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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강대국들에 휘둘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1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은가.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공사관. 동아일보

1896년 병신년(丙申年) 2월 11일.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음력 섣달 그믐 전날 새벽. 설맞이 준비로 들떠 있던 조선 천지를 뒤집어엎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조선의 대군주(大君主, 고종)와 왕태자(王太子, 뒷날의 순종)가 궁녀가 타는 가마 안에 들어앉아서 몰래 경복궁을 탈출, 아관(俄館)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관’은 아라사(러시아) 공사관, ‘파천’은 임금이 자신의 궁궐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함을 가리키기에, 역사는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북악산 기슭 경복궁에서 서소문 근처 아관까지는 불과 2400여m. 그러나 그날 새벽에 조선의 대군주와 왕태자가 가마를 타고 몰래 지나간 뒤 그 ‘2400m’가 지닌 의미는 거대한 다이너마이트처럼 강력하게 폭발했다.

당시 앙숙이던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비중을 일거에 완전히 뒤바꾸는 상전벽해의 격동을 일으킨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후폭풍

아관파천의 근본 원인은 고종의 정비(正妃) 중전 민씨(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세칭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에 있다.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의 야망을 꺾기 위해 중전 민씨가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이를 막았다.

이 사건 이후 일본 세력과 친일파들은 고종을 경복궁에 연금하고 그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한 나라의 국모를 그처럼 처참하게 살해한 뒤 그로 인해 일어날 반작용과 후폭풍을 막기 위해 극도의 경계조치에 나선 것이다.

일본의 잔혹한 위세와 강력한 통제에 억눌린 고종은 극심한 심신의 고통에 시달렸다.

일본인들이 자신을 폐위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연금된 경복궁 안에서 자신도 명성황후처럼 피살될 수 있다는 생명의 위협까지 체감하고 있었다.

명색이 일국의 통치자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세력에 완전히 장악당한 불쌍한 포로에 불과했다.

고종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이런 사정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 국외 인사들에게도 관찰됐다.

그래서 일본 신문에 ‘조선의 군주가 자신의 궁궐을 탈출해 러시아공사관이나 미국공사관으로 가려고 한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런 판국이니 고종을 감시하는 자들의 경계심은 극도로 고조됐고, 그 때문에 고종의 경복궁 탈출은 그만큼 더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그런 악조건에도 연금 상태의 무거운 압박을 견디지 못한 고종은 마침내 거사에 착수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미 예측하던 대로였다.

고종은 일본 측의 날카로운 감시망을 힘겹게 뚫고 믿을 만한 극소수 신하들에게 밀조(密詔, 비밀조서)를 내려 “나를 구출하라!”고 명했다.

그는 전·현직 고위 관료들 중 친러파와 친미파에 속하는 인사들이 자신을 구해주기를 희망했다.

밀조를 받은 신하들은 충성을 다짐하며 최선을 다해 일을 벌였다.

을미사변 50일 만인 1895년 11월 28일, 그들은 어렵게 병력을 동원해 경복궁의 동쪽 협문인 춘생문 앞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거사에 동원된 군사들은 총포를 쏘아대며 궁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동원군 지휘부의 한 인물이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사전에 밀고하는 바람에 궁궐 안에서는 군사를 대거 동원해 단단히 대비하고 있다가 응전했고 결국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거사에 참여한 자들은 붙잡혔고 이내 재판이 시작됐는데, 임금은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라며 시치미를 떼고 빠져나갔다.

엄 상궁의 거사

궁궐을 향해서 총을 쏘았기에 이 사건은 ‘역모’로 규정됐고, 주동자인 전 시종 임최수와 이도철 참령이 사형을 선고받고 곧 처형됐다.

처형을 모면한 나머지 관련 인사들, 즉 왕족인 이재순을 비롯해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윤웅렬, 윤치호, 이하영, 이채연 등 친러파와 친미파에 속하는 명문 거족의 유명 인사들은 유배형과 태형 등으로 처벌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했고, 더러는 서울에 있는 외국 공관이나 시골로 달아나 숨었다.

