) 였습니다.

            . 였다는 생각이 들어요.20주년 기념으로 VIP석을 S석 금액으로 제일 앞자리에서 보았어요.공연 기간이 있어 앞 좌석을 티켓팅할 수 있어서 신났었어요.최초를 넘어 명작으로 대한민국 뮤지컬의 역사 20주년 공연의 감동대한민국 최초 브로드웨이, 웨스트 엔즈 진출 (2009년)대한민국 최초 1,000회 공연 돌파 (2010년)뉴욕. LA. 런던. 토론토. 일본 구마모토 공연명성황후의 원작은 이문열 소설 '여우사냥'이며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궁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이 우리의 국모를 살해하기 위해 붙인 작전명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울분을 느끼게 하게 되는 아픈 역사입니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원작보다는 표현이 순화된 느낌이에요.시대극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복을 놓칠 수가 없었어요.고풍스러운 자태, 디자인, 무대가 단층이 아닌 2층, 회전으로 돌아가는 무대가 압도적이였어요.군무를 펼치는 안무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을 만큼 화려했어요.김소현 배우가 주연이라 더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어요.서울대 성악과 출신으로 '오페라의 유령'으로 데뷔해서 지금까지 많은 작품들을 하고 있어요.한 사람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의 모습으로, 배우 김소현으로의 모습으로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요.실제로 듣은 음색은 방송으로 듣는 음색보다 더 높고 청량하게 들렸어요.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은 처음으로 가게 되었는데 소극장, 콘서트홀, 미술관, 갤러리 볼 것이 너무 많았어요.집과 거리가 있어 많이 둘러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뮤지컬 관람료가 적은 금액이 아니라 늘 조금의 고민을 하지만아주 가끔은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이 활력소가 되어 좋습니다.

하지만 관상학적인 접근에서는 그녀의 과거 약력만으로도 금방 정답이 나타난다.

 그녀의 약력을 기준으로한 관상학적 접근은 다음과 같다.

 [명성황후의 간략한 약력]1. 경기도 여주 출생으로 숙종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이다.

2. 귀족 가문으로서 부친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부친이었던 민유중의 5대손이다.

3. 명성황후는 무남독녀로서 8세 때 부친이 사망하였다.

4. 남자 형제가 없어 12촌인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가문의 제사를 지냈다.

5. 명성황후는 소녀시절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의 칭찬이 자자했다.

6. 16세 때 대원군의 아내 민씨의 눈에 띄어 고종과 결혼했다.

7. 고종은 상궁 출신의 궁인 이씨와 사랑에 빠져 명성황후를 등한시했다.

8.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생산하자 대원군은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9. 명성황후도 두 아들을 생산했으나 어린 나이에 모두 요절했다.

10. 황후가 된 후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인간적인 갈등이나 정치적 노선      차이로 결국 등을 돌렸다.

11. 개방정책을 고수하며 임오군란, 청나라와의 화친, 대원군과의 대립,     국고 탕진 등등 시대적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는 명성황후는     1895년 을미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 당하고 말았다.

  명성황후의 간략한 약력이다.

역사학자들은 수많은 사료를 근거로 2번 여인과 3번 여인을 명성황후로 추정하나 고위급 상궁들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명성황후의 관상과 이해]1. 명문 사대부 가문의 출신이라면 1번 여인은 이마가 뒤로 하향하여   우선 거리가 멀다.

평면적인 사진만으로 이마의 부실한 하향을 어찌   판단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수많은 관상을 보다보면 골격을 알 수가 있다.

2. 명성황후는 무남독녀로서 8세때 부친이 사망한다.

   이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4번 여인을 지목할 수 있다.

   가문의 유명무실을 떠나 조실부모하여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에    그 모친은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광활한 이마와 불길한 산근(山根)에다   두 눈의 거리가 멀어 태양과 달의 순리적인 조화가 불균을 이루어    그 생김새만으로도 모든 것을 말해 준다.

 3. 명성황후는 소녀시절부터 무척 총명했다는 점도 4번 여인이 가장 유력하다.

    청결하게 돌출된 이마와 후퇴된 화형 일간(火形 日干)이 정확히 일치한다.

