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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월향


글/사진 김미선(urvex4@naver.com)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가장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생략)한용운의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廟)에’ 중에서?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의 침실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생략)한용운의 ‘계월향에게’ 중에서?논개와 계월향은 둘 다 조선시대의 절세미인이다.

진주의 논개 하면 잘 알지만 평양의 계월향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두 여인은 그녀들의 미모에 총명함을 더해 임진왜란 때 왜장을 죽게 하고 그녀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의(義)인으로 만해 한용운은 이 두 여인에 대한 사랑을 시로 표현하였다.

한용운은 애국이라는 가치를 종교적 신념까지도 넘어설 만큼 귀하게 여겼고, 의(義)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두 여인을 애인으로 삼았던 것이다.

? 논개, 양귀비보다 더 붉은 정열을 가진 여인?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중략)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논개’하면 ‘기생으로 진주 남강에서 왜병 적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알고 있다.

학창시절 변영로의 시 ‘논개’를 외우며 덩달아 정의감에 불타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논개 기념관의 기록에 따르면 논개의 고향은 전북 장수 임내면 주촌마을이다.

성은 주(朱)씨이고 양반가 출신이다.

훈장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어린나이에 숙부 집에 의탁했지만 숙부는 논개를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들인다며 금품을 받고 도망 가버린다.

논개는 체포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는데 당시 장수현감 최경회(1453

1593)는 용모도 뛰어나고 현명한 17세의 논개를 후처로 들인다.

최경회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의 뒤를 이어 의병장으로 나섰고 1차 진주성 싸움도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2차 진주성 전투를 하였는데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한다.

승리한 일본군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진주 촉성루에서 연회를 갖고,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 한 후 논개는 연회에 참석한다.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을 꾀어 남강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는다.

장수를 잃은 왜군은 사기가 떨어졌고 전라도 지역으로 더 진격하지 못한 채 진주성을 떠나 버린다.

 ?  논개,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의(義)인논개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에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이 남아있어 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1987년 해주 최씨 문중에서 발행한 ‘의일휴당실기(義日休當實記) 중 최경회를 의미하는 경상우병사증좌찬성최공시장(慶尙右兵使左贊成公諡狀)에 논개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라는 귀절을 보면 그녀는 부실(副室, 정식아내 외에 데리고 사는 여자)이다.

조선시대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외면했다.

임진왜란 중의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姜行實圖)에도 그녀의 순국 사실이 누락되었다.

그녀가 기생이었거나 양반 출신이었더라도 최경회의 첩이었으며, 남편이 아닌 왜장 끌어안고 투신했고, 그녀의 숙부가 가산을 탕진한 점들은 그녀가 외면당한 요소들이다.

진주 주민들은 해마다 논개의 혼을 위로해 왔고 논개의 포상을 간절히 바랬다.

영조 14년(1738년) ‘남덕하’가 경상우병사로 부임하여 진주 주민들의 건의를 수렴해 논개 사당과 사당 이름을 내려주도록 글을 올렸다.

드디어 조정의 허락을 받아 진주 남강의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부르고 전북 장수읍에 ‘의암사’ 라는 사당이 건립되어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논개의 우국충절은 순국 후 147년 만에 진주 주민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재 평가 된 것이다.

장수 주촌마을에 논개 생가가 조성되고 최근 장수에서는 ‘의암주논개대축제(매년 음력 9월 3일 전 후)’ 진주에서는 ‘진주논개제(매년 5월 넷째 주 금, 토 일)’가 열리고 있다.

 ?장수 논개생가지에서 논개를 만나다논개의 생가가 있는 전북 장수 주촌 마을에 가 본다.

논개 생가는 2000년 의암 주논개의 충절을 기리고자 2만 여 평의 부지에 복원되었다.

처음 들어서면 의랑루와 연못이 있고 멀리 논개상과 논개 생가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논개 기념관에는 고운 미모를 가진 논개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논개의 일생을 잘 알 수 있도록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논개의 상을 향해 넓은 길을 걷다보면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라는 한용운의 시비가 있다.

한용운의 논개에 대한 예찬이 절절이 느껴진다.

논개 상을 지나면 복원된 논개의 생가가 나온다.

생가는 건물 2동으로 이루어진 일자형 초가집이고 돌담이 둘러져 있다.

방 안에는 영정과 침구, 책들이 놓여있지만 왠지 쓸쓸해 보인다.

주변에 주논개비, 최경회 비, 주논개 부모 묘 등이 있다.

생가에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서면 주촌 마을이 나온다.

주촌마을은 1986년 대곡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전체가 수몰되었다.

저수지 근처에 논개 생가만 복원해 두었다가 1994년부터 현재의 위치에 마을을 복원했다.

언덕에 올라서서 보면 실제로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예쁜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초가집, 흙집, 기와집과 통나무집들이 아기하게 모여 있어 정겨워 보인다.

물레방아, 연자방아, 디딜방아도 볼 수 있어서 자녀들과 함께 가면 얘깃거리가 많을 듯싶다.

? 계월향, 나라를 구한 평양의 아리따운 여인 장수 논개생가에서 논개를 만나며 평양의 게월향을 떠올려 본다.

계월향은 평양 명기로 임진왜란 때 왜장을 죽게 해 나라를 지킨 의(義)기이다.

본명은 월선(月仙)이며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 김응서(1564- 1624)의 애첩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평양성이 함락되자, 계월향은 포로로 잡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관이자, 평양 최고 우두머리인 고니시(小西飛)의 진중에 있게 된다.

그 당시 평양의 기녀들은 한양과 더불어 전국 최고의 명성을 뽐내고 있었다.

계월향은 그녀의 미모에 반한 고니시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자결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곧 ‘혼자 죽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고 깨닫고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고니시의 애첩이 된다.

계월향은 고니시를 극진히 모셔 마음을 산 다음 김응서를 오라버니라고 속이며 불러들여 고니시의 부하로 머무르게 한다.

잔치 날 왜장 고니시가 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 김응서는 그의 목을 벤다.

적장의 목을 벤 후 적군에 쫓기는 상황에서 총에 맞은 계월향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김응서 혼자 탈출하도록 한다.

고니시가 죽은 후 왜군은 사기가 떨어졌고 이듬해 1593년 평양성은 탈환된다.

김응서는 큰 공을 세워 포도대장에 임명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까지 거친다.

김경서는 김응서의 또 다른 이름인데 사 후 우의정까지 추종된다.

왜란 후 사람들은 ‘남 논개요 북 계월향’이라고 그녀를 칭송했다.

김응서 장군은 북한 우표에도 그려질 정도로 유명한 임진왜란의 전쟁영웅이다.

평양 의열사는 계월향의 의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매년 봄, 가을에 평양 기생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계월향 비가 관서 8경의 하나로 조선시대 건축물의 하나인 평양의 련광정 옆에 세워져 있다.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계월향을 만날 수 없음이 애석하다.

                                                                                                            (네이버 이미지 중에서)                                                                                                        논개와 계월향의 신분이 무엇이던 간에 목숨을 바쳐 의를 이룬 공로는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뛰어난 미모를 소유하고 있어서 가능했어도 17세 소녀들이 발휘한 총명함을 더 높이 살만하다.

요즘 결혼, 취직이나 자신감 회복을 위해 외모에 대한 관심이 하늘을 찌른다.

외모가 개개인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줄 지는 주어진 외모로 얼마나 현명하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절세미인이면서 기지를 발휘한 논개와 계월향은 이 시대에도 뛰어넘기 어려운 우국충절을 실천한 의인이다.

  *찾아가는 길-장수 논개생가마을 네비에 검색 http://nongae.go2vil.org/01_about/sub06.html *생가마을 내 민박: 산유화네(063-353-4412), 국화네(063-352-1854)*주변 볼거리: 논개사당(의암사), 방화동 가족휴가촌, 와룡 자연휴양림 *먹거리: 장수한우명품관(063-352-8088), 삼봉가든(063-351-8440)    그곳에는 계월향이란 기생이 한 명 있었다.

계월향은 북한의 논개라고 알려진 기생으로, 역사적 사실과 야담이 뒤섞인 그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평안도 우방어사 김응서와 동심합력하여 왜장의 수급을 베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준 한 조선 여성이었다.

이리 보면 실상 계월향의 활약은 논개의 의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아직 대중들 사이에선 그녀의 이름조차 생소한 것이 사실. 아마 계월향은 북한(평양) 출신이고, 논개는 진주(남한) 출신이라는 편협한(?) 지역 논리가 가미되어 발로된 결과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행장의 부장(副將)에 용력이 절등한 사람이 있으니 언제나 앞장서서 진을 함락시켜 행장이 소중히 여기고 일을 맡겼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이 그에게 잡혔는데 지극히 사랑을 받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서문에 가서 친척을 보고 오겠다 하니 왜장이 허락하였다.

계월향이 성 위에 올라, “우리 오빠 어디 있소.” 하고 연거푸 슬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응서가 답하고 가니 계월향의 말이, “만약 나를 탈출하게 해준다면 죽음으로 은혜를 갚겠소.” 하니 응서가 허락하고 계월향의 친오빠라 자칭하고 성에 들어갔다.

밤중에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계월향이 응서를 인도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왜장이 걸상에 앉아서 자는데 두 눈을 부릅뜬 채 쌍검(雙劍)을 쥐고 얼굴을 벌겋게 해가지고 마치 사람을 내리칠 것 같았다.