이 일은 역사에 ‘춘생문 사건’이라 기록돼 있다.

고종으로서는 가뜩이나 견디기 힘들던 경복궁 연금 상태가 춘생문 사건 실패 후 더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뻗대면서 빠져나가긴 했지만, 춘생문 사건이 고종의 밀조로 시작됐음은 누구나 아는 진실이었다.

군사를 이끌고 춘생문에 이른 지휘부가 임금의 밀조를 꺼내 휘두르면서 “여기, 임금님이 내리신 밀조가 있다!”고 고함치면서 궁궐 진입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감시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면서 이후 병력 동원을 통한 거사는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임금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 속에 갇힌 듯한 당시 상황을 해결하고 경복궁을 무사히 탈출하게 할 방도가 있다고 나선 이가 있었다.

대전(大殿, 임금의 처소)에 소속된 궁녀 엄 상궁이었다.

엄 상궁은 ‘두 채의 가마 작전’이라는 복안을 내놓았다.

워낙 기발한 생각이라 처음 들었을 때는 황당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했다.

그의 계획은 이러했다.

엄 상궁과 그의 심복 궁녀인 내인 박씨가 가마에 들어앉아 궁궐을 드나드는 일을 매일 자주 반복함으로써 두 채의 가마가 나란히 궁문을 드나드는 것이 사람들 눈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그들이 두 채의 가마를 타고 궁곤룡포를 입은 고종. 동아일보밖에 나가는 것은 ‘서소문에 있는 엄 상궁의 친정집으로 들어오는 뇌물을 챙기기 위해서’라는 소문을 내고 다닌다.

현재 고종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처지라 충분히 먹혀들 것이다.

궁문을 드나들 때마다 수문병들에게 후한 행하(行下,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금품)를 내린다.

그래서 두 사람이 궁문을 출입할 때마다 큰돈을 받는 군사들이 굳이 가마문을 열고 안에 있는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신원을 확인하는 일이 점차 미안해지도록 한다.

그리 되면 얼마 안 가서 수문병들이 가마를 열어보지 않고 궁문을 통과시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거사한다.

거사 계획은 이러하다.

가마 한 채에는 임금이 안쪽에 들어앉고 문 앞엔 엄 상궁이 앉는다.

다른 한 채에는 동궁이 안쪽에 들어앉고 문 앞에 내인 박씨가 앉는다.

출궁할 궁문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으로 한다.

거사할 때는 평소 엄 상궁과 박씨가 궁문을 출입할 때처럼 경호 인력이 전혀 없다.

가마 두 채가 무사히 건춘문을 나서면 평소처럼 서소문의 엄 상궁 친정집에 가는 듯 여유롭게 걸어서 주변의 경계를 피하며 아관으로 간다.

권력 지도를 바꾸다

임금과 그의 후계자인 동궁을 함께 경복궁에서 탈출시키는 데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분리되면 나라도, 권력도 분리될 것이다.

친일, 친러, 친미 등등 저마다 배경이 다른 세력에 등을 대고 있는 신하들이 두 사람 중 하나를 확보한 뒤 서로 자신들의 ‘포로’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내세워 권력 다툼을 가중시킬 것이었다.

엄 상궁의 계획은 그 점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고종은 엄 상궁의 계획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성사 가능성이 크다고 확신해서는 아니었다.

다른 길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 황당한 시도를 통해서라도 일본의 극심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엄 상궁은 춘생문 사건의 여파로 여기저기로 숨은 친러파 및 친미파 인사들과 비밀리에 연락해 자신이 임금과 동궁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뒤의 일을 맡아 처리하도록 주선해놓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절체절명의 처지에 있는 한 나라의 임금과 동궁을 그처럼 위험하고 기괴한 모험을 하도록 몰아넣은 엄 상궁의 거사는 결국 성공했다.

모든 것이 엄 상궁의 계획대로 됐다.

상식과 법도를 뛰어넘는 고도의 심리조작 기법이 활용된 놀라운 사례다.