[명성황후] 대단하네요.



 4. 무남독녀로서 남자 형제가 없는 점도 눈썹이 절단되어 상향하였고    광대와 턱선마저 부실하여 4번 여인이 정확하다.

 5. 자식을 둘이나 생산했으나 모두 저 세상을 보냈다는 점도    1번과 4번 여인에 해당된다.

하지만 광채의 눈빛과 아래 치아의 돌출,     협소한 식록(食祿)에다 산근(山根)마저 종(縱)으로 무너져 있어     4번 여인이 더욱 유력하다.

 6. 시아버지 대원군과 견원지간으로 지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비혈주(鼻穴柱)가 내려앉았고 독선을 뜻하는 재성(財星)과    준두(準頭) 또한 4번과 일치하며    1번 여인은 水形, 2번과 3번 여인은 土形, 4번 여인은 木形에    해당되는데 4번 여인은 얼굴의 화기(火氣)가 약하여 형살로     파극(破剋)하니 시부모와 인연이 없는 점도 4번 여인이 가장 유력하다.

 7. 또한 험난한 정치적 노선에서 한 평생 전략전술에 골머리를 앓았던    그녀의 역사도 4번 여인의 굴곡진 이목구비에서 잘 나타난다.

 역사학자들이 이 글을 본다면 여러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역사는 역사 일뿐 관상학적 접근 방식과는 전혀 별개다.

발본된 고증에 의존한다면 천년만년 고민하고 연구해도 그녀의 얼굴은 찾을 수가 없다.

한 여인의 역사가 그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의 입장에서 관상 자체를 부정하겠다면정말 무식한 아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확률상 4번 여인이 틀림없으나  이 후 그녀의 약력과 더욱 일치하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면 다시 감평해야할 문제다.

 하지만 4명의 여인 중에 명성황후를 찾는다면 4번 외는 결코 그녀의 정체성을 따를 여인이 없다.

명성황후는 4번 여인이 확실하다.

믿어도 좋다.

(스크랩 가능) -현산역리원 현산-   하지만 관상학적인 접근에서는 그녀의 과거 약력만으로도 금방 정답이 나타난다.

 그녀의 약력을 기준으로한 관상학적 접근은 다음과 같다.

 [명성황후의 간략한 약력]1. 경기도 여주 출생으로 숙종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이다.

2. 귀족 가문으로서 부친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부친이었던 민유중의 5대손이다.

3. 명성황후는 무남독녀로서 8세 때 부친이 사망하였다.

4. 남자 형제가 없어 12촌인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가문의 제사를 지냈다.

5. 명성황후는 소녀시절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의 칭찬이 자자했다.

6. 16세 때 대원군의 아내 민씨의 눈에 띄어 고종과 결혼했다.

7. 고종은 상궁 출신의 궁인 이씨와 사랑에 빠져 명성황후를 등한시했다.

8.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생산하자 대원군은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9. 명성황후도 두 아들을 생산했으나 어린 나이에 모두 요절했다.

10. 황후가 된 후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인간적인 갈등이나 정치적 노선      차이로 결국 등을 돌렸다.

11. 개방정책을 고수하며 임오군란, 청나라와의 화친, 대원군과의 대립,     국고 탕진 등등 시대적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는 명성황후는     1895년 을미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 당하고 말았다.

  명성황후의 간략한 약력이다.

역사학자들은 수많은 사료를 근거로 2번 여인과 3번 여인을 명성황후로 추정하나 고위급 상궁들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명성황후의 관상과 이해]1. 명문 사대부 가문의 출신이라면 1번 여인은 이마가 뒤로 하향하여   우선 거리가 멀다.

평면적인 사진만으로 이마의 부실한 하향을 어찌   판단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수많은 관상을 보다보면 골격을 알 수가 있다.

2. 명성황후는 무남독녀로서 8세때 부친이 사망한다.

   이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4번 여인을 지목할 수 있다.

   가문의 유명무실을 떠나 조실부모하여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에    그 모친은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광활한 이마와 불길한 산근(山根)에다   두 눈의 거리가 멀어 태양과 달의 순리적인 조화가 불균을 이루어    그 생김새만으로도 모든 것을 말해 준다.