응서가 칼을 빼어 왜장을 베니 머리는 벌써 땅에 떨어졌는데도 칼을 던져 하나는 벽에 꽂히고 하나는 기둥에 꽂혀 칼날이 반이나 들어갔다.

응서가 왜장의 머리를 가지고 문을 뛰쳐나오니 계월향이 뒤를 따랐다.

응서가 둘 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짐작하고 칼을 휘둘러 베고 한 몸으로 성을 넘어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그 장수의 죽음을 알고 크게 놀라 소란을 피우며 사기를 잃었다.

'<평양지, 윤두수>  계월향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사서에 등장한 것은 평양부윤 윤두수(그래, 그 윤두수가 맞다.

)가 지은 평양지에서이다.

헌데 평양지의 편찬시기는 1590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의 기록이다.

아마 임진왜란 이후, 윤두수나 여타 인물이 기록에 서술을 추가한 듯으로 보인다.

이 평양지의 부분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그대로 인용되었는데,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덕무 또한 그의 저서인 청장관전서에서 비슷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청양관은 평양성(平壤城) 안에 있는 객사(客舍) 이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장(倭將) 소서비(小西飛)가 평양을 점령하자 김응서(金應瑞)는, 소서비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과 밀계(密計)하고 밤중에 소서비가 잠이 든 틈을 이용하여 장중(帳中)에 들어가 그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적장(敵將)은 목이 없이도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기둥을 쳐서 칼자국이 났다.

김응서는 소서비의 머리를 꿰어차고서, 계월향과는 같이 적진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할 수 없이 계월향을 죽이고 혼자 성(城)을 넘어 자기 진영으로 온 것을 말한다.

계선(桂仙)은 계월향이다.

'<청장관전서, 이덕무>  청장관전서에선 김응서와 계월향이 죽인 왜장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이름이 소서비라고 한다.

이 소서비는 小西飛를 음차한 것으로, 일본어로 읽으면 나이토 조안이 된다.

헌데 정작 이 나이토 조안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전해서 패한 뒤, 필리핀 마닐라로 유배(라고는 하나 실제 일본의 지배력이 필리핀까지 미쳤을 리 없으므로, 실상 추방에 가깝다.

)되었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은 왜적의 상수 소서비를 데리고 관백의 항복문서를 가지고 돌아왔으나,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 항복문서가 관백의 것이 아니라 소서행장 등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징비록, 유성룡>  징비록의 기록에서와 같이, 소서비는 평양성 함락 이후에도 사서에서 등장한다.

그는 고니시의 부장이면서, 고니시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아 그에게 고니시의 성을 하사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계월향과 김응서가 고니시를 참했다는 이설도 존재하는데, 이 역시 사실일 리 없다.

  '계월향은 평양기생이다.

임진년에 왜적이 평양성을 점령하였을 때 별장 김응서가 용강, 삼화, 증산, 강서의 네 읍의 군(軍)으로 평양의 서쪽에 20여 진지를 설치하였다.

 왜군의 우두머리인, 소서행장의 부장이었던 자는 용맹하여 맨 먼저 성벽에 올라가서 진을 함락시켰고, 계월향을 얻어서 무척 그녀를 사랑하였다.

그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루각(樓閣)은 깊은 곳에 있고 방어가 무척 견고하였으며, 사람들을 물리쳐 통과할 수 없었고, 오직 계월향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때 심유경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 고니시와 조약을 맺어 평양 서쪽 십리에 표를 세워 조선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왜군이 병력을 거두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양성을 왕래할 수 있었다.

 계월향은 비록 왜적 우두머리의 사람을 받았지만 요행이 도망하여 돌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두머리에게 청하여 부모님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였고, 우두머리는 허락하였다.

즉시 성에 올라가 부르기를 “내 오라버니는 어디 계시오?” 하고 외쳤고, 응서는 마침 왜군을 정찰하러 성 아래에 와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다.

”라고 대답하였고, 계월향이 그를 맞아들여, 은밀히 말하기를 “공께서 나를 탈출시켜 주신다면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소.” 하고는 그를 이끌어 성으로 들어가서 왜군 우두머리에게 보였다.

 왜군 우두머리는 응서를 계월향의 오빠로 생각하고 무척 가까이 여겨서 신임하였다.

계월향은 왜군 우두머리가 잠든 것을 틈타 몰래 응서를 끌어들였고 왜군 우두머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을 붉히고 눈을 부릅뜨고는 왼손으로는 방울 끈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사람을 베려는 듯 칼을 잡고 있는 것을 응서가 직전에 그를 베었다.

 우두머리는 죽었으나 방울 끈이 움직였고 검이 땅에 떨어져서 땅에 여러 자(尺)의 구멍이 뚫렸다.

마침내 왜군들이 방울 소리를 듣고 시끄러워졌다.

계월향이 (그들을) 맞아서 말하기를 “장군이 취한 것일 뿐 다른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고, 드디어 왜군들이 물러났다.

응서는 우두머리의 머리를 차고 나가려 했고, 계월향은 옷을 잡아끌며 그를 따랐다.

응서는 둘 다 온전하게 되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곧 계월향을 베었다.

성을 넘어 군에 도착해서 그 머리를 높이 걸어 왜군들에게 보였다.

왜군들이 그로 말미암아 기세가 움츠러져 감히 나오지 못했다.

(중략) 계월향은 비록 죽었지만, 결국 왜장의 머리를 베었으니, 아, 그 광명은 길이 남을 것이다.

'<연경재전집, 성해응>  성해응이 쓴 연경재전집엔 계월향의 활약에 대해 더욱 소상한 기술이 존재한다.

이덕무와 윤두수, 그리고 성해응의 유사한 기록들을 역사적인 사실로 생각한다면, 계월향의 공은 실로 추앙받아야 마땅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1800년대 초반까지 계월향에 대한 기록은 평양과 그 인근 지역의 기억으로만 국한되고 있었다.

계월향의 비문이 규장각에 모셔지게 된 것도, 1835년, 평양감사 정원용의 청원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계월향은 논개와 달리 조선 왕조로부터 잊혀지게 되었던 것일까?(팬텀하록 작가의 조일전쟁 中. 소서비(나이토 조안)의 역할이 종의지(소 요시토시)로 대체되었다.

의외로 계월향은 서브창작계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녀가 적장에게 수청을 들은 기녀였기 때문이었고, 이차적인 것은 아녀자가 된 몸으로 사내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어이가 없는 이유다만,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적 질서가 개편된 조선조에게 계월향은 '의기'로서 추앙하기엔 참으로 껄끄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논개 또한 여성으로서 남자인 왜장을 죽이긴 했다만, 논개는 적장의 수청을 들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녀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그에 비해 계월향의 죽음은 연경재전집, 평양지, 청장관전서를 통틀어 김응서가 부득이 그녀를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계월향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들과 야담들을 살펴보면, 그녀의 죽음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설정이 존재한다.

 (평양 장향각에 모셔진 계월향의 영정.)  이화여대 여성학과 정지영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다면, 그 첫째는 둘 다 살기 어려울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때 김응서는 "아녀자로서 영웅을 죽였우니 너를 두면 일을 성사하기 어렵다.

" 라거나 "첩으로서 남편을 죽였으니 인륜을 저버린 여자를 살려둘 수 없다.

" 라는 말을 덧붙인다.

둘째는 계월향이 원해서 김응서에게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다.

이때 계월향은 "내가 죽어야 김 장군의 공이 온전할 수 있다.

" 라던가 "천한 계집으로서 영웅을 죽였으니 나는 죽어야 한다.

" 라는 말을 덧붙인다.

화자가 바뀌었지만 말하는 내용은 실상 동일한 것이나 마찬가지.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계월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이때 그녀는 더러워진 몸으로 살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은장도를 꺼내 자신의 몸에 찔러 넣는다.

보통 설화와 야담에선 둘째와 세번째 경우의 설정이 많이 차용된다.

아무래도 이야기만큼은 '미담'이 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왜 이런 설정들이 추가되고, 계월향은 각광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주저앉아있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계월향 그녀가 감당해야했던 운명이었다.

허나 그 운명은 1592년, 그 당시의 운명이 아닌 약 100

200여년이 지나고 나서 새로이 구성된 성리학적 질서 하의 운명이었다.

기녀의 충, 효, 열은 그 몸을 온전히 희생시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논개는 이를 완벽히 성사시켰지만, 계월향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계월향이 의기가 될 수 없던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가 '기녀'로서 적과 내통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강압적인 왜장의 강요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계월향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고,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고로, 그녀에 대한 서술과 평가는 성리학 교조주의 체제의 조선조에서 상당히 비판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계월향은 '잊혀지게' 된 것이었다.

(신암행어사의 계월향. 본 만화를 한번이라도 봤다면 이 장면에서 같이 울어줘야한다ㅠㅠㅠㅠ) 임진록의 이본인 흑룡일기에선 훗날 김응서가 강홍립과 함께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을 두고 "김응서가 죽은 것은 평양 기생 계월향을 죽였기 때문에 그 보복을 받은 것."이라고 기록한다.

실제 김응서는 사르후에서 전사하진 않았다만. 더 나아가 흑룡일기에는 "국왕의 은혜를 갚고 가부를 위해 죽었으니 그녀를 노류장화와 같이 보내면 안 된다.