본래 궁궐 안에서는 왕족과 삼공(三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외에는 가마를 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엄 상궁은 ‘두 채의 가마 작전’을 기획했고, 실제 거사에 들어가자 가마꾼들이 평소와 달리 한 가마에 두 사람을 태우고도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엄 상궁의 사전 공작에 길든 건춘문 수문병들은 가마 문을 열어보지도 않고 통과시황귀비 엄씨. 동아일보켰으며, 단 한 명의 경호인도 없이 홀홀히 건춘문을 빠져나간 두 채의 가마가 광화문 앞 큰길을 유유히 질러가도 누구 하나 의심을 품지 않았다.

임금과 동궁이 탄 두 채의 가마가 러시아공사관 정문 안에 들어간 때는 1896년 2월 11일 오전 7시 20분. 그 순간부터 조선 천지의 권력 지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일본인들이 판을 치던 세상에서 러시아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으로.엄 상궁은 여러모로 특출한 인물이다.

그녀는 철종 5년 갑인년(1854)에 태어나 만 5세에 ‘아기 내인’으로 입궁해 궁녀가 됐다.

어릴 때부터 궁 안에서 자라 궁궐살이의 전모를 꿰고 있는 데다 두뇌와 체력이 비상했다.

그래서 성인이 된 뒤 명성황후가 부리는 지밀상궁이 됐다.

지밀상궁은 통치자의 최측근이기에 궁 안에서 대단한 권력자로 꼽힌다.

엄 상궁이 지닌 단 하나의 흠은 얼굴이 너무도 못생겼다는 것. 그런데도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그녀는 만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고종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승은(承恩)’을 입었다.

역사의 거울 속 아관파천

독점욕이 강한 중전 명성황후는 자신을 직접 모시는 궁녀인 엄 상궁이 승은을 입은 사실을 알게 되자 즉시 형틀을 차려놓고 때려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엄 상궁 측에도 사람이 있어 이를 즉각 고종에게 알렸고, 급히 현장에 온 그가 극력 만류해 궐 밖으로 내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엄 상궁이 다시 고종을 본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뒤였다.

중전 시해 뒤 일본인과 친일파들은 대궐에서 근무하는 자들을 자기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을 전혀 믿지 못한 고종은 중전 시해 5일 만에 엄 상궁을 궁으로 불러들이게 명하고 대전 소속 지밀상궁으로 임명해 최측근에 뒀다.

고종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 상궁을 생각해낸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10년 전 승은할 무렵 엄 상궁이 고종에게 자신의 충성심과 명민함, 유용함을 확고하게 각인시켰다는 의미다.

엄 상궁에 대한 고종의 안목은 정확했다.

엄 상궁은 재입궁 4개월 만에 아관파천이라는 초유의 대사건을 기획하고 성사시켰다.

아관파천으로 일본 세력권에서 벗어난 고종은 1년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뒤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했고, 엄 상궁은 만 43세의 늦은 나이에 러시아공사관에서 임신한 고종의 아기를 대한제국 수립 후에 경운궁에서 낳았다.

그 아기가 영친왕 이은으로, 뒤에 대한제국 황태자가 됐다.

황족 아기를 낳은 엄 상궁은 ‘황귀비 엄씨(약칭 엄 귀비)’라는 높은 지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제 엄 상궁과 아관파천 성공이라는 그녀의 업적을 역사라는 이름의 거울에 비춰보자. 그녀가 지닌 뛰어난 지략과 책략의 광휘(光輝)가 초라하게 오그라들어 금세 빛이 죽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

그녀의 지략과 책략은 태생부터 구차하고 서글픈 한계를 지닌 것으로서, 오로지 패배자의 보신(保身)에나 유용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에 휘둘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1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래서 아관파천의 기억과 치욕이 더욱 아프다.

음습한 사잇길에 해당하는 괴이하고 기묘한 술책을 통해서 이루어진 아관파천, 과연 그런 오욕의 역사는 이제 우리에게서 아주 멀어졌는가. 우리가 방심할 때, 다시 난민수용소와 같은 고통의 역사에 갇혀서 몸부림치는 좌절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송우혜 | 소설가swhoo@daum.net앞서 쓴 을미사변이 구한말 가장 큰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이지만 지금 쓸 아관파천도 그에 못지 않다.