 3. 명성황후는 소녀시절부터 무척 총명했다는 점도 4번 여인이 가장 유력하다.

    청결하게 돌출된 이마와 후퇴된 화형 일간(火形 日干)이 정확히 일치한다.

 4. 무남독녀로서 남자 형제가 없는 점도 눈썹이 절단되어 상향하였고    광대와 턱선마저 부실하여 4번 여인이 정확하다.

 5. 자식을 둘이나 생산했으나 모두 저 세상을 보냈다는 점도    1번과 4번 여인에 해당된다.

하지만 광채의 눈빛과 아래 치아의 돌출,     협소한 식록(食祿)에다 산근(山根)마저 종(縱)으로 무너져 있어     4번 여인이 더욱 유력하다.

 6. 시아버지 대원군과 견원지간으로 지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비혈주(鼻穴柱)가 내려앉았고 독선을 뜻하는 재성(財星)과    준두(準頭) 또한 4번과 일치하며    1번 여인은 水形, 2번과 3번 여인은 土形, 4번 여인은 木形에    해당되는데 4번 여인은 얼굴의 화기(火氣)가 약하여 형살로     파극(破剋)하니 시부모와 인연이 없는 점도 4번 여인이 가장 유력하다.

 7. 또한 험난한 정치적 노선에서 한 평생 전략전술에 골머리를 앓았던    그녀의 역사도 4번 여인의 굴곡진 이목구비에서 잘 나타난다.

 역사학자들이 이 글을 본다면 여러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역사는 역사 일뿐 관상학적 접근 방식과는 전혀 별개다.

발본된 고증에 의존한다면 천년만년 고민하고 연구해도 그녀의 얼굴은 찾을 수가 없다.

한 여인의 역사가 그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의 입장에서 관상 자체를 부정하겠다면정말 무식한 아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확률상 4번 여인이 틀림없으나  이 후 그녀의 약력과 더욱 일치하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면 다시 감평해야할 문제다.

 하지만 4명의 여인 중에 명성황후를 찾는다면 4번 외는 결코 그녀의 정체성을 따를 여인이 없다.

명성황후는 4번 여인이 확실하다.

믿어도 좋다.

(스크랩 가능) -현산역리원 현산-   지난 100여년간 명성황후(1851∼1895)는 우리에게 이런 존재였다.

 권모술수로 시아버지를 내치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으며, 급기야는 나라까지 말아먹은 '사악한 암탉'.. 비록 역사책은 그녀를 '외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국모'라고 기록했으나  일반 한국인에게 그녀는 잊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였다.

???     그러나 명성황후'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 인식들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강점한 사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역사적 날조와 변조에 기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흔히 '민비'로 격하되고 비하되어 있는 '명성황후'에 대한 호칭은 이 나라에서 아직도 식민지 사관에 젖어 있는 자들의 산물이다.

그런 그녀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바로 친일의 역사관에 젖어있는 책이 아닌 드라마와 오페라를 통해서 재조명되어 세종대왕, 이순신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위인중 4위에 올랐다.

?? 조선왕조 500년동안 많은 왕비가 있었지만, 과연 '국모'의 자질을 갖춘 이는 몇 있을까.  쇠락해가는 조선왕조, 침략의 발톱을 숨기지 않는 구미 열강과 일제의 야욕 앞에서 일시적이나마 마침내 조선의 독립을 얻어낸 '철의 여인, 명성황후'. 그녀의 위대함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국모를 시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일본 총리대신인 이또오의 탄식 속에 함축되어 있다.

   명성황후(1851

1895)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이해(1895)가 을미년었기때문에 을미사변 이라함)사실 위의 사진도 그녀임을 아직도 증명하지 못한다.

죽어서 사진 한 장, 그림 한 장 남기지도 못하는 황후. ?    흥선대원군과의 고종의 대리전을 치루고 난 후 정치의 주도세력일 뿐 아니라 외교 일체를 고종황제에게진언하는 일급참모 역할을 한 명성황후는 실제로 외교관으로서의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 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고 한다   (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의 일기).?    일찍이 일제의 야욕을 눈치챈 황후는 '인아거일책 (引俄拒日策)'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철저히 견제해 나갔다.