"라는 다분히 계월향을 의식한 기술이 존재한다.

이러한 흑룡일기의 서술을 볼 때, 민중들, 그 중에서도 최소한 평양의 민중들 만큼이라도 계월향의 죽음을 기리고, 그녀를 찬양했다는 의식이 소수로나마 존재했으며 이들을 통해 계월향의 전설은 미담의 형태로 사실과 혼재되어 오늘까지 전해내려오는 것이다.

그 예로, 두산백과에서까지 계월향은 김응서의 애첩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실제 사서에선 계월향이 김응서의 애첩이란 기술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김응서가 사헌부로부터 가는 곳마다 창기를 가까이 하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난 적이 있는 것을 본다면, 김응서와 계월향과의 염문설은 아주 신빙성이 없는 수준까진 아닐 것이다.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계월향에게, 한용운>계월향 그리워라 모란봉만 높구나 능라도 버들로도 그대 매기 어려워 갸륵한 일편단심 볼 길이 없어라<장한가, 신불출>  계월향을 기린 신불출과 한용운의 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의(義)를 떨친 계월향을 되뇌이고 그녀를 추앙하는 것 자체는 일종의 문학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근대 이후, 부국과 외세로부터의 압제에서 벗어나기위한 계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을 때, 국가 보전의 영역은 여성도 예외일 수 없다는 논리에 그제야 계월향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출두'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계월향은 논개와 마찬가지로 구국의 여성으로 재연되었다.

결국 계월향은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창기로 전락했고,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영웅이 된 인물이라 볼 수 있으리라.  그에게는 의기(義妓)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첩이던 계월향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副將)에게 몸을 더럽혔으나 기지를 발휘해 김응서에게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결했다.

이런 전력으로 말미암아 기생으로는 특이하게 사당에 배향되어 제사를 받는 인물이 된다.

 19세기 초반 평양 장향각(藏香閣)이란 사당에 안치했던 그의 영정이 공개된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은 1815년에 제작된 이 영정을 최근 구입, 내달 2일부터 8월11일까지 전시한다고 29일 밝혔다.

영정은 주인공인 계월향이 앉아있는 전신상을 담고있으며 그와 관련된 일화가 그림 윗부분에 적혀있다.

민속박물관은 "조선후기 영정이라고 하면 당시 사회윤리의 근간인 숭현사상(崇賢思想)에 따라 사묘(祠廟)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 주로 전하지만 국왕의 어진(御眞)이나 일반 사대부 등의 남성 영정 일색인 현실에서 이 계월향 영정은 여성, 그것도 기녀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이 특히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크게 올려 꾸민 형식이라든가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에 달린 향노리개 등은 당시 복식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초상화 전문가로 문화재위원이자 성균관대박물관장인 조선미 교수는 "표정이 살아 있고, 자태가 곱고 앳된 연령이 느껴 질만큼 세부 표현에도 신경을 썼다"면서 "얼굴 윤곽과 코선, 목덜미 등을 따라 붉은 계열의 음영을 짙게 넣되, 코나 목선, 인중 등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고 있는 특색이 있다.

이러한 음영법은 19세기 초상화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드문 표현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계월향을 배향하는 제사는 이 영정을 제작한 시기인 19세기 초부터 근대까지 이어졌다.

예컨대 동아일보 1921년 4월26일자 기사에는 "1921년 4월22일(음력 3월15일) 평양 의열사(義烈祠)에서 평양기성권번(平壤箕城券番) 주최로 제수를 갖추어 배례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 <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던 만화이긴 한데이 만화는 마지막이 너무 병맛납니다.

보신 분은 말안해도 잘 아시겠죠.  뭐, 어쨌든간에 양경일님 만화이면서 완결이 되었다는게 중요합니다.

 뒷통수를 두번이나 맞아서... -_-; 일단 보시죠. ^^ 1권 표지입니다.

신암행어사는 일본 쇼가쿠칸의 월간 선데이GX에서 연재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역수입 되어 발매된... 좀비헌터와 같은 사례였죠. 당연히 대원에서 발매했구요. 좀비헌터때처럼 글자로 그림 삭제하는 더러운만행이 없다는게 보는 입장에선 참으로 쾌적했습니다.

 신암행어사는 한국의 고전 설화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구성했던 것이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큰 화재가 된 바가 있습니다.

 (그나저나 아무리 봐도 춘향이의 저 복장은... 인기를 얻기 위해 일부러 노린 듯한 느낌이... ㅎㅎ)1,2권입니다.

1권이 일본에 처음 나왔을 때는 슬램덩크의 작가 타케히코 이노우에씨도 이 만화가 재밌다며 극찬을 했다고 하죠. 실제로 1권은 엄청 재밌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나오는 반전, 처음 문수를 봤을 때는 이놈이 주인공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황당했고, 정의감에 불타는 뻔한 스타일이 아니라 악을 더 악랄하게 심판하는 모습이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계월향] 와오.


저는 문수를 보면 볼수록 비밥의 스파이크를 닮은 것 같던데... 다시 보니 아닌거 같고... -_-;3,4권입니다.

신암행어사는 쥬신이라는 나라가 아지태라는 괴물 때문에 멸망하고 쥬신의 장군이었던 문수가 무정부상태의 혼란 시대에 암행어사를 자처하며 아지태 일당과 재회해서 싸운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명대사는 '암행어사 출두야

!' (이상하게 볼때마다 오글거린다는...;;)이 과정에서 초중반부 스토리는 한국의 고전 설화를 많이 이용했는데요. 문수의 산도인 춘향은 당연히 춘향전에서 스토리를 딴 캐릭이고, 이몽룡이 죽는 부분은 과거 극장판 애니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도 개봉했고 DVD도 나왔는데 스토리 전체를 애니화 한 것도 아니고 뻔히 아는 이야기이다보니 그닥 재밌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전 구입하지 않았네요. (DVD도 대원에서 발매했음.) <극장판 애니메이션 포스터입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서 대차게 말아먹은 극장판...; 완성도도 그닥 좋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애니 보면서 프롤로그 스토리설명란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죠. 왜 그랬는지 보신분은 잘 아실 겁니다.

ㅎㅎ5

6권입니다.

 신암행어사는 이런저런 설화들을 끌어쓰는 과정에서 고려장을 끌어썼던 부분이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죠. (1권쯤에 나옵니다.

) 다른 고전 설화들도 원작과 너무 틀린게 많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일본인이 보기엔 재밌었을지 모르지만 한국인 입장에선 좀 아니다 싶은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6권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 생각에 신암행어사는  여기가 제일 재밌는 것 같습니다.

평강공주를 황당하게도 파랑새 증후군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다시 봐도 완성도는 여기가 가장 높았습니다.

재밌어요. 7

8권입니다.

 7권에선 평강공주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슬슬 강한 적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과거 문수가 사랑했던 여자 계월향의 언니가 등장하는데, 그녀가이끄는 조직 이름이 활빈당... (활빈당은 설마 그... 그...?) 네, 그렇습니다.

이 만화에서는 홍길동이 여자입니다.

이거 보고 완전히 깼죠. -_-;;9, 10권입니다.

 평강공주에 이어서 홍길동전이 시작되고 동시에 아지태와의 대결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문수의 과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10권에 나오는 아지태는 그야말로 절대자, 넘볼수 없는 신같은 존재!  병으로 폐가 썩어가던 문수는 마지막 죽기 직전 방자에게 부탁해 만드라고라의 침을 맞으며 깨어날 수 없는 꿈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11, 12권입니다.

꿈속에서 문수의 과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토리를 한국 고전 설화에 바탕을 두지 않고 오리지널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문수가 과거 쥬신의 장군이었던 모습, 그가 사랑했던 계월향, 그리고 앞권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적들의 과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문수가 꿈속 세계에 빠져있는동안 현실의 춘향이는 아지태 밑으로 들어가서그의 심복이 되고 맙니다.

순수한 춘향의 마음을 아지태가 파고 든거죠. 13, 14권입니다.

 과거 이야기에서는 문수가 왜 불치병에 걸려서 늘 체력이 딸렸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계월향과 문수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보며 가슴이 참 아팠습니다.

14권에서 결국 계월향이 죽습니다.

 문수로부터 친구, 연인, 나라까지 앗아간 아지태. 그야말로 악마죠. 15, 16권입니다.

 오랜 꿈을 꾸던 문수는 15권에서 드디어 깨어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아지태 + 춘향과 마지막 결전으로

 17권, 외전입니다.

 마지막 17권에선 문수 VS 춘향의 대결로 춘향이가 제정신을 찾게 되고절대자 아지태와 문수의 대결에선 문수가 팔 잘리고 한쪽 눈 파이고 송장이 되어서도 아지태를 눈빛 하나로 쫄게 만듭니다.

문수의 죽음을 알게 된 춘향이가 분노의 칼질로 아지태의 얼굴을 두동강

그리고 끝. -_-;;  이 마지막권은 그동안 적을 가루조차 남기지 않았던 절대적 존재 아지태가 다 죽어가던 문수의 눈빛에 벌벌 떨고 춘향의 칼질 한번에 K.O. 당하는데,이 절대적 존재를 도데체 어떻게 이길까? 하며 온갖 상상을 다 펼쳤던 오랜 독자들의 기대감을 일순간 배신감으로 만들었다는게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이야기 정말 잘 끌어와놓고서 마무리를 대충 될대로 되라 식으로 했다는 느낌이랄까요? 마지막은 정말 황당함을 넘어서 너무 실망스러웠네요.  외전은 단편 모음집인데 신춘향 외전, 원술 외전, 방자 외전, 신암행어사 외전이 수록되었습니다.