아관파천 이름마저 요상하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으로 일명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고종 개인적인 일로만 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한 나라 왕으로서 가장 안전 하다는 궁궐 침실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자기도 옷을 찢겨가면서 끌려다니는 수모를 당하고 고종이 보는 앞에서 세자는 칼등으로 목을 맞아 기절을 한다.

더욱이 아끼는 아내인 왕비가 처참하게 능욕을 당하고 불에 태워져버린 그런 궁궐이 두려워서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나 고종은 한 나라의 왕 이었다.

그것도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오백년을 넘게 이어 온 왕조였다.

그런 왕조 왕으로서 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버려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조선 최악의 왕이었던 선조, 인조에 이어 세 번째로 궁궐을 버리고 도망가는 왕이 되어버렸다.

'1896년 2월 11일 이른 아침, 고종과 왕세자는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두 대의 가마에 나누어 탔다.

가마 앞쪽에는 상궁이 한 명씩 올라타서 뒤쪽에 앉은 임금과 왕세자를 가려 주었다.

[아관파천] 대박이네요.


경비병이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준다면 고종은 감옥 같은 궁궐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가마 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면 탈출 계획이 탄로 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가마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덜덜 떨었다.

고종과 함께 가마에 탄 엄 상궁이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염려 놓으세요. 제 가마는 늘 군말 없이 통과시켰으니 이번에도 별일 없을 것이옵니다.

”한 나라 왕이 자기 궁궐을 벗어 날 때 상황이다.

너무 수치스러워 더 이상 언급하고도 싶지 않다.

아관파천에까지 이르게 된 상황이나 살펴보자!을미사변과 을미개혁 중 단발령 실시이후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자 친일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를 이용하여 의병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기대에 못미치자,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한다.

이로 말미암아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겼다.

이완용을 비롯한 친러파는 이 기회를 틈타 고종을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려는 모의를 한다.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시도는 1895년 음력 10월 12일 춘생문사건 때에도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당시 사건을 모의하고 해외로 탈출했던 친러파 이범진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이윤용및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또 다시 모의하고 고종에게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을미사변 이래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한다.

한편 러시아측은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한양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에 타고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자기네 영토안에 있는 가장 안전한 궁궐을 믿지 못하고 비밀리에 자기 영토안에 있는 대사관으로 피신하고 1년 동안이나 그 대사관에서 정사를 보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웃지 못할 코메디 같은 일이 실제로 조선에서 벌어진 것이다.

어쩌든 파천 직후 러시아라는 강국의 보호 아래서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낀 고종은 급히 명령을 내린다.

제일 먼저 친일개화파이자 갑오경장을 주도적으로 진행해온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를  참형시킨다.

이에 놀란 내부 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한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부 대신 김윤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처럼 고종은 안전한 러시아 공관에서 친일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동안 은신 중이었던 친러·친미파 인물들을 대거 등용한다.

조선 최초 친러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결과 법부 대신과 경무사를 겸임하게 된 이범진을 비롯하여 이완용·이윤용·박정양·조병직·윤용구·이재정·안경수·권재형·윤치호·이상·고영희 등의 인사가 요직에 임명되었다.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은 이때만 해도 친러파 우두머리인 이완용 과 이때 참여한 대신들이 얼마 후 곧 바로 친일파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는데도 앞장 선다.

정말 어떤면에서는 대단한 능력의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어쩌든 친러 내각은 친일파를 나라의 역적으로 단죄한다.

그리고 단발령 실시를 보류하고 의병을 회유하며 세금을 탕감하는 등 인심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갑오·을미의 개혁 사업을 폐지한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개혁을 폐지하고 반동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밖에 23부였던 지방 제도를 한성부와 13도로 개편하였고, 호구 조사도 재정비하였다.

한편 의정부로 환원한 신내각은 국내에 있던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을 파면시키고 대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을 초청했다.

또 러시아 학교를 설립하는 등 러시아 영향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때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무력 대결이 아직은 시기상조라 판단한다.