명성황후로부터 철저히 배제 당한 일제는 황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자기 세력을 부지할 수 없고 조선침략을 수행할 수 없는 최대의 걸림돌로 판단했다.

? ?황후의 시해 ?    이미 1895년 초부터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사이에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여우(황후)를사냥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고 한다.

또한 황후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성신보' 고바야카와는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 라고 훗날 기록했듯이 이는 황후가 그들에게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일본으로써는 명성황후를 제거해야 할 직접적인 표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왜놈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시해하고  그 시신위에 등.유.를 붓고 장작을 둘러치고 불.태.웠.으니, 남은 것은 몇 개의 뼈 조각뿐이었다.

..   사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조선역사상 유래없는 일로 외국공사관으로 왕족들을 데리고피신하였다(아관파천)     ?해방전후 노인들이 며느리를 흉볼 때 쓰던 욕이 '민후(閔后) 같은 년'이었다.

민후란 민비(閔妃), 곧 명성 황후를 일컫는다.

지난 100여년간 명성황후(1851∼1895)는 우리에게 이런 존재였다.

 권모술수로 시아버지를 내치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으며, 급기야는 나라까지 말아먹은 '사악한 암탉'.. 비록 역사책은 그녀를 '외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국모'라고 기록했으나  일반 한국인에게 그녀는 잊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였다.

???     그러나 명성황후'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 인식들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강점한 사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역사적 날조와 변조에 기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흔히 '민비'로 격하되고 비하되어 있는 '명성황후'에 대한 호칭은 이 나라에서 아직도 식민지 사관에 젖어 있는 자들의 산물이다.

그런 그녀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바로 친일의 역사관에 젖어있는 책이 아닌 드라마와 오페라를 통해서 재조명되어 세종대왕, 이순신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위인중 4위에 올랐다.

?? 조선왕조 500년동안 많은 왕비가 있었지만, 과연 '국모'의 자질을 갖춘 이는 몇 있을까.  쇠락해가는 조선왕조, 침략의 발톱을 숨기지 않는 구미 열강과 일제의 야욕 앞에서 일시적이나마 마침내 조선의 독립을 얻어낸 '철의 여인, 명성황후'. 그녀의 위대함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국모를 시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일본 총리대신인 이또오의 탄식 속에 함축되어 있다.

   명성황후(1851

1895)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이해(1895)가 을미년었기때문에 을미사변 이라함)사실 위의 사진도 그녀임을 아직도 증명하지 못한다.

죽어서 사진 한 장, 그림 한 장 남기지도 못하는 황후. ?    흥선대원군과의 고종의 대리전을 치루고 난 후 정치의 주도세력일 뿐 아니라 외교 일체를 고종황제에게진언하는 일급참모 역할을 한 명성황후는 실제로 외교관으로서의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 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고 한다   (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의 일기).?    일찍이 일제의 야욕을 눈치챈 황후는 '인아거일책 (引俄拒日策)'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철저히 견제해 나갔다.

명성황후로부터 철저히 배제 당한 일제는 황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자기 세력을 부지할 수 없고 조선침략을 수행할 수 없는 최대의 걸림돌로 판단했다.

? ?황후의 시해 ?    이미 1895년 초부터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사이에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여우(황후)를사냥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고 한다.

또한 황후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성신보' 고바야카와는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 라고 훗날 기록했듯이 이는 황후가 그들에게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일본으로써는 명성황후를 제거해야 할 직접적인 표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왜놈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시해하고  그 시신위에 등.유.를 붓고 장작을 둘러치고 불.태.웠.으니, 남은 것은 몇 개의 뼈 조각뿐이었다.

..   사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조선역사상 유래없는 일로 외국공사관으로 왕족들을 데리고피신하였다(아관파천)     ?해방전후 노인들이 며느리를 흉볼 때 쓰던 욕이 '민후(閔后) 같은 년'이었다.

민후란 민비(閔妃), 곧 명성 황후를 일컫는다.

지난 100여년간 명성황후(1851∼1895)는 우리에게 이런 존재였다.