이런 외전 단편집이 모두 그러하듯 앞권들을 봐야 내용이 와닿습니다.

    분명 재밌게 봤던 만화인데 마지막이 너무 실망스러웠고, 때문에 저에게는이상하게 다시 읽히지 않는... 책장에 오래 꽂혀있기만 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만화가 의미는 많다고 생각해요. 한국인이 일본에서 연재해서가장 성공했던 만화이며, 결과가 어쨌든 일본에다 한국의 고전 설화를 직,간접적으로 전파 했다는 점에선 큰 점수를 주고 싶네요. 결론은 신암행어사는 마지막권 마무리만 제외하면 괜찮은 작품!   이상 신암행어사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국가 쥬신의 총사령이었던 문수는 쾌타천전투에 참여하게되고 쾌타천 전투 승리 후 전설이라는 칭호와 함께 총사령관에서 사임하게됩니다 그리고 어릴때 같이자란 여인 계월향과 함께 여행을떠나게됩니다   그래서 서양에서 알콩달콩한 생활을 하다가 ? ? 아지태의 모략으로인해 문수는 외국에서 역적으로몰리게되고 본국으로 왔지만 왕 해모수는 없어져버렸고 아지태가 가장하여 그의 자리를차지하게됩니다 그리고 아지태의 모략으로인해 계월향은 자살을하게됩니다(문수가찌른것이아닌 , 계월향이 달려와서 찔린것입니다)  계월향의 죽음에 분노한 문수는 아지태를 죽이려듭니다 하지만 신과같은 힘을 가지고있던 아지태는 문수따윈 가볍게 처치할수있었기에 안심을 하고있다가  개맞듯이 맞아 피떡이됩니다 하지만 이에그치지않은 아지태는 죽지않고 마지막힘을 다하여 쥬신을 송두리째 날려버립니다   그후 1년뒤 북쪽 끝까지날아간 문수는 계월향의 묘앞에서 암행어사가 되기로합니다  그리고 아지태를 만나 싸우기위하여 여행을다니는겁니다 문수의 과거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네요 주인공 문수편은 총 3개로나뉘어서 쓸것입니다 이상 문수편 - 과거사 마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조선의 백성임을 명심하라는 애인 조방장 김경서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소서를 죽일 것을 결심한다.

 한편 김경서는 흩어진 군을 모아 평양 수복의 기회를 노린다.

이 무렵 남해에서는 한산도 대첩이 있고 왜군들의 보급로가 끊긴 것을 연을 올려 경서에게 알려준다.

경서와 월향은 소서를 주살했으나 월향은 부상을 입고 경서를 탈주시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개봉관 개봉 기록없음. 이 영화는 정비석(鄭飛石:1911

1991)작가가 에 1976년부터 4년간 연재했던 "명기열전" 중 <평양기생 계월향>편을 임권택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신성일과 정윤희가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함께 연기한 영화.계월향은 논개와 더불어 조선 2대 의기로 불리운다.

평안도병마절도사 김경서의 애첩이었던 계월향은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 '고니시 히'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고니시 히'를 속여 김경서로 하여금 '고니시 히'의 머리를 베게 한 뒤 함께 도망가다가 김경서만 도망가게 하고 자신은 자결하였다.

 2007년 기생으로는 처음으로 계월향의 초상화가 발견되었다.

그만큼 당시 사대부들이 계월향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86년 VHS 출시]포스터 : ⓒ양해남 컬렉션 그곳에는 계월향이란 기생이 한 명 있었다.

계월향은 북한의 논개라고 알려진 기생으로, 역사적 사실과 야담이 뒤섞인 그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평안도 우방어사 김응서와 동심합력하여 왜장의 수급을 베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준 한 조선 여성이었다.

이리 보면 실상 계월향의 활약은 논개의 의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아직 대중들 사이에선 그녀의 이름조차 생소한 것이 사실. 아마 계월향은 북한(평양) 출신이고, 논개는 진주(남한) 출신이라는 편협한(?) 지역 논리가 가미되어 발로된 결과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행장의 부장(副將)에 용력이 절등한 사람이 있으니 언제나 앞장서서 진을 함락시켜 행장이 소중히 여기고 일을 맡겼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이 그에게 잡혔는데 지극히 사랑을 받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서문에 가서 친척을 보고 오겠다 하니 왜장이 허락하였다.

계월향이 성 위에 올라, “우리 오빠 어디 있소.” 하고 연거푸 슬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응서가 답하고 가니 계월향의 말이, “만약 나를 탈출하게 해준다면 죽음으로 은혜를 갚겠소.” 하니 응서가 허락하고 계월향의 친오빠라 자칭하고 성에 들어갔다.

밤중에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계월향이 응서를 인도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왜장이 걸상에 앉아서 자는데 두 눈을 부릅뜬 채 쌍검(雙劍)을 쥐고 얼굴을 벌겋게 해가지고 마치 사람을 내리칠 것 같았다.

응서가 칼을 빼어 왜장을 베니 머리는 벌써 땅에 떨어졌는데도 칼을 던져 하나는 벽에 꽂히고 하나는 기둥에 꽂혀 칼날이 반이나 들어갔다.

응서가 왜장의 머리를 가지고 문을 뛰쳐나오니 계월향이 뒤를 따랐다.

응서가 둘 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짐작하고 칼을 휘둘러 베고 한 몸으로 성을 넘어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그 장수의 죽음을 알고 크게 놀라 소란을 피우며 사기를 잃었다.

'<평양지, 윤두수>  계월향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사서에 등장한 것은 평양부윤 윤두수(그래, 그 윤두수가 맞다.

)가 지은 평양지에서이다.

헌데 평양지의 편찬시기는 1590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의 기록이다.

아마 임진왜란 이후, 윤두수나 여타 인물이 기록에 서술을 추가한 듯으로 보인다.

이 평양지의 부분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그대로 인용되었는데,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덕무 또한 그의 저서인 청장관전서에서 비슷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청양관은 평양성(平壤城) 안에 있는 객사(客舍) 이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장(倭將) 소서비(小西飛)가 평양을 점령하자 김응서(金應瑞)는, 소서비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과 밀계(密計)하고 밤중에 소서비가 잠이 든 틈을 이용하여 장중(帳中)에 들어가 그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적장(敵將)은 목이 없이도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기둥을 쳐서 칼자국이 났다.

김응서는 소서비의 머리를 꿰어차고서, 계월향과는 같이 적진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할 수 없이 계월향을 죽이고 혼자 성(城)을 넘어 자기 진영으로 온 것을 말한다.

계선(桂仙)은 계월향이다.

'<청장관전서, 이덕무>  청장관전서에선 김응서와 계월향이 죽인 왜장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이름이 소서비라고 한다.

이 소서비는 小西飛를 음차한 것으로, 일본어로 읽으면 나이토 조안이 된다.

헌데 정작 이 나이토 조안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전해서 패한 뒤, 필리핀 마닐라로 유배(라고는 하나 실제 일본의 지배력이 필리핀까지 미쳤을 리 없으므로, 실상 추방에 가깝다.

)되었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은 왜적의 상수 소서비를 데리고 관백의 항복문서를 가지고 돌아왔으나,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 항복문서가 관백의 것이 아니라 소서행장 등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징비록, 유성룡>  징비록의 기록에서와 같이, 소서비는 평양성 함락 이후에도 사서에서 등장한다.

그는 고니시의 부장이면서, 고니시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아 그에게 고니시의 성을 하사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계월향과 김응서가 고니시를 참했다는 이설도 존재하는데, 이 역시 사실일 리 없다.

  '계월향은 평양기생이다.

임진년에 왜적이 평양성을 점령하였을 때 별장 김응서가 용강, 삼화, 증산, 강서의 네 읍의 군(軍)으로 평양의 서쪽에 20여 진지를 설치하였다.

 왜군의 우두머리인, 소서행장의 부장이었던 자는 용맹하여 맨 먼저 성벽에 올라가서 진을 함락시켰고, 계월향을 얻어서 무척 그녀를 사랑하였다.

그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루각(樓閣)은 깊은 곳에 있고 방어가 무척 견고하였으며, 사람들을 물리쳐 통과할 수 없었고, 오직 계월향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때 심유경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 고니시와 조약을 맺어 평양 서쪽 십리에 표를 세워 조선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왜군이 병력을 거두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양성을 왕래할 수 있었다.

 계월향은 비록 왜적 우두머리의 사람을 받았지만 요행이 도망하여 돌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두머리에게 청하여 부모님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였고, 우두머리는 허락하였다.

즉시 성에 올라가 부르기를 “내 오라버니는 어디 계시오?” 하고 외쳤고, 응서는 마침 왜군을 정찰하러 성 아래에 와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다.

”라고 대답하였고, 계월향이 그를 맞아들여, 은밀히 말하기를 “공께서 나를 탈출시켜 주신다면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소.” 하고는 그를 이끌어 성으로 들어가서 왜군 우두머리에게 보였다.

[계월향] 대박이네요.

 왜군 우두머리는 응서를 계월향의 오빠로 생각하고 무척 가까이 여겨서 신임하였다.