일본의 주도면밀한 대외정책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러일 전쟁을 10년 가까이 철저히 준비한다.

러시아 무적 발틱함대를 기습공격하기위해 대마도를 두 쪽으로 나누는 운하를 만든 것도 이쯤이었다.

무서운 일본이었다.

일본은 발톱을 숨기고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조선의 내정에 대해 불간섭을 표명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안에 합의하고 각서를 체결한다.

각서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함과 동시에 일본군 병력의 감원·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등 러시아측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 뒤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파견하여, 러시아외상 로바노프와 타협을 모색한다.

같은 해 5월 28일부터 6월 9일까지 진행된 비밀 회담을 통해 양국 대표는 조선 문제에 대한 공동 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4개조의 공개 조관과 2개조의 비밀 조관으로 구성된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취소하는 대신,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한다.

이때 이미 중국은 조선에서 사라졌고 대신 러시아가 나타나 조선 분할통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50년이 넘어 일본이 패망하자 정말 미국과 쏘련에 의해 조선은 분할되었다.

당시 조선에 아무 생각 없었던 미국은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제안을 참고 했을 지도 모른다.

미국의 너무 단순한 생각으로 한 그 분할은 우리 역사상 수백만이 죽는 최악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했다.

[아관파천] 생각의 끝은?

지금까지 우라나라가 통일이 되지 못한 채 오늘도 북한 핵문제나 여러 사태로  우리민족은 늘 전쟁공포 속에 살고 있게하는 우리민족 최악의 비극을 만들어 놓았다.

바로 그 분할이 지금으로 부터 120여녀 전 일본에 의해 제안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전에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게 비슷한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 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해방직후 북한에 진주한 혹은 남한에 진주한 쏘련군과 미군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도 앞으로 닥칠 일을 전혀 모르는 국외 정세에 무지한 우리 민족이었다.

이어서 아관파천 2가 이어집니다.

사진1. 단발한 고종2. 당시 러시아 공관3. 러시아 공관 전경4. 러시아 공관 내 2층에 보이는 고종일행5. 러시아 공관 내 고종침실구 러시아공사관 근처엔 네덜란드.뉴질랜드.노르웨이 대사관등이 위치해 있고수학능력평가시험을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등이 위치해 있습니다.

구 러시아 공사관 방면 모습.구 러시아 공사관은 정동근린공원에 위치해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앞에 위치한 작은 벤치러시아 란 느낌답게 동화같은 모양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모습.우뚝 ??은 구 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 앞쪽에 서서 담아본 정동근린공원 전체모습.굉장히 키가 큰 나무들의 모습이 인상적 입니다.

작은 공원벤치 중심으로 담아본 모습.르네상스 양식의 조선말기의 건축물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1885년(고종 22)에 착공하여 고종 27년인 1890년 준공되었다고합니다, 3층 탑 양쪽에 위치한 문 들러시아 공사관은 고종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후.생명에 위협을 느껴 비밀리의 궁?씬� 탈출해 타국의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의 현장 이기도 합니다.

구 러시아 공사관에 남아있는 출입문.그리고 3층 높은 창문 구 러시아 공사관 모습.구 러시아 공사관은 6.25전쟁으로 불 타 없어져서.탑부분과 지하2층 부분만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문 공간은 당시 러시아공사관 내부에서 가장 좋은 방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편치않았을것 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아픔이 흔적이 남아있는 구 러시아공사관나라가 힘없을때 느껴지는 슬픔을.느끼게 해준 장소였습니다.

이 출사는 2015년 1월 7일에 다녀왔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점심을 먹고 덕수궁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정동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구 러시아공사관을 돌아봤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건물은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A.I.Seredin Sabatine)의 설계로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뒤 1890년(고종 27년) 준공된 르네상스식 건물입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벽돌조 2층 벽돌조 건물로 한쪽에 3층짜리 전망탑이 있는데 6·25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2층 전망탑, 기초 유구, 지하터널 등만 남아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세자(순종)와 함께 피신했던 곳입니다.