 권모술수로 시아버지를 내치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으며, 급기야는 나라까지 말아먹은 '사악한 암탉'.. 비록 역사책은 그녀를 '외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국모'라고 기록했으나  일반 한국인에게 그녀는 잊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였다.

???     그러나 명성황후'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 인식들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강점한 사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역사적 날조와 변조에 기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흔히 '민비'로 격하되고 비하되어 있는 '명성황후'에 대한 호칭은 이 나라에서 아직도 식민지 사관에 젖어 있는 자들의 산물이다.

그런 그녀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바로 친일의 역사관에 젖어있는 책이 아닌 드라마와 오페라를 통해서 재조명되어 세종대왕, 이순신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위인중 4위에 올랐다.

?? 조선왕조 500년동안 많은 왕비가 있었지만, 과연 '국모'의 자질을 갖춘 이는 몇 있을까.  쇠락해가는 조선왕조, 침략의 발톱을 숨기지 않는 구미 열강과 일제의 야욕 앞에서 일시적이나마 마침내 조선의 독립을 얻어낸 '철의 여인, 명성황후'. 그녀의 위대함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국모를 시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일본 총리대신인 이또오의 탄식 속에 함축되어 있다.

   명성황후(1851

1895)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이해(1895)가 을미년었기때문에 을미사변 이라함)사실 위의 사진도 그녀임을 아직도 증명하지 못한다.

죽어서 사진 한 장, 그림 한 장 남기지도 못하는 황후. ?    흥선대원군과의 고종의 대리전을 치루고 난 후 정치의 주도세력일 뿐 아니라 외교 일체를 고종황제에게진언하는 일급참모 역할을 한 명성황후는 실제로 외교관으로서의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 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고 한다   (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의 일기).?    일찍이 일제의 야욕을 눈치챈 황후는 '인아거일책 (引俄拒日策)'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철저히 견제해 나갔다.

명성황후로부터 철저히 배제 당한 일제는 황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자기 세력을 부지할 수 없고 조선침략을 수행할 수 없는 최대의 걸림돌로 판단했다.

? ?황후의 시해 ?    이미 1895년 초부터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사이에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여우(황후)를사냥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고 한다.

또한 황후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성신보' 고바야카와는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 라고 훗날 기록했듯이 이는 황후가 그들에게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일본으로써는 명성황후를 제거해야 할 직접적인 표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왜놈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시해하고  그 시신위에 등.유.를 붓고 장작을 둘러치고 불.태.웠.으니, 남은 것은 몇 개의 뼈 조각뿐이었다.

..   사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조선역사상 유래없는 일로 외국공사관으로 왕족들을 데리고피신하였다(아관파천)      명성황후(1851

1895)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이해(1895)가 을미년었기때문에 을미사변 이라함)사실 위의 사진도 그녀임을 아직도 증명하지 못한다.

죽어서 사진 한 장, 그림 한 장 남기지도 못하는 황후. ?    흥선대원군과의 고종의 대리전을 치루고 난 후 정치의 주도세력일 뿐 아니라 외교 일체를 고종황제에게진언하는 일급참모 역할을 한 명성황후는 실제로 외교관으로서의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 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고 한다   (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의 일기).?    일찍이 일제의 야욕을 눈치챈 황후는 '인아거일책 (引俄拒日策)'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철저히 견제해 나갔다.

명성황후로부터 철저히 배제 당한 일제는 황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자기 세력을 부지할 수 없고 조선침략을 수행할 수 없는 최대의 걸림돌로 판단했다.

? ?황후의 시해 ?    이미 1895년 초부터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사이에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여우(황후)를사냥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고 한다.

또한 황후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성신보' 고바야카와는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 라고 훗날 기록했듯이 이는 황후가 그들에게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일본으로써는 명성황후를 제거해야 할 직접적인 표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왜놈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처참하게 시해하고  그 시신위에 등.유.를 붓고 장작을 둘러치고 불.태.웠.으니, 남은 것은 몇 개의 뼈 조각뿐이었다.

..   사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조선역사상 유래없는 일로 외국공사관으로 왕족들을 데리고피신하였다(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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