계월향은 왜군 우두머리가 잠든 것을 틈타 몰래 응서를 끌어들였고 왜군 우두머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을 붉히고 눈을 부릅뜨고는 왼손으로는 방울 끈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사람을 베려는 듯 칼을 잡고 있는 것을 응서가 직전에 그를 베었다.

 우두머리는 죽었으나 방울 끈이 움직였고 검이 땅에 떨어져서 땅에 여러 자(尺)의 구멍이 뚫렸다.

마침내 왜군들이 방울 소리를 듣고 시끄러워졌다.

계월향이 (그들을) 맞아서 말하기를 “장군이 취한 것일 뿐 다른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고, 드디어 왜군들이 물러났다.

응서는 우두머리의 머리를 차고 나가려 했고, 계월향은 옷을 잡아끌며 그를 따랐다.

응서는 둘 다 온전하게 되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곧 계월향을 베었다.

성을 넘어 군에 도착해서 그 머리를 높이 걸어 왜군들에게 보였다.

왜군들이 그로 말미암아 기세가 움츠러져 감히 나오지 못했다.

(중략) 계월향은 비록 죽었지만, 결국 왜장의 머리를 베었으니, 아, 그 광명은 길이 남을 것이다.

'<연경재전집, 성해응>  성해응이 쓴 연경재전집엔 계월향의 활약에 대해 더욱 소상한 기술이 존재한다.

이덕무와 윤두수, 그리고 성해응의 유사한 기록들을 역사적인 사실로 생각한다면, 계월향의 공은 실로 추앙받아야 마땅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1800년대 초반까지 계월향에 대한 기록은 평양과 그 인근 지역의 기억으로만 국한되고 있었다.

계월향의 비문이 규장각에 모셔지게 된 것도, 1835년, 평양감사 정원용의 청원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계월향은 논개와 달리 조선 왕조로부터 잊혀지게 되었던 것일까?(팬텀하록 작가의 조일전쟁 中. 소서비(나이토 조안)의 역할이 종의지(소 요시토시)로 대체되었다.

의외로 계월향은 서브창작계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녀가 적장에게 수청을 들은 기녀였기 때문이었고, 이차적인 것은 아녀자가 된 몸으로 사내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어이가 없는 이유다만,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적 질서가 개편된 조선조에게 계월향은 '의기'로서 추앙하기엔 참으로 껄끄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논개 또한 여성으로서 남자인 왜장을 죽이긴 했다만, 논개는 적장의 수청을 들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녀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그에 비해 계월향의 죽음은 연경재전집, 평양지, 청장관전서를 통틀어 김응서가 부득이 그녀를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계월향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들과 야담들을 살펴보면, 그녀의 죽음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설정이 존재한다.

 (평양 장향각에 모셔진 계월향의 영정.)  이화여대 여성학과 정지영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다면, 그 첫째는 둘 다 살기 어려울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때 김응서는 "아녀자로서 영웅을 죽였우니 너를 두면 일을 성사하기 어렵다.

" 라거나 "첩으로서 남편을 죽였으니 인륜을 저버린 여자를 살려둘 수 없다.

" 라는 말을 덧붙인다.

둘째는 계월향이 원해서 김응서에게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다.

이때 계월향은 "내가 죽어야 김 장군의 공이 온전할 수 있다.

" 라던가 "천한 계집으로서 영웅을 죽였으니 나는 죽어야 한다.

" 라는 말을 덧붙인다.

화자가 바뀌었지만 말하는 내용은 실상 동일한 것이나 마찬가지.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계월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이때 그녀는 더러워진 몸으로 살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은장도를 꺼내 자신의 몸에 찔러 넣는다.

보통 설화와 야담에선 둘째와 세번째 경우의 설정이 많이 차용된다.

아무래도 이야기만큼은 '미담'이 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왜 이런 설정들이 추가되고, 계월향은 각광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주저앉아있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계월향 그녀가 감당해야했던 운명이었다.

허나 그 운명은 1592년, 그 당시의 운명이 아닌 약 100

200여년이 지나고 나서 새로이 구성된 성리학적 질서 하의 운명이었다.

기녀의 충, 효, 열은 그 몸을 온전히 희생시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논개는 이를 완벽히 성사시켰지만, 계월향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계월향이 의기가 될 수 없던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가 '기녀'로서 적과 내통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강압적인 왜장의 강요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계월향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고,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고로, 그녀에 대한 서술과 평가는 성리학 교조주의 체제의 조선조에서 상당히 비판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계월향은 '잊혀지게' 된 것이었다.

(신암행어사의 계월향. 본 만화를 한번이라도 봤다면 이 장면에서 같이 울어줘야한다ㅠㅠㅠㅠ) 임진록의 이본인 흑룡일기에선 훗날 김응서가 강홍립과 함께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을 두고 "김응서가 죽은 것은 평양 기생 계월향을 죽였기 때문에 그 보복을 받은 것."이라고 기록한다.

실제 김응서는 사르후에서 전사하진 않았다만. 더 나아가 흑룡일기에는 "국왕의 은혜를 갚고 가부를 위해 죽었으니 그녀를 노류장화와 같이 보내면 안 된다.

"라는 다분히 계월향을 의식한 기술이 존재한다.

이러한 흑룡일기의 서술을 볼 때, 민중들, 그 중에서도 최소한 평양의 민중들 만큼이라도 계월향의 죽음을 기리고, 그녀를 찬양했다는 의식이 소수로나마 존재했으며 이들을 통해 계월향의 전설은 미담의 형태로 사실과 혼재되어 오늘까지 전해내려오는 것이다.

그 예로, 두산백과에서까지 계월향은 김응서의 애첩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실제 사서에선 계월향이 김응서의 애첩이란 기술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김응서가 사헌부로부터 가는 곳마다 창기를 가까이 하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난 적이 있는 것을 본다면, 김응서와 계월향과의 염문설은 아주 신빙성이 없는 수준까진 아닐 것이다.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계월향에게, 한용운>계월향 그리워라 모란봉만 높구나 능라도 버들로도 그대 매기 어려워 갸륵한 일편단심 볼 길이 없어라<장한가, 신불출>  계월향을 기린 신불출과 한용운의 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의(義)를 떨친 계월향을 되뇌이고 그녀를 추앙하는 것 자체는 일종의 문학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근대 이후, 부국과 외세로부터의 압제에서 벗어나기위한 계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을 때, 국가 보전의 영역은 여성도 예외일 수 없다는 논리에 그제야 계월향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출두'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계월향은 논개와 마찬가지로 구국의 여성으로 재연되었다.

결국 계월향은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창기로 전락했고,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영웅이 된 인물이라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조선의 백성임을 명심하라는 애인 조방장 김경서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소서를 죽일 것을 결심한다.

 한편 김경서는 흩어진 군을 모아 평양 수복의 기회를 노린다.

이 무렵 남해에서는 한산도 대첩이 있고 왜군들의 보급로가 끊긴 것을 연을 올려 경서에게 알려준다.

경서와 월향은 소서를 주살했으나 월향은 부상을 입고 경서를 탈주시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개봉관 개봉 기록없음. 이 영화는 정비석(鄭飛石:1911

1991)작가가 에 1976년부터 4년간 연재했던 "명기열전" 중 <평양기생 계월향>편을 임권택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신성일과 정윤희가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함께 연기한 영화.계월향은 논개와 더불어 조선 2대 의기로 불리운다.

평안도병마절도사 김경서의 애첩이었던 계월향은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 '고니시 히'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고니시 히'를 속여 김경서로 하여금 '고니시 히'의 머리를 베게 한 뒤 함께 도망가다가 김경서만 도망가게 하고 자신은 자결하였다.

 2007년 기생으로는 처음으로 계월향의 초상화가 발견되었다.

그만큼 당시 사대부들이 계월향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86년 VHS 출시]포스터 : ⓒ양해남 컬렉션 그곳에는 계월향이란 기생이 한 명 있었다.

계월향은 북한의 논개라고 알려진 기생으로, 역사적 사실과 야담이 뒤섞인 그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평안도 우방어사 김응서와 동심합력하여 왜장의 수급을 베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준 한 조선 여성이었다.

이리 보면 실상 계월향의 활약은 논개의 의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아직 대중들 사이에선 그녀의 이름조차 생소한 것이 사실. 아마 계월향은 북한(평양) 출신이고, 논개는 진주(남한) 출신이라는 편협한(?) 지역 논리가 가미되어 발로된 결과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행장의 부장(副將)에 용력이 절등한 사람이 있으니 언제나 앞장서서 진을 함락시켜 행장이 소중히 여기고 일을 맡겼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이 그에게 잡혔는데 지극히 사랑을 받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서문에 가서 친척을 보고 오겠다 하니 왜장이 허락하였다.

계월향이 성 위에 올라, “우리 오빠 어디 있소.” 하고 연거푸 슬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응서가 답하고 가니 계월향의 말이, “만약 나를 탈출하게 해준다면 죽음으로 은혜를 갚겠소.” 하니 응서가 허락하고 계월향의 친오빠라 자칭하고 성에 들어갔다.

밤중에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계월향이 응서를 인도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왜장이 걸상에 앉아서 자는데 두 눈을 부릅뜬 채 쌍검(雙劍)을 쥐고 얼굴을 벌겋게 해가지고 마치 사람을 내리칠 것 같았다.