아관파천 중 친일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 내각이 조직됐으며, 서재필 주재의 독립협회가 이 곳에서 결성됐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정동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 내려 5번출구를 따라 정동사거리 방향으로 가다가 사 뒤편에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을 돌아본 뒤 정동길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덕수궁을 함께 돌아보시면 좋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빨간 원안에 있는 것이 구 러시아공사관입니다.

정동 전망대에서 내려보면 덕수궁 뒤편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이웃님들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   지도보기50m� NAVER Corp.??? /OpenStreet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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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VER Corp. /OpenStreetMap구러시아공사관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1-18 정동공원전화상세보기지도보기 지난주 금요일에 점심을 먹고 덕수궁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정동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구 러시아공사관을 돌아봤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건물은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A.I.Seredin Sabatine)의 설계로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뒤 1890년(고종 27년) 준공된 르네상스식 건물입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벽돌조 2층 벽돌조 건물로 한쪽에 3층짜리 전망탑이 있는데 6·25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2층 전망탑, 기초 유구, 지하터널 등만 남아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세자(순종)와 함께 피신했던 곳입니다.

아관파천 중 친일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 내각이 조직됐으며, 서재필 주재의 독립협회가 이 곳에서 결성됐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정동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 내려 5번출구를 따라 정동사거리 방향으로 가다가 사 뒤편에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을 돌아본 뒤 정동길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덕수궁을 함께 돌아보시면 좋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빨간 원안에 있는 것이 구 러시아공사관입니다.

정동 전망대에서 내려보면 덕수궁 뒤편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이웃님들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   지도보기50m� NAVER Corp.??? /OpenStreet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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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VER Corp. /OpenStreetMap구러시아공사관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1-18 정동공원전화상세보기지도보기앞서 쓴 을미사변이 구한말 가장 큰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이지만 지금 쓸 아관파천도 그에 못지 않다.

아관파천 이름마저 요상하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으로 일명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고종 개인적인 일로만 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한 나라 왕으로서 가장 안전 하다는 궁궐 침실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자기도 옷을 찢겨가면서 끌려다니는 수모를 당하고 고종이 보는 앞에서 세자는 칼등으로 목을 맞아 기절을 한다.

더욱이 아끼는 아내인 왕비가 처참하게 능욕을 당하고 불에 태워져버린 그런 궁궐이 두려워서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나 고종은 한 나라의 왕 이었다.

그것도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오백년을 넘게 이어 온 왕조였다.

그런 왕조 왕으로서 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버려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조선 최악의 왕이었던 선조, 인조에 이어 세 번째로 궁궐을 버리고 도망가는 왕이 되어버렸다.

'1896년 2월 11일 이른 아침, 고종과 왕세자는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두 대의 가마에 나누어 탔다.

가마 앞쪽에는 상궁이 한 명씩 올라타서 뒤쪽에 앉은 임금과 왕세자를 가려 주었다.

경비병이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준다면 고종은 감옥 같은 궁궐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가마 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면 탈출 계획이 탄로 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가마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덜덜 떨었다.

고종과 함께 가마에 탄 엄 상궁이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염려 놓으세요. 제 가마는 늘 군말 없이 통과시켰으니 이번에도 별일 없을 것이옵니다.

”한 나라 왕이 자기 궁궐을 벗어 날 때 상황이다.

너무 수치스러워 더 이상 언급하고도 싶지 않다.

아관파천에까지 이르게 된 상황이나 살펴보자!을미사변과 을미개혁 중 단발령 실시이후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자 친일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를 이용하여 의병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기대에 못미치자,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한다.

이로 말미암아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겼다.

이완용을 비롯한 친러파는 이 기회를 틈타 고종을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려는 모의를 한다.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시도는 1895년 음력 10월 12일 춘생문사건 때에도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당시 사건을 모의하고 해외로 탈출했던 친러파 이범진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이윤용및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또 다시 모의하고 고종에게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을미사변 이래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한다.

한편 러시아측은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한양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에 타고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자기네 영토안에 있는 가장 안전한 궁궐을 믿지 못하고 비밀리에 자기 영토안에 있는 대사관으로 피신하고 1년 동안이나 그 대사관에서 정사를 보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웃지 못할 코메디 같은 일이 실제로 조선에서 벌어진 것이다.