응서가 칼을 빼어 왜장을 베니 머리는 벌써 땅에 떨어졌는데도 칼을 던져 하나는 벽에 꽂히고 하나는 기둥에 꽂혀 칼날이 반이나 들어갔다.

응서가 왜장의 머리를 가지고 문을 뛰쳐나오니 계월향이 뒤를 따랐다.

응서가 둘 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짐작하고 칼을 휘둘러 베고 한 몸으로 성을 넘어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그 장수의 죽음을 알고 크게 놀라 소란을 피우며 사기를 잃었다.

'<평양지, 윤두수>  계월향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사서에 등장한 것은 평양부윤 윤두수(그래, 그 윤두수가 맞다.

)가 지은 평양지에서이다.

헌데 평양지의 편찬시기는 1590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의 기록이다.

아마 임진왜란 이후, 윤두수나 여타 인물이 기록에 서술을 추가한 듯으로 보인다.

이 평양지의 부분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그대로 인용되었는데,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덕무 또한 그의 저서인 청장관전서에서 비슷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청양관은 평양성(平壤城) 안에 있는 객사(客舍) 이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장(倭將) 소서비(小西飛)가 평양을 점령하자 김응서(金應瑞)는, 소서비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과 밀계(密計)하고 밤중에 소서비가 잠이 든 틈을 이용하여 장중(帳中)에 들어가 그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적장(敵將)은 목이 없이도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기둥을 쳐서 칼자국이 났다.

김응서는 소서비의 머리를 꿰어차고서, 계월향과는 같이 적진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할 수 없이 계월향을 죽이고 혼자 성(城)을 넘어 자기 진영으로 온 것을 말한다.

계선(桂仙)은 계월향이다.

'<청장관전서, 이덕무>  청장관전서에선 김응서와 계월향이 죽인 왜장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이름이 소서비라고 한다.

이 소서비는 小西飛를 음차한 것으로, 일본어로 읽으면 나이토 조안이 된다.

헌데 정작 이 나이토 조안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전해서 패한 뒤, 필리핀 마닐라로 유배(라고는 하나 실제 일본의 지배력이 필리핀까지 미쳤을 리 없으므로, 실상 추방에 가깝다.

)되었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은 왜적의 상수 소서비를 데리고 관백의 항복문서를 가지고 돌아왔으나,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 항복문서가 관백의 것이 아니라 소서행장 등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징비록, 유성룡>  징비록의 기록에서와 같이, 소서비는 평양성 함락 이후에도 사서에서 등장한다.

그는 고니시의 부장이면서, 고니시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아 그에게 고니시의 성을 하사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계월향과 김응서가 고니시를 참했다는 이설도 존재하는데, 이 역시 사실일 리 없다.

  '계월향은 평양기생이다.

임진년에 왜적이 평양성을 점령하였을 때 별장 김응서가 용강, 삼화, 증산, 강서의 네 읍의 군(軍)으로 평양의 서쪽에 20여 진지를 설치하였다.

 왜군의 우두머리인, 소서행장의 부장이었던 자는 용맹하여 맨 먼저 성벽에 올라가서 진을 함락시켰고, 계월향을 얻어서 무척 그녀를 사랑하였다.

그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루각(樓閣)은 깊은 곳에 있고 방어가 무척 견고하였으며, 사람들을 물리쳐 통과할 수 없었고, 오직 계월향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때 심유경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 고니시와 조약을 맺어 평양 서쪽 십리에 표를 세워 조선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왜군이 병력을 거두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양성을 왕래할 수 있었다.

 계월향은 비록 왜적 우두머리의 사람을 받았지만 요행이 도망하여 돌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두머리에게 청하여 부모님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였고, 우두머리는 허락하였다.

즉시 성에 올라가 부르기를 “내 오라버니는 어디 계시오?” 하고 외쳤고, 응서는 마침 왜군을 정찰하러 성 아래에 와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다.

”라고 대답하였고, 계월향이 그를 맞아들여, 은밀히 말하기를 “공께서 나를 탈출시켜 주신다면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소.” 하고는 그를 이끌어 성으로 들어가서 왜군 우두머리에게 보였다.

 왜군 우두머리는 응서를 계월향의 오빠로 생각하고 무척 가까이 여겨서 신임하였다.

계월향은 왜군 우두머리가 잠든 것을 틈타 몰래 응서를 끌어들였고 왜군 우두머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을 붉히고 눈을 부릅뜨고는 왼손으로는 방울 끈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사람을 베려는 듯 칼을 잡고 있는 것을 응서가 직전에 그를 베었다.

 우두머리는 죽었으나 방울 끈이 움직였고 검이 땅에 떨어져서 땅에 여러 자(尺)의 구멍이 뚫렸다.

마침내 왜군들이 방울 소리를 듣고 시끄러워졌다.

계월향이 (그들을) 맞아서 말하기를 “장군이 취한 것일 뿐 다른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고, 드디어 왜군들이 물러났다.

응서는 우두머리의 머리를 차고 나가려 했고, 계월향은 옷을 잡아끌며 그를 따랐다.

응서는 둘 다 온전하게 되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곧 계월향을 베었다.

성을 넘어 군에 도착해서 그 머리를 높이 걸어 왜군들에게 보였다.

왜군들이 그로 말미암아 기세가 움츠러져 감히 나오지 못했다.

(중략) 계월향은 비록 죽었지만, 결국 왜장의 머리를 베었으니, 아, 그 광명은 길이 남을 것이다.

'<연경재전집, 성해응>  성해응이 쓴 연경재전집엔 계월향의 활약에 대해 더욱 소상한 기술이 존재한다.

이덕무와 윤두수, 그리고 성해응의 유사한 기록들을 역사적인 사실로 생각한다면, 계월향의 공은 실로 추앙받아야 마땅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1800년대 초반까지 계월향에 대한 기록은 평양과 그 인근 지역의 기억으로만 국한되고 있었다.

계월향의 비문이 규장각에 모셔지게 된 것도, 1835년, 평양감사 정원용의 청원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계월향은 논개와 달리 조선 왕조로부터 잊혀지게 되었던 것일까?(팬텀하록 작가의 조일전쟁 中. 소서비(나이토 조안)의 역할이 종의지(소 요시토시)로 대체되었다.

의외로 계월향은 서브창작계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녀가 적장에게 수청을 들은 기녀였기 때문이었고, 이차적인 것은 아녀자가 된 몸으로 사내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어이가 없는 이유다만,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적 질서가 개편된 조선조에게 계월향은 '의기'로서 추앙하기엔 참으로 껄끄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논개 또한 여성으로서 남자인 왜장을 죽이긴 했다만, 논개는 적장의 수청을 들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녀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그에 비해 계월향의 죽음은 연경재전집, 평양지, 청장관전서를 통틀어 김응서가 부득이 그녀를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계월향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들과 야담들을 살펴보면, 그녀의 죽음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설정이 존재한다.

 (평양 장향각에 모셔진 계월향의 영정.)  이화여대 여성학과 정지영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다면, 그 첫째는 둘 다 살기 어려울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때 김응서는 "아녀자로서 영웅을 죽였우니 너를 두면 일을 성사하기 어렵다.

" 라거나 "첩으로서 남편을 죽였으니 인륜을 저버린 여자를 살려둘 수 없다.

" 라는 말을 덧붙인다.

둘째는 계월향이 원해서 김응서에게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다.

이때 계월향은 "내가 죽어야 김 장군의 공이 온전할 수 있다.

" 라던가 "천한 계집으로서 영웅을 죽였으니 나는 죽어야 한다.

" 라는 말을 덧붙인다.

화자가 바뀌었지만 말하는 내용은 실상 동일한 것이나 마찬가지.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계월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이때 그녀는 더러워진 몸으로 살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은장도를 꺼내 자신의 몸에 찔러 넣는다.

보통 설화와 야담에선 둘째와 세번째 경우의 설정이 많이 차용된다.

아무래도 이야기만큼은 '미담'이 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왜 이런 설정들이 추가되고, 계월향은 각광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주저앉아있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계월향 그녀가 감당해야했던 운명이었다.

허나 그 운명은 1592년, 그 당시의 운명이 아닌 약 100

200여년이 지나고 나서 새로이 구성된 성리학적 질서 하의 운명이었다.

기녀의 충, 효, 열은 그 몸을 온전히 희생시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논개는 이를 완벽히 성사시켰지만, 계월향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계월향이 의기가 될 수 없던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가 '기녀'로서 적과 내통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강압적인 왜장의 강요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계월향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고,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고로, 그녀에 대한 서술과 평가는 성리학 교조주의 체제의 조선조에서 상당히 비판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계월향은 '잊혀지게' 된 것이었다.

(신암행어사의 계월향. 본 만화를 한번이라도 봤다면 이 장면에서 같이 울어줘야한다ㅠㅠㅠㅠ) 임진록의 이본인 흑룡일기에선 훗날 김응서가 강홍립과 함께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을 두고 "김응서가 죽은 것은 평양 기생 계월향을 죽였기 때문에 그 보복을 받은 것."이라고 기록한다.

실제 김응서는 사르후에서 전사하진 않았다만. 더 나아가 흑룡일기에는 "국왕의 은혜를 갚고 가부를 위해 죽었으니 그녀를 노류장화와 같이 보내면 안 된다.

"라는 다분히 계월향을 의식한 기술이 존재한다.

이러한 흑룡일기의 서술을 볼 때, 민중들, 그 중에서도 최소한 평양의 민중들 만큼이라도 계월향의 죽음을 기리고, 그녀를 찬양했다는 의식이 소수로나마 존재했으며 이들을 통해 계월향의 전설은 미담의 형태로 사실과 혼재되어 오늘까지 전해내려오는 것이다.

그 예로, 두산백과에서까지 계월향은 김응서의 애첩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실제 사서에선 계월향이 김응서의 애첩이란 기술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김응서가 사헌부로부터 가는 곳마다 창기를 가까이 하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난 적이 있는 것을 본다면, 김응서와 계월향과의 염문설은 아주 신빙성이 없는 수준까진 아닐 것이다.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계월향에게, 한용운>계월향 그리워라 모란봉만 높구나 능라도 버들로도 그대 매기 어려워 갸륵한 일편단심 볼 길이 없어라<장한가, 신불출>  계월향을 기린 신불출과 한용운의 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의(義)를 떨친 계월향을 되뇌이고 그녀를 추앙하는 것 자체는 일종의 문학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근대 이후, 부국과 외세로부터의 압제에서 벗어나기위한 계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을 때, 국가 보전의 영역은 여성도 예외일 수 없다는 논리에 그제야 계월향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출두'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계월향은 논개와 마찬가지로 구국의 여성으로 재연되었다.

결국 계월향은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창기로 전락했고,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영웅이 된 인물이라 볼 수 있으리라.  그에게는 의기(義妓)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첩이던 계월향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副將)에게 몸을 더럽혔으나 기지를 발휘해 김응서에게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결했다.

이런 전력으로 말미암아 기생으로는 특이하게 사당에 배향되어 제사를 받는 인물이 된다.

 19세기 초반 평양 장향각(藏香閣)이란 사당에 안치했던 그의 영정이 공개된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은 1815년에 제작된 이 영정을 최근 구입, 내달 2일부터 8월11일까지 전시한다고 29일 밝혔다.

영정은 주인공인 계월향이 앉아있는 전신상을 담고있으며 그와 관련된 일화가 그림 윗부분에 적혀있다.

민속박물관은 "조선후기 영정이라고 하면 당시 사회윤리의 근간인 숭현사상(崇賢思想)에 따라 사묘(祠廟)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 주로 전하지만 국왕의 어진(御眞)이나 일반 사대부 등의 남성 영정 일색인 현실에서 이 계월향 영정은 여성, 그것도 기녀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이 특히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크게 올려 꾸민 형식이라든가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에 달린 향노리개 등은 당시 복식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초상화 전문가로 문화재위원이자 성균관대박물관장인 조선미 교수는 "표정이 살아 있고, 자태가 곱고 앳된 연령이 느껴 질만큼 세부 표현에도 신경을 썼다"면서 "얼굴 윤곽과 코선, 목덜미 등을 따라 붉은 계열의 음영을 짙게 넣되, 코나 목선, 인중 등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고 있는 특색이 있다.

이러한 음영법은 19세기 초상화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드문 표현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계월향을 배향하는 제사는 이 영정을 제작한 시기인 19세기 초부터 근대까지 이어졌다.

예컨대 동아일보 1921년 4월26일자 기사에는 "1921년 4월22일(음력 3월15일) 평양 의열사(義烈祠)에서 평양기성권번(平壤箕城券番) 주최로 제수를 갖추어 배례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 <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계월향은 곧 죽을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지태가 이를 '세크로파이스'라는 주술로 살릴 수 있다고 문수를 현혹했다.

이로 인해서 문수는 계월향의 병을 가지고 대신에 짊어졌다.

그러나 병이 나을 줄 알았던 계월향은 사실 저주에 걸려서 죽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몸이 부식되고 썩어나가며 아지태에게 범해지고 농락을 당해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쥬신을 떠나고 나서 다시 돌아온 문수는 아지태를 없애기 위해서 궁궐로 쳐들어 가고 거기서 계월향을 만나러 간다.

계월향은 항상 문수를 <뿌리 깊은 나무>라며 존경했다.

사람들이 어떤 거대한 나무를 제거하자고 했을 때 이를 막아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알고 봤더니 그 거대한 나무 덕에 산사태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문수가 자신 때문에 흔들리자 그녀는 문수의 검에 뛰어들어서 자결을 한다.

원래의 저주대로라면 계월향은 죽을 수 없는 몸... 하지만 계월향의 희생으로 아지태의 저주가 틀어지면서 계월향이 죽을 수 있게 되고 문수만이 아지태의 초월적인 능력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는 계월향이란 기생이 한 명 있었다.

계월향은 북한의 논개라고 알려진 기생으로, 역사적 사실과 야담이 뒤섞인 그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평안도 우방어사 김응서와 동심합력하여 왜장의 수급을 베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준 한 조선 여성이었다.

이리 보면 실상 계월향의 활약은 논개의 의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아직 대중들 사이에선 그녀의 이름조차 생소한 것이 사실. 아마 계월향은 북한(평양) 출신이고, 논개는 진주(남한) 출신이라는 편협한(?) 지역 논리가 가미되어 발로된 결과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행장의 부장(副將)에 용력이 절등한 사람이 있으니 언제나 앞장서서 진을 함락시켜 행장이 소중히 여기고 일을 맡겼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이 그에게 잡혔는데 지극히 사랑을 받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서문에 가서 친척을 보고 오겠다 하니 왜장이 허락하였다.

계월향이 성 위에 올라, “우리 오빠 어디 있소.” 하고 연거푸 슬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응서가 답하고 가니 계월향의 말이, “만약 나를 탈출하게 해준다면 죽음으로 은혜를 갚겠소.” 하니 응서가 허락하고 계월향의 친오빠라 자칭하고 성에 들어갔다.

밤중에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계월향이 응서를 인도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왜장이 걸상에 앉아서 자는데 두 눈을 부릅뜬 채 쌍검(雙劍)을 쥐고 얼굴을 벌겋게 해가지고 마치 사람을 내리칠 것 같았다.

응서가 칼을 빼어 왜장을 베니 머리는 벌써 땅에 떨어졌는데도 칼을 던져 하나는 벽에 꽂히고 하나는 기둥에 꽂혀 칼날이 반이나 들어갔다.

응서가 왜장의 머리를 가지고 문을 뛰쳐나오니 계월향이 뒤를 따랐다.

응서가 둘 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짐작하고 칼을 휘둘러 베고 한 몸으로 성을 넘어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그 장수의 죽음을 알고 크게 놀라 소란을 피우며 사기를 잃었다.

'<평양지, 윤두수>  계월향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사서에 등장한 것은 평양부윤 윤두수(그래, 그 윤두수가 맞다.

)가 지은 평양지에서이다.

헌데 평양지의 편찬시기는 1590년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의 기록이다.

아마 임진왜란 이후, 윤두수나 여타 인물이 기록에 서술을 추가한 듯으로 보인다.

이 평양지의 부분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 그대로 인용되었는데,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덕무 또한 그의 저서인 청장관전서에서 비슷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청양관은 평양성(平壤城) 안에 있는 객사(客舍) 이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장(倭將) 소서비(小西飛)가 평양을 점령하자 김응서(金應瑞)는, 소서비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과 밀계(密計)하고 밤중에 소서비가 잠이 든 틈을 이용하여 장중(帳中)에 들어가 그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적장(敵將)은 목이 없이도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기둥을 쳐서 칼자국이 났다.

김응서는 소서비의 머리를 꿰어차고서, 계월향과는 같이 적진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할 수 없이 계월향을 죽이고 혼자 성(城)을 넘어 자기 진영으로 온 것을 말한다.

계선(桂仙)은 계월향이다.

'<청장관전서, 이덕무>  청장관전서에선 김응서와 계월향이 죽인 왜장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이름이 소서비라고 한다.

이 소서비는 小西飛를 음차한 것으로, 일본어로 읽으면 나이토 조안이 된다.

헌데 정작 이 나이토 조안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전해서 패한 뒤, 필리핀 마닐라로 유배(라고는 하나 실제 일본의 지배력이 필리핀까지 미쳤을 리 없으므로, 실상 추방에 가깝다.

)되었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은 왜적의 상수 소서비를 데리고 관백의 항복문서를 가지고 돌아왔으나,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 항복문서가 관백의 것이 아니라 소서행장 등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징비록, 유성룡>  징비록의 기록에서와 같이, 소서비는 평양성 함락 이후에도 사서에서 등장한다.

그는 고니시의 부장이면서, 고니시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아 그에게 고니시의 성을 하사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계월향과 김응서가 고니시를 참했다는 이설도 존재하는데, 이 역시 사실일 리 없다.

  '계월향은 평양기생이다.

임진년에 왜적이 평양성을 점령하였을 때 별장 김응서가 용강, 삼화, 증산, 강서의 네 읍의 군(軍)으로 평양의 서쪽에 20여 진지를 설치하였다.

 왜군의 우두머리인, 소서행장의 부장이었던 자는 용맹하여 맨 먼저 성벽에 올라가서 진을 함락시켰고, 계월향을 얻어서 무척 그녀를 사랑하였다.

그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루각(樓閣)은 깊은 곳에 있고 방어가 무척 견고하였으며, 사람들을 물리쳐 통과할 수 없었고, 오직 계월향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때 심유경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 고니시와 조약을 맺어 평양 서쪽 십리에 표를 세워 조선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왜군이 병력을 거두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양성을 왕래할 수 있었다.