어쩌든 파천 직후 러시아라는 강국의 보호 아래서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낀 고종은 급히 명령을 내린다.

제일 먼저 친일개화파이자 갑오경장을 주도적으로 진행해온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를  참형시킨다.

이에 놀란 내부 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한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부 대신 김윤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처럼 고종은 안전한 러시아 공관에서 친일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동안 은신 중이었던 친러·친미파 인물들을 대거 등용한다.

조선 최초 친러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결과 법부 대신과 경무사를 겸임하게 된 이범진을 비롯하여 이완용·이윤용·박정양·조병직·윤용구·이재정·안경수·권재형·윤치호·이상·고영희 등의 인사가 요직에 임명되었다.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은 이때만 해도 친러파 우두머리인 이완용 과 이때 참여한 대신들이 얼마 후 곧 바로 친일파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는데도 앞장 선다.

정말 어떤면에서는 대단한 능력의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어쩌든 친러 내각은 친일파를 나라의 역적으로 단죄한다.

그리고 단발령 실시를 보류하고 의병을 회유하며 세금을 탕감하는 등 인심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갑오·을미의 개혁 사업을 폐지한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개혁을 폐지하고 반동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밖에 23부였던 지방 제도를 한성부와 13도로 개편하였고, 호구 조사도 재정비하였다.

한편 의정부로 환원한 신내각은 국내에 있던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을 파면시키고 대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을 초청했다.

또 러시아 학교를 설립하는 등 러시아 영향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때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무력 대결이 아직은 시기상조라 판단한다.

일본의 주도면밀한 대외정책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러일 전쟁을 10년 가까이 철저히 준비한다.

러시아 무적 발틱함대를 기습공격하기위해 대마도를 두 쪽으로 나누는 운하를 만든 것도 이쯤이었다.

무서운 일본이었다.

일본은 발톱을 숨기고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조선의 내정에 대해 불간섭을 표명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안에 합의하고 각서를 체결한다.

각서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함과 동시에 일본군 병력의 감원·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등 러시아측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 뒤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파견하여, 러시아외상 로바노프와 타협을 모색한다.

같은 해 5월 28일부터 6월 9일까지 진행된 비밀 회담을 통해 양국 대표는 조선 문제에 대한 공동 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4개조의 공개 조관과 2개조의 비밀 조관으로 구성된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취소하는 대신,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한다.

이때 이미 중국은 조선에서 사라졌고 대신 러시아가 나타나 조선 분할통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50년이 넘어 일본이 패망하자 정말 미국과 쏘련에 의해 조선은 분할되었다.

당시 조선에 아무 생각 없었던 미국은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제안을 참고 했을 지도 모른다.

미국의 너무 단순한 생각으로 한 그 분할은 우리 역사상 수백만이 죽는 최악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했다.

지금까지 우라나라가 통일이 되지 못한 채 오늘도 북한 핵문제나 여러 사태로  우리민족은 늘 전쟁공포 속에 살고 있게하는 우리민족 최악의 비극을 만들어 놓았다.

바로 그 분할이 지금으로 부터 120여녀 전 일본에 의해 제안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전에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게 비슷한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 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해방직후 북한에 진주한 혹은 남한에 진주한 쏘련군과 미군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도 앞으로 닥칠 일을 전혀 모르는 국외 정세에 무지한 우리 민족이었다.

이어서 아관파천 2가 이어집니다.

사진1. 단발한 고종2. 당시 러시아 공관3. 러시아 공관 전경4. 러시아 공관 내 2층에 보이는 고종일행5. 러시아 공관 내 고종침실 지난주 금요일에 점심을 먹고 덕수궁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정동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구 러시아공사관을 돌아봤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건물은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A.I.Seredin Sabatine)의 설계로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뒤 1890년(고종 27년) 준공된 르네상스식 건물입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벽돌조 2층 벽돌조 건물로 한쪽에 3층짜리 전망탑이 있는데 6·25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2층 전망탑, 기초 유구, 지하터널 등만 남아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세자(순종)와 함께 피신했던 곳입니다.

아관파천 중 친일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 내각이 조직됐으며, 서재필 주재의 독립협회가 이 곳에서 결성됐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정동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 내려 5번출구를 따라 정동사거리 방향으로 가다가 사 뒤편에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을 돌아본 뒤 정동길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덕수궁을 함께 돌아보시면 좋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빨간 원안에 있는 것이 구 러시아공사관입니다.

정동 전망대에서 내려보면 덕수궁 뒤편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이웃님들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   지도보기50m� NAVER Corp.??? /OpenStreet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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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VER Corp. /OpenStreetMap구러시아공사관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1-18 정동공원전화상세보기지도보기06조회: 3150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하여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조선에 박영효·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만주를 탐내던 러시아가 일본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여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행하자 일본의 세력확장은 다소 주춤하였다.

청일전쟁중 붙잡힌 청군 포로를 감시하는 조선군인들이러한 삼국간섭의 내용이 국내에 전해지자 조선 정계에서도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여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 세력의 중심에는 일본에 의하여 정권을 잃은 민비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고 민씨 세력인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등용하였다.

또한 이범진, 이완용 등의 친러파 세력을 등용하여 하는 한편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고, 일본 교관이 훈련시킨 훈련대도 해산하는 등 배일정책을 강화하였다.

   미우라 일본공사이렇듯 조선정계에서 배일세력이 증가하자 일본은 무인 출신인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주한일본공사로 파견된 미우라는 조선정부의 대일견제정책이 예상보다 강성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이에 미우라는 친러세력의 중심인 민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워 약화된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하였다.

1895년 10월 8일, 미우라는 일본 군사들과 자객들을 동원하여 궁궐에 난입, 왕비인 민씨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을 일으킨 후 조선조정을 장악한 일본은 대원군을 협박하여 갑오개혁 이후에 중단되었던 제4차 김홍집 내각을 강행하였다.

제 4차 김홍집 내각은 곧 군제도와 교육제도를 개편하고 양력을 사용하였으며, 단발령을 시행하였다.

한편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높아지고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 주력부대는 의병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왕비가 궁궐에서 살해되고 일본의 극심한 내정간섭에 불안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처소를 옮 일본도 고종에게 심하게 압박을 가할 수 없었고 러시아와 일본사이에서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

서울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친일내각이 몰락하자 박정양, 이완용, 이윤용, 윤용선, 이범진 등의 친러파 정부가 구성되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는 한편 일본세력이 개혁하였던 제도를 구제도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 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공포의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 고 거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 ·종성의 채광권, 경원전신선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구 러시아공사관 근처엔 네덜란드.뉴질랜드.노르웨이 대사관등이 위치해 있고수학능력평가시험을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등이 위치해 있습니다.

구 러시아 공사관 방면 모습.구 러시아 공사관은 정동근린공원에 위치해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앞에 위치한 작은 벤치러시아 란 느낌답게 동화같은 모양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모습.우뚝 ??은 구 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 앞쪽에 서서 담아본 정동근린공원 전체모습.굉장히 키가 큰 나무들의 모습이 인상적 입니다.

작은 공원벤치 중심으로 담아본 모습.르네상스 양식의 조선말기의 건축물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1885년(고종 22)에 착공하여 고종 27년인 1890년 준공되었다고합니다, 3층 탑 양쪽에 위치한 문 들러시아 공사관은 고종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후.생명에 위협을 느껴 비밀리의 궁?씬� 탈출해 타국의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의 현장 이기도 합니다.

구 러시아 공사관에 남아있는 출입문.그리고 3층 높은 창문 구 러시아 공사관 모습.구 러시아 공사관은 6.25전쟁으로 불 타 없어져서.탑부분과 지하2층 부분만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문 공간은 당시 러시아공사관 내부에서 가장 좋은 방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편치않았을것 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아픔이 흔적이 남아있는 구 러시아공사관나라가 힘없을때 느껴지는 슬픔을.느끼게 해준 장소였습니다.

이 출사는 2015년 1월 7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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