 계월향은 비록 왜적 우두머리의 사람을 받았지만 요행이 도망하여 돌아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두머리에게 청하여 부모님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였고, 우두머리는 허락하였다.

즉시 성에 올라가 부르기를 “내 오라버니는 어디 계시오?” 하고 외쳤고, 응서는 마침 왜군을 정찰하러 성 아래에 와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다.

”라고 대답하였고, 계월향이 그를 맞아들여, 은밀히 말하기를 “공께서 나를 탈출시켜 주신다면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소.” 하고는 그를 이끌어 성으로 들어가서 왜군 우두머리에게 보였다.

 왜군 우두머리는 응서를 계월향의 오빠로 생각하고 무척 가까이 여겨서 신임하였다.

계월향은 왜군 우두머리가 잠든 것을 틈타 몰래 응서를 끌어들였고 왜군 우두머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을 붉히고 눈을 부릅뜨고는 왼손으로는 방울 끈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사람을 베려는 듯 칼을 잡고 있는 것을 응서가 직전에 그를 베었다.

 우두머리는 죽었으나 방울 끈이 움직였고 검이 땅에 떨어져서 땅에 여러 자(尺)의 구멍이 뚫렸다.

마침내 왜군들이 방울 소리를 듣고 시끄러워졌다.

계월향이 (그들을) 맞아서 말하기를 “장군이 취한 것일 뿐 다른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고, 드디어 왜군들이 물러났다.

응서는 우두머리의 머리를 차고 나가려 했고, 계월향은 옷을 잡아끌며 그를 따랐다.

응서는 둘 다 온전하게 되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곧 계월향을 베었다.

성을 넘어 군에 도착해서 그 머리를 높이 걸어 왜군들에게 보였다.

왜군들이 그로 말미암아 기세가 움츠러져 감히 나오지 못했다.

(중략) 계월향은 비록 죽었지만, 결국 왜장의 머리를 베었으니, 아, 그 광명은 길이 남을 것이다.

'<연경재전집, 성해응>  성해응이 쓴 연경재전집엔 계월향의 활약에 대해 더욱 소상한 기술이 존재한다.

이덕무와 윤두수, 그리고 성해응의 유사한 기록들을 역사적인 사실로 생각한다면, 계월향의 공은 실로 추앙받아야 마땅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1800년대 초반까지 계월향에 대한 기록은 평양과 그 인근 지역의 기억으로만 국한되고 있었다.

계월향의 비문이 규장각에 모셔지게 된 것도, 1835년, 평양감사 정원용의 청원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계월향은 논개와 달리 조선 왕조로부터 잊혀지게 되었던 것일까?(팬텀하록 작가의 조일전쟁 中. 소서비(나이토 조안)의 역할이 종의지(소 요시토시)로 대체되었다.

의외로 계월향은 서브창작계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녀가 적장에게 수청을 들은 기녀였기 때문이었고, 이차적인 것은 아녀자가 된 몸으로 사내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어이가 없는 이유다만,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적 질서가 개편된 조선조에게 계월향은 '의기'로서 추앙하기엔 참으로 껄끄러운 인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논개 또한 여성으로서 남자인 왜장을 죽이긴 했다만, 논개는 적장의 수청을 들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녀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그에 비해 계월향의 죽음은 연경재전집, 평양지, 청장관전서를 통틀어 김응서가 부득이 그녀를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계월향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들과 야담들을 살펴보면, 그녀의 죽음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설정이 존재한다.

 (평양 장향각에 모셔진 계월향의 영정.)  이화여대 여성학과 정지영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다면, 그 첫째는 둘 다 살기 어려울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때 김응서는 "아녀자로서 영웅을 죽였우니 너를 두면 일을 성사하기 어렵다.

" 라거나 "첩으로서 남편을 죽였으니 인륜을 저버린 여자를 살려둘 수 없다.

" 라는 말을 덧붙인다.

둘째는 계월향이 원해서 김응서에게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다.

이때 계월향은 "내가 죽어야 김 장군의 공이 온전할 수 있다.

" 라던가 "천한 계집으로서 영웅을 죽였으니 나는 죽어야 한다.

" 라는 말을 덧붙인다.

화자가 바뀌었지만 말하는 내용은 실상 동일한 것이나 마찬가지.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계월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이때 그녀는 더러워진 몸으로 살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은장도를 꺼내 자신의 몸에 찔러 넣는다.

보통 설화와 야담에선 둘째와 세번째 경우의 설정이 많이 차용된다.

아무래도 이야기만큼은 '미담'이 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왜 이런 설정들이 추가되고, 계월향은 각광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주저앉아있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계월향 그녀가 감당해야했던 운명이었다.

허나 그 운명은 1592년, 그 당시의 운명이 아닌 약 100

200여년이 지나고 나서 새로이 구성된 성리학적 질서 하의 운명이었다.

기녀의 충, 효, 열은 그 몸을 온전히 희생시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논개는 이를 완벽히 성사시켰지만, 계월향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계월향이 의기가 될 수 없던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가 '기녀'로서 적과 내통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강압적인 왜장의 강요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계월향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고,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고로, 그녀에 대한 서술과 평가는 성리학 교조주의 체제의 조선조에서 상당히 비판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계월향은 '잊혀지게' 된 것이었다.

(신암행어사의 계월향. 본 만화를 한번이라도 봤다면 이 장면에서 같이 울어줘야한다ㅠㅠㅠㅠ) 임진록의 이본인 흑룡일기에선 훗날 김응서가 강홍립과 함께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을 두고 "김응서가 죽은 것은 평양 기생 계월향을 죽였기 때문에 그 보복을 받은 것."이라고 기록한다.

실제 김응서는 사르후에서 전사하진 않았다만. 더 나아가 흑룡일기에는 "국왕의 은혜를 갚고 가부를 위해 죽었으니 그녀를 노류장화와 같이 보내면 안 된다.

"라는 다분히 계월향을 의식한 기술이 존재한다.

이러한 흑룡일기의 서술을 볼 때, 민중들, 그 중에서도 최소한 평양의 민중들 만큼이라도 계월향의 죽음을 기리고, 그녀를 찬양했다는 의식이 소수로나마 존재했으며 이들을 통해 계월향의 전설은 미담의 형태로 사실과 혼재되어 오늘까지 전해내려오는 것이다.

그 예로, 두산백과에서까지 계월향은 김응서의 애첩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실제 사서에선 계월향이 김응서의 애첩이란 기술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김응서가 사헌부로부터 가는 곳마다 창기를 가까이 하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난 적이 있는 것을 본다면, 김응서와 계월향과의 염문설은 아주 신빙성이 없는 수준까진 아닐 것이다.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계월향에게, 한용운>계월향 그리워라 모란봉만 높구나 능라도 버들로도 그대 매기 어려워 갸륵한 일편단심 볼 길이 없어라<장한가, 신불출>  계월향을 기린 신불출과 한용운의 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의(義)를 떨친 계월향을 되뇌이고 그녀를 추앙하는 것 자체는 일종의 문학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근대 이후, 부국과 외세로부터의 압제에서 벗어나기위한 계몽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을 때, 국가 보전의 영역은 여성도 예외일 수 없다는 논리에 그제야 계월향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출두'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계월향은 논개와 마찬가지로 구국의 여성으로 재연되었다.

결국 계월향은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창기로 전락했고,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영웅이 된 인물이라 볼 수 있으리라.  그에게는 의기(義妓)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첩이던 계월향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副將)에게 몸을 더럽혔으나 기지를 발휘해 김응서에게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결했다.

이런 전력으로 말미암아 기생으로는 특이하게 사당에 배향되어 제사를 받는 인물이 된다.

 19세기 초반 평양 장향각(藏香閣)이란 사당에 안치했던 그의 영정이 공개된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은 1815년에 제작된 이 영정을 최근 구입, 내달 2일부터 8월11일까지 전시한다고 29일 밝혔다.

영정은 주인공인 계월향이 앉아있는 전신상을 담고있으며 그와 관련된 일화가 그림 윗부분에 적혀있다.

민속박물관은 "조선후기 영정이라고 하면 당시 사회윤리의 근간인 숭현사상(崇賢思想)에 따라 사묘(祠廟)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 주로 전하지만 국왕의 어진(御眞)이나 일반 사대부 등의 남성 영정 일색인 현실에서 이 계월향 영정은 여성, 그것도 기녀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이 특히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크게 올려 꾸민 형식이라든가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에 달린 향노리개 등은 당시 복식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초상화 전문가로 문화재위원이자 성균관대박물관장인 조선미 교수는 "표정이 살아 있고, 자태가 곱고 앳된 연령이 느껴 질만큼 세부 표현에도 신경을 썼다"면서 "얼굴 윤곽과 코선, 목덜미 등을 따라 붉은 계열의 음영을 짙게 넣되, 코나 목선, 인중 등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고 있는 특색이 있다.

이러한 음영법은 19세기 초상화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드문 표현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계월향을 배향하는 제사는 이 영정을 제작한 시기인 19세기 초부터 근대까지 이어졌다.

예컨대 동아일보 1921년 4월26일자 기사에는 "1921년 4월22일(음력 3월15일) 평양 의열사(義烈祠)에서 평양기성권번(平壤箕城券番) 주최로 제수를 갖추어 배례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 <